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Lost Winner (2)
“하아…….”
침대 위에 모로 누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축 늘어졌다. 침대와 한 몸이 된 듯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결국 그날은 무슨 정신으로 아르바이트를 하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겨우 시간 내에 도착해서 정신없이 몸을 굴리다 보니 어느새 일을 마칠 시간이었다.
류주호가 했던 말을 계속 생각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쉴 틈 없이 떠오르는 그의 말에 자꾸만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벌써 이틀이 지났다.
물컹한 볼이 베개 위에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얼굴을 뉜 채로 눈만 껌벅이다가 흐느적거리는 팔로 핸드폰을 들었다. 의미 없이 열었다가 닫았다가를 반복했다. 도착한 전화나 메시지는 한 개도 없었다. 오므린 입이 비죽 튀어나왔다.
‘망할 놈.’
나쁜 새끼.
싸가지없는 새끼.
……사람 헷갈리게 하지나 말든가.
최근 들어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콤하게 대해 주던 류주호였다.
특히 그날은 더더욱 이상했다. 이상할 정도로 다정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예고도 없이 사람을 진창으로 처박았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데려다 놓고는 발밑이 꺼지는 것을 절감할 정도로 사람을 밑바닥으로 추락시켰다.
“하아…….”
망할 류주호.
“헐. 야, 이거 다 명품 아냐? 대박이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한숨을 쉬느라 잔뜩 쪼그라든 등 뒤로 까불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하아.”
“와. 이거 겨우내 다 입지도 못하겠다. 코트에, 바지에, 셔츠에. 너 이거 진짜 뭐야?”
연신 입을 놀리던 연채우가, 새 옷이 그대로 담긴 채 구석에 팽개쳐진 쇼핑백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호들갑을 떨어 대는 통에 깊은 한숨이 묻혀 버렸다.
대답 없이 누워 있던 온기현이 “글쎄.” 하고 말을 웅얼거리자, 잔뜩 떠들다가 흐음 소리를 낸 연채우가 기현을 향해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그냥. 누가 빌려줬어.”
“뭐어? 네가 네 돈으로 샀다고 해도 안 믿을 판에, 누가 빌려주냐, 이런 명품을. 아니, 아무리 선물이라고 해도 명품을 이렇게 한 바가지를 준다고? 온기현! 야, 너 똑바로 대답해. 너 이 새끼, 설마…….”
“설마 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온기현이 뜨끔해 대답이 잠시 뾰족하게 올라갔다.
“……짝퉁 장사하냐?”
“그딴 소리 할 거면 가, 쫌.”
“아니, 아니면 이게 다 뭔데.”
“가게에 연락해서 다시 가져가라고 할 거야. 내 거 아니거든?”
연채우가 꼬치꼬치 캐묻는 탓에 대충 얼버무리며 머리를 감쌌다.
하지만 그런 온기현의 모습을 보던 연채우의 시선이 더욱 수상한 눈초리로 바뀌었다.
“너 요새 진짜 이상해.”
“내가 뭘.”
“아니, 저번에는 갑자기 재수 없게 메시지 말끝마다 ‘히읗’을 붙이질 않나. 그것도 한 개씩. 내가 그래서 너 메신저 피싱인 줄 알고 신고할 뻔했잖아.”
“……요새 그게 유행이라던데.”
“웃기는 소리 한다. 유행은 개뿔. 사람 은근히 비꼬는 게 퍽이나 유행이겠다.”
허, 하고 웃은 연채우가 금세 쇼핑백 더미에서 흥미를 잃었는지, 온기현이 누워 있는 침대 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에 싸구려 스프링의 탄력으로 인해 기현의 몸이 출렁였다. 번데기처럼 웅크린 상태 그대로 몸이 잘게 흔들렸다.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연채우가 흘끔거리면서 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온기현은 연채우에게 류주호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연채우는 제가 한 사람만 바라보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사람만 짝사랑하던 사실을. 하지만 그게 류주호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린 적은 없었고, 또 류주호와 있었던 일련의 일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즉, 제가 오랜 기간 짝사랑하던 그와 어쩌다 몸을 섞었고, 또 얼마간 야릇한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류주호가 좀…… 잘해 주었고, 또 꽤 다정하게 대했었고. 그러다 결국은…….
거기까지 생각한 온기현이 대뜸 몸을 일으켰다. 가뜩이나 덥수룩한 머리가 여기저기 뻗쳐서 엉망이었다. 몸을 옹송그린 채로 머리를 손끝으로 부산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어렵게 입을 열었다.
“……있잖아.”
“응. 뭐가 있는데.”
“그…….”
잠시 뜸을 들인 온기현이 달싹거리다가 다시금 말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냐.”
“뭐냐. 싱겁긴.”
온기현은 입을 닫았다. 연채우한테 “이건 아는 사람 얘기인데…….” 하고 운을 떼어도, 연채우는 눈치가 빠른 놈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귀신같이 알아차릴 것이다. 괜한 걱정도 끼치기 싫었고, 또 이제껏 동성 간의 문제에 있어서 안 좋은 경험을 숱하게 겪어 온 연채우가 어떤 반응을 할지는 뻔할 뻔 자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궁금증을 우물우물 입에 담았다.
“채우야. 너, 스카이 타워 알지.”
“스카이 타워? 알지.”
“혹시 거기 81층에 뭐가 있는 줄 알아?”
“웬 81층?”
연채우가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얘가 그런 걸 왜 물어보지, 하는 표정이었다. 너무 구체적인 숫자를 불렀나, 하는 생각에 온기현이 아무것도 아냐, 라고 말하려던 때였다.
“아, 거기 엄청 유명한 레스토랑 있지 않나? 나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데이트 특집 기사에 뜬 거 봤었어. 아마 뭐랬더라……. ‘잠실에서 즐기는 데이트 코스’, 뭐 그런 제목이었던 것 같다. 석촌 호수에서 가볍게 산책하면서 길거리 공연도 보고, 스카이 타워 전망대도 갔다가, 81층에 있는 코스 요리 보면서 야경 즐기는 아주 흔한 데이트 코스 소개였을걸?”
“…….”
순간 벙긋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류주호와 자신이 했던 코스 그대로였다.
“그리고 81층 레스토랑이 왜 유명하냐면, 그 위층 호텔 방까지 직통으로 연결돼 있다고 했어. VIP 엘베 타면 바로 이어져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일단 데이트할 때, 코스 요리에 와인 한 잔 딱 곁들이면서 로맨틱한 분위기에 빠트린 뒤에, 그 분위기 안 깨트리고 바로 침대까지 직행하는 코스라더라. 건물 누가 지었는지 아주 낭만적으로 섹스를 권유한다고 한창 떠들었었는데. 나도 지금 기억난다. 근데 왜?”
“……아무것도 아냐.”
뭐야, 류주호.
도로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뉘며 다시금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네 일상에 관여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하던 그의 표정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제 시간을 돈으로 산다는 말이 너무나 수치스러웠기에 당시는 얼굴도 보기 싫었다. 류주호가 이제까지 누구와 무슨 관계를 어떻게 맺어 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다지 정상적인 관계를 맺어 온 것은 아닐 것 같았다.
“그걸 왜 물어? 그런 데는 평생 흥미도 없던 녀석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연채우가 수상하다는 말투로 제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설마 이게 내 얘기란 걸 들켰나? 싶어, 스리슬쩍 몸을 움츠리면서 손가락을 피했다.
“왜? 돈 많이 벌어서 나 코스 요리 배 터지게 먹게 해 주려고? 어?”
“어휴.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손 좀 치워 봐, 하고 어깨를 털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연채우의 얘기를 들으니 그러잖아도 터질 것 같던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문득 뒤에서 얕은 한숨이 들려왔다. 여태껏 신나게 떠들던 연채우가 침대 매트리스 옆으로 등을 기댔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현아.”
“응.”
“너, 예전에 나한테 물어봤던 거 기억나?”
“뭘?”
“……감후석, 이라고 아냐고 물어봤었잖아.”
“?”
온기현이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켰다. 앞머리를 정리하느라 손으로 헤치며 연채우의 뒤통수를 바라봤다.
“왜? 갑자기?”
“어? 아니……. 음. 그때는 몰랐는데. 나, 사실 아는 사람이더라고.”
“그랬어?”
“응.”
“어떻게 아는데? 응?”
“뭐, 이래저래? 오가다 좀 마주쳤던 사이? 라고 할까…….”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웅얼거리는 연채우가 제 목덜미를 손으로 감싸며 쓸었다. 그 목덜미가 타오를 듯 붉어져 있었다.
그리고 입을 닫아 버렸다.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연채우가 “아무것도 아냐.”라며 배고프다고 투덜거리는 말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자연스레 찬장을 뒤지는 연채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평소였다면 뭐 때문에 그러는지 더 캐물었겠지만, 지금은 제 일만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작게 말았다.
* * *
“기현 학생, 괜찮아?”
멍하니 서 있던 온기현이 불시에 들린 물음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고깃집 사장님이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지금 뭘 하고 있다가 넋 놓고 있었는지 자각했다. 지금 저는 한창 일하던 도중이었다. 테이블마다 새롭게 보충해야 하는 티슈 봉지를 뜯어내다가 그대로 손을 멈춘 상태였다.
사장의 말에 온기현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네,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고요.”라고 대답했다. 오픈 시간 전에 아직 장사 준비로 한창인 시간이라 테이블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여러 가지 상념이 머릿속에 그득했다. 누구나 알 법한 유명한 데이트 코스를 자신과 함께한 류주호의 의중이 궁금했다. 마지막에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그날 하루가 정말 행복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붕 뜬 설렘은 아직도 생생했으니까.
하지만 류주호는 여전히 연락 한 통이 없었다.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끝인 건가.’
그냥 이렇게 진창인 채로, 끝나는 건가.
그냥 이렇게 서로 연락이 닿지 않고, 그가 자신을 찾아오지 않고, 자신의 수업이 끝나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고, 아르바이트에서 집까지 데려다주지 않고, 밥도 같이 먹지 않고, 얼굴도 보지 않고, 이대로 학기가 끝나 버리면.
그냥, 이대로.
바스락.
얇은 봉지가 가느다랗게 뒤틀리는 소리를 내며 손끝 아래에서 구겨졌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다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조금 시큰거렸다. 애써 눈앞에 있는 티슈 봉지로 정신을 집중했다.
“기현 학생! 다 했어?”
“아, 네네!”
주방에서 들린 사장의 물음에 온기현이 냉큼 대답했다.
얼른 마저 정리를 마치고 나서, 시계를 올려다봤다. 마침 딱 오픈 시간이었다. 대학가 주변 고깃집의 특성상 오후 5시만 돼도 느닷없이 손님이 들이닥칠 수 있기에 오픈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편이었다.
가게 안의 조명을 전부 환하게 켜고 문을 열자, 정말 기다렸다는 듯이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들어온 것은 남녀 한 쌍의 커플이었다. 그리고 앞서 후드 티를 입은 남자 뒤를 따라 들어온 화려한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알은체를 했다.
“어…….”
온기현의 입에서 의미 없는 음성이 샜다. 안면이 있는 여자였다. 분명,
“예전에 오셨던…….”
“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류주호랑 그때 와서 한번 먹고 갔죠. 고기 맛있어서 또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여기 앉으세요.”
그랬다. 류주호와 함께 가게에 왔었던 여자다.
