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금사빠의 ×× (2)
탁, 탁, 탁.
타닥, 타다닥, 탁탁.
“아, 시끄러워.”
“응? 뭐가?”
“니 손톱. 존나 시끄럽다고. 귀 아파.”
“으음?”
예쁘게 정돈된 손톱 위에는 화려하게 빛나는 파츠들이 가득 올려져 있었고 그 길이 또한 남자가 보기에는 저게 부러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길게 자라나 있었다.
그게 핸드폰 화면을 빠르게 터치하면서 부딪치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차 안에 계속 울려 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대체 뭐가?”
“핸드폰 줘.”
“왜?”
“밖으로 던져 버리게.”
류주호가 고개는 앞으로 향한 채 조수석 쪽으로 손을 뻗자, 여자의 인상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아이 씨. 이거 지난달에 나온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바꾼 거거든? 기기값 백이십 쌩으로 다 줬거든?”
“그럼 카톡이나 작작 보내든가.”
“미친놈. 성질, 진짜. 내가 남친이랑 깨 볶는 게 그렇게 질투 나냐?”
“꼬우면 내리든지.”
그는 진심인 듯 끽 소리가 날 정도로 핸들을 돌려 갓길 쪽으로 차선을 바꿨다. 그걸 보자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양희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제 가방에 쏙 집어넣었다.
이미 류주호와는 양가 간의 인연으로 인해 코흘리개 때부터 질기도록 본 사이라 지긋지긋하더라도 서로 겉으로 욕하고 말기가 일쑤였다. 애초에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으니 무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인성이 터져 버리다 못해 가루다 됐네, 이 새끼는. 어? 너 그러고 여자는 어떻게 만나냐?”
“만날 때 자는 것밖에 안 하는데, 못 참는 행동을 용인해 줄 필요가 있어?”
“와…….”
양희인은 이제는 입을 떡 벌리고는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류주호를 돌아봤다.
“너 그러고 다니면서 칼 안 맞는 게 용하다.”
칼.
류주호의 미간이 살짝 파였다. 그 얼굴을 양희인이 빠르게 캐치했다.
“와하하. 너 뭐야? 혹시 진짜 맞은 적 있는 거 아냐? 어디 봐 봐. 칼에 찔린 자국 남아 있어?”
양희인은 신이 난 듯 가방 속에 넣어 놨던 제 핸드폰의 카메라를 켜고서는 류주호의 상체 여기저기를 살펴봤다.
“맞은 적 없어.”
맞을 뻔한 적은 있지.
류주호는 거기까지 흘리듯 말하고는 얘기하기도 피곤하다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흠……. 보나 마나 네가 잘못한 거겠지, 뭐. 한 사람 진득하게 사귀어 보는 건 어차피 평생, 네 스타일이 아닐 거고. 몸만 섞는 사이라도 인간적으로 좀 대해 주지 그래? 애프터케어도 확실히 하고.”
“내가 왜? 난 충분히 인간적으로 대해 주고 있어.”
“네가 만난 여자들의 기대를 어느 정도 맞춰 주면서 꾸준히 사귀어 봐. 어차피 새로 갈아 치울 상대를 찾는 것도 귀찮아하면서. 서로 윈윈이잖아?”
“글쎄. 오히려 나는, 왜 내가 일방적인 낭만을 기대하는 사람들한테 맞춰 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거야말로 이기적인 것 아닌가? 서로가 얻고 싶은 합의선을 미리 맞춰 둔 상태에서, 그 선을 맘대로 넘으려 하면. 곤란하지, 나도.”
그리고.
류주호가 심드렁하니 말을 이었다.
“갈아 치울 상대 일부러 찾은 적 없어. 알아서 오는 거지.”
“하.”
그래. 대충 이런 놈이었지.
양희인은 더는 할 말이 없어져서 얕게 한숨을 쉬며 시트에 몸을 풀썩 기대었다.
“그래, 뭐. 그래서 나랑 하는 결혼도, 내가 너한테 기대하는 바가 없는 걸 알고 있으니, 부모님이 정해 준 대로 맞춰 줬던 거겠지.”
쉽게 말해 편한 상대였다. 서로의 성향을 잘 알고, 질척이지 않는.
그의 말마따나 선을 절대로 넘지 않을 것이라 믿는 상대이기도 했다.
“그, 결혼하면 종로에 놀리고 있는 건물 명의 내 앞으로 옮겨 준다고 하더라.”
“와, 역시 아저씨는 배포가 크시네. 너 땡잡았네?”
“너도 마찬가지잖아.”
“응. 숍 하나 차리려고 했는데 아빠가 이 결혼 하면 A부터 Z까지 다 해 주신대서.”
그녀는 손을 편 채 제 영롱한 손톱을 차창으로 비추어 보며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칼은 되도록 맞지 않게 조심해. 나도 옆에 있다가 괜히 덩달아 맞을까 봐 무섭거든. 그리고, 너한테서 깔끔하게 마음 털어 내는 여자 찾기도 쉽지 않을걸? 네가 이제까지 만났던 여자들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너를 못 잊고 미련이 철철 넘쳤었지. 왜, 누구나 마음속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든다고들 하잖아. 그 크기만 다를 뿐이지.”
“내가 알 바야? 방을 50개를 만들든, 500개를 만들든. 관심 없어.”
절레절레. 양희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감각이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과 오래 말 섞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 이내 입을 다물었다.
깔끔하게 마음을 털어 내는 사람이라.
핸들을 쥔 손에 얼핏 힘이 들어갔다. 이제까지 자신도 그런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학창 시절, 고백을 받아서 날 선 말로 뿌리치더라도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라거나, 이미 헤어진 사이임에도 새벽에 “자니……?”, “너랑 같이 갔던 바에서 들었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네 생각이 나서…….”라고 보내오는 메시지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리고 류주호는 바 같은 데를 그 누구와도 간 적은 없었다. 하물며 식당도 마찬가지였다. 호텔이라면 몰라도.
그런데.
‘네. 알겠습니다.’
그 남자만은 달랐다.
이제까지 남자한테 성적인 호감을 느껴 본 적도 없거니와, 남자와, 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고, 구역질이 일어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남자와 엮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낭창하게 몸을 흔들며 은밀하게 보내오는 시선에 그 자리에서 바로 얼굴에 대고 토악질을 한 적도 있었다.
‘진심인 건지, 아닌 건지.’
그렇게 1초 만에 떨어져 나갈 거면 대체 왜 고백을 하냔 말이다. 눈은 꼭 어미 잃은 망아지 같은 꼴을 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꾀죄죄해서는.
그리고. 목숨이 뭐 열 개라도 되나? 오지랖 넓게 그 자리에 몸을 날리기는 왜 날려?
또. 돈도 주는 대로 처받을 것이지, 왜 돌려주냔 말이다. 신경 쓰이게.
씨발.
거슬렸다. 이제까지 마주친 것은 두 번이었지만, 제 예상을 모두 빗나가는 행동 양상에 마음 저 아래서 스멀스멀 정체 모를 불편함이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인 류주호의 굵은 목에서 핏줄이 불거졌다.
양희인은 힐끔 그것을 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무언가로 인해 심기가 불편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의 류주호는 건드리면 안 되었다. 양희인은 어릴 때부터 그를 봐 와서 그가 긋는 선이 대충 어디쯤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이 나이 될 때까지 류주호와 연을 이어 갈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묵직한 SUV 차량이 미끄러지듯 캠퍼스 정문을 지나쳤고, 도로를 따라 부지 끄트머리의 언덕에 있는 경영관까지 바퀴를 굴렸다.
“지금 무슨 강의인데?”
“교양 선택. 어차피 학점 채우려고 듣는 거라 아무거나 넣었어.”
“그래? 아, 난 저쪽에 세워 줘.”
성악을 전공하는 양희인이 다니는 음악 대학 건물은 경영관을 향하는 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집 근처에서부터 데려다 달라고 따라오는 통에 달고 올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의 속력을 점점 늦추려던 때, 류주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인영이.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커다란 백팩이었다. 그 위로 숱 많은 검은 머리가 위아래로 잘게 흔들렸다. 경영관으로 향하는 길은 길게 펼쳐진 가로수 길을 지나고 나서는, 바로 가파른 오르막길인 탓에 한껏 꾸미고 온 여학우들은 뾰족구두를 신고서 불평하는 일이 많았다.
자신은 항상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류주호의 눈썹이 설핏 구겨졌다.
‘어쭈. 저거 봐라.’
쟤가 왜 여깄어?
순식간에 황당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야, 야. 류주호! 뭐 해? 나 저기에 세워 달라니까.”
“기껏 태워 줬더니. 넌 발이 없어, 손이 없어. 그냥 알아서 내려.”
“뭐? 이 미친 새끼.”
고속력은 아니더라도 교내 차량 이동 속도 규정 준수에 따라 최소 시속 20킬로미터로는 달리고 있는 차량이었다.
여기서 첩보 액션 영화라도 찍으라는 건가 뭔가.
심보는 못돼 처먹어서는 날로 못된 심보가 점점 악질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긴, 꼬맹이 때부터 언제는 안 그랬냐 마는. 저 화려한 외모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런 개차반인 성격 때문에 수명이 줄어들 게 뻔했다. 아니면 반대로, 욕을 하도 먹어서 오히려 무병장수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뭐 해? 안 내려?”
“……여기에 그냥 세워.”
양희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잇새로 내뱉듯이 말했다.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게 “그래?”라고 대답하며 바로 그 자리에 차를 세웠다.
“내려.”
“아, 예― 예―.”
아래턱을 길게 늘이며 이죽거리듯이 대답하자 한심한 눈길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양희인이 차 문을 닫자마자 류주호의 차는 곧바로 매연을 내뿜으며 쌩하고 출발했다.
“와, 씨. 갈수록 저건 진짜.”
다행히 오늘은 잠깐 교수님만 뵈러 온 차라 볼일만 마치면 바로 집에 갈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구두로 탁, 탁 치며 양희인은 분을 삭였다.
개 새끼, 소 새끼, 말 새끼. 온갖 포유류의 새끼들이 입에서 죄 튀어나왔다.
‘어디 한번 누구한테 된통 당했으면 소원이 없겠네.’
하지만 저렇게 운과 능력을 달고 태어난 놈에게 빌어 성취하기에는 참으로 요원한 소원이었기에 이내 화를 삭이고는 또각또각 우아한 발걸음을 되찾으며 음악관으로 향하는 양희인이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콘텐츠 플랫폼 혁명]
그러고 보니 제가 무슨 강의를 선택했는지도 잊고 있었다.
첫 수업은 사업 파트너인 개발 업체들과의 미팅 때문에 얼굴도 안 비쳤었고, 수강 변경 기간이 끝난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강의를 들을 마음으로 발을 들이미는 것이었다.
어차피 어떤 수업이든지 간에 학점만 잘 받으면 상관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않은 적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는 점도 있었다.
‘강의명만 거창하네.’
산업 혁명이고 콘텐츠고 지랄이고 나발이고 지금 저한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싶을 뿐이었다.
