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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Loosened it (2) (4/20)

2부. Loosened it (2)

달랑 둘뿐인 조 모임은 순조로웠다.

리포트는 이미 훌륭하게 완성되어 있었고 손을 댈 일이 없이 그대로 진행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수업에서는 조원 세 명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드롭을 한 것이 분명했지만 온기현도 별말을 하지 않았고, 류주호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분담대로 PPT 제작은 온기현이, 발표는 류주호가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류주호가 기존에 쓰던 탬플릿 중 알맞은 게 있다고 하길래 PPT 제작도 모여서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조 모임 장소는 언제나 한 곳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읏, 으응…….”

“하아.”

거칠게 부딪친 입술이 고개를 번갈아 기울일수록 더욱 깊게 맞물렸다. 질척하고 끈적한 소리가 연이어졌다.

뜨거운 숨을 교환하듯 입을 벌리며 혀를 밀어 넣었다. 서로의 것이 얽히고설켰다. 절로 나오는 비음이 간지럽게 울렸다. 반대로, 류주호의 입에서는 헉헉 씨근덕거리는 숨소리가 터졌다.

코를 뭉개듯이 더욱 깊이 맞물리려 고개를 들이미는 통에 온기현의 무게 중심은 점점 더 밀려나고 있었다.

“자, 잠깐, 으응……!”

숨을 못 쉬겠다고 칭얼거리는 온기현의 말이 류주호의 입 안으로 먹혔다. 류주호는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안 들은 척하는 것인지 더욱 거세게 혀를 깊숙이 집어넣어 왔다. 젖은 점막끼리 맞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질척하게 울렸다.

앞에는 열린 노트북과 프린트된 리포트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 이후로, 첫 번째 키스 이후로 벌써 세 번째였다. 조 모임을 한 것이. 그리고 그때마다, 둘은 입술을 접붙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지만, PPT 파일을 열고, 화면 하나를 같이 보면서 붙어 있는 체온을 의식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이렇게 혀를 섞고 있었다.

관성처럼, 습관처럼.

이미 생성된 야릇한 분위기를 깨트릴 방법은 없었다. 두 번째는 PPT를 켜고서는 어색하게 앉아서 혀로 입술을 축이는 온기현을 바라보던 류주호가 난데없이 입술을 겹쳐 왔다.

깜짝 놀라 굳어 있던 것도 잠시, 금세 반응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번에는, 온기현이 먼저였다.

다소 기분 안 좋은 얼굴로 좌식 소파 위에 걸터앉아 있던 류주호에게, 촉 하고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그 뒤에 곧바로, 온기현을 악력을 이용해 목덜미를 꽉 받치고서는 거침없이 입술을 부딪쳐 온 것이다.

그런데 키스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류주호의 행동이 점점 기이하게 변해 갔다.

“읏, 하으……!”

씨발.

비음이 터지자, 거칠게 숨을 몰아쉰 류주호가 대뜸 욕설을 지껄였다. 몽롱한 눈으로 류주호를 올려다보는 온기현이 멍하게 입을 달싹였다. 그것에 시선을 주던 류주호가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다시금 잡아먹을 것처럼 온몸을 이용해 키스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헐떡대는 온기현의 손목을 꽉 붙들어 맨 채였다.

“흐으, 주, 주호야. 나, 숨, 수움……!”

“하, 씹……. 잠깐만 있어 봐.”

“으흡!”

입술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퉁퉁 부르틀 정도였다. 조 모임을 하는 거의 절반의 시간, 아니 PPT 파일을 열기까지만 조 모임 활동을 끝마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기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빠져나가려 바둥거리자, 류주호가 이번에는 아예 팔을 뒤로 둘러 빈틈없이 온몸을 옭아매듯 껴안아 버렸다.

가슴팍을 밀기 위해 손을 올리자 돌덩이처럼 단단한 감촉에 화들짝 놀라서 그대로 움직임을 잡혀 버렸다.

후끈, 하고 올라오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온기현의 눈에서 찔끔 눈물이 샜다. 그리고 게걸스럽게 탐하는 류주호 탓에 입에서 타액이 범벅이 되어 턱 아래로 흘렀다.

“하아, 씨. 완전 줄줄 싸네.”

“무, 뭘 싸……?! 아니, 쫌……!”

면박의 말에 온기현이 채 반응할 여유도 주지 않았다.

너 왜 이렇게 야해, 어?

온기현의 말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온기현의 몸의 반응 하나하나가 전부 야했다.

야릇하게 흘리는 허스키한 비음, 손대는 상대를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차지게 감겨 오는 살갗, 툭 건드리면 참 쉽게도 질질 흐르는 체액들까지 전부, 하나하나.

이게 다 온기현이 헤픈 탓이었다.

이제까지, 씨발……, 얼마나.

순간 멎어 버린 동작에 온기현이 이때다 싶어서 어깨를 슬그머니 밀었다. 육중한 몸이 쉬이 밀려났다. 그리고 올려다본 류주호의 얼굴을 보고 몸을 움칠, 떨었다.

“너, 너 눈이…….”

“……눈이, ……뭐.”

이상해. 맛이 간 거 같은데, 라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의 눈은 뭐에 화가 잔뜩 난 듯, 아니 화가 났다고 표현하기도 약할 정도로 분기탱천하여 벌게져 있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그저 그가 또 뭔가에 심술을 부리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득 온기현의 손이 류주호의 어깨 위에 살그머니 올려졌다. 류주호가 조용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용기를 낸 손이 류주호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툭, 툭 두들겼다.

마치 먹이를 먹지 못해 화가 난 짐승을 타이르고 길들이는 동작이었다. 어디 영상에 나온 것을 따라 하는 어설픈 손짓이다.

하지만 류주호는 타일러지지 않았다. 되레 그의 눈이 번들거리며 이채가 도는가 싶더니.

“아!”

풀썩. 온기현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숨 막히는 입맞춤이 시작됐다. 숨이 전부 빨려 들어갈 것같이 이곳저곳을 마구 빨아 댔다. 그리고 입술을 볼까지 미끄러트리더니 살갗이 닿는 대로 여기저기를 정신없이 머금고 핥아 댔다.

그러다가 그의 손길이 점점 거칠게 온기현의 몸을 쓰다듬었다. 두 번째에는 숨 막히는 키스는 진득하게 했었지만, 이렇게까지는.

후욱, 후욱.

상체가 심하게 들썩였다. 불현듯 그가 온기현의 목덜미까지 얼굴을 내렸다. 그리고 깊숙이 고개를 묻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개처럼 헐떡였다.

그러다, 이제까지 스스로 무의식적으로 결박해 온 것처럼 극히 제한적인 움직임을 하던 손이 절로 밑으로 내려갔다. 도저히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제까지 제 인생에서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던 어떤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것도 온전히 제 의지로.

류주호가 전신을 순간 굳혔다. 커다란 물살에 몸을 맡겼다가는 당장 이 자리에서 흥분에 몸을 맡겨 일을 치르고 말 것이었다.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울 듯이 떠오르는 행위들은, 이제껏 겪어 보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꽤 구체적인 모습들이었다.

눈앞의 이놈과 엉망으로 뒤엉켜서는…….

“하.”

벌떡, 몸을 일으켰다. 뻣뻣하게 굳어 있는 몸을 온기현에게서 완전히 떼어 냈다.

그러고는 갑작스러운 류주호의 행동에 놀란 눈을 한 온기현을 잠시 내려다봤다. 말없이 공중에서 시선이 얽혔다. 류주호는 그대로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는 얼핏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홱, 시선이 모로 돌아갔다. 그리고.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가 쾅 하고 문을 닫고서는. 류주호는 그대로 집을 나가 버렸다.

‘어……?’

갑자기 홀로 남겨진 온기현은 멍하니 현관문만 바라봤다.

아무리 기다려도 류주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혼자 자신의 귀에만 들리는 크기로 작게 중얼거린 온기현은 이내 크게 한숨을 쉬고, 제 백팩과 노트북, 그리고 핸드폰을 챙겼다.

충전기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돌돌 말면서 현관 쪽을 흘끔댔지만, 집주인이 돌아올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무거운 백팩을 둘러메고 좌식 소파에서 끙, 하고 일어나려다가, 아직 식지 않은 천 위의 온기를 가만히 더듬었다. 그리고 제 입술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물 진짜 많네, 헤프게.’

류주호의 말이 뇌를 울렸다. 눈썹이 축 처졌다. 입술은 완전히 말라 있었다. 다만, 조금 따끔하고 아릴 정도로 부풀어 오른 감각이 제가 류주호랑 이제까지 무슨 행위를 나눈 건지 상기시킬 따름이었다.

문득 연채우가 가볍게 흘리던 말이 떠올랐다.

몸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 마음과 몸 둘 다 잡지 못할 바에야…….

거기까지 생각하던 온기현은 도리질을 쳤다. 쿵쾅대는 심장을 가눌 길이 없었다.

기다리지 않고 얼른 이 자리를 뜨는 편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제가 갑자기 없으면 돌아온 류주호가 놀랄까 봐. 정말로, 정말 혹시라도.

온기현은 주머니에 꽂아 둔 핸드폰을 매만지다가 그냥 제 백팩을 다시 열어 스프링 노트를 꺼내 한 장을 죽 찢었다. 그리고 펜도 같이 꺼내서 테이블 위에 두고 몇 자를 끄적였다.

[시간이 늦어서 나 집에 갈게.]

거기까지 적은 온기현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헤맸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말이 아닌, 당장 읽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카톡이 아닌.

글로 전하는 종이 위에다가는 어쩐지, 무슨 말이든 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신인을 적지 않은, 그 누군가에게 보내는 가장 명징한 고백.

‘좋아해.’

하지만 그 고백은 최초의 그것 이후로 제 가슴 깊숙이 봉인해 둔 채였다.

절대로 꺼내지 않으리라 다짐한 언어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온기현은 느닷없이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그 언어를 다시금 갈무리했다.

