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부. 금사빠의 ×× (1) (1/20)

1부. 금사빠의 ×× (1)

“좋아해요.”

그 말을 처음 듣는 순간 들었던 감상은, 먼저 지겨움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처음’이란, ‘좋아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족한테든 이성한테든 생면부지의 사람한테든 질릴 정도로 들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고, 처음은 바로 같은 성별인 남자로부터 이 말을 면전에서 듣는 것이었다. 동성을 향한 단순한 동경의 의미를 표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적이 드문 인문대 건물 뒤편. 그리고 홀로 있는 때를 노렸다는 듯한 기습적인 고백.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류주호 씨.”라고 명확하게 부르던 음성.

이런 모든 것이 단순한 친근함의 표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길가를 지나가던 닭이 세 바퀴를 돌고 봐도 명백한 ‘고백의 장면’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고백하는 사람치고는 평연한 얼굴을 한 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내리깔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류주호는 애써 갈무리한 짜증을 억누르고 사회인의 탈을 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남자한테는 관심 없는데.”

“네. 알겠습니다.”

즉각적인 대답이었다. 거의 0.1초 만에 들려온.

‘뭐야?’

의아함이 담긴 눈썹을 삐뚜름하게 위로 올리기도 전에, 눈앞에서 제 백팩 끈을 양손으로 질끈 잡고 있던 남자가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하고서는 휭하니 가 버렸다. 류주호를 뒤에 남겨 두고 저 혼자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이 자리를 떠 버렸다.

“……허……?”

류주호의 입에서 어이가 없는 단발성 음성이 절로 나왔다.

하.

별 또라이를 다 보겠네.

땡볕 아래에서 땀 하나 나지 않는 이마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매미가 사납게 울어 젖히는 한여름에 만난 느닷없는 봉변이었다.

* * *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응, 안녕.”

왁자지껄한 무리가 곁을 스쳐 가며 발랄하고 우렁차게 인사를 건넸다. 류주호는 그 인사들에 그린 듯한 눈웃음으로 대충 응수해 주며 걸음을 옮겼다.

스쳐 지나간 뒤편에서 그 무리가 제 이름을 거론하며 흥분 어린 어조로 저들끼리 신나서 웅성거리는 소리는 알차게 무시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소음이었다.

‘존나 덥네.’

짜증이 치솟는 날씨다.

눈웃음 뒤로 ‘이 좆 같은 날씨에 늙다리 교수 한 명쯤 뒈져야 폐강을 하려나.’라며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잔악하지만 허무맹랑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리며 유유자적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동시에 ‘아니, 교수들은 에어컨 빵빵한 방에 들어앉아서 조교들이나 열심히 입으로 부리고 있을 테니까 열사병으로 죽는 건 좀 무리가 있으려나.’와 같이, 사실은 허무맹랑을 떠나 꽤 구체적인 희망을 서늘하고 무감각한 낯으로 이어 가고 있었다.

길쭉한 다리를 내디디며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천천히 걷고 있는 류주호의 모습은 마치 누구나 동경해 마지않는 경영학과 선배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했다.

하지만 사실은 빨리 움직일수록 이 더위의 진창 속으로 빠지는 것이 역겨울 뿐이었다.

앞쪽에서 또다시 갓 입학한 새내기처럼 보이는 여자아이들 두엇이 저를 보고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씨발. 귀찮아.’

류주호는 그대로 방향을 틀었다. 마주치기 전에 바로 뒤 건물로 이어지는 샛길로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단순히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기 귀찮았고, 또 귀찮았기 때문이다.

류주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어느 것이나 어렵게 인생을 살아온 적이 없었고, 운도 나름 좋은 편이었다.

적당히 국내 각지에 땅 좀 있고 부동산 좀 있는 잘난 부모 만나서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이 편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타고난 피지컬과 외모는, 편히 살아갈 인생의 방점을 찍어 주는 역할을 해 주었다. 그 외에 불편한 게 있으면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평소에는 보통 학교에 올 때 차를 가지고 이동했었지만, 오늘은 하필이면 차가 퍼져서 정비소에 맡기고 오는 길이었기에 넓디넓은 학교 부지 안에서 이렇게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오늘따라 운이 없는 날이었다. 유독 이런 날이 있었다. 그에게도.

그나마 건물 옆쪽에서 넓게 뻗은 그늘이 가려 주고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시원스럽게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와, 흰 셔츠 위로도 알 수 있는, 그간의 운동 성과와 타고난 유전자를 여실히 보여 주는 탄탄한 몸에서는 땀 한 방울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지만, 이건 단순히 기분의 문제였다.

기실 그건 날씨만의 탓은 아니었고, 얼마 전에 생전 처음 겪은 기이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남자한테 고백을 받다니.

그리고, 차자마자 대번에 수긍하고 바로 미련 하나 남기지 않고 돌아서다니.

불쾌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기이한 감정이었다.

난데없이 누군가가 제 머리칼을 죽 당겼다. 하지만 그 괘씸한 이를 향해 이를 드러내기도 전에 “죄송합니다.” 하고 먼저 선수치고 쌩하니 가 버린 느낌과 비슷했다.

물론,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바로 뒤따라가서 상상 속 놈의 머리칼이 다시는 솟아나지 않게끔 온갖 방법으로 수를 썼겠지만.

류주호는 조금 느릿하게 걸으며 골몰히 생각에 빠졌다.

이제까지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는 더더욱 안 막는 신조를 지니고 살아왔었다. 그 안에서 제 성적 지향성이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가능성조차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남자 새끼들이 동경 어린 눈빛을 보내오는 것 또한, 같은 성별을 가진 남성의 우월한 개체로서 바라보는 눈빛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간혹, 그 안에서 저한테 섹슈얼한 의미를 지니고 바라보는 눈빛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고 저도 적당히 무시해 왔었다.

하지만.

분명히 같은 교내 학생일 텐데.