평연한 낯으로 강의실에 들어섰다. 순간, 계단식으로 구분되어 나열된 자리에 드문드문 앉아서 웅성거리던 조용한 소란이 딱 그쳤다.
시선이 남자에게로 한데 모였다. 마치 만유인력처럼 존재감이란 것이 그러했다.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게 마련이었다.
류주호는 일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시선들을 무심하게 넘기며 벽에 가까운 넓은 계단으로 성큼성큼 발을 디뎌 올라가려던 때.
“서, 선배님. 안녕하세요.”
라고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는 여자애였다. 누군지 도통 모르겠다.
“응, 안녕.”
류주호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례적으로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자 여자애의 무리가 “웬일이야. 미쳤어.”라고 소곤거리며 인사를 건넨 여자애의 어깨를 탁탁 쳐 댔다.
‘더럽게 시끄럽네.’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을 지운 류주호가 또다시 계단을 올라 제일 뒷자리에 털썩 앉았다. 앞, 뒤, 옆 모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계를 내려다봤다.
흠.
지루하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끊이지 않았다. 뭐 언제는 재미있었나 싶지만.
그때 마침, 프로젝터가 비추는 화면이 탁, 하고 밝아지면서 슬라이드 하나가 크게 띄워졌다.
그리고 40대 정도로 보이는 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섰다. 청바지와 폴로 티셔츠의 가벼운 차림인 것을 보니, 혁명이니 뭐니 하는 강의명을 만들어 낸 교수의 사상이 퍽 가늠이 갔다.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무척 덥지요? 아, 거기 앞에 있는 남학생은 모자 좀 벗어야겠다. 정수리에 땀띠 나겠어요. 물론 제가 강의 중에 모자나 마스크를 쓰는 것을 매우 안 좋아한다는 점도 있지만 말입니다. 벗어 주면 고맙겠네요?”
가벼운 투로 얘기하고 있었지만, 류주호는 알 수 있었다. 아마 강의실에 있는 대부분이 파악했을 것이다.
‘아, 이 새끼. 젊은 꼰대구나.’ 하고.
어쨌거나 그는 가볍게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한 시답잖은 구절 ― 오지랖과 유행어를 간간이 버무린 ― 을 몇 가지 시전하더니 화면에 띄워진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말을 이었다.
평가 방식에 관한 내용이 큼직한 글씨로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강의실에 웅성거림이 천장까지 울렸다. 간간이 “미친.” “최악이다.”라는 중얼거림도 들렸다.
“여러분은 최신 트렌드에 걸맞은 굉장히 섹시하고 크리에이티브한 강의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의는 단순히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물론 크리에이티브, 중요하죠. 하지만 저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개인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장려해야 할 것은 협동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수가 팔을 활짝 벌리며 유쾌한 듯 읊어 댔지만 웅성거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리고 거기에, 활짝 웃은 교수가 쐐기를 박았다.
“지금 이 강의는 백 퍼센트 팀플레이, 즉 조별 과제로만 평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에 걸쳐서요.”
씨발.
어디선가 욕설도 들려왔다. 육성으로 내뱉는다기보다 분위기 자체가 욕설 덩어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류주호도 마찬가지였다. 교양이라고 해서 팀플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잘못 걸려도 한참을 잘못 걸렸다.
중간과 기말 모두 순수하게 팀플로만 평가한다니, 앞으로 시간을 쪼개기도 바쁜 류주호에게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당장 저게 개가 짖는 소리였다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대충 교수가 설명하는 바는 이러했다. 1차는 조별 PT, 그리고 2차는 조별 실기.
각 팀플에 대해 구성원을 달리 가져가는 것은 오롯이 학생들의 자유다, 라고 말이다. 더불어 출석 체크는 필수였다. 참고로 수업 태도도 반영한다고 쓰여 있었다.
한마디로 평가 방식은 오로지 조별 과제라고는 해도 자신이 강의하는 내내 집중하라는 말밖에 안 되었다.
류주호로서는 수강 변경 신청 기간이 이미 지나서 선택지는 드롭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사업 착수에 돌입한 시점에서 다음 학기에 또다시 3학점을 수강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반향을 예상했는지 팀플의 조 구성은 다음 수업 때 하자며 유쾌한 웃음을 날리고는 교수는 재빨리 강의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학생들은 저들끼리 짜증스러운 낯으로 웅성거리며 불만을 토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류주호도 강의실에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불현듯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시야 끄트머리에 무언가가 걸렸다.
류주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 멀리 시선을 내던졌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제 눈을 의심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건.
하.
입에서 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좁게 열린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거리는 풍성한 머리카락.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검은 머리와 아래로는 척 보기에도 낡아 보이는 티셔츠.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커다란 백팩.
그 남자였다.
온기현.
“하하.”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웃음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눈치를 보며 슬쩍 뒤돌아보는 것은 보이지도 않았다. 류주호는 계속해서 온기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쫓아왔단 말이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연이 벌써 세 번째였다.
그것도, 그가 자신에게 고백하고 나서 바로. 아니 어쩌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그전부터 자신을 스토킹해 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알게 모르게 뒤에서 자신을 훔쳐보고, 자신의 동선을 쫓아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류주호의 미간이 대번에 금이 갔다.
‘거슬려.’
류주호는 재빨리 일어나서 강의실 뒤쪽을 빙 돌아 창가에 있는 계단을 뚜벅뚜벅 커다란 보폭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일어나서 제 백팩을 챙기려던 이의 티셔츠 뒷덜미를 콱 잡아 올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살짝 등을 쓰다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은밀하게.
그러자 급소를 덥석 잡힌 망아지 같은 표정을 하며 녀석이 홱,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땡그랗게 커져 있었다.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류주호는 서늘한 낯을 하고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잠깐. 나 좀 보자.”
* * *
한국 대학교는 국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넓은 부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혈기 왕성한 젊음과 지성의 보고寶庫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렸다는 것을 과시하듯 6차선 도로와 맞붙은 방향으로 엄청난 크기의 정문을 활짝 펼쳐 놓고 있었다.
정문에서 이어지는 너른 가로수 길은 봄이 되면 끝이 보이지 않는 벚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이 대학교만의 명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경영관의 뒤편에는, 언덕보다는 높고 산보다는 낮은 높이의 뒷산이 자리하고 있었다. 철이 되면 새가 우짖고 바람이 불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져, 그야말로 사계절의 진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간혹, 계절이 되면 인도人道 위에 징그럽게 흩어져 있는 은행 때문에 ‘×밭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어찌 됐건 제삼자의 관점에서 겉으로 봤을 때는 경관만은 끝내주는 것은 사실이었다.
더불어, 평소에는 인적이 드문 뒷산 근처는 곳곳에 그늘지거나 움푹 들어가 있는 숨겨진 장소들이 꽤 많았다.
축제 기간만 되면 은밀하게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하는 장소였다.
온갖 로맨스가 꽃 피어나는 이곳에서 사랑이 이루어진 커플은 평생 행복하다는 무근지설까지 퍼질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좀 더 성공적으로 모종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누군가의 의도적 헛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그런 대학의 낭만이 가득 담긴 이 장소에, 두 남자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앞서가는 한 명은 서릿발이 날릴 정도로 무표정한 낯이었고, 세 발 정도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는 길쭉한 다리를 따라가기가 버거운지 조금 빠른 종종걸음이었다. 머뭇거리는 걸음 때문에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그때. 앞서가던 남자가 걸음을 뚝 멈췄다.
그에 맞춰서 뒤따라오던 남자도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백팩의 끈을 쥔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
앞 남자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눈빛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둔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게 여문 근육들 위로 짙은 남색의 티셔츠가 그의 실루엣을 늘씬하게 감싸고 있었다.
남자가 발을 뒤로 돌리더니 천천히 몸의 방향을 뒤로 틀었다. 정면의 시야에, 탄탄한 가슴 위로 팽팽하게 당겨진 티셔츠 주름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땡볕에서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는 오로지 나무 아래 그늘뿐이었다.
“야.”
“네?”
대답이 대번에 들려왔다.
류주호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너 스토커야?”
“저 스토커 아닌데요.”
온기현이 땡그란 눈을 하고서는 얕게 도리질을 쳤다. 류주호는 헛웃음을 쳤다.
대번에 그의 낯의 온도가 극점 아래로 떨어졌다.
왜 돼도 않는 거짓말이야, 이게.
얼굴에서 표정이 아예 지워지며, 류주호가 저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냈다. 저벅저벅 두어 걸음 만에 온기현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근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것 같지? 나 미행 안 한다며.”
“네. 미행한 거 아닌데요.”
“그럼 계속해서 마주치는 것 같은 게, 이게 내 착각은 아닐 텐데.”
“착각이신 것 같은데요.”
“뭐?”
온기현은 혀를 씹었는지, 아니면 입이 작아서 그런지 ‘착’을 어물어물하게 발음했음에도 단호한 어투로 대꾸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류주호였다.
허, 이놈 봐라.
뭐가 이렇게 당당해?
“내가 있는 곳마다 나타나고, 내가 듣는 강의도 수강 변경 기간이 지난 후에 신청해서 들어오고. 이게 내 착각이라고.”
“네.”
온기현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렇게 당당하고 건방질 수가 없다. 잘못은 이놈이 했는데 꼭 제가 억울한 누명을 쓴 그에게 어깃장을 놓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빤히 올려다보던 온기현이 입술을 우물거리더니 이내 삐죽 내밀었다. 그에 시선이 절로 쏠려 그의 얼굴을 새삼 유심히 볼 수밖에 없었다.
희멀건 얼굴 위 솜털이 빛에 반사되어 바짝 올라온 것이 다 보였다.
갓 입학한 신입생이나 됐을까.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콧방울 위 중심에서 살짝 비껴간 자리에 검은 점이 하나 콕 박혀 있었다.
이목구비와 얼굴선을 가는 붓을 이용해 스윽스윽 예사로운 선을 설렁설렁 그어 대다가 방점을 톡, 하고 찍은 양.
그것이 온기현이란 사람의 완성을 색깔과 모양으로 형상화한 것 같았다.
눈은 내리깔았지만 마치 그 앙증맞은 점이 자신을 빤하게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그시 내려다보던 류주호의 입술이 삐딱하게 한쪽으로 올라갔다.
“나 좋아한다며.”
단순히 제 착각이 아닌 단 하나의 근거가 이거다. 남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계속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게 우연이 아닌.
“그랬죠.”
“그랬죠?”
“저 원래 금방 좋아했다가 또 금방 포기해요. 그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뭐라고?”
“저 금사빠예요.”
이 망아지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금사빠?”
줄임말의 뜻을 알고 있었는데도 황망함에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네. 모르세요? 금방 사랑에 빠지는.”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그리고 되묻는 말에 부러 친절히 뜻을 풀어 알려 주려는 온기현의 말을 가로채며 물었다.
“네. 저 원래부터 그랬어요. 금방 사람 좋아하거든요. 태어나서부터 이제까지 총 53명 좋아했어요.”
