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싸늘한 바람이 몰아쳐 왔다. 영하 7도에 햇살마저 구름에 가려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오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음울한 날씨에 구석진 터미널의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재현은 급히
들고 있던 커다란 백팩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검은색의 천으로 된 스포츠백을 꺼
내들고 입고 있던 검은 다운패팅재킷을 벗어 넣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백팩에서
갈색의 듀코로이 재킷을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둘둘 만 뒤 백팩을 스포츠백에 구겨
넣었다.
옷을 갈아입은 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자 낯선 얼굴이 보였다. 싸구려 탈색약을
사 직접 탈색을 하고 안경을 쓴 것뿐인데도 전혀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혹시나
싶어 노랗게 탈색된 머리 위로 비니까지 눌러쓴 뒤 커다란 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걸친 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지방 작은 소도시의 오래되고, 낡은 터미널의 화장실이라 감시카메라도 드물다.
버스 정류장과 매표소 쪽에만 설치된 카메라를 확인하고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먼 거리를 유지한 채 곧장 정류장을 나서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거리를 걷기 시
작했다.
다행히 명절 직후라 터미널 근방에는 커다란 짐 가방을 든 사람들이 많았고 날도
유난히 싸늘해 아무리 커다란 가방을 들쳐 매고 옷과 목도리로 몸을 칭칭 감아도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분명 안전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눈치를 보게 된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으면서도 누군가 뒤를 따라올까, 어딘가에 카메라가 있지 않을까. 계속해서 가
슴이 두근거려 심장에 좋지 않았다.
이미 충분하다고, 지금쯤이면 괜찮다고 아무리 자신을 달래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그날 집을 나와 강남을 시작으로 압구정을 지나 다음은 명동, 그리고 그 뒤는 신
촌과 이대 근방의 중고명품 가게를 들러 갖고 있던 시계와 지갑, 반지와 가방에
넣어둔 가격표도 떼지 않는 새 옷과 여행가방까지 모두 팔아치웠다. 가격도 기억
안 나는 것들이었지만 현금 매입을 부탁하자 꽤 많은 액수가 나왔다. 대학 입학
당시 학생증 겸용으로 받은 현금카드 계좌로 모두 입금을 받은 뒤 하나도 남김없
이 모두 현금으로 찾아 시장통을 지나면서 산 검은 백팩에 넣고는 가지고 있던 물
건들의 매입이 대강 끝났을 무렵, 합정역에서 한참 떨어진 골목길에 차를 세워둔
채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던지고 잠깐 지나온 가방과 함께 산 다운패딩을 걸친 채
안경을 썼다. 그리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 얼굴을 감춘 뒤 들고 있던 핸드폰의 전
원을 끈 뒤 운전석 아래쪽에 던져 넣고 차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골목길을 천천히 내려와 근방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큰 건물이 보이는
곳에서 내린 뒤 다시 건물의 화장실로 가 겉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쓴 뒤 백팩에서
꺼낸 커다란 스포츠백에 백팩과 옷들을 옮겨 넣었다. 그리고 또 다시 택시를 잡아
타고 한참을 달려가 눈에 띄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이
번엔 수도권으로 향했다.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수도권의 한 도시에서 내려 무
작정 걸음을 옮겨 후미진 곳에 위치한 여관을 찾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와보는 낯선 곳이라 그도 쉽지 않았지만 5시간 정도를 걷고 또 걸어 겨
우 좁은 골목 안쪽에 위치한, 낡은 여관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 미리 사둔 탈색
약으로 머리카락을 탈색한 뒤 뜬 눈으로 하룻밤을 세운 뒤 남색의 코트를 걸치고
여관을 나섰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최대한 큰 건물이나 은행들이 있는 길들은 피해 사람들 틈바구
니에 낀 채 계속해서 무작정 걸음을 옮겨갔다. 겨울의 장점은 목도리와 모자로 얼
굴을 가려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감과 디자인의 옷을 선
택하면 군중 속에 섞여 찾기 힘들다는 거였다.
보안카메라가 많은 지하철은 피하고 버스를 탈 때에도 최대한 허리를 숙이고 움직
이며, 잠시 멈추는 곳마다 수없이 옷을 사고 버리며 갈아입고 염색과 탈색을 반복
하며 버스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때마침 명절이 껴 이동인구가 많았던 탓에 몸을 숨기기도 좋았다. 시장과 버스정
류장마다 사람들이 그득해 그 사람들 사이에 동화되어 움직이며 열흘을 버텼다.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그리고 다음은 부산으로, 그리고 지금의 대구까지.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된다. 수색을 시작했다 해도 그 수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게다가 연휴까지 낀 상태에서 자신의 자취를 쫓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젠 안심해도 된다. 한 군데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으니 이젠 괜찮다.
이제 슬슬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잠깐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머리를 덮
쳐왔다. 지난 이틀간은 야간 고속을 타고 계속 돌았으니 오늘은 허름한 여관에 방
을 잡고 푹 자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마음을 놓으려는 순간 슬슬 밀려오는 피로에 퉁퉁 부은 다리가 점점 무거워져간다
. 보도블록이 깔린 바닥 아래로 다리가 푹푹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이젠 쉬고 싶다. 잠깐이라도, 쉬고 싶다.
그 강렬한 유혹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다. 어딘가
잠깐이라도 들어가 쉴 곳이 있지 않을까 하며 건물의 간판들을 돌아보던 중 등 뒤
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오싹한 그 감각에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검게 변해간다. 흐릿하던 장막 위로 먹물이 퍼진 듯 삽시간에 까맣게
사방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깨 위로 차가운 뭔가가 닿아왔다.
처음엔 그게 눈송이인 줄 알았다.
너무 차가워서,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눈인 줄 알았다. 귓가에 너무나 우아하
고 아름다운 그 음성이 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진짜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어?』
“아, 좀 조용히 좀 하라고! 여기 그쪽 혼자 살아?”
바로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고함 소리에 눈을 뜬 재현은 식은땀을 흘린 채
눈을 뜨곤 방안의 정경을 확인했다. 백색의 아무 무늬 없는 천장과 시끄러운 소음
이 나는 소형 냉장고, 그리고 연한 갈색의 책상과 성인 남자 하나가 간신히 들어
가 씻을 수 있는 좁은 샤워 룸. 그리고 그 옆에 팽개쳐진 검은색의 커다란 스포츠
백까지.
자신이 안전하다 느끼는 방 안의 풍경에 재현은 겨우 안도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덮쳐온 지긋지긋한 악몽에 잠시 꿈과 현실이 뒤엉켜, 다시 그 집
안으로 끌려간 건가 하는 생각에 무서워 잠시 패닉 상태에 빠졌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건 꿈이었다. 사나흘에 한 번 꼴로 꾸는 악몽이었지만 매번 이렇
게 놀라고 무서워하며 눈을 뜬다.
땀에 흠뻑 젖은 채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사이 쾅- 하며 문이 울
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공부하는 사람도 있잖아! 새벽에 왜 축구를 보고 지랄이야! 양심이 있으면
헤드폰이라도 끼든가!”
버럭버럭 내질러지는 남자의 고함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켜 앉은 재현은 그 음성이
바로 옆방, 1403호의 남자의 음성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1403호
와 1402호는 사흘에 한 번 꼴로 저런 식으로 싸워대 방 밖으로 나가지 않는 자신
도 두 사람의 목소리는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말이 고시원이지, 공단 근처에 위치한 곳이다 보니 실제 고시생은 극소수이고 대
부분이 근처의 공장이나 가게에서 일을 하는 근로자들이었다. 그 중 몇은 외국인
노동자들이었고 또 몇은 보증금이 없어 당분간 고시원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었
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활 리듬이나 이해관계가 달라 간혹 싸움이 발생하고는 했는
데 바로 1402호와 1403호는 그 중에서도 아주 안 좋은 케이스였다. 1402호 남자는
오전 근무를 하는 근처 피시방의 직원이었고 1403호는 이 고시원 내의 극소수에
속하는, 진짜 고시생이었다. 최근 지어진 건물 내의 고시원은 시설이나 방음이 꽤
좋은 쪽에 속했지만 예민해진 사람들에게는 옆방에서 물을 따르는 소리마저도 생
생히 울리는 모양이었다.
한 사람이 나가지 않는 이상 끊이기 않을 것 같은 그들의 다툼에 더는 밖의 일에
신경 쓰기를 포기하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지독한 근육통이 전신을 덮쳐왔다.
한 달 반을 부랑자처럼 전국을 떠돌다 사람들이 많은 공단 지역의 고시원에 방을
잡은 뒤 또 다시 두 달은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아직 돈은 여유가 있기에
그 두 달간 근처의 마트에서 주문한 컵라면과 햇반, 그리고 포장 김치로 연명을
하며 처박혀 있다 이틀 전 과용을 부려 아르바이트를 하겠다고 나선 게 문제였다.
신원확인이 복잡하지 않고 현금으로 일당을 주는 아르바이트라는 말에 혹해 택배
물류센터의 야간 아르바이트에 지원했었다. 아무 사전지식도 없이 멍청하게 교차
로를 보고 연락을 하고, 그쪽에서 오라는 곳으로 가 작은 봉고차를 타고 도착한
곳에서 10시간 동안 지옥을 경험하고 나왔다.
평생 해본 적도 없는 과한 노동에 일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토악질이 쏟아지
려 했지만 악으로 참아냈다. 다리가 후둘거리고 땀이 비 오듯이 오는데도 바득바
득 시간을 채우고 새벽 일찍 이 방으로 돌아온 순간 샤워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덕분에 하루를 꼬박 잠만 잤다. 그 악몽을 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시 돌아온 현실 속에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이른 시간이다. 아직 출근 전이라 저 난리인 모양이었다.
“그럼 네가 나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나가라 말라 지랄이야! 일하러 가는 사람
붙잡고 재수 없게!”
“뭐? 너어? 나이도 어린 새끼가 어디서 반말이야!”
1402호와 1403호의 고함소리 사이로 그만해라, 출근 안 하냐, 하는 사람들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바로 이쪽 방 앞에서 싸우는 듯 소리가 가까웠지만 그 소리를 무
시한 채 침대 헤드 위쪽에 위치한 작은 창을 열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는 순간 치익- 하며 담배 끝이 타들어간다.
완연한 봄이었다. 좁은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은 따뜻하고 싱그럽다. 저 멀리
보이는 초등학교의 운동장 쪽으로는 만개한 벚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전신을 두꺼
운 천으로 감고 다니던 사람들 역시 어느새 가벼운 차림으로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 자고 깨어난 것 같았는데, 어느새 봄이 와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소했다. 아니, 사실은 모든 것이 생소했다.
좁은 샤워룸과 책상, 그리고 침대가 놓인 두 평이 조금 넘는 방과 좁은 창, 그리
고 답답한 풍경. 공간뿐 아니라 입고 있는 옷과 자신의 머리카락도, 그리고 얼굴
도 모두 자신 같지 않았다.
몇 번이나 탈색과 연색을 반복한 탓에 볏 짚단처럼 뻣뻣해진 채 얼룩진 머리카락
과 허름한 차림새. 방 안을 메운 매캐한 담배 연기와 너저분한 옷가지와 물건들.
더럽고 흐트러진 건 절대 참지 못하던 이전의 자신과는 너무 다른 지금의 모습에
헛헛한 웃음이 터졌다.
사람은 어떻게든 환경에 맞춰 살아가는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이런 성격이었
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냥 그 집에서는 그렇게 살아야 하기에 그렇게 했던 것
뿐인 것 같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뭐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꾸며진 집안이
기에 뭔가를 흐트려 놓을 수도 없었다. 그 집안의 물건들은 반드시 제자리에 있어
야 인테리어가 완성이 되기에 물건 하나도 함부로 놓지 못했다.
독한 향을 품은 시가 모히토를 길게 빨아들인 뒤 재떨이에 재를 떨었다. 봄이라
그런지 충동적으로 저 햇살 아래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은, 저 태양 아래에 설 자신이 없다.
고시원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근을 한 후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우고 샤워를
한 뒤 쌓인 빨랫감을 들고 공동세탁실로 향했다. 단 8시간의 노동으로 목부터 발
목까지 모든 근육이 엉망이 된 채로 어기적거리며 제법 긴 앞머리를 부스스하게
내려 눈가를 가린 뒤 안경을 세탁기 앞으로 가 빨랫감을 넣고 세재를 넣었다. 그
리고 세탁코스를 맞춰 누른 뒤 방으로 돌아와 대강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 떠날지 몰라 짐은 여전히 가득 싸둔 채라 안쪽에 있는 옷들을 대강 정리해
넣고 침대 시트와 베개, 이불들을 정돈한 뒤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었다. 그
리고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워낙에 방이 좁아 볼륨은 최대한 낮춰둔 채 케이블
채널에서 해주는 미국 드라마 시리즈를 보며 그냥 그 드라마 자체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집에 있을 때엔 텔레비전도 영화도 거의 보지 않았다. 마치 강박증에라도 걸린
듯 영상 매체는 병적으로 멀리 했고 유일하게 관심이 있는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음악이었다. 하지만 이 좁은 방 안에 틀어박힌 순간부터는 유일하게 하는 일이 자
고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드라마와 오락프로그
램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의외로 재미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도, 처음
으로 깨달았다.
여전히 욱신거리는 몸에 웃다가도 신음을 흘리고 앉아서 보다 허리가 아파 누웠다
, 누워 보니 이번엔 목이 아파 다시 일어나 구르고, 그러면서도 움직일 때마다 비
명을 내지르면서 그렇게 또 하루를 보냈다.
파스를 사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기는 했지만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밖을 나
갈 수 없어 그렇게 환한 봄의 햇살이 사그라지기만을 기다렸다.
해가 진 직후, 적당히 장을 보는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대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온 재현은 우선 약국에 가 파스를 잔뜩 사든 뒤 처음으로 용기를 내 근처의 마
트에 들어섰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변을 잔뜩 경계한 채 햇반과 김치, 그리고
마트의 반찬 코너에서 파는 나물무침과 젓갈, 그리고 모처럼 음료수와 생수까지
사들고는 터덜터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도 심장이 두근두근해 계속해서 주변을 살피며 고시원으로
오는 길에도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겨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에 올라타 버튼을 누르는 순간 길게 숨을 내쉬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나간다고 했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나
두려움과 함께 오는 기이한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졌다. 겨우 한 걸음 걸음마를
뗀 것뿐이지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게, 그리고 자신을 찾는 이들이 없다는 게
기뻤다.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물론,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고 아무 것도 확실해진 건
없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자신의 손으로 장을 봐오고 이걸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중에 편의점에 들르거나 전화로 마트에 주문을 한 적은 있
지만 마트에 가서 직접 장을 봐온 건 이게 처음이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들을 해냈다는 기분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간다.
