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부. Loosened it (1) (3/20)

2부. Loosened it (1)

하얀 공간이다.

온 사방이 새하얗고 깨끗하다. 눈을 내리니 먼지 한 톨 굴러가지 않을 것 같은 바닥이 보인다. 마찬가지로 새하얗다. 막 눈이 내린 설원처럼.

여긴 어디지.

아무도 없나.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소리를 내어 보려 하지만 목 안쪽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짜증이 밀려온다. 제멋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신체가 짜증스러웠다.

이제껏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아왔기에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은 극도로 혐오했다.

시선을 사방으로 돌렸다.

사각형의 공간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딱 제 한 몸 들어가서 양팔을 벌려 휘휘 저을 수 있을 정도 크기의 사각 형태의 박스였다.

누군가의 방인 것 같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왼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문손잡이와 꽉 닫힌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열면 나갈 수 있나?

미심쩍은 마음에 터벅터벅 걸어가서 문손잡이를 살펴봤다. 일반적인 문손잡이였다. 언제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해 보이는 동그란 문손잡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것을 잡고 오른쪽으로 천천히 돌려 보았다. 역시나, 잠겨 있지는 않았다. 문을 슬그머니 열자, 그 앞에는 꼭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똑같은 모양의 하얀 방문이 보였다.

그것은 꽉 닫혀 있었다.

두어 걸음 더 디뎌서 앞으로 나아갔다. 방문 밖에 서서 좌우로 둘러보자, 그곳에는 복사해서 붙이기를 한 듯한 방문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기분 나쁜 공간이다.

다시 들어가야 할까? 출구는 안 보인다.

미간을 찌푸리며 제가 있었던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인 건.

.

.

.

“헉!”

허억, 헉.

상체가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튕겨 올랐다. 심장이 미칠 듯이 방망이질을 해 댔다.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가 뱉었다.

“……허억, 하아ㅡ.”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허리께에 걸쳐진 매끄러운 시트가 스르륵 아래로 밀려 났다.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다. 그 탓에 상체가 마구 들썩거렸다. 윗도리를 벗고 자는 습관 때문에 씨근덕거리는 근육이 햇볕 아래 여실히 드러났다.

“아, 씨발.”

류주호는 핏줄이 두둑 불거진 손으로 아래에 걸쳐진 시트를 쥐어 침대 저편으로 내팽개쳤다.

그리고 묵직한 발걸음을 떼어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왈칵 문을 열고 생수 한 병을 집어 올려 뚜껑을 거세게 뜯어서는 목구멍 뒤로 욱여넣듯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제야 타는 듯한 갈증이 가라앉는 듯했다.

조금씩 머리가 식어 가는 중에 시선을 들어 제 오피스텔을 둘러봤다.

어딜 보나, 자신이 살고 있고 매일같이 생활하는 공간이 맞았다. 스튜디오 형식으로 된 커다란 오피스텔 안에는 흐트러진 침구와 커다란 침대, 그리고 몇몇 단조로운 디자인의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도 꿈속에서 본 것 같은 하얗고 깨끗한 공간은 없었다.

류주호는 손에 든 빈 물병을 와작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마지막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시야에 박힌 듯 들어온 것을 상기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패였다.

각 문 앞마다 달린 번호판이었다.

그 문패에는 ‘54’라고 적혀 있었다.

* * *

“세이―프!”

우렁차고 단호한 소리가 운동장 한가운데서 쩌렁쩌렁 울렸다. 양팔을 양쪽으로 뻗은 커다란 제스처를 취한 심판이 내지른 소리였다.

그 판정을 듣고 타자가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1루에서 모자를 고쳐 썼다.

유니폼 앞면에는 ‘H.K’라는 이니셜이 크게 새겨져 있었다.

타 대학과의 비정기적인 친목 경기가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장소는 한국 대학교 부지 내의 야구 경기장이었다.

경기는 이제 막 열기가 달아오를 5회 초 2사 만루인 상황.

흐름은 단연 한국 대학교 쪽이 우세했다.

하지만 한국 대학교의 더그아웃 분위기는 반대로 썩어 가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이 날아가는 험악한 난장판은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난장판인 게 다행일 지경으로 살벌하게 고요했다.

“아, 오늘 쟤 왜 왔대? 누가 불렀어?”

“몰라.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와서 앉아 있는 거야. 애나벨 인형이야 뭐야?”

“야야. 감독이 불렀다나 봐. 그래도 명색이 학교 대 학교 맞짱인데 류주호 네가 나와야 한다고.”

“맞짱은 무슨. 말죽거리 잔혹사에 한 맺혔나. 고딩 때도 안 떠 봤을 맞짱을 왜 여기서 찾아.”

“와, 분위기 뒈졌다, 진짜…….”

삼삼오오 모여서 쑥덕거리는 같은 야구부 학우들의 말은 정작, 대화의 주인공인 류주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안 들어가게 할 정도로 숨죽여 대화하고 있다는 말이 옳았다.

“근데, 류주호 저 새끼는 왜 저러고 있는데?”

“글쎄? 지 손도 잘나서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가 보지. 내버려 둬라.”

류주호는 벤치 끄트머리에 몸을 늘어트리고 앉아 있었다. 다리를 벌려 쭉 뻗은 채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의 표정이 어떤 상태인지 엿볼 수도 없도록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주위에서 떠들어 대는 말마따나 제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 올린 채로 계속해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끔 입매가 꽉 다물리며 불거진 턱선이 꿈틀거렸다.

가끔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꼴을 보며 누군가는 “쟤 어떤 놈 죽도록 패고 와서 감촉 음미하는 거 아니냐.”라는 소리까지 지껄일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썩어 가는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전부 류주호의 탓이었다.

“어, 근데 다음 타자…….”

“아, 씨. 야, 네가 가서 말해.”

“저, 저요?”

“그래, 새꺄. 여기서 네가 너밖에 더 있냐?”

취미이자 재미로 시작한 게 분명한 대학 야구부인데도 운동부 특유의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는 엄격했다.

대학까지 와서 선배의 말에 찍소리도 못 하고 고분고분 말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참 뭐 같다고, 역시 OB는 대학교 활동을 금지해야 한다고 OB로부터 지목당한 남자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류주호를 향해 다가갔다.

“저, 저기. 주호야.”

하지만 정작 저와 같은 학번인 동기한테도 말을 못 놓는 처지임은 마찬가지였다. 류주호 한정이었지만 말이다.

불러도 류주호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여전히 제 손바닥을 죽어라 노려보고 있었다. 한국인 같지 않게 길게 쭉 빠진 사지가 얄미울 정도로 단단했다. 물론, 자신이 그의 피지컬에 압도당해서 류주호를 겁내는 건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주, 주호야. 저, 저기, 네 차롄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다시 불러 보았다.

그때, 불현듯 류주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깊게 팬 눈매 사이로, 사납게 치켜뜬 눈이 경기장을 향했다. 그에 절로 몸이 움찔했다.

그는 쫙 펴고 있던 제 손을 꽉 쥐며 고개를 양쪽으로 꺾어 우두둑, 소리를 냈다. 몸을 푸는 중이었다. 그리고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더니 제 옆에 세워 두었던 야구 배트를 그 손으로 쥐어 올렸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조지고 와야겠다.”

“뭐, 뭐?”

류주호를 부르러 온 선배는 헉 소리를 냈다. 설마 야구 배트로 상대방 투수를 아작 내려는 심산인가 싶었다. 폭력은 절대 안 되었다.

국내에서 톱 3에 드는 명문대 간의 야구부 폭력 사건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하지만 미처 말리기도 전에 내디딘 류주호의 걸음이 더 빨랐다.

류주호는 타석에 올라서서 야구 배트를 땅에 두어 번 툭툭 두들기더니 공중에서 가볍게 돌렸다. 부웅― 하는 소리가 포수의 귀를 따갑게 때렸다.

타석이 아닌 투수 쪽으로 향할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는, 류주호가 배트로 사람을 치려는 게 아닌 걸 알자마자 자신이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휴― 하고 안심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타석에 올라선 류주호의 얼굴은 여전히 살벌하기 그지없어서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류주호는 다시금 야구 배트를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시선을 멀리 던졌다.

글로브에 야구공을 툭툭 두들기고 있는 투수는 초조함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2사 만루.

스코어 따윈 알 바 아니었다.

사내새끼들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 같이 한데 섞여 뒹구는 스포츠는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 기분만 더러웠다.

한 놈만을 정확히 패는 킥복싱이나 권투 같은 것은 즐겨 해 왔다. 오늘 나온 것도 딱히 의미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찝찝하고 거지 같은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서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딱 그것을 해소하기에 알맞았다. 제가 던진 공으로 아웃을 기대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피식, 입에서 바람이 샜다.

야구 배트를 손아귀에 쥐고 들어 올려, 다리를 넓게 벌려 섰다.

투수가 자세를 잡았다. 다리를 굽혀 올린 투수가 힘껏 공을 날렸다.

공이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 존 안에 날아 들어왔다. 아마추어가 던지는 것치고는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류주호는 공기를 사납게 가르며 팔을 휘둘렀다.

땅―!

야구 배트에 직격으로 맞은 공이 투수의 오른쪽 머리 위를 크게 감싸며 저 끝까지 날아갔다.

“어, 어어―!!!”

“안타다, 안타!!!”

뒤쪽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류주호의 시선은 공의 궤적이 아니라, 정면의 투수 얼굴을 향했다. 냉한 눈빛으로 투수의 얼굴을 지켜봤다.

역시나, 제가 예상했던 대로, 일말의 기대가 먼지처럼 사라져 허무함에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야구부에 나오는 이유는 단순히 이런 순간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다른 건 없었다. 그런데.

류주호의 얼굴이 아까보다 더욱 굳어졌다. 전혀 즐겁지 않은 것처럼 딱딱한 표정이었다.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귓등 밖으로 밀려났다.

류주호는 속으로 혀를 차며 거칠게 읊조렸다.

“……좆 같네.”

손에 들린 야구 배트의 묵직한 감각이 왠지 거슬렸다. 버석하고 차가운 느낌이, 손에 차지게 감기는 어떤 매끄러운 감촉을 더욱 상기시켰다.

마치 그 손에 질척하게 감긴 무언가를 떨구어 내듯, 류주호는 야구 배트를 거칠게 바닥에 던져 버렸다.

* * *

쿵!

털썩.

“아―!”

중심을 잡지 못한 몸이 침대 매트에서 바닥으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폈다.

입에서 절로 으아아, 하는 앓는 신음이 샜다. 얼굴은 완전히 울상이었다.

“에이, 저번에는 잘됐는데.”

온기현은 구부정하게 몸을 한 채 제 침대 매트리스 위에 깔린 손바닥만 한 파스를 내려다봤다. 아예 등에 닿지도 않아서 어디에도 붙은 곳 없이 아까 깔아 놓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누군가 아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당사자인 온기현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다시, 다시.”

살갗 위로 땀 한 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털털 소리를 내며 삐거덕거리며 돌아가는 오래된 선풍기는 원룸 안의 무더운 공기를 약간은 밀어내 줄지언정 땀을 식힐 시원함은 선사하지 못했다. 하물며 저 혼자 옷 벗고 난리를 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온기현은 침대 끄트머리에서 등을 대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또다시 침대 위로 등을 대고 눕는 자세로 몸을 날리려 힘차게 바닥을 박찼다.

쿠당탕탕.

