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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Lost Winner (3) (10/20)

4부. Lost Winner (3)

“……악!”

쿨럭, 쿨럭.

괴성과 함께 상체를 벌떡 일으킨 온기현이 목구멍의 통증을 느끼고는 기침을 터트렸다. 눈앞이 핑핑 돌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눈가는 얼마나 부었는지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할 지경이다.

밭은기침을 뱉으면서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개구리 우는 소리처럼 쉴 수도 있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깨기 직전까지는 꿈결처럼 혼몽하게 드문드문 채우던 지난밤의 기억이, 부지불식간에 머릿속을 생생하게 강타했다.

몸이 뻑적지근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 앉은 탓이 아니었다.

간밤에 정말 말도 아니게 시달렸다.

류주호에게 키스를 조른 이후부터는, 사실 차에서 있었던 일은 거의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술에 취하기도 했었고, 심하게 몰아 붙여진 탓에 류주호가 행위 중간중간 무슨 말을 했는지도 윙윙거리는 진동음처럼 흐릿할 뿐이었다.

하지만 차 안에서 눕혀진 채로 잠들었다가 류주호의 집에 들어와서부터는 조금씩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아, 미쳤다. 온기현.”

그 뒤로 동이 트기 전까지, 류주호에게 밤새 시달려야 했다. 류주호는 집요했다. 힘없이 늘어진 온기현의 몸을 빈틈없이 끌어안고 허리만 움직여 안을 헤집었다. 동시에 입 안까지 혀로 연신 쓸어 대며, 숨이 부족해 헐떡이는 미약한 동작에도 흥분했다. 결국 묽은 물조차 나오지 않아 구멍만 잘게 경련하며 절정에 이를 때까지 허릿짓을 쉬지 않았다.

심지어는, 정신을 놓고 까무러지는 동안에도, 류주호는 자신을 기현의 안에 쑤셔 박은 채 꽉 옭아매듯 안았더랬다.

당장 아래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목 아래로 시선을 내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전신이 아리고 저릿한 것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미 몇 번이나 왔었던 류주호의 침대 위였다. 침대 옆자리는 딱 한 사람의 크기만큼 비어 있었다. 흐트러진 시트 위로 살며시 손을 가져가자, 미미한 온기가 느껴진다.

다시금 목이 아려서 인상을 찌푸리며 목울대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들자 침대 옆 협탁 위에 물병과 컵이 놓여 있었다. 쪼르륵 물을 따라서 홀짝홀짝 넘겼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류주호는 어디 갔지.’

조금씩 말끔해지는 정신으로 귀를 여니 샤워 소리가 욕실 쪽에서 들려왔다. 온기현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대체 어제 무슨 짓까지 해 댄 건지, 허벅지 사이와 사타구니 앞쪽까지 쓰라렸다.

옷가지를 찾기 위해 시트로 몸을 돌돌 말고서는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화해하게 된 건가.

기실 화해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류주호는 제 성질대로 필터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이고, 며칠 동안 서로 연락도 없다가 술자리에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자신을 붙잡고 이상한 말을 지껄인 것뿐이지 않나.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해야, 네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어?’

그렇게 묻는 류주호의 표정이나 몸짓이, 어쩐지 가슴을 후벼파는 부분이 있었다. 이건 류주호 나름의 사과인 것인가 하고 제멋대로 해석했다.

그래서였다. 아, 졌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은.

그리고 또…….

온기현이 갑자기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으음, 하고 목을 울렸다.

이건 어쩌면, 또다시 제멋대로 해석을 붙이자면, 류주호는 어쩌면, 나를.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시선 끝에 제가 들고 온 모자가 보였다. 좌식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곳이었다. 소파 위에 덜렁 놓인 그것은 어쩐지 누군가 대충 휙 던져 버린 듯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었고,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 제 티셔츠가 마찬가지로 누군가 벗어 던져 버린 듯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

누가 봐도 급하게 벗겨서 여기저기서 치댄 꼴임이 너무나 확연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끊긴 필름처럼 짤막하게 떠오르는 제 기억과도 연결됐다.

온기현, 진짜 미쳤냐…….

주섬주섬 옷가지를 주웠다. 바지와 속옷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차에 있을 것이다. 괜스레 머쓱해져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두리번거렸다.

문득 테이블 위에 있는 서류 더미로 눈길이 갔다.

교재 자료는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스듬하게 쌓인 서류들 위에는 죄다 빨간색의 엑스 표시가 그어져 있었다. 그것도, 서류를 붙여 놓고 이어서 쓴 듯 중간에 끊어져 있기도 했다.

뭐지, 하고 갸웃하는 사이에 욕실 문이 덜컥 열렸다.

“어…….”

멍청한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류주호가 막 젖은 몸을 수건으로 대충 닦으며, 아래는 수건을 두르고 상체는 홀딱 벗은 채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일어났네.”

“아, 응…….”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아 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너무나 태연한 행동에 온기현이 괜히 멋쩍어져서 입매를 우그러트린 채 볼을 긁었다.

뭐야, 류주호.

나만 어색해? 나만 이거 이상해?

시트로 온몸을 감싸고 머리만 내민 채 속으로 툴툴거리는 온기현을 잠시간 평연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류주호가 대뜸 성큼성큼 걸어왔다.

후끈한 기운이 지척에 다가왔다.

“어?”

순식간에 눈앞까지 다가온 류주호를 올려다보며 온기현이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괴상한 소리를 내자, 류주호가 갑자기 입술을 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살덩이가 단번에 침입했다. 그리고 빠르게 입 안 구석구석을 훑고서는 물러났다.

어, 하고 망연히 있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축축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물린 류주호가 가만히 기현을 바라봤다. 뻘쭘하게 서서 눈을 껌뻑거리던 온기현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우측 위에 검붉게 맺힌 딱지를 발견했다.

“헉. 너, 너 이거 상처 난 거 아냐? 어제 내가……. 그, 그래 가지고. 맞지, 어? 봐 봐. 어디.”

온기현이 제풀에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면서 어깨를 끌어 내리려고 하자, 육중하고 단단한 몸이 쉬이 딸려 온다. 귓바퀴를 유심히 살폈다. 고개를 돌려 준 덕분에 상처가 보였다.

“야……. 여기 약 발라야겠다. 엄청 아팠겠는데.”

“……아니, 별로 안 아팠어.”

“그래? 피딱지 졌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제 뼈 씹었던 거 같은데.”

“안 아팠어, 정말.”

그렇게 심상하게 말하는 류주호의 목소리가 어쩐지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 아프면 그냥 그렇다고 얘기를 하지…….

이빨 자국이 난 살갗을 살피려 귀를 만지자, 근육이 움찔하며 조금 단단해진다.

“괜찮아, 이제.”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굽혔던 상체를 들어 올린다. 그에 손을 뻗으려던 온기현의 손이 공중에 잠시 헤매다가 푹 아래로 떨어졌다.

“음……. 그러니까 그. 이걸로, 그냥 비긴 걸로 하자.”

“…….”

“너도 나한테 한 번 잘못했으니까, 그냥 그런 걸로.”

그런 걸로 하자.

비등하지도 않은 상처였다. 며칠이면 싹 나아서 없어질 얕은 상처와, 잘게 할퀴어진 제 마음이 전혀 같지 않은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둘을 부러 동일 선상 위에 두고서는, 제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류주호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뚫어질 듯 기현을 쳐다보다가 이내 팔을 길게 뻗더니 시트째로 확 끌어안았다. 그의 몸의 물기가 이미 말라 있어도 한 겹의 천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만은 뜨거웠다.

그리고 그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지만, 온기현의 귀까지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눈으로 귀의 상처를 좇으며, 시트 안에 갇힌 팔 대신에 뺨을 류주호의 어깨에 비볐다.

자신을 안는 힘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 * *

그리고 다시금, 류주호가 비집고 들어온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니, 전과 비교해서 바뀐 것은 있었다.

“진짜로 그만둔다고?”

“네, 사장님. 죄송해요. 원래 학기 끝나고 방학에도 계속하려고 했었는데요.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요.”

“허어……. 이런. 기현 학생같이 성실한 알바생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데 말이지…….”

황성 한우집의 앞치마를 입고서는 기현과 마주 보고 앉은 고깃집 사장이 두툼한 턱을 엄지로 슥슥 쓸었다.

하긴, 요새 웬만한 젊고 파릇파릇한 애들은 이런 고깃집에서 알바하려고 자처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가할 때는 한가하지만 바쁠 때는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하다. 시급이 다른 곳의 두 배 정도 되는 것도 아니고 고된 노동 거리가 대부분의 일을 차지하는 곳은 아르바이트생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걸 알기에, 막상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온기현의 모습이 꽤나 죄송스러워 보였다. 원래라면 학기가 끝나고, 휴학을 하게 되면 다시 일할지도 몰라요, 라고 말해 두는 게 나았다. 하지만 온기현의 입에서는 단호한 작별의 말만 나올 뿐이었다. 후회는 들지 않았다.

사장도 그만둔다는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뜯어말릴 수도 없는 노릇일지라, 고뇌하는 모습만 보이고 잠시 별말 없이 허어, 하고 한탄의 소리를 내뱉었다.

“허어……. 기현 학생이 그만두면, 그 키 크고 이목구비 짙은, 잘생긴 친구도 이제 안 오겠지?”

“네? 네, 뭐……. 아, 아무래도 그러겠죠?”

괜히 뜨끔한 온기현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쉽구나……. 아쉬워……. 그렇게 배포가 큰 대인을 잃다니.”

“네?”

“아, 아니. 기현 학생이 그만둔다니 아쉽다 이 말이야. 하하. 지금까지 일한 월급은 내가 확실히 챙겨 줄 테니까. 응? 어딜 가서도 잘될 거야. 다음에 친구들 데리고 한번 고기 먹으러 오고. 알았지?”

갑자기 말을 수습하며 호탕하게 웃는 사장을 보며 온기현이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도 아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럼, 이제부터 계속 학업에만 열중하려고?”

“네. 아무래도……. 지금은 꾸준히 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요. 뭐, 이러다가 돈이 궁해지면 또 알바 찾아야겠죠, 하하.”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자, 사장이 흠, 하고 코로 한숨을 쉬더니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오래 못 해서 그런 거면, 어디 괜찮은 단기 알바 자리라도 찾아봐 주랴?”

그동안 쌓인 정 때문에라도 으레 하는 말이었다. 그에 온기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네에, 그래 주시면 좋죠. 나중에요.” 하고 가볍게 응수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가게를 나선 온기현이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꼭 류주호를 위해서는 아니라고 아무리 속으로 되뇌어도, 결국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류주호가 저에게 좀 더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을, 결국 이루어 주게 된 꼴이다.

온기현은 그런 자신의 선택을 결코 평가 절하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헛된 기대로 인한 선택임을 부정하지 못했다. 혹시 류주호가 나를, 이라는 기대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을 내기 위해 자신의 일상을 크게 바꾸는 것도 어쩐지 감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붉어지는 얼굴을 흔들며 가뿐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주머니에서 꺼내 든 핸드폰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양반은 못 되는 놈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응.”

전화를 받자 건너편에서 “어디야?”라고 자신의 행방을 묻는 류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온기현이 도망가리라고 생각지 않는 것인지, 전처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어디에 있든지 꼭 전화로 행방을 묻고는 했다. 지금처럼.

“어, 나 지금 고깃집에서 막 나왔어.”

―오늘은 일하는 날 아니잖아.

그래도 온기현의 웬만한 스케줄은 꿰고 있는 류주호였지만.

“나 알바 그만뒀어.”

―……그만뒀어?

