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약이 안 듣는다고요?”
무서울 정도로 싸늘한, 칼날 같은 바람이 불어오는 한겨울의 어느 날, 또다시 찾
아온 상담실에서 재현이 더 이상 그 약도 듣지 않는다고 말하자 의사는 곤혹스러
운 얼굴을 했다. 정신과라는 게 결국 환자의 말만 듣고 그때그때 필요한 처방만
남발하는 곳이라는 걸 이미 눈치 챘기에 더 강한 약을 요구하자 의사가 씁쓸한 얼
굴을 한다.
“그것도 꽤 센 약인데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운동을 해보시는 건 어때요?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은데.”
“……움직이고 싶지 않아서요.”
그와 얼굴을 팔러 다닌 덕에 백화점에 가는 것도 꺼려져 최근엔 다시 병원과 집만
오가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차피 더는 백화점에 갈 필요도 없었지만 확실
히 집에만 있는 건 피로하다. 집에 있으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약에 의존하게
되고 점점 복용량이 늘어 최근엔 약과 술을 섞어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일이나, 의욕도 없나요?”
“……별로요. 그냥…….”
거기까지 말한 뒤 말을 끊자 의사가 말해보라는 듯 자상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해
온다. 그 눈빛에 조금 뜸을 들이다 답해주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어요. 절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요.”
“……집이 견디기 힘든가요?”
“네.”
“가족들과의 관계를 개선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러기엔, 너무 골이 깊어서요.”
거기까지 말하자 의사도 더는 깊이 파고들 수 없는 듯 말을 끊었다. 매번 상담이
끝날 때마다 서진에게 오늘의 상담 내용과 처방약을 보고하고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 꼬치꼬치 보고해야만 하는 입장이니 이쪽 집안 문제를 파고들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이런 큰 병원의 정신과의로 들
어온 건 그가 꽤나 처세술에 능하다는 의미였다. 그래서인지 손을 대도 될 문제와
아닌 문제에 대한 판단이 빨랐다.
“더 이상 강한 약은 처방할 수 없습니다. 양을 늘리는 것도 안 되고요. 기분전환
을 할 일을 찾으시거나 다른 취미 생활을 가져보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약에 의존
하기 시작하면 계속 그 상황으로 돌아올 뿐이니까요.”
그 말에 재현이 침묵하자 의사가 다시 자상한 어조로 말을 건넨다.
“그렇게나 집이 싫다면 환경을 바꿔보는 게 어때요? 여행을 가거나, 집안의 가구
나 인테리어를 바꿔보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 전환이 될 수 있으니까요.
”
그 말에 설핏 웃음이 흘렀다. 아마 다음주쯤이면 그 별채가 또 뒤집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독단적이고 멍청한 남자는 또다시 역할놀이에 푹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
다. 그날 이후, 차마 잇지 못했던 말의 마법에 빠진 그는 이전처럼 또다시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가엾을 정도로 단순하고 즉흥적인
남자였다.
어떻게든 자신에게 약을 끊게 하기 위해 별채를 아예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는
남자를 떠올리며 맥없이 웃고 있자 의사가 한숨을 내쉰다. 그도 이 상황이 막막할
것이다. 분명 위에서는 더는 강한 약을 처방하지 말라고 강요하고 있을 테고 자신
은 입을 꾹 다문 채 더 강한 약만 요구하고 있으니 난감해하는 게 당연하다.
“전과 같은 약으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의사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충고해드리는 건데요…… 정신과 약은 근원적인 처방이 되
지 않습니다. 물론, 호르몬 문제로 인한 증상에는 도움이 되지만 진짜 정신적인
문제에는 잠깐의 도피처가 될 뿐 근원적인 치료는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최대한
약을 먹지 말고 버텨보세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뭔지 파악하고 그걸 극복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지한 의사의 말에 재현은 설핏 웃고 말았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제거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와 자신 중 하나가 죽었다 다시 태어날 수밖에 없다.
혹은, 지금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내야 하지만 전자는 불가능하고 후자 역시 불가
능하다.
그러니까 이건 어떻게 해도 해결될 수 없는 일이었다.
“열심히 생각해볼게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대강 시간은 채웠고 원하던 처방전을 받았으니 됐다는 생각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몸이 비틀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직도 약 기운이 가시지 않
았는지 휘청이는 몸에 앞에 앉아 있던 의사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손을 뻗었
지만, 곧 중심을 잡고는 다시 한 번 인사를 건넸다.
“잠깐 현기증이 난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멍한 얼굴로 깍듯하게 인사를 한 뒤 조심스레 느린 걸음으로 상담실을 나섰다. 뒤
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는 의사의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고 상담실을
나와 처방전을 받고 언제나와 같이 약국에 들러 처방받은 약을 챙겨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역시나 언제나처럼 혼자 식사를 한 뒤 이른 시간에 와인을 꺼내들고 약봉
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오늘은 조금 양을 늘려 두 알을 꺼내 든 뒤 약을 와인이
반쯤 찬 잔에 넣었다.
하지만 약은 쉽사리 녹아들지 않았다. 차라리 가루로 만들걸, 하고 후회하며 잔을
들어 천천히 흔들자 한참 뒤에야 겨우 약이 아주 작은 결정만 남긴 채 녹아들었다
.
그 정도는 별 상관없다는 생각에 잔을 들어 단숨에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약 때문인지 약간 쓴 맛이 도는 와인을 다 마시고 나자 머리가 어질어질해오기 시
작했다. 슬슬 잠이 올 것 같아 잔과 약봉지를 그대로 둔 채 침대로 비틀거리며 다
가가 이불 속에 누웠다.
아직 8시밖에 안 된 시간이었지만 술에 섞어 마신 덕인지 순식간에 수마가 몰려들
었다.
그 수마에 몸을 맡긴 채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천천히 무기력한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재현아, 재현아. 일어나야지.”