이번엔 머리를 감쌌다. 무게 중심을 잘못 잡아서 침대 모서리에 이마를 박기 직전에 겨우 몸을 말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온기현은 온몸을 던져서 등에 파스 하나를 붙이기 위해서 이렇게 생쇼 아닌 생쇼를 벌이고 있었다. 누구한테 붙여 달라고 부탁하기도 뭣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서 등에 파스를 붙일 방법은 바로 보호 스티커를 떼어 낸 파스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 제 몸을 파스 위에 얹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잘됐었는데 벌써 두 번이나 실패했다.

“우씨, 다시, 다시.”

누가 보면 몸 개그라도 준비하는 줄 알겠지만 온기현은 나름 진지했다.

“하나, 둘……!”

띠리릭. 철컥.

“기현아, 형님 왔다.”

“악!”

세 번째의 둔탁한 충격음과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우우, 하고 웅크려 끙끙대는 온기현의 등짝을 향해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 생지랄이야? 위에는 홀딱 벗고서.”

“윽……. 채우야, 왔어?”

“오냐.”

온기현은 상체를 들어 제집인 양 신발을 대충 탁탁 벗고 설렁설렁 원룸으로 걸어 들어오는 이를 바라봤다.

연채우는 온기현의 오랜 소꿉친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어진 악연이라고 할 수 있는 연채우와는 서로의 옷장 속의 팬티 개수까지 알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그 인연은 연채우가 대학교 진학을 포기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같은 반이었던 것을 계기로 어찌어찌 그 이후로도 여전히 질긴 인연을 이어 오고 있었고,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그는 지금은 허구한 날 온기현의 자취방에 들락거리고는 했다.

“아, 미치겠다. 라면 없냐?”

“왜? 어제도 술 많이 마셨어?”

오자마자 마른 배를 문지르며 찬장을 뒤적거리는 연채우를 보며 기현이 주섬주섬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어. 엉아가 간만에 좀 달렸다. 라면이이ㅡ 어디갔나아ㅡ.”

“……혹시 저번에 그 바에 간 건 아니지? 질 나쁜 놈들한테 잘못 걸렸던 거기.”

“아, 라면 찾았다.”

온기현의 걱정 어린 잔소리를 뒤통수로 받아 낸 연채우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금세 냄비를 찾아다가 수돗물을 솨아― 하고 틀었다.

“아냐, 아냐. 그 새끼들은 내가 아주 다시는 좆 부리 못 휘두르고 다니게 자근자근 조져 줬으니까 이제 얼씬도 못 하지. 어제는, 그냥 원나잇.”

라면 봉지를 뜯던 연채우가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벌리고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말아 그 사이로 메롱, 하듯이 혀를 내밀었다.

작게 킬킬거리는 그를 보며 온기현은 그럼 그렇지, 하고 자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언뜻 목덜미 위로 붉은 울혈이 보였다.

온기현은 그런 그의 성적 지향성을 예전부터 알았다. 하지만 그 어린 시절, 한밤중에 놀이터 그네를 타면서 고뇌와 낙담을 공유하며 울음을 터트린 것도 하루가 끝. 연채우는 밝은 성격 덕에 즐거움을 알아 갈 방법들을 강구하기 시작했고, 현재도 그런 자유로운 나날들은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는 엉덩이가 가볍다며 간혹 험한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당한 것은 그대로 되갚아 주며 해피 섹스 라이프를 보내는 중이었다.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칼칼한 냄새를 맡던 온기현은 “아, 맞다!” 하고 제 손뼉을 딱 쳤다.

“나 고기 사 온 거 있는데 고기 구워 먹자.”

“오, 진짜?”

“응! 안창살이랑 갈빗살이랑.”

“이야. 니가 돈이 어디서 나서 소고기를 다 샀냐? 맨날 고깃집에서 알바해서 소고기는 싫다면서 삼겹살만 먹었잖아. 그것도 타임 세일 막판에 다 말라비틀어지기 직전에.”

“내, 내가 언제? 그리고 돈은 그냥……. 어쩌다 생겼어.”

온기현이 얼버무리듯이 우물거리자 연채우가 흐음, 하고 말을 늘이면서 미심쩍은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을 슬쩍 피하며 냉장고를 열어서 아직 뜯지도 않은 고기 팩을 꺼냈다.

“와, 마블링 봐라. 예술이네.”

“그치? 완전 맛있겠다. 채우야, 프라이팬 꺼내.”

“오키.”

상은 순식간에 차려졌다. 라면의 알싸한 국물과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군침 도는 소고기 냄새가 마치 천상에 온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연채우는 집에서까지 고기를 구워야겠냐며 집게를 빼앗아 가려고 했지만 온기현은 소고기는 프로가 구워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고는 집게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앞에 구워지는 족족 쉼 없이 날라다 주고는, 저는 집게째로 집어다가 입에 넣었다. 잔뜩 사 놓았던 소고기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채소나 쌈장 없이 고기만으로도 두둑이 배를 채웠다.

“와. 간만에 포식했다. 남의 살은 왜 이렇게 맛있냐.”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연채우가 배를 두들기며 침대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근데 너 나 오기 전까지 진짜 뭐 하고 있었냐? 저건 또 뭐고?”

그 위에는 깜빡하고 치우지 않은 파스가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아.”

이제야 생각난 듯 연채우를 향해 등을 돌려서 티셔츠를 슬금슬금 걷어 올렸다.

“나 파스 좀 붙여 줘.”

“잉? 파스? 너 어디 다쳤어? 새꺄, 너 맨날 왜 그렇게 다쳐. 이게 다 몸 쓰는 일 해서 그런다, 자식아. 좋은 대학 갔으면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혀를 차며 타박한 연채우가 그의 말과는 달리 잽싸게 파스를 가져와서 온기현의 등 뒤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았다.

“허이구. 이건 또 어디서 당했대. 야, 너.”

“응?”

연채우가 자못 심각해진 어조로 말하며 파스의 필름을 찍 떼어 냈다.

“무슨 고수익 알바 이런 데 낚여서 헛짓거리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고수익 알바? 그게 뭔데?”

솔깃한 온기현이 고개를 휙 돌리자 연채우가 파스를 탁 붙이며 혀를 찼다.

“돈 주면서 사람 패고 진창 굴리는 거.”

“아야야.”

“거기다 돈까지 떼이면 아주 가관이지, 가관이야. 고수익은 개뿔. 완전 사기꾼, 씨발.”

“왜 그렇게 잘 알아?”

“어?”

온기현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연채우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시선을 피하며 볼을 긁적이자, 온기현의 눈에서 스파크가 파박 튀었다.

“너, 너 혹시 그렇게 당한 적 있어? 뭐야! 누구한테? 어쩌다가? 너 그러니까 내가 아무나 막 만나고 다니지 말랬잖아! 누구야, 누구. 연락처 있어? 번호 내놔 봐! 어? 이 새끼들을 내가 그냥!”

“아……. 이 자식 또 혼자 흥분했네. 아, 쫌! 시끄러! ……별거 아니었다고. 다 지나간 일이고. 형님은 이미 지난 과거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초연한 듯 농담조로 대꾸하는 연채우의 말에, 흥분해서 일어나 씩씩거리던 온기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서로가 아픈 곳을 훤히 내보이지 않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하지만 상처를 핥아 주는 처량맞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게 이제까지 오랫동안 우정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이유다.

그에 한숨을 삭이며 풀썩 주저앉았다.

“짜증 나, 연채우.”

“파스까지 붙여 줬는데 짜증 난다니 너무한다!”

“고기 먹여 줬으니까 쌤쌤이야.”

“말발 존나 좋아, 온기현.”

그 말에 입을 비죽이자 연채우가 온기현의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헤쳤다.

“근데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너야말로 간잽질만 하지 말고 진짜를 좀 만나라.”

은근히 진중해진 어투에 머리 위를 덮어 놓았던 손을 신경질적으로 탁 쳐 냈다. 사실 ‘탁’이라고 속으로 생각한 것뿐이지 ‘툭’ 건드리다시피 해서 밀어 낸 것뿐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야, 그럼. 누구 보는 사람마다 ‘나 그 사람 좋은 것 같다’, ‘이 사람 좋은 것 같다’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그러냐. 근데 또 대시는 안 해. 그게 연애 간잽질 아니고 뭔데?”

“……나는 항상 진심이었거든?”

“까고 있네.”

“진짜라고!”

온기현이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리고 팔을 앞으로 붕붕 휘둘렀다. 하지만 재빨리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 밀어 내는 연채우의 길쭉한 팔 때문에 허공에 휘두르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진심인 건 하나도 없었으면서. 너 좋아하는 사람 한 명이지? 예전부터.”

“…….”

“나를 속이냐?”

팔에서 힘이 빠지며 공중을 가르던 두 팔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러나저러나 옛날부터 제 곁을 지키며 이 꼴 저 꼴 다 본 녀석이기에 이미 녀석도 다 알고 있었다.

제가 어떤 마음을 품어 왔는지를.

“……근데. 희망이 없잖아, 이거야말로 진짜.”

힘없이 중얼거리자 이마를 누르던 연채우의 팔에서도 힘이 빠졌다.

이 하나야말로 정말, 희망이 없었다.

류주호의 무분별한 마음은 어디에나 널려 있고, 또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 뒤편의 후미진 그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학관 그 어느 곳, 과방, 도서관, 심지어 무심코 위를 올려다본 나무 위에도.

그의 마음이 혹은 손길이, 덜렁거리며 걸려 있을 것 같다.

어디에나, 또 누구에게나 방만하게 열려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저기 걸려 있는 것들 중, 무엇 하나 진심인 것이 없었다. 오는 사람을 굳이 막지는 않았지만, 떠나는 사람을 붙잡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자신을 향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것이다.

자신은 남자였고, 또 눈에 띄는 외모도,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혹할 만한 매력을 지닌 이도 아니었다.

그 헤픈 애정의 귀퉁이 한편도 차지하지 못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내가 무슨 수로.”

그런데 왜 이렇게 포기가 되지 않는 건지.

자신도 이 사람 저 사람한테 헤프게 마음을 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왜 이 마음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수는 무슨. 뭐 그렇게 꼭 하나만 따질 필요는 없어. 나를 봐라. 몸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매일매일이 해피하잖냐. 굳이 마음까지 맞을 필요 있어? 마음과 몸, 둘 다 안 될 바에야, 둘 중 하나라도 즐거운 편이 낫지 않겠어?”

아니, 그러니까. 그것조차 안 된다니까.

“너는…… 365일 발정기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고…….”

“뭐? 이 새끼가!”

중얼거리는 말을 어찌 그렇게 잘 알아들었는지 연채우가 득달같이 잡으려 달려들었다. 온기현이 재빨리 피하자 또다시 쫓아왔다. 좁은 원룸에서 성인 남자 둘이 나 잡아 봐라, 하는 것만큼 소모적인 일도 없었지만 이게 둘이 지내는 나름의 방식이었다.

엎치락뒤치락 쫓고 쫓기던 둘은 결국 헉헉거리며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와중에도 온기현의 등이 신경 쓰였는지 발로 툭툭 치며 침대 위로 올라가라고 떠미는 연채우였다.

꾸물거리며 침대 위로 올라가자, 연채우가 그릇을 정리한 후 설거지를 했다.

달그락거리는 소음을 귀에 담으며, 온기현은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고단한 하루가 너울거리는 구름의 장막 뒤로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으으―!”

으아악, 으학, 으악!

정수리로 쏟아지는 찬물을 온몸으로 받아 내며 온갖 괴성을 다 질렀다. 여름에는 찬물 샤워. 온기현만의 철칙이었다. 사실은 뜨끈한 물에 몸이 노곤해질 때까지 체온을 덥히는 게 훨씬 좋았지만, 자신의 마르고 볼품없는 체격에 알게 모르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터라 그 외의 것에서 남성성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여름에 샤워를 할 때마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찬물을 뒤집어쓰곤 했다. 비명은 최대한 지르지 않는 것이 목표였지만, 그것까지는 제 이성으로 제어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턱에 호두가 생길 정도로 최대한 참아 보는 게 한계였다.