이렇게 대놓고 고백을 하다니. 내가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려고 그랬던 거지? 이렇게 쉽게 커밍아웃을 한다고?

생각할수록 저가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리고, 또다시 떠오른 그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남자애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평균 남성에 못 미치는 조금 작은 키에 수더분한 얼굴. 그리고 어디서 빌어먹지도 못한 듯한 가는 몸매와 그에 반해서 커다란 사이즈의 무지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또 커다란 사이즈의 백팩을 움켜쥔 앙상한 손.

그 무엇도,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이끌림을 바라는 듯한 얼굴이나 모습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 더욱 그럴지도 몰랐다. 이 불유쾌한 감정이 찌꺼기처럼 계속 둥둥 떠오르는 것이.

됐다. 잊어버리자.

아마 그렇게 차였으면 다시는 자신 앞에 고개 들고 나타나지 않을 터였다.

일반적인 자존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다시금 걸음을 빨리하려던 때.

“류주호.”

자신을 부르는 가녀린 음성에 뒤를 돌아봤다.

* * *

‘하아.’

류주호는 고개를 모로 기울여서 팔짱을 낀 채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속으로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향해 새된 소리로 발작 중인 여자 때문이었다. 물론,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안면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하반신 쪽으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대답 좀 해 봐!”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 류주호를 향하는 가시 돋친 고음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진짜, 오늘 운 지랄맞게 없다.

순간 담배 생각이 절실했지만, 최근에 끊었다는 것을 곧바로 상기했다.

사실 담배를 피우고 싶다기보다, 속에서 들끓는 패악을 지껄이고 싶다는 게 맞았다.

제 안의 흉포한 무언가와 싸울 때 꼭 담배를 피우는 게 버릇이 되어 있었는데, 머리가 커지면서 슬슬 그런 비이성적인 행동도 제 안으로 갈무리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담배를 멀리했다.

“내 말 듣고 있니? 어?!”

“네에. 듣고 있어요, 누나.”

사실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연상이었나, 싶은 정도로만 기억이 났다.

류주호의 마른 음성에도 누나라고 불린 여자는 조금 화기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단순히 듣기 좋은 목소리를 귀에 담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비록 진심이 안 담겨 있더라도 나긋한 어조에 마음이 녹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화가 쓸고 지나간 자리를 눈물이 채웠다. 누나는 흑, 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이건 또 무슨 지랄 쇼야.’

“왜 울어요.”

류주호의 물음에 여자가 흐느꼈다.

“너, 너. 나한테 어떻게 그 뒤로 한 번도 연락 안 할 수가 있어?”

“연락이요?”

새된 소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우리가 좀, 속도가 빨랐어도 그렇지.”

“언제요?”

진짜로 궁금해서 다시 한번 물었다.

그대로 입을 닫고 눈물을 훔치는 여자를 보며 류주호가 아, 하고 무언가 상기한 듯 태연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눈물에 젖어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을 보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지난달에 섹스하고 나서요?”

“……그래.”

“근데요?”

“근데요라니. 너…….”

파들거리는 입매를 무감하게 쳐다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나는 별로였어요? 우리 둘 다 만족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때 누나 엉엉 울었잖아.”

듣기만 해도 정수리가 찌릿해져 오는 음성이었다.

여자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도리질을 치며 다시금 새된 소리를 내었다.

“그, 그래! 그랬는데, 그랬는데 왜 그랬어? ……나 다 봤어.”

“뭘요?”

“너, 너. 네가…… 다른 여자랑 팔짱 끼고 지나가는 거.”

“제가요?”

뭘 어디서 봤다는 건지 도통.

류주호는 고개를 기울였다. 저한테 팔짱을 낀 여자가 어디 한둘인가. 서로의 즐거운 시간을 위해서라면 류주호는 팔짱을 끼는 정도야 얼마든지 용인해 줄 수 있었다. 몸을 섞을 때 상대방이 흥분하고 감도가 높아져야 쾌락의 농도도 짙어지는 것을 안다. 상대방이 원하는 분위기쯤이야 얼마든지 내 줄 수 있었다.

호텔로 가기 전 연인 행세를 하며 팔짱을 끼거나 가벼운 스킨십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니면 강압적인 태도로 거칠게 대하면 흥분하는 타입도 있었다.

“그랬나……. 근데요, 누나.”

류주호의 나긋한 부름에 여자가 물기 어린 눈만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걸 왜 제 앞에서 울면서 이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였나요? 저는 누나도 그냥 편하게 몇 번 즐긴 줄 알았는데요.”

“……뭐……?”

“아니, 그렇잖아요. 뭐 우리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를 했어요, 뭐를 했어요. 그냥 몇 번 떡친 것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말하는 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은은한 미소는 입에 걸친 채였다. 입에 담긴 말만 아니었다면 누구나 넋 놓고 5초 정도는 바라볼 잘난 얼굴이었다. 하다못해 황당함과 분노에 잠긴 눈앞의 여자도 이 순간 그랬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하나를 뇌에 욱여넣고 곱씹던 여자가 꺼져 가던 분노를 화르르 불태웠다. 역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국대 희대의 쌍놈, 혹은 개싸가지라고 불릴 만도 했다.

여자가 눈물을 그치더니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를 까득 물고서 뺨을 내려치기 위해 손을 휙 올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내려치려던 그 순간. 짝, 소리 대신에.

탁.

류주호가 그 팔을 잡아 버렸다. 그다지 센 악력은 아니었지만, 저보다 약한 여자의 팔 힘을 가누기는 딱 맞았다. 이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했었기에 우러나오는 반사 작용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황당함에 벙찐 여자를 향해 눈을 접으며 싱긋 웃었다.

“폭력은 별론데.”

