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Lost Winner (4)
파출소에서의 조사는 금방 끝났다.
류주호는 말을 아끼며 필요한 말만 했다.
“네. 제가 때렸습니다.”
순순히 시인하는 류주호의 모습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에 빡빡머리는 온몸이 아프다고 난리를 쳤다. 피범벅이 된 얼굴은 점점 퉁퉁 부어올라서 발음이 점점 샜다.
영흘도에 있는 파출소의 경찰들은, 최근 들어 심해진 취객들 간의 싸움으로 인해 이런 폭행 혹은 상해에 대한 조사가 익숙한 듯 보였다.
상황은 일방적인 류주호의 과실이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제가 먼저 시비가 걸렸다고 류주호를 변호해 나섰다. 경찰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구타를 당한 남자들은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고소를 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류주호가 제시한 합의금에 금세 입을 닫았다.
소리치는 꼬락서니를 보니 멀쩡해 보인다며, 피곤한 낯을 한 경찰은 합의를 종용하며 손을 떼었다. 관광객이 흘러넘치게 된 이 작은 섬에서는 이제 이런 사건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신고자인 편의점 할아버지도 파출소에 동행했는데, 불량배들이 온기현에게 해코지하는 줄 알고서는 신고를 했다고 했다. 류주호는 할아버지에게도 사례를 해 드렸다.
류주호는 기현의 핸드폰을 빌려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놈들의 핸드폰에 입금 알림 문자가 도착했다. 누구와 통화를 했는지, 또 얼마를 쥐여 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놈들은 생각지도 못한 공돈을 얻어서 기분 좋은 표정을 숨기듯 떨떠름한 얼굴로 구시렁대더니 그 길로 털레털레 파출소를 벗어나 버렸다.
탁.
모텔방 문이 낡은 경칩 소리를 내며 등 뒤로 닫혔다.
“…….”
류주호는 우뚝 선 채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온기현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말을 골랐다. 너 어떻게 된 거냐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냐고, ……그리고 괜찮은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류주호가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온기현을 온몸으로 와락 껴안았다. 둘의 몸이 빈 곳 없이 완전히 겹쳐졌다.
“어…….”
“……걱정했어.”
“…….”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를 꽉 끌어안은 류주호의 팔이, 아까 그가 성난 흉포함을 그대로 드러낸 때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힘줄이 불거진 새빨간 손등이 온기현의 마른 어깨 위를 감쌌다.
“나도, 걱정했어……. 일어났는데 네가 없길래. 잠, 잠이 안 와서 바람 쐬러 갔다 온 거야? 핸드폰이라도 갖고 가지 그랬어. ……전화했는데.”
“……몰랐어.”
그러고 보니 핸드폰은 아직도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방에, 돌아왔는데……. 네가 없었어. ……없어서. 그래서…….”
“아…….”
저가 없는 것을 알고 찾으러 나온 것일까. 핸드폰도 챙기지 않고.
온기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류주호의 음성은 얇은 유리처럼 떨리고 있었다. 다소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만큼.
류주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는 동안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그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순간 움찔하고 굳은 커다란 손을 온기현이 꽉 틀어쥐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때리면 어떡해. 왜 그런 거야, 너…….”
“…….”
쿵. 쿵.
말없이 맞닿은 류주호의 가슴이 커다랗게 맥동했다. 북처럼 둥둥 울리는 그것이, 점점 느려질 때까지 온기현은 류주호의 손을 꽉 잡았다.
불규칙하게 엇박자로 마구 울려 대던 두 사람의 맥동이 점차 같은 리듬을 찾아갈 때까지. 계속.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야.”
“……응.”
나직하게 귓가에 읊는 말에 조용하게 대답해 주었다. 목덜미에 닿는 숨이 뜨거웠다.
오늘은, 기대했던 날과 무척 달랐다.
간질거리는 하루를 보낸 후에, 제 기대를 확인하는 게 목적이었다. 류주호의 마음을. 하지만 어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안 좋은 일만 잔뜩 벌어졌다.
거기다 둔통이 몸 여기저기를 찔러 댔다. 류주호. 너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라고 면박이라도 주고 싶은데, 어쩐지 그럴 수가 없다.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데이트. 낯선 류주호의 모습.
죄다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만 날이 아니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그래. 천천히. 천천히 생각하자.
* * *
이른 아침, 동이 채 트기도 전에 영흘도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차 안의 공기는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쩐지 날카로운 공기를 의식한 온기현이 슬금슬금 류주호의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손에 피를 묻힌 채로 온기현을 끌어안고 자꾸만 입술을 맞대 오려는 류주호를 간신히 달래어 피 묻은 손을 깨끗이 씻겼다. 하지만 옷에까지 묻은 핏자국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상태로 류주호는 한시도 온기현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침착하게 갈무리한 건지, 아니면 애써 숨기고 있는 건지 온기현은 알 길이 없었다.
류주호는 축제 때도 그렇게 말했었다. 폭력은 싫다고. 그것만큼 꼴사나운 것은 없다고 읊조리던 모습이 기억난다.
하지만 정작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른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을까. 그런데 온기현은 그놈들은 그래도 싸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흘도에 고양이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게 된 시점이 있다고 했다.
온기현에게 치근덕거렸던 그놈들은 영흘도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놈들로, 그놈들이 올 때마다 이상하게 길고양이들이 몇 마리씩 죽어 나갔다고 했다.
길거리의 고양이들을 위해 길가 곳곳에 놔둔 사료 그릇들에 누군가 쥐약을 섞어 넣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었다.
파출소를 나오면서 편의점 주인 할아버지의 분기에 찬 속앓이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저딴 놈들에게 합의금을 왜 주냐며, 돈을 쥐여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죽일 놈들이라고 어찌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지.
류주호는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연거푸 관자놀이를 손으로 강하게 누르며 제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듯했다. 물기만 대충 적셔 서로 얼굴을 닦고서는 또다시 얼굴 여기저기에 정신없이 입술을 내리누르는 류주호의 팔을 이끌고서 모텔 밖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
온기현이 손을 꼼지락거렸다. 자신의 것은 기어 위에 아무런 의지 없이 올려진 채였고, 기어를 움직이는 것은 류주호의 손이었다.
제 손 위를 덮어 누르는 류주호의 손이 기어를 바꿀 때마다 기현의 손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자세였지만, 온기현은 어쩐지 조금 간질간질하고 어색해서 손을 자꾸만 빼고 싶었다.
강하게 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류주호가 혹여나 졸음 운전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고, 또…….
“……손에 땀 난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슬금슬금 기어에서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래? 아닌데. 땀 안 났어. 부드러워.”
류주호는 검지만 기현의 손바닥 아래로 스윽 끼워 넣더니 허리가 찌릿할 정도로 살살 쓰다듬으며,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가가 뜨끈해질 정도의 다정한 목소리로.
운전하는 내내, 그렇게 류주호는 절대로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가죽 재질의 기어와 류주호의 오른손 사이에 낀 왼손은 쥐가 나서 저릴 정도로 바짝 굳어 있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바다가 탁 트여 보이는 영흘 대교를 지날 때도, 차창 밖 풍경에는 그저 슬쩍 눈길만 주고 말았다.
“이틀 동안 너무 정신없었다. 그치.”
온기현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는 더 좋은 데로 가자. 너무 멀리 나가지도 말고, 가까운 데라도…….”
좀 더 확실한 사이가 되고 싶어서. 몸만이 아니라, 부풀어 가는 마음에 정의를 내리고 싶어서. 그렇게 향했던 작은 섬.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다. 누구 탓이라기보다는 그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잘못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들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아!
순간 저릿한 느낌에 어깨를 굳혔다. 마침 빨간불로 바뀐 신호등 앞에서, 류주호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엄지를 이용해 마른 손가락 사이를 비볐다. 여린 살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불시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그때.
