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 Banana in Mud Puddle (3) (7/20)

3부. Banana in Mud Puddle (3)

1× 과대 나성기 [아…… 안녕하세요 ㅎ] 16:40

우웅 울리는 진동에 기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과대로부터 톡이 와 있었다. 그 뒤에는 온기현이 두 시간 정도 전에 보낸 톡이었다.

다름 아닌, [제가 뭘 준비하면 되나요? ㅎ 단톡방 내용을 다 못 따라가서 따로 물어보려고 연락드렸어요. ㅎ]라고 묻는 내용이었다.

축준위의 단톡방은 쓸데없는 농담과 이미 친목을 다진 저들끼리의 실없는 대화가 대부분을 이루었고, 막상 축제 준비를 위한 논의는 어쩐지 그들끼리 따로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핵심적인 내용은 없었고, ‘그때 우리 얘기한 것처럼’이라는 대화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래서 누가 뭘 준비하는지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니 온기현만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학교는 대동제 분위기에 완전히 잠겨 들어 있었다.

공연을 위해 레게 머리로 바꾼 학생들이, 캠퍼스 구석에서 두구닥 두구닥 쿵쿵거리는 음악에 맞춰 힙합 댄스를 연습하고 있기도 했고, 가로수 길의 나무 사이사이에 조명을 길게 이어 설치하는 학생들, 궤짝으로 된 짐을 이리 저리로 옮기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과대에게 제가 뭘 준비하면 되는지 묻고자 먼저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대동제 준비 때문에 정신없으시죠? ㅎ 제가 뭘 준비해야 하는지 혹시 담당 정해진 게 있나요?] 16:41

1× 과대 나성기 [아…… 네네 ㅎ] 16:45

그렇게 단답식으로 뒤늦게 대답한 과대는 그 뒤에 가타부타 별말이 없었다. 그래서 재차 메시지를 보냈다.

[제가 도서관 사서 일이 6시 정도에 끝날 것 같아요 ㅎ] 16:46

1× 과대 나성기 [네넵 ㅎ 그럼 끝나고 저희 주점으로 바로 오시면 됩니다 ^^ ㅎ ] 16:50

[그냥 가면 되나요? 따로 준비할 건 없나요? ㅎ] 16:51

1× 과대 나성기 [몸만 오세요~ㅎ ] 16:55

몸만 오라고?

그냥 몸으로 때우는 힘 쓰는 일을 시키려고 하나? 그거라면 자신 있는데.

뒷머리를 긁적이며 으음, 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바로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어수선하게 일렁이는 축제 분위기를 뒤로하고 캠퍼스 정문을 나섰다.

* * *

“들어오세요, 들어오세요―! 선배님, 이쪽이요!”

“어, 저희 추로스 두 개요!”

“헐, 야, 저기 가 보자!”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한국 대학교는 축제로 한껏 흥이 오른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드디어 대동제가 시작됐다.

해가 지기 시작하는 지금, 어둑한 사위를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늘어선 주점과 푸드 트럭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공연용 핀 조명이 눈을 때렸다.

가로수 길에 늘어선 각 단과대에서 주최하는 주점들은 이미 밖에서도 술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왁자한 취기를 내뿜고 있었다.

군데군데 추로스나 아이스크림을 파는 부스는 사람들의 주문에 밀려 연신 땀을 흘리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대동제의 흥에 겨운 축제 분위기를 맘껏 느끼고 있었다. 간이 공연장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하는 버스킹 덕분에, 맛깔난 BGM도 충분했다.

“앗, 죄송합니다. 지나갈게요.”

그 인파 사이에서, 온기현이 부딪쳐 오는 어깨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몸을 웅크린 채로 바쁘게 사람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백팩은 앞으로 메고 감싸 안은 채, 발걸음은 분주하기 그지없었다.

도서관 사서 일은 제시간에 끝났지만, 순서가 엉망으로 꽂힌 책장 라인을 발견한 게 늦어진 이유였다. 아마 같이 일하는 타임의 학생인 것 같았다. 축제 때문에 얼른 나가야지 하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지 않은 양이라서 30분 만에 책들은 전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뒤로 바로 나온다는 게 벌써 이렇게 어두워질 줄이야.

줄지은 주점들 사이에서 온기현은 경영대 주점을 찾느라 시선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몸만 오라고 해서 진짜로 몸만 가도 되나, 하고 고민하던 것도 잠시, 시간에 쫓겨 깊이 물어볼 새도 없었다.

“주호야!”

“어?”

시끌벅적한 가운데 누군가의 외침에 온기현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왔어?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가 손뼉을 마주쳤다. 언뜻 김주호, 라는 소리가 들렸다. 겉모습만 보기에도 절대로 류주호는 아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바쁘게 움직이던 온기현의 다리가 멈췄다.

온기현은 그 상태 그대로 잠시 얼굴을 가리고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바로 마주 오는 커플들로 인해 화들짝 놀라 비켜섰다.

그 커플들은 서로의 얼굴만 뜯어보느라 미처 온기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아마 새빨간 사과처럼 달아올라 있을 것이었다.

기현은 갑작스레 떠오른 어젯밤의 일을 상기했다.

어제는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라, 간만에 집에서 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수업을 마친 온기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류주호의 커다란 SUV였다.

그대로 차에 몸이 실렸다.

시간표를 꿰고 있는 터라 교내에서는 어딜 가나 류주호의 손바닥 안이었다. 온기현은 그제야 자신이 축제를 돕게 됐다는 것을 말해 줬다.

득달같이 따라올 것이라 예상했던 류주호는 마뜩잖은 표정을 짓고서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축제가 이루어지는 며칠간 급한 일 때문에 집에 돌아올 수가 없고, 아마 이틀이나 뒤에야 돌아올 것 같다고 읊었다.

대수롭지 않게 그러냐며 응수한 온기현은, 어느새 내비게이션을 찍지 않고도 찾아온 빌라촌 앞에 차가 서자 그대로 몸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류주호는 가만히 온기현의 팔뚝을 붙들고는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입술을 겹쳐 왔다.

차 안에서 갑자기 얼굴을 맞대어 오는 것은 저번에도 있었던 일이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맞나 보다. 다만 어제의 류주호는, 어딘가 초조하고 다급해 보였다.

잡아먹을 듯이 키스하던 류주호는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내리다가, 커다란 상체를 확 기울여 오며 온기현의 귀와 부드러운 턱선을 따라 턱 끝까지 이르도록 가쁜 호흡 속에서 입술을 짓눌렀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폐부 속 깊숙이 살 내음을 들이켜며 목 줄기를 따라 얼굴을 내렸다.

돋아 오르는 흥분 속에서 척척한 혀가 맛을 음미하듯 목 여기저기를 빨아 대고, 심지어는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몇 번이고 빨아 대는 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따끔거리는 통증조차 쾌감으로 다가왔다.

신음을 삼키고 기분 좋은 음성을 목구멍 아래에 둔 채 벌벌 떠는 몸을 보며, 류주호는 뭐에 씐 것처럼 옷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맨살을 쓸어 대더니 훌렁 벗기려고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온기현이 제지하지 않았으면 큰일을 치를 뻔했다. 아무리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이라도 누구라도 지나갈 수 있는 빌라촌에서 상의를 벗고 있다가는 다른 의미로 유튜브에 영상이 올라갈 일이었다.

류주호도 그제야 자각했는지 온기현을 그대로 품 안에 꼭 가두었다. 씨근덕대는 가슴팍이 온몸으로 여실히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근래에는 매일 만나서 이틀이 넘게 떨어지게 된 것이 어느새 생경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꽉 끌어안은 채 귓가에 대고 연락 꼭 받으라며 속삭였다.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틀 동안 집을 비우는 건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알겠다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러고는 웬일로 오늘은 아침부터 온종일 연락이 없었다. 매일같이 빚쟁이를 독촉하듯 연락을 해 오던 게 언제부턴가 익숙해졌는지 괜스레 허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부산한 캠퍼스 분위기 속에서 여기저기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수업하고, 거기다가 근로 장학생 일까지 정신없이 소화하느라 핸드폰은 거의 방치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도, 주점을 향해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너무 늦은 건 아니겠지?’

애써 생각을 떨쳐 낸 온기현은 가로수 길 끄트머리에 크게 자리 잡은 부스로 향했다. 커다랗게 ‘경영대’라고 쓰여 있어서 생각보다 쉬이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막 가까이 다가가려던 찰나, 마침 천막을 걷으며 걸어 나오는 과대인 나성기와 마주쳤다.

“어? 이제 오셨네요?”

어쩐지 그의 얼굴에도 ‘ㅎ’ 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을 띤 나성기가 온기현을 보며 알은체를 해 왔다.

“죄송해요. 일이 좀 늦게 끝나서요.”

“아아, 괜찮아요. 잠시만요. 야! 그거 갖고 와! 중국!”

나성기는 천막을 손으로 들추고 고개를 비틀어 안쪽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 나와 나성기에게 봉투를 하나 건네주고, 나성기는 토스하듯 그 봉투를 곧바로 온기현에게 전달했다.

“자. 여기요. 이거 입고 나오세요.”

“네?”

“탈의실은 따로 없고요, 저기 우리 부스 뒤쪽에 좀 가려진 공간 있거든요? 거기 가서 갈아입고 나오시면 돼요. 전 지금 다른 일 때문에 잠깐 학관 갔다 와야 하니까, 안에 들어가서 시키는 거 하고 계세요.”

그럼 이만. 그렇게 대충 목례를 한 나성기가 온기현을 지나쳐 사람들 틈바구니로 사라졌다.

“어…….”

뭐지?

온기현은 봉투를 들고 부스 뒤쪽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불투명한 푸른 천막이 쳐져 있어서 안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반대로 안쪽에서도 저가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성기가 가리킨 곳은 재료 창고처럼 보였다. 업소용 기름통과 소주 짝이 쌓여 있었다. 그곳에서 백팩을 대충 짐 사이에 내려놓고, 옷을 훌렁 벗어젖혔다. 그리고 봉투 안을 열어, 뭉쳐져 있는 흰색의 얇은 천 쪼가리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 대충 앞뒤를 맞춰 팔과 목을 끼워 넣었다. 어쩐지 달라붙는 면이 조금 부들부들했다. 그리고 아래까지 끌어 내린 옷으로 시선을 내려 가늠해 보고는 놀라서 헉 소리를 냈다.

눈을 의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흰색의 차이나 드레스였다. 칼라는 쇄골 위쪽 언저리까지 올라오고, 두 팔은 휑하다고 느낄 정도로 짧게 올라붙은 반소매였다. 그리고 심지어, 치맛단 아래에 터진 슬릿이 허벅다리까지 전부 보일 정도로 깊게 파여 있었다.

이것은 어디로 보나 남성용 의상이 아니었다. 명백히 중국의 여성용 전통 의상이었다.

아연한 마음에 온기현은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스태프용으로 안쪽으로 터진 천막 틈새를 벌려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바로 보이는 뒷모습들은 뭔가를 튀기고 굽고 있는지 기름 냄새가 코를 확 찔러 왔다.

“저기요. 이거, 좀 이상한데요.”

“어, 네? 아, 저기, 바쁘니까 일단 나오세요!”

온기현은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살짝 던진 남학생의 말을 듣고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 사이즈 맞으시죠? 그럼 안에 가서 서빙 보세요!”