서둘러 자리를 안내했다. 여자는 후드 티를 입은 남자 팔짱을 끼고서는 “여기 맛있어.”라고 발랄하게 말하며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류주호랑 왔을 때는 저런 느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후드 티를 입은 남자 옆에서는 한없이 밝게 웃고 있었다.
“주문은 뭐로 하시겠어요?”
“음, 안창살 맛있던데. 그거 2인분 주세요.”
여자가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화답했다.
“술은 어떻게 할까요?”
저번에 호기로운 목소리로 “데슬라 주세요.” 하던 말이 생각나서 저번과 같은 걸로 가져다드릴까요, 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속사포처럼 웃음 어린 말을 쏟아 냈다.
“저 술 잘 못 해서요. 사이다 주세요. 자기도 사이다 먹을래?”
“아니. 자기만 마셔.”
사이다 하나요. 여자가 검지를 들고 그렇게 말했다. 온기현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설핏 끄덕였다.
주문한 고기와 사이다를 갖다주고 나서 다른 잡일을 하는 동안, 그쪽 테이블을 흘끔 쳐다봤다. 식사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얼굴을 붉히고 쑥스럽게 웃어 대는 여자는 과연, 사랑을 하는 이의 얼굴이었다. 류주호 앞에서는 입이 좀 건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미인의 화사한 분위기가 돋보였다.
술이 없는 자리는 빠르게 끝났다. 다른 손님이 오기 전에 그 둘은 깔끔하게 2인분을 해치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드 티 입은 남자가 먼저 나가고, 여자가 계산대 앞에 섰다.
“2만 5천 원입니다.”
“카드로 해 주세요.”
여자가 내민 카드는 광이 나는 검은색에 금색의 테두리가 입혀진 카드였다. 어쩐지 때도 타면 안 될 것처럼 카드 자체도 값비싸 보여서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류주호랑, 조 모임 잘 끝났어요?”
“네?”
갑작스레 여자의 입에서 나온 류주호의 이름에 몸을 움칠 굳히며 계산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봤다.
“음? 잘 안 되셨나? 하하. 뭐, 그럴 수밖에요. 성격이랑 주둥이가 워낙 좀 필터가 없잖아요.”
“아……. 네, 맞아요. 많이 그렇죠.”
“아하하. 완전 빠른 수긍. 진짜 웃기시다.”
온기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큭큭거리던 여자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더니 물 만난 고기처럼 말을 이었다.
“옛날부터 그랬어요. 완전 싸가지가 바가지여서는.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 재수가 없어질까요?”
그러고는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어이없어하는 숨을 터트렸다.
“근데 또 운은 좋아서, 웬만한 일에서는 다 제멋대로라니까요. 글쎄, 어떨 때는 길 가다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네, 네. 맞아요. 그러게요.
“걔랑 웃는 얼굴로 얘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걸요? 얼굴만 잘생기면 뭐 해요. 허우대만 멀쩡하면 뭐 해. 아무렇게나 해도 저 좋다는 사람이 넘쳐나니까 그런 되바라진 성격이 된 거라고요. 안 그래요?”
네, 그러게요. 맞아요. 완전 개싸가지예요.
격하게 공감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손짓까지 섞어 가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제까지 쌓인 게 많은 것을 죄 털어놓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다. 또 얼마나……, 하. 진짜 말도 못 해요. 온 세상 여자의 적이에요, 적! 아니, 인류의 적이에요. 아주 어디 가서 된통 당해야 해요. 제가 차마 심한 말은 못 하지만요. 그냥 가끔, 티셔츠 거꾸로 입고 나와서 개쪽당했으면 좋겠고요, 아닌 밤중에 덜 굳은 시멘트에 발이 빠졌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깔끔하게 어디 한가한 외계인한테 납치라도 당해서 정신 개조받았으면 좋겠네요.”
“…….”
흥분한 여자가 씩씩거리다가 예쁜 입술에 반듯한 곡선으로 씩 미소 지었다. 꼭 악마가 빙의한 것처럼 눈이 희게 빛났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손을 꼼지락거렸다. 시멘트에, 외계인의 납치에다가 정신 개조라니. 평소에 류주호를 가지고 뭘 참고해서 시뮬레이션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요.”
“헐, 어머.”
문득 그렇게 중얼거리자 여자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놀람을 표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온기현이 어색한 몸짓으로 카드를 들고 한 손으로 POS기를 찍으며 카드를 긁었다. 그걸 보며 여자가 그제야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류주호랑 되게 친해지셨나 봐요.”
“아뇨, 별로요. 안 친해요.”
온기현이 극구 부인하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래도 여자는 귓등으로 듣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까지 굳이 입에 담지 않고 그저 싱긋 웃었다.
“뭐, 친구가 생기면 좋죠. 걔는 그나마 이제까지 친하다고 할 만한 친구가 집에서 키우는 셰퍼드뿐이었을걸요. 걔한테만 웃더라고요. 워낙 어릴 때부터 길러서 따르던 개여서요. 동물한테는 의외로 친절해요, 걔가. 뭐, 안타깝게도 수명이 돼서 진작에 무지개다리를 건넜지만요.”
말로는 욕하는 것 같으면서도 언뜻 자세히 들어 보면 가까운 사이라는 느낌이었다. 툭툭 던지는 말투에서 친근함이 배어났다.
“아……. 어릴 때부터…….”
“아, 이 말씀을 안 드렸구나. 소꿉친구예요. 가족끼리 다 아는. 그래서 제 앞에서 걔 쌍욕해도 전 다 이해해요. 뭣하면 같이 욕해 줄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에 어색하게 웃음 지으려 입꼬리를 올리려다가 곧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어떻게 돼요?”
“이름이요?”
“네. 저기요, 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온기현이요.”
멋쩍게 볼을 긁적이며 대답하자, 양희인이 말을 이었다.
“저는 양희인이라고 해요. 그리고 저 사람은, 제 남자 친구.”
그렇게 고갯짓을 한 양희인이 큭 웃으며 귀엽죠, 하고 덧붙였다. 슬쩍 밖을 내다보니 후드 티를 입은 양희인의 남자 친구가 얌전한 얼굴로 멀뚱히 서서 양희인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털이 북슬북슬한 사모예드 같았다.
온기현이 열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긁었다. POS기가 영수증을 뱉어 내는 사이에 양희인이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하아, 곧 헤어져야 하긴 하지만. 앗! 제가 두 번째 만난 사람한테 별 얘기를 다 하네요. 그것도 이런 데 서서. 그쵸? 괜히 친구한테 털어놓는 것처럼 편하게 얘기하게 돼서……. 죄송해요.”
“아,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온기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양희인이 저도 모르게 입에 담은 사적인 부분까지 굳이 아는 척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근데 진짜, 되게 친근해요. 아. 다른 의미는 아니고요. 그냥 뭐랄까. 같은 적을 가진 동지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요……? 네, 감사해요.”
목을 손바닥으로 쓸며 고개를 살짝 꾸벅하고 숙였다. 끝에 붙은 저에게 호감을 표하는 말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어서 몸이 삐거덕거렸다. 그랬더니, 양희인이 입으로 손을 가리지 않고 “으하학!”, 특유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재밌으시다. 아!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네??”
“너무 갑작스러웠나요? 다른 게 아니라, 혹시 만나는 사람 없으면 제 주변 사람한테 소개해 주고 싶어서요. 네? 있어요?”
“어, 없는데요. 그리고 전 괜찮아요. 여자 친구, 같은 거 관심도 없고. 지금은 딱히. 아무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흐음, 그래요?”
양희인이 약간 고개를 갸웃하며 고심하는 표정을 했다.
“귀여운 남자 좋아하는 걔한테 딱인데. 어딘지 모르게 섹시한 점도…….”라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그럼, 이상형은 있어요?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거나.”
“이상, 형이요?”
순간 뇌리에 류주호의 얼굴이 팟 떠올랐다.
그런 자신에게 당황스러워서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얼른 떠오른 얼굴을 털어 버리기 위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온기현 미쳤구나.
그딴 말을 듣고도, 아직도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 약간 가슴이 들뜬다. 하늘 위에서 불안하게 휘청거리던 그때, 그가 저에게 내민 커다란 손이 생각났다.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던 자신을 상상했다. 안 떨어지게 꽉 잡아 주겠다는 류주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뜨거운 손바닥의 감촉을, 그 다정한 감촉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하지만 자신은 이미 그를 밀쳐 내 버렸고 그도 자신의 감정을 싸구려 취급했다. 최악으로 치달은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니, 정말 그래도.
온기현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밖에서 기다리던 양희인의 남자 친구가 “자기야,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라고 말하며 문을 열었다. 양희인은 “아냐, 아냐. 갈게.”라고 발랄하게 대답했다.
“여기, 카드요.”
“아! 영수증은 버려 주셔도 돼요.”
“네. 또 오세요.”
“그럴게요. 기현 씨 보러 또 와야지.”
장난스레 피식 웃은 양희인이 카드를 지갑에 쏙 집어넣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에 결 좋은 머리가 공중에 찰랑였다.
말은 다소 거칠고 직설적이어도 옷차림이나 몸 매무새 자체가 단정했다. 여유로운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티가 났다. 사람을 굳이 구분한다면 류주호와 같은 부류, 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사고 회로까지도.
“아.”
그만하자.
이렇게 자꾸만 류주호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버릇은 정말 옳지 않았다. 앞치마에 손을 탁탁 털어 닦았다.
* * *
여전히 연락이 없는 나흘째.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만 갔다.
짧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류주호가 없던 원래의 일상이 이랬었구나, 하고 아득한 감상이 들 정도로 나흘이 길게도 느껴졌다.
기현은 강의실 안에서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로 교재 위로 펜을 올려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앞의 강단에서는 교수가 열띤 강의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집중되지 않았다. 제 앞에 놓인 노트북의 팬 소음과 맞물려, 그저 배경음처럼 먹먹하게 들릴 뿐이었다.
턱 아래로 손을 괴었다.
학교, 고깃집과 집을 전전하는 동안, 류주호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간간이 누군가 ‘류’, ‘선배’ 어쩌고 말하는 것을 엿듣기만 해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 속으로 개새끼, 미친놈, 있는 대로 욕을 하면서도 그 원망스러운 마음이 자꾸만 ‘그의 부재’ 쪽으로 점점 쏠리고 있었다.
대체 어디 갔느냐고.
나타나서 변명이라도 하라고 말이다. 정강이라도 걷어차 주게.
그와 몸을 섞고 나서부터 언제나 당연하게 달고 다녔던 사타구니 안쪽의 둔통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샤워할 때도 제 몸을 보며 괜스레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류주호가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빼곡하게 채워 놓았던 울혈도 어느새 완전히 희미해져 있었다.
류주호가 곁에 없는 며칠이 우스울 정도로 확연히 제 눈으로 확인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실감이 났다.
“……후.”
위잉―.
얕게 터지는 숨에 섞여 작게 진동이 울렸다.
앞으로 힐끔 눈길을 주다가 몰래 핸드폰을 확인했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010―××88―0××0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메시지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이번에 새롭게 과대로 선출된, 1×학번 심현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메시지를 드리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그렇게 시작된 메시지는 꽤 길었다. 중간중간 문단까지 줄을 띄워 가며 한참을 늘어져 있었다.
