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부. Lost Winner (1) (8/20)

4부. Lost Winner (1)

익명

10/20 09:34

제목 : 존.나.빡.친.다

내용 :

야 이거 실화냐??????

너네 방금 올라온 학교 공지 봤냐???

시발; 앞으로 대동제 할 때 주점에서 술 못 판단다;

말이 되냐 이게???

아니 꼰대들 지네는 대학교 다닐 때 즐길 거 다 즐겨 놓고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ㅡㅡ

축제에 술이 빠지면 시발 뭐 다 같이 잔디밭에 모여서 강강술래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그게 축제야??

와…… 나 진심 너무 야마 돌아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나라냐?

―――――――――――――――――――――――――――――――――――――――――――――――――――――――――――――――――――――――――――――

익명

└ 나도 봤음. 진심 미친 거 아님?

익명

└ 근데 대동제 주류 금지는 대체 누구 대가리에서 나온 거냐; 내년부터 뭔 재미야

익명

└ 근데 갑자기 올해 그딴 공지가 나온 이유가 뭔데? 아는 사람 있음?

익명

└ 그거 아니냐?? 경영대 주점 이번에 완전 개판 났잖아

익명(글쓴이)

└ 경영대가 왜???

익명

└ 걔네 신입생 여자애들한테 야한 옷 입히고 술 서빙 시켰다던데

익명

└ ???? 진짜?? 미친 거 아냐?

익명

└ 나도 친구한테 들었음; 이번에 경영대 과대가 졸라 이 갈고 준비했다던데 그게 그런 거일 줄 몰랐네; 근데…… 이 갈다가 축제까지 갈아 버렸네. 이 십새끼가?

익명

└ 근데 작년 축제도 경영대 좀 쎄하지 않았냐? 그때는 클럽 콘셉트? 뭐 그런 거였는데. 그때 4학년 선배들이 여자애들 몸평하고 그랬던 걸로 앎; 그때 묻힌 것도 신기했는데 이번에 완전 터졌네……. 이럴 줄 알았다ㅡㅡ

익명

└ 개쓰레기들이네 근데 왜 지금에야 터졌냐;

익명

└ 이번에 수위가 좀 심했다더라. OB들 몰려와서 성희롱 장난 아니게 했다던데. 완전 9시 뉴스감이다;

익명

└ 야 그리고 그거 기획한 과대 징계 먹음

익명(글쓴이)

└ ㄹㅇ?? OB는 어케 됨??

익명

└ OB중 하나는 파이어 볼 아작 났대 ㅋ 듣기로 축준위 중 한 명이 발로 깠다고 함 ㅋ

익명

└ 아 시발ㅋㅋㅋㅋㅋㅋ 내가 고자라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

└ 근데 이 정도면 인터넷 기사에 뜰 법도 한데, 어째 조용하다?? 신기하네

* * *

캠퍼스 앞 대로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전에는 6차선 도로 위의 횡단보도를 새까만 콩나물들이 가득 메우며 한국 대학교 정문을 향해 우르르 몰려갔다. 그리고 또 오후만 지나면 강의를 마친 학생들이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도로 건너편에 즐비한 맛집과 술집을 찾아 이동했다.

학생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도,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정차 중인 새까만 SUV를 향해 눈을 흘끔거렸다.

척 보기에도 눈길을 끌었다. 비단, 5미터에 가까운 전장의 커다란 보디 전체가 매트 블랙으로 뒤덮어져 어딘가 육중함을 자아낸다는 사실뿐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순서는 먼저 차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였고, 새까만 SUV는 그다음이었다. 그 남자는 SUV의 차체 옆문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급스러움과 우아함이 차고 넘쳤다.

옆 가르마로 단정하게 앞으로 내린 앞머리가 남자의 눈썹 끝을 살짝 덮었다. 언뜻 만져 보고 싶어질 만큼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은 남자가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살짝살짝 좌우로 흔들렸다.

남자는 썩 기분이 좋지 않은 듯 입매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서늘한 표정과 눈매가, 그의 화사한 외양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이들의 이목이 한데 집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남자, 류주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팔꿈치 언저리를 톡톡 두들기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 온기현을.

아니, 정정이 필요했다. 드디어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고삐를 거머쥐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고삐 잡힌 망아지였다. 그렇게 류주호는 생각했다.

류주호는 쉼 없이 대학교 정문에서 나오는 이들을 눈으로 좇으면서, 머릿속으로 지난 축제 때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류주호는 상당히 심적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연심을 방패 삼아 이기적인 낭만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 거기다 몸의 상성까지 나무랄 데 없이 잘 맞는 사람. 류주호는 온기현같이 저에게 적당한 사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이제껏 만났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 류주호에게 무언가를 기대해 왔다. 심플하게 서로의 욕구만 충족하기 위해 만났던 여자들 중에, 처음에는 이런 면에 있어 상당히 건조해 보여 꾸준한 관계를 지속할 만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만남을 지속하다 종내에는 류주호로부터 무언가의 약속을 얻기를 바랐다.

질투든, 구속이든, 물질이든, 사랑이든.

애초에 약속했던 목적과 하등 관계없는 것들을 들이밀기 시작하면 금세 싫증이 나고는 했다. 그렇다고 남자와 관계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끔찍한 일이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달랐다.

생전 처음 느끼는 야릇한 흥분을 설마 동성에게서 느낄 줄은 몰랐지만, 온기현은 무언가를 돋구는 구석이 있었다. 먼저 가만히 있던 저를 건드린 주제에, 괘씸하게도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류주호를 두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고삐를 잡았다. 어마어마한 성취감이었다. 달뜬 몸을 한껏 껴안았을 때 온몸을 휘감는 아찔한 승리감에 전율이 일었다. 지금껏 살면서 이만큼 만족감이 큰 목적을 쟁취한 적이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무엇을 하든 쉽게 이루어 냈고, 또 무엇을 하든 제가 기대했던 결과를 도출하리라는 데에 의심하지 않고 살아왔다.

생전 처음이었다. 온기현을 제 품에 안은 그 순간, 정수리까지 관통하는 희열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손에 쥔 고삐가 마치 저에게 속한 가장 훌륭하고 값진 전리품처럼 생각됐다.

심지어 그 전리품은 가까이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면 무척 달큼하고, 놀랍도록 부드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마치 설탕 과자로 만들어진 트로피 같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매 순간, 처음 온기현을 눈에 담았던 순간이 점멸하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노력하는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손에 거머쥔 그것이 끔찍하도록 달큼했다. 그제야 범재를 이해한 천재처럼, 누군가 들으면 재수 없다고 욕하며 침을 뱉을 만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온기현과 좋은 관계를 구축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꾸며 내는 것 없이 편하게 자신을 풀어 헤치고, 뜨겁게 몸을 맞추고, 서로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그런 관계.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희열이, 단숨에 온몸을 지배해 갔다. 흥분과 직결된 희열은 곧 심장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어느 순간부터 온기현만 보면 온몸이 저릿저릿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고양될 수 있나, 하는 자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 희열은 생전 처음 느끼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간혹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이 제 머리와 몸을 잠식해 갔다.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 노력해서 가져 본 제 것이 누군가에게도 마찬가지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겠구나, 라고 깨닫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류주호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다.

초조했다. 자꾸만 입이 마르고 미친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온기현이 새된 목소리로 너 미쳤냐고 물을 때마다 불쾌감은 한없이 커져만 갔다. 그의 말대로 정말 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온기현에게 했던 행동을 돌아봐도 이건 과거의 자신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장 제 감각을 뒤흔드는 달큼한 살 내음에 취해 희열에 잠식된 뇌는 곧 그것을 불완전함으로 연결했다.

고삐를 그러쥔 힘이 아직 느슨했던 것이다. 그래, 아직 덜 가진 것이다.

완전히 가지고 싶다. 완전히 가져야 했다. 더 완전히, 뼛속까지 전부 발라먹을 정도로 몸속 깊숙한 곳까지 전부 다.

무엇까지 가지고 싶은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져야 이 불쾌감이 사라질지도.

여기저기 마음을 흩뿌리고 다니는, 정확히 저까지 포함하여 54개의 마음을 흩뿌리고 다니는, 마음이 헐렁하다 못해 아주 헤프기 그지없는 이 생명체의 존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저한테 내보이는 것처럼, 쾌감에 약한 몸이 어디까지 열렸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에 흉포한 풍랑이 일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사실은 다 찢어 죽이고 싶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한창 그런 초조한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져 올 때쯤, 제가 벌이던, 공유 복합 공간을 만들겠다는 부동산 사업을 언젠가부터 손에서 놓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업 파트너 중 하나인, 플랫폼 개발 업체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을 때였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 완전히 가지지 않아도 좋았다. 당장의 이 성취감은 거짓이 아니니까.