“응. 그렇게 됐네. 암튼, 나 지금 갈 건데. 집이지? 거기로 갈게.”

―……아니.

“어? 왜?”

―5분 뒤에 도착해.

“뭐?”

뚝 끊기는 전화를 보며 온기현이 멍하게 뭐냐, 하고 중얼거렸다. 가게 앞에서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스웨터의 목 폴라를 턱 끝까지 끌어 올리고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던 것도 잠시.

“기현아.”

문득 들리는 부름에 휙 몸을 뒤로 돌렸다. 롱 재킷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류주호가 보였다. 5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놀란 온기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 뭐야.”

어리벙벙하게 흐르는 말끝에 미소가 감돌았다.

“완전 놀랐다. 되게 빨리 왔네, 너.”

“마침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온기현이 놀란 어투로 말하자 류주호가 기현을 빤히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무슨 볼일?”

“……너 만나러 가던 볼일.”

“허. 야아. 내가 어딨을 줄 알고.”

“너희 집으로 가던 길이었어.”

온기현이 눈을 샐쭉 위로 올리며 조금 홍조가 올라온 볼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피식 웃음을 머금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혹시 따라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 괜히 머쓱해졌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황당하거나 화가 나지도 않았다. 괘씸한 류주호.

짐짓 헛기침하며 괘씸한 놈을 향해 비죽 말했다.

“이제 볼일 끝났으니까 가자.”

“그만뒀어? 가게.”

“어? 아아, 응.”

“왜. 내가 그런 말 해서?”

류주호의 단조로운 물음에 온기현이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야. 너한테 돈 달라고는 안 할 거거든. 그냥, 뭐. 기말도 있고. 중간 망친 것 같아서 기말에 올인하려고 그런다, 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응?”

류주호가 입가를 손으로 슥 가렸다. 고개를 살짝 떨구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기현이 완전히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살피려고 하자, 류주호가 손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오묘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금세 평상시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 옷. 예쁘다.”

“어? 으, 응. 그러게. 고마워. 잘 입을게.”

그러더니 대뜸 자기가 사 준 옷을 보고 예쁘다고 칭찬한다. 순순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요새 들어 이렇게 느닷없는 표정이나 말을 불쑥 내뱉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제 가자. 배고프다.”

온기현이 그렇게 말하며 류주호를 흘끔 보자, 류주호가 평소처럼 피식 웃으며 “뭐 먹을래?” 하고 묻는다. 온기현이 “글쎄, 고기?” 하고 대답하자, 류주호가 “너는 고깃집에서 나오면서 고기가 먹고 싶어?”라고 대꾸한다.

실없는 말을 주고받고 티격태격하면서도 가슴이 뜨끈해진다.

류주호의 눈빛과 행동, 사소한 어투까지. 기대가 한없이 부푼다. 어쩌면 이번 학기까지 걸어 놓았던 제 마음의 끝이,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 * *

“으음.”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어슴푸레 푸른 빛이 들이치는 창을 보니 아직 새벽인 듯했다.

온몸이 뻐근하고 아렸다. 팔십 먹은 노인네처럼 아구구,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최근에는 매일 둔통이 가시지 않는 허리를 두들기며 부스럭 상체를 일으켰다.

주먹 쥔 손으로 다시 한번 눈두덩이를 비볐다. 이렇게 일찍 일어난 적도 참 드물었는데, 어제는 일찍 기절해서 그런가 싶었다.

나 이제 힘들어…….

간밤 내내, 그 말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류주호는 한참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그만한 체력이 대체 어디서 나는 건지 참 신기하기도 신기했다.

멍하니 앉아 있기를 잠시. 스륵, 하고 휘감아 오는 굵은 팔에 의해 온기현이 다시금 풀썩 침대 위로 눕혀졌다.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온기현이 누운 자리를 더듬은 것 같았다. 옆으로 누워 한창 잠에 빠진 류주호를 바라봤다.

그의 귀 쪽으로 시선을 굴렸다가 다시 또르르 정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제가 씹은 귀는 거의 다 아물어 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소독해 주고 약을 발라 준 덕이었다. 그래서 아플 리는 없을 텐데, 류주호의 미간이 설핏 구겨진다.

‘얘는 또 자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네.’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던 중 갑자기.

“헉.”

류주호가 눈을 번쩍 떴다.

“어, 깨, 깼어?”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소곤거리며 묻자, 류주호가 잠시 크게 뜬 눈으로 기현을 빤히 쳐다본다.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냐고 다시금 묻기도 전에 류주호가 하아, 하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모로 누워 마주 보던 상태 그대로 류주호의 큰 가슴팍 안에 덜컥 갇혀 버렸다.

“너 뭐,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그런 것 같아.”

“왜. 무슨 꿈인데?”

몸을 살짝 떼어 내며 묻자 류주호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뜨고서는 입을 열었다.

“……엄청 많은 방이 있었어. 아주, 새하얀 방이.”

“응응.”

“그리고 그, 좆같이 많은 방 중에 어느……, 한 방 안에 내가 갇혀 있었는데.”

“……어.”

그래서? 덩달아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고 싶은 거야. 너무 답답했어. 나가기 싫었는데, 또 나가고 싶었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문을 열었어. 새하얀 문의 문손잡이를 잡고 빙글 돌렸어. 그랬더니 방문 밖 아래에.”

“응.”

“낭떠러지가 있었어. 발아래로 꺼져 있는 밑이 보이지 않는 아주, 까마득한 낭떠러지.”

“허얼. 그래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했어. 방에서 탈출하려면 뛰어내려야 하는데. 그런데 탈출하려면 저 깊고 아득하고 까마득한 곳까지 떨어져야 하는 거야. 온몸이 산산조각 날지도 모르는, 깊은 곳으로. ……한참을 망설였어.”

온기현의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고개를 잘게 끄덕이자, 류주호가 입을 달싹이다가 말을 맺었다.

“거기서 깼어.”

“헉. 뭐야. 꿈 되게 이상하다.”

“…….”

“설마 너, 너, 그거 키 크는 꿈 아냐? 높은 데서 떨어지면 원래 키 크잖아.”

“……글쎄.”

“너 여기서 더 크면 어쩌냐.”

“왜. 싫어?”

류주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아니, 뭐. 싫다기보다는. 아, 그 꿈 내가 살까? 나 아직 무릎이 가끔 시린 게 성장판 안 닫힌 거 같은데. 어때?”

“…….”

그렇게 조잘거리자 류주호가 뭐라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기현도 마찬가지로 류주호와 돈 얘기를 입에 올리는 게 조금 멋쩍은 감이 있어서 금세 다른 얘기로 말을 돌렸다. 이놈이 부르는 값은 왠지 제가 생각한 몇천 원 단위가 아닐 것 같았다.

“아. 아니면 혹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수맥이라도 흐르나? 내가 전에도 생각했는데 조상님이 너 혼내시려고 나타나는 것 같아. 아님, 해몽 사이트에 올려 보는 건? 어?”

하지만 눈을 감은 류주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똑바로 누운 자세로 얕고 고른 숨을 뱉고 있었다. 다시 잠든 것 같았다.

‘뭐야, 꿈 때문에 잠을 설쳤나.’

몸이 피곤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렇게 며칠을 격렬하게 밤새 뒹굴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던 온기현이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는데, 류주호는 오죽할까.

기현은 눈앞의 잘생긴 콧날을 괜히 쿡 찔러 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궁금증을 다시금 속으로 되뇌었다.

‘너 나를 어떻게 생각해?’

전에도 비슷한 물음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온기현에게 되돌아왔던 것은, 다름 아닌 체념이었다. 그래. 뭐, 그럴 줄 알았어. 이런 체념으로 빠르게 수긍하고 받아들였지만.

하지만 지금은?

항상 여자만 만나 오던 류주호가, 남자와의 섹슈얼한 접근이나 접촉이 질색이라던 류주호가, 남자인 자신과 이렇게까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자신에게 하는 행동들이 어느 한 결론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연애 경험이 별로 없다고 하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 나 좋아하냐?’

라고 묻기에는 꽤 이상하지 않은가.

지독하게 긴 시간 동안 내내 속에 품어 왔던 감정을 대수롭지 않은 고백의 말로 흘렸었다. 당연히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그리고 그 거절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였던 당시의 결심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건 오로지 제 선택이었고 결과에 대해서 감수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기현의 몫이었다.

“하아…….”

류주호를 향해 얼굴을 돌려 누웠다. 베개에 볼이 눌린 채로 입술이 불룩 튀어나온다.

볼을 괜히 쿡쿡 찌르다가 입술까지 손가락을 미끄러트린다. 몰캉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졌다. 흠칫. 손가락이 살짝 튀었다.

“…….”

이 입으로 제 살갗 여기저기 위를 미끄러트리며 빼곡하게 훑어 댔고, 이 입이 제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전부 닿아 왔다. 순간 허리가 찌릿한 감각에 눈앞이 흐려졌다.

입이 말라 옴을 느껴서 억지로 타액을 만들어 혀로 입 안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 씨. 미치겠네.’

살짝 엎드린 자세 탓에 시트에 비벼지던 제 앞이 완전히 기립해 가고 있었다. 쑥쑥 크기를 늘리던 그것은 눈 깜빡할 사이에 제 뱃가죽과 침대 사이에 끼어 압박되고 있었다.

온기현은 속으로 펭귄이 나오는 어린이 애니메이션 주제가나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니, 지난밤에 나눈 행위가 더욱 뇌리에 선명해졌다. 허리가 절로 들썩거리고 본능에 따라 자꾸 앞을 시트에 비비고 싶어진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화장실에 가려고 슬금슬금 몸을 물리려던 때였다.

“여기서 해.”

“으, 어, 어?”

불쑥 튀어나온 나직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떠서 옆을 바라봤다. 하지만 류주호는 아까 잠든 그 상태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흡, 하고 숨을 들이켠 온기현이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가만히 있었다.

류주호가 눈을 스르륵 떴다.

올리브색이 감도는 갈색의 오묘한 시선이 천천히 저를 향한다. 심장이 뱃가죽까지 쿵, 하고 떨어졌다.

“아니면, 내가 도와줄게.”

그 말과 동시에 온기현의 위로 커다란 몸이 덮였다.

이른 새벽, 이제 막 창백한 푸른 빛이 스러져 가는 시간. 맞붙은 두 사람의 체온은 다시금 붉게 타올랐다.

* * *

“네. 그럼 그렇게 마무리하시죠. 이번 건은 죄송하게 됐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뚝 끊긴 전화에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리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대기 화면으로 이미 넘어갔음에도 잠시간 핸드폰을 내려 보고 있었다. 미간이 설핏 좁아진 얼굴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입매가 살짝 우그러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조용하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조수석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그 아래에는, 이미 파기된 계약서가 한 뭉텅이로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완전히 끝났다.

류주호는 핸들을 쥐고서는 잠시 몸을 뒤로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이 공유 오피스, 아니 나아가서는 공유 복합 시설 사업을 벌이기 위해 그간 얼마나 공을 들였던가. 제 아버지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여기까지 준비를 마쳤다. 화려한 레드 카펫까지는 아니더라도 얼추 프롭테크 신생 기업으로서의 구색은 갖춰 가던 때였다.

하지만. 그토록 중요한 시기의, 그간의 자신은 어땠는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온기현에게 네 시간을 사겠다는 말은 가겠다는 온기현을 붙잡기 위해, 초조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입 밖에 내뱉어진 실수였다.

그래, 그건 실수였다. 그리고 충분히 수습할 용의가 있었다. 장소와 시간도 적절했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서울 야경이 훤히 보이는 고급스러운 호텔 룸에서 그놈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제 망아지가 놀라면서 웃고, 또 신나서 조잘거리는 모습을 보려고, 이제까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짓거리를 했다.