류주호가 자신과 키스를 한 연유가 궁금했다. 그냥 기분 좋아서, 그에게 있어서 키스가 별게 아니라서, 그럴 것이라 짐작은 했었다.

키스까지는 성별과 관계없으니 딱히 거부감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을 감으면 여자랑 하는 것과 대동소이하니까.

연채우의 말마따나, 몸이 즐거우면 됐지, 마음이 대수랴 싶은 것은 딱 류주호를 위한 말인 것 같았다. 그가 이제까지 가벼운 만남을 했던 횟수만 해도 한 트럭, 아니 열 트럭은 될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물과 기름처럼, 몸과 마음을 분리할 수 있다면. 하지만 그러다가 류주호과 키스를 나눈 자신의 모습이 불똥처럼 뇌리에 튀어 올랐다.

……완전 티 나지 않았을까, 누가 보더라도.

순간 손에서 힘이 빠지며 펜이 주륵, 하고 미끄러졌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아, 아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이제 정말 가야겠다.

공중에서 빙글빙글 춤추던 펜에 뚜껑을 덮었다.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다시금 내리누르며.

좋아해, 좋아해.

마지막으로 속으로 딱 두 번만 더 되뇌었다.

좋아해.

그리고 한 번만 더.

이제 끝.

이제 정말, 끝.

뚝뚝 떨어지는 미련은 이제, 진짜 완전히, 끝.

그렇게 한 줄로 마무리한 쪽지를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온기현은 주인 없는 텅 빈 집을 나섰다.

* * *

“뭐 해? 이상한 표정 짓고 서서?”

불쑥 앙칼진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쯧.”

혀를 차며 “아무것도.”라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양희인이 “빨리 가자고!”라고 버럭 소리치며 류주호 앞으로 걸음을 빠르게 내디뎠다.

부르는 대로 나오기는 했지만, 급격한 후회의 물살이 일었다. 사실은 갑작스러운 양희인의 연락에 응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하지만. 어쩐지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소파에 눈이 가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꼭 저같이 동글동글한 글씨체의 쪽지 하나가 자꾸만 신경을 갉작거렸다.

“빨리 가자, 나 배고파.”

양희인의 높은 목소리가 머리를 식게 만들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방금 전까지 뇌를 빙빙 맴돌았던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오늘 왜 부른 건데. 나 바쁘다고 했잖아.”

“나 남친이랑 헤어져서 우울하다니까.”

“그런데?”

“개자식. 불알친구가 이 정도 위로도 못 해 주냐?”

“넌 불알은 또 언제 생겼어.”

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무감하게 내뱉은 류주호의 말에 양희인이 어금니를 갈았다.

“공감 능력 제로인 새끼.”

“그래서.”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 새끼.”

“언제 분리수거 한 번이라도 해 본 것처럼 말하네.”

“너 요새 아저씨한테 아주 책잡혀서 설설 긴다며.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아저씨한테 할 말 못 할 말 다 할 줄 알아.”

“그러든가.”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류주호를 보고 양희인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식이랑 정상적인 대화를 한 적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아, 다 왔다.”

양희인이 끌고 온 곳은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후미진 구석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류주호는 고개를 들어 간판을 봤다.

“‘황성 한우집’? 개나 소나 다 황성 한우라고.”

“여기 맛집이라고 소문났어. 내 친구가 여기 고기 맛있다고 강추하던데? 술이 착착 감긴다더라.”

머리를 식히기 위해 부름에 응했지만 고기라는 글자를 보자 또다시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짜 미치겠다. 왜 이런 것만 봐도 생각이 나느냔 말이야.

짜증이 치솟았다. 이제껏 굳게 다져 온 자신의 견고한 이성이 제어되지 않고, 마구 날뛰어 대는 기분은 영 탐탁지 않았다.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사람의 3대 욕구 중, 배설욕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서일 것이다. 요새 바빠서 누군가와 몸을 섞을 여유도, 시간도 없었기에.

예전 몇 번 서로 즐거운 만남을 가졌던 누군가에게 연락해서, 당장 이 갈급을 해소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그런 귀찮은 생각까지 들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차에 양희인은 이미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안쪽에서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다시금 혀를 쯧, 차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아무에게나 연락할 셈이었다.

어차피 섹스는 스포츠와 비슷하다. 킥복싱이나, 야구나, 섹스나. 상대방을 정복하고 땀을 흘리며 개운해지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행위지만, 또 그것만큼 탁해진 머리를 시원하게 해 주는 것은 없었다.

딸랑.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시끌벅적했다. 양희인이 말한 대로 맛집으로 유명한 건지, 눈에 띄지 않는 가게인데도 손님이 많았다.

“류주호, 여기―!”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양희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덜컹, 의자에 걸터앉자마자 누군가 부산스럽게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뭐?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허.

류주호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아. 어, 어?”

그렇게 말을 잠시 더듬은 고깃집 종업원, 온기현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뜬 채였다. 류주호는 제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나 싶었다. 하도 놈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서 제 뇌가 제멋대로 만들어 낸 상상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온기현은 제 머릿속의 모습과는 달리 새빨간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뭐야. 아는 사이야?”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류주호는 양희인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온기현이 주문서와 펜을 들고서 양희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다시 류주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리고 둘의 모습을 한 번에 눈에 담은 온기현의 눈꺼풀의 움직임이 금세 느리게 처졌다. 코를 찡그렸다가 내려놓는 온기현의 얼굴이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비쳤다.

그 순간. 가슴에 누군가 돌을 던진 듯 찡한 파동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저도 모르게 속이 막힌 것 같아 가슴께에 손을 올렸다. 목이 칼칼했다.

“응? 아는 사이냐고.”

“주문, 하시겠어요?”

여전히 말이 없는 류주호에게 인상을 찌푸린 양희인이 주문을 종용한 온기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것을 눈치챈 온기현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슬쩍 류주호의 눈치를 본다.

“아, 아는 사이 맞아요.”

“오, 정말요? 어떻게 알아요?”

“……같은 조 모임 하고 있어요.”

“아하, 그렇구나. 어, 근데 류주호 보자마자 쌍욕 하지 않는 걸 보니 성실한 조원이신가 봐요. 예전에 얘랑 같이 팀플하다가 이 갈던 애들이 한 트럭인데. 데스 노트 단골이잖아요, 얘가.”

“야. 시끄러.”

사이좋게 건네지는 대화를 쌩― 하고 들이받듯 류주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그 사나운 눈빛은 양희인을 향해 있었다.

“아, 왜 또. 아, 저희 안창살 2인분 주세요! 음, 그리구 소주 두 병이랑 맥주 한 병요.”

“어떻게 드릴까요?”

“데슬라요.”

“네.”

데슬라는 맥주인 데라와 소주인 진이슬을 섞는 소맥을 일컫는 말이었다. 약어나 신조어에 취약한 온기현이었지만 고깃집에서 일하다 보니 가장 주문이 많은 술의 약어만큼은 외울 수 있게 되었다. 끄적끄적 열심히 받아 적은 온기현은 앞치마 주머니에 수첩을 넣은 채로 후다닥 몸을 돌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왜 또 여기서 만나는 거지. 진심으로 자신이 주인공인 <트루먼 쇼>라도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저놈, 학교 도서관에서도 사서로 아르바이트하고 있지 않나?

주방으로 들어갔던 온기현은 양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나왔다. 그리고 여자 둘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테이블로 가서 반찬을 새걸로 바꿔 주고, 고기가 잔뜩 얹어진 도마를 내려놓았다.

여자 중 한 명이 술에 취한 듯 꺄르르, 하고 온기현을 향해 웃음을 터트리자 온기현 또한 어색하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하더니 여전히 커다란 사이즈의 티셔츠 끝자락을 펄럭이며 다시 재빨리 주방으로 돌아갔다.

아니, 손님한테 굳이 웃어 줄 필요가 있나?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씨근덕거리는 숨과 함께 비어져 나온 실소가 성난 황소가 뿜어내는 숨소리와 닮았다는 것을 본인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온기현이 냉장 쇼 케이스를 열어 술병을 두어 개 들고는 남자 세 명이 걸걸하게 취해 있는 테이블로 갔다.

저 씨발 새끼들은 술 작작 처먹었으면 집에 가지 왜 고깃집에서 술판을 벌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간에 깊은 금이 갔다.

온기현이 술병을 내려놓자 이번에는 체격이 좋은 어떤 남자가 소주를 빠닥, 하는 소리를 내며 호탕하게 까더니 제가 마시던 술잔을 온기현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크게 웃으며 어서 받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온기현이 손사래를 치며 살살 눈을 접으며 웃자, 그 테이블에서 뭔가 두어 마디 주고받더니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친 거 아닌가? 저거, 종업원에 대한 부당 대우 아냐? 신고해야 되는 거 아냐?

덜컹하고 의자에서 일어서려던 때, 온기현이 소주병을 직접 받아 들더니 술을 권하던 남자의 소주잔에 액체를 꼬로록 따라 줬다. 싱글벙글한 남자가 그것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류주호가 돌연 이를 아득 갈았다.

온기현이 문제다. 저렇게 헤프게 흘리고 다니니까, 마음에 방을 54개나 만든 것이다. 헤프게 웃어 주고, 또 씨발, 다 받아 주고.

지가 대부호야, 뭐야? 대저택이야? 마음이 무슨 벌집이냐고. 방이 존나 54개나 되게. 곧 55번째도 만들 생각이겠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웃음 흘리고 다니는 꼴이 못마땅해서 이가 갈렸다.

왜 저렇게 헤픈 건지. 옷이나 좀, 헐렁이는 것이나 입지 말든가.

거기 팔 들면 안에 다 보이잖아.

바닥을 탁탁 굴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다리를 덜덜 떨고 있었다.

양희인이 뭐라 뭐라 지껄이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온기현이 술병을 갖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기, 주문하신 데라랑 진이슬이요.”

“감사합니다―.”

“고기도 곧 가져다 드릴게요.”

