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부. Banana in Mud Puddle (1) (5/20)

3부. Banana in Mud Puddle (1)

익명

09/15 23:30

제목 : 같은 남자끼리 얼굴 좀 붉히지 마라.

내용 :

아무리 피지컬 좋고 얼굴 잘생겼어도 그렇지

남자가 남자한테 막 두근거리는 거 티 내고;

친해지고 싶어서 드릉드릉하는 거 ㄹㅇ 보기에 역겹지 않음?

―――――――――――――――――――――――――――――――――――――――――――――――――――――――――――――――――――――――――――――

익명

└ 안심하세요. 요즘 세상 사랑에 성별은 관계없습니다.

익명(글쓴이)

└ 감사합니다. 제가 비정상인가 싶었습니다. 덕분에 용기를 얻습니다.

익명

└ 독해력 무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

└ 미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익명

└ 삑 정상입니다. 우리 과에 성격 존나 더럽기로 유명한 존잘 있는데 걔 와꾸만 보고 추종하는 것들 중에 남자 지분 ㅆㅅㅌㅊ임.

익명

└ 시발…… 인간은 성격이 전부가 아니란다

익명

└ 그분 말하는 거 맞지? 나 얼마 전에 경영학과 건물에서 그분 봤는데 존나 살벌하더라…… 인사도 다 씹던데 ㅋ 근데 그분이 걸어오던 방향 쪽으로 가 보니까 어떤 검은 반팔 티 입은 남자가 멍하니 서서 개발린 얼굴하고 있었음……; 울기 직전이더라. 싸웠나?

익명

└ 볼드모트야? 그분은 무슨, 시발 ㅋㅋ

익명

└ ㄹㅈㅎ가 누구랑 싸울 위인이냐? 그 반팔 티도 주제 파악 못 하고 금붕어 똥처럼 ㄹㅈㅎ 뒤꽁무니 쫓아다니다가 개쪽당했겠지 ㅋ

익명

└ 자기소개 중 ㅅㄱ

익명

└ 학생……^^~고민이,,,많은가 보군요~,,,상담 함……~해 드릴까요~?

익명

└ 요새 이런 글마다 이 형님 왜 이렇게 자주 보이냐? 설마; 장난이지?

익명

└ 백 명한테 찝쩝대다가 그중에 한 명만 걸려도 개이득 아님?

익명

└ 찝쩝X 찝쩍O ㅂㅅ아

익명

└ 호모들 작작 좀 해라 시발ㅡㅡ 셤 공부 안 하냐??

익명

└ 니 엉덩이에 아무도 관심 없으니까 풀발 ㄴㄴ하고

익명

└ 게2추

* * *

― 7년 전 ―

[강산 고등학교 입학식]

산들바람에 하얀색 현수막이 공중에서 나풀거렸다. 바람에 따라 현수막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위에 적혀 있는 커다란 글자를 새까만 눈을 들어 멍하니 올려다봤다.

고개를 뒤로 젖힌 탓에 눈썹까지 덮은 머리칼이 갈라져 동그랗고 새하얀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교문으로 들어서는 저마다의 무리는 하하 호호 기분 좋은 웃음을 울렸다. 그것은 모두 그들의 아이를 가운데에 둔 부모들에게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성장의 기대를 담아 벙벙한 사이즈로 교복을 맞춰 입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남자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짜증스레 바라보면서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그들의 얼굴에는 앞으로의 학교생활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온기현은 눈을 껌뻑거리며 잠시 서 있다가 비로소 걸음을 옮겼다. 뒤로 멘 백팩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지만, 괜히 두 손으로 가방끈을 무겁게 고쳐 메면서. 양옆에서 웃어 주는 이도, 이끌어 주는 이도 아무도 없었기에 표정은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대강당으로 줄지어 이어지는 행렬은 마치 개미 떼를 연상시켰다. 검은 머리의 인영들을 보며, 먹이를 가져다 바치려 땅바닥을 열심히 구르는 개미라고 생각하니 작게 웃음이 터졌다. 하지만 혼자 웃는 것도 머쓱하고 민망하기도 해, 그 작은 웃음은 말간 얼굴에서 금세 사그라졌다.

너무 큰 사이즈를 샀는지 바닥에 질질 끌릴 것 같은 바짓단은 두세 번은 접어서 발목에 고정했지만, 허리춤이 자꾸만 아래로 빠져서 걸으면서 계속해서 치켜올렸다.

원단과 맵시가 좋은 브랜드에서 몇십만 원짜리의 교복을 맞추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온기현은 그냥 동네의 작은 교복 가게에서 맞췄다. 척 보기에도 얇고 잘 찢어질 것 같은 싸구려 원단을 사용한 게 눈에 보였지만, 어차피 입을 수 있기만 하면 상관없었다.

교복 가게 할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잘 어울린다, 1학년은 원래 크게 입어야 한다, 앞으로 몇십 센티나 더 클지 모른다며 유난스레 장단을 쳐 주었기에 그럭저럭 기분은 좋았다.

커다란 통을 허우적거리며 걸음을 한 대강당 안은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가 천장까지 가득 울렸다.

신입생 입학식을 앞두고, 벌써부터 옆자리에 나란히 앉은 학우가 될 이와 인사를 나누는 사교성 좋은 학생도 있었으며, 넓디넓은 대강당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두리번거리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입학식은 그런 들뜬 분위기에서 젊은 남교사의 “아아, 마이크 테스트.”와 함께 시작됐다. 사회를 보는 교사는 입학을 환영한다고 목청 높여 소리쳤고 우렁찬 박수가 이어졌다.

그리고 연이어 교장 선생님의 입학 허가 선언으로 포문을 열었다.

남교사가 열렬히 손뼉을 치자, 투실한 몸을 한 백발 머리의 교장이 강단을 향하는 계단에 천천히 올라섰다. 오른쪽에 앉은 남학생이 갑자기 K×C 치킨이 먹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동시에 왼쪽에 앉은 남학생은 농구가 하고 싶어지네, 라고 중얼거렸다.

그 정도로 교장은 어딘가 인자함과 연륜이 동시에 느껴지는 외모였다. 그는 제 하얀 콧수염을 연신 쓰다듬으며 입학 허가 선언과 환영사를 읊었다. 자부심, 긍지, 성장, 희망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을 여럿 섞어 가며 졸기 직전인 아이들에게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북돋아 주었다.

교장의 장황한 말이 이어지는 동안, 온기현은 속으로 오늘 저녁 반찬은 달걀말이, 달걀말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마트에서 특가 세일이 있는 엄청난 날이다. 채소뿐만이 아니라 무려 육류와 달걀까지, 50% 세일을 한다. 입학식을 마치자마자 튀어 나가야 했다. 타임 세일 시작은 6시부터였다.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얼른 키가 자랄 것이다. 고기는 비싸니, 대신 한 번 구매해서 여러 번 나눠 먹을 수 있고 요리 방법도 쉽고 다양한 달걀 한 판을 사는 게 제일 적당했다.

―다음으로는, 신입생 대표 선서가 있겠습니다.

그때, 사회자인 남교사가 다음 순서를 힘 있게 알렸다.

뚜벅. 뚜벅. 뚜벅.

묵직하고 정갈한 걸음이 강당 바닥을 울렸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기현은 멍하니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빈 단상 위로 커다란 인영이 올라왔다.

달걀말이, 달걀말이, 달걀, …….

기현은 속으로 읊던 달걀말이를 끊어 낼 수밖에 없었다.

시선이 못 박힌 듯 앞에 고정됐다.

감탄스러움에 눈을 크게 떴다.

입도 벌어졌다.

척 보기에도 바다 건너편의 피가 섞인 듯한 이국적인 외모였다. 이목구비는 동양인의 그것이었으나, 어린 나이에도 얼굴에 진 깊은 음영이 상당했다. 대강당 위로 높게 뚫린 창으로부터 들어찬 빛을 받아 연갈색으로 빛나는 머리칼과, 마찬가지로 옅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빛과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저렇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봐.’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안녕하십니까. 강산 고등학교 신입생 대표, 류주호입니다.

어쩐지 귀가 찌릿해져서 저도 모르게 제 손을 귓바퀴 위로 올렸다가 화끈거리는 감각에 깜짝 놀라서 떼어 냈다. 제 손바닥이 뜨거운 건지, 귀가 뜨거운 건지 몰랐다.

대강당 안이 순식간에 고요로 가득 찼다. 모두의 이목이 강당 앞으로 집중됐다. 그때, 예쁘게 눈웃음 지은 류주호라는 학생이 입을 열었다. 스피커에서 터진 나긋하면서도 힘 있는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노력하는 사람은.

홀려 버릴 것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재능있는 사람을 이기지 못합니다.

응?

뭐야?

저거 반대 아냐? 잘못 말한 거 아니야? 뒤에서 어떤 남자애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군데군데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하지만 남자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앞에 놓인 선서문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재능이 없는데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즐기기만 하는 사람은, 꼴사납기 짝이 없습니다. 그것도 무척이요.

일동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허황한 꿈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학부모도, 학생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교장은 뭔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던 눈치로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 내며 단상으로부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쓸데없이 아등바등하지 마세요. 인생만 피곤해지니까요. 3년 동안 함께 효율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헐, 미쳤나 봐, 존나 웃긴다, 라며 키들거리는 학생들 얼굴에서 그 나이대의 장난기 가득한 왁자함이 피어났다. 반대로, 학부모들이 모여 있는 뒷자리는 혀를 차는 소리와 다소 분개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온기현은, 입을 헤벌렸다.

‘와, 진짜 싸가지없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대로 단상에서 유유히 내려와 제자리를 찾아가 착석하는 그의 모습을 눈으로 좇아 멀거니 바라보았다.

쓸데없이 아등바등하지 마세요.

인생만 피곤해지니까요.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쭉 빠졌다. 어쩐지 편안하게 늘어지는 신체에 선연한 감각이 되돌아오며, 저도 모르는 새에 빳빳하게 굳어 있던 발가락에서도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아, 내가 이렇게 긴장했었나.’ 하고 새삼 생각했다.

눈은 여전히 느긋하게 앉아 여유로운 미소를 걸친 신입생 대표 남자애, 류주호에게 박힌 채였다. 머리 위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칼에 어쩐지 눈이 부셔서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여유로운 미소가 은은하게 입가에 걸쳐진 그 남자애는, 어쩐지 눈은 웃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외모에 가려져 아마 누구도 한눈에 알아챌 수는 없었겠지만, 저 아이는 이 자리가 재미없어서 미치겠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저도 그랬다. 이 자리가 너무 따분하고 재미없었다.

쿵. 쿵. 쿵.

요동치는 심장이 발길질하듯 온몸을 두드렸다. 온기현은 그렇게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오늘 저녁은 고기 먹어야지. 달걀말이는 다음에.’라고 생각하며 입학식이 끝날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그 뒤로 복도에서 몇 번씩 류주호를 마주쳤다.

사실 일방적으로 마주친 것이었다. 온기현은 류주호를 봤고, 류주호는 기현을 보지 못했다. 아니, 류주호가 주변에 쓸데없는 관심을 안 준다는 게 맞았다.

온기현은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빼앗기는 자신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류주호는 홀로 유유자적하게, 혹은 소란스러운 여자애와 함께, 혹은 일방적인 호감을 보이는 학우들을 뒤에 달고, 그는 그저 저 혼자 세상을 사는 것처럼 행동했다.

쿵, 쿵 제멋대로 날뛰는 가슴에 처음에는 왜 이럴까, 하고 긴가민가했다. 그다음엔 공포심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리면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귀신 들린 인형이 나오는 영화를 봤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자각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의문이었다.

자꾸만 쿵쾅거리는 가슴에, 류주호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도 그런 건가 싶어서 주위에 눈을 돌렸다. 처음 눈이 간 아이는 같은 반에서 항상 창가에 앉아서 얌전히 공부만 하는 여자아이였다. 새까만 머리칼 위에 창에서 비쳐 들어오는 햇빛이 내려앉아 반짝거렸다. 단상 위에 올라선 류주호를 봤을 때처럼.

빤히 쳐다보던 기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여자애가 고개를 돌렸고 그에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를 며칠, 온기현은 그 여자애에게 고백했고 둘은 사귀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24시간 만에 헤어졌다.

