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 Banana in Mud Puddle (2) (6/20)

3부. Banana in Mud Puddle (2)

지잉―.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미약하게 진동을 주며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중이라 미처 못 알아차릴 뻔했지만, 그날 이후로 계속해서 약간 들떠 있는 신체는 미약하게 가해지는 조그만 자극에도 화들짝 튀었다. 부랴부랴 핸드폰을 꺼냈다.

1× 과대 나성기 [안녕하세요ㅎ 중간고사 치르느라 고생 많으심다.] 10:45

‘아.’

온기현은 눈썹을 긁적이며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날, 과방에서 과대를 만나기로 해 놓고서 결국 만나지 못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고, 류주호가 과방에서 온기현을 끌고 나가는 바람에, 거기다가 직격타를 날리고 떠나는 바람에, 결국 과방에서 과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말았다.

1× 과대 나성기 [후석이 형 말로는 몸이 안 좋아서 급하게 나가셨다던데~ ㅎ 이젠 좀 괜찮으세요? ㅎ] 10:46

[아…… 그때는 말없이 죄송했어요.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10:46

과대는 기현과 같은 3학년이었지만, 휴학 없이 쭉 학기를 연이어 다닌 터라 온기현보다 후배였다. 후석이 형이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것을 보니, 그와는 꽤 친한가 싶다.

과방에 남아 있던 감후석이 생판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저를 위해 핑계를 대 줬다는 게 조금 의아하고 머쓱하기는 했지만.

망설이다가 빠르게 답장을 보내자, ‘읽음’ 표시가 사라진 후에 조금 간격을 두고 답장이 왔다.

1× 과대 나성기 [그럼 다행이고요 ㅎ]

1× 과대 나성기 [원래 축준위 단톡방에 걍 초대하려고 했는데 ㅎ 전과하신 지 얼마 안 되셨고 ㅎ 아는 사람도 없을 것 같으셔서요. ㅎ 일부러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도 좀 나누고 ㅎ 중간고사 끝나면 있을 축제 준비도 말씀드리려고 했거든요. ㅎ]

1× 과대 나성기 [아시다시피 경영학과 학생이 좀 대가리 수가 많잖아요. ㅎ 하나하나 챙겨 드리기 힘들긴 한데 그래도 전과하고 어색하실 거 같아서 ㅎ 일부러 보자고 말씀드렸어요. ㅎ 경영학과 오시고 처음 하는 축제니까요. ㅎ 같이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ㅎ] 10:49

PC로 채팅을 하는지 빠른 속도로 돌아오는 말에 기현이 잠시 끙, 하고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축제 준비를 도울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하지만, 나름 챙겨 준다는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또 그날 그렇게 말없이 약속을 깬 게 영 맘에 걸리기도 하였다.

근데 이 사람은 ‘ㅎ’을 말끝마다 붙이는 게 버릇인가? 웃는 표시인데도 괜히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잘못한 게 있어서 지레 찔려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니면, 저가 모르는 사이에 대학교 내에서 유행하는 표시라도 되나?

꾸준히 연락하는 사람이 연채우밖에 없으니, 알 길이 없었다.

일단 어쩔까 하다가 답장을 하려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네.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알바 때문에 시간이 많이 안 날 것 같기는 하거든요. 그래도 도울 일 있으면 도울게요.] 10:50

1× 과대 나성기 [네. ^^ ㅎ 알바…… 많이들 하시져. ㅎ 암튼 담주부터 대동제인데 경영학과는 콘셉트 주점 하그든요. ㅎ 셤 끝나면 정신없을 거예요. ㅎ 일단 단톡방에 초대할게요. ㅎ] 10:51

웬만한 단과대는 주점을 하는 게 보통이라서 특별한 사항은 아니었다.

긍정적인 답변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가 하는 대로 따라서 말끝마다 웃는 표시를 했다.

[네 ㅎ 알겠습니다 ㅎ] 10:52

1× 과대 나성기 [ㅎ] 10:52

[ㅎ] 10:53

‘뭐, 유행어 같은 건가?’

요새 유행하는 언어들이 시시각각 바뀌는 탓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별별 말을 다 줄이기도 하고. 제가 아는 줄임말이라고는 ‘아아’, ‘따아’ 정도인 온기현으로서는 또 별게 다 유행이네, 하면서 머리를 긁적일 뿐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때, 핸드폰 상단에 팝업이 뜨며 새로운 메시지를 알렸다.

류주호 [어디야] 10:53

류주호의 이름을 보자 쿵, 하고 심장이 떨어졌다. 대뜸 위치를 묻는 그의 카톡에 온기현이 걸음을 멈췄다.

눈덩이를 꾹 눌렀다. 눈시울이 괜히 화끈거려 비벼도 보았다.

그날 그렇게 밤새도록 뒹굴고 거의 실신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길고 긴 밤을 끝낼 수 있었다. 다음 날은 다행히 주말이었던지라 아침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기현은 뽀송하게 닦인 제 몸과 어느새 깨끗한 천으로 갈린 시트를 손으로 짚으며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였다.

집에 가려고 해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다. 그 상태로 한 발자국도 제대로 내딛지 못하는 기현을 갓 태어난 망아지 같다며 류주호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누구 때문이냐고 버럭 성을 내자, 그는 어쩐지 눈을 빛내더니 다시금 몸을 기울여 왔다. 퉁퉁 부어오른 곳이 아리고 쓰려서 씩씩거리고 화도 내 봤지만 결국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미친놈처럼 더 달라붙었다.

[수업 가는 길] 10:53

류주호 [11시부터 회계 원리 수업이지] 10:53

[응] 10:54

류주호 [경영관 103호? 끝나고 연락해] 10:54

외마디 대답을 해 주자 류주호가 쉴 틈 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저를 두고 날름 먹고 튀었다던 ― 류주호의 말에 따르면 ― 기억이 어지간히 강렬했던 듯했다.

심지어는, 그 후 집으로 가겠다고 하자 빌라 앞까지 태워다 주면서 내리려고 하자 차 문을 안 열어 주었다. 뒷좌석에 편히 다리를 뻗고 앉으라고 하더니, 어느새 차일드 록을 걸어 놨던 것이다. 배려 따위가 아니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대뜸 손을 내밀었다.

‘시간표 줘 봐.’

‘뭐? 시간표는 왜?’

‘네가 또 어디로 튈 줄 알고.’

‘……어차피 같은 학교인데 내가 튈 데가 어딨냐. 그리구 너, 내 집 주소도 알잖아.’

‘그래서?’

‘…….’

꼭 중도 휴학까지도 생각했던 제 속을 읽힌 것처럼 지레 찔려서 입만 벙긋거렸다. 이러다가는 차 안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어, 그저 단념하고 시간표를 보여 줬다.

공강마저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 빡빡하게 짜인 시간표를 본 류주호가 설핏 짜증스러운 표정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시간표를 제 핸드폰으로 찍어 갔다.

그래서 이렇게 온기현의 일주일치 수업 시간과 장소를 꿰고 있을 수 있었다. 기현은 짧게 대답했다.

[왜? ㅎ] 10:55

이후 오는 답장이 없자 기현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중간고사가 한두 개씩 끝나 가서 조금씩 들뜬 분위기가 부푼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그때 허벅지께에서 다시금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류주호 [수업 끝나고 바로 나와. 밥 먹게] 10:56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주말부터 내내 든 의문이었다. 우리는 무슨 사이일까. 같은 조원? 그냥 아는 사이? 아니면 동창? 아무리 생각해도 친구는 아닌 것 같다.