“네? 아니, 그래도 이건.”

“바쁘다고요!”

버럭 성을 내는 후배는 기름으로 닭고기를 들들 볶고 있었다. 이 이상 말을 걸면 위험할 것 같아서 일단 주점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게.

테이블과 술이 굴러다니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여느 주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서빙을 하는 학생들의 의상이 심상치가 않았다. 짧은 스커트로 된 기모노를 입고 있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시스루로 된 한복 ― 이것을 한복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 을 입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이제야 채팅방에서 말하던 국가, 콘셉트 어쩌고 하던 내용이 이해됐다. 어쩐지, 국가별 전통 의상을 콘셉트로 한 듯했다.

그런데 좀 묘했다. 서빙하는 학생들은 전부 여학생들이었다. 그리고 의상들도 어쩐지 좀.

설핏 미간을 좁히던 때.

“선배님! 이것 좀요!”

“네?”

“아, 저기 가운데 테이블요! 파전! 소주 두 병이랑요!”

온기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자, 후배가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내며 파전이 올려진 접시를 확 내밀었다. 어정쩡하게 그 접시를 든 온기현이 이내 한숨을 삼키고 가운데 테이블로 접시를 옮겼다.

남학생 둘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체육복을 입은 채로, 커다란 스포츠 백과 야구 배트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채 어딘가를 보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파전 나왔습니다.”

“어! 푸하하. 아, 이건 또 뭐야. 진짜 웃긴다.”

“잉? 아, 씨발. 깜짝이야! 미친, 대박이다. 남자도 입었네……. 아니, 근데 야야, 잘 어울리는데? 춤춰 봐요, 춤! 그거 있잖아요. 엉덩이 흔들면서 그 뾰로롱 하는 거 있잖아요!”

“…….”

이미 어딘가에서 술을 들이켜고 온 듯, 소주가 서빙되기도 전에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이런 손님들은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하며 간혹 겪는 일이라, 그저 무난하게 넘기면 그만인 경우도 있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뒤돌아서는 기현을 보며 무언가 속닥이더니 웃음을 터트린 그들은, 이내 다른 여학생들을 향해 은근한 눈길을 던지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했다. 분위기도 묘하고. 일단 자신의 의상부터가 완전히 잘못된 것 같았다. 다른 사람한테 주려던 걸 잘못 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때.

“어! 온기현 선배님, 맞으시죠?”

모르는 얼굴의 남학생 두 명이 알은체하며 어깨를 툭 쳤다.

“네, 맞는데요. 저기, 근데.”

“아! 저희 축준위요! 성기한테서 전해 들었어요. 선배님 6시 넘어서 오신다고 하더라고요.”

6시보다 훨씬 넘은 시각에 도착한 온기현은 면구스러운 얼굴을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둘은 요리를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인지, 얼굴과 입에서 기름과 술 냄새가 진동했다.

저들끼리 신이 나서 낄낄거리며 온기현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오오, 완전 잘 어울리시는데요? 의외로……. 그치?”

“어. 그러네? 이쪽으로 적성 바꾸셔야겠다.”

“내 말이.”

남자 후배들 둘이서 서로 대화하며 키들거리는 것이 꼭,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말 자체는 대수롭지 않았는데도 어쩐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것들, 작정했구나.’

누구의 주도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굳이 주도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심술궂은 장난 비슷한 것이었다. 굳이 온기현에게 이런 의상을 입히게 한 것은.

양쪽으로 터진 슬릿 사이로 다행히 속옷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과하게 터진 치맛자락의 틈 때문에 제대로 보폭을 벌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온기현만 입은 게 아니란 게 문제였다.

“근데요. 서빙용 옷이 너무 야한 거 아니에요?”

“에이, 남잔데 뭐 어때요? 그리고 콘셉트 주점이라 어쩔 수 없어요.”

“아니, 제가 아니라요. 지금 일하고 있는 저 여자애들이.”

“선배님 오셨다!”

이어지던 온기현 말이, 누군가의 외침에 의해 뚝 끊겼다.

귀에 익은 그 음성은, 과대인 나성기의 것이었다. 그가 하회탈 같은 웃음을 쓰고 천막을 걷으며 부러 보여 주듯 고개를 수그렸고, 걷힌 천막 사이로 양복을 입은 여럿의 남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죽이는데?”

“이야. 올해는 화끈하네. 이게 축제지, 인마.”

“과대가 수고했네. 응?”

“오오.”

정확히 양복을 걸친 네 명이 능글거리는 웃음을 걸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죽 둘러보자, 안에서 음식을 하던 사람, 서빙을 보던 여학생들이 줄줄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얼굴을 모르더라도 대충 분위기를 보니 졸업한 선배인 듯했다.

과대가 그들을 제일 안쪽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넥타이를 대충 손가락으로 풀어 내린 차림으로, 양복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걸어가던 OB들은 안내된 자리에 앉으며 나성기를 향해 아무거나 갖고 오라고 고개를 까딱였다.

온기현 앞에서 무어라 쑥덕대던 축준위 후배 두 명도, 그 테이블로 달려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곧이어 맥주와 소주를 손에 든 나성기가, “제가 시원하게 말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외치고서는 네 개의 맥주잔에 소맥을 말아 그들에게 건넸다.

이 투철한 선후배 간의 위계는 어떠한 우정이나 아름다운 청춘 그 무엇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한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여 대기업에 취직한 선배들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과 연줄 같은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앞뒤로 끌어 준 학연으로 인해 활발하게 활동 중인 정치계의 인사나 기업 승진 등에서 꽤 득을 봐 왔던 전통이 있었기에 이렇듯 깍듯한 것이었다.

네 명의 OB 중 가장 크게 다리를 벌리고 앉아 가운데에 자리를 잡은 덩치 좋은 남자가 아무래도 개중에서 가장 좋은 곳에 취직한 듯했다. 고개를 쳐들고 연신 크게 웃으며 옆에 앉은 제 동기를 퍽퍽 쳐 댔다.

한편 ‘동화 보험(주)’라고 쓰여 있는 쇼핑백을 들고서는 내용물을 언제 꺼내야 할지 계속해서 눈치를 보던 OB는, 보험 계약을 단단히 따낼 생각으로 온 듯했다. 쭈뼛거리면서도 동기에게 보험 약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성기야! 후배들 선배한테 인사 안 시키냐.”

“아, 옙! 갑니다! 잠시만요!”

그러던 중 가운데에 앉은 OB가 소리치자, 나성기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깍듯하게 인사했다.

“야야! 다들 선배님들한테 인사드리자, 얼른!”

“네?”

어리둥절해하며 신입생이 되묻자, 나성기가 재촉하는 손짓으로 빨리 오라고 손을 파닥거렸다.

“어, 아니, 너는 오지 말고. 서빙하는 애들만. 어어, 너랑, 너랑. 얼른.”

“어…….”

“네에…….”

아무래도 서빙 중인 여학생들은 모두 신입생인 것 같았다. 얼빠진 표정으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테이블로 다가가자 나성기가 여학생들을 그 테이블 앞에 줄지어 나란히 세웠다.

순서대로 한국, 일본, 베트남 순이었다. 여학생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하나같이 짧은 치마에 속살이 많이 드러나는 옷이었다. 전통적으로 갖춰 입었다면 절대로 드러나지 않았을 팔뚝과 다리가 외부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였다.

나란히 놓고 보니, 일부러 작정하지 않은 이상 그렇게 꾸미기 어려운 듯 정말 누가 보더라도 퇴폐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허.”

온기현이 헛웃음을 쳤다.

미친 거 아닌가?

“중국은 없냐? 중국 어딨어.”

“아, 중국이요?”

순간 ‘ㅎ’이 뒤에 붙었다는 착각이 들 만큼 희게 웃은 나성기가 온기현을 향해 크게 외쳤다.

“온기현 선배님! 잠깐 이리 와 보세요. 선배님들이 찾으십니다.”

“잠깐, 이게 무슨.”

“아, 얼른요.”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끄는 힘에 온기현도 마찬가지로 그 자리로 끌려가게 됐다.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온기현을 쭈뼛거리는 여학생들 옆에 세웠다. 어처구니없게도 네 명이 주르륵 늘어선 와중에 온기현까지 더해진 모습이 되었다.

“푸하하. 뭐냐? 남자까지 입혔어?”

“야, 이 새끼. 왜 위화감이 하나도 없냐.”

“그러게.”

“올해는 별미까지 있네. 재밌다, 야.”

칭찬하듯 건들거리는 말투로 나성기를 향해 말을 던지자, 나성기는 칭찬받은 게 자못 쑥스러운 것처럼 뒷머리를 긁적이며 뭘요, 라고 대꾸했다. 이 일련의 광경들이 참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신입생 여자애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손을 모으고 어색하게 움츠리고 있었다. 천막이 쳐져 있기는 하지만 이제 막 가을이 되는 날씨에 살을 내보이고 있는 차림이었고, 거기다가 자꾸만 끈적이는 시선들이 따라붙으니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오빠 한잔 따라 주라. 뭐 하냐, 응?”

“네, 네? 저요?”

“응. 거기 일본, 너.”

OB는 여학생을 향해 술잔을 들이밀었다. 자신을 지칭하는지 몰라 되묻는 여학생을 향해 그냥 나라 이름으로 불러 댔다. 마치 네 명 중 누구를 고를지 쭉 둘러보다가 툭 내뱉는 말 같았다.

“성인이 됐으면 사회생활도 미리미리 알아야지. 회사 가면 다 술자리에서 이렇게 업무 배워.”

번듯한 직장인 선배가 생각해서 해 주는 사회생활을 위한 조언으로 가장한 쓰레기 같은 말에 여학생이 어쩔 줄 몰라 망설이다가 울먹거리며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보니,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이는 죄 남자들뿐이었고, 이런 광경을 그저 한낱 유희 거리처럼 지켜볼 따름이었다.

허리를 숙이느라 점점 짧아지는 치마를 잡아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맥주잔을 향해 병을 기울이려던 때.

“하지 마요.”

온기현이 맥주병을 턱, 하고 집어 들며 빼앗았다. 술을 따르려고 허리를 굽힌 상태로 놀라서 고개를 든 여학생이 온기현을 쳐다봤다.

“응? 뭐야. 중국 네가 따르게?”

킬킬거리며 웃는 OB의 낯짝을 내려다본 온기현이 맥주병을 들어 그 선배의 손을 향해 밀었다.

“손 없어요? 술 마시고 싶으면 직접 따라 드세요.”

헐.

뭐?

뭐야?

왁자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옆에 선 나성기는 경악스러운 얼굴로 입을 벙긋거리며 온기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 있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구경거리가 생긴 게 신난 듯 핸드폰을 들고 카메라를 켠 사람도 있었다. 축준위 멤버 중 하나가 카메라 든 사람에게 카메라 끄라며 짜증을 내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새된 소리를 버럭 지르는 OB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하게 바뀌었다.

“이 새끼 뭐야! 어? 선배한테 말하는 꼬라지가, 씨발. 너 이름이 뭐야?”

“저요? 온기현이요.”

“온기현? 야, 너 몇 학번이야.”

“알아서 뭐 하시게요.”

“이게 따박따박.”

쿠당탕.

그 덩치 좋은 OB가 박차고 일어나며 의자가 뒤로 나뒹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나성기가, 다른 테이블에 앉은 이들에게 죄송하지만 나가 달라며 돈은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이제 이 천막 부스 안에는 축제 관련한 경영대생과 OB들만 남았다.