등교하자마자 사귀기 시작해서, 수업 시간 내내 수업만 듣다가, 야간 자율 학습 시간까지도 각자 공부만 했고 하교 후에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여자애가 덤덤하게 공부에 집중하고 싶으니 헤어지자고 하길래 온기현도 그러자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연채우가 듣고서는 파안대소했다. 역대급 단기간 커플이라고 했다.

온기현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그저 그렇구나, 싶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게 아닌가? 싶었다. 류주호를 볼 때의 느낌과 뭔가 달랐다.

그러다, 자각의 기회는 느닷없이 찾아왔다.

강산 고등학교에는 학생용으로 갖춰진 조그만 도서관이 있었고, 그곳에서 봉사 활동으로 사서를 하던 온기현은 어느 날, 도서관 안의 독서용 테이블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류주호와 마주쳤다.

아니, 이번에도 마주쳤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그는 독서에 여념이 없었고, 온기현이 일방적으로 그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류주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책장을 사락사락 간질이는 소리를 내며 넘기고 있었다. 온기현은 늘어선 책장 끄트머리에 멍하니 서서 그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순간,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피식 터지는 비웃음에 그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픽 올라갔다. 그러다 조용히 저만 들리도록 읊조렸다.

“존나 재미없네.”

무심코 시선이 향한 책등에는 ‘세상이 등진 그 남자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이라고 쓰여 있었다. 불우한 가정환경과 선천적 신체장애를 극복한 어떤 남자가 제 삶을 덤덤히 받아들인 후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훈훈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였다. 당시에 저자의 이야기가 기사에도 나고, 꽤 화제가 된 유명한 책이었기에 온기현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싸가지도 없는데, 인성까지 바닥이구나.

온기현은 그에 대한 두 번째 감상을 속으로 뇌까렸다.

문득, 그의 촘촘한 속눈썹이 깜빡하고 움직였다.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제가 있는 쪽을 쳐다봤을 때, 온기현은 괜히 제 머리를 헤집고 매만지며 책장 사이로 도망치듯 들어가 숨어 버렸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그가 입 밖으로 낸 냉정하게 찌르는 말들은 이미 뇌리에서 사라지고, 그의 빛나는 머리칼과 옅은 눈동자, 단정한 옷매무새, 그리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밖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어떤 가시 돋친 말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온기현의 매듭 없는 첫사랑이 시작된 것은.

* * *

“아야야. 아야.”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터졌다. 목이 조금 쉬었는지 평소보다 음성이 거칠어져 있었다. 일어서려다가 다시금 침대 위로 풀썩 엎드렸다.

허리부터 둔부를 지나쳐 그 아래까지, 완전히 감각이 얼얼했다. 뭉근한 통증과 아직도 안에 남아 있는 이물감 때문에 온종일 이렇게 침대 위에 몸을 눕힌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멍하니 누워서 갑작스레 머릿속에 떠오른 예전 일을 회상했다.

그 에세이는 나중에 기사화되어 꽤 화제가 되었다. 알고 보니 저자인 남자의 불우한 상황은 어느 정도의 양념이 가미되어 있었고, 그 책을 통해 받은 고액의 후원금을 착복하여 차명 계좌를 이용해 여기저기 투자 명목으로 부동산을 쟁여 뒀었다고 한다. 탈세 문제가 터져서 결국 만천하에 그 바닥이 드러나게 됐고, 에세이의 주인공인 남자는 그저 겉멋만 잔뜩 든 필력을 가진 사기꾼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게 되었다.

입으로 푹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진짜 끝이니까.’

스스로 되뇐 말이 머리에 못 박혔다. 섹스를 제안한 것은 사실 오기에서 비롯됐다. 그 촉발점은 과방에서 끌려 나온 경영학과 건물 구석에서, 이제까지 수고했다며, 마치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처럼 읊던 그의 말을 들었던 시점이다.

이제까지 못된 말을 들으며 무디게 깎인 마음이 불쑥 반기를 든 것이다. 자신도 마음과 몸을 별개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 치달았던 결과였다.

하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질질 끌어왔던 이 마음에 매듭을 짓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제껏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마음을 주어 보려고도 했었지만, 그 무엇도 어쩐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언제나 제 속에 꽉 자리를 튼 응어리가 있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분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제가 제안했던 단 하룻밤에 그가 응해 올지는 미지수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차라리 경멸의 말을 듣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오히려 깔끔하게 물러설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된 지금은, 이리저리 뒤죽박죽 섞여서 더욱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온기현은 핸드폰을 주섬주섬 들어 카톡 창을 열었다.

어제 이후로 류주호에게서 온 연락은 일절 없었다. 예상은 했었다. 다만, 연채우에게서 온 연락이 하나 남아 있었다. 심심한데 뭐 하냐는 연락이었다. 기현이 답하지 않았어도 아무런 말이 없었던 걸 보니, 답을 기다리던 것도 잠시, 또 어딘가에서 뻑적지근하게 진탕 놀았던 것이 분명했다.

‘이놈도 좀, 그만하지. 차라리 정착을 하든가.’

제 친우에게 보내는 한숨을 이불 위로 흘려보내며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어 한 손으로 화면을 꾹꾹 터치했다.

‘나 어제’까지 쓰고서 잠시 바라보다가 그냥 지워 버렸다. 연채우에게 괜히 쓸데없는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 예전부터 누군가를 좋아했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 누군가에 대해서 절대 말하지 않았었고, 또 지금 그와 이런 사이까지 됐다는 것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손가락을 놀려 글자를 하나하나 쳤다.

과방에서 감후석을 만났던 일을 상기했다. 과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과방에 가 본 적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날따라 과대가 드물게도 온기현에게 전화해 왔다. 전과하면서 어떻게 알았는지 연락처를 물어온 터라 이미 알려 줬던 번호였다. 과 활동을 장려하려는 눈치가 보였기에, 온기현은 그럴 여유가 없다고 거절하려 했고, 잠깐 얘기를 나누자는 말에 과방에 들렀던 참이었다.

그리고 과방에 홀로 있던 감후석과 마주쳤다.

온기현을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한 감후석이,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는 대뜸 물어 왔었다.

“그때, 도서관에서 옆에 있던 사람이랑 친해요?”

“아.”

온기현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스포츠머리로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는 도서관에서 자신과 연채우가 있는 쪽을 쳐다보던 체육계의 남자. 바로 그였다.

연채우에 관해 물어보는 감후석에게 기현은 다소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 방탕하게 몸을 놀리는 연채우였기에, 생판 모르는 이가 아는 체를 하는 경우는 별로 좋은 이유가 아닐 터였다.

“느닷없이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낮은 목소리로 가늠하듯 경계 태세를 취하자, 마치 그제야 다급했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한 듯 아, 하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아, 죄송해요. 그런 게 아니라.”

“뭐가 그런 게 아닌데요. 그때 도서관에서 빤히 쳐다보던 거 저도 기억해요. 말 한마디 섞은 적 없는 사람이, 대뜸 물어볼 만한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서늘한 온기현의 철벽에 감후석이 매우 당황하더니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이렇게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말 해 봤자 안 믿으시겠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다 잠시 뜸을 들이더니, 기현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감후석이 허리까지 90도가 될 정도로 숙였다.

“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습니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수상쩍게 바라보다가 “오해라면 됐어요.”라고 말하자 그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진지한 얼굴을 해 왔다.

같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인 감후석이라는 소개를 듣고, 무시할까 하다가 통성명을 했다. 정말 죄송하다며, 닮은 사람이랑 착각한 것 같다고 변명했다. 아직 의심의 눈초리를 하는 기현에게 연신 사과를 하던 감후석을 보며 마음이 누그러진 온기현도 자신이 좀 예민했다며 마음을 풀었다. 같은 과인 것을 알고 말도 놓기로 했다. 엄청난 친화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류주호가 들이닥친 것이다.

[채우야. 너 혹시 감후석이란 사람 알아?] 19:02

그래도 혹시 몰라서 엄지를 놀려 연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설마, 싶은 마음에. 그때 바로 띠링― 하고 알림이 울렸다.

채우 [감후석? 그게 누군데? 잘 생겼어?] 19:03

[모르면 됐다.] 19:04

채우 [아 ㅡㅡ…….]

[야, 내가 젤 싫어하는 거 두 가지가 뭐라고 했지?]

[하나는 말하다가 마는 거고. 또 하나는.] 19:06

.

.

.

[아, 쫌.] 19:10

채우 [그니까 빨리 말해 봐. 나 안대? 누구냐니까.] 19:10

[아냐. 진짜 모르면 됐어. 신경 쓰지 마.] 19:11

채우 [뭐냐, 싱겁게.] 19:11

그 뒤로 시답잖은 얘기만 주고받다가 연채우가 오늘도 술 빨러 간다는 말과 함께 대화를 마쳤다.

핸드폰을 머리맡과 떨어진 침대 위에 툭 던져 놓고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기현의 귀 끄트머리가 점점 불이 번지는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허리 아래에서 뭉근하게 달아오르는 통증과 아릿하게 섞인 지난밤의 쾌감을 애써 무시했다. 이불을 꽉 틀어잡고 끙, 하고 올라오는 신음을 베갯잇에 묻는 자세로 한참을 뻗어 있었다.

* * *

와, 미친.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빠득거리는 턱이 잔뜩 불거졌다.

받치는 감정으로 인해 덜덜 떠는 다리 때문에, 바닥과 구두의 마찰이 빚는 규칙적인 소음이 울렸다.

‘이 망아지가.’

류주호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온기현을 향해 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제 앞에 놓인 갖가지 반찬에 손도 안 댄 것은 물론이고, 물티슈 포장은 아예 뜯지도 않고서는 팔짱을 낀 채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버티고 앉아 있는 류주호를 향해 빨간 앞치마를 한 종업원이 다가왔다. 종업원의 얼굴에는 난처함이 가득했다.

“저, 저기요. 대체 언제까지…….”

그런 종업원에게 류주호가 싸늘하게 일별하며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고기 5인분 더 줘요.”

“네? 아니, 손님.”

“왜요.”

“웬만하면 제가 손님한테 이런 말 안 하는데요. 아까부터 고기 시키기만 하고 굽지도 않으시잖아요. 계속 여기 이러고 계시면 다른 손님들에게 민폐입니다.”

“10인분, 아니 20인분 더 줘요.”

고깃집 종업원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황성 한우집’이 휘갈겨진 글씨체로 쓰인 앞치마가 꽉 그러쥔 두 주먹에 구깃구깃 구겨졌다. 종업원은 그가 홀로 가게에 들어섰을 때 얼굴을 보고 홀려서 방긋거리며 어서 오시라며 환영 멘트를 날렸던 자신을 패고 싶었다.

류주호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빠직 인상을 구기며 일어섰다.

헉, 드디어 간다!

소리 없는 환호가 종업원의 얼굴에 퍼졌다.

그때 류주호가 대뜸 물었다.

“사장 나오라고 해요.”

“네? 사, 사장님요? 제가 잘못한 게 있으면 저한테 말씀을…….”

“아니. 댁은 잘못한 게 없어요. 다른 직원이 잘못했지. 아주, 큰 잘못.”

“헉.”

사색이 된 종업원은 금세 “사장님!!” 하고 소리 지르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4시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온 터라 손님은 한 시간이 지난 지금 두 테이블 정도밖에 없었다.

안에서부터 앞치마에 물기 묻은 손을 닦으며 사장이 헐레벌떡 기어 나왔다.

세상에 둘도 없을 굼벵이처럼 느린 동작에, 류주호의 인내심이 아슬아슬하게 막 바닥을 보일 때쯤 사장이 “무슨 일이십니까, 손님.”이라며 허리를 굽실하며 공손하게 물어 왔다.

“여기서 일하는 온기현이란 학생 알죠.”

“네?”

“아니, 그 머리 새까맣고, 맨날 커다란 티셔츠만 입고 다니고, 콧방울 위에 앙증맞게 점이 있고, 얼굴은 피죽도 못 먹고 다니는 놈처럼 하얘서는, 사람 미치게 빤히 쳐다보는 요망한 버릇이 있는 대학생 아르바이트 말입니다.”