그래서 며칠 동안은 그간 지연되었던 사업 준비에 골몰할 생각이었다. 처음엔 잘돼 가는 듯했다. 나머지 부족한 자금만 융통하면 되었다. 미팅을 마치고,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차에 올랐을 때 불현듯 떠오른 온기현의 얼굴을 애써 지웠다.

삼호 투자 운용의 좆 같은 대회든 뭐든, 그딴 증명이 없더라도 저한테 투자하라고 아버지를 설득할 셈이었다. 아버지에게 원하는 수익률을 얼마든 부르라고 할 생각이었다. 사업 이후 2년 이내에 그 수익률을 달성시키지 못하면 아버지가 애당초 저에게 원했던 대로 가업을 잇든 뭘 하든, 저보고 개새끼처럼 짖으라면 짖을 것이라는 서약서라도 쓸 셈이었다. 집에 가겠다고 미리 아버지의 비서에게 연락을 넣어 놓고 차를 몰았다.

그렇게 정신을 집중시키려 애쓰던 중이었다. 신호에 걸린 차가 정차했을 때 문득 시선을 돌렸다. 우연히 길가에 파는 망아지 인형을 발견했다.

트럭을 개조하여 노상에 대어 놓고, 총을 쏴서 과녁을 맞히면 망아지 인형을 증정해 주는 게임이었다. 상품은 언뜻 보기에도 조잡한 싸구려 망아지 인형이었다.

불쌍하게도, 누군가 자신을 가져가 주기를, 누군가 과녁을 맞혀 주기를, 사각 상자 안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을, 꼬질꼬질 때 묻은 인형. 그게 어쩐지……. 제 머릿속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씨발.’

류주호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온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안 받아.’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그래서 바로 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온기현은 읽지 않았다. 그래서 또 전화를 걸었다.

‘딱 세 번만 건다.’

연신 울리는 전화 연결음. 통화 목록 이름 옆에 죽죽 쌓여 가는 발신 전화 수.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소리샘으로…….

53번째로 좆같이 발랄한 안내음을 들었을 때, 류주호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차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온기현을 찾아,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기현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이제까지 느꼈던 불쾌감이 전신을 칭칭 옭아매듯이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에서 야만적이고 폭력성을 띤 무언가가 휘몰아쳤다. 하지만 류주호는 그 생경한 감각을 애써 내리눌렀다. 주먹을 휘둘러서 될 게 아니었다.

집안의 이름을 빌려 학교 이사회에 찔러 넣고, 연루된 새끼들은 모두 알게 모르게 사회적으로 매장했다. 정·재계에 입김이 센 놈들이 제 주위에는 널렸다. 어릴 때부터 비슷한 집안끼리 자주 모임을 했던 터라 슬쩍 말을 흘렸을 뿐이다.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을 만한 국내 기업의 그 어디에도 발을 들이지 못하리라.

양희인도 그 모임의 멤버 중 하나였다. 양희인 집안은 대대로 언론계에 힘을 써 온 집안이었다. 혹여라도 온기현의 이름이 오르내릴까 싶어, 그녀를 통해 언론 쪽은 철저히 막았다.

그리고. 온기현은 다시 제 손에 돌아왔다. 고삐는 다시금 제 손안에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슴속 어딘가가 따끔거렸다.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불안함이 제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류주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 순간, 오감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신기하게도 시야에 보이는 거리면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알 수가 있었다.

온기현이 여전히 거지 같은 꼴을 한 채 오버사이즈의 검은색 반팔 티를 입고 백팩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평소의 꼬질꼬질한 행색 그대로 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 뭐야?”

허스키한 음성에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류주호는 입꼬리를 비죽이 올렸다. 일단 지금 당장 눈에 거슬리는 부분부터 해치울 생각이었다.

“기다렸어. 타.”

“뭐야, 연락도 없이. 사람들 지나다니는 데 방해되게 커다란 차를 길가에 세워 놓고.”

온기현이 조수석에 탄 채로 좌석의 안전띠를 매며 무어라 꿍얼거렸다. 벌써 몇 번이나 타 봤다고 이제 제법 류주호의 차에 올라타는 것도 익숙한 모양새였다.

이미 조수석 좌석의 각도는 온기현이 제 몸에 편한 것으로 맞추어 놔, 시트 높낮이를 건드릴 일은 없었다.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을 빤히 바라봤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싫은 기색은 아니다. 온기현이 손등으로 연신 제 볼을 문질러 댔다. 평소 화를 낼 때마다 뾰족하게 솟아오르던 눈꼬리가 유순하다. 진심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기분 좋은 놀람을 담은 얼굴이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류주호는 비죽 솟는 웃음을 입가에 걸쳤다. 뒷덜미가 뻐근하게 당겨 왔다.

어떻게 매번, 온기현을 눈에 담을 때마다 이럴 수 있는지 불가해하게 여겨질 정도로 그를 본 순간 온몸의 감각이 묵직해졌다.

아니, 기실 눈에 담을 때만은 아니었다. 외려 온기현을 마주하지 않는, 그 이외의 시간에 더욱 빠듯한 감각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격렬하게 흥분을 부딪칠 때마다 야한 몸뚱이는 그에 적극적으로 응해 온다. 가느다란 몸에 제 것을 맞출 때마다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고양됐다. 몇 번이나 절정을 토해 내도 항상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 탓에 간혹, 아니 최근 들어서는 자주 속이 울렁거렸다.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은 느낌도 들었고, 아니 오히려 속이 꽉 찬 느낌이 들기도 했다.

동시에 새삼 신기했다.

이렇게까지 몸의 합이 좋을 수도 있나.

“지금 딱 강의 마치고 나올 시간인 거 아니까 왔지. 오늘은 어디 좀 가, 나랑.”

“어디?”

그렇게 묻는 온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어제 하도 빨아 대서 잔뜩 부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

뻐근한 느낌이 순식간에 아래를 달궜다. 그 아래로는 가슴팍의 허연 살이 얼핏 드러날 정도로 헐렁한 티셔츠가 안전띠 아래로 구겨진 채였다. 팔꿈치까지 오는 티셔츠는 틈이 많았다. 제가 이대로 저 티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도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헤프게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의 살갗에는 제가 만들어 놓은 울혈이 가득했다.

목구멍 안으로 욕지거리를 겨우 삼켰다. 류주호는 얼굴을 굳히며 핏줄이 돋아난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었다.

“네 옷 벗기러.”

모든 이들의 시선을 모으던 커다란 차는 빠른 속도로 도로를 벗어났다.

* * *

“어서 오세요, 류주호 고객님―!”

발레파킹을 맡긴 류주호는, 카멜색의 롱 재킷 주머니 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에 즐겨 찾는 편집 숍이었다. 얼굴만으로 류주호를 알아본 직원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은인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환한 미소와 발랄한 인사말로 우량 고객을 맞이했다. 우량 고객은 언제나 머릿속에 얼굴과 이름을 담아 둬야 하는 매니저의 노련함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류주호가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야.”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류주호가 고개를 돌렸다. 온기현이 제 팔뚝 옆에 가까이 몸을 기댄 채로 저를 부르고 있었다. 바싹 붙은 온기가 기꺼워서 괜히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것을 꾹 참느라 주머니 안의 손이 움찔거렸다.

온기현이 산만하게 가방끈을 쥐었다 놓았다 반복하며, 류주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여기 어디야? 너 쇼핑하게?”

온기현의 미간에 설핏 주름이 졌다. 불만스러운 듯 입매가 조금 우물우물하며 일그러졌다.

씨발. 귀여워.

제 손으로 쟁취한 이 망아지는 정말 미치도록 귀여웠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봐도 어엿한 사내새끼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작고 말랑한 그것처럼 보였다. 망아지 인형.

온기현의 걸음이 자꾸만 뒤로 물러졌다. 네가 쇼핑하는데 왜 자기까지 따라와야 하냐는 거부의 몸짓이었다.

류주호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손을 공손하게 모은 채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직원을 향해 말했다.

“옷 좀 보러 왔어요, 매니저님.”

“네에, 류주호 고객님. 무슨 옷을 찾으실까요? 이번에 생×랑에서 새로 나온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 신상이 있는데, 시착 한번 해 보시겠어요? 지난번에 구매하신 그레이 칼라의 솔리드 니트와 매치하면 참 잘 어울리시겠어요.”

“아뇨, 제 거 말고.”

“네?”

류주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얘 거요.”

“뭐?”

“네?”

온기현과 편집 숍 매니저가 동시에 되물었다. 류주호는 말을 이었다.

“오늘 당장 입고 갈 옷으로 골라 줘요.”

온기현은 한사코 거부했다. 왜 네가 자기 옷을 사 주냐면서 직원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연신 쫑알거렸다.