“오십…….”
류주호의 입매가 힘을 잃었다. 그러다가 이내 찡그린 미간과 함께 입꼬리를 다잡으며 황망하다는 어투로 말을 이었다.
“하. 그럼, 내가 54번째다 이거야?”
“네, 맞아요. 이해가 빠르시네요.”
황당함에 주머니에 손이 절로 들어갔다. 당황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한쪽 다리가 산만하게 탁탁 흔들렸다.
“와…….”
당황스럽고, 황당했다.
“존나 헤프네.”
읊조리듯이 중얼거린 말에 온기현이 눈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것은 노려본다는 느낌보다는 중얼거리는 입 모양을 확인하려고 본다는 눈빛이 더 맞았다.
대놓고 면전에서 이런 폄하의 말을 들어도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성질을 돋우려고 한 말은 아니었고, 절로 뱉어져 나온 혼잣말이었음에도.
갈수록 가관이었다.
눈 아래에 있는 까만 점이 또다시 자신을 쳐다보는 기묘한 느낌. 신경을 득득 긁듯이 그 점 하나에 잠시 주의를 빼앗겼다.
그때 아래에서부터 웅얼거리듯이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왔다.
“……헤픈 게 누군데.”
“뭐?”
“할 말 다 하셨어요? 그럼 저 이만 가 볼게요.”
그리고 온기현은 또다시 그 말만 남기고 꾸벅 인사하더니 몸을 돌려 온 길을 따라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류주호는 또다시 인적이 드문 장소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
……저거 완전 또라이 아냐?
* * *
두 번째 수업은 금세 찾아왔다. 일주일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류주호는 의미 없는 만남들을 일절 끊어 냈다.
저번처럼 괜히 혼자 자신에게 기대를 품고서 접근하는 여자들 때문에 일어날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고, 솔직히 흔한 말로 떡칠 시간도 없었다.
여전히 투자금은 부족했고, 계약하고자 했던 매물을 잡아 두기 위해 권리금을 150% 얹어 준다는 조건을 걸고 협상을 했다. 그리고 공유 오피스 사업 준비를 위해 인테리어 업체, 앱 개발 업체 등의 파트너 발굴에도 여념이 없었다.
시드 투자 심사를 받고 싶지는 않았고, 투자 유치를 받을 마음도 애초에 없었다.
이미 제 손에, 제 집안에 가진 시드가 널렸는데 누군가의 앞에서 고작 몇억 받기 위해 발밑에서 웃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상 류주호가 다른 젊은 사업가들처럼 개고생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인복과 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이제껏 인맥을 두텁게 쌓아 올린 집안을 이용해 필요한 인력과 업체 들을 다 잡아 놓았고, 류주호가 콜만 하면 당장 따라온다는 기술자들, 혹은 전문인들이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시간과 노력이 아예 제로인 것은 아니었기에 여타 학생들과는 다른 양상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스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간간이 정신을 빼놓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 또라이.’
그놈만 생각하면 한창 중요한 전화를 하다가도 머릿속에 약 2초 정도의 버퍼링이 걸렸다.
“헤픈 게 누군데.”라는 그의 말이 ‘헤픈 게 누군데. 헤픈 게 누군데. 헤픈 게 누군데…….’로 메아리처럼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코 위에 콕 박힌 점과 샐쭉 올라간 눈초리가 눈앞에 둥둥 떠올랐다.
괘씸한 새끼.
그리고 괘씸한 일이 그새 하나 더 있었다.
웬만해서는 학식을 먹지 않는 류주호였지만, 그날은 전공 수업을 마치고 밥 먹을 사람이 없다고 당장 나오라는 양희인의 성화에 못 이겨 학관에서 대충 때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놈의 모습을 또 보게 되었다. 종종걸음으로 치킨마요덮밥 코너에서 마치 줘도 안 먹을 개밥에 흰색 페인트를 뿌린 듯한 음식물을 받아 들고서는 저 구석 자리에서 냠냠 먹고 있었다.
저놈은 왜 또 여기 있는 거야, 라고 생각한 순간, 저를 흘끔 쳐다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고 순간적으로 그놈을 향해 득달같이 쫓아가려던 때.
“너 뭐 해?”
양희인이 의아한 눈초리로 류주호의 걸음을 막았다.
“……아무것도 아냐.”
그래. 침착하자.
학관이 저만 이용하는 데도 아니었다. 혼밥을 즐기는 고학번들이나 시간에 쫓기는 학생들 모두가 즐겨 이용하는 곳이었다. 모든 학생을 저렴한 가격과 넉넉한 양으로 환영하는, 한국대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도 오픈된 곳이기도 했다.
“빨리 먹자. 라면 불겠어.”
“야. 넌 이딴 게 입에 들어가냐? 존나 밥 같지도 않은 걸.”
“우리 학교 콩나물 라면 겁나 유명하거든? 이모님이 공기 반 불 맛 반 해서 착착. 얼마나 맛있게 끓여 주시는데?!”
양희인이 불같은 표정으로 성질을 냈다. 저 꼴을 보니, 어제 거하게 술을 들이켠 게 분명했다.
“너나 먹어.”
“음식 남기면 벌받는다, 너? 뭐 하긴, 네가 죽어서 안 받을 벌 찾는 게 더 빠르긴 하겠다.”
“술 덜 깼냐. 작작 처먹어. 나 간다.”
“므어? 야! 어디 가!”
후― 후― 라면 면발을 젓가락으로 집고 불어 대던 양희인을 두고 그대로 등을 돌려 학관에서 나와 버렸다.
어쩐지, 누군가의 시선이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스토커가 아니야?
이게?
벌써 몇 번째로 우연히 마주치는 건지 모르겠다. 이게 스토커가 아니면 대체 뭐냔 말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처음 듣는 수업.
그리고 류주호는 지금 이 순간, 모든 우주가 자신을 기만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면 이놈이 저를 단단히 얕보고 저를 놀려 먹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또?’
류주호는 서늘한 낯으로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총 네 명의 인간이 있었다. 계단식 강의실에서 앞자리에 세 명. 그리고 제 오른쪽에 한 명.
이 모두가 첫 번째 과제를 함께하게 된 조원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전 처음 느끼는 제 운에 대한 굴욕감을 느끼게 한 주인공인 온기현이 그 옆에 앉아 있는 주인공이었다.
젊은 꼰대인 그 망할 교수는, 자율성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조 편성은 제 맘대로였다.
어떻게 구성했는지, 심지어 이름순도 아니었고 앉아 있는 자리대로 구성한 것도 아니었다. 슬라이드에 대여섯 명씩 각 조에 해당하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류주호는 스크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제 눈을 의심했다.
류주호, 온기현.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이름.
뭐랄까. 이제 더는 화낼 힘도 생기지 않았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우연의 힘이 이 또라이, 아니 온기현의 코에 박힌 점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이 상황에 열을 내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낯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앞에 앉은 세 명의 가련한 희생양들은 그저 교내에서 유명하기로는 손꼽히는 류주호 선배의 눈치만 보고 쭈뼛거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용자는 있기 마련이었다. 눈치를 보던 세 명 중 남학생 한 명이 복화술을 하듯이 누구에게랄 것 없는 말을 건넸다.
“저……. 안녕하세요. 저는 국문학과 상의현이라고 합니다. 3학년입니다.”
굳어 있던 냉기에 파삭, 하고 금이 갔다. 그에 긴장감에 바싹 쫄아 있던 옆에 있던 여학생이 조금 풀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의류학과 2학년 김미래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이번에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1×학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옆에서 여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이름이 뭐예요?”라고 묻자 크게 당황한 신입생이 헉하며 “신용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류주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듣기 좋은 저음이 벌린 입 새로 흘러나왔다.
“저는 경영학과 4학년 류주호입니다.”
“아,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나 알아요?”
류주호의 미소 섞인 물음에 저를 김미래라고 소개했던 여학생이 주저하는 제스처로 볼을 붉히며 말을 걸었다.
“그, 그럼요! 우리 학교에서 류주호 선배님 모르면 간첩일걸요. 앤타에서도, 막. 어. 와아. 진짜 신기하다. 연예인 보는 것 같아요.”
“저, 저도요! 인문대에서도 선배님 유명하십니다. 와, 저 선배님이랑 팀플한다고 하면 아마 제 동기들이 저 가만 안 놔둘걸요.”
그 둘의 들뜬 어투에 신입생이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며 눈치를 봤다.
“…….”
하지만 금세 싸늘해진 분위기에 또다시 그들은 말을 잃고 말았다. 류주호는 대답 없이 팔짱을 풀며 제 머리를 한 손으로 스윽 쓸어 넘겼다.
좆 같네, 씨발.
이딴 애송이들을 데리고 별 시답잖은 조별 과제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지긋지긋했다.
자신이 속한 이상 거지 같은 결과물을 내는 것은 제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까지도 딱히 다를 바 없는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팀플이 수업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영학과 특성상,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팀플을 해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거기서 제가 택한 방법은 하나였다.
무조건 발표는 자신이 할 것.
그리고, 나머지 팀원들에게 각자 일을 분담시켜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기 전까지 모두 반려할 것. 만약에 끝까지 제대로 해 오지 않으면 조별 과제 명단에서 그 새끼 이름은 뺄 것이라 미리 엄포를 놓고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팀원들은 교수의 평가까지 가기도 전에 류주호의 평가에서 아웃되면 끝이란 얘기였다. 평가를 두 번 치르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그와 같은 조가 되면 높은 확률로 A를 받기 때문에 가혹한 환경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만드는 조장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류주호의 지옥의 불쏘시개 같은 악담을 ― 예를 들어, “이딴 걸 조사라고 해 왔냐”, “능력이 개떡 같아서 PPT를 개떡같이 만드는 것이냐”, “뇌에 우동 사리를 넣었으면 우동 값이라도 하시라”라는 등 ― 견딜 수 있는 강심장만이 그와 함께하기를 간절하게 희망했다.
이번에도 같은 수순을 밟아야 할까. 여차하면 죄다 떨궈 버리고 혼자 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들의 점수까지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류주호가 막 입을 떼려던 때.
파삭거리던 아슬아슬한 냉기를 가로지르는 허스키한 음성이 관자놀이를 툭 하고 찌르듯 들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경영학과 3학년 온기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류주호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다. 그렇다, 이놈이 아직 소개를 끝내지 않았었다.
같은 학과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어떻게 이제까지 한 번도 눈에 띄지 않았는지 그게 의문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군 미필인 3학년이라면, 까마득한 후배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번뜩 떠올랐다. 이놈은 하룻망아지다.
“엇, 3학년이면 저랑 같은 학번이시겠네요! 저도 아직 군대 안 갔어요. 와, 반갑다. 1×학번 맞으시죠?”
아까 본인을 인문대 3학년이라고 소개한 남학생이 활짝 웃으며 떠들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자, “어…….”라는 우물거림과 함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병장 만기 제대했는데요.”
“네?”
“그리고 제가 휴학을 좀 자주 해서요. 저 1×학번입니다.”
“네?”