그리고. 온기현이 류주호를 거부했던 그날 이후, 그 이후의 며칠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온기현과 만나지 않았던 때의 류주호의 일상이 어땠는가 돌이켜 볼 여유도 없을 정도로 그저 텅 빈 상태였다.

밤에는 밤마다 별 머저리 같은 꿈을 꾸느라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온기현과 체온이 맞닿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뻐근해졌다. 온기현을 안고 있을 때면, 정말이지 다른 건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의 극렬한 만족감이 머리끝까지 치달아 여타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그런데, 그것이 제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류주호는 지독하게 불쾌한 감각에 휩싸였다.

진짜로 어느 더러운 뒷골목에 서식하는 구제 불능의 마약 중독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당장 달려가서 껴안고 싶었다. 제 머리를 뜨겁게 해 줄, 또 동시에 부글거리는 기분을 안정시켜 줄 그놈을 찾아가서. 하지만 그 방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류주호의 인생의 100%를 자기 자신이 채우고 있었다.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며칠간 류주호는 껍질만 남아 있는 듯했다.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듯한 그것은,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기이한 감각이었다.

무력감. 탈력감.

이런 익숙지 않은 감각이 전신을 옭아매고 머리까지 지배했다.

핸드폰만 붙잡고서 극히 예민한 상태로 거의 이틀을 꼬박 새웠다. 고작 사흘 사이에 완전 폐인이 다 되어 갔다.

그러던 중에, 건물을 계약하기로 했던 건물주로부터 최후 통보 전화를 받고 제가 벌인 일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입주 계약 파기. 걸어 놓은 계약금 중 절반만 겨우 건졌다. 그리고, 함께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던 플랫폼 개발 업체에도 사업 포기를 선언했다.

오래전부터 수십만 회원을 보유한 부동산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중년 남성도 사업 파트너 중 하나였다. 수억의 프리미엄을 받고 커뮤니티를 팔아넘기고는 상업용 부동산 장사로 눈을 돌리게 된 이였다.

류주호의 공유 플랫폼 사업에 혹해서 이쪽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힘쓰던 파트너사 사장은 겉으로는 쌍욕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류주호를 돈 많은 철부지 취급하며,

“요새는 뭐, 개나 소나 다 사업한다고 뛰어들더라고요. 하이고. 젊은 애들은 세상을 먼저 배우는 게 맞는데 말이죠. 그쵸? 사업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원. 놀이도 아니고 중간에 엎어 버리면 쓰나. 하하.”

라며 이죽거렸다.

가뜩이나 수면이 모자란 상태였다. 평소 같았으면 웃는 낯으로 뻔뻔한 면상을 일그러트릴 말을 뱉으며 조져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욕적인 개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류주호는 온기현을 떠올렸다.

매끄러운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온기현의 축축한 살갗을 생각했고, 캐모마일 티의 향을 입 안에 머금고 음미하며 온기현의 음부에 코를 박는 상상을 했다.

그 좁은 몸이 얼마나 자신한테 꼭 맞는지, 제가 닦아 놓은 길의 어디를 누르면 그 몸이 펄쩍 뛰는지.

문득 속이 울렁거림을 느꼈다. 깊숙한 안에서부터 울컥울컥 솟아오르듯이 속이 널을 뛰었다. 꿀렁이는 익숙지 않은 감각에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렇게 홀로 온갖 난잡한 상상을 하며, 울렁거림을 애써 누른 채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새로운 과대라고 자칭하는 누군가였다. 오늘 조촐하게 단합하자는 취지로 술집에서 모이기로 했다며 장소를 알려 왔다. 당연히 무시할 생각이었다. 답장할 생각 없이 그대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파트너사 사장의 돼지 같은 면상을 향해 “알겠으니까 닥치시고 그만 일어나시죠.”라며 막 입을 떼던 때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축제 날 피해를 입은 학생들과 함께…….]

그 말을 보자마자 류주호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박차고 나왔다. 차를 거칠게 몰고 가는 동안,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했다.

당장 그 얼굴을 봐야 한다고. 보지 않고는 미칠 것 같다고.

제가 준비하던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되어 버렸는데도,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온기현이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불확실한 가능성에 매달리듯 무작정 내달렸다.

“하아…….”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젖혀 짙은 한숨을 터트렸다. 이 순간조차 당장 이 차의 뒷좌석에서 온기현을 붙들고 게걸스럽게 몸을 섞었던 때의 감각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동시에, 머릿속이 진창이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뿌연 안개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미친 새끼.

류주호는 이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계약서 더미를 손안에서 구기고는 거칠게 내던졌다. 그리고 기어를 바꿔 핸들을 꺾고서는 끼익― 하는 바퀴의 마찰음을 내며 도로를 빠져나갔다.

당장 지금도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 * *

“우리, 주제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

땀을 잔뜩 흘리고 나서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좌식 소파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 화면을 펼쳐 놓으며 그렇게 운을 뗐다.

따듯하게 난방을 틀어 놓은 터라, 아래에서부터 훈기가 퐁퐁 풍겼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기현과 달리, 류주호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트레이닝 바지를 걸친 채였다.

뜨거운 물에 푹 익은 몸은 갓 지은 떡같이 따끈따끈했다.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은 아니지만 유독 류주호와 함께 샤워할 때면 체온이 더 올랐다.

여름에도 부러 사나이답게 찬물로 샤워를 하는 온기현이었지만, 사실은 이렇게 뜨거운 물에 의해 노곤하게 풀리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살짝 나른하고 취한 것처럼 들떴다.

“너 그거 알아? 지구 전체에서 가장 많은 물질이 철이래.”

“그래?”

“어. 되게 신기하지? 지각만 따지면 산소가 가장 많아서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근데 또 지구 면적 자체로 보면 바다가 70%나 된다잖아.”

온기현은 포털에 검색해서 찾은 정보들을 내도록 떠들었다. 별 의미 없는 수다나 마찬가지였다.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의 두서없는 말에도 꾸준히 대꾸해 주었다.

“차라리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는 주제가 더 찾기 쉽겠다. 오히려 흔하면 흔할수록 정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안 그……래?”

노트북의 화면 스크롤을 내리며 말하던 온기현이 고개를 휙 돌리자마자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류주호의 눈과 딱 마주쳤다.

“주제 정하는 게 일이다, 참. 어…….”

온기현은 어색하게 삐걱거리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마우스 휠을 슥슥 내려 댔다.

요새 들어서 부쩍 말수가 적어진 류주호였다. 간혹 이렇게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흐르는 횟수가 늘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그러다가도, 몸을 섞을 때면 집요할 정도로 난잡하게 밀어붙였고, 다시 생각하기에도 화끈거리는 저속한 말들을 내뱉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온기현이 그만하라고 해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숨이 넘어가기 직전 헐떡거릴 지경까지 몸을 부딪쳐 왔다. 꼭 무슨 버튼이 눌린 것처럼 말이다.

“으음, 어렵다. 어렵네…….”

양반다리로 앉았던 허벅지를 바짝 모아서 다리를 길게 뻗었다. 움직일수록 사타구니 쪽으로 올라가는 바짓단이 조금 신경 쓰였다. 바깥에 훤히 드러난 맨살에 시선이 빼곡하게 닿아 오는 것 같은 묘한 느낌에서였다.

간지러운 느낌에 동그랗게 굽은 검지로 허벅지를 긁었다. 그러다가 그것조차 어색해서 괜히 턱을 괴었다가, 볼을 문질렀다가를 반복했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류주호는 꼭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굴다가도 또 조금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러다가 금세 불이 붙어서는 조금, 아니 꽤 많이 맛이 간 눈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차마, 제가 궁금했던 질문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르고, 공간에는 마우스를 달칵이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포털의 검색창을 뒤적이던 중, 문득 온기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와 박혔다. 류주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아니면.”

“응.”

“밖에 나가 볼까?”

“밖에?”

온기현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에 류주호가 담담하게 되물었다.

“응응. 안에서만 찾지 말고, 밖에 나가서 이런저런 사람들도 보고, 여러 가지 눈에 담으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제가 제안한 말이 어떠냐는 표정으로 온기현이 번쩍 눈을 떴다. 고개를 휙 돌리며 류주호를 보자 류주호는 조용히 수긍의 빛을 띤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전에 둘이 도심으로 외출했던 날의 안 좋은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아무런 계획 없이 외출한다면 이놈은 또 고급 레스토랑에서 칼질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 그리고 어디로 갈지 내가 정해도 돼?”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음…….”

온기현은 조금 고민하다가, 이윽고 대답했다.

“바다.”

* * *

“와, 바다다.”

차창 너머로 펼쳐진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절로 감탄의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류주호와 온기현이 탄 차는, 바다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 위를 건너가고 있었다.

“바다 냄새. 바람 엄청 세.”

반쯤 연 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폐부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탄성과 함께 중얼거렸다.

둘은 서울에서 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의 섬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전방 2킬로미터 앞에서 우회전입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음성을 들으며 동시에 온기현도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어 기계가 가리키는 길과 위치를 열심히 눈으로 확인했다.

“저기 다리 앞에서 꺾는 건가 봐.”

바다를 보고 싶다고 먼저 제안한 온기현은, 어디를 갈지 제가 다 결정하겠다고 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류주호는 순순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해에 둘러싸인 작은 섬은 제가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 찾은 곳이었다. 맛집과 볼거리도 전부 북마크해 두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오늘 온기현이 따로 결심한 게 있었기 때문이다.

다리 끝에서 오른쪽으로 핸들을 틀어 진입한 차는 곧바로 구불구불 이어진 비포장 도로 위를 달렸다. 망망대해에 인접한 도로였지만 기현은 도로의 요철 때문에 사방으로 튀는 차로 인해 몸이 들썩들썩하느라 제대로 밖을 구경하지도 못했다.

―전방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어, 야, 저, 저기, 아프, 아페서, 좌, 회전, 이르, 이래.”

몸이 튀는 탓에 말도 튀었다. 비포장 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류주호가 팔을 뻗어 몸이 앞으로 쏠리지 않게 막아 주는 것도 허사였다.

분명 여기가 맞을 텐데. 블로그에서 찾아봤을 때는 활짝 웃으며 윙크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운치와 특색이 넘치는 맛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류주호가 다행히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은 게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그렇게 좌회전을 해서 굽이진 좁은 길에 진입했다. “곧 나올 거 같은데 이상하네.”라고 중얼거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영흘 할매 해산물 칼국수]

가게는 허름했다. 겉으로 보기에도 좁고 낡아 보였다. 하지만 옆으로 난 공터에 차가 몇 대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손님은 꽤 있는 것 같았다.

“저어. 실례합니다. 두 명이요.”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며 가게에 들어섰다.

그리고 동시에.

“이 쌍노무 새끼들! 이제들 오냐!”

“네?”

앞치마를 입은 나이 지긋하신 할머님이 대뜸 삿대질과 함께 쌍욕을 하며 손님을 맞이했다.

느닷없이 면전에서 날아온 욕설에 멍하니 서 있는 온기현의 뒤에 우뚝 선 류주호를 보고서는, 할머니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귓구녕에 쇠빠따를 들이박았어! 썩어 빠진 놈들아! 미적대구 지랄이여! 여기 이리 와서 어여 앉어!”

“…….”

멍청히 있던 온기현은 가게 안을 둘러봤다. 손님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끼리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는 욕쟁이 할머니 맛집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은 둘을 향해 끊임없이 욕이 날아왔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찰진 욕이 귀에 쏙쏙 박혔다.