류주호는 “왜냐면 오늘 너희 집에 갈 거거든.”이라고 말했다. 대놓고 야릇한 말이라도 한 것으로 생각한 온기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온기현이 직원의 눈치를 보며 운동화 끝으로 류주호의 무릎을 쳤다. 그러고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식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류주호를 노려봤다.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 네 집에 있는 거지 같은 옷들 다 불태워 버리려고.”

“…….”

온기현은 그 말을 듣고는 입을 벙긋거리며 씩씩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열을 내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냥 장단에 맞춰 주기만 할 생각인 듯,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중얼거렸다.

류주호는 고객용 가죽 소파에 앉아 온기현을 기다렸다.

자신이 직접 골라 준다고 하니 온기현은 계속해서 완강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옆에서 대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한 ― 즉, 이 편집 숍의 최대 VVIP 고객님께서 돈을 쓰는 대상이 이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임을 파악한 ― 매니저가 금세 웃으며 다가와 이것저것 추천해 주었다.

류주호에게는 야박하게 굴던 온기현은, 매니저의 상냥한 태도와 숨 쉬지 않고 몰아치는 나긋한 싱잉랩 같은 추천의 세례에 혼을 뺏긴 듯 그녀가 골라 주는 옷을 한 아름 팔로 끌어안고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류주호는 의미 없이 테이블 위의 잡지를 뒤적거리던 참이었다.

“어머! 세상에! 너무 잘 어울리세요!”

그때 높은 옥타브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온기현은 어색한 몸짓으로 탈의실에서 주춤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유니섹스 스타일을 이렇게 훌륭하게 소화하시는 분이 흔치는 않거든요! 몸매가 예쁘셔서 그런가 봐요. 이거 조금만 군살이 있어도 부해 보이는 옷이거든요. 저번에 저희 숍 단골인 이종영 배우님도.”

“별로네요.”

“……네?”

꺅꺅거리던 직원의 목소리가 단숨에 멎었다.

그리고 거울을 보며 뻣뻣하게 굳어 있던 온기현도 마찬가지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류주호를 바라봤다. 류주호는 잡지를 테이블 위로 건성으로 던졌다.

“가슴이 너무 파였잖아요. 저걸 어떻게 입고 다녀요? 너무 야한 거 아닌가요?”

“네? 아, 그. 고객님. 이종영 배우님이 얼마 전에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셨을 때 입으셨던 건데……. 너무 야하실까요? 그러실까요?”

요상한 말투를 구사하는 매니저는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프로페셔널했다. 웃음을 잃지 않고 류주호의 말에 결국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기현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애초에 살 생각도 없었지만, 대체 뭐가 야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깨선이 조금 내려온 얇은 셔츠는 쇄골 조금 아래에서 첫 단추가 시작되었다.

한숨이 폭 새어 나왔다.

“야, 됐어. 나 이거 못 사. 돈도 없고, 너한테 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어.”

“매니저님.”

“아, 네, 네.”

“안에 얘가 벗어 놓은 옷 가져와 주세요.”

온기현의 말을 자르는 류주호의 뜬금없는 말에 매니저는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량 고객의 말을 거스를 수 없는 그녀는, 온기현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후다닥 탈의실로 들어가서 온기현이 입고 온 옷 쪼가리를 가져다 류주호에게 건넸다.

“아, 뭐야! 내놔!”

“싫은데?”

“애처럼 뭐 하는 거야. 유치해, 너!”

온기현이 소파에 앉아 있는 류주호가 들고 있는 옷을 빼앗기 위해 덤벼들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온기현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내가 애가 아닌 건 네가 직접 목격해서 알잖아.”라고 속삭였다. 무엇을 지칭하는지 눈치챈 온기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샐쭉하게 올라간 눈을 하고는 팔을 뻗었다.

그 찰나였다. 네가 알아서 가져가라는 듯 건성으로 들고 있던 티셔츠를 온기현이 손으로 잡아당기자마자, 류주호가 대뜸 끌어당기듯 힘을 줬다.

북―.

“헉.”

뒤에서 매니저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티셔츠가 찢어졌다. 소맷단에서 이어지는 박음질 부분을 시작으로 아주 깔끔하게 좌우로 쫙.

“허.”

갈라진 티셔츠 양쪽은, 두 남자의 손이 잡은 채였다. 온기현의 입이 벌어졌다. 앉아 있는 류주호에게 달려드느라 상체를 대각선으로 숙인 상태였다.

그런 온기현의 모습을 본 류주호의 시선이 쇄골과 그 아래로 향했다. 상체를 숙인 탓에 틈이 살짝 벌어져, 제가 요새 한창 물고 빠는 데에 맛 들어 벌겋게 부어오른 유두가 보였다.

‘저 야해 빠진 몸으로, 이딴 옷을 입고 어딜 다닌다고.’

“이제 옷 사야겠다, 그치?”

“하…….”

싱긋 웃는 류주호는 얄미울 정도로 단정한 얼굴이었다. 찢어진 티셔츠를 들고 있는 모습조차 화보로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온기현은 아랫입술을 사리문 채 한숨을 푹 쉬고 제 손에 있던 티셔츠를 류주호를 향해 거칠게 집어 던졌다.

“매니저님. 다른 옷 보여 주세요.”

가볍게 받아 든 그 천 쪼가리를 손안에서 구긴 류주호가 유쾌한 얼굴로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드륵.

탈의실 문이 열렸다.

완전한 무표정의 온기현이 체념한 듯 얌전히 옷을 걸쳐 입은 채 걸어 나왔다.

“어머! 세상에! 어쩜 이렇게 딱 맞춘 것처럼 잘 어울리시죠? 이건 또 이번 탐×드의 F/W 시즌에서 가장 인기 많은 폴라 스웨터거든요. 고객님! 이거 보이시죠? 여기, 여기 목 폴라가 목 전체를 뒤덮고 있어서 가슴이 절대 하나도 안 파인 옷이에요! 세상에, 얼굴이 어쩜 이렇게 작으실까! 피부도 새하얘서 또 이런 밝은색의 스웨터가 잘 어울리시나 봐요. 이건 또 저번에 모델이신 유보윤 님이 오셔서.”

“옷이 왜 저따위예요?”

“네?”

마네킹처럼 서 있는 온기현이 아니라, 류주호가 있는 쪽을 쳐다보며 온갖 칭찬 일색을 늘어놓던 매니저의 얼굴이 또다시 굳었다. 호들갑 떨던 손놀림도 멈춘 채였다. 마네킹이 두 개가 서 있는 것 같았다.

“몸에 너무 붙잖아요. 몸 선 예쁜 거 어디 대놓고 광고할 일 있어요?”

씨발, 이상한 새끼들이 들러붙으면 어쩌려고.

류주호가 서늘한 말로 지껄였다. 매니저의 하회탈 같은 얼굴에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언제는 너무 파였다고 뭐라고 하고, 이번에는 너무 붙는다고 뭐라고 하고. 어금니가 으득 갈렸다. 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편집 숍은 VVIP를 대상으로 디포짓(deposit), 즉 일정 금액을 선결제해 놓고 구매하는 대로 차감하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일종의 회원제 비슷한 개념이었다. 그리고 류주호는, 이 숍의 VVIP +a였다. 여기서 +a는 고객 구분 등급이었다.

순위는 a부터 d까지 있었다.

다름 아닌 싸가지가 없을수록, 즉 지랄맞은 고객일수록 순위가 높아지는 시스템이었다. 류주호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옷 셀렉팅이 이 정도밖에 안 됩니까?”

그럼 네가 해, 이 새끼야.

매니저는 목구멍에서 이 말이 순간 튀어나오려던 것을, 다년간의 온갖 종류의 개싸가지 셀럽들을 상대했던 경험과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 참았다.

“앗, 아앗! 그럼 어떤 스타일을 찾으실까요? 오호호. 몸 선이 드러나지 않는 루즈한 핏으로 찾아볼까요?”

“루즈? 얘는 가뜩이나 불쌍해 보여서 눈길을 끄는데, 헐렁한 거 입고 헐렁해 보였다가, 웬 동정심 많은 개새끼가 도와주겠답시고 엉겨 붙기라도 하면 어쩔 겁니까. 매니저님이 책임지실 겁니까?”

이, 이, 이…….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류주호를 쳐다보는 매니저의 입에서 거의 쌍욕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보통 이 편집 숍의 매니저는 고객의 쇼핑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고객의 기분을 맞추는 대응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와서 어울리는 옷을 골라 달라고 하는 고객이 더러 있었는데, 그런 경우엔 최대한의 리액션과 함께 동행자에게 칭찬을 하는 것이 대응 방침이었다.

당최, 이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열심히 숍의 방침에 따라 고객 대응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건 필시 매니저인 자신을 엿 돼 보라고 지껄이는 말임이 틀림없었다.