“헐.”
“……헐.”
뭐?
벙쪄 있는 그들 사이로 류주호 또한 어이없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를 미필로 알고 있었다. 좋게 쳐 줘 봐야 1, 2학년쯤 됐을까 싶었는데 3학년이라니. 비록 한 살 차이지만 그 간극의 이질감은 꽤 컸다.
그런데, 군필에다가 심지어 같은 학번이라고?
한동안 멍한 공기가 흘렀다. 하지만 온기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입을 열었다.
“음. 그리고요. 혹시 괜찮다면 제가 조장을 할게요. 괜찮으실까요?”
“아, 네.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감사하죠.”
“네, 네.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
뭐야.
순식간에 제가 나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아니, 근데 이것들 봐라.
이 새끼들은 애초부터 조장을 맡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온순해 보이는 놈의 적극적인 모습에 방긋거리며 좋아하는 꼴을 보니 촉이 싸하게 왔다.
온기현은 류주호 쪽을 흘끔대며 말을 이었다.
“주제는 제가 생각해 온 게 있긴 한데요. 최근까지 급성장 중인 OTT를 주제로 발표를 해 보면 어떨까 해요. 엣플릭스나, 왓쳐같은.”
“이유는?”
류주호가 대뜸 말을 잘랐다. 온기현이 슬쩍 눈을 굴려 이쪽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어……. 자유 주제라고 되어 있긴 하지만 콘텐츠 제공 측면에서 봤을 때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어떻게 보면 가장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리고 아이디 하나로 여러 개의 콘텐츠를 나눠 갖는 미디어 공유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도 될 것 같아서요.”
술술 나오는 말은 일주일 동안 제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류주호가 무어라 말을 얹기도 전에 온기현은 괘씸하게도 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자료 수집은 신용철 씨가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느 사이트 소스가 좋을지는 참고할 만한 주소를 몇 개 공유해 드릴게요. 그리고 자료 분석은 상의현 씨랑 김미래 씨 두 분이 같이 해 주시면 좋겠어요. 제출할 리포트 작성도 동시에 해 주시고요. PPT 제작은 제가 하겠습니다.”
온기현은 생긴 외양과 달리 조장으로서 깔끔하고 야무진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한 명만 뺀 모두의 과제 분담이 마쳐졌다.
“발표는, 류주호 님이 해 주세요.”
“내가 왜?”
류주호는 삐딱하게 되물었다. 왜 멋대로 정해 주느냔 말이다.
그 되물음을 예상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사고가 정상의 궤도에서 벗어난 놈이라 그런지 낯은 평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봉긋한 입술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잘하시잖아요, 발표.”
허. 꼭 저를 줄곧 봐 온 사람처럼 얘기하는 온기현의 말에 류주호의 입에서 헛숨이 터졌다.
“그럼. 여기 번호 적어 주시고요. 각자 저장해 주세요. 톡방은 제가 만들게요.”
“네, 선배님.”
“네. 연락 주세요!”
“네!”
우렁차고 발랄한 대답이 들려왔다. 류주호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 낯을 유심히 살폈다.
그렇게 각자의 번호를 저장했다. 류주호의 번호를 얻었다는 것에 몇 명이 꽤 감명 깊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다음에 뵙자는 말로 꾸벅 인사를 하고서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류주호는 또 같은 백팩을 메고 온 온기현이 자리를 뜨기 전에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날 그렇게 잘 알고 있었네.”
“……뭐 그렇죠. 워낙 유명하시잖아요.”
“어쩐지. 그런데 같은 학과인데도 왜 전혀 몰랐지. 과 활동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나 보네?”
“아까 말했다시피 제가 휴학을 자주 해서요.”
“거기다가 같은 학번이기까지.”
류주호가 물끄러미 온기현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도통 같은 나이 같지 않았다.
“거짓말 아냐?”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해요.”
온기현이 백팩을 고쳐 메며 단호히 대꾸했다. 그러고는 대뜸 매서운 눈초리로 올려다봤다.
“근데요.”
“?”
“왜 계속 반말하세요?”
뾰족한 말에 류주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어쩌라고, 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읽은 온기현이 이내 빽 소리를 질렀다.
“우리 동갑이라고. 나도 반말할 줄 알아!”
“……뭐?”
그러고는 부리나케 강의실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아니, 저게.
황당함에 또다시 남겨진 류주호는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진심으로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머릿속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저런 불가해한 인간, 아니 생물은 처음이었다.
류주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가만히 서 있다가, 핸드폰을 들어 통화 목록 중 010으로 시작하는 여러 개의 번호 중 제일 위쪽에 있는 번호를 꾹 눌렀다.
그리고 ‘스토커 새끼’라고 썼다가 지우고는, ‘헤픈 새끼’라고 썼다가 다시 지웠다.
그리고 이름을 새로이 입력한 뒤에 연락처에 저장했다.
‘헤픈 망아지’
그리고 그 아래로 줄지은 번호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화면을 껐다.
* * *
띵.
띵띵.
띵.
띵띵띵.
“아, 씨발.”
존나게 시끄럽네.
류주호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침대 시트 위에 누운 채로 잔뜩 찌푸린 눈가를 손등으로 가렸다. 짜증스러운 소음으로 인해 잠이 깨 버렸다.
지난밤, 제 아버지에게 한바탕 대거리를 했다.
자금은 사업을 시작한 후에 이자까지 쳐서 톡톡히 갚겠다, 아버지 자신을 투자자라고 생각하시면 되는데 뭐가 문제냐며, 식사 자리에 참석하기 위해 본가에 찾아갔던 류주호는 금세 삐딱선을 탔고, 매서운 눈초리로 방탕해 마지않는 제 아들을 흘겨보던 아버지에게 재차 호기로운 요구를 한 것이다.
“거 좀, 핏줄한테 마음 좀 넓게 씁시다. 그렇게 꼰대처럼 팍팍하게 구시다가 노후에 비행기 안이 아니라 금고 안에 갇혀서 생을 마감하시겠습니다. 예?”
“못난 놈.”
“그런 말도 있잖아요. 못난 새끼 떡 하나 더 준다고.”
“썩 꺼져!”
차마 화기애애하다고는 못 할지언정 엄숙하고 평온하기 그지없던 가족 간의 단란한 식사 자리는 대번에 식기류가 오가는 험악한 분위기로 치달았다. 그에 집안일을 거드는 직원들이 죄 식당으로 모여들 정도로 엄청난 소란이었다. 드넓은 저택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짱짱한 노인네를 상대로 말 한마디 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로 서로 치고받고 하다가 결국 한껏 열 오른 상태로 제 단골 회원제 바로 가서 마침 그곳에서 흥이 올라 즐기고 있던 지인들과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댔던 터다.
띵.
정교하게 다듬어진 매끄러운 미간에 내 천 자가 새겨졌다.
입학 초기에는 별의별 이름도 기억 못 할 연놈들한테서 메시지가 오는 경우는 허다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쉴 새 없이 올라가는 배지 알림 숫자가 지저분하고 지겨워서 견딜 수가 없어지던 때 몇 번이나 번호를 바꿨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겹게도 핸드폰이 울리곤 했다.
유유하게 독보적인 위치에 있던 류주호는 속으로는 어떤 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우월한 외모와 탁월한 존재감 덕에 어디에서나 눈길을 끄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와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이는 산처럼 많았다.
결국, 그렇게 아무도 상대를 해 주지 않자, 겁 없는 이가 대표로 그에게 직접 물어보게 되었다.
“어, 주호야. 우리 단톡방에서 얘기하던 MT 때문에 말인데. 호, 혹시 올 수 있어?”
“……아하. MT.”
말을 더듬으며 볼이 빨개진 채 말을 걸어오는 이는 다름 아닌 과대인 남자 선배였다. 류주호는 꾸준히 유지해 온 사교성 있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마치 발로 짓밟은 토마토처럼 과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순간 구토감이 치솟는 것을 겨우 참으며 류주호가 말했다.
“이를 어쩌죠. 저 그날 시간 안 되는데.”
“어, 언제인지 말 안 했는데……. 맞다. 단톡방 한번 봐 볼래? 거기 내가 공지 띄워 놨거든.”
“저 핸드폰 없어요.”
“어? 해, 핸드폰이 없어?”
“네. 저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네요. 아, 여보세요.”
대화 중에 마침 전화가 와서 핸드폰을 귀에다 대고 싱긋 눈웃음으로 인사를 하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과대를 등지고 자리를 떠 버린 류주호였다.
그리고 그 뒤로, 그에게 의미 없는 문자나 카톡을 보내며 접근해 오는 사람들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마치 스크린 너머의 연예인처럼 멀리서만 지켜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도 대담한 몇몇, 아니 다수의 여자들만이 류주호의 연락처를 악착같이 알아서 곁을 차지하기 위해 꽤 애를 다. 하지만, 그것도 유쾌한 관계만을 추구하는 류주호로 인해 일회성의 연락이 되어 버렸기에 류주호는 굳이 생판 모르는 타인의 번호를 저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류주호의 사적인 연락처는 상당히 빈약한 편이었다.
띵.
“씹.”
이마에 얹었던 손등을 치우며 침대에서 나른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에 탄탄하게 잘 짜인 그의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길게 뻗은 목선 아래로 두툼한 삼각근으로부터 넓게 뻗어 나오는 어깨선, 그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이느라 등 뒤로 견갑골이 울퉁불퉁 불거진 상태로 씰룩거렸다. 증조부가 혼혈인 터라 바다 건너 서양인의 피가 일부 섞인 류주호의 몸은 결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그 피의 근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굵은 잎맥과 닮은 핏줄이 팔뚝을 따라 길게 이어져 있었고 그 손끝은 핸드폰을 향해 느릿하게 뻗어 갔다.
‘어떤 새끼야.’
찬 금속성 물건을 손에 쥔 류주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핸드폰을 열었다.
톡 앱에 들어가자 눈에 들어온 것은 처음 보는 새로 생긴 단톡방이었다.
류주호는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그리고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글자를 입에 담았다.
“헤픈 망, ……하.”
헤픈 망아지.
순간 뾰족하게 올려다보던 제 딴에는 매섭게 만든 눈초리가 떠올랐다. 그 뒤에 줄줄이 이어진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다른 조원들 이름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단톡방에 들어가자 대화가 꽤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뭔 말을 이렇게 길게 하는 것인지 웃기지도 않아서 처음부터 주욱 살폈다.
헤픈 망아지 [안녕하세요.] 08:00
운을 뗀 것은 그놈이었다. 밑으로 대충 의미 없는 인사말이 이어졌다.
헤픈 망아지 [명확한 주제에 대해서 의견 여쭈려고 합니다. ‘글로벌 3대 OTT 업체의 생존 전략’이 어떨까요? 의견 부탁드립니다.] 08:03
그 밑으로는 대충 좋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헤픈 망아지 [네. 그럼 과제의 상세한 내용과 방향에 대해서는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08:04
헤픈 망아지, 온기현이 계속해서 무어라 주절거렸다.