“네에―!”

술만 얼른 가져다 놓고 후다닥 내빼는 온기현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양희인이 술병을 따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담 걸렸어? 고개를 왜 그렇게 돌리고 앉아 있어.”

“말 걸지 마라.”

“응? 뭐야. 뭘 그렇게 봐? 너랑 같은 조원이신 분? 저분을 왜 그렇게 노려보는 건데?”

가만히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양희인이 왜 또 지랄이냐며 읊조리더니 온기현이 고기 도마를 들고 다시 다가오자 불쌍한 중생을 대하듯 말이 나긋해졌다.

“와아, 감사해요. 엄청 맛있겠다!”

“네. 여기 고기 맛있어요.”

순간 류주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때 온기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제가 준 돈으로 고기를 사 먹었다는 게 어쩐지 아이러니했다.

담담하고 순순하게 말하는 온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양희인이 뭐가 맘에 들었는지 갑자기 꼴값을 떨기 시작했다.

“얘랑 같은 조 하려면 마음고생 심하시겠네요.”

“그냥. 조금요. 네. 그러네요.”

“아, 아하하하! 진짜 솔직하시다.”

생각지도 못하게 덤덤하니 솔직한 대답에 양희인한테서 웃음이 터졌다. 류주호의 얼굴이 빠직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일그러졌다.

“아, 진짜 웃긴다. 장사 잘되시라고 고기 많이 시켜야겠다.”

“엇,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장사 잘되면 사장님만 좋아요. 저는 알바라서 힘들기만 하고요. 조금 시키시는 게 전 좋아요.”

“네에? 아하하학!”

양희인이 깔깔대며 웃어 젖혔다.

씨발. 지금 이게 웃겨?

전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종알대는 온기현의 입술만 봐도 감촉이 생생히 떠올라 머리가 핑 돌고 미칠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당장 탄내와 술 냄새가 진동하는 이딴 곳 말고, 조용한 곳으로 놈을 끌고 나가서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진한 달달한 체향을 흠뻑…….

“아하하. 아, 여기 고기는 알아서 굽는 거죠? 집게랑 가위 어딨지? 아, 여기 있네. 저 이래 봬도 고기 되게 잘 굽거든요.”

제멋대로 주절거리는 양희인이 집게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황망하게 공중에서 멈추고 말았다.

류주호의 손이 더 빨랐기 때문이다.

“너 뭐야. 너 고기 절대 안 굽…….”

“굽지 마.”

“뭐?”

“굽지 말라고.”

“뭔 개소리야, 뜬금없이.”

“굽지 말라면 좀 굽지 마. 내가 구워. 이리 내.”

류주호가 불퉁하게 내뱉자 양희인이 ‘이게 미쳤나,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 눈길로 쳐다봤다. 온기현은 그런 둘을 번갈아서 쳐다보다가 이내 “그럼 맛있게 드세요.” 말을 남기고서는 다시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대충 집어다가 던지듯 올리자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벌건 살이 불판 위에 달라붙었다.

“하.”

가슴에 불이 일었다. 연기를 일으키며 달구어지는 게 소고기가 아닌 마치 제 살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 좀 나갔다 온다.”

“뭐? 야, 어디!”

고기 굽는다며!

뒤통수에 대고 “저 새끼 저럴 줄 알았어!” 하고 쏘아붙이는 소리를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답답함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고깃집 주변은 인적이 드물었다. 오른편의 벽에 등을 대고 잠시 심호흡했다. 이제 막 저녁 시간을 넘겨 어둑해지는 사위는 조용했고, 가게 안쪽의 소란스러움만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때.

가게 뒤편에 나 있는 쪽문이 열렸다. 가게 오른편은 콘크리트 벽과 맞닿아 있었는데 그 사이로는 사람 하나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 나 있었다.

그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류주호는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을 지그시 바라봤다.

빨간 앞치마를 입은 온기현이었다.

“알바를 대체 몇 개를 하는 거야?”

류주호가 심상하게 던진 말에 온기현이 쓰레기봉투를 정리하다가 번쩍 눈을 들었다. 그리고 통로를 막고 서 있는 류주호를 보며 잠시 놀란 눈을 했지만 금세 가라앉았다.

“이거랑, 도서관 알바 두 개.”

“돈 벌 거면 이딴 거 하지 말고, 그냥 내가 주려던 돈 마저 받지 그랬어. 개고생하는 게 취미야?”

“어. 취미야. 개고생 완전 좋아. 개고생 짱. 됐어?”

세모로 치켜뜬 눈이 류주호를 향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가시 돋친 말만이 좁은 통로를 지나 류주호에게 닿을 뿐이었다. 비껴간 시선이 어쩐지 고파서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은, 자기를 좋아한다면서, 여자와 둘이 있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깔깔한 목구멍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하긴 그렇게 여러 사람들한테 헤프게 굴고 다니는 것도, 취미라면 취미겠지. 그래서 그런가. 넌 아무렇지도 않나 보네. 좋아하던 사람이 다른 여자랑 있는 걸 봐도 멀쩡하고.”

“안 멀쩡할 게 또 뭐 있어?”

피식.

입에서 웃음이 샜다.

“멘탈 존나 강하다, 너.”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와서.”

그래서 익숙해, 이 정도쯤이야.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단단한 시선은 여전히, 벽을 향해 있었다.

하하. 씨발, 진짜.

“그래, 뭐. 편하고 좋네.”

이를 갈 듯 그렇게 간신히 툭 내뱉은 류주호를 두고, 온기현은 다시 쪽문으로 들어가 버렸다. 류주호는 닫힌 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짜증스레 미간을 와락 구겼다.

* * *

헤픈 망아지 : [글로벌 3대 OTT 업체의 생존 전략_최종_fin_v3.ppt] 22:05

파일만 전송된 카톡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 뒤로 류주호와 온기현 사이에는 연락이 일절 오가지 않았다. 오로지 대화방 안에서 서로 파일만 주고받았다.

류주호가 기존에 잘 활용해 왔던, 어느 정도 탬플릿이 만들어진 PPT 파일에 내용만 정리해서 넣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모여서 하는 편이 효율적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순조로웠지만, 엉망이었다.

류주호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새하얀 목에 이를 박아 넣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부터인지, 처음 입술을 겹쳤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온기현이 눈을 똑바로 마주쳐 오며 고백을 해 왔던, 그때부터인지.

집은 곤란했다.

그렇다고 다른 개방된 장소에서 만나기도 힘들었다. 오히려 그렇게 된다면, 공공장소에서 타인이 보는 앞에서 뭔가 미친 짓거리를 해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지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짓거리를. 이제껏 류주호를 단단하게 구성해 왔던 견고한 틀이 와르르 무너지는 짓거리를.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있었던 적도, 자신의 어떠한 행위를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던 적도 없다. 저는 하고 싶은 것은 하면서 살았고, 하기 싫은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 이성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그놈과 알게 되면서부터, 매끄럽게 돌아가던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삐걱대는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묘한 초조함과 불유쾌함. 계속해서 이 두 가지 감정이 머리를 지배했다. 아니, 오히려 이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닌 것 같아서 가슴에 걸린 뾰족한 가시 같은 걸리적거림이 동반되었다.

무기질적으로까지 보이던, 덤덤하던 뒷골목에서의 온기현의 모습.

그날 밤 그 모습을 떠올린 류주호는 커다란 동작으로 핸들을 돌리며 뻐근한 목덜미를 거칠게 쓸었다.

캠퍼스 내의 차도를 따라 SUV의 바퀴를 굴렸다. 온 사방이 시끌벅적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대학교의 대大행사, 대동제 시즌이었다. 항상 중간고사와 애매하게 겹치는 시기에 축제가 시작하는 터라, 학생들은 축제와 중간고사 사이에서 골머리를 썩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는 했다.

묘하게 들뜬 분위기가 캠퍼스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류주호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벤트였다.

‘좋댄다.’

짜증이 일고 시끄러운 속을 달래느라 이쪽은 미치겠는데. 괜한 화풀이처럼 대충 심드렁한 감상을 속으로 지껄인 류주호는 오늘도 어김없이 교수용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가뜩이나 속이 시끄러운 마당에, 주변까지 술렁거리니 짜증이 치솟았다. 뭐가 좋다고 저리 신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캠퍼스 안 여기저기 개판을 치고, 쓰레기통을 만들며 술판을 벌이고, 또 사람들 눈을 피해 후미진 곳에서 떡이나 치고.

신입생 때부터 과에서 하는 행사에는 애초에 철벽을 쳐 왔기에 참여는 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축제 기간에 술을 먹고 잔뜩 들떠 있던 세 살 위의 선배와 일회성 유희로 난잡하게 뒤엉켰던 기억은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주변이 축제 기간의 유명한 떡 스폿이라, 자신들 외에도 여럿이 숨을 죽이고 열중하고 있던 곳이었다.

떼씹도 아니고.

주위에 둥실거리며 떠다니는 미미한 열기가 괜스레 불쾌하게 느껴져, 그 후로 야외에서는 절대로 섹스하지 않았고, 축제 기간은 더더욱 오밤중에 캠퍼스에 나타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요즘이 딱 축제 기간인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최근에는 거의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지 모를 정도로 주변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속으로 괜히 왔다고 생각했지만, 과거 10년 전부터 최신 것까지의 기업 분석 자료가 과방에 비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어 그것을 찾으러 온 참이었다.

어찌 됐든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국내 정·재계에서 날고 긴다는 선배들의 노하우가 집약된 자료이기에, 삼호 운용 그룹에서 주최하는 투자 대회에 참고할 요량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기본적인 분석 자료나 단순한 공시 자료와는 비할 바가 안 되었다.