저딴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진심일 리가 없지 않은가.

매니저는 또다시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VVIP가 매출을 많이 내 줄수록 제 주머니에 들어오는 인센티브는 어마어마했다. 다음 달 카드값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루즈한 핏이 막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불쌍해 보이지는 않으실 거고요, 고객님. 사, 사실 이 고객님이 본판이 상당하고 피부도 좋으셔서 머리만 좀 단정하게 다듬어 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으로 풀 세팅을 하면 아주,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실 것 같거든요! 어디, 제가 한번 스타일링해 볼까요?”

“……뭐라고?”

헉.

순식간에 류주호의 눈빛이 서늘하게 뒤바뀌었다.

“장난해요?”

“아뇨, 고객님. 혹시 무슨 불편하신 부분이라도 있으시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뭘 해요?”

“스, 스타일, 링……을.”

“미치겠네.”

류주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뭔가 흉험한 상상이라도 한 듯,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가뜩이나 외양부터가 일반인과 확연히 다른 류주호였다.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단정하고 짙은 이목구비가 벼려진 듯 빛났고, 위압적인 몸은 어쩐지 한층 더 부풀어 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매니저가 곤란한 표정으로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이러다 혹시, 디포짓 금액을 전액 환불 요구라도 하게 되면.

거기까지 생각한 매니저는 정신을 가다듬고 허리를 거의 폴더로 접고 죄송하다고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너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야? 네 눈이 이상한 거고만.”

온기현이 뚱한 말투로 그렇게 툭 말을 뱉었다. 매니저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됐어. 그냥 네가 골라 줘. 그럼 됐지?”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말한 온기현은 성큼성큼 옷이 줄지어 걸려 있는 행거 쪽으로 걸어갔다.

류주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온기현의 옆으로 다가가 이것저것 옷을 꺼내서 대어 보았다.

그리고 대어 보는 것마다 어떤 조그만 흠이라도 발견해서 읊어 대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무늬가 현란해서 네가 너무 튄다든가, 이건 너무 속이 비쳐서 눈만 마주쳐도 음란한 생각을 하게 한다든가 하는 얼토당토않은 것들이었다.

온기현은 이를 꽉 깨물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행거에 걸린 옷들을 이리저리 열심히 뒤적거리는 류주호를 가느다란 눈으로 흘겼다. 그러고는.

“너 잠깐 이리 와.”

“응?”

온기현이 한 손으로 류주호의 재킷 앞자락을 확 낚아챘다. 뒤에서 대기 중인 매니저의 눈을 피하고자 류주호를 끌고서는 탈의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류주호는 순순히 온기현을 따라왔다.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온기현이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탈의실 안쪽까지 들어와서는 류주호를 홱 올려다봤다.

가게는 어마어마한 크기에 비해 손님이 많지 않았다. 당장 지금만 해도 류주호와 온기현 이외의 손님은 없었다.

그리고 탈의실 또한 크기가 성인 남성 네 명은 충분히 들어가 체조를 할 정도로 넓었다. 프라이빗을 추구하는 공간엔 푹신한 1인용 소파와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온기현은 그 안에서 류주호를 벽에 밀치고 물었다.

씩씩거리는 온기현을 보는 류주호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바짝 붙은 몸에서는 달큼한 살냄새가 났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바나나 향이었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아직 여물지 않은 푸릇한 내음이 풍겼다.

그 이전에 어떤 사람과 무슨 짓거리를 했는지까지 알 수 없었지만 ―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 온기현은 그렇게 경험이 많지 않았다. 여러 번 몸을 섞다 보니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익숙지 않은 행위에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몸. 그리고 가해지는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살갗, 그 모든 게 아직은 설익은 그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온기현에게서는 농익은 냄새가 났다. 달큼한 과육이 짓물러져 으깨진 향이었다. 같은 사내면서도, 남자를 아는 몸에서는 그런 방탕한 향이 났다.

온전히 자신이 길들이고 끌어낸 감각이었다.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너는, 뭐 하고 싶은데.”

“뭐?”

뭐 하자는 거냐는 질문에 류주호가 되물었다. 황망함이 담긴 얼굴이 지척이었다. 숨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졌다.

“키스할까?”

비죽이 웃으며 얘기했지만, 사실은 머릿속에서 온기현을 진즉에 발라먹고 있었다.

온기현은 입을 벙긋거렸다. 눈꼬리 끝이 점점이 붉어지며 커다랗게 뜨였다. 말은 뾰족하게 하더라도 이렇게 조금만 밀어붙이면 금세 풀어진다.

순간, 화가 날 정도로 거친 성감이 치솟았다.

“이런 데서 키스하면 너 진짜 죽도록 맞을.”

거기까지 얘기한 온기현이 헙, 하고 입을 닫았다. 맞으면 더 꼴린다는 이전의 변태성 짙은 발언이 불시에 떠오른 듯했다. 류주호의 아래가 지끈거릴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져 왔다.

온기현이 손등으로 거칠게 볼을 쓸었다. 그러더니,

“나 그냥 가다가 근처 마트 앞에 내려 줘. 거기서 티 하나 사 입고 가게.”

라고 말했다.

불퉁한 표정의 온기현을 류주호가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올려 온기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지 마. 내가 옷 사 주고 싶어서 그래. 근데……. 뭘 입어도 예쁘니까. 딱 고를 수가 없어. 그래서 그래.”

“…….”

불시에 받은 공격과 같이, 달콤한 음성을 들은 온기현의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갛게 물들었다. 꼭 절정을 터뜨릴 때처럼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류주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냥 당장 여기서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이 거센 풍랑을 잠재울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제 것을 말랑한 속살에 욱여넣고 미칠 듯이 허리를 흔들어 대는 것뿐이었다. 요즘따라 제어력을 잃은 이 갈증이 더더욱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알았어. 그럼, 딱 하나만. 골라 주는 걸로 입고 갈게. 그리고…….”

온기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새하얀 목덜미까지 울긋불긋하다. 그 사이로 제가 어제 씹어 놓은 자국이 흘끗 보였다.

“키스는 집에 가서 해…….”

아.

류주호는 탄성을 삼키며, 다시금 제 안의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온기현은 류주호를 탈의실 밖으로 먼저 내보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서야 탈의실 밖으로 나왔다.

결국 온기현은 류주호가 골라 준 베이지색 터틀넥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적당히 헐렁하고 적당히 몸에 붙는 스웨터는 보들보들한 감촉의 굵은 털실로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온기현의 새까맣고 덥수룩한 머리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둘 다 만지면 부드럽게 손에 착 감긴다.

온기현이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 와서 옷 사 주는 사람한테 그런 거 묻는 건 실례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온기현이 자꾸만 어깨 너머로 계산대를 훔쳐보길래 몸으로 가려 버렸다. 고개를 내밀어도 그 높이가 류주호의 어깨선을 넘지 않아, 온기현이 가격을 알아내는 것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어쩐지 딱딱 끊어지는 스타카토 같은 매니저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둘은 편집 숍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류주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미 제집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기에 내비게이션을 찍을 필요는 없었지만, 부러 온기현에게 내비게이션을 찍어 달라고 했다.

온기현은 흘끔 곁눈질하며 눈동자를 굴리더니 내비게이션에 손을 뻗어 류주호의 오피스텔 주소를 찍었다. 기특하게도.

류주호가 웃음 어린 눈을 부드럽게 접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석양이 도심의 빼곡한 건물 숲 사이로 숨어들고 있었다. 붉은 석양빛이 한강의 윤슬에 반사되어 반짝이며 출렁였다.

슬슬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지 도로 위로 차가 조금씩 빽빽하게 모여들고 있었다.

류주호는 조수석에 시선을 던졌다.

제가 사 준 옷을 입은 온기현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만 보였던 얇고 헐렁한 티셔츠를 벗고, 부드럽고 따듯한 옷에 감싸인 온기현은 그야말로 품에 끌어안으면 말랑하게 녹아내릴 것 같은 포근한 솜사탕 같았다.

“차가 막히네.”

앞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옆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금 눈을 돌리자 온기현은 몸을 아예 돌리고는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밖에 무슨 구경이라도 났어?”

“어? 아니. 그냥, 저거 봤어. 전에 말로만 들었었는데, 진짜 높구나…….”

“어디?”

온기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서울에서 제일 높은 복합 쇼핑몰이었다. 저층엔 쇼핑몰이, 고층에는 고급 호텔이 위치한 그 건물은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의 높이를 자랑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코스인 서울의 마천루였다. 아마 건물 층수가 총 백 층이 넘어간다고 뉴스 같은 데서 들었던 기억이 있다.

