소설리스트

5부. Naughty, Nutty, Night (12/20)

5부. Naughty, Nutty, Night

눈깔이 버석거렸다.

해변의 모래알을 눈알에 전부 퍼부은 것처럼 까끌까끌한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밖에서 얼굴을 사납게 때리는 햇볕 때문에 절로 의식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아…….

온기현은 이부자리 위에 번데기처럼 웅크린 채로 아침을 맞이했다.

멍하게 눈앞의 아이보리색 벽을 바라봤다. 이불을 돌돌 말아 잔뜩 초췌해진 얼굴만 밖으로 내밀어진 상태였다. 끔뻑끔뻑. 따가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지금 몇 시지…….’

몽롱한 정신으로 반사적으로 제 핸드폰을 찾았다. 이불 사이로 팔만 내밀어 이불 위를 턱턱 건드렸다. 그리고 핸드폰 끄트머리의 서늘한 감촉을 손끝에 느끼고, 그것을 그대로 끌어다가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하지만 어떠한 화면도 뜨지 않았다.

아, 맞다. 핸드폰 꺼 놨었지.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뒤에 어떻게 됐더라.

온기현이 내뱉은 욕설의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류주호는 분노로 부들거리던 자신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애초에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에게 무슨 말을 더 해 봤자 벽에다 대고 소리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류주호가 자리를 뜬 사이에 매니저에게 몸이 너무 안 좋다고 말하며 일당은 필요 없다고 전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는 매니저를 뒤로하고 그 높다란 빌딩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여러 가지의 일들이 엄청 오래된 무성 영화처럼 기억에서 흐릿했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류주호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발신인을 본 순간, 지긋지긋하다는 감상이 먼저 떠올랐다. 전화를 받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느라 일부러 더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몇십 통이 울렸는지, 톡이나 문자가 얼마나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를 일일이 수신 거부를 누르는 것조차 미칠 노릇이었다.

결국 류주호의 번호를 차단하고, 카톡도 차단했다. 드디어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길로 바로 짐을 싸서 집을 나섰다.

온기현이 향한 곳은 연채우의 집이었다. 연채우는 문을 덜컹 열어젖히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이거 받아. 나 며칠 신세 좀 질게.”

“헐, 이게 다 뭐냐? 어? 이거 네 그 명품 옷들 아냐? 저번에 본 거. 이거 준다고? 왜?”

“어. 이제 필요 없어.”

기현의 심드렁한 말에 연채우는 쇼핑백을 받아 들면서도 구시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채우가 혼자 기거하는 집에는 문턱이 닳도록 들락날락했었기에, 굳이 말해 주지 않더라도 알아서 씻고 이불을 척척 폈다.

침대 없는 단칸방에 두 사람분의 요를 깔고서는 나란히 누워 곧바로 눈을 감았다.

바로 옆에 깔린 이부자리에 어정쩡하게 몸을 뉜 연채우는 온기현의 눈 감은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이내 잠에 빠졌다.

핸드폰의 벨 소리가 귓가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아도, 그 사이를 비집고 선연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뇌리를 울렸다.

한참이나 잠을 이루지 못해서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겨우 얕은 잠을 잘 수가 있었다.

한껏 웅크린 채로 또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잠만 자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할 일이 있었다.

연채우가 집에서 나갈 때 뒤통수에 대고 “밥은 먹어라.”라고 어르듯 던지고 간 말도 웅크린 채로 고개만 살짝 끄덕인 것으로 응수했다. 연채우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집에서 나갔다.

자꾸만 아래로 까라지는 몸을 애써 일으켰다. 주섬주섬 이불을 개고 고개를 숙여 눈두덩이를 꾹꾹 누른 다음 욕실로 향했다.

“하아.”

한숨을 푹 쉬다가 애써 고개를 젖혔다. 고개를 잘게 저으면서 무언가를 떨치려고 부산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입술을 잘게 씹었는지 옅게 쇠 같은 피 맛이 났다. 그날 이후로 잘게 씹어 댄 아랫입술은 이미 너덜너덜했다. 배어 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억세게 비볐다.

후드 티를 머리 위로 깊게 눌러썼다. 연채우의 것이었다. 운동화 뒤축을 구겨 신으며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었다. 꺼 두었던 그것은 여전히 암전인 채였다.

전원으로 향하던 손가락이 공중에서 헤매었다. 차단은 해 두었지만 어쩐지 망설여졌다. 전원을 켰을 때 혹시라도 류주호라는 세 글자의 이름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동시에, 그런 걱정 자체가 지긋지긋했다.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다시 쑤셔 넣고서는 밖으로 나섰다.

* * *

“그건 안 되는데요.”

“네? 안 된다니요?”

온기현이 당황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학과 행정실에 근무하는 직원이 다소 딱딱한 표정으로 온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입에서 나온 무미건조한 말이 마치 청천벽력같이도 느껴졌다.

온기현이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짜증 어린 눈썹을 힐끗 올리더니, 서류를 뒤적이다가 기현의 앞에 펼쳐 놓았다.

“거기 써진 거 보이시죠. 학기 시작하고 90일 이후에는 학기 중 일반 휴학은 불가능해요.”

“아.”

단발성의 신음과 같은 외마디를 흘렸다. 종이를 든 채로 후드 티 아래로 글자들을 빠르게 훑고 있는 온기현을 어딘가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본 행정실 직원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특수 휴학만 가능해요. 입대 휴학은 이미 한 번 쓰신 것 같고. 이거 말고는 꾸준히 장기적 치료가 필요한 질병에 걸렸거나, 창업 같은 거요. 아니면, 뭐. 임신이나 출산이라도 하셨거나.”

“…….”

힐끗 쳐다보며 던지는 말에 온기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전부 해당하지 않는 사유들이었다.

어떡하지.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은, 류주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은 불가피하게 학교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류주호가 저를 찾으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놈은 제가 무슨 말을 했든지 간에,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놈이니까. 온기현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제가 찾고 싶을 때 그 자리에 온기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그리고 자신의 모든 일정은 류주호가 알고 있었다. 어느새 온기현의 일상을 속속들이 꿰고 있던 그였다. 그래서 류주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는, 휴학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 등록금 돌려받지 못해도 괜찮아요. 휴학하고 싶은데요.”

“네? 굳이 그렇게까지 휴학하셔야 하는 거면, 어쩔 수 없지만. 전혀 돌려받지 못하는데요.”

“네. 괜찮아요.”

제가 집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뼈 빠지게 벌어들인 돈이었다. 정말 최악의 선택지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이게 결국 최선의 선택지였다.

행정실 직원은 흐음, 하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학사 시스템에서 1차 신청을 하고 행정실에서 2차 신청을 해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등록금이 전액 환불되지 않기 때문에 만일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온기현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도 휴학을 하게 되면 근로 장학금도 반환하여야 할 터였다. 연채우가 이 사실을 안다면 “이 머저리야!”, 라고 욕을 퍼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까지 해야겠냐고.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 견딜 수 없는 것은 온기현이었다.

‘얼른 졸업해 버려.’

눈에 띄지 않으면 곧 잊어버리겠지. 그래. 나도 그럴 거야. 나도, 네 그림자를 눈에 담고 혼자 설레는 짓거리, 눈에 자꾸만 밟히는 네 흔적을 곱씹는 짓거리, 이제는 그만둘 거니까.

‘얼른 눈앞에서 사라져 버려.’

한 학기만 버티면 되겠지, 생각했다.

‘개새끼. 소새끼. 말새끼.’

죄 없는 짐승들을 온통 류주호를 형용하는 수식어로 갖다 붙였다. 마치 버릇처럼 욕을 내뱉어도 속이 갑갑했다. 턱턱. 주먹 쥔 손으로 가슴을 두어 번 두들겼다.

후드를 다시 한번 푹 아래로 끌어 내렸다. 벌어진 옷자락 틈새를 쑤시다시피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정의 풍경은 따듯한 색으로 물들었다. 곳곳에 류주호와 함께했던 추억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었을까.

하지만 이제야 알았다. 서로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 걸치자마자 꺼끌꺼끌하게 살갗을 건드리는 새 옷처럼.

갑자기 제 주위의 여상한 풍경들이 새삼스럽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얼른, 잊어버려. 온기현.’

그딴 이기적인 새끼에다, 자기밖에 모르는 안하무인인 자식. 얼른 잊어버려야 해.

문득 머리가 핑 돌며 속이 울렁거렸다. 류주호가 저에게 속삭이던 달콤한 말들이 귓가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그런 꾐에 홀랑 넘어가 닫으려 애썼던 마음을 열어젖혔다. 아예 그와 부딪힐 일 없이 멀리서만 지켜보던 때보다 더욱 욕심이 났었다.

마음이 더없이 깊어지는 줄 자신조차 까맣게 모르고…….

눈을 떠 보니 발밑은 바닥이 없는 시꺼먼 낭떠러지였다. 자신은 그 구덩이로 떨어지고 있었다. 발을 디뎌 올라갈 틈도 없이 무너져 버렸다.

그런 놈이라는 걸 진즉 알고 있었는데. 바보같이. 등신같이.

온기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꽉 짓눌렀다. 아팠다, 너무나. 더욱 힘을 주었다.

이 아픔은 류주호가 준 것뿐이 아니었다. 짧게 깎아 내지 않고 길어질 때까지 그저 무작정 방심하던 자신의 탓도 있었다.

잘라 내 버렸어야 했던 마음이 무방비하게 자라나도록 방치한 탓이었다.

너무나도 커져 버린 마음이 가슴을 꽉 채우며 짓눌렀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쁜 호흡이 잇새로 터졌다.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온기현의 옷자락을 툭, 건드리듯 스치고 지나갔다.

무덥고 습한 바람의 계절이 물러나고 있었다.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었다.

* * *

학사 시스템에 휴학 신청을 하고 나서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휴학을 할 터였으니, 당연히 수업에는 가지 않아도 됐지만, 괜한 불안감이 끓어오르는 것을 내리누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조촐하게 짐을 챙기면서도, 급하기도 급했는지 노트북은 물론이고 핸드폰 충전기조차 챙기지 않았던 온기현은 연채우가 쓰는 최신 노트북을 빌려 썼다.

연채우는 어디 갔는지 아침부터 나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언뜻 듣기로 이제 밤이 아니라 낮에 하는 새로운 일을 찾았다고는 했으나, 혹시나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 보이스 피싱 같은 불법적인 일이나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대로 다시 바닥에 웅크리고 누웠다.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핸드폰은 여전히 꺼 둔 채였다.

차게 식은 금속성의 옆면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류주호는 뭐 하고 있을까. 나한테 또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까. 나를 찾고 있을까. 나한테 미안하기는 할까.

이런 상념이 자꾸만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전혀 배고프지는 않았지만, 하루종일 쫄쫄 굶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뭐라도 먹어야지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연채우의 집에는 라면밖에 없을 터였다. 찬장을 뒤지자, 생각한 대로 라면 봉지가 그득 쌓여 있었다.

보글보글 라면이 끓는 사이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

분명 텅 비어 있어야 할 냉장고 안은 꽤나 채워져 있었다. 원래 생수밖에 없던 작은 냉장고였는데, 지금은 온갖 종류의 반찬이 담긴 반찬 통과 심지어 과일까지 있었다. 거기다 썩지도 않았다니.

이제부터 제대로 살아 보려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다행인 일이었다.

어느새 푹 익어 버린 라면을 보고 아차, 하며 얼른 불을 껐다. 대충 받침대를 깔고 수저를 챙겨 먹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한 젓가락을 후후 불어 입에 넣는 순간,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온기현은 그대로 화장실로 가서 속에 든 것은 죄 게워 냈다. 어차피 든 것도 없어서 나중에는 캑캑거리며 신물을 토해 냈다. 결국 라면은 제대로 입도 대지 못하고 전부 버려 버렸다.

‘미치겠다.’

또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철컥.

“야, 엉아 왔다. 어?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자리에 곰팡이 피겠다.”

“왔어?”

온기현이 눈동자만 굴려 연채우를 맞이했다. 연채우는 어이없다는 듯 코로 웃으며 제 손에 든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고기 사 왔다. 이거 먹자.”

“……입맛 없어. 너만 먹어.”

“야. 고기를 어떻게 혼자 먹냐? 이거 소고기거든? 돼지고기 아니거든?”

“나 진짜 생각 없어.”

그렇게 힘없이 읊조리자 연채우가 온기현의 굽어진 등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대충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고기를 꺼내어 냉장고에 정리해 넣었다.

“야.”

“응.”

“너 진짜 무슨 일이야.”

자못 심각한 어조로 연채우가 물어 왔다.

“…….”

털썩. 등 뒤로 연채우가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말 안 하냐?”

“……아무 일도 없어.”

입 밖에 내기 싫었다. 그냥 전부 잊어버리고 싶었다. 파도에 깎이는 작은 돌멩이처럼. 언제까지고 끊이지 않는 파도에 깎이고 깎여, 결국 자잘한 모래가 되어, 또다시 바다로 쓸려 들어갈 때까지.

아무도 이 고요한 망각을 방해하지 말아 줬으면.

“……그래.”

온기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채우가 조용히 마무리 지은 대답에는, 나중에 언제든 편할 때 얘기하면 된다, 라는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쯤은 이미 긴 세월 함께했던 시간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었다.

“근데 너 전화는 왜 안 받냐? 핸드폰 어쨌어?”

“아.”

온기현은 부스스한 모양새로 부스럭거리며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꺼 놨었어.”

그렇게 웅얼거리듯 대답하며 전원을 켰다. 어차피 차단해 놨으니, 켜도 괜찮겠지. 화려한 그래픽이 지나가고 뒤이어 시간을 나타내는 숫자가 화면에 나타났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재중 기록에 찍힌 것은 연채우에게서 온 전화 한 통뿐이었다.

띠롱

그때 마침,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헉. 불현듯 울린 알림 소리에 온기현이 화들짝 놀라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도착한 것은 다름 아닌 문자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과대 심현석입니다! 다름 아니라 내일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긴밀하게 상담드릴 게 있어서요. ㅠㅠ]

아.