사장이 이게 대체 뭔 소린가 싶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자동으로 반문한 말에 알 수 없는 설명이 따라 나와 다소 어리둥절했다.

“온기현 학생이 여기서 알바를 하고 있기는 한데요.”

“걔 왜 안 와요. 오늘 일 하는 날 아닌가요? 아니면 내일인가?”

개고생 짱, 이라고 개고생 찬양을 할 때는 언제고, 아르바이트를 왜 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언제부터 제가 온기현의 행동을 모두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지난밤만 해도…….

‘아, 젠장.’

또 생각났다. 미친놈처럼, 틈만 나면 그날의 온기현이 두더지 게임의 얄미운 두더지처럼 뿅뿅 튀어나와서 머릿속을 두들겼다. 아주 미치고 환장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머릿속이 제 초원이나 되는 것처럼 있는 대로 날뛰고 있었다.

“아, 온기현 학생. 그, 지금 중간고사 기간이라 쉰다고 그랬…….”

“하. 그걸 왜 지금 말해요.”

“네? 아니, 그건 네 노, 아니 손님이…….”

안 물어봤잖아……!

억울함에 말을 채 마치지 못한 사장이 입만 벙긋거리자, 류주호가 잇새로 욕을 짓씹고는 두둑한 지갑에서 하얀색 수표 몇 장을 꺼내더니 테이블 위에 턱 올렸다.

“손님? 이게 대체??”

“고깃값이요. 잔돈은 필요 없고, 고기는 저기 테이블에나 나눠 주세요.”

고깃집을 운영한 이래 처음으로 “저쪽에 계신 신사분이 보내셨습니다.”를 시전할 처지에 놓인 사장이 당황스러움에 말을 어버버 더듬는 동안 류주호는 가게에서 거친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그 등 뒤에서, 잔돈으로 거의 한 테이블 하루 매출 정도의 금액이 남을 듯한 수표 다발을 보고 입을 뜨악하게 벌린 사장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류주호를 향해 저도 모르게 자영업자로서의 본능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또 오세요. 소중히 모시겠습니다, 고객님.”

어디로 튄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제가 모르는 장소만 골라 다니는지, 아니면 학교에 아예 나오지 않는지. 팔랑대는 옷자락 그림자의 끄트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지만, 온기현의 새까만 머리칼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태어난 이래로 이렇게 답답하고 기가 막히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고, 열이 뻗쳤다. 상기할수록 진득하게 꿀렁이는 감정이 일었다. 이 감각이 대체 무엇인지. 철철 끓는 감정은 분노와 비슷했지만, 또 조금, 아니 많이 달랐다.

어찌 됐든 반드시 잡아야 했다.

일단 그놈을 낚아채고서, 얼굴을 마주 보고, 그 새까만 동공을 쳐다보며, 그리고.

“아.”

류주호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핸드폰으로는 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했다가는 가뜩이나 숨어 있는 놈이 아예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같이 듣는 교양 수업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별 과제는 물론이고 출결도 중요했기에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작정하고 기다렸던 류주호는 완전 허탕을 쳤다.

온종일 기분이 들쑥날쑥 롤러코스터를 탔다. 제가 미친 것 같았다. 그중의 약 99.9%가 거의 한계치에 가까운 분노였다. 자신이 기만당했다는 생각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가 농담조로 멋대로 떠들었던 것이 머릿속에 언뜻 떠올랐다. 당시에는 한 귀로 듣고 흘렸었지만 제 기억으로는 분명 남자끼리 처음 삽입할 때는 쾌락보다 고통이 더 크다고 했다. 동성 간의 성교에 관심이 없더라도, 애당초 삽입의 용도로 쓰지 않는 기관이기에 처음부터 느끼는 사람은 정말 백 명 중 한 명이라도 될까 말까 한다고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류주호의 머리는 뜨겁게 달구어질 정도로 열이 올랐다.

그놈은 분명, 쾌감에 못 이겨 온갖 야한 신음을 흘렸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긴 했지만, 분명 사정까지 이르지 않았는가.

저를 딜도 취급한 것도 모자라서, 그놈이 그렇게 쾌감을 느낀 것이 오롯이 자신 때문만이 아니라는 생각. 53번까지의 축적된 경험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류주호를 미치게 했다. 이 쓰디쓴 패배감에 도저히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완전히 이용당했다.

그놈의 꾀에 넘어가서 미친놈처럼 정신을 놓고 허리를 놀렸다. 그놈이 원하는 대로.

이제는 54라는 숫자만 봐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핏줄이 불거진 관자놀이를 다시금 검지로 쓸어내리듯 눌렀다.

그놈 시간표라도 알아 둘 걸 그랬다. 어떤 수업을 듣는지 알 수 없으니 찾아가서 낚아챌 수도 없었다.

미친 들소처럼 캠퍼스 구석구석을 뒤졌다. 온기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류주호는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카톡 창을 열어 온기현에게 폭풍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너 어디야?] 19:15

[수업도 안 오고.] 19:16

[교양 수업이 우스워?] 19:16

[F 맞아도 상관없나 보네. F가 만만해? F는 좆같은 거야.] 19:20

[이 문자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씨발!

거기까지 쓰던 류주호는 미친 듯이 핸드폰을 터치하다가 있는 힘껏 땅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충격에 강한 핸드폰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두어 번 바닥을 굴렀다. 환장하려니까 별 미친 문자까지 다 보내고 앉아 있었다.

깊게 팬 미간을 꾹 누른 류주호가 눈을 번뜩이더니 느린 동작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서늘한 표정으로 다시금 어딘가로 연락을 하기 위해 키패드를 눌렀다.

* * *

고깃집 사장님에게 시험 기간이라서 딱 일주일만 쉬겠다고 미리 말을 해 놨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락부락한 겉모습 때문에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나름 고학생에 대한 배려와 연민을 가진 마음 따듯한 사장님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중간고사 기간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고기를 서빙할 몸 상태가 도저히 아니었기에,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온기현은 캠퍼스 내를 그림자처럼 몸을 숨기며 다녔다.

얼굴에 진한 그림자가 질 정도로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발걸음도 티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다녔다. 전부 류주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황당한 생물을 보는 듯한 류주호의 눈빛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흐물흐물하게 몸이 녹아내릴수록 오히려 반대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반기는 그 위력을 잃었다. 살갗이 부딪칠수록 제 속에서 하나둘씩 항복의 백기가 세워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 그의 모진 말에 뾰족한 가시를 세운 것도 잠시, 뭐가 그렇게 기분 좋았다고 금세 약해져 버린 자신도 참 답이 없었다. 연채우가 말했던 마음보다 몸이 먼저란 게 진짜일까, 진지하게 고민이 될 정도였다. 평생 류주호의 얼굴을 안 볼 생각이었다.

물론, 류주호가 그렇게 그에게 대담한 말을 하고 피하듯 도망쳐 버린 자신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가늠이 안 가는 것도 아님에 더욱 그랬지만. 이제까지 없었을 싸가지없는 말로 경멸을 표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어느 것도 상상하기 싫었다.

교양 선택 강의는 수강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중간고사 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수강 철회가 가능했다. 그게 아니면 중도 휴학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등록금을 일부밖에 돌려받지 못할 것이기에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 와중에도 금전 사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한 표정으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삼각김밥을 먹던 온기현이 지잉― 하고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화면을 보니 02로 시작하는 번호였고, 중간 번호는 한국 대학교에서 사용하는 전용 회선 번호였다.

어, 하고 단발의 음성을 낸 기현이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경영학과 온기현 학생 맞으신가요?

“아, 네. 온기현 맞습니다.”

어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4차 산업 혁명 콘텐츠 플랫폼 혁명’ 강의 조교인데요. 다른 게 아니라, 이번 중간고사 조별 과제 조장 맡고 계시죠? 저번에 제출하신 리포트 파일이 좀 이상해서 연락드렸어요.

“네? 파일이요?”

―네. 일부 내용이랑 사진이 누락된 것 같아서요. 교수님이 웬만해서는 이런 잘못된 파일들은 전부 감점 요소로 처리하시는데……. 제가 미리 보다가 이상한 부분이 있어서 연락드렸어요. 조원도 세 명이나 드롭해서 두 분만 남으셨잖아요. 내용을 보니까 남은 조원들끼리 열심히 조사하신 것 같은데.

“아. 네……. 감사합니다. 일부러 연락까지 주시고요.”

온기현의 목소리가 대번에 풀 죽었다.

“그런데, 혹시 어떤 부분이 잘못됐나요? 제가 지금은 밖이라서 집에 가서 확인하고 다시 파일 보내 드릴게요.”

―아. 혹시 모르니까, 그냥 이번 발표 수업 끝나고 잠깐 저랑 같이 보시겠어요? 발표 수업 끝나고 바로 중간고사 채점 마무리하니까요.

“아, 그…….”

사실 제가 철회할지도 모르거든요.

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리포트가 잘못됐다면 그 피해는 그럼 오롯이 류주호에게 갈 것이 아닌가. 온기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칼에 손을 넣어서 마구 헤쳤다.

“……네. 알겠습니다.”

끊긴 전화를 붙들고 온기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은 삼각김밥을 양 볼이 터지도록 욱여넣었다. 굽어 있던 무릎을 펴고서는 백팩을 고쳐 멨다. 어쩐지 오늘따라 어깨를 짓누른 무게가 무거웠다.

10분.

수업이 시작한 지 이미 10분이 지난 시각이었다.

꽉 닫힌 강의실 문 너머에서는, 누군가가 발표를 준비하는지 마이크를 딱딱 때리는 소리와 자기소개를 하는 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안 들키고 몰래 들어가기 위해 부러 모두가 착석해서 앞을 집중해 보고 있는 틈을 타서 강의실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문을 열기 전 모자를 다시금 눌러썼다. 수업 끝나고 보자고 했으니 조교에게 대충 얼굴도장이라도 찍어 놓을 심산이었다. 그리고 류주호가 발표하는 동안에 잽싸게 빠져나올 요량이었다.

최대한 문 여는 마찰음이 들리지 않게 느릿느릿 문을 열었다. 계단식 강의실의 내부는 조명이 죄 꺼져 깜깜했다. 오로지 대강당 앞쪽의 스핀 조명과 슬라이드에 비친 빛만으로 발표자의 모습에만 모두가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어찌나 조용하게 문을 열었는지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심지어, 강단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는 교수조차 기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온기현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류주호의 모습을 찾았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어째서 자신은 어디서나 류주호의 모습을 알아챌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지만, 비단 기현의 시야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서는 항상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류주호는 제일 앞줄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살짝 모로 기울인 채, 그가 평가자라도 되는 양 발표자를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온기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붉어지는 귓바퀴를 손으로 감쌌다.

앞에서 발표자가 뭐라고 하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울렸다.

앞을 슬쩍 보니 류주호는 고개를 숙여 대놓고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아예 발표 내용을 듣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수업 종료 15분을 남겨 놓고, 류주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어두운색 재킷 안에 하얀 라운드 니트를 입고 있었다. 재킷 단추를 잠그며 발표 단상으로 올라섰다.

이목이 한순간에 앞으로 집중됐다.

온기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슬라이드가 켜졌다. 류주호와 둘이서 함께 혹은 따로 만들어 낸 발표 자료였다. 그리고 PPT 표지 위에는, ―류주호, 온기현―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당장 기현의 눈에 그런 것은 들어오지 않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스핀 조명이 류주호의 머리 위로 떨어지며, 빛의 갈무리를 쏟아 내었다. 류주호는 그의 인생처럼, 그의 존재 자체처럼, 그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신입생 입학식 때처럼. 모두의 눈이 닿는 그 자리에 서서 제 앞에 늘어선 모두에게 똑같은 정도의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류주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평하다면 공평하다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홀린 듯이 류주호를 바라봤다. 7년 전 강단 위에 올라선 그를 처음 봤던 그때처럼,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류주호가 마이크를 잡은 손을 느리게 올리더니 빙긋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경영학과 4학년 류주호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글로벌 3대 OTT 업체의 생존 전략’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화면이 전환됐다.