도심 경관을 빛나게 하는 그 건물은, 외벽에 휘황찬란한 조명을 박아 넣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한참 이른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것 같았다. 돈도 되지 않는 낭만을 돈벌이로 이용하는 단순한 돈지랄이겠거니 싶은 감상에 류주호가 무감하게 건물을 쳐다봤다.

“예쁘다…….”

그때 문득, 온기현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갈까?”

“어? 어딜? 아. 저기?”

“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고급 호텔에서 온기현을 닮은 새큼한 와인을 한 잔씩 기울이며, 달과 별과 가장 가까운 하늘 아래에서 온기현과 밤새 뒹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됐어. 가긴 뭘 가. 그냥 빨리 집에 가자.”

온기현이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자세를 바로 했다. 류주호는 그에 잠시 뜸을 들인 후 단조로운 음성으로 “그래.” 하고 대답하고서는 조금 한산한 도로로 빠져나와 그대로 집으로 차를 몰았다.

* * *

“아니. 이게 다…….”

기현은 현관문 앞에서 어이없는 중얼거림을 흘렸다.

대관절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뻐근한 허리를 두들기며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때, 누군가로부터 “배달 왔습니다. 댁에 계시나요?” 하고 또박또박 물어 오는 공손한 전화를 받았다. 노곤한 몸을 겨우 일으켰다.

택배를 시킨 게 없는데, 하고 의아해하던 참에 곧이어 벨이 울렸다. 그리고 기현은 제집에 방문한 남자로부터 쇼핑백 꾸러미를 받았다.

“온기현 님 맞으십니까?”

“네, 맞는데요.”

“여기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네?”

남자는 정중하고 공손하다 못해 정장까지 빼입고 있었다.

기현이 황망하게 어어, 하는 사이에 남자는 싱그러운 미소를 걸치며 절도 있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쇼핑백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양손이 묵직해질 정도로 쇼핑백 꾸러미를 받아 든 온기현을 두고, 배송원은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덩그러니 서 있는 온기현을 향해 90도로 인사하고는 가 버렸다.

“……잠시만요.”

그제야 남자를 불러 세우려고 해 봤자 이미 늦었다. 조용한 엔진 소리를 내며 남자가 타고 온 차가 이미 떠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뭐지……?”

기현은 의아한 얼굴로 쇼핑백으로 시선을 내렸다. 잘못 보내온 택배일지도 몰라서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투명한 보호 가방으로 싸여 있는 쇼핑백 여기저기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겉면에는 하나같이 제가 알지도 못하는 로고가 박혀 있었고 쇼핑백 색깔과 모양도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좌우 앞뒤를 살펴보다가 구석에 붙어 있는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누군가의 이름이 필기체로 쓰여 있었다.

[류주호]

“어?”

아.

보낸 사람이자 동시에 결제한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가늠이 갔다. 투명 백 안쪽을 살펴보자 지금 제 옷걸이에 걸려 있는 저 고급스러운 스웨터와 비슷한 재질의 옷들이 안에 한가득 들어 있었다.

류주호가 제멋대로 사서 보낸 옷들이었다.

“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동시에,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결국 류주호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격하게 온몸을 부딪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격정에 몸을 맡겼다. 마치 그 짓만 머릿속에 든 두 마리의 짐승처럼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입술을 진득하게 빨고 또 빨렸다. 기현의 하의가 순식간에 모조리 벗겨졌다.

현관 앞에서 정신없이 키스했다. 동시에 상의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유두를 거칠게 짓누르고 잡아당겼다. 속절없이 신음을 흘렸다. 눈을 들자 빠듯하게 당겨진 류주호의 턱선이 보였다. 홀린 듯 그곳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자 류주호는 대뜸 온기현의 바지 버클을 풀러 속옷째 내려 버렸다.

허벅지께에 바지가 걸려 어정쩡하게 선 상태가 됐다. 새빨갛게 농익어 바짝 올라서 있는 온기현의 성기를 보며 류주호가 욕설을 짓씹었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다급하게 제 성기를 꺼내어 온기현의 것과 함께 그러쥐었다.

갑작스럽게 닿아 온 뜨끈한 살덩이의 감촉에 온기현이 얕게 신음을 흘리자 그대로 류주호는 머릿속의 핀이 나간 사람처럼 거칠게 손을 아래위로 움직였다. 골반이 절로 앞으로 내밀어져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잡기 쉽도록 성기를 내미는 꼴이 됐다.

절정은 눈 깜짝할 새에 찾아왔다. 온기현이 그의 손과 성기에 사정액을 뿌리고 밭은 숨을 내쉴 때쯤 류주호도 절정이 찾아왔다. 진득하게 쏟아진 정액이 온기현의 배와 옷, 그리고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진득한 유사 행위로 살을 맞대며 머리가 몽롱해질 때쯤, 어느새 둘은 류주호에 의해 침대로 직행하고 있었다.

류주호는 제가 사 준 베이지색 스웨터는 입힌 채로 그대로 얼굴만 옷 아래로 불쑥 집어넣어 복부나 가슴 같은 곳을 한참이나 물고 적셔 대며 빨았다.

“아까부터 이러고 싶어서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그런 말을 거친 숨과 함께 토해 냈다.

거기다, 지금 자신의 꼴이 민망함을 부추긴다는 것을 그제야 자각했다. 아래는 전부 벗고 위는 정반대로 맨살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차라리 아예 벗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꾸물꾸물 팔을 안으로 집어넣어 옷을 벗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류주호가 가벼운 손짓으로 저지했다.

“왜.”

“……존나게 예뻐서.”

눈 돌아가게.

자신이 골라 입힌 것을 몸에 두른 채, 흥분한 몸을 드러내고 있는 온기현을 내려 보는 류주호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그에 온기현이 외려 급하게 스웨터를 벗으려 애썼다. 끙끙대는 사이에 그의 얼굴은 이미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이 행위는 할 때마다 민망했다. 어쩐지 오늘따라 어질한 머리 때문에 숨을 헐떡이며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나, 갚을게, 옷……값.”

그 말에 조금 흥이 깨진 얼굴을 한 류주호가 설핏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때에 돈 얘기 하지 마. 내가 사 준다고 했잖아. 받는다며.”

“그래도.”

“하아, 나중에. 응? 더 말 걸면 나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지금도 존나 어지러워.”

“아, 잠, 잠깐! 앞에……, 윽. 그만 좀 해……. 아 씨, 가뜩이나 창피한데.”

고간을 향해 입을 벌리던 류주호가 눈만 들어 온기현을 쳐다봤다. 스웨터의 목 폴라 사이로 동그란 코와 눈동자만 튀어나와 보였다. 휑한 아래가 어색한 듯 자꾸만 얼굴이 스웨터 안으로 숨었다.

“왜? 난 좋은데.”

“그게 뭐가, 좋아. 진짜 이상해. 남들은 다 있는데 나만 없잖아.”

“살이 보들보들해, 엄청.”

“윽, 하지 마. 진짜 제발.”

류주호가 손으로 없는 곳을 간질이자 몸이 파득 튀었다. 남자의 몸에 거부감을 표하며 외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류주호는 이제 몸을 맞출 때면 당연하다는 듯 온기현의 아래를 애무하는 데에 열중했다. 아래가 짓물러질 정도로 적셔 댔다.

“그렇게 창피해?”

“응.”

진지한 물음에 온기현이 팔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여기 맨살 빨아 주는 거 환장하면서.”

류주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단조롭게 읊는 음성이 외려, 흥분이 극치에 다다른 것처럼 들렸다. 귀가 먹먹하게 울릴 지경이었다. 얼굴을 와락 구긴 기현을 보다가 연이어 운을 뗐다.

“발모제 발라 볼래?”

“어? 발모제?”

“응.”

“어. 어디서 파는데?”

“해외 직구 사이트.”

그 말을 들은 온기현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류주호의 사이즈에 맞는 해외 직구의 그 무언가가 생각나서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스리슬쩍 힐긋 눈치를 보며, “효과 좋을까?”라고 조심스레 묻자, 류주호는 “아무래도 그렇겠지.”라고 어쩐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끝내고 나서야 온기현이 굳었던 몸에서 힘을 뺐고, 류주호는 마치 ‘기다려’에서 ‘먹어’를 습득한 개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결국 거의 기진맥진해서 나중에는 여느 때처럼 엉엉 울어 댄 기현은 까무룩 정신을 잃다시피 하며 잠들었다.

받은 옷에 대한 값은 제대로 갚아 주겠다는 말은 그 이상 꺼내지 못한 채였다. 그런데다가 또다시 이런 옷 꾸러미라니. 그저 아연할 뿐이었다.

‘이건 아니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번부터 티셔츠가 구질구질하다느니, 옷이 이것밖에 없냐느니, 하는 소리를 하긴 했어도 그게 이렇게까지 억지로 옷을 사 입혀 가면서까지 창피한 일일 줄 몰랐다.