지난날의 제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버릴 마음인 거 오기로 들이댄 관계에 제 발이 걸려 우당탕탕 넘어져 버린 느낌이랄까. 그간의 류주호의 언사를 봤을 때, 그저 이 관계를 단순한 흥미 본위로 보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남자와의 섹스는 역겨워서 싫다던 그가, 몸을 맞춰 보니 의외로 꽤 괜찮아서, 아니면 자신을 한껏 기만한 기현이 괘씸해서, 그래서 심술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랑 내가 밥을 왜 먹어? ㅎ] 10:59

강의실에 도착해서 가방을 내려놓고는, 수업 시작 전에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냥 섹스만 하면 되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가벼워지려는 마음이 자꾸만 무게를 갖는다. 한번 지우려 결심했던 마음이 계속해서 무거워지며 제 속에 똬리를 튼다. 이제까지는 손에 잡힐 일 없이 언제든 흘려보내야지 하고 마음먹었던 해묵은 감정이 단단히 자리 잡을 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나이 지긋한 교수가 웃으면서 강의실로 들어왔다. 온기현은 후다닥 핸드폰을 암전시키고 두꺼운 회계 원리 책을 꺼냈다.

연채우한테 상담을 해 볼까.

아니다, 그놈은 분명히 몸 먼저 직진하라고 말할 게 분명하다. 상사상애 따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허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매듭 없는 첫사랑에 매듭을 지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결심이 틀어진다. 그냥 이대로 빨리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더 늦어지기 전에, 완전히 풀어지기 전에.

덜컹.

그때, 바로 옆자리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자리에 앉았다. 시선이 절로 돌아간 그곳에는, 검은색 캡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커다란 체구의 남자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코끝까지 그림자가 져, 아래로 드러난 하관이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로 단정한 굵은 선을 내보이고 있었다.

눈에 익은 입매와 턱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에 저 입술이 제 온몸 구석구석을 빠짐없이 애무하고 침범했었다. 저 잘생긴 턱으로 흐르던 땀방울까지 여실히 기억한다.

무심하게 앞을 향하던 류주호의 얼굴이 문득 온기현이 앉은 곳을 향했다. 기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앞으로 휙 돌렸다. 인식하기 시작하니, 그의 알싸한 체향이 확 진해졌다. 담배는 이제 피우지 않는 건지, 담배 냄새가 빠진 익숙한 향은 청량하기만 했다.

‘얘가 갑자기 왜 여기에.’

교수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보다, 제 심장 소리가 더 컸다. 귀까지 먹먹하게 울릴 정도였다.

문득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핸드폰이 진동음을 울렸다. 책상을 자잘하게 두들기는 마찰음에 얼른 알림을 확인했다.

류주호 [무슨 생각을 하길래] 11:06

류주호 [그렇게 바짝 얼었어] 11:06

아니, 내가 언제 바짝 얼었다고…….

불퉁한 변명이 튀어나오기도 전에,

류주호 [새빨개서는] 11:07

류주호 [자꾸 생각나게] 11:08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가?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미쳤어.’

손바닥으로 귀 끝을 다급하게 감싸고 노려보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제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교수의 말을 잘 경청하는 올바른 학생처럼. 오히려 온기현이 딴짓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돌리고 책상 밑에서 핸드폰을 만졌다.

[그냥 밖에서 기]

기다리라고 쓰기도 전에 불쑥 오른손이 책상 위로 올려졌다. 편하게 올려진 굽어진 팔이 아무렇지도 않게 온기현의 영역을 침범했다. 팔꿈치가 온기현의 팔과 손가락 마디도 차이 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전신이 맥동하는 것처럼 크게 울리고, 발끝이 살짝 곱아들었다. 곁눈질하듯이 시선을 주니 류주호가 자세를 살짝 바꾸면서 몸을 좀 더 앞으로 기울였다. 그 바람에 얇은 니트를 걸친 그의 팔 근육 위에 핏줄이 두둑 불거졌다가 내려앉았다.

‘아, 진짜.’

순간, 그의 바위 같은 팔뚝을 붙잡고 엉엉 울며 매달렸던 제 모습이 머릿속에서 플래시쉬처럼 지나갔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이미 그 몸이 주는 쾌감을 알아 버린 감각은 자꾸만 저릿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왔다. 사타구니 안쪽이 간지럽고 아릿해서 두 다리를 꽉 맞붙였다. 눈두덩이가 뜨끈해지는 감각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음탕하고 난잡하게 뒹굴었던 강렬한 기억이 자꾸만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어쩐지 가빠 오는 호흡에 고개를 들었다가 문득 옆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대로 허리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캡 모자의 넓은 챙 아래로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 사이로, 그가 빤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언제부터 저런 눈빛으로.

꾹 다문 입매가 어쩐지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괴고 있는 손등은 연신 핏줄이 불퉁하게 튀어 올랐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찌르르하게 전율이 일며, 전신이 뭉근하게 늘어졌다.

매듭을 지으려던 마음이, 이전보다 훨씬, 그리고 점점 더 헐거워지는 것을 이제야 자각했다.

* * *

“아……. 음, 흐…….”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살이 맞붙는 소리와 절로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새는 비음과, 가쁜 숨소리 같은 것들이 좁은 실내를 꽉 채웠다.

조수석에 앉은 온기현의 뒷덜미를 감싼 뜨끈한 손바닥. 그 손바닥의 주인인, 류주호는 운전석에서 커다란 상체를 살짝 굽힌 상태였다. 온기현 또한 운전석 쪽으로 몸이 점점 기울어졌다.

콘솔 박스 위에 팔을 걸쳐 더욱 기울이려는 몸을 간신히 지탱한 채, 입술을 비비고 붙이고, 핥았다가 또다시 고개의 각도를 바꾸어 더욱 세게 감쳐물었다. 그리고 같은 동작을 더욱 거칠고 크게 행하고 있는 류주호는 다소 여유가 없어 보였다.

밥 먹으러 가자고 하고 차에 태울 때까지는 괜찮았었다. 끈끈한 긴장감은 여전했지만.

키스는 느닷없었다. 페인트 뿌린 학식 같은 거 먹고 다니면 없는 머리도 안 돌아가겠다는 둥 고학생에게 있어서 한없이 재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가까운 한적한 식당을 알고 있다며 온기현을 차에 태웠던 것이다.

얼마간 도로를 달리던 차 안에서, 온기현은 계속해서 혼란한 머릿속을 가다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밀폐된 공간에 둘만 있으니 더욱 죽을 맛이었다. 어쩐지 후끈거리는 속을 식히느라 한껏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누르기도 하고, 티셔츠 앞섶을 펄럭이기도 했다.

그리고 흘긋대다가 어쩌다 마주친 눈.

깊은 곳이 울리는 감각과 동시에, 류주호가 액셀을 밟아 대더니 어딘가 으슥한 곳으로 재빠르게 차를 몰았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입술을 붙여 왔다. 온기현도 마찬가지였다. 정수리 끝까지 오른 열이 그제야 빠르게 끓어 증기가 되듯, 그제야 해갈된 감각을 마구 발산시켰다.

정신없이 키스를 나눴다.

얼마나 깊게 맞물렸는지, 감았던 눈을 질끈 감자, 속눈썹이 류주호의 얼굴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간지러운 느낌이 뭐를 또 건드렸는지, 류주호가 문득 탄식을 터트렸다.

“아……. 너 너무…….”