말은 이랬다. 이전 문제를 일으켰던 과대가 징계를 받고 퇴학 절차를 밟게 되어 자신이 과대로 새롭게 선출되었고, 불미스러운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그리고 비록 자신이 연루된 사건은 아니지만, 한국대 경영학과에서 안 좋은 기억을 가지게 된 사람들을 무관심 속에 방임하고 싶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결론은 오늘 저녁에 시간이 되면 술자리에 함께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그때 신체적, 심리적으로 피해를 입은 여학생들과 그리고 온기현까지.
“……예,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고요. 가볍게 쪽지 시험을…….”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내려 보다, 교수의 말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쪽지 시험 범위를 알려 준다는 말에 혼란스러운 머리로 재빨리 교재 위에 표시하려 했으나 이미 교수는 다음 강의를 기약하며 강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입에서 하, 하고 허망한 탄식이 터졌다. 정신 차려야지, 바보같이 넋 놓고 있지 말아야지, 수없이 다짐했던 말을 다시금 되뇌었다.
그리고 교수가 강의실을 빠져나간 후,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일어서려던 때, 온기현이 핸드폰을 들었다.
자신은 이전에 있었던 일은 이제 괜찮으니 참석하지 않겠다는 답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과 활동에 이 이상 참여할 여력도 없었고, 온기현에게 있어서 ‘안 좋은 기억’이란 그날 일은 댈 것도 아니었다. 훨씬 더 안 좋은 기억은 다른 곳에 있었으니.
그러나 그때.
“……저, 선배님.”
“?”
캡 모자의 챙 위쪽에서 들려오는 말에 답장을 보내다 말고 온기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여러 번 깜박이다가, 말을 건 여자애를 알아보고서는 어, 하고 단발의 음성을 냈다.
“안녕하세요. 저, 그때…… 축제 때 도와주셨던…….”
“네, 안녕하세요.”
온기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때 온기현에게 옷가지를 가져다주었던 여학생이다. 피해 여학생 중 한 명인.
같은 강의를 듣고 있었구나, 단순한 감상을 흘렸다.
여자애는 온기현을 보며 약간 우물쭈물하는 자세로 말을 망설였다. 어쩐지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강의실을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온기현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혹시, 심현석 과대 메시지 받으셨어요?”
“네. 방금요.”
“오늘, 혹시 오실 수 있으세요?”
조심스럽게 던지는 질문에 온기현이 대답을 바로 하지 못하고 있자, 여학생이 옅게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꼭 와 주세요. 저희, 그때 신입생 여자애들끼리 그날 이후로 선배님들 얘기 많이 했어요. 그렇게 용기 내어서 도와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요. 선배님들 아니었으면 그런 악질적인 관행이 내년에도 이어졌을 거예요. 아마, 더 심해질 수도 있었겠죠.”
조용히 읊조리는 말은 조곤조곤했다.
“이번에 과대로 뽑힌 선배는 저희가 잘 아는 분이에요. 평소에 예전 과대가 하던 여러 가지 행동들 보면서 맘에 차지 않아서 안 그래도 항의하려고 벼르고 있었대요. 오늘 가벼운 마음으로 오셔서 간단히 밥이라도 같이 먹어요. 네? 아마 그때 서빙하던……, 하 씨. 그때 축제 참가했던 세 명이랑 과대 선배랑, 그날 뒷정리 도와주신 몇 분, 이렇게 모일 거 같아요.”
“…….”
온기현이 시선을 슬쩍 내렸다. 안 간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앉아 있는 상태에서 서 있는 그녀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은 뼈마디를 맞부딪치며 부산스럽게 얽히고 있었다. 자리에 와 달라는 말을 어렵게 내뱉었음이 틀림없었다.
‘으음.’
저 혼자서 괜한 생각만 할 바에는 차라리.
뒷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린 온기현이 잠시 후,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장소가 어디라고 했어요?”
* * *
“안녕하세요. 심현석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과대 오영훈이라고 합니다.”
둥그런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자리에서, 자신을 과대라고 밝힌 남자가 꾸벅 인사했고, 연이어 부과대가 인사했다. 그에 순서대로 인사말이 오갔다. 온기현을 빼고는 다들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 같았다.
당연하겠지만 류주호는 자리에 없었다. 아마 그가 이런 자리에 함께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자신은 당연히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 근처 술집 중에서도 개중 상대적으로 학생들이 많이 찾지 않는 장소를 부러 택한 듯, 술집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를 빵빵하게 틀어 놔 음침한 분위기는 들지 않았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 주위를 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가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파인 벽이 테이블 자리의 절반 정도를 가려 주고 있어서, 자리마다 오붓한 분위기가 났다.
여느 술자리처럼 떠들썩하거나 시끄럽지 않았다. 각자 편하게 먹고 싶은 술 혹은 음료수를 시켜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서 들이켤 뿐이었다.
그 안에서 온기현은 어색한 몸짓으로 맥주잔을 든 채 과대의 말에 적당한 인사로 응수했다.
잠깐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벽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 안쪽 자리에 앉게 되어, 나가려고 해도 모두를 일어서게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맥주 한 잔만 마시고 가야겠다는 체념으로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갑자기 불렀는데 모여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은 서로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어서 모이자고 했어요. 그냥 편한 술자리라고 생각해 주시면 돼요.”
“선배님.”
“네, 말씀하세요.”
“그럼……, 저 전 과대, 아니 그 새끼 뒷담화도 해도 돼요?”
“큭.”
조심스레 손을 올린 신입생 여자애의 말에,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다른 여자애의 얼굴이 풀리며 입으로 손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네. 해도 돼요, 해도 돼요. 마음껏 하세요.”
순식간에 분위기가 온유하게 바뀌었다. 약간 당겨져 있던 긴장이 풀렸다. 이전에 있었던 일을 간간이 떠들기 시작하며 분위기는 단숨에 소란해졌다.
온기현은 거품이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맥주잔을 손에 쥔 채, 그들을 그저 지켜보며 어색하게 모자의 챙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혹시 어디 안 좋아?”
“어?”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온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 그리고 얼마 전에 근황을 접했던 사람의 얼굴이 약간 아래로 내려와 가까이에서 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감후석이었다.
감후석도 이 자리에 함께하는 줄은 몰랐다. 온기현이 괜스레 옆을 의식하여 뻣뻣하게 앉아 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얼굴이 좀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아, 아니. 괜찮은데. 이거 그림자 때문에 그래. 모자 써서 그림자 졌잖아.”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는 이들 사이에서 조용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그에 온기현이 설레설레 손을 젓자 감후석이 그러냐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맥주잔을 입에 가져가며 흘끔 옆을 쳐다봤다. 감후석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로 누군가의 이야기에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연채우가 했던 말이 못내 신경 쓰였다. 연채우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시뻘건 얼굴로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구석은 분명 있었다. 미처 물어보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됐다.
오가다 마주칠 리가 없는 둘이었다. 접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접점은 온기현 한 명뿐이었다.
‘이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데, 설마 채우한테 해코지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이제껏 진짜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이상한 놈들만 만나 온 연채우였기에, 조금만 잘해 줘도 홀딱 넘어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서글서글한 성격의 믿음직해 보이는 두툼한 체구를 보니 더욱 미심쩍은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다정다감해 보이는 외면이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다정하면 좋은 거 아닌가, 하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얼마 전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붕 띄웠다가 밑바닥으로 떨어트리는 아찔한 감각을 안다. 지금의 자신은 연채우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락을 경험한 머리는 자꾸만 의심의 싹을 틔운다. 그리고 물을 주지 않아도 무럭무럭 자라나 가슴까지 좀먹게 된다.
정신을 차려 보면 거멓게 타 버린 심장 안에 똬리를 틀고 온갖 찬란한 마음을 밀어 낼 것이다. 어떤 달콤한 말도 그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게 됐으리라.
옹기종기 둘러앉은 테이블에 이어진 좌석이라 옆에 앉은 감후석과 허벅지가 맞닿았다. 감시하는 것처럼 연신 흘끔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딪쳤던 듯했다.
괜스레 목기침을 하자, 감후석이 눈가를 접으며 웃음 띤 얼굴로 기현을 쳐다봤다. 그리고 물잔을 기현의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진짜 다정하네.’
목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몸을 물리려던 찰나.
“정말 그때, 후석 선배님이 자리를 정리해 주지 않으셨으면 저희 완전 패닉에 빠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진짜 그때 난장판이어서. 침착하게 선배랑 후배들한테 이렇게 하라고 일러 주시고 빠르게 정리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제야 말씀드리지만요.”
기현과 같은 강의를 듣는 여학생이, 아까와 같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읊었다.
“저도 나중에야 들었어요. 아 씨, 사실 졸업반만 아니셨으면 후석 선배님이 과대 됐어야 하는데. 아깝다!”
“아하하.”
과대 본인인 심현석이 분통하다는 듯 장난스레 외치는 말에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온기현 선배님도, 대동제 때 고생 많이 하셨죠. 가뜩이나 전과해서 아는 사람도 많이 없으셨을 텐데요.”
“아, 맞다! 저 그러고 보니 궁금한 거 있어요!”
취기가 돌아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한 여자애가 손을 번쩍 들며 대뜸 기현을 향해 물었다.
“혹시 그분이랑 친구예요?”
“그분?”
옆에서 부과대가 의아한 듯 되묻자, 여자애가 맥주를 벌컥 들이켜며,
“그분이요! 류주호 선배님.”
“아!”
“헉! 맞아, 맞아. 저도 안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
온기현과 감후석을 제외한 모두가 들썩거리며 기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흥미를 담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온기현을 향해서 모였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나온 이름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온기현이 잠시 입을 벙긋거렸다.
“친구 아닌데요?”
저도 모르게 뱉은 단호한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 입술을 안으로 말다가 야트막한 한숨과 함께 입을 떼어 냈다.
“……그냥, 같은 수업을 들어서요.”
“같은 수업이요? 이 중에 같은 수업 안 들어 본 사람 없을걸요! 제 친구는 졸업반 수업에 일부러 청강도 신청했대요! 얼굴 보려고.”
“하긴 나도 그날 처음 봤는데, 진짜 연예인 와꾸더라.” 하고 옆에서 킥킥거렸다. 하지만 기현은 그저 마른 볼을 손등으로 쓸어 댈 뿐이었다. 목이 타고 뻑뻑한 갈증이 밀려왔다.
눈앞에 있는 맥주잔의 손잡이를 부산스럽게 만져 댔다.
“조 모임이 같은 조였어요. 진짜 별로 안 친해요.”
“에이, 아닌 것 같던데…….”
요 며칠 새 류주호와 친하지 않다는 강력한 주장을 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이젠 툭 치면 툭 하고 자동으로 말이 나왔다. 심상한 온기현의 말에 또 다른 여학생이 수상쩍다는 눈길을 보냈다.
“진짠데…….”
왜 다들 안 믿어 주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안 친한 이유를 500개는 더 읊고 싶었다. 걔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하면서.
하지만, 지금은 정말,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겨우 머릿속에서 밀어 냈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제 속을 가득 채워 갔다.
이 화제를 얼른 돌리고 싶었다. 손에 들린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알싸한 액체가 터질 듯 식도를 건드리며 넘어갔다. 계속해서 목이 타는 느낌에 연신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과대랑 부과대한테 제대로 축하도 못 전해 줬네. 축하해.”
잠시 침묵이 감돌던 그때, 옆에서 대뜸 그런 소리가 들렸다.
감후석이었다.
“에이, 뭘요. 거의 거저 된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뭐.”
“그래도. 잘된 일이지. 앞으로 정신없어지겠네. 워낙 성격도 좋고 꼼꼼해서 잘 해낼 것 같아, 둘 다.”