난감했다. 과대의 문자를 본 순간 든 생각이었다. 단지 휴학할 예정이라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웬만하면 학교와 연관된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게 맞을 것이다.

거기다 만나자고 하는 거면 장소는 학교가 될 텐데, 학교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있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행정실에 다시 한번 들러야 하긴 할 텐데. 조금 고심하다가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로요? 제가 요새 시간이 잘 나지 않아서요.]

조금 쌀쌀맞게 느껴진다 해도 어쩔 수 없다. 금방 답이 올 것 같았는데 급하다고 한 것치고 답장이 좀 느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았다. 연채우가 씻는다고 욕실에 들어가서 한참을 있다가 나올 때까지도.

띠롱

[그건…… 지금 말씀드리기 좀 곤란해서요. ㅠㅠ 만나서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잠깐이면 돼요, 선배님. ㅠ 제발 부탁드려요…….]

“하아.”

어쩌지. 엄청 곤란한 상황인가.

[전화로 대화하는 건 힘든가요?]

온기현이 보낸 문자에 이번에는 금방 답이 왔다.

[네. 그건 좀…….]

뒷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당장은 누군가와 평연히 대화를 나눌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간절하게 부탁해 오는 말을 완전히 무시하기도 쉽지 않았다. 순전히 이런 우유부단한 성격 탓이었다. 이러니 질질 끌려다니지. 자조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럼 학교 밖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곧바로 이어진 답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빨랐다. 심현석이 만나자고 찍어 준 장소는 학교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카페였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는 구석진 데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행정실에 가기 전에 잠깐 얼굴만 볼 생각이었다. 뒤에 중요한 볼일이 있으니 시간을 길게 끌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다. 핸드폰을 대충 바닥에 내려놨다.

지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도통 잠들지 못하는 밤은 수면 부족으로 괴로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자꾸만 생각나는 간지럽게 부대끼던 뜨거운 체온이었다. 그의 넓은 집의 좌식 소파에 앉아 슬쩍 서로를 건드리던 손짓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저를 옭아매고 거칠게 몰아붙이던 격렬한 움직임. 그 모든 것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게 싫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었다.

머저리. 등신.

벽에 등을 툭 기대며 양 손바닥으로 뒷머리를 감쌌다. 그리움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해 힘껏 발버둥 쳐 보지만, 결국 돌아보면 제자리다.

도무지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가슴을 부여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이러다가는 숨이 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어느샌가 그대로 쓰러져 잠든 모양이었다. 꽤 오랫동안 잔 것 같은데도 머리가 멍했다. 꾸부정하게 누워 있는 제 몸 위에 이불이 덮여 있었다. 간밤에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 잠깐 나갔던 연채우가 새벽에 돌아온 모양이었다.

깊은 수면이 어려웠다. 자꾸만 꿈에 나와 저를 괴롭히는 개자식 때문이었다.

꿈속에서의 남자는 너무나 다정했다. 무엇이든 같이할 것처럼, 무엇이든 해 줄 것처럼 굴었다. 언제까지고 달콤함을 나눌 것처럼 애틋했다.

하지만 끝내 꿈에서 깨어나게 한 것 또한 남자였다. 숨 막히도록 아득한 흙탕물로 저를 툭 밀어 넣고서는 유유자적 웃고 있는 얼굴을 눈에 담으며 꿈에서 깨어났다.

“좆 같다, 진짜…….”

평소 자주 쓰지 않던 욕도 절로 나왔다.

씻은 후에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었다.

욕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마치 못난이 찐빵 같았다. 눈 밑은 퀭하고 입술은 거칠거칠한 데다가 부어 있었다. 거기다 요새 끼니를 자주 거른 탓에 살이 좀 내려서 볼이 홀쭉해졌다. 비루먹은 털 짐승도 저보다는 나을 터였다.

괜히 짜증이 일어 거울에 대고 손바닥으로 물을 튀겨 촥 뿌렸다.

도저히 사람에게 보일 몰골이 아닌 것 같아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캡 모자까지 눌러쓴 온기현이 과대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만약 휴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강의를 듣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제 오늘부로 한동안 학교에 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씁쓸하기도 했다.

[오고 계시죠?]

심현석은 재차 온기현이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온기현은 제가 그렇게 약속도 못 지킬 것같이 행동했었나 싶다가 간단히 [네.]라고 답장했다.

버스 창문에 머리 한쪽을 툭 기대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불편한 감각이, 조용하게 제 아래를 받쳐 주던 커다란 고급 SUV의 가죽 시트와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버스가 짱이야. 싸고, 어디든 갈 수 있고, 환승도 되고.’

괜히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버스 최고…….”라고 읊조리자,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 앞쪽의 멀찍이 떨어진 자리로 옮겨 갔다. 그에 온기현이 합,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 정거장은 한국 대학교 앞입니다.

희미하게 들리는 안내 방송에 온기현이 급하게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핸드폰을 꺼내어 카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과대 심현석이 알려 준 카페는 멀리서 보더라도 굉장히 구석진 곳에 있었다. 막다른 길을 끼고 있는 카페는 내부 또한 테이블 세 개 정도가 벽에 딱 붙어서 이렇게 해도 장사가 되려나 싶을 정도로 의아한 구석이 있는 가게였다.

어찌 됐든 문자로 “저 도착했어요.”라고 보내며 카페의 유리문을 열었다.

“어, 선배님!”

“아.”

그때 마침, 뒤에서 헉헉거리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심현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와 비슷하게 도착했는지, 아니면 제 문자를 보고 달려온 것인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아, 넵.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어……, 저, 저기 안쪽에 일단 들어가요. 들어가서 얘기해요.”

“저 시간이 별로 없는데.”

“진짜 잠깐이면 돼요, 네?”

어쩐지 부산스럽게 말을 헤매는 심현석의 표정이 자못 간절하다. 온기현이 열없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10분이면 될까요.”

“아, 네네. 10분……. 10분, 괜찮아요. 네.”

심현석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거의 등을 떠밀리다시피 안으로 들어온 온기현이 이리저리 카페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심현석이 “뭐 드실래요?”라고 물어서, 애초에 주문할 생각이 없던 온기현이 얼떨결에 “초콜릿 프라푸치노요.”라고 대답했다.

짜증 나는 일이 있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는 절로 혀가 얼얼해지도록 다디단 초콜릿 음료부터 찾게 되는 온기현이었다. 하지만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아……. 죄송해요. 메뉴를 보고 주문했어야 하는데. 제가 주문하고 올게요. 뭐 드실래요?”

“제가 사겠습니다, 선배님. 어, 여기 잠시 앉아 계세요.”

심현석은 손목시계로 시간을 흘끗 확인하며 계산대로 갔다.

사람이 저렇게 어수선했었나.

예전에 한번 술자리에서 봤을 때만 해도 침착하고 활달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 의아하게 생각하다가도 금세 또 멍해졌다.

‘류주호랑 카페에서 조 모임도 했었는데…….’

아.

자꾸만 멍해지는 사고를 다잡으려 애쓰려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또다시 터진 입술 살에서 피가 퐁퐁 솟았다. 쓰라림은 둘째치고 입술 살이 너덜너덜했다.

초췌한 데다가 성한 데가 없이 입술도 찢어졌으니, 누가 보면 몹쓸 병에라도 걸린 줄 알겠다. 심현석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으나, 제 꼴이 새삼 신경 쓰였다.

계산대 앞에 선 심현석의 등을 흘끗 본 온기현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아까 얼핏 본 기억으로 바깥에 화장실 표시가 있었다.

비좁은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 앞에 서서 뿌연 거울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아…….”

살이 심하게 찢겼는지 입술 새로 계속해서 피가 새어 나왔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쪽쪽 빨았지만 따끔하기만 하고 허사였다.

그리고, 밖에서 보니 더 초췌했다. 피죽도 못 먹고 다니는 사람처럼 혈색도 파리하니 병자도 이런 병자 꼴이 없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 냉수를 얼굴에 두어 번 끼얹었다.

뻑뻑한 눈을 꾹 눌러 비비며 손에 묻은 물을 탈탈 떨었다.

“후우.”

젖은 손을 바지에 탁탁 털어 말리고 얼굴의 물기도 대충 소매로 닦아 냈다.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기다리겠다 싶어서 화장실 문을 막 열고 나가려던 때.

어?

온기현이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제 눈을 의심했다.

입이 아연히 벌어졌다. 하지만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저건 분명, 저 옆모습과, 저 어깨와, 저 머리는. 분명히, 류주호였다.

차에서 다급한 몸짓으로 바로 내린 그는 카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생생한 모습까지 온기현은 숨죽인 채 제 눈에 담았다.

‘여긴 대체 왜.’

쿵, 쿵, 쿵.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모자 안쪽으로 땀이 차는 것처럼 축축했다.

절대로 마주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대로 화장실을 빠져나와 카페를 거치지 않는 길로 냅다 뛰었다.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음에도 계속해서 뛰었다. 새까맣고 커다란 차가 저를 쫓아오지 않을 때까지.

제가 잘못한 것은 전혀 없었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마주했다가 제가 또 속절없이 그를 용서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 같았다. 류주호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이, 제가 온전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땀이 관자놀이에서 뚝뚝 떨어지며 디디는 발의 속도가 점점 느려질 때, 별안간 핸드폰이 우웅, 작게 진동했다.

온기현이 자리에 멈춰서 앞으로 상체를 숙인 채 잠시 숨을 골랐다. 눈앞이 핑 돌고 머리가 어질했다. 축축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심현석에게 다음에 얘기하자고 연락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문자가 와 있었다.

[선배님. 어디세요??]

아.

심현석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갑자기 사라진 자신을 찾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지 않았는가. 류주호가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렇다면.

[선배님. 어디세요?]

[선배님 부탁이에요. 제발 문자 좀 보내 주세요.]

[제발]

[답장 좀]

[보내 주세요;;]

연달아 도착하는 문자들은 어쩐지 다급해 보였다. 언뜻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제 목적만을 요구하는 문자들은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그때,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심현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기현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수신 거부 버튼을 누르고는 잠시 화면을 내려다봤다. 어쩐지 섬뜩했다.

‘대체 뭐야…….’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류주호가 심현석을 시켜서 저를 불러내게 한 게 아닌가 싶은…….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생각은 곧 머릿속에서 밀어 냈다.

아니, 아니다. 류주호가 미쳤다고. 그렇게까지 할 리가 없었다. 류주호는 절대로 가는 사람은 붙잡지 않는다. 제가 없어서 당장 배신당한 것 같고, 괘씸하고, 짜증 나는 것도 한순간일 터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곧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제가 취했던 행동과 반대였다. 몸으로 밀어붙이던 최초의 관계와 지금의 상황은, 마치 양날의 검과 같았다.

더불어, 제가 했던 착각이 미칠 듯이 창피했다.

류주호에게 고백하기 위해 데이트를 계획했던 노력들이, 류주호의 연인이라는 자리가 손에 잡힐 듯이 대롱대롱 흔들리는 당근처럼 보여서, 신나서 그 난리를 쳤던 제 쓸데없는 노력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쳤다.

‘그냥 그 자식은 나랑 섹스할 생각밖에 없는데.’

“아야.”

입에서 신음성을 흘렀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어 댔는지 또다시 피가 퐁퐁 솟았다.

혀로 피를 쓸었다. 코끝이 시큰거릴 정도로 강한 쇠 맛이 났다. 너덜거리는 입술이 너무나 아팠다.

불안하게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심현석의 번호를 아예 차단할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어차피 휴학하게 되면 한동안 보지 않아도 될 사이였다. 앞으로 과 활동은 안 할 생각이니, 연락할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러다가, 제가 너무 과민한 반응을 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이대로 학교 행정실로 가려다가 순간 고민이 들었다. 어쩌지, 하고 입술을 손으로 쥐어뜯으며 발길을 헤매던 때, 진동이 울렸다.

온기현이 화들짝 놀랐다.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핸드폰 알림은 한 번이었다. 전화는 아니었다.

딱. 입술 살을 손톱 소리가 나게 뜯어 버린 온기현이 핸드폰을 손에 쥐고 문자를 확인했다.

[선배님……ㅠ 갑자기 이상한 연락 드려서 죄송해요. 어…… 아까는 좀 급해서요. ㅠ]

역시 제가 착각한 건가 싶었다. 막 문자를 치려던 때, 다음 문자가 이어졌다

[저기, 선배님. 근데요, 혹시; 류주호 선배님이랑 싸우셨어요?? 엄청 찾으시더라고요;; 제가 중간에서 좀 이상하게 됐는데 두 분이서 그냥 서로 직접 얘기해서 화해하세요……. 두 분 되게 친하시잖아요…….]

“하.”

온기현이 허탈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역시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빠듯하게 눈에 피가 몰린다. 미간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그리고 이런 말씀 좀 죄송하지만; 류주호 선배님, 어디 좀…… 이상하신 것 같던데……;; 뭐라고 하지; 아프신 거 같기도 하고요;]

뒤이어 도착한 문자는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답장하지 않고 심현석의 번호마저 차단한 채, 그대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저 무작정 피하고 싶었다. 얼굴도 마주치기 싫었다. 냄새도 맡고 싶지 않았다.

분명히 자신은 지고 말 거였다. 제 온몸의 물렁한 곳이란 물렁한 곳은 한 군데도 빠짐없이 잔인하게 파고드는 류주호의 온갖 행동에 완전히 패배해, 결국 무릎을 꿇게 될 터였다.

그러기 싫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짓 하나에도 바보처럼 헤실거리는 짓, 이제는 하고 싶지 않았다.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연채우의 집은 한국 대학교에서 버스로 떨어진 원룸이었다. 학교에서 걸어갈 수 있는 제 원룸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지금 여기서 가까운 곳은 자신의 원룸이었지만, 그곳조차 류주호의 흔적이 온 군데에 흩어져 있었다. 진저리가 처졌다.