뭐 대충 요약해 보자면 대략적인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담은 것이었다. 온기현의 말이 길어질수록 조원들의 대답은 짧아졌다. 긍정적인 반응들뿐이었다.
손 닿는 대로 의미 없이 선택한 듯한 좆같지도 않은 오케이 이모티콘과 함께.
나중에는 나머지 조원들은 단답식의 대답만 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의견을 내며 줄줄이 얘기하는 것은 온기현뿐이었다.
다들 좋아요, 좋네요, 넵, 이 지랄만 하고 있었다.
류주호는 대충 어떤 분위기인지 가늠하고선 얼굴을 구긴 채로 픽, 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분담한 대로 나눠서 다음 수업 시간까지 조사해 오기로 하고 대화는 종료되었다.
핸드폰을 침대 저쪽으로 심드렁하게 던져 버리며 느른한 짐승처럼 곤한 몸을 일으켰다. 회색의 트레이닝 바지가 장골에 걸쳐져 걸음을 할 때마다 복사근이 꿈틀댔다.
달칵.
냉장고에서 500밀리 생수병을 꺼내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방관자 효과. 혹은 책임감의 분산.
대충 그런 것이지, 싶었다.
누군가는 하겠지, 의 심리. 이 경우에는 동일한 목표에 있어서 누군가 한 사람이 발 벗고 나서면 나머지는 책임과 의무를 밀어 주고 저는 최소한의 지원만 하며 빠지는 형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다. 같이 불타올라서 열심히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머지 세 명에 그런 타입이 전혀 없는 게 문제였다.
관성이었다.
특히 대학에 유독 많았다. 책임을 덜 지고, 어떻게든 저는 손해 보지 않고 무임승차하려는 사회의 버러지들이 대량 양산되고 있는 곳이 바로 대학교였다.
물론 자신이었으면 절대로 그 꼴은 두고 보지 않을 터.
어쨌든 온기현이 열심히 발 벗고 나서서 끌어 주는 형태가 되고 그들이 순순하게 말을 잘 듣고 하라는 것 제때 해 주며 끌려가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뭐.
류주호는 텅 빈 생수병을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렸다.
‘알아서 하겠지.’
이미 제 손을 떠난 지금, 자신이 나서서 커버를 쳐 줄 의리는 없었다. 일단은 두고 볼 생각이었다. 거지 같은 결과물로 도매금으로 팔려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꼬리 자르기 또한 자신의 관성이었다.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거실을 가로질러 욕실로 향했다.
* * *
“으음. 아……. 아……. 아, 여깄다!”
책등에 붙여진 ‘아’가 가리키는 책장 위치를 따라서 손으로 훑다가 책이 꽂힐 제자리를 발견하고 얼른 책을 꽂았다. 빈틈에 꽂는 그 순간만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 온기현은 입꼬리를 올려 빙긋 웃었다. 맹하던 인상이 금세 톡 튀어 오를 듯이 환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것도 일순이었다. 아직 북 트럭 위에는 제자리를 찾아 줘야 할 책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따라 반납이 많은 날이었다.
근로 장학생인 도서관 사서로 일하게 되면 장점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안 좋은 점은, 의외로 보기보다 노동 강도가 세다는 것이었다. 데스크 업무와 서가 업무를 번갈아 가며 조를 짜서 일하기에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보는 것만큼 단순하고 얌전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중학생 때부터 교내 도서관에서 봉사 활동을 하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남들보다 아주 조금 더 요령 있게 일하는 법을 아는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은 없어서 못 구한다는 근로 장학생 아르바이트 자리를 운 좋게 꿰찬 것도 온기현으로서는 이미 입시 운 이래로 최소 3년 치 운은 다 써 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바짝 벌어야 할 때였다.
빈번하게 휴학을 하느라 동기들보다 졸업이 거의 2년이나 뒤처지게 생겼다. 물론 요새는 제때 졸업하는 것이 드물다고는 하지만, 휴학하더라도 이제는 스터디를 한다거나 어학 공부를 하는 등 의미 있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었다.
“악.”
이응 칸을 전부 채우자 그제야 허리의 통증이 둔중하게 몰려왔다.
결국 병원엔 못 갔다. 대신 고깃집 사장님한테서 파스를 하나 얻어다가 붙인 게 다였다.
그나마도 혼자서 끙끙대며 붙이느라 멍이 든 위치에서 조금 어긋났는지 멀쩡한 살이 알싸해지는 감각이 생생했다.
아, 진짜. 진짜 오늘은 병원 가야겠다.
속으로 결심하다 이내 오늘도 고깃집 아르바이트가 있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 오늘 말고, 내일은 병원 진짜 가야지.
매일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만, 늦어질수록 제 손해인 것은 알고 있었다. 미련해지지 않기로 스스로 그렇게 다짐했는데.
문득 들어찬 빛에 눈이 부셔 시선을 들었다. 커다란 도서관의 차창 너머로 햇볕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그에 하늘하늘 휘날리는 얇은 커튼이 보이는 것 같았다.
기현은 눈을 깜빡였다. 느릿느릿.
시야에 하나의 빛나는 인영이 들어왔다. 그는 일렬로 서 있는 책장들을 지나치며 걷다가, 막 기현이 있는 책장 사이로 몸의 방향을 틀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커튼 사이로 보이는, 빛에 반사되어 옅게 빛나는 갈색의 물결과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남자다우면서도 매끄럽게 깎은 듯한 이목구비. 보존이 잘된 한 폭의 고전적인 서양 인물화를 넋 놓고 감상하는 듯한, 그런 느낌.
그림이 눈을 감았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점점 다가온다.
점점. 점점.
온기현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멍하니 햇볕을 등지고 다가오는 인영을 쳐다봤다. 북 트럭을 잡은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깜빡, 깜빡,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문득 열린 창문 틈새로 왁자지껄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원한 바람에 얇은 커튼이 나부끼고, 환하게 굽이치는 햇살이 그의 주위를 따스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느덧 점점 멀어진다. 그림같이 뚜렷한 음영 진 얼굴이 주위로부터 시야를 빼앗았다. 모든 감각이 차단될 정도로 아득하게 감각을 빼앗겨 버린다.
점점 다가올수록 온기현의 고개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위로 꺾였다. 그의 깊은 갈색 눈동자까지 헤아릴 수 있을 때쯤 그의 그림자가 온기현의 위를 완전히 덮쳤다.
그리고.
“멍하니 뭐 해.”
툭 튀어나온 냉소적인 음성에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눈동자를 휘휘 굴려 주위를 둘러보자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고 조용한 도서관 내에는 바스락거리는 잡음만이 들려올 뿐 어떤 웃음소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바보같이 고개를 돌리며 입을 헤벌리고 있는 온기현을 남자가 마뜩잖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한심할 수가 있냐는 듯 눈썹이 가지런히 모였다.
대체 여기서 왜 또.
하.
어이없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류주호는 오늘 아침에 평생 관심도 없던 제 황소자리 운세까지 찾아봤다. 요새 운이 따라 주지 않는 게 도통 이상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심산이었다.
예전부터 도서관을 좋아했다. 중, 고등학교 내에 갖춰진 교내 도서관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도 이래저래 시끄러운 속을 달래고 싶어서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았던 것이다.
시끌벅적한 공간이 아닌, 학생들이 잘 찾지 않는 층의 창가와 가까운 책상에 앉아 앞으로의 할 일과 버려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곤 했다.
하지만 당장 맞닥뜨린 이 온기현이란 남자는 그 둘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생각 중에 문득 떠오른 샐쭉한 눈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듯이 속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모로 기울인 고개를 숙여 눈앞의 남자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펑퍼짐한 티셔츠를 입고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남자. 제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자신을 홀린 듯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저까지도 같이 넋을 놓을 것 같은…….
아니, 아니다.
류주호의 말에 그가 번쩍 정신이 든 듯 금세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오며 얼굴의 빛이 꺼졌다. 불쑥 솟아오른 초조감에 문득 입 안이 말랐다. 생경한 초조감 때문에 더욱 기분이 나빠진 것은 덤이었다.
“뭐 하냐니. 안 보여? 지금 일하잖아.”
도서관을 의식한 듯 속삭이는 허스키한 음성이 불퉁했다. 자신을 향해 던지는 말투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반말이 되었다.
“무슨 일. 너 여기 학생이라며.”
“근로 장학생도 몰라? 여기, 여기. 이렇게 반납된 책들 책장에 다시 넣고 있잖아.”
온기현이 제가 밀고 있는 북 트럭을 류주호 방향으로 흔들어 댔다. 그러고 보니 뭔 책들이 더럽게 많았다.
인적이 드문 장소, 드문 시간, 특히 도서관에서 다시금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 마치 운명이 저를 가지고 놀아 대는 것 같았다. 툭 튀어나오듯이 등장한 이 남자의 존재 자체가 그러했다.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제 앞에 불쑥불쑥 나타나는.
“……별. 홍길동도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뭐? 홍길동? 나, 온기현인데.”
“허.”
기가 찼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면 뭐, 어쩌란 말인가. 귀여운 척을 하고 난리네, 이게. 그가 온기현이란 걸 누가 모르느냔 말이다. 한번 들은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는 비상한 머리가 며칠 새에 죽을 리는 없었다.
“경영학과 학생, 그것도 3학년이면 한창 정신없을 텐데. 여기서 책 정리할 시간은 있고?”
“수업도 열심히 듣고 있고, 교양 조별 과제도 피해 가는 일 없게 할 거야.”
거기까지 물어보지 않아도 제멋대로 척척 대답은 잘했다.
자신을 좋아한다던 놈이, 툭툭대면서 생판 남 대하듯이 한다. 아니, 거의 남보다 못한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
물끄러미 보고 있으려니 놈이 눈을 떼구루루 굴리다가 북 트럭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중얼거리듯이 내뱉었다.
“나 일해야 하는데.”
“해.”
“거기 있으면 방해야.”
“나도 책 읽으러 왔어. 《아시아 100인의 패륜아》.”
‘이응’ 라인에 줄지어 있는 책장만 해도 사람 열댓 명 키를 합친 것보다 길었다.
온기현은 그런 책이 있었나?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을 다물고는 그를 무시하듯 책을 집어 고개를 내밀고 눈으로 훑은 다음 제자리를 찾아 휙 책을 꽂아 넣었다.
그것을 흘끔 보다가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시아 100인의 패륜아》란 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딴 책을 냈다가는 100인의 직계손으로부터 소송을 당해서 진작에 편집기획자부터 줄줄이 모가지를 당했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책을 찾는 척했다.
온기현은 청구 기호를 뚫어지게 보다가 책장을 보고 한참을 번갈아 봤다. 고개를 빼내어 청구 기호를 보니 저 꼭대기 줄에 꽂혀 있어야 할 책이었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 차이가 나는 신장이었다. 그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저기까지 손이 힘겹게 닿을 것이다. 류주호는 그의 손에 든 것을 휙 낚아채서 덜렁이는 손이 어어, 하며 쫓아오기 전에 얼른 위 칸에 쑤셔 넣었다.