“이 씨발. 후배라고 오냐오냐하니까. 너 말 다 했어?”

“아뇨. 말 다 안 했는데요. 과대한테도 한마디 할게요. 왜 신입생, 그것도 여학생들한테 이렇게 노출이 심한 옷을 입혔어요? 다들 불편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거 안 보여요?”

겨우 손님들을 돌려보낸 나성기를 향해 온기현이 서늘하게 말을 이었다.

자신에게로 화살이 박히자, 나성기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버럭 성을 냈다.

“하! 선배. 뭔 개소리세요? 지금 다 축제 분위기 잘 즐기고 있는 데다가 찬물 끼얹은 게 누군데요?”

아, 존나 재수가 없으려니까. 선배답게 대해 줄 때 좀 씨발, 얌전히 있을 것이지.

나성기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거친 보폭으로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씨발, 까놓고. 선배가 뭐, 축제 준비할 때 뭐 숟가락 하나,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보탠 적 있어요?”

거기서 온기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막상 축제 준비를 같이하자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만 잘해 놓고, 결국 막판에 와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런 의상을 입혀 놓고 일을 시켜도 오늘 하루만 참자 하고 버티는 각오로 조용히 일을 도와주다가 집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거는, 죄송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거랑 이 여자애들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차라리 저처럼 남자들한테 옷을 입히든가요.”

계속해서 제 말을 이어 가는 온기현을 향하는 눈빛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식의 축제 주점 운영을 매년 해 왔을 것이라고 내심 예상했다.

아마 이제까지는 적당히 재미를 위한 익살스러운 콘셉트라고 커 버칠 수 있을 정도로 수위를 조절해 왔을 것이다. 아마 올해도 대충 그렇게 웃으며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런 걸 준비를 했겠지.

“사회를 좆도 모르네, 이 새끼가. 신입생이야? 온기현? 대면식이랑 MT 때도 못 본 거 같은데?”

“그건. 제가 전과를 해서.”

“아하. 어쩐지, 씨발. 경영대 전통도 모르면 구석에서 좆뱅이나 치고 있든가.”

“지금 전통이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이거 솔직히 성희롱 아닌가요?”

“안 닥쳐?! 말대꾸도 작작 하라고, 새꺄!”

어쩐지 말이 통하지 않는 벽이랑 대화하는 느낌에 온기현은 선배가 윽박지르는 말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려 옆에 나란히 떨고 있는 여학생들을 향해 고갯짓했다.

“저쪽 가서 옷 갈아입으세요. 긴 바지라도 있으면 입으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근데 이 새끼가?!”

자신이 완전히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지, OB가 온기현의 어깨를 확 낚아챘다.

“앗!”

가뜩이나 덩치 차이가 꽤 나는지라, 온기현의 몸이 기우뚱하고 OB 쪽으로 살짝 넘어갔다. 그 탓에 온기현이 허리를 숙여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중심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어라?”

“무슨.”

그러자 드러난 목덜미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OB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온기현의 머리를 아래로 꾹 누른 채로 제가 본 것을 확인했다.

“하하. 이 새끼. 쪼가리를 대놓고 달고 다니네.”

“쪼, ……네?”

“누가 이렇게 맛있게 쪽쪽 빨아 놨냐. 어? 얌전한 척은 저 혼자 다 하더니. 하.”

남자가 거친 손끝으로 온기현의 목덜미 오른쪽을 툭툭 쳤다.

그제야 거기에 뭐가 달려 있는지 퍼뜩 생각난 온기현이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가리며, 남자의 손에서 냉큼 벗어났다.

손바닥으로 가린 목덜미는, 지난밤 류주호가 얼굴을 묻고 한참을 핥고 빨아 대던 부근이었다. 그 기억을 상기한 온기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

피식.

순간, 달아오르는 온기현을 본 남자의 얼굴에서 화기가 사라지더니 입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샜다. 완전히 덜미를 잡힌 동물을 내려다보는 모양새였다.

“이제 보니까, 얼굴도 딱 그렇게 생겼네.”

그렇게 저열한 말을 뱉으며 온기현의 목덜미부터 발끝 아래까지 은근한 시선으로 느릿하게 훑었다. 의상도 의상이라, 다 터진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하얀 허벅지 살에 유난히 시선이 오래 머무르는 느낌이 들었다.

삽시에 태세가 기울었다.

목으로 집중되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래서 온몸이 발긋하게 물들어 화끈거리는 것까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아차렸다. 온기현이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자, 문득 어딘가에서 피식하는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아예, 위도 찢어 줄까? 좋아할 것 같은데.”

그리고 동시에, 덩치 큰 OB가 온기현의 얇은 의상과 어깨뼈를 한 번에 까득 움켜쥐며 제 쪽으로 당겼다.

윽, 하는 소리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입술을 사리물고 위로 시선을 올려 노려봤다. 덩치로 보나, 뭐로 보나, 힘으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제 악력이 그렇게 세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얼굴로 뱉어지는 취기 어린 뜨끈한 숨이 역했다.

너무 싫었다. 욕지기가 났다.

‘주방에서 프라이팬이라도 하나 훔쳐 올걸.’

머릿속으로는 이 새끼의 뚝배기를 깰 생각으로 요리조리 머리를 굴렸다. 저도 고깃집에서 일하면서 술에 취한 손님들이 어디까지 행패를 부리는지 뻔히 봐 왔었다. 다행히 고깃집 사장이 전직 뒷골목 출신이라는 게 소문나서인지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생겨서인지 모르겠지만, 가게를 찾는 손님 중에 이 정도로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개중에는 자신에게 술 시중을 요청하는 사람도 더러 있긴 했지만, 불쾌하게 다가오지 않는 이상 웬만한 요청은 가볍게 웃으며 받아 주고 넘기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건 완전히, 어린 후배들을 대놓고…….

두둑.

옷자락을 세게 잡힌 탓에, 목젖까지 잠근 단추 하나가 뜯기는 소리를 내며 풀어졌다. 온기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간이 의자가 바닥에 데굴데굴 나뒹구는 소음이 들렸다.

모두가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온기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그곳에는, 가슴팍을 씨근덕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는 류주호가 서 있었다.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순간, 싸한 정적이 모두를 덮쳤다.

“어……? 저 사람 혹시…….”

“마, 맞는 것 같은데…….”

문득 옆에서 축제 준비 위원회인 남자 후배 두 명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온기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 입으로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이틀 뒤에나 올 예정이었던 그가 왜 이곳에 저런 싸늘한 표정을 하고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서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장소를 잘못 찾아왔나?”

그가 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소리를 내뱉었다. 희미하게 가쁜 숨이 섞여 들어가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급하게 달려온 듯, 아마도 깔끔하게 세팅되어 있었을 머리도 한두 가닥 빠져나와 이마 위를 드리우고 있는 상태였다.

옷차림 또한 회색의 캐시미어 니트 아래에 검은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하의와 같은 색의 재킷을 걸치고 검은색 정장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 그가 사적인 자리와 거리가 먼 어딘가에 있었던 것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류주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다들 갸웃거릴 때.

하.

“……이게, 씨발. 룸살롱이지, 학교야?”

라고 희미한 비웃음과 함께 이를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말을 듣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뭐, 뭐?!”

온기현을 잡은 손의 주인인 OB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그 옆에서 보험 회사에 다니는 OB가 입을 벌린 채 “어? 류주호…….”라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그 대상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받은 류주호의 시선은 온기현의 옷자락과 어깨를 움켜쥔 우악스러운 손에 못 박힌 채였다.

눈길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 섬뜩했다.

마치, 시선에 칼날을 심었다면 곧바로 손이 난도질당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주위의 모두를 오싹하게 했다. 단정한 얼굴에서 아예 표정을 지운 탓에 그것이 오히려 주위 사람들의 등골을 더욱 오싹하게 했다.

그리고 그 시선이 곧 옷자락의 주인에게로 옮겨 갔다. 기실 이곳에 존재를 드러냈을 때부터,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 시선은 떨어지는 일이 없었지만. 지금은 좀 더 차근차근 살피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그 더러운 손을 떼어 내고 제 곁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하지만, 혹여라도 어딘가 생채기라도 났는지, 제가 눈앞의 빌어먹을 것을 어디까지 찢어 놔야 좋을지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어, 어, 뭐야.”

저벅. 저벅.

류주호가 발을 내딛는 동시에, OB가 온기현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절로 힘이 빠져서인지도 몰랐다. 그 손이 두 번 다시 쓸 수 없을 정도로 아작 나 버리는 사태는 막을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했음을, 남자는 몰랐다.

커다란 두어 걸음의 보폭으로 그들을 향해 단숨에 다가온 류주호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온기현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야 정면에서 바라본 온기현의 차림이 오롯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살이 다 드러나고 온몸에 감기듯 달라붙은 실크 재질의 의상과, 그로 감싸인 하얀 살갗. 눈에 보이는 모두에게 야릇하고 음험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펼쳐진 광경이 딱, 새벽녘 무렵 퇴폐 유흥업소에서 일어날 법한 난장 직전의 분위기였기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지척에서 온기현을 눈에 담고 나니 속 어딘가가 흉포한 무언가로 가득 차는 것처럼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거센 풍랑을 애써 잠재우려 숨을 가라앉히고, 주먹을 그러쥐었다.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가자.”

그의 머릿속에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까지, 온기현을 데려가 숨겨 놓기 전까지 한시도 쉴 생각이 없었다.

온기현은 자신의 팔을 잡아챈 류주호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전까지 그저 멍하게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거센 힘에 몸이 끌려갔다.

“주, 주호야.”

“야!! 이 새끼가. 선배한테 인사도 안 해?”

돌린 등을 향해, 거친 노성이 쏟아졌다.

류주호의 무표정 속에 감춰진 핏발 어린 분위기에 멍했던 것도 잠시, 온기현의 팔을 잡고 있던 OB가 대뜸 류주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턱을 치켜들며 위협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신장 차이로 인해 눈만 더 올려 떠야 할 뿐이었다.

“…….”

류주호가 말없이 시선만 돌려 물끄러미 쳐다봤다. 온기현은 제 뒤로 끌어와 숨겼다.

“선배?”

하하.

문득 류주호의 입에서 성마른 웃음이 툭 튀었다가 사그라들었다.

“……선배는 씨발, 좆 까는 소리 마시고요.”

“뭐?!”

“선배라는 새끼가 어린 후배들 줄 세워 놓고 술 시중을 시키시네.”

고급스럽고 우아한 모양의 입에서 쌍스러운 욕설이 흘렀다. 애매하게 존댓말과 욕설을 뒤섞은 류주호의 말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것처럼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술 시중? 이게 뭐가 술 시중이야. 눈깔은 폼으로 달고 다녀? 넌 축제도 모르냐, 이 개새끼야? 다 놀이잖아, 놀이. 놀이 몰라?”

OB는 목을 걸게 긁더니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끈적한 액체 방울이 류주호의 구둣발에 튀었다. 류주호가 제 구두로 시선을 내렸다.

“옛날부터 뻐기면서 잘난 체만 하더니 씹, 이게 무슨 개 족보야, 어? 선배가 개 좆으로 보여?”

“개 좆……. 차라리 개 좆이 더 쓸모 있겠네요.”

그리고.

류주호가 말을 이었다.