이런 곳일 줄이야.

어쩐지, 블로그 마지막 줄에 두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초롱초롱한 눈을 한 대머리 이모티콘과 함께 ‘특색 주의’라고 쓰여 있던 것이 기억났다.

온기현은 부산스럽게 물수건에 손을 닦으며 류주호를 흘끔 봤다. 저 싸가지없는 놈이 무슨 반응을 할지 가늠하는 시선을 던졌다. 제가 추천해서 온 가게인데 이런 곳인 줄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약간의 민망함을 담아서.

하지만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저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피식 웃었다.

가게 메뉴는 단출했다. “뭐 처먹을 거야!”라고 소리치는 할머니에게 해물 칼국수 2인분과 물회 하나를 달라고 했다.

쿠당탕, 하고 사납게 테이블 위로 내리쳐진 음식들은 생각과 달리 모두 하나같이 맛있었다. 류주호도 괜찮네, 하더니 후루룩 전부 먹었다.

먹는 와중에도 욕쟁이 할머니는, “처먹었으면 얼른 꺼져! 정신 사나워, 이것들아!” 하고 소리쳤다. 류주호는 웃으며 “잘 먹었습니다. 맛있었습니다.” 하고 인사했다. 사회화가 잘된 모습이었다. 어른들한테는 원래 깍듯한지도 몰랐다.

뒤통수에 꽂히는 맛깔난 욕을 들으며 가게를 벗어났다. 차에 올라타며 헛기침을 했다.

“……욕도 되게, 흔한 거 같아.”

“오늘은 그러네.”

“어. 그리고 욕먹으면 오래 산대.”

왠지 변명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류주호는 피식 웃으며 액셀을 밟고는 부드럽게 차를 전진시켰다.

넌 장수하겠다……. 그 말은 류주호의 귀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서. 다음은 어디야?”

류주호의 물음에 온기현이 제 핸드폰을 열어 뒤적였다.

“이제 섭지포 해수욕장 한번 가 보자. 거기 덱 길이 관광지로 유명하대.”

내비게이션이 다시금 길 안내를 시작했다. 최근 들어 국내 여행을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섬이라, 그렇게 크지 않은 곳인데도 차가 조금 밀리기 시작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아 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사잇길로 언뜻 바다가 보이는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곧이어 하얀 모래사장과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우와.”

끼룩끼룩.

갈매기가 하늘 위에서 울어 대는 소리도, 바다의 전경을 즐기기 위한 배경음으로 한몫했다.

마음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젖히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다가 너무 자기만 감탄한 건 아닌가 해서, 옆의 류주호를 돌아보았다.

“…….”

류주호는 조용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온기현을 좇는 시선에, 이제는 놀랄 일은 없었다. 다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저 위로 올라가자. 해변가를 따라서 산책로가 이어져 있대.”

그렇게 말하며 소매를 잡아끌자 류주호는 잠시 침묵하더니 곧 고개를 주억거리며 얌전히 말을 듣고는 따라왔다.

끼루룩.

쏴아.

파도 소리를 만끽하며 길게 이어진 길을 나란히 걸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대로 운치가 말도 못 했다. 야릇한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속이 뜨끈하고 포근해지는 감성이 물씬 풍겼다.

온기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분위기 좋은 데서 고백할 생각이었다. 류주호를 향한 두 번째 고백을.

기실 고백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다만, 류주호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류주호는 단순히 몸 정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제가 남보다 둔한 편이라고 연채우가 가끔 핀잔하기는 하지만, 류주호가 저에게 남모를 애착을 품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류주호의 벼려진 칼 같은 언어들은 아직도 불편했고 헤집으면 아팠다. 하지만 그것은 류주호의 고칠 수 없는 성정이라고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언제는, 누구에게는 안 그런 적이 있었나, 싶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고등학교 때도,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본 지금도.

류주호가 동성의 친근한 접근을 싫어하는 것도, 오로지 이성과의 관계만 거쳐 온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면을 포함하더라도, 저를 향한 류주호의 행동은 남달랐다. 그의 눈빛이나 손짓 하나하나가 온기현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다. ‘설마’ 하는 마음이 자꾸만 기대로 부풀어서 뻥 터져 버리기 전에.

이놈이 먼저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가 못 견딜 것 같았다. 약 한 달가량 남은 시간 동안 이대로 질질 끌다가 어정쩡한 상태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것을 위한 여행 계획이었다.

“안 추워? 오늘 옷 두껍게 입긴 했지만.”

“어? 아, 응. 안 추워. 조금 바람이 차긴 한데, 그래도…….”

아.

아래로 흔들리는 손등에 류주호의 뜨거운 온기가 가까이 다가온다. 좁은 길에 나란히 걷는 둘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손을 잡고 싶었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가빠져 왔다. 얼굴이 불타듯 화르륵 달아오르던 온기현이 슬쩍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때.

“저기요, 안 가세요? 좀 지나갈게요.”

“아, 가, 가요!”

뒤에서 걸어오던 연인이 약간 짜증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당황한 온기현이 후다닥 손을 내빼며 난간으로 휙 기대려 했다. 하지만 류주호의 손이 더 빨랐고 끌어당기는 힘이 더 단단했다.

“헉.”

“……괜찮아?”

“아, 응.”

등에 퍽, 하고 부딪혀 닿은 류주호의 가슴팍 때문에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도 얼른 가자. 아, 뒤에 또 사람 온다. 빨리.”

하하, 하고 웃은 온기현은 오른팔이랑 오른발 동시에 나가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그런 온기현을 향해 조용한 시선을 보내던 류주호가 온기현의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걸었다.

길게 이어진 길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길의 왼쪽으로는 얕은 절벽을 수풀이 뒤덮고 있었다.

볼을 손등으로 연신 문지르며 삐걱대며 걷는 것도 잠시, 곧바로 왼쪽으로 꺾는 길로 절벽 위에 공터가 나타났고,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였다.

절벽 위의 평지와 수평선이 일직선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 때문에, 영흘도의 명소라고 알려져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유명했다.

“와, 주호야. 저거 봐. 진짜 멋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감탄했다. 인터넷으로 보던 사진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탁 트인 시야에 전부 들어오지 않는 끝없는 바다와 하늘, 그리고 지면이 수평으로 나란히 이어진 광경은 그야말로 절경이고 장관이었다.

“아, 맞다! 혹시 모르니까 다 영상으로 남겨 놓자. 과제에 쓰일지도 모르잖아.”

“그래.”

그렇게 말한 온기현이 핸드폰을 들고서는 카메라 앱으로 영상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몸을 빙 돌리면서 여기저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자연스럽게 류주호의 모습을 스치듯 녹화했다. 어차피 편집하면 그만이었기에, 류주호도 제가 렌즈에 담기는 것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얹지는 않았다.

류주호도 이런 광경을 보면 감동하겠지.

자연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정은 설렘과도 비슷했다. 그리고 같은 설렘과 감격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튀는 로맨틱한 감성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저도 찾아보며 알아낸 것이다.

온기현이 손가락을 뻗으며 류주호를 돌아봤다.

“와, 저거 봐. 저, 어, 아, 주호야!”

끼룩! 끼룩!

하지만 절경을 감상할 새도 없었다. 어디선가 갈매기가 날아와 류주호의 머리 위를 배회하며 날개를 퍼덕거렸다.

“아, 이 새대가리들이.”

류주호는 귀찮은 듯 팔을 살짝 휘저었지만, 갈매기는 끼룩거리고 울면서 팔에 발을 감으려고 했다.

온기현은 놀라서 갈매기를 내쫓으려고 덩달아 팔을 휘저었다. 하지만, 온기현이 가세함으로써 인간 대 갈매기, 즉 2 대 2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악! 아, 저리 가. 아!”

온기현이 소리쳤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매서운 눈을 뜨고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어딜 감히 인간이 큰소리를 내냐는 듯, 혹은 새우 맛 과자도 없는 인간은 발도 들이지 말라는 듯 부리로 머리끝을 잘게 쪼아 댔다.

순식간에 삐죽삐죽 더벅머리가 되어 가는 온기현이 눈을 질끈 감고 팔을 버둥거렸다. 저 멀리 절벽 끝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연인들의 상황도 마찬가지인 듯, 여자의 꺄악거리는 비명이 들렸다.

“이리 와. 내려가자.”

정신없는 와중에 마찬가지로 손을 크게 휘두르며 갈매기를 내쫓으려던 류주호가 나머지 손으로 기현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둘이 올라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내려갔다.

갈매기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떠난 인간은 쫓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둘이 사라지자 그대로 날개를 돌려 다른 연인들이 있는 쪽으로 휘휘 날아갔다.

“하아……. 와, 갈매기들이 무슨 깡패네, 완전. 텃세 부리는 거 봐…….”

“괜찮아?”

류주호가 그렇게 물으며 기현의 부스스한 머리를 여기저기 매만졌다. 그 손길이 조금 다급하면서도 무척 세심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문득, 귓바퀴가 뜨끈하니 간지러웠다.

“응……. 괜찮아.”

“…….”

온기현은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머리를 매만져주던 류주호의 손이 잠시 멈칫, 했다.

멋쩍은 마음에 고개를 털어 댔다.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간 것과 온기현이 고개를 돌린 것은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터벅터벅. 상심한 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원래대로라면, 영흘도의 맛집에서 기분 좋게 배를 불린 다음에 평온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끽하려고 했었다.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한 목적은 조 모임 아이디어를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연인들의 명소라고 할 만한 곳은 모조리 뒤진 것이다.

그런데.

맛집에서 욕은 욕대로 얻어먹고, 깡패 갈매기한테 공격이나 당하고, 이게 뭐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니야.’

아직 상심하기에는 이르다. 그래. 아직, 갈 곳은 남아 있었다.

문득 하늘을 보자 해가 조금씩 넘실거리는 해수면 위에 걸쳐져 있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날이 저물 것이다.

“어……. 다른 데도 멋진 데 많대.”

조금 풀이 죽었지만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차에 올라탔다. 별말 없는 운전석에 시선을 주지 못한 기현은 핸드폰을 다시 열어, 제가 마지막으로 북마크해 놓은 장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었다.

코스 자체는 영흘도로 진입하는 영흘 대교를 지나, 해수욕장 안쪽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영흘도를 빠져나오는 지점을 찍고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섬을 한 바퀴 빙 도는 여정이었다.

긴장감으로 인해 손에 조금씩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창밖을 바라봤다.

커다란 SUV가 해변 길을 따라 조용히 이동했다. 날이 저물수록 날씨가 점점 쌀쌀해졌다. 창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열어 그 사이로 얼굴을 들어 올려 바닷바람을 쐬자, 류주호가 운전석의 버튼으로 온기현이 앉은 조수석 쪽 창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추워. 감기 걸려.”

“아, 응.”

단조롭고 딱딱한 말투에 기현은 괜히 어정쩡하게 정자세를 취했다.

류주호가 기분이 안 좋은 건가. 하긴, 그럴지도 몰랐다. 조 모임 주제를 정하자고 해 놓고 가는 데마다 욕받이만 했으니. 저 성격에 당장 집으로 가자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가는 곳은 한적한 섬 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만한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가 찾아본 사진만 해도 수십 장이었다.

그곳에는 영흘도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새들의 섬이 있었다. 외따로이 떨어진 섬은, 썰물 때는 양쪽으로 갈라진 바닷길을 두고 가운데에 나 있는 돌길을 따라 쭉 걸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석양이 바다를 빨갛게 물들이고, 외로운 섬을 향해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연인들은, 하나같이 알콩달콩한 증거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렸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장소였다.