멋쩍은 기분에 목덜미를 긁적거리던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그리고 곧 열리는
문틈으로 내려서 1404호를 향해 가는데 1403호실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 반찬통을
든 남자가 나선다. 처음으로 보는 옆집 남자의 얼굴에 재빨리 모자를 푹 눌러쓰자
자신의 방문 앞에 선 그가 이쪽을 보곤 어색하게 말을 건넨다.
“아, 4호 사람 맞죠?”
자신의 방을 가리키며 남자가 묻는 말에 심장이 쿵 하니 떨어졌다. 이 고시원에서
두 달은 지냈음에도 옆방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게 아닌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어떻게 자신을 알아본 건가 하는 생각과 함께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챈 걸까 싶어 두근두근 하며 살짝 고개만 숙여 보이자 그가 어색한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옆방인데도 처음 보네. 요 며칠 시끄럽게 굴어서 미안해서요. 이거, 어머니가
담가주신 깍두긴데 좀 먹어보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내민 작은 김치통에 받아들까 말까 망설여졌다. 겨우 그런
문제로 이런 걸 받아들기엔 미안하고 또 안 받자니 야박한 느낌이다.
“그런 건 괜찮은데요…….”
“우리 어머니 깍두기 진짜 잘 담가요. 맛은 보장하니 먹어 봐요. 조용히 하라고
하면서 제가 제일 시끄럽게 군 것 같아서, 미안해서 그래요.”
진심어린 사과가 담긴 남자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김치통을 받아들었다. 지나치게
사람을 피하면 인상을 남기게 된다. 적당히 있는 듯 없는 듯 투명인간처럼 살아가
려면 너무 튀어서도 안 된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주 좀 봐요. 여기 들어온 지 꽤 된 것 같은데 얼굴은 처음 보죠?
”
“……네.”
“하도 안 나오길래 다들 자살한 건 아니냐고 걱정했는데 건강해 보이네요. 그럼
들어가요. 아, 오늘부터는 저도 조용할게요.”
“네.”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막 그의 방으로 향해가는 남자의 모습에 재현 역시 서둘러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려던 순간 남자가 문득 떠오른 듯 묻는다.
“아, 통성명도 안 했네. 난 한진수, 28살. 그쪽은?”
그 말에 재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대꾸했다.
“아…… 이세현이라고 합니다. 22살이에요.”
이제 해가 지났으니 22살이라고 자신의 가방에 있는 위조신분증에 있는 동갑내기
남자의 이름을 정확히 대자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하, 역시 어리구나. 어려 보이더라. 내가 형이니 말 놔도 되지?”
“네.”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인사는 하고 지내자.”
마지막 말을 끝낸 뒤 그의 방으로 들어가는 1403호의 남자를 바라보던 재현은 서
둘러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잠시 문에 기대 가슴을
손으로 눌렀다. 여전히 두근두근 거칠게 뛰는 심장박동에 길게 심호흡을 하며 작
게 중얼거렸다.
“이세현, 이세현, 이세현.”
여기저기를 떠돌고 고시원에 온 이후로도 이름을 부를 사람이 없어 아직 그 이름
이 입에 익지 않았다. 방금 전에도 순간 서재현이라고 말을 할 뻔한 걸 간신히 이
세현이라고 했던 거다. 주민번호는 이미 외웠지만 당황했을 때엔 또 다르니까 조
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아직은 완전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앞으로 당분간 외출을 자제해야 한
다. 그리고 이제 슬슬 이곳을 떠날 준비 역시 해둬야 할 것 같았다.
또다시 문을 걸어 잠근 뒤 방 안에서 대강 식사를 하고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여기저기 널려 있던 겨울옷들은 가방에 채워 넣고 당장 입을 옷들만 대강 꺼내
둔 뒤 가방을 옷장 제일 높고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만약 갑자기 떠나게 된다
면 저 가방을 꺼내 아래쪽에 있는 옷들만 집어넣고 가면 되도록 모든 준비를 해둔
채 옷장 문을 닫았다.
일단 정리를 해두자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져 담배를 입에 문 채 창문을 열고 침
대에 걸터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느긋한 시선으로 창밖을 내려다봤다. 이젠
완연한 봄이라 해가 진 후인데도 가벼운 옷차림들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멍하니, 딱히 할 일이 없어 담배를 입에 문 채 가로등이 밝혀진 길가를 바삐 걸어
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구경하듯 내려다보고 있는데 1403호의 문이 열리는 소
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조용하던 복도 쪽에서 저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울려
댄다. 옆방의 남자가 외출을 하는 것 같았다. 친구들을 만나는지 고시공부를 하는
3호실 남자는 이렇게 가끔 오후에 나가 새벽녘에나 들어오곤 했다. 그의 패턴은
대강 파악했기에 그가 외출을 한다는 확신이 들자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틀었
다. 1405호의 경우는 야간 타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듯 8시쯤 출근을 해 양쪽 방
이 다 빈 채라 마음 놓고 텔레비전 전원을 켠 뒤 볼륨을 높였다.
담뱃재를 창가에 놓인 재떨이에 떨며 화면을 바라보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줄줄이
앉아 뭔가를 떠들어댄다. 왁자지껄한 박수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쉴 새 없이 이
어지는 패널들의 말소리가 싫어 버튼을 눌러 채널을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
와 중국드라마,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영화. 채널마다 줄줄이 나오는 화면들을 천
천히 훑어봤지만 딱히 끌리는 화면이 없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계속해서 버튼
을 누르던 중 한 채널에서 손이 멈췄다.
화면 가득 차에서 내려 공항으로 향해가는 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낯익은 그
얼굴에 숨이 저절로 손이 멈춰버렸다. 너무나 선명하게 잡힌 그의 옆얼굴이, 그리
고 그의 체형과 걸음걸이가 화면이 아닌 자신의 눈앞에서 보는 듯한 착각에 심장
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정신없이 뛰는 심장과 멍한 정신에 그대로 얼어붙은 듯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중
곧 화면이 바뀌며 데스크로 이어진다. 그리고 화면에 잡힌 지긋한 나이의 남자가
말을 이어간다.
『늦은 회장직 취임은 이례적인 일이라기보다는, 여론을 의식한 것 같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장직을 수행하기엔 지나치게 젊고 대기업의 세습경영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 집을 나와서, 아니 그 집에 있을 때에도 들을 일이 없던 그의 풀네임에 몸을
흠칫 경직시키자 데스크의 중심에 앉은 남자 앵커가 방금 말을 한 지긋한 나이의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이번에 서정혁 사장이 그룹의 회장직에 취임을 한다면 그룹 내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일단 그룹 내부적으로는 파격적인 인사조정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간 서정혁
사장이 경영하던 방식으로 봐서는 소수정예의 인원으로 그룹을 끌고 갈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외부적인 상황으로는 젊은 회장의 등장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엇갈리
고 있는 중입니다만 서정혁 사장이 그간 보여준 경영 능력으로 보아 긍정적인 평
가가 더 높은 편입니다.』
전혀 모르고 있던 그의 소식에 재현은 혼이 빠진 듯 멍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그룹의 본사 이전 문제도 빠르게 진행이 되는 건가요?』
『그 부분 역시 여론을 의식한 듯 포기 의사를 내비친 상태입니다. 한국 기업이
해외에 본사를 둔다는 데에 반감이 컸으니까요.』
『그건 다행이군요. 최근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 뭐 그런 소문이 돌았는데 건강
상태는 양호한 건가요?』
『1월 말에 잠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증권가 소문이 있었지만 아직 젊어
건강 문제는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회장 취임식을 앞두고 해외 출장 장면을 공
개한 것도 그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고요.』
『그보다는 홍보 효과를 노린 것 같은데요.』
그의 외모에 대한 앵커의 농담 같은 말에 남자가 가볍게 웃으며 대꾸한다.
『아마, 그런 목적도 있었던 것 같죠? 기업의 예비 총수 사진이 뜨자마자 검색 순
위 1위를 도배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니까요.』
『처음 공개된 서정혁 사장의 사진에 오늘 종일 포탈이 술렁였는데…… 그 사진에
설레는 여성분들께는 슬픈 소식이 있네요. 회장 취임 소식과 함께 GK자동차의 박
영철 사장의 첫째 딸과 결혼설 역시 돌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어떤 영향을 미칠
거라 예상하십니까?』
『아직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확히는 GK자동차 사장의 장녀가 아
니라 GK그룹 회장 손녀와 하는 결혼이라고 봐야겠죠. 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
견이 분분한데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서정혁 사장의 나이가 아직 젊은 탓에 위치
가 불안해 뒤를 바치기 위한 정략결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데이트 장
면들이 포착되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진은 풀리지 않고 있으니까요.』
순간 손에서 툭하니 리모컨이 떨어져 내렸다.
결혼은,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결혼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아들들이 셋인데다 할머니도 결혼을 적극 권하는 쪽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가
그럴 의향이 전혀 없었기에 조금도 예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럴 나이였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버텨왔지만 회장직에 취임을 하고 나
이가 찼다면 결혼을 하는 게 맞다. 아무리 독선적인 남자라 해도 버티는 데엔 한
계가 있다.
그렇다면 끝이다. 그가 결혼을 한다면, 이제 완전히 끝난 거다. 자신이 이렇게 벌
벌 떨며 숨어있을 이유도, 그가 자신을 찾을 이유도 없다. 설사, 찾는다 해도 더
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안심을 해도 된다. 한 그룹의 총수자리에 앉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다면 더더욱 그가 자신을 찾을 여유가 없을 테니 더 이상 사람들을 피해 고개
를 숙이고 걷지 않아도 된다. 더는 방안에 처박혀 누가 문을 두드릴 때마다 놀라
지 않아도 되고 햇살이 무서워 해가 지기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이 술렁거린다.
기뻐야 하는데, 분명히 기뻐해야 하는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너무, 이상한 느낌이었다.
슥슥, 펄럭 하는 소리가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늦은 새벽이기는 하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옆방에서 들려오는 필기 소리와 종이를 넘기는 소리까지 모두 들려올 정
도로 고요했다. 간간히 지나가던 차 소리도 완전히 멈춘 채라 사방이 조용하다.
세상 위로 가득 내려앉은 어둠과 고요. 깊은 잠을 청하기엔 가장 이상적인 새벽이
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이 고시원에 온 첫 주에는 불안해 안절부절못
하며 방밖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도 놀라 잠에서 깨곤 했지만, 어느 순간 마음
을 놓자 그 후로는 눕기만 하면 잠이 들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깨지
않았다.
한 달 반 동안 거리를 떠돌던 피로가 한번에 몰려왔는지, 미친 듯이, 진짜 몸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속해서 잠만 잤었다. 그래서 오히려 걱정이
었을 정도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다. 몸을 쑤시는 근육통과 지나친
노동으로 인한 피로감도 여전하지만, 정신은 지나치게 맑다.
잠깐 본 경제뉴스 탓인지 그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회장 취임은 원래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다만 그게 예정보다 조금 빨라졌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본사이전을 포기한 것 역시 당연한 거다. 아무리 그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건 확실히 무리수였다. 단지 자신과 둘이 나가 살
기 위해서 무모하게 밀을 밀어붙였으니, 포기하는 게 맞다.
그래, 이상할 건 없다. 모두 알고 있었던 거니까 아무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아주 잘된 일이었다, 이건. 그가 결혼을 하고 회장직에 취임을 한다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자신에겐.
회장직에 앉는다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바빠질 테고 바로 그의 곁을 지
키는 사람도 생길 테니 더는 자신을 뒤쫓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도 이미 단념
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이나 그를 속이고 사라졌다면 아무리 그 남자라도 자존심
때문에라도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 잘 된 거다.
이제 끝난 거다.
하지만…….
“……정신 차려, 서재현…….”
이건 잘된 거다, 진짜 잘된 거다, 라고 수없이 머리를 후려치며 정신 좀 차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봐도 그 이상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잠깐 스쳐간 그 남자의 옆얼굴이 사라지질 않는다. 많이 야위어 보였다. 여전히
수려한 미모지만, 선이 유독 날카로워 보이는 건 분명 야윈 탓이었다. 1월 말 건
강상의 문제가 있었다는데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건강 문제는 자
신 때문인지도 모른다.
약이 잘못되었던 걸까, 하는 생각에 조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도 이제 회장직
취임과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면 괜찮아졌다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하다가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며 쿡쿡 쑤셔대기도 한다.
한동안 잊고 있던 가슴의 통증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명치 부분을 손끝으
로 내리눌렀다.
아주 잠깐, 화면에 스친 그를 본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이 울려대고
있었다.
이건 싫다. 차라리 잠을 못 자고 신경이 곤두서는 게 낫지, 이렇게 아픈 건 싫다.
이게 싫어서 도망친 건데, 또 시작되었다.
더는 싫은데, 그 통증이 멈추질 않는다.
밤새 뒤척거리다 결국 날이 밝아왔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한 채라 해가 뜬 후에
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역시나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도 전날 푹 잔 후라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또다시 수면장애가 시작되었다는 거였다.
잠을 못 자서인지 지끈거리는 머리와 나른한 몸에 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 해가 질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리고 조심스레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기를 찾아 그제 외워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오늘 택배물류센
터의 아르바이트가 가능하냐고 묻자 또 같은 장소를 지정한다.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정신없이 뭐라도 하고 싶었다. 택배 물류센터의 일은 고
되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마음은 편했다. 소수의 사람들만 일을 하
니 여러 사람과 마주칠 일도 없고 새벽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 역시 인적이
드물어 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 일을 하고 나면 정신없이 잘 수 있으니까
좋다.
지금 자신에겐 그런 일이 필요하다. 어떻게든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
장소와 시간을 확인한 뒤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신문 가판
대에 놓인 석간신문의 타이틀로 눈에 갔다.
『서정혁 차기 회장 결혼 초읽기. 경제계의 지각변동을 예고.』
『처음으로 사생활을 드러낸 재벌 총수, 그 목적은?』
『현대판 왕족. 재벌가의 경영세습, 정략혼, 이대로 괜찮은가?』
결국 같은 내용이지만 여러 가지 시선으로 갈린 신문의 일면 타이틀 아래로는 모
두 어제 뉴스화면을 통해 나온 그의 옆얼굴이 실려 있었다. 주로 경제신문들이었
지만 조악한 인쇄질에도 그의 옆얼굴은 너무나 선명하게 잡혀 있었다. 그 중에는
친절하게 GK그룹 총수 손녀라고 써진 실루엣 사진을 그의 사진 옆에 배치해준 신
문도 있었다.