우웅― 우웅―.
뒷좌석에서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온기현이 시선을 뒤로 던졌다. 아까부터, 운전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울리던 전화였다.
“안, ……받아도 돼?”
“응.”
하지만 류주호는 최초의 전화를 화면만 확인하고는, 그 뒤부터는 무시로 일관했다. 되레 신경 쓰이는 것은 온기현 쪽이었다.
대체 누구길래.
‘아까부터 계속 울리던데…….’
오른손으로 제 볼을 멋쩍게 긁적였다. 매듭의 끄트머리를 잡을 수 없는 실타래가 엉킨 느낌이다. 실의 첫머리를 잡으려 해도 자꾸만 어딘가에서 엇나가 있는 듯, 작금의 류주호를 종잡을 수가 없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음을 귀에 담고, 정말로 땀이 척척하게 배어나는 손을 빼지도, 또 마주 잡지도 못한 채 도로 위를 한참을 내달렸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빡빡하게 도로를 메운 IC를 지나 해가 지기 직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덩치만큼 넓은 길만 여유롭게 질주했을 것만 같은 커다란 SUV는, 이제 빌라 사이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는 요령을 깨우친 듯, 수월하게 바퀴를 굴렀다.
빌라 앞에 다다른 차가 멈췄다.
온기현은 속으로 어딘가 불편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리자. 나 좀 씻고 싶어.”
“어?”
온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류주호는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것처럼 온기현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말하며 안전띠를 풀고는 저도 따라서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우웅― 우웅―.
또다시 울리는 진동음이 그걸 방해했다. 아까부터 거의 엔진 소리와 맞먹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울리던 전화였다. 개중에는 짧은 진동음도 섞여 있었던 것을 보면, 문자도 여러 통 와 있는 듯했다.
“……씨발.”
류주호가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팔을 뒤로 젖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제 핸드폰을 손아귀에 쥐었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류주호의 눈썹이 움찔하고 위로 튀었다. 눈동자에 망설임이 스쳤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온기현은 내리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그런 류주호를 살폈다.
“전화 받아. 나 들어갈게. 조심해서 가.”
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전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길 수는 없었다. 류주호가 온기현의 팔목을 부드럽게 휘어잡았다.
“가지 마. 잠깐 전화만 받을게.”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음성이었다. 얼떨떨하게 쳐다보고만 있자, 류주호는 온기현이 대답할 때까지 손목 안쪽의 살을 연신 쓰다듬었다. 진동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온기현이 대답할 때까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류주호가 그제야 설핏 미간을 좁히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 저예요.”
나지막한 류주호의 음성 뒤로, 전화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류주호의 입에서는 “아니요.” “싫습니다.”와 같은 거부의 대꾸만 이따금 들려왔다.
팔목은 여전히 잡힌 채였다. 그러던 중, 전화를 건 쪽 사람의 말이 길어졌다. 듣고 있던 류주호가 피곤한 낯을 하며 팔에서 힘을 뺐다.
언제까지고 잡고 있을 것만 같던 팔이 스르륵 빠졌다. 저도 모르게 아직 잔열이 남아 있는 팔목에 손톱을 대고 슬슬 긁었다.
류주호는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 짚으며 눈가를 가렸다.
“알겠습니다. ……지금 가요.”
어딘가 짜증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끝났다.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여전히 확립되지 않은 관계성에 대한 아쉬움이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만들어 냈다. 아니, 그 보이지 않는 경계는 자신만 느끼는지도 몰랐다.
“갈 거야?”
“……응.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운전하느라 고생했어. 난, 들어가 볼게. 어……. 학교에서 봐.”
내일은 월요일이었다.
“…….”
온기현이 작별의 말을 고했음에도, 류주호는 지그시 기현을 바라본 채, 시동을 다시 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
온기현이 문득 단발성의 음성을 흘리며 류주호에게 마지막으로 일렀다.
“손 부었더라.”
오는 내내 힐끔거리고 신경 쓰였던, 제 손 위를 덮은 류주호의 오른손 마디뼈의 피부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맞은 쪽도 맞은 쪽이지만, 때린 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맞은 쪽에 대한 걱정은 전혀 들지 않는 것을 보면, 저도 참 저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
류주호가 제 오른손을 들어 빤히 살폈다. 주먹을 느릿하게 쥐었다 폈다 하면서. 손을 뒤집고 돌려 가며. 마치 생경한 감각을 떨치려는 듯 보였다.
“치료 꼭 해. 까먹지 말고 약 발라야 해. 알았지?”
“알겠어.”
그렇게 할게.
류주호는 그렇게 덧붙였다.
온기현은 손을 공중에서 팔랑하고 흔들었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엔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탁탁 발소리를 내며 빌라 계단을 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가 신발을 급하게 벗었다. 그리고 그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 벌렁 드러누웠다. 얼굴을 이불 위로 푹 파묻었다.
헉. 헉.
가슴이 심하게 들썩거린다. 조용하게 숨을 죽인 채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온 신경은 귀에 쏠려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숨이 가빠져 턱 막힐 무렵에서야, 밖에서 부르릉 소리가 났다. 그제야 새까만 차가 낡은 빌라촌을 벗어났다.
쫑긋거리는 귀가 점점 멀어지는 배기음을 빠짐없이 담았다. 뒤로 토해 내는 매캐한 연기가 너무나 길었다.
* * *
“자, 수업 시작합시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네요. 하하. 그리고 쪽지 시험은 별로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강단 앞에 선 교수가 시원하게 웃으며 악랄한 말을 내뱉었다. 강의실에 빼곡히 들어찬 학생들이 작게 에에이― 하는 장난스러운 야유를 퍼부었다.
온기현 또한 입술을 삐죽거렸다.
일전에 쪽지 시험 범위를 놓쳤던 온기현이다. 지난번, 류주호의 집에서 유유자적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때였다. “아, 맞다! 시험인데…….” 하고 머리를 싸매자 류주호가 무슨 강의냐고 물어봤다.
강의와 교수 이름을 말하니 류주호가 “그 교수는 매년 같은 범위에서 시험 문제를 내. 문제도 뻔하지, 항상.”이라고 말하며 나올 문제를 콕콕 짚어 줬다.
속으로 믿어도 되나, 싶었던 온기현이지만 결국에 쪽지 시험은 틀린 것 없이 다 맞았다. 류주호가 교수님에 빙의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골라서 나온 수준이었다.
입술을 비죽이던 온기현이 피식, 웃었다.
류주호의 불성실한 사생활만 봤을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어느 것에나 무심하고 심드렁하게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제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타고난 머리가 밑바탕에 있을 테지만, 그 선천적인 머리를 받쳐 주는 남모를 노력도 한몫할 터였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생 때도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하면서도 성적은 언제나 전교권에 머무르던 그였다. 그러면서 수업만은 성실하게 출석했었다.
난잡하고 방탕해 보이는 겉모습과 대비되는 그의 숨겨진 모습은, 그를 면밀히 관찰하거나 한 번이라도 가까이해 본 적이 있는 누구에게나 매력적으로 보였다. 저를 포함해서.
결국은 욕심 사나운 남자인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능글맞은 웃음으로 다가오는 악의를 흘려 넘기다가도 거침없이 제 할 말을 쏟아 내는 류주호는, 예쁜 꽃이 피어 있는 선인장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선명한 빛의 예쁜 꽃에 홀려 손을 내밀면 결국 찔리는 것은 언제나 이쪽이었다.
하지만.
영흘도에서의 류주호는 조금 달랐다. 결국 그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고 정작 곤죽이 된 것은 불량배들이었지만, 그는 제가 스스로 휘두른 날 것의 폭력성을 생소한 얼굴로 마주했다.