경영학과 과방으로 가는 중간에 신나서 인사하는 후배들에게는 대충 손짓으로 인사해 주고, 저를 슬금슬금 피하는 선배들은 철저히 무시하며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과방 앞에 도착하자 안에서부터 조용하게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안에 사람이 있나 싶은 생각에 발을 돌릴까도 싶었지만,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여럿이 모여 있더라도 일절 신경 쓰지 않았을 류주호지만, 가뜩이나 복잡하고 시끄러운 속 때문에 누군가의 좆 같은 면상을 1분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누가 있더라도 무시하려는 생각에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막 안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갑자기 열린 문을 향해 휙 뒤돌아본 얼굴이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류주호는 제 눈을 의심했다.

꼭 진짜로 미쳐서 헛것을 보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일어날 지경이었다.

온기현.

놈이 눈을 커다랗게 뜬 말간 얼굴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통통한 입술을 잠시 달싹인다. 그러더니 곧바로 외면하듯 고개를 모로 돌린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야.’

그렇지 않아도 좆 같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까만 더벅머리로 덮인 동그란 뒤통수 양쪽으로 잔뜩 새빨개진 귀가 언뜻 눈에 들어왔다. 꼭 누르면 터질 것 같다.

그는 완전히, 애써 무시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추측했다.

그 샐쭉한 눈이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는지, 아니면 고깃집 뒷골목 콘크리트 벽을 볼 때처럼 무덤덤하게 앙다물고 있는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대체 가늠할 수가 없었다.

숨이 틀어막힌 것 같은 답답한 마음에 저벅저벅 온기현 바로 뒤쪽까지 다가가 말을 막 걸려던 참이었다.

“어, 주호야. 여긴 어쩐 일이야?”

그때, 의문 섞인 다감한 목소리의 익숙한 음성이 귀에 들어왔다. 류주호는 그제야 시선을 온기현의 주위로 돌렸다.

“……감후석?”

“어. 뭐야. 꼭 내가 있는지 몰랐던 것처럼. 하하.”

유쾌하게 웃는 그의 서글서글한 얼굴을 보며 류주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공간에 들어와서 온기현의 뒷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부터, 온기현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근데 너 온기.”

“아, 저기. 후석아.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류주호가 감후석의 말을 대충 흘려넘기며 바로 온기현을 부르려던 차에 말이 끊겼다. 류주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던 온기현의 목소리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옆얼굴이 감후석을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

둘이 언제부터 아는 사인데.

순간 치미는 충동을 억눌렀다. 어떤 충동인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얼마 전까지 정신없이 입술을 접붙여 여린 곳까지 탐닉하던 그 감각의 기억이 전신을 지배할 뿐이었다.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가려는 손을 겨우 잡았다.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아, 응. 가려고? 오늘은 미안했어. 갑자기 그…….”

“아냐, 괜찮아. 나야말로 예민하게 반응해서 미안해.”

“하하. 내가 더 미안하지.”

대화를 듣던 류주호의 미간에 줄이 생겼다.

완전히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둘의 태도. 대체 둘이 뭐 하고 있었는지, 뭐 하자는 수작들인지 따지고 싶었다.

“너희.”

“그럼 다음에 또 봐.”

류주호의 두 번째 말도 가차 없이 끊겼다.

온기현은 여전히 류주호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감후석을 향해 손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그에, 말랐지만 모양이 예쁘게 잡힌 하얀 손이 공중에서 느슨하게 덜렁거렸다.

감후석의 시선이, 팔을 올리느라 드러난 척 보기에도 말랑해 보이는 팔뚝 살에 끈적하게 닿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류주호의 눈에서 확 불길이 치솟았다.

씨근덕거리며 다가가 덜렁이는 온기현의 손목을 콱 틀어쥐었다.

차지게 감기는 감촉에 저도 모르게 더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게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는지 감후석이 놀란 눈을 하며 말리려 했다.

하지만 류주호의 동작이 더 빨랐다.

온기현의 뒷덜미를 낚아채려다 말았다.

겨우 참고서는 백팩 손잡이를 틀어쥔 채로, 백팩을 메려다 어정쩡한 자세가 된 온기현을 그대로 끌고 과방을 빠져나왔다.

온기현은 어어, 하는 사이에 거북이 등껍질에 이끌리듯 류주호의 걸음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거 놔!”

류주호는 과방을 나서서 그곳을 벗어나기까지, 정확히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까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뒤에서 따라오는 온기현은 이내 체념한 듯 보폭을 빨리하며 맞춰 걸었다.

복도 끝, 코너를 돌자 건물 비상구로 통하는 막다른 벽이 나왔다.

몸을 거칠게 돌렸다.

그리고.

온기현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이제까지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이, 순식간에 느슨하게 풀리는 감각에 휩싸였다.

기이하고 어색한 느낌이었다. 온몸이 늘어진 것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에, 백팩 손잡이를 잡은 악력이 절로 풀어졌다.

온기현은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깔고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의도적으로 류주호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속에서는 있는 말 없는 말이 죄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온갖 질문이 쏙 들어갔다.

겨우 꺼내져 나온 말이 이거였다.

“과방에서, 뭐 하고 있었어?”

감후석이랑 둘이.

둘이 뭐 하고 있었는데. 그 새끼한테 웃어 주면서, 그 새끼는 너한테 뭐라고 했고, 너는 뭐라고 대답했는데. 그 새끼가 네 어디를 만졌으며, 또 다음에 보자는 얘기는 왜 꺼낸 건데.

왜 그 새끼한테 반말하는데. 이름으로 부르면서.

“뭐?”

온기현은 황당하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사실 되물었다기보다 어이가 없어서 절로 나온 대꾸 같았다. 그리고 눈 코 입이 가운데로 모이도록 얼굴을 확 찡그리더니 또박또박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경영학과 학생이 경영학과 과방에 있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뭐, 못 올 데라도 왔어? 아니면 거기서 수상한 짓이라도 했을까 봐? 나도 경영학과 학생이야. ……뭐, 너는 내가 너랑 같은 전공이라는 그런 것쯤이야…… 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씨발, 키스하고 싶다.

“하.”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류주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스스로가 미칠 대로 미친 것 같았다.

가시를 잔뜩 세우고 불퉁하게 내뱉는 온기현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류주호는 뻣뻣하게 굳은 목덜미를 주욱 늘어트린 채 고개를 숙였다.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덮어 양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잔뜩 달궈진 뜨거운 머리가 가라앉지 않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가슴팍이 아래위로 커다랗게 율동했다.

자못 짜증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에, 온기현 또한 한숨을 작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왜 여기까지 끌고 온 거야? 내가 보내 준 PPT 파일, 제대로 안 갔어?”

카톡에는 분명히, 제대로 읽음으로 뜨던데.

보내기 전에 파일도 몇 번씩 확인했는데.

그렇게 저한테만 들리도록 작게 중얼거린다.

그따위 것, 마지막에는 파일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

고개를 잠시 갸웃하던 온기현이 계속해서 “분명히 보냈는데. 확인했는데. 최종의 파이널 버전 스리 맞는데.”라고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서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헉. 혹시, 행운의 편지 쓰여 있었어? 파일이 잘못 갔나? 이상하다. 설마 그거 66통 보내는 것 때문에 걱정돼서 그러는 건……아니지?”

“뭐? 무슨, 뭔, 행운의 편지, 그딴.”

순간적으로 이게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어서 욱하고 말았다. 황당해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말똥말똥 저를 쳐다보는 눈을 보니 모든 울화가 눈 녹듯 사라졌다. 입에서 단 숨이 절로 나왔다.

눈을 내리감으면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새치름해 보이는 눈매가, 커다랗게 놀란 눈을 하면 눈꼬리가 내려가서 그렇게 순해 보일 수가 없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정면에서 받은 온기현은 “아니면 뭔데.”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지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멋쩍게 귀를 감싼 하얀 손끝이 어색하게 삐걱거린다. 손가락이 틈새 없이 닫혀서 귓바퀴 속살이 보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마른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기현의 손목뼈 부근을 덥석 잡아챘다. 낭창한 몸이 앞으로 휘청 흔들렸다.

미끄러지듯 감겨 오는 감촉에 순간 머릿속이 핑그르르 돌았다.

고개가 정면으로 돌아가는 온기현의 숱 많은 머리가 공중에서 휘날렸다. 탁, 하고 발로 지탱하는 동작에 온기현의 몸이 한 발자국 정도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달큼한 체향이 안타깝도록 미미했다.

감질날 정도로 연하게 코끝에 스친다.

이미 그 냄새를 맡은 적이 있는, 그 저릿함을 알고 있는 뇌가, 더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머릿속이 바글바글 끓었다.

머릿속을 점령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당장, 이 마른 몸을 끌어당기고, 붙잡고, 주무르고, 꽉 잡아채어, 터트릴 것처럼. 그렇게.

그렇게,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게, 아무도 못 보게.

아무도…….

아무도.

거기까지 다다른 생각에 사고를 멈췄다.

‘지금 무슨.’

폭주하다가 끽 급정지한 감각에 신경이 예민하게 일어섰다.

둘 사이에 정적이 들이닥쳤다. 문득 숨이 가빠질 무렵, 복도 쪽에서 왁자한 소리가 울렸다.

그에 확 온기현의 손을 뿌리쳤다.

코너 건너편에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는 듯,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럴수록 미치도록 선명했던 감각들이 아스라이 흩어진다.

표정이 서늘하니 굳었다.

진짜 미친 것 같다.

자신이 순간적으로, 교내에서 절대로 하면 안 될 지저분한 상상을 멋대로 했음을 이제야 자각했다.

그것도 온기현과. 지금 당장 여기서.

해소되지 않은 욕구가 쌓일 대로 쌓인 몸이 초조하게 안달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갈증이 심상치 않게 거세진다. 정말 요새 제대로 안 빼 줘서 그런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뿌리쳐진 손목을 매만지는 온기현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는 게 더 맞는다. 벙찐 표정으로 난데없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 울컥하고 치솟는 무언가를 억누르듯 류주호의 미간이 깊게 팼다.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이런 건 자신이 아니었다. 이런 건 모른다.

머리가 심하게 아파져 오는 것 같기도 했다.