“언제부터 봤다고 말을 까고 지랄이세요. 응? 나는 당신 누군지 기억도 안 나는데. 나 알아요?”

“허, 허……!!”

한국대의 인기인이자 희대의 난봉꾼이었던 류주호는 누구나 알 법한 유명인이었지만, 류주호는 귀찮고 짜증 나는 선배들의 얼굴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말을 잃은 채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진 선배를 두고, 류주호는 다시금 온기현의 어깨를 붙잡고 가자고 속삭였다. 온기현은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류주호와 뒤에 있는 선배를 번갈아 바라봤다.

입에 게거품을 물며 잔뜩 흥분해서 씩씩거리던 놈이 겨우겨우 태연한 척하듯 일그러진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담아 실소를 날렸다.

“하하. 여기서 한 년 낚아채 가는 너야말로, 룸살롱이니 뭐니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어? 야. 나도 별미 한번 먹어 보자. 어? 나도 중국 걔, 맛 한번 봐 보자고, 새꺄.”

듣는 사람의 귀에 쓰레기를 꽂아 넣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더럽고 저열한 말을 침 튀기며 뱉어내는 OB로 인해, 분위기가 대번에 싸늘해졌다.

놈이 지칭하는 한 년, 이란 누구를 말하는지 누구나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지칭의 대상이 된 온기현은 모욕감에 말을 잃고 눈을 크게 떴다. 분노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 저 새끼의 얼굴을 주먹으로 날려 버리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온기현의 떨림은 금세 가라앉았다.

자신의 어깨를 꽉 잡은 손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올려다본 온기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꼿꼿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는 류주호의 표정은 온기현만이 볼 수 있었다.

류주호의 얼굴에서는 사람다운 기색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안광은 감정이 전혀 비치지 않도록 메말라 시퍼렇게 빛났으며, 원체 곧은 입매를 자랑하며 미운 말만 툭툭 뱉어 내던 입술은 윤기 하나 없이 일자로 굳게 다물려 있었다.

오로지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형물 같았다.

그에 반해, 턱과 목 줄기를 잇는 부근의 핏줄이 눈에 띄게 불거졌다.

문득 온기현의 어깨를 감싸던 손이 살며시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육중한 몸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곧 시선이 아래에 꽂혔다.

아까 남자 둘이 앉아 있던 테이블이었다. 바닥에 내려놨던 스포츠 백은 챙겨 간 모양이었지만, 그 옆에 구르고 있는 야구 배트는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류주호가 허리를 깊게 숙여 팔을 뻗었다. 여유롭게 손에 닿는 야구 배트를 커다란 손으로 그러쥐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배부른 흑표범같이 느른한 동작으로 어깨와 허리를 편 류주호가 무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발을 내디디니 콘크리트 바닥이 가르륵, 하며 긁는 소리를 냈다.

“너, 무, 너, 뭐……!”

“선배.”

놈이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 치는 사이에, 류주호가 그 옆으로 시선을 흘기듯 던졌다. 류주호가 나타났을 때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 선배였다. 그는 류주호가 신입생일 때 몇 번 대화를 나눴던 과대이기도 했다.

“어, 어……?”

“보험 회사에 취직하셨나 보네요.”

“아, 아아. 응. 이, 이번에.”

“그럼, 오늘 계약 한 건 따 가시겠어요.”

류주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이 새끼 앞으로 하나 들어야 할 것 같거든요.”

“……!”

그리고 류주호가 느닷없이 빠르게 발을 뻗어 걸어오더니,

부웅―!

하고 야구 배트를 크게 휘둘렀다.

꺄아악!

안 돼!

아악!!

콰장창!!!

하는 소리가 연이었다.

온기현도 마찬가지로, 헉 소리를 냈다. 미처 류주호를 말릴 새도 없었다.

하지만.

“허, 헉……. 으…….”

턱, 하고 구두 앞꿈치가 뒤쪽 바닥을 디뎠다. 미처 물러서지 못한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튀어나올 듯 벌어진 남자의 눈에는 눈물이 찔끔 맺혔고 관자놀이에서는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후배 여학생들은 입을 막은 채 경악에 차 있었고 남자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는 아연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굳은 선배와 류주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야구 배트의 끝이 남자의 코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것이다. 벌벌 떠는 남자의 얼굴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리고 OB의 얼굴 앞을 스친 야구 배트가 그대로 테이블 위로 향했다. 플라스틱 테이블은 엄청난 굉음을 내며 부서졌고, 술병과 술잔은 깨지고 산산조각 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천막 내부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류주호는 야구 배트를 바닥에 깡그랑, 하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세게 내려놓았다. 동시에 얼굴을 땀으로 흠뻑 적시고 있는 놈의 입에서 히익,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무기 들고 설치는 것만큼 꼴사나운 게 없어요. 이걸로 쓰레기들 눈깔이 터지도록 패 봤자, 손맛도 안 좋더라고요.”

섬뜩하도록 낮은 음성이었다.

“그렇다고 더러운 거 내 손으로 직접 만지기도 싫고.”

마지 무생물을 보는 듯한 류주호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류주호가 몸을 돌렸다. 한쪽 손은 온기현을 놓치지 않았다. 성큼성큼 걷는 류주호 옆에 바짝 붙은 온기현이 종종걸음을 하며 그에게 끌려갔다.

그때.

“……이.”

이를 가는 소리와 함께 드르륵, 하고 무언가 바닥을 끄는 소음이 들렸다.

모두가 경악에 빠져 아연해 있는 틈이었다. 그 틈을 타고, 남자가 움직였다. 축 처진 팔을 겨우 움직여 바닥에 내팽개쳐진 야구 배트를 들고서는.

“이 개새끼가!!!!”

류주호의 뒤통수를 향해 돌진했다. 둘이 뒤를 돌아본 것은 동시였다. 온기현을 자신의 뒤로 빼내려는 류주호의 움직임 또한 순식간에 일어났다.

하지만.

휘익ㅡ.

퍽!

“헉……!”

“……미친.”

온기현의 행동이 그보다 훨씬 빨랐다.

“억…….”

남자의 입에서 그르륵 하는 거품이 일었다.

남자가 눈에 불을 켜고 야구 배트를 집어 들며 달려오던 순간에, 온기현이 힘껏 발 구르기를 한 후 높게 발차기하듯 남자의 고간을 걷어찬 것이다. 순간 작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에 달라붙는 스커트였지만 양쪽 허벅지로 슬릿이 터져 있는 터라 거칠 것 없이 유연하게 올라간 다리가 힘을 받아 남자의 정중앙을 쉽게 가격할 수 있었다.

남자의 검은자위가 데구루루 뒤로 넘어갔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새파랗게 질린 남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짓단 아래가 점점 젖어 갔다. 동시에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온기현을 뒤로 빼내려는 류주호의 손은 여전히 그의 팔을 잡은 채였다. 다만, 온기현이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후.”

온기현은 바닥에 고꾸라진 남자를 차게 바라보다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류주호를 바라봤다.

“…….”

“어…….”

온기현이 입을 아연하게 벌렸다. 류주호의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는 류주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잠깐만 비켜 봐. 어어, 안 되는데. 아냐, 이 선배는 괜찮. 저리 가세요. 구경났어요? 잠깐만요, 핸드폰으로 찍지 말라니까요. 흩어지세요, 좀, 하는 소리가 웅성거림에 섞여 안까지 들려왔다.

아무래도 경영대 부스 앞에서 두엇이 망을 보며 서 있었나 보다. 그 사이를 헤치고 어떤 커다란 체구가 입구의 천막을 걷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

“후, 후석아!”

“후석 선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감후석이었다. 사람들의 만면에 반가움과 놀라움, 희열이 교차했다. 마치, 악당을 무찌르러 온 구세주의 등장을 마주한 것과 같은 열렬한 반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부드럽고 낮은 음성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온기현도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감후석은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이 나동그라지고 술병이 깨지고 양복 입은 남자가 주저앉아 있는 난장판이 된 사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온기현과 마주쳤다.

“어? 기현이? 주호도 있네. 대체 이게.”

“가자.”

눈을 설핏 마주친 류주호는 감후석에게 별말 없이 그대로 천막을 벗어나기 위해 커다란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나서기 직전 뒤로 차디찬 시선을 던진 류주호가 이 모든 걸 천천히 눈에 담았다. 류주호의 단정한 입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너희. 다시는 이따위 짓거리 벌이지 못할 거야.”

중얼거리듯 뱉어진 말이 모두의 귀에 박혔다.

그리고 둘은 그대로 축제 부스에서 나왔다. 밖을 지키고 선 경영대 학생들이 무어라 말을 거는 듯했지만 류주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딘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들을 가로질러 몇 걸음 가기 전에 온기현이 “어…….” 하고 작게 말을 꺼냈다. 류주호가 금세 시선을 온기현에게로 돌렸다.

“주호야. 나 가방이랑 옷.”

“……어딨어?”

“저 뒤에…….”

여태 낮게 가라앉은 류주호의 목소리에, 기현이 조리대 뒤쪽 공간을 손짓했다. 그때.

“저, 제가 가져왔어요, 선배님.”

가녀린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기현이 돌아보자 아까 전 술을 따르라는 모욕을 받은 여학생이 양손으로 백팩과 옷가지를 한 아름 든 채 서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아녜요. 저야말로 감사해요. 선배님.”

기현을 보며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한 여학생이 고개를 꾸벅 숙여 왔다.

기현이 미처 대답을 채 하기도 전에, 류주호가 그 짐들을 제 한쪽 팔로 한 번에 낚아챘다.

류주호에 의해 다시금 몸이 이끌리며, 기현은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축제의 장에서 멀어져 갔다.

헉헉.

헉.

성큼성큼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을 내도록 뒤따랐다. 시끌벅적한 장소에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발걸음은 느려지는 게 아니라 더욱 빨라졌다.

캠퍼스의 가로수 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져서 이제는 지척에 있는 단정한 머리통도 희끄무레하게 시야에 보일 뿐이었다.

다만, 그 어두운 사위 안에서 온기현의 팔뚝을 거세게 휘어잡고 있는 류주호의 불거진 힘줄만이 시퍼렇게 눈에 띄었다. 그는 노염에 뒤틀린 심상을 내보일 듯 내보이지 않고 고요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종종걸음으로 뒤를 쫓던 온기현이 가쁜 숨을 내뱉어도 그는 여전히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야, 야! 주호야. 어디까지 가.”

그의 뒤통수에 대고 그렇게 쏴 대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완전히 인적이 끊긴 한적한 숲 근처였다. 간혹 찌르르 우는 벌레 소리가 들렸다.

그때. 온기현의 몸이 기우뚱하고 옆으로 기울었다. 차이나 드레스의 옆부분이 아무리 터져 있다고 하더라도 불편한 의상임에는 변함없었다. 그러자, 순간을 놓치지 않고 류주호가 바로 뒤돌아 다른 손을 뻗어 온기현의 몸을 턱 받쳤다.

그제야 류주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짙은 음영이 더욱 깊어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스커트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올라온 눈이 온기현의 눈과 마주쳤다. 류주호의 눈에 잠시 윤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뒤에 곧이어 그는 미간을 설핏 찡그리는가 싶더니 입으로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는 가까운 수풀 사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온기현 또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소나무가 군데군데 심어져 있었다. 낮이었으면 아름답다고 했을, 한국 대학교 뒤편의 숲은 완전히 밤이 된 지금은 어쩐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커다란 나무 앞에서 류주호가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온기현의 양어깨를 콱 틀어잡았다.