언론 노출을 거의 병적으로 싫어하던 남자의 지나치게 과감한 행보에 눈살이 찌푸
려졌다. 홍보용인지 과시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자의 얼굴은 역시 심장에 좋
지 않다. 슬쩍 지나가는 화면이나 사진만으로도 자신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 느낌이 싫어 도망치듯 신문가판대 앞을 스쳐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해 걸었다.
“와, 어떤 놈은 나이 서른넷에 재벌총수인데 어떤 놈은 노가다 뛰러가는구나.”
이미 한 번 와봤던 조악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신문을 뒤척거리던, 택배
사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그 옆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던 남자가 툭하니 말을 던진다.
“이 새끼는 전생에 뭘 했길래 저 얼굴에 저 나이에 재벌총수래요?”
“지구라도 구했나 보지.”
“그럼, 돈 좀 뿌려주지. 돈도 엄청 많을 거 아니에요?”
“이런 놈들은 돈으로 똥을 닦아도 남한테는 안 준다. 재벌들이라는 게 그런 종자
들이야.”
지금 이 순간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에 다시 사무실을 나갈까
했지만, 어딜 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조용히 빈 자리에 가 앉았다. 이미 사무
실 안에는 자신 외에도 서넛의 남자들이 와 자리하고 있었기에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모자를 눌러쓴 채 구석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신문을 보던 남자들이 말
을 이어간다.
“그런데, 재벌이 또 재벌 딸하고 결혼한다는 거죠, 지금?”
“재벌들은 재벌들하고만 결혼하는 거 모르냐?”
“여자 땡 잡았네. 이 얼굴이면 재벌 아니라도 환장할 것 같은데.”
“야야, 이 나이에 벌써 아들이 둘이다.”
뜨끔한 그 말에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자 다른 남자가 놀란 듯 되묻는다.
“에에? 이 사람 총각이라면서요?”
“총각은 무슨.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 호적만 총각이지 아들이 벌써 둘이야. 내
친구 한 놈이 여기 조선소에서 일하다 쫓겨났는데 아들 하나는 벌써 대학생이란다
. 이 여자 인생 조진 거야. 결혼해서 대학생 아들을 키워야 돼.”
“우아, 진짜요?”
“그 회사 사람들은 다 알걸. 어릴 때부터 얼굴값 하고 다닌 걸로 유명해. 그래서
그동안 사생활 공개 꺼려했는데 회사가 주춤하니 별걸 다 팔아먹네. 어제 사진 뜨
자마자 여자들 환장하고 이 인간 사진 찾느라 혈안이 됐더라. 몇 년 전 박람회 관
람 사진까지 찾아내서 미친 듯이 퍼지고 있던데.”
역시나, 회장 취임 소식이나 거대 재벌 간의 정략혼보다는 그의 외모가 더 이슈화
되고 있는 듯했다. 뉴스와 신문에서 그의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은 것도 그의 외
모가 워낙에 화려한 탓이었다. 서른넷의 나이에 재벌 총수 자리를 꿰찬다는 것도
이슈거리지만 그보다는 그 재벌총수가 너무나 아름답다는 게 더 사람들에게 먹히
고 있었다. 영화나 만화, 로맨스 소설에서 빠져나온 듯한 그의 스펙과 미모에 사
람들은 열광하며 동시에 시기하고 이 남자의 자산이나 연애관계, 그리고 생활 자
체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인터넷은 안 봐서 모르지만 현실이 이 정도라면 인터넷상에서는 아마 광풍이 불고
있을 것이다.
그도 분명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간 언론 노출을 꺼렸던 걸
로 아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나 공격적으로 노출을 하는 걸까?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소문을 불식시키려는 걸까, 아니면 자신에게 뭔가를 말하
고 싶어 하는 걸까?
사방에 깔린 그의 사진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그에 관한 이야기에 심각하게 지금
상황에 대해 고민하던 중, 갑자기 사무실 문이 열리며 남자 둘이 저벅거리며 들어
섰다. 작은 키에 단단한 외모를 한 두 남자의 등장에 사무실 내로는 묘한 공기가
돌기 시작했다. 잠바에 청바지를 입은,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림의 남자
들이었지만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묘한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일을 찾으러
온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그들만의 독특한 느낌이 있었다. 위압적인 그 느낌에 몸
을 경직시키고 있자 안으로 들어선 두 남자가 수첩을 꺼내 보인다.
“검문 나왔습니다. 신분증 보여주세요.”
귀찮다는 듯, 툭하니 내뱉는 두 남자의 말투에 신문을 보던 두 남자가 서둘러 신
문을 옆으로 치우고 일어서 그들에게 다가선다.
“아이구, 수고하십니다.”
“신분증.”
“아 다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여기 다들 일용직들이에요. 불법 노동자들은 없습
니다. 아직 다 모이지도 않았고요.”
“알았으니까 신분증 보여주세요.”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이 검문 자체가 짜증이 나는지 툭툭 던지는
듯한 그 말투에 남자들이 어쩔 수 없이 먼저 신분증을 건네자 핸드폰으로 그들의
주민번호를 확인한 남자들이 신분증을 돌려준 뒤 이쪽으로 다가선다.
“어이, 신분증.”
짜증이 잔뜩 밴 그 말투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신분증을 꺼냈다. 그 사이 손끝이 가늘게 떨려오는 듯한
기분에 재빨리 손에 힘을 주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신분증을 건넸다.
분명 상명이는 실제 존재하는 사람의 주민번호이고, 식별 역시 불가능해 핸드폰
개통도 무리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신분
증을 사용한 게 처음이라 긴장을 숨기기 위해 애써 태연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자
신분증의 사진과 얼굴을 확인하던 남자가 핸드폰의 버튼을 누르는 게 보였다.
그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움직일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댔다. 혹시나 저 신
분증의 원래 주인이 신고를 했거나 아니면 주인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아니
면 경찰들이 위조신분증임을 알아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잔뜩 긴장한 채 기다리
고 있자 조회를 마친 경찰이 신분증을 돌려준다.
“여기.”
“……네.”
“다음, 그쪽…….”
아무 문제없다는 듯 돌아서는 경찰의 모습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
했다.
다행이었다. 진짜 다행이었다. 이 신분증은 쓰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잠시
놀라고 긴장하기는 했지만 일단 고비는 넘겼다. 그리고 이 신분증이 경찰에게도
통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다시 한 번 작게 숨을 몰아쉬며 신분증을 넣은 지갑을 재킷 주머니 안쪽에 찔러
넣는 사이 경찰들은 문 쪽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거기 신분증.”
경찰의 말에 문 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주섬주섬 신분증을 꺼내 건네자 역시나 그
걸 확인한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남은 남자의 신분증까지 확인하고는 사
무실을 빠져나간다. 그러자 작업복을 걸치고 있던 통통한 체형의 남자가 이상하다
는 듯 말을 건넨다.
“웬일이래? 사무실까지 확인은 잘 안 하는데.”
“건수 채워야 하나 보죠. 요즘 불법 이주 노동자들 단속 강화했잖아요.”
자기들끼리 투덜투덜 대화를 이어가던 남자 둘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사무실 안에
있는 텔레비전을 켠다. 화면에 나오는 두 명의 드라마 주인공을 본 남자가 다시
리모컨을 돌린다.
“난 저런 드라마 왜 보나 모르겠어.”
우리 집 사람이 아주 환장한다며 투덜거리며 빠르게 리모컨을 누르는 남자가 한순
간 손을 멈추자 화면에서 낭랑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랭킹 3위, 서정혁 사장. 경제신문의 1면이 이렇게까지 큰 화제를 불러일으
킨 건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죠.』
너무나 귀에 익은 그 이름에 놀라 화면을 바라보자 화면 한가득 그의 사진 위로
댓글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아나운서의 말이 이어진다.
『현재 서정혁 사장은 장기 유럽 출장 중인데요. 그가 유럽에 가서 뭘 얻어오냐보
다는 입국 장면 역시 사진에 찍힐까에 더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무슨 연예 프로인 듯, 가볍기 그지없는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자 화면이 바뀌며 아
이돌 가수들의 화면이 떠오른다. 그리고는 곧 ‘검색어 랭킹2위’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곧 화면이 바뀌어 응급실의 다급한 화면이 비쳐진다.
거기서 채널이 멈췄다. 화면을 돌리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실려 온 36
세 환자’라는 나레이션에 귀를 기울은 채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울리는 소리 외에는 조용한 그 안에서 재현은 소리 없이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해외로 갔구나, 라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본 화면도 차에서
내려 공항 내로 들어서던 모습이었다. 그걸 인식한 순간 긴 한숨이 터졌다.
그래,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그렇게 요란하게 떠났으니 당분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안심해도 된다. 물론 한국에서는 계속 수색 작업을 벌일 수도 있지만 그
가 없는 한은 괜찮다.
그래, 이젠 괜찮다. 이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떨 이유가 없다. 위조신분증
은 경찰도 판독하지 못했고, 그는 국내에 없다. 게다가 돌아오는 즉시 취임식을
할 거고 곧 결혼도 할 거다.
이제 그에게 자신은 필요 없다. 그럼, 모두 끝난 거다.
조금 가슴이 아리고, 여전히 작은 불안은 남아있더라도 괜찮을 거다.
모든 게 곧 좋아질 거다. 자꾸만 눈에 띄는 그의 모습이 눈에 밟히기는 하지만 그
것도 한때일 뿐이다. 내일이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더는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그에 대해 떠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 가슴의 통증도 곧 사라질 테
니 걱정할 것 없다.
8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작업복을 걸친 두 명의 남자를 따라 봉고차에 타고 사흘
전에 일했던 그 물류센터에 도착해 일을 시작했다. 정확히 8시에 작업을 시작해
먼저 컨베이어벨트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송장에 있는 코드에 따라 분류를 하고 분
류 작업이 끝나자 새로 들어온 대형 트럭에서 물건을 내렸다. 오늘은 죽어라 일하
라는 의미였는지 첫 트럭이 농산물이었다. 쌀과 과일, 김치류들을 내리느라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새벽 자정에 맞춰 식사를 하고 또 다시 하차 작업을 시작했다.
이미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은 채였고 팔다리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지만 너무
힘이 드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게 좋았다. 그 별채에 있을 때, 서진이 몇 번이
나 운동을 하고 몸을 피로하게 하라고 한 이유를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몸이 고되면 사람은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울해할 이
유도 불면증에 걸릴 이유도 없어진다. 결국 모든 문제는 머릿속이었다.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면 복잡해진다. 특히나 그에 관해서는 자신 역시 정의
를 내릴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차 있기에 늘 혼란스럽고 복잡하기만 하다. 명확
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그 감정은 혼란이 되고 혼란은 불안을 몰고 온다. 그 불안
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점점 덩치를 키워 결국엔 자신마저도 거기에 잡아먹히고
만다.
‘불안’이 무서운 건, 그 감정들이 결국 자신의 머리를 통째로 먹어치우는 탓이
다.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마치 강박처럼 그 불안에만 빠져 허우
적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쪽이 좋다. 머리는 비우고 몸만 움직이는 쪽이 편
하다.
슬슬 몸에 한계가 느껴지긴 했지만 이를 악문 채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몸을
혹사하고 안전한 그 방으로 돌아가 다시 자면 된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은 채 하루고 이틀이고 자버리면 그만이다.
오전 6시가 되어 겨우 청소까지 마친 뒤 봉고차를 타고 다시 그 사무실 근방으로
돌아갔을 때 즘에는 이미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방으로 돌아가는 즉
시 잘 것 같다는 생각에 사무실에서 터벅터벅 텅 빈 거리를 지나 고시원으로 향했
다.
그 사이에도 고개가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온 몸이 엉망이었다. 지금
은 괜찮지만 아마 자고 일어나면 또 전신이 아프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우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 고시원
건물 안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찌나 일을 해댔는지 엘리베이터 버
튼을 누르는 손끝이 가늘게 떨려오긴 했지만 그조차도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느껴
졌다.
차가운 엘리베이터의 벽에 기댄 채 살짝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막 눈을 뜨려는 순
간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14층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며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고시원의 문을 열고 들어서 1404호를 찾아갔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기
분에 주머니에서 방 열쇠를 찾아 막 문을 열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건 그냥 느낌이 아니었다. 이상했다. 방문이 열린 채였다.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상할 정도로 강하게 뛰는 심장 박동에 열
쇠를 든 손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뭔가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놓인 듯 어색하고 불편한 그 느낌에 차마 문고리를 돌리지 못한 채 서 있
던 사이 끼익거리며 문이 열려간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열리는 그 문소리에 신경을 바싹 곤두세우고 있던 사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한 방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텔레비전이 놓인 책상 겸 식탁
과 작은 냉장고, 그리고 긴 옷장과 간이 샤워실, 그리고 폭이 좁은 창과 침대까지
.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을 확인한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방 안은 어제 나가기
전 그대로였다. 침대 시트 하나 흐트러짐 없다. 그러니까, 아무 문제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제 나갈 때 정신이 없어 문을 열어놓고 나간 모양이었다
.
그래, 단지 그뿐이다. 신경 쓸 것 없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게 발각되었다면 벌
써 끌려갔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지금 그는 한국에 없다. 그가 없다면 서진도
없다. 누군가 뒤를 쫓는다 해도 보고만 할 뿐 이곳에 와서 뭔가를 할 리가 없다.
그제와 어제, 연이어 그를 여기저기서 본 후라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었다. 별거
아닌 일에 놀라고 날카롭게 반응하고. 이런 건 좋지 않다. 겨우 겨우 무뎌진 신경
이 또 다시 곤두서려 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은 좀 쉴 필요가 있다. 최대한 날카로워진 신경을 내리눌러야
한다.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에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고 방 안으로 들어서 현관에서 신
발을 벗었다. 그리고 문을 닫은 후 그대로 침대 쪽으로 가 커튼을 내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그렇게 아주 잠깐을 잔 것 같았다.
한창 자고 있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잠을 깨우는 그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문 쪽을 돌아보자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이세현 씨, 방에 있어?”
잠결에 들려온 그 이름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하고 문을 바라보다 문득 그
이름이 지금 자신이 쓰는 이름이라는 걸 떠올리곤 무거운 몸을 일으키자 다시 밖
의 남자가 문을 두드린다.
“이세현 씨, 도둑이 들어서 그런데 방에 있으면 일어나서 없어진 물건 있는지 확
인해봐. 이 방에서는 가방을 들고 나가던데.”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밖에서 들려온 그 말에 화들
짝 놀라 침대에서 내려섰다. 일어서는 순간 전신에서 지독한 근육통이 울려와 멈
칫했지만 아프다고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전신이 울려대는 느낌에 서둘러 옷장 문을 열고 안을 보자 옷은 그대로였다. 그래
서 이번엔 고개를 들어 옷장의 위쪽을 바라보자 검은색의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혹시나 해 그 위쪽을 다시 보고 옷장의 아래쪽을 살
피고 이번엔 침대의 아래쪽과 텔레비전이 놓인 테이블 아래쪽까지 샅샅이 살폈지
만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돈과 겨울옷들을 넣어둔 가방이 통째로 사라진 채였다.