계속 울리던 전화와 그의 기이한 태도가 관계가 있는 것일까.
온기현이 더벅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옆에 앉은 안경 낀 남자가 작게 아이 씨, 하고 짜증을 내며 슬쩍 옆으로 의자를 끌며 떨어졌다.
그에 머리를 대충 다듬으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때였다. 핸드폰의 작은 불빛이 점멸했다. 책상 아래에서 몰래 핸드폰을 들었다.
류주호 [수업 중이야?] 15:42
어김없이 류주호였다. 사흘째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안 비치면서 메시지만 주야장천 보내왔다.
[왜?] 15:43
조금 심술이 나서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집 앞에서 헤어진 이후로 마치 감시하듯 온기현한테만 행방을 물었다. 제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서는. 물어보려면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항상 “어디야?” 혹은 “수업 중이야?” “집이야?”로 시작하는 물음표로 시작하는 메시지뿐이었다.
그러고 그때마다 “도서관이야!” “응! 수업 중!”이라고 대답을 했다. 하지만 온기현이 답장을 하면 그때는 또 뚝 메시지가 끊겼다. 마치 오래 핸드폰을 붙들고 있지 못하는 사람처럼.
하지만 결국 또 계속해서 질문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자, ‘도서관’은 ‘ㄷㅅㄱ’, 그리고 ‘ㄷ’으로 대답이 바뀌어 갔다.
‘수업’은 ‘ㅅㅇ’, ‘집’은 ‘ㅈ’, 이렇게 초성으로만 대답했다. 조금씩 심술이 돋았던 탓이다. 그래도 꼬박꼬박 답장은 했다. 알아들었으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답장을 하면 뭐 하나. 그러고 나서 답이 없는걸.
지금도 저번처럼 ‘ㅇ’만 보내려다가 말았다. 완전히 토라져 버린 마음 때문에 반문해 버렸다. 어차피 이번에도 답이 없겠지.
그리고 막 교재에 눈을 돌리며 핸드폰을 암전시키려 할 때. 작은 빛이 다시금 잘게 깜박거렸다.
류주호 [보고 싶어] 15:45
“쿨럭.”
에이 씨.
온기현의 기침 소리에 옆의 학생이 의자를 드르륵 조금 더 옆으로 끌어갔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심장이 귓가로 올라붙은 것처럼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잠시 멍하게 핸드폰을 바라본 온기현이 손가락을 재빨리 놀렸다.
[너 어디야, 지금?] 15:45
나도, 나도 보고 싶은데.
나도 보고 싶어.
양 볼에 홍조가 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저도 보고 싶다고 답장을 하려 했다. 너무 급하게 쓴 나머지 ‘나도ㅗㅂㅗ시펄’이라고 오타가 난 메시지를 전송하기 직전, 다행히 재빨리 지웠다.
하지만 몇 번이나 오타를 지웠다가 다시 쓰는 동안에도, 읽음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쪽 말풍선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
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디 간 건데, 류주호. 뭐 하고 있는 건데.
얼른 와.
“……보고 싶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리를 내었다. 한번 언어로 뱉어진 탓인지, 왠지 더 보고 싶어지는 것 같다.
귓가에는 교수의 지루한 강의 대신 쿵쾅거리는 가슴 박동이 채웠다.
강의가 끝날 때까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온기현은 강의가 끝나자마자 얼른 교재를 챙겨 부리나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헉. 헉.
백팩이 등 뒤에서 들썩이도록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간 온기현은 건물 밖에 나가서 핸드폰을 들었다. 밭은 숨을 몰아쉬며 류주호의 번호로 막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다.
전화가 걸려 왔다.
“어?”
화명에 뜬 발신자명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황성 한우집 사장님이었다. 왜 갑자기 전화하셨지?
“네, 여보세요.”
―어, 기현 학생. 잘 지내지? 오랜만이야. 지금 전화 가능해?
“안녕하셨어요. 잘 지내셨어요?”
―목소리 들으니까 뭐 신나는 일 있나 봐?
“네? 아…….”
상기된 목소리가 티가 났나 보다. 온기현이 멋쩍게 볼을 쓰다듬었다.
“벼, 별로요. 무슨 일이신데요?”
―혹시 단기 알바 해 볼 생각 없어?
“단기 알바요?”
온기현이 의아함에 되물었다.
―응. 하루만. 내 요식업 쪽으로 아는 형님이 파티 케이터링 서비스를 하시거든. 그런데 당장 내일 급한 행사에 일손이 한 명 부족하다고 하셔서. 딱 기현 학생이 떠오르지 뭐야.
허허, 하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깃집 사장님의 푸근한 말에 온기현이 소리 없이 빙긋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런 좋은 자리에 제가 생각이 났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일전에 일자리가 있으면 소개해 주겠다는 말이 헛말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응할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감사한 말에 거절할 말을 애써 골랐다.
“정말 감사해요. 감사하고 죄송한데, 저는…….”
당장 돈이 급하지도 않을뿐더러. 류주호도 만나야 하고…….
“아!”
―응? 뭐라고?
번쩍 눈을 뜨며 단발성의 소리를 질렀다. 전화 건너편에서 고깃집 사장이 “기현 학생, 잘 안 들려.” 하고 탁탁 두들기며 통화 신호음을 확인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 할게요!”
―할 거야?
“네네! 사장님, 혹시 일당은…… 얼마예요?”
그렇게 물어보는 온기현의 목소리가 완전히 들떴다. 입술 끝이 절로 말려 올라갔다.
―글쎄. 프라이빗 파티라고 소소한 행사라고는 했지만, 대충 들어 보니까 어쭙잖은 모임은 아닌 것 같고. 내 듣기로 20 정도는 준다는 것 같던데?
“헉.”
대박.
시급을 듣는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단 몇 시간에 20만 원이나 받을 수 있다면 값나가는 선물 하나를 사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꽃밭이 됐다. 지난번 망해 버린 데이트를 만회하기 위한 아이디어가 퐁퐁 샘솟았다.
“저 할게요! 사장님, 할게요!”
―오, 그래? 알겠어. 그럼, 간단한 이력서 한 장만 보내 봐. 보건증이랑. 알지? 내 추천이니까 형식적인 거라 생각하면 되고. 오케이?
“네. 감사합니다!”
―오냐.
끊긴 전화를 붙들고 팔을 앞뒤로 마구 흔들었다. 그러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큼큼 헛기침을 했다.
‘내일이라고 했지.’
류주호가 더 늦게 왔으면 좋겠다. 그래도 주말까지는 오면 좋겠는데.
백팩을 고쳐 메고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 * *
“안녕하세요.”
온기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온기현 씨, 맞으시죠?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아, 네.”
온기현이 다시금 어색하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저를 케이터링 업체의 매니저라고 소개한 남자는 기현에게 웃으며 “이력서 사진보다 훨씬 멀끔하신데요? 인기 많겠어요.”라며 살갑게 말을 덧붙였다.
하하, 하고 겸연쩍게 웃은 온기현이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심 안도했다.
프라이빗 파티라고 하길래, 혹시 몰라서 머리도 왁스로 깔끔하게 넘겨 정돈했다. 소개해 준 사장님의 면을 생각해서라도 평상시의 차림으로 오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좀 더 신경을 썼다.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시내가 좀 막혀서 늦을까 걱정했지만 딱 제시간에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옷은 류주호가 사 준 때깔 고운 것들을 걸친 상태였다.
쑥스러운 나머지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알려 준 주소대로 찾아오긴 했는데, TV에서나 보던 곳이었다. 아니, 이런 곳이 과연 TV에 노출이나 가능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특급 호텔이었다. 내부는 꽤나 차분한 분위기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내장재나 장식 하나하나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가 매니저를 따라 들어온 곳은, 카드 키를 찍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는 호텔의 최상층이었다.