“너, 제정신이야?”

“어?”

바스스 흔들리는 수풀 새로 으르렁대며 짓씹는 류주호의 말이 똑똑히 들렸다. 하지만 당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온기현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대체, 뭐가?”

벙긋거리며 놀란 눈을 하자 류주호의 깊은 눈매가 한없이 좁아졌다.

“그 새끼가, 배트 휘두르면서 달려오는데, 거기서 그걸 네가 앞서 막으면 어쩌자는 거야.”

“아까 그때?”

온기현이 날쌔게 OB의 가운데를 걷어차 버린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기현이 막아서지 않았으면 방심해 있던 류주호의 머리통은 지금쯤 산산이 깨져 있을 터였다. 그 정도의 기세로 악다구니를 쓰며 야구 배트를 치켜들고 돌진해 오지 않았던가.

“내가 막을 수 있으니까. 급소를 노릴 타이밍이 딱 맞았어.”

“미쳤어?”

이를 갈듯 묻는 말에, 온기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누굴 구해 줬는데 이런단 말인가.

생각해 보니 첫 만남 때도 그랬었다. 칼을 들고 오는 여자를 막아선 것은 본인이었다.

“칼 들고 설치는 사람 앞에 무턱대고 몸을 날리지 말라는 교육, 안 받았냐고.”

그때도 류주호가 그렇게 말하기는 했었다. 비아냥을 담아. 무식하게 몸을 날린 온기현을 향해 대놓고 비웃었다. 어쩐지 그때가 생각나서 온기현은 입을 다물었다. 괜스레 억울했다.

“내가 왜 미쳐. 안 미쳤으니까 지금.”

“다쳤으면 어쩔 뻔했어!!”

확 내지르는 류주호의 언성에 온기현의 꾹 다물려 있던 입이 설핏 벌어졌다.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류주호는 어쩐지 아까보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순간 목구멍이 턱 막힌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류주호의 퍼렇게 질린 눈동자만이 여실히 시야에 들어왔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에 어쩐지 힘이 들어갔다. 꽉 죄는 가슴을 대변하듯, 손끝 마디마디, 이 이상 할 것 없이 빠듯하게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온기현은 자신을 뚫어져라 직시하는 류주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어 멍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맨살이 드러난 팔뚝을 잡고 있던 류주호의 손에서 언뜻 힘이 풀렸다.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어깨선을 지나 실크로 감싸인 쇄골과 목울대를 쓸더니, 턱 언저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동안에도 온기현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손으로 귓가를 감싸며 뒷덜미까지 손을 내린 그가 어느덧 온기현의 몸을 제 품 안으로 훅 끌어왔다.

씨근덕거리는 가슴이 온몸에 맞닿았다. 북이 울리는 것처럼 둥둥거려, 제 몸까지 두들겨지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숨이 귀를 간질였다. 그가 악다문 잇새로 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다쳤으면, ……어쩔 뻔했냐고…….”

아.

그의 나지막한 음성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등 뒤로 던져지는 그의 눈이 어떻게 벼려져 있는지 온기현은 알 수가 없었다.

“아, 안 다쳤으니까. 다행히……. 안 그랬으면 너도 다칠 뻔했었고……. 그니까.”

온기현은 고개를 들어 류주호의 어깨에 입을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단단한 어깨에 닿은 제 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류주호가 팔에 더욱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입을 닫았다. 저를 안은 온기가 탈 듯이 뜨거웠다.

문득 가슴에 확 불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류주호는 자신을 걱정했던 것이다. 혹여라도 다칠까 봐. 그래서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다.

온기현이 무모한 행동을 한 것에 대한 분노는, 온기현을 비껴간 그 외의 모든 것에 향해 있었다.

눈과 귀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쿵쿵거리는 울림이 자신의 울림으로 바뀌었다. 박동이 미친 듯이 거세졌다. 어깨 위로 솟아난 두 개의 눈동자가 도록도록 좌우로 굴렀다.

그때 문득.

그 씹새끼들.

류주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몸을 떼어 내었다. 그러더니 온기현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 물었다.

“연락은 왜 이렇게 안 받아.”

“연락?”

그러고 보니 핸드폰을 옷 주머니에 둔 채로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류주호가 연락을 했었다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의 팔에 걸쳐져 있는 자신의 백팩과 옷가지에 손을 뻗었다. 뒤적거려 핸드폰을 빼내었다. 화면을 켜자마자, 온기현은 눈을 의심했다.

[부재중 전화 : 53통]

“어?”

53통?

온기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가늘게 뜬 눈으로 봐도 부재중 전화가 들어온 숫자는 변함없었다.

핸드폰을 몇 번 터치해서 알림 창을 확인했다. 메신저 창은 의외로 몇 건 없었다. 류주호가 어디냐고 묻는 채팅이 다섯 개 정도 와 있었다.

다만, 그 간격이 규칙적이었다. 메신저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 메신저를 보내고 전화를 하고를 여러 번 반복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전화만 수십 통이 넘게 연달아 있었지만.

“……연락했었네. 미안. 몰랐어…….”

화면을 암전시키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류주호는 아까와 같이 서늘한 낯이기는 했지만 화를 내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고개를 작게 주억거리며 눈을 마주쳐 올 뿐이었다.

“근데 너 무슨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이틀 정도 바쁘다고 했었잖아.”

퍼뜩 생각난 온기현이 그렇게 물었다. 류주호는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약간 고개를 숙이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게. ……진짜, 중요한 일이었는데.”

그러더니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금 온기현의 얼굴을 정면에서 쳐다봤다.

“……그런데…….”

왜 지금이 더 중요한 것 같지.

문득 류주호가 그렇게 읊었다. 한숨과도 같은 말이었다.

인적이 드문 수풀 속, 드리워진 나무 사이로 어둑한 사위. 시끌벅적한 축제의 흥성거림이 드문드문 들려오는, 외따로이 서 있는 고요한 이곳.

류주호의 중얼거림을 듣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울컥하고 뜨끈한 게 목구멍에 걸린 느낌이었다. 막힐 듯 목이 메어 왔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저 스스로 끝을 보고 달리는 카운트다운을 시작한 게 엊그제였다. 그런데도, 류주호가 이렇게 자꾸만 이상한 행동을 할 때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지금은, 정말로.

정말로.

온기현은 뻥 터져 버릴 것 같은 마음을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천천히 손을 뻗어 류주호의 서늘한 옆얼굴을 조심스레 감쌌다. 순간 류주호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마주쳐 오는 눈은 떼지 않았다. 가느다랗게 뜬 눈이 조금 커졌다.

온기현이 그대로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목을 쭉 뻗었다. 그대로 손을 류주호의 뒤통수까지 미끄러트려 감싸고는 제 쪽으로 당겼다. 류주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갈색 눈동자가 저를 응시했다.

‘아…….’

목구멍에 걸렸던 울컥거리는 마음이, 터져 나갈 것 같다. 가만히 서 있는 류주호의 입술을 살포시 입술로 물었다. 그리고 슬쩍 입술 사이를 벌려 혀를 내밀었다. 건조한 그의 입술을 살살 축였다.

그리고,

“아!”

순식간이었다. 류주호가 물어뜯을 기세로 온기현의 입술을 거침없이 삼켰다. 팔을 뒤로 휘감아 온기현의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결박한 다음, 온기현의 고개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사납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온기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놀란 것도 잠시, 마구 안을 헤집는 살덩이를 열렬하게 받아들이고, 입을 벌려 제 혀도 마구 그의 것과 얽어 댔다.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어쩐지 눈물이 찔끔 맺혔다.

더욱 깊이 맞물리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그리고 그런 온기현의 반응을 민감하게 눈치챈 류주호는 무섭도록 흥분한 짐승처럼 온몸을 들썩이며 온기현을 마구 몰아갔다.

바람결 사이로 축축한 타액이 뒤섞이는 소리가 가득했다. 젖은 마찰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거친 숨결을 주고받으며 난잡하다 싶을 정도로 여린 살갗을 마구 빨아 댔다. 어느새 턱, 하는 소리가 온기현의 등 뒤에 울렸다. 류주호는 온기현을 커다란 나무 기둥까지 밀어붙이고서는 게걸스럽게 입술 안쪽을 범했다. 거친 나무 표면이 새하얀 드레스에 흙 얼룩을 만들어 내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온몸을 꽉 잡고 있던 류주호의 두 손이 온기현의 뺨과 귀를 여기랄 것 없이 쓰다듬다가 기어코 밑으로 내려왔다.

“이 좆 같은 옷.”

문득 류주호가 그렇게 짓씹듯 중얼거렸다.

“이걸, 씨발……. 본 새끼들 눈깔을 파 버리든지.”

연이어 섬뜩한 말을 계속 지껄였다.

그는 제 본능에 몸을 맡겨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뜯어진 슬릿 사이로 손을 거칠게 집어넣었다. 온기현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어깨를 밀어도 단단한 암석처럼 꿈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외려, 그럴수록 손이 더욱 깊숙한 곳으로 침범하기 시작했다.

“야, 야!!”

온기현이 다급하게 얼굴을 떼어 내며 알 주먹으로 류주호의 팔과 등을 힘껏 쳤다. 아프지 않을 만큼 쳤다. 그러자, 하아, 하고 가쁜 숨을 내쉰 류주호가 얼굴을 목덜미로 내리더니 이번에는 양손을 전부 아래로 집어넣어 왔다.

미친놈아!

온기현의 입에서 소리 없는 경악이 흘렀다.

여기는 아무리 으슥한 곳이라고는 해도, 완전한 외부였다. 누군가 지나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란 말이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기로 교양 수업을 마친 후 류주호가 처음 저를 끌고 온 곳이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였다.

축제의 열기에서 잠시 떨어져 있고 싶은 학생들이 이곳으로 혹여나 오게 될지도 몰랐다.

기겁한 온기현이 주먹을 올려 류주호의 어깨를 퍽퍽 쳤다. 이번에는 조금 세게.

그랬더니 그제야 류주호가 목덜미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온기현의 시야가 조금 낮게 내려왔다.

헉, 헉, 하는 두 사람의 호흡이 공중에 뒤섞였다.

내려다본 류주호의 눈이 약간, 아니 꽤 음습해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온기현이 흠칫하는 사이에 류주호가 입을 열더니 입꼬리를 올려 낮게 웃었다.

“씨발……. 니가 때리니까, 더 꼴려…….”

라고 말하며 다시금 입을 벌려 입술을 감쳐물었다. 온기현은 몸을 뒤로 물릴 수도 없었다. 나무 기둥으로 인해 퇴로가 가로막혀 있었다.

‘아이 씨! 진짜!’

고개를 틀기 위해 틈이 벌어진 사이에 온기현이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야. 너 변태야? 왜, 왜 때리니까 더, 어? 그렇대?”

“응. 그런가 보지.”

온기현의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어쨌는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단단한 허벅지를 내밀어 스커트를 헤치듯 온기현의 다리 사이로 불쑥 집어넣었다.

“하지 말라고! 누가 보면 어떡해!”

“아무도 안 봐.”

“어, 어떻게 안 봐. 이렇게 뻥 뚫렸는데.”

“여기 떡 스폿이라, 어차피 아무도 신경 안 써.”