―이제는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AI, 공유 경제, 혹은 플랫폼.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혁신적인 기술 덕분에 미디어 플랫폼의 생태계에 격변이 왔습니다. 이러한 시장 상황에서 과연, 글로벌 3대 OTT 업체들의 성장 전략은 무엇이며, 무엇을 동력으로 앞으로 혁신을 이끌어 갈까요.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슬라이드가 넘어가며 목차가 나타났다. 자신이 고심해서 생각한 발표 내용이었다. 류주호가 썩 괜찮다고 칭찬했던 배치의 목차였다.

그의 성정과는 전혀 다른 모습. 너른 공간에 울리는 류주호의 말은 부드럽게 굽이치는 물결과 같았다. 듣기 좋은 저음으로 나긋하게 읊는 그의 말을 듣고 보면 어쩐지 전부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만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가 신랄하게 비판의 날을 세우면, 날이 향한 상대는 조각조각 남김없이 찢기고 흩어지고 말 것이다.

류주호는 발표 중간 적절한 타이밍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조금 더 강한 어조로 연이어 흐름을 바꾸며 말을 이었다.

―그럼 먼저, 3대 OTT 업체의 프로필과 성장해 왔던 과정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바로 뛰쳐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결심이 흩어지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류주호의 모습을 홀린 채 바라보았다.

온몸이 불긋하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그가 나직하게 지껄이던 질 낮은 욕설과 거세게 부딪혀 오는 뜨거운 체온도 상기해 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작 몸을 겹침으로 인해서 속절없이 허물어진 것은 자신이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걸,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기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제 마음처럼 무거운 어깨가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축 늘어졌다.

아, 나는 아직도 류주호를 좋아하는구나.

―이상으로, 발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류주호의 맺음말을 끝으로 교수나 학생들 너나 할 것 없이 쳐 대는 박수 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기현은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몸을 돌려 후다닥 도망치듯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소음에 묻혀 누가 나가는지, 누가 문을 여는지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강단 위에 서 있던 류주호의 시선만이, 막 강의실을 떠나온기현의 백팩 끄트머리에 꽂혔다.

* * *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도서관에서의 업무는, 행정실 담당자와 같은 시간대 일하는 학생에게 부탁하여 최대한 서류 작업 쪽으로 돌렸다.

시험 기간이라서 몸이 고된 반납 업무와 서류 업무를 바꾸는 게 상당히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 이후 언제든 업무를 바꾸자고 할 때 바꿔 주는 것을 전제로 합의가 돼서 다행이었다.

온기현은 단지 허리의 둔통과 미미한 열상 때문에 바꾼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류주호와 절대 마주치지 않게 되었던 것은 자신도 몰랐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캠퍼스를 나섰다.

이미 해가 진 하늘은 짙푸른 색깔로 번져 가고 있었다.

‘으, 추워.’

휭 바람이 불었다. 틈 많은 티셔츠 사이로 다소 쌀쌀한 바람이 스며들어 와서 몸을 움츠리고 부르르 떨었다. 제 비좁은 원룸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여전히 어딘가 지저분했고 엉성하게 깔끔했지만, 그래도 안락한 제 공간이었다. 얼른 들어가서 몸을 씻고, 눕고 싶었다.

교문을 막 나서기 전, 쭉 뻗은 가로수 길 양쪽에 색색의 현수막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바야흐로 대동제 시즌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제 이번 주까지 중간고사가 끝나게 되면, 다음 주부터는 코가 비뚤어지도록 축제를 즐기는 분위기로 잔뜩 들떠 오를 것이다. 온기현과는 전혀 관계없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터벅터벅. 자꾸만 그림자처럼 늘어지는 제 발걸음을 잡아 이끌듯이 집으로 향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되는 거리의 원룸촌은 밤이 되면 다소 스산한 기운이 감돌 정도로 어둑한 길목이 많았다.

따닥따닥 붙어선 빌라의 작은 창문에서부터 드문드문 밝은 빛이 새어 나왔지만, 누렇게 때가 낀 가로등만큼 밖을 비춰 주지는 못했다.

걷는 동안에도 하늘은 쉼 없이 진한 색으로 물들어, 이제는 완전히 어둑해져 있었다.

위잉― 위잉―.

빌라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마지막 가로등이 벌레가 우는 것 같은 소음을 내며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를 반복했다.

아, 이거 수명이 다됐구나. 전구 교체해야겠네. 위를 올려다보며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골목 어귀를 막 돌았을 때.

온기현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켠 목에서 헉 소리가 났다. 눈이 커다랗게 뜨이며 입이 벌어졌다. 제가 헛것을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절대로, 이 자리에, 울퉁불퉁한 콘크리트와 칠이 다 벗겨진 페인트 철통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이 원룸촌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서 있었다.

류주호였다. 그가 있었다.

온기현이 나타난 골목 어귀에 이미 시선을 던지고 있었던 듯, 그는 기현을 보고 그다지 놀라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는 입에 문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더니, 후― 하고 내뱉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져 있는 짧은 담배꽁초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담배가 그의 구둣발 아래 무참히 짓이겨졌다. 바닥에는 그렇게 짓이겨진 잔해들이 여럿이었다.

강단 위에서 웃던 미소와 180도 다른, 비릿하고 잔악한 웃음을 입에 걸며 그가 말했다.

“잡았다. 이 망아지.”

포획에 성공한, 사냥꾼의 웃음이었다.

온기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캡 모자가 붕 뜬 상태로 머리에서 벗겨질락 말락 하는데도 인식하지 못했다.

완전히 아연해 있는 사이에, 그가 넓은 보폭의 빠른 걸음으로 기현에게 다가왔다. 기현은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그런 그를 뚫어지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겨우 내뱉은 한마디는 제대로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라니. 뭐가 어떻게야.”

“왜, 여기까지…….”

“아니. 물어야 하는 건 내 쪽이지.”

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양손을 모두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목을 쭉 빼서 온기현의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 먹은 감상이 어때.”

류주호의 입에 걸린 호선이 더욱 짙어졌다.

“맛있었어?”

“……뭐?”

기현이 뒷걸음질을 치며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하. 아주 때깔이 번들번들하네. 영양가 있는 거 아주 배부르게 잘 먹은 것처럼. 응? ……남은 씨발, 지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거지 같은 꿈만 매일.

마지막에 짓씹듯 내뱉어지는 말은 거의 혼잣말에 가까웠다.

어, 어, 하고 입을 벌린 온기현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대꾸가 튀어나오지 않았다. 류주호의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얼굴이 팍 구겨졌다.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그리고 이어지는 말 또한 혼잣말보다는 그르렁댐에 가까워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감히 먹튀를 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다가 치켜뜬 류주호의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먹튀……?”

바보처럼 되묻는 온기현을 향해 그의 오른쪽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알바도 안 오고, 도서관 근로 장학생이라면서 도서관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고. 이게 튄 게 아니라고?”

하나하나 사실을 적시하는 말에 기현의 입이 한일자로 턱 막혔다.

“형법상 사기죄에 해당하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연이어 무미건조하게 읊는 말에 온기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자꾸만 도망치려 뒷걸음질하던 발끝이 한계까지 구부러질 정도로 무게 중심이 뒤로 쏠렸다.

“먹튀는 범죄야, 너.”

다시금 류주호가 심상하게 툭 말을 뱉었다. 한 뼘 간격으로 가까이 다가온 류주호에게서는 진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평소에는 청량하기만 한 향이 났었는데.

“뭐, 잠깐만. 내가 무슨 먹튀를 했다고 그래. 그리고 범죄라니. 완전 억지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당당하게 우기는 류주호를 향해 대들던 온기현의 말끝이 점점 힘을 잃었다.

빌라 건물의 대부분의 창문이 까맣게 덮여 있었다. 아무래도 시험 기간이다 보니 아직 집에 일찍 돌아온 이는 거의 없는 듯했다. 그래도 이렇게 밖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민폐였다.

“저기, 일단 좀 들어가서.”

“아니라고?”

온기현의 말을 끊으며 류주호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리고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불쑥 기현의 티셔츠 앞섶을 확 잡아끌었다.

불시에 닥친 힘에 온기현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며 류주호의 손에 이끌렸다. 하지만 그 악력은 그렇게 세지 않았는지 기현이 탁, 하고 반사적으로 손을 내치자 류주호의 손이 움찔, 하며 어이없을 정도로 쉬이 내쳐졌다.

약간 스스로도 황망하다는 듯 제 손을 내려다보던 류주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하, 하고 잠시 헛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들어 눈가를 좁혔다.

“날 먹고 버리려고 한 것 아냐? 맞잖아.”

그가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멀쩡하게 가만히 있는 사람 있는 대로 꼬셔 놓고, 너만 맛있고 배부르게 먹으면 그만이냐고.”

이딴 식으로, 이제까지 대체 얼마나, 누구랑…….

류주호가 잇새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흘렸다.

온기현이 고개를 붕붕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ㅡ……. 계속하자는 말은 어차피 없었잖아, 처음부터.”

“아아…….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하자는 말이 없어서, 원나잇이었다고?

그가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입가를 커다란 손으로 가린 채 잠깐 뭔가 골몰하는가 싶더니, 곧 조금 전의 격렬하던 태도가 거짓말인 듯 조금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뗐다.

“섹스 좋았는데, 나도.”

“어?”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그가 잠시 눈썹을 꿈틀하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기분, 좋았다고. 아니, 좋았던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아, 어?

의아해하는 온기현의 반응에, 류주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니가 그렇게 홀랑 튀는 바람에, 나는 맛도 제대로 못 봤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긋하게 쏘아붙이는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거리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에, 숱 많은 까만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출렁였다.

“난 별로…….”

“뭐?”

반문하는 류주호의 태도가 금세 험악해졌다. 그 기세에 움찔한 기현이 말을 이어 조곤조곤한 말투로 대꾸했다.

“난 이제 너랑 그럴 생각 없는데.”

“하.”

아.

하하.

아하하.

미친 사람처럼 실없이 웃어 젖히는 류주호를 기현이 멍하니 바라봤다. 진짜로 오밤중에 난데없이 실성한 사람처럼, 제 얼굴을 손으로 덮고 상체를 앞으로 살짝 굽히고는 끅끅대고 있었다.

그런 류주호의 모습은 혹시 지나가던 누가 보면, 미치광이가 나오는 공포 영화라도 찍는 줄 알 것이다.

그때 느닷없이 류주호의 몸이 확 펴졌다. 그리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ㅡ. 생각을 해 봐. 진짜 어떤 사람이 엄청나게 굶주렸어. 거의 이성을 잃을 지경으로. 그런데, 그 앞에 푸아그라를 두고서 한 입, 아, 아니다. 미치게 맛있고 귀여운 냄새를 풍기는 라면을 끓이고서는 딱, 한 젓가락만 먹였어. 그리고 나머지는 못 먹게 한단 말야. 그럼 그 사람 기분이 어떨 거 같아.”

“…….”

기현은 상상력을 가동했다. 중간에 뭔가 이상한 단어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문장의 뜻은 헤아릴 수 있었다. 그가 푸아그라에서 라면으로 음식을 바꿔 준 덕에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며칠을 쫄쫄 굶었는데 라면 한 젓가락만 먹이고 빼앗아 버린다…….

만약 제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진짜 화날 것 같아.”

“거봐.”

“그게 인간이야?”

“그렇다니까.”

“죽여도 무죄.”

감정 이입을 너무 심하게 해, 제풀에 점진적으로 흥분해서 눈을 세모꼴을 뜬 온기현을 향해 류주호가 승자의 웃음을 지었다.

잔악하도록 예쁜 호선을 걸친 채, 그가 턱을 까닥였다.

“죽일 데가 어딨다고. 그냥, 나. 라면 하나 끓여 주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원룸의 현관문 앞까지 다다라 있었다.

그래 봤자 빌라 바로 앞에서 계단을 몇 걸음 오르기만 하면 되어서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안 됐지만, 깜빡하는 사이에 제 뒤에 달라붙어 얼른 문을 열기를 재촉하는 류주호를 두고 현관에 키를 꽂고 있었다.

문득 뒤에서 낮게 뇌까린 음성이 들려왔다.

“201호.”

“어?”

“아냐. 숫자가 마음에 들어서.”

1층이면 더 좋았을 텐데. 이왕이면 101호라든가, 그런 거.