“후석 선배가 하실 말씀은 아니죠, 진짜. 그러지 말고 우리 짠 해요, 짠―!”
순식간에 전환된 분위기에 모두가 잔을 가운데로 가져갔다. 온기현이 고개를 살짝 비틀어 옆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감후석이 눈빛으로 살짝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곤란해하는 걸 눈치채고 도와준 건가, 설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곁눈질로 감후석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한 모금, 두 모금 연신 맥주를 홀짝홀짝 넘겼다.
어느새 류주호에 대한 화제는 쏙 들어갔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왁자하게 전공이 어떻고, 스펙이 어떻고, 교수가 어떻고 하는 얘기들을 열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는 새에 눈앞이 조금 몽롱해졌다.
원래 술은 잘 마시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모임을 가질 시간도 없을뿐더러, 몸에 잘 받지 않는 알코올로 인해 취기가 빠르게 도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자꾸만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간신히 힘을 주어 참아 냈다.
그리고. 손은 주머니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어느샌가.
나흘 동안 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핸드폰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핸드폰이 무척 괘씸하게 느껴졌다.
‘짜증 나, 진짜.’
그냥 이유 없이 성질이 났다.
“어어, 기현 선배님. 너무 빨리 달리시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같이 마셔요! 이모님! 여기 소주랑 판타 한 병씩이랑 맥주 피처로 주세요!”
온기현이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감후석이 하하, 웃으며 물잔을 내밀었다.
“물 좀 먹어. 안주도 챙겨 먹고.”
“응.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찬물을 한 잔 들이켜자, 조금 머리가 차갑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초대받은 도리는 한 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가 보겠다고 말하려 막 입을 뗀 순간.
“……어?”
누군가 놀란 음성을 겨우 떼 내며 가게 문 쪽을 바라봤다.
“어?”
“헐.”
그리고 다른 이들도 연신, 놀라움을 뱉어 냈다. 대박, 이라는 말도 얼핏 들려왔다. 그에 온기현도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류주호가 입구에 들어서며,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오셨네요. 여기예요, 선배님.”
그때, 심현석이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에 류주호를 보고 놀란 얼굴을 하던 이들의 시선이 심현석 쪽으로 쏠렸다. 어떻게 된 거냐는 물음 가득한 표정이었다.
온기현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굳었다.
꿀꺽, 하고 목구멍 뒤로 넘긴 물이 마치 알싸한 술처럼 느껴질 정도로 목구멍 안이 거칠했다.
어떻게……. 왜?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류주호는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롱 재킷 안에 부드러운 라운드 넥 니트를 걸친 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단정한 매무새였다. 하지만, 은은한 벽 조명이 공간을 밝힌 입구 쪽에 서 있는 류주호의 얼굴은 어쩐지 음영이 짙게 져 딱딱하게만 보였다.
심현석을 흘끗 쳐다본 류주호가 성큼성큼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류주호의 걸음걸음마다, 마치 뾰족한 가시를 박자에 맞춰 찌르는 것처럼 눈이 따끔따끔했다. 아니, 가슴인가.
“선배님, 여기 앉으세요.”
류주호가 심현석의 권유에 둥그런 테이블에서 가장 바깥쪽 의자에 앉았다. 온기현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위치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아니, 아까부터 계속 마주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류주호의 시선은 이곳에 들어오면서부터 한시도 온기현에게서 벗어난 적이 없던 것처럼 한 곳만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은, 아까 선배님께 메시지 드렸거든. 그때 선배님도 같이 도와주셨잖아. 답장이 없으셔서 안 오시는 줄 알고 있다가. 아까 연락하셨길래 여기라고 알려 드렸지.”
“헐, 그랬어요? 아까는 아무 말씀도 없길래 완전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니까요. 어……. 안녕하세요, 선배님.”
주변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넬 때도 류주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의 그라면 으레, 그린 듯한 웃음이라도 지으며 영혼 없는 인사라도 겉치레로 한마디 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주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모로 돌린 온기현만 쳐다보고 있었다.
마주쳤다가 금세 비껴간 눈동자부터 시작해서 취기에 올라 홍조가 어린 볼, 만지면 뜨겁게 느껴질 듯한 새빨간 귓불, 캡 모자 아래로 얼핏 보이는 새까맣고 가느다란 머리칼, 하얗게 드러난 마른 목덜미, 평소와 같은 차림의 헐렁한 검은 티셔츠,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술잔을 쥔 손가락 마디와 분홍빛 끄트머리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는 것처럼 그 눈빛은 진득하기만 했다.
온기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빤히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슬쩍슬쩍 돌리는 눈길에 담긴 류주호의 모습은 어쩐지 조금, 수척해 보였다.
가뜩이나 선이 짙은 얼굴이다. 그런데다가 약간…… 살이 빠진 건지, 아니면 조명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음영이 더욱 짙어져 어딘가 음울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까지 풍겼다.
문득 심장이 선득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급격하게 벌렁거렸다. 익숙한 감각이다. 그런 자신에게 짜증이 일었다. 술잔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때 류주호의 시선이 언뜻 옆으로 기울었다. 괜히 몸을 이리저리 가누면서 비트느라 옆에 앉은 감후석의 팔뚝에 설핏 닿은 온기현의 어깨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그대로 그 시선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류주호의 굳은 입매가 이윽고 벌어지던 때,
“주호야. 왔어? 너 오는 줄도 몰랐다. 그때 이후로 나도 좀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었지.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었어.”
“……그래.”
감후석의 부드러운 말에, 류주호의 등장으로 인해 약간 어색하게 들떠 있던 긴장감이 기분 좋게 풀어졌다. 모두의 놀라움은 어느새 취기로 인해 흐려졌고, 술자리의 여흥을 즐기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저, 이제야 말하는 건데요!”
판쏘를 거나하게 말아 먹은 후배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온기현 선배님이, 신나게 황금 발차기 날렸을 때 있잖아요. 아, 속 진짜 시원했어요. 막 이거 판타를 콸콸 부은 느낌이랄까요!”
“어, 나도, 나도! 그 새끼 나중에는 막 거의 엉엉 울면서 기절하지 않았어?”
“맞아! 그리고 나중에 우리끼리 막 그런 얘기 했잖아. 호두까기 장인이시라고.”
“헉, 그럼. 기현 선배니까……. 호두까기현?”
와아. 호두까기현, 호두까기현.
분위기는 대번에 달아올랐다. 온기현을 앞에 두고 저마다, 차이콥스키가 무덤에서 들으면 벌떡 일어나 기함할 별명으로 칭송하는 데에 재미를 잔뜩 붙이고 있었다.
“다음에도 또 나타나면 갈겨 주세요! 호두까기현!”
와학학. 웃음이 터졌다. 누군가는 찔끔 나온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그때.
“글쎄. 다음부터는 안 그럴 거 같은데.”
“……네?”
낮고 묵직한 음성이 공간을 갈랐다. 잠시 어리둥절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더러운 데 발이나 손 대는 거, 하지 말라고 할 거거든. 앞으로.”
이어진 말이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알코올로 푹 절여진 뇌들은 그것을 새로운 농담으로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흔히 얼굴만 봐도 재미있는 류주호가 무언가 말을 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웃긴 건지, 그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하.
온기현이 실소했다. 자꾸만 목이 바싹바싹 말라서 옅은 주황색의 음료를 다시금 들이켰다.
“나는 할 건데?”
그리고 그렇게 내뱉었다. 다소 가시가 돋은 말이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반박하고 싶었다.
네가 무슨 상관인데. 또 내 일에 이것저것 관여하면서, 애먼 소리만 늘어놓으려고 그러지.
온기현의 입이 대번에 불퉁해졌다. 자꾸만 목이 말라서 계속해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너도 싫잖아. 그날도, 발 깨끗하게 씻었었고.”
“뭐? 너 지금 무슨……. 조용히 안 해?”
“밤새도록 더러운 거 묻은 발, 꼼꼼하게 닦았잖아.”
그날은, 둘이 정신없이 몸을 섞은 날이었다. 하필이면, 왜 이 자리에서 그날 일을 입 밖에 꺼내는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해서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그런 적 없다니까. 그런 거 한 기억 없다고. 난 안 씻었어.”
“……누가 씻었는지가, 중요해?”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말 속에 숨어 있는 행위의 주체가 달랐다.
욕실에서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밤새도록, 온기현이 격렬하고 거친 성교로 기진맥진하여 거의 혼절하다시피 한 뒤에, 누군가가 온기현의 발을 꼼꼼하게, 열심히, 더러운 감촉을 전부 씻어 내듯이 닦아 준 것이다. 그 누군가란 바로 지금 그날 일을 입에 담는 당사자였다.
온기현이 입을 닫았다. 그리고 곧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냉랭하게 던지듯 오가는 대화에 주변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어. ……두 분이 진짜 친하신가 봐. 근데 싸우셨나…….”
“그러게……. 워워, 싸우지 마세요.”
어색하게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과대의 노력이 가상했다. 이러려고 만든 자리가 아닌데, 이상하다……. 망했다, 괜히 불렀다……. 하는 후회와 초조함이 얼굴에 역력했다.
“원래 둘이 이러더라고. 티격태격하면서. 근데 원래 친한 애들끼리 더 그러더라. 그치?”
감후석이 시원하게 웃는 얼굴로 잔을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어, 맞아요. 저도 친한 친구한테 완전 못되게 굴어요.” “저는 막 대놓고 쌍욕 해요.”라며 금세 감후석의 농에 말을 얹었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신나게 건배를 하고, 또 무어라 떠들고.
하지만 기현의 귀에는 그런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이유는, 다름 아닌 시선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저를 좇으며 집요하게 달라붙는 시선.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끈끈하게 들러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시선.
기현은 모자를 다시금 푹 눌러썼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유리컵에 들어 있는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큼한 맛이 감돌아 목구멍 뒤로 꿀떡꿀떡 잘 넘어갔다. 주위의 대화가 먹먹했다. 기현은 푸하― 하고 내뱉으며 잔을 탁 내려놓았다.
눈을 들었다. 그러고는.
‘쳐 다 보 지 마.’
라고, 류주호의 시선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며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입 모양으로 똑똑하게 발음했다.
그에 류주호의 안면이 순간 꿈틀했다.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천천히 가렸다. 인내가 깃든 눈매가 조금씩 가늘어지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안광이 옅게 빛났다. 수척한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워서, 평소와 다른 들끓는 잔학함이 엿보였다.
온기현의 눈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갔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를 향해 흘기듯 가늘게 떴다. 씨근덕거리자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 살짝 부풀며 눈두덩이가 좁아졌다. 문득 류주호의 입을 가린 손의 뼈마디가 눈에 띄게 불거졌다.
쳐다보지 말라니까, 좀.
온기현이 테이블 아래에서 냅다 정강이를 차려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힘을 잃은 다리로 인해 허무하게 공중에서 발만 팔랑댈 뿐이었다.
“류주호 선배님도 그날 진짜 약간 그거 같지 않았어? 영화 보면…….”
제가 화제에 오른 사이에도 류주호는 계속해서 온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것처럼 빼곡하게 시야에 담았다.
시끌시끌한 대화가 점점 더 먹먹해졌다. 온기현은 조금씩 멍해지는 머리를 느끼며 손으로 눈을 비벼 댔다. 무게 중심이 쏠린 탓인지 온기현의 몸이 절로 옆으로 기울었다.
“엇차. 괜찮아? 술이 엄청 약한가 봐.”