“뭐?”

떡, 뭐?

온기현이 아연해 있는 사이에도 그는 어떻게든 들러붙기 위해 커다란 몸을 부딪쳐 왔다.

사실 온기현도 지금 아닌 척했지만 사실 무척 흥분해 있었다. 이러다 여기서 일을 치를 성싶었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이 여기서는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달뜬 숨을 가다듬으며 “집에 가자. 집에 가서 하자. 응?”이라고 애원하듯 속삭이자, 류주호는 어쩐지 더 흥분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곧 씨근덕거리며 몸을 세우더니 “그래.” 하고 대답하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집에 가서, 너. 완전 죽여 줄게.”

류주호가 다리 사이를 헤매던 손으로 스커트 윗단을 잡더니 가로로 주욱 찢었다.

기다란 치마 때문에 걷기 불편했던 온기현이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던 게 생각나서였다. 순간 헉, 하고 놀란 온기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류주호를 치려다가 그가 한 말이 생각나서 공중에서 팔을 굳혔다. 스커트가 대번에 무릎까지 짧아졌다.

하지만 그런 우려도 잠시, 류주호는 제 재킷을 순식간에 벗어서 온기현의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뜨거운 그의 체온이 온기현의 맨살에 전달되었다.

그제야 싸르르하니 서늘한 날씨를 체감했다.

류주호의 차는 지척에 세워져 있었다. 주차장으로 가던 길이었던 것을 이제 알았다.

조수석에 탄 온기현은 액셀을 힘껏 밟아 차를 출발시키는 류주호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어 댔다. 자꾸만 그에게로 손이 뻗어 나갔다.

안달하듯 기어 위에 올려진 손을 살며시 건드리자, 류주호가 욕설을 내뱉더니 끼익, 하고 급하게 차를 세워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열렬하게 그에게 응했다. 하지만, 지금 이것조차 아쉬웠다.

온기현이 흥분할 대로 흥분한 것을 류주호가 모를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뒤엉키고 싶은 마음은 류주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을 하고 싶었다. 류주호 자신도 살을 섞는 것보다 더한 게 뭔지, 그게 뭔지 모를 뿐이었다. 어찌 됐든 당장 온기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노기를 부딪치듯 퍼붓던 키스를 겨우 멈추고는 다시금 차를 출발시켰다.

“으…….”

온기현의 입에서 새된 신음이 터졌다.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알고 있는데도, 빨리 도착했으면 싶었다. 류주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까 축제 부스에 있던 때보다 더.

엄청난 속도로 차를 몰아 갔다. 핸들을 꺾는 동작조차 크고 거칠기 짝이 없었다.

어서. 빨리. 빨리.

그런 온기현의 안달하는 마음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인지, 류주호는 다시금 으슥한 곳에 차를 세우고 미친 듯이 입술을 부딪쳤다. 게걸스럽게 혀를 섞고 질척한 타액을 흘리고, 또 타액을 삼켰다. 달뜬 숨조차 모조리 먹어 치웠다. 가느다란 터럭만 한 숨도 남기지 않을 기세였다.

그러다가 또 차를 출발시켰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 탓에 최대치의 속도로 운전을 해도 평소보다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지하 주차장 고정석에 차를 세우고 텅,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러고자 하지 않았어도 악력이 절로 들어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맨발로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밀폐된 엘리베이터에서는 더욱 그랬다. 가까이에 선 류주호의 향이 짙게 퍼지며 콧속 깊이 파고들어 왔다.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당장 맨살을 맞대고 싶었다.

제가 류주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이 마음을 당장 몸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표출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시한폭탄처럼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완전히 터져 버려, 일어서지 못할지도 모른다. 완전히 녹아 버려 온갖 추태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급했다.

시선은 공중을 향했다. 언뜻 곁눈질로 보이는 거울 속 자신의 옆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새빨개져 있었다. 머리도 여기저기 삐죽빼죽 솟아나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거울로 던진 시선에 류주호가 들어왔다. 그리고, 류주호는 언제부터 저를 그렇게 보고 있었는지 어둡고 음산한 눈빛으로 거울 너머로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제 얼굴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지 않지만, 마주 보고 있었다.

띵.

15층에 도착했다는 신호가 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류주호는 엄청난 기세로 온기현을 끌고서는 문을 벌컥 열었다.

현관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류주호가 온기현의 몸을 내리누르며 거친 파도처럼 얼굴을 내려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아아…….”

온기현이 양팔을 뒤로 둘러 류주호의 등을 꽉 껴안았다. 하읍, 헉, 하는 가쁜 숨소리가 서로의 입 안으로 죄 먹혔다. 학교에서 했던 키스보다, 차에서 했던 키스보다 훨씬 집요하게 온기현의 입 안을 남김없이 혀로 쓸고 빨아 댔다.

허겁지겁 서로를 삼켰다.

숨이 막혀 왔다. 눈물이 찔끔 배어 나왔다.

“하아. 하아.”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자 그가 혀를 내민 상태로 악마같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좆 터지는 줄 알았어.”

온기현이 시선을 내렸다. 그의 바지가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있었다. 제가 경험했던 그 어마어마한 크기가 갑갑하게 생각될 정도로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나도……. 나도 터지는 줄 알았어.”

스커트 앞을 들추어 올리는 제 흥분의 증거도 얼른 해방해 달라며 자기 존재를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다. 선단이 젖은 탓에 하얀 실크 일부분이 조금 어두운 빛을 띠었다.

씨발.

류주호의 눈이 핏발 선 것처럼 붉게 빛났다. 그리도 동시에, 온기현의 몸을 두르고 있는 옷가지들을 죄 찢어발기듯 벗겨 냈다. 빈 곳 없이 맨살끼리 비비고 싶어서 환장을 한 사람처럼. 뚜두둑, 하는 매듭이 뜯어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입술은 쉬지 않았다. 온기현의 얼굴 곳곳을 누비던 입술이 턱선을 빨고, 목덜미로 내려와 온갖 살 내음을 빨아당기듯 숨을 쉬어 댔다. 뜨거운 습기가 하얀 목덜미를 적셔 갔다.

온기현은 삽시에 알몸이 됐다.

류주호도 마찬가지로 셔츠를 쥐어뜯고 슬랙스 앞섶을 다급하게 풀었다. 좆이 퉁, 하고 바깥으로 튕기듯 빠져나와 꺼떡였다. 얼른 들어가고 싶었다. 점막으로 맞닿고 싶어 화까지 날 지경이었다.

제 성기를 손으로 쓸며 동시에 혀끝으로 타액을 절절히 묻혀 가며 온기현의 어깨선에 자국을 남겼다. 목에 있던 자국이 아직 희미해지기도 전이었다.

“아읏!”

입을 벌려 살을 머금고 세게 빨아당겼다. 여린 살갗 아래의 핏줄이 터지며 빨갛고 동그랗게 고이는 것이 눈에 보였다.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계속해서 깨물고, 빨아 댔다.

“잠깐, 잠깐만……!”

“…….”

만류하는 온기현의 음성이 귀에 꽂히면서도 도저히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온기현도 필사적이었다.

“씻자. 응? 씻고 하자.”

오전 내내 도서관에서 일하고, 또 저녁까지 그 사달을 겪었다. 온몸에서 기름과 땀 냄새가 가득할 것이었다. 알몸이 된 이제야 그것이 퍼뜩 생각나 신경쓰였다.

욕실이 코앞이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무시하는 것처럼 가슴의 돌기까지 얼굴을 내렸다.

“하읏, 잠깐, 아, 진짜……!”

안 되겠다 싶은 온기현이 류주호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매가 안 되면 약이었다. 저도 흥분에 차 있었지만, 류주호가 혹여라도 자신의 이상한 냄새를 맡는 게 싫었다.

“씻을래. 응?”

류주호가 지그시 온기현을 바라봤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것도 몇 초, 둘은 다시금 입을 맞붙였다. 그 상태로 어떻게 발을 옮겼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 부스 안까지 들어오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혀를 섞은 채로 류주호가 온기현의 허리를 감싸 왔다. 그리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쏴아ㅡ 하고 쏟아지는 미지근한 물이 류주호의 등 위로 전부 쏟아졌다.

어느 정도 뜨거워졌다 싶었는지 류주호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온기현과 류주호의 정수리 위를 물줄기가 때렸다. 그동안 류주호는 척척하게 젖어 있는 남은 옷가지를 전부 벗어 던졌다.

둘은 완전한 알몸이었다.

뜨거운 수증기로 인해 잔뜩 습윤해진 공간에 둘의 흥분된 숨소리가 울렸다.

샤워 젤로 손을 뻗은 류주호가 손에 젤을 찍 짰다. 그리고 온기현의 몸 위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쏘아 대는 샤워기로 인해 거품이 금세 일어났다. 그러고는.

“흐으읏!”

“그래. 깨끗하게 씻자, 우리.”

커다랗고 뜨거운 손으로 온기현의 온몸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느 더러운 새끼가 만졌을 그 모든 곳을 모조리 씻겨 내는 것처럼 거침이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충분히 거품이 생기기도 전에, 아랫입술을 사리문 그가 커다란 온몸을 맞붙여 왔다. 꽉 껴안은 상태가 되었다. 맨살 사이에 거품이 미끈거려 오묘한 감각을 자아냈다.

어쩐지 발끝까지 미끈거리며 몸이 기울어질 것 같은 위기감에 온기현이 류주호의 어깨를 꽉 잡았다. 만족스러운 웃음이 류주호의 얼굴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의 발기한 성기가 온기현의 배에 딱 맞붙었다. 온기현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플 정도로 일어선 둘의 흥분이 서로의 맨살에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아, 아아! 흑! 아!”

그렇게 맞붙어 있던 것도 잠시, 류주호가 그 상태 그대로 입술을 삼키며 밀착된 상반신과 성기를 아래위로 문질렀다. 마치, 섹스를 연상시키는 동작이었다. 자연히 보글보글한 거품이 가슴과 배, 팔, 그리고 성기까지 잔뜩 생겨났다.

류주호의 단단한 배에 비벼지는 성기에 이는 자극이 엄청났다. 서로의 맨살에 꽉 감싸여, 그의 복부에 마구 마찰시킨 터라 성감이 빠듯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제 복부에 비벼지는 류주호의 것은 더했다. 질척하게 적셔 오는 액체가 샤워 거품인지, 아니면 체액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뜨거웠다. 배 속을 뚫을 것처럼 안으로 짓쳐들어오던 감각이 문득 선연했다.

거칠한 음모가 편편한 배를 비빌 때마다 야릇한 감각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반면 온기현의 터럭 하나 없는 매끈한 아래는 걸리적거리는 것 하나 없이 살덩이 전체가 류주호의 장골과 이어진 아랫배에 맞닿은 상태였다. 자신과 전혀 다른 아랫도리의 감촉이 생경했다.

배꼽을 지나 가슴팍까지 문질러지는 그것은 류주호의 허릿짓이 더해질수록 더욱더 팽팽해졌다.

류주호의 손이 젖은 온기현의 머리칼 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꽉 붙잡았다.

아슬아슬한 자세로 격하게 움직이는 터라 더욱 류주호를 꽉 붙들어 맸다. 류주호를 따라 하는 것처럼 허리를 엇박자로 앞뒤로 움직였다. 류주호의 목구멍에서 쌍스러운 소리가 낮게 뱉어졌다.