“나도 저기 닿아.”
“퍽이나.”
“진짠데…….”
코웃음을 치니 그가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다. 그러다가 시선에 무언가 걸렸다. 어색하게 공중에 떠 있던 손을 가져가 부산스럽게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 사이로, 발갛게 달아오른 귓불이 보였다.
하.
이것 봐라.
“이제는 마음 다 접은 건가?”
“어?”
“나 좋아한다며. 아니, 좋아했었다며.”
“아. 응.”
“그래서.”
어떤데.
싱긋 웃으며 온기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그렇지 뭐, 하고 다시 부산스러운 척을 한다.
“54번째라니. 하하. 이 사람 저 사람한테 그렇게 헤프게 굴기도 힘들 텐데.”
“별루. 안 힘들었는데.”
주변에 사람이 지나다니지는 않았지만, 공공장소라 언제든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개방된 곳이었다. 온기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속삭이는 듯 간지러웠다.
“이제까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좋아한 거야? 외모? 아니면 성격? 금방 사랑에 빠지는 이유도 다 달랐어?”
“응, 뭐.”
이제까지는 저랑 몸을 섞은 이들이 누구와 사귀든, 누구와 사귀었든, 아니면 원나잇을 했든 전혀 상관없었다. 이렇게 물어본 것은 순전히 이제껏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생명체에 대한 탐구심에 더 가까웠다.
온기현은 평연하게 대꾸했지만,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재미있어서 굳이 파고들었다.
“왜 좋아했는데?”
경계심 많은 망아지를 살랑살랑 꾀어내는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로 웃음과 함께 속살거렸다.
제가 호감을 사는 외모인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 덕을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가 그것에 별로 연연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질척임을 받으면 상당히 곤란해지는 상황들이 많았다.
적당히 즐기고 순순히 떨어져 나가는 관계까지가 딱 좋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아예 기대조차 품지 않은 터무니없는 고백이 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애초에 어떤 연유로 자신에게 호감을 품었길래 고백을 했는지.
보통은 이렇게 묻지조차 않았다. 궁금해하는 것조차 하나의 관심이라고 생각하며, 이상할 정도로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이 저에게 동등한 애정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행태였다.
일정 기준 이상의 관계와 거추장스러운 감정으로 깊어지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온기현이 다시금 발갛게 달아오른 귀를 만지작거렸다. 입술이 자꾸 달싹였다. 어쩐지 그런 미세한 움직임에 시선이 꽂혔다. 그 주름 하나 없이 도톰한 입술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에 걸린 의도적인 미소가 점점 옅어졌다.
낯이 서늘하니 굳어진다.
그때, 온기현이 코로 숨을 폭 내쉬더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좋아하는 이유는 다 달라.”
“그래서.”
“어?”
“나 전에 좋아했던 사람은? 왜 좋아하게 된 건데.”
“어. 아이스크림 먹는 모습이 이뻐서.”
“흠.”
좆 빠는 것처럼 먹기라도 했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고개를 모로 까딱였다.
“그 전에는?”
“삼겹살 먹으러 갔는데 고기를 뒤집었더니 딱 알맞게 구워져 있었어. 고기를 잘 굽더라고.”
“하하. 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시답잖은 이유들이었다. 고기를 잘 굽는 게 좋아한 이유였다고? 고작 만 원짜리 고기에 헤프게 벌어지는 마음이 영 마뜩잖았다.
굳어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팔짱을 풀었다.
“그럼 나는?”
나는 왜 좋아한 건데.
온기현이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쓱쓱 비벼 눌렀다. 그리고 콧잔등을 찡그리자 그의 콧방울 위에 박힌 점이 저를 노려보는 것처럼 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빛이…….”
작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좀 더 가까이 숙였다.
응? 뭐라고?
그러자 온기현은 고개를 번쩍 들고는 북 트럭 손잡이를 불끈 잡았다.
“싸가지없어서.”
“뭐?”
“비켜, 비켜. 나 시간 없어. 길 막지 말고.”
“뭐, 아니, 잠.”
온기현이 좁은 책장 사이 공간에 서 있는 류주호를 쳐 버릴 기세로 막무가내로 북 트럭을 밀어 댔다. 성난 망아지처럼 무작정 냅다 밀어 대는 탓에 쫓겨나다시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 저거 진짜.
씩씩한 발걸음으로 힘을 주어 북 트럭을 밀고 휑하니 건너 건너편의 책장으로 쏙 들어가 버린 온기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류주호의 얼굴에서 황망한 표정이 감추어지지 않았다.
* * *
시끄러웠던 단톡방이 잠잠했다.
그것을 인지한 것은 며칠 안 되었다. 애초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처음 며칠에는 숫자가 꽤 자주 올라가는 듯싶더니, 이제는 잠잠한 상태였다.
할 일이 대충 정리된 건가.
별생각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서 나아가질 않았던 것은, 류주호의 창업을 둘러싼 일들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정면에서 조건을 걸었다.
삼호 운용 그룹에서 주최하는 투자 대회에서 입상하면 투자금을 거머쥐는 조건을 말이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더니, 평소에 두터운 신뢰감을 갖고 있던 김 교수가 주관하는 대회라고 하자마자 눈에서 윤기 어린 빛을 번득였다.
그리고 악랄하게도 입상이 아니라 1위를 요구했다. 류주호도 지지 않았다.
그렇게 부자간의 딜이 성사되었다. 그 사이에는 억을 호가하는 금액이 걸려 있었다.
골치가 아팠다.
단순히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이는 대회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중에서 특히. 한 명이 걸렸다.
감후석.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웃음으로 인망이 두터운 제 동기. 하지만 단순히 물렁물렁하게만 보고 감후석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무시하지 못한다는 말이 맞았다. 내면에 있는 호기로운 승부욕이 타오르는 남자란 걸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렇지 않고서야 투자 대회란 대회에서 모조리 상을 휩쓸 수가 없었다.
누구나 제각각 빛을 발하는 분야가 있기 마련이다.
류주호는 자신의 분야는 빠른 두뇌와 그에 걸맞은 공격적인 행동력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감후석은 그와는 조금 달랐다.
친밀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알 만한 수준으로 몇 년 동안 말을 섞어 온 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렴하고 온화해 보이지만, 한 가지를 파게 되면 득달같이 골몰해서 독보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반대편에서 상대하기에 꽤 골치 아픈 사람이었다.
그 자신도 연애를 하게 되면 그 사람만 본다고 하지 않았는가. 마음을 뺏기면 뒤도 안 돌아보고 그것에만 올인하는 스타일인 듯싶었다.
저와는 정반대였다. 달콤하게 서로만을 바라보는 연애라고 일컬을 만한 관계도 거의 없었고, 오로지 관계뿐인 그것과 제 일상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만약 그런 놈이 연애를 한다면 다른 곳에 신경 쏟을 틈은 없을 것이다.
웃기는 일이다.
어느 놈은 한결같고, 어느 놈은 헤프기 짝이 없고.
또박또박 대꾸하던 입매를 떠올렸다.
고기를 잘 구워서 좋아하게 됐다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류주호는 피식하고 제 입에 걸리기 직전인 웃음이 바람 앞 먼지처럼 사그라지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괜스레 핸드폰이 손에 걸렸다. 문득 초조함이 느껴졌다.
곧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뇌리에 느닷없이 나타난, 샐쭉이는 눈꼬리와 함께 생각 저편으로 치워 버렸다.
류주호의 머리가 의아함에 모로 돌아갔다.
무표정한 낯이 빤하게 한 지점으로 향했다.
팔짱 낀 단단한 팔뚝 위로 손가락을 툭툭 일정한 리듬감으로 두들겼다. 그 아래로 길쭉하게 겹쳐서 꼬아 올린 다리 위로 주름 하나 없던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졌으며, 한여름임에도 더워 보이지 않는 가죽 로퍼를 신은 발이 손가락과 똑같은 리듬감으로 공중에서 까딱였다.
그는 원형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주위는 시끄럽지 않은 백색 소음이 둘러싸고 있었다. 캠퍼스 바로 앞에 위치해 있는 커다란 카페는 드문드문 공부 중인 학생들의 고개 숙인 머리통만 보였다.
그런 은근한 열의가 섞인 유유한 분위기 속에서, 한 테이블만 유독 팽팽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만.
류주호는 제 앞에 앉은 이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그리고 저와 같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이, 온기현 또한 마찬가지로 눈을 껌뻑이며 류주호를 멀뚱히 쳐다봤다.
하아.
입에서 짜증이 새어 나왔다.
“오늘, 조 모임이라며?”
“응.”
온기현은 고개를 살짝 위아래로 끄덕였다.
“근데.”
팔짱을 느릿하게 풀며 제 팔뚝을 두들기던 손가락을 테이블 위로 가져간다. 그리고 툭, 툭.
“왜 우리 둘밖에 없어?”
그랬다.
단체 대화방은 아예 쳐다도 보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근래에는 대화 자체도 뜸했고 새로 올라오는 알림도 없었다. 그러던 중, 온기현에게서, 아니 정확히는 ‘헤픈 망아지’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조 모임의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약속 장소로 나왔다. 어찌 됐든 팀플의 생명은 참여도였다. 그리고 참여도만큼 기여도도 중요했다. 이것이 기본으로 깔린 다음에야 여럿이 모여서 뭐든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게 된장이든 좆 부리든 뭐든지 간에.
그런데.
왜 지금 총 다섯 명인 조원 중에, 딸랑 둘만이 이 장소에 모여 있는지 그게 의문이었다.
“아. 사실은 있잖아―.”
버릇인지, 아니면 애교가 원체 많은 건지 ‘아―’ 이러고 말끝을 길게 늘인다. 귀엽게 보이려는 수작인 것도 같아서, 헤프다는 인상이 더욱 짙어졌다.
온기현은 백팩을 멘 채였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한 희멀겋고 길쭉한 손으로 그 끈을 꽉 쥔다. 저번부터 저런다. 누가 제 백팩을 빼앗아 가기라도 하나. 엿으로도 못 바꿔 먹겠더만. 얼굴과는 다르게 잔뜩 긴장한 듯한 손등의 뼈마디를 보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못 온다고 하더라고. 조 모임.”
“못 온다고?”
“응. 나도 오기 직전에 연락받았어.”
하하.
실없는 웃음이 터졌다. 자신이 조장이었을 때는 생각도 안 해 본 사태였다.
조 모임 바로 직전에 못 온다니.
“세 명 다?”
“응.”
“동시에?”
“응.”
순순히 대답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무것도 느끼는 게 없는 듯했다. 이놈은 대학 생활을 허투루 한 것인가. 눈치를 개나 줘 버린 것인가?
“뭐라고 연락 왔는데.”
핸드폰을 꺼내어 몇십 개의 대화가 쌓인 단톡방을 터치했다. 그 마지막 대화는 헤픈 망아지가 잘 부탁한다는 이모티콘을 보낸 것이 끝이었다. 그것도 이틀 전이었다.
“아무 얘기도 없잖아.”