여기가 대체 몇 평이야.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넓은 그곳은 층 전체가 하나의 집 같기도 했고, 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복도도 미로처럼 굽이져, 여기서 자칫 미아가 되기에 십상이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들었다.
“자. 옷은 저희가 준비해 드린 정장으로 갈아입으시고요. 서빙 알바 많이 해 보셨으면 하다가 아시겠지만, 그거랑 별반 다른 점은 없어요. 비어 있는 음식이 있으면 채워다 드리면 되고, 특히 와인 병은 깨 먹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 알죠?”
온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해야 할 일에 대한 몇몇을 숙지해야 했다. 자신 외에도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장기적으로 고용되었던 이들이기에 이런 기본적인 사항은 교육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매니저가 은밀한 음성으로 소리를 낮췄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대화들은 절대 비밀 엄수예요.”
“아…….”
“사실 다른 것보다 이게 제일 중요하죠. 저번에는 벤처 기업 CEO끼리의 만찬회가 있었는데, 알바생이 대표들끼리 얘기하던 비공개 상장 정보를 까발렸었어요. 하아, 정말 난리도 아니었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네에. 그 뒤에 피해를 본 회사의 젊은 대표가 그 알바생을 이런저런 죄까지 씌워서 고소해 버렸어요. 결국 그 알바생은 남은 인생 종 친 꼴이 됐죠. 졸지에 어마어마한 빚까지 지고.”
매니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정보 팔았을 때 언론에 제값이나 받았으려나 몰라요. 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긴 하지만. 나머진 기밀 사항이라.”
아연함에 입을 벌렸다. 괜히 겁주는지도 몰랐다. 어차피 말할 데도 없지 않은가.
“암튼, 그렇다고요. 이해했으면 여기 사인요.”
“아, 네.”
매니저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전자 펜슬을 들고 액정 위에 이름을 또박또박 써 내렸다.
“오늘 있을 행사는 소소한 약혼식 애프터 파티예요. 가까운 지인들끼리 편하게 즐기고 싶다는 호스트의 요청도 있었고요. 소란스럽지 않게. 그래서 크게 벌이지 않고 얌전하게 하는 편에 속하긴 해서,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거예요.”
“네.”
걱정할 만한 일이 뭔지 감도 오지 않았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때는 무조건 대답을 간결하게 하는 게 장땡이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온기현 씨.”
“네. 잘 부탁드립니다.”
온기현은 검은색 정장 일체와 보타이, 그리고 발 사이즈에 맞는 검은색 구두를 받아 들고서 옷을 갈아입었다. 다행히 몸에 딱 떨어지게 맞는 옷이었다. 이제껏 넉넉한 옷만 즐겨 입었던지라 몸에 달라붙는 착의감이 조금 어색했다.
“오오. 완전 잘 받네요, 옷.”
“아, 하하.”
보타이를 손으로 매만지며 걸어 나오자 매니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칭찬을 던졌다.
“핸드폰은 두고 오셨죠?”
“헉. 맞다.”
“에헤이.”
온기현이 당황하자 매니저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쯧, 차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요. 내가 보니까, 기현 씨가 일 치를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사장님 추천도 있었고. 무슨 일 나면 사장님이 책임지시겠죠, 뭐.”
“죄송합니다.”
“무음으로 해 두는 거 잊지 마시고, 되도록 핸드폰 절대로 보지 말고요. 손님들 앞에서는 특히.”
“네, 네.”
“그리고 잠깐만 핸드폰 좀.”
잽싸게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내밀었다.
매니저는 파일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손톱만 한 스티커를 두 개 떼어 내어 후면과 전면 카메라 렌즈에 붙였다.
“보안 스티커예요. 떼어 내면 여기 이 접착제 부분이 티가 나게 떨어져서, 다시 붙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일 끝나고 나가서 떼면 돼요. 핸드폰에는 자국 안 남으니까.”
“네.”
온기현이 신기하다는 듯 핸드폰을 앞뒤로 살폈다. 매니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매니저가 지시한 대로 라운지에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해산물, 육류, 애피타이저, 뭐든 이거랄 것 없이 전부 기현의 눈에는 처음 보는 생김새의 요리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걸 보며 신기해할 여력이 없었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정신없이 바빠졌다. 누군가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 뒤에서는 이만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새삼스럽게 몸이 고되었다. 생경한 환경이라서 그런 듯했다. 제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의 존재도 잊힐 지경이었다.
몇 시간만 버티면 되었다. 딱딱한 구두도 적응이 되니까 자연스럽게 발에 맞춰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강도의 이런 시급의 아르바이트라면 앞으로 계속 불러 달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괜히 사장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시급이 센 이유가 입막음 값도 있는 것처럼 들렸지만, 애초에 온기현에게는 아무런 의미 없는 약속이었다. 입을 닫고 자물쇠까지 걸어서 비밀번호를 까먹을 자신까지 만만했다.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날이 금세 어둑해졌다.
새로운 일자리로 긴장한 탓에 야경을 제대로 곁눈질할 여유도 없었다. 최상층의 호텔이라 그런지, 슬쩍 눈에 담은 야경만은 끝내줬다.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앞에 막힌 시야가 하나도 없었다.
대체 누가 오는 걸까. 이런 사치스러운 분위기와 풍경을 유유자적 향유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지만, 어차피 저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일 터였다.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말에, 잠시 멍해 있던 정신을 추스르고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그리고 때맞춰, 층에 하나밖에 없는 엘리베이터의 고요한 기계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띵, 하는 도착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온기현 씨, 이리로.”
“아, 네.”
“저기서 카나페 좀 더 가져다줘요. 종류 하나가 빠졌네요.”
온기현이 “알겠습니다”, 하고 성실히 대꾸했다. 그리고 넓디넓은 복도를 지나 파티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가서 다른 직원에게 커다란 플레이트를 건네받았다. 플레이팅도 예쁘게 되어 있어서 혹여라도 가져가는 길에 쏠리지는 않을까 조심하여 걸었다.
“하아, 피곤하다.”
“에이, 형. 벌써부터 피곤하면 어떡해? 결혼식은 어쩌려고.”
“노친네들 존나 말이 많아.”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저 끝에서부터 울렸다. 아무래도 파티의 주인공들이 도착한 듯했다. 발소리를 죽이며 살며시 걸어갔다.
그들은 이제야 편한 곳으로 들어왔다는 안심과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매끈한 재질의 정장 재킷을 아무렇게나 벗어서 소파 위로 던졌다.
지인들끼리의 소소한 파티라는 얘기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짜증과 피곤함도 잠시, 그들은 금세 편안한 낯으로 돌아와, 준비돼있는 와인 잔을 하나씩 손가락 사이에 걸치고는 저들끼리 무어라 말하며 웃어 댔다.
“어, 근데 다른 애들은?”
“아아. 곧 오겠지.”
“글쎄. 아까 보니까 아저씨한테 잡혀 있는 것 같던데?”
“며칠 동안 그 대거리를 하고서는 끝까지 피곤하게 구시네, 아저씨도.”
아마 다른 일행이 곧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누군가에게 발이 묶인 것 같았다. 온기현은 그들이 대화하는 얘기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카나페 접시를 비어 있는 공간에 살포시 얹어 놓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일은 끝나지 않았기에 매니저의 지시에 따라 분주히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러게. 그놈은 애초에 왜 사업을 손대서 말아먹어서는. 그래도 그 업계 요새 꽤 핫하던데. 내 동창 놈도 그쪽 분야 사업 뛰어들었다가 얼마 전에 시리즈 C 투자 유치 성공했잖냐. 크으. 아깝다, 아까워.”