절로 입이 헤벌어지고 눈이 게슴츠레하게 풀렸다. 높아지는 신음이 욕실 내부를 가득 울렸다. 쿨쩍거리는 액체의 마찰음이 음란하게 서로의 살갗에 비벼졌다.

“아, 아! 좋, 아, 아아, 조아……. 흣, 아!”

“좋아? 응? 기현아, 읏, 하아.”

씨발, 나도 좋아서 돌 거 같아.

그가 속닥이듯 으르렁대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고막을 징징 울리는, 언제나처럼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고등학생 때는 그 목소리를 지척에서 듣고 싶어서 괜스레 아닌 척 교실 문밖을 서성이고는 했다. 모두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아무도 없는 도서관을 지키고 서서 막연하게 기다리고는 했다.

귓바퀴에서 시작한 열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아, 아, 나, 잠, 지금, 아아……!!”

“응, 큿……! 흣!”

온기현이 입을 벌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절정을 쏟아 낸 뜨거운 흔적이 서로의 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분간이 안 갈 정도였지만, 온기현의 복부가 유난히 질척거렸다.

잔뜩 토해 낸 희끄무레한 점액질이 샤워 거품에 섞여 아래로 주륵 흘러내렸다. 정수리까지 후끈 달아오르는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숨이 턱까지 찼는지 온기현의 몸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류주호가 부드러운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새빨갛게 드러난 점막을 보며 다시금 성감이 끓어오른 류주호가 혀를 내밀어 안쪽을 다시금 진득하게 빨아 댔다. 한 번 쏟아 낸 것으로도 부족한지, 류주호의 것은 아직 꼿꼿이 선 채였다.

뜨거운 물이 거품을 완전히 씻어 내릴 때까지 계속해서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물에 담긴 솜을 건져 올리듯, 온기현의 겨드랑이에 팔을 집어넣어 단단하게 품에 안은 류주호가 수건으로 둘의 몸을 쓸어 닦아 냈다.

욕실 바깥의 시원한 공기를 맞은 온기현의 새빨간 얼굴이 평소처럼 돌아왔지만 달아오른 볼은 그대로였다. 코끝도 빨갰다. 그에 유독 도드라지는 까만 점을 류주호가 혀를 내밀어 핥았다.

“아, 흣……. 뭐, 해, 흐으…….”

늘어지는 만류의 말에 류주호가 문득 훗,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뜨거운 숨이 콧등 위에 안착했다.

두 사람은 침대 위로 쏟아지듯 누우며 다시금 뒤엉켰다.

물기를 떨어낸 머리칼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머리, 머리 말려야…….”

이대로라면 시트가 눅눅하게 젖을 터.

“어차피 젖을 거니까 상관없어.”

확신에 찬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열기에 먹힌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류주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쪽, 쪽. 가벼운 키스가 이어졌다.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한번 사출한 절정의 여운이 나른하게 전신을 녹여 갔다. 그래서 굳이 입을 벌리려 애쓰지 않아도 따끈한 점막이 설핏 드러나도록 절로 벌어졌다.

그 사이를 물컹한 살덩이가 침범해 와, 계속해서 끈질기게 애무했다.

온기현의 목에서 끙끙하고 앓는 소리가 터졌다.

좀 더 가까이 붙고 싶었다. 저번처럼, 빨리 마구 뒤섞이고 엉키고 서로의 영역을 무자비하게 침범하고 그 무엇보다 바싹 달라붙고 싶었다.

어깨와 등으로 이어지는 견갑골과 옷 위로 볼 때는 미처 몰랐던 단단하고 빈틈없이 조여진 근육들을 손바닥으로 다급하게 더듬었다. 그럴수록 류주호의 입맞춤도 더욱 깊어졌다. 가쁘게 호흡을 터트리자, 달큰한 숨을 삼킬 듯이 먹어 치웠다.

온몸을 들썩이며 흥분에 겨운 신음을 흘린 온기현이 손을 점점 아래로 내렸다.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군살 하나 없는 허리를 지나, 앞으로 손을 뻗었다. 문득 류주호의 목울대가 거칠게 울렸다.

그러더니 팔꿈치로 시트를 누른 채 상체를 살짝 떼어 냈다. 온기현의 시선이 절로 아래를 향했다. 두 사람의 상체에 맞물려 잔뜩 습윤한 상태의 성기가 중력의 힘을 받아 온기현의 아랫배 쪽으로 살짝 늘어져 있었다.

아아.

온기현이 입가에 침이 고였다. 혀를 내밀어 꼴깍 삼켰다. 미처 다 못 넘긴 타액이 입꼬리 끝에 걸렸다. 그걸 류주호가 모를 리 없었다.

류주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거, 그렇게 먹고 싶어?”

근데 빨리 먹으면 다쳐.

그렇게 읊조린 류주호가 별안간 상체를 직각으로 세웠다. 무릎으로 서서 온기현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위로 먼저 먹어 볼래?”

온기현이 숨을 삼켰다. 자신의 몸을 무릎 사이에 둔 채 커다란 몸을 일으킨 그의 모습은 충분히 위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무척 흥분됐다. 자신의 머리가 완전히 끓어 줄줄 녹아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신이 이렇게 색에 약하고 쾌감에 약한 몸이었나 싶은 생각도 잠깐. 눈앞에서 꺼떡거리는 거대한 살덩이를 보니 문득 입 안이 메말라져 옴을 느꼈다.

온기현이 입을 헤벌린 채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그리고 상체를 조금 들어 입을 벌리며 다가왔다. 머리 위에서 상스러운 중얼거림이 또 한 번 들려왔다.

좆을 물기 쉽도록 류주호가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온기현의 등 뒤로 푹신한 베개가 받쳐지며 더할 나위 없는 자세가 되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니 성기의 엄청난 크기가 더더욱 실감되었다. 남의 성기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거니와, 그의 얼굴과 다르게 흉흉하게 생긴 살덩이가 비현실적으로 생각되었다. 더운 기운이 코끝을 훅 끼쳤다.

야한 냄새라고 생각했다. 평소 류주호가 뿌리고 다니던 향수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노골적인 색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냄새였다. 온기현이 홀린 듯 입을 벌려 혀끝을 내밀어 그의 귀두 아래쪽을 할짝 핥았다.

“하…….”

이런 어설픈 애무만으로도, 그의 허벅지 근육이 크게 불거졌다.

뜨겁게 부푼 좆에서는 살 맛이 났다. 다시금 입을 벌려 귀두 옆을 쪽, 빨아 봤다. 어쩐지 아랫배가 찌르르하게 울려 왔다. 혀를 내밀어 귀두 위로 미끄러트렸다. 용기를 내어 입을 벌렸다.

턱이 얼얼했다. 입 안에 가득 들어찬 커다란 기둥의 선단이 후끈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훅, 하고 숨을 들이쉬는 것도 어쩐지 버겁게 느껴져, 양손을 겨우 뻗어 제 가슴께 옆을 철벽처럼 막고 있는 류주호의 허벅지를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꽉 잡았다.

하지만 외려 역효과였다.

“흐으읍!”

기둥까지 입을 내리기도 전에, 류주호의 성기가 그 양감을 더했다. 입 안이 찢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덜컥 걱정이 되었다. 쭙, 하는 소리가 제 입에서 나는 것이 순간 너무 생경했다. 그래서 입을 뒤로 물리려는 순간.

류주호의 커다란 손이 온기현의 앞머리를 살며시 쓸어 왔다. 겁먹은 아이를 달래듯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도 잠시, 뒤통수까지 감싼 그 손에 의해 온기현은 다시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막힌 숨구멍에서 새된 소리가 새어 나왔고, 안쓰러울 정도로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어마어마한 크기를 한껏 머금은 탓에 침이 줄줄 흘렀다. 눈물과 침이 한데 뒤섞여 턱 아래를 축축하게 적셨다. 그걸 오롯이 내려다보고 있는 류주호의 허벅지가 뿌득,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단단하게 굳어졌다.

후, 후, 하는 낮은 호흡이 연신 들려왔다. 그는 엄청난 자제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안 돼. 더 이상은 못 하겠어……!

눈을 질끈 감은 온기현이 겨우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입은 제 좆을 물고, 애처롭고 가련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그 눈빛에, 류주호의 이성의 고삐가 풀렸다.

“크윽!”

“흐읍……!!”

퍽!

성기가 목구멍까지 한 번에 거세게 치고 들어왔다. 반밖에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턱이 빠질 듯 아팠다. 온기현이 눈을 부릅떴다. 으흡, 하는 밭은 숨소리가 귀두를 울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그걸 지켜보던 류주호가 돌연 성기를 쑥 빼내었다.

“진짜…….”

“……?”

하아, 하아, 하고 숨을 몰아쉬느라 절로 벌어진 아랫입술에 걸쭉한 체액이 맺혔다. 프리컴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하고는 세상 순진한 얼굴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풀린 눈을 하고 류주호를 바라본다.

그 간극이 진심으로 멀쩡한 사람을 돌아 버리게 했다.

이제까지의 인생을 모조리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별안간 가슴속 어딘가에서 지펴 오른 생경한 불꽃에 류주호가 잠시 미간을 좁혔다.

“하…….”

그렇게 입술을 사리문 류주호가 몸을 아래로 훅 떨어트렸다. 그리고 온기현의 뒷머리를 단단히 부여잡고는 무자비하게 입술을 짓눌렀다. 벌어진 입이 얼얼했다. 가뜩이나 숨찬 상태에서 또다시 입이 막혔지만, 입 안의 여린 살을 온통 자극당한 쾌감 때문인지 온기현은 그저 오면 오는 대로 전부 받아 주며 저도 적극적으로 혀를 섞었다.

급하게 입술을 떼어 낸 류주호가 돌연 커다란 몸을 아래로 완전히 내렸다. 마주 보던 시선이 아래로 사라지고 흐리멍덩한 온기현의 눈에는 류주호의 뒤통수만 보였다. 그리고.

“아!”

온기현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놀랄 새도 없이 높은 비명을 질렀다.

류주호가 온기현의 아래를 게걸스럽게 빨고 있었다.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미끈한 사타구니에 전부 입술과 혀를 놀려 완전히 질척하게 적시며, 선단이 빨갛게 부어 흥분에 바르르 떠는 온기현의 성기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허리가 펄쩍 튀어 올랐다.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류주호의 정수리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세차게 빨고 핥아 대는 뜨거운 감각에 힘을 잃은 팔이 시트 위로 떨어졌다.

“아, 아아……!”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점막에 감싸인 성기가 줄줄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류주호가 제 아래를 전부 삼켜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불안감까지 엄습할 정도였다.

“안 돼……. 흐, 안 돼……! 아! 하지, 하지, 마아……!”

어물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류주호가 슬쩍 눈을 위로 치켜떴다. 그 눈이 위험할 정도로 서늘하게 빛났다.

머리가 자글자글 끓는 쾌감에 의해 절정은 빠르게 찾아왔다. 면역이 되어 있지 않은 자극에 미처 몸을 물릴 새도 없이 류주호의 입 안으로 액체가 팟, 하고 터졌다. 허리가 둥글게 휘었다.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 바르르 떨렸다.

문득 꿀꺽, 하는 울림이 들렸다.