벅벅 몸을 씻은 후 수전을 잠그고 머리를 푸르르 털었다.

수건으로 온몸을 마구 문지르며 물기를 닦고서는 욕실에서 나와서 대충 걸쳐 놓은 티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결국 그날, 연채우는 마른 바닥에서 잠시 잠을 청하더니, 또 어스름한 밤이 되기도 전에 나가 버렸다.

집에 자주 놀러 오는 터라 연채우의 칫솔도 온기현의 것과 함께 양치 컵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걸로 오랫동안 이를 신경 써서 닦고 온몸을 꼼꼼하게 씻고서 나가는 것을 보니 누군가를 만나서 뭘 할지는 뻔할 뻔 자였다.

그만하면 좋으련만.

온기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이 가고 나서 몸이 가는 거 아닌가. 그냥 몸만 맞대서 살을 비빈다고 그게 그렇게 좋은가 싶었다.

문득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제 배를 만져 봤다. 그리고 슬그머니 손가락을 꿈지럭대며 바지 안으로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배꼽 아래에서 성기로 이어지는 맨살이 손끝에 부들부들하게 잡혔다. 까슬한 감촉 하나 없이 보들보들한 살갗이 느껴졌다. 온기현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전신의 털이란 털은 죄 머리털로 간 것 같았다. 무슨 자석도 아니고. 그 탓에 자라야 할 게 제대로 자라지 않고 희미하게 흔적만 남기듯이 솜털만 자라 있는 것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짜증 나.’

발모제라도 사서 바를까.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지만 사실 그럴 돈이 있으면 라면이라도 한 박스 더 살 게 뻔한 자신이었기에 어차피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했다. 괜히 애꿎은 브리프만 당겼다가 팡 놓았다.

이불을 잘 포개어 정돈하고 먼지 하나 없는 바닥이었지만 물티슈로 삭삭 닦았다. 좁디좁은 공간이더라도 항시 청결함을 신경 썼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을 쭉 둘러보고서야 대충 머리를 슥슥 매만지고는 백팩을 등 뒤로 둘러멨다.

띠링.

그리고 막 집을 나서려던 때, 핸드폰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잔뜩 구겨진 운동화 안으로 겨우 발을 끼워 넣으려다 멈춰 서서 핸드폰을 들어 올려 메시지를 확인했다.

* * *

묵직한 백팩을 옆자리에 내려놓고 숨을 가다듬었다.

요새는 채 1킬로그램도 되지 않는 얇고 가벼운 노트북을 갖고 다니는 대학생들은 흔하디흔했고, 태블릿이 대학 생활에 필수라는 둥 하며 파우치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새내기들도 넘쳐났다.

이제는 부팅 시간만 해도 하세월인, 거의 벽돌 열 개를 합쳐 놓은 듯한 무게감의 구식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학생은 아마 온기현뿐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백만 원을 호가하는 기계를 덥석덥석 살 배짱은 안 되었다.

지금 있는 것도 굴러가기는 잘 굴러갔다. 어차피 인터넷과 문서 작업만 하는 거니 고사양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너무 무거워서, 제가 키가 여기서 이 이상 크지 않는 이유가 이 엄청나게 무거운 노트북을 매일 어깨에 둘러메고 다니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급격하게 우울해지는 것만 빼면, 바꿀 이유는 하등 없었기에 스스로 합리화하고는 했다.

오늘은 미리 도착해서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위잉― 하고 엄청난 소음을 자랑하며 한참을 돌아가더니 겨우 윈도 화면이 켜졌다.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한참이나 걸려서야 물결 표시가 없어졌고 파란 바탕 화면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앉아 있자 카운터에 앉아 있는 직원이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작은 목소리로 괜히, “아아. 언제 오지. 오면 같이 시키려고 하는데…….”라고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저번에 류주호가 조 모임에 딸랑 저만 나와서 괜한 시간을 허비했다고 인상을 찌푸리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오늘은 그래도 조 모임다운 조 모임을 할 요량이었지만, 그래도 온기현 혼자만 떨렁 나온 것은 매한가지였다.

저 때문에 피해를 봤다거나 시간 낭비를 했다거나 티를 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자각은 하고 있었다.

미련도 못 떨치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또 바보같이 그에게 민폐를 끼치는 모습도 보이기 싫었다.

파일을 여는 데도 오래 걸리기 때문에 그가 오기 전에 미리 파일을 띄워 놓았다.

온기현은 한글 파일을 더블 클릭해 놓고 허리를 쭉 폈다. 이제 통증이 많이 가라앉아서 자유자재로 허리를 움직일 수 있었다. 파일을 여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크흠, 큼.

괜히 민망해서 일부러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눈썹을 딱 모으고, 입은 일자로. 한쪽 손을 올려 입가를 살짝 가리고 나머지 손으로는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들기면서 고민하는 느낌을…….

“눈은 세모꼴로 뜨고 거기서 뭐 해.”

“허억.”

정수리 위에서 들린 기가 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얼굴을 홱 들었다. 눈높이보다 한참 위에 자리한 커다란 키 때문에 고개가 빠지도록 목을 젖혀야 했다.

류주호였다.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의 단추 두어 개를 살짝 풀고 머리를 가볍게 넘긴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청량함이 물씬 풍기는 옷차림이었다. 온기현은 저도 모르게 놀란 그 상태로 입을 헤벌렸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네.”

“아.”

냉소적인 음성에 입을 합 닫고 다시금 허리를 쭉 폈다. 그는 어쩐지 짜증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모로 돌린 채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류주호의 성질이 좋지 않다는 것은 저도 알고 아마 그의 지인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의 이질적인 외모에 혹한 ‘와꾸가 인성이다’라고 주장하는 몇몇 동기들이나 아직 그를 제대로 접해 본 적이 없는 후배들은 그를 끊임없이 찬양했지만, 어찌 되었든 그는 인성 쓰레기였다.

하지만 지금 류주호의 짜증은 이유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인성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흠, 흠. 저, 사실 오늘도 다른 애들은 참석 못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근데 걱정 마. 자료는 철저하게 준비됐으니까. 오늘은 시간 낭비하는 일 없을 거야.”

“……뭐?”

순간 류주호의 눈에서 불길이 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늘하게 내뱉는 되물음에 온기현이 몸을 움칠했다.

어라. 이유 없이 인성질을…… 할 수도 있나……?

류주호는 시선을 온기현에게 돌리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었다. 조 모임인데 온기현밖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없으니 또다시 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느냐며 성질을 부리는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온기현이 “조원들 말이야.”라고 대꾸하자 류주호는 그제야 작금의 용무가 원래 무엇이었는지 생각난 듯 “아아.”라고 중얼거리며 마치 내가 여기 그것 때문에 나왔었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러면 어디 한번 봐.”

“아, 응. 근데 음료 시켜야 할 것 같아. 뭐 마실래?”

온기현은 조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생각이었다. 음료를 사는 게 조장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에게서 받은 십만 원으로 전부 고기를 사다 먹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다. 마침 어제 아르바이트비도 들어왔겠다, 몇천 원 정도는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던 때. 그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에 어정쩡하게 무릎을 굽힌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됐어, 내가 살게. 너 뭐 마실 거야?”

“어? 아니, 내가.”

“너한테 뜯어먹을 게 뭐 있다고.”

픽, 하고 어이없다는 양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온기현의 눈이 세모꼴이 됐다.

“…….”

“빨리 말 안 하면 아무거나 시킨다.”

“그럼 나 초콜릿 프라푸치노 라지 사이즈 위에다가 휘핑크림 잔뜩 얹고 초코칩 가루도 많이많이.”

“…….”

“…….”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말없이 온기현을 바라보던 류주호는 고개를 홱 돌리며 말없이 카운터로 향했고, 얼마 뒤 그는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과 제가 말한 초콜릿 프라푸치노 라지 사이즈에 이것저것을 왕창 얹은 것을 가져왔다.

“이딴 게 입에 들어가? 혀 썩겠네.”

“……고마워. 잘 마실게.”

온기현은 음료를 받자마자 통이 넓은 빨대로 먼저 휘핑크림을 듬뿍 찍어 입에 와앙 하고 집어넣었다. 정말 천상의 맛이었다. 세상에 휘핑크림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바보다. 빨대를 음료 안에 깊숙이 넣어 양 볼이 움푹 패도록 초콜릿 프라푸치노를 쪽 빨아당겼다. 시원하고 혀가 아릿할 정도로 진한 초콜릿의 걸쭉한 음료와 얼음 알갱이가 입 안에 가득 들어왔다.

‘맛있다.’

평소에는 사실 잘 사 먹지 않는 것이었다. 가격 탓도 있었지만. 그런데 오늘따라 입에 단 게 왜 이렇게 당기는지. 아마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

행복한 표정으로 정신없이 빨대를 빨아 당기고 있을 때, 문득 눈을 들었다가 류주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온기현에게 시선을 박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모로 돌려 버렸다. 그리고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목이 타는 듯 굵은 목울대를 제 손으로 거칠게 두어 번 쓸었다.

“아, 미안. 빨리 보자.”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 온기현은 아차, 싶었다. 너무 초코 음료에 열중했나 싶었다. 온기현은 커다란 유리컵을 슬쩍 밀어 놓고 아직까지도 위잉― 하고 격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노트북을 그가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어, 잘 안 보이지? 내가 거기로 갈게.”

“됐어.”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류주호는 심드렁한 대꾸와 함께 제 의자를 옆으로 조금 끌어다가 온기현 쪽으로 다가왔다.

“어……. 좀 더 가까이 붙어야 할 거 같은데.”

“이 정도 거리면 충분히 보여.”

“……알겠어.”

온기현은 입을 삐죽였다. 괜히 제 오래된 티셔츠 아랫단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우스 위로 손을 올렸다. 한글 파일로 된 리포트 화면 레이아웃을 작게 축소해서 일단 목차를 설명했다.

“일단, 초반에 이렇게 기업 소개부터 시작하려고 하는데…….”

온기현은 그렇게 노트북을 쳐다보며 마우스와 키패드를 조작했다. 확대해서 보고 내용의 흐름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간혹 버퍼링이 걸려 터질 듯이 팬이 돌아갔지만 당황하지 않고 “아, 이거 왜 이러지.”라고 중얼거리며 노트북 옆구리를 퍽퍽 쳤다.

그러던 때.

“야, 줘 봐.”

“어?”

“마우스 줘 보라고.”

“아.”

멀찍이 떨어져 시선만 던지고 있던 류주호가 대뜸 마우스를 요구했다. 온기현은 “여기.” 하며 넘겨줬다. 그와 동시에 류주호의 굵은 팔이 뻗어 나와 온기현의 상체 앞을 가로막듯 마우스를 채갔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짝 붙은 류주호의 온기가 가깝게 느껴져서 살짝 몸을 옆으로 떼어 냈다.

하지만 벌어진 거리만큼 류주호가 의자를 끌어 붙어 앉은 상태라 더 이상 달아날 데도 없었다. 볼을 손등으로 연신 쓸어내렸다. 류주호는 마우스를 빠르게 움직여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빠르게 읽어 내렸다.

“너.”

그리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류주호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며 온기현을 쳐다봤다.

“이거 너 혼자 했지?”

“뭐?”

초콜릿 프라푸치노로 뻗어 가던 손이 중간에 뚝 멈췄다.