가쁜 호흡을 앓는 온기현의 입꼬리까지 입술을 미끄러트려 쪼듯이 쪽, 쪽 몇 번 맞춘 후에 그대로 볼까지 쪼아 댔다. 그리고 그대로 온기현의 콧잔등까지 입술을 내려 점이 박힌 곳에 마구 입술을 짓눌렀다.

―빠앙!

“헉.”

그때 조금 떨어진 뒤편 도로로 지나가는 차의 소란스러운 경적에 깜짝 놀란 온기현이 류주호의 어깨를 퍽 밀었다. 어쩐지 그는 쉬이 물러났다.

“야, 나 수업 늦어.”

“어.”

외마디로 대답한 류주호의 낯이 설핏 서늘했다. 입술을 간질이듯 내뱉는 뜨거운 숨이 지척에 닿았다. 귓바퀴나 볼을 연신 만지작거리는 그의 눈빛이 어쩐지, 예전에 잠깐 스쳐 본 적 있는……. 까마득히, 깊이가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다. 무슨 속인지 알 수 없는.

조금 오싹했다.

그래서 입 안에서 맴돌던 말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사이인데?’

어차피 되돌아올 말은 뻔했다. 제가 저한테 고백했었던 것도 알고, 그리고 차이자마자 금방 포기했었던 것도 너무 잘 안다. 절대로 제 마음을 강요하지 않고, 편하게 몸을 맞출 수 있고, 상성도 좋고. 류주호 입장에서는 이만한 상대도 없는 것이었다.

저도 완전히 휩쓸려 헐떡였기에, 굳이 말을 더할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자꾸만 덜컥거렸다.

제 얼굴을 직시해 오며 얼굴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는 류주호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정면으로 몸을 돌리려 몸을 뒤척이며 그의 손을 조금 떨구어 냈다.

“빨리 가자.”

“어지간히 배고픈가 보네.”

류주호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평소의 그 같은 심술이 묻은 얼굴로 돌아왔다. 다시금 핸들을 돌려 으슥한 곳을 빠져나가던 중 힐끔거리던 온기현이 입을 열었다.

“나 그냥 학식 먹어도 되는데. 왔다 갔다 시간 낭비잖아.”

“나는 그거 못 먹으니까.”

“거기 이모님이 끓여 주는 콩나물 라면 진짜 진국인데.”

“아아.”

조금 입을 삐죽이며 황당해하자, 류주호는 뭔가 생각난 것처럼 피식했다.

“음식 차별하면 못쓴다, 너.”

“그래서 돼지고기, 소고기.”

“소고기. ……아.”

본능적으로 소고기를 선택한 온기현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예전에 그가 준 돈으로 소고기를 사 먹었던 적이 있어서 차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둘 다 엄연히 다른 음식인데 한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그래도 소고기가 더 맛있었다. 가격은 전혀 즐겁지 않았지만.

그리고.

당연히 저도 같이 밥을 먹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 류주호도 류주호였다. 이러다 화장실까지 따라오겠다.

‘진짜 어지간히 벼르고 있었나 보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한 발자국 내딛는 게 아니었는데. 또, 그러고 도망가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와 지나가 버린 일의 선택지를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말을 말자, 하고 속으로 되뇌며 도리질 쳤다. 창문에 옆머리를 콩 박고, 빠르게 흘러가는 풍경들에 시선을 줬다. 쿵쾅대는 심장 위에는 어김없이 손바닥이 올라가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다독이듯 꾹 눌렀다.

* * *

“…….”

온기현은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오늘따라 가게가 북적였음에도 약간 얼이 빠진 상태였다.

‘황성 한우집’은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웬만한 날에도 테이블이 만석인 날이 많았다. 중간고사 기간에 잠시 주춤했던 대학생 손님들이 시험 기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자 우르르 들이닥친 탓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테이블 하나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는 남자. 연달아 있는 강의 때문에 자신을 학교까지 차로 다시 데려다주고 어딘가 가 버렸던 류주호가, 다시 지금 이곳에 있었다.

온기현이 눈을 비볐다. 아까부터 헛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기현 학생, 뭐 해? 눈에 뭐 들어갔어?”

“아, 아뇨. 그냥 좀.”

테이블 두어 팀을 내보내고 나니 조금 숨 돌릴 틈이 났다. 나가는 손님들을 향해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나서는 “아이고, 바빠라.”라고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돌아오던 사장이 온기현에게 참견했다. 슬쩍 돌아보고 대충 둘러댔다. 문득 꽂히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다가, 이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류주호와 눈이 마주쳤다.

‘왜 또 여기까지 따라왔어……. 내가 진짜 어디 도망갈까 봐 저러나, 설마?’

어이가 없어져서 조그만 소리로 사장에게 말했다.

“저기 근데요, 사장님. 원래 사장님 영업 방침이, 혼자 와서 고기 1인분만 시키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요?”

보기에는 인심이 넉넉해 보이는 사장이었지만, 술 매상을 올려 주지 않을 것 같은 혼밥 손님들에게는 어김없이 야멸찼다. 온기현은 내심 그게 못마땅해서 주변에 자취생도 많은데 그냥 좀 팔면 안 되냐고 했더니, 그렇게 장사해서 네 인건비도 안 나온다는 사장의 말에 결국 더 이상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런데 류주호는, 당당하게 혼자 와서 1인분만 시켰다. 그것도 굽지도 않고, 아주 제사를 지내고 앉아 있다. 팔짱을 끼고,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넓게 앉아서. 이렇게 바쁜 시간에.

그런데 사장이 짜증을 낼 만도 하건만, 웬일인지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있었다.

“……제가 말하고 올게요.”

사장이 쫓아내지 않더라도 제가 가서 말하려고 했다. 저 때문에 여기 와서 죽치고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신경도 쓰이고 여간 민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테이블, 저 테이블 손님을 상대할 때마다 계속해서 뒤통수를 찌르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누가 보면 온기현이 사기라도 친 원수인 줄 알겠다.

사장에게 그렇게 속닥이고 막 몸을 돌리려는데, 사장이 퉁퉁한 손으로 온기현의 어깨를 턱 잡았다.

돌아보니 이제까지 없었을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입매를 꾹 다물고 온기현을 직시하고 있었다.

“사, 사장님?”

“기현 학생. 내가, 이 가게를 열 때부터, 항상 가슴속에 품어 왔던 신념이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떼돈 벌고 싶다?”

“아니, 아니, 아니.”

사장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손님은 왕이다.”

“…….”

사장이 그런 신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처음 듣는 온기현은 눈만 껌뻑이며 말을 잃었다.

“혼자서 오든, 1인분을 시키든, 손님은 손님이야, 기현 학생.”

“아, 네…….”

“그리고 특히 저분은, 염치가 많으신 분이야. 내가 이미 겪어 봐서 알지.”

“네? 류주, 아, 아니 저 손님을 아세요?”

기현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온기현이 알기로는 친구라고 했던 여자와 같이 왔던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한 번 온 것뿐인데 그걸 기억한다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싶었다.

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의미심장하게 싱긋 웃더니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그리고 뿌듯한 눈길을 류주호가 있는 테이블에 건네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뭐지, 진짜.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린 온기현이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찾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서 류주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은지 날 선 눈빛으로 온기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작게 속삭이듯 말을 걸자, 류주호가 대뜸 황당한 소리를 했다.

“저 새끼가 너한테 뭐라고 하길래 그렇게 속닥거려.”

“저 새끼가 누군데?”

“저 새끼.”