“어이, 찾아봤어?”
문 밖에서 들리는 그 음성은 분명 3호실 남자의 목소리였다. 늘 목소리만 들었기
에 그의 목소리만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꾸할 기운도 없었
다.
그저 막막하고 어이가 없었다. 옷이야 그렇다 쳐도 남아있던 현금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진 채였다. 지금 남은 돈은 일당으로 받은 65000원이 전부였다.
허탈하고 황당한 이 상황에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자 문을 두드리던 남자가 다시
말을 건다.
“잠깐 들어갈게.”
라며 슬며시 문을 연 그가 안쪽을 바라보며 묻는다.
“역시 여기도 고장 났구나.”
‘역시’라는 말에 놀라 현관 쪽을 돌아보자 옆방 남자가 한숨을 내쉰다.
“1406호실에 있던 남자가 방문들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서 돈 되는 물건들하고 현
금들을 싹 쓸어갔어. 새벽에 방에 없던 사람들을 위주로 턴 모양인데 너랑 1405호
, 1408호, 1409호가 당했어. 잠금장치 다 고장 났을 거야.”
어쩌면 이렇게도 운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 헛헛한 웃음이 터졌다. 하필 매일 방
에 처박혀 있다 겨우 두 번째로 방을 비운 날 방을 털리다니. 이 정도면 끔찍할
정도다. 지난 두 달 간의 평화가 거짓인 것처럼 그 남자를 본 순간부터 다시 악몽
이 시작되고 있었다.
마치 그 남자가 몰고 온 듯 자신의 주변에 불운이 휘몰아치는 기분이었다.
“CCTV 확인했는데 네 방에서는 아예 가방을 통째로 들고나가던데. 지금 다른 사
람들 신고하러 가는데 같이 갈래?”
걱정스러운 듯, 조심스레 건네는 남자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현금이 모
두 사라진 건 끔찍하지만 괜히 그런 일로 신고를 하느라 경찰과 연락을 하고 오갈
생각은 없었다. 돈을 되찾지 못한다 해도 경찰에 자진으로 찾아가는 건 안 된다.
어제 검문은 겨우 넘겼다 해도, 그가 ‘서재현’이라는 이름으로 실종신고를 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실종신고도 문제지만 만약 그가 독한 마음을 먹고 자신을 절
도죄로라도 신고했다면 곤란해진다.
당장 그는 한국에 없더라도 어디든 흔적이나 인상을 남기는 건 좋지 않다. 그러니
까 돈은 포기해야 한다.
“괜찮아요. 가방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 안에 든 건 겨울옷들뿐이에요. 어차피 다
버릴 거니 상관없어요.”
담담한 그 답에 남자가 언뜻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쓴다.
“그래도 옷도 재산이잖아. 아무리 버릴 거라도, 가방도 있고.”
“그것도 버릴 거였어요. 괜찮아요.”
분명히 얼굴을 하얗게 질린 채인데도 괜찮다고 하는 자신을 그가 잠시 관찰하듯
바라보다 다시 묻는다.
“그럼, 다른 건 없어진 거 없어? 시계나 지갑, 핸드폰 같은 거.”
“지갑은 제가 갖고 나갔고 핸드폰하고 시계는 없어요. 옷만 달랑 들고 들어왔는
데 버릴 옷들만 들고 갔네요. 의류수거함에 넣으려고 안 쓰는 가방에 넣어둔 걸
들고 갔으니 상관없어요.”
“그래도 도난은 당한 거니 일단 신고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분명 그렇다. 누군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서 방을 뒤져 뭔가를 가져갔다면 그 물건
의 가격 여하를 떠나 도난 신고는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그럴 입장이 아
니었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피곤한데 좀 나가주시겠어요? 방금 들어와서요.”
흘깃 방안에 놓인 싸구려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하자 아직 아침 9시였다. 겨우
두 시간을 좀 넘게 자고 일어난 상태라 피곤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옆방 남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뒷걸음질친다.
“그래, 그럼. 자는데 깨워서 미안하다. 여기 방문 고장 났으니까 고쳐두는 게 좋
을 거야. 이런 건 자기가 고쳐야 돼.”
“네,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그 인사말에 그가 이상한 놈이네, 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는 방문을 닫고
복도로 사라진다. 탁하니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다시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다시
깨질 듯 울려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일이 또 이상한 방향에서 꼬이고 있었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막막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이없는 도난 사건에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입에 문 채 남은 돈을 확인하기 시작
했다.
정확히 68300원과 담배 7개비, 그리고 라이터와 지갑, 옷장에 몇 장 남은 옷가지
들이 남은 재산의 전부였다. 남아있던 것들을 확인한 순간 먼저 한숨이 터져나갔
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이틀 뒤면 고시원에 들어온 지 정확히 두 달 째가 된다. 신
원확인을 하지 않는 대신 선불로 돈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이틀 뒤에 돈을 지불
하지 않으면 방을 비워줘야 한다. 날이 따뜻해졌으니 노숙을 해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다른 곳으로 간다 해도 일단 어느 정도의 돈은 필요하다. 온몸이 아프고
저렸지만 지금은 파스를 붙이고 아프다고 뒹굴 여유도 없다.
당장 이틀 뒤부터 어디에서 잘 것인가가 하는 것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였다.
오늘과 내일 이틀 일을 하면 20만원 정도는 확보가 된다. 다행히 냉장고는 건들지
않아 당분간 먹을 것들은 충분하니 그 20만원으로 당장 고시원의 방값을 지불해야
한다. 아니, 지금 방이 문제가 아니다. 이쯤 된다면 이제 이 곳을 슬슬 떠나야 한
다. 그리고 앞으로는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갖고 있는 현금으로
어떻게 살아왔다지만 무일푼이 된 지금부터는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
당장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야 하지만 선뜻 움직일 수 없는 게 사람을 많이 만나
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의 근무는 안 된다. 사람들과 부딪치면 자꾸 이것저것
을 물어올 테고 거기에 대해 답하다 보면 어디선가 아는 사람들과 부딪치게 될지
도 모른다. 그러니 최대한 혼자 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 새벽에는 우유배달이나
신문배달을 하고 낮에는 사람이 없는 어딘가에서 일을 하는 쪽이 좋다. 일당이나
신분 확인 문제들을 따져본다면 낮에도 택배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게 나을지도 모
른다.
일단, 정신을 차려야 하기에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켜 선 채 쓰레기통에 넣어둔 벼
룩시장 신문을 꺼내 구인모집란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든 해야 한다. 지금은,
도망치고 숨어있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생존의 문제가 눈앞에 들이닥
쳐 있었다.
컵라면으로 대강 끼니를 때우고 벼룩시장의 구인란에 실린 기사들을 하나하나 확
인해갔다. 빵집 아르바이트와 게임방, 그리고 편의점과 공장 등의 아르바이트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당일 급여 지급 조건이나 사람들과 많이 부딪치지
않는 점, 그리고 신원확인이 복잡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역시나 택배물류센터 일이
최고였다.
수가 없다. 오늘, 내일.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틀간 물류센터의 아르바
이트를 한 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연 내일까지, 아니 당장 오늘 밤까지
자신의 몸이 버텨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몸 상태 같은 걸 따질 만한 여
유가 없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자고 일어나 일을 해야 한다. 보고 있던 벼룩시장을 바닥에 내
던진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절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간 자신이 얼마나 안
락하고 풍요롭게 살아왔는지, 이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 집으로 들어간 뒤 뭐 하나 불편한 거 없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더운
집안에서 어딜 가든 기사가 달린 차를 타고 명품 옷과 가방을 들고 어린 나이부터
신용카드를 들고 다녔다. 현금은 따로 받는 일이 없었지만 그 신용카드에서 원하
는 대로 얼마든지 찾아 쓸 수 있었다. 그 집 돈은 쓰고 싶지 않아 필요한 최소한
의 것들 외에는 산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 집에 있는 동안은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어쨌든 속은 썩어가도 몸은 편안했던 생활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
자신은 어리고 그리고 아직까지는 버틸 힘이 있기에 몸이 고돼도 속은 편한, 이
세계가 좋다.
욕심 부리지 말고, 그냥 편한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만 살 수 있다면 명
품 옷도 가방도 비싼 외제차도, 한도 무한의 신용카드도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저
택도 필요 없다.
불행히도, 그 남자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자신에겐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원하는 건 그가 줄 수 없고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이 줄 수 없
다. 그건 절대 어떻게 해도 타협할 수가 없는 문제이기에 그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거였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원하고 사랑한다 해도, 자신은 그에게 답해줄 수 없다. 아니,
그는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사랑해서는 안 된다.
절대, 그 비슷한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에게서 도망친 거니까.
오후 6시 30분. 전화를 하고 정확히 그 시간이 되자 무너져갈 것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방을 나섰다. 돈은 모두 챙겨 지갑에 넣었고 더는 방 안에 훔쳐갈 것도 없
기에 잠금쇠가 고장 난 문을 닫은 뒤 고시원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한 길을 걸어 약속된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나 어제와는 다른 얼굴들이 모여 있는 사무실 안에서 기다리다 오늘은
시간에 맞춰 온 아저씨를 따라 봉고차에 올라탔다. 벌써 세 번째라 제법 익숙해진
풍경을 바라보다 한순간 눈을 감았다. 물류센터는 시 외곽의 한산한 지역에 위치
해 시내에서는 40분 정도가 걸린다.
그러니까 잠깐, 자도 될 것 같았다. 온몸이 끊어져 내릴 것 같은 느낌에 창가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잠을 잔 것 같았다. 몸이 흔들리며 끼익거리는 큰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놀라 눈을 뜨려는 순간 몸 전체가 흔들렸다. 몸이 느낀 위기감에
눈을 뜨고 손을 뻗어 몸을 지탱할 뭔가를 잡으려는데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단단한 뭔가가 머리를 강타했다.
그리고 의식이 사라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세상은 검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뭔가가 왼쪽 이마에 닿아왔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 감촉에 인상을 쓰며 고
개를 움직이자 곧 그 차가운 감촉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번엔 부드러운 뭔가가 이
마 위로 번지더니, 까칠까칠한 뭔가가 이마에 닿았다. 그 낯선 감각에 왼쪽 눈썹
을 찌푸린 채 눈을 뜨려하자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셨어요?”
상냥하고 맑은, 처음 듣는 여자의 그 음성에 겨우 눈을 뜨자 흰 천장이 눈에 들어
왔다. 흔들리는 시야에 두 번 정도 눈을 감았다 뜨자 바로 위에서 분홍색의 카디
건을 걸친 간호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놀라 그녀를 바라보다 더듬거리며 물었다.
“……병원인가요?”
“네. 교통사고 때문에 실려 왔어요.”
“교통사고요?”
“네. 하지만 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상처는 가벼운 타박상뿐이고 검사결과
아무 문제없으니까요. 의식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깨셔서 다행이네요.”
방긋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네는 그녀의 말에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갔다. 고시원
에 도둑이 들어 현금이 모두 없어졌고, 그래서 저녁 때 그 사무실로 나가 차를 타
면서 잠깐 졸았는데 갑자기 몸이 흔들리며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는데, 그게 교통
사고 때문인 모양이었다.
하나하나 기억을 떠올린 순간 머리가 지끈 울려왔다. 그 통증에 인상을 쓰자 간호
사가 다시 묻는다.
“머리 아프세요?”
“……네, 조금.”
“큰 이상은 없지만 머리를 부딪쳤으니까…… 일단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병실을 빠져나간다. 가볍게 울려대는 두통에
손을 들어 머리를 누르며, 교통사고라니 같이 탄 사람들은 괜찮은 걸까, 하는 생
각을 떠올리던 중 문득 그녀의 뒷모습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병실
도 묘하게 친숙하다.
여느 병원과 다를 바 없는 하얀 타일이 나란히 발린 천장과 살짝 열린 창문, 그리
고 침대 반대편에 놓인 작은 냉장고와 편안해 보이는 소파, 그리고 테이블…… 그
리고…….
방심한 채 방을 돌아보던 중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
고 다시 한 번 병실을 돌아봤지만 분명, 그곳이었다. 바로 9개월 전 자신이 입원
해 있던 그 방이었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절대 잊었을 리가 없다. 한 달이나 갇혀 있던 이 방을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건. 분명히 잘못되었다.
몸을 감싸는 불길한 예감에 침대에서 내려서자 지독한 어지럼증이 몸을 덮쳐왔다.
극심한 현기증에 그대로 몸을 지탱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 내렸다. 어떻게든
일어서기 위해 침대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침대 아래쪽에 달린 네임택이
보였다.
설마, 설마 하는 기분에 뻣뻣해진 목을 돌려 그쪽을 바라보는 순간 정신이 얼얼해
졌다.
‘이세현.’
선명하게 적힌 그 이름에 몸이 가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써져 있었다. 마치 9개월 전
으로 돌아간 듯한 상황이었지만,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신
분증에 있는 이름이 그 자리에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이건 이상하다. 분명히 이상하다.
강한 충격에, 그리고 그보다 강한 공포감에 몸이 얼어붙어 갔다.
끔찍한 느낌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앉아 멍
하니 그 네임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 혹은 몇 분, 어쩌면 몇 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이 깨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뭐가 어떻게 되었든, 절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건 생각이라기보다는 본능의 강박이었다.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요란한 경고신호에 그대로 몸을 일으켜 오른쪽 팔뚝에 꽂힌
링거 바늘을 빼냈다. 무작정 바늘을 빼내고 피가 흐르는 부분을 휴지로 감싼 채
팔을 구부리고 옷장을 찾았다. 욕실 쪽에 있는 커다란 장을 열자 그 안에 곱게 개
켜져 있는 자신의 옷이 보였다.
분명히 그 차를 타던 순간 입고 있던 그 옷이었다. 망설일 여유도 없기에 서둘러
옷을 꺼내 갈아입고는 조심스레 병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병원의 구조는 질리도록 잘 알고 있기에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비상구로 달려
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그 안에서 누군가와 마주
칠까 비상구의 문을 열고 나가 미친 듯이 달려 내려갔다.