“됐어, 이제 그건. 파일, 알겠고. 발표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앞으로 연락 주고받을 일 없어.”

낮고 거친 음성이 뜨거운 숨을 가르며 차갑게 터져 나왔다.

냉기 어린 말을 그대로 정면에서 받은 온기현이 숨을 흡, 하고 멈춘 것처럼 가느다란 몸이 조금 부풀었다.

“그동안 수고했다.”

“…….”

말없이 못 박힌 채 서 있는 온기현에게서 등을 돌린 류주호가 큰 보폭으로 그 자리를 완전히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걷기만 했다. 왁자한 소란의 주인공들은 저들끼리 신나서 까르르 웃더니 류주호를 보고 알은체를 해 왔다.

“앗, 류주호 선배님! 안녕, 하…….”

대꾸해 줄 기분도 나지 않아 시선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왔다.

뒤에서 “선배님 얼굴이 왜 저렇게 무서워?” “존나 살벌하다, 다른 선배들이 되도록 얽히지 말라고 그러던 게…….”와 같은 수군거림도 귀에 와 닿지 않았다.

류주호는 마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굳은 몸으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 *

치익.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입에 가져다 물었다.

벌겋게 타오르는 담배 끄트머리가 시야에 걸렸다.

오랜만의 칼칼함을 목구멍으로 욱여넣듯,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폐부 가득 들어찬 칼칼한 것을 내뿜자, 연기가 공중에서 춤추듯이 흩어진다.

여러 금욕 중 하나를 쉬이 떨구고 나니, 잠시나마 신체적 만족감이 알싸하게 전신으로 내달았다. 긴장이 탁 풀어지는 나른한 흡족함에 뻐근했던 신체가 조금 늘어진다.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 한 손으로는 술잔을 들고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피식 웃었다.

언뜻 단순하게 보였다.

그래, 그냥 이런 식으로 해소하면 되는 것이다. 빨아서 뱉어 버리면 되는 것처럼. 욕구의 해소란, 제 안에 묻어 두는 게 아니었다. 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담배를 참아 왔던 금단 현상 때문에 몸이 더욱 달았던 것이다.

흡연 욕구가 폐 가득 충족되니, 최근 들어 느낀 갈급증과 초조함이 잠시 저 멀리 물러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 촉촉한 기억은 금세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썰물처럼 밀려났다가 조금 마음을 놓는 순간 확 들이닥친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며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 찰나.

“혼자예요?”

끈적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오만상을 구기고 있네. 뭐 안 좋은 일 있나 봐요?”

그리고 깔끔한 베이지색 손톱을 한, 작고 하얀 손이 불쑥 들이 밀어지더니,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담배를 제 가녀린 손에 끼우며 잽싸게 앗아 갔다.

손가락을 살며시 쓸며 지나가는 스킨십은, 뭇 사내들의 아찔한 상상을 자아내는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 상태 그대로 시선만을 돌려 여자를 곁눈으로 바라봤다.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상의를 입고 있었다. 가슴골이 깊게 팬 옷의 앞자락은 속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몸의 굴곡을 과시하듯 자신의 상체를 바 테이블 위로 깊게 숙여, 부러 보여 주는 것처럼 윤기 어린 입술을 벌려 담배를 살포시 물었다.

류주호가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여자는 “웃으니까 더 섹시하네. 저 사실 아까부터 보고 있었어요.”라며 몸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그녀의 얼굴에도 짙은 미소가 걸렸다. 눈은 번들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완전히 몸이 달아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노골적일 정도로, 상대로 하여금 성적인 긴장감과 흥분을 고양하려 하고 있다.

뻔한 의도, 뻔한 자신감, 뻔한 반응.

이런 상황에는 익숙했다. 꽤 예전부터.

섹슈얼한 긴장의 완급을 적당히 조절하다, 종내에는 제 손으로 주도권을 그러쥐었다. 그것은 류주호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접근해 오는 여자들과 하룻밤의 열락을 해소하는 것 또한, 크게 의미를 두는 일도 아니었다.

단순한 메커니즘이다. 기대와 흥을 한껏 북돋아 절정에서 쏟아 내듯 해소하고, 언제 흥분했냐는 듯 팍 식어 버린 열기가 거추장스러워지기 전에 치워 버리는 것.

밀착해 오는 여자의 몸짓에 응하는 것처럼 류주호의 미소가 진해졌다. 여자가 벌써부터 녹아내릴 듯한 몽롱한 시선을 보내온다. 이미 저 혼자 침대 위로 올라가 들썩이고 있는 것처럼 입이 벌어져 있다.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몸을 완전히 밀착해 온다.

여자의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가오는 야릇한 움직임에 맞추어 류주호가 손을 뻗었다. 여자가 움칠 몸을 굳힌다.

하지만 그 손끝은 굴곡진 선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류주호는 대번에 여자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담배를 빼앗았다.

그리고 바로 술잔 안에 내리꽂았다.

“난 남이 먹다 남긴 건 안 먹어요. 입맛 버려서.”

“뭐, 뭐?”

여자가 기가 찬 얼굴로 일그러진 입매 사이로 헛웃음을 연신 내뱉었다. 그러고는 “미친 새끼 별꼴이야.”라고 짓씹어 말하고는 몸을 홱 돌려 거센 구두 소리를 내었다.

이제야 거지 같은 면상과 냄새를 안 맡게 돼서 속이 다 시원했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쉽게 베드 인 했을 상황인데도, 오늘따라 유독 내키지 않았다. 외려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다.

부러 분위기를 달구기 위해 틀어 놓은 음악조차 거슬려서 당장에 그 자리를 박차고 가게를 나왔다.

큰 길가에서 막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술은 두어 모금밖에 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골이 띵했다.

제 오피스텔 주소를 부르며 차창 밖을 내다보다가 이내 지겨워져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눈을 감았다. 턱이 굳게 다물렸다.

이도 저도 해갈하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오히려 기분이 더 더러워졌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느낌이다.

오피스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택시를 세웠다.

잠시 걸을 요량이었다. 조금씩 선선해지는 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식히려 했다.

그러다가 이내 마음을 바꿨다.

헬스장에 가서 땀이라도 죽 빼야겠다, 싶었다. 몸을 거칠게 혹사하고 근육을 제대로 움직여 땀이라도 빼야 할 것 같았다. 아니면 이전에 다니던 킥복싱 도장에라도 들를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사내새끼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또다시 입 안이 타는 듯한 갈증이 일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택시에서 내려서부터 벌써 몇 개비째인지 모르겠다. 세고 싶지도 않았다.

후우ㅡ.

공중에 흩어지는 연기가 잔잔한 가을바람과 만나 어스름한 골목길 사이로 도망치듯 이지러진다.

천천히 걸음 하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내뿜어진 연기 사이로, 언뜻 멀뚱히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인적이 드문 오피스텔 입구로 이어지는 길목, 담벼락에 기대어 있던 그 인영이 저를 알아차린 듯 슬그머니 몸을 떼었다.

그것을 알아본 류주호의 눈이 설핏 커졌다.

담배를 든 손이 툭, 아래로 떨어진다.

온기현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검은색 오버 사이즈 티셔츠에, 백팩에, 그리고. 무심한 얼굴을 걸치고 있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어귀에서 유난히 그의 얼굴이 하얗게 빛났다.

아래로 처진 손가락 사이로 연초가 제 몸뚱이를 불사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타 버린 연초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기 직전, 온기현이 입을 열었다.

“나랑 잘래?”

* * *

탁, 철컥.

“아! ……아흡. ……읍……!”

등 뒤로 현관문이 조용한 소음을 내며 닫혔다. 빨려 들어가듯 집 안으로 발을 들인 이후부터는 허겁지겁 달려드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아슬아슬하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감이 거칠게 부딪쳐 오는 단단한 몸과 거세게 맞부딪친 입술에 완전히 뭉개졌다.

갑작스러운 부대낌에 온기현이 류주호의 어깨를 탁탁 쳤다. 하지만 류주호의 어깨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되레 그의 옷감 아래의 더운 온기가 손까지 전이되어 오는 듯해서, 가볍게 때리던 어깨 위에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흐으.”

입술을 쪽쪽거리며 이리저리로 접붙이느라 살짝 드러난 공간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훤하게 켜진 현관의 센서 등 아래에서 온몸을 단단하게 붙잡힌 채로 부닥쳐 오는 커다란 체중을 받느라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부족한 숨 때문에 미간을 설핏 찡그렸다.

“하아.”

그도 숨이 가쁜지 입술을 떼어 내지 않은 채로 볼로 미끄러트리며 숨을 내쉬었다. 볼과 관자놀이가 뜨끈한 습기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류주호는 뭔가를 만족스럽게 충족시킨 사람처럼 온기현의 보들보들한 살에 코를 비비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치 이제야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는 사람처럼. 어렴풋이 작게 미치겠다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온기현은 아래에서 올라오기 전의 상황을 다시금 되새겼다. 류주호는 자신의 제안 아닌 제안에, 다소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인데.”

“지금 나랑, 섹스하고 싶다는 뜻이야?”

그의 얼굴에서 헛웃음이 비죽 튀어나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그라들었다. 그의 싸늘한 시선을 받으며 온기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왜.”

“너랑 자고 싶어서.”

자고 싶어서 자고 싶다고 한 것뿐이라고 덤덤히 읊었다. 응당 거부의 말이 날아올 것이다. 모 아니면 도였다.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의 말에 담배를 쥔 손가락으로 고개를 기울여 관자놀이를 꾹 짓누른 다음 쉬이 한마디만 덧붙였을 뿐이다.

“그래, 뭐. 못 할 것도 없지.”

섹스가 별거야?

마치 그렇게 들리는 듯했다. 류주호와 키스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리고 그 가벼운 대답에, 저는 이리저리 속절없이 흔들렸다.

허억, 헉.

입술이 간신히 떨어진 틈에 가쁘게 헐떡였다.