왔던 그대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 도착한 파란색 버스에 탑승하고 카드를 찍자마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차단한 이들은 아닐 터였다. 약간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핸드폰을 꺼내어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따라 핸드폰이 바빴다.

보낸 이는 다름 아닌 빌라 주인이었다. 대략 빌라 앞에 커다란 SUV 차를 세워 놓고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빌라 주인의 단체 문자를 보며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이따금 쓰레기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된다느니, 층간 소음으로 인해 마찰이 심하다느니, 새벽에 들리는 음란한 소리 때문에 빌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느니 하는 이유로 빌라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의 번호로 단체 문자를 보내오기도 했었다.

협박성 짙은 문자의 말미에 눈길이 간 것도 잠시, 커다란 SUV란 말이 신경에 거슬렸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이것도 신경과민이다. 중증이다, 정말.

깊이 생각하기도 지겨웠다. 순간 급작스러운 갈증이 일었다. 목이 바싹바싹 타는 불편한 감각에 콜록하고 기침을 했다. 이마를 짚어 보니, 약간 미열이 나는 듯했다. 뜨끈한 감각이 손등을 타고 전해졌다.

“하아…….”

옅은 숨조차 뜨거운 습기가 어려 있다.

‘최악이다.’

온기현은 눈을 감으며 고개를 숙여 몸을 옹송그린 채 버스 좌석 위에서 잠들었다.

* * *

결국 꾸벅꾸벅 잠든 온기현은 종점까지 갔다가, 같은 버스를 타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부족했던 잠을 쪽잠으로라도 보충했는지, 몸은 아까보다 훨씬 가뿐해져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져, 연채우의 빌라에 돌아온 것은 거의 저녁이 다 된 시간이었다.

온기현이 사는 원룸촌보다 조금 한적한 이 동네는 한밤중에는 먼지가 굴러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것처럼 조용했다.

터벅터벅.

짙은 고요함이 내려앉은 바닥에 기현의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발목에 거대한 추가 달린 것처럼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얼른 들어가서 씻고 싶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막 코너를 돌 때였다.

으응.

골목께 어딘가에서 얕게 신음하는 소리가 울렸다. 하도 조용한 동네라 온기현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질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음란한 짓거리를 하는 커플일 확률이 높았다. 기현은 애써 모른 척하며 발소리를 죽인 채 골목을 지나갔다. 다행히 저들도 이쪽을 알아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연채우의 빌라에 들어서자, 껌껌한 실내가 온기현을 맞이했다.

‘아직 안 들어왔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기의 찬물을 틀었다. 겨울에도 부러 찬물로 샤워하는 오기도 부렸었지만, 지금은 그저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싶을 따름이었다. 정수리에 쏟아지는 물줄기를 받으며 서 있다가, 몸에 한기가 돌 즈음에서야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덜컹, 하는 문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연채우가 와 있었다.

“……어서 와.”

온기현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인사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 어, 어. 와, 왔네?”

연채우는 어디서부터 달려온 건지, 아니면 격한 운동이라도 하고 온 건지 온몸을 들썩이고 있었다. 헉헉하며 가쁜 숨을 내쉬는 연채우의 볼이 발갛다. 들뜬 음성도 마찬가지로 새된 소리가 섞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는 온기현을 온전히 살핀 연채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얼굴이 왜 그래!”

“어……?”

연채우가 심각한 낯으로 신발을 벗어 던지고서는 다가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 씨. 다행히 열은 안 나는데. 너 이 자식……. 안색이 왜 이따위야? 무슨 병자처럼. 헐. 입술 다 찢어졌잖아!”

꽥꽥 소리를 지르는 통에 머리의 물기가 흩날리도록 고개를 저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조용히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조용히 좀 해.”

머리 울려.

온기현이 물기를 수건으로 탈탈 떨며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한숨을 푹 쉰 연채우가 바닥을 손바닥으로 턱턱 두들기며 온도를 확인하더니, 난방 온도를 더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머리 위에 수건을 둘러쓰고 있는 온기현의 앞에 와 물었다.

“너 진짜 뭔 일이야. 말 안 하냐?”

연채우는 저의 오랜 친구였다. 그의 속을 낱낱이 알기도 했으며, 그도 저의 속을 낱낱이 알았다. 흔히 말하는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그런 친구 사이에도, 서로 넘지 않는 선이 분명히 존재했다.

속에서 꺼내고 싶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조용히 곁에서 지켜봐 주는 편이었다. 연채우가 남자들과 지독하게 얽히는 모습을 보면서도 온기현이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이 그러했다. 그것은 이 친구 나름의 삶을 즐기는 방법이자, 속에 곪아 있는 고름을 짜내는 해소 방법이었다.

그리고 연채우도 마찬가지로, 온기현이 예전부터 마음을 한군데에 두지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좋다는 말로만 티를 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며, 저 속에 대체 어떤 커다란 구렁이가 자리 잡고 있길래 저러나 하고 답답하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굳이 캐내어 묻지 않았다. 그것이 이 둘이 우정을 유지해 온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소중한 친우가,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서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는 때에는 반드시, 어떻게든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

온기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연채우는 씨근덕거리던 숨을 가라앉히고는 가만히 온기현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얼굴색이 말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러는가. 속이 곪은 것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술을 달싹이던 온기현이 입을 열었다.

“……나…….”

“어?”

연채우가 득달같이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나, 남자 만날래.”

“……뭐?”

“아니. 남자건 여자건, 그냥. 만날래. 사람.”

“뭐, 뭐……?”

조용하고 담담하게 읊는 말에 연채우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놈이 지금 뭐라는 건가.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럴 애가 아닌데, 싶었다. 그러다 불쑥 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몸과 마음이 굳이 맞을 필요가 있겠냐며, 몸만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지껄이던 제 말이.

끄응. 연채우의 입에서 소리 없는 신음성이 흘렀다. 제가 뿌린 잘못된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난 느낌이었다.

연채우가 팔짱 낀 채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는 하염없이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온기현을 향해 푹 한숨을 내쉬었다.

“기현아. 너 지금 무슨 망발이야. 내가 너한테 그렇게 가르쳤어? 어? 남자 만날래, 라니. 아무나 만날 거라니! 사람 관계 그렇게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다. 너, 지금 큰일 날 소리 하는 거야. 어? 내가 아무리 말야. 어? 너, 무릇 만남이란 말야.”

“……연애할래.”

“……뭐라고?”

훈장님처럼 제 올챙이 적도 생각 못 하고 훈계질을 하던 연채우가 바보처럼 다시금 되물었다.

온기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말간 얼굴로 말했다.

“나 연애할 거야.”

“너…….”

입을 벙긋거리던 연채우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내리눌렀다. 이놈의 얼굴을 보니, 무슨 일이 있었냐고 아무리 캐물어도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터였다.

예전부터 자기가 결심한 일에 대해서는 고집이 워낙 셌기에 목을 쥐고 짤짤 흔들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온기현의 표정이 딱 그러했다.

연채우가 팔짱을 풀며 심각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을 폈다. 그리고 부러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연애 좋지. 연애 좋아. 뭐,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누구 소개라도 해 줄까? 어?”

“응.”

“어, 어. 그래. 어떤 사람?”

이제까지 온기현이 이 사람 저 사람, 대중없이 좋다고 할 때는 기준이 없었다. 그리고 연채우가 누구랑 뭘 했건 잔소리는 할지언정 적극적으로 누군가와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막상 시큰둥하던 온기현이었다.

“다정한 사람.”

온기현이 잔뜩 말라서 부어 있는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다정한 사람이 좋아.”

* * *

“나 그냥 아무거나 입고 갈래. 이게 뭐야ㅡ.”

“아, 쫌. 말 안 들을래?”

온기현의 투덜거림에 연채우가 타이르듯 짜증 내듯 하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근데 이거 내가 너한테 준 건데, 다시 내가 입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럼 다시 내가 너 빌려줬다 셈 쳐.”

온기현은 제가 입은 옷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연베이지색의 상의는 굵은 꽈배기 모양으로 짜인 스웨터였다. 안에는 티셔츠를 받쳐 입고 스웨터 자체도 두꺼워서 쌀쌀한 바람에도 끄떡없는, 척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스웨터였다. 다름 아닌 류주호가 선물해 준 옷 중 하나였다.

“역시. 사람은 화사하게 입어야 한다니까. 밝은색 입으니까 얼굴이 산다, 살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색이 희멀겋게 떠 가지고는. 거기다 시꺼먼 옷까지 걸치니까 귀신이라고 해도 믿겠더라.”

“……그 정도는 아니었거든.”

작은 소리로 항변하자, 연채우는 듣는 체도 하지 않으며 제 준비를 끝마쳤다. 온기현은 어색하게 제 머리를 연신 손가락으로 쓱쓱 쓸어 댔다.

“그래서 지금 어디 가는데? 나 누구 소개해 준다며. 언제 해 줄 건데? 오늘 해 주는 거지?”

총알같이 쏘아 대는 질문에 연채우가 피식 웃었다. 정말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핏기도 하나 없이 다 죽어 가는 얼굴이더니, 기현은 열심히 먹고 기운을 차려서 지금은 예전처럼 볼이 조금 통통하게 올라오고 혈색이 피어 있었다. 그게 연채우는 못내 안심됐지만 괜히 툴툴거렸다.

“보채지 좀 마라.”

“우리 어디 가는데? 나 소개팅시켜 주러 가는 거 아냐?”

“야. 넌 자만추도 모르냐? 누가 요새 소개팅으로 커플 붙여 주냐? 존나 멋대가리 없이.”

“자만추?”

온기현이 가지런한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자만추? 자만추?” 하고 중얼거렸다. 연채우가 머리를 매만지다 말고 입으로 헛바람을 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헐. 자만추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 넌 인터넷도 안 하냐? 화석이야, 뭐야.”

“아니, 알아.”

“뭔데. 말해 봐.”

“자…….”

“어.”

“자……. 자……. ……자리. 자라……. 자연……. 자다…….”

“…….”

“……자 보고 만족스러운 사람 추구.”

“……씨발, 말 되네.”

말은 되는 풀이였지만 어쩐지 제가 추구했던 만남 자체를 콕 집는 것 같아서 기분이 영 찝찝하고 머쓱하여 연채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큭, 하고 웃으며 “뭐 그런 풀이도 있을 수 있지.”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일단 나가자. 따라와.”

* * *

“어, 오랜만이다. 연채우.”

“잘 지냈어? 요새 잘 안보이더라.”

“안 보이긴. 잘 지냈어요, 형?”

가게 안 여기저기서, 이제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온 둘을 향해, 아니 연채우를 향해 반가운 인사를 건네 오는 것이 들렸다.

온기현은 연채우의 뒤에서 어리둥절한 눈빛을 보내며 멀뚱히 따라붙었다.

자만추가 대세라는 연채우를 따라온 곳은 다름 아닌 연채우의 단골 가게였다. 그 가게란, 뭐 흔히 말하면 술도 팔고 안주도 파는 캐주얼한 분위기의 칵테일 바였지만 가게의 분위기는 여타 술집의 시끌시끌하고 부산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랐다.

그렇게 넓지 않은 내부는 모던한 인테리어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보통 다른 술집이라면 테이블마다 각자의 일행과 어울리는 것이 일반적이겠지만, 이곳은 어쩐지 가게 안의 모두가 일행인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흥에 겨운 편안한 얼굴로 테이블과 카운터를 오가며 누구랄 것 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서로 대부분이 안면이 있는 것도 보였고, 간혹 누군가에게 자신과 함께 온 지인을 소개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연채우는 저를 향해 알은체해 오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기현을 데리고는 비어 있는 카운터 테이블 자리에 사뿐히 앉았다.

“오랜만이네. 요새 너무 뜸한 거 아냐?”

“거참, 왜 보는 사람들마다 뜸하다고 난리예요. 그냥요, 뭐. 요새 바쁘기도 하고.”

“그래애?”

바텐더와도 꽤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 앉자마자 대뜸 말을 걸어오는 바텐더이자 이 가게의 사장인 남자에게 연채우는 귀찮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바텐더가 날카로운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수상한데, 이거?”

“뭐가 수상해요. 그러지 말고, 저희 목말라요. 주문이나 받으시죠.”

“얼씨구. 뭐 마실래?”

어이없다는 식으로 픽 웃던 바텐더가 기현에게 눈길을 건넸다. 그는 험악하게 생긴 인상을 누그러트리며 싱긋, 하고 온기현에게 눈인사를 해 보였다. 그에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여기 제 친구요.”

“아하. 채우가 친구 데려온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친한 친구신가 봐요. 뭐, 혼자 왔다가 둘이 나간 적은 있지만.”

“아, 쫌! 하지 말라고요. 오늘 그러려고 온 거 아니에요. 이제 그럴 일도 없고.”

둘은 그렇게 티격태격했지만 서로 간에 불쾌한 기색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온기현은 눈동자를 굴리며 가게를 휘둘러봤다.

“채우야.”

“어?”

슬며시 속삭이듯 채우를 부르자 연채우가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여기 혹시, 니가 다니던 게이 바야……?”

“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처럼 조용히 묻는 말에 연채우는 외마디 음성을 흘렸다. 이제까지 너저분한 데서 아무나와 뒹굴던 짓만 해서일까. 온기현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 아니. 아니. 여기 그런 데 아니야. 그냥 맘 편하게 술 마시고 싶을 때 가끔 오는 곳이야.”

“그래?”

자못 아쉽다는 듯 말끝이 허물어졌다. 그에 연채우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온기현이 대뜸 아까부터 내리 반복했던 질문을 이었다.

“나 그럼 남자 언제 소개해 줄 거야?”

“뭐?”

그 소리는 꽤 컸다. 바텐더를 포함해서 카운터에 앉아 있는 남성 서너 명은 얘기를 들었는지, 슬쩍 시선을 던졌다. 연채우가 아오, 하고 작게 투덜거리며 온기현의 이마를 손끝으로 툭 쳤다.

“그냥 자연스럽게 가자, 자연스럽게. 응? 오늘은 일단 편하게 기분 전환한다는 셈 쳐. 뭘 대뜸 소개냐, 소개는. 오늘 그러려고 나오자고 한 거 아냐.”