“그 욕심 사나운 놈이 멍청하게 눈 뜨고 코 베일 줄이야. 뭐, 아저씨도 설마 생각 못 하셨겠지. 그러니까 그렇게 노발대발하신 거 아냐.”
“야야. 시끄러워. 그 새끼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 하는 것들이.”
“아, 혀엉ㅡ!”
아아. 그러니까, 이런 느낌인 거구나.
누가 사업을 일으켰고, 투자를 어디에서 받았고, 어느 업체랑 계약을 체결했고. 대략 이런 내용의 대화들이 이들 사이에서는 그저 가벼운 안줏거리처럼 술자리 위의 흥취와 함께 오고 가는 것이다.
“아, 맞다. 너 그거 알아? 유현이 놈, 아이돌 걔랑 깨진 거.”
“와, 진짜? 미친 새끼. 그럴 줄 알았다.”
그리고 금세 화제가 바뀐다.
언뜻 들으면 대수롭지 않은 시시껄렁한 불평 혹은 세상살이 같아도, 자세히 들어 보면 흥미로운 화젯거리가 이리저리 튀었다.
속으로 난 아무것도 모른다, 난 아무것도 못 들었다, 를 되뇌며 무상무념의 상태에 빠지려 애썼다.
술잔이 빠르게 사라졌다.
샴페인 한 병이 순식간에 동났다. 사전에 전달받은 값비싼 샴페인 병을 가지러 막 자리를 벗어나던 차였다.
“아, 저기요. 그냥 병째 가져와 줘요. 우리끼리 알아서 마실 테니까. 위스키도 있을 텐데, 얼음하고 같이요.”
“네.”
누군가 온기현을 향해 말을 던졌다. 알겠다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바로 등을 돌려 샴페인을 가지러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우웅―.
‘헉!’
재킷 주머니 안에서 저만 들리도록 작게 진동이 울렸다. 낭패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히 무음으로 바꿔 놓으라고 했는데 정신이 없다 보니 잊어먹은 것 같다. 그래도, 손님 앞에서 핸드폰이 울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누구 때문에 진동이 울렸는지, 알 것 같았다.
재빨리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님들은 쓰지 않는 작은 화장실이었다.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역시나.’
진작 연락해 둘걸. 아 씨.
온기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류주호 [지금 어디야?] 20:43
기현은 일절 고민하지 않았다.
[ㅈ] 20:43
바로 초성의 답문을 찍어 보내고는, 핸드폰을 재킷 안쪽에 쑤셔 넣었다. 무음으로 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차피, 읽고서 답장도 안 할 게 뻔했다.
집이라고 말해 뒀으니, 그런 줄 알겠지. 서프라이즈로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절대 함구였다.
화장실 밖을 빠져나와, 늘어서 있는 샴페인과 위스키를 챙기고 아이스 바스켓에 얼음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막 들고 가려던 때.
또다시 바깥에서 왁자한 소리가 이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일행이 더 내린 듯했다. 낭랑한 여자의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조심해서 걸음을 옮겼다. 보폭을 작게 해서 빨리 걸었다.
간간이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이들이 “드디어 풀려났나 보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하고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온기현이 고개를 숙인 채 제가 챙겨 온 것들을 소파가 둘러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놨다.
“아, 힘들어. 드레스는 왜 이렇게 불편한 거야? 얼른 벗고 싶다.”
“야야, 오늘의 주인공이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 여기, 네 예비 신랑이 다 듣는다.”
“아하하. 언니 성격 원래 이런 거 알면서 그래.”
마지막에 들린, 어쩐지 귀에 익숙한 높은 목소리에 온기현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깜짝 놀라서 숨을 헉 들이켜며 푹 숙였다. 그리고 등을 홱 돌려서 괜히 음식이 늘어선 기다란 테이블로 다가가 음식을 살피는 척했다.
그 여자였다. 양희인.
남자 친구를 데리고 고깃집에 왔었던, 류주호의 친구였다.
“어? 그러고 보니 그 새끼는 왜 안 와?”
“저기 오네. 악다구니에 한참 시달렸거든. 아저씨는 나이도 지긋하신데 소리치시는 거 보니까 100살까지도 지독하게 사시겠더라.”
“그래도 어느 정도 가족끼리 합의는 본 모양이던데?”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이에, 이 파티의 호스트라는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매니저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인사치레와 몇 가지의 요청 사항에 관한 내용일 터.
곧이어, 느릿한 구둣발 소리가 딱딱하게 복도를 울렸다. 그가 이 파티의 마지막 참석자인 듯했다.
“어, 왔어?”
묻는 소리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온기현은 등을 돌린 채로 열심히 일하는 척 제법 분주하게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약 서너 시간이었다. 케이터링 서비스를 완전히 마무리하는 시점은 내일 아침이라고 했지만, 서빙 업무 자체는 오늘 밤까지였다.
제발 그때까지 양희인에게 얼굴을 들키지 않았으면. 아니, 들키더라도 류주호에게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성격이 좋아 보이니 아마 들어줄 것이다.
20만 원으로 어떤 깜짝 선물을 준비할까, 생각하던 온기현의 머릿속 꽃밭에 먹구름이 슬금슬금 끼었다.
마치 프러포즈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싶던 두근거림을 죽이려 부단히 애썼다.
“근데 아까부터 계속 핸드폰만 보고 있어. 뭐 재밌는 거라도 있냐?”
털썩. 소파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톡? 누군데, 누군데?”
“아까는 약혼식 내내 무슨 동영상만 계속 보더니.”
“뭔 동영상?”
“……자연?”
아, 뭐야. 흥미진진하게 물어보던 주위 사람들에게서 김빠진 허탈한 소리가 터졌다.
“그래, 뭐……. 요새 좀 마음의 안정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긴 하더라.”
“웬 파도 소리가 들리길래 왜 보냐고 했더니, 이놈이 뭐라는 줄 알아?”
“뭐라는데?”
“욕구 불만.”
“……사업 말아먹은 충격이 컸나 보네. 어쩌냐.”
정작 화제의 주인은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저들끼리 툭툭 던지듯, 하지만 이면에는 말을 고르는 듯한 조심스러운 농담이 이어졌다.
온기현은 마치 TV 드라마를 보는 감상자처럼 귀를 쫑긋거리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때 매니저가 구석에서 온기현에게 슬쩍 손짓했다. 무슨 시킬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게 옆으로 몸을 돌린 상태로 종종걸음을 하며 매니저에게 다가갔다. 매니저가 온기현의 귓가 가까이에 얼굴을 내려 소리를 낮췄다.
“방금 호스트가…….”
“너네 좀 닥쳐 봐.”
어?
매니저의 작은 말소리를 뒤엎는, 무척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쿵 아래로 떨어졌다. 매니저가 무어라 계속 말을 잇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쭈뼛거리는 고개를 겨우 움직여, 뒤쪽으로 슬금슬금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온기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거대한 소파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남자. 무릎에 양 팔꿈치를 올린 채, 핸드폰 화면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슈트로 감싸인 남자는, 다름 아닌 류주호였다.
‘미친.’
뭐야, 진짜 뭐야? 쟤가 왜 여기에 있어?
그의 얼굴에 눈이 못 박힌 듯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놀라고 충격이 커서인지, 머리로는 그만 보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현 씨, 온기현 씨.”
“……아. 어? 아, 아니. 네?”
저를 부르는 속닥임에 온기현이 홱 고개를 바로 돌렸다. 매니저가 인상을 찌푸리며 저를 보고 서 있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아……. 아뇨, 아니에요.”
“저기 비어 있는 것 좀 치워 줘요. 일단 그것부터 하고…….”
말을 경청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귀는 자꾸 뒤쪽으로 쏠린다.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체 며칠 동안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 했더니, 이런 곳에서 마주쳤다.