키스는 기분 좋았다. 류주호와 몇 번 입을 맞추는 동안 항상 머릿속이 자글자글 끓는 느낌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능숙했다.

키스하는 도중에 동그란 머리통을 다정하게 감싸 안는 자연스러운 손짓이든, 흥분을 돋우기 위해 예민한 살갗을 애무하는 사소한 움직임이라든가 하는 게, 이거다 할 것 없이 다 야하고 기분 좋았다.

온기현은 류주호를 좋아한다.

류주호는 온기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기분 좋은 키스를 할 수 있었다. 류주호가 온기현과 키스를 나눌 수 있었다.

연채우의 말마따나,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사람은 제 생각보다 많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류주호는 그럴 수 있는 인간이었다. 제 생각과 같았다. 정말 혐오하던 남자와의 관계조차, 쾌락을 위해서라면 용인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자, 잠깐만, 잠깐……, 들어가서, 흐읏……!”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 일단 안에 들어가서 숨을 고르고, 또 할 게 많았는데. 대뜸 류주호가 다시금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다가 여린 점막 사이로 혀를 넣어 간질이듯 핥았다.

‘……아, 기분, 좋아…….’

질척한 키스에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또다시 갈급하게 부딪쳐 오는 체온에 몸을 맡겼다. 입술을 벌려 주자 두툼한 혀가 비집고 들어와서 안쪽을 전부 헤집어 놨다. 저도 모르게 도망가서 뒤로 숨어 버리는 기현의 혀를 기어코 옭아매더니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쓰디쓴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얘가 원래 담배를 피웠었나, 이제까지 본 적 없는데, 싶은 생각도 잠시. 혀끝에 느껴지는 알싸한 맛이 불편해서 혀를 도로 물리려고 하자, 류주호가 악착같이 얽힌 살을 놔주지 않는다. 그에 입에서 타액이 진득하게 흘러나와 입가를 적셨다.

헤프게 물이 많다는 류주호의 말이 떠올랐다. 침을 삼키고 싶었는데 입을 한껏 벌린 상태라서 잘되지 않았다. 목울대만 꿀렁이자 제 것인지 류주호의 것인지도 모를 넘치는 타액이 꿀떡,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에 촉촉한 소리를 자아내며 맞붙은 점막이 설핏 떨어졌다.

“……너도 물 많은데.”

문득 소곤거리듯 중얼거린 말에 류주호가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래서,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면 그 어떤 말도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를 표정이었다.

간신히 떨어진 입술이 야하게 번들거렸다. 잠시 그 상태로 밭은 숨을 내뱉고 있자 센서 등이 확 꺼졌다가 곧이어 팟, 켜졌다. 류주호가 움직임을 재개한 까닭이다.

다급하게 부딪치며 몸을 겹친 채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류주호가 이동하다가 뭐에 걸렸는지 이따금 쿵, 따각, 하는 소리가 울렸지만, 입이 틀어막혀 있어서 뭐에 부딪혔는지 궁금해할 여유도 없었다.

무게가 뒤로 쏠려 고꾸라지기 직전에 류주호의 가슴팍에 손을 대고 밀어 내니, 이번에는 커다란 몸이 쉬이 밀쳐졌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보이는 그의 굴곡진 얼굴 음영 탓에 위압감이 평소보다 훨씬 컸다. 조금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불을 켜는 것보다 아무래도 끈 상태가 나을 것 같았다. 같은 성별인 남자의 몸을 봐 봤자 그는 별 재미도 없을 거고, 흥이 식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나 자신이나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둘은 어느덧 침대 바로 옆까지 이동해 있었다.

순간 무언가를 참지 못하고 다시금 충동에 몸을 맡긴 류주호가 입술은 거세게 부딪쳐 왔다. 류주호의 손이 온기현을 꽉 옭아맸다. 읍, 하고 볼을 부풀린 기현의 입이 작게 오므라들었지만, 류주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전부 다 먹어 치울 것처럼 양껏 빨아 댔다.

그 기세에 점점 뒤로 걸음이 밀리며 오금에 침대 매트리스 모서리가 턱 부딪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몸이 풀썩 뒤로 눕혀졌다. 아직 메고 있던 백팩 때문에 배겨 오는 등의 감촉에 온기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우뚝 행동을 멈춘 주호의 가슴팍이 격하게 들썩이다가 점점 멎어 갔다. 지금 당장의 두 사람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자각한 류주호가 상체를 확 올렸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가, 몸을 떨어트린 거리의 간극 만큼 약간 식어 갔다.

온기현은 몸을 일으켜 백팩을 주섬주섬 벗어서 내려놨다. 그리고 지익― 하고 지퍼를 열었다. 준비물을 꺼낼 차례였다.

대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류주호가 그 행동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온기현의 손에 이끌려 나온 것은 플라스틱 용기로 된 투명하고 굵은 보틀 하나와, 작은 종이 박스였다. 살뜰하게 준비물 두 개를 꺼낸 온기현은 백팩을 구석으로 조금 밀어서 치웠다. 그리고 류주호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 두 개를 슬쩍 제 등 뒤로 숨겼다.

“준비물, 가져왔어.”

“……무슨 준비물?”

“준비해야 해서.”

“무슨 준비?”

거친 음성이 무기질적으로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아, 하더니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젤과 콘돔이었다. 연채우가 추천해 준 젤은 입소문으로 좋다고 소문나서 꾸준하게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라고 했다.

“익숙하네……. 아예, 박히려고 작정하고 온 것처럼.”

저열하게 내뱉는 류주호의 목소리가 바닥보다 낮게 떨어졌다. 온기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끼리 할 때는 여자랑 할 때와 다르게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해야 서로 번거롭지 않지.”

네가.

“하.”

줄줄이 설명하듯 대꾸하는 말에 기가 찬 지 바람 빠진 웃음이 날아왔다. 세상 가장 흔하게 널린 싸구려를 비웃는 느낌도 강하게 배어 있는 건 비단 기분 탓은 아니리라.

“그럼 해 봐, 어디.”

“응, 잠깐만.”

화장실로 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무릎으로 침대 위를 누르며 상체를 세우고 우뚝 몸을 굳히고 있는 류주호를 보며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류주호는 섹스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온기현이 자리를 뜬 사이에 마음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류주호에게서 몸을 떨어트렸다. 일단 젤 통을 들고 다리가 침대 위로 전부 올라올 수 있게 등으로 슬금슬금 기어 침대 끄트머리에 가서 몸을 뉘었다.

꼼지락거리는 손짓으로 바지 지퍼를 아래까지 내렸다. 엉덩이만 들어서 바지 뒷부분과 브리프를 살살 둔부 아래까지 내렸다. 앞섶이 보이지 않도록 무릎은 단단히 붙인 상태였다.

뒤를 풀어 주는 모습을 보이는 게 여간 어색하고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진득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버거워서 젤 통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손바닥에 젤을 짜니 뷰뷱, 뷱, 민망한 소리가 났다. 케첩 짜는 소리와 같은데도 괜히 크흠 하는 기침 소리를 냈다.

그 손바닥 위에 제 검지와 중지로 젤을 흠뻑 묻혀 그대로 팔을 뒤로 돌렸다. 부스럭하는 소리조차 예민하게 귀에 울렸다. 고개는 푹 숙인 채였다.

어정쩡한 자세로 제 뒤로 손을 내렸다.

“흣.”

손끝에 닿는 주름의 감촉과 차갑게 질척이는 액체의 감촉이 뒤에 닿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입에서 쉰 소리가 흘러나와서 아랫입술을 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검지를 구멍으로 쑥 밀어 넣었다. 찌걱거리는 음탕한 소리에 스스로 움찔했다. 어깨를 배배 틀며 아랫입술을 세게 사리물었다.

집에서 미리 조금 풀어 왔기에 망정이었다. 그래도 그새 조금 빠듯하게 다물려 있었지만 조금씩 풀어 주니 점점 손가락을 감싸듯 차지게 물어 왔다. 손가락 한 개까지는 수월하게 들어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중지까지 구멍으로 넣었다.

“……읏.”

아래턱이 덜덜 떨렸다. 몸에 힘을 풀고 싶은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두 마디까지는 한꺼번에 머금었지만 초조한 마음에 일단 급하게 어느 정도 풀렸다 싶을 때까지 몇 번 더 앞뒤로 흔들었다. 찔꺽이는 마찰음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굳게 다물렸던 주름이 조금 흐물흐물해진 느낌에 이 정도면 됐겠지, 하고 손가락을 빼내었다. 이제는 류주호의 성감을 돋울 차례였다. 아무리 받는 부위가 준비되었다고 해도, 류주호가 흥분하지 않으면 그저 의미 없는 헛짓에 불과했다.

그를 위한 두 번째 준비물은 바로 핸드폰이었다.

키스까지는 어떻게든 기분이 좋을 수는 있었다. 막말로 눈만 감으면 아무나랑 입만 붙여도 좋을 수 있는 게 키스 아닌가. 하지만 섹스는 달랐다. 들어가는 곳이 있으면 넣을 것도 있어야 했다.

대충 젤을 옷자락에 닦아 내고 언뜻 류주호를 올려 봤다.

그리고 온기현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어둠이 내린 그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듯 팔뚝은 간혹 희미하게 꿈틀거렸으며, 주먹은 꼭 무언가를 내리눌러 참는 것처럼 꽉 쥐고 있었다.

“이거 가져왔는데.”

그때 온기현이 핸드폰을 한 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는 제가 백팩에 가져온 작은 종이 박스 세 개를 집어 뒤쪽으로 밀듯이 이불 위에 떨어트렸다. 다름 아닌 콘돔이었다. 어떤 사이즈일지 전혀 몰랐기에 일단 제일 큰 것과 중간 것, 그리고 작은 것까지 세 개를 집어 왔다. 이것도 연채우가 추천해 준 브랜드였다. 과일 모양의 그림에는 눈 코 입이 그려져 있었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겉에는 ‘초박형’이라고 써 있었다.