가라앉았던 마음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그러더니 어느새 기분이 확 들떠 올라,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몸을 잘게 들썩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긴장감에 손은 축축하게 땀에 젖어서는 말이다.

―잠시 후 목적지 주변입니다.

명랑한 안내음에 따라 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마른 흙으로 덮인 공터에 차를 댔다.

“진짜 예쁘다.”

온기현이 입을 벌렸다. 오늘 눈에 담았던 광경 중에서 제일, 아니 이제까지 보았던 어느 광경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다.

저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느리게 걸어온 류주호가 기현의 옆에 섰다. 둘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시야에 담긴 붉은 노을을 품은 광활한 바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동그마니 홀로 떠 있는 작은 새들의 섬. 한 폭의 그림 같은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

온기현이 당황한 음성을 내뱉었다.

“왜 그래?”

어라?

류주호의 물음에도 입 밖으로는 어? 어?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잠시 주춤한 온기현이 차를 대어 놓은 언덕에서 다급하게 밑으로 내려갔다.

빠른 걸음으로 수평선으로 이어진 지면에 땅을 내딛는 순간.

……아.

허탈한 탄식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섬으로 이어지는 예쁜 돌길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바닷길은 온데간데없었고, 바닷물이 온기현이 서 있는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까지 들어차 있었다.

만조였다. 저 멀리 떨어진 섬은 절대로 발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바다에 둘러싸인 외로운 곳에서 그저 어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이게.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벌써 밀물 시간이라니. 자신이 찾는 블로그 사진에는 그저 석양을 앞에 둔 아름다운 광경만 찍혀 있었다. 이런 얘기는 전혀……. 아.

온기현은 제 머리를 퍽, 치고 싶었다. 아무리 저녁 시간이라고 해도, 서해의 만조와 간조 시간은 날마다 달랐다. 오늘은 만조가 일찍 들어찬 날인 것이다. 간발의 차이일지도 몰랐다.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자동차가 움직이는 속도보다 물길이 이동하는 시간이 훨씬 빨랐던 것이다.

“아아. 씨이. 망했다…….”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헉.

그때. 류주호가 심상한 말투로 물었다. 곁으로 다가온 류주호를 향해 온기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짓, 발짓을 했다.

“아니, 원래 저게. 바닷길이 있어야 하거든? 이렇게 저기 작은 섬으로 이어진 길이 쭉……. 그거 때문에 여기가 유명한 건데…….”

그런데…….

망했다, 오늘 하루는 죄 망해 버렸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온기현은 제 머리를 쥐어뜯다시피 하며 팔로 머리를 감쌌다. 이런 상태로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안 될 것 같았다. 재수 옴 붙은 날이었다.

‘텄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 로맨틱은 개뿔. 류주호에게 품었던 기대를 확인하고 싶었던 온기현은 남몰래 체념했다. 이런 꼴로는 도저히 고백이고 자시고 할 수가 없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척하면서 소매로 슬쩍 눈물을 훔쳤다.

“해 지겠다……. 집에 가자……. 주제는 아무거나 하지 뭐…….”

돌멩이라든가 쓰레기라든가 뭐 그런 거 아무거나…….

티가 나지 않도록 하려 했지만 상심한 어깨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몸을 돌려 그대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던 때.

“잠깐만.”

“……응?”

“따라와 봐.”

류주호가 기현의 걸음을 막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류주호를 올려다보자, 류주호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를 슬쩍 쓸어 올리고는 다시금 차를 세워 놓은 곳으로 올라갔다.

집에 가자는 건가? 온기현이 어리둥절해하며 차에 올랐다. 류주호는 그대로 차를 몰아 갔다.

바깥은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저기 봐.”

“어?”

제 손을 꼼지락대며 아래만 보던 온기현을 향해, 류주호가 바깥을 보며 고갯짓했다.

“헐.”

새까만 하늘의 중간 어딘가에서 번쩍, 하고 빛이 튀었다. 그 빛은 바다를 관망하는 길잡이, 등대가 있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등대네.”

고깃배가 정박해 있는 자그마한 항구를 지나치자, 등대로 이어지는 기다란 길이 나타났다. 차는 그곳으로 이동했다. 방파제에 파도가 부딪치며 철썩, 하고 새하얀 포말을 남기며 부서졌다. 멀리서는 잔잔해 보이는 수면은 가까이서는 이렇게 거칠고 격렬했다.

새하얀 등대 가까이 차가 멈췄다. 등대는 원형의 벽체에 둘러싸여 매끄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온기현이 홀린 듯 다가갔다. 그리고 등대에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튀어나온 굴곡진 절벽 너머 화려한 빛의 무리가 쏟아졌다.

“……예쁘다.”

아까 건너왔던 영흘 대교가 찬란한 조명을 밝히며 밤바다를 환히 비추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마치 알록달록한 옷을 걸쳐 입은 것 같았다.

진짜 예쁘다.

멍하니 반짝이는 조형물을 쳐다봤다.

“여기서 보이는 야경이 꽤 유명하다더라.”

“어? 그래?”

“이런 것도 영상에 담아 가면 좋겠지.”

어디서 찾아봤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류주호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아, 그래. 이러려고 온 거지. 온기현은 그런 류주호를 빤히 쳐다봤다.

류주호는 어둑해지는 밤바다와 넘실대는 파도를 열심히 찍고 있었다. 새하얀 등대와 저 멀리 펼쳐진 화려한 빛의 향연까지.

무심한 태도로 한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주변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류주호는 온기현을 향해 “등대 앞에 똑바로 서 봐.”라고 하더니 이제는 기현에게 렌즈를 고정시킨다. 그의 표정이 짐짓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아아……, 어떡하지.

온기현이 멍하니 류주호를 바라봤다. 손끝이 간지러웠다. 속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알싸한 감각이 심장을 감싸며 온도를 드높였다.

너무 좋다.

애써 준비했던 하루가 무색할 만큼. 엉망이 된 계획이 아무것도 아닐 만큼. 온종일 긴장에 애가 타 잔뜩 굳은 근육이 녹진하게 풀어질 만큼.

그냥, 좋았다.

문득 온몸이 간지러웠다. 온기현은 터져 버린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쌉싸름하기만 했던 짝사랑이 왜 이렇게 달콤하고 유쾌한지. 어느새 이렇게 행복한 감정으로 바뀐 건지.

부풀어 오르는 감정에 하하,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온기현은 눈을 반달로 접으며 시원하게 입을 벌리고 웃었다. 볼살이 불거져 둔덕을 만들 정도로, 빨간 혀와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지금 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첫 번째 고백과는 또 다르게. 체념으로 시작했던 그 마음과는 다르게. 행복해지려는 고백을 전하고 싶었다.

온기현은 말갛게 웃는 얼굴 그대로 류주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하, 어…….”

“…….”

하지만.

어…….

온기현이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류주호의 표정이 이상했다.

류주호는, 핸드폰을 들어 올린 그 모습 그대로, 눈을 크게 뜨고 온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크게 뜬 눈으로 완전히 굳어서는, 기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주호야……?”

왜 저러지.

석고상같이 굳은 류주호의 모습에, 놀란 것은 온기현이었다. 네댓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떨어진 거리 그대로,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살짝 벌어진 류주호의 입에서는 숨소리 하나도 새어 나오지 않을 것처럼 미동도 없었다.

“아.”

그때. 류주호가 느릿하게 팔을 올렸다. 그리고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을 것처럼 살며시 감쌌다. 덜그럭 소리를 내며 류주호의 손아귀에 있던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졌다.

“……속이…….”

그의 입에서 거친 사포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울렁거려…….”

“어, 어? 속이?”

탄식과 같이 터진 말에 온기현이 화들짝 놀랐다.

“속이 안 좋아? 토할 것 같아? 왜 그러지? 헉, 아까 먹은 해산물이 안 좋았나?”

어떡해.

온기현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눈썹을 늘어트리며 류주호를 향해 다가왔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으니까 속이 울렁거리지. 아……. 식중독인가.”

입을 가린 채 우뚝 서서 눈만 껌뻑이고 있는 류주호를 이리저리 살피며 온기현이 발을 동동거렸다.

“기분이……. 안 좋아.”

목을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온기현을 쳐다보는 암갈색의 눈이, 새까만 바다처럼 낮게 가라앉았다. 동공조차 까맣게 굳어 빛을 잃은 안광은, 어딘가 소름 끼치도록 메말라 있었다.

류주호가 손으로 가슴과 명치가 있는 부분을 어설픈 손길로 더듬는다.

“이상하게, 미친 듯이 여기가…….”

왜 이렇게, 여기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류주호는 진짜로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안 되겠다 싶은 온기현이 허리를 굽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냅다 주웠다.

“야. 너 그거 탈 났나 봐. 이제 집에 가서, 흡!”

고개를 들어 올림과 동시에, 주절대던 말이 류주호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흐읍, 아. 흐으, 잠깐, 아.

거센 입맞춤이었다. 아니, 입맞춤이라고 표현하는 게 과연 맞나 싶을 정도로. 숨을 완전히 앗아 가는 몸짓이었다.

이가 따닥,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정도로 다급하게 맞부딪힌 호흡은 폐부에서 터짐과 동시에 류주호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뒷머리를 우악스럽게 잡아챈 류주호의 몸짓은, 어딘가 흉포했다. 이제까지도 격하게 몸을 부닥쳐 오기는 했었지만, 이 정도로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무작정 거칠지는 않았다.

고개가 완전히 뒤로 젖혀진 온기현이 숨을 쉬지 못해서 몸을 마구 버둥거림에도, 류주호는 더욱 몸을 옥죌 뿐이었다.

허억, 허억.

간신히 떨어진 입술 사이로 축축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입술이 얼얼하고 머리가 핑 돌았다.

너 왜 그래, 하고 물을 정신도 없었다. 류주호가 굳은 낯으로 기현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기현의 팔을 덥석 잡아끌었다.

“어디 가는 거야? 어?”

그렇게 묻는 온기현의 말에도 류주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서늘하게 굳은 낯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앞만 바라보며 운전대를 돌리는 몸짓은 어딘가 딱딱하면서도 건드리면 터질 것처럼 보였다.

이동 시간은 길지 않았다.

차가 세워진 곳은 섬 안에 있는 숙박업소였다. 빨간 네온사인의 불빛이 글자를 훤히 밝혔다. 영흘 모텔. 페인트칠을 한 지는 얼마 안 되어 보였지만, 5층도 되지 않는 작은 건물은 척 보기에도 지어진 지 오래된 것처럼 구식 디자인이 돋보이는 곳이었다.

놀란 토끼 눈을 한 온기현을 잡고 안으로 걸어가는 류주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주, 주호야. 야아. 여기서 자고 가게?”

카운터에서 열쇠를 받아 들고서는 온기현의 손을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류주호의 큰 보폭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류주호의 너른 등판에 대고 “주호야, 주호야.” 하고 말을 걸었지만, 오히려 잡아끄는 힘이 거세질 뿐이었다.

“…….”

쾅.

“헉.”

등 뒤로 거세게 닫힌 문을 돌아볼 틈도 없었다. 앞서 걷던 류주호의 조용한 뒷모습이 어쩐지 낯설었다. 아까처럼 이름을 불러서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온기현은 입만 벙긋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 때문에 갑자기 화가 난 거지?

도통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아니, 짐작 가는 바는 몇 있었다.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류주호로부터 화가 난 기색은 찾을 수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아.

오늘,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기현의 눈썹 끝이 처량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입술을 안으로 꽉 말아 물었다. 분위기는 진즉에 틀어졌다. 그게 못내 아쉽긴 했다.