“……어떻게 알았어?”

목울대가 꿀꺽, 울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류주호는 마우스를 빠르게 움직여 자료 처음부터 아래까지 쭉 내렸다.

“자료 수집 출처도 일관적이고, 리포트 정리까지 그 어쭙잖은 둘이서 깔끔하게 손봤다고? 이게? 이건 한 사람이 한 거야. 그 세 명이 자처해서 했을 리도 없고. 그럼, 너밖에 없지.”

“…….”

온기현은 할 말을 잃었다.

같은 학번의 같은 경영학과로서, 호기롭게 조장을 자처한 것은 자신이었다. 전과하기 전에 있던 과는 영문학과였다. 과 특성상 조별 과제가 적었던 터라 교양 수업에서 함께했던 조 모임이 이제껏 했던 팀플의 전부였다. 그리고 하늘이 내린 운발 덕에, 훌륭한 조장과 훌륭한 조원들을 만나 잔잔한 바다를 순항하는 배처럼 무사히 조별 과제를 마칠 수 있었다.

흔히 말하는 ‘망한 팀플’은 온기현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그래서 당연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또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어쨌든 발표할 수 있게 결과만 나오면 되는 거 아니야? 너……. 발표자 입장에서는.”

“그래. 자료는 잘돼 있어. 이 상태면 PPT도 꽤 잘 나오겠지. 그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사람이 만든 거니까.”

류주호는 ‘한 사람’이라는 말을 강조하듯 끊어서 내뱉었다.

크흠, 큼. 온기현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정곡을 찔린 것에 더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어쩐지 따가웠다.

“그래서.”

“어?”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해 봐. 왜 나는 같은 조인데도 이 상황을 전혀 몰랐는지.”

“……듣기로는 다들, 사정이 있다던데.”

“사정?”

하.

류주호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핸드폰 꺼내 봐.”

“핸드폰은 왜?”

“어서.”

칫. 온기현은 툴툴대면서도 순순히 핸드폰을 꺼냈다.

“카톡 열어 봐.”

카톡 앱을 실행했다.

“차례대로, 국문학, 의류학, 그리고 신입생. 걔네한테서 온 톡 열어.”

“어? 그건…….”

류주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아…….

1×학번 국문학 상의현에게서 온 채팅 창을 열었다. 그러자 류주호가 핸드폰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왜 가져가! 내놔!”라고 외친 소리는 류주호의 휘휘 젖는 손짓에 묻혔다.

1×학번 상의현 : [기현 씨, 아니 온기현 선배님. 정말정말 죄송한데요. 하……. 저희 큰아버님이 이번에 돌아가셔서……ㅠㅠ 장례를 치르느라 이번 리포트 작성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신에 혹시 다른 일 시킬 거 있으면 꼭 저한테 말해 주세요! 정말정말 죄송해요.] 15:32

[그랬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좋은 곳으로 잘 보내 드리고 오세요.] 15:40

“하.”

류주호는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이놈은 학기 때마다 팔촌의 친척까지 죄다 줄초상 치르는 새끼일 거고. 다음.”

“…….”

온기현은 입만 벙긋거리며 그가 건네는 핸드폰을 받고 의류학과 김미래의 채팅 창을 열었다.

1×학번 김미래 : [저, 선배님. 죄송해요. 제가 사실…… 지병이 좀 있어서……. 학교 수업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몸 상태가 영 안 좋아서요……. 리포트 작성은 이번에 좀 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진짜…… 진짜…… 죄송해요……. 대신에 제가 다른 건 다 열심히 할게요……. 아, 맞다. 그런데 제가 어릴 적부터 심하게 폐렴을 앓아서 발표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우는 이모티콘)] 09:02

[몸 괜찮으세요? 약이랑 끼니 잘 챙겨 드시고 부디 몸조리 잘하시길 바랍니다.] 09:13

류주호가 무표정한 낯으로 빠르게 읽더니 또다시 말을 툭 뱉었다.

“얘도 마찬가지로 팀플 할 때마다 온갖 지병은 다 갖고 다닐 거고. 이 정도로 매번 아프면 굿해야지. 다음.”

“…….”

핸드폰을 건네받은 온기현은 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에 류주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넌……. 왜 그렇게 사람을 삐딱하게 봐?”

“무슨 말이야?”

“아니, 진짜로 장례를 치를 수도 있고, 진짜로 아플 수도 있잖아. 근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라서 그걸 다 거짓말 취급하는데. 과제가 고인보다 위야? 지병보다 위야? 과제 같은 거, 그냥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되잖아. 그걸 왜 그렇게 고깝게 받아들이는데?”

온기현은 숨도 안 쉬고 들이받았다. 말을 끝맺으니 숨이 쉭쉭 하고 터져 나왔다. 그래도 할 말은 했다.

‘나는, 나는 왜 이런 애를…….’

그런 자조감이 문득 고개를 들었지만, 뭐 그런 생각을 잠깐 해 온 것도 아니고, 몇 해 동안 지속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실 온기현도 내심 어라, 싶긴 했다. 저번에 이어서 왜 갑자기 이런 우환이 팀원 모두에게 닥치는지. 내심 ‘설마? 혹시? 에이, 진짜로?’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실은 곧바로 그들에게 ‘그거 거짓말 아니세요?’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엔 그러지 못하고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런데 류주호가 굳이 짚어 주고 힐난하는 모양새가 된 게 억울하고 원통스러워서 오히려 그들을 두둔했다. 괜히 분하고 화가 났다.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또다시 욱하는 마음에 치받으려던 때.

“……하아.”

“??”

류주호가 손으로 양 관자놀이를 지그시 짓누르며 눈을 덮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가 다시 손을 떼어 내었다. 온기현은 대체 왜 그러는지 궁금해서 눈을 크게 뜨고 코끝을 찡긋거렸다. 그러자 그가 다시금 손으로 얼굴을 덮고 짜증이 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단언하는데.”

“……어?”

“그 신입생 새끼는, 매일 술에 절어서 지금쯤 간덩이가 썩어 곪아 가고 있을 거야. 안 봐도 뻔하지.”

“야, 너 진짜!”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대들었다. 하지만 금세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정말로 새내기인 신용철은 톡으로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저번처럼 초록위키나 블로그 같은 데서 모조리 긁어 온 자료는 출처를 지우지도 않고 보내기 일쑤였다.

그리고 통 연락이 안 되길래 종내에는 통화를 시도하자, 전화를 걸 때마다 술자리라고 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끊어 버렸다. 매번 MT다, 대면식이다, 하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안 그래도 좀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한마디 할까 하던 차였다. 그렇게 속을 끓이다가도 그냥 직접 하자, 하고 이내 마음을 삭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상황을 류주호가 지적하는 점은 얄미웠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라는 격 같았다.

“정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는 방법은 있어.”

온기현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쏘아보자 류주호가 아랑곳하지 않고 노트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로 옮겨진 이 편지는 66시간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해서 66통을 A가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 주셔야 합니다. 복사를 해도 좋습니다. 혹 미신이라 하실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영국 대학의 ‘비이하 뒤지즈’라는 사람은 1980년에 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편지를 하루 만에 66통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는 그 학기 성적을 모두 A를 받았습니다.

어떤 이는 이 편지를 받았으나 66시간 이내 자신의 손에서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그는 F를 받았습니다.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고 66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교수는 F를 철회해 주지 않았습니다.

기억해 주세요.

팀플을 좆같이 아는 사람이라도 이 편지를 66통 보내면 A를 받을 것이고, 그러지 않으면 낙제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 내용을 변경하거나 삭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66통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사람에게는 A가 깃들 것입니다. 힘들겠지만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하세요.

과 수석의 행운을 빌면서…….]

“자, 이제 이거 그대로 전송.”

“……이게 뭐야?”

“뭐냐니. 팀플이지.”

“아니이. 이걸 대체 왜 보내는데?”

이런 악몽 같은 편지를 받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어릴 때 유행하던 행운의 편지를 살짝 각색한 이것이야말로 66이라는 불길한 숫자와 F라는 불길한 문자가 맞물린 최악의 편지라고 생각했다. 그 옛날 꼬꼬마 시절, 똑같은 편지를 하나하나 써 내려가다가 손이 아파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다려 봐.”

심드렁하게 읊은 류주호는 제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슥 집어넣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했던 그는 핸드폰을 몇 번 터치하더니, 노트북으로 뭔가를 전송했다. 그리고 온기현이 작성한 리포트의 제목을 똑같이 하고, 행운의 편지를 몇 번 복사, 붙여 넣기를 한 후 용량을 대충 리포트처럼 보이도록 얼추 비슷하게 맞추었다.

그리고 파일 그대로, 단톡방에 전송. 단톡방에 ‘글로벌 3대 OTT 업체의 생존 전략.hwp’라는 제목으로 파일이 올라갔다. 온기현은 그저 멍하니 류주호가 하는 양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아무도 읽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뭔데. 뭐 하자는 건데. 마치 사탄을 보는 양 핸드폰을 붙든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금세, ‘읽음’ 표시가 한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1×학번 상의현 [좋습니다! 내용 잘 짜인 것 같습니다!]

1×학번 김미래 [좋아요! 리포트 최종본 목차와 내용, 너무 훌륭히 구성됐네용!(박수 치는 이모티콘)]

1×학번 신용철 [확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충성하는 이모티콘)]

“…….”

온기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세 명은 리포트 파일을 아예 열어 보지도 않은 것이 틀림없다. 설마가 역시나였다. 류주호의 말이 다 맞았다.

류주호는 그것 보라는 듯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유리컵을 들고서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잘잘 흔들더니 비웃음이 잔뜩 담긴 목소리로 읊었다.

“전부 제명.”

* * *

결국 그렇게, 팀플 멤버는 류주호와 온기현 둘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류주호는, 온기현이 만들어 온 리포트를 그대로 활용해서 PPT 제작을 해도 되겠다고 했다. 원래 과제 분담 중에 류주호가 발표를, 그 전까지의 PPT 제작을 온기현이 하는 걸로 되어 있었기에 당연히 자신이 만드는 줄 알고 있었는데.

그랬는데. 또 왜 이렇게 된 거지.

온기현이 책을 품에 한 아름 안은 채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암……. 웬 한숨이냐. 한숨 쉬면 정력 날아간다아…….”

그리고 그 옆의 낮은 책상 위에 두꺼운 외국 서적 한 권을 올려놓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몸을 축 늘이고 한숨 푹 잔 모양새로 부스스하게 말하는 이를 흘끔 곁눈질했다.

학생들이 한차례 우르르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도서관의 구석진 곳, 온기현이 잔뜩 쌓여 있는 책들 옆에서 컴퓨터를 붙들고 빠른 속도로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연채우. 너 여기 잠자러 왔어? 심심하다고 하길래 들여보내 줬더니.”

“어엉……. 머리 울리니까 크게 말하지 마라.”

철없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심정이 딱 이럴까. 자신은 바빠 죽겠는데 옆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는 친우를 보니 한숨이 발끝에서부터 밀려 나왔다.

“언제 끝나? 빨리 밥 먹으러 가자. 너 수업 없잖아, 이제.”

“오늘 고깃집 알바 있어.”

“아, 맞다! 그럼 나두 갈래.”

“나 일해야 한다니깐.”

“응. 나는 그 옆에서 밥 시켜 먹을게.”

온기현은 “맘대로 해라.”라고 중얼거린 뒤 청구 기호별로 파일에 쉬지 않고 입력을 했다. 반복적으로 손을 놀릴 때는 자꾸만 잡생각이 떠올랐다. 그 잡생각이란, 류주호와의 지난 대화였다.

