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 (12/14)

Chapter 11

빗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하늘과 쿵쿵거리는 천둥소리, 그리고 미친 듯이 떨어

져 내리는 빗줄기. 달빛마저 검은 비구름 사이에 몸을 가린 어두운 밤이었다. 도

시의 불빛조차도 닿지 않는 그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위태로운 자세로,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서 있는 그를 잡으려 해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너무 아프고, 몸이 무거워 더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안 되는데. 지금 저 자리에 선 그가 떨어져 내릴 텐데.

어서 그를 잡아야 하는데, 간절한 마음과 달리 몸은 천 근처럼 무겁기만 했다.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말을 하려는데 소리 역시 빗속에 먹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에게 다가가려 손을 뻗으려는 순간, 난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그가 

자신을 돌아봤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그 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어서 내려오라고, 안타까움과 불안에 있는 힘껏 소리를 

치는 순간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는 곧 어둠 속으로 뛰어내린다. 그리

고 사라져버렸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가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

치 쇠사슬에 묶인 듯,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

어깨를 뒤흔드는 힘에 겨우 눈을 뜨자 환한 불빛이 시야로 쏟아져 내려왔다. 높고 

강한, 새하얀 한여름의 햇살에 놀라 눈을 껌뻑거리고 있자 곧 시야가 선명해졌다. 

눈에 익은 천장과 새하얀 햇살, 그리고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더웠다. 지독히도 더웠다. 그래서 전신이 땀에 전 채였다. 이마를 흥건히 

적신 식은땀에 빠르게 눈을 굴리며 사방을 돌아보자 그가 걱정스레 말을 건넨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러지?』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그의 손길에 비로소 그게 꿈이었

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의 손이 닿는 지금이 현실이고 그건 악몽이었다.

그래, 그건 악몽이었다. 지독한 악몽이다.

그런 게 현실일 리가 없다.

세상은 너무나 밝고 환하다. 그리고 그의 손은 언제나처럼 따뜻했고 그의 음성도 

언제나와 같았다. 그 생생한 감각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잔뜩 긴장한 몸에서 

힘을 빼자 그가 다시 묻는다.

『왜 그러지?』

『……무서운 꿈을 꿨어.』

『무슨 꿈?』

『삼촌이 죽는 꿈.』

그 말에 그가 웃는다. 그도 어이가 없는지 가볍게 웃는 그 얼굴에 천천히 숨을 내

뱉으며 눈을 감자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여온다.

『그게 꿈이라고 생각해?』

섬뜩한, 너무 다정하고 부드러워서 무서운 그 음성에 다시 눈을 뜨자 그가 웃는다

.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그건 그냥 사고니까. 그냥 귀찮은 짐덩이 하나가 사라

진 것뿐이야. 아무 것도 걱정할 거 없어.』

끔찍한 그 상황에서도 그의 목소리는 즐거운 듯 가볍고 경쾌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 괴리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숨이 막힐 정도로 더웠는데 지금은 춥다. 너무 춥고 무서워서 계속해

서 몸이 떨려오기만 했다.

이건 악몽이다. 분명히 악몽이었다. 이런 건 현실이 될 수 없다고 수없이 자신에

게 타이르며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뒤흔들었지만 어떻게 해도 악몽은 끝나지 않았

다. 꿈에서 깨어지질 않는다.

이게 바로 지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사이 다

시 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무서워할 거 없어. 이건 당연한 결과야.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 네가 날 속이고 배신하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 녀석이 죽은 거야. 그 녀석은 네 

악몽이 되기 위해서, 네 앞에서 죽은 거야.』

거기까지 말한 뒤 그는 잠시 말을 끊은 뒤 천천히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너무나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그러니까, 네가 그 녀석을 죽인 거야.』

섬뜩한 그 말에 정신을 놓는 순간 빠앙-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왔다. 위협적

인 그 울림에 눈을 뜨자 차를 타고 바로 옆을 스쳐가던 차에서 욕설이 울려온다.

이상한 상황에 사방을 돌아봤지만 보이는 건 온통 어둠 속에 눈이 아플 정도로 환

하게 밝혀진 불빛뿐이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자신이 이 곳에 서 있는지도 모른 채 멍하니 주변을 돌아봤

지만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몽유병에라도 걸렸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

.

그저 머리가 멍하고 둔해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던 중 환한 가로수의 불빛에 비친 

중앙선으로 이곳이 도로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어둠 속의 도로는 위험하다. 그런데 왜 내가 여

기 서 있는 걸까?

어떻게든 안전한 길가로 가려 발걸음을 돌리려 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

았다. 마치 다리가 땅 속에 녹아든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어서 안전한 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다리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안한 듯, 정신없이 사방을 돌아보던 어느 순간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죽기 위해 이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죽으려고 이곳까지 왔다는 걸.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더는 스스로를 감당할 수가 없다.