지금에야, 엉망이 된 계획은 그것대로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속이 울렁거린다던 류주호의 말이 생각났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싶었다. 기현은 아까부터 저를 꽉 틀어잡고 있던 류주호의 손을 살며시 쓸었다.

“어……. 너, 너 속 안 좋아서 그래? 아무래도 운전 못 하겠지? 그럴 거 같아. 몸 안 좋을 때는 무리하면 안 돼. 그……. 아니면, 화장실 가서 한번 토할까? 어?”

“…….”

온기현이 류주호의 차가운 손등을 연신 엄지로 쓸어 댔다. 문득 류주호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스웨터가 그 안에서 엉망으로 구겨졌다. 류주호의 말 없는 뒤통수만 애타게 쳐다봤다.

그에 온기현이 류주호의 팔꿈치를 슬며시 붙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막, 약 달라고 할까? 라고 말하려던 순간.

“……!”

그가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그러더니, 온기현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약한 통증에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냈음에도 류주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온기현이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 숙인 류주호를 올려다봤다.

어…….

류주호의 눈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언제나 사람을 제 아래로 보던 눈에는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어딘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안광이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류주호가 틀어쥔 어깨에서부터 시작한 소름이 전신을 내달렸다. 몸이 약간 움츠러들었다.

류주호는 얕게 숨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허억허억 하고 숨 쉬는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상했다. 류주호의 상태가, 너무나.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섬찟했다.

온기현이 새하얗게 질린 낯으로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을 뱉었다.

“……지, 집에 가자. 그냥. 어……. 벼, 병원에 가면 나아질 거야. 응급실에라도 가면, ……!”

뒷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숨을 쉴 새도 없이 입술이 틀어막혔다. 아까의 지독하도록 진득했던 키스보다 더욱 갑작스러웠고, 또 더욱 거칠었다. 강하게 옭아매는 악력 때문이었다.

애무의 수준이 아니었다. 류주호는 그저 무작정 저를 온기현의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서라도, 한계까지 벌어진 턱이 아파 눈썹이 마구 구겨지더라도, 그저 기현의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안쪽까지 저를 밀어 넣고 싶은 포악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온기현이 본능적으로 류주호의 몸을 밀고 그 품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류주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두꺼운 혀를 뿌리까지 넣을 기세로, 점막 깊숙이까지 침범했다. 그랬다. 그것은 침범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흐! 으으……!”

괴로운 음성이 입술 새로 흘렀다. 끈적이며 액체가 마구 뒤섞이는 소리가 노골적이었다. 침이 턱까지 질질 흘렀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너, 왜, 으……!”

왜 이러는데, 라는 타박 어린 음성은 가냘프게 떨렸다. 소리조차 되지 못한 말을 온기현이 제 몸으로 표시했다. 강하게 몸에 힘을 줘서 버둥거렸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질끈 감았던 눈을 반쯤 뜬 순간, 류주호의 핏발 선 눈과 마주쳤다. 그는 키스 중에도 눈을 감지 않은 채 온기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문득 류주호의 안면이 꿈틀, 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돌연, 온기현의 상의를 찢어발길 듯이 벗기기 시작했다. 온기현이 헉, 하며 놀란 것도 잠시, 그는 온기현의 아래위를 순식간에 벗겨 냈다.

눈 깜짝할 새에 알몸이 된 온기현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벅지가 달달 떨리는 탓이었다. 마찬가지로 달달 떨리는 턱 끝에 애써 힘을 줬다.

평소의 류주호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주호야……. 너, 너 왜 그래……. 응? 야, 약 먹……. 아흑!”

침을 삼키며 겨우 말을 이어 가던 온기현의 입에서 신음성이 터졌다.

긴장과 두려움에 꼿꼿이 선 유두가 뜨끈한 점막에 휩싸였다. 류주호가 유륜까지 흡입할 기세로 온기현의 가슴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이빨을 이용해 잘근잘근 씹어 대며 있는 힘껏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뾰족하게 솟은 유두에 찌릿찌릿 강한 자극이 가해졌다. 이전의 강하지만 부드러웠던 애무와는 전혀 달랐다.

벌벌 떨리는 몸이 완전히 경직되었다. 턱 아래를 간질이는 류주호의 갈색 머리칼은 바싹 말라 있었다. 온기현은 그 머리를 잡고 떼어 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흑, 흑……, 아, ……아아!”

까득.

신음을 흘리던 온기현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졌다. 류주호가 힘껏 기현의 유두를 깨문 것이다.

“흐윽…….”

아픔은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서웠다. 아무 말 없이 제 몸을 탐하는 류주호의 기세가, 표정이, 몸짓이, 모두 낯설었다.

날 것의 류주호가 생생하게 드러나 있었다. 사회화된 제어 장치가 전혀 듣지 않아,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포악성이 여실히 드러난 것처럼.

고요하지만 포학한 본성이.

“……읏, 흑.”

그럼에도, 자신의 몸은 가해지는 자극에 착실히 반응했다. 짧게 끊어지는 신음에 류주호는 더욱 세게 유두를 빨아들였다. 손을 내려 온기현의 얇은 살갗을 마구 더듬었다. 좀 더 온몸에 닿고 싶어 안달 난 행위 같기도 했고, 욕심껏 취하고 싶은 속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이는 행위 같기도 했다.

온기현이 류주호의 어깨를 밀치려 했으나, 미약한 저항이 들을 리 만무했다. 원체 단단한 몸이었다. 류주호는 벗기기 전에는 커다란 키와 훌륭한 비율 때문에 그렇게 근육이 붙은 몸처럼 보이지 않기도 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더욱 몸을 단련한 것인지, 전보다 훨씬 두드러진 근육은 땅속에 깊이 박힌 커다란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마른 허리와 복부를 거칠게 쓰다듬다가 그대로 내려와 기현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그에 몸이 움찔 튀어 올랐다. 류주호는 손자국이 빨갛게 남을 정도로 엉덩이를 손아귀에 쥐고는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온 말랑한 살까지 남김없이 제 손에 움켜쥘 것처럼 손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둔부를 양쪽으로 쩍 벌렸다. 굵은 엄지가 가운데의 엉덩이 골을 향한 것은 동시였다.

“자, 잠까, 하으……!”

주호야……, 주호야…….

온기현이 가느다란 음성으로 류주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탓에 류주호의 행동이 거칠어졌다.

젖꼭지를 씹고 빨아 대며 엄지를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온기현이 놀라서 소리를 터뜨렸다. 그의 손가락은 웬만한 평균 남성의 손가락보다 긴 편이었다. 대번에 안쪽의 점막을 비비며 들어왔다. 그것은 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젖은 내벽을 억지로 벌리며 더욱 깊숙이 침입했다.

“흐읏, 흑, 으.”

신음이 짧게 끊어졌다. 허리가 절로 앞으로 기울었다. 그에 엉덩이는 더욱 뒤로 밀리는 꼴이 되어 둔부가 좀 더 쉽게 벌어졌다.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손으로 짚어 체중을 지탱했다. 도저히 놔줄리 없는 악력 탓에 이미 몸에서는 버둥거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헉……. 헉…….”

류주호의 입에서는 거친 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탄성 어린 호흡을 귀에 담으며 온기현이 류주호의 목을 꽉 안았다.

낯설었다. 너무 낯선 모습이었고, 조금 섬뜩했다.

굶주림에 이성을 잃은 야생 동물을 달래듯, 류주호의 등까지 팔을 휘감고 얼굴을 그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훌쩍거리면서도 류주호의 목덜미에 축축한 혀를 내밀어 살살 쓸었다. 그리고 약한 힘으로 입술을 벌려 마른 목덜미를 춥, 하고 빨았다. 옅은 자국이 남았다.

“흐윽, 흑, 흐음…….”

너 좀 이상해. 그러니까 이제, 잠깐 놔줘. 응?

마치 류주호의 지금 상태에 본능적으로 대응하는 요령을 깨달은 것처럼, 온기현도 몸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다. 혀로 할짝할짝 류주호의 살갗을 핥았다. 그의 살에서는 장작이 타는 것 같은 냄새가 났다.

문득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목덜미에 제 젖은 볼을 비비며 훌쩍훌쩍 눈물을 삼켰다. 그러고는 주호야, 이제 좀……. 하고 막 운을 떼려던 찰나.

“아……!”

순식간에 몸이 불쑥 들어 올려졌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에 류주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욱 세게 줬다. 발아래가 붕 떠올랐다. 놀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허억, 하고 숨을 들이켰다. 류주호가 공중에 덜렁거리는 온기현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도록 위로 끌어 올렸다.

온기현은 알몸으로 류주호의 몸에 딱 엉겨 붙어 매달려 있는 꼴이 되었다. 순식간에 기현의 눈높이가 류주호의 이마 가까이에 닿았다. 그의 얼굴이 지척에서 보였다.

저를 지그시 쳐다보는 류주호의 눈은 터질 것처럼 붉었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흰자가 붉은빛으로 빛났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모든 감정이 토사물처럼 엉망으로 뒤섞여 밖으로 죄 드러남에 되레 표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듯도 했다.

마주친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곧이어 지익― 하는 지퍼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는.

“……읏!”

그가 온기현의 허리를 양손으로 쥐고는 아래로 내렸다. 벌어진 구멍으로 굵은 귀두가 푹 꽂혔다. 입이 떨리며 벌어졌다. 헉, 하고 한번 뱉어진 숨을 도로 삼킬 수가 없었다.

아래가 아직 완전히 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샌가부터 바짝 기립해 있던 류주호의 성기는, 온기현의 음부에 닿자마자 그 양감을 부풀렸다.

우악스럽게 침입하려 드는 성기를 피할 수가 없었다. 중력으로 인해 몸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아슬아슬함이 더해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류주호의 목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흐윽, 아, 아읏……. 잠, 잠깐만……. 아, 아…….”

“후우……. 큭. 헉…….”

가슴팍을 들썩이며 류주호가 심호흡했다. 곧이어 즈즛, 소리를 내며 빠듯하게 내벽을 밀던 귀두가 점점 더 안으로 들어왔다. 아래에서부터 내장을 밀어 올리는 살덩이는, 이미 선단이 조금 젖어 있었다. 풀어지지 않은 구멍이 점점 쉬이 벌어져 갔다. 익숙한 모양에 아래가 맞물려 끼워 맞춰지는 것처럼.

온기현의 허리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다.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할 곳이라고는 류주호의 몸뿐이었다.

“떠, 떨어질 것 같……. 흑…….”

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꽉 매달리듯 달라붙은 온기현의 허리를 류주호가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흑……! 아, 아, 아아……!”

성기를 완전히 밀어 넣었다. 허리를 아래에서 퍽, 하고 위로 쳐 올렸다. 온기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눈이 번쩍 떠지고, 벌어진 입가에서는 침이 조금 흘렀다.

류주호는 한번 또다시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는 무표정한 낯을 하고는 온기현의 입가에 흐른 타액을 샅샅이 핥았다.

류주호는 사고를 완전히 배제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저, 머릿속에는 이 몸속으로 어떻게 하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 것처럼 오로지 온기현의 안에 저를 집어넣는 행위만을 반복했다.

입술은 온기현의 얼굴 여기저기를 마구 더듬었다.

하얀 다리가 힘을 잃고 공중에서 덜렁거리자, 팔을 내려 그 다리를 제 팔의 오금에 걸쳐 지탱했다. 다리가 조금 위로 들려 몸이 반으로 접힌 상태가 된 아래가 절로 벌어졌고, 류주호의 성기가 뿌리까지 처박혔다.

“헉……. 크흑…….”