“……뭐야. 나 사람 만나고 싶다니까.”

꿍한 표정으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민 온기현을 보던 연채우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트리다 말았다.

오늘은 정말로 그러려고 데리고 나온 게 아니었다. 곁에서 지켜보기에 온기현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에 밖으로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을 시키고자 했었다. 제가 편하게 드나드는 단골 술집에서 한잔 기울이려 했던 것뿐이다. 온기현이 방구석에서 곰팡이처럼 썩어 가는 꼴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뭐, 어차피 이 가게 자체가 오픈된 만남에 대해 꺼리는 분위기는 아니고 바텐더가 말한 것처럼 온유한 만남을 원할 때마다 이곳에서 파트너를 찾기도 했었으니, 온기현이 원한 바를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연채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좀 마시고. 응? 그리고 여기 굳이 따지자면 게이 바는 아냐. 가게 둘러봐 봐. 남자만 있는 건 아니잖아.”

“…….”

온기현이 눈동자를 도록 굴려서 내부를 슬쩍 돌아봤다. 연채우의 말마따나, 남성의 비율이 훨씬 높기는 했지만, 서너 명 정도의 여성도 군데군데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더니,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다.

“어어, 친구분. 혹시 괜찮은 사람 찾아요? 그럼 나는 어때요?”

“아, 쫌. 아저씨는 논외거든요?”

“말이 심하다. 아저씨 상처받는데.”

바텐더가 맥주잔을 앞에 놓아두며 실없이 농담을 건넸다. 그리고 워워, 하며 앞을 막아서는 연채우의 말에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찡그린 표정을 부러 지어 보였다.

“하이고. 상처는 퍽이나. 왕년에 좆대가리 함부로 놀리다가 칼 맞을 뻔한 거 제가 다 알거든요?”

“케케묵은 옛날 일이지, 그거야.”

“……칼……, 맞을 뻔하셨어요?”

“음?”

주고받는 대화에 온기현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흘리며 끼어들었다. 바텐더는 쓰게 웃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이 그렇다는 거죠.”라고 대답을 회피했다.

그에 연채우가,

“상종 못 할 바람둥이니까 넌 신경 쓰지 마. 저런 놈한테 걸리면 진짜 같이 좆 되는 거다. 하반신으로 대화하려는 새끼들 중에 정상인 놈은 없다니까. 내가 겪어 봐서 알잖아.”

라고 커다란 소리의 귓속말로 온기현을 을렀다. 온기현은 눈만 깜빡거리다가 가만히 대답했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안 해, 이제.”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야야. 내 뒷담화 다 들려, 다 들려.”

바텐더가 연채우의 귓속말을 듣고는 핀잔을 주듯 큰 소리로 항의했다. 그러자 연채우가 장난스레 웃으며, “귀도 밝으시네. 아저씨, 취소.”라고 응수했다.

그렇게 장난 반, 진담 반인 대화가 이어졌다.

기현은 제 앞에 놓인 맥주를 홀짝였다.

“근데 진짜로 누구 만나 보려 한 거라면, 우리 가게로 잘 찾아온 거예요.”

“네?”

저에게 던지는 말에 온기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여기는 단골손님만 거의 찾아오거든요. 새로 찾는 손님도 거의 단골손님이 데려오는 친구고. 단골 중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점잖은 분들이고요.”

“네에…….”

“전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지갑도 빵빵한 사람들이 많고.”

“네에.”

온기현이 힘없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텐더는 그런 온기현을 보며 열없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 곧 다른 손님을 상대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에이, 됐고. 그냥, 이런 데도 있다는 거지. 오늘은 그냥 우리 둘이서 편하게 마시자. 응?”

연채우가 술잔을 기울이며 가벼운 말투로 온기현의 어깨를 툭 쳤다.

아마 온기현의 마음을 누그러트리려고 하는 말이리라.

하지만 겉으로 약간 침울해 보이기만 하는 모습과는 달리 온기현의 속은 흙탕물에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동시에, 누군가 손잡아 주지 않으면 완전히 먹혀들 것 같은 불안감도 들었다.

그리고 문제는, 술이 들어갈수록 자꾸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이었다. 한 모금, 한 잔. 입에 술이 들어갈수록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어느새 카운터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눈빛이 계속해서 가게 내부를 훑었다. 술이 들어가 알딸딸해진 연채우는 온기현과 얘기를 나누다가도, 친근한 사이로 보이는 누군가가 부르면 다른 테이블에 가서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는 했다.

혼자 있는 온기현을 의식하는 듯 불안한 시선을 가끔 보내왔지만, 온기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편안하게 놀다 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연채우는 됐다고 하며 잠깐 인사만 하고 와서는 계속 온기현의 옆에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연채우를 향해 인사를 건네던 누군가가, 온기현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내며 친구도 같이 놀자고 권유했다. 연채우는 헛소리 말라며 쫓아냈지만 온기현은,

“왜? 인사시켜 줘. 나 저 사람 맘에 드는데.”

라고 연채우를 원망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연채우는 그럴 때마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딘가 조급해 보이는 온기현은 과연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무슨 일이 날 것처럼 굴었다.

연채우가 부러 밝게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더라도, 구름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부산스럽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가게 내부를 정신 사납게 둘러보기 일쑤였다.

오늘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연채우가 이만 가자고 막 입을 떼려던 때였다. 연채우의 핸드폰이 격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연채우가 핸드폰의 화면에 뜬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다급한 얼굴로 기현에게 말했다.

“기현아.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알았지?”

“응.”

“금방, 금방 올게!”

연채우는 끝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가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 연채우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누구길래 저러지, 싶은 마음도 한순간.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흘끗 쳐다봤다.

“아냐, 아냐. 그러면 안 돼.”

소매의 보풀을 손끝으로 뜯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부정했다. 하지만 사실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곧바로 개새끼, 라고 욕을 씹으면서 술을 벌컥벌컥 마셔 댔다.

“푸하.”

싸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맥주 맛이 씁쓸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좋은데…….”

손으로 턱을 받치며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손으로 꾹 누른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홀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때.

“다정한 사람이 좋아요?”

“……어?”

누군가 불쑥, 뒤에서 말을 걸었다. 온기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제 곁에 다가온 사람을 바라봤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친 남자는 멀쑥한 스리피스 정장을 입은 채 온기현의 옆 카운터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여기 앉아도 돼요?”

점잖은 말투로 물어 온 말에 온기현이 고개를 아래위로 몇 번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가 그제야 자리에 앉으며 온기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남자는 키가 꽤 큰 편이었다. 자신은 스탠딩 의자의 발 받침대에 신발 바닥이 겨우 닿았는데, 남자는 바닥까지 닿은 한쪽 발로 바닥을 따닥, 하고 리듬을 타듯 몇 번 두들겼다.

‘류주호랑 키가 비슷한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런 감상이 떠올랐다. 하지만 얼굴 생김은 달랐다. 남자는 각이 두드러진 얼굴선을 갖고 있었고 하악이 다소 발달하여 마초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거기까지 생각한 온기현은 취기가 올라 뜨끈한 볼을 마구 매만졌다.

“친구는 갔어요?”

“네?”

“아까 같이 있던 친구요. 아니면 혹시, 애인?”

“아. 아뇨. 그냥 친군데요…….”

남자는 바텐더와 눈인사를 잠깐 주고받으며 온기현을 향해 시선을 못 박은 채 말을 걸었다. 단골이긴 하지만 연채우는 모르는 사람인 듯했다.

“아하. 아까 친구는 나가는 것 같던데요.”

“네……. 잠깐, 전화 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그래요? 잠깐 나간 것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온기현은 그저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쩐지 의미를 담은 은근한 시선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정쩡하게 술잔만 꽉 잡고 있었다. 그때.

“야, 미안. 기다렸지.”

가게 안으로 빠르게 들어온 연채우가 그렇게 말하며 온기현이 앉은 자리로 걸어왔다.

“응? 아니. 괜찮아.”

“어? 근데 누구세요?”

연채우가 그 말과 함께 남자를 돌아보자 남자는 약간 머쓱하게 웃는 표정을 짓더니 “실례.”라는 한마디만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우야. 그냥 가자, 집에.”

“어? 왜. 별로야? 아 씨, 방금 그 남자가 뭐 이상한 짓 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덧붙이는 말에 연채우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그래. 집에 가자.”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가 괜히 오자고 했다.” 하고 미안한 표정을 짓길래 온기현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그렇게 가게에서 나와서 연채우의 집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근처까지 거의 다다랐을 즈음에 온기현이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 편의점 좀 들렀다가 갈게. 먼저 들어가 있어.”

“어? 왜?”

“집에 맥주 없잖아. 사 갈게.”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댄 온기현은 연채우를 얼른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갔다.

자신을 생각해서 밖으로 끌고 나와 준 연채우에게는 고마웠다. 하지만 그가 있으면 괜히 걱정만 더 끼치게 될 것 같았다. 오늘은 어쩐지 혼자서 진탕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마시고, 취하고 싶었다.

사실 소개고 뭐고 상관없었다. 아무나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면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사람으로 그 기억들을 모두 덮어 버리면, 지금의 이 괴로움도 전부 잊히지 않을까.

누구든 상관없었다.

류주호가 아닌 다른 사람이면, 누구든.

어느새 다다른 가게 안에 들어선 온기현을 향해 인사하던 바텐더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온기현은 아까와 같이 카운터 바에 앉아 아까와 같은 것으로 시켰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온기현은 아랫입술을 질근 물고 앞에 놓인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시선을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가게 내부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아까보다 확실히 농밀해진 부분이 있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저마다 지금의 파트너 혹은 새롭게 만난 누군가와 밀착하여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시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또 왔네요.”

말과 동시에 남자가 불쑥 온기현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왔다. 다소 매캐한 냄새가 확 풍겼다. 가끔 류주호에게서 나던 담배 냄새와 같았다. 그에 순간 말문이 막히며 잠시 멍해졌다.

“아…….”

아까의 그 남자였다. 자신에게 말을 걸던.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온 모양인지 남자의 옷에서는 바깥 냄새와 알싸한 담배 향이 뒤섞여 있었다. 온기현은 남자의 셔츠 깃 부근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 친구는 집에 가서요.”

“아하.”

남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럼, 이제부터 혼자네요?”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두툼한 입술의 꼬리를 올려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 * *

후우.

뿌연 연기가 공중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이제껏 지겨울 정도로 목도해 왔던 허무한 연기의 소멸을 메마른 눈동자가 지그시 응시했다.

입에서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장초는 손가락에 끼워진 상태였다.

저 뿌연 연기만큼, 며칠 동안 시도한 통화만 해도 헤아릴 수 없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몇백 번째 듣는 안내 음성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류주호는 통신사에 전화를 걸었다.

―네에. 행복을 전하는 디케이 텔레콤 상담사, 김풍경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네에, 고객님. 전파 장애로 상대방과 통화 연결이 어려우시다고요. 정확히 어떤 증상인지 알 수 있을까요? ……네에, 고객님. 기지국에 이상이 있거나 하는 건 아니고요. 네에, 고객님. 여러 가지 이유로 파악이 되는데요. 통화음이 한 번만 울리고 바로 안내음이 나온다는 건, 상대방 측에서 번호 차단을 하신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여러 가지가……. 네에, 고객님. 그런, 차단 같은 경우는 저희 측에서 해제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고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고객님의 행복한 상담사 김.풍.경.이었습니다.

명랑한 목소리가 뚝 끊겨, 당시 류주호는 ‘차단’이라는 단어를 곱씹고는 미간을 꾹 누르며 초조함에 이를 아득 물었다.

번호가 차단되면 안내 연결음으로밖에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한 번도 제가 겪어 보지 않은 상황이라 처음 알았다. 차단을 했으면 했지, 차단을 당해 본 적은 없었다.

사실상 별 의미 없다는 행위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류주호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빌라의 깜깜한 창을 올려다봤다.

“…….”

눈이 가느스름하게 빛났다. 하염없이 기다린 것이 과연 며칠째인지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미 잠을 제대로 취하지 못하여 밤낮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온기현의 좁은 인맥 탓에 학교에는 그의 거취를 모르는 놈들투성이였다. 같은 단대라는 새끼들이 왜 진작 온기현과 친분을 쌓지 않고 뭐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작 그랬으면 애초에 싹을 잘라 버렸을 터였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던 과대를 이용해서 온기현을 불러내게 했다. 하지만,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멍청한 과대 놈이 정신을 판 사이에 온기현이 귀신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알아낸 것은 온기현이 휴학을 신청했다는 사실이었다.

집에도 없고, 도서관에도, 고깃집에도. 그 어디에도 없다.

온기현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제가 쥐고 있던 목줄을 완전히 끊어 버린 채, 사라졌다. 아니, 류주호가 애초에 목줄을 쥐고 있던 적이 있었던가. 거뭇하고 퀭한 눈두덩이를 꾹 눌러 문질렀다. 연초를 끼고 있는 제 손을 내려다봤다.

금단 증상을 겪는 환자처럼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매캐한 연기를 머금어도 머리에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탁했다.

문득 온기현의 냄새를 맡고 싶었다. 야만적인 갈증이었다. 그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코를 묻고 싶었다. 달큼한 바나나 향이 나는 가랑이 사이에 코를 박고 살갗이 헐도록 비벼 대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설렁설렁 그려낸 것 같으면서도 유려한 얼굴선을 이 손안에 가득 담고 그 눈동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새까만 눈동자를 볼 때마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강렬한 감각이 온몸을 강타한다. 그게 어색했다. 그토록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강한 열망을 이제껏 느껴 본 적 없었다.

진정으로,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었다. 생전, 이런 강렬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그 혼란스러운 감정이 터진 것은 영흘도에서였다.

온기현은 무언가 나름의 계획을 짜 왔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그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맛집이라고 애써 검색해서 찾아간 곳은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가게였고, 명소라고 불리는 곳마다 우스꽝스러운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럴 때마다 온기현은 실망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자신을 슬쩍슬쩍 쳐다봤다. 부러 초조하고 실망한 기색을 감추듯 더욱 발랄하게 행동하면서.