그때, 감후석이 눈매를 접고 웃으며 온기현의 몸을 너른 어깨로 받치고는 걱정스러운 소리를 냈다.
“어……. 아인데, 괜찮은데.”
“아하하. 기현 선배님, 지금 혀 좀 풀리려고 해요.”
온기현이 놀라서 번쩍 고개를 들고 좌우로 흔들며 감후석을 향해 말하자, 과대인 심현석이 그런 기현을 보며 유쾌하게 웃어 댔다. 그도 마찬가지로 취기가 슬슬 올라오는 듯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게. 많이 취했네.”
덜컹.
“어?”
“엇.”
눈앞이 이지러졌다. 정면에서 마주쳐 오던 시선이 대번에 위로 올라섰다. 류주호가 그대로 일어서서 걸음을 뗐다. 사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몸짓으로 억지로 테이블을 밀어서라도 다가오려 한 바람에 앉아 있던 둘이 하는 수 없이 밀리듯 일어나게 되었다.
“어, 가시게요?”
“가려고?”
사람들의 물음에도 류주호는 한 곳만 바라봤다. 고개를 설핏 끄덕이더니,
“애가 많이 취해서.”
라고 말하며, 취한 탓에 감후석의 어깨로 휘청하고 체중이 쏟아지려는 온기현의 팔뚝을 턱 잡았다. 그에 흐리멍덩한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아니, 자신은 뾰족하게 세우려고 했지만, 한껏 풀린 눈은 가늘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너나 가.”
“가자.”
“실허. 왜 네 멋대로……, 아!”
꼬인 발음으로 단단한 팔뚝이 있는 쪽으로 몸을 숨기려고 했다. 커다란 바위 뒤에 몸을 숨겨 포획을 피하는 동물의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팔뚝을 잡은 힘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단하게 붙잡은 커다란 손이 물에 푹 젖은 듯 흐느적거리는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하지 마. 신경 끄라니까. 왜 맨날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해.
제발 가. 제발 가라고…….
진짜 꼴도 보기…….
하지만 그 말은 웅얼거리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다.
다들 어어, 하면서 망연히 있는 사이에 류주호는 일언반구도 없이, 흡사 제 가방이나 핸드폰이라도 갖고 가듯이, 당연히 제가 챙겨야 할 것을 챙겨 가는 사람처럼 그대로 유유히 술자리에서 벗어나 버렸다.
“……짱친이네.”
멍하니 있는 사이 누군가 그렇게 읊었다.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미 류주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린 뒤였고, 그 둘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 * *
몸이 가볍다.
이상했다.
두둥실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었다. 이건 꿈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눈을 뜨려고 해도 눈두덩이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지탱할 지반을 찾지 못한 채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제 턱 아래부터 상체, 그리고 제 엉덩이 아래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무엇이 굉장히 따듯하다는 것이었다.
‘아, 졸려.’
졸음이 마구 쏟아졌다. 너무나 편안했다. 이상하게도, 몽롱한 머리로는 이렇게 편안하게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뭉게뭉게 피어나는 노곤함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싹 쓸어 버렸다.
따듯하다.
편안하다.
규칙적으로 둥실둥실 흔들리는 몸과 따스하게 제 몸을 덥히는 체온으로 인해 온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바위같이 딱딱한 무언가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안정적으로 잡고 있는 덕분에, 전기장판 기능이 있는 진동 돌침대 위에라도 엎드려 있는 기분이었다.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갔다. 좀 더 뜨끈한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더운 기운이 물씬 느껴지는 부근을 찾아 파고들어 얼굴을 비볐다. 그러자, 돌침대가 약간 굳더니 진동을 멈추었다.
흐응, 하고 목으로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자 곧 돌침대가 다시 전진하며 진동을 시작했다. 양팔이 위로 올려진 채여서 어깨가 들려 있었지만 그래도 불편한 감은 없었다.
편안하게 호흡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익숙한 체취가 풍겼다. 묵직하고 알싸한 향이었다.
아득한 머리가 혼몽한 안개로 뒤덮이며 그 체취의 주인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오래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강단에 올라선 그를 눈에 담은 순간을, 온몸에 전율이 일고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우르르 쾅쾅 쳐 대는 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학교 도서관에서 빛을 받는 모습과 귀에 꽂히는 낮은 음성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문득문득 불시에 빠지는 사랑은 걷잡을 수 없었다. 서툴고 어리숙한 제 통제를 듣지 않는 제멋대로인 감정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얼결에 사귀게 된 여자 친구와 헤어지며, 류주호의 얼굴이 떠오르던 때.
그리고 네 번째.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리고 다섯 번째. 이동 수업으로 옮긴 반의 맨 뒷자리 창가에 앉았을 때 ‘어, 여기 류주호 자리다.’ 하고 생각하던 쌀쌀한 가을.
.
.
고1 겨울. 모의고사를 치른 후 부모님이 데려가 준 고깃집에서 태어나서 처음 소 등심을 먹은 날. 고기가 구워지는 모양을 보며 ‘류주호는 소고기를 좋아할까?’ 하고 생각하던, 열다섯 번째.
고2 여름. 에어컨이 불행히 고장 나 후덥지근하던 한낮, 담임이 반에 단체로 돌린 시원한 초코바를 핥으며 ‘걔는 초코바는 싫어할 것 같아, 너무 달아서.’ 하고 문득 떠올리던 때. 스물세 번째.
대학교 입학식. ‘아, 류주호다.’ 하고 홀로 그를 발견하며 눈으로 좇던, 마흔 번째.
기껏 전과했는데, 얼굴을 거의 못 보네.
쉰 번째.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약간 가슴이 아팠던……. 쉰세 번째.
시도 때도 없이 불거지는 감정에 번호를 매기기를 포기한 게 언제부터였을까.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려고 해도 언제나 결국에는 한곳으로 귀결됐다. 마음을 애써 돌리려 눈길이 가는 사람이 생길 때마다 연채우에게 부러 알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는 자신과의 약속과도 같은 억지도 소용없었다.
이제는 그만 끝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제 마음에 시한부를 걸었지만. 자꾸만 견고할 리 없는 방벽을 부수어 물렁한 속을 꺼내 제멋대로 흔들고는, 전부 녹여 낼 것처럼 다정하게 대한다.
지금처럼.
놓치지 않을 것처럼 흔들림 없이 받쳐 주는 그 체온만은 얼마나 다정한지.
“그럼, 이상형은 있어요?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거나.”
문득 머릿속을 스쳐 가는 목소리가 생각났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 안에서는 이제껏 담아 보지 않았던 생소한 단어가 굴렀다.
“……다정, 한…….”
다정한 류주호. 여기저기 모가 나서 베일 듯 날카롭지만, 또 불시에 다정해지는 류주호.
방심한 틈을 잔인하게 파고드는, 생각지도 못한 다정함.
멀리서 쳐다만 봤을 때는 절대로 느껴 보지 못했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따듯한 체온. 저를 견고하게 받치는 이 단단한 체온이 좋다.
“……다정한, ……가…… 좋아…….”
입에서 웅얼거리듯 겨우 말이 되어 나온다.
그때, 둥실둥실 떠가던 흔들림이 삽시에 멈췄다. 우뚝, 걸음을 멈춘 커다란 몸은 미동도 없다. 그리고 동시에, 온기현의 체중을 그대로 받으며 그를 업고 있는 몸이 꿈틀거리며 단단해진다.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는 돌침대에 조금 짜증이 난 온기현이 으응, 하고 심통 섞인 소리를 내며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흠칫, 하고 저를 받친 무게가 떨린다.
익숙한 체취 속에 담배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코를 찌르는 매운 냄새에 얼핏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담배 냄새 싫어, 하고 생각한 온기현이 얼굴을 길게 빼내어 제 콧등에 걸린 툭 튀어나온 말캉한 부분에 입술을 가져갔다.
후, 하고 앞쪽에서 거친 숨이 터지는 게 들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벌려 그대로 까득, 말캉한 살과 연한 뼈를 씹었다.
“……아.”
……어?
이로 세게 씹은 곳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보다, 어쩐지 한숨과 같은 낮은 음성이 들려서 정신을 차렸다. 무거운 눈을 껌벅껌벅 감았다 뜨자, 제 눈에 보인 것은 다름 아닌 뒤통수였다. 언뜻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자신은 류주호의 등에 업혀 있었다. 옅게 피가 밴 귓불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뭐야……?”
온기현이 중얼거리듯 의문을 표했다. 류주호가 그런 기현을 고쳐 업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쌀쌀한 바람에 취기가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제가 지금 무슨 자세로, 누구한테 업혀 있는 건지 알 수 있었다. 늘어진 몸을 붙들어 매고 있는 것이 누구의 팔인지, 누구의 등에서 내뿜어지는 체온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
이제야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류주호가 술자리에서 저를 잡고 나오자마자, 바로 올라온 취기로 머리가 잠시 핑 돌았다. 그리고 몸이 쓰러지려던 찰나, 류주호가 저를 안아 들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자락의 끝이었다.
대번에 작금의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발을 버둥거렸다. 모자는 어디 갔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발을 찰 때마다 턱, 턱 하고 발꿈치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류주호가 손에 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야아, 놔! 내려놔……!”
“…….”
하지만 묵묵히 걸어가는 류주호는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계속해서 버둥거리자 걸음이 더욱 빨라졌고, 성큼성큼 걷더니 어느새 으슥한 골목 옆에 세워진 새까만 차 옆에 다다라 있었다.
“하아……, 하…….”
성이 났다가 약간 지쳐 버린 온기현을 재차 둘러업은 류주호는 말없이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돌아 온기현을 좌석 위에 풀썩 내려놓았다.
순식간에 정자세로 눕혀진 온기현이 고개를 확 들었다. 그리고 무어라 쏘아 대려던 때, 몸이 뒤로 밀리며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류주호가 커다란 체구를 밀고 들어와 제 뒤쪽의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야심한 시각의 으슥한 골목은 그 흔한 가로등 하나 없었다. 그에 그림자로 가려진 류주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으로 가려져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저 그는, 팔꿈치로 좌석을 짚은 채 어정쩡하게 고개만 들고서는 저를 째려보고 있는 온기현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뭐 하자는 건데, 너……. 아……!”
벌건 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얼굴을 있는 힘껏 째려보며 씩씩거리던 때, 별안간 커다란 그림자가 불쑥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 으……!”
아무런 말 없이 얼굴을 가까이 붙이더니 뜨거운 입김이 느껴졌다. 입술을 부딪쳐 오려는 몸짓에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며 가까스로 밀어 냈다.
하지만 류주호의 입술은 끈덕지게 따라왔다. 당연하다는 듯 붙여 오는 입술에 짜증이 일었다. 아니면 고요하게 분노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본능에 몸을 맡긴 것도 같았다. 왜 이러는지 대체 알 수 없었다.
뒷좌석에 가로로 누운 자세가 된 기현의 다리 사이로 뜨거운 몸이 느린 동작이지만 다소 우악스럽게 비집고 들어왔다. 허벅지 사이가 절로 넓게 벌어졌다. 아연함에 눈썹을 찡그렸다. 류주호는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제 몸으로만 의사를 표하는 동물 같았다.
이리저리 피하다가 습한 기운이 입술 표피를 살짝 스쳤다. 순간 찌릿한 등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온기현이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앞의 어깨를 퍽 밀쳤다.
미동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몸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
허억,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기현이 허리를 뒤로 물렀다.