‘그렇게 꾸질했나?’

그의 옆에 서면 좀, 초라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건 비단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류주호 옆에 서면 어느 남배우라도 오징어로 만들 것이다.

근데. 그렇게까지 이상했나.

뒤늦게 창피함이 몰려들었다. 연채우도 가끔 몇 마디 하기는 했었다. 멋도 좀 부리고, 미용실에 가서 파마도 좀 해 보고 자신을 가꿔 보라고. 하지만 그건 연채우가 자신보다는 겉치레에 관심이 많은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나 자신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장난스레 말하고는 했기에 그 말도 대충 흘려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류주호로부터 이런 고가의 옷을 받을 이유는 없었다. 딱 하나만 사 준다고 하길래 나중에 갚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옷 꾸러미를 받을 이유는 정말이지 전혀 없었다.

“뭘 입어도 예뻐서 그래.”

순간 떠오른 그의 달콤한 말에 입에서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샜다. 자꾸만 류주호의 말에 가슴이 반응하고, 머리가 울린다. 자꾸만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달콤한 말에 면역돼 있지 않기에 자꾸만 제가 했던 결심을 잃는다. 그가 하는 어떤 말에도 상처받지 않고, 그냥 지금을 즐기다가 이대로 끝내자 했던, 최초의 결심을.

온기현은 그대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통화 목록 제일 상단에 있는 이름을 터치했다. 곧바로 ‘류주호’ 이름이 화면에 뜨며 연결음이 울렸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뚜루루루―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오른쪽 귓가에 울리는 신호음과 동시에, 어쩐지 좀 멀게 느껴지는 둔탁한 벨 소리가 왼쪽 귓가를 때렸다.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응. 기현아.

“응. 기현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양쪽에서 동시에 들렸다. 그에 놀라서 커진 눈을 현관문 쪽으로 돌렸다. 손에 핸드폰을 쥔 채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핸드폰을 쥔 손에 설핏 힘이 빠졌다.

한 아름의 쇼핑백 꾸러미보다 훨씬 더, 깜짝 선물 같은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 * *

온기현은 제 옆에 있는 이를 흘끔 쳐다봤다. 입보다 먼저 마중 나온 혀를 빨대 위에 얹어 척 보기에도 혀가 아릴 것처럼 달아 보이는 걸쭉한 아이스 초콜릿 프라푸치노를 주욱 빨아들였다.

류주호는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었다.

‘원래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나?’

의아함에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그런데 옆에서 보기에 딱히 맛있는 것처럼 먹고 있지는 않았다. 한창 쌀쌀한 날씨에 소프트아이스크림이 웬 말인가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맛을 음미했다. 초코칩 조각을 아작아작 깨물며 생크림과 같이 입에 녹여 먹으니, 이런 꿀맛이 따로 없었다.

“맛있어?”

볼을 부풀리며 먹는 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어쩐지 나긋한 음성으로 그렇게 물었다. 기현은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어떻게 기억했는지 온기현에게 “초콜릿 프라푸치노에 생크림 많이, 초코칩 많이, 맞지?”라고 물은 류주호가 시켜 준 것이었다. 그는 어쩐지 뿌듯한 얼굴을 했다.

진짜 이상하네, 오늘.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류주호를 보며 온기현은 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까만 해도 그랬다.

“이걸 나한테 왜 줘? 당장 환불해.”

“환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뭐?”

어이없어서 멍하게 입을 벌렸다. 환불 방법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려, 그냥 이 상태 그대로 가게에 가져다주고 돈을 돌려받으면 된다고 했더니,

“여기서 사는 옷은 이미 구매할 때부터 태그 떼고 갖다줘. 태그 떼면 환불 안 되는 거 알지?”

“…….”

“네가 안 입으면 다 불태워 버리고. 아니면 뭐, 찢어 버리든가.”

라고 빙긋 웃으며 짓궂은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니면.”

하고 운을 떼고는,

“불태워질 운명인 불쌍한 이것들 살리는 셈 치고, 네가 예쁘게 입은 거 보여 주든가.”

라고, 아직 서늘한 바람 냄새가 묻은 커다란 몸을 가까이 붙이며 속삭여 왔다.

정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온기현은 지금, 류주호가 골라 준 짙은 남색의 블루종 코트를 걸치고 그 아래에는 옅은 아이보리색의 캐시미어 폴라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어쩐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마냥 어색하고 어딘가 거추장스러웠다.

그리고, 류주호는 제멋대로 옷을 골라 입히며 온기현의 얼굴 여기저기에 연신 쪽쪽 소리 나도록 뽀뽀했다.

가벼운 뽀뽀가 볼과 콧등, 그리고 이마에 내려졌다. 곧 숨 가쁜 키스로 바뀌는 건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아, 여기서 하면 옆방에 소리 들리는데…….” 하고 멍한 머리로 걱정하던 기현의 생각과는 달리, 류주호는 온기현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스치듯 목격한 류주호의 바지 앞섶이 팽팽했다.

그리고 잠시 후.

차를 몰고 온 곳은 기현의 원룸에서 꽤 떨어진 거리의 도심 속 호수였다.

호수 주위로 산책길이 길게 나 있는 이곳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가을 날씨를 만끽하고자 저마다 발걸음한 사람들로 꽤 붐비고 있었다.

“어머, 자기야! 나 여기서 사진 한 장만 찍어 줘!”

“그래, 그래. 저기 가서 서 봐.”

사진 찍는 연인들의 들뜬 대화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까르르 터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퍽 때리고 도망가는 친구를 잡으러 달려가며 왁자하게 떠드는 학생들의 왁자한 외침. 나른한 오후의 햇볕을 쬐며 조곤조곤 저녁 찬거리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노부부의 두런두런한 대화.

다들 각자의 소중한 사람과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에 반해, 류주호와 온기현은 각자 손에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든 채 그저 터벅터벅 걷고 있을 뿐이었다.

온기현은 또다시 흘끔 류주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오늘은 어쩐지 평소와 분위기가 달랐다. 능글맞은 웃음을 띠고 이리저리 치댈 만도 하건만, 얌전하고 조용히 걷는 그의 모습은 사뭇 색달랐다. 그리고 어딘가 몸짓이나 움직임, 혹은 표정 등이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묘함이었다.

더욱이, 평소에도 잘 갖춰 입고 다니기는 했지만, 오늘따라 좀 뭐랄까. 굉장히 신경 쓴 티가 났다. 가르마를 옆으로 타서 자연스레 이마가 드러나는 머리 모양이라든가, 드레스 셔츠 위에 걸친 어깨에 각이 진 세미 정장 재킷이라든가.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딜 가나 튀는 외모의 류주호였지만 오늘은 어딘가 유독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디 방송 촬영이라도 하고 온 듯한 느낌을 풍겼다. 그만큼 눈에 띄었다.

척 보기에도 뭇사람들과 외양 자체가 남다른 남자였다. 서구적인 이목구비와 옅은 색소가 섞인 머리칼과 눈동자까지.

길가에 널린 그저 겉모습만 잘생긴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로 보나, 예사롭지 않았다. 존재 자체가 특출나 보였다.

흔히 후광이 비친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이었다. 저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처음 그를 봤을 때 느꼈던 감상 그대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을 터였다.

왠지 입맛이 썼다. 초콜릿의 쓴맛이 강하게 혀끝에 감돌았다.

손에 음료가 절반 정도 남은 컵을 들고 멍하니 호숫가를 바라보고 있던 때, 아무런 말 없이 옆에서 걷던 류주호가 말을 걸었다.

“다 먹었어?”

“어? 어어.”

“그럼 이리 줘.”

류주호가 손을 내밀었다.

얘가 왜 이래, 오늘.

괜히 주변을 흘끔거렸다. 하지만 의식하는 것도 저뿐인 듯싶었다. 정작 손을 내민 류주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온기현이 어색함에 관절을 덜거덕거리며 제 손에 들려 있던 일회용 컵을 내밀자, 류주호가 그것을 가볍게 받아 들고는 제 아이스크림과 같이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아이스크림은 거의 세 입도 채 먹지 않았다.

“자기야! 저기 공연 하나 봐. 가서 보자.”

옆으로 휙 지나가는 연인이 주고받는 대화가 들렸다. 그들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던지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거나 혹은 계단에 걸터앉아 있었다. 말처럼 누군가 공연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서 볼까?”

그때,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류주호가 부드럽게 읊었다. 가까이 다가온 류주호에게서 청량하면서도 묵직하고 알싸한 향기가 났다.

평소 그에게서 나는 이 향기는 맡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그 향을 맡으며 온기현은 약간 머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홀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걸터앉아 있는 넓적한 계단 뒤편으로 다가가 제일 뒤편에 섰다. 작은 공터가 대각선으로 보이는 위치였다.