한참을 정신없이 자던 중 들려온 음성에 재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렸다
. 온몸이 나른하고 무거워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어깨를 잡아 흔드는
힘과 시끄러운 부름에 겨우 눈을 뜨자 서진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
다.
“……왜?”
“약하고 술을 같이 먹은 거야?”
그 말에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옆으로 눕자 서진이 한숨
을 내쉰다.
“못 일어나겠어도 일어나.”
“……더 잘래…….”
“너, 이틀을 잤어.”
그 말에 재현은 다시 눈을 뜨곤 서진을 돌아보며 되물었다.
“……뭐?”
“이틀 내내 잠만 잤다고.”
“……아…….”
라고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은 재현은 인상을 쓰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역시나 몸이 흔들린다. 약 기운이 강해서인지 여전히 뇌가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려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장님께서 걱정 많이 하셨어. 우선 일어나. 큰 사모님께서 오늘 화랑에 나가시
는데 같이 나가자고 하셨어.”
“……응…….”
머리가 울려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그렇게 대강 답하자 서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묻는다.
“너,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응?”
“큰 사모님하고 같이 화랑에 나가라고.”
명확하고 느릿한 서진의 말에 그제야 그의 말이 제대로 들려왔다. 하지만 듣기는
들었는데 선뜻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여자가 자신을 데리고 외출을 한
다니, 이건 또 너무 기괴한 일이라 여전히 울려대는 머리를 겨우 들어 서진을 바
라봤다.
“뭐라고?”
“집에 있지만 말고 어디라도 나가라고 사장님께서 큰 사모님께 말씀드린 거야.
일어나서 씻어.”
벌써 나흘, 아니 닷새를 얼굴도 못 본 남자의 쓸데없는 배려에 절로 인상이 써졌
다. 그 사람이 바쁘기도 하지만 그가 출근할 때나 퇴근할 때나 자신은 늘 약에 취
해 자고 있었기에 얼굴을 볼 일이 없었다. 그가 그것 때문에 상당히 화가 났고,
또 조금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꼭 나가야 돼? 귀찮은데.”
“귀찮아도 움직여. 이대로는 병원에 입원해야 할지도 몰라.”
“……그럼 좋지.”
적어도 이 집은 나가게 될 테니까, 라고 말하며 다시 침대에 누우려하자 서진이
어깨를 잡아 일으킨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너한테도 독이 되는 일이야. 정신
은 차리고 살아야지.”
답지 않게 자신을 걱정하는 그의 말에 마른 웃음이 흘렀다.
“아무 것도 못 하고, 집 밖으로도 나갈 수 없는데 정신 차려서 뭘 하라고?”
비웃음이 역력한 그 말에 서진의 표정이 굳어진다.
“뭐든 해봐. 사장님도 걱정하고 계셔. 운동을 해도 좋고, 학원을 다녀도 좋고.”
“귀찮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의사한테 얘기 들었어. 너 지금 잡지 한 페이지도 제대로 못 본다고. 문장 하나
를 읽고 해독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을 정도면 심각한 거야.”
잠시 처리할 문서가 있으니 잡지를 읽으라고 하더라니, 10분 가까이 한 페이지를
못 넘기는 걸, 의사가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파악했다면
자신에게 말할 것이지 그걸 굳이 입 다물고 있다 서진에게 보고를 한 의사의 행태
에 실소가 흘렀다. 예상대로 의사와 환자 간의 신뢰나, 의료자료 유출에 대한 두
려움 같은 건 그 의사에게는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은 성인이라도 금
치산자고 자신의 대리인이자 자신의 보호자의 대리인 역시 서진이니 그에게 모든
상담기록이나 처방에 관한 내용이 전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그건 예상대로였다. 나름 그 의사가 훌륭한 메신저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약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아.”
“해결 돼. 약을 먹으면 꿈을 안 꾸고 잘 수 있으니까.”
“일시적인 것뿐이야. 평생 약을 먹을 수는 없어. 너 벌써부터 집중력이 떨어지고
무기력해지고 있어. 이렇게 빠르게 후유증이 보이는 거면 약을 끊어도 위험해질
수 있어. 넌 지금 치료를 넘어 중독으로 넘어가는 중이야. 너도 느끼고 있지?”
그 말에 아무 대꾸 없이 침묵하자 서진이 협탁 서랍에 있던 약봉투를 꺼내든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앞으로 병원에 가도 처방은 안 해줄 거야.”
갑작스러운 그 말에 기가 막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서진이 약봉투를 그의 코트 주
머니에 넣는다. 그래도 약을 압수할 것 같은 그의 태도에 조금 목소리가 높아졌다
.
“그럼 난 어떻게 자라고?”
“다른 방법을 찾아.”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서진의 태도에 재현은 이번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한 듯 손
을 뻗었다.
“알았어. 그럼, 일단 그 약만 먹고…….”
“사장님 명령이야. 약은 모조리 압수야. 더는 안 돼. 너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
태야. 어떻게든 버텨 봐. 그래도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단호한 그 태도에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고 있자 서진이 침대에
서 일어서 물러서며 재촉하듯 말한다.
“그만 일어나. 조금이라도 몸이 피곤하게 움직여.”
“꼭 이래야겠어?"
"널 위해서야. 이 이상은 위험해.”
이성적이고 냉정한, 그 사람보다도 더 보호자 같은 그 말에 더는 대꾸할 수 없어
마지못한 듯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서자 서진이 어서 욕실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하지만 몸이 굼뜨다. 일단 일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멍멍하고 몸에
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참을 만 했지만 확실히 이번에는 과했다. 술에 섞어 마시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너무 많은 양을 섞었다. 조금씩 늘려갔어야 하는데 욕심이
과했다.
깨질 듯 울려대는 머리와 후들거리는 다리에 겨우 겨우 몸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
다. 그리고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바로 옆에서 감시하는 서진 때문에
억지로 식사를 하곤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나온 시간은 오후 3시였지만 유난히도 날이 흐렸다. 곧 눈이라도 쏟아질 듯 우울
한 날씨였다.