아무런 몸짓도 없이 무릎으로 우뚝 선 채 가만히 있던 류주호가 그것을 달랑 집어 들었다. 차례대로 바나나 향, 딸기 향, 레몬 향이었다. 그걸 어이없다는 듯 보더니 코로 웃었다.

“이거 내 사이즈 아냐. 난 해외 직구로 산 것만 써.”

아.

부끄러운 자세를 한 채 순간 몸을 굳혔다.

‘하기 싫다는 뜻인가.’ 하고 이내 체념했다. 꿈지럭거리며 속옷과 바지를 다시 입으려고 움직일 때, 불현듯 류주호가 팔을 대뜸 뻗어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네모난 비닐 포장이었다. 기현이 산 것과 같은 해괴한 과일 얼굴 그림은 없었다. 시꺼먼 색에 어쩐지 포장의 크기가 굉장히 큰 것처럼 느껴졌다.

그에 온기현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을 어정쩡하게 올린 채 약간 갈팡질팡했다. 그러자, 불거진 턱을 겨우 움직인 류주호가 입을 열었다.

“뒤돌아.”

“어?”

“뒤, 돌아서, 허리 내리고. 엉덩이 들어.”

온기현이 그에 입을 멍하니 벌리자 류주호가 짓씹듯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은 거 달린 거 보고 싶지 않으니까. 뒤, 돌라고.”

“아, 안 그래도 나도 그러려고 했어. 응. 서로 그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네, 하고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 온기현이 조잘조잘 뭐라고 떠들었다. 곧바로 뒤돌아 그에게 등을 보였다. 슬그머니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 아래까지 내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리를 배배 꼬며 전부 벗어 던졌다.

사이즈가 큰 티셔츠 덕분에 엉덩이 맨살이 바로 드러나지는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혹시 남자 엉덩이를 보고 그가 마음을 바꿀지도 모를 일이었다. 엉덩이를 까지 않고도 가능할 것 같았지만, 혹시라도 엉덩이를 까 보이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엉거주춤 핸드폰을 들었다.

등 뒤에서는 온기현이 대체 또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지켜볼 심산인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창문으로 들이차는 달빛은 어둑한 음영만 드리우고 있어서,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쨍하고 빛났다.

몇 번 터치를 한 후에 마지막으로 살색이 난무하는 이미지를 터치했다. 어떤 영상이었다. 그리고 두 팔로 핸드폰을 가로가 되게 지탱한 다음 머리 위로 올렸다. 핸드폰 거치대 같은 자세였다.

이어 조용한 실내에 “Fu××!”, “Oh, God!” 같은 신음 섞인 감탄사가 울려 퍼졌다. 엊그제 연채우가 빌려준 아이디였다. 게이 동영상을 보려고 연간 회원 결제한 아이디인데, 일반 성인 동영상도 볼 수 있는 사이트라고 했다.

“하.”

순간 영상에서 들리는 질척한 마찰음에 “Sh×t!” 소리와 함께 낮게 울리는 헛웃음이 들려왔다.

“니가 남자랑 할 때 잘 안 될까 봐 가져왔는데. 저번에 같은 거 달린 남자랑은 하기 싫다고 했잖아. 그래서 이거라도 보고 있으면 그나마 나을 것 같아서.”

영상 속의 남녀는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불 위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며 말하는 탓에 기현이 말하는 중간에 “Holy ××ck!” 음성이 박자처럼 맞아 들어갔다.

“씨발, 무슨.”

어이없어하는 말에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조용히 툭 혼잣말을 뱉어 냈다.

“……노력이 가상하네.”

그렇게 따먹히고 싶었나, 라고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말은 물음도 확인도 아니었다. 절정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는지, 남녀는 영상 속에서 서로 쩝쩝 소리를 내며 물고 빨고 있었다.

무릎으로 이불을 짓누르며 조금씩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에 둔부를 뒤덮고 있던 티셔츠가 허리선을 따라 스르르 내려가며, 뽀얀 살이 달빛 아래 여실히 드러났다.

순간, 영상의 난잡한 소리에 섞여 뒤에서 무언가 들린 것 같았다. 욕하는 소리 같았다.

아마 제 엉덩이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꼴사납게 젖어 있을 것이다. 젤이 녹아내려 흐르는 느낌이 선연했다. 억지로 손가락 두 개를 욱여넣은 탓에 구멍 입구가 살짝 얼얼한 기분도 들었다.

“……더.”

스륵. 그가 이불 시트를 헤치며 조금씩 가까이 다가온 듯했다. 온기현은 제 성기가 보이지 않도록 무릎을 움츠리고 있었지만 다가온 무릎이 턱, 하고 제 무릎 안쪽을 건드렸다. 순간 움찔하며 무릎을 천천히 양쪽으로 벌렸다. 자연스럽게 허리가 내려가고 엉덩이가 위로 들렸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영상에서는 남녀가 자세를 바꾸는 중인 듯 부스럭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뒤에서도, 류주호에게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걸로 괜찮아?”

온기현이 얼굴을 묻은 채로 심상하게 물었다. 마치 밥 먹었어? 하는 어조와도 비슷했다.

사실 영상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뒤에 있는 류주호에게 제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별다른 반응이 오지 않았다.

얼굴을 묻고 핸드폰을 뒤통수에 댄 채 자세를 고쳐 잡으며 바투 쥐었다. 이번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찍―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류주호가 사용하는 해외 직구 콘돔인 듯했다.

혹시 영상으로도 안 되면 빨아 준다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는 그대로 씌울 수 있을 정도는 발기해 있는 것 같았다.

그때.

“!!”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돌연 왼쪽 엉덩이에 뜨끈한 손바닥의 감촉이 닿아 온 탓이다. 그 손바닥은 엉덩이가 한 손에 다 들어갈 정도로 커다랬다. 콱 짓이겨지는 살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넣을 건가.’

조금 무서웠다. 그의 크기를 눈으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 손가락보다는 굵지 않을까 싶었다. 레몬 향 콘돔을 썼으면 레몬 향 때문에 긴장감이 덜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긴장 때문에 조금 풀어졌던 구멍이 확 오므라든 것도 같았다.

“잠깐만. 나, 조금만, 기다려 봐. 이것 좀.”

기현은 말과 동시에 오른손만 뒤로 뻗어 아래를 더듬어 구멍을 찾았다. 젤은 어느덧 조금 말라 있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아래를 풀어 주는 건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해야 할 사람이 저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검지 한 마디를 점막을 헤집듯 집어넣었다. 흐읏, 하고 나오는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하하, 미치겠네…….”

“으, 읏……?”

“너 지금 내 좆 세워서 나, 딜도 취급하려고. 그러려고 섹스하자고 한 거야?”

“어, 어? 아니―……. 그게 아, ……!!”

헤퍼도 정도가 있지.

짓씹는 소리가 들린 건 그가 엉덩이를 터트릴 정도로 있는 힘껏 손아귀에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구멍을 거칠게 쓰다듬을 때였다. 조금 남아 있는 액체 때문에 찌걱, 하는 미약한 마찰음이 울렸다.

“뭐, 뭐 하……!”

“하아.”

“자, 잠……!, 으……!”

온기현의 손가락보다 배는 커진 압박감이 느껴졌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은 그의 손가락 한 마디도 들여보내기 버거웠다. 낮은 음색의 허스키한 신음이 들리면 괜히 산통이 깨질까 봐 목소리를 콱 틀어막듯 얼굴을 더욱 깊게 묻었다. 우븝, 소리가 났다. 동시에 혀를 찬 류주호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젤 통을 쥐어 다급하게 제 손에 부었다. 그러고는 구멍 위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도, 흐느적흐느적 빠지는 것도 같았다. 다가온 손가락이 주름 위를 둥글리듯이 한차례 쓸었다. 그리고 조금 풀어진 틈새로 미끄러트리듯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헉.’

제 손가락 두 개는 댈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 한 개만 집어넣는데도 어쩐지 스스로 할 때보다 훨씬 벌어지는 것 같았다.

한 마디 한 마디씩 파고든 손가락이 어느덧 점막 안쪽까지 깊게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듣기에도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난잡한 소리가 울렸다. 손가락이 강박적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안을 드나들었다. 영상이 아직 뒤통수 위에서 재생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는 점점 아래로 내려앉는 엉덩이를 눈치챘는지 억센 힘으로 다시금 콱, 그러쥐고는 손가락 하나를 더 쑤셔 넣었다.

“아으흣!”

―F××k!

막힌 입과 이불, 그리고 영상 사이로 신음이 먹혔다. 류주호가 “……잘 안 들리잖아.”라고 하며 무어라 욕설을 지껄였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 온기현이 다시금 얼굴을 묻으며 좀 더 잘 보이게 팔을 단단히 받쳤을 때, 류주호가 느닷없이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대충 종료해 버리고 침대 반대편 구석으로 휙 던져 버렸다.

“아, 앗……! 아흣……!”

놀라서 고개를 든 사이에 그의 손가락이 다시금 거세게 침입해 왔다. 그에 벌어진 입에서 막을 수 없는 신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질량감이 더 컸다. 내벽을 쓰다듬듯이 들어차는 손가락은 어느덧 두 개가 되어 있었다. 꽉꽉 물어 대는 속살을 좌우로 벌리듯 움직이는 손가락에 온기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흣, 주, 주호, 야……!”

“……너 내 이름 부르지 마. 구멍 찢어 버릴지도 몰라.”

가뜩이나, 좁아터져 가지고는.

그렇게 말하는 류주호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뒤로 물렸던 손가락이 다시금 짓쳐들어왔다. 손바닥이 둔부에 부딪쳐 철퍽철퍽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자 기현은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울 것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지금. 네 아래가, 안이 어떤지 알아? 흐물거려서, 물 나오는 게 완전……. 아, 완전 홍수 났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예민한 속살이 마찰될수록 절로 내벽이 척척하게 젖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외부의 침입을 빠듯하게 거부했던 것도 잠시, 세게 흔들어 주자 안은 기뻐하는 듯 체액을 흘리며 요동쳤다. 아래가 녹아내릴 것처럼 축축했다.