사람들의 기대 어린 시선을 받으며 어깨에 멘 기타를 고쳐 쥔 남자가 선을 뚱두룽 튕기더니, 곧바로 마이크에 대고 아아, 하는 목기침과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나 그대를 어째서 이렇게 좋아하게 됐는지 몰라요.

눈을 감아도 자꾸만 어른거리는 그대

날 어쩌면 좋을까.

몇 번을 놓쳐버린 사랑에 겁을 먹은 마음이

그래도 바라만 보고 있으라 해요.

짙은 감성이 절절히 느껴지는 사랑 노래였다. 누군가는 고개를 좌우로 느리게 움직이며 리듬을 탔고, 누군가는 흠뻑 빠져 잔잔한 선율을 감상했다.

그리고.

흠칫, 몸이 떨렸다. 가만히 서서 노래를 감상하던 중이었다.

불현듯 손등에 온기가 닿아 왔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말 가볍게 스친 온기였다.

온기현은 고개를 돌려 류주호를 바라봤다. 류주호는 고개를 살짝 틀어, 이미 온기현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살짝. 정말 아주 살짝씩, 손등이 스쳤다.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꽉 잡아채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리고 그건 류주호도 마찬가지인지 손끝이 설핏 검지를 툭, 하고 건드렸다.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저 손이 얼마나 뜨거운지, 저 굵은 손가락이 얼마나 제 안까지 깊숙이 들어오는지, 얼마나 거칠게 안을 헤집는지, 저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괜스레 등줄기가 가늘게 떨렸다. 목이 탈 듯이 말라 왔다. 심한 갈증을 느끼며, 음료를 괜히 버린다고 했나, 하고 잠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몸을 잔뜩 굳히던 새에 한 곡이 끝나 있었다.

“갈까.”

“……응.”

환호성과 함께 손뼉을 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둘은 다시금 몸을 돌려 굽이진 산책로를 걸었다. 두 번째 곡이 시작되고 있었다.

Give Love 사랑을 좀 주세요.

Give Love 사랑이 모자라요.

발랄한 음률이 뒤통수에서 점점 멀어졌다.

―환영합니다. 하늘 위의 새로운 세상, 스카이 타워에 어서 오십시오. 총 123층의 지상 555미터 높이를 발밑에서 느껴 보실 수 있는 …….

안내 방송이 귓전을 때렸다.

“…….”

여긴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았다.

호수를 한 바퀴 전부 돌고 난 후 류주호의 손에 이끌렸고, 어느새 이곳으로 와 있었다.

제가 그때 차를 타고 가다가 예쁘다고 중얼거리며 가리켰던 엄청나게 높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복잡한 쇼핑몰을 지나, 전망대 입구까지 들어온 것도 눈 깜빡할 순간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류주호와 몸을 가까이 붙인 상태로 엘리베이터 구석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직 날이 밝은 데다가 평일이라서 그런지 전망대에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저와 류주호 빼고는 남녀 두 커플이 더 있었는데, 그들은 저들끼리 쪽쪽거리며 껴안고 있느라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모퉁이에 나란히 서서 손잡이에 설핏 몸을 기댔다. 좁은 공간이라서 그런지, 그의 묵직한 향이 더욱 가깝게 느껴졌다.

“아.”

온기현은 잠시 숨을 멈췄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속도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엘리베이터 숫자 계기판이 빠르게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동시에.

엘리베이터 내벽을 꽉 채운 디스플레이가 색색의 휘황찬란한 영상들을 마구 뿌려 댔고,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의 화려한 풍경에 이어 별이 쏟아지는 우주로 감싸인 듯한 영상까지 휙휙 지나갔다.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사방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돌연 감각이 꽉 막힌 느낌에 입에서 으, 소리가 났다.

“왜. 귀가 먹먹해?”

머리 위에서 들린 속삭이는 음성에 눈을 들었다. 미간을 좁힌 채 귀를 감싸 쥔 온기현의 손이 설핏 굳었다. 흩뿌려 대는 현란한 영상 가운데에 선 류주호가 돌연 손을 올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온기현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꿀꺽. 해.”

실을 쥔 인형사의 말을 잘 듣는 마리오네트가 된 것처럼, 온기현은 그의 말대로 침을 꿀꺽하고 삼켰다. 그러자 곧 귀가 뻥 뚫렸다.

“잘했어.”

웅장하고 다채로운 배경음에 묻힐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침을 두 번 더 삼켰음에도, 먹먹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머리를 울렸다. 여전히 귀를 감싸 쥔 손이 잘게 떨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해도 자꾸만 뒤흔들렸다.

오늘 얘 진짜 이상해…….

오늘만 해도 대여섯 번은 떠오른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도착한 전망대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편안한 관람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행복한 스카이 타워에 오신 것을…….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커플들이 내렸고, 류주호와 온기현도 그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몇 걸음도 채 디디기도 전에.

“헉. 와아.”

온기현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서울의 불그스름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와아, 와. 완전 쪼그매. 엄청 높다. 건물들이 장난감 같아.”

류주호의 팔을 이끌며 통창 바깥을 손으로 가리켰다. 눈은 한시도 풍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류주호가 옆에서 피식, 하고 웃었다. 기현은 언제 몸을 굳혔냐는 듯 연신 들뜬 탄성을 터트렸다.

“우리 집이 어느 쪽일까? 어! 저기 우리 학교 있는 쪽 아냐?”

“그러네.”

심상하게 대꾸하는 류주호는 담담하기 그지없었지만, 온기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막힘없이 뚫린 하늘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위에도 있어.”

“응?”

류주호가 온기현을 이끌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이게 꼭대기가 아니었구나. 그저 신기하다는 감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내딛자, 기다랗게 뻗은 창문 아래로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헉. 이거, 안전할까? 와. 아래가 다 보여. 무너지는 거 아냐? 떨어지면 어떡하냐.”

“그렇게 허술하게 돈지랄을 하지는 않았을걸.”

옆에서 신랄한 말이 들렸지만, 그저 신기하다고 연신 와, 와 탄성을 터트리는 온기현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려 버렸다. “괜찮으려나……. 안 무너지겠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신기한 마음에 목을 쭉 빼고 아래를 내려다보려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류주호가 “이 위에서 여럿이 단체로 떡 쳐도 끄떡없어.”라는 난잡한 소리를 해 대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는 설핏 웃었다. 다행히 이 층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모난 눈초리를 한 번에 받을 뻔했다. 온기현은 그런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무시했다.

“그래도 무서운데.”

“이리 와 봐.”

“싫어. 너나 가.”

온기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류주호가 “야박하네.”라고 구겨진 웃음으로 중얼거리며,

“내가 잡아 줄게. 안 떨어지게, 꽉.”

이라는 말과 함께 온기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에게 건네진 손이 새삼 커다랗게 느껴졌다. 주머니를 정장 바지에 꽂은 채,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이 언뜻, 외국 모델이 찍은 명품 광고 같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류주호의 잘난 모습을 볼 때마다 팔불출같이 생각하고 마는 자신도 참, 별수 없었다.

얼른, 이라고 보채듯 손을 살짝 흔드는 류주호가 조금 낯설었다.

한껏 빼입은 옷차림 하며, 오늘따라…… 이상하리만치 다정한 모습이 조금, 아니 매우 낯설었다.

손, 잡아도 괜찮지 않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 자신에게 뻗어 온 저 손을 잡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더욱이, 자신이 저 손을 거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망설임은 잠시였다. 입술을 안으로 말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때.

“으악!”

몸이 난데없이 앞으로 이끌렸다. 잡은 손을 류주호가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긴 탓이다. 발을 퉁퉁 튀기며 투명한 바닥 위에 올라서게 됐다.

류주호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볼 겨를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보자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한 풍경이 발아래로 펼쳐졌다.

“으……. 야, 이거 너무…….”

앓는 소리를 내며 코알라처럼 류주호의 팔뚝에 달라붙었다. 그러자 불현듯 류주호가 팔로 온기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류주호의 입에는 부드러운 호선이 걸려 있었고, 눈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따듯하게 빛나고 있었다. 옅은 색소가 섞인 올리브빛 눈동자가 저를 응시했다. 못 박힌 시선이 유독 따가웠다.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몸이 바닥까지 떨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다정해.

상냥해.

따듯해.

그리고 동시에, 생경했다.

이제까지 느껴 본 적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확 피어났다.

이제껏 그를 볼 때마다 눈앞이 핑 돌 정도로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체념 혹은 절망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애초에 시작부터 그랬으니까. 저 혼자 시작했던 감정이니까.