“이,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아하하. 무슨 사람을 괴물 취급하고 그러세요. 저도 엄연히 찌르면 피도 나는 사람인데요. 뭣하면 한번 확인해 보실래요? 뱃가죽 뚫으면 저도 피나요. 그렇게 되면 나는 괴물 아닌 거 증명할 수 있겠고, 누나는 뭐, 어디 보자. 유혈량에 따라서 상해죄나 살인죄 둘 중에 하나 고르시면 되겠네요.”

비꼼도 놀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였다. 모욕감이 얼굴을 붉히다 못해 새하얘졌다. 그리고 눈빛이 순간적으로 스산해지는 것을 류주호가 찰나의 순간 알아채고 팔에 힘을 줬다.

하지만 여자의 한이 맺힌 움직임이 더 빨랐다. 언제부터 숨겨 왔던 건지 모를 커터 칼을 여름용 리넨 재킷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휙 치켜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던진 말이었다. 즉, 지금의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금속성의 예리한 날이 시야에 들어왔고 순간적인 판단으로 류주호가 거리를 벌리기 위해 팔을 놓고 뒤로 재빨리 물러섰다.

“하…….”

대번에 피곤이 몰려와서 머리를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여자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뜨고서는 중얼거렸다.

“내, 내가 못 가질 바에야, 너 같은 건…… 그냥, 그냥 없어, 지는 게 나아.”

그녀의 정성 들여 세팅했을 머리가 얼굴을 뒤덮으며 휘날렸다.

“너 같은 건……!”

그리고 여자가 마치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처키 같은 모습으로 산발한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커터 칼을 몸 앞으로 쥐고 류주호를 향해 돌진하려던 때.

누군가의 인영이 그 사이로 휙 끼어들었다. 너무 잽싸게 들어와서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류주호가 발로 그녀의 커터 칼을 정확히 조준해서 날려 버리려고 위로 뻥 걷어찬 것도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 어라.’

끼어든 인영을 뒤늦게 눈치채고 발을 거두기에는 이미 늦은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놀란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여자는 움찔하며 제 손을 거두었지만 류주호는 달랐다. 관성을 받아 위로 올라간 다리가 누군가의 몸을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릴 정도로 걷어차 버렸다.

“꺄악!”

검은 인영이 여자를 퉁 밀치며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여자는 밀치는 힘에 의해 커터 칼을 떨구며 옆으로 쓰러졌다.

‘미친.’

뭐야?

쓸데없는 의협심과 오지랖으로 칼 앞에 저 스스로 몸을 던지는 등신이 대체 누군가 싶었다.

“윽…….”

쓰러진 남자가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었다.

“하……. 저기요. 괜찮아요?”

“아……. 네…….”

씨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짜증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자박자박 등을 구부리고 엎어져 있는 남자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앉았다.

“등 맞은 거 맞죠? 미안해요. 내가 취미긴 하지만 킥복싱을 좀 했었어요. 꽤 아플 텐데. 고개 좀 들어 보시죠.”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진짜로 아픈지 다시 한번 으으, 하고 몸을 꿈지럭대더니 고개를 들었다.

“어?”

그 남자다.

느닷없이 고백해 왔던 그, 남자애.

“앗……. 그…….”

동시에 덜덜 떨리는 가느다란 음성이 옆쪽에서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한 여자가 옆으로 주저앉은 상태로 멍하니, 이쪽으로 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었다. 커터 칼은 손이 안 닿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극점 이하로 떨어진 서늘한 시선을 위로 올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마치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 바뀐 듯한 모습이었다. 류주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자 파드득 몸을 떨었다.

저런 깜냥으로 칼은 왜 들고 설치는 거야.

류주호는 시선을 내려 무표정한 낯으로 잠시 여자를 내려다봤다. 어렴풋한 기억에 한때는 열락 어린 시간 속에서 귓가에 달콤한 말도 속삭여 줬던 것 같다. 자초한 비극에 그저 여자가 한심할 뿐이었다. 달콤했던 시간에 구정물이 튀어도 저는 전혀 상관없었지만.

두어 걸음 더 다가가자 여자가 온몸을 경련하듯이 화들짝 놀랐다. 옆에 떨어져 있는 커터 칼을 들고서 칼날을 잘 넣어 겉에 묻은 흙을 떨어낸 다음에 몸을 돌려 무릎을 구부렸다. 여자 앞에 커다란 몸을 숙였다. 눈물이 마른 낯이 잔뜩 질려 부들거리는 게 보이는 거리까지 얼굴을 가까이 내밀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나, 다음에는요.”

류주호는 제 손에 있던 커터 칼을 그녀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마치 뱀의 비늘이라도 살갗에 닿은 양, 여자가 힉 하는 소리를 냈다.

“제 여기에. 이렇게 푸욱. 찌르세요. 세게 쥐고서.”

그리고 그 손을 그대로 끌고 와, 제 복부를 향해 칼을 찌르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순간, 원래 행했을 자신의 행동이 타의에 의해 다시금 반복되자 여자는 이제 완전히 공포 영화에서 마지막 남은 생존자가 된 것처럼 온몸을 경련했다.

“어설프게 칼을 쥐니까. 이렇게 떨어트리잖아요. 그쵸?”

살살 짓는 눈웃음에 여자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안 찌를 거면 꺼지시고요.”

또다시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그리고 류주호가 몸을 멀리 떼어 내자마자 여자는 팔로 바닥을 짚고서는 넘어질 듯 위태로운 몸짓으로 뒤를 향해 달렸다.

절대로 다시는, 이 공포 영화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류주호는 그 뒷모습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몸을 돌렸다.

“한번 일어서 볼래요? 일어설 수 있겠어요?”

남자는 몸에 충격이 컸는지 아직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네.”

남자의 음성은 생긴 것과 달리 조금 허스키했다. 그렇다고 듣기 싫은 음성이 아니라, 기저에 깔린 신경을 미묘하게 툭, 툭 건드리는 듯한 묘한 목소리.