12월 말이 가까워지는 한겨울임에도 어둑한 하늘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건 눈이
아니라 비였다. 날이 갑자기 풀려 푸근하다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라니……
음울하기 그지없는 하루였다.
차의 뒷좌석에 앉은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 바로 옆에 앉은 할머님께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약까지 먹는다고?”
조금 화가 난 듯, 나무라는 할머니의 음성에 무성의한 투로 대꾸했다.
“……잠을 잘 못 자서요.”
“아무리 그래도 바깥 일 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신경을 쓰게 하면 안 되지. 집에
서라도 편히 쉬게 해줘야지, 집안에서도 마음 상하게 하는 거 아니다. 집안에서도
편히 쉬질 못하니 애가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지.”
“……말랐어요?”
“매일 보고도 몰라?”
잠만 자느라 이미 못 본 지 닷새째라고 하면 한바탕 잔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
은 생각에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 역시 입을 다문다. 딱히 더는 할 말이
없어 다시 창밖을 바라자 다시 눈꺼풀이 내려앉아간다.
몸도 노곤한데 날씨까지 흐리자 자꾸만 잠이 쏟아져왔다.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
면서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약 기운이 남아 정신이 몽롱했다.
자면 안 된다는 생각에 겨우 겨우 정신을 유지하려 했지만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
앉았다. 그렇게 두어 번 깜빡 졸다 깨다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난 처음부터 네가 싫었어.』
그날도 꼭 이런 날이었다. 계절이 다르기는 하지만 음산한 빗줄기가 쏟아지던 밤,
자신의 앞에 선 삼촌은 그렇게 말을 했었다. 피부 안쪽이 저릿저릿해오던 그 통증
보다도, 뇌까지 녹여버릴 듯 끓어오르던 열보다도 삼촌이 던진 그 말에 놀라 멍하
니 있던 중 삼촌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움직이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 아픈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라 그가 사라지는 것도 몰랐었다.
그의 부재를 깨달은 건 갑자기 번개가 치는 순간이었다. 창밖이 잠시 환해지더니
이윽고 천둥소리가 울려왔다. 그 빛과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순간 실내화원을
너머 난간 쪽으로 걸어가던 삼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위태로워 보였다. 저 난간이 아니라도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떨어져 내릴 듯,
위험하고 아슬아슬했다.
본능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지금 삼촌이 뭘 하려고 하는지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 그를 놓치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몸을 움
직였다. 열에 들떠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바닥을 기어 겨우 겨우 화원을 가로질
러 나갔을 때, 삼촌은 이미 난간에 올라선 채였다.
위험하다고, 어서 내려오라고 소리를 쳤지만 한여름의 독감에 걸린 목에서는 제대
로 된 소리가 아가지 않았고, 그나마 작은 소리마저 쏟아지는 빗줄기에 소리는 묻
혀버렸다.
어떻게든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겨우겨우 다시 움직이려던 순간 삼촌이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작게 속삭인다. 그 소리 역시 너무 작아 눈을 부릅뜬 채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분명 그건…….
『안 돼. 형이…….』
“다 왔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벌써 도착했다는 소리에 재현은 눈을 뜬 채 사방
을 돌아봤다.
“김여사랑 최여사가 와 있다고 하니 예의 바르게 대하고.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공식적으로 얼굴을 알려놓는 게 좋겠지. 뒤에서 수군거리는 파리 소리 듣는
것보다는 앞에서 제대로 듣는 쪽이 나으니까.”
그 말에 아직도 정신이 들지 않아 멍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곧
열린 문 밖으로 내려선다. 그녀의 구두가 바닥에 닿는 순간 커다란 소리가 울려왔
다. 그 소리에 비로소 이곳이 화랑의 지하주차장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차문을 열고 내려서자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검은색의 원피스에 밍크 숄을 걸친 그녀가 어서 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 재촉하는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에 천천히 트렁크를 돌아 그녀를 따라 걷자 그녀가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마치 명령하듯 말을 건넨다.
“앞으로 이틀에 한 번씩은 화랑에 나와서 돌아보고 가끔은 나랑 경매에도 참석해
. 화랑은 윤정이에게 줄까 했지만 네가 있으니 굳이 바깥사람한테 줄 필요는 없겠
지. 혜선이 너한테 붙여줄 테니 열심히 배워둬라. 나도 이젠 힘에 붙이니까.”
아예 자신을 그의 안사람으로 들어앉히려는 듯한 그녀의 말에 당황스럽기는 했지
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귀찮고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
기는 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가 화를 낼 테고, 좋다고 하는 건 또 진심이 아
니라 어중간한 침묵으로 응대하자 그녀가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안으로 들어선다.
그녀가 들어서길 기다리다 같이 엘리베이터에 타 기다리자 2층 버튼을 누른 그녀
가 마지막 잔소리를 남긴다.
“절대 큰소리를 내면 안돼. 핸드폰은 진동이나 무음으로 해두고 고개를 들고 조
용히 걸어. 아무리 급해도 뛰는 건 안 돼.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도 안
되고. 누가 인사를 하거든 살짝 고개만 숙여 눈을 맞추고, 대화할 때는 조용히 웃
으면서 대꾸해주고. 이미 소문이 다 나서 널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눈치
보거나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대해. 뭐, 어차피 넌 눈치 보는 성격은 아니니 그건
걱정 안 한다만, 그 모난 말투는 조심하고. 아무리 상대가 무례해도 네 고모나 삼
촌들한테 하는 것처럼 날을 세우는 건 안 돼. 너한테 로비나 청탁 같은 건 바라지
도 않으니 정혁이 짐은 되지 말아야지.”
넌 어차피 써먹을 데라고는 없으니까, 라는 그녀의 속내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재
현은 굳이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저 2층에 도착해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
보고 있자 그녀가 먼저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걸어 안쪽으로 향해간다.