그러나 이렇듯 퐁퐁 샘솟는 찬란한 비눗방울 같은 느낌은 이제껏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걸친 새 옷처럼 어색하게 제 몸을 휘감은 부드러운 느낌이 심장을 살금살금 간질이며 톡톡 터졌다.

“엄마! 여기 위에도 있어!”

그때, 에스컬레이터에서부터 신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저리 가.”

그에 온기현이 류주호의 팔을 확 걷어 냈다. 당황함에 힘이 들어간 탓에 류주호의 몸을 밀치는 모양새가 됐다. 순간 류주호가 팔이 내쳐진 상태로 설핏 굳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어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몸을 재빨리 떨어트렸다.

와아―!

아이가 신나서 뛰어오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투명 바닥 위에서 발을 쿵쿵 굴렀다. 그에 기현의 몸이 설핏 굳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쳐도 10센티미터도 채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언뜻 류주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에 들어온 류주호는 약간 굳은 입매를 한 채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꼭,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온기현이 먼저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기를. 이미 밀쳐진 무게는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기다렸다. 온기현이 잠시 곤란한 듯,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아이고, 엄마가 까불지 말라고 했지!”

바로 옆에서 들린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사람의 꾸중에, 화들짝 놀라 류주호의 소매를 손가락 끝으로 움켜쥐었다. 무의식중에 잡은 빳빳한 소매가 팟 당겨지며 손끝에서 와락 구겨졌다.

“어, 아.”

그에 미안, 하고 말하며 손을 빼려고 하자, 류주호가 그제야 얼굴에서 힘을 풀더니 싱긋 웃었다. 순간, 덜거덕거리던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쿵쿵 울려 댔다.

류주호는 그 상태로 기현을 밑이 막힌 바닥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온기현은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이상한 류주호를 따라, 완전히 넋이 나간 마리오네트처럼.

‘큰일이다.’

온기현은 입 안 여린 살을 어금니로 살짝 깨물었다.

이러면 자꾸만 어처구니없는 기대가 생겨난다. 모질게 몸만을 위한 관계라고 그렇게 선을 그을 때는 언제고, 왜 이렇게 자꾸만 저를 허물어트리는 행동만 하는 건지.

혹시, 설마, 아니 정말 혹시,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볼과 귀가 발그레 달아올랐다. 후끈거리는 제멋대로의 생각에 자꾸만 근거가 생겼다. 최근 류주호가 저에게 하던 행동들에 자꾸만 이유를 붙이고 싶어진다. 다정한 모습만 뇌리에 남는다.

약간 몽롱해져 있는 온기현을 바라보던 류주호가 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제 내려가자.” 하고 말했다. 온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강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매표소가 있는 곳까지 내려왔다. 무슨 정신으로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자꾸만 제 옆을 스치는 류주호의 온기만이 놀랄 정도로 예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류주호는 온기현을 또 다른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어디 가는 거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무지막지하게 넓은 곳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그를 따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본디 종종걸음으로 그의 보폭을 따라가기만 했던 지난날과 달리, 오늘은 제가 편안한 보폭으로 그와 나란히 서서 걷고 있다고.

“어. 우리 근데 어디 가?”

그제야 의아한 물음으로 엘리베이터 표시판을 바라봤다. 류주호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배고프지?” 하고 물었다. 기현은 그제야 제 배가 비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어! 맞다!”

하는 소리와 함께 제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

오후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고깃집 아르바이트가 7시부터였다. 지금 당장 지하철을 타더라도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류주호더러 태워 달라고 해도 될 일이었지만 지금 이 시각이면 막 퇴근하는 차량이 도로에 들어찰 때라, 아마 지하철이 더 빠를 터였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완전히 넋을 놓고 있었다.

“주호야. 나 근데 지금 좀 가 봐야겠다. 밥은 다음에 먹자.”

“뭐?”

빠르게 쏟아 내는 말에 대뜸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류주호가 되물었다. 온기현이 옆머리를 긁적이며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 알바 7시부터거든. 지하철 타고 가면 얼추 시간 맞겠다. 미안.”

하며 1층 버튼을 눌렀다. 81층에 눌려 있던 엘리베이터 버튼이 사라지지 않아, 1층 버튼의 빨간 불이 켜졌다가 곧 꺼졌다.

“아, 안 눌리네. 위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겠다.”

“…….”

팔을 뻗었다가 에이, 하고 옅게 한숨을 쉬던 때까지 류주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대로 굳어 서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거기, 그만둬.”

“어디?”

“알바. 지금 하는 거.”

뭐?

온기현의 고개가 설핏 기울어졌다.

“더럽고, 지저분하고, 냄새도 배고, 손님들도 험하고. 그냥 이참에 알바 다 때려치워.”

“…….”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기현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나 못 그만둬.”

“왜?”

“아니, 난 그……. 너랑 다르게 여유로운 형편도 아니고. 학기 중에는 알바해서 생활비 벌어야 하고, 또 학비도 그렇고. 돈이 뭐 땅 파서 나오나? 땅 내가 파 봤는데 1원도 안 나오더라. 돈은 일해야 나오지.”

애초에 당연한 말을 평연하게 읊자, 이번에는 류주호의 얼굴이 굳는다. 금전적으로 불편한 적 없는 사람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은 아니었다. 류주호는 금전적인 면에서 우월함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애초에 자격지심이란 것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멋대로 자기 위주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까지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류주호가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다시금 반복한다.

“그래도 그만둬.”

“……내가 왜? 그리고 네가 왜 나한테 그만두라 마라 말하는데?”

“왜냐니.”

류주호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뭐라고 말은 해야겠는데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근육이 꿈틀거리며 커다란 어깨의 곡선이 살짝 올라갔다.

“내가 이 정도도 못 말해?”

“그니까 네가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느냐고.”

왜냐고?

류주호가 순간 짓씹듯이 혼잣말을 읊었다. 그만두게 할 명분이 불확실한 형태로 혀끝에만 맴돌았다. 그게 속 안에서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자못 답답한 것처럼 턱을 굳혔다. 그리고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돈, 내가 줄게.”

“……무슨 돈?”

“네가 알바해서 번다는 그 돈. 그 푼돈. 내가 준다고. 그러니까 거기 그만둬.”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싫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까지 하며 거부를 표하는 온기현을 향해 류주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우리가 이제까지 섹스한 게 몇 번인데, 우리가 그 정도 사이도 안 돼?”

“……뭐?”

“네가 지금 버는 돈보다 많이 얹어 줄게. 아니, 훨씬 차고 넘칠 정도로. 그러니까.”

“…….”

“네 시간, 나한테 팔아.”

쿵.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둔탁한 감각이 울렸다.

온기현이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순간 혼란스러웠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어지러운 감각에 휩싸여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너한테 내 시간을 왜 팔아? 네가 그걸 살 이유는 또 어딨고?”

제가 가진 것이 류주호에 비해 한없이 빈약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류주호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판다니.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을 판다니, 어불성설이었다.

그것을 제안하는 류주호의 낯을 볼 수가 없었다. 타오를 것 같은 수치심이 온몸을 살랐다.

손으로 이마를 턱 짚었다. 발밑이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시큰거리는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까 전 아슬아슬하지만 제 발밑을 지탱하던, 투명한 유리 바닥이 밑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바닥을 잃은 몸이 아래로 떨어진다. 빙글 도는 어지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따라 이상했던 류주호. 그런 그를 보며 혹시, 하고 기대하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류주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알까. 이 망할 놈은, 과연 알까.

자꾸만 불거지는 울컥한 감정을 내리누르며, 겨우 입을 뗐다.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야. 내 일상이고, 내 생활이야. 겨우 몸 몇 번 섞었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그런, 걸. 요구할 권리는 없어.”

“권리?”

“그래.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자, 류주호 또한 낮은 목소리로 응수했다.

“내가, 네 일상에 관여하면 안 되는 거야? 우리 그래도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

그에 온기현이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너한테 이 정도 권리도 주장하면 안 되는 거냐고.”

온기현이 겨우 눈동자를 치켜들며 류주호를 쏘아봤다. 마주친 류주호의 눈동자가 얼핏 흔들렸다. 어쩐지 화가 난 듯도 보였다. 표정이 지워진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뇌까렸다.

“……개새끼…….”

그때 마침 띵, 하고 도착 음이 울렸다. 열린 문을 향해 얼른 발을 떼어 냈다.

“갈 거야. 따라오지 마.”

온기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 류주호만 남겨진 채, 그대로 문이 닫혔다.

그리고 닫힌 엘리베이터 안에서,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친 욕지거리가 울렸다. 류주호는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빼내어 손안에서 와작 구기더니 거칠게 아래로 내던졌다.

차가운 금속성 바닥에, 검은색 플라스틱의 직사각형 카드 키가 반으로 접힌 채 한 바퀴 굴러 엘리베이터 구석에 처박혔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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