류주호는 불쑥 불쾌감, 아니 불편함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선선하게 말을 뱉었다. 그리고 그의 팔을 덥석 잡아 일으켰다. 동시에 으으, 하는 앓는 소리가 나왔지만 뭐,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하등 고맙지도 않았다. 되레 민폐였다.

일으켜 세운 남자는 그때와 엇비슷한 차림이었다. 펑퍼짐한 무지 티셔츠에 슬랙스. 다만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지 않은 점이 달랐다.

흠.

“교육 안 받았어요?”

“네?”

난데없이 들려온 말에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때는 바닥을 보고 있어서 눈꼬리가 샐쭉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렇게 정면으로 보니 순한 망아지처럼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 햇빛이 들어올 때마다 검푸른 빛이 일렁였다.

“칼 들고 설치는 사람 앞에 무턱대고 몸을 날리지 말라는 교육, 안 받았냐고.”

무덤덤하지만 서늘한 말투에 남자가 잠시 움찔, 하더니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진짜로 망아지 새끼 같네. 류주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교육, 받은 적 없는데요.”

“이런 건 굳이 말 안 해도 상식적으로 알 만한 거 아닌가? 그리고. 또 만났네요.”

“네? 아, 네. 그렇네요.”

뭐야.

이죽거리는 말에도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한테 고백했던 사실을 꼭 저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설마, 그럴 리가.

“그런데 여기에는 어떻게 왔어요?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혹시.”

“……?”

“나 미행했어요?”

“아뇨.”

류주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 반, 비꼬는 마음 반으로 던진 말에 즉각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자신에게 고백해 왔을 때랑 비슷했다.

상당히 수상쩍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피곤한데 여기서 짜증스러운 일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근데, 아파요?”

“네?”

“어디 다친 데 없냐고.”

“없는데요.”

남자는 자신의 몸을 손바닥으로 대충 툭툭 건드려 보더니 심상한 말투로 그렇게 대답했다.

단순한 거야, 멍청한 거야.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 같은데 그 정도면 어느 정도 머리는 있을 것 아닌가.

자기 같으면 당장에라도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내고 말 것이었다. 아니, 혹시 모르지. 이러고 나서 나중에 또 딴소리할지도.

“이름이?”

“온기현이요.”

“여기 학생?”

“네.”

“흠.”

이 학교 학생이면 괜한 노이즈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만 해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한테 고백하고 차였다는 사실과 지금 이 사태를 목격한 사실이 어떻게 보면 비등한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이거 어디서부터 봤어?”

“네?”

“방금 끼어들기 전까지, 어디서부터 듣고 봤냐고.”

“아, 아아. 머리 이렇게 앞으로 산발을 한 여자분이 칼을 품에서 꺼내는 것부터요.”

대답은 참 자세하고 순순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눈을 옆으로 떼구루루 굴리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이 새끼, 거짓말이네.

‘하, 참. 존나 뭐 하는 새끼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을 보고 놀란 듯 온기현은 또다시 망아지 같은 눈을 땡그랗게 뜨고서는 자신을 올려다봤다.

류주호는 혀를 쯧, 차고는 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지갑을 신경질적으로 펼치고서는 그 안에서 수표 다섯 장을 꺼냈다.

핸드폰 번호를 받아서 남자가 진료를 받은 후에 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추가로 청구될 치료비를 이체해 주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처졌다.

거기까지 생각한 류주호는 다섯 장을 더 꺼냈다. 총 열 장이었다.

“이걸로 치료해. 이 정도면 치료받고, 그 김에 마사지도 좀 받고, 뭐 필요하면 생필품 같은 것도 좀 사고 해도 충분할걸.”

“…….”

자신을 아래위로 훑으며 덥석 손에 쥐여 준 빳빳한 수표를 온기현이 멍하니 내려다봤다.

설마 부족한 건가?

꼬질꼬질하게 하고 다니면서 욕심은 많네.

류주호는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고개를 내려 손목시계를 보니 다음 수업은 완전 지각이었다.

그럼 이만, 하고 등을 돌려 돌아서려던 때. 류주호의 발걸음을 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정형외과 타박상 진료비 오천 원. 엑스레이 촬영 팔천 원. 물리치료비 만 오천 원. 딱 이만 팔천 원 들어요.”

“뭐?”

“이거 아홉 장은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나머지 칠만 이천 원으로 말씀하신 마사지도 받고 생필품도 살게요. 집에 돌돌이 휴지가 떨어졌거든요. 나머지 여기요.”

황망해서 바라보는 류주호의 손에 온기현이 수표 아홉 장을 힘주어 끼워 넣듯이 건네줬다. 마치 거스름돈을 건네받는 기분이었다. 자신은 거스름돈을 받을 만한 서비스 직종에 종사한 적이 평생 전혀 없었다.

“그리고요.”

온기현이 눈을 치켜떴다.

“왜 저한테 반말하세요?”

“……뭐?”

바보같이 뭐 이 단어만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이유는 너무 황당해서.

“그럼. 안녕히 가세요.”

데자뷔처럼 또다시 그 말만 남기고 휙 돌아선 온기현이 가다가 멈춰 서서 제 등을 툭툭 두들겼다. 그러자 류주호의 얼떨떨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끼워져 있던 수표 아홉 장도 후드득, 하고 바닥에 흩날리듯 떨어졌다.

* * *

드디어 차를 고쳤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그동안은 택시를 타고 다녔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생판 모르는 남이 운전해서 모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신물이 났다. 모범택시만 골라서 탔음에도 그랬다.

애초에, 자기 앞에 누가 탔을지도 모를 자리에 몸을 기대거나 비비는 것은 성향에 맞지 않았다. 아니, 성향이랄 것도 없다.

그냥 존나 싫었다. 불쾌하고, 더럽고, 비위생적인 것은 질색이었다.