류주호는 그때, 가슴속에 들끓던 무언가가 엄청난 기세로 팽창하며 제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했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자꾸만 험악하고 흉포한 생각만 가득 들었다. 누가 보든 말든 당장 그와 하나로 섞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류주호는 몸을 섞는다는 것 자체는 해소라고 생각했다. 안에 그득 쌓여 있는 거추장스러운 것을 아무렇게나 싸 버리듯 풀어내면서 신체적 즐거움까지 찾을 수 있음에, 굳이 다가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달랐다. 단순히 풀고 털어 버리고 싶은 게 아니었다. 도리어, 그를 자신의 안에 가득 채우고 싶었다. 동시에, 자신 또한 그의 안을 가득 채우고 싶었다.

온기현에게 살갑게 다가가는 감후석을 보며 거센 풍랑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고 목구멍까지 꽉 죄는 듯한 흉포한 감정에 휩싸였다. 꿈속에서 봤던 낭떠러지가 제 발밑에서 저를 끌어 내리는 것 같았다. 한없이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하고 싶었다. 한데 뒤엉겨 섞이고 싶었다. 어떠한 틈도, 그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도록 완전히.

그것은 류주호에게 있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부정이었고, 또 동시에 최초의 혼란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지 몰라 그저 무작정 밀어붙였다.

온기현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어 주던 그 순간, 안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폭력적일 정도의 감정이었다. 이제까지 그토록 혐오하던, 힘으로 누군가를 짓누르고 억압하는 저열함이 자신을 지배했다. 마구잡이로 온기현의 안으로 제 것을 쑤셔 넣었다. 전부 들어가고 싶었다.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자신으로 메우고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껏 사랑스럽다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달콤하고 폭력적인 상반된 감정이 한데 뒤엉겼다.

온기현이 모텔방에서 사라졌음을 안 순간의 기억이 희미했다. 미친 듯이 온기현을 찾으러 헤맸다. 눈앞이 새빨갛게 될 정도로. 그리고 그가 어떤 놈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는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인 뒤였다. 무작정 주먹을 휘둘렀다.

그래서 아버지의 비서에게 연락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놈들에게 돈을 쥐여 주고 꺼지라고 해야 했다. 안 그러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사고가 엉망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일으키려 했던 사업이 물거품이 되며, 가뜩이나 초조했던 마음은 그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생각했다.

결국 영흘도에서의 사건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끌어서 시도했던 프롭테크 사업을 완전히 말아먹은 것을 어디서 알았는지, 폭력 사건으로 합의금까지 들먹인 류주호에게 조건을 제시했다.

사업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서는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내건 조건을, 즉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양희인과의 결혼을 조금 이른 시기로 앞당기자는 강제에 가까운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어차피 이것 또한 집안 대 집안끼리 맺는 계약의 일종이었다.

류주호의 부모님도 정략결혼으로 이루어진 부부였다. 혼인 신고서에 사인하는 것과, 사업 파트너와 협력 계약을 맺는 것은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결혼 또한 사업이었다.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온기현을 향한 욕심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온기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온기현과는 계속해서 이렇게 지내면 된다. 자신의 곁을 떠나는 일 없게, 언제까지고 옆에 묶어 두면 된다. 온기현과의 관계는 서류 위에 휘갈기는 ‘계약’과는 완전히 별개였다.

이성적으로 계산해서 셈을 하고 최적의 결과를 끌어내는 세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온기현은…….

애초에 남자와 결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히 대한민국에서 그것은 절대적으로 불가한 일이었다. 온기현 또한 자신과 육체적인 상성이 잘 맞아 만족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충분히 설명될 줄 알았다.

너와 나는 앞으로 변하는 것이 없다고. 이 관계는 내가 어떤 ‘사업’을 하든 어떤 ‘계약’을 하든 쭉 이어질 것이라고. 그러니 나는 너를 절대로 놓지 않을 것이라고.

“……기현아.”

온기현.

푹 숙였던 고개를 다시금 올렸다. 비어 있는 새까만 공간을 뚫어질 듯 바라보는 동공이 무섭도록 낮게 가라앉아, 거친 사포처럼 메말라 있었다.

류주호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빌라에 도착하기 전,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오는 길이었다.

이제는 사진처럼 눈에 박힌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주인 없는 깜깜한 창을 응시한 채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연결음이 이어졌다. 몇십 초도 되지 않는 기다림이 영원 같았다. 몇 번이나 신호음이 계속됐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또다시 입으로 가져가 쭉 빨아들였다.

―뚜르.

이윽고 신호음이 끊겼다. 전화를 받은 것이다.

“…….”

류주호가 상체를 조금 앞으로 일으켰다. 기척도 숨긴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곧이어, 연결된 전화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아, 여보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

―흐읏, 아……. 으음, 아, 잠깐……. 여보세요? 여보세요?

“…….”

―네? 하아, 뭐라고요? 여보세요.

가쁜 숨소리가 섞인 묵직한 저음의 남성이 연신 “여보세요?”라고 물어 왔다. 온기현의 핸드폰을 받은 남성의 음성은 약간 거칠었다.

그리고 그 음성 사이로, 남자의 말 중간중간에 헐떡이는 신음이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인 듯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떤 행위인지 여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음란하고 끈적한…….

아무런 말이 없자 “뭐야, 대체.”라고 중얼거린 건너편의 남성이 뚝 전화를 끊어 버렸다.

“…….”

류주호는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상태 그대로, 마치 밀랍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앞을 주시했다.

핏줄이 불거진 손이 핸드폰을 그러쥐었다. 류주호의 안광이 빨갛게 타오르는 연초 끄트머리처럼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났다.

* * *

차가 조용히 도로를 내달렸다.

목적지가 명확한 자동차의 바퀴가 쉼 없이 굴렀다. 한참을 내달린 차는 묵직한 엔진 소리를 도로에 흩뿌리며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잠시 갓길에 선 자동차의 주인이 슬며시 시선을 올렸다. 이 지역에 오랫동안 자리해 있었을, 그 흔한 네온사인조차 걸어 놓지 않은 모텔의 창을 눈동자만을 들어 아래서부터 하나씩 세어 나갔다.

1, 2, 3…….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은 하나뿐이었다. 그곳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한참을 부르릉거리며 도로에 정차해 있던 차가 느릿하고 조용하게 모텔의 1층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탁.

사뿐하게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시트에 얌전히 올려져 있는, 제가 집에서부터 바로 챙겨 온 야구 배트를 손에 쥐었다.

차갑게 빛나는 금속성의 야구 배트가 남자의 손에 착 감기듯 쥐어졌다.

튀어나온 뼈마디와 핏줄이 두드러질 정도로 손에 빠듯한 힘이 들어갔다. 손을 다시금 느리게 폈다가 배트 손잡이 부분을 그러쥐었다.

그러다가 잠시 으음, 하고 한숨과도 닮은 소리를 신음처럼 흘렸다.

야구 배트를 든 손을 아래로 내린 채 숨을 쉬는 기색조차 없이 못 박힌 듯 서 있던 남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을 것처럼 무기질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빙글.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몸을 돌려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드르륵. 야구 배트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차분하게 바닥을 울렸다.

“아, 으음……. 어서 오세요…….”

새벽이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카운터를 보던 모텔 주인은 오늘따라 손님이 드물어 저도 모르게 깜빡 졸고 있다가 귓가에 울리는 발소리를 듣고 흐리멍덩하게 눈을 겨우 뜨며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저도 모르게 졸기 전에 안경을 빼고 잠든 모양이었다. 카운터 위에 올려 둔 안경을 들어 대충 콧등 위에 걸쳤다.

“수고하십니다.”

그 말에 느리게 껌뻑거리던 흐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의자에 기대어 있던 터라 상반신만 눈에 들어왔음에도 눈앞을 지나가며 싱긋 웃는 남자가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웃음과 함께 그림처럼 웃는 남자는 키가 엄청나게 컸고, 새까만 폴라 티에 새까만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어, 어……. 수, 수고……, 네. 가, 감사……합…….”

남자는 말을 바보같이 더듬는 모텔 주인을 향해 웃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이고는 그대로 카운터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 어……! 자, 잠깐만요……! 계산을…… 하셔야…….”

“아.”

당연한 일을 요구하는데도 모텔 주인은 어쩐지 면구스러웠다. 자다가 깬 제 흉한 낯이 괜히 창피해지기도 해, 미끈거리는 손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외마디 음성을 흘린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와, 씨발. 존나 잘생겼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계, 계산……하셔야…….”

“위에 일행이 있어서요.”

“네? 위, 위에요?”

“……505호. 제 일행이 거기에 있어요.”

아, 아아…….

모텔 주인은 입을 헤벌렸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콱 다물었다. 이 모텔은 취향이 독특한 손님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그래서 객실을 많이 판다는 목적보다는 객실 한 개를 팔더라도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게 우선이었다. 하룻밤의 숙박비가 거의 최고급 호텔 수준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독특한 취향이라 함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SM 플레이를 즐긴다거나, 동성 간의 관계라거나, 아니면 세 명 이상이 관계를 맺는 등등. 갖가지 취향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505호면, 아까 남성 둘이 올라간 곳이다. 오늘은 딱 객실 하나만 팔렸다.

모텔 주인은 대번에 사정을 파악했다. 비밀스러운 관계를 즐기는 남자들이었다. 한참 전 객실로 올라간 두 명의 손님 중 하나도 키가 크고 깔끔한 슈트를 갖춰 입은 점잖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겉모습과 다르게 꽤 난잡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티를 내지 않았다. 장사한 지 하루 이틀 된 게 아니었다.

“네. 505호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금 입꼬리를 올리며 까딱 고개를 숙인 남자가 다시 사뿐한 발걸음을 옮겼다.

모텔 주인은 다시 몸을 뒤로 길게 기댔다.

‘세 명이라.’

피식. 입에 웃음이 걸렸다. 그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상판이 잘난 놈들이 취미도 고상하셔라.’ 하고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안경을 벗고서는 눈을 감았다.

띵.

스르륵.

목적한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아가리를 벌렸다. 그 커다랗게 뚫린 사이로 먼저 내밀어진 것은 야구 배트였다. 그리고 동시에, 새까만 구두코가 복도 모서리에 걸렸다. 발걸음은 조용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디딜 때마다 야구 배트도 바닥에서 함께 흔들렸다.

[505]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차갑게 끓는 퀭한 눈이 호실 숫자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손을 들어, 똑똑.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핸드폰을 꺼냈다.

똑똑.

시선이 객실 문에 뚫어질 듯 박혔다.

똑똑.

문 건너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짜증스럽게 신경질을 내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뭐야, 대체.

벌컥, 구시렁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목욕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가 이맛살을 구겼다. 그러고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수상쩍은 시선을 보내며 조금 톤을 낮추어 말을 뱉었다.

“……누구시죠?”

류주호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애 여깄죠?”

“……네?”

가운을 입은 남자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상체를 뒤로 물리며 다소 당황스럽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애요? 당신 애를 왜 여기서 찾습니까.”

남자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새까만 구두코가 문 끝을 턱, 가로막았다.

“이, 무슨. 지금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누굴 찾는지 모르겠지만,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예?”

“…….”

류주호가 남자를 빤히 쳐다보며 제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가장 최근에 전화를 걸었던 번호로 연결되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뭐 하는 거야? 어?”

핸드폰 건너편에서 통화 연결음이 시작됐다. 그리고.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띠롱 띠롱 띠롱…….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띠롱 띠롱 띠롱…….

희미하게, 모텔방 안쪽에서 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에서 작게 터지는 연결음과 기이하게 맞물리는, 전화벨 소리였다.

류주호가 통화 종료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동시에, 방 안쪽에서 울리던 벨 소리도 끊겼다.

류주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망아지 여기 있는 거, 맞잖아.”

‘씨발.’

남자는 속으로 욕을 되뇌었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대체 왜?

방금까지만 해도 남자는 꽤나 흡족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 하룻밤의 상대가 아주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격렬하게 몸을 뒤얽고 나서 두 번의 사정을 끝낸 남자는 상대의 몸을 안고 만족스러운 후희를 즐겼다.

그러다가 상대가 막 샤워를 하러 들어간 때였다. 다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지, 상대는 빨개진 얼굴을 하고서는 안에 들어 있는 제 체액을 혼자서 처리하겠다고 했다. 남자는 욕실에서 한 번 더 관계를 갖고 싶었지만, 상대가 너무 부끄러워해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했다.

오래 걸릴 거라는 말과 함께 욕실로 들어가는 상대의 뒷모습을 보다가, 개운하게 몸을 일으켜 막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다.

똑똑.

모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 그때였다.

‘씨발. 그때 문을 열지 말아야 했는데.’

입을 꾹 다문 채 같은 욕을 두 번, 세 번이고 계속해서 속으로 읊조렸다. 하지만 험하게 욕을 지껄이는 속과는 달리, 샤워 가운을 걸친 남자는 다소곳하게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눈을 들어 눈앞에 있는 이를 쳐다봤다.

새까만 코트와 새까만 폴라 티, 그리고 새까만 바지와 구두까지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의상과는 대조적으로, 머리는 진갈색에 눈동자는 오묘한 옅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와는 다르게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다소 이질감을 자아냈다.

아까까지만 해도 후끈했던 방 안이 극점까지 내려간 듯 춥게 느껴졌다. 실제로 가운 아래의 살갗에서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새까만 옷을 입은 사내는 모텔방의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리를 늘어트린 채, 언뜻 느른하고 편안한 자세로도 보였지만 실상 그게 더 긴장감을 드높였다.

그의 왼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는…….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던 은빛 금속성의 야구 배트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꿀꺽.

남자가 침을 삼키며 목울대를 울렸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목구멍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떠돌다가 다시금 침과 함께 아래로 꿀떡 내려갔다.