한겨울인데도 건물 안은 지나치게 따뜻했다. 날이 따뜻해 얇은 재킷 하나만 걸치
고 나왔는데도 후끈할 정도로 내부는 지나치게 난방이 잘 되어 있었다. 조용히 그
녀를 따라 막 그녀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부인
에게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오셨어요?”
그녀의 인사에 자리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노부인이 웃으며 응대한다.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옆에는?”
자신을 바라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두 부인의 표정에 먼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께서 그녀들의 앞으로 다가서며 소개의 말을 대신한다.
“저희 집 장손이에요. 처음 보시는 거죠? 재현아, 인사드려.”
평생 본 적 없는 자애로운 그녀의 표정에 잠시 얼떨떨하기는 했지만 그게 곧 그녀
의 대외적인 얼굴이라는 걸 깨닫고는 서둘러 인사를 건넸다.
“서재현이라고 합니다.”
짤막한 그 인사말에 투피스를 걸친 여인이 먼저 아는 체를 해온다.
“어머, 그래. 그 소문의……. 그런데 진짜 청년이네. 이 관장 막내아들이라고 해
도 믿겠어요.”
“네, 정원이랑도 친형제처럼 자란 아이에요. 둘이 유별났죠. 제 막내 삼촌 죽은
뒤로 아파서 쉬고 있는 중이에요.”
“어머나, 저런.”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로 안쓰럽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여인들을 보며 겨우 겨우
웃어 보이고 있자 할머님께서 자랑스러운 듯 어깨까지 두드리며 상냥하게 시선을
맞추며 그녀들을 바라본다.
“이 아이, 잘 봐주세요. 원래 화랑은 우리 정원이한테 물려주려고 했는데 그 아
이가 그렇게 돼서 재현이한테 물려주려고요. 아직 모자란 게 많지만 너그럽게 지
켜봐주세요. 워낙에 아비 닮아 영특한 아이라 잘 해내겠지만 아직은 어리니까요.
”
너무나 상냥하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인 듯 구는 그 말에 속이 뒤집히
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죽은 삼촌과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리
고 어떻게 대했는지 너무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란 탓에 지금 그녀의 위선이 역겹
게만 느껴졌다. 할아버지처럼 대놓고 학대하지는 않아도 그녀는 냉랭한 시선과 태
도로 사람을 기죽이는 타입이었다. 지긋지긋하고 더럽고 천한 것들이라도 그 집을
나서면 사랑스러운 막내아들, 자랑스러운 우리 집 장손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 집이 싫었던 것 같다.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것도 싫었지만 집안사람들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집이 불쾌했던 것 같다.
밖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상냥하고 예의 바른 이들이 그 집안에만 들어서면 그
더럽고 추한 본성을 드러내며 다른 이들을 짓밟고 모욕하는 모습이 역겨웠던 것
같다.
피부 위로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듯 소름끼치고 불편한 기분에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자 그녀가 숄을 벗어 건 뒤 먼저 자리에 앉는다.
“차는 드셨어요?”
“응. 우린 마셨어.”
“그럼…… 아, 혜선이가 어디에 있지…….”
그 말에 재현이 재빨리 답했다.
“제가 찾아볼까요?”
“어, 그럴래? 1층 화랑에 내려가 봐.”
“네. 그럼 이야기 나누세요.”
억지로 겨우 웃음을 보이며 인사를 마친 재현은 다시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해갔
다. 그 사이에도 뒤에 앉은 세 사람의 시선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게 그대로 느껴
졌다.
“그런데, 정혁이랑은 안 닮았네요.”
“그렇죠? 둘째는 정혁이 빼닮고 셋째는 막내를 닮았는데 재현이는 아무도 안 닮
았어요. 하지만 영특한 건 꼭 지 아비를 빼닮았답니다. 그래서 정혁이도 첫째한테
유난히 기대가 크더라고요. 괜히 밖으로 돌리면 버릇 나빠질까 봐 조용히 공부만
시키다 나중에 유학까지 끝내고 제대로 일을 배워보라고 해서 아직까지 얼굴을 비
치지 않았던 거거든요. 정혁이가 그런 쪽으로 까다로워서요.”
그간 그에게 해가 될까,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 필사적이던 그녀의 아주 그럴 듯한
설명에 설핏 웃으며 막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는 순간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 확실히 좀 크네요. 저러니 같이 다닐 때 이상한 소문이 나죠.”
“……네?”
“아니, 정혁이도 아직 젊은데, 아들이 너무 크고 예쁘네요. 저러니 소문이…….
”
정확히 그 소문이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서둘러 문고리를 돌려 열고는 다시 복
도로 나섰다. 그리고 그대로 복도 끝 쪽에 보이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자 얼음처럼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그 물을 바라보다 주머니를 뒤져 접힌 종이를 꺼내들었
다. 그리고 차곡차곡 종이를 펴 그 안에 있던 알약을 들어 넘긴 뒤 손으로 물을
받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물줄기에 잠시 아찔해지긴 했지만 곧 고개를 흔들고
는 물을 잠갔다. 그리곤 긴 한숨을 내뱉었다.
고작 하루, 그와 함께 한 효과는 대단했다. 그 날 이후로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
지도 않았는데, 그가 회사로 찾아온 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호텔 라운지를 들러
스위트룸을 지나 왔다는 소문은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렇게 눈에 띄는 남자가 사내아이 하나를 끌고
다니며 의도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고 이상한 코스들을 돌았으니 다들 그 아
이가 소문의 그 아들인지, 아니면 애인인지 궁금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말이 섞여 이상하게 퍼져나갔을 것이다.
확실히 영리한 사람이다. 자신은 발끝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영악한 사람이다.
미친 사람처럼 비척비척 웃다 고개를 들자 거울 너머로 하얗다 못해 창백하게 질
린 얼굴이 보였다. 유난히도 지쳐 보이는 표정과 창백한 낯빛, 그리고 빛을 잃은
채 둔해 보이는 눈동자까지.