차 한 대를 빼고 전부 중고로 팔아 치운 것이 원인이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제가 뭘 하든 방임해 왔던 제 집안에서, 이제 슬슬 졸업할 시기가 되니 제 커리어를 걸고넘어졌다.

프롭테크 관련 스타트업을 설립하려고 준비 중이던 류주호는 웬만한 자금은 제 능력으로 긁어모았다. 대출도 빠듯하게 확보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부동산 확보에 있어서 딱 일부가 부족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국내에서는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는 ‘투자의 귀재’라고 불리는 제 아버지한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제까지 네가 나한테 보여 준 성과가 뭐가 있냐. 스타트업? 요새 젊은 애들 사이에서 어중이떠중이들도 다 한다는 그거 말이냐? 네가 개떡 같은 회사를 설립한다고 해도 그게 결국 땅바닥에 돈 뿌리는 경우밖에 더 되겠냐. 난 너 못 믿는다.”

라고 호통 아닌 호통을 치며 일절 거부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래서 차 한 대를 빼고 전부 팔았다. 그래 봤자 십억도 채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라도 해서 자금을 융통해야 했다.

그런데.

‘씨발. 그사이에 거품이 낄 게 뭐야.’

몇 달도 채 안 된 사이에 훅 오른 권리금이 문제였다. 애초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고 이전의 건물주와 잘 얘기해서 적당한 가격으로 합의한 금액이었는데, 그게 배로 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공유 경제의 성장에 발맞추어 글로벌 유니콘 기업이 나날이 몸집을 키워 갔지만, 국내에서 판을 키우기 위해서는 일단 현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부동산. 시작은 최근에 공실률이 높아지는 건물을 타깃으로 하는 공유 오피스였다.

어떻게든 시작만 하면 크게 키워 볼 수도 있었고 향후 사업 영역을 좀 더 확장해서 블루 오션의 틈새시장에 진입할 기회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 준비를 위해 수중에 있는 웬만한 자산은 일부를 남겨 둔 후 큼직한 것 거의 대부분을 처분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한 대 남은 차까지 퍼지고, 또 얼마 전에는 칼부림까지.

그리고.

남자한테 고백까지 받았다.

순간, 샐쭉하니 올라가던 온기현이라는 남자의 눈꼬리가 떠올랐다.

순하게 생겨서는 할 말은 또박또박 다 하는 녀석이다. 그리고 보통은 자기가 차인 상대한테 그런 식으로 행동하나? 알다가도 알 수 없었다.

근래엔 제 맘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와, 이거 진짜. 굿해야 하는 거 아니야?

미신 같은 건 절대 믿지 않는 류주호였다.

심지어 초등학생 때는 빨간 펜으로 이름 쓰면 죽는다는 미신이 돌자, 마침 반장이었던 류주호는 학급 인원 방학 과제를 체크한다는 이유로 “펜이 이거밖에 없네.”라고 하며 제가 마침 갖고 있던 빨간색 펜으로 제 학급 친구들의 이름을 전부 써 내렸던 적이 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당시 재미없다며 콧방귀를 뀌었었다.

그런 그가 지금 굿 같은 무속 신앙 생각까지 할 정도라면 상당히 수세에 몰려 있는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류주호는 교수용 주차장에 후면 주차를 하고 가볍게 차에서 내렸다. 엄연히 학생용 주차장이 따로 있었지만, 류주호는 그곳에 주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너무 좁아서였다. 다닥다닥 붙어서 꼴사납게 차 문과 옆 차 틈새로 몸을 구기듯이 빠져나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제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류주호는, 나름 행정 직원들이나 교수들한테는 참 잘했다. 그것은 비단 저보다 웃어른을 공경하자는 취지는 절대 아니었고, 잘해 줘서 실보다 득이 크기 때문이었다.

교수용 주차장의 한편을 차지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뭐, 사실은 입학 후에 기부금 명목으로 잔디를 깔아 준 것이 제일 컸지만 말이다.

류주호는 경영학관을 향해 천천히 걸으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일단은 제일 중요한 것부터 해결하자.

돈을 빌린다고 하더라도 이자까지 생각하면 집에서 빌리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뭐, 여차하면 빌리고 난 뒤에 깔고 앉아 뭉갤 수도 있었다. 투자 명목으로 받아서 사업이 안정화되면 돌려준다고 해도 아버지는 그까짓 푼돈으로 뭐라고 할 위인은 아니었다. 다만, 그 주머니에서 돈을 나오게 하는 게 문제인데.

류주호는 단순히 공간을 나눠 주고 자잘한 세를 받는 것에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제 것은 한 톨도 나눠 주지 않으려는 성향의 남자가 공유 사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돈이 보이는 곳은 귀신같이 노리는 류주호의 목표는, 하나의 프랜차이즈화된 복합 시설을 만드는 것이었다.

건물 하나에 공유 하우스, 공유 키친, 공유 오피스, 그리고 집객이 필요한 편의 시설을 한 데 끌어모아서 하나의 플랫폼을 브랜드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소 거창한 로드 맵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설득력 있고 실행이 가능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부동산 수십 채를 엉덩이 아래에 깔고 앉아 있는 꼰대한테서 최신 트렌드와 접목한 업태에 대해 이해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투자에 있어서 업계에서는 이름이 제법 오르내릴 만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 와서 돈이 나는 자리를 보는 데는 도가 텄다. 방법을 알고 수완은 있으니, 스타트만 잘 끊으면 되는 시점에서, 아버지―라고 쓰고 투자자라고 읽는―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에 대한, 혹은 이 사업에 대한 신뢰를 받아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을지.

이건 웬만한 신용 대출이나 투자 유치보다 더 까다로웠다. 그렇다고 여타 신생 기업처럼 투자액을 여기저기서 모으는 귀찮은 과정은 거치고 싶지 않았다.

한 방에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게 있으면 좋을 텐데. 예를 들어서, 공권력 혹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저명인사가 인정해 준 능력이라든가.