의미 모를 말을 구시렁대는 류주호를 보며, 그러는 저는 서울 야경이 훤히 보이는 높은 데 살면서 왜 1층이면 좋겠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무시하고 철컥 문을 열었다.

집 주소까지 들킨 마당에 이제 와서 류주호를 떼어 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주장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설득당해 껌뻑 넘어갔다. 어어, 하면서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가 유도하는 대로 대답을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라면까지 끓여 줄 지경에 이르렀다. 냉정하게 떼어 놓지 못하는 저도 참 저라고 생각했다.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열어 그를 먼저 들여보냈다. 그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고, 온기현은 저도 따라 들어가 문을 닫으며 잠금을 걸어 잠갔다.

“흐음.”

그가 신발을 벗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유쾌한 콧소리를 냈다. 방 안을 빙 둘러보는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굳이 그럴 것도 없이 그냥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원룸인데 왜 이렇게 두리번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이때쯤 되면 잘난 놈 입에서 으레, ‘우리 집 화장실만 하네.’라는 소리가 들려올 법한데, 그는 꼭 마치 자신이 이 집의 집주인인 양 느긋하게 침대까지 걸어가더니 빙글 몸을 돌렸다.

“집 좋네.”

“좋다고?”

이게?

완전히 낡고 허름한, 그냥, 일반적인 대학가의 빌라 원룸인데…….

“응. 좋아. 좁아서 더 좋은 것도 같고.”

“……장난해?”

“아니. 진심인데.”

악의를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에 희미한 만족스러운 웃음까지 내비쳤다. 실내의 공기와 냄새를 들이마시듯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크게 들이켠 류주호의 얼굴에 걸쳐진 호선이 더욱 짙어졌다.

예전에 멀리서 바라만 봤을 때는 그냥 과묵하고 성격만 별로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성격은 변하지 않았지만.

“누구 하나 숨을 데도 없이, 누가 어딨는지 다 보이잖아.”

“그게 좋다고?”

류주호는 의미 모를 말을 지껄이며 고개를 설핏 끄덕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그의 집 또한 넓은 평수인데도 분리된 방이 없었다. 어떠한 경계도 없이 모든 공간이 하나로 합쳐져 있는 그 오피스텔은 온기현의 허름한 원룸과 전혀 달랐지만, 또 원룸이라고 치면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볼 것 없는 방 안을 두어 걸음 걸으면서 휘휘 둘러보는 류주호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온기현은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어쩐지 CG를 합성해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모습 자체가, 이 낡은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폭의 초현실주의 그림 같았다.

온기현은 작게 폭 한숨을 내쉬며 류주호가 있는 집 안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가방을 내려놓을 요량이었다. 왜 여기까지 류주호를 들였는지, 아까 전의 제 선택에 순간 후회가 일었다.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피해 다녔는데, 말짱 도루묵이었다.

“라면 먹고 싶다고 했지. 끓여 줄 테니까, 먹고 얼른 가.”

이렇게 된 마당에, 대체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하자는 대로 해 주고 얼른 쫓아내는 게 나았다. 깔깔한 음성으로 낮게 목소리를 내며 어깨에서 가방을 막 내리려던 때, 억센 손이 온기현의 늘어진 팔을 휙 하니 잡아챘다.

“뭐, 뭐야? 잠……!”

몸이 빙글 회전을 하더니 단단하고 커다란 몸이 강한 힘으로 부딪쳐 왔다. 팔과 허리를 잡아챈 손이 온기현의 퇴로를 막고, 휘청이는 몸을 빈틈없이 붙들어 맴과 동시에.

“……흡!”

입술이 불시에 겹쳐졌다. 아니, 그의 것이 위에서 압박하듯 거세게 짓눌렀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갑작스러운 류주호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고 눈이 크게 떠졌다. 의아함조차 채 떠오르지 않았다. 작금의 상황을 가늠할 틈도 주지 않고, 류주호가 폭신한 입술을 벌려 온기현의 아랫입술을 세게 빨아 댔다.

“으응!”

점막에 가해지는 순간적인 짜릿함에 기현이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자, 류주호가 잠시 멈칫하더니 더욱 다급하게 몰캉한 살을 감쳐물고 비벼 대기 시작했다. 온기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따져 물을 새도 없었다.

몸이 완전히 압박된 상태였다. 팔꿈치와 허리에 이르기까지 팔을 크게 둘러 바싹 당긴 탓에, 오도 가도 할 수가 없었다. 목에서 저항의 신음이 들끓었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류주호가 코 속 깊이 기현의 살 내음을 들이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높은 콧대가 기현의 얼굴 위를 짓뭉개듯 노닐었다.

그 순간 그의 숨이 대번에 끓어오르듯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기현의 목이 한없이 뒤로 젖혀질 정도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울 듯이 입술을 내렸다.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 마치, 타는 듯한 갈증을 이제야 해소한 짐승처럼, 그는 기현의 미약한 숨과 연한 살을 한껏 맛보고 들이켜며 제 마른 목을 성급하게 축이고 있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터진 만족스러운 탄성이 서로의 입에 먹혔다.

고개가 돌아가며 입술이 더욱 깊게 맞물리자, 류주호의 입맞춤은 더욱 농밀해졌다. 그저 다급하게 밀어붙이는 줄만 알았던 접촉은, 금세 끈적한 애무 비슷한 걸로 바뀌었다. 애를 태우듯 혀를 내밀어 표피를 간질이는가 싶더니,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서 집요하게 빨기도 했다.

머릿속이 핑 돌았다.

금세 온몸이 흐느적거렸다.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이성이, 완전히 그에게 먹히고 있었다.

류주호는 능숙했다.

능숙하게, 기현을 녹여 갔다.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이미 몸이 알고 있는 저릿함에 온몸이 달콤하게 절여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입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나고, 허리가 절로 뒤틀릴 즈음에야, 온기현은 애써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각도를 바꾸기 위해 잠깐 입술 간에 틈이 생긴 사이에, 연신 씨근덕거리던 류주호의 가슴팍을 퍽 밀쳤다.

“하아, 하아.”

꽉 틀어막혔던 입으로 인해 부족했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 밀쳐지는 힘에 의해 류주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원망의 눈초리를 던지기 위해 올려다본 온기현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류주호는 온몸이 오싹해질 정도로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에는 가는 금이 가 있었다.

하지만 온기현과 눈이 마주치자, 그 실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억지로 가라앉히려 하는 것 같았지만 가라앉은 표정 사이로 언뜻 보이는 날 선 예각은 절로 드러나며 감추어지지 않았다.

불쑥, 울컥함이 솟았다. 절로 움츠러졌던 어깨를 빳빳하게 펴며 류주호를 노려봤다.

“갑자기 왜 이래? 너, 너 미쳤어?”

“미쳤냐고? ……내가?”

류주호는 그 물음에 잠시 갸웃하더니, 무언가 골몰하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몇 초가 흐른 것 같다. 그가 제 손으로 턱 언저리를 가볍게 쓸었다. 뭔지 모를 불편함을 떨구어 내는 듯 목 뒤쪽을 주무르며 목 근육을 두둑, 풀었다. 그가 다시 온기현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문득 류주호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걸렸다. 방금까지 격렬하던 분위기를 조금 상쇄하는 그것은, 엉켜 온 뜨거움과 상충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조금 서늘했다.

무언가 속으로 갈무리한 것처럼, 온도가 조금 내려간 그 모습은 어색해 보이리만치 평소의 그다운 표정이었다.

“아니. 난 지극히 정상인데.”

지저분하게 맞부딪힌 축축한 살갗으로 인해 그의 입술이 약간 촉촉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게 어쩐지 굉장히 야해서 기현의 눈꼬리가 허물어지듯 살짝 내려갔다.

“내가 미쳤다니……. 그럴 리가 있어?”

내가 미쳤을 리가 없지. 맞아. 그는 평연하게 말하며 잇따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류주호의 시선이 기현의 얼굴의 궤적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조금 벌겋게 달아오른 눈꼬리, 상기된 볼, 콧방울 위의 까만 점, 그리고 아마도 그의 것과 마찬가지로 번들거리고 있을 입술까지.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의식한 기현은 냉큼 손을 올려 제 입술을 가리고 손등으로 벅벅 문질렀다.

“……난 이제 그럴 생각 없다고 했잖아.”

“범죄자가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

“아, 대체 누가 범죄자라고……!”

덜컹.

소리를 빽 지르려던 온기현의 목소리가 턱, 멈췄다. 옆집에 사는 학생이 이제 귀가했는지 벽 너머로 둔탁하게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빌라는 방음에 취약했다. 온종일 집에만 있으면 옆집 사람의 생활 패턴도 어렴풋이 다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이웃 간의 정이 차고 넘치는 빌라였다. 온기현의 목소리가 저절로 작아졌다.

“먹튀는 범죄.”

“악!”

류주호의 음량은 작은 편이 아니었다. 그가 입에서 툭 말을 내뱉는 동시에 그 말을 막으며 온기현이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화급하게 막았다. 데시벨 줄이라고!

“여기, 방음이 잘 안 된단 말이야. 이상한 소리 절대 하지 마.”

온기현이 류주호를 노려보며 소곤거리듯 작은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항의하자, 손바닥을 향해 문득 바람 빠지는 웃음이 닿는 듯했다. 동시에.

헉.

류주호가 입술을 손바닥으로 내리눌렀다.

……미쳤나 봐, 진짜.

눈에는 심술이 그득 담겨 있었다. 그의 성질 나쁜 장난에 온기현이 아연한 표정으로 있자, 류주호는 기회를 포착한 사냥꾼처럼 방아쇠를 당겼다. 혀를 내밀어 기현의 땀에 젖어 축축한 살갗을 핥았다. 숨을 흡, 들이켰다.

‘내가 소리 죽이라고 하니까, 더 이러는 거…….’

황급하게 손을 떼자, 그는 어쩐지 유쾌해 보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불쑥 팔을 뻗어 아까처럼 허리께를 감싸 안아 왔다. 다만, 다급했던 아까와는 다르게 느릿하고 질척한 동작이었다. 팔로 밀어 대는 저항은 의미를 찾지 못하고, 벌어졌던 틈새만큼 몸이 단단하게 밀착했다.

류주호가 예쁘게 빙긋 웃었다.

진짜 못됐어. 얘는 진짜, 어떻게 이렇게.

이어폰이 없으면 음악도 듣지 못하는 원룸이었다. 대학가 빌라가 으레 다 그렇겠지만, 기현은 이따위 공사를 한 빌라 주인을 원망하기까지 이르렀다. 망할 부실 공사.

온기현은 울 것 같은 심정으로 위협하듯 노려보며 입 모양을 벙긋거렸다.

옆에서 다 듣는다니까!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소용없었다. 위협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고삐가 풀려 날뛰던 망아지를 제 손으로 낚아챈 것이 자못 흡족스러운 듯, 류주호의 눈에서 유쾌함이 가시지 않았다.

“이거, ……놔…….”

미약한 숨소리에 섞여 마지막 음절이 흐트러짐과 동시에, 류주호가 부드럽게 얼굴을 내렸다. 제 품 안에 가둔 생명체를 향해 반듯하게 눈을 맞추며.

두 번째로 겹쳐진 입술은 느릿하고 진득했다.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애무하듯이 쓸어 대는 살갗의 감촉에, 허리께가 징 울렸다.

“아, 흐…….”

그래서였다. 억세고 격렬한 입맞춤보다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다. 정신없이 맞부딪쳤던 키스에서는 느껴 보지 못했던 생생한 감각이었다. 쩍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울리며 어쩐지 야릇한 쾌감이 이 허름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잔뜩 주었던 힘을 풀어 헤쳤다. 느른한 감각이 전신에 퍼졌다.

그렇게 헐겁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가 불쑥 침입했다. 기현의 눈썹이 늘어졌다. 아까 전의 무자비했던 침입자는 온데간데없었다. 류주호가 위와 아래의 치열을 하나하나 쓸었다. 포획한 사냥감을 느긋하게 포식하려는 사냥꾼의 여유였다.

그의 입에서 뜨끈한 숨이 흘러나왔다. 언제 저항했냐는 듯 그의 혀를 받아들이며 입을 벌린 온기현의 모습을 류주호가 만족스러운 목울음으로 음미했다.