나직한 탄성을 터트린 류주호의 단단한 몸은 델 듯이 뜨거웠다. 성인 남성을 들어 안고 있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뜨겁게 날뛰는 것처럼 크게 불거진 상태였다.

철퍽!

젖은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릎을 살짝 굽힌 채 퍽, 퍽 하고 쳐 올리는 동작은 빠르기도 빨랐거니와 자못 천박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체를 앞뒤로 흔들며 좁은 안을 마구잡이로 찧어 댔다. 류주호의 턱이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해졌다.

“아, 아……. 주, 주호, 흑……. 너무…….”

너무 깊어, 주호야. 잠깐만. 잠깐만……. 응? 나 좀 내려놔 줘. 이거 이상해, 주호야…….

완전한 소리가 되지 못한 처량한 애원의 말이 잇새로 흘렀지만, 류주호는 좀 더 빠듯하게 다리를 고쳐 안을 뿐이었다.

“아아……! 아, 아, 흐아!”

온기현의 몸속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앞도 마찬가지였다. 무섭고, 두렵고, 약간의 통증을 동반한 성교임에도 그간 몇 번이고 몸을 섞어 온 터라 당시의 짜릿한 쾌감을 기억하는 온기현의 몸은 흥분해 있었다. 선단에서 튄 희멀건 액체로 인해 뱃가죽이 점점 젖어 갔다.

하지만, 그 흥분을 자각할 새도 없었다.

류주호는 미친 듯이 하체를 움직였다. 퍽, 하고 치고 들어오는 성기는 아래를 찢어발길 것처럼 우악스러웠다.

좀 더, 좀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 것처럼. 왜 이렇게까지밖에, 여기까지밖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 하는 사람처럼 연거푸 쳐 올리는 몸짓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온기현은 젖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몸을 덜덜 떨었다. 아래가 완전히 벌어진 느낌이었다. 내벽을 쾅쾅 때리는 어마어마한 살덩이가, 안을 마구 쑤셔댔다.

오싹함이 점점 커져 갔다. 류주호는 제 고환까지 안으로 처넣을 기세로 마구 찧고, 박고 있었다.

정말로 이러다가는 류주호의 뿌리로 이어진 커다란 고환까지 전부 들어올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아니었다. 덜컥 겁에 질린 온기현이 호흡을 들썩거렸다.

벌어진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져 있었다. 혹시라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도 않은 것 같은 생각에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아, 안 대, 아, 이, 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온기현의 말이, 흔들리는 박자에 따라 음절마다 끊겼다.

주호야. 이거 다 들어올 것 같아. 안 돼…….

단단한 어깨를 있는 힘껏 틀어쥐었다. 이미 온기현의 얼굴은 땀과 눈물과 타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다시금 퍽, 하고 쳐 올리는 동작에 온기현이 등을 굽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 류주호의 얼굴과 일직선에 놓이게 되었다.

혼곤하게 풀린 온기현의 흐리멍덩한 눈이 류주호의 눈과 마주쳤다. 입을 달싹이자 아무런 말 없이 거친 신음만 내뱉던 류주호가 입을 한껏 감쳐문다.

순순하게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저를 끊임없이 쳐다보는 눈이 극점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뜨거움의 한계를 넘어서면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하음……, 아, 흐……. 아아……!!”

하지만 입술이 맞물린 것도 잠시였다. 류주호는 온기현의 혀를 뽑을 것처럼 마구 빨아 댔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래를 마구 쳐 댔다. 말랑한 엉덩이와 완전히 땅땅해진 허벅지가 연신 철퍽거리는 마찰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허억, 헉, 큭.”

류주호의 가슴이 크게 부풀고 목 줄기에 돋아난 핏줄이 크게 맥동했다. 기현은 거의 실신할 것처럼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엄청난 기세로 몰아붙이던 류주호가 마지막으로 구멍을 찢을 듯이 쳐 올리며, 안으로 제 정액을 전부 쏟아 댔다. 구멍이 수축하며 안을 꽉 죄어 댔다. 그리고 팟, 하고 온기현의 성기에서도 맑은 물이 쏟아졌다.

쉴 새 없이 경련하는 온기현의 안쪽이 척척하게 젖어 갔다. 절정에 삼켜졌던 정신이 조금씩 점멸하듯 깜빡거렸다. 그러다 문득, 제 아래가 이러다가 완전히 벌어져 닫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무섬증이 일었다.

류주호의 고환만이 아니라 그의 과일 하나 크기만큼의 주먹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릿하게 벌어져, 류주호의 성기를 끝까지 삼키고 있었다.

“어흑, 흑……, 흐엉…….”

온기현이 어깨에 손톱을 박으며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류주호는 극렬한 절정의 여운을 아직까지 느끼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온기현의 콧등 위의 점을 혀로 핥고, 따끈하고 습한 볼과 보드랍고 말랑한 귓불까지 혀와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댔다.

히끅, 히끅 하고 울며 몸을 들썩이는 온기현의 등을 끌어안고 류주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침대 위로 온기현을 살며시 눕혔다.

“흑……. 이, 이제……, 으흑……!”

이제는 놔줄 것이라는 예상은 산산이 조각났다.

끈적하게 젖어 있는 안에서 류주호의 좆이 커다랗게 꿈틀거렸다. 습기 어린 밭은 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 누워 있어도 고개를 흔들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너무 이상했다. 오늘따라 류주호가 너무 이상하고, 낯설었다.

말없이 거칠게 좆을 처박는 행위는, 섹스라고 불러도 될지 모를 정도였다. 이것은 제 몸뚱어리를, 제 커다란 신체를 전부 넣을 수 없기에. 가장 무너뜨리기 쉬운 헐거운 곳으로 제 신체 일부를 쑤셔 넣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완전한 침략을 원하는 그의 거칠 것 없는 동작은, 흥분 속에서도 두려움을 만들어 냈다.

온기현이 제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류주호는 만족할 줄을 몰랐다.

또다시 아래를 키운 류주호가 제 것을 가득 물린 채, 온기현을 쳐다봤다. 류주호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눈은 완전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류주호의 땀을 닦아 주려 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간신히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류주호의 얼굴로 향하던 순간, 류주호가 불시에 그 손을 잡고는 제 가슴 쪽으로 끌어 내렸다.

“……이렇게 해도, 아직까지…….”

아직까지 속이 가라앉질 않아.

마치,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처럼.

어떻게 해도 멈추지 않을 것처럼.

온기현의 젖은 손이 류주호의 가슴을 덮었다. 손바닥을 쿵, 쿵 때려 대는 심장이 뼈를 가르고 살갗을 찢을 것처럼 거세게 울렸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류주호의 얼굴을 훑었다. 류주호의 미간이 괴로운 것처럼 조여들었다.

어……, 하며 입을 달싹이던 때, 류주호의 얼굴이 다시금 아까와 같은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크게 뒤로 물리더니 곧바로 재차 제 좆을 쑤셔 넣었다. 갑작스러운 진입에 허리가 펄쩍 튀며 놀란 것도 잠시, 악착같이 파고드는 움직임이 또다시 재개됐다.

행위 도중에도 류주호는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허릿짓을 하기도 했다. 급기야 온기현이 혼절하고 나서도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새까만 달빛이 으스러져 등대 아래에 기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낼 때까지도.

* * *

깜빡깜빡.

“하……. 으…….”

눈을 뜨자 바로 보인 건 낯선 천장이었다. 조명이 매립되어 몰딩으로 감싸여 네모로 뚫린 천장 가운데에,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알몸으로 축 늘어져 허리 아래로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있는 멍한 표정의 모습이.

헉, 하고 눈을 크게 뜬 온기현은 5초간의 인식의 과정을 거쳐서야, 그게 천장에 달린 거울이란 것을 알아챘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곳은 급하게 들어온 영흘도의 오래된 모텔이었다.

“……주호야.”

켈록.

거친 목에서 밭은기침이 터졌다. 요새 이놈의 목구멍은 아주 남아나질 않는다. 온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뿐이었다는 것도 지금에야 겨우 머릿속에 들어왔다. 류주호가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디 간 거지.

목이 말랐다. 비척비척 일어나 작은 냉장고를 열어 봤지만,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편의점 간 건가?’

몸을 움직이자 아래가 쓰라리고 아팠다. 거칠었던 섹스로 인한 여파였다.

류주호, 이 자식 진짜…….

작게 속으로 꿍얼거렸다. 몸을 짓누르는 나른한 감각 때문에 불평도 쉽지 않았다.

온기현이 목을 쓰다듬으며 핸드폰을 찾기 위해 제 옷을 뒤졌다. 충전하는 것을 잊어버렸지만, 다행히 20% 정도의 배터리가 남아 있었다.

두어 번의 터치로 류주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뚜르르르―.

귀에 박히는 핸드폰 연결음과 동시에, 테이블 위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어? 핸드폰이 왜 여깄지.”

어디 간 거야. 핸드폰까지 두고서는.

전화를 종료하며 설핏 걱정스러운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핸드폰에 나타난 시간은 어느덧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장성한 남성 어른임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잠깐 차에 볼일이라도 있는 거일 것이다. 그래도 핸드폰은 좀 챙겨서 다니지. 어느덧 몸을 힘들게 한 원망은 사라져,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챙겨 입었다.

쿨럭.

다시 한번 기침이 터졌다. 목이 칼칼하고 따끔거리는 게, 어쩐지 이러다가는 목감기라도 걸릴 것 같았다. 작게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어쩐다.

핸드폰을 두고 갔으니 어딜 갔는지 알 길도 없고, 당장 목이 마른 것도 급했다. 뻑뻑한 눈을 손등으로 비볐다. 잠시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냉장고 위 선반에 올려진 열쇠를 집어 들었다. 두껍고 기다란 플라스틱 손잡이가 아래로 딸랑거렸다.

혹시 엇갈리면 전화하겠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고심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오면서 편의점 하나 본 것 같은데.’

차로 이동하면서 눈앞을 스쳐 간 잔상이 흐릿했다. 핸드폰을 열어 근처 편의점을 검색했다. 다행히 약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체인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영업은 24시간.

이 정도면 걸어갈 만한 거리라고 생각하면서, 카운터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로비를 지나쳐 모텔 건물 밖으로 나왔다.

‘으, 추워.’

매서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몸을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오면서 혹시 몰라 주차장을 살펴봤지만, 차는 그대로 주차되어 있었다.

슬슬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류주호도 편의점에 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 주위에 이 시간에 갈 만한 곳이 그곳밖에 없지 않은가.

그럼 잠깐 바람도 쐴 겸 겸사겸사 갔다 오지 뭐. 약간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다리 사이가 아릿하게 벌어지는 느낌이 났다. 배 속이 엉망으로 찧어져, 싸하게 저릿한 느낌이 평소보다 더했다.

“…….”

류주호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은 기분 탓이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도 그렇게 얌전한 섹스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안쪽으로 더 들어오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욕심껏 살을 섞으려는, 원초적인 그것 이상이었다. 어딘가 삐걱대며 고장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물칼국수가 문제였나. 그래도 맛집으로 블로그에도 올라온 곳이었고, 딱히 자신은 이상이 없었다. 류주호가 자신도 몰랐던 갑각류 알레르기라도 있었던 건가 하고 심각하게 생각했다.

“흐으. 춥다.”

쌩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드문드문 위치한 민가는 불이 완전히 꺼져 있었고, 가로등은 제 구실을 하는 개수가 드물었다. 고양이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을 것처럼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핸드폰을 열어 위치를 확인했다. 여기서 코너만 돌면 편의점이 금방이었다.