소파에 앉은 그를 흘긋거리며 다소곳하게 얌전히 침대 위에 앉아 무릎 위로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연신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막상 그는 남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다.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샤워 소리가 들리는 욕실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어쩐지 금방이라도 야구 배트를 휘두를 것만 같은 공포감이 내리 몸을 짓눌렀다.

‘아까 빨리 112에 신고해야 했는데. 괜히 미적거려서는, 씨발!’

다 저 야구 배트 때문이다. 성큼성큼 구둣발을 내딛던 그가 야구 배트를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야구 배트를 본 순간, 몸이 일순 굳어 버렸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외양이라도 험악한 강도처럼 보였더라면.

겉으로는 완전히 멀쩡해 보였기에, 모텔 주인도 그냥 들여보내 준 건가. 단골인 모텔이어서 잘 알지만, 그 주인은 곯아떨어져 있었을 게 분명했다. 경찰을 섣불리 불렀다가는 모텔이 영업 정지를 먹을 수도 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욕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솨아아.

욕실 안쪽에서 울리는 샤워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욕실 쪽으로 흘끔 곁눈질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일단 저라도 살고 봐야겠다.

남자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슬금슬금 도망치기 위해 몸을 꾸물거릴 무렵,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놀랐어요.”

“네??”

남자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몸이 바짝 굳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남자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멍하니 샤워실만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꼭 저한테 하는 말 같지 않기도 했고, 또 저한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이 새끼 약 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꿈결을 노니는 것 같은 몽롱한 얼굴을 남자가 구겨진 얼굴로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땐 말이죠. 대뜸 나한테 고백했을 때……. 처음에는 뭐 이런 놈이 있지, 싶었어요. ……그러다가 너무 괘씸하고, 또 계속해서 눈에 밟히고, 그러다……. 자꾸만 보고 싶어지고…….”

“…….”

그가 핸드폰을 엄지로 연신 쓸어내렸다. 눈은 꿈꾸듯 무언가를 회상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같은 방향을 향한 채였다.

“우리 기현이……. 귀엽죠. 눈도 새까맣고 머리도 새까매서, 너무 예쁘잖아요. 거기다 콧방울에 찍힌 점까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예쁘고 야하고 귀엽고 다 할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그렇지 않나요.”

그가 영문 모를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말만 따지면 애정이 듬뿍 담겨 달콤하기 그지없었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저 오싹하기만 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정중한 존대가 더욱 그러했다.

그러다 언뜻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현이?

‘기현이가 누구지.’

남자는 아리송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다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그가 이러고 있는 이유가 혹시, 제가 오늘 밤 관계를 했던 저 남자 때문인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쳐 버리겠네……. 혹시, 저놈 애인인가?’

어이가 없었다. 남자는 그래도 나름 이 바닥에서 매너 좋고 젠틀한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증권 회사에 근무하는 남자는 얼굴도 나름 멀쑥하게 생겨서, 인기도 많았다. 깔끔한 관계 스타일을 추구하는 남자는 이런 유의 치정 싸움에는 익숙지 않았다.

가만. 근데, 저놈 이름이 기현이였던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름을 물을 새도 없이 몸을 섞기에 바빴던 터다.

의문을 품었던 것도 잠시. 그가 말을 이어 갔다. 은은하게 울리는 샤워 소리가 배경음처럼 간간이 섞여 들었다.

“그런데.”

“…….”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였나.”

바닥까지 내려앉을 듯한 저음이 묵직했다.

“속절없이 빠져들어서 헤어나지 못하리라 예감했던 순간이.”

“…….”

남자는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손을 꿈틀거렸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이 새끼야.’

속으로는 온갖 쌍욕과 삿대질을 다 하고 있었다.

“그.”

“54번째라고 했거든요, 나를.”

“…….”

뭔 소리야.

진짜 이 새끼 약 했나 보다. 아니면 미쳤거나.

남자는 샤워 가운이 벌어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눈만 굴려 방문을 바라봤다. 혼잣말을 지껄이는 틈을 타 당장 뛰쳐나가야 했다.

미친놈을 상대하는 법은 모른다. 이제까지 시황 그래프와 숫자만 볼 줄 알았지, 진짜로 미쳐 버린 또라이를 상대하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포털에서 ‘미친놈 상대하는 법’을 검색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남자가 순간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가 늘어진 자세 그대로, 손으로 천천히 야구 배트를 잡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었어. 54번째라고는 했지만, 그 몸을 처음 안 사람은 나일 거야. 나였거든……. 그건 몇 번씩이나 몸을 섞으면서 알게 될 수밖에 없었어. 그 예민한 반응, 어설픈 몸짓…….”

“…….”

어느새 남자의 혼잣말이 반말이 되어 있었다.

“……그래. 알 수 있었어, 그건. 아무리 내가 이것저것 욕심부리려다가 겨우 손에 넣었던, 겨우 잡았던 내 걸 놓쳐 버린 병신이라도. …….”

“…….”

꿀꺽.

남자가 목울대를 크게 꿀렁였다.

“그래도……. 55번째는, 안 돼. 절대로.”

“…….”

손에 땀이 흥건했다. 샤워 가운에 벅벅 문질러 닦고 싶어도 맘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계속해서 은은하게 들리는 샤워 소리가 더욱 작금의 현실을 생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만약 저 안에 있는 놈 때문이라면, 괜히 하룻밤의 잘못된 인연으로 인해 제가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울컥 솟았다.

“……큰일이네.”

말이 이어졌다.

……사람은 죽여 본 적 없는데.

‘헉.’

손으로 목덜미를 한번 성마르게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리는 말에,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무, 무……슨. 저, 저기…….”

“지금 고민 중이에요.”

“……네, 네??”

“기현이가 보는 데서 네놈 대가리를 깨는 걸 보여 주는 게 나을까.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쟤를 당장 납치해서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곳에 가둬 버리는 게 나을까. 그런 고민.”

“……아, 씨발……. 저, 저기요!!”

남자의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욕지거리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는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다, 당신 미쳤어요? 제정신이야?! 이, 이거 범죄라고! 어?!”

남자가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욕실 안쪽에서 샤워 소리가 뚝 끊겼다.

그에 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욕실 쪽을 다시금 집요하게 응시했다.

“당신 뭐야! 아, 씨. 저, 저 안에 있는 놈 상대가 미친 새끼인 줄 알았으면 나도 안 건드렸을 거라고!!”

남자는 자기는 몰랐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거의 울먹이다시피 하는 목소리였다. 증권가의 브레인이라 불리며 언제나 침착하게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해 오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이런 비이상적인 상황에서 그저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씩씩거리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다가 다리가 후들거려서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욕실에서 수건으로 몸을 탁탁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며 곧이어, 끼익. 욕실 문이 열렸다.

그에 류주호가 뒤로 물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 * *

“어?”

어라? 이상하다?

온기현이 제 주머니를 더듬더듬 손바닥으로 짚었다. 하지만 제가 찾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하고 난처한 마음에 입술이 저도 모르게 비죽 튀어나왔다.

“아, 미치겠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온기현은 머리를 감싸 쥐고는 제 기억을 더듬었다.

카운터 자리에 와서 한 남자가 말을 걸던 그때부터.

혹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거짓말이었다. 그럴 작정으로 바로 되돌아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은근한 유혹에 마음이 흔들렸다. 남자가 맘에 들어서가 아니다. 속에서 치미는 괴로움을 잊고 싶어서 흔들렸다. 슬쩍 닿아 오면서도 선을 지키는 몸짓에 잠시 하룻밤의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거센 풍랑이 제 안에 있었다. 약간의 흔들림은 완전히 뒤엎어 버릴 만한, 세상이 거꾸로 뒤집힐 것같이 요동치는 거센 풍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어딘가가 마음에 안 들었다. 자세히 보니 하악이 너무 발달한 얼굴 생김새였다. 그리고 싱긋 웃는 앞니가 약간 어긋나 있었다. 눈빛이 너무 느끼했다. 머리를 고정한 왁스 냄새와 지독하게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 되는 이유는 넘쳐났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뒤이어 손목 위에 올라온 손길을 저도 모르게 확 뿌리쳤다.

남자가 “저기요.”라며 저를 부르는 소리도 무시한 채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말을 남기며 다급하게 가게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좁은 골목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고개를 드니 완전히 낯선 동네였다. 그러다가 연채우로부터 혹시나 연락이 왔을까 싶어서 핸드폰을 찾던 중이었다.

그제야 카운터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올려놨던 것이 기억났다. 남자가 무어라 말을 거는 와중에도 술을 홀짝이면서도 자꾸 핸드폰 쪽으로 눈길이 갔었다. 핸드폰만 보지 말라고 얼핏 웃으며 저에게 얘기했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뒷머리를 거칠게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발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가게로 들어갔을 때, 저를 반긴 것은 텅 빈 자리뿐이었다. 제 핸드폰도,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도 없었다.

바텐더에게 물어봤지만 그도 손님을 상대하느라 바빠서였는지 아는 게 없었다. 난감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바텐더에게 전화를 빌렸다. 일단 전화를 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통화 연결음만 귀에 들릴 뿐, 전화가 연결되지는 않았다.

왜 안 받지. 그 남자가 가져간 게 아닌가. 어디에 흘렸나. 약정도 아직 안 끝났는데.

제 원룸으로 가면 핸드폰 위치를 추적할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누구라도 받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걸어 봐야겠다.

아니면 집에 갔다 와야지.

다시금 전화를 걸었을 때, 뚝 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전화를 받는 기척이 들렸다.

“아. 여보세요? 저 아까 핸드폰 분실했는데요.”

전화를 받은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아. 핸드폰 주인이신가요? 여기 용산 2 파출소입니다. 지금 핸드폰 주우신 분도 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실 때…….

온기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몇십만 원이나 되는 핸드폰 기기 값을 허공에 날리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정말, 되는 일도 없구나. 붕 떠서는, 괜히 어정쩡한 마음으로 억지로 발버둥 치다가. 결국 핸드폰까지 잃어버릴 정도로 정신이 어지러웠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불안정함의 발로였다.

조금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도피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정말…….

같이 가자는 연채우를 떼어 놓고 대충 바텐더에게 물어 용산 2 파출소까지 가는 길만 파악해 둔 다음에 온기현은 홀로 다시금 제가 왔던 길을 엇비슷하게 되돌아갔다. 파출소는 술집 근처에 있었다.

이미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핸드폰을 길에 떨어트렸던 것일까. 아까 그 남자가 자신의 핸드폰을 주워 가서는, 자신을 불러내려고 이런 귀찮은 짓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면, 노골적으로 접근해 오는 남자를 두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 버린 온기현이 괘씸해서 부러 뒤틀린 생각으로 전화를 안 받았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어쩐지 자존심이 센 부류처럼 보였다. 남자를 보며 기억에 있는 이가 떠오른 탓에 제가 착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생각이 점점 복잡해져서 고개를 잘게 흔들었다.

핸드폰을 주워서 파출소에 가져다준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일전의 조별 과제를 통해 기현은 사람의 영악함에 대해 새삼 체감하게 되었다.

아마, 파출소에서 핸드폰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100%의 선의만은 아닐 것이다. 소정의 사례비라도 바라는 거겠지.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더라…….’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기기 값까지는 아니더라도 돈은 깨지게 생겼다. 사례비로 얼마가 적당할지 속으로 끙끙거리고 고민하던 중, 어느새 파출소 앞까지 다다랐다. 생전 연이 없던 파출소라는 곳에 발걸음한 게 벌써 두 번째다.

기현은 제 스웨터의 소매 부분을 손끝으로 끌어 내려 잡으며 밝게 불이 켜진 파출소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핸드폰 찾으러 왔는데요…….”

“아. 아까 전화했던, 맞죠? 이거 핸드폰.”

“네! 맞아요. 와아,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문을 열자마자 경찰과 눈이 마주치고, 핸드폰을 쥐고 손을 흔든 경찰에게 온기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신분증 여기요.”

“아아. 네.”

경찰은 신분증을 받아 들고는 온기현을 보며 사선으로 턱짓했다.

“저기, 핸드폰 주우신 분이 기다려요.”

“어, 어디…….”

그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온기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려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아니, 아예 숨소리도 내지 못할 정도로 몸이 굳었다.

“……핸, 핸드폰, 을…….”

“네. 거기 까만 코트 입으신 분이요.”

아…….

송곳 같은 시선이 저를 직시해 왔다.

일어선 채로 똑바로 향하는 시선을 정면에서 받으며, 온기현은 아찔함을 느꼈다.

순간 눈앞이 어지러웠다. 힘이 쭉 빠지는 탈력감을 억지로 버티며 다리에 힘을 주려 애썼다.

발끝까지 온통 새까만 옷을 걸친 류주호가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라붙는 그의 눈이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연갈색의 눈동자에서는 어떠한 온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운지, 뜨거운지도 알 수 없는 시선을 오롯이 받으며 기현은 저주에 걸린 인형처럼 그저 굳어 있었다.

“네. 확인했습니다. 여기 신분증 받으시고요.”

경찰의 말에 흠칫 놀라며 커다랗게 뜬 눈을 깜박거렸다. 그리고 삐걱거리는 몸을 돌려 신분증을 받아 들고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바로 발걸음을 떼어 내어 그대로 경찰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공간 가득한 묵직한 존재감을 부러 모른 척했다.

온기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쿵쾅대는 심장의 박동 따라 발이 바닥을 디뎠다.

묵직하도록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려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폐부가 가득 차도록 숨을 들이켰지만, 아직도 한참이나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작게 헐떡였다.

하지만 온기현의 신경을 휘어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뒤에서부터 조용히 따라붙는 인기척이었다.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 없는.

이삼 미터는 떨어져서 더 멀어지지도 가까워지지도 않는 거리가 외려 더욱 미칠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택시를 잡으려 큰길가로 나가게 되더라도, 택시를 기다리느라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사이에 어쩐지 거리가 확 좁혀질 것만 같은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둘은 인적이 드문 공원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온기현이 부러 어둡고 으슥한 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터다.