“그럼 마무리는 둘이서 하지. 언제 시간 돼?”

“시간이라니? PPT 작성은 이제 나 혼자 하면 되는데.”

“야. 이거 개인 과제야? 아니잖아. 팀플이잖아, 팀플. 그리고 너랑 나는 뭐지?”

“……팀……?”

“알면 빨리 되는 시간 말해.”

결국 온기현은 아르바이트 시간이 비어 있는 요일인 이번 주 금요일 저녁을 불렀다.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게 그럼 그때 연락하겠다며 카페에서 휑하니 자리를 떠 버렸다. 정신없는 새에 그렇게 단둘이서 과제를 하는 약속을 잡아 버렸다.

괜스레 심란해져서 연채우가 베고 있던 서적을 옆으로 거칠게 빼내었다. 순간 책상에 머리를 박은 연채우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씩씩거렸지만 무시하고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옆에서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가 들려 도서관에서 제발 조용히 좀 하라며 잔소리하려고 고개를 돌리던 때.

‘응?’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옆구리에 책을 낀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살짝 놀란 듯 보였다. 온기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는 어딘가로 가던 중 시선을 문득 돌렸다가 다시금 몸을 왼쪽으로 살짝 튼 상태였다. 스포츠머리보다 조금 긴 길이의 이마를 덮는 검은 머리, 멀리서도 눈에 띄는 스포츠계의 커다란 체구. 훈훈하다고 할 만한, 굵은 선을 가진 얼굴이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

마치, 여기서 절대로 마주치지 않아야 할 것을 본 듯한…….

“도와줄까?”

“어? 아, 아니.”

순간적으로 연채우에게 되물으며 고개를 돌린 틈에, 그 남자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온기현은 학교 내에서 지인이 많지 않았다. 전과한 탓에 경영학과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단대에 친구가 많냐고 묻는다면 신입생 때부터 아르바이트에 파묻혀 사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의아한 마음도 연채우가 청구 기호별로 겨우 분류해 놓은 책들을 헤집으며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제지하느라 금세 잊었다.

“도와줄게! 얼른 끝내고 나가자!”

“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리고 시간 채워야 나갈 수 있거든? 그냥 집에 가 있어, 쫌. 학교에 외부인이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거 없다고 말했지.”

연채우는 입이 뚱하게 나와서는 투덜거렸다. 그리고 홱 돌아서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도서관을 나서면서도 온기현이 말한 대로 “그럼 나 집에 가 있는다. 빨리 와야 돼.”라며 보채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방해꾼을 보내니 한결 일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툭 기억 저편 속 바짝 붙어 앉아 전해지던 뜨끈한 온기가 떠올랐다.

쿵, 쿵, 쿵.

왼쪽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 계속 꾹꾹 눌렀다.

마음은 왜 하나인 걸까? 여러 개면 좋을 텐데.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 도저히 실현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려 좋은 점을 찾아내고 마음을 기울이려고 많이도 애썼다.

연채우가 농담조로, 이러다 나중에는 얼굴에 눈코입만 달려 있어도 좋다고 달려들겠다며 핀잔을 줬다.

애초에, 속절없이 흔들리고 기우는 이 단 하나의 마음에는 이유가 없었다. 마치 불시에 닥친 사고 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십 개의 이유가 필요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사실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여자인 것도, 남자인 것도.

이미 마음을 가져가 버린 한 사람이 아닌 이상, 사실 눈코입이 없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고백은 곧 실연이었다. 용기가 아니라 오기였다.

실연당하지 않으면,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여차하면 다시 휴학계를 낼 셈이었다. 남자가 자신에게 고백하다니 끔찍하다며 진절머리를 치는 것 정도야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받아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종지부를 찍었어야 했는데.

그래야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데.

자꾸만 이러면 미련스럽게도, 점점 더 자신이 구차해져 버린다. 사실은 이미 구질구질하고 너덜너덜해진 마음이다. 구차함이 더해져 봤자, 오래되어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마음이 이제 와 새삼 반짝거릴 것도 없다.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얼굴을 벅벅 문질러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 미련퉁이.

“저…….”

그러던 때, 문득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으앗, 깜짝이야. ……어?”

“선배님……. 잠깐, 얘기 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들자 팀플 조원인, 아니 조원이었던 새내기 신용철이 공손하게 손을 모은 자세로 울먹울먹한 표정을 하고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띵―동―.

제가 눌러 놓고도 크게 울리는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춤하고 걸음을 뒤로 물렸다.

[1502호]

문패에 분명 그렇게 적혀 있다.

‘맞게 찾아온 거겠지.’

온기현은 핸드폰을 열었다. 약속한 금요일 저녁 전, 대뜸 카톡으로 주소와 호수를 보낸 류주호에게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조 모임 할 장소라고 말했다.

“카페는?”이라고 물어보자, 한참 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다가 거기는 시끄러워서 얘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잘만 들리던데.

척 보기에도 고급 오피스텔처럼 보이는 건물이다. 한 층에 두 세대밖에 없고, 류주호가 미리 일러뒀는지 1층의 경비원 ― 심지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연배 높으신 분이 아니라 젊은 남자였다 ― 이 “15층 방문자 맞으시죠?”라며 오피스텔 출입구를 열어 줬다.

그리고 도착한 15층.

벨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현듯 문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리면서 이쪽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덜컹하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안녕.”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려다가 놀라서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나, 들어가도 돼?”

“누가 안 된대?”

류주호는 문을 열어 놓고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온기현을 바라보다가 온기현이 손가락으로 안을 가리키자 그제야 싸가지없는 말을 지껄이며 몸을 비켜 줬다. 그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라 온기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긴장돼서 신경 쓸 틈도 없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실례합니다.”

백팩을 양손으로 꼭 쥔 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와아―.

온기현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터벅터벅 안쪽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돌려 휘휘 둘러봤다. 혼자 사는데도 엄청 넓었다.

제가 생각해 왔던 흔하디흔한 대학생의 자취방이 아니었다. 자신이 사는 낡은 빌라의 원룸만을 떠올리던 빈약한 뇌에 인지적 부조화가 일어날 지경이었다.

“여기 혼자 살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처럼 그렇게 묻자, 류주호가 잠시 간격을 두고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나 누구랑 같이 못 살아. 공동생활은 성미에 안 맞아서.”

“아, 그렇구나…….”

자기 같으면 룸메이트를 여럿 모아서 월세 부담을 악착같이 줄였을 텐데. 괜히 그런 상상이나 해 보았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서민적이었다.

하지만 류주호가 사는 집의 거실을 보자마자 여기서는 그럴 수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탁 트인 거실은 빠른 달리기를 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거기다 침실도 겸하고 있었다. 이불이 잘 정돈된 커다란 침대가 벽에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통창이었다.

“우와, 야경 끝내주겠다.”

온기현이 입을 떡 벌리며 통창 앞으로 향했다. 15층인데도 건물 앞쪽에 막힌 것이 없어 남산 타워가 저 멀리 보였고 창 아래로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마치 미니어처 모형처럼 불규칙하게 늘어서 있었다.

온기현은 홀린 듯 유리창에 딱 붙어서 펼쳐진 도심을 감상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거주 환경과 인성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 좋은 것을 눈에 담으며 살아도, 본디 지니고 있는 싸가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류주호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멍하니 바깥을 둘러보다가 헉, 하고 정신을 차렸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그러고 보니 가방도 멘 채였다.

“아, 미, 미안. 과제 얼른 하자.”

당황스럽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자, 류주호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서는 미동도 없이.

한참 동안을 바라본 것처럼, 눈동자가 한 지점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지점은 온기현을 향해 있었다.

‘내가 뭐 실수했나?’

온기현이 눈을 껌뻑껌뻑 감았다 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한 게 뭔지 생각나지 않았다. 미리 사전에 인터넷 지식인에 ‘싸가지없는 조원 집 방문할 때 주의할 점’이라도 물어보고 올걸,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괜히 제 낡은 티셔츠 밑단을 구기며 물었다.

“어……. 저기, 내 옷에 뭐 묻었어?”

그 말에 류주호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뭐지? 오다가 새똥이라도 맞았나? 하면서 제 옷을 이리저리 살피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씨발, 사람 속도 모르고…….”

“뭐?”

“주접 그만 떨고 와서 앉아. 가방은 언제까지 메고 있을 건데. 거북이 등껍질이야 뭐야.”

거북이 등껍질…….

제 몸의 일부처럼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이기에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동시에 미처 제때 반박하지 못한 자신한테 부아가 치밀어서 입술이 뚱하게 삐져나왔지만 “알았어.” 하고 대답은 잘했다.

침대와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어쩐지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흘끗 류주호를 쳐다봤다.

그는 칼라가 없는 흰 셔츠 위에 얇은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고, 진회색 세미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입어도 원체 외관이 좋아서 다 어울렸지만, 오늘은 특히나 신경 쓴 느낌이 났다. 화보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은 그 모습을 보고 절로 쿵쾅거리는 제 심장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 약속 있으니까 빨리 끝내자는 얘긴가 보다.’ 하고 생각하며 속으로 체념 섞인 한숨을 쉬었다.

좌식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류주호가 그 옆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최신 노트북을 옆으로 슥 밀었다. 척 보기에도 1킬로그램도 채 나가지 않아 보이고 얇고 빨라 보였다.

“어, 저기. 네 거는 안 켜?”

“네 걸로 하면 되잖아.”

“내 거는 완전 고물이라서 오래 걸리는데. 오늘 안에 켜지려나 모르겠다, 하하.”

“이거 고장 났어.”

류주호가 제 하얀 노트북을 던지듯이 치워 버렸다.

‘좀생이.’

완전 거짓말 같았다. 최신 노트북에 제 손때가 묻는 게 그렇게 싫고 아까운가 싶었다. 불퉁해진 마음에 코끝을 살짝 찡그렸다.

제 노트북 전원을 켜자 위잉― 소리가 심하게 울려 퍼졌다. 괜히 민망해져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러다가 순간 어깨를 움찔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이, 싸하고 청량한 향이 지척에 와 닿았다.

류주호가 어느새 제 옆까지 다가와 앉아 있었다. 좌식 소파라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자칫 제 왼쪽 무릎이 류주호의 허벅지에 닿을 것 같은 아슬아슬한 거리에 있었다.

쿵, 쿵, 쿵.

‘아, 씨이…….’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입 안이 마르는 느낌에 입을 달싹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절반으로 잘라 왼쪽으로만 온 신경이 쏠린 기분이었다.

‘미쳤나 봐, 진짜…….’

“켜졌네. 리포트 파일 열어 봐.”

그때, 불쑥 시야로 류주호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그가 노트북 앞으로 몸을 숙이며 몸을 좀 더 가까이 붙인 탓이었다.

‘아…….’

조각칼로 섬세하게 깎은 듯한 수려한 얼굴선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깊게 팬 눈매 탓에 얼굴에 음영이 짙게 졌다.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나이였던 그때도 얼굴에 앳된 티는 날지언정, 외모만큼은 이미 완성형이었다.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을 것이다. 짙은 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별을 박은 것처럼 반짝였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홀린 듯 쳐다봤다. 마우스를 달깍이는 손이 어느새 온기현의 몸 앞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제 심장의 고동이 행여나 전달될까 싶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럼에도 시선은 그의 옆얼굴을 향해 있었다.

그때.

피식.

문득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온기현이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영원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것 같던 눈동자가 미끄러지듯이 굴러 자신을 향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얼굴 뚫어지겠네.”

“……어, 어?”