“나쁜 새끼. 나쁜 놈…….”
“…….”
커다란 그림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온기현이 계속해서 씨근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야, 이 나쁜 놈아……. 말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너는, 어? 천 냥 빚 만들어서 이자도 복리로 불릴 놈이야. 어떻게 말을 그따위로 할 수가 있어? 하. 근데 복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그것도 돈으로 산다고 하겠지? 이 씨, 이……. 돈 많으면 다야?”
무슨 뜻인지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횡설수설 죄 쏟아 내자, 아직 알코올이 덜 빠진 머리가 어지러웠다. 점점 목소리에 힘이 빠졌지만 계속해서 굳은 혀를 겨우 놀렸다.
“진짜 나빠……. 나한테……, 수표로 십만 원 줬을 때처럼……. 너는 한결같이 싸가지였어.”
윽…….
온기현이 고개를 숙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놈……. 하고 입 모양으로 다시금 중얼거렸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코끝이 매웠다. 다리를 오므리려 허벅지에 힘을 줘 봤지만, 무릎으로 앉은 자세로 떡 버티고 선 류주호만 더 옥죄는 꼴이 될 뿐이었다.
제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다정한 새끼가 좋아?”
공간을 거친 사포로 긁는 듯한 섬뜩한 낮은 목소리가 차 내부에 울렸다.
“……어……?”
온기현이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불현듯 그가 상체를 낮게 내렸다. 제 앞에 둔 먹이의 얼굴을 자세히 가늠하는 듯도 했으며, 체취를 가까이서 들이켜서 안달하는 듯도 보였다.
윤곽으로 언뜻 보인 그의 눈이 매섭도록 날카로웠다. 그리고 자꾸만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억눌렀던 뜨거운 숨이 불시에 터졌다. 유혹을 참지 못할 정도로 잔뜩 굶주린 것처럼.
“뭐, 뭐가……. 무슨 말이야……. 저리 가, 이 나쁜…….”
“말해 봐, 응? 기현아. 어떤 다정한 새끼가 좋은 건지, 아닌지.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그게 지금 미치도록 알고 싶어. ……나 정말 요새 이상하거든. 내가, 이제까지의 내가 아닌 것 같아. 마치 다른 새끼가 내 껍질을 입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한단 말이야…….”
야트막한 한숨과 함께 터진 말은 여상한 의문을 담고 있었다. 무감하게 읊는 자신의 상태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스럽게 읊조렸다.
“……이상하기는, 뭐가 이상해. 그딴 재수 없는 소리 지껄이는 놈은 너밖에 없어…….”
웅얼거리면서도 웃기는 소리 다 한다는 식으로 온기현이 뚝, 그의 말을 잘랐다. 한마디 말로 사람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지독한 놈은 너밖에 못 봤다고.
“……왜. 아닌 것 같아? 내가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병신같이 굴었는지 알면……. 씨발…….”
짓씹듯 터지는 말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류주호가 하체를 바투 붙이며 손으로 온기현의 허벅지를 감싸 왔다. 진저리치며 다리를 버둥거리자, 류주호가 거듭 손을 악착같이 붙이며 어떻게든 닿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필사적이었다.
“하지 말라고……!”
기어이 짜증스러운 외침을 터트리며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저를 압박하던 체중이 살짝 가벼워졌다.
“……내가.”
중얼거리듯이 입을 연 류주호가 단조롭게 읊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어떻게 해야, 네 가장 깊은 데까지……. 속속들이, 전부, 다. 관여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
“너한테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어.”
속삭이듯 덧붙인 말에 천천히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차창 밖에서 달빛이 비집고 들어왔다. 빛과 그림자로 인해 반으로 갈라져 한쪽만 새까만 얼굴이 기현의 혼몽한 눈에 담겼다.
그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절하고 쓸쓸해 보였다.
류주호가 아닌 것 같았다.
평소의 류주호가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제멋대로에 안하무인이던 류주호가 짓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벙긋거리던 입에서, 겨우 제 솔직한 말이 터져 나왔다.
“……다시는 그딴 말 하지 마.”
“……그리고.”
“……내 의견도 꼭, 물어봐 줘야 해. 나랑, 나한테 관련된 일이면…….”
“또.”
딱딱하게 되묻는 말과 다르게 어느새 허벅지를 살살 어루만지는 커다란 손은 깃털같이 부드러웠다. 그에 순간 허리가 찌릿할 정도로 간지러운 느낌에, 저도 모르게 다리를 그의 허리에 꽉 붙였다. 한쪽 손은 닿을 듯 말 듯 티셔츠 아랫자락을 사락사락 들추어 대며 살갗을 건드렸다.
잠시 말똥해졌던 정신이 또다시 흐릿해진다.
어째서, 이렇게 쉽게 무너질까.
내 안에 들어와, 좀 더 속속들이 헤집고 싶다는 너를, 나는 왜 말릴 수가 없을까.
왜…….
더 깊이 들어오겠다는 류주호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지금의 이 쉬운 선택을 질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쯤에서 풀고 싶었다.
화났던 감정이 며칠 새에 눈 녹듯 녹아 버린 것처럼 그렇게 쉽게, 류주호한테는 뭐든지 헐거워졌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입에 담았다.
……다정하게, 응어리진 얼음까지 전부 녹아내릴 것처럼 그렇게.
“……키스, ……해 줘.”
말과 동시에, 류주호가 제 체중을 있는 힘껏 실어 입술을 부딪쳤다. 뜨끈한 숨과 타액을 게걸스럽게 빨아 댔다. 흡, 하고 들이켠 숨조차 전부 류주호가 앗아 갔다.
살짝살짝 간질이듯 건드린 손길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티셔츠 안쪽으로 들어온 손이 어디랄 것 없이 맨살을 쓰다듬었다.
키스는 집요했다.
벌어진 입 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여린 살갗을 빨고 깨물기를 반복했다. 다소 버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게 맞물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취기가 덜 빠진 것인지 온기현이 허리를 들썩이며 다리를 꽉 감아 왔다. 류주호가 그에 흥분해서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거리더니 거세게 빨았다.
“아흣, 아, 흐으…….”
금세 달아오른 차내에 숨소리와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뒤섞였다. 밀폐된 좁은 공간 안에 울리는 소리가 더욱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귓가에 훨씬 가까이 와 닿는 음란한 신음을 정신없이 터트렸다. 평소라면 의식해서 애써 억눌렀을 그것이 어쩐지 입에서 마구 터져 나왔다.
그 솔직한 흥분의 표출에, 류주호는 몸을 거세게 들썩거렸다. 제 흥분을 채 가누지 못해 숨도 못 쉴 만큼 기현을 몰아붙였다.
그에, 서로 바투 안은 상태에서 류주호의 어깨를 마구 더듬던 온기현이, 폐에 숨이 충분히 들어차지 못한 압박감에 못 이겨, 저도 모르게 류주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고 밀어 내며 난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류주호는 기현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꽉 끌어안았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은 거의 짐승 같은 움직임과 다름없었다. 딱딱하게 닿는 곳을 주먹으로 퍽 때리고, 할퀴고, 자꾸만 붙여 오는 입술을 씹어 대고.
저항과도 닮은 격정이었다.
류주호 또한 그런 온기현의 행동에 정수리 끝까지 치닫는 성감을 숨기지 않고, 절절 흐르는 타액을 죄 빨아들이고 얼굴 이곳저곳에 입술을 가져다 비벼 댔다.
그러고는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낮게 뇌까리는 말에서는 언뜻 광기조차 비춰질 정도로 음산함이 느껴졌다.
“하아……. 진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사람이. 너 하나 때문에 엉망이 됐어. 내가 오랫동안 준비하던 것도, 다 망가졌어, 이 며칠 동안. 전부……. 그런데도 전혀 화가 안 나. 너라서.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환장할 것 같아. 이게 뭐야. 대체……. 응? 기현아. 진짜 뭐야.”
그의 말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같았고, 자조를 담는 것도 같았다.
목덜미 언저리와 귓바퀴를 입술로 짓누르며 말하는 탓에 척척하게 땀이 밴 살갗에 습기가 어렸다. 어쩐지 감질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욕에 몸과 머리를 내맡긴 온기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보채는 것뿐이었다.
“몰라……. 모르겠어……. 더, 해 줘……. 그냥, 빨리…….”
“하아…….”
그의 말에 류주호가 헐떡이며 온기현의 유두로 얼굴을 내렸다. 티셔츠는 어느샌가 목 끝까지 올라가 구겨져 있었다.
“아흣……!”
축축하게 젖은 입 안으로 유두가 순식간에 삼켜졌다. 꼿꼿하게 선 유두를 혀끝으로 짓누르고 입 안에서 굴리다가 끝내는 혀를 단단하게 만들어 유두가 움푹 패도록 꾹꾹 눌렀다.
“흐아아……! 아, 흣, 아아……!”
고개를 젖히며 방탕한 신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가슴은 더 해 달라는 것처럼 앞으로 내밀어진 채였다.
양쪽을 그렇게 한참을 물고 빨았다. 연한 빛이던 가슴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어둠 속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여실히 보일 정도로 진득하게 타액을 묻혔다.
입을 떼어 내자 가는 실 가닥처럼 늘어지는 타액을 혀끝으로 잘라 내 삼키며, 다시금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니, 두툼한 혀로 마구 핥아 댔다고 보는 게 맞았다.
“기현아……. 하……. 눈 풀렸잖아, 기현아……. 나 똑바로 봐. 응? 너한테 키스하는 게 누구야, 지금.”
“하으으……. 몰라아…….”
쪽, 쪽. 류주호가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빨며 말하는 통에 기현의 말이 어리숙하게 들렸다. 하지만 머리도 온전하지 못했다. 동공이 잔뜩 풀린 채로 류주호의 키스에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답할 뿐이었다.
“얼른……. 나 누구야, 기현아. 응?”
“흐…….”
재촉의 말은 다정하면서도 다소 서늘했다. 온기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가느다랗게 떴다. 흐린 시야로 류주호의 날카로운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 냈다.
“못된…….”
“응.”
“개소리로, ……천 냥 빚……. 만드는…….”
류주호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딱딱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눈빛은 집요했고 대답을 재촉하는 손짓은 초조했다.
“……류주호……, 흐읍! 아!”
이윽고 웅얼거리며 이름을 입에 담는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우흡, 으픕, 하는 소리가 비어져 나올 정도로 거칠게 삼키고는 쭉쭉 빨아 댔다. 벌겋게 부르튼 입술이 싸르르하게 아파져 올 지경이 되어서야, 류주호는 가쁜 숨을 내뱉으며 다급하게 아래를 벗겨 냈다.
철컥, 지익.
하의를 벗기는 금속성의 소리가 차내에 울렸다. 온기현은 몸을 늘어트린 채로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흐트러진 얼굴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벌린 입가에는 고인 침이 주르륵 흘렀다.
류주호는 눈깔이 죄 뽑힐 지경으로 오르는 열을 제정신으로 가눌 수가 없었다. 기현의 어깨를 잡아 일으켜 좌석 시트에 등을 기대도록 자세를 바꿨다. 그리고 자신은 좌석 아래에 무릎으로 지탱하여 섰다.
“흐으.”
발목 아래까지 브리프와 바지를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오금을 팔뚝에 걸치고 하체를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온기현의 허리가 반으로 접히고 목이 시트에 눌렸다. 엉덩이가 류주호의 가슴팍에 짓눌린 채다.