어둠이 짙게 내린 길을 걸으며 앞쪽에 밝게 빛나는 조명을 눈에 담았다. ‘24시간’이라고 쓰여 있어도, 왠지 불안했는데 밝은 빛을 보는 순간 어쩐지 조금 안심되어 눈이 뜨였다.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편의점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조금 시끌시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편의점 앞에서 조금 비켜난 골목 구석에서 껄렁하게 보이는 남자들이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다소 경박하게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다.

관광객인가. 영흘도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울 근교의 섬인 만큼, 해변에 늘어선 펜션이 꽤 많았다. 저들도 이곳을 찾은 관광객 중 하나인 듯했다.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떼어 내며 아주 최소한의 물품만 갖춰 놓았을 것 같은 편의점 안으로 막 들어가려던 때였다.

“야.”

옆통수에 대고 시비조의 말이 들려왔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저들끼리 신나게 웃던 두 명이 실실거리는 낯으로 기현을 쳐다본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트레이닝 팬츠에 손을 꽂아 넣은 덩치가 크고 머리를 빡빡 민 녀석이 입에 꼬나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로 집는다. 그리고 온기현을 부른 다른 한 놈은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를 손으로 쓸며 삐딱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저요?”

“어, 그래. 너요. 씹새야.”

웬걸, 노란 머리가 대뜸 욕을 지껄이더니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는 온기현을 향해, 빡빡머리가 놀리는 조의 말을 던졌다.

“엄빠랑 놀러 왔니? 엉? 아님 뭐, 친구들이랑? 이 시간에 밖에 그렇게 하고 싸돌아다니면 존나 위험하다, 야. 심심하면 엉아들이랑 같이 놀래?”

“……안 심심한데요.”

왜 초면에 찍찍 반말이람. 겉으로 봐서는 저랑 나이도 얼마 차이 나지 않아 보였다. 아니, 막 고등학교나 졸업했을까. 저보다 어릴 수도 있었다.

“안 심심하대. 푸하, 개웃겨.”

“와, 목소리 봐. 갭 존나.”

“씨이발. 생겨 먹은 건 존나 응애 할 것 같은데. 응애 해 봐, 응애―.”

“…….”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시비는 무시가 답이었다. 술 냄새도 풍기는 걸 보니, 웬만하게 응수해서는 내리 저럴 것이 분명했다.

“저는 물 사러 와서요. 그럼 이만. 살펴 가세요.”

살짝 고개를 숙인 온기현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얼른 물만 사고 들어가야지. 류주호는 어딜 간 거야, 대체.’

속으로 투덜대며 500밀리 생수 두 개, 그리고 내일 아침에 먹을 커피 두 개까지 집고는 계산을 했다. 편의점 주인일 듯한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에게 카드로 결제를 하고는 봉지에 담아서 가게를 나섰다.

편의점 밖으로 나오니 불량배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류주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혹시 키 되게 크고 눈은 갈색이고 엄청나게 잘생긴 남자가 여기 온 적 없냐고 할아버지에게 물어보니, 그런 놈은 본 적 없다고 했다. 편의점에도 안 왔었다는 건데…….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혹시 지금쯤 방에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열어서 류주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류주호]

발신자명이 뜨는 것까지 확인하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신호 연결음이 막 들리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큭큭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꺾어진 골목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어쩐지 기분 나쁜 웃음에 미간을 찌푸린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실루엣은 두 사람이 쭈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손으로 무언가 봉지를 털고 있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다닥.

야옹―.

그때, 검은색 길고양이 한 마리가 구석에 숨어 있다가 온기현이 있는 쪽으로 달려오면서 가늘게 울었다. 그에 쭈그려 앉아 있던 둘이 고개를 휙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아.”

“잉?”

히죽.

한 놈이 징그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걸음을 재빨리 옮겼다. 그때.

“야.”

“네? ……헉!”

뒤를 돌아봄과 동시에, 불쑥 강한 힘으로 어깨가 잡혔다. 얼떨떨하게 핸드폰을 붙들고는 걸음을 주춤했다.

“어디 가니?”

“네?”

“어디 가냐고, 새끼야.”

역시나, 편의점 앞에서 봤던 그 두 놈들이었다.

“아, 진짜. 이거 놔요.”

“어쭈, 성질도 부리니? 응?”

“…….”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하는 온기현을 보며 저들끼리 웃음이 팍, 터졌다. 완전히 얕잡아 보고 놀리는 투였다. 코끝이 매워서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매캐하고 불쾌한 냄새가 코 속으로 확 풍겼다.

“……돈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저 현금 가진 것 없고요. 뽑아 주려고 해도 편의점에 ATM 기계도 없어서 못 줘요. 지금 여기서 저랑 비생산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 거라고요.”

온기현이 신경질적으로 어깨에 얹힌 팔을 어깻짓으로 쳐 내리며 똑 부러지게 말했다.

“허얼. 까칠하다. 근데 난 그런 애랑 노는 게 좋더라고. 튀는 맛이 있잖아.”

노란 머리가 킬킬대며 웃는다.

“너무 그러지 말고. 응? 우리 펜션 여기서 쫌만 걸어가면 있어. 가자, 좋은 거 보여 줄 테니까. 너도 재밌을걸.”

빡빡머리가 비실거리는 낯으로 그렇게 말하면서 온기현의 허리 안쪽으로 불쑥 굵은 팔을 집어넣어 왔다. 순간적으로 몸을 옆으로 확 빼냈다.

“난 볼일 없다고, 너네한테.”

당황함을 숨기며 날카롭게 말을 뱉자, 허리를 잡고 있던 놈의 표정이 굳었다. 덩달아 노란 머리의 얼굴도 삽시에 가라앉았다. 순간, 솜털이 삐죽 섰다.

빡빡머리가 하 참, 하고 웃기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너 아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야밤에 그러고 싸돌아다니면.”

“뭐?”

“위험하다고 했지?”

“!!”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놈이 양옆에서 온기현의 어깨를 확 붙들어 맸다. 그러더니 우악스러운 힘으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뭐야?!

둔한 감각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채는 게 늦었다. 그리고, 놀라서 숨을 들이켠 온기현이 막 버둥거리던 때.

퍽!

“악!!!”

한쪽 어깨가 순간 가벼워지더니, 뼈와 뼈가 맞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란 머리가 뒤로 쿠당탕 나뒹굴었다.

“……?!”

놀라서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무표정한 낯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류주호가 서 있었다. 류주호는 땀에 젖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겼다. 땅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노란 머리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욕설을 동시에 내뱉으며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했다.

“주…….”

“너 뭐야, 이 새끼야!”

빡빡머리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 손.”

“뭐?”

“……으면 좋겠는데.”

“뭐라고?”

인상을 팍 찌푸린 놈이 되묻자, 류주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까딱 기울이며 심상한 말을 뱉었다.

“더러운 손 떼라고.”

“뭐, 더럽? 이 새끼가. 너 뭔데? 어? 얘 알아? 친구야?”

놈이 바닥으로 침을 칵 뱉었다.

“야. 기분 좋았는데 잡치네, 씨발.”

“…….”

“왜. 너도 같이 가서 놀래? 엉?”

이죽거리고 말하며 빡빡머리가 굳어 있는 온기현의 어깨를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겨 안았다. 제 쪽 대가리 수와 제 덩치만 믿고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온기현을 완전 물로 보고 있었다.

“아, 놓으……!”

온기현이 막 입을 떼려던 때, 뒤이어 일어난 일은 순식간이었다. 류주호가 덩치 큰 놈의 뒷덜미를 덥석 잡아채더니, 뒤로 휙 던져 버렸다. 빡빡머리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잽싸게 몸을 일으키며 류주호를 향해 발길질했다. 비스듬하게 복부를 가격당한 류주호의 낯이 날카롭게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우지끈,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류주호가 주먹으로 놈의 얼굴을 거세게 내려쳤다.

“!!”

온기현이 경악스러움에 눈을 크게 떴다. 류주호는 약간 미친 사람 같았다.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일방적인 폭행이 시작됐다. 빡빡머리가 입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거친 쌍욕을 지껄였다. 팔을 부웅 휘두르며 류주호에게 공격을 가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잠깐의 틈을 노려 노란 머리가 소리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류주호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 나가떨어졌다.

“헉…….”

너무 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았다.

뻑! 뻑!

두툼한 몸집을 가진 빡빡머리의 얼굴에 점점 피가 크게 번져 갔다. 그놈을 눕혀 놓고 위에 올라탄 상태에서 계속해서 주먹을 휘두른 류주호의 손이 시뻘겋게 젖어 갔다.

“그, 그만……. 그만해, 주호야.”

제가 아는 사람이 맞는 건가 싶었다. 새된 소리로 그만하라고 만류하는 말에도 류주호는 전혀 듣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기어이, 빡빡머리의 눈깔이 뒤로 넘어갔다.

온기현이 냅다 달려가서 류주호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그, 그러다 죽겠어!!!”

그의 몸이 뚝 멈췄다.

“죽, 죽겠다구. 그 사람…….”

“하아……. 하아…….”

꽉 잡은 류주호의 팔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속으로 채 갈무리하지 못한 격분이 전율을 일으키듯, 근육 하나하나가 툭툭 불거지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 이놈들이 돼먹지 못한 놈들인 것은 맞았다. 그러나, 류주호의 상태도 그렇게 정상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하…….”

류주호가 우뚝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씨근덕거렸다. 그러더니 피범벅이 된 제 손을 내려다봤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기이한 것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얼떨떨하게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문득 류주호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기현을 향해 나직하게 속삭였다.

“……어디 갔었어.”

류주호는 피떡이 되어 바닥에 뒤집혀 있는 이들의 상태는 일절 관심도 주지 않았다. 시선은 오로지 온기현만을 향했다.

날카로운 신경이 모조리 한 사람에게 쏠렸다. 온기현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잔뜩 쉬어 버린 목 때문에 터지는 목소리가 죄 갈라졌다.

멍한 머리로 류주호의 대답에 횡설수설 대답했다. 제가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양 제 위치를 물어오는 말에 저도 상황을 확연히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 어? 난 네가……. 일어났는데 네가 없어서……. 잠깐 편의점에……. 너, 너는…….”

“……잠이 안 와서.”

“…….”

기현을 쳐다보는 류주호의 시선이 집요했다. 빙글빙글 도는 머리로 멀뚱히 서 있는 온기현을 향해 바싹 다가온 류주호에게서 알싸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정면에서 바라본 류주호의 얼굴을 보고 온기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얼굴에는 새빨간 피가 튀어 있었다. 평연한 낯에 어울리지 않는.

“……너, 얼굴에.”

벙긋거리던 입에서 겨우 나온 말은 속삭이듯 작았다. 하지만 천천히 살펴보니, 류주호의 옷 앞섶에도 피가 튀어 있었고, 가까이서 본 류주호의 주먹은 아예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물론, 그의 피는 한 방울도 없었다.

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노란 머리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깜짝 놀란 온기현의 몸이 펄쩍 뛰었다.

“아. 이, 이 사람들, 어떻…….”

그때.

삐익―,

“거기, 거기! 멈추세요!”

호루라기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 바닥을 향해 있었다. 플래시 라이트였다.

갑자기 빛이 쏟아져 눈을 찌푸리던 온기현이 호루라기를 불며 소리치는 중년 남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편의점 주인 할아버지가 약간 당황한 얼굴로 뒤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가까이 다가온 경찰이 작금의 상황을 보고 아연함에 입을 벌렸다. 바닥에 나뒹굴어 신음을 흘리는 남자 둘과 얼떨떨한 모습의 기현, 그리고 그 앞을 막아선 온통 피를 묻힌 채로 선 남자에게로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플래시 라이트를 아래로 내린 경찰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소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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