감각이 죄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달콤한 설탕물에 절인 과일같이 축축 늘어졌다.

마음도, 몸도, 전부 다.

류주호가 못되게 굴 때도 헤프고 느슨하게 벌어지던 마음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부드러운 애무와 마치 제 연약한 것을 소중히 대하는 양 하는 태도에, 덜컹거리던 걸쇠가 점점 더 속절없이 흔들렸다.

입 안을 전부 맛본 혀가 미련을 남기며 조금씩 물러났다. 춥 소리가 나며 실같이 가느다란 타액이 입술과 입술 사이를 주욱 연결하다 한계까지 다다른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눈이 마주쳤다.

온기현의 눈은 아마 우스울 정도로 게슴츠레 풀려 있을 것이다. 깜빡이는 눈동자를 류주호가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

어, 지금 온다고? 어, 그래! 야야, 맥주 좀 사 와라. 어, 막걸리도 있음 좋지!

벽 너머에서 옆집 학생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벽을 향해 돌아갔다. 언뜻 류주호가 혀를 짧게 차는 듯했다.

그에 다시금 류주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가 못마땅한 시선을 내비치더니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힘드네.”

“뭐, 뭐가?”

“먹는 거.”

“……라면?”

“하.”

생각지도 못하게 튀는 엉뚱한 대꾸에 류주호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사선으로 짧게 걸린 입꼬리는 금세 아까와 같은 농염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살살 꼬드기는 미끼와 닮은 미소로 그가 말했다.

“우리 집에 가자.”

그 말에 온기현이 움찔했다.

“너도 그때 기분 좋았잖아. 다시 제대로 해.”

지그시 내려다보며 은근히 속삭이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귀가 간지러웠다.

“싫어?”

대수롭지 않게 던져 오는 물음에 기현은 두둑, 하고 떨어지는 심장을 가눌 길 없이 멍하니 올려다봤다. 싫냐고? 내가? 류주호를? 싫어해? 그런 되물음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결론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류주호는 아까 몰아붙일 때는 언제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류주호의 가슴팍이 조금씩 씰룩이며 아래위로 잘게 들썩이고 있었다. 마치, 애써 초조함을 누르고, 제대로 된 이성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인 사람처럼.

하지만 온기현 또한, 혼란한 머릿속으로 인해 약간 혼몽한 상태였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냥 여기서 끊으라고, 이 이상 내딛지 말라고. 그 경고음은 두근대는 심장 소리와 엇박자로 기현을 마구 뒤흔들었다.

머리를 흔들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섹스가 별거냐는 식의 그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아니. 나는 이제 정말로, 너랑……. 그럴 생각 없어. 정말.”

“흠.”

물러난 걸음으로 인해 틈이 벌어진 두 사람 사이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파고들었다. 기현이 그에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서려던 때.

“헉.”

문득, 류주호의 커다란 손이 기현의 얼굴 위로 다가왔다. 기현이 빤히 올려다보자 순간 공중에서 멈칫, 하는가 싶더니 재차 뻗어 온 손길이 기현의 입술 위를 쓸었다. 누가 보더라도 노골적인 터치였다. 거기다가 어딘가 집요하기도 했다.

류주호의 시선 또한 손이 가 있는 살갗 위에 박혀 있었다. 그 손은 살짝 붉게 달아오른 볼을 지나 코로 다가갔다. 점이 있는 곳을 살며시 쓸어 댔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의아함에 그를 부르려던 찰나, 류주호의 눈동자가 어쩐지 깊게 가라앉아 있다고 느꼈다. 무언가 골몰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시 허리께부터 시작되는 들끓는 감각에 우왕좌왕했다. 눈가를 쓸던 류주호의 손가락이 얼굴을 쓰다듬듯 내려오더니 입술 새로 엄지를 조금 집어넣었다.

순간 놀란 기현이 류주호의 손을 퍽 쳐 냈다.

류주호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금세 제 손을 거둔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제 통제를 벗어나 움직였던 손가락을 공중에서 움켜쥐었다.

그가 돌연 고개를 돌리더니, 기현에게 박혀 있던 시선을 거둬 갔다. 어쩐지 싸늘한 옆얼굴에 심장이 덜컹하고 내려앉아, 그저 가만히 제 가슴으로 올라가는 손을 꼼지락댈 수밖에 없었다.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는 그의 시선이 다시금 기현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어쩐지 초조해져서 발가락까지 곰지락거렸다.

“그래.”

그렇게 짧게 뇌까리듯 입을 연 류주호가 온기현을 지나쳐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집 안을 가로질렀다. 좁은 탓에 거의 서너 걸음 만에 현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구두를 신은 다음에,

“네가 그렇다면.”

차갑게 말을 던진 그는 그대로 현관문을 철컹 열고 나가 버렸다.

“어…….”

망연하게 뒤에 남겨진 온기현의 몸이 엉거주춤 멈췄다. 굳게 닫힌 현관문을 잠그러 갈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분명히, 달아나려고 한 건 자신이었는데.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누덕누덕 기운 마음을 구석 어딘가에 방치한 채, 모른 척하려고 했는데.

“아 씨, 진짜…….”

온기현, 이건 아니야. 진짜.

류주호는 단순히 제가 괘씸해서, 그 오만하고 높은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온기현이 괘씸해서, 그리고 생소했던 동성 간의 쾌감이 생각보다 괜찮아서, 그래서 온 것이었다. 굳이 저 제안에 응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

눈덩이를 덮듯이 꾹 눌렀던 손을 떼어 내고, 발이 제멋대로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 어쩐지 지금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쯤에서 끝내는 게 맞는 거라고 울리던 이성의 경고음은 이미 고장 나 버린 지 오래였다.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헐떡이며 덜컹거리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철컹.

현관문을 벌컥 열고서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은 발을 막 밖으로 들이밀려던 때. 현관문 바로 옆에서 벽에 몸을 기대 있던 커다란 인영을 발견하고서는 놀란 몸이 헉, 하는 호흡과 함께 기우뚱거렸다.

엉킨 발로 인해 상체가 옆으로 넘어가기 직전, 억센 손이 바로 뻗어 와 온기현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조용히 올려다본 온기현의 눈이 그의 것과 마주쳤다.

언뜻, 그의 눈에 이채가 스몄다.

커다란 검은 차체가 좁은 골목길을 굽이굽이 빠져나갔다.

거칠고 딱딱해 보이는 새까만 SUV 차량 위로 듬성듬성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꼬리를 물고 끝나 갈 무렵, 둘을 태운 차는 둔한 직각으로 꺾이며 6차선 도로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핸들이 돌아가며 차가 꺾일 때마다 몸이 둥둥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승차감이고 뭐고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제 마음처럼 덜컥거리는 흔들림에 더욱 긴장될 뿐이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았다.

운전석 팔걸이에 굵은 팔꿈치를 걸쳐 올린 채 시트에 느른하게 기댄 자세였다. 핸들을 잡은 류주호의 팔뚝에 희미하게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차가 방향을 바꿀 때마다 연신 씰룩이며 불거졌다.

온기현은 흘끔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훔쳐보며 마른 손으로 안전벨트를 꽉 틀어쥐었다.

당장이라도 어딘가 어둠이 깔린 골목길로 빨려 들어가듯 급하게 차를 세울 것 같은, 급격하게 무언가가 휘몰아칠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내부에 감돌았다.

숨소리, 옷이 구겨지는 소리, 핸들을 두들기는 미약한 소리까지. 꿀꺽, 하고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조차 예민하게 귀에 울리는 듯한 초조함에 마른입을 축이듯이 타액을 내어 입 안을 혀로 살살 쓸었다.

자칫, 손끝 하나라도 스치면 무슨 사달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빳빳한 긴장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것은 비단 온기현뿐만이 아니었다.

류주호의 턱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차 내부에 희미하게 감도는 부드러운 머스크의 방향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 공기에 알싸한 담배 냄새가 조금 섞여 있었다.

빌라 담벼락 아래에서 태우던 류주호의 담배 냄새였다. 어쩐지 머리가 핑 돌았다.

류주호의 옆얼굴에 진 짙은 음영이 도드라졌다. 워낙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깊은 그였지만, 지금은 어둠 속으로 차창 바깥에서 현란한 빛무리가 굽이쳐 들어와 굴곡이 더욱 돋보였다.

어느덧 시선을 빼앗긴 기현이 그의 옆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발끝이 곱아드는 팽팽한 긴장감에 어쩐지 사타구니께가 찌르르 저려 왔다. 이상했다. 이런 감각은 낯설었다. 단둘밖에 없는 밀폐된 공간에 부드럽게 엉덩이를 받친 시트와 알싸한 체향까지, 이거랄 것 없이 모든 게 온기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안전벨트를 꽉 쥔 손에서는 어느덧 땀이 배어났다. 비단 손바닥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온기현의 목에서 앓는 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온 것은.

“…….”

연약한 동물이 앓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처 단속하지 못한 목에서 끓는 숨소리에 온기현이 스스로도 놀라 헙, 하고 입을 다물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는 그의 귀에 들어갔다. 류주호의 손등에서 시퍼런 핏줄이 굵게 불거지는가 싶더니, 그가 무어라 중얼거렸다. 잔뜩 화가 난 것처럼 하관이 단단하게 굳고, 그 밑으로 이어지는 목 줄기가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다.

“아!”

그리고 차는 거침없이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류주호는 아무런 말 없이 최대한의 속도를 내며 차를 몰았다. 온기현은 입을 뻐끔거리며 양손으로 벨트를 그러쥐었다. 큰 도로를 빠져나온 커다란 차가 어느새 지하 주차장까지 진입했다. 추락하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끽.

덜걱.

차를 세운 류주호가 나직하게 “내려.”라고 읊조렸다. 온기현은 슬금슬금 떨리는 손으로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다.

지하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갈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아까보다 더 밝은 공간이었는데도, 왠지 더 조마조마했다. 스칠 듯 가까이서 느껴지는 손등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몰랐다.

숫자가 아래에서부터 하나둘 올라가는 매 순간이 너무나 느렸다. 아니, 너무 빠른지도 몰랐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다리가 죄 풀리고 발바닥이 푹신하게 젖어서 들러붙은 듯 흐느적거리는 감각을 가눌 길이 없었다.

띵.

1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스르륵 문을 열었다. 류주호는 먼저 내리지 않았다. 기현이 살금거리며 발을 내디뎠다. 그 뒤를 류주호가 마치 몰듯이 뒤따랐다. 거리가 금세 좁혀졌다. 현관문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아득했다.

가빠 오는 호흡에 잠시 걸음을 멈추려던 찰나, 등 뒤에 바로 뜨거운 체온이 들러붙었다.

“하아, 하아…….”

전신이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랐다.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꾸만 느려지는 걸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단단한 체구가 바투 붙어 왔다.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었다. 현관이 지척이었다. 고작 두세 걸음.

그런 온기현을 알아차린 류주호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그도 이미 한계였다.

흐으…….

“하.”

그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고개가 확 뒤로 젖혀졌다. 순식간에 사선에서 내려온 류주호의 입술이 다급하게 온기현의 입술과 맞물렸다.

‘아니, 아직 잠깐.’

속으로는 여기가 아직 바깥이라는 인식이 희미하게 들었지만 녹을 듯 쪼아 대는 입술에 금세 까마득해졌다. 허리를 받친 채 코가 짓뭉개지도록 입술이 깊게 맞물렸다. 코로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느새 류주호가 현관 앞까지 둘의 몸을 이끌었는지, 류주호는 입술을 삼킨 채로 눈만 들어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하고 여섯 번의 키패드 음이 울리고 둘은 무너지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하으, 아!”

“후…….”

센서 등이 자동으로 팟 켜진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여린 점막을 마구 빨아당겼다. 우악스럽게 혀를 넣어 와서 안쪽을 마구 헤집어 댔다.

아까 했던 두어 번의 키스와는 어쩐지 달랐다. 목말랐던 갈증을 해소하듯 조급하게 부딪쳐 왔던 첫 번째 키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졌던, 어쩐지 여유로움을 가장한 듯한 농밀한 키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제 명확한 목적을 인식한 듯 단호하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제 영역에 먹잇감을 들인 포식자의 그것처럼. 그는 제 것을 탐하는 데 그지없었다. 엉킨 다리로 신발을 어떻게 벗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계속해서 입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방 안쪽까지 들어와 있었다.