이렇게 될 때까지도 온기현은 흥분에 못 이겨 앓는 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려 있었다.
시팔.
욕설을 짓씹은 류주호가 온기현의 양다리를 쩍 벌렸다. 힘이 풀린 몸은 저항 없이 부드럽게 벌어졌다. 내려 본 시야에 온기현의 음부 전체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머리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온기현의 아래는 완전히, 흠뻑 젖어 있었다. 기립한 성기는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희멀건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고, 음낭과 회음부는 물론이고, 오므라진 채 빠끔거리고 있는 구멍 입구는 정체 모를 액체로 인해 반들거리고 있었다.
류주호는 허벅지를 바투 끌어안았다. 허리가 들린 온기현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이어지는 말캉한 살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코앞에 있는 엉덩이 구멍이 이따금씩 개폐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감질날 정도로 내벽의 빨간 점막이 나타났다 숨는 모양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아, 기현아……. 너 여기, 왜 이렇게 젖었어. 응? 아무리 몸에 물이 많아도 그렇지…….”
“아, 흐으읏.”
류주호가 제 검지를 입구로 가져갔다. 손끝만 대도 척척한 액체가 주르륵 묻어났다. 그대로 손가락으로 주름을 쓰다듬더니 왼쪽으로 주욱 늘렸다. 꽉 다물렸던 구멍이 가로로 길게 벌어졌다.
“아흐, 아, 아은, 대애……. 그, 그렇게, 하지, 으…….”
“……언제부터, 젖어 있었을까. 언제부터……. 설마 아까, 술자리에서부터, 그 새끼 옆에서도 이랬어? 응? 만약에 그랬으면, 어떡하지……. ……너를 어떡하면 좋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류주호는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말에는 혼란이 깃들어 있었지만, 제가 이제껏 한 번도 제 인생에서 마주한 적 없는 모습의 자신을 향하는 말이기도 했다.
평생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감각에 휩싸인 자신이, 이런 폭력적일 정도의 욕구를 느껴 본 적이 없는 생경한 자신이, 과연 어디까지 행동할지 자신조차 전혀 모르겠다는 투였다.
그는 말하는 내내 주름을 관찰하듯이 사방으로 당겼다가 쓰다듬고를 반복했다. 안쪽에서 생겨난 척척한 물 때문에 찰박거리는 소리도 언뜻 들렸다.
그러다가 돌연, 류주호가 음부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높은 콧대가 짓뭉개지도록 아래로 얼굴을 처박았다.
온기현이 신음을 터트렸다. 류주호는 마치 정키 입에 그토록 원하던 약을 물린 것처럼, 미친 듯이 구멍을 빨고 핥아 댔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음낭 위로 코를 문대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동성의 샅 냄새를 이렇듯 도취할 정도로 맡고 핥는 행위 자체가, 가히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했다.
그리고 집요했다. 샅에서 풍기는 체취로, 상대방의 갖가지 생식 정보를 습득하는 짐승처럼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켰다.
그래서 이미 몇 번이나 해 본 적이 있는 행위인데도 유독 끈질겼다. 코를 처박고 폐부 깊숙이 살갗의 냄새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예쁘고 동그란 그것을 입에 넣기도 하고 빨기도 했다.
너무나 게걸스러운 몸짓 탓에 되레 무섬증이 인 것은 기현 쪽이었다. 밀어 내고자 팔을 들어 허공을 휘저어 댔지만 그의 팔뚝에조차 닿지 않았다.
“그, 그만……. 흐으……. 거기, 아, 나쁘은, 흐, 놈아아……. 그거, 으응, 하지 마…….”
“……어떻게 안 해. 내가 여기 네 아랫도리에 이렇게 개처럼 얼굴 묻고 헐떡거리는 상상으로 그동안 얼마나, ……돌아 버릴 뻔했는지 네가 알면, 그런 소리 못 하지.”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돌 것 같은지, 나도 모르겠어.
정말, 왜 이렇게.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았다. 류주호가 다시금 아래에 입을 가져다 댄 탓이다. 흥분해서 바짝 올라붙은 음낭에 입을 대고 쭉 빨았다.
온기현이 허리를 부르르 떨며 허리를 물리려고 하자, 허용치 않겠다는 듯 엉덩이 꼬리뼈를 자신의 가슴팍에 가져가 단단히 붙들었다. 한쪽 다리가 자연스레 어깨 위로 걸쳐졌고, 한쪽은 어찌할 줄 몰라 공중에 팔랑였다.
류주호가 혀를 내밀며 엉덩이 골 사이에 또다시 코를 처박았다. 넓적하게 내민 혀로 입구 주위에 타액을 질척하게 펴 바르더니, 이번엔 혀끝을 단단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아직 긴장감에 굳어 있는 구멍을 억지로 열어젖히려 쑤셔 댔다.
방탕한 신음이 제어되지 않았다. 흐느끼는 소리와 쾌감에 젖은 앓는 소리가 뒤섞였다. 그만해 달라는 듯도 했고, 아니면 더 해 달라는 보챔으로도 들렸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의미는 없었다. 류주호가 혀로 내벽을 밀고 쑤셔 대며, 입을 벌려 고개를 비틀며 안과 밖의 살들을 쭙, 쭙 소리가 나도록 빨아올렸다.
“자, 흣, 아, 흐앗, 잠까아, 으흣……!”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낯부끄러웠다. 말로는 거부하지만 허리는 야살스럽게 흔들렸다. 그에 좀 더 깊숙하게 얼굴을 파묻은 류주호는, 개폐를 반복하는 구멍에 대고 추삽질을 하듯 살덩이를 안으로 쑤셨다.
구멍이 열리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고, 오밀조밀하게 닫히면 손가락을 사용해 양쪽으로 찢을 것처럼 벌려 댔다.
온기현의 얼굴은 눈물과 타액으로 척척하게 젖어 갔다. 한참 동안 엉엉 울면서 자지러졌다. 아랫도리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져 뼈까지 녹아내린 것 같았다. 반면, 감각은 더욱 예민해져서 작은 자극에도 몸서리쳐지게 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엉덩이 사이를 빨아 젖히면서, 류주호는 계속해서 온기현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종용했다.
당장 온기현과 이 난잡한 행위를 주고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끝없이 확인했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꼭 류주호의 이름을 불러 줘야 했다.
그는 감질나게 얼굴을 뒤로 물리며 애만 태우다가, 류주호의 이름을 끝까지 입에 담는 것을 제 귀로 확인하고 나서야 내벽까지 거세게 빨아 줬다.
엉덩이 사이가 짓물러지지 않을까 하던 때에, 류주호가 이를 세워 구멍을 살살 갉작였다. 엉덩이와 허벅지같이 연한 살은 이미 손자국이 새빨갛게 나 있었다.
단단히 붙든 채로 이를 세워 빨듯이 긁었다. 한참 예민하게 솟아 있는 감각에는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이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온기현이 목을 한껏 뒤로 젖히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이윽고.
팟. 배까지 올라붙은 선홍빛의 성기 끝에서 정액이 터졌다.
한번 액체가 짧게 터진 후의 사정은 길었다. 선단에서 정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른 뱃가죽과 돌돌 말린 티셔츠, 그리고 턱 언저리까지도 희끄무레한 액체가 튀었다.
동시에 구멍이 수축하며 빠르게 경련했다. 그때까지도 민망함을 모르는 류주호의 혀는 아래에 박혀 있었다. 구멍이 혀를 죄었다 풀었다 하는 감각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눈으로는 뚫어질 것처럼 온기현의 사정을 오롯이 지켜봤다.
징그러울 정도로 악착같은 시선이었다.
“하아……, 하아……. 아……!”
“빨아 주니까 좋아? 기현아……. ……온기현.”
온기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무척 외설스러웠다. 목소리만으로도 아래가 저릿해지며 방금 절정에 다다른 성기가 다시금 기립할 정도였다.
고막을 때리는 음성이 점차 또렷해진다. 지난 며칠이 마치 몇 년이라도 된 것처럼. 오래도록 굶주린 것처럼, 부딪쳐 오는 체온이 버거울 정도로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온기현의 이름을 낮게 중얼거리던 류주호가 얼굴을 올려 여기저기 튄 액체들을 전부 핥고 먹어 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내저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류주호가 쪽, 쪽 입술을 미끄러트리며 어느새 말라 빨갛게 부은 유두를 번갈아 춥, 하고 끈적한 소리를 내며 가볍게 빨았다.
서늘하던 차 내부의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땀이 흐른 등이 가죽 시트에 쩍쩍 달라붙었다.
언제나 깨끗하게 정리되어, 다소 결벽적으로까지 보이던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차 안이 온갖 액체로 여기저기 얼룩져 지저분해졌고, 그와 닮은 묵직하고 알싸한 향이 감돌던 공간이 야살스럽고 방탕한 냄새로 꽉 찼다.
하지만 류주호는 이 모든 게 아직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하아, 하…….”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들어, 아래를 내려봤다. 허리가 들려 몸이 반으로 접히고 양다리가 벌어진 채 온갖 액체로 축축하게 젖은 몸은 말초 신경 어딘가의 극점을 건드릴 정도로 음란했다.
자신이 만든 광경임에도, 어쩐지 불쾌감이 솟았다.
왜 이렇게 자꾸만 초조한지, 왜 이렇게 뭔가가 부족한지, 왜 이렇게 속이 울렁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류주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 손안에서 짓뭉개진 작은 엉덩이를 더욱 꽉 쥐었다.
온기현의 몸이 잠시 흠칫, 들썩였다. 눈은 완전히 풀려서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멍한 표정이었다. 아마 격한 쾌감으로 인해, 채 빠지지 않는 술기운이 오른 탓이리라.
새까맣게 선팅된 덕분에 아무도 안을 들여다볼 수 없을 테고, 인적이 드문 야트막한 도심 속 산자락 아래의 구석진 골목이었다.
그런데도, 류주호는 온기현의 몸을 가리듯이 어느새 벗어 던진 상체로 그 위를 덮었다. 순간 코 속으로 야살스러운 체취가 물씬 풍긴다. 새까만 머리칼 끝에 땀이 송골송골 매달려 있다. 발갛게 풀어진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아래가 아플 정도로 당겨져 왔다. 빠듯하게 당겨진 바지로 손을 가져갔다. 이미 기립할 대로 기립해 있는 묵직한 성기로 인해 지퍼를 내리는 게 쉽지 않았다.
당장 처박고 싶은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지익. 지퍼를 느리게 내리던 때.
“하으……. 으읏…….”
쿨쩍거리는 소리에 시선이 못 박혔다. 온기현이 제 손가락을 아래로 가져가 어설프게 더듬고 있었다. 양손을 등 뒤로 돌려 엉덩이 쪽으로 가져가더니 류주호가 진득하게 빨아서 흐물흐물해진 구멍을 문지르고 지분거리고 있었다.
“하.”
눈깔이 터질 것 같았다.
온기현은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이지를 상실한 얼굴이었다. 입을 헤벌린 채, 제가 방금까지 했던 행위를 따라 하듯이 가는 손가락 두 개를 사용해 구멍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걸 빼곡하게 눈에 담았다.
으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퉁퉁 부은 구멍 안으로 제 검지 한 마디 정도를 집어넣는다.
절로 입에서 욕설이 터졌다.
이딴 몸을 하고서는, 술자리에서 흐느적거리며 옆에 앉은 새끼한테 기대어 쓰러진 온기현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머리가 지끈, 울렸다. 이것을 달리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병적일 정도의 성욕이었다. 아니, 성욕과 닮은 병인 듯도 했다.