류주호가 고개를 까딱거린 방향에는 저 새끼, 아니 사장이 인심 좋은 얼굴을 만들며 이쪽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왜 저러지, 오늘따라. 사장은 이쪽이 뭐라고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제는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사장님?”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그냥……. 별말 안 했는데. 네가 염치가 많다더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류주호가 얼핏 미간을 찡그렸다.

도마 접시를 보자, 아예 건드리지 않은 것처럼 고깃덩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니, 조금 뒤적인 것 같았다. 다시 보니, 불판 위가 조금 그을려 있었고 딱딱하게 탄 덩어리 같은 게 불판 구석에 두어 점 굴러다니고 있었다.

고기가 아닌 것도 같았다. 그냥……, 새까만 고체 같았다. 연탄 덩어리인 듯도 하고.

계속해서 불판을 쳐다보자, 류주호가 뭔가 숨기려는 것처럼 괜히 상추를 집어다가 그 고체 덩어리를 위에 얹으며 “뭘 봐.”라고 지껄였다.

“근데 고기도 안 먹으면서 왜 이러고 있어.”

“돈은 제대로 낼 거야.”

“아니, 그것보다는.”

내가 신경 쓰인다니까. 온기현이 불만스러운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주름 없이 부풀어 오른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자 저를 올려다보던 류주호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기시감이 드는 눈빛이었다. 바로 아까, 차에서 봤던.

“여기요! 진이슬 두 병 더 주세요!”

“아, 네!”

그때 마침, 다른 테이블에서 부르는 소리에 온기현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던 때, 기현의 팔목을 류주호가 덥석 잡았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그가 무표정한 낯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왜?”

“너 그냥 여기 있.”

“응? 아, 나 바쁘니까 나중에! 너 안 먹을 거면 그냥 가!”

다급하게 류주호의 팔을 흔들어 뿌리치자 그 악력은 스르륵 힘없이 빠져나갔다.

또 한차례 들이닥친 손님들을 상대하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류주호가 있던 테이블로 시선을 던졌을 때, 그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말은 하고 가지.’

괜한 서운함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다가 이내 한숨을 삼켰다. 사실상 그런 의리는 둘 사이에 없는데.

온기현은 시계에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가 다 되었다. 손을 털고 앞치마를 벗어 사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장은 어쩐 일인지 아까보다 더 싱글벙글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짐을 챙겨 가게 밖으로 나왔다.

‘으.’

순간 휭― 하니 불어온 바람이 옷 틈으로 들어와 맨살을 쓸고 지나갔다. 쌀쌀한 것을 보니 완연한 가을바람이었다. 몸을 부르르 떨고서는 맨팔을 감싸듯이 슥슥 비볐다. 그러다 걸음을 옮기기 전, 가게 옆의 담벼락으로 언뜻 시선을 던졌다.

하얀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몽글거리며 공중으로 솟는 연기가 움직임을 멈추더니, 빨간 불씨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집에 가자.”

심상하게 튀어나온 말에 온기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허. 너, 계속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아연하게 묻는 말에 류주호가 장초를 든 손을 내리더니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담배 냄새가 나지 않기에 아예 끊었는가 싶었더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게. 내가 굳이 기다릴 이유는 없는데 원래라면. 왜 그랬을까.”

“뭐?”

뭔 소리야?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류주호가 중얼거리는 말은 마치 자신에게 반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쩐지 조금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에서 튀었다.

사실 웃음이 나온 것은, 저렇게까지 하면서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따라붙는 류주호가 어이없어서이기도 했고, 집에 갔나 생각했던 그의 얼굴을 보니 반갑다는 생각부터 한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어쩔 수 없이, 류주호에게는 한없이 마음이 헤프다, 자신은.

저벅.

그가 부쩍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화가 난 듯도, 멍해 보이는 듯도 한 얼굴이었다. 이런 얼굴조차 눈길을 빼앗았다. 싸가지없는 말조차, 류주호가 행하는 것은 그 어느 것조차 진심으로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미 빠져 버린 물웅덩이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힘을 빼기로 했다. 체념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기다리기로 했다. 오히려 익숙하게 몸이 맞붙다 보면, 으레 그 어떤 흔한 사랑들처럼 이것도 바래지겠지. 제 마음도 한풀 꺾이겠지.

거센 파도에 제 몸을 던진 작은 돌멩이처럼, 조금씩 조금씩 깎여 나가다가 그렇게 없어지겠지. 헤프디헤픈 사랑, 그 하나쯤 되겠지.

이번 학기까지만 류주호가 하자는 대로 어울려 주자. 그 전에 그가 이 관계에 질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상처가 되지는 않게, 편하게 힘을 빼기로 했다.

온기현이 류주호를 향해 말간 얼굴로 웃었다.

“그래. 가자, 같이.”

류주호가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차를 끌고 왔다. 고단한 몸이 조수석의 부드러운 시트에 닿자마자 바로 잠으로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식은땀을 흘리게 했던, 끊어질 것처럼 미칠 듯이 아슬아슬하던 성적인 긴장감이 거짓말인 것처럼.

어느새 류주호가 편해진 건지, 아니면 이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놓은 게 많아서인지. 부드럽게 몸을 흔드는 편안한 운전 때문인지도 몰랐다. 운전하는 내내 류주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평소보다 운전이 얌전하다는 것만 잠결에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온기현이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쯤, 그가 또 재수 없는 소리를 던지긴 했지만.

“개고생에서 취미를 바꿀 필요가 있어.”

“뭐?”

“너 알바 좀 줄여. 병든 망아지처럼 곯아떨어져서는.”

그가 심상하게 툭툭 던지는 말에 온기현이 반박했다.

“일을 안 하면 돈이 어디서 나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아.”

얘는 하늘에서,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돈이 저절로 손에 떨어졌던 애였구나. 온기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불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야말로 팽팽 놀면서. 제가 알기로 류주호가 요새 하는 일이라고는 제 뒤만 쫓아다니며 감시하는 일밖에 없었다.

온기현이 말을 하지 않자 그는 작게 혀를 차더니, 들어가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나 들어갈게. 조심해서 가. 데려다줘서 고마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팩을 어깨에 걸치고 차 문을 열려고 할 때,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싸더니 류주호가 고개를 깊게 숙이며 입술을 맞물려 왔다.

기습적인 행동에 온기현은 잠시 놀랐지만 이내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했다. 그럴수록 뒤통수를 누르는 손바닥의 힘이 더욱 거세졌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그의 것을 살살 빨아 주었다.

언제는 상상이나 했으랴. 지저분한 빌라촌 구석에서 류주호의 차 안에서 이렇게 농밀한 키스를 나누는 날이 올 줄이야. 누가 보면 끈적하게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되는 줄 알 것이다.

척척한 소리가 성감을 돋우니 기어이 허리가 저릿하게 울렸다. 이대로는 이 자리에서 일을 치를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래로 내려간 시선에,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류주호의 바지 앞섶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갑갑하게 바지 안쪽에서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그의 크기를 몸소 체험한 온기현은 민망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곧바로 다시 뜨거운 숨을 붙여 오려는 류주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며 고개를 잘게 흔들어 잘 가라는 다급한 인사와 함께 얼른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

문을 쾅 닫고 주륵 등을 미끄러트렸다. 눈을 아래로 내려 흘끔 제 아래를 봤다. 저도 만만치 않았다. 고작 몇 번의 키스로 벌써 이렇게 허물어졌다.

‘미치겠다.’

몸을 돌려 열기 어린 이마를 문에다 실없이 쿵쿵 박았다. 그리고 한참을 서 있었다.

* * *

중간고사가 끝났다.