류주호는 낮게 그르렁댔다. 어둠 속에서 윤곽만 드러나는 그의 얼굴이 무섭도록 사나웠다. 입을 잠깐 뗀 사이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온기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또다시 고개를 숙여 왔다.

이마부터, 콧대, 뜨끈한 눈시울과 볼을 지나 귓불까지, 온기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마다 죄 입술을 내렸다. 뜨거움 숨이 곳곳에 닿았다. 그러다가 그가 목덜미까지 입술을 내리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순간, 기현이 그의 어깨를 밀쳤다. 긴장감에 땀에 젖은 몸을 상기했다.

“……자, 잠깐만. 좀 씻고 해.”

아무리 밀쳐도 꿈쩍도 하지 않은 그는 온기현의 말을 듣고도 잠시 가만히 있었다. 얼마간 침묵하더니 조금씩 제정신을 차리는 것 같았다. 씨근덕거리던 가슴의 율동이 점차 가라앉았다.

“나 씻을 때 또 도망가려고.”

“뭐어?”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는 사이에 류주호가 다시금 입을 맞붙여 왔다. 아플 정도로 세게 빨아당기는 통에 “응!” 하고 새된 소리로 저항하자, 뾰족하게 세운 혀로 또다시 입을 벌려 왔다. 무엇 하나 틈을 주지 않았다.

온기현의 무릎 뒤로 침대가 걸렸다. 그 탓에 둘의 몸이 기우뚱 쓰러지려는 순간, 류주호가 두 팔을 뒤로 둘러 기현을 단단히 받쳤다. 동시에, 푹신한 이불 위로 출렁, 하고 둘의 몸이 쏟아졌다.

그 자세 그대로 류주호가 온기현의 티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왔다. 델 듯이 뜨거운 체온에 순간 움찔했다. 분명 땀을 흘려서 끈적거릴 텐데, 류주호는 그 감촉이 좋은 듯 옆구리와 배 언저리를 한참을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손길이 점점 위로 올라오며 티셔츠가 돌돌 말렸다.

“아흣!”

용수철처럼 허리가 튕겼다. 그의 손가락이 튀어나온 돌기에 걸린 탓이었다.

이상해.

기현은 아연실색했다. 이제껏 제 젖꼭지가 이렇게 민감한 신체 부위인 줄 전혀 몰랐다. 류주호는 거친 손길로 티셔츠를 목 끝까지 올리더니 공기 중에 완전히 노출된 젖꼭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여기서 처음 몸을 섞었을 때는 뒤를 돈 상태여서 류주호는 보지 못했던 신체 부위였다.

어쩐지 민망해서 몸을 뒤틀자, 그가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여기는 또 왜 이렇게…….

들릴 듯 말 듯 그렇게 중얼거린 류주호가 기가 막힌 헛웃음을 흘리더니, 느닷없이 입으로 예민한 돌기에 입을 대 왔다.

깜짝 놀란 온기현이 어깨를 퍽퍽 치는 것도 소용없었다. 외려 한쪽 팔을 등 뒤로 돌린 다음 가슴을 더욱 내미는 자세로 만들었다. 헉, 하는 외마디의 숨소리는 금세 새된 비명으로 바뀌었다.

류주호가 타액을 죄 묻힌 축축한 혀로 튀어나온 예민한 부분을 둥글게 쓸어 댔다. 그것만 해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민감하게 몸이 튀는데, 류주호는 입을 벌려 덥석 감쳐물었다.

온기현의 허리가 경련하며 위로 튕겼다. 저도 모르게 터지는 비음을 참기 위해 입을 막아 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류주호는 심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더욱 세게 살갗을 빨아당겼다. 쭙, 쭙 빠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그리고 더욱 경악스럽게도 비어 있는 다른 손으로는, 찬 공기를 맞으며 꼿꼿이 서 있는 반대편의 젖꼭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흐, 아, 으으!”

미처 막아 내지 못한 신음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류주호는 거의 입을 흡착시켜 목구멍으로 넘길 듯이 강하게 빨아당겼다. 머리가 자글자글 끓었다. 점막이 가하는 농밀하고 빡빡한 애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류주호는 반대편까지 똑같이 타액으로 범벅을 만들고 퉁퉁 부을 정도로 빨아당긴 후에야 겨우 고개를 들었다.

흐린 시야 사이로 류주호가 저를 빤히 내려 보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민망하여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원망의 목소리를 냈다.

“내가 여자도 아닌데, 거기를 왜 그렇게, 그렇게 해.”

“……뭐. 여기?”

되물음과 동시에 그의 거친 손끝이 돌기를 짓눌렀다. 기현이 화들짝 놀라며 손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은 공중에 팔랑댈 뿐이었다. 강하게 둥글리자 벌린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샜다.

“……미치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그가 기현을 붙잡고는 침대 가운데까지 끌어 올렸다. 기현은 그럴 때마다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몸은 솔직했다. 그가 젖꼭지를 애무하기 시작할 때부터 아래가 흠뻑 젖고 있었다. 바지 속에서 제 존재를 주장하는 성기가 이미 힘을 받은 상태였다.

이번에도 뒤로 하겠지.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차피 남자의 성기를 봐 봤자 그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게 뻔했기에. 이번에는 흥분을 북돋을 준비물도 없었지만, 저와의 섹스가 기분 좋았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것까진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기현이 바르작거리며 몸을 뒤로 돌리려고 하자, 류주호가 어깨를 단단히 감싸 왔다. 잠시 어리둥절한 기현이 류주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잔악할 정도로 야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같이 기분 좋자고 했잖아.”

온기현이 눈을 깜빡거리자, 류주호가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그의 눈빛은 어쩐지 냉담해 보이는 말투와는 다르게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처럼 무섭도록 진지했다. 입가에 떠 있던 미소가 어느새 사라졌다. 뒤로 돌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서 망설이는 온기현을 향해 그가 심상하게 말을 뱉었다.

“그때도 너 혼자 만져서 쌌잖아. 그렇게 좋은 거 숨기지 말고 같이 즐겨.”

가볍고 노골적인 언사에 기현이 반박하려 입을 열었지만, 미처 언어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류주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쩐지 불쾌해 보였기 때문이다. 성마른 얼굴을 한 류주호가 이를 갈며 상체를 휙 들어 올리더니 제 윗옷을 훌렁 벗어 젖혔다.

‘헉.’

온기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류주호의 몸이 마치 광장에 세워 놓은 조각상처럼 근육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저마다 크기를 달리하여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옷을 입고 있을 때는 길쭉하게 뻗은 모델 같은 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체의 그는 깨지지 않는 물성으로 이루어진 암석같이 위압적이었다.

두툼하지만 기다란 목으로 이어진 넓은 어깨는 굵은 굴곡이 지도록 굵은 근육이 감싸여 있었고, 그 아래의 발달한 가슴과 촘촘하게 잘 짜인 복근까지, 어디랄 것 없이 군더더기 없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그제야 류주호의 알몸을 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넋을 빼놓고 있기도 잠시, 커다랗게 상체를 숙인 류주호가 입술을 내리며 다시금 볼 안쪽을 축축하게 채웠다. 깊게 맞물리는 입술에 머리가 울리는 사이에, 류주호가 기현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하의를 벗겼다.

침대 위에 무릎으로 서서 온기현이 어디로도 가지 못하도록 자기 다리 사이에 기현의 허벅지를 가둔 상태에서, 하의를 아래까지 끌어 내림과 동시에 제 다리를 넓게 벌렸다.

삽시에 나체가 되어 버린 온기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열기가 오른 몸이 이 이상을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쾌감에 약한 신체인 줄 몰랐다. 하지만 내벽이 집요하게 비벼지고 곧 절정에 다다르는 감각을 이미 아는 몸이 자꾸만 찌릿하게 울렸다.

작게 앓으며 엉덩이를 시트에 비볐다. 그리고 동시에, 바짝 솟아오른 중심을 가려야 한다는 급급함에 손을 가운데로 가져갔다. 그는 같이 즐기자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남자의 성기를 본 순간 흥분이 사그라들 냉랭한 공기까지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손목을 턱 잡아챈 류주호에 의해 막혔다.

“미친.”

그가 씩씩대는 호흡에 뒤섞인 말을 읊조렸다. 온기현의 성기는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서 일어서 있었다. 몸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류주호의 시야 속에, 그렇게 작지도 않은 크기인, 온통 불긋한 빛깔로 상기되어 성감에 잔뜩 일어선 예민한 국부가 대번에 시선을 앗았다. 샅샅이 훑는 그 시선이 무섭도록 진지했다.

그렇게 전신을 잡아먹을 듯이 유영하던 시선이 어느 곳에 박혔다.

“……너 여기, 왜 이래.”

온기현은 쉰 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눈을 망연하게 깜빡거렸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키스와 애무만으로 잔뜩 흥분한 증거를 그가 질타하는 것이 분명했다. 류주호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나 갈 거니까 비켜! 라고 외치려던 타이밍보다 류주호의 아연한 말이 더 빨랐다.

“원래부터 이랬어?”

“뭐가.”

부러 시치미를 뗐다. 원래부터 이런 자극에 약한 닳은 몸이었냐고 묻고 싶은 거라면 전혀 대답해 줄 마음이 없었다.

“아……!”

하지만 류주호의 손이 뻗어 온 곳은 성기 주위의 사타구니 부근이었다. 매끈한 살에 닿아 오는 손가락의 감촉에 기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너 여기…… 털이 원래 없어……? 아니면, 밀고 다니는 거야.”

나직하게 뇌까리는 그의 음성이 사포처럼 거칠었다. 하지만.

바닥을 기는 듯한 그의 낮은 음성보다, 성기가 시야에 노출된 당황스러움보다, 류주호가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 깨달은 당황함이 먼저 치밀었다.

빠른 대꾸가 튀어나왔다.

“뭔 소리야? 털 있는데.”

“뭐? 아니, 지금……. 없잖아.”

당당한 온기현의 말을 들으며 설핏 미간을 찡그린 그의 눈이 한없이 아래에 박혀 있었다.

“있어.”

“…….”

“잘 보면 보여.”

“…….”

단호한 기현의 말에 류주호의 눈에 언뜻 혼란함이 떠올랐다. 어릴 적 언젠가 봤던 《벌거숭이 임금님》 동화의 신하들처럼,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해야 하나 하고 고민할 정도의 당당함이었다.

류주호의 손끝이 다시금 사타구니를 간질이듯 쓸었다. 온기현은 제 앞을 손으로 가리기 위해 꾸준히 시도했지만, 시선을 민둥민둥한 그곳에 박은 채 일일이 쳐 내는 손길에 의해 어김없이 가로막혔다.

“……솜털, 같은 거지만, 나긴 났어…….”

기어이 쪼그라든 음성으로 변명처럼 속을 내보이자, 류주호가 대뜸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앗, 하고 외마디를 지르면서 바르작거리며 도망가려는 움직임 또한 단단히 봉쇄했다.

“……조금…… 짧지만…….”

이어지는 대꾸는 거의 속삭임처럼 작아졌다.

으.

매끈한 아래를 타인 앞에 이렇게 가까이 노출한 건 처음이었다. 수치심에 자꾸만 허리가 뒤로 밀려 났다.

류주호는 진짜로 털 한 올이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아래를 진득하게 관찰했다. 하, 하고 내쉬는 뜨거운 숨이 살갗에 닿자 몸이 파드득 튀었다.

“아, 아냐! 없으, 없을 수도 있어……! 일부러 민 거는 아닌데! 아, 그니까 이제……. 그만 봐, 쫌.”

“……그때도 이랬겠네.”

간곡하리만치 구구절절 읊는 말에 이어지지 않는 대화 흐름이었다. ‘그때’라고 지칭하는 것이 맨 처음 몸을 접붙였을 때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류주호의 혼잣말에 가까운 것 같았다. 굳이 대답을 바라지 않았던 듯 집요하게 아래를 살피던 그가 문득 중얼거렸다.

바나나 향이 어디에서 나는가 했더니.

“아, 으, 잠……! 거기, 하지……!”