면밀하게 기현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류주호가 제 브리프 사이에서 흉흉하게 일어선 성기를 꺼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불거진 굴곡이 선연했다. 비좁은 차 안이 순식간에 더운 기운으로 중량을 더했다.
온기현은 약간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땀과 체액으로 범벅이 된 아래에서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감질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쾌감을 익히 아는 몸은 더한 것을 필요로 했다. 허리가 자꾸만 아래위로 꿀렁였다.
빠끔거리는 구멍 위로 묵직한 살덩이가 대어졌다. 시선은 금방이라도 처박을 기세로 날카롭게 일어서 있었지만, 몸짓만은 느릿했다. 안달 난 기현의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하으……. 가, 간지럽……. 빨리…….”
“……넣어 줘?”
묻는 목소리는 무척 낮았다. 딱딱하게 발기한 좆 끝에서는 선액이 뚝뚝 흘렀다.
“읏……. 흐으…….”
왜 그걸 묻는지, 얼른 넣었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에 아랫입술을 깨물고 짜증이 나서 도리질을 쳤다.
“……좆 넣어 줬으면 좋겠어?”
재차 묻는 말은 속삭임과 닮아 있었다. 온기현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가만히 쳐다만 보면 류주호의 턱이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해졌다.
“누구 좆?”
그리고 짓씹듯이 묻는다.
“내가 누구야, 대답해.”
“하…….”
대답 없이 색색 숨을 내쉬며 좆으로 아래를 비벼 댔다. 그저 삽입만 기다리는 기대와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몸짓이었다. 야살스럽기 그지없다. 가늘어진 류주호의 눈가 옆으로 푸른 핏줄이 불거진다. 아까부터 수없이 반복하던 질문을 또다시 던졌다.
“내가 누구야, 기현아. 응? 지금 너한테, 좆 넣어 주는 사람이. 내가 누구냐고.”
대답해.
대답이 없으면 절대로 넣어 주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함이었다. 검붉은 성기는 핏줄이 잔뜩 일어서서 쿵쿵 맥동하고 있었지만, 류주호는 날카롭게 벼려진 눈을 하고서는 목을 숙였다.
“……말해 봐, 네 입으로. 어서.”
“으으…….”
기현의 습기 어린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어서 빨리 제 안 깊숙이 결합하고 싶었다. 제 안에 이렇게까지 깊이 들어온 이는 단연코 한 사람밖에 없었다.
“……류, 주호…….”
류주호. 류주호.
아까부터 몇 번씩이나 입에 담은 이름을 입 안에서 웅얼거리듯 재차 뱉어 내던 때, 온기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대답과 동시에 거대한 살덩이가 구멍을 찢듯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온기현이 아아, 하고 앓는 신음을 흘렸다. 가뜩이나 불편한 자세였다. 조여드는 압박감에 구멍이 수축하자, 류주호는 잠시 거친 호흡을 가다듬더니 귀두까지 넣은 채로 빠듯하게 벌어지는 입구를 쳐다봤다.
위에서 아래로 허리를 내렸다. 뒤가 팽팽하게 당겨지면서 내장이 터질 것처럼 안을 가득 채워 갔다. 주름 하나 없이 벌어진 구멍에서는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아…….”
커다란 손이 기현의 팔을 붙잡았다. 다리 사이에 자리한 류주호가 끝까지 허리를 밀어 넣었다. 아무리 충분히 풀어졌다고는 해도 평범 이상으로 굵은 성기를 전부 삼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접합부는 찢어질 정도로 빨갛게 부어올라 그냥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그게 못내 만족스러웠다. 기이할 정도의 잔학한 가학심이 샘솟았다. 온기현이 류주호를 향해 벙긋거리며 쳐다보지 말라고 할 때도 그랬었다.
제가 고삐를 쥐었다고 생각했던 이 망아지가, 무척이나 골치 아프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또 동시에…….
짙은 탄성을 지른 류주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기현을 칭찬하듯 얼굴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쪽, 쪽 하고 쪼아 대는 애무는 어느샌가 깊은 입맞춤으로 이어졌다.
젖은 혀를 빨고 입술을 머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간 열심히 남겼던 것이 무색하게도 흔적이 희끄무레해진 목덜미와 쇄골, 그리고 가슴까지 다시금 발간 울혈을 남겼다.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온기현이 헐떡거리며 팔을 등 뒤로 둘러 날개뼈까지 확 끌어안았다. 통증을 동반한 삽입은 어느새 쾌감으로 바뀌어 갔다. 긴장한 듯 수축하던 내벽이 조금씩 꿈틀거리며, 젖어 가기 시작했다.
“하……. 씨발. 며칠 사이에 너무 좁아졌잖아, 기현아…….”
류주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우악스럽게 허리를 내리눌렀다. 위에서부터 강하게 삽입한 터라 음낭이 철벅, 하고 엉덩이 골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비좁은 구멍이 즈즛 하고 억지로 벌어졌다.
“아흑!”
온기현이 신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류주호가 온몸으로 치받듯이 허리를 크게 들썩이며, 제 좆을 기현의 안으로 퍽퍽 처박았다. 온기현이 신음을 내질렀다. 한껏 흐트러진 정신이 몸을 솔직하게 만들었다. 제어가 풀린 입에서는 기분 좋다는 말이 연신 터져 나왔다.
“기분, 좋, 으, 아아…….”
“하.”
큭, 하고 이를 까득 문 류주호가 철벅거리는 살끼리의 마찰음이 울릴 정도로 마구 치받아 댔다. 내벽을 빈틈없이 빼곡하게 자극하는 엄청난 양감에 기현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뚝뚝 흘렀다.
류주호가 고개를 숙여 기현의 눈물을 전부 핥아먹었다. 그리고 굽어진 허리로 시선을 돌렸다. 마른 뱃가죽 가운데가, 기이하게 부풀어 있었다.
“하아……. 너 이거, 내 좆인 거 알아……? 네가 지금, 내 좆 여기까지 먹고 있는 거라고.”
손을 가져가 척척한 뱃가죽 위를 살며시 눌렀다. 그러자 온기현이 발을 버둥거렸다. 엉엉 울면서 손을 공중에 휘저었다. 어쩐지 부족하다고 느꼈던 초조함이 조금 사라지는 것 같아서 다시금 꾹 눌렀다.
“하지, 흐아, 마아……!”
하지만 말과는 달리 기현의 성기는 아까부터 계속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류주호가 그것들을 모두 시야에 담으며, 손을 미끄러트려 매끈한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터럭 하나 없이 그저 풋내만 풍기는 아랫도리는, 지독할 정도로 성적 도취감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언뜻 또 다른 불쾌함이 스멀스멀 생겨났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런 개 같은 감상을 내뱉는 사람이 더 있으면 절대로 안 되었다. 절대로.
기현의 성기를 잡고 귀두를 문지르자, 구멍이 빠르게 조였다가 풀리기를 반복했다.
류주호가 그대로 기현의 몸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머리끝까지 터진 흥분에 고삐가 말을 듣지 않았다.
퍽! 퍽!
류주호가 온몸을 들썩거리며 제 좆을 욱여넣듯이 허리를 처박았다. 앞뒤로 움직였다가 넣은 채로 허리를 돌리고, 잘게 흔들기도 했다. 또다시 뒤로 주욱 물렸다가 뿌리까지 처넣었다. 기현은 거의 실신하기 직전인 사람처럼 잔뜩 흐느꼈다.
몸을 움츠러트리며 도망가려는 몸짓을 진즉에 차단했다. 하지만 류주호의 허릿짓에 차체가 마구 흔들리며 진동하자, 온기현이 누워 있는 위치가 조금씩 바뀌었다. 시트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몸이 아래로 쓰러지며 시트 좌석에 눕는 형태가 됐다.
그 상태로 아래를 때리듯이 박아 대자, 쿵, 하고 기현의 정수리가 자동차 문짝에 받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류주호가 제 팔을 기현의 머리로 가져가 손으로 휘감아 감쌌다.
류주호가 “괜찮아?” 하고 나직하게 물었다. 하지만 기현은 통증보다 쾌감이 훨씬 더 큰지, 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며 아래를 오물거렸다.
다시금 육중한 몸이 추삽질을 재개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비좁은 공간을 채우며, 점점 극점을 향해 치달았다. 배 속이 아릿해질 정도로 커다란 성기가 내벽을 때리는 것처럼 짓찧었다. 그 모든 게 성감을 자극했다.
입구가 퉁퉁 부어오르는 것도 모를 정도로 온기현이 좀 더 강한 자극을 원하며 무아지경으로 저도 아래를 비벼 댔다. 어설프게 류주호의 허리를 다리로 바투 끌어당겼다. 류주호의 허릿짓이 거세어져 갔다. 거칠고 악착같은 움직임이었다.
흐느끼고 울고 진절머리를 치기도 했다. 간혹 너무나 버거운 감각에 짜증을 섞어 “나쁜, 나쁜 놈아, 흑.” 하고 울먹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종내에는 류주호가 원하는 대로 그의 이름을 연신 부르며 입을 맞췄다.
“아, 흣, 나, 나오, 아아……!”
“하아……! 큭, 읏……!”
기현의 성기가 말간 액체를 내뿜었다. 극점에 다다른 쾌감에 온몸이 경직했다. 그에 류주호의 좆을 아플 정도로 물어 당겼다. 잘게 경련하는 내벽 또한 자극이라, 류주호가 얕게 허리를 떨었다. 쾌감에 잠식당한 머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러고는.
깊게 물린 안쪽으로 정액을 폭발하듯이 쏘아 댔다. 계속해서 사출되는 절정에 눈앞이 핑 돌았다.
몸을 섞을 때마다 점점 더 제어되지 않는 느낌이다.
동시에, 점점 더 깊은 웅덩이에 빠지는 느낌이다.
하아, 하아.
아직 한참 부족했다. 온기현의 축 처진 몸을 끌어안았다. 얼굴이 타액과 눈물로 범벅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하나도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디단 액체로 목을 잔뜩 축이고 싶을 정도였다.
기현의 힘을 잃은 다리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공중에서 덜렁이던 한쪽은 어느새 무릎이 접힌 채 좌석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류주호가 아직도 크기가 줄지 않은 성기를 천천히 빼내자, 안쪽에서 주륵 하고 액체가 함께 딸려 나오는 느낌에 온기현은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행위가 끝나고 뜨거운 살덩이가 멀어지자 어쩐지 조금 추운 기분에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그러자 바로, 류주호가 차 안에 있던 티슈를 빼내어 기현의 아래를 조심스레 닦아 냈다. 퉁퉁 부어서 아린 구멍 탓에 허리가 뒤로 물러졌지만, 류주호는 가만가만히 세심하게 닦았다. 그리고 새로운 티슈로 얼굴과 몸을 살살 닦았다.
온기현이 신고 있던 신발도 부드럽게 벗겨 냈다. 도저히 일어나 옷을 입을 수가 없어서 그저 시트 위에 누워만 있자, 류주호가 제 겉옷을 위로 덮더니 꼼꼼하게 감쌌다. 꼭 갓 목욕한 어린 동물이 동사하지 않도록 얼굴만 빼고 전부 감싼 모양 같았다.
그리고 제 아래를 갈무리한 류주호가 땀에 젖은 기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집에 가자.”
그 말과 동시에 온기현의 의식이 까무룩 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