두 과목을 남기고서는 아르바이트를 다시 나갔던 터라, 마지막 시험 전까지 체력이 꽤 달린 상태였다. 완전히 끝난 시험 기간에 온기현은 찌뿌드드한 몸을 쫙 펴며 조금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했다.

그동안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과대가 말한 것처럼 축준위 단톡방에 온기현을 초대한 탓이었다. 그들은 주로 3학년 이하로 이루어져 있었다. 온기현보다 아마 두어 살, 많게는 네 살 정도까지 차이 날 후배들이었다.

사실 아르바이트와 시험공부를 병행하느라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는 내용을 하나하나 전부 보지는 못했다. 공지에 따로 각자 할 일을 띄운다고 한 말에 나중에 공지만 확인해야지, 하고 있던 터였다.

대충 훑어본 바에 따르면, ‘주점’, ‘특별 콘셉트’, ‘술’, ‘요리’, ‘서빙’, ‘의상’, ‘국가’ 등등의 말이 오갔다. 어쨌든 종합해 보자면 콘셉트 주점을 열 계획인가 보네 하고 얼추 유추할 수 있었다. 과대가 말한 대로였다.

온기현의 일상은 이런 비일상적인 변수만 제외하면 또다시 그럭저럭 예전과 같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 일상 안에, 커다란 변수가 하나 더 껴 있는 게 사실 제일 컸지만.

류주호는 여전했다. 온기현이 이제 안 도망갈 테니까 그렇게까지 감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디 한 터라 고깃집까지 쫓아오는 일은 더는 없었지만, 지금은 연채우보다 류주호와의 연락이 훨씬 잦았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류주호 [어디야] 14:49

류주호 [강의 빼먹으면 안 되는 거 알지 이제] 14:49

류주호 [또 빠지면 F야] 14:49

저번에 계속 카톡으로 이상한 말을 보내더니, F를 받지 않게 조심하라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 댔다. 자기는 F가 너무 싫다나 뭐라나. F는 곧 죽음의 사死 자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4라는 숫자는 최악이라고 했다.

온기현도 F는 절대로 싫었지만, 미신의 ‘미’ 자도 믿지 않을 류주호가 그런 말까지 해 대니 온기현까지 되레 더욱 초조해져서 같이 듣는 교양 수업을 빼먹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 버렸다.

[알았어. 가고 있어 ㅎ]

한창 캠퍼스의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멈춰 서서 그렇게 답장을 쓰고는 고개를 숙여 엄지를 놀리다가 막 전송 버튼을 누르려 하던 때였다.

“어. 안녕.”

묵직한 저음의 다감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에 고개를 들자 저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키의 남자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기현이 소리 없이 아, 하고 입 모양을 했다. 감후석이었다.

“안녕.”

온기현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적당히 기른 스포츠머리에, 맨투맨 티와 청바지를 입고서는 어깨에 가방끈이 긴 가죽 가방을 걸치고 있었다. 조금 어색하게 웃는 인상조차 청량하고 시원해 보였다. 다정다감한 쾌남이라고 한다면 딱 이런 남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과방에서 마주쳤을 때는 경황이 없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무난하게 인기 정말 많겠다, 라는 단순한 감상이 얼핏 머리를 스쳤다.

“아, 맞다. 그, 과대한테서 들었는데.”

온기현의 말에 감후석은 미미한 웃음을 띤 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날 과대랑 과방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다른 일 때문에 약속을 못 지켰거든. 그런데 들어 보니 말을 좋게 전해 준 것 같아서. 고마웠어.”

온기현의 인사에 감후석이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 아, 하고 외마디를 흘렸다. 무의식적인 배려와 친절을 베풀고 막상 저는 베푸는 것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않는 사람인 듯했다. 어쩐지 그의 외견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인성이 비례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아, 별거 아닌데, 뭐. 그날 주호랑 뭐 곤란하게 급한 일이 있던 것 같더라고. 눈앞에서 보고서 모르겠다고 하기도 그렇잖아.”

주호?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제까지 류주호를 이름으로 친근하게 부르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서였다.

“아……. 주호, 류주호랑 친한가 봐.”

“으음. 나는 일단 동기라서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아, 주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감후석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눈가가 서글서글하게 접히며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이 사람도 류주호가 어떤 성격인지 모르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괜스레 웃음이 터졌다. 대번에 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풉. 아하하.”

“하하.”

실없이 웃음이 터진 둘의 분위기는 훈훈하기 그지없었다. 길 한가운데서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캠퍼스 청춘 드라마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바닥을 기는 음성이 그 분위기를 산산이 갈랐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

뒤쪽에서 들리는 말에 온기현이 뒤를 휙 돌아봤다. 그리고 웃음을 머금은 채로 고개를 든 감후석도 마찬가지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눈이 살짝 뜨이며 반가운 얼굴로 바뀌었다.

“주호야, 오랜만에 보네. 잘 지냈어?”

“어.”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온기현은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류주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때 과방에서 봤던 표정과 좀 비슷했다. 그리고 그때, 류주호는 온기현을 데리고 나가서는 다시는 보지 말자고 끝을 고했고, 온기현을 남겨 두고 가 버렸다.

하지만.

‘아.’

이번에는 좀 달랐다.

온기현의 몸이 흠칫, 떨렸다. 류주호가 뒤쪽에서 한 걸음 더 등 뒤로 다가오며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각도로 손끝을 뻗어 온기현의 허리께를 살며시 쓸어내린 탓이었다. 백팩에 가려 아마 누구도 모를 테지만, 여기는 사방으로 시야가 뚫린 캠퍼스 한가운데였다.

헉, 하고 놀란 가슴을 부풀리며 류주호에게 반항 섞인 시선을 보냈다. 미친 거 아니냐고.

그럼에도 류주호는 오히려 온기현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 내며 얼핏 싱긋 웃었다. 그가 다시금 쓸어내린 예민한 허리가 오싹해질 정도로 예쁜 웃음이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그대로 손가락을 입으로 왁 깨물고 싶었다.

“되게 사이좋네.”

그렇게 서늘하게 읊조린 류주호가 눈까지 접고 웃으며 감후석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너희 웃음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입에서 나온 말은 입가에 머금은 웃음과는 다르게 잔뜩 가시가 나 있었다.

‘얘가 또 왜 이래.’

하긴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하지만 오히려 놀란 것은 감후석의 평연한 반응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싹수가 노란 말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음으로 맞받아 주었다. 마치, 무엇이든 포용하는 성자의 웃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아, 그러네. 생각해 보니까. 정신없이 얘기 나누다 보니까 민폐인 줄도 몰랐어.”

‘와. 이 사람 인성 진짜 훌륭하다.’

초반에 좋지 않았던 첫인상이 싹 사라졌다. 이 사람 멘탈과 인성은 지구 내핵만큼 두껍다. 그렇게 남몰래 감탄하며 감후석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

“힉.”

“응?”

그때 불쑥 온기현이 입을 턱 막았다. 갑작스럽게 간질인 손끝 탓에 허리가 부산스럽게 튀었던 탓이다. 입에서는 새된 외마디가 절로 터졌다. 감후석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온기현을 쳐다봤다.

‘류주호, 이……!’

기현은 뒷걸음질하는 척하며 류주호의 발을 콱 밟아 버릴까 생각했다.

“그래? 그럼 앞으로 조심해.”

웃음기 머금은 말이 온기현의 머리 위에서 툭 날아갔다. 감후석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탄스러운 마음에 괜히 류주호가 괘씸하여 기현이 진짜로 뒷걸음질을 하려던 때,

“가자, 기현아.”