에라, 모르겠다.

도저히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 제 머리를 손으로 가볍게 헤쳐 댔다.

한여름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터라 그의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로 찰랑거렸다.

그때.

“주호야. 이제 와?”

등 뒤에서 친근한 어조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류주호가 뒤를 돌아봤다.

“너야말로.”

“응. 오는 길에 차가 좀 막혀서.”

비슷한 방향에서 오는 남자를 향해 류주호가 그린 듯한 웃음을 싱긋 지으며 여상히 말을 툭 던졌다. 그 말에 남자는 시원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혼혈의 피가 섞인 까닭인지 웬만한 남성들의 평균 체형을 훌쩍 뛰어넘는 류주호였다. 그런 그와 나란히 섰을 때 약간 더 부피감을 느낄 정도로 단련된 몸을 가진 것에 반해 꽤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는 이는, 제 대학 동기인 감후석이었다.

얼굴 인상과 성격이 일치한다는 것은 감후석을 향하는 말일 것이다. 류주호의 옆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제 성격을 유지하면서 한결같은 사람은 감후석이 유일했다. 그렇다고 마음을 터놓을 정도는 아닌, 불편하지도 편하지도 않은 딱 거기까지의 관계였다.

누구나 겉모습에 혹해서 다가왔다가 류주호가 그어 놓은 선을 못 넘고 안달복달만 하다가 주위에서만 맴도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감후석은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제 심지가 굉장히 굳어서 누구에게나 공평한 사람이었다.

“오늘은 첫 수업이잖아. 오리엔테이션만 할 테니까. 김 교수님 빡센데. 큰일이네, 하하.”

“글쎄. 너는 신입생일 때부터 교수님이 한결같이 잘 봐 주시니까 첫 수업 지각 정도야 눈 질끈 감고 모른 척해 주시겠지.”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그 교수님이 얼마나 지독하신지 너도 알잖아. 왜, 지난번 회계 심화 세미나 때 그 나이 드시고도 너랑 한 시간 동안이나 설전하셨었고.”

“어지간하셔야지. 그때 튀긴 침 때문에 그날 입었던 셔츠 불태웠어.”

“뭐? 아하하하.”

감후석은 시원스럽게 웃어 젖혔다. 그는 농담으로 아는 듯했지만 진짜로 그날 세미나가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뒤편의 마당에서 티셔츠를 불태워 버렸다.

어찌 됐거나 감후석과 류주호는 서로 장르가 다르긴 하지만 각자의 이미지로 학교 내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지금까지 서로의 선 밖에서, 흥미를 느끼는 분야가 류주호와 겹친 적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아마 둘이 맞붙었으면 서로 피 튀기며 경쟁했을 터다. 욕심 사나운 둘이 그나마 각자가 잘하고 흥미 있는 분야가 달라서 서로에게 다행이었다.

별 의미 없는 사담을 몇 마디 주고받으며 걸을 때쯤, 어느새 경영학관 건물까지 다다랐다. 그늘 안에 들어오니 바깥의 후끈한 기운이 조금 가셨다.

그리고 막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에, 류주호의 눈에 무언가 익숙한 듯한, 거치적거리는 듯한 것이 잡혔다.

‘음?’

류주호는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것은 커다란 백팩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덥수룩하게 덮여 흔들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저 뒷모습은, 그 남자였다. 온기현.

‘경영학과 학생이었던 건가?’

자신을 대체 어디서 보고 고백을 했나 싶었더니, 같은 단과대였단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입학하고 나서 이제까지 온기현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척 보기에는 얼굴이 뽀얀 것이 새파란 후배 같았는데. 하기야, 웃으면서 인사하는 후배들 얼굴도 제대로 기억한 적 없었는데, 최소 몇천 명은 됨 직한 상경 계열 단과대 안에서 학생들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죄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기억하고 알은체해 오는 사람들뿐이었기에 부러 신경을 쓰지도 않았었다.

왜 저한테 반말하시냐고?

씨발, 어이가 없어서.

건방진 것을 보니 완전히 되바라진 망아지였다. 그것도 고삐 풀린 망아지 새끼.

온기현은 학교 정문에서부터 숨차게 걸어왔는지 가슴을 들썩이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매끈한 피부 위에서 땀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그가 제 손등으로 이마를 훔쳐냈다.

저처럼 땀이 많은 타입은 아닌지 그러고서 한동안 숨을 고르더니, 제 등을 툭툭 두들겼다.

그때 류주호의 눈썹이 움찔했다.

‘왜 저렇게 등을 구부정하게 하고 있어. 병원 안 간 거야, 설마?’

병원 진료비를 정확히 읊조리며 자신만만하게 딱 필요한 돈만 가져갈 때는 언제고, 대체 그 돈을 어디다 써 버린 건지 아직도 온기현의 움직임이 불편해 보였다. 제 착각은 아닐 터였다.

그게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아니면, 혹시 나 따라온 건가? 스토커, 뭐 그런 거라든지.’

류주호의 얼굴에 어이없는 조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충분히 가능성 있어 보이는 얘기였다.

이제까지 마주한 건 두 번이었지만, 두 번 모두, 도저히 행동이나 사고를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류주호 딴에는 꽤 충격적인 만남이었다.

“주호야. 뭐 해?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을까. 감후석이 의아한 얼굴로 류주호에 말을 걸었다.

그 말에 류주호가 저 멀리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감후석에 돌렸다.

“아니.”

“왜? 뭔데 그래? 음? 아무도 없는데?”

감후석의 말에 류주호도 다시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온기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네.”

“하하. 싱겁긴. 올라가자. 늦겠다.”