“단톡방이 아니라, 나한테 연락이 왔더라고. 그, 상의현 씨는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했고, 또 김미래 씨는 몸이 안 좋아서 오늘 못 오겠다고 했고, 신용철 씨는 선배들한테 붙잡혀서 못 온다고…….”
조소 어린 웃음이 짙게 드리웠다. 그러다가 그 웃음은 곧 사그라졌다.
꼴사납게 피해자 쪽에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수룩해 보이는 이놈과 같은 취급이라니. 진한 현타가 찾아왔다.
“하아.”
“왜?”
“그걸 믿냐?”
“뭐를?”
눈치를 밥 말아 먹었다.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또랑또랑하게 저를 노려보는 콧방울의 점, 아니 눈빛은 그저 궁금증만 담고 있었다.
“걔네 거짓말한 거. 모르겠어? 딱 보니까 쌩깐 거네, 조 모임.”
“무슨. 아냐, 그런 거. 갑자기 못 가게 됐다고 얼마나 미안해했는데.”
“퍽이나.”
“진짜야!”
온기현은 성을 버럭 냈다. 하지만 그것도 주위에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데시벨로, 저에게만 들릴 정도의 노성이었다. 호구 잡힌 건 이쪽인데, 왜 성질은 나한테 내느냔 말이다.
“세 명이 동시에 파투를 낸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어! 그럴 수도 있지, 왜? 나한테 진짜 막 미안해하면서. 다음에는 꼭 참석하겠다고 했어.”
“말로는 뭘 못 해.”
비웃음을 픽 날리며 도로 팔짱을 끼고 시선을 모로 돌렸다.
앞에서 씨근덕대는 것 같더니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싸가지 밥 말아 먹은 사람 눈에는 뭐만 보이나 보지.”
고개가 다시 정면으로 돌아갔다.
이번에 시선을 모로 돌리고 있는 것은 온기현이었다. 제가 뱉어 놓은 말을 주워 담을 생각도 없는지 뾰로통해서는 귓불이 벌게져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희디흰 손가락이 그 귓불을 꽉 쥐듯이 감싼다. 대조되는 색감 때문에 귀가 더욱 붉게 보였다.
얇은 가슴팍이 아래위로 잘게 흔들렸다. 순간적으로 난장을 피워 놓고서는 제풀에 제가 놀란 듯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기가 찬다.
보면 볼수록 웃기고, ……희귀한 놈이었다.
자신이 조장이었다면, 당장 그 괘씸한 세 명을 조별 과제 명단에서 제명해 버렸을 것이다. 아니, 다른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경영학도 3년이면 조별 과제 요령을 3절이나 읊겠다.
“야, 너. 경영학과 3학년이라고 했지.”
“아, 응.”
“지난 학기에는 뭐 했어.”
“휴학.”
그러고 보니 휴학을 자주 했다고 했다.
“팀플 몇 번이나 해 봤어?”
경영학과의 생명은 팀플이다.
“어……. 두…….”
놈이 슬그머니 눈치를 본다.
“아니, 세……, 아니, 네에…….”
“몇 번.”
“……한 번.”
“하.”
그래 놓고 무슨 깡으로 조장을 맡은 거야. 조원 다 같이 룰루랄라 황천길로 인도하려고 작정했나.
“왜 한 번밖에 안 했는데.”
서늘하게 묻는 태도에 온기현은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냥, 주로 필기시험 있는 강의 위주로만 신청해서, 그랬어.”
“그럼 이번에는?”
“…….”
묵묵부답이다.
순간적으로 우연히 저와 같은 수업을 듣게 된, 기막힌 우연의 집합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온기현은 한사코 부인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의심을 떨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 와 그걸 따져 봤자였다. 발뺌과 뻔뻔함은 충분히 봤다.
“됐고.”
“어?”
“이제까지 발표 자료 준비된 것 좀 보자.”
멀뚱히 저를 쳐다보는 온기현을 보고 혀를 쯧 차며 일어나서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 류주호의 동선을 커다란 눈이 좇는다. 그러다가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이 깜빡, 하고 움직였다.
“노트북 가져왔지?”
“아, 응.”
“켜 봐.”
나란히 앉은 상태로 온기현이 제 백팩에서 부산스럽게 노트북을 꺼내는 모습을 곁눈질했다.
오늘도 역시나 펑퍼짐한 티셔츠를 거적때기처럼 걸친 차림이다. 대체 저딴 옷은 어디서 구해다가 입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백팩 안쪽으로 고개를 숙인 터라 언뜻 보이는 목덜미가 길게 뻗어 있었다. 안쪽을 뒤적이며 마치 벽돌 같은 커다란 노트북을 꺼내는 팔뚝이 햇볕 하나 받지 못한 것처럼 새하얗다. 사이즈가 큰 소매가 헤프게 벌어지며 팔뚝 안쪽의 연한 살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류주호는 어쩐지 목 뒤가 뻑적지근하여 좌우로 목 근육을 이완시키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여기.”
“응.”
노트북은 돌덩이처럼 무거운 구식이었고 오래된 만큼이나 부팅이 오래 걸렸다. 폴더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한글 파일 하나를 열어서 노트북 화면을 돌리며 보여 준다.
“……이게 뭔데.”
“뭐기는? 이거 봐 봐. 자료 보내 준 거잖아. 일단 그 1학년 신용철 씨가 자료 모은 거라고 보내 줬어.”
류주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묘하게 일목요연한 인덱스가 군데군데 붙어 있고, 묘하게 구어체인 문구가 마음에 걸린다.
“그 애송이가 보내 줬다고? 멀대같이 키만 큰 빡빡이가?”
“왜 사람을 그렇게 말해? 신용철이라는 이름이.”
“마우스 줘 봐.”
마우스를 낚아챈 류주호가 한글 파일 위로 커서를 갖다 대, 한 문단을 드래그했다. 그리고 컨트롤 C를 눌렀다.
다행히 와이파이는 되는 노트북인 모양이었다. 포털을 켜서 대뜸 검색창에 붙여 넣기를 하고 엔터를 쳤다.
“역시.”
“왜? 뭔데? 뭔데?”
픽 웃은 류주호와 노트북 화면 사이로 검은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온다. 순간 바나나 향이 코 속으로 훅 끼쳤다. 아무래도 바나나 향이 나는 샴푸를 쓰는 듯했다. 아니면……, 본래 살에서 나는 체향이든가.
애새끼 같네, 생긴 것처럼.
그때 온기현의 입에서 벙찐 소리가 새어 나왔다.
“……초록위키…….”
“복붙 할 때 하더라도 문장 고쳐 쓰는 성의도 없네, 이 새끼는.”
완벽하게 일치하는 볼드체의 글씨를 보고 시니컬하게 비웃자 이번에는 득달같은 항의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대로 노트북을 덮고서는 제 가방에 욱여넣는다.
“제명해.”
“뭐?”
온기현이 놀란 눈으로 냉큼 뒤돌았다.
“조장이잖아. 괘씸죄로 제명해.”
“아직 신입생이니까 뭘 모를 수도 있지.”
“지금쯤 동기들이랑 낮술 처먹고 있다에 내 성적 걸지.”
“…….”
온기현은 왠지 화가 난 듯도 했다. 아니, 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본인을 향한 것이었다. 오기 실린 목소리가 류주호를 향했다.
“내가 말해 볼게. 내가 조장이니까. 나한테 맡겨.”
꼭 조장인 자신이 이 흔들리는 조각배의 선원들을 모두 감싸 안고, 반드시 순항하리라 다짐하는 선장이라도 된 듯한 패기가 엿보였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어이없는 패기와 결심이 저와는 인연이 없는 그 무언가였다.
“네가?”
비웃음과 독기 어린 말을 던진다.
“네가 무슨 수로. 그딴 식으로 물렁하게 대하다가 얕보인 거잖아.”
“아니야.”
“아니긴.”
짧은 대답으로 부정했다. 말을 길게 할 수가 없는 듯했다. 할 말이 없겠지.
“나는, 너랑 세트로 도매금으로 넘겨지는 건 못 참아.”
“…….”
“알아듣겠어?”
마지막은 나긋하게 읊조렸다.
온기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음에 다 같이 모일 때는 카페 말고 스터디 룸을 빌려야겠어. 카페는 다섯 명이 모이기에는 너무 좁잖아. 오랫동안 얘기하기도 좀 그렇고. 오늘은 짧게 만나게 됐는데 일부러 시간 내게 해서 미안했어. 다음에는 혹시 조 모임 일정이 바뀌면 미리 연락해 줄게.”
그러더니 조잘조잘 제멋대로 떠들면서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가방을 정리했다.
“그럼 이만, 잘 가.”
“야, 너―.”
부리나케 일어서서 자리를 뜨려고 하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미처 잡을 새도 없이 온기현이 백팩을 들고서는 휙 일어섰다. 그리고 후다닥 두 걸음도 채 못 가서.
“아!”
“아,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아.”
마침 테이블 앞쪽에 지나가던 남자와 부딪쳤다. 절로 터진 소리에 카페의 이목이 모두 집중되었다. 남자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세게 부딪친 거 아닌데.”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온기현은 부딪친 곳이 아픈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원래 아팠던 곳이어서. 신경 쓰지 마세요.”
“네에, 그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나가는 남자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온기현은 등에 손을 짚은 채로 슥슥 문질러 댔다.
그러자 집중되었던 곳곳의 시선들이 이내 분산되었다.
류주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등을 구부린 채로 신음성을 억누르고 있는 망아지의 뒷덜미를 확 낚아챘다.
“너 잠깐 이리 와.”
“왜 이래? 이거 놔! 놔!”
바둥거리는 온기현의 뒷덜미를 더욱 거세게 잡았다.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류주호의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현저하게 차이 나는 악력과 덩치로 인해 쉽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힐끔거리는 주위 시선은 일절 무시했다.
카페 구석진 곳에 있는 남자 화장실 문을 벌컥 열고 온기현을 밀어 넣으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화장실은 한 사람만 이용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건조식 세면대 부분과 용변을 보는 곳이 분리되어 있었다. 둘이 들어가니 공간이 상당히 비좁게 느껴졌다.
뒷덜미를 놓아주자마자 휙 하고 노려보는 온기현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벗어.”
“무, 머?”
온기현은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늘어진 티셔츠를 추스를 생각도 못 하고 입을 어벙하게 벌렸다.
“아니면 내가 벗겨 줘?”
다시금 어르듯 말하자 온기현이 제 티셔츠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말도 더듬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미, 미쳤어? 내가 왜 벗어! 벗고 싶으면 너나 벗어!”
“얼른. 나 시간 없어.”
“악!”
“쯧.”
자꾸만 뒷걸음질 치려는 온기현의 티셔츠를 류주호가 확 잡아당기며 그를 뒤로 돌려세웠다. 동시에 터진 비명은 류주호가 막아 버린 손바닥 안으로 가두어졌다.
조용히 하라며 낮게 혀를 차자 온기현은 바싹 굳은 채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시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세면대의 목조 상판에는 흠 하나 없었다.