취한 듯 몽롱하고 무기력한 그 얼굴에 살짝 고개가 기운다. 자신의 얼굴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얼굴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약에 취해 멍해 보이는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아마 그건……
『안 돼. 형이…….』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느낌에 멍하니 서 있던 중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
왔다. 작게 진동하는 그 울림에 놀라 정신을 차린 뒤 서둘러 전화를 찾아들자 익
숙한 번호가 떠 있었다.
“네.”
「사모님 도착하셨다고?」
혜선이었다. 자신이 나온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네. 기다리고 계세요.”
「지금 올라가. 손님이 오셔서 안내해드리고 있었어.」
“그렇지 않아도 찾으러 가려던 차였어요. 저 화장실에 있어요.”
「나 계단이야.」
“나갈게요.”
짤막한 통화를 끝낸 뒤 다시 물을 틀어 손을 씻고 핸드타월로 손을 닦아낸 뒤 화
장실을 나서자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올라서는 혜선이 보였다. 살짝
고갯짓을 해 보이는 그녀에게 마찬가지로 답한 뒤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전했다
.
“오랜만이다.”
“네.”
“화랑은 처음이지?”
“네.”
“새로 들어온 그림하고 조각 있는데 보고 가. 기분 전환도 할 겸.”
“……네.”
단답형으로 짤막하게 답한 뒤 그녀를 따라 걷는데 시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제 먹은 약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또 약을 먹어서인지 효과가 빠르다.
몸에 부칠 정도로 강한 약 기운에 조금 휘청거리자 옆에서 걷던 혜선이 팔을 잡아
준다.
“괜찮아?”
“네. 아직 좀 어지러워서요.”
“몸 안 좋으면 그만 들어갈래?”
“……네, 그래야겠네요.”
괜히 폐 끼치기 전에, 라고 작게 웅얼거리는데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리
고 몸이 나른하다. 몸이 바닥으로 꺼져 내릴 듯한 느낌에 겨우겨우 다리를 잡아끌
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쓰러져서는 안 된다고 독하게 자신을 다독거리며 그녀를
따라 복도를 걷는데 올 때는 짧았던 그 거리가 지금은 아주 멀게 느껴졌다.
“너, 진짜 괜찮아?”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자신이 하는 말이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도 애매했다. 머릿속
이 울렁울렁거리는 기분에 겨우 사무실에 도착해 다시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번
엔 시야가 빙빙 돌며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자꾸만 감기는 눈을 필사적으
로 뜬 채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서자 소파가 놓인 쪽으로 먼저 다가선 혜선
이 할머니께 뭔가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눈이 아니라 귀가 닫힌 듯 아무 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순간 의식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깊은 곳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멍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어두웠다. 한 치의 빛도 없이, 어둡기만 했다. 그리고 소음도 없었다
. 하지만 몸은 부유하듯 기분 좋게 떠다니고 있었다. 가볍고 부드럽게 일렁이듯
움직여간다.
아주 깊은 물 속에 잠긴 채 유영하는 듯한 느낌에 그대로 정신을 놓고 있던 중 하
얀 빛이 번쩍였다. 눈을 때리는 그 빛에 겨우 눈을 뜨자 검은 하늘 아래에 위태롭
게 선 남자가 보였다.
언제나 꾸는 그 꿈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비는 쏟아져 내
리고 있었지만 비의 소음도 시끄러운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모든 소음이 사라져버린 채였다.
이상한 그 느낌에 앞을 바라보자 난간 위에 선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가 자신을 바
라보는 게 느껴졌다. 다른 감각이 사라지자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창백한 얼굴과 흐리멍덩한 눈동자. 얼핏 보기엔 그냥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자세히 그 얼굴을 들여다보자 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보였다.
불안한 듯 정신없이 흔들리며 초점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처럼, 약에
취한 듯 나른해진 얼굴이었다.
그 멍한 얼굴을 바라보며 어서 이리 오라고, 거기 있으면 안 된다고 소리치자, 그
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간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
만 그 입술의 모양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소음이 사라지자 시각이 예민해진 듯 쏟
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삼촌이 얼굴이 세세히 눈에 들어왔다.
그 선명한 화면에 이번엔 그의 입 모양을 선명히 새겼다.
『안 돼. 형이 죽으라고 했어.』
“대체 무슨 약을 처방한 거야?”
신경질적인 남자의 목소리에 갑자기 의식이 튕긴 듯 정신이 들었다. 채찍처럼 내
리꽂히는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은 들었지만 눈꺼풀은 떠지지 않았다. 너무 노곤했
다. 이상할 정도로 피곤하기만 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기다리자 귀에 익은 남자
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정신과에서 처방하는 신경안정제입니다. 제가 직접 약을 가져가 확인도 했습니
다. 의사 말로는 아무래도 약을 과다 복용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아주머니도 그
날은 약 봉지가 두 개가 나와 있었다고 하고요. 확실치는 않지만 와인 잔도 나와
있던 걸로 봐서는 술과 약을 섞어 마신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간수치도
조금 높아져서 더 피로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나하나, 세세하게 자신의 일상을 보고하는 그 음성은 분명 서진의 목소리였다.
약봉지 숫자까지 세고 있던 걸까 싶어 허탈해 하던 사이 방금 전보다는 조금 낮아
진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은? 확실히 모두 수거한 거야?”
“아주머니께서 분명 하루에 하나씩 처방약의 봉투가 나갔다고 확인해줬습니다.
처방된 수량과 모두 일치합니다. 혹시나 해서 침실 서랍과 서재 책상도 모두 뒤져
봤지만 다른 약은 없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서진이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어떻게 할까요?”
“상담도 처방도 모두 중지시켜.”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병원에 둘 테니 간병인하고 경호원 배치하고. 의사들에게 진통제나 수
면제, 안정제 어떤 약도 처방하지 말라고 확실히 말해둬.”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병원에 두실 예정이십니까?”
“일단 정신을 차릴 때까지.”