뒷머리가 고리에 걸린 듯 당겨지는 느낌이 들어 괜히 손으로 제 어깨를 툭툭 털어 냈다. 어쩐지 온기현의 시선이 들러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이미 강의 시작 시각을 5분이나 넘겼지만 둘은 급하지 않았다. 좆 같은 경영관은 유구한 역사만 자랑할 뿐이지 학생들을 위한 복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 흔한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3층까지 귀찮은 발걸음을 옮기기가 굉장히 짜증스러웠다.

3층에서 강의실까지 가는 복도를 거닐 때, 한산한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가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이쪽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활짝 띠더니 시선을 옆으로 굴리면서 류주호를 보고서는 표정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누구지? 하고 생각하다가 저 걸을 때마다 출렁이는 뱃살을 보니 그제야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지난 학기 때 류주호한테 호되게 깨졌던 대학원생이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기분 나빠서였을지도.

이렇게까지 여러 사람한테 알게 모르게 인성질을 해 왔는데도, 아직 류주호의 평판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것은 비단 외모 덕뿐만은 아니었다. 우월한 개체로서의 별세계와 같은 이질감이 한몫했다.

그래서 더욱, 류주호에게 비판 아닌 비난을 거세게 받은 사람은 회복이 쉽지 않았다. 저 조교도 그런 듯 쭈뼛쭈뼛하면서 몸을 굳히는 꼴이 또 굉장히 꼴 보기 싫었다. 하지만 굳은 미소를 애써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류주호는 아니었다.

“후, 후석아. 안 그래도 너 찾으려고 했었는데.”

“아하, 그러셨어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무슨 일이신데요?”

저보다 머리통 두 개는 더 키가 작은 조교를 보면서 감후석은 서글서글하게 웃어 보였다.

“네가 이번에 참여하겠다던 투자 대회 말이야. 그거 참여 방법 공고가 김 교수님 사무실로 별도로 날아왔더라고. 그거 전해 준다고 말하려고 했어.”

“아아. 삼호 투자 운용에서 주최하는 거요?”

“응. 그래, 그거.”

삼호 투자 운용이라는 소리에 류주호가 닫혀 있던 귀를 열었다.

그 회사라면 제 아버지가 존경해 마지않는 국내 투자계의 거장이라 불리던 김삼호 교수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아마 최근에는 경영진 실무에서 내려와서 고문역으로 있다지. 하지만 오히려 거물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 그의 입김이 한층 거세다고 듣긴 했다. 주식이나 선물만이 아니라 인재 또한 투자 대상 중 하나라고 보고 인재 영입에 보통 신경을 쓰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보통 거기는 대학생들 상대로 투자 대회 같은 건 안 여는데. 유치하고 귀찮아서.

그냥 지나쳐 가려던 류주호의 걸음이 느려졌다.

“감사합니다! 와, 말씀 안 해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에이, 큰일은 무슨. 네가 이제까지 웬만한 모의 투자 대회에서 2등 밖으로 밀려난 적이 있기는 하냐? 그래도 이번 대회는 전무후무한 대회라고 교수님께서도 신경 많이 쓰시는 거라서, 입상하기만 한다면 완전 한 방이지. 비단길, 알지? 교수님이 너 격려 많이 해 주라고 하시더라.”

감후석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겸손을 떨었다. 아마 진심으로 멋쩍어하는 거겠지만.

류주호는 삐딱한 눈으로 그 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 류주호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조교는 “어. 그럼 가라, 후석아.” 하고서는 부리나케 둘을 지나쳐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방금 무슨 얘기야?”

“응? 방금?”

“어. 삼호 투자 운용에서 투자 대회를 한다고 하던데. 금시초문이라.”

“아아. 그거. 그게 공개 투자 대회는 아니고, 뭐 어떻게 보면 채용을 위한 전 단계의 대회라고 보더라고. 나도 김 교수님 아니면 전혀 몰랐을 뻔했어.”

“교수 추천이 필요한 건가 보지?”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아무나 참가는 할 수 있더라고. 근데 아무래도 교수님께서 지도해 주시는 내용이 많이 도움이 되기는 하니까.”

감후석은 마치 도덕책을 찍어 낸 듯한 말을 하고서는 눈을 접으며 씨익 웃었다.

도움은, 씨발. 점찍어 둔 학생을 대회를 빌미로 앞에 내세워서 입상시키려는 거겠지.

“왜? 너도 나가 보려고?”

“글쎄.”

“으음. 너 나가면 나도 긴장 좀 타야겠다.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류주호는 심드렁한 시선을 여전히 웃고 있는 그에게 던졌다.

“너야말로. 여자도 안 만나고 스펙만 죽어라 쌓아 왔으면서 인제 와서 긴장은 무슨. 재미없는 데에 열 내는 게 신기하기는 해. 혹시 활자에 발기하는 스타일인가.”

“무슨 소리야. 아하하.”

감후석은 짧은 스포츠머리를 멋쩍게 쓰다듬듯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네가 여자에 일절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여자 친구 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 봐서.”

“그렇다기보다는. 이래저래 바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랬지, 뭐. 난…… 연애를 시작하면 그것만, 정말 한 사람만……, 보는 스타일이야. 하하. 내가 좀, 외골수 기질이 있어서.”

그 말에 류주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언뜻 지었다. 한 사람만 보는 외골수라니. 그런 점이 저랑은 명백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한 사람만 볼 수가 있어? 지겹지 않아?”

그에 류주호는 심상하게 던지듯이 물었다.

“지겨울 리가.”

단조롭지만 단단한 언어와 함께 눈을 접으며 웃는 감후석을 향해 의미 없이 가늠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던 류주호가 이내 고개를 설핏 끄덕였다. 어차피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우리 강의 늦겠다. 빨리 가자.”

류주호는 그 말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강의실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강단 앞쪽 스크린에는 강의 개요와 함께 평가 방식이 커다란 글자로 띄워져 있었고, 김 교수가 한창 입에서 침을 튀기며 꼬장꼬장한 말투로 학생들을 향해 인생에 대한 훈화 말씀을 늘어놓고 있었다. 꼰대는 장수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나 싶었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지긋지긋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충 비어 있는 자리에 걸터앉았다.