“……어?”

제 귀를 의심했다. 뒤돌아보자 류주호가 입가에 짙은 호선을 그린 채 저를 보고 있었다.

“우리 수업 가야지.”

“아, ……응.”

류주호가 그대로 감후석을 스쳐 지나갔다. “그럼, 이만.”이라는 무감한 말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어리벙벙한 표정을 한 채,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는 류주호의 옆에 바짝 따라붙어 짧은 보폭을 여러 번 내디뎠다. 류주호가 온기현의 백팩 가방끈을 꽉 붙잡고 걷는 탓에 절로 보폭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만류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몸속이 둥둥 북소리를 냈다.

류주호가 제 이름을 부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강의실로 향했다.

가던 도중에 화장실을 들르고 싶다고 하자 거기도 따라서 들어오려고 하는 류주호에게, 화장실 가는 것까지는 내버려 둘 수 없냐며 조금 짜증 어린 표정을 지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둘러대고 창문 사이로 몸을 욱여넣어 살인마로부터 도망치는 추격전도 아니고 말이다.

그랬더니 대뜸 류주호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자기도 어차피 가려고 했었다면서, 학교 화장실 네가 전세 냈냐고 우겨 대는 통에 볼일을 보는 것은 체념했다. 그냥 강의실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류주호의 볼일도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결국 화장실을 가려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었다. 완전 진상도 이런 진상이 없었다.

그래도 결국 그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는 걸 어쩌겠는가.

‘……맨날 야, 너, 라고만 불렀었는데.’

기현아, 라고 귓가에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것은 제 머리였다. 괜히 민망하고 부끄럽고 어색하여, 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잠시라도 떨어져서 머리를 식히고 싶었는데, 제가 질러 놓은 불길도 모르고, 류주호는 자꾸만 온기현 옆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했다.

답답함에 가슴을 턱턱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류주호는 아까부터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다. 옆모습으로 풍기는 느낌이 그러했다. 옆에 붙어 있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얼굴만 봐도 기분까지 알 수 있을 정도가 되다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빤히 보고 있자, 류주호가 대뜸 귓가로 입을 붙여 왔다.

“왜. 키스할까?”

“아!”

진짜.

뜨거운 숨이 닿는 귓바퀴를 감싸 쥐며 온기현이 화들짝 몸을 떼었다. 바라본 그는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저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것조차 멍해질 정도로 잘생겨서 눈길을 빼앗았다.

“……근데 너 뭐 기분 나쁜 일 있어?”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글쎄. 기분이 나쁜 건지, 아니면……. 잘 모르겠지만.”

류주호는 생전 처음 접하는 생소한 것을 마주한 것처럼, 그 자신조차 조금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느새 얼굴에는 웃음기가 완전히 걷어져 있었다.

류주호의 인상은 웃을 때는 한없이 빛나고 반짝이지만, 이렇게 무표정으로 있을 때는 어떨 때는 가끔 좀, 섬뜩하기도 했다. 온기현이 류주호의 팔뚝을 잡은 건 무의식에 의해서였다. 그가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단단한 팔을 꽉 잡은 채 쳐다보고 있자니, 그가 문득 얼굴에서 힘을 뺐다.

그러더니 작게 읊조렸다.

“답장은 꼭 해.”

온기현은 넋을 놓은 채 입을 꾹 다물고는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언제나 날 선 태도나 행동과는 천지 차이인 부드럽기만 한 목소리.

온기현은 멍하니 있다가 다시금 입술을 안으로 사리물었다. 입을 열면, 당장에라도 그를 끌고서 화장실 구석으로 들어가,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얼굴을 붙잡은 채 키스를 퍼부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번뜩 들자마자 머리에서 밀어 냈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하는 상상이라니 미친 짓이었다. 류주호처럼 자신도 점점 인간성을 상실한 괴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완전히 뭔가 풀어진 듯, 아니 스스로 억지로 떨쳐 낸 듯, 류주호는 평소와 같은 모양으로 돌아왔다.

수업이 시작하는 시간에 얼추 딱 맞춰서 강의실에 나란히 들어섰다. 온기현을 끌고 가다시피 하는 류주호였지만 앞장선 탓에, 그 뒤에 딱 붙을 수밖에 없는 채로 자리를 향해 걸었다.

강의실에 류주호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느 때처럼 내부에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시선들이 모였다. 어쩔 수 없이 잠시 말을 잃게 만드는 존재감이 탁월했다.

그에 온기현까지 덩달아 조금 주목을 나눠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갑게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려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 한숨을 쉬며 그가 이끄는 대로 강의실 맨 뒷자리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계속해서 시선을 허공으로 던지며 귓불과 이마와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괜히 의자를 덜컹거리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어쩐지, 류주호의 시선이 자꾸만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중간고사는 다들 잘 치르셨나요? 어라, 표정들을 보니 이거 큰일인데요? 하하.”

교수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중간고사의 악몽을 떨쳐 내고 축제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들떠 있던 학생들이, 만면에 웃음을 띤 교수와 다르게 얼굴에 빠르게 그늘을 드리웠다.

하지만 교수는 그에도 눈치도 없이 아랑곳하지 않고, 강단 앞에 서서 양팔을 쫙 벌리고 커다란 제스처를 취했다.

“1차 조 모임 발표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모두 열심히 해 주셨어요. 개중에는 특출나게 발표를 잘하시는 분도 있어서 깜짝 놀랐지 뭡니까.”

학생들의 흘끔대는 시선이 왠지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은 둘을 향해 박히는 듯했다.

“자, 이제 기말고사를 미리미리 준비해야겠지요? 강의 개요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기말고사도 조 모임 평가로 진행됩니다. 다만, 이번에는 2인 조를 이루도록 하지요. 슬라이드.”

교수가 조교를 향해 손짓하자, 슬라이드가 펼쳐졌다. 2차 팀플에 대한 설명 페이지였다.

“2차 조 모임은, 다름 아닌 영상 제작 및 업로드입니다. 분량은 약 3분 정도로, 두 명이 영상 클립을 촬영하고 제작, 편집, 그리고 업로드하는 과정까지를 모두 경험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미래에 좀 더 가까이 다가올 영상 콘텐츠의 생활화를 미리미리 준비해 두기 위한 예행연습이라고 할까요?”

학생들은 조용했다.

“주제는 ‘세상에서 가장 흔하디흔한 것’. 제작 방식은 자유입니다. 다만, 평가 방식을 잘 들어야겠지요.”

교수는 스크린 옆으로 가서 팔을 뻗어 설명을 이어 갔다. 너튜브에 업로드를 하고 비공개 공유 링크를 제시간 안에 제출한 후, 교수 쪽 익명 평가자 열댓 명으로부터 ‘좋아요’를 많이 받은 영상을 기준으로 평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외에 자극적인 영상 혹은 제삼자 촬영에 대한 개인 정보 침해 금지 등 주의 사항에 대한 설명을 구구절절 이어 갔다. 이게 무슨, 유튜버 꿈나무들을 기르기 위한 수업인가 싶기도 했다.

들을수록 생전 처음 듣는 팀플 방식에 학생들이 황당해하는 것이 확 느껴졌다. 점점 수군거리며 어수선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온기현도 뭐야, 라고 삐죽 생각하며 노트북을 열었다. 팬의 커다란 소음이 민망하도록 울려서 노트북을 괜히 손끝으로 두들겼다. 옆에 앉은 류주호는 노트 하나 펼치지도 않고 있었다.

그때.

‘……?!’