“징후가 좋지 않습니다. 의사에게 계속해서 더 강한 약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이틀 치 약을 술과 함께 먹었다는 건 이미 의존성이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 당분
간만이라도 요양소나 별장에서 지내게 하는 게 어떨까요?”
조심스러운 서진의 말에 그가 빠르게 답한다.
“안 돼. 그걸 목표로 약을 먹고 있는 거니까.”
“……하지만…….”
“일단 병원에 있다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별채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뒤의 일은
그때 결정할 테니 우선 그렇게 움직여.”
“알겠습니다.”
“나가 봐. 난 조금 있다 나갈 테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발걸음 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곧 문소리가 들린 걸로
봐서는 서진이 방을 나간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눈을 뜨려했지만 눈썹만 떨려올
뿐 눈꺼풀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무겁고 나른하기만 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눈을 뜨
려 필사적으로 눈꺼풀을 들어올리던 중 그의 손이 이마에 닿아왔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그의 목소리에 울려온다.
“그래, 이번엔 네가 이겼어. 확실히, 넌 날 미치게 하는 데에만은 탁월한 재능이
있어.”
조금은 지친 듯, 그리고 조금은 화가 난 것 같은 그 목소리에 겨우겨우 눈을 뜨곤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그가 조금 인상을 찌푸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리고 조금은 상처 받은 듯한 그 얼굴은 분명 마지막으로 봤던 때
보다 야위어 있었다. 할머니 말대로 조금 말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건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기에 가장 먼저 궁금했던 바를 물었다.
“당신이 삼촌한테 죽으라고 했어?”
직접적인 그 질문에 그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문다. 그걸로 알았다. 죽으라고는
하지 않았어도 그 비슷한 주문은 했다는 것을.
“그날 내가 열이 높아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맞지만 난 삼촌을 부르지 않았어.
삼촌이 걱정이 돼 날 찾아왔고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리 생각해도 이상해. 삼촌이 당신 허락 없이 그 집에 올 리가 없잖아. 그럼, 결론
은 하나지. 당신이 불렀다고 거.”
그 물음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건 곧 긍정의 의미였다.
“그때 삼촌은 약에 취해 있었어. 내가 먹는 신경안정제나 항우울제였겠지. 항우
울제는 끊은 걸로 알고 있었지만…… 다시 먹기 시작했다 해도 약을 먹으면 횡설
수설해지거나 멍해져서 외출을 할 때엔 절대 먹지 않았는데…… 삼촌이 왜 약까지
먹고 그 아파트로 온 거지?”
우울증 때문에, 우울증 약 때문에, 마음이 약해서, 너무 지쳐서, 라고 그간 끊임
없이 서진에게 주입 당했던 그의 자살 원인을 무시한 채, 냉정하게 상황을 돌아보
자 역시나 삼촌이 자살을 했다는 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못 된다. 그러기엔 너무 용기가 없다. 자살 같은 건, 진짜
자신 같이 독한 인간이나 생각할 수 있는 거지, 그 사람은 그럴 만한 용기가 없다
.
아무리 자신이 밉고 증오스러워 자신의 앞에서 죽어버리고 싶다고 해도, 그건 이
상하다. 6살부터 함께 자란 사람이었다. 삼촌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든,
자신은 삼촌을 잘 알고 있다. 삼촌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약을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고, 병원에 가라면 간다. 하지만 본인이 그걸 거부하거
나 먼저 능동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어린 자신에게조차도 끌려 다니며 모든
걸 확인 받을 정도로 소극적이고 순종적인 남자였다.
그걸 너무나 잘 알기에 확신을 담아 그를 바라보자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다.
“그게 궁금해?”
“궁금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거든. 그 사람은 남을 저주하거나 홧김
에 자살할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기엔 너무 약해. 극한으로 몰리지 않는 이
상, 그런 용기를 낼 수는 없어. 누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는 있지만 자기 스스
로 죽을 결심 같은 건 못 해.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 말에 그가 이마에서 손을 떼며 한 박자 늦게 답한다.
“이 세상엔 가끔 죽음으로써 존재를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지. 살아있으면 그곳에
있는지, 뭘 하는지도 모르다가 죽는 순간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사람. 그 녀석은
그런 류의 인간이었을 뿐이야.”
“그래서, 죽으라고 했어? 죽으면 사랑해 주겠다고?”
“……아니. 정확히는 아주 거슬리고 귀찮으니까, 사라져버리라고 했지. 네가 돌
아온 후엔 필요 없으니까.”
그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여전히 냉랭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조금의 죄책
감도 후회도 느끼지 않는 듯한 그의 표정과 시선에 더는 말을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신경이 무뎌져서인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그냥, 아 그렇구나. 역시 그랬
구나, 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삼촌이 먹던 약이 간혹 살인과 자살충동을 일으키는 약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
래서 몇 번이나 끊으라고 했었고 실제로 자신이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약을 끊기
도 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한은 분명히 끊었었다. 하지만 다시 약을 처방받기
시작했고 그날 약을 먹고 그와 대화를 한 뒤 아파트로 온 거라면 대강 이해가 간
다.
삼촌이 이 기괴한 남자가 던진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지 대강 알 것 같았다.
그 용기 없는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결심하게까지 되었는지, 왜 그때 그렇게 화가
났던 건지 이제 겨우 알 것 같았다.
덕분에 결심이 쉬워졌다. 이제 망설이고 있던 모든 것들을 떨쳐낼 수 있게 되었다
.
이제 조금만 더하면 된다.
아주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며칠간을 조용히 병원에서 보낸 뒤 퇴원을 하고 다시 본가로 돌아온 후, 조금이지
만 확실히 생활은 바뀌었다. 큰마음 먹고 화랑을 이어받으라던 할머니께서는 귀한
손님들 앞에서 자신이, 다른 것도 아닌 약물과용으로 쓰러진 탓에 그 제의를 철회
하셨고 그 역시 이젠 위험하다는 판단을 했는지 병원과 약도 모두 강제로 끊게 만
들었다.