두근두근.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했다. 애써 시선을 회피하고 싶었는데,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마치 자석 같았다. 어떻게 피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그냥 흔들리는 동공으로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숨쉬기가 점점 어려워질 때쯤, 류주호가 옆으로 몸을 스윽 비켰다. 아빠 다리는 가지런히 펴진 지 오래였다. 긴장이 극에 달해서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근데 너, 내 어디에 반한 거야?”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왔다. 신경이 온통 그쪽에 쏠려 있던 기현이라도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동자를 모로 굴리던 기현이 자동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싸가지없.”

“아니.”

그거 말고.

류주호는 이제 그 말은 안 믿는 눈치였다.

“……그냥, 도서관에서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망설이다 웅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류주호가 잠시 가늠하는 시선을 던졌다.

“도서관? 흠, 대학교 들어와서 도서관에 간 건 손에 꼽을 정도인데. 하긴, 사서 알바를 하니까 뭐, 그럴 만하네.”

그는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실은, 도서관에서 봤다는 시점이 류주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건 그렇고 깡도 좋네. 남자한테 고백을 다 하고.”

그가 돌연 화제를 이어 갔다.

“넌 내가 소문이라도 냈으면 어쩔 뻔했어?”

“안 낼 거 아니까.”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자, 류주호가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언뜻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날 너무 착하게 보는 거 아냐?”

“그게 아니라, 넌 귀찮고 성가신 건 딱 질색하잖아―.”

하물며 소문의 중심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그의 존재 자체가 구설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남자한테서 고백받고 그것을 제 입으로 떠벌릴 정도로 입방아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고, 제가 그 화제를 부러 만들어 내며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담담하게 읊자, 류주호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가 등을 길게 늘어트리고 있던 소파 등받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난, 애초에 너랑 고백해서 사귈 생각도 없었어.”

“왜.”

한껏 낮아진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바로 다음 사람한테 마음 주고, 넘어가면 그만이니까?”

들려오는 류주호의 목소리에서는 웃음기가 싹 빠져 있었다. 온기현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억지로 그렇게 해서라도 20대 중반까지 질질 끌어 온 첫사랑을 끊어 내고 싶었다.

“하하, 그래.”

언뜻 들린 메마른 웃음소리에 온기현은 고개를 돌려 류주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서늘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잔뜩 날카로워져 있다.

잠시간 침묵이 가로지른 시선을 타고 머물렀다. 그러다 돌연, 류주호가 풀어진 입매 사이로 심드렁하니 내뱉었다.

“사실 난 남자는 잘 상상이 안 가거든. 이제까지 고백한 남자 새끼 얼굴도 기억 안 나고. ……사내새끼 구멍에 박는 게 뭐가 재밌을까? 나랑 같은 좆 달린 새끼가 걸걸한 목소리로 내 밑에서 앙앙거리는 거, 생각만 해도 토 나올 것 같은데.”

“…….”

“너는 어때?”

온기현이 내리깔았던 눈을 번쩍 들었다. 뭐를, 이라고 묻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류주호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나직하게 되물었다.

“나랑 하는 거, 상상해 본 적 있어?”

“없는데.”

온기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류주호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설마. 한 번도?”

“응. 없는데.”

단호하게 자르는 말에 류주호가 흐음, 하며 고개를 앞으로 빼내었다. 온기현의 시선이 자석의 반대 극을 마주한 것처럼 반대로 도로록 굴러간다.

그때.

“아!”

류주호가 온기현의 어깨를 움켜쥐더니 소파 쿠션으로 그대로 밀어 버렸다. 온기현의 상체가 앉은 상태 그대로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 위를 류주호가 상체를 팔로 지탱하며 완전히 덮어 퇴로 없이 가두었다.

온기현이 허억, 하고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뱉었다. 단단한 팔뚝이 제 얼굴 양옆에 떡 버티고 있었다.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서 눈을 굴리면서 작게 헐떡였다.

“이런 것도?”

“아.”

돌연 무겁게 내려온 체중에 숨을 삼켰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가슴팍이 짓누르듯이 상체를 압박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눈앞이 뱅글뱅글 돌았다.

진짜 심술궂다. 이 싸가지, 개싸가지! 못돼도 너무 못됐다.

“아니라고……!”

이런 와중에도 온몸에 피가 돌아 제 얼굴이 불긋하게 상기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재빨리 제 양팔을 들어 얼굴 앞을 막으며 바르작거렸다. 뒷머리가 쿠션에 사정없이 짓눌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기현의 몸을 암석처럼 짓누르고 있던 류주호가 움찔하더니 점점 더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패닉에 빠져 그것까지 눈치채지 못한 온기현이 이제 그만 비키라고 소리를 빽 지르기 직전, 돌연 몸이 훅 가벼워졌다. 류주호가 몸을 순식간에 일으킨 것이다.

“하아, 하아…….”

온기현은 폐부에 잔뜩 모아 둔 숨을 터트렸다. 그리고 저도 얼른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완전 사방으로 뻗어서 부스스해져 있었다.

류주호는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얹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있었다. 옆에서 보인 표정에는 불쾌감이 가득해 보였다.

“아니면 됐고. 그런데, 네 말마따나 아니라면, 너무 몸 달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마.”

“…….”

“좀 불쾌해.”

툭 내뱉는 말에 온기현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꼭 미련을 못 떨치고 너덜너덜하게 끄트머리를 겨우 붙잡고 있는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았다. 들킨 건 아니겠지만, 지레 제 발이 저렸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못되게 굴 건 없잖아.’

“윽…….”

울컥하고 목구멍에 맴도는 말을 그대로 토해 냈다.

“아니라고, 미친놈아!”

마구 소리치면서 몸을 일으키려 버둥거렸다. 그는 어쩐지 기분이 안 좋은 표정으로 있다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떼며 손을 뻗었다.

그것조차 온 힘을 다해 밀어 버렸다. 일어서기 위해 공중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다리를 힘껏 버둥거렸다. 퍽. 발끝에 둔중하게 부딪히는 감각이 걸렸다.

윽, 하고 앓는 목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온기현은 당황한 나머지 몸을 벌떡 일으켜 백팩을 정신없이 둘러맸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집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미친놈, 미친놈!

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바깥으로 퉁기듯 달려 나간 온기현은 양손을 무릎 위에 지탱한 채 헉헉, 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며 이마를 짚었다. 커다란 티셔츠가 어느새 가을 냄새를 머금은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펄럭였다.

몸이 달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니, 아! 진짜.

꺾이듯 푹 숙여 무겁게 늘어지는 목덜미가 잘게 떨렸다.

‘……온기현, 이 미친놈.’

* * *

익명

09/05 21:53

제목 : 한번만 살려주새요

내용 :

시발 나ㅓ오랴머노아러 나 어떡하냐 진심 아

교양 선택 개꿀인 줄 알고 수강했는데 조별 과제 뭣 같이 걸림;;;

체육계라서 좀 기분전환? 삼아서 재밌어 보이는 강의 신청했단 말임;

근데 팀플에서 자료조사 맡았거든?

솔직히 자료조사 거기서 거기잖음; 나도 나름대로 존나 열심히 했단 말임

근데 우리 과가 행사가 존나 만아서 솔직히 나도 좀 신경 못 쓴 부분도 잇는대;

암튼 최종본이라고 단톡으로 리포트 파일 와서 아니 다들 좋다고 하길래

나도 좋은거 같다고 일단 대답하고 나중에 열어 봤거든?

근데 시발;ㅋ

거기에 행운의 편지 써 있었음;;;;; ㅡㅡ

66통을 66시간 안에 보내라고;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시발 존나 사람 농락하는 거자나; 완전 좆댐;

이거 드랍하면 이번 학기 좆망하는거임……

나 좀 살려주라 어케 해야 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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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 행운의편지시발앜ㅋㅋㅋ 나 옛날에 그거 받고 무서워서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그날 넘어져서 팔 부러짐ㅋㅋ

익명(글쓴이)

└ 니 추팔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익명

└ 위로추

익명(글쓴이)

└ 아니 위로 말고 조언;

익명

└ 니가 잘못했는데 나한테 지랄 ㅋㅋ

익명

└ 학생……~~ ^^ 꽃 한 송이,,,두고 갑니다. ――――. 언제든 ~~…… 힘들 땐 찾아와요.^^ 문은…… 항시 열려 있습니다~!……^^

익명

└ 누가 이 교수님 끌어내

익명

└ ……? 형님이라고……불러요^^~~……

익명(글쓴이)

└ 저 어떻게 해야 해요 형님???ㅠㅠ

익명

└ 귀여운 후배님…… 오늘 밤……형아가 술 사주까……?!……^^

익명

└ 쓰니 오늘 형님한테 아다 따이겠네. 미리 메리 개통 축하

익명(글쓴이)

└ 시발

익명

└ 이제부터 학교에 콘돔 입고 가야겠네

익명(글쓴이)

└ 뭔 개소리야

익명

└ 좆됐으니까

익명

└ 조장한테 가서 함 빌어 보면 안 됨?? 열심히 하겠다고 시키는 거 다 하겠다고 그래

익명(글쓴이)

└ 아니; 안 그래도 좀 순둥해 보이는 선배가 조장이라서 찾아가서 부탁했거든? 근데 안 된대ㅡㅡ

익명

└ 싹싹 빌어봐

익명

└ 성의 보일 거 있으면 보이고 부탁해 봐 음료라도 사 드리던지 비타500 같은 거

익명

└ 비타오백??ㅋㅋㅋㅋ 가성비 ㅁㅌㅊ?

익명(글쓴이)

└ 아니 혹시 몰라서…… 동기 세 명한테는 저거 보냈거든; 개욕먹음……과 선배들한테 보내면 나 진심 매장당할 거 같아서……그래서 선배 있는 데로 찾아가서 조심스럽게 부탁했더니 조장 선배가……. 63통 마저 보내고 연락하래ㅡㅡ;;

익명

└ 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웃기네

익명(글쓴이)

└ 안 그렇게 생겨서 존나 독함 ㅅㅂ 독한 척하는 줄 알았는데 걍 독종이었음 피도 눈물도 없음

익명

└ 갑자기 그거 기억나네…… 앤타에 자주 등장하는 경영학과에 존나 유명한 존잘남 있잖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성격 개쓰레기거든ㅋ 같이 팀플했던 사람 중에 참여도 낮은 애한테 교내에 잇는 계단 개수 다 세어오면 이름 제명 안 시키겠다고 했던 거…… 그때 걔도 울면서 글 썼었는데ㅋ

익명

└ 그거 나야ㅠ

익명

└ ㅅㅂㅋㅋ 본인 등판ㅋㅋ 그때 어케 됨? 자기가 근데 개수 맞는지 안 맞는지 어케 알아 ㅋㅋ 다 셈???

익명

└ ㅡㅡ 다 셌겠냐 시발 나 그때 이후로 2층 이상 계단 보면 헛구역질 나서 엘베만 탐

익명

└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보면 계단이랑 섻스해서 입덧하는 줄ㅋㅋ

익명

└ 개새기야

익명

└ 우냐?ㅋㅋ

익명

└ 존나 트라우마라고; 근데 그 선배 인성 뒤졌는데. 그래도 옆에 금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고 싶어 하는 변태 마조들 존나 많음; 하…… 와꾸 좋고 돈 많으면 다냐?

익명

└ ㅇㅇ 다야

* * *

“헉……!”

폐부에 고인 숨을 토해내듯 내쉬며 침대에서 상체를 튕겨 내듯 벌떡 일으켰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쿵쾅거리고 가슴이 쉼 없이 들썩였다.

“하아…… 하아…….”

이런 젠장.