온기현의 몸이 화들짝 튀어 올랐다. 헐, 하는 소리가 잇새로 삐져나왔다. 제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제 허벅지 위에, 손이 올려져 있었다.

“무, ……!”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입을 벙긋거리며 황당한 표정으로 옆을 휙 돌아보았다. 삽시에 얼굴에 황당함이 짙어졌다. 류주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온기현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린 상태로.

온기현은 괜히 아무도 없는 제 뒤쪽을 휙 돌아보았다가, 모두가 앞을 보고 있는 강의실을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둘러봤다. 아무도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리 없이 소리치는 기현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류주호가, 그 커다란 손을 점점 은근하게 문질러 왔다. 이렇게 뻥 뚫린 장소에서, 무슨 미친 짓인가 싶었다.

계단식으로 된 넓은 강의실이지만, 책상 아래에서 누가 발바닥을 긁건, 뭐를 하건 보이는 위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와 남자가 허벅지를 쓰다듬는 장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점점 대담해지는 움직임이었다. 옷 위를 슬슬 쓰다듬는가 싶더니, 대뜸 그 손이 사타구니 사이까지 제 영역을 넓혀 왔다. 그게 불가피하게도 민감한 부분을 스쳤다. 기현이 흡, 하고 입술을 깨물며 목소리를 참았다.

마침 그때, 류주호가 고개를 온기현 쪽으로 낮게 숙여 오며 속삭였다.

“노트북 소음이 커서 다행이다, 그치?”

위잉― 하는 팬 소리에 묻힐 정도로 작은 속삭임이었다.

‘와……. 이, 미친…….’

온기현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벙긋거렸다. 고물 노트북이 이런 때 도움이 된다는 말투에 정수리에서 김이 났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류주호를 옆으로 노려보며, 그 손을 턱 쳐 냈다. 힘이 부족한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서 이번에는 꼬집기까지 했다. 류주호가 그제야 아야, 하고 낮게 읊조리더니 피식 웃었다. 그것마저 장난스럽게 느껴졌다.

다행히도 류주호의 장난은 거기서 끝났다. 순전히 놀려 먹고 싶어서 치대는 것 같았다.

그런 류주호의 변덕과 같은 터치 하나에도 부유하는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저도 저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류주호 때문에 화났다가 두근거렸다가 빨개졌다가 아주 난리였다.

의자를 드륵, 하고 끌어 조금 떨어트렸지만, 류주호는 다행히 쫓아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강의가 끝나고 교수가 나가자, 너나 할 것 없이 팀플 조원을 정하는 데에 시끄러웠다.

대부분은 친구와 함께 조를 짜거나, 1차 팀플에서 같은 조원이었던 이들과 팀을 꾸리고 있었다.

“아, 저기. 안녕하세요. 혹시, 팀 짜셨어요?”

문득 높은 음의 발랄한 미성이 들려왔다. 약간 조심스럽게 저기, 하고 부른 목소리에 온기현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 여학생이, 볼을 발갛게 붉힌 채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류주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팀 안 짜셨으면 저랑 해요! 저 예전에 유튜브 영상 편집 일 잠깐 했던 적 있거든요?”

류주호가 말없이 여자애를 쳐다보자, 그녀는 긴 머리 한쪽을 귀 뒤로 살짝 넘기면서 쑥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찬가지로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던 온기현이,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강의실을 둘러보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제 조원을 찾아 이미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개중에 멀뚱멀뚱 강의실을 두리번거리는 학생도 있었다.

온기현은 노트북을 덮어 가방에 욱여넣으며 몸을 슬그머니 일으켰다.

류주호와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팀별 과제야, 누구랑 하든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무임승차를 시도하는 조원으로부터 뒤통수 맞는 일도 충분히 경험했던 바이니, 굳이 류주호와 묶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네? 네?”

여자애가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면서 “제 전번은요.” 하고 핸드폰을 류주호 앞에 막 들이밀려던 때.

턱, 하고 온기현의 팔이 잡혔다. 커다란 손아귀가 마른 팔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온기현을 올려다보며 여상한 말투로 류주호가 말했다.

“난 너랑 할 건데.”

“뭐?”

“네?”

온기현과 여학생이 동시에 되물었다.

여학생에게 시선을 일절 주지 않았던 류주호가, 온기현의 되물음에는 입을 열었다.

“나랑 안 하면 쓰레기들이랑 해야 하잖아, 너.”

“아. 뭔 소리야. 조용히 해.”

순식간에 좌중을 모두 쓰레기 취급한 류주호에게로 언뜻 시선이 모였다. 정색하며 조용히 하라고 해도, 이미 터져 나간 소리는 큰 소리도 아니었지만 작은 소리도 아니었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다시금 조원과 회의를 시작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학생은 아니었다. 모두를 쓰레기 취급하는 발언을 전부 들은 것이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린 여학생의 손이 핸드폰을 든 채 공중에 멈춰 있었다.

그녀가 아예 없는 것처럼 투명 인간 취급하는 류주호의 태도 때문에도 더욱 그녀는 뿔이 난 듯했다. 물건 취급도 하지 않는 류주호를 보고는 “미친놈 아냐?”라고 톡 쏘아붙이고는 몸을 홱 돌려 아래로 내려갔다.

문제는 그 여학생 뒤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머뭇거리던 학생들도 알게 모르게 차례차례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온기현이 문득 한숨을 삼켰다.

자신의 팔을 잡은 커다랗고 뜨거운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류주호의 차 조수석에 타고 그의 오피스텔에 함께 도착했다.

“실례합니다.”

딴에 몇 번이나 들어와 본 곳이라고, 벌써 익숙해지기 시작한 장소라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못내 희한했다. 그래도 입으로 의식적으로 남의 집에 발을 들일 때 사용하는 인사말을 중얼거렸다. 옆에서 구두를 벗으며 그 말을 듣는 류주호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무슨 실례를 벌써부터 해. 급해?”

“……진짜 너, 좀. 그런 말 좀.”

류주호가 은근하게 속닥이는 말에 좌식 소파 옆에 백팩을 내려놓으며 다시금 정색했다. 그랬더니, 부러 심각하게 화난 얼굴을 짓는 온기현이 웃긴지, “너 얼굴 터질 것 같다.”라고 장난스레 말하며 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온기현이 푹신한 쿠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근데 유튜브 영상 제작이라니. 팀플 과제도 되게 이상한 걸 주네.”

“딱 보니까 남들이 안 할 법한, 특이한 과제를 주는 게 크리에이티브나 혁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렇구나.

온기현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게 제일 걱정인데.”

자신감 넘치는 류주호의 말에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류주호가 하는 말이 얼추 사실인 데다가 일전의 일이 있으니 딱히 반박할 수도 없어서 더 모난 말투가 튀어나왔다.

문득 발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감각이 뜨끈했다. 바닥을 탁탁 손바닥으로 치다가 살포시 누르자 손바닥도 금세 따끈따끈해졌다.

“난방을 벌써 틀었네. 아직 초가을인데.”

“누구씨 때문에.”

“응?”

온기현이 고개를 돌렸다. 류주호가 관자놀이를 괸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다시 쿵, 하고 떨어지는 심장에 눈만 깜빡거렸다. 그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이 기분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맨날 커다란 반팔 티만 입고 다니잖아. 춥지도 않아? 이제 가을인데.”

“아, 이거.”

온기현은 제 옷자락을 집었다 내려놓으며 꼼지락댔다.

“가을 중반까지는 그래도 더운 날도 있어. 겨울에는 이 위에다가 점퍼만 입으면 되니까, 뭐.”