그는 일절 거부감 없이 아무렇지 않게 사출된 정액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온기현의 눈가가 시큰하게 붉어졌다. 익숙지 않은 애무에 흐느낌이 마구 터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울음은 류주호에게 있어서 자극만 될 뿐이었다.

그는 온기현의 아래를 죄 적실 기세로 입을 여기저기에 가져다 대며 혀를 놀렸다. 말랑해지는 성기에서 음낭, 그리고 회음부까지 죄 적셔 갔다. 그리고.

“……!!!”

류주호가 돌연, 양 오금을 잡더니 위로 끌어 올렸다. 그에 온기현의 허리가 공중에 붕 뜬 상태가 되었다.

민감한 음부가, 축축하게 젖은 아래가 그의 시선 아래 전부 노출되었다. 발긋한 음낭과 봉긋하게 솟아오른 회음부, 그리고 분홍빛 점막을 간헐적으로 내보이며 벌름거리는 구멍까지.

류주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언뜻 그가 화난 듯도 보였다. 턱이 빠듯하게 불거졌다.

“하……. 씨발, 진짜. 잠깐이라도,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걸 두고 내가…….”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얼굴을 내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뭐, 뭐 해, 아, 아 대, 하지, 아흐……!”

볼기 사이로 류주호가 코를 박았다. 그리고 드러난 구멍 위로 입을 벌리더니 게걸스럽게 빨아 대기 시작했다. 버둥거리는 온기현의 무릎을 콱 틀어잡아 어디에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붙잡고는, 마치 이제야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그렇게 미친 듯이 빨고 핥았다.

혀를 내밀어 주름을 핥는 동작 자체도 끈끈하기 그지없었다. 집요할 정도로 개처럼 아래를 빨자 긴장감에 굳어 있던 구멍이 살살 녹아내리듯, 그렇게 류주호의 축축한 혀를 맞이했다.

온기현이 아연함에 질리다 못해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미친 듯이 구멍으로 혀를 집어넣고 마구 휘저었다.

평생 남자 새끼의 아래를 빨 날이 올 거라고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니, 상상은커녕 절대로 자신과 인연이 없는 행위에 비위생적이라고까지 생각했던 류주호다.

하지만 지금, 왜 이 짓거리를 이제야 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상대는 온기현 한정이었다.

어떻게 아래까지 이런 야살스러운 냄새를 풍길 일인가. 색도, 냄새도, 맛도, 그 모든 게 류주호의 성감을 직격했다. 평생 이러고 빨라면 빨 수 있을 정도였다.

미칠 일이었다. 머릿속에 불길이 일었다.

온기현이 그의 허벅지를 마구 밀어 대며 울어 젖히는 소리도 그저 흥분제나 다름없었다. 완전히 흐물흐물해질 정도로 안과 밖을 죄 적셨다. 눅눅하고 부드러운 구멍이 당장이라도 저를 쑤셔 넣고 싶을 정도로 붉게 발름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길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간을 들여 샅샅이 발라먹고 싶었다.

고개를 들자, 온기현이 손등으로 제 눈두덩이를 가리며 훌쩍이고 있었다. 그 모습조차 미치게 꼴렸다.

“울 정도로 기분 좋았어?”

“흐윽……! 내, 내 말도, 안 들어줘, 왜……!”

원망 섞인 말에 류주호의 음성이 나긋해졌다.

“네 구멍이 내 혀를 안 놔주고 조이잖아.”

“으, 미친 놈아아……!”

욕 같지도 않은 욕을 하면서 엉엉거려 봤자, 흥분만 부추길 뿐이었다.

류주호는 팔을 내려 온기현의 오금을 풀어 줬다. 아량이 아니었다. 온기현이 또다시 만류의 말을 읊기 전에 류주호가 제 손가락 두 개를 구멍 안으로 퍽, 처박았다.

“아흑, 아아……!”

느닷없이 침입한 류주호의 손가락을 잔뜩 예민해진 내벽이 꽉 죄었다. 온기현의 입이 벌어져 새빨간 혀가 늘어지듯 입술 위에 걸쳐졌다.

쾌감의 파도가 끊이질 않았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늘의 섹스는 지난번하고는 또 달랐다.

난잡하리만치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행동을 과연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게 류주호라는 사람의 진정한 본성에 가까운 섹스라는 생각에, 문득 겁이 나고 아찔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자극이 온몸을 이리저리 쳐 대는 느낌이었다.

손을 뒤로 물렸다가 다시 퍽! 하고 안쪽 깊숙이 삽입했다. 내벽을 끈질기게 문지르며 동시에 온기현의 발긋한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아래위로 행해지는 자극에, 온기현이 자지러졌다. 류주호의 어깨를 마구 밀며 밭은 숨조차 내쉬기 힘들 정도로, 그렇게 몰아붙였다.

그런 온기현의 얼굴에 시선이 못 박혔다.

손가락을 네 개로 늘리고 손목까지 넣을 기세로 아래를 마구 들쑤시며 젖꼭지가 부풀어 터질 정도로 빨아 대면서도, 온기현의 쾌락에 잠겨 이성을 잃은 얼굴에서 절대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았다.

급기야 온기현이 도리질을 쳤다.

안 할래, 안 할래……!

입을 벙긋거리며 새어 나오는 말을 들은 류주호가 유두를 입에 머금은 채로 훗, 하고 웃었다.

내가 너 완전 오늘, 죽여 준다고 했지.

내빼는 것은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류주호의 팔뚝에 핏줄이 푸르게 불거졌다. 땀이 흥건하게 밸 정도로 구멍을 빠르게 쑤셨다. 네 개를 여유롭게 먹어 대는 구멍이 빠듯하게 조일 즈음, 온기현의 성기에서 희끄무레한 액체가 다시금 터졌다.

마른 몸이 경직되어 절정에 잠식되었다.

류주호는 손가락을 빼낸 다음 곧바로 온기현의 무릎 사이로 들어가 자세를 잡았다.

아까부터 온기현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서 터지기 직전인 거대한 좆을 예고도 없이 구멍에 거세게 들이박았다.

뒤로 젖혀진 온기현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철벅, 하고 젖은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철벅, 퍽! 하는 마찰음이 처음부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반복됐다.

온기현의 입에서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말을 잃은 사람처럼, 음성을 내지 못하는 그것처럼, 입만 벌린 채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 애처로운 모습을 보며, 류주호는 무언가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충족감이 가슴속을 빠듯하게 채우는 것을 느꼈다. 제 의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온기현의 모습이 류주호의 어딘가를 건드렸다.

류주호가 미친 듯이 허리를 쳐 올렸다.

퍽! 퍽! 퍽!

온기현의 힘없는 팔이 허공을 더듬었다. 미약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멈추지 않았다. 외려, 조금 허리를 들어 위에서부터 빻듯이 내리찍었다. 주름 하나 없이 커다란 성기를 삼킨 구멍이 위를 향하며, 둘의 몸이 더욱 깊숙이 맞물렸다.

한번 허리를 물렸다가 세차게 콱 들이받았다. 그 상태 그대로 류주호가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얕고 빠르게 움직이는 허릿짓이 다소 천박한 무엇을 연상케 했다.

거친 음모가 온기현의 음낭과 회음부에 마구 비벼졌다. 터럭 하나 없이 매끈한 아래는 방어할 것이 마땅히 없었다. 새하얀 피부에 벌건 자욱이 생기는 것이 가학심을 부추겼다.

눈에 핏발이 섰다. 이대로 몸을 섞은 채 들러붙고 싶을 정도로 기이한 만족감이 피어났다. 이런 감각이 과연 정상일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아래는 율동하듯 성기를 죄어 대는 내벽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시금 크게 움직였다. 서로의 분비액으로 인해 찌걱거리는 소리가 야살스럽게 울렸다. 떨어지는 살갗 사이로 점도 높은 무엇이 쩌억 하고 늘어지며 거미줄처럼 이어졌다.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할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어마어마한 쾌감이었다. 과연 이걸 쾌감이라도 불러도 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소 폭력적인 감각이 동반되었다.

그때 문득, 눈물 젖은 흐느낌을 내던 온기현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아으, 안, 잠까, 안 대애, 아……, 아아……!”

공중에서 덜렁이는 온기현의 성기의 선단이 피가 몰리는 듯 새빨개졌다. 류주호는 집요한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거세게 퍽! 하고 허리를 쳐 올렸을 때.

파앗, 하고 투명한 물이 터졌다. 온기현의 성기 끝에서 터진 그 액체는 구멍으로 성기를 처박을 때마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계속해서 터졌다.

류주호가 말한 대로,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액체로 인해 시트가 눅눅하게 젖어 갔다.

“하……!”

정수리 끝까지 절정이 몰렸다.

뿌득, 하고 이를 간 류주호가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몸을 부둥켜안고 거칠게 좆을 쑤셔 댔다.

그리고 곧, 짐승 같은 목울음을 내며 온기현의 내벽에 좆을 꽂아 넣고는 정액을 쏘아 댔다. 정액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엄청난 양을 물을 쏘듯 내벽으로 밀어 넣었다.

좀 더 내장 안쪽 깊숙이까지 정액이 스며들 수 있도록 온기현의 허리를 든 채였다. 남성의 본능이 발동한 야만적인 동작이었다.

언제까지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출이 멎었다. 아래를 물린 채로 몸을 내려 온기현의 얼굴을 살폈다.

초점이 풀린 멍한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아…….”

간신히 터진 쉰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도 않은 낮은 소리에도 류주호의 성기가 또다시 힘을 받았다. 온기현의 눈에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아직 멀었어.”

느릿한 동작으로 팔을 아래로 뻗은 류주호가 온기현의 발목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 * *

으으…….

눈을 깜빡깜빡하고 감았다가 떴다.

추라도 단 것처럼 천근만근으로 감각이 죄 무거웠다.

암막 커튼 새로 희미하게 비치는 햇빛이 침대 구석을 밝게 비췄다.

몽롱했던 정신이 느리게 돌아왔다.

여기는…….

아.

순간적으로 여기가 어디지, 하고 생각한 온기현이 손등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그제야 생각났다. 어제 여기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밤새도록 시달린 것을.

그리고 동시에, 제 온몸을 부둥켜안은 따끈한 체온을 인식했다.

“어?”

바위처럼 단단한 팔이 제 목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제 몸과 시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뽀송하기만 했다.

눈을 들어 눈앞에 있는 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미간을 좁힌 상태로 간간이 으음, 하는 괴로운 음성을 흘리고 있는 이는 류주호였다. 미간이 좁혀졌다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기를 반복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영상에서 봤던 악몽을 꾸는 강아지가 생각났다.

이 괴로운 신음 때문에 잠에서 깬 것이다.

신기하게 그의 자는 모습을 바라보던 온기현이 설핏 웃었다.

‘대체 무슨 악몽을 꾸는 거야……?’

그러게, 평소에 사람들한테 못되게 굴며 살지 말았어야지. 조상님이 꿈까지 찾아와서 너를 호되게 혼내 주나 보다.

그렇게 생각한 온기현의 입에서 푸슬푸슬 웃음이 샜다.

손을 들어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관자놀이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단정한 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너무 좋아.’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지.

신기했다. 어떻게 이렇게 벅차도록 좋을 수가 있지.

입가가 나른하게 풀렸다. 온몸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뜨끈한 그의 품속으로 몸을 포옥 들이밀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이 행복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허망한 염원은 잠시 뒤로 밀어 둔 채. 지금의 이 행복을 완연히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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