헐떡이는 몸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에야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도 집 안에는 낮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미명도 채 오지 않은 캄캄한 밤이었다.

손을 들어 이마에서부터 뒷머리까지 훅 쓸어 넘겼다. 머리털 끝까지 땀으로 범벅이었다. 축축해진 손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래도 체온이 굉장히 높았다. 잔뜩 달구어진 몸이 방금까지 제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 상기시켜 주었다.

또 그곳이었다. 54개의 방이 있는 하얀색 공간.

류주호는 이번에는 54번째 방 밖에 있었다. 그리고 줄지어 늘어서 있는 53개의 방을…… 전부 불태워 버렸다. 마구 뛰어다니며 죄다 불을 질러 놓았다. 현실이 아닌 꿈이었기에 제가 생각한 대로 전부 이루어졌다.

꼭 범죄자가 된 것 같은 찜찜함이었다. 53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불유쾌함 또한 은근하게 남아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해괴한 꿈인가 싶었다.

아직도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감각이었다.

‘왜, 누구나 마음속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든다고 하잖아. 그 크기만 다를 뿐이지.’

문득, 양희인이 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온기현에게 있어서, 54번째 마음.

그리고 54번째의 방에 들어가 있는 자신.

저 53개의 방에 대체 어떤 연놈들이 들어차 있는지 모르겠지만, 꿈속의 자신은 불을 지르며 희열에 젖어 있었다.

설마.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불쾌함을 덜어 내고자, 샤워를 하기 위해 축축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제 몸이 어떤 상태인지 그제야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가시지 않는 열기로 달아오른 것은 비단 손이나 등 같은 부분만이 아니었다. 어이없는 실소가 터졌다.

제 중심이 빳빳하게 굳어서 브리프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위세로 올라붙어 있었다.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류주호는 신경질적으로 시트를 쳐 낸 다음 저벅저벅 큰 보폭으로 샤워실로 들어가 찬물을 세게 틀었다. 그리고 그 물을 정수리로 전부 받아 냈다.

감은 눈 위로 굵은 물줄기가 주르륵 떨어졌다.

“씨발…….”

수전을 거칠게 잠갔다. 찬 기운을 뒤집어써도 소용이 없었다.

류주호는 거뭇하게 일어서 있는 중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큰 동작으로 훑기 시작했다. 전신을 내달리는 열기가 순식간에 성기로 몰리며 아랫배 위까지 닿을 정도로 더욱 크게 부풀었다.

“……후우.”

딴딴한 가슴 앞판이 꿀렁이듯 들썩였다. 잇새로는 목울음이 끓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위가 오랜만이긴 했지만 뭔가 해소되지 않는 것이 안에 그득 쌓여 있는 느낌이었다. 해갈되지 않는 응어리가 외려, 성기가 부풀어 오를수록 크기를 더해 가는 느낌이었다.

커다란 손으로 거칠게 비벼도 자글자글 끓는 열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를 빠득 갈았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에 무언가가 팟 떠올랐다.

제 팔 안에 가둔 마른 몸. 그리고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던 몸짓.

“…….”

어금니에서 으득 소리가 났다.

이 이상 커질 리 없을 것 같던 제 손안의 그것이 힘차게 부풀었다.

어젯밤, 쿠션에 은은하게 남아 있던 달큼한 바나나 향과,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손바닥으로 쓸며 얼굴을 잠시 묻고서 코 속 깊이 들이켜려던 충동까지 불시에 떠올랐다.

류주호의 온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리고 크윽,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벽에 진한 유백색의 체액이 질척하게 튀었다. 가득 쥔 손까지 흘러넘치는 엄청난 양이었다.

짜증이 급격하게 몰아쳤다. 고여 있는 열기가 아직도 은은하게 남아 있는 것이 더욱 확연히 와닿았다.

다시금 찬물로 온몸을 씻어 내리고 샤워실 바깥으로 나왔다.

어릴 적에, 불놀이를 하다 자면 밤에 자다가 오줌을 싼다는 어른들의 꾸짖음이 생각났다. 그런데 저는 반대였다. 꿈에서 53번이나 불을 지르고, 깨어난 뒤에는…….

미치겠네, 진짜.

류주호는 수건을 머리 위에 덮어 늘어트린 채 테이블이 있는 곳을 응시했다. 테이블 위에는 두껍고 낡은 노트북이 올려져 있었다.

그 망아지 새끼. 그렇게 사람을 발로 차고 도망가 버리다니. 갓 태어난 망아지도 그렇게 힘찬 발길질은 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받은 것은 배로, 아니 수십 배로 갚아 주는 제 성정상 이미 진작에 쳐 냈어야 할 사람인데. 어쩐지, 발이 닿은 옆구리가 알싸하게 저릿했다.

정신 차려 보면, 온종일 그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제 주변에 전혀 없던 인물이라, 계속해서 신경을 갉작거리는 게 영 못마땅했다. 문득 얕은 파도 같은 초조함이 밀려왔다.

머리를 털며 재빨리 생각을 몰아냈다. 제 아버지와 해 버린 약속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오늘은 거기다 모바일 플랫폼 개발 업체와의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가볍게 술 한잔하며 사업 얘기를 제 쪽으로 유리하게 이끌어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투자 대회 준비도 만만치 않게 골치가 아팠다. 마음 같아서는 신묘한 요행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류주호는 제 옆구리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를 애써 무시하며 서류로 눈을 돌렸다.

* * *

띵동―.

띵동―.

처음 벨이 울리고 문이 열리는 기색이 없자 홈 패드 카메라 너머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류주호는 무표정이 내려앉은 버석한 얼굴로 그런 온기현을 화면을 통해 보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그리고 저벅저벅 느린 발걸음으로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철컥, 열었다.

온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답이 없자 막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려던 눈치였나 싶었다. 류주호는 고개를 까딱하며 몸을 슬쩍 비켜 주었다.

“들어와.”

“아, 응.”

온기현은 백팩을 양손으로 꽉 쥐며 안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커다란 오버 사이즈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틈새로 살며시 들어가며 옷자락이 살짝 스쳤는지 사락, 하는 소리가 났다.

딱딱하게 몸을 굳힌 류주호를 흘끔 보며 온기현이 신발을 벗었다. 겨울에는 눈을, 여름에는 비를 잔뜩 머금은 그 운동화는 그냥 찢어 버려도 될 것처럼 너덜너덜했지만 온기현은 한 발 한 발씩 조심히 벗고서는 가지런히 모아서 신발장 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에서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신발 다 벗었으면 빨리 들어와.”

“어, 어. 저, 근데 손 좀 씻을게. 화장실이 어디야?”

류주호는 턱 끝으로 바로 옆에 있는 문을 가리켰다. 온기현은 고마워하더니 종종걸음으로 화장실로 들어섰다. 쏴아― 하는 거센 물줄기 소리가 울렸다. 뽀득뽀득 깨끗이 손을 씻고서 나온 온기현은 어쩐지 풀이 죽은 기색이었다.

눈치를 흘끔흘끔 보는 모양새가, 지난번의 일 때문인 것 같았다.

괜히 머리가 핑 돌았다. 짜증이 욱하고 치밀었다. 이건 기실, 지난밤 밀린 일을 정리하느라 거의 밤을 꼴딱 새운 탓이리라. 업체 제안서와 플랫폼 시나리오 기획서, 그리고 서비스 리스트 등 검토할 서류가 천지였다.

이제껏 정신을 놓고 있었던 자신을 채찍질하듯 새벽 내내 몰두했다. 아니, 몰두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더욱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모자란 수면과 그와 반대로 계속해서 묘하게 들떠 있는 몸뚱어리의 간극 때문에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받쳐 있었다.

“주호야.”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온기현이 뒤에 잽싸게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순간 어깨가 움찔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놈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것이 처음이라는 실없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하는 것처럼 걸음을 계속하자 온기현이 대뜸 소리를 높였다.

“저번에는……! ……미안해. 내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차는 게 아닌데. 아무리, 네가……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뭐. 내가 뭐. 아무리 사이에 들어가는 말이 괜히 거슬리고 기분 나빴다.

“됐어.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너 발로 찬 적 있으니까.”

“아, 맞아. 쌤쌤이네!”

“쌤쌤 같은 소리 하네. 너는 다분히 고의였고, 나는 아니었지.”

코로 웃어 주니 온기현이 그새 잠잠해졌다. 제 딴에는 신경 쓰였는지 사과는 했지만, 기회를 봐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저 웃음만 났다. 그러네, 하고 입을 웅얼거리는 온기현이 코를 한번 찡그렸다.

문득 코로 웃던 류주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놈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고 숨을 들이켰다. 어쩐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피곤함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헬스장에서 웨이트를 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뻐근함 때문에 더욱 신경이 곤두서서 그럴 것이다.

류주호는 애써 무시하듯 고개를 홱 돌렸다.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도 무시했다. 온기현은 제 걸음마다 바짝 뒤쫓아 왔다.

“내 노트북 어딨어?”

그깟 고물 노트북. 오자마자 그것부터 찾네. 창밖으로 던져서 부숴 버릴걸.

“글쎄.”

“어? 여기 놔두고 갔잖아. 못 봤어?”

“모르겠는데.”

심드렁하니 대꾸하자 온기현이 저를 지나쳐 테이블 쪽으로 씩씩거리며 걸어갔다. 그것은 숨길 것도 없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 올려져 있었다.

또다시 자신한테 심술부린 것으로 생각했는지 온기현의 눈이 샐쭉하니 올라갔다. 여깄는데 왜 없다고 해, 하고 시위하는 표정이었다.

류주호는 지금이라도 저 고물 덩어리를 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터벅터벅 걸어가서 좌식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글거리는 피곤함이 말이 아니었다.

그새 온기현은 충전기를 연결한 노트북을 켰다. 옆으로 보는 얼굴에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왜 입술은 내밀고 난리야. 사람 헷갈리게. 그리고. 오늘도, 또 왜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왔는데. 잡아당기면 바로…….

“씨발.”

“??”

저도 모르게 지껄인 욕지거리에 온기현이 놀란 눈을 하고 뒤를 흘끔 돌아봤다. 류주호는 그 얼굴을 보며 마른 등짝에 손을 올리고 싶은, 그새 멍이 사라졌는지 당장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짜증스럽게 좁혀진 미간에, 온기현이 다시 위잉― 하고 소리를 내는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닥, 타닥.

잔뼈가 두드러진 하얗고 마른 손이 반복적인 율동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내려다봤다. 거센 흡연 욕구가 불쑥 치밀어 올라서, 스스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왜 이렇게 초조한지. 수면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리고, 최근에 쌓이고 쌓인 신체적 욕구 또한.

하아.

빠르게 맥동하는 뒷덜미를 주욱 늘어트리며 좌식 소파 등받이 위로 고개를 젖혔다. 잠시 눈을 감았다.

위잉―.

타닥, 타닥.

딸각.

타닥.

자잘한 소음이 어쩐지 기분 좋아 일렁이는 초조함도 조금씩 사그라드는가 싶었다. 그리고 어느새 잠시 얕은 잠에 빠진 모양이다.

‘…….’

‘…….’

조용했다.

얕게 숨소리를 내며 잠든 류주호의 귀는 살짝 열려 있었다. 기분 좋은 침묵 속에서, 문득 바나나 향이 훅하고 코 속으로 들이쳤다.

그리고.

물컹. 입술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그것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표피만 살짝 대는가 싶더니, 류주호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내 꾸욱, 힘을 주어 내리눌러 왔다.