당황스럽고, 또 황당하기까지 했다. 왜 류주호가 여기에. 지인 모임인가.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제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면.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지만, 반가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동시에, 들키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감도.
그러다가 문득 괘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류주호는 아까 저한테 어디냐고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던가. 저는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려 준 적 없으면서.
절로 눈이 세모꼴이 되며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괘씸한 놈.
“……내 말 중에 기분 나쁜 것 있어요?”
“네?”
그런 온기현의 표정을 본 매니저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 그에 온기현이 눈을 마주치며 당황한 얼굴로 “아뇨, 아니에요.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 죄송합니다.” 하고 말을 흐렸다.
시키는 대로 비어 있는 접시를 치우기 위해 창가 쪽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웬 한숨이야, 아까부터. 아저씨가 많이 갈구시디?”
“아저씨 성질에. 만약 당신이 류주호 이놈한테 투자했었다면, 하는 상상만 해도 이가 갈리시겠지. 제 자식이 사업 말아먹은 건 둘째 치고라도 말이야.”
“하하. 그러겠네.”
뒤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류주호를 두고 하는 이야기 같았는데, 도통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사업은 또 뭐고, 아저씨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귀가 뒤통수에 달린 것처럼 연신 온 감각이 뒤로 쏠렸다.
그러다 문득 제 손이 멈춰 있다는 걸 인식하고 바지런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머리도 다른 사람처럼 세팅하고, 옷도 몸에 밀착하는 정장을 입었으니 아마 뒤태만으로 저를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쿵쾅쿵쾅.
손끝까지 심장이 달린 것처럼 마구 울려 댔다. 놀라던 마음이 조금씩 기분 좋은 쪽으로 바뀌어 갔다.
뭔가 진짜로, 제대로 된 서프라이즈 같았다. 류주호의 곁에서 그가 모르게 그를 위해 제 모습을 숨기고 아르바이트를 하다니. 첩보 영화인 것도 같았고, 마치 드라마의 어느 한 장면 같기도 했다.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매니저가 멀리서 약간 미친놈 보듯이 인상을 쓰고 저를 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래도 지금 여기 있는 것을 류주호에게 들키는 것은 상당히 골치 아플 터였다. 차라리 안 보이는 데서 힘쓰는 일이라도 거들겠다고 말해야 하나, 하던 찰나였다.
“야야. 그만 좀 해. 얘가 어디 아저씨 성난 소리 귓등으로라도 들을 놈이니? 다른 것 때문인 것 같은데. 혹시 너 어디 아프냐?”
“아프면 머리밖에 더 있냐, 얘가.”
“자기소개야?”
“이 새끼가!”
어지간히 친근한 사이인가 보구나. 엿들을수록 어쩐지 조금 소외감을 느꼈다. 완전 제멋대로인 감정이었다.
왠지 저들이 자신보다 더 류주호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해서 그런가. 조금 부아가 치밀었다. 그리고 류주호가 아프다는 소리가 귀에 걸렸다. 설마 싶은 마음에 신경이 쓰였지만, 이내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비밀 유지 각서에 사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저들의 대화를 귀담아들은 티를 내고, 또 류주호까지 아는 척해 버린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터였다. 저뿐만이 아니라 저를 소개해 준 고깃집 사장님까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등을 보인 채로 자리를 뜨려던 때였다.
“그만들 좀 해, 너네.”
“이야아. 이제 네 남편 될 사람이라고 편드는 거야, 뭐야?”
“그러게. 양희인 너, 이놈 가루가 되게 까던 양희인 맞냐?”
“뭐야. 너네 벌써 날 잡았어? 하긴 그래서 아저씨가 곱게 놔준 거였구만.”
뒤에서 왁자하게 터지는 수다가 둔중하게 귀를 때렸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잘못 들은 건가? 잘못 들은 게 확실하다.
너무 뒤쪽의 대화에 신경을 쏟았던 듯하다. 아까부터 이리저리 튀는 대화에 누가 대화의 주인공이고, 누가 화자인지 헷갈릴 만도 하지 않은가.
그래, 다른 사람 얘기겠지.
류주호가? 양희인 저분이랑? 그건 좀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저들은 어디까지나 친구 사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양희인은 남자 친구도 있지 않은가. 그녀만을 바라보는 순한 양 같은 남자 친구가.
‘맞아. 이상해.’
귀에 들린 대화를 애써 다른 쪽으로 해석하며 온기현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자리를 떠야 했다. 떠야 하는데, 발이 묵직하게 바닥에 박힌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듣기를 원치 않는 소리들이 제각기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계속해서 귀에 박혀 들어왔다.
“그래. 그 조건이었어. 손해액을 메우려면, 아버지가 설계한 일을 좀 앞당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하. 역시나.”
“뭐, 그래도 언젠가는 맺어질 일 아니었어? 그래서 이렇게 죽을상인 거냐?”
“에이. 뭐 결혼한다고 제 버릇 개 주냐? 양희인 얘도 애인 있잖아.”
쿵, 쿵, 쿵, 쿵.
긴장감에 울려 대던 맥동이 제 가슴을 치고 귀를 치고 또다시 다리를 치고 머리를 쳤다.
도대체 뒤에서 저들끼리 뭐라고 떠들어 대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니, 혼란한 머리가 제멋대로 귀를 닫아 버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며 귓바퀴를 손으로 쓸었다. 차가운 손끝이 귀에 닿자마자 움찔, 하고 몸을 떨었다. 파닥거리던 심장이 옷을 찢고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는 제가 들은 것이 맞는다고 외치는데, 제 속 어딘가에서는 자꾸 아닐 가능성을 몇백 개씩 늘어놓고 있었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졌다. 눈에 모래알이 들어간 것처럼 뻑뻑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앞이 혼몽해졌다.
‘아냐.’
잠깐만. 침착하자.
귓바퀴를 쓸던 손을 관자놀이로 가져왔다. 그리고 볼을 부산스럽게 매만졌다. 흐리던 시야를 애써 다잡았다. 눈앞에 예쁘게 플레이팅 된 진귀한 음식들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제껏 먹어 본 적도, 눈에 담아 본 적도 없는 것들이.
손을 눈두덩이로 가져가 꾹 짓눌렀다.
침착하고. 일단, 지금 일을……. 일을 하러 왔으니까.
애초에 들은 적이 없는 얘기니까.
들었어도 못 들었어야 하는 거니까.
작금의 혼란에서 회피하려는 본능이 자꾸만 그렇게 사고를 뒤틀었다. 와중에도 온기현은 파들거리는 허벅지에 힘을 주어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바라봤다. 현란한 대리석 무늬 때문에 조금 어지러웠다.
“괜찮아요?”
“아…….”
고개를 들었다. 눈이 따끔거렸다. 매니저가 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시 몸, 안 좋아요?”
“……괘, 괜찮아요.”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는 걱정 반, 난처함 반이 섞여 있었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 그래요. 어딘지는 알죠?”
온기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머리를 차게 식힐 필요가 있었다. 제가 뭘 들은 건지, 차근차근 정리를…….
또다시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린 저들은 무언가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리 안에 류주호가 있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어떤 얼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온기현은 그저 눈을 바닥으로만 향한 채 화장실을 찾아 어지러운 걸음을 내디뎠다.
달칵.
눈앞에 보이는 문손잡이를 붙잡고 돌려 열었다. 세면대 아래의 자동 센서 등이 활짝 켜졌다.
“하아……. 하아…….”
세면대 위에 턱, 하고 양손을 올렸다. 손끝에서 퍼진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를 지나쳐, 갈기처럼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흩어졌다.