“진짜, ……너 때문에 내가……. 씨발.”

얼굴을 쓸어내리는 듯 음성이 들쑥날쑥했다. 온몸이 저릿했다. 눈이 몽롱하게 풀리고 허리가 잘게 경련했다. 잔뜩 곧추선 제 성기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만지고 싶었지만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싶어서 참았다.

하아.

뒤에서 들썩이는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온기현은 두 손으로 주먹을 쥐듯 이불 시트를 그러쥐었다. 후끈한 열기가 제 예민한 살갗 바로 앞에 다가와 있는 게 느껴졌다.

“후. 잘 봐. 이게 내 섹스야. 이게 누굴 딸딸이 용도로 쓰려고.”

“아, 아흐, 앗! 아아……!”

온기현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미, 미쳤어.’

귀두 선단으로 구멍을 툭툭 치듯이 가늠한 류주호가, 제 성기를 잡고 고정하더니 헤집어 벌리듯이 삽입해 오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감이었다. 손가락으로 조금 풀어 준 것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좁은 안쪽을 빡빡하게 헤집으며 진입했다.

“하아……. 미친. 이거, 무슨.”

그의 입에서 제 머릿속을 복사해 간 것처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간혹 류주호가 뭔가를 참는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짓씹듯 그르렁거렸다. 아래에서는 계속해서 들어오려는 좆 때문에 뿌득뿌득 소리가 났다.

발끝이 잔뜩 곱아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너무 컸다. 이러다가는 엉덩이가 손쓸 수도 없이 망가질 것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흐읏. 기, 기다려, 거기, 찢어질 거, 같…….”

“안 찢어져. 지금 네 구멍 완전히, 완전히…… 아…….”

“주호야……. 류주호ㅡ…….”

울음 섞인 애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사선으로 틀어 뒤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아흐악……!!!”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류주호의 성기가 예고도 없이 격하게 치고 들어왔다. 아직은 다물려 있던 안쪽의 속살이 단숨에 억지로 열리는 감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찔하게 숨이 막히고 눈앞이 핑 돌았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아흑……! 앗! 아아……!”

헤벌어진 입 밖으로 연신 탄성이 터졌다. 아래가 완전히 열린 두려움도 잠시, 류주호가 쉴 새도 없이 빠르게 추삽질을 시작했다.

“아, 아흑……! 흐으, 잠까안……! 주, 주호야……!”

“윽, 너, 하, 그거, 역효과랬지. 돌겠다, 진짜.”

학습력이 없는 기현을 탓하는 류주호의 말이 잇새로 비어져 나왔다. 버거운 감각에 바르작거리며 자꾸만 앞으로 달아나려고 하는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듯 그가 둔부를 양쪽에서 움켜잡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델 듯 뜨거웠다.

안에서 척척하게 새어 나온 물이 성기 표피와 맞닿아 음란한 소리를 자아냈다. 미칠 것 같았다. 뒤에서 얼마나 세고 빠르게 허릿짓을 하는지 철벅철벅 류주호의 장골과 제 엉덩이 살이 접붙다 떨어지며 끈덕지게 부딪쳤다.

온기현은 이제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알 주먹으로 류주호를 퍽퍽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빈 곳 없이 빡빡하게 들어찬 성기 때문에 격렬한 자극이 머릿속을 깡, 깡 울렸다.

다소 성급하고 다급해 보이는 류주호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중간중간, 주름 하나 없이 헤벌어진 아래를 들락거리는 제 성기를 확인이라도 하듯, 엉치뼈 부근으로 손을 가져가 양쪽으로 벌리듯 살을 들어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낭창한 허리로 이어지는 그 위까지 본능적으로 손을 올리려다가 다시금 아래로 내리는 행동이 반복됐다. 애써 내리누르는 충동에 제풀에 신경질이 났는지 애꿎은 엉덩이만 찰떡 주무르듯 이리저리 뭉개고 짓눌렸다.

‘아, 죽을 것 같……!’

확실히 온기현의 몸은 솔직했다. 자극점을 빈틈없이 쾅, 쾅 찧어 대는 통에 이미 온기현의 성기는 발딱 일어서서 가련하게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통증이 지나간 자리를 쾌감이 메웠다. 언제 아팠냐는 듯 앞을 만지고 싶어서 손이 꿈질거렸다. 쾌락으로 튀는 몸에서는 땀이 배어나, 얼굴이 축축해질 정도로 젖은 시트에 얼굴이 뭉개졌다.

퍽, 퍽, 퍽.

전신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몽롱한 정신으로 쾌감에 몸을 맡겼다. 격렬한 자극에 배 속이 간질거렸다. 찌릿찌릿 울리는 신경에, 거세게 박힐 때마다 온몸이 튀었다. 빡빡하게 물어 대던 아래가 완전히 열린 것 같았다.

“하윽……! 나, 그, 그마……!”

“어딜, 읏, 도망, 가려고.”

“기, 기부, ㄴ……! 조, 으, 하읏, 앗, 앗! 아흣……!”

“흣, 제대로, 하, 말해.”

안 그래도, 속이 터져 버릴 것 같으니까.

뒤에서 읊조리는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 온기현의 흐리멍덩하게 풀린 눈과 작게 뻐끔거리는 입은 척척하게 젖어 가기만 했다.

“하하, 흣, 욕심부리면서, 조르는 게, 하. 무슨, 이런 게……, 읏, 다 있지.”

골반을 부서지도록 콱 틀어쥔 류주호가 더욱 거세게 추삽질을 해 댔다. 몸에 비해 살이 많은 엉덩이 살이 으깨지도록 짓눌렸다. 거친 음모에 쓸려서 잔뜩 벌게지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였다. 손은 안타까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며 시트를 꽉 쥐고 있었다.

문득문득, 류주호의 거친 손이 골반 앞까지 가려다가 턱 멈추곤 했다.

꼭 뭔가를 부정하는 것처럼. 뭔가를 회피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럴수록 허릿짓이 더욱 거세어졌다. 온기현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깨를 둥글게 말고서는 팔을 아래로 뻗어 제 성기로 몰래 손을 가져갔다.

공중에서 애처롭게 흔들리는 선단을 검지로 쓸자마자, 온기현은 그대로 사정하고 말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빠른 절정이었다. 이미 극점까지 치달은 쾌감이 뻥, 하고 터져 버린 느낌이었다.

“아아……!”

“……!!”

븃, 하고 터지는 정액이 감싼 손바닥 위로 두둑 쏟아졌다. 다행히 이불 위에는 흘리지 않았다.

“……하, 씨발. 너 지금 박히면서…….”

입을 벌리고 등을 휜 채 온몸을 경련하는 기현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읊조린 류주호의 턱이 빠득 당겨졌다. 녹진하게 풀어져서 차지게 감기던 내벽이 류주호의 좆을 욕심 사납게 꽉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큭.”

안이 뜨끈해졌다. 그가 콘돔 안에서 길고 긴 사정을 했다. 허리를 두어 번 느리게 쳐 올릴 때마다 내벽에 쏘아 대듯 정액이 사출됐다. 꼭 콘돔이 찢어질 것처럼 둥그런 모양으로 뜨끈한 점액질이 가득 들어차며, 그 안에 다 담기지 못한 희뿌연 액체가 류주호의 성기 뿌리 쪽으로 주르륵 흘렀다.

“하아.”

“흣.”

안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이 제 크기를 유지하던 살덩이가, 철벅이는 소리를 내며 내벽을 훑듯이 주욱 빠져나갔다. 빼는 내내 기현의 몸이 경련하듯 흠칫, 흠칫 떨렸다.

드디어 몸을 옥죄던 힘이 떨어져 나갔고, 온기현의 몸은 허물어지듯 이불 위로 쓰러졌다. 아니,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겨우 부들거리는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몽롱했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시근덕거리는 숨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마치 전력 질주라도 한 것 같았다.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그럼 이만.”

“……뭐?”

“휴지 좀, 빌려 쓸게.”

류주호의 성기에 씌워졌던 콘돔은 입구가 묶인 채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그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해외에서 날아온 작은 콘돔 박스를 손에 쥐고 있었다. 안에서 하나 더 꺼내려는 것처럼 손을 넣은 상태 그대로, 기현의 말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들어 제 가방과 준비물들을 챙기고 바지를 겨우 입었다. 휴지로 슥슥 제 손을 닦고는 그 쓰레기도 제 백팩에 넣었다. 꼭 모든 흔적을 제가 가져가려는 것처럼.

“뭐 하는 거야, 지금.”

“집에 가야지. 다 했으니까.”

굳어 있는 혀 때문에 말이 어눌하게 튀어나왔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류주호에게는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류주호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어정쩡하게 서 있는 새에, 온기현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안녕. 섹스 잘했어. 잘 자.”

“……무.”

말리는 류주호의 말보다 온기현의 행동이 더 빨랐다. 비척비척 걷더니 곧 재빠르게 물건을 챙겨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씩씩하게 현관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황망한 류주호의 표정이 무색하게끔 다시금 안녕, 하더니 쾅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기현은 류주호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바닥을 박차듯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1층에 다다라서야 신음을 죽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래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잔뜩 젖고, 벌어지고, 쓰리고. 아직까지도 헤벌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마와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온기현의 양 볼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쾌감에 허우적대던 아까 전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쳐올리는 허리에 내벽이 뭉개지던 무시무시한 압박감까지도, 여태 제 몸에 잔여물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곧, 얕게 도리질을 치고는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타박. 타박. 구름 뒤로 달빛이 숨어 버린 짙은 어둠이, 기현이 땅을 딛는 소리로 채워졌다.

이마 위에 송골송골 맺히다 이내 주룩 흐르는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무더운 기운이 점차 물러나는 환절기는, 오늘따라 싸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어느덧 한여름이 지나고 있었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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