새벽이 다 된 시각. 도심 속 커다란 나무가 빽빽이 드리워진 공원 안쪽으로 들어선 온기현은 몸을 휙 돌렸다.

계속해서 달라붙어 오던 새까만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온기현이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적당히 해!”

눈을 치켜뜨며 새된 소리를 뱉었다.

“왜 쫓아오는데.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하아, 하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래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목소리는 최대한 억누른 상태였다. 어둠에 가려져 새까만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어둠을 향해, 눈을 질끈 감고는 가슴속에 있던 말을 죄 터트렸다.

“난 너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제발 가라고! 너, 진짜……!”

지긋지긋해…….

하지만 그런 온기현의 음성이 점점 작아졌다.

똑바로 서서 그대로 영원토록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커다란 실루엣이 점차 가까이 다가온 탓이었다.

뚜벅뚜벅.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리는 구둣발 소리가 점점 귓가에 선명했다. 그리고 동시에,

“야, 이거 안 놔? 이거 놔……!”

그는 느닷없이 온기현을 끌고는 공원의 나무숲 사이로 들어갔다. 속절없이 그의 손에 잡힌 팔목에 알알한 통증이 스며들었다. 몇 걸음도 채 가지 않아, 어둑한 곳까지 다다른 류주호가 온기현을 놓아줬다. 그러고는.

“……! 하, 하지……!”

“……하아.”

류주호가 온기현을 꽉 끌어안았다. 저리 비키라고 발버둥 치는 것도 아예 의식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류주호는 온기현을 팔 안으로 온통 끌어안고는 가슴 깊이에서 우러나는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하…… 기현아. 아아…….”

“이, 이거, 이거 놔. 너……! 아!”

하지만 류주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온기현이 짜증을 내며 밀어 대는 손힘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는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한껏 살 내음을 들이켰다. 그리고 밀치는 손을 마다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으며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가슴팍을 미끄러지듯 지나, 배 부근에 잠시 머물러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더욱 상체를 아래로 숙이더니, 대뜸 온기현의 고간에 얼굴을 파묻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온기현이 어깨를 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류주호는 그제야 숨을 쉬는 법을 알게 된 사람처럼, 온기현의 가랑이 사이에 코를 처박고는 날렵한 콧날이 죄 뭉개지도록 제 안면을 내리눌렀다.

당황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류주호는 심지어 뒤로 팔을 둘러 온기현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경악에 차서 거의 패닉에 빠져 주먹을 꽉 쥔 손으로 어깨를 퍽퍽 때렸다.

세게 때렸음에도 류주호는 돌덩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현아, 하아……. 아, 기현아……. 아, 씨발…….”

류주호는 계속해서 온기현의 이름을 낮게 읊조리며 그 체취를 흠뻑 들이마셨다.

온기현은 그제야 그가 맞으면 더 흥분한다는 기이한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상기해 내고, 억지로 밀어 내며 류주호를 떨어트리려 발버둥 쳤다. 벗어나려는 시도 중에 무릎이 류주호의 가슴팍을 가격하고, 발끝이 류주호의 무릎에 퍽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아……!”

두꺼운 바지 천 너머 그의 숨결이 성기에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을 벌려 온기현의 가랑이 사이에서 잘게 숨결을 흐트러트리는 통에 온기현의 성기가 얼핏 힘을 받았다.

그게 싫었다. 이런 게 너무 싫었다. 쉽게 무너지려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눈앞이 아찔했다.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오는 느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류주호는 세계 제일의 감미로운 무엇에라도 흠뻑 취한 것처럼 굴며 제 아래를 무자비하게 흔들어 놓았다.

온기현의 앞섶이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는지, 류주호의 숨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점점 선명해지는 윤곽을 그의 입술이 덧그렸다. 천 너머로 습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에 순간 터지려는 신음을 억누르려 손으로 입을 다급히 막았다.

기어이 바지춤 안으로 그가 손을 집어넣어 왔다. 헉, 하고 놀란 온기현이 울먹였다.

“제발……, 하지 마……!”

낮게 흐느끼는 소리에 류주호가 눈을 들었다. 온기현을 응시하는 메마른 눈은 소름 끼칠 정도로 날뛰는 포악함을 머금고 있었다.

악력이 잠시 풀어진 사이에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류주호가 그에 달아나려는 온기현의 몸에 따라붙으며 굽혔던 무릎을 일으켰다. 그리고 동시에.

뻑.

주먹으로 류주호의 얼굴을 내리쳤다. 뼈와 뼈가 맞닿는 소리가 났다. 세게 쥔 주먹이 그의 뺨에 닿았을 때 순간 살짝 힘이 풀려 손톱에 긁히기라도 했는지 류주호의 얼굴에 가는 실금이 그어졌다.

류주호는 얼굴이 모로 돌아간 채 살짝 벌게진 한쪽 뺨을 내보인 채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온기현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이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헉……. 헉…….”

숨이 가쁘게 터졌다. 뼈마디가 날카롭게 쑤셨다.

“……개자식.”

“…….”

낮게 욕을 읊조리자, 류주호가 고개를 기울인 그 상태로 천천히 얼굴을 기현의 쪽으로 돌렸다. 온기현은 순간 흠칫했다.

류주호는 맞은 것 때문에 화난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 온기현에게 키스하며 잔뜩 어둡게 가라앉은 눈을 할 때랑 비슷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게 되레 뒷걸음질하게 했다.

“……윽. 네 이런 점이……. 이런, 막무가내로, 네 뜻대로만, 다 될 거라고 생각하는, 네 이런 점이, ……너무, 싫어. 너무.”

“…….”

“너무 싫어.”

온기현이 두어 걸음 류주호로부터 몸을 물리며 그렇게 억눌린 말을 뱉었다. 제 마음을 허물어 버린 것도 모자라, 몸을 뜨겁게 녹이고, 제 속을 전부 열어젖히게 만들어 뭐든 쉬이 무너트리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한번 자 보려고, 심심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기분이 좋아서.

그가 이러는 이유는 불 보듯 뻔했다.

스윽. 류주호가 손등으로 제 얼굴을 쓸었다. 단순히 상처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 뺨에 새겨진 온기의 잔열을 느끼는 것처럼 약간 끈적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떨어진 거리가 안타까운 듯, 한 걸음 가까이 발을 내디딘 류주호가 입을 열었다.

“……좋다며. 나, 좋다고 했잖아.”

나 좋아한다며.

중얼거리는 것처럼 토해 낸 목소리가 지독히 낮았다.

당연하다는 것처럼 묻는 말에 가슴이 울렁거리며 속에서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이 왈칵 치솟았다.

“아니야.”

“아니야?”

왜?

선선하게 되물으며 류주호가 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밭은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서다가 굵은 나무 기둥에 턱 하고 등이 맞닿았다.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

“내가 널 왜 좋아해?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너밖에 모르는. 남의, 내 감정 따위는 지나가는 돌덩이만도 못하게 여기는, 너를, 내가……. 왜.”

속사포처럼 토해 낸 말끝이 점점 허물어졌다. 류주호의 흐트러진 머리가 눈썹 위에서 흩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의미 모를 눈빛이 온기현을 향해 쏟아졌다.

온기현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요동치는 감정 탓에 속이 뒤집히는 감각이 들이닥쳤다. 그때.

“나는.”

“……?”

류주호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잠깐 뜸을 들인 그가 속삭이듯 말을 뱉었다.

“절대 널 그렇게 본 적 없어. 나는…….”

“…….”

“나는 너 좋아해.”

“……하.”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그래, 그랬었다. 좋아한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그건 제가 생각하는, 제가 꿈꾸던 사랑과는 엄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웃기지 마. 너 그거 아니야.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좋아해.”

“하지 마. 듣기 싫어.”

“기현아.”

“……가까이 오지 마.”

“온기현.”

좋아해.

고장 난 기계처럼 온기현의 이름과 의미 없는 낱말의 조합을 읊는 말에 온기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아니야!!”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그리고 마저 말을 토해 냈다.

“너 그건 욕정이라고!”

곧바로 마른 목구멍이 턱 막혔다.

“그냥 그거, 너 그거 성욕이야.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쩌다 보니 나랑 몸의 상성이 잘 맞을 뿐이고. 그리고…… 읏……. 나랑, 나랑 자고 싶은 것뿐이라고.”

“…….”

“나도, 나도 마찬가지였거든? 그냥……, 몸이……. 나 너 이제 안 좋아해. 그리고 사실 그, 그렇게……. 그렇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야. 잊었어? 나 금사빠야. 어차피 금세 마음 바뀔 거였어. 우연히 몇십 번째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너였을 뿐이야. 이, 이제 안 좋아해.”

좋아하는 거, 이제 안 해.

아래로 무너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나무에 기대어 지탱했다. 입이 터진 대로 말은 술술 흘러나왔다.

“나 원래 마음 헤퍼. 너도 알잖아, 나 헤픈 거. 여기저기 마음 주고 다니는 거 나 그런 거 원래 잘해.”

이제 그만둘 거야.

지독하고 지겨운 내 첫사랑.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 사랑인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홀로 삭였을 것이다. 애초에 한 발을 내디딜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음을 키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너무 늦지 않은 거야. 여기서 그만할 수 있어.

입 밖으로 뱉고 나니 어쩐지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평생, 류주호를 안 보고 살라고 하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썩이는 가슴을 내리눌러 가라앉히고는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시선이 온기현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그 울렁거림이 제 것이 아닌 양 행동했다. 성마르게 표정이 사라진 시선을 류주호에게 보냈다.

겨우 시선을 보내 준 온기현을 보는 류주호의 눈동자가 언뜻 일렁였다.

“……다음 사람을 찾겠다고?”

“어. 내가 왜 못 해? 나도.”

“아니. 안 돼.”

“뭐라고?”

하.

단호한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실소를 터트렸다.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온기현이 씩씩거렸다.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제가 저지른 짓은 생각지 않는 그가 죽도록 미웠다.

“……그건, 달라.”

“하. 뭐가 다른데?”

“말했잖아, 이건.”

“같아!”

온기현이 버럭 내지른 소리가 칼칼한 목에서 토해지듯 왈칵 터졌다.

“……같아. 아니, 네가 더 악질이야. 넌 나를 완전히 기만한 거라고.”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런 사이도 아니었잖아, 우리. 네가 네 좆대로 네 상대 찾아서 간 것처럼. 나도 나대로 내,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다정하고 상냥하고, 나만 바라보는 사람 찾아서 갈 거야.”

“안 돼.”

류주호가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한없이 낮아져 있었다.

“……절대로, 안 돼.”

하지만 계속해서 안 된다고만 하는 그가 어이없었다. 낮게 읊조린 류주호가 말을 이었다.

“뭐가 안 돼. 나는 왜 그러면 안 되는데? 진짜 너.”

“나랑 했던 것처럼. 다른 놈하고 몸 맞추고……, 키스하고, 웃어 준다고? 절대로 용납 못 해. 그런 지옥 같은 일은, 오늘 겪었던 일로도 충분해.”

“뭐?”

“……난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졌어. 그냥 전부 죽여 버리고, 그렇게 우리 둘이 같이 나락으로 떨어질까 생각까지 했어. 악몽보다 훨씬 끔찍한 현실에서 내가 얼마나…….”

“오늘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류주호가 뇌까리는 뜻 모를 소리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다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너, 왜 내 핸드폰을 갖고 있었던 거야……?”

“…….”

“너, 설마.”

아니, 아니다. 설마. 그런 짓까지 할 리가 없었다.

제 핸드폰의 위치 추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포털 계정과 연동되어 있는 자신의 고물 노트북에서나 추적이 가능했다. 그리고 노트북은 자신의 원룸에 있었다. 그것을 원룸에 그대로 놓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아니. 아니야. 됐어. 너랑 그만 말할래. 이제 연락도 하지 마. 전화도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기현아.”

“내 이름도 부르지 마.”

제발.

온기현이 진저리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기현이 손등으로 제 눈을 덮었다. 열이 오른 눈가가 탈 듯이 뜨거웠다. 뜨거움에, 눈물이 치솟아 올랐지만 입 안 살을 깨물며 참았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나도…….”

나도 받고 싶어. 받고 싶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그 마음. 이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나. 진짜로 자신이, 얼토당토않은 꿈을 꾼 것인가.

나를 바라봐 줬으면 하는 욕심이, 나만 바라봐 줬으면 하는 바람이 이렇게까지 아플 일인가.

고개를 들었다. 류주호가 자신을 홉뜬 눈으로 보고 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렸지만 무시했다. 이딴 감정, 필요 없다, 이제.

저만 속절없이 흔들리는 사랑은 싫었다.

그런 거 싫다, 이제.

“너랑 이 이상 얼굴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건.”

“부탁이야.”

붉어지는 눈을 들어 류주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류주호의 눈이 점점 커다랗게 뜨였다. 진심이 담긴, 직선으로 꽂히는 시선을 마주하며, 류주호의 낯빛이 점차 딱딱하게 질려 갔다. 류주호가 온기현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무언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찾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온기현을 훑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차 낮아지는 온기현의 온도만이 외려 선명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영겁과 같게도 느껴지던 눈 맞춤은 단 몇 초도 되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온기현이었다.

“오늘 이후로 나 찾거나, 연락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다시는 보지 말자.”

“…….”

이제 너 필요 없어.

온기현은 무거운 다리를 겨우 이끌어 가만히 서 있는 류주호를 놔두고 걸음을 옮겼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구둣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니, 뒤따라오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제 정말로, 끝이야.

온기현의 뒷모습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새까맣고 여기저기 삐죽 솟은 머리를 마구 흩날리며 앞으로 걸어가는 온기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땅바닥에 발이 붙은 것처럼 핏발이 일 정도로 눈을 치켜뜬 채 온기현이 떠나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류주호가 돌연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칼로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격통이 찾아왔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곧, 검은 점이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깨닫고 헉, 하는 밭은 숨을 턱 내쉬며 까끌한 목구멍을 열어 “기현아.”라고 중얼거렸다.

“기, 현아. 기현아…….”

어디로, 어디 간 거지. 기현아.