덕분에 또다시 지독한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병원에서는 정신없이 잠만 자다 집으
로 돌아오자 불면증과 두통이 동시에 덮쳐왔다. 약은 모두 압수당했고 더는 의사
에게 처방도 받을 수 없어 이번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조금씩 와인을
마시기는 했지만 이번엔 도수가 높은 양주로 바꿔 조금씩 양을 늘려가기 시작했다
.
처음에는 한 잔, 그리고 다음에는 두 잔, 그러다 어느새 반병을 지나 한 병을 비
워가고 있었다.
술의 양에 따라 푹 잘 때도 있었고, 중간에 자다 깨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나 술을 마신 뒤에는 숙취가 남아 일어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약도 마찬가지지
만, 술은 뒤가 더 좋지 않았다.
덕분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약을 먹으면 지나치게 무뎌지는데 술을 마시니
신경 끝이 뾰족해졌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뿐 아니라 식사도 하지 못하고 말
수는 급격히 줄었다. 어차피 대화를 할 상대가 없기도 했지만 말을 할 기력도 없
어, 그가 왔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냉랭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렇게 시간은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폭풍 같았던 한 해
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1월 중순의 날씨는 꽤 가혹했다. 12월까지만 해도 비가 올 정도로 따뜻하던 날씨
가 해를 넘기자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해 지금은 후원의 연의 수면이 모두 얼어붙
어 버릴 정도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바깥 날씨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봄처럼 따뜻한 실내 서재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던 중 핸드폰이 울려왔다. 몇 시간 째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다 핸드폰으
로 시선을 던지자 어쩐 일인지 서진이 아닌 그의 번호가 떠 있었다.
한 번 통화를 한 이후로 그가 낮에 간혹 전화를 하는 일이 있었기에 아무렇지 않
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어디지?」
뻔한 그 질문에 뻔한 답을 남겼다.
“서재. 왜?”
「잠은?」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던 걸 알았는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했다.
“아침에 좀 잤어.”
「또 술 마시고?」
“약을 끊게 하니 술이라도 마실 수밖에. 그래도 오늘은 좀 자서 괜찮아.”
「……내일 새벽 일찍 산장으로 갈 테니 준비하고 있어. 사흘이야. 겨우 시간을
뺀 거니 짐부터 싸놔.」
갑작스러운 그 말에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갑자기 왜?”
「그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한 건 너잖아.」
“나 때문에 가는 거라고?”
「술은 그만 마셔. 일단 네가 잠을 좀 자야 생각이라는 걸 할 테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선뜻 좋다고는 할 수 없어 잠시 망설이자 그가 침묵을 뭐
라고 생각했는지 부연설명을 더해준다.
「너랑 나, 둘이 가는 거야. 준비해.」
“……일은?”
「사흘 정도는 뺄 수 있어. 그 이상은 안 되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싫다고 하는 건 또 이상해 아무 말 없이 침묵
하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사람들 없는 산장으로 가는 거니 준비해둬.」
그 말과 함께 뚝하니 전화가 끊겼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해 멍하니 핸드폰
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의사에게서 자신의 상담 내용을 모두 전해들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
게 빠를 거라는 건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서 좀 당황했다. 준비는 언제든 되어 있
었지만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는 너무 빠르다.
기다리고 의도하던 바였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자 조금 망설여졌다. 과연 제
대로 진행이 될까, 이 사람이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고 있지 않을까, 과연 이번엔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겨우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눈앞에 온 기회는 놓치는 게 아니다.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을지도 모른다.
명확히 결론이 난 순간 책상 위에 놓인, 세 시간 째 첫 페이지 멈춘 책을 덮고 주
방으로 향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며칠 밤을 못 잔 환자처럼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가 서자 마침 식사를 준비 중이던 아주머니가 보였다. 벌써 식사할 거냐는 듯 바
라보는 그녀에게 천천히 말을 건넸다.
“내일부터 사흘간은 안 오셔도 돼요.”
그 말에 그녀가 왜냐고 묻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내일부터 사흘 동안 여행갈 거예요. 아버지도 없을 테니 쉬셔도 돼요.”
어차피 그녀는 이 별채만을 봐주는 사람이라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얼굴을 본 뒤 다시 주방을 나가 이번엔 응접실 쪽으로 향했다. 복도
의 중간에 위치한 그 안으로 가 진열장 안에 있던 양주를 한 병 꺼내들고는 복도
끝으로 가 후원으로 나섰다.
따뜻한 집안을 나서자 혹독한 취미가 피부 위를 스쳐갔지만 망설이지 않고 작은
연못으로 걸어가 얼어붙은 수면 위로 양주를 쏟아 부었다. 절반 이상을 아낌없이
쏟아 붓다 기껏해야 두세 잔 정도가 남았을 때 병의 뚜껑을 닫아 침실의 창가 쪽
에 둔 채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서 침실로 향해갔다. 그리고 드레스 룸에서 커다
란 여행 가방을 꺼내들었다.
앞에 놓인 커다란 가방을 바라본 채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진짜 필요한 짐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꼭 가야 돼?”
잠이 오지 않아 역시나 독한 양주를 들이키며 기다리던 중, 돌아온 그에게 가장
먼저 그렇게 묻자 코트를 벗던 그가 혀를 찬다.
“겨우 시간 낸 거야. 귀찮아도 움직여.”
“움직이기 싫어.”
솔직한 그 답에 그가 코트를 벗어던진 뒤 재킷을 벗으며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본
다. 탐색하는 듯한 그 시선에 태연한 척 술을 들이키자 그가 이쪽으로 다가와 들
고 있던 잔을 빼앗는다.
“그만 마셔.”
“……조금이라도 자려면 마셔야 돼.”
“7시에 나갈 거야. 이 집만 나가면 괜찮을 테니 오늘은 더 마시지 마.”