목구멍까지 받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질려 핏기를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 저를 마주했다. 3 대 7 가르마로 애써 정돈한 머리는 올올이 삐죽거리며 튀어나와 있었고, 꽉 졸라맨 보타이는 우스꽝스럽게 비뚤어진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쏴아―.
수전을 간신히 열자 물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잠시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바로 힘을 잃은 다리가 풀썩 꺼졌다. 세면대 위에 팔을 걸친 채 아래로 가라앉듯이 무릎으로 바닥을 지탱했다.
하.
“결혼한다고 제 버릇…….”
“이제 네 남편 될 사람이라고…….”
“벌써 날 잡았어?”
퍼즐처럼 조각난 말들이 뇌리에 둥둥 떠다녔다.
“……욱.”
순간, 토기가 치솟았다. 이해하지 못할 언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뇌가, 제 속에 있는 것이라면 뭐라도 저어하듯, 속을 뒤집어 놨다.
“헉……, 헉…….”
목울대가 꿀꺽, 하고 울렸다.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패닉에 빠진 정신을 애써 다잡으려 했다.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밭은 숨이 연신 뿜어져 나왔다.
그때.
철컥.
“어라?”
오른쪽 시야가 잠시 환해진다 싶더니, 누군가 의아한 소리를 내며 화장실 문을 열고서는 발을 막 내디디려 했다.
“누구세요? 아, 맞다. 아까 일하시던?”
“…….”
의아함이 가득 담긴 음성에 온기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 전 기현에게 위스키와 샴페인 병을 주문한 남자였다.
“이런…….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신 거 같은데.”
“아……. 아뇨, 아니에요.”
온기현이 고개를 숙인 채 입을 틀어막았던 손으로 입술 주변을 비비면서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렇담 다행이고요.”라며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당황함에 깜빡이던 눈으로 온기현이 고개를 들자, 남자가 그린 듯한 웃음을 입가에 걸친 채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
“그런데요. 장소, 착각하신 거 같은데.”
“……네?”
온기현이 느리게 되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가 금세 입꼬리를 갈무리하며 사람 좋아 보이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종업원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여기 아니거든요.”
“……아.”
그제야 제가 어딜 들어온 것인지 인식이 됐다. 이곳은 호스트와 초대받은 손님들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었다. 제가 아까 사용했던 화장실은, 좀 더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아주 구석진 곳에.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수치와 당황, 혼란과 생경함. 그 모든 게 뒤죽박죽 섞인 감정이었다. 흔히는 이걸, 모욕감이라고 부를 것이다.
“죄송합니다.”
온기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아니면 아예 바닥이 아래로 쑥 꺼져 내려, 이 장소에서, 이 높은 곳에서 얼른 사라지고 싶었다.
발이 땅에 달라붙는 느낌이 그리웠다. 지면이 발을 떠밀어, 쓰러지지 않게 온몸을 받쳐 주는 감촉이 이곳에는 없었다.
뻑뻑한 눈을 가늘게 뜨며 온기현이 남자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불시에 팔뚝이 덥석 잡혔다. 온기현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털어 냈다.
“아, 놀랐어요? 미안해요. 음. 얼굴이 좀 낯익어서.”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온기현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무례함과 예의 바름, 그 어딘가에 선 남자는 싱긋 웃음을 지었다.
“혹시, 애인 있어요?”
“……네?”
온기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아하하. 당황하셨나 봐.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가까이서 보니까 되게 매력적이라서요. 그런 사람만 보면 가만히 못 있는 게 제 나쁜 버릇이라.”
“…….”
온기현이 아무 말 없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저, 저는 그럼 이만.”
“무슨 일이야.”
덜컹.
뒤에서 내리꽂히는 나른한 음성에 온기현의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헉, 하고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음성의 주인은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류주호였다. 류주호가, 지금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어? 아니. 화장실 좀 가려고, 잠깐.”
남자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에 반해 기현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이 상태로 걸음을 앞으로 옮기면 된다. 그러면, 제가 기억하거나 제가 들었던 모든 것이 악몽으로 끝날 것이다.
확실하지도 않은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말은, 이 높은 곳에 묻어 버리고.
그리고…….
“…….”
하지만 몸은 반대로 움직였다. 몸을 빙글 돌렸다. 차가운 발끝이 삐걱거렸다.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목을 겨우 들어 류주호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류주호의 나른하게 풀린 눈이 조금씩 커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온기현을 마주 봤다.
“너……? 여긴.”
온기현이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동시에,
“……!!”
딱딱하게 얼어붙은 뺨에 뜨거운 체온이 닿아 왔다.
“뭐야……. 이거 꿈이야?”
류주호가 몽롱한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아무리 나흘 내내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 엄청난데.”
뜨거운 손이 볼을 살살 쓸어 대더니, 실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곧바로 굳어 있는 온기현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러고는 저항 없이 끌려간 온기현의 머리에 제 코를 파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켠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쉬는 사람처럼. 콧대가 뭉개지도록 입술을 내리누르고서는.
“정말 너야? 너 여기서 뭐 해. 어떻게 된 거야. 응?”
꿈꾸듯 나른한 저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온기현이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류주호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온 탓이었다. 그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류주호 너, 이 사람이랑 아는 사이야?”
하지만 뒤에 서 있던 남자의 말에 류주호의 눈에 순간 날카로운 빛이 서린다. 그리고 곧바로 온기현의 팔을 붙들었다. 기현은 하릴없이 이끌렸다. “엇.” 하고 당황한 음성을 내뱉는 남자의 말은 귓가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류주호는 성큼성큼 걸어간 끝에, 파티 룸 내부의 수많은 방 중 비어 있는 곳을 찾아 방문 하나를 열어젖히고는 등 뒤로 쾅 닫았다. 그리고 허리를 감싸며 온기현을 자신의 품에 오롯이 가둔다.
꽉 끌어안는 류주호의 행동을 멀거니 받아들이던 온기현이 뒷걸음질을 쳤다.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자, 허리 뒤쪽으로 돌려 감싼 팔이 스르륵 풀렸다. 류주호도 완전한 온기현의 모습을 훑어보고 싶은 듯 쉬이 떨어졌다.
“아까 집이라고 그랬는데, 분명…….”
그리고 묻는 듯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다시금 손이 온기현의 얼굴로 올라온다. 비단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런 류주호의 행동을 무감하게 받아 내던 온기현이 입을 열었다.
“너, ……해?”
“……뭐?”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 질문은 너무 작아, 거의 웅얼거리는 말과 비슷했다.
“아, 잠깐만. 잠깐…….”
온기현이 고개를 숙여 제 눈두덩이 위쪽과 눈썹 사이 움푹 파인 곳을 꽉 짓눌렀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목구멍이 무언가로 인해 꽉 막힌 듯 갑갑했다.
“아……. 내가,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그런데, 분명히 그렇게 들어서. 그래서…….”
낮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온기현을 보던 류주호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온기현에게로 손을 뻗어 왔다.
탁.
“만지지 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온기현이 류주호의 손을 날카롭게 쳐 냈다. 순간, 류주호의 낯이 싸늘해졌다.
“아까 그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 했어? 그 빌어먹을 새끼.”
류주호가 애먼 사람에게 분을 터트렸다.
“너, 너……. 나한테 설명해야 할 거 없어?”
“무슨?”
“나한테, 내가 알아야 할, 그런 거……. 없어?”
“무슨 소리야. 나 지금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잘 모르겠어.”
류주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온몸이 차게 식는 감각과 정수리 끝까지 불에 덴 쇠처럼 달아오르는 느낌이 동시에 일었다.
온기현은 이를 악물었다. 손끝까지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반드시 물어봐야 했다.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는 류주호의 셔츠 깃을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 상태로 류주호를 제 쪽으로 끌어 내렸다. 류주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온기현의 얼굴로 가까이 다가왔다. 서로의 체온이 조금 더 바투 붙기 직전, 경련하는 입술을 열고 드디어 말을 뱉었다.