무지근하게 바닥에 들러붙은 발을 겨우 떼 내었다. 한번 떼어 내자 딴딴하게 굳은 허벅지가 힘을 받아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공원을 빠져나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이마에 땀이 배어 나왔다. 온기현의 이름을 쉴 새 없이 입 안에서 중얼거리며 그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저기를 미친놈처럼 뛰어다녔다. 쉬지 않고 내달렸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 삐걱거리며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제가 딛고 선 지각을 거침없이 흔들어 댈 정도의 충격이었다. 고백은 받았었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이미 진즉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런데. 너무 아팠다.

이제껏 달콤하게 음미해 오기만 한 그 언어가, 심장을 찢어발겼다. 눈알을 뽑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그가 토해 내듯 내뱉은 그 말에 이제는 체념의 그림자가 짙었기 때문이다.

꿈속의 낭떠러지가 완전히 자신을 집어삼켰다. 산 채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버림받았다는 인식이 선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허억, 헉…….”

온기현의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간다는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웃어 주고, 안기고, 그리고…….

“안 돼. 절대, 안…….”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으로는 끊임없이 온기현의 흔적을 찾으며 미친 사람처럼 새벽의 어둑한 길거리를 방랑했다.

온기현이 없으면 안 되었다. 평생 오래도록, 그 웃음을 저 혼자 봐야만 했다.

나만, 나 혼자만, 나만이 너를…….

“너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순간, 눈동자를 숨겨 버린 온기현의 언어가 숨통을 틀어쥔 것처럼 빠듯하게 옥죄었다.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눈이 크게 뜨였다. 힘겹게 옮기던 발이 느리게 멈췄다.

아.

아, 아…….

아니었다. 자신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온기현을 제 옆에 묶어 두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필요에 의한 선택도, 계약도, 그 무엇도 관계없었다. 온기현은……. 그 무엇과도 관계없었다.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는 자신은 틀렸다. 완전히 거꾸로 생각했었다. 온기현을 저한테 묶어 두는 게 아니라 자신을 온기현한테 묶어 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온기현만은 잃을 수 없었다.

절대로 잃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절대로 놓을 수 없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다.

“윽…….”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격통도, 작금의 회한에서 비롯된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자신의 평생을 그에게 쥐여 주어야 했다. 자신이 그를 틀어쥐는 게 아니라, 온기현이 자신을 잡아 주고 안아 주는 것을 바라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온기현은 거부했다. 진절머리를 치며 류주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55번째일 수도, 56번째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 자신은 지나가는 수십 명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류주호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엄청난 절망감이 그를 덮쳤다. 이 온몸이 찢길 듯한 절망감은 사업을 포기할 때 느꼈던 실패의 쓴맛과 비교할 바가 안 되었다.

몰랐을 때는 자신을 덮치던, 가슴이 간질간질하면서도 끝없는 욕심을 부르는 기이하고 생경한 그 감각이 그저 얼떨떨하고 조금 껄끄럽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생토록 그 기이한 감각 속에 있고 싶었다.

온기현이 보고 싶었다.

사로잡았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지금에야 알 수 있었다. 목줄에 칭칭 감겨 애정을 갈구하며 개처럼 헐떡이는 것은 자신이었다.

류주호는 통렬하게 시인했다.

정작 망아지에게 목줄이 잡힌 것은 자신이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만, 네가 나를 다시 돌아봐 줄까. 뇌가 녹슨 것처럼 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해야 했다. 다시 온기현을 바라볼 방법을, 온기현이 자신을 바라봐 줄 방법을.

발밑이 움푹 팬 진흙탕 속으로 점점 몸이 가라앉는 것 같은 무력감이 전신을 덮쳤다.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버석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

여지없이 거부당한 몸과 마음이 길가에 던져져 짓밟히는 처절한 심정으로 새벽을 보냈다.

동이 트기 전, 하루 중 가장 짙은 어둠을 뜬눈으로 맞이했다.

푸르스름하게 떠오르는 여명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제야 깨달았다.

류주호는 지금, 지독한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 * *

온기현은 그길로 자신의 빌라 건물로 내달렸다. 정신없이 택시를 잡고 그대로 집 주소를 말했다. 새벽의 빈 도로를 택시가 질주했다. 금세 다다른 원룸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대로 계단을 텅텅 발소리를 울리며 올라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하.’

입에서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빌라 원룸의 도어 록이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것도 터치형으로 된, 비닐도 벗기지 않은 신식이었다.

비밀번호를 이것저것 찍어 보았지만 전부 틀린 번호였다.

“윽.”

개자식.

그 누군가를 향해 입에서 욕지거리를 쏟아 냈다. 입매가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진저리 치듯 머리를 가로로 잘게 흔들었다.

“하아…….”

설마설마했는데.

류주호, 그놈이 제집에 들어왔던 것이 틀림없다. 현관 자물쇠를 뜯고 안으로 들어가, 제 노트북을 열어, 자동 로그인되어 있던 포털 계정으로 접속해 핸드폰 위치를 추적했던 것이 틀림없다.

노트북은 그 앞에서 몇 번이나 잠금 해제를 한 적이 있었다. 보안 번호는 어깨 너머로 이미 보고 기억했을지도 모른다.

의심이, 아니 예상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제가 목도하고 있는 최신 디지털 도어 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류주호가 핸드폰을 주웠다는 것인데,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았다.

어느 시점에서 온기현의 핸드폰을 손에 넣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친 새끼.’

온기현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빌라촌을 벗어났다.

밤을 꼴딱 지새운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다시금 익숙한 길을 짚어 나갔다. 한참을 걷다가, 다시 택시를 잡았다.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그 방법밖에 없었다.

연채우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온기현의 핸드폰에 연채우의 이름이 떴다. 걱정했던 탓이리라. 이제 막 도착했다고 말하려던 때에 빌라가 보였다. 그리고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빌라 앞에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한 사람은 익숙한 이였다. 연채우였다. 그리고 그 옆에 선 커다란 형체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응.”

전화를 받은 온기현이 “나 여깄어.” 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연채우가 놀라서 통화를 종료하지도 않고 온기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더욱 놀란 것은 온기현 쪽이었다. 깊게 모자를 눌러쓴 커다란 체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감후석이었다.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피곤한 머리와 정신 때문에 그저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감후석은 입에 호선을 걸치고 고개를 꾸벅하고 인사하더니, 연채우를 향해 “갈게.”라고 인사말을 건네고는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이곳을 벗어났다.

연채우는 온기현이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하며, 볼을 긁적였다.

연채우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나 집에 좀 가 있을게.”

“어? 뭐? 갑자기?”

온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채우가 사는 원룸으로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왜 그러냐고 묻는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온기현이 말하는 집이란, 제 부모님이 사는 본가였다. 지방이긴 해도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지역이었다.

“어차피 휴학해서 학교도 갈 필요 없고. 계속 너네 집에서 신세 지기도 미안하고. 집에 가 본 지도 오래됐잖아.”

“언제까지?”

“…….”

연채우의 물음에 온기현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자꾸만 이것저것 물어오는 연채우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며 짐을 쌌다. 연채우는 고향 친구였지만, 오래전에 가족과 인연을 끊고 서울로 올라온 연채우는 제가 자란 그곳으로 발걸음한 지 꽤 오래됐다. 아마 이후로도 발을 들일 생각은 없을 것이다.

“……그래. 가서 네 부모님께 안부 좀 전해 드려.”

“응.”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채우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방학에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사코 이 차갑고 낯선 타지에 머물렀던 제 친구가 고향의 품으로 간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시간을 보니 이제 슬슬 고속버스 첫차가 뜰 시각이었다. 연채우의 집에 왔을 때보다 더욱 단출해진 짐을 꾸려 백팩을 어깨에 둘러멨다.

“간다.”

온기현은 그 말을 끝으로 서울을 벗어났다.

* * *

온기현의 부모님은 지방에서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지방의 한적한 고향에서 중학교 때까지 철물점을 하다가 온기현이 고등학교를 올라가는 시점에, 서울에서 사업을 크게 벌여 보자는 아버지 친구의 권유에 따라 가족 모두 상경했다. 한창 DIY다 뭐다, 재료만 사서 집을 꾸미거나 하는 게 유행할 때였다.

그때가, 온기현이 류주호를 처음 만난 입학식이 있기 바로 전이었다.

부모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온기현은 바쁜 부모님 대신 장을 보는 것도, 교복을 사 입는 것도, 입학식에 참석하는 것도 모두 홀로 해야 했다.

혼자 할 수 있는 음식 중에, 제일 잘하는 음식은 달걀말이였다.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해야 얼른 키도 크고 몸도 커져서, 부러 품을 크게 맞췄던 교복이 딱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혼자인 것에 불평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저 학교에 가는 것이 즐거웠고, 집에서도 다음 날 학교에서 눈부신 사람을 보는 게 기대가 되어 밤까지 늦어지는 부모님을 기다리다 홀로 잠드는 것조차 외롭지 않았다.

하지만 온기현이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녹록지 않았던 낯선 땅에서의 사업은 전부 허탕을 치게 되었고, 도심의 빠르고 가혹한 시류에 치여 자리를 잡지 못한 부모님은 그대로 마음을 접고 다시금 고향으로 내려갔다.

온기현은 대학 등록금은 제가 다 벌 수 있다며 생전 처음으로 반항 아닌 반항을 했다. 그렇게 서울에 남을 수 있었다. 그래도 연채우가 서울에 머무르고 있던 것이 내심 안도했던 구석이긴 하지만.

버스의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제 숨결을 따라 뿌옇게 흐려지는 유리창을 올 굵은 스웨터 소매로 벅벅 문질렀다.

몇 년 전,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던 부모님이 이런 심경이었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뻑뻑한 눈을 손으로 비비며 빠르게 내달리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금세 잠들었다.

* * *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부모님은 놀라기는 했지만 제 자식을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엄마, 미안해요. 나 잠깐만 있다 갈게.”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네가 네 집에 왔는데. 그게 왜 미안해.”

온기현은 괜히 멋쩍어서 입술을 내밀고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 말랐냐며 등을 두들기는 엄마에게 다이어트 중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요새 대학생 중에 다이어트 안 하는 애 없어, 라는 대꾸를 덧붙였다. 휴학했다는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해야지, 하고 생각한 기현은 단출한 짐을 낡은 제 방에 내려놓았다.

이곳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장사를 준비하는 부모님도 그렇고, 비좁고 곰팡내 나는 이 방도 그랬다. 제 몸 하나, 그리고 낮은 책상 하나 들어서면 꽉 차는 공간이었지만 서울에 있는 원룸보다 따듯하고 아늑하게 느껴졌다.

바닥에 누워 얼룩덜룩한 천장을 올려 봤다. 지난 몇 달간의 일이 꿈같았다.

그런데 온기현을 미치게 만드는 건, 그게 비단 지독한 악몽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달콤했던 순간까지 모조리 꿈같이 느껴졌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저를 따라 쫓아오는 끈덕진 시선이 아직까지도 제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했다.

‘온기현. 정신 차려. 그냥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치자.’

‘아니야. 미친개가 아무리 미쳤어도 개는 사람보다 작고 귀엽잖아. 이건 개를 모욕하는 짓이야.’

‘그 자식은 몸도 커다래서. 몸 여기저기도 커다랗고. 눈도 예쁘고. 손도 따듯하고, 또…….’

아, 미친.

혼자 이랬다저랬다 짜증을 내며 홱 돌아누워 번데기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제는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전부 색이 바래지길 간절히 소망했다. 앞으로 절대로 보는 일이 없어지기를. 아니, 이제 류주호를 봐도 가슴 떨리는 설렘을 느끼지 않기를.

지금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온기가, 오래된 추억 속 낡은 사진처럼 느껴지길.

그렇게 바랐다.

* * *

하루, 이틀, 사흘…….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꿈적도 하지 않던 온기현은 슬금슬금 부모님의 눈치를 보다가 철물점 일을 돕기 시작했다. 부모님 또한 슬금슬금 온기현을 곁눈질하며, 쟤가 대체 언제까지, 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게 1주일이 지나고 2주일이 되자, 눈칫밥을 먹는 데 한계까지 내몰린 온기현은 부모님에게 휴학 얘기를 꺼냈고 부모님은 아무런 말 없이 밥을 먹는 중에 수저를 내려놓고는 고생했다고 한마디 해 주었다.

그동안 생활비나 등록금을 보태 준다고 해도 집안 사정을 생각해서 한사코 거절하던 온기현이었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고생했다는 말이 괜히 목을 막히게 해서 가슴을 툭툭 두들기며 보리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어차피 류주호는 졸업할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학기였다.

그럼, 류주호가 졸업을 해 버리면, 이제는 아예 평생 얼굴을 안 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더는 없을 것이다.

그래. 그 새끼가 누구랑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하든지, 말든……. 누구랑 알콩달콩 지지고 볶고 살든지 말든지. 제 알 바가 아니었다.

‘응응. 맞아. 내가 알 바야?’

온기현은 볼이 미어터지도록 하얀 쌀밥을 욱여넣었다. 그동안 괜히 끼니를 거르거나 먹어도 대충 먹다시피 해서 쪼그라든 위장 탓에 입 안 가득 찬 식사가 목구멍 뒤로 잘 넘어가지 않았지만 억지로, 억지로 씹어 삼켰다.

일단 원룸은 계약을 유지한 채 남겨 두었다.

두어 달만 있으면 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다. 그 전에 미리 올라가서 새로운 아르바이트도 찾아야 하고, 수강 신청도 해야 하고, 할 게 많았다.

그리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한 달 동안 철물점 일을 돕고 간만에 가족들과 외식도 했다. 사업의 실패를 딛고 겨우 일어선 부모님을 보며 얼른 기운을 차리려고 했다.

고작 사랑이었다. 온기현은 지독한 열병을 앓은 아이처럼, 한때의 감정에 조금 지치고 힘들었을 뿐이다. 많이 먹고 많이 자고,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 그저 열병 같은 사랑이었다.

유독, 지나치게 길었던.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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