그 말에 딱히 대꾸하지 않은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자, 잔을 빼앗아 내려둔
그가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왔다. 그 감촉에 눈을 감으며 자연스레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얇은 옷자락을 서서히 벗겨내는 그의 손길에 그에게 안긴 채 그
의 어깨 너머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7시까지는 이
제 9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이제 마지막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검은 하늘이 서서히 진한 남색 빛으로 바뀌어가며 어스레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빛이 든다 해도 여전히 어두웠지만 서서히 해가 떠오르려는 기미가 보였다. 여
름이라면 벌써 환할 시간임에도 한겨울의 태양은 느리다.
겨울바람보다도 차고 시린 새벽의 여명에 멍하니 창가에 앉아 있던 재현은 정확히
6시 50분이 되자 울린 벨소리에 느릿하게 움직여 현관 앞에 세워둔 가방을 끌고
현관을 나섰다.
“여기요.”
겨울이라 꽤 큰 여행용 가방을 문 앞에 선 기사에게 건네자 그가 가방을 끌고 차
앞으로 가 트렁크를 열고 짐을 싣는다. 일어나자마자 차부터 끌고 나온 듯 양복이
아닌 편안한 옷차림에 파카를 걸친 남자를 바라보고 있자 트렁크를 닫은 그가 다
시 현관으로 다가와 차 키를 건넨다.
“시동은 걸어놨어.”
“네.”
오늘도 그가 직접 운전할 거라고 이야기를 해뒀는지 기사 아저씨가 건네주는 차
키를 받아들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가 천천히 돌아서 본채 쪽으로
향해간다.
현관문에 선 채 재현은 커다란 파카를 걸친 남자가 어둠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지
는 걸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섰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집안 분위기에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미닫이 문 앞에 선
뒤 소리 없이 문을 밀어 열었다. 그리고 환하게 조명을 밝혀둔 침실로 들어가 미
리 꺼내놓은 외투를 걸쳐 입었다.
남색의 무릎까지 오는 하프코트를 입고 단추를 빈틈없이 여민 뒤 환한 방 안을 가
로질러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곤히 잠든 남자를 내려다봤다.
“이틀이면 돼. 딱 이틀만 자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직접 시험해봤으니 걱정하지
마.”
약을 조금씩 쪼개 먹어본 결과 내성이 없는 사람의 경우 정확히 두 알이면 이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와인보다 독한 양주에 섞은 거라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
지만 괜찮을 것이다. 그래,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약 기운에 취해 정신없이 잠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현은, 늘 그가 자신에게
하듯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니까, 나 믿지 말라고 했잖아.”
이 사람이 자신에게는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자신을 믿지는
못해도, 이 사람은 자신을 죽일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다치는 것도 참지
못한다. 처음이야 어떻든 지금은 그렇다.
그래서 그걸 이용했다.
확률은 반반이었다. 새벽 2시 경 잠깐 자다 일어나 조각조각 잘라 서재의 책 뒤에
숨겨놓았던 신경안정제를 탄 술을 술잔에 따랐을 때 그가 그냥 둔다면 자신이 마
실 생각이었고 못 마시게 한다면 그냥 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
이라 여겼는지 그는 자신이 아예 술을 마시지 못하게 그가 대신 잔을 비웠다. 그
리고는 잠시 후 쓰러져 내렸다.
대강은 예상하고 있었다. 이 사람이 자신이 술이나 약을 먹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알았고,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기에 도박을 했던 건데 그는 예상 외로 아주 잘
속아 넘어가 주었다.
서진의 말대로 자신의 문제에 한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단순하고 즉물적인 남자라,
조금만 머리를 쓰면 이 남자를 다루는 건 쉬웠다. 애매하게 말을 흐리고, 그가 원
하는 말을 뒤로 숨기는 척 시선을 돌리면 결국 그가 끌려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
다. 아무 감정 없이 내뱉던 사랑한다는 말에도 흔들리던 사람이니 조금의 연출만
더해줘도,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자신을 믿고 싶어 할 거라는 걸, 알고 있
었다.
게다가 시기도 좋았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오늘이 매해 성대하게 준비하던 그
의 생일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특별한 날, 특별한 계획을 세우면 사람은 누
구라도 경계가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이번엔 나 찾지 마. 잡히지도 않겠지만…… 또 당신만 상처 받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그에게 인사를 남긴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섰다. 그리고는 협탁 위
에 있던 그의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방안의 불을 끄고 침실을 나섰다. 침착하고 조
용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복도를 걸어 나와 집안 전체의 조명을 끈 뒤 보안장
치를 가동시키고는 집을 나와 차의 운전석에 올라탔다.
미리 시동을 켜놓고 히터를 틀어놓은 후라 차안은 따뜻했다. 열선이 깔린 시트와
따뜻한 차내 공기에 잠깐 걸어 나오는 동안 움츠렸던 몸을 풀고는 어색한 손길로
안전벨트를 맸다. 운전은 오랜만인데다 자신이 타던 차보다 차체가 크고 낮아 조
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오토는 거기서 거기라 핸들 주변의 기기들 위치
를 대강 파악한 뒤 브레이크를 밟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그리고 시트에 기대앉아 백미러와 사이드미러의 각도를 조정한 채 기어를 드라이
브에 놓았다.
시간을 확인하자 정확히 7시 3분이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우선 가방에 넣어둔 시
계와 지갑들을 먼저 처분한 뒤 최대한 많은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시간은 충분하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그와 자신이 사흘 간 여
행을 떠나는 건 모두 알고 있을 테고 그의 핸드폰은 자신이 갖고 있다. 그리고 저
집으로는 앞으로 사흘간 누구도 얼씬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깨어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이 상황을 눈치 챌 수 없다.
그러니까, 천천히 가도 된다. 괜히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지 말고 침착하게 움직여
야 한다.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한 번 자신을 다독거린 재현은 손을 뻗어 핸들을 손에
쥐었다. 손에 익지 않은 감각에 살짝 핸들을 틀어 힘을 조절해본 뒤 마지막으로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서서히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재현은 망설임 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