마음이 급해 몇 번이나 고꾸라질 뻔하면서 겨우 1층에 도착했다. 그 사이 전신에
서 땀이 비 오듯이 쏟아져 내리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잠시라도 멈춰 서 있을 여
유가 없었다. 이대로는 또다시 제자리라는 생각에 쫓기듯 비상구를 나와 건물의
지상 주차장과 연결된 뒷문으로 빠져나가자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려왔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그 빛에 또다시 눈이 아리며 강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분명히
봄이었는데 지금은 마치 여름 같다. 햇살이 너무 뜨거웠다.
피부마저 타들어가는 듯한 감각에 잠시 휘청거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
며 병원의 후문으로 달려갔다.
빈소와 연결된 후문 쪽으로 나가자 택시 정류장에 멈춰서 있는 택시가 보였다. 망
설임 없이 멈춰 선 택시에 올라타자 기사가 태연하게 묻는다.
“어디로요?”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던 기사의 물음에 갑자기 멍해졌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갈 곳 따윈 없다. 자신에겐, 이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대로 잠시 멍하니 있자 기사가 이상하다는 듯 뒤를 돌
아보다 눈살을 찌푸린다.
“학생, 팔에서 피나는데?”
그 말에 천천히 오른팔을 내려다보자 누르고 있던 휴지는 어느덧 사라지고 바늘이
꽂혔던 자리에서 흐른 가느다란 핏줄기가 손목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낮에 오른팔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은 어
떻게 봐도 수상쩍었다. 아니, 수상함을 넘어 괴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이상한 그 모습에 기사가 인상을 쓰며 다시 묻는다.
“학생, 차비는 있는 거야?”
기괴한 그 상황에서 너무나 현실적인 기사의 물음에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봤다.
지금 자신은 그 흔한 핸드폰도 손에 들지 않은 채 청바지와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였다. 분명히 지갑은 입고 있던 재킷에 넣었었다. 하지만 그 재킷은 옷장 안에
없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둔한 움직임으로 주머니를 뒤져봤지만 주머니에서는 동전 몇
개만이 나올 뿐 지폐는 없었다. 그조차도 너무나 현실감이 없어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멍하니 있자 기사가 혀를 찬다.
“내려. 사고치고 도망친 거면 빨리 돌아가!”
문제 생기는 건 질색이라는 듯 위협을 하듯 소리를 치는 기사의 목소리에 다시 차
문을 열고 택시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아주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다.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지금 내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왔는데 공포에 질려 낯선 병실을 자신이 있던 그 병실로
착각한 게 아닐까.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지만, 불행히도 그건 자신의 착각도
악몽도 아니었다.
눈에 익은 약국과 편의점, 그리고 익숙한 건물의 형태들. 이곳은 자신이 한 달간
지냈었고, 그 후로도 지겹도록 드나들었던 그 병원이었다. 바로 건너편에 보이는
약국은 자신이 늘 약을 타가던 약국이었고, 그 옆의 편의점은 가끔 음료수를 산다
는 핑계로 들러 현금을 찾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백화점 건
물은 자신이 늘 쇼핑을 하던 그곳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현실이다. ‘서재현’이 드나들던 그 병원에 ‘이세현’이 와서
입원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이건 악몽도 아니고 착각도 아니다. 명백한 현실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생각하기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리가, 뇌의 명령보
다도 먼저 빠르게 내달음질친다.
서재현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머리가 아닌 육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건, 살기 위한 본능이었다.
거리를 돌고 돌아, 걸음을 멈췄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직후였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과 어지럼증에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주변을 돌아보자 퇴근시간인
듯 길거리에 사람이 가득했다. 얇은 옷차림으로 빠르게 걷는 사람들과 어두운 도
로를 달리는 차들. 그리고 화려한 간판들까지. 고개를 들어 도로표지판을 확인해
보니 아직 서울이었다. 몇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고 달려도 여전히 시끄러운 도심
이었다.
순간 눈앞이 막막해졌다. 가야 하는데, 어디로든 멀리로 도망을 쳐야 하는데 몇
시간을 달려도 여전히 이 자리다.
아득한 기분에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자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그 힘에 밀려 휘청거리자 흘깃 이쪽을 보던 남자가 멈칫하는 기색
이 느껴졌다. 안 좋은 기색에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자 남자가 말을 건다.
“저기요, 팔에 피…….”
그 팔에 오른팔을 내려보니 흘러내린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런 건 좋지 않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다. 그제야 지금 자신이 도망을 치는 중이라는 사실이 떠
올랐다. 공황 상태에 빠져 무작정 달려오기는 했지만 지금은 최대한 눈에 띄어서
는 안 된다. 바로 서울 시내에서 잡히는 건 순식간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거의 달리듯 그 블록을 벗어나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는 적당히
, 눈에 보이는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의 건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았다. 그리고
먼저 물을 틀고 피를 닦아냈다. 다행히, 피는 멈춘 채였다. 말라붙어 잘 흘러내리
지 않는 핏자국을 찬물과 비누로 겨우 닦아낸 뒤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땀에 젖어 끈적거리고 답답한 얼굴을 찬물로 닦아낸 뒤 고개를 들어 세면대를 바
라보자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과는 또 다른, 지치고 지친 환
자 같은 얼굴이 거울 속에 드러난다. 그 창백한 얼굴을 보며 격려하듯 말을 건넸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 생각을 해, 서재현. 생각이라는 걸 해.”
우선, 교통사고가 난 건 기억이 났다. 해가 진 후의 국도에서의 교통사고는 이상
할 것도 없다. 차가 흔들리던 걸로 봐서는 큰 사고는 아니다. 아마 갑자기 끼어든
차량을 피하려다 급히 핸들을 돌려 차가 미끄러졌을 수도 있다. 운전석은 몰라도
뒷좌석에 탄 사람들은 모두 안전벨트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자신은 특히나 자던
중이었으니 대처가 늦어 상처가 컸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다쳤으니 당연히 앰뷸런스가 왔을 테고 사고가 나서 병원에 실려 갔는데
하필 실려 간 병원이 그곳이었을 수도 있다. 분명히 ‘이세현’이라는 이름으로
입원이 되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 병원의 원장과 정신과 의사, 그리고 신경의학
과와 내과 의사들까지 모두 자신을 알고 있지만 응급실로 들어와 옮겨졌을 테니,
아무도 자신을 보지 못했고 지갑에 있던 신분증으로 신원 확인을 했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애써 말도 안 되는 사실들을 끼워 맞췄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 낮는
다. 그 국도에서 이 병원까지는 적어도 1시간이 넘는 거리다. 애초에 서울과 연결
된 국도도 아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병원으로 실려왔느냐 하는 것과 병실로 옮
길 때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한 것, 그리고 가벼운 교통사고 환자를 왜 일인실에
입원시켰느냐 하는 건 어떻게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하필, 자신이 9개
월 전 입원했던 바로 그 방에 말이다.
갑자기 심장이 지끈 울려왔다.
아무리 자신을 안심시키려 되도 않는 말들을 갖다 붙여도 어딘가에 구멍이 생긴다
. 어떻게 끼워 맞춰도 맞지 않는다.
역시나, 들킨 걸까?
드디어 그가 자신을 찾아낸 걸까?
또다시 현기증이 났다. 다리가 떨려오고 머리가 울려오는 기분에 세면대를 잡고
몸을 지탱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또 다시 자신에게 같은 말을 던
졌다.
“괜찮아, 서재현. 그 사람은 여기 없어. 그러니까, 당분간은 괜찮아.”
어쨌든, 그가 푼 사람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잡았다 해도 그는 지금 한국에 없다.
서진도 그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괜찮다. 아직은 뭔가를 할 시간
이 있다.
그러니까 우선 먼 곳으로 가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하지만 ‘어떻게’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 가진 돈은 주머니에 있는 동전들
뿐이다. 버스도, 지하철도 탈 수 없다. 도보로는 아무리 달려도 곧 따라잡히고 만
다.
막막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울려왔다. 단지 의지만으로 도망을 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어디로든 도망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혹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
다.
세면대를 세게 쥔 채 침착하게, 다시 한 번 상황을 돌아봤다. 패닉 상태라 제대로
된 생각을 하는 건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생각을 쥐어짜지 않으면 모든 게 끝장나
버린다.
지금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상명이는 안 된다. 이미 감시를 받고 있을 것이다. 선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집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윤진경…….”
그 여자라면, 어쩌면 어떻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온 뒤 해외로 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국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뭔가를 해줄 수도 있다.
갑자기 떠오른 그녀의 존재에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들었다. 해외로 갔다 해
도 재원이가 있으니 아마 핸드폰을 로밍해 갔을 것이다. 그럼 우선 통화가 될 가
능성은 높다. 지금 그녀도 결국 그에게 내쫓긴 상태라 독이 올랐을 테니 자신을
도와줄 수도 있다. 설사 그녀가 도와주지 않는다 해도, 지금은 그녀에게 걸어볼
수밖에 없다. 이미, 그에게 자신의 위치는 들통이 났을 테니 그 정도 위험은 감수
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정한 뒤 핸드타월을 빼들고 젖은 얼굴과 팔을 닦아냈다. 그리고 화장실을
빠져나와 건물 1층 로비 쪽을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공중전화박스는 보이지 않았
다. 서울 시내의 공중전화기들은 모두 사라져 지하철 역내나 환승편이 많은 버스
정류장 근방에나 한두 대가 놓여 있을 뿐이라 건물 내에서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까 지하철역으로 가야 한다. 혹은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 쪽의 버스정류장을
찾아야 한다.
잠시 쉬던 사이 슬슬 무거워지기 시작한 다리를 질질 끌며 지하철역을 찾기 시작
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도로 위의 표지판을 보며 건물과
자동차, 그리고 저 먼 거리에서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헤집고 걷던 중,
저 멀리로 지하철역의 입구가 보였다. 겨우 찾았다 안도하는 순간 바로 그 입구
옆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지하철역과 이어져 유독 붐비는 그 정류장의
옆에는 두 개의 공중전화박스가 있었다. 텅 빈 채였지만 분명히, 공중전화기가 있
었다.
그걸 발견하는 즉시 걸음을 서둘렀다. 이젠 감각조차 둔해진 다리를 간신히 질질
끌고 막 도착한 버스로 달려드는 사람들 틈을 간신히 헤치고 공중전화박스에 도착
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왼손에 든 채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동전 투입구에 넣었다.
동전이 들어가자 철컥하며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뚜- 하는 신호음이
울려온다.
그 소리에 오른손을 들어 번호판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겨우 두 번
정도 전화를 걸었던 번호라 정확히 그 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필사적으
로 기억을 끌어내 더듬더듬 버튼을 눌렀다. 손이 기억하고 있는 버튼의 위치를 더
듬어 하나하나 버튼을 누르던 중, 정확히 열한 번째의 버튼을 누른 순간 통화 연
결음이 울려왔다.
로밍을 했구나, 하는 안도감과 동시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이건 모험이었다. 통화가 연결되었다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다. 그녀가 자신이
부탁을 들어준다면 다행이지만 안 들어준다면 서둘러 전화를 끊고 도망쳐야 한다.
그리고 설사 도와준다 하더라도 그녀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 그녀가 그에게 자
신의 위치를 알려줄 수도 있고 자신을 함정에 빠트릴 수도 있다. 그걸 뻔히 알면
서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지금 자신을 도와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사람
이 그녀뿐이라는 것 때문이 반, 그리고 그가 지금 한국에 없다는 이유가 반이었다
.
그 사람이 없는 동안은 설사 추적을 당한다 해도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제정신을
갖고 도망칠 만한 여유가 있으니까, 만용을 부릴 수 있다. 그가 한국에 없는 동안
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가 오기 전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더 멀리, 더 깊숙이 도망쳐야
한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계속되는 통화 연결음에 초조해져 오른손의 엄지손톱을 살짝 물어뜯는 순간,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거의 1년 전 이맘때 즈음, 지금과 꼭 같은 일이 있었
다. 그는 출장 중이었고 자신은 그 사이 도망쳐 전국을 헤매고 다녔었다. 분명히,
그때도 그랬었다. 그가 한국에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잠시
방심을 해 삼촌에게 전화를 했었다.
분명 그때와 지금 상황은 다르지만 흘러가는 패턴은 유사하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은 그가 국내에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모험을 하려하고 있었다.
과정은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상황과 사고의 흐름에 지금까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
던 의문이 순간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어째서 지갑은 사라졌는데, 동전은 남겨둔 걸까? 분명히 자신은 동전도 재킷의 안
쪽 주머니에 넣었었다. 몸을 움직이게 되면 동전 같은 걸 흘리는 일이 잦아 담뱃
갑과 라이터, 그리고 지갑과 동전은 모두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왜 이 동전만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었던 걸까?
그런 의문을 떠올린 순간 뇌가 멈췄다.
모든 게 일 년 전 그때와 같았다. 마치 그 상황에 갇혀버린 듯, 혹은 그 상황이
그대로 되풀이 되는 듯, 시작은 다르지만 자신의 사고 과정도 행동도, 그때와 유
사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새 도망을 친다. 그리고 여기저기를 헤매다 갑작스러운 불안에
전화기를 든다.
그리고 그 뒤는…….
「숨바꼭질은 재미있었어?」
수화부를 통해, 바로 귓가에서 울려온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수화기를 쥔 손이 와
들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몇 달 만인데도,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게 언제인지 아득한데도 그 음성
이 누구의 것인지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무나 강렬하게 각인된 목소리
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떨쳐내려 애를 쓰고 발악을 해도, 매일 악몽 속에서 듣는 그의 그 목소리
만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귓가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이제 슬슬 놀이를 끝내야지. 이것도 꽤 재미있긴 했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놀이
라도 길어지면 지루해져.」
수화부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얼어붙어 있던 사이 불현듯 왼손에 들고 있던
수화기가 귀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레 걸쇠에 걸리며 찰랑-하는 소
리와 함께 동전이 떨어져내린다.
요란한 그 소리와 동시에 시끄러운 차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모두 멎어버렸
다. 시간이 멈춘 듯, 그렇게 모든 소음이 끊겼다. 온 세상이 죽어버린 듯 고요했
다.
그 무서울 정도의 적막 속에서, 수화기가 아닌 현실에서,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
온다.
“이쯤이면 충분히 쉬고, 충분히 즐겼지?”
성량이 풍부해 윤기가 흐르는 듯 우아한 음성, 그리고 정확하면서도 느리고 부드
러운 말투.
바로 귓가에서 울려오는 그 음성에 처음에는 자신이 환청을 듣는 거라 생각했다.
아니면 그 고시원 방에 누워 또 악몽을 꾸는 거라 여겼다. 언제나 꾸던 그 꿈처럼
여기저기를 도망 다니다 그와 마주치는 악몽을 꾸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꿈도 환청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듯 너무나 익숙한 손길이
뺨에 닿아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가볍게 뺨을 쓸어내린다.