둘이 들어서자 강의실 내에 생겨났던 살짝 들뜬 웅성거림은 곧 가라앉았다.

류주호의 머릿속에는 아까 나누던 얘기가 가득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아 투자금을 타낼 방법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른 참이었다. 골머리 썩는 건 딱 질색이었지만, 이제까지 제가 하고자 마음먹었던 일 중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없었기에 이번에도 반드시 그럴 것이었다.

‘뭐, 생각하다 보면 수가 나오겠지. 수가 없으면 만들면 되고.’

류주호는 그렇게 제가 꾸려 나갈 사업체에 대한 고민으로 머릿속을 채워 넣었다.

* * *

“으으.”

등이 절로 굽어지고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여기요! 여기 불판 좀 갈아 주세요!”

“아, 네에!”

온기현은 찌뿌둥한 허리를 엉성하게 쥔 주먹으로 툭툭 두들기다가 손님의 채근에 얼른 대답하고서는 재빨리 불판을 갈기 위해 종종걸음을 했다.

“여기요! 안창살 2인분 추가요!”

“네에!”

왁자지껄한 분위기 사이에서 나름 우렁차게 대답한 온기현은 커다란 티셔츠를 휘날리며 손님이 부르는 테이블마다 소주를 갖다주고, 불판을 갈아 주고, 서빙을 하고, 또 고기를 구워 주고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아!”

허리에서 찌릿, 하고 통증이 울렸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대략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도저히 아르바이트 시간을 뺄 수가 없었기에 일단 참아야지, 하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가고 있었다.

‘킥복싱을 했다는 게 진짜였나 봐.’

당시에 걷어차였을 때는 그렇게 아프지 않았는데. 뒤늦게 통증이 올라오는 게 제 몸뚱이도 꼭 저 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아픔을 참으며 겨우 남은 시간을 버텼다.

“기현 학생. 10시까지지? 이제 가 봐.”

“네에. 수고하셨습니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응. 고생했어.”

바쁜 사장님의 등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하고서는 주방 뒤쪽에 있는 좁은 스태프 룸에서 앞치마를 벗고 제 백팩을 어깨에 걸쳐 챙기고서 가게를 나왔다.

킁킁.

팔을 들어 코에 가져다 대며 냄새를 맡자, 온종일 맡은 고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걸어 다니는 소고기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진하게 옷에 배어 있었다.

이 냄새 때문에 집에 가는 길은 오늘도 어김없이 뚜벅이 신세였다.

고깃집 아르바이트가 힘들고 고된 축에 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시급이 그나마 제일 센 게 여기 ‘황성 한우집’이었고 어차피 몸이 축나더라도 지금처럼 젊을 때 바짝 돈을 벌어 놓아야 하는 저로서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아야야.”

등을 똑바로 펴고 두어 걸음 내딛자마자 찌르르하고 울리는 아픔에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바로 만져지는 빳빳한 수표 하나를 꺼내 들었다. 때가 묻은 천 원, 만 원짜리 지폐랑은 감촉도 달랐다. 그 말고는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완전 새것이었다. 당연한 거겠지마는.

온기현은 그걸 다시 빳빳하게 펴서 양손으로 양 모서리를 잡고는 눈앞에 펼쳤다.

자기앞 수표

100,000 (금일 십만 원정)

십만 원.

오늘 자신이 수업을 마치자마자 고깃집에서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이 약 5만 원 남짓이었다. 온기현은 빳빳한 종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코를 또다시 킁킁거렸다.

‘돈 냄새.’

약간 화학 약품 냄새도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미하게 매캐하지만 청량한 향이 느껴졌다. 잔뜩 날이 서 있는 향. 그런데도, 조금 가슴이 찌르르하게 알싸해지는 향.

제 착각일지도 몰랐다.

분명, 이 돈으로 병원에 가서 진료받고 몇 차례 물리 치료를 받으면 싹 나을 정도의 타박상일 것이다. 하지만 아까웠다. 이 돈이면 안창살을 최소 30인분은 구워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병원에 갈 마음이 싹 사라졌다.

휴학하는 동안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었던 탓에 정형외과에는 이골이 날 정도로 자주 갔었다. 병원비를 아예 외울 정도로 말이다.

몇 번의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등록금을 모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가서 고된 노동을 하다 보면 집으로 돌아올 때쯤에는 몸이 너덜너덜했다. 그리고 인간관계 또한 그러했다. 아마 단대에서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었다.

갓 입학하고 나서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뛰고자 사이트를 뒤져 보고 실제로 아이들을 몇 번 가르쳐 봤었다. 하지만, 어려 보이는 외모와 후줄근한 옷차림 때문인지 학부모로부터의 미심쩍은 눈초리와 또 동시에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두세 달 만에 잘리기 일쑤였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제 적성이 아닌가 보다, 하고 이내 때려치우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뭐, 어쩌겠는가.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게 낫겠다 싶었던 참에.

온기현은 제 벙벙한 티셔츠 아래를 죽 늘렸다. 등에 착 들러붙은 것 같은 뱃가죽 때문에 넓어진 품 사이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에휴휴.”

입에서 풍선에서 공기가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얼른 가서 밥이나 먹어야지.

고기 굽는 냄새가 찌든 냄새처럼 들러붙어서 식욕이 뚝 떨어지기 직전이었지만 잘 챙겨 먹지 않으면 또 쓰러지고 말 것이었다.

그러면 진짜로, 그가, 류주호한테 돌려주었던 아홉 개의 수표가 아쉬워질지도.

#“난 남자는 관심 없는데.”

……나도 알고 있다고.

온기현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도리질을 쳤다.

됐어, 이제.

그렇게 읊조리듯 되뇌며 운동화 앞발을 탁탁 구르고서는 백팩을 고쳐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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