도망치고 싶은 건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었다. 진짜 도망치고 싶은 건 자신에게서

였다.

모든 걸 깨끗하게 지워내고 되돌리고 싶었다. 이렇게 되기 전으로, 이 모든 비극

이 시작되기 전으로 모든 것들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한 번 있던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을 정당화하고 

면죄부를 주려 해도, 이미 벌어진 일들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다. 그리고 자신 

역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과거를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다면 그 과거를 끌어안은 채 사라

질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튀어나가기 전에, 다른 이들이 알아채기 전에 그것들을 영원히 소멸시켜

야 한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고 있던 중 저 멀리서 시끄

러운 차 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곧 불빛이 달려온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그 

빛에 아, 이제 드디어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제 끝이라고. 드디어 이제 편히 잠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이제 더는 악몽을 꿀 필요도 누군가에게 들킬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배신당하고 배

신하고 아파할 필요도 없다.

편안히 눈을 감고 있던 중 끼익거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몸이 저 아래로 추락해 내려간다.

이제 이 끝없는 악몽을 끝낼 때였다.

“그래서, 여전히 잠은 못 자고 있는 건가요?”

어느덧 짧은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성큼 다가서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가장 추

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메마른 나무와 마른 정원, 그리고 두꺼운 옷을 껴입

은 사람들. 모든 것이 죽어버리는 계절의 길목에서, 재현은 상담실 의자에 걸터앉

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의사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대

꾸했다.

“푹 잠들지 못해요. 눈을 붙여도 악몽을 꿔서요.”

“무슨 꿈요?”

“삼촌이 죽는 꿈이요.”

딱 잘라지는 그 말에 의사가 잠시 재현의 안색을 살피다 다시 묻는다.

“그 꿈을 꾸고 나면 죄책감을 느끼나요?”

“……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까운 이들의 자살 뒤에는 죄책감을 느낍니다. 자살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것이죠. 특히나 서재현 씨처럼 직접 그 자살 장면을 본 사람

들은 그 자체가 트라우마가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누구라도 자살을 결심한 사람

을 막을 수는 없어요. 특히나 추락사라면 더더욱, 누구도 막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건 제삼자의 관점이겠죠.”

딱 잘라 말을 한 뒤 시선을 내리자 의사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몇 번의 상담을 

통해 이 의사 역시 자신이 다루기 힘든 타입이라는 걸 눈치 챈 듯했다. 그래서인

지 이젠 어설픈 위로나 진단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듯 그저 의례적인 대화와 처방만을 반복할 뿐이다.

“수면장애는 여전하고…… 두통은 어떠세요?”

“마찬가지에요.”

그 말에 그가 들고 있던 신경외과의 소견서를 훑어보며 중얼거린다.

“외과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데…… 신경 쪽의 문제도 아니고.”

“심인성 장애죠.”

딱 잘라지는 재현의 답에 의사가 설핏 웃는다.

“제가 해야 할 진단을 환자가 직접 하는군요.”

“그 집에만 들어서면 머리가 아프니까요.”

“집 밖에서는 괜찮나요?”

“그러니 아직 살아있는 거겠죠.”

자조적인 그 말에 의사가 차트를 덮으며 다시 말을 건넨다.

“저번에 타간 약은 어떠세요?”

“처음엔 좀 듣나 했지만 계속 먹으니 그대로예요.”

“그럼 조금 센 약으로 처방해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다른 증상은 없나요?”

“그냥 잠을 좀 못 자는 것뿐이에요.”

“저번에 얘기한 가슴 통증은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괜찮아요.”

그 말에 흘깃 재현을 바라보던 의사가 다시 차트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혈압이나 혈관 문제도 없고 깨끗하네요. 위가 약한 것 빼고는 다 괜찮으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신경안정제를 먼저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수면제까지는 위험

하니 만약 이 약이 안 듣는다면 다음에는 수면제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다음에도 다음 주 이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럼 다음 주에 뵙죠.”

짧고 별 의미 없는, 말 그대로 의무적인 상담이 끝나자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서 

외투를 챙겨들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그럼.”

남색의 부드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얇은 피코트를 걸친 뒤 재현은 상담실을 나와 

대기실에서 처방전을 기다렸다. 시간은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채였다. 원래도 말

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상담은 피하고 싶었지만 최근 두통과 수면장애

가 심해져 결국 상담을 시작해야 했다. 말이 상담이지 결국 몸에 문제가 없으니 

이런저런 핑계를 댄 뒤 수면제와 신경안정제를 타가는 게 최종목적이었다.

“서재현 씨, 처방전 나왔습니다.”