“자,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방안은 고요했다. 3개월 반 만에 다시 돌아온 별채는, 외관도 그 내부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리고 창을 통해 훤히 내다보이는 후원의 풍경 역시
, 시간이 멈춘 듯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 변함없는 풍경 속에서 재현은 멍하니 어두운 방 안의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잡아 채이듯 강제로 차에 태워져 별채로 돌아온 후, 완전히 방치되어 있었다. 그
는 본채 앞에서 내린 채였고 자신만 이 별채로 돌아와 있었다.
이곳까지 그에게 이끌려 오면서도 반항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더는 바
동거릴 기운도 없어 그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끌려와 방 안에 처박혀 있었다.
그와 함께 차를 타고 오면서 처절하게 통감했다.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건 자신의
착각이었다. 그를 완전히 속여 넘기고 성공했다고 생각한 것 역시 오만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계속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
었던 거다. 손만 대지 않았을 뿐, 분명 자신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도망치나, 그리고 어디서 지쳐 나가떨어지나, 계속해서 관찰하며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다 모습을 드러낸 거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 없어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망쳤다는 건 자신의 착
각일 뿐, 자신은 한 번도 그의 손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걸, 그가 다가선 순
간 그냥 알아채버렸다. 어쩌면 한순간은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또 다
시 그에게 붙잡힌 거다.
두 번, 세 번, 네 번을 도망친다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떻게 해도
, 자신은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런 확신이 들
었다.
멍하니 어두운 방의 한 귀퉁이에 맥없이 기댄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중 저 멀
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하면서도 가벼운, 거의 소음을 느낄 수 없는
그 걸음 소리에 그가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허탈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더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뿐
이다.
멍하니 그렇게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던 사이 곧 걸음이 멈추고 문이
열린다. 그리고 갑자기 어둡던 방 안으로 눈이 부신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 빛이
아찔해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사이 느릿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의 목소리가 울
려왔다.
“오랜만이지?”
가볍게, 마치 며칠 못 본 사람들에게 하듯 던지는 인사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재킷을 벗어 침대 위로 내던진 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이쪽
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무심한 투로 말을 이어간다.
“머리를 꽤 잘 굴렸어. 그건 칭찬해주지. 설마 그렇게 허를 찔릴 줄은, 나도 미
처 예상 못 했으니까. 찾는 데에도 꽤 애를 먹었으니 그것도 칭찬해줄게. 문제는
…… 그 덕에 내 머리에 좀 이상이 생겼단 말이지.”
느릿한 움직임으로 입고 있던 베스트의 단추를 풀어 벗어던진 뒤, 손목시계를 풀
고 커프스를 떼어낸 그가 어이없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띤 채 느긋하게 말을 이어
간다.
“그 덜 떨어진 정신과 의사 진단으로는 IED(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
간헐적 폭발성 장애)라고 하더군. 나름 누른다고 누르고 있었는데, 순간순간 폭발
할 때가 있었거든. 차 몇 대 박살낸 정도로 IED라니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는
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더군. 널 찾아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네 목을 부러뜨
릴까, 아니면 아예 칼로 난도질을 해버릴까만 고민했거든. 그러다 사무실 안을 엉
망으로 만들고 난리를 치다 결국 심장발작까지 일으켜서 실려 가고…… 그동안 재
미있는 일들이 많았어. 그래서 조금 더 지켜보면서 기다리기로 한 거야. 겨우 찾
아내서 죽여 버리면 너무 허무하니까.”
역시나, 그 말은 이미 찾아낸 뒤 지켜보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기가 막힌 그의 능
력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바로 앞까지 다가와 한쪽 무릎을 굽
혀 앞에 앉는다. 그리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시선을 맞춰온다.
그 손길에도 무감각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자 그가 입가에서 웃음을 거둔 채
냉랭한 얼굴로 되묻는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지?”
“…….”
“지난 석 달 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거든. 찾는 즉시
죽여 버릴까 하다가도 네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면 또 가슴이 너무 아파서 쓰
러지고…… 그렇다고 얌전히 살려두자니 내가 이러다 진짜 돌아버릴 것 같고……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지금은 내가 좀 미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 네가 말해봐. 넌 영리한 아이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네가 생각해 봐.”
나긋한 목소리, 그리고 조용조용한 말투.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분
명한 살의와 증오였다. 지금 그는 그에게 지난 석 달 반의 시간이 어떠했는지 토
로하며, 고통과 회한을 담아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뒤를 따를까,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까, 언제 그가 자신의 앞에 나타날까
조마조마해하며 복도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길 반복했다. 그렇게 긴 불면의 밤을 두 달 가까이 보냈고 겨우 자신을 안정시
킨 후로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아 그 좁은 방 밖으로 나오는 데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그 초조함이 얼마나 컸는지 막상 그를 본 순간에는 차라리 마음이 편하
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니, 비긴 거다.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폭발장애를 떠안았더라도 결국 그와 자
신은 비긴 거다. 한쪽이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다.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기에 여전히 담담히, 아무 감
정 없는 눈으로 그를 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다.
“말해봐. 서재현. 널 어떻게 할까? 응?”
보채는 듯한 그의 물음에 겨우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버려.”
피로함 때문인지,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던 탓인지 팍팍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입
술을 통해 흘렀다. 그 거칠고 메마른 음성에 그의 눈빛이 조금 아픈 듯 일렁인다.
“그렇게라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단 말이지…….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아예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너 같은
걸 데려오지 않았다면 마주치지도 않았을 텐데. 별의 별 가정에 후회를 다 해봐도
이미 일은 벌어진 후야. 이제 와 되돌릴 수도 없고 없던 일로 넘길 수도 없으니까
…… 그대로 지고 가는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버리라고 하잖아. 있었던 일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라도 끝내. 당신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그게 좋아.”
그 외엔 어떤 방법도 없다고 그에게 같은 답을 반복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가 눈초리를 접으며 웃는다.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널 죽이고 싶어 하는 거니까.”
순간 머리 뒤쪽으로 강한 충격이 와 닿았다. 부지불식간에, 몸을 덮친 충격에 몸
을 가누지 못한 채 휘청거리는 사이 머리카락을 쥔 손이 우악스레 몸을 패대기쳤
다.
연이은 충격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멍멍한 머리에 전신을 바
들바들 떨고 있던 사이 이번엔 가슴 쪽으로 엄청난 통증이 번져왔다. 폐를 걷어차
인 듯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듯한
충격에 필사적으로 숨을 고르던 중 목이 잡혔다. 그리고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려
졌다. 목을 내리누르는 손길에 더욱 숨을 내쉬기가 버거워 헐떡거리고 있자 흔들
리는 시야 속으로 그의 얼굴이 가득 차 왔다. 얼어붙은 듯 더욱 깊고 차가워 보이
지만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설핏 웃음이 나왔다.
심장은 터질 듯 아파오고 숨도 제대로 내쉴 수 없는 와중에도, 그냥 웃음이 나왔
다.
여전히 냉랭하고 감정을 읽기 힘든 눈동자였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의 감정이 보인
다. 그가 상처 받았다는 게, 그래서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게, 선명
히 보였다.
그래서 기뻤다. 이 남자가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래서 그 상처를 어떻게 해
야 할지를 몰라 이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이게 맞는 거다. 그래야 계산이 맞아떨어진다. 그도 다치고 아파야, 계산이 맞는
다.
“넌 이게 재미있는 모양이지?”
낮게 깔린,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는 그 물음에 겨우 답해주었다.
“그……래. 재미……있어.”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주제에 킥킥거리며 겨우 겨우 말을 이어가자 그가 천
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위로하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손길과는 전혀 다른 냉랭한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진짜 널 어떻게 해야 할까?”
“……화가 풀릴 때까지 패. 그리고…… 버려. 어차피 쓰레기니까.”
겨우 진정된 호흡에 끊어질 듯 가느다란 목소리로 답을 마친 순간 머리카락을 쓰
다듬어주던 그의 손이 이번엔 뺨을 후려쳤다. 악의가 담긴 그 힘에 눈앞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순식간에 뺨으로 번져가는 열기와 함께 눈가와 입술이 아려왔다.
입술이 찢어지고 눈을 다친 듯 얻어맞은 쪽의 눈이 얼얼했다.
아프다. 아리다. 그리고 슬펐다.
좋지 않은 감정들과 통증이 순식간에 터져 나올 듯 목구멍 위까지 꽉 차올라 있었
다.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이상하고 너무 무거운
그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몸을 웅크린 채 고통을 삼키며 웃고 있자
따뜻한 그의 손길이 얼얼한 뺨을 매만져온다. 그리고 작게 혀를 찬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됐군.”
왼쪽 눈이 잘 떠지지 않아 오른쪽 눈만을 간신히 뜬 채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여
전히 얼음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명령하듯 말한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
“그럼, 다 용서해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해봐.”
냉랭한 얼굴로, 마치 위협하듯 말을 이어가는 그의 태도에 이젠 서글픈 웃음이 흘
렀다. 말투나 표정은 더없이 사납지만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마디에는 초조함
이 배어 있었다. 그는 모르고 있지만 자신에겐 그게 보였다.
지금, 이 남자는 불안한 거다. 그래서 명확한 답을 원하는 거다. 설사 거짓이라
해도 증명을 원하고 있는 거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가 원하는 답을 내줄 수 없었다.
만약 9개월 전이라면 그 정도의 거짓말 같은 건 얼마든지 해줬을 것이다. 그 따위
한 마디, 감정이 없어도 내뱉는 건 쉬우니까, 그렇게라도 편안해진다면 무슨 말이
든지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 말만은 할 수 없을 것이
다.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에 먹혀버린 이상 더는 그 말을 내뱉어선 안 된다.
그러니까…….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짤막하고 단호한 그 말에 그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게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었
지만 분명히 스쳐간 그 혼란에 불쌍하다는 듯, 가여워 미치겠다는 듯 그를 바라보
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불쌍하게…… 그걸 진짜 믿고 싶었던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할 리가 없잖아.
아버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말을 마친 순간 흔들리던 그의 눈동
자가 굳어가기 시작했다. 손을 델 수도 없이 차갑게 얼어가는 그 시선에 그를 바
라보며 즐거운 듯 웃어 보였다. 도발하듯, 얼마든지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그를
비웃어주었다.
그 웃음에 그의 깊고 진한 눈동자 위로 번들거리는 빛이 흐르기 시작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남자의 눈빛은 오싹할 정도로 아름답고 찬란했다. 어떤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때보다도 광기에 찬 남자의 얼굴은 매혹적이었다. 혼이 매료될 듯 깊은 그
눈을 응시하며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고 있자 다시 한 번 날카로운 격통이 뺨을 스
쳤다.
이번에는 좀 더 강했다. 입안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더 이상은 눈을 뜨고 있을 수
도 없었다.
고통에 숨을 멈춘 채 본능적으로 몸을 구부리자 이번엔 머리채를 잡힌 채 다시 한
번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머리와 어깨를 시작으로 전신으로 퍼져가는 통증이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여유도 없어 그대로 늘어져 있자 또다시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반항 한 번 못 해보고 속수무책으로 그의 손에 끌려 또 한 번 침대 위로 내팽개쳐
졌다.
이번엔 다행히 푹신한 매트리스 위였지만 그대로 계속되는 충격에 머리가 울려왔
다. 뇌가 흔들리며 머릿속이 빙빙 돈다. 이대로 머리가 깨져버리지 않을까 두려울
정도로, 머릿속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몸 전체가 배 위에서 요동을 치는 듯한 느낌에 머리를 감싸 안던 중 문득 피부 위
로 서늘한 공기가 닿아왔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가 아닌 허벅지 안쪽의 은밀한 부
위를 스치는 한기에 몸이 떨려왔다. 설마 하는 생각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모으려 애를 썼지만 그조차도 간단히 그의 손에 짓눌리고 말았다.
어느새 옷은 사라진 채였다. 아주 잠깐 어지럼증을 느낀 사이 피부를 싸고 있던
옷감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맨살에 닿아오는 이불의 감촉에 경악하던 사이, 허벅지 안쪽의 맨살을 누르는 그
의 손에 강제로 다리가 벌려졌다. 훤히 치부를 내보이는 자세에 그에게서 벗어나
려 몸부림을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전신을 짓눌러 오는 그의 무게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기껏해야 허리를 비틀며 발버둥을 치는 사이, 어느 순간 다리 사이로 섬
뜩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겁고 강한 힘으로, 엉덩이 골 사이를 무작정 눌러오는 건 뜨거운 살덩어리였다.
너무나 잘 아는 그 촉감에 몸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그 살덩이가 주던 쾌락을 기억하고 있다. 그 단단하고 난폭한 성기가 몸속으로 들
어오는 순간 느껴지는 전율을, 그리고 몸 속 깊은 곳을 찔러댈 때 느끼던 아득해
질 정도의 쾌감을, 몸은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은 그 살덩이의
감촉만으로도 다시 한 번 절정의 쾌락을 기대하며 몸을 들쑤시고 있었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빠르다. 그리고 몸 역시 본능의 명령에 더 충실하다.
그걸 잘 알고 있다. 늘 이런 식으로 무너져 내렸기에 싫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
그게 너무 싫었다. 싸구려 창녀처럼, 그의 성기가 피부 위로 닿은 것만으로도 기
대에 들떠 뜨거워지는 몸이 혐오스러웠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흥분하려는 몸을 어떻게든 제어하려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자, 방금 전 그를 도발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모습에 허벅지
를 잡아 누르던 그가 잇새로 나지막한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단단하게 발기한 성
기로 엉덩이 골 사이를 느긋하게 문지른다. 회음부를 지나 엉덩이 골 사이로 천천
히 움직이는 살덩이에 소름이 끼쳐왔다.
당장이라도 아래쪽을 꿰뚫을 듯 위협하는 그 흉기에 아랫배로 피가 몰린다.
어서, 지금 당장 저 물건이 자신의 아래쪽을 쑤셔주길 기다리는 몸에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이걸 찔러 넣어주길 바라지?”
회음부 안쪽으로 성기를 찔러올리며 속삭이는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
시 피부 위를 스친 것뿐인데도 몇 달이나 방치된 몸은 굶주린 듯 그의 것을 원하
고 있었다.
“재미있지 않아? 아버지 물건을 뒤에 넣고 헐떡거리는 아들이라니. 너무 추잡해
서 삼류 포르노 소재로도 아까울 정도야.”
수치심을 부추기는 그 말에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뭐, 좋아. 네 거짓말에 상처 받는 것도 이젠 슬슬 익숙해져 가니까. 하지만……
그래도 화는 난단 말이지. 지금 내가 또 돌아버린 것 같거든?”