그 앞으로 조금 온기현을 밀친 다음에 상판 위로 양손을 짚게 했다.
온기현은 완전히 얼어 있었다.
류주호는 다시금 혀를 쯧, 찬 다음 손에 들린 백팩을 수건걸이에 대충 걸어 버리고 온기현의 헐렁한 티셔츠를 등 뒤에서 휙 들추었다.
그와 동시에 온기현의 몸이 움찔했다.
‘역시.’
속으로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간이 절로 모아졌다.
한껏 들추어 올린 티셔츠 아래로 푸르죽죽하게 멍이 든 등짝이 훤히 드러났다.
“너, 병원 안 갔지?”
“……갔는데?”
하얗게 삐죽 솟은 어깻죽지가 조금 움찔한다.
이놈은 피죽도 못 얻어먹고 다니는지.
군살 없이 마른 살갗은 창백하리만치 희었다. 그래서 더욱 넓게 번진 피멍이 처참하게 보였다. 설핏 미간이 찡그려졌다.
불쌍하고 처량해 보였다. 안 그렇게 보이려고 해도, 상처가 도드라진 몸이 잔뜩 웅크려져서는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이런 게 바로 연민, 혹은 동정심이란 건가. 생전 처음 느끼는 동정심에 어쩐지 목이 바싹 타들어 가는 듯했다.
“보니까 대충 파스 하나 붙이고 만 것 같은데. 내가 돈 준 거로 뭐 했어.”
“……갈 거야. 가려고 했어. 그니까 이거 놔.”
“가만히.”
온기현이 얕게 버둥대며 티셔츠를 끌어 내리려고 했지만, 류주호가 간단히 제지했다.
혹시 생채기라도 난 건 아니겠지.
등은 손도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인데 혹여라도 살이 파여서 곪기라도 했으면, 골치 아프다고.
가만히 보고 있자 온기현은 이윽고 반항하기를 포기한 듯했다.
어디 맘대로 해라, 라는 태도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간간이 얕게 몸이 들썩였다.
류주호는 쉬이 잡힌 몸체 덕에 여유롭게 티셔츠를 좀 더 위로 끌어 올렸다.
보기만 해도 아플 것 같은데.
흰 도화지 위에 갈색, 팥죽색, 검은색 등의 진한 물감을 확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좀 가라앉으려고 하나.’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어서 멍 위를 살짝 더듬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손을 물리고 말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어마어마하게 매끄러웠다.
땀을 흘렸는지 살짝 습기를 머금고 있는 살갗이, 잠깐 닿았음에도 차지게 감겨 왔다. 누르면 푹신푹신 말랑할 것 같은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류주호는 다시금 손을 가져갔다. 이번에는 손끝에서부터 손바닥까지 넓은 면적으로 등을 쓰다듬었다.
티 한 점 없는 맨살 위에 울긋불긋한 넓은 멍을 엄지손가락으로 간질이듯 슬며시 쓸어 봤다.
……오싹하리만치 기분 좋은 감촉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뼈마디까지 만져질 정도로 얇은 가죽이었지만 촉촉하게 감싼 피부로 인해 전신을 뒤덮은 그의 살결을 상상하게 했다.
목울대가 꿀렁이고 허리께가 절로 잘게 경련했다.
미미하게 전류가 흐르듯 팔딱거리는 몸에 손바닥을 대고 정신을 놓고 음미하듯 문질렀다.
기이했다. 불쾌한 듯하면서도 뭔가.
‘…….’
문득 입이 탔다. 갈증이 일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격하게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폐부까지 칼칼해지는 연기를 진득하게 빨아들이고 싶었다.
그때, 앞쪽에서 끄응 앓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못 박혀 있던 시선을 들었다. 세면대 위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하.”
미친 새끼.
아마 시간상으로는 몇 초밖에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뭐 한 거야.
욕지거리를 삼켰다. 시선을 내리니 타오를 듯이 빨개진 온기현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진붉은색 물감을 퍼 올린 듯한 귓바퀴. 그리고 눈꼬리까지 붓으로 칠해 놓은 것 같은 물감의 물결. 뒤돌아 있었지만, 얼굴도 새빨개져 있을 터였다.
‘하하.’
이놈 봐라.
어쩐지 곧바로 마음이 유쾌해지며 짜증스러움이 멎었다.
“……이제 놔.”
끝이 조금 떨리는 온기현의 말에 순순히 걷어 올린 티셔츠에서 손을 뗐다.
“완전 엉망인데. 왜 방치한 거야. 그때 준 돈이 모자랐어?”
“……시간이 없었어.”
“시간?”
옷매무새를 추스르는 온기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조장 노릇 좆같이 할 시간은 있고?”
“…….”
금세 할 말이 끊긴 듯 고개를 숙인 채 길쭉한 손으로 티셔츠 아래 자락을 탁탁 털어 냈다. 그래 봤자 티셔츠에서 꾸질함이 벗겨질 리 만무하건만.
“이 몸을 하고 잘도 돌아다녔네. 너 제대로 말해. 백만 원으로 퉁칠 거, 괜히 나중에 목도 아프고 다리도 아프다며 몸 죄다 망가트리고 나서. 아니, 망가트린 척하고서는 삼백, 오백씩 뜯어낼 생각인 거지?”
실제로 그런 사례는 어릴 때 수두룩이 많이 겪었었다.
머리가 크기 전에는 성질만큼 손도 빨랐기에, 가벼운 손짓에도 몸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 아이의 부모들은, 재력이 빵빵한 류주호의 집안을 어찌 알고서는 원하는 만큼 돈을 뜯어내기 일쑤였다. 염치도 없는 것들이었다.
제가 마치 두들길 때마다 재화가 터지는 땅딸보 배관공의 물음표 상자도 아니고.
그게 소문이 난 뒤부터는 굳이 저에게 와서 쓸데없이 시비를 거는 치기 어린 동급생들이 늘어났다.
아예 제 부모에게 가서 일러바치지도 못할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패고는, 치욕스러운 추태를 몇 번 겪게 해 주고, 덤으로 증거까지 남겨 놓고 나서야 얼마 가지 않아 곧 잠잠해졌지만.
“그런 거 아니라고!”
온기현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휙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 본 상태에서 류주호가 더 말해 보라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온기현이 코를 씰룩이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뾰족하게 올라왔던 눈초리가 금세 순해진다. 이 순간을 몇 번이나 눈앞에서 봤는지 모르겠다.
성질이 잔뜩 올라온 가시가 누그러지는 간극의 낙차가 기묘하게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게 아니라, 뭐?”
알게 모르게 먹먹해지는 목구멍을 쥐어짜듯이 말을 건네자 듣기에 놀랄 정도로 낮고 거친 음색이 튀어나왔다.
역시나, 코끝이 다시 움질거리며 콧방울 위의 까만 점도 반항기를 머금고 들썩였다.
“그게 아니라. ……기.”
“뭐?”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고개를 설핏 숙였다. 카페에 소란스러운 무리가 들어온 듯 꽉 닫힌 화장실 문틈으로 시끌벅적한 소음이 흘러 들어와서 더더욱 들리지 않았다. 문 쪽을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밖에 조용히 좀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가 눈을 조용히 들었다가 다시 내리깐다.
“……기.”
“뭐?”
“……고기 사 먹었어.”
“……고, 기?”
이건 또 무슨.
“응. 고기가 너무 먹고 싶어서. 십, 십만 원으로 고기, 안창살 사 먹었어. 그리고 돌돌이 휴지도 사고. 그리고 집에 치약이 다 떨어져서 치약도 사고. 아무튼……. 그래서 다 썼어. 근데, 돈이 없는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까 고기를 사게 된 거야. 병원 갈 거야. 갈 건데, 지금은 아무튼 시간도 없고 그래서. 돈 뜯어내려고 시위하는 거 아니야. 진짜야.”
횡설수설이다.
결론은.
“고기 사 먹느라 십만 원 다 썼다 이거지.”
간단명료하게 요약해 주자 온기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왜.
아니, 이 질문은 좀 이상했다.
왜냐니, 먹고 싶어서 그랬겠지.
아니, 근데 왜?
왜 굳이?
류주호는 온기현의 꼬질꼬질한 옷차림을 바라봤다. 새삼 낡아 보이는 티셔츠와 때가 잔뜩 묻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고기라고…….”
“어. 맛있었어.”
맛있었다고.
류주호는 할 말을 잃었다.
“고마워.”
온기현이 시선을 들어 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순한 망아지 같은 눈 속의 새까만 동공까지 훤히 드러났다.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누군가가 제 목을 쥐어틀고 짤짤 흔드는 것 같은 격렬한 질식감이 몰려왔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전혀 신선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속에 잔뜩 들러붙어서 찐득거리는 토심吐心과 비슷했다.
불현듯 제가 남자로부터 고백받았을 때 토악질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거랑은 어딘가 확연히 달랐지만, 어쨌든 속이 울렁거린다는 점은 엇비슷했다.
분명히 그 때문이었다.
이놈은 아직 류주호로부터 품었던 마음을 떼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튀어 오르는 반응으로 미루어 봤을 때 확실했다.
“내가 까서, 내가 보상해 줬는데, 나한테 고맙다고 하네. 완전 등신 아냐.”
답답함에 뭐라도 내뱉은 말에 온기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얼마 있지 않아, 눈을 옆으로 내리깔며 푸욱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등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신이야.”
“너 전부터 또박또박.”
손을 들어 제 목을 거칠게 쓸었다. 힘을 주어 목덜미를 꽉 그러쥐었다.
저답지 않게 변명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병원 가 봐. 꼭.”
“……신경 쓰여?”
조심스러운 물음이 돌아온다.
“도의적으로 할 건 해야지. 인간 대 인간으로 신경 쓰여.”
“도의적으로?”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치 “너한테 ‘도의’란 게 있었어?”라고 말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아랍어나 아프리카어 같은 외국어라도 지껄인 듯한 기분이다.
묘하게 사람을 정면에서 들이받는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래. 같은 온혈 동물로서, 포유류로서, 영장류로서, 같은 종 생물의 존속성에 대한 심심한 우려 때문에 신경 쓰인다고. 이제 이해했어?”
좁은 공간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다.
바깥의 소란 때문에 더욱 갈급증이 밀려왔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가 생각지도 못해 왔던 무언가가 일어날 것만 같은 초조함이었다.
온기현이 제 가방을 살뜰히 챙기며 어깨에 둘러멨다.
“다음에는 진짜로 미리 연락 줄게. 조 모임.”
딱히 류주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온기현이 등을 돌려 나가 버렸다.
벌컥, 열리는 문 사이로 들어온 서늘한 외기에 그제야 비좁은 공간의 온도가 현저히 높았음을 깨달았다.
문득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온기현에게서는, 흔한 또래 남자들에게서 나는 땀 냄새가 아니라 갓 세상에 나온 듯한 축축하고 부들부들한 살냄새가 났다.
미간이 사납게 좁혀졌다.
손 씻는 것도 잊은 채 신경질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