대기실에서 몇 분 기다리지 않아 나온 처방전을 받아든 뒤 병원을 뒤로 한 채 나

와 대기 중이던 차에 올라탔다. 이미 자신이 타고 다니던 차는 정리된 후였고 운

전 자체를 금지당한 상태라 아예 전용차와 기사가 붙어 있었다. 외출을 할 때마다 

감시당하는 건 질색이지만, 싫다고 해봐야 물릴 수 없는 일이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

“병원 옆 약국에 들렀다, 백화점으로 가주세요.”

그 말에 운전석에 있던 남자가 또냐는 얼굴로 백미러를 바라본다. 최근 자신의 생

활은 단순했다. 집, 병원, 백화점, 서점. 그게 다였다. 만날 사람도 없고 특별히 

갈 곳도 없고, 취미도 없기에 외출을 하는 곳은 세 군데가 전부였고 혼자 집안에 

있으면 너무 머리가 아파 최근 가장 자주 들르는 곳이 백화점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백화점을 빙빙 돌며 시계와 지갑, 안경, 선글라스에 지갑, 

가방까지 되는 대로 사들이고 상자도 뜯지 않은 채 방치한다. 취미라고 하기도 뭐

한 말 그대로 돈지랄이었지만 그것밖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적어도 그 시간 동안은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끔찍한 두통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기에 최대한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천천히 병원을 나와 약국 앞에서 잠시 멈춘 차에서 내려 처방전을 들고 약국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자 곧 핸드폰의 벨소리가 울려왔다. 지금쯤 당연히 전화가 올 

거라 여겼기에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상담 끝났어?」

예상대로 서진이었다.

“응. 지금 약국이야.”

「의사가 뭐래?」

“언제나 하는 소리지, 뭐. 아무 문제없대. 그래서 신경안정제만 처방받았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곧장 집으로 갈 거야?」

“아니. 백화점 들렀다.”

짤막한 그 답에 서진이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뭐 살 거 있어?」

“아니. 그냥.”

「요즘 너무 자주 가네. 너 쇼핑 싫어했잖아.」

“돈하고 시간은 넘치고 할 일은 없는 재벌집 아들의 돈지랄이지.”

「그러지 말고…… 뭐 배우고 싶은 거나, 하고 싶은 거 없어?」

“있으면?”

「사장님한테 얘기해 봐. 너 이러는 거 보는 거, 마음 안 좋다.」

한도 무한대의 카드 한 장을 들고 매주 백화점 명품 매장을 쓸고 다니는 꼴이, 서

진은 영 마음에 안 드는 듯했지만 자신은 지금의 생활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정신 나간 금치산자라 뒤에 사람 안 달고는 대문 밖으로도 못 나오는데 뭘 하라

고? 감시하는 사람들 등 뒤에 달고 학원을 다닐까? 아니면 피트니스 클럽이라도 

다닐까? 형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 다 일일이 감시하려면 힘들잖아.”

조금 날이 선 재현의 공격적인 말투에 서진이 한숨을 내쉰다.

「나한테 아직 감정이 안 좋구나.」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뿐이야. 형한테는 별 감정 없어.”

그가 하는 일이 불쾌할 뿐, 분명 서진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 재현이 솔직

히 답하자 수화기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딱히 더 할 말도 없어 재현 

역시 입을 다물고 있던 사이 약사가 곧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지갑을 꺼내 카드

로 계산을 한 뒤 약봉지를 받아드는데 잠시 조용하던 수화부에서 다시 서진의 목

소리가 울려왔다.

「약은 받았어?」

“응.”

「될 수 있는 한 약 먹지 말고 버텨봐. 신경안정제 후유증 심해.」

계속해서 졸음이 쏟아지거나 무기력해지는 것뿐 아니라 살이 찌고 몸이 둔해지는 

후유증 정도는 이미 꿰고 있었다. 대부분 장기 복용일 경우 오는 후유증이지만 한 

알만 먹어도 종일 머리가 멍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자신도 그다지 약은 좋아하지 

않는다.

약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뿐이다.

“조심할게.”

「몇 시쯤 집에 갈 거야?」

“쇼핑하고 6시쯤엔 집에 들어갈 거야. 아버지는 몇 시쯤 끝나?”

「오늘은 좀 늦으실 거야. 먼저 저녁 먹고 있어.」

“알았어.”

짤막한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다시 약사를 불렀다.

“수면유도제 하나 주세요.”

약봉지를 들고 약국을 나와 다시 백화점으로 간 뒤, 한 시간 가까이 백화점을 돌

아다니며 시계와 반지, 안경 같은 소품들을 쓸어 담고 겨울에 입을 코트와 머플러

, 그리고 옷가지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 

식사를 한 뒤 곧장 샤워를 하고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아직 9시도 안 된 시간이

었지만 약을 먹고 나니 전신이 노곤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몸이 나른해 그대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잠깐 잠을 잔 듯한 기분이었다. 아주 잠깐 선잠을 잔 것 같은데 문

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인기척이다. 그 사람이 온 거다, 라고 떠올리는 순간 바로 옆이 묵직하게 가라앉

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시간에 자다니 별일이군.”