“너, ……결혼해?”
“결혼?”
아니라고 해. 제발 아니라고 해.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잠시의 간격이 억겁의 시간 같았다.
사실은 이런 걸 물어보려던 게 아니었다.
내 애인 해 줘.
나랑 사랑하자.
너랑 사랑하고 싶어.
너랑 사랑할래.
너의 모든 사랑을 다 내가 갖고 싶어. 아무한테나 흩뿌리던 손길이나 관심, 그런 거 이제 다 나한테 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그럴 거야. 너한테만 줄 거야. 지금까지처럼.
날 좋아해?
드글드글 끓어오르는 말은 셀 수 없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단 한마디의 문장을 던지고 류주호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예전처럼. 류주호의 입에서 흘러나올 한마디가 온기현을 흔들었다.
입술을 말아 물고서는 류주호의 멱살을 쥔 손에 애써 힘을 줬다. 류주호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서는 눈썹 한쪽을 위로 잠시 치켜들었다. 그러고선.
“응. 해, 결혼.”
“……뭐?”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이놈이 뭐라고 대답을 한 건지,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가정만 했던 걸까. 갈 곳 잃은 눈이 공중에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연하게 벌어지는 입술 새로, 신음과 같은 외마디가 튀어나왔다.
“……왜.”
왜? 왜, 왜.
왜?
바보같이 그런 생각만 반복했다. 류주호는 태연하기 짝이 없는 투로 말을 이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어.”
“원래……부터라고?”
“그래. 오래전부터. 그리고 그렇게 결정되어 있던 사안은 내가, 진행하던 사업을 죽 쑨 바람에 그 시기가 좀 앞당겨졌을 뿐이야.”
“하.”
눈앞이 핑 돌았다. 어마어마한 탈력감이 전신을 뒤덮었다. 옷깃을 잡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류주호의 옷깃은 빳빳했다. 힘이 풀린 제 손이, 생각보다 세게 잡고 있지 않았음을 그제야 알았다.
망연하게 앞을 보던 온기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나는 뭔데.”
“너? 네가 뭘. 너는 너지.”
류주호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온기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랑 너는……. 무슨 사인데. 우린 무슨 관계인데.”
류주호는 단조롭게도 느껴지는 질문에 고개를 사선으로 잠시 까딱하더니, 말을 이었다.
“좋은 관계지. 너랑 나는.”
“좋, ……은 관계라고?”
온기현의 눈이 대번에 뾰족해졌다. 애써 세팅한 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져 있었다.
“네가 결혼을 하는데. 그리고 너랑 내가, 이제까지. ……그런 짓을 했는데. 너랑 내가 그냥, 그냥 좋은 관계라고? 무슨 개소리야?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어. 우린…… 우린 끝난 거잖아, 그냥.”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던 관계지만.
온기현이 뱉어 내는 말에 류주호의 눈빛이 점점 가늘어진다.
“아니.”
“뭐?”
헉, 헉, 하고 점차 가빠져 오는 숨이 고통스러워 주먹을 꽉 쥔 온기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가 너랑 왜 끝내. 너랑 절대 안 끝내.”
“……?”
“네가 나한테서 떨어져서 딴 새끼한테 가는 걸 보라고? 아니. 절대로 용납 못 해, 그딴 거.”
류주호가 상상만 해도 이가 갈린다는 듯 턱 근육을 부풀렸다. 마치 영흘도에서 포악했던 그 밤처럼.
눈가가 심하게 경련했다. 주먹 쥔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아릿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꽉 틀어막힌 제 숨보다는 덜 고통스러울 터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 한다며.”
“하아……. 그건 그냥, 형식적인 거야. 서류상의 장난질일 뿐이라고. 흔한 거래랑 비슷한 거야.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마치 외계어를 귀에 꽂아 넣는 느낌이었다. 눈을 질끈 감은 온기현이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애써 올렸다. 온기현이 잇새로 음절 하나하나를 짓씹듯 내뱉었다.
“결혼한 새끼랑, 계속 만나면서 그 짓을 하라고? 나보고? 지금 제정신이야?”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요새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너 한정이야. 너한테만은 유독 정신을 못 차리겠어. 너랑 있으면 내가……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지만 네 일 외에는 전부, 내 의식 안의 일이야. 엄연히 네 일과는 달라. 결혼은 오로지 필요에 의한 선택일 뿐이라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멀쩡한 사람들도 다 이해관계에 의해서 결혼했다가 또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이혼해. 단지 서류상의 관계일 뿐이야. 그런 종이 쪼가리 한 장이 무슨 의미가 있어.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 없어.”
“아니, 잠깐…….”
잠깐만.
온기현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서 눈을 깜박거릴 수도 없었다.
내가 아는 류주호가, 이놈이 맞나 싶었다. 아니, 과연 내가 류주호를 이제까지 깊이 이해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아니, 아니다. 이건 자신이 착각해 왔던 것일지도 몰랐다. 몇 번 몸을 맞췄다고 해서, 그가 자신한테 남들보다 조금 살갑게 다가오고 다정한 말을 몇 번 건네주었다고 해서 착각했다. 류주호도 어쩌면, 하는 마음으로. 그래서 류주호를 전부 이해한 것처럼 멋대로 여기고 류주호에 대한 감정을 키워 나갔다.
그래. 애초에 이런 놈이었는데. 이미 진작 알고 있었는데.
온기현은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리듯 감싸 쥐었다. 화살을 어느 쪽을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보 같고 어리석었던 자신과, 뾰족하게 모난 헛소리를 지껄이며 자신의 가슴을 후비는 눈앞에 선 류주호 둘 중에.
이제까지 류주호에 대해 느꼈던 친밀함은 뭐였을까. 어쩌면 류주호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감정이 심장에서 조각나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제일 가까이서 느껴 왔다고 생각했던 류주호와의 아득한 거리감. 세상이 어지럽게 느껴질 정도의 지독한 유리遊離.
하. 쓴웃음이 허탈하게 터졌다. 얼마든지 류주호는 이런 돼먹지도 않은 짓거리를 할 수 있는 놈이었다. 자신이 뭐에 씌어도 단단히 씌었던 거다.
순간 제 안에 알알이 박혀 있던 감정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설렘, 씁쓸함, 추억, 그리움, 체념, 기대, 분함, 긴장, 혼란, 행복, 염원…….
한 사람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이렇게 다양했나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부 허상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기시감을 느꼈다. 저들과 양희인 그리고 류주호, 그리고 기현 자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간극이 존재했다.
그렇게 느낀 순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는 기현을 향해 류주호가 손을 뻗어 왔다.
온기현이 탁,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입을 열어 몽글몽글하게 부풀어 있던, 애초에 류주호에게 묻고 싶었던 제 질문을 내뱉었다. 입술을 악문 채.
“너 나, 좋아해?”
“응.”
대답은 빨랐다. 하지만 이토록 가볍게 되돌아오는 대답을 바란 적 없었다. 아니, 서로 그게 일상인 듯 주고받는 대답을 바란 적은 있었지만.
그동안 제 속에서 삐걱거렸던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운 불안함이 일제히 꺼져 버렸다.
허망한 한숨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이상 화낼 힘도 없었다.
감은 눈을 천천히 떠 류주호를 한껏 노려보며 온기현이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개자식.”
떨쳐 내려 애써도 끈질기게 저를 따라다니던 감정이 서서히 막을 내렸다. 엉성하게 묶으려던 매듭이 한순간에 스르르 풀려 버리며, 실마리가 제 손을 떠났다.
길고 길었던 지독한 짝사랑이 완전한 끝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