성기 주변을 배회하며 쓸던 손가락이 성기를 건드렸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전에, 그가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성기를 쥐었다.

“여기도 매끈하네…….”

그 말에 미처 반박할 새도 없이 입에서는 앓는 소리가 터졌다. 이어진 건 동성 간의 섹스가 역겹다고 하던 남자라고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눅진한 애무였다.

작은 터치에도 금세 파닥거리며 반응하는 게 자못 신기한 듯, 아래에서 위로 손바닥을 사용해 거침없이 자극을 가했다. 주로 그가 매끈하다고 평가한 기둥 부근이었다. 쉴 새 없이 마찰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바싹 올라붙은 선단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아, 잠, 잠깐……!”

이러다가 그의 얼굴에 사정할 것 같았다. 온기현이 헐떡이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나 근데 오늘, 그거 안 가져왔어.”

“그게 뭔데.”

“준비물.”

성감을 돋우는 영상과 그 여타 등등의 것들.

“아하.”

그 거지 같은 준비물.

류주호가 비죽이며 웃더니,

“필요 없어.”

라고 읊조리며 제 하의로 손을 가져갔다. 지익― 내리는 지퍼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완전히 나체가 된 류주호의 몸이 껌껌함에 익숙해진 시야에 오롯이 드러났다.

‘말도 안 돼. 저게, 내 아래에 들어 왔었다고……?’

진짜 말도 안 된다.

저만한 크기가 사람 몸 안에 멀쩡하게 들어갈 리가 없다.

정말, 이전에 왜 그렇게 동영상을 바리바리 준비해 왔나 싶을 정도로, 그의 성기는 이미 흥분의 증거를 내보이고 있었다. 거의 아기 팔뚝만 할 정도의 음경이 배 아래에 바싹 올라붙어서, 점점 그 크기를 더하고 있었다.

이미 귀두 끝에서 찐득한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는 그 살덩이는, 크기도 크기이거니와 모양도 온기현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림 같은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조금 징그러운 모양이었다. 거기다 검붉은색까지 띠어, 여기저기 불거진 핏줄이 선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연하여 겁에 질린 온기현이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도리질을 했다. 허리가 뒤로 빠졌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뭐가.”

그가 제 성기를 손으로 느릿하게 훑다가 동작을 멈췄다.

“나 저번에 사실, 엄청 고생했어. 다음 날에도, 제대로 못 걷고, 막 부어서 아리고.”

되는대로 막 지껄였다. 사실상 다음 날 고생깨나 하기도 했었다.

그 말을 끝까지 듣던 류주호가 조금 심통 난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나 먹을 생각에 어설프게 풀어서 그렇지. 말했잖아.”

오늘은 그때랑은 다를 거야.

“아……!”

그렇게 말한 류주호가 대뜸 온기현의 오금에 팔을 걸쳐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기현의 입으로 가져갔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입술 표피를 쓸 듯이 간질이자, 헤벌어져 있던 입이 헐겁게 틈을 키웠다.

“하음…….”

타액을 적셔 축축하게 핥았다. 입을 크게 벌려야 겨우 손가락 두 개를 머금을 수 있었다. 질척하게 타액을 묻히는 온기현을 보는 시선이 어딘가 집요했다. 무섭도록 서늘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피하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

턱 끝이 살짝 얼얼했다. 츠읍,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는 손가락이 몽둥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따라붙는 체액이 길게 늘어져 입 주변에 실처럼 가늘고 끈적하게 엉겼다.

입가가 타액으로 죄 젖은 스스로의 얼굴이 꽤 꼴사나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류주호는 그의 말마따나 생각보다 여러 가지가 괜찮은 듯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가는 안면은, 침착해 보이면서도 조금 무섭게도 보여, 사람을 겁에 질리게 했다.

빠지는 허리를 그가 다시금 꽉 붙잡았다. 일말의 회피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듯 단호하게 옥죄었다.

‘으.’

음부 주변을 둥글리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내부로 진입했다. 혼자서 풀었을 때는 긴장감에 그저 보고 배운 대로 넣어서 휘젓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전혀 달랐다. 아랫입술을 질근 물었다.

벌써부터 진득한 애무였고, 주도권을 완벽히 빼앗은 승자의 여유였다. 조금 빠듯하게 열리는 안을 그의 손가락이 집요하게 헤집었다.

정신없이 내달렸던 그때는 고통 속에 간혹 잡히는 열락을 간신히 붙드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처음부터 쾌락으로 녹여 가고 있었다.

“하으, 아……! 아……!”

두 개였던 손가락이 세 개로 늘어나면서 압박감이 더욱 커졌다. 내벽을 비비고 흔드는 그의 손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간혹 안에서 손가락을 가위질하듯 벌릴 때면 이성을 잃고 울음 섞인 비음을 터트렸다.

빠르게 쑤셔 대는 손짓은 더욱 빨라졌다. 허리를 바투 끌어안은 탓에 뒤로 허리를 뺄 수도 없이 완전히 결박된 온기현은 고개를 젖혀 입을 벌렸다. 종내에는 아예 손목까지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센 속도와 기세에 박차가 가해졌다.

그러다 둔부와 함께 퍽, 하고 안을 쳐 대는 팔의 힘에 어느 지점을 강하게 마찰하는 자극을 느끼며 허리가 팍 튀었다. 온기현이 자지러지며 그만하라고 어깨를 퍽 쳤다.

“으, 읏……. 안 대으…….”

어물거리는 말은 제대로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그런 바보같이 말을 질질 끄는 온기현을 보며 홀린 것처럼 척척하게 젖은 꼴사나운 얼굴 곳곳에 입술을 내렸다.

늘어진 눈꼬리에 맺힌 눈물도 쪽, 하고 입술을 붙이며 빨아먹었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움직임을 재개한 손가락 때문에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친 듯이 안쪽이 찌릿했다. 정말로 그의 말마따나 물이 많은 체질인지, 안에서부터 비어져 나온 점액질로 인해 손짓에 가속도가 붙었다. 젖은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류주호는 단숨에 그 지점을 다시 찾아냈다. 엉덩이 안쪽 꽤 깊숙한 위치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그곳까지 손이 여유롭게 닿았다. 손가락과 비할 수 없이 거대한 성기가 작금과 같은 의도로 내벽에 들이친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자 잘게 도리질이 쳐졌다.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온기현이 무어라 입을 벌리는 찰나, 그가 얼굴을 내렸다. 빠르게 치대고 쑤셔 대는 아랫도리의 자극에 아래위 할 것 없이 물이 질질 흘렀다. 머릿속이 팔팔 끓었다. 쾌감에 잠식당한 온기현의 다리 사이가 절로 크게 벌어졌다. 미처 아래에 손을 대기도 전에, 사정감이 폭발했다.

저항할 수 없는 쾌감에 뒤를 쑤셔진 것만으로도 사정을 해 버렸다. 새된 비명은 류주호의 입 안에 먹혔다. 정말로, 처음 몸을 맞춘 그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작정하고 퍼붓는 애무와 적극적인 리드에 정신이 혼미했다.

“……이거 어떡하지, 진짜.”

그렇게 중얼거린 류주호가, 아직 쾌감의 여운에 파들거리는 온기현을 바로 눕혔다. 그리고 허리를 들어 후, 하고 숨을 가다듬더니 땀으로 젖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하, 씨발.”

그가 문득 욕을 지껄였다. 입술과 젖꼭지는 심하게 빨려 빨갛게 부어오르고, 땀과 눈물과 체액으로 더럽혀진 몸을 위에서 오롯이 내려다봤다. 제가 만들어 놓은 상태를 면밀히 살피는 눈이었다. 야하고 헤픈, 난잡하리만치 사랑스러운 몸을.

팽팽한 근육으로 뒤덮인 허벅지가 침대 위에서 스륵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아직껏 부르르 떨고 있는 온기현의 허벅지를 그러쥐고는 양옆으로 벌렸다. 힘을 잃은 다리가 헤프게 벌어졌다. 질척한 아래가 여실히 드러났다.

탄식 섞인 한숨을 쉰 류주호가 아랫배까지 바투 올라붙은 제 강직한 성기를 쥐고는 귀두로 아래를 맞춰 왔다. 온기현이 몸을 퍼드득 떨었다.

“흐아, 아……!”

손가락은 댈 것도 아니었다. 엄청난 양감이 내벽의 장기를 마구 밀어 대며 안으로 침입해 왔다.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일 게 분명한데, 성급하게 접붙었던 지난번과는 차원이 달랐다. 류주호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 섹스는 어딘가 더 집요하고 농밀했다.

“아으, 앗, 아, 이거 너무, 아!”

“왜. 너무, 읏, 좋아서?”

“아, 아니이! 아으……!”

어째서인지 크기를 더 키운 성기가 꾸역꾸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조금 느릿한 마찰에 문득 무섬증이 일었다. 내벽을 빈틈없이 비비는 감각이 선연했다. 차라리 저번처럼 안으로 급하게 들어오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냥, 아, 아, 빠, 빨리…….”

“응?”

“빨리, 박아 줘……. 주, 호야……. 응?”

“……너…….”

빨리, 세게, 안으로, 빨리.

안달하듯 보채는 기현의 울먹임에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순간, 류주호의 눈빛에 무섭도록 이채가 서렸다. 시퍼렇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퍽!

“흐아……!”

온기현의 양 허벅지가 한계까지 접혔다. 동시에 허리가 들린 자세로, 엄청난 기세로 들썩였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온기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벌어진 입에서는 채 막지 못한 비명 같은 신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고양된 쾌락과 흥분에 엉망진창,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엄청난 힘으로 박아 대는 통에 머리가 침대 헤드까지 올라가 부딪힐 지경까지 되자, 류주호가 팔을 뒤로 둘러 양쪽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온몸을 이용해 기현을 결박한 그가 허리만을 이용해 쑤욱 끝까지 물렸던 성기를 퍽, 하고 둔부가 아릴 정도로 세게 안으로 진입시켰다.

생리적인 눈물이 터진 기현의 얼굴에 코가 뭉개질 정도로 입술을 내리누른 다음, 개처럼 모두 핥아먹었다. 그러면서 허리만 사용한 추삽질도 더욱 거세졌다.

퍽, 퍽, 퍽!

그런 류주호의 행동에 온기현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릴 뿐이었다.

땀에 젖은 두 몸이 마구 엉켰다. 어깨를 붙잡던 커다란 손이 뺨을 쓸어내리고, 젖꼭지를 꼬집고 짓누르며 유린하다가, 어느 순간 기현의 성기를 주무르기까지, 기현은 쉰 목소리로 그저 차오르는 쾌감에 울부짖을 뿐이었다.

저번에는 다소 통증까지 동반했던 경험이, 이번에는 완연한 쾌감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아픈지도 몰랐다. 퉁퉁 부어오른 구멍이 성기를 꽉꽉 조일 때마다 류주호는 욕을 짓씹더니 더욱 크게 율동했다.

그러다 거의 실신할 지경까지 다다라서야, 류주호가 한 번 크게 퍽! 하고 치달았다. 상스러운 욕설을 제 입 안으로 내뱉었는지 류주호의 목에서 탄성이 끓었다. 그리고 동시에, 안에서 찐득하고 미지근한 체액이 터졌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이미 둘의 복부 위는 기현이 토해 낸 정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하얀 실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내벽 안쪽까지 퍼지는 뜨끈한 감각에 온기현이 기어이 엉엉 울어 버렸다.

“흐윽, 해……, 해외, 흑, 직구…….”

“…….”

이제야 콘돔을 찾는 기현의 반응에 거친 호흡을 고르던 류주호가 잠시 아연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 다 버렸어.”

“아으흐…….”

내벽을 쓸어내리며 주욱 빠져나가는 양감에 기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온몸이 시트 위에 축 늘어졌다.

결승선이 보이지 않는 마라톤을 전력 질주한 기분이었다. 이제 끝났다는 생각에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기현의 젖은 몸이 턱 잡혔다.

마찬가지로 땀에 흠뻑 젖은 류주호가 속삭이듯 나직하게 읊었다.

“너, 이제 못 가.”

저번과 같은 일은 두 번 다시 허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언어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둘의 몸이 다시금 거칠게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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