그 말과 동시에 아래쪽이 찔려왔다. 그 격렬한 통증에 눈앞이 순식간에 검게 변하
다 이내 새하얀 불빛들이 튀어 올랐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그 통증에 숨이 막혀
비명도 내지를 수가 없었다.
그만하라고, 너무 아프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안쪽 깊숙이에 들어왔
던 그게 거칠게 안쪽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깊숙이 들어와 빠르게 빠져나간다. 살갗을 찢어내고 내벽을 도려내는 그 흉기에
전신이 얼어붙어간다. 칼로 아랫배를 난도질당하고 있는 듯했다. 감내하기 힘든
끔찍한 고통에 숨을 멈춘 순간 다시 한 번 몸 속 깊숙한 부분까지 찔려왔다. 깊고
강하게 박혀온 그것에 다리 사이가 찢겨져나가는 듯했다.
내장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에 시트를 세게 쥔 채 헐떡이며 그에게 애원했다.
“그만……. 하지 마. 하지…….”
끊어질 듯 가느다란 음성으로 애원했지만 그에겐 그 음성이 닿지 않았다. 안쪽을
쑤셔대는 성기는 멈추지 않았고, 그가 안쪽을 쳐올릴 때마다 뼈가 부서져 내리는
듯한 격통이 흐른다. 그와 함께 입술 사이로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갔다.
뜨겁고 아프다. 상상을 초월한 그 통증에 숨을 멈추고 있던 사이 몸속으로 들어온
성기가 정확히 한 부분을 찔러올린다.
예리한 그 움직임에 눈앞이 하얗게 변해가며 통증보다 더 강한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전율과도 같은 쾌감에 몸이 휜다. 그리고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했
다.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남자였다. 어디를 만지고, 어디를 찌르면 느끼
는지, 그리고 쾌감에 젖은 순간 자신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
다.
비명을 내지르던 몸이 순식간에 희열에 들뜨는 모습에 그가 다시 한 번 그 부분을
쳐올린다.
“아윽.”
고통이 쾌감으로 변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전신이 타들어갈 듯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져간다. 어느새 발기한 성기의 끝에서는 애액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좁은
내벽은 수축하듯 그의 성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몸 안이 욱신거리며 아랫배가 울려댄다.
조금 더, 좀 더 강하게, 더 깊이 찔러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성기를 세게 조여 대
자 그가 허리를 멈춘 채 웃는다.
“이러면서, ‘아버지’라고?”
방금 전 그에게 했던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그가 이번엔 느긋하게 그 부분을
문질러댄다. 간질이는 듯, 일부러 애를 태우는 그 움직임에 몸이 달아올랐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반쯤 정신이 나간 채 그의 아랫배 위로 성기를 문지르며 졸
라대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의 꼴이 얼마나 우습고 천박해 보이는지 따위는 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섬세하게 몸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과 슬금슬금 그 부위를 건드리는 성기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어리광을 부리듯 몸을 비벼댔다. 머리와는 전혀 달리,
더 해달라고 조르는 자신의 육체를 그가 비웃는다.
“불쌍하게…… 어쩌다 이렇게 음란해진 거지? 수치도 모르고 아버지한테 덤벼들
다니. 창녀들도 너보다는 참을성이 있을걸.”
그 말과 함께 그가 허리를 뺀다. 안쪽에서 빠져나가려는 그의 움직임에 허리를 밀
어붙인 채 그의 성기를 잡아끌 듯 내벽을 수축시키자 그가 귓가를 핥으며 속삭인
다.
“다시 넣어주길 바라면 사랑한다고 말해봐. 그럼, 얼마든지 쑤셔줄 테니까. 기절
할 때까지 원하는 걸 줄게.”
달콤한 독처럼 강렬하고 빠르게 귓가에서 퍼져가는 그의 속삭임에 몽롱하던 정신
이 깨었다.
그건 절대 말할 수 없는 거였다. 설사 자신이 죽는다 해도, 다시는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 해도 같은 실수를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기에 이를 악문
채 버텼다. 이미 몸속에서 퍼지기 시작한 열기에 뼛속까지 저릿하며 쑤셔왔지만
이 순간의 쾌감을 위해 내뱉기엔 그 말은 너무 무거웠다.
또다시 그 저주에 빠져들 수는 없다.
필사적으로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돌리자 반쯤 빠져나갔던 성기가 다시 푹 하고
안으로 꽂혀온다. 안타깝게 저려오는 낮은 쾌락에 그의 성기를 다시 세게 조이자
그가 다시 한 번 얕게 그 부분을 누른다. 안타까운 그 움직임에 몸이 움찔하며 그
의 어깨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이성과 본능의 격렬한 싸움에서 의식을 놓지 않으려 이를 악다문 채 그를 끌어안
고 있자 느리게 움직이던 그의 성기가 다시 한 번 깊이 안으로 파고든다. 여린 점
막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예민한 부분을 도려내는 듯 찔러오는 그 감각에 몸이 튀
어 오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허리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해달라는 듯 몸을 비
틀며 그의 것을 더 깊게 넣으려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아 조이자 그가 낮은 신음
을 토해낸다. 그도 더는 버티기 힘든 듯 몸속에 있는 물건이 요동을 친다.
“해줘. 어서……. 빨리…….”
당장 숨이 넘어갈 듯 가느다란 음성으로 띄엄띄엄,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단어들을
반복하며 애원하자 그의 어깨가 잠시 굳어진다. 그리고 이내 낮게 욕설을 내뱉는
다.
“……빌어먹을 자식.”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과 함께 그가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고 강
하게,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찔러올리는 그의 움직임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울리던
쾌감에 뇌리를 쳐댄다.
전신이 욱신거리며 뜨거운 열기가 몸을 덮어간다. 그가 안쪽을 쳐올릴 때마다 머
리가 하얗게 비어갔다.
무리한 삽입에 아래쪽이 찢어진 듯 피 냄새가 퍼졌지만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
았다. 진한 피 냄새에 오히려 더 흥분이 돼 마음껏 교성을 내질렀다.
방 안을 울려대는 비명 같은 교성과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더욱 쾌감을 부추겨간다
.
“아, 아앗!”
점점 절정으로 향해가는 쾌락에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운 채 높은 비명을 내지르
자 한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추며 몸 속 깊이로 따뜻한 체액이 퍼져나간다. 내벽을
적셔가는 그 감각에 자신 역시 그의 아랫배 위로 정액을 토해냈다.
사정 후의 나른함에 그대로 침대 위로 늘어지자 그가 깊이 입을 맞춰온다. 혀로
치열을 가르며 입안을 헤집는 그의 키스에 머리가 몽롱해졌다.
달콤하고 상냥한 키스였다. 그러고 보니 늘 키스만은 더없이 상냥하게 해주던 남
자였다. 입술을 가볍게 문대며 빨아들이고 호흡을 뒤섞으며 상냥하게 혀를 얽어온
다. 관계를 가질 때에는 과격할 정도로 몰아치던 남자가 관계가 끝난 후에는 세상
에서 가장 다정한 남자가 된다.
이상한 사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도저히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남자였다.
가끔은 잔인하고 냉혹하고, 또 가끔은 너무나 다정하고, 또 가끔은 가엾기도 하고
, 그러다가도 밉고 증오스러운, 너무 이상한 사람이었다.
또다시 가슴을 내리누르는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아팠
다. 둔하게 울리는 그 통증을 참으려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어떻게 해도 사라지
지 않을 것 같은 그 흉통에 온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자 아래쪽에서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벽을 누르는 그 부피감에 작게 신음하자 서서히 단단해지던 것이 빠르게 부피감
을 더해간다.
“아…….”
처음에는 그게 뭔지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한 번의 사정으로 힘을 잃
었던 그의 성기가 다시 발기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채버렸다. 조금씩 잘게 움직
임을 시작하는 그것에 놀라 한숨 같은 감탄사를 내뱉자 어느새 단단해진 그것이
다시 안쪽을 짓눌러 온다. 그리고 곧 내벽을 압박하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남긴 정액으로 훨씬 부드러워진 안쪽을 헤집어대는 감각에 등줄기로 소름이
끼쳐왔다. 굶주린 듯 만족을 모른 채 계속되는 그의 욕망에 두려운 한편, 자신 역
시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그를 알아챈 듯 입술을 뗀 뒤 빠르게 허리를 움직여간다. 다시 시
작된 그의 움직임에 채 식지 않은 몸의 열기가 다시 피어오르고 저릿한 쾌감이 몸
을 타고 간다.
다시 빠르게 움직이는 그에게 눌린 채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움직임에 맞춰가기
시작했다. 그도 자신도, 더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서로의 육체를 탐
하며 그 관계에 몰두해갔다.
그에게 안기는 순간만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와 자신의 관계도, 죄악감도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더 크게 신음하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내맡긴
채 수없이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의 절정을 맞이했다.
피곤에 지쳐 더는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가 없을 때까지, 몇 번이나 사정을 한 뒤
지쳐 기절하듯, 그에게 안겨 눈을 감았다.
그리고 편안하게,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채 숙면을 취했다.
『그만 일어나.』
한순간 혼절을 한 듯 의식이 사라진 사이 뺨을 가볍게 두드리는 힘에 눈을 뜨자
낯선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유난히도 높은 천장과 갤러리형태의 새하얀
창문. 환하고 넓지만 단출하게 침대 하나만이 놓인 방 안의 풍경에 잠시 어리둥절
해 있다 이내 이곳이 뉴욕이고 이 집은 그가 미국에 있을 당시 쓰던 빌라라는 게
떠올랐다.
마침 방학 중이라 출장을 가던 그에게 끌려 여기까지 왔고 이틀 정도 호텔에서 지
내다 호텔 밖으로 나가지 않던 자신을, 그가 이 빌라로 끌고 왔던 것도 기억이 났
다.
언뜻 한국의 아파트와 별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유난히도 높은 침대라든가 창가
의 형태라든가, 벽지나 마감재 같은,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 이국적인 느낌이 나는
방 안을 돌아보고 있자 침대 맡에 걸터앉은 그가 간지러운 듯 웃음을 흘린다.
『왜? 아직도 정신이 안 들어? 기절할 정도로 느낀 건 좋지만 이제 정신은 좀 차
려야지?』
장난스러운, 마치 진짜 연인을 대하듯 짓궂은 그 말투에 기가 막힌 듯 인상을 쓰
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자 그가 팔을 잡아당겨 강제로 몸을 일으킨다.
『일단 식사는 하고 자.』
그 말에 겨우 침대에 일어나 앉은 채 옆을 보자 트레이 위로 요리가 가득 차 있었
다. 스프와 빵, 그리고 과일과 커피가 놓인 간단한 식사였지만 배달음식이라기엔
꽤나 고급스럽고 정성스레 세팅이 된 트레이에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한 거야?』
『설마. 하우스키퍼가 와 있어.』
그럴 리 있겠냐는 듯, 아주 간단히 부정하며 그가 트레이 위에서 진한 향을 풍기
던 커피 잔을 들어 건네준다. 아직 머리가 멍한 채라 일단 잔을 받아들다 문득 어
떤 의문이 들었다.
『하우스키퍼를 부른 거야? 남의 집인데?』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슬쩍 그의 눈치를 살피며 그렇게 묻자 그 역시 잔
을 손에 들고는 편안한 어투로 대꾸한다.
『원래 집주인은 나야. 돌아간 사이 비워두기도 그렇고 팔기는 아까운 집이라 렌
트를 해준 거지. 일하던 사람도 원래 나랑 계약했던 여자야. 요리 솜씨가 좋아.
일처리도 깔끔하고. 그래서 지금 사는 녀석도 그대로 고용한 거고.』
『……빌린 사람은 누군데?』
『대학 친구.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녀석이니 신경 쓸 것 없어. 지금은
어디에 처박혔는지도 몰라.』
이번 말에는 상당히 놀랐다. 그가 ‘친구’라는 말을 한다는 게 너무 어울리지 않
아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커피 잔을 든 채 웃는다.
『왜? 내 친구라니 이상해?』
『……조금. 그런데 지금 일봐주시는 분 와 계신 거야?』
『응.』
『아, 그럼 일어나야지.』
혹시라도 알몸인 상태로 그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낭패라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
서려는데 그가 팔을 잡아 말린다.
『주방 정리만 하고 곧장 돌아갈 테니 신경 쓸 것 없어.』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식사 준비를 해주겠다고 왔다 널 보곤 한바탕한 후야. 미성년자
아니냐고 난리를 쳐서 결국 네 패스포드까지 보여주고 성인이라고 확인까지 해줬
어.』
『……벌써 날 봤다고?』
『청소하겠다고 침실에 들이닥쳤으니까.』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데려온 애인.』
짤막한 그 말에 놀라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간다.
『잘하면 이 집에 사는 녀석도 들이닥칠 수 있어. 쓸데없이 호기심만 넘치는 녀석
이라 내가 이 빌라에 사람을 데리고 왔다면 궁금해서라도 보러 올 테니까.』
가볍고 편안한 그의 말투에 당황해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돌아봤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진짜, 너무 어색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가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즐거운 듯 이야기를 하고 모든 말에 기분 좋게 받아치는 게 너무나
낯설고 어색했다. 보통은 이런 때라면 누가 올까 무섭고 놀라 긴장을 하거나 신경
증을 일으키는데 지금은 낯선 그의 태도가 당황스러워 그런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
너무나 그답지 않은 태도와 말투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그가 왜 그러냐는 듯
되묻는다.
『왜?』
『……그냥…… 좀…… 이상해서.』
『뭐가?』
『그냥…… 이상해. 잘 상상이 안 가. 당신이 하우스키퍼한테 절절 매며 내 여권
까지 보여줬다는 것도 그렇고, 친구 얘기도 그렇고…….』
확실히 며칠 전부터 그의 변화는 눈치 채고 있었다. 그 집을 벗어나, 아니 정확히
는 한국을 벗어난 낯선 땅에서의 그는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더 쾌활하고 유쾌했
고 무서울 정도로 다정했다.
이곳 특유의 문화나 환경 탓인지, 아니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서인지 그는 한
국에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었고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자신 역시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이국 땅 위에 서자 날카롭던 신경이
무뎌지고 행동도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호텔에서는 갑갑했지만 이 집으로 온 뒤
로는 어떤 해방감마저 느껴져 그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적극적이고 솔직했다. 덕분
에 이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서 구르기 시작해, 그의 말대로 기절까지 해버렸지만
이상할 정도로 몸도 마음도 가뿐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라서인지, 그도 자신도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당신은 여기가 한국보다 잘 맞나 봐?』
할 말이 없어 그냥 되는 대로 내뱉으며 커피를 마시자 마시던 잔을 트레이 위에
내려놓던 그가 농담처럼 말을 던져온다.