그렇게 아무런 동작도 없이 말캉한 입술을 짓누른 채로 대고만 있는가 싶더니, 팔딱팔딱 뛰는 심장 소리가 입술로 전달될 만큼 잔뜩 몸을 굳히고 잠시 떼어 냈다. 그러더니 또다시 작게 호흡하는 소리와 함께 마른 입술이 류주호의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망설이듯 헤매던 움직임이 점점 더 적극적으로 변해 갔다. 완전히 아래위로 맞물린 입술이 금세 촉촉해졌다. 습기 어린 숨 때문에 따듯한 기운이 훅 끼쳤다.

류주호는 수면 아래 뉘었던 의식을 천천히 깨웠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시야를 가로막은, 질끈 감은 눈이 보였다. 온기현이, 벌게진 얼굴로 저에게 입술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모양까지. 전부 눈에 들어왔다.

깜빡, 하고 눈을 감았다 뜨자 온기현이 낌새를 눈치챈 듯 화들짝 놀라며 몸을 확 떼어 냈다. 달큼한 향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마치 귀신을 본 양 저를 쳐다보는 온기현을 향해 입매를 일그러트렸다.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습기를 머금어 다소 부드러워진 아랫입술을 닦아 내듯이 쓸었다. 엄지 끝이 예민해진 입술을 건드렸다.

저도 스스로 놀랄 정도로 머리에 피가 몰렸다.

놀란 망아지 눈을 하고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얼어붙어 있는 온기현이, 류주호의 움직임을 보며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팔이 후들후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귀는 이제껏 보지 못한 붉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반대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곧이라도 픽, 쓰러질 것만 같이.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꼭,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몹시 나쁜 짓을 한 어린애처럼. 파리하게 질린 모습이 눈에 완전히 들어찼다.

류주호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이거, 뭐야?”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을 보며 비죽 웃었다. 사실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거친 목소리에 온기현이 눈에 띄게 흠칫거리는 것을 보니, 몰려 있던 피가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열기가 온몸을 죄 휩쓸어서 되레 피가 식는 듯한 착각이 일어날 지경이다.

“아,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온기현이 도리질을 했다. 류주호가 온기현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그가 뒤로 짚었던 팔을 한 뼘 간격으로 더 뒤로 빼며 몸을 피했다.

“지, 진짜……. 아무것도, 아무 짓도, 안 했…….”

입꼬리가 꿈틀했다. 하얗게 질려서 말을 더듬으며 극구 부인하는 꼴이, 주인 몰래 남의 밭에 발을, 아니 입술을 디밀어 한껏 서리하고서는 제풀에 제가 지레 놀라 그런 적 없다며 발뺌하는 격이었다.

류주호는 속에서 울컥, 괘씸한 이놈을 당장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욕구가 거세게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생전 처음 느끼는 초조함과 갈증에 목구멍 안쪽이 바짝 말라 옴을 느꼈다. 동시에 피곤함에 엉망이었던 신체가 팽팽해지면서 목덜미가 아파져 오는 짜증까지 더해졌다.

“너 이거 도둑질이야. 알아?”

류주호가 서늘한 목소리로 툭, 내뱉자 더 커질 리 없을 정도인 놈의 동공이 더욱 커졌다. 저러다 튀어나오겠네 싶을 정도였다.

“뭐, 뭐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 미, 미안. 나 일이 생겨서 집에 좀 가 봐야겠다.”

그러더니 시선을 홱 아래로 깐다. 한껏 말을 더듬으며 비실비실 제 몸을 추슬러 기어가듯이 몸을 스리슬쩍 피한다. 딱, 너튜브 어느 영상에서 본, 해외 마트 CCTV에 찍힌 도둑놈의 도주 직전 몸짓, 그것이었다.

괘씸하게도.

슬금슬금 몸을 물리던 온기현의 눈빛이 바뀐다. 류주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곳을, 저한테서, 벗어나려는 것이었다. 회피였다.

놈이 입술을 꽉 깨물며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리고.

“아!”

발목이 잡혔다. 류주호가 억센 힘으로 그의 발목을 완전히 감쌌다. 그리고 바로, 끌어 내리듯이 발목을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온기현의 입이 어어, 하고 벌어지는가 싶더니 끌어당기는 힘의 반동으로 인해 상체를 지탱하던 팔에서 힘을 잃었다.

풀썩.

그리고 그대로 좌식 소파 위로 누워 버리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헉, 하는 소리가 났다.

그 틈을 류주호는 놓치지 않았다. 저번과 같았다. 아니, 달랐다. 이번에는 절대로 자신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발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체중을 실어 벙쪄 있는 온기현을 내려다보듯 상체를 내렸다.

온기현은 눈을 크게 뜬 상태였다.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는 꼴이, 꼭 제가 그에게 못 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대체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란 말인가.

그런데 그것도 참, 놈 같았다. 빼앗는 것도 제대로 뺏지 못한다. 야무진 척은 혼자 다 하면서, 고작 입술 표면을 대고 비비기만. 류주호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도둑놈이 도망가긴 어딜 도망가.”

“누, 누가 도둑, 놈이라고.”

사그라드는 불씨처럼, 온기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오밀조밀 움직이는 입술이, 귀와 같은 색깔로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요망하게. 이걸로, 이 입술로…….

류주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저지르려면, 제대로 하든가.”

“뭐……?”

온기현의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말을 잇느라 살짝 벌어진 입 새로 나온 말이 그대로 류주호의 입 안으로 먹혀들어 갔다. 류주호가, 몸을 짓누르는 것처럼 온기현의 입술에 제 것을 거칠게 맞대었다. 아니, 먹어 치울 듯이 한껏 머금었다고 하는 편이 더 맞았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에, 온기현의 몸이 놀란 듯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하.

……미친.

그것은 류주호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이 핑 돌 것처럼 부드러웠다. 얇은 표피에 닿는 놈의 말랑한 그것에서, 아찔할 정도로 달큼한 맛이 났다.

절로 숨이 가빠 왔다. 입술을 포개듯이 맞대어 한껏 빨아당겼다. 뒷골이 저릿해질 만큼 아찔했다. 완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온기현의 말랑한 아랫입술을 점막을 이용해 정신없이 문지르고 비벼 댔다.

놈이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 바람에 속눈썹이 팔랑거리는 간지러움이 죄 느껴졌다. 움칠거리면서도 몸을 약하게 밀어 대는 움직임을 비어 있는 손으로 강하게 억압했다.

지금, 놈이 달아나면 진심으로 머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이 짓을 놈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지배했다.

온기현이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듯 살짝 입을 벌렸고, 그 틈새로 두꺼운 살덩이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리고 축축한 살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잔뜩 예민해진 감각이 몸을 녹이는 듯했다. 흐트러진 숨까지 전부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뭐야, 이게…….’

씨발.

놈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침입은, 거침없었다. 볼 쪽 움푹 팬 곳, 입천장, 심지어는 치열 아래의 여리고 여린 곳은 전부 잡아먹을 듯이 비벼 댔다.

치미는 욕구로 인해 팔뚝이 딴딴하게 굳어졌다. 어느새 손아귀에도 절로 힘이 들어갔는지 놈이 발목을 빼려고 바르작거렸다.

“으, 응…….”

미약하게 새어 나온 신음에 류주호의 침입이 더욱 거세고 흉포해졌다. 살덩이로 안에 움츠러들어 있는 살덩이를 위협하듯 쿡쿡 찌르자, 자꾸만 뒤로 도망가던 혀가 “후읏.” 하는 숨소리와 함께 조금씩 반응해 왔다.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망설임 끝에, 놈이 손을 자신의 어깨에 살포시 대는가 싶더니, 점점 등 쪽으로 미끄러지듯 팔을 감아 왔다.

“……으, 읏. ……흐응.”

온기현의 코와 입에서 간지러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류주호로부터 도망갈 궁리만 하던 온기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완전히, 류주호의 배려 없는 애무에 적응하려고 열심이었다. 등을 살며시 쓰다듬는 따듯한 손바닥의 온기에 류주호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조바심과 초조함이 전신을 지배했다. 더욱 깊숙이 맞물리고 싶다는 욕구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머릿속에 경보가 울렸다. 본능적인 무언가가 위험함을 감지한 것처럼 웽웽― 시끄럽게 울려 댔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그간 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던 사업 때문인지, 자신의 예상에서 한껏 벗어난 행동뿐이던 이놈을 향한 화풀이인지, 피곤한 신체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온기현과 하는 당장의 이 저질스럽고 게걸스러운 짓거리가 상당히, 아니 엄청나게 기분 좋다는 것이었다. 문란과 방만을 기억하는 몸이 이 정도까지 한계로 달아오르는 것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불가해한 욕구는 금세 쌓여 온 신체적 금욕에 대한 해갈로 이해되었다. 인정한다. 온기현과의 키스는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촉촉한 입술과 습기를 머금은 눈꼬리, 그리고 달아오른 말랑한 두 볼과 폐부 깊이 들어오는 달큼한 바나나를 닮은 체향. 풋내가 절절한 이놈처럼, 샛노랗게 익은 바나나를 닮은ㅡ.

이 모든 게 어우러져서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확연했다.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입술과 입술 사이가 촉, 하는 촉촉한 마찰음을 내며 떨어졌다.

“하아……, 하아…….”

온기현의 입술이 완전히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눈꼬리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방울져 있다가 이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볼 위로 또륵 떨어졌다.

금세 가느다란 물방울이 퍼지며 볼이 젖어 들었다.

입 안도 거친 곳 없이 죄 젖어 있었지.

류주호는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놈도 처음에는 빼다가, 적극적으로 반응해 왔다. 마치, 이런 게 익숙하다는 몸짓이었다.

그래. 54번째와 하는 입맞춤은 아무리 좋게 쳐 줘도 54번째 입맞춤일 터였다. 아직도 해소되지 못하고 온몸을 떠돌던 열기가 머리끝까지 확 치솟았다. 뇌, 혹은 가슴 어딘가에서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에 눈알이 뽑혀 나올 것 같았다.

물기 묻은 류주호의 입술이 비스듬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너, 물 엄청 많다. 여기저기 다리 벌리고 다니는 어지간한 헤픈 애들보다 물 많은 것 같아.”

“…….”

“아, 너도 마찬가지로 어지간하지, 참.”

너도 헤프게 여기저기 마음 흘리고 다니니까.

그렇게 말을 맺는 거 같았다. 순간, 온기현의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지만, 류주호는 눈치채지 못했다. 땀이 송골송골 솟아오른 하얀 목덜미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어쩐지 그 하얀 굴곡 사이에 얼굴을 묻고 미친 듯이 물어뜯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미처 그 충동의 의미를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피곤하다고만 여겼다.

“그래.”

그러던 중, 온기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리깐 눈 때문에 눈꼬리가 샐쭉하게 올라가 있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은 어느새 조금 윤기가 사그라들었다.

“맞아. 나 키스도 좋아하고, 그리고. 너랑 하는 것도 기분 좋았어.”

“……허.”

“이제까지 중에서도, 좋았던 축에 속해.”

이놈이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아연함에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해.”

눈을 똑바로 뜨며 당돌하게 요구해 오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는 혼이 빠진 것처럼 허탈한 소리를 냈다.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잇새로 비어져 나왔다.

“그래. 서로 기분 좋으면 된 거지. 나도 나쁘지 않았어, 너랑 하는 거.”

키스가 별거야?

그렇게 말하는 류주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흉악함이 걸려 있었다. 비죽이며 웃는 입술이 작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그리고 비뚤어진 입이 다시금 그의 것과 맞물렸다. 다소 조급함이 묻어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극렬한 감각 속에 묻힌 두 번째 키스가 이어졌다. 느리게 깜박이던 온기현의 눈꺼풀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듯이, 지그시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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