“……그걸 겨울에도 입는다고?”

“응. 왜?”

“그거랑 똑같은 티 몇 벌 있어? 너.”

“이상한 거 묻지 말고!”

이제는 하다 하다 옷가지 개수까지 말해 줘야 하나 싶었다.

사실 좀 춥기는 했지만. 바깥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일하다 보면 금세 더워지기에 상관없었다. 그리고 이 티셔츠도, 금세 근육도 붙고 키도 크겠지 하는 생각에서 큰 사이즈로 같은 것을 여러 벌 사다 보니 입고 다니게 되었을 뿐이지, 딱히 오버사이즈 핏이 좋아서 입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흔하디흔한 게 대체 뭘까?”

이 화제로 말을 이어 가기를 체념한 온기현이 가방에서 제 노트북을 꺼내며 그렇게 물었다.

“이유야 붙이기 나름이지. 세상에서 가장 흔한 것이라. 굳이 따지자면, 글쎄. 물, 일까?”

“뭐? 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런 때까지……!”

“왜. 너야말로 지금 무슨 생각 해.”

씨익 웃는 류주호의 입꼬리가 시선을 앗았다. 온기현도 순간 아차, 했다. 저를 보고 물이 많고 헤프다며 입을 놀리던 게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었기에 그가 당연히 농담하는 줄 알았던 터다.

계속 뜨끈해지는 귓바퀴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눈을 정면으로 돌렸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데? 그냥, 물 부족 국가에서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아……!”

순간 목덜미가 당겨졌다. 목덜미를 삽시에 덮쳐 온 커다란 손이 잔뜩 달아오른 바닥처럼 뜨끈했다. 목을 덮어 이끄는 힘에, 기현의 몸이 무게 중심을 잃고 기우뚱했다. 코가 닿을 것처럼 얼굴이 가까워졌다. 서로가 내뱉는 얕은 숨도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야한 생각만 하고.”

……누구 때문인데.

소리 없는 항의가 입가에 머물렀다. 류주호의 갈색 눈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잔뜩 가라앉았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도 눈을 더욱 깊이 마주치지 못해 초조한 것처럼, 온기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그의 시선이 끊임없이 좇았다.

“…….”

입술이 닿을락 말락 했다. 그의 손이 목덜미에서 미끄러지듯 볼을 쓸었다. 그리고 살갗 위를 살금살금 유영하던 손이 어느새 기현의 콧등 위로 올라왔다.

콕 점이 박혀 있는 부근을 쓸었다. 까만 점이 뭐라도 되는 양, 콕콕 찍어 댔다.

“……너는 씨발, 점까지 귀엽고 야해서는. ……왜 점까지.”

문득 그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손이 떼어짐과 동시에 입술이 덮어 왔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아랫입술과 윗입술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뇌수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날 정도로 입술을 야하게 빨아 당긴 류주호의 입술이 춥, 소리가 나도록 점막에 입술을 비볐다가 떼어 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문득 떼어진 입술 사이로 흥분 섞인 고요한 숨이 터졌다. 빤히 바라보는 눈길이 숨 막혔다. 까맣게 내려앉은 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음산하게 일렁였다. 은근한 눈길이 설레었다.

“……기현아.”

“……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되물으니, 분명한 언어가 들려왔다.

“온기현.”

“…….”

어쩐지 참을 수가 없었다.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목구멍 사이로 가늘게 새는 들뜬 숨을 연신 내뱉었다.

아랫배에서부터 끓어올라 목구멍까지 치닫는 이 의문과 초조함을 해소하고 싶었다.

침잠해 있던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느낌. 이미 체념했다 싶었던 마음이 해방해 달라고 문을 쾅쾅 두드리는 느낌.

그리고 벌컥 열어젖혀서 속을 전부 내보이고 싶은 갈망.

“……주호야.”

그래서 입을 열었다.

“너, 나랑…….”

사귈래?

아 씨. 아니, 이건 좀 너무 앞서갔다.

기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전처럼 들이댔다가, 또다시 괜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몰랐다.

그래서, 이전에 앞서 궁금했던 질문을 꺼내었다.

바위 같은 가슴팍을 살짝 밀었다. 몸이 조금 떨어지자 후끈한 공기가 그제야 인식됐다.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었다. 온기현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너는 나랑 왜 해?”

키스나, 섹스나, 내 이름을 부르는 거나, 뭐 그런 것들.

우리는 대체 뭐야? 라는 말이 입 안에 맴돌다가 결국 나온 말이 이거였다. 허우적대지 않고 힘을 빼기로 결심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류주호가 행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자꾸만 저에게 기대를 심어 주었다. 조금만 더 허우적대 보라고, 아직 힘을 빼기에는 늦지 않은 것 아니냐고.

류주호는 그 말에 조금 생각에 잠긴 것처럼 말이 잠시 없었다.

침묵이 길었다. 그 와중에 뭔가 생각난 듯 불유쾌한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의아한 것처럼 눈을 아래로 내리깔기도 했다. 온기현은 내도록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류주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왜냐니. 네가 눈앞에서 살랑대니까 그러지.”

“내가 언제. 아니, 그게 아니라…….”

“왜 물어.”

“왜 묻냐니, 당연히.”

“벌써 55번째를 찾고 싶어?”

말을 자르며 그렇게 묻는 그의 말투는 다소 서늘했다. 얘가 왜 갑자기 이러지, 하는 황망함도 잠시,

“……난 마음에 드는데.”

“……어?”

순간 온기현의 심장이 바닥까지 두둑 떨어졌다. 마음에 든다니…….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쳐들었다.

“너 처음에는 좀 골 때린다 싶었는데. ……몸의 상성도 잘 맞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 나한테 쓸데없는 기대도 안 하고 그 어떤 낭만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 그래서 난 우리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

‘아아.’

온기현의 입이 벙긋 벌어졌다. 류주호는 이런 놈이었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제가 쾌락에 약한 몸인 줄 꿈에도 몰랐다. 그것이 더 온기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제가 고백했던 것도 알고, 그리고 차이자마자 금방 포기했던 것도 너무 잘 안다. 절대로 제 마음을 강요하지 않고, 편하게 몸을 맞출 수 있고, 상성도 좋고.

류주호 입장에서는 이만한 상대도 없는 것이었다. 저번처럼 치정 싸움으로 번져 괜히 칼을 맞을 뻔한 좋지 않은 기억도 남아 있는 판에, 눈앞에 있는 온기현 같은 상대가 딱 적당한 것이다.

“단, 네가 내 합의 없이 도망만 안 가면.”

문득 류주호가 특유의 예쁜 심술이 묻은 웃음을 지었다. 온기현은 다소 멍했다. 저기에 저번에도 넘어갔었고.

“그렇게 심각하게 따질 것 없어.”

“그래. 그렇구나…….”

하.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이래저래 치대는 온갖 행동들은, 변덕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온기현은 속으로 허탈한 웃음을 삼켰다.

어렴풋이 긴가민가하던 것들이 다시금 물웅덩이 속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거의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애초에 이러려고 했었지.

이 집 안에서,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종이에 쓰려다가 만 고백을 다시금 안으로 삼켰다. 사귀자고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꼴사납게 쪽팔린 모습만 보이고 끝날 뻔했다.

온기현은 이내 눈을 감으며 류주호의 어딘지 초조하게 부딪쳐 오는 호흡을 다시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속으로 아무도 모르게, 삼켜 버린 고백을 대신할, 이번 학기 마지막을 향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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