『너도 이쪽이 더 잘 맞는 것 같던데? 안 하던 짓까지 다 하고. 네가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드문 일인데…… 이쪽 물이 좋은가 보지?』
기가 막힌 그 말에 헛웃음을 흘리며 커피를 마시려 잔을 드는데 그가 먼저 잔을
빼앗아 트레이 위에 올려둔다. 그리고는 당연한 듯 입술을 겹쳐온다. 유난히도 상
냥한 그 입맞춤에 눈을 감고 있자 식사를 하라고 깨우던 남자가 당연한 듯 어깨를
누르며 자신의 위로 올라탄다.
『일어나라며?』
『나중에. 한 번 더 하고.』
『배고파.』
『한 번만 더.』
어울리지 않게 억지를 부리는 그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어 그대로 얌전히 그의 손
에 몸을 맡겼다. 이미 몇 번이나 그를 받아들였던 곳은 너무나 쉽게 그를 받아들
였고 삽입되는 순간의 저릿한 감각에 그의 성기를 조여 대며 신음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고 그의 입술은 더없이 달콤했다. 그의 손과 입술이
닿는 부분마다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 열기가 퍼져 전신이 뼈까지 녹아들어
가는 듯한 기분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언제나 관계를 가질 때면 느끼는 게 싫
어 신음을 삼키거나 몸부림을 치곤했지만 그 순간만은 아무 생각 없이 그가 주는
쾌락에 몸을 내맡겼다.
낯선 여행지에서의 관계는 너무나 자극적이었고 자신을 아는 이가 없다는 생각에
완전히 스스로를 방기해버린 채라 정신을 놓아버린 게 문제였다.
낮과는 달리 느리게 서로를 끌어안은 채 허리를 움직이던 중 그의 입술이 목덜미
를 빨아들이는 느낌에 낮게 신음하던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중간한 상태에서 멈춰버린 행위에 몸이 달아 그를 안은 채 몸을 비비적거리자
그가 작게 묻는다.
『뭐?』
라고.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처음에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뎌져버린 머리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어리광을 부리듯 허리를 비틀자 상
체를 일으킨 그가 시선을 맞춰온다. 그리고는 더없이 진지한 눈빛으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다시 말해봐. 지금 뭐라고 했지?』
그렇게 물어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창 관계 중에 하는 말 같은 건 기억하지 못한
다. 가끔은 의식을 잃기도 하고 관계 중에 정신이 나가는 일도 빈번하기에, 그런
것들은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술을 손끝으로 누르며 다시 말한다.
『사랑한다고, 다시 말해봐.』
목을 살짝 감싸 쥔 채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그의 얼굴에 방금 전, 무의식중에 내뱉
어버린 그 말을 떠올려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마치 신음처럼 내뱉은 그 말을 떠
올린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다시 말해봐.』
『…….』
『어서, 다시.』
계속해서 반복되는 종용에도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건 그냥 실수였
다. 무의식중에, 지나치게 방심한 상태에서 나온 의미 없는 신음과 다를 바 없는,
헛소리였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다.
『기억…… 안 나.』
그 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해져 모른 척 시선을 돌리려 하자 그가 갑자기
허리를 움직여 깊이 들어왔다. 멈춰있던 그의 성기가 갑자기 안쪽의 예민한 부분
을 푹 찔러올리는 순간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간질거리던 쾌감이 날카롭게 몸을
관통해간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그 감각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가장 원하는 것은 주지
않은 채 슬금슬금 몸을 농락해오는 그의 움직임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강한 것을 원하는 몸에 애가 타 신음을 억누른 채 그의 것을 더 깊이
빨아들이기 위해 허리를 휘자 그가 민감한 부위를 문질러대며 더욱 애를 태운다.
짓궂은 그의 움직임에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안타까움에 몸
부림을 치며 시트를 세게 쥔 채 숨을 헐떡거리자 다시 한 번 강하게 안쪽을 쳐올
린 그가 허리를 멈춘 채 다시 말한다.
『다시 말해봐, 어서.』
당장이라도 사정을 할 것 같은데 도저히 거기까지는 닿지 않는 쾌감에 기계적으로
그가 원하는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내뱉은 그 말에 몸 안에 있던 그의 성기가 더욱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몸을 갈가리 내찢을 듯 더욱 단단하게 그것이 안을 쑤
셔대는 느낌에 교성을 내지르며 그에게 매달렸다.
그 짧은 한 마디에 마냥 상냥하기만 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거칠고 강하게 달라붙
어오는 그에게 매달려 울고 신음하며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랑해.』
라고.
그 말을 듣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이상할 정도로 그 한 마디 말에 휩쓸려 진심으
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대로 그 말을 반복해주었다. 그가 다정해서, 그리고 그 한 마
디면 그는 자신을 위해 뭐든 다 해주었기에, 자신도 그걸 이용하기 시작했다. 거
기까지는 아무 문제없었다. 문제가 된 건, 그가 그 말의 저주에 걸려들어 버렸다
는 사실이었다.
반복되는 그 말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는 서서히 감정을 내보이기 시작했고, 진
짜 연인처럼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드러낸 그는 무서울 정
도로 다정하고 열정적이었다. 그 열정이 넘쳐 그는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할
각오까지도 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남자의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맹목적이고 지
독해,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그게 무서웠다. 세상의 시선도 주위 사람들의 만류도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가 가
진 모든 걸 걸고 부딪쳐오는 그가 무서웠다. 사람의 마음이란 거울과 같아서 자신
에게 애정을 갖고 온 힘을 다해 부딪쳐오는 상대에게는 그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
여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처음 본 순간 매료되었던 남자라면 흔
들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면서도, 자꾸만 그에게로 마음이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그걸, 이젠 인정한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리고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진짜 도망치고 싶었던 건, 그가 아닌 그의 열정에 흔들리며 그와 함께 저
주에 걸려버린 자신으로부터였다는 것을.
까맣게 변했던 머리를 내리치는 통증에 불현듯 의식이 떠올랐다. 지끈거리는 통증
에 머리가 깨인 순간, 차가운 수건이 왼쪽 눈가에 닿아있었다. 지그시 부드럽게
눈가를 눌러주는 그 힘에 눈을 뜨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너무 어지러웠다. 그
리고 몸이 무겁고 나른했다.
“눈 뜨지 마. 왼쪽 눈이 부어서 뜨기 힘들 거야.”
차가운 물수건으로 왼쪽 눈가를 눌러주는 그의 손길과 걱정스러운 듯한 음성에 오
른쪽 눈꺼풀만 들어올리자 잠시 시야가 흔들리다 곧 수려한 그의 얼굴이 눈에 들
어왔다. 어둠이 가득한 창가를 배경으로 환한 방 안에 앉은 그는 살짝 긴 머리카
락을 흘러내린 채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
다.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그의 얼굴은 확실히 야윈 채였다. 못된 성질 덕에 심장발작
까지 일으켰다더니 역시나 너무 야위었다. 마른 얼굴 위로 살짝 눈가를 가릴 정도
로 긴 머리카락까지 자연스럽게 흘러내리자 음영이 더욱 짙어져 그 수려한 미모
위로 우수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 애틋한 분위기에 쓴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가 그다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는 걸 알기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속이야 어떻든, 이 남자의 포장은 너무 그럴
듯하다. 눈빛도 외모도 분위기도, 목소리와 말투까지도, 감동적일 정도로 매혹적
인 남자였다.
“곧 새 집으로 옮기게 될 거야. 시내 쪽의 단독주택이야. 그다지 시끄럽지 않은
주택가니 조용히 보내기 좋을 거야.”
또다시 돌아온 현실 속에서 그는 또 한 번의 도피를 꿈꾸고 있었다. 해외로 나가
는 건 포기했지만, 꿈같았던 뉴욕에서의 휴가에 대한 미련은 남은 듯 그는 한 번
더 그 달콤한 꿈을 꾸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의 미련에 안타까움이 휘몰아친다. 안타까울 정도로, 이 남자는 단순하고 즉물
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이다. 욕망에 약하고 본능에 따라
서만 움직여간다. 그가 꾸는 꿈이 곧 현실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정도로 순수한 남자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와는 달리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논리적이라 꿈같은 건 꾸지 않는
다. 꿈은 꿈일 뿐 절대 현실이 될 수 없다. 현실도 주위 상황도 전혀 개의치 않고
본인의 욕망대로만 움직이는 그는 모르고 있지만 자신은 알고 있다.
꿈이 달콤한 건 그 순간이 짧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 꿈이 현실로 내려와 길
게 반복되는 순간, 꿈은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된다.
어떻게 해도 그와 자신의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 그와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만 가
득한 이 세계의 끝으로 도망간다 해도, 그는 자신의 아버지였고 자신은 그의 아들
이었다.
어디로 가더라도 그 진실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자신을 미치게 하는 게 바로 그
거였다.
“어차피 더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을 테니 집을 옮긴 후에는 자유롭
게 움직여도 좋아. 가을학기에 복학을 해도 좋고. 다른 걸 배워보는 것도 좋겠지.
”
그 나름대로는 최대한 양보하고 있는 거였지만, 그 대단한 배려도 자신에게는 별
로 와 닿지 않았다. 그와 함께 하는 이상 어디서 어떻게 살든 마찬가지다. 어떻게
해도 그 자리다. 변하는 건 없다.
그래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왼쪽 눈가를 눌러주던 그가 그
침묵에 기분이 상한 듯 살짝 인상을 쓴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합의야. 그 이상은 없어.”
약간의 인간적인 모습 뒤로 다시 나타난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의 본성에 겨우 입
술을 움직여 받아쳤다.
“……필요 없어.”
잔뜩 갈라진, 피 내음이 나는 듯한 그 말에 그의 손이 멈칫한다. 여실히 느껴지는
그의 동요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다시 그의 손이 움직인다.
지그시 눈가를 내리누르던 차가운 물수건이 이번엔 왼쪽 입술 끝을 눌러온다. 입
술이 찢어진 듯 아려와 인상을 쓰자 그가 곧 얼굴에서 물수건을 뗀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뱉으며 부어오른 입술과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린다.
“얼굴이 엉망이야. 모처럼 마음에 든 얼굴이었는데.”
작게 혀를 차며 내뱉는 말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부어오른 눈가에
입을 맞춰준다.
세상에 다시없을 다정한 연인처럼, 그가 남긴 상처를 그가 치유해주려 하고 있었
다.
다시 지끈하며 심장이 울려왔다. 그의 다정함은 자신에겐 독이었다. 그것도 심장
을 직격하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또다시 흔들리려는 마음에, 찢어져 아려오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내가 곁에 있길 원해?”
그 말에 그가 멈칫한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숙인 채 자신을 바라본다. 여전히 무
감각해 보이는 깊은 눈동자 위로 이채가 스친다. 조용히 다음 말을 재촉하는 그
시선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정하게 대하지 마.”
짤막한 그 말에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혼란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눈동자에 힘겹
게 말을 이어갔다.
“학대하고 괴롭히고 짓밟아. 나한테 상냥하게 대하지 마. 날 위해 뭔가를 하려고
도 하지 마. 배려하지도 말고, 그냥 쓰레기처럼 다뤄.”
“……어째서?”
자꾸만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지니까, 라는 말이 순간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그 말을 목구멍 안으로 우겨넣으며 그와는 조금 다른, 하
지만 아주 비슷한 답을 내주었다.
“난 당신의 공범은 될 수 없어. 그러기엔, 그 죄가 너무 무거워.”
“그래서, 피해자가 되겠다고?”
애매하고 추상적인 그 말을 그는 정확히 알아들었다.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그
는 잘 알고 있었다.
“미친 사람은 당신 하나면 돼. 나까지 끌고 들어가지 마.”
비겁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그가 되묻는다.
“결국 네가 내린 결론은 면죄부를 달라는 건가?”
예리하고도 영리한 단어 선택에 다시 침묵하자 그가 허탈한 얼굴로 웃는다.
“그래, 내가 악당이 되면 넌 편해지겠지. 강제로 끌려가고 얻어맞고 강간을 당한
걸로 모든 걸 정당화하면 되니까.”
“…….”
무언의 수긍에 그가 웃는다. 씁쓸함이 섞인, 하지만 나름대로 납득한 듯한 미소였
다.
그 역시, 이 이상의 해결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하고 싶어 하지만 자신은 그의 곁에서는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면 그가 미친다. 혹은 죽는다. 결국 이건 그에게도 자신
에게도 욕망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가 걸린 일이었다. 그렇기에 절실하고 이기적
일 수밖에 없다. 그도 자신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포기시킬 수밖에 없다. 더
절실한 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르고 강제로 발목을 잡아 묶어 버려야 한다.
거기에 원만한 합의란 있을 수 없다. 애초에 그와 자신의 관계는 합의로 정당화될
수 있는 관계였다.
반드시 한 사람은 가해자가 되고, 한 사람은 피해자가 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방패막이로 삼아 자신은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걸 그
의 탓으로 미루고 자신은 그의 뒤에 숨어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려버려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살 수 있다. 그래야만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다.
비겁하고 치졸한 방법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납득을 해야 그
의 곁에 머물 수 있다.
그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자신이 왜 도망치는지, 그리고 무엇을 부정하려 하는지, 그리고 뭘 무서
워하는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리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가 다정하게 대하면 자신
이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니까.
“네가 바라는 게 그거라면 좋아. 적어도 네가 자살하는 걸 지켜보는 것보다는 그
게 나을 테니까. 어차피 난 미친놈이니 나 하나로 끝내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자조적인 그 말에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또 뭐라고 말
을 할 수도 없어 그대로 침묵한 채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자
그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그리고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여온다.
“그렇게 인정할 수 없다면 부정하고 도망쳐. 얼마든지 따라가 줄 테니까.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인정하게 될 거야. 그건,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부정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지고 깊어져. 도망치면 집요하게 발목에 휘감겨오지. 너도,
나처럼 도망칠 수 없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는 그의 속삭임에 또다시 가슴의 통증이 인다. 간질거리고
따끔거리고 멍이 든 듯 아려오는 그 통증에 무거운 팔을 들어 그의 목을 안았다.
그리고 남은 힘을 다해 그를 끌어안은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
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 말에 그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지껄이고 부정해보라고, 그 정
도는 상관없다는 듯 따뜻한 손길로 얼굴을 쓰다듬어줄 뿐이다.
그 상냥함에 다시 한 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사랑하지 않아.”
그건 다짐이었다.
자신이 내뱉은 저주에 먹히지 않기 위해, 그에게 흔들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비명처럼 울리는 그 다짐이 허공을 맴돌아 메아리 쳐진다. 닿을 곳 없는 그 허무
한 외침은 그렇게 방 안을 울리다 사그라져가고 있었다.
아프게, 또 아프게.
또 허무하게.
그렇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