머리카락을 건드리는 손길과 그 부드러운 음색에 눈을 뜨려 했지만 눈꺼풀이 움직

이질 않았다. 정신은 반은 깨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약 기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낮에 의사와 통화했는데 조금 강한 약을 처방했다

고 했습니다. 기억이 돌아온 대신 수면장애가 다시 시작돼 이전보다 더 강한 약을 

처방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진이었다. 자신이 자고 있다 여기는지, 그는 아버지에게 하나하나 오늘 있던 일

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직접 두 사람의 대화를 듣는 건 처음이라 숨을 죽인 채, 

잠든 척하고 있자 그가 천천히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어쩔 수 없지. 혼자 잠들 때는 푹 자지 못하니까.”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조용히 침묵하자 서진이 잠깐 동안의 

침묵 후 다시 말을 잇는다.

“휴학 기간 동안 뭘 배우게 하는 건 어떨까요?”

“왜? 너한테 하고 싶다고 징징대?”

“그게 아니라…… 재현이가 안 하던 짓을 하니 걱정돼서요. 오늘만 해도 백화점

에서 상당한 액수를 썼는데…… 백화점 쪽에도 슬슬 재현이 존재가 알려지고 있습

니다. 워낙에 고가품들을 사대니 손님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고, 카드가 사장님 명

의 카드라 조금 안 좋은 소문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그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무슨 소문?”

“아시지 않습니까? 얼굴 알려지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갑자기 카드를 들고 명품매

장을 돌면 무슨 소문이 나는지…….”

“내 정부라고?”

어쩐지 몇 번 가본 매장에서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있더라니, 벌써 그런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그간 옷이나 필요한 것들은 모두 혜선이나 서진이 직접 사다준 터라, 상류층에 그

런 커넥션이 있다는 걸, 재현은 처음으로 알았다.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 라고 떠올리는 순간 그가 자

신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뭐, 반쯤은 맞는 말이군.”

말투에 웃음기가 묻어 있다. 그도 나름 이 상황이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웃어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께서 재현이와 함께 분가하셨

다 돌아오신 뒤 별채에서 머물고 계시다는 소문이 다 퍼졌습니다. 그리고 이 별채

가 무슨 용도인지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남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

다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상관없어. 내버려둬.”

“하지만…….”

“얼마든지 뒤에서 떠들어대라고 해. 어차피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고 감출 필요

도 느끼지 못하니까.”

“사장님…….”

“그냥 내버려둬. 그 인간들도, 이 녀석도.”

“……진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입으로 시끄럽게 떠들어 대봐야 아무 소용없어. 그리고 이 녀석도 나름 

필사적일 테니, 그냥 둬. 다들 어디까지 하나 한 번 지켜보자고.”

이 상황을 즐기는 듯 가벼운 그의 말투에 서진이 무거운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뭐가?”

“재현이를 이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물음에 그가 자신의 뺨을 쓰다듬다 느긋하게 답한다.

“기억은 모두 돌아왔고 조용히 지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위험한 아이입니다.”

딱 잘라지는 서진의 말에 그가 다시 천천히 뺨을 쓰다듬어준다. 그 부드러운 손길

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자 다시 그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그래…… 위험하지. 위태롭고, 위험하고. 늘 아슬아슬해.”

“소문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사장님께 위험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재현이 문제

에 한해서는, 사장님도 늘 이성적이지 못하시니까요.”

묘한 그 말에 그가 웃음기가 묻는 음성으로 답한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성적이지 못했지. 이상한 일이지? 그 조그만 녀석 

뭐가 그렇게 눈을 끌었을까? 기가 세서 골치 아프고 상대하기 싫은 타입인데…… 

바락바락 대들면 화가 나고 무시하면 미쳐버릴 것 같고. 다른 녀석 같았으면 눈앞

에서 아예 치워버렸을 텐데…… 그렇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데도 이 녀석만은 계속 

보고 싶었던 말이지. 새벽 늦은 시간이라도 굳이 집으로 들어와 시비를 걸 만큼. 

그건, 확실히 이상하지?”

“……사장님께 재현이가 특별하다는 건 압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고요.”

“그래. 나한테는 아주 위협적인 녀석이지.”

거기까지 말한 뒤 그의 손이 멈췄다.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뛰었다. 뭔가 눈치를 

챈 건가 싶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사이 서진이 다시 말을 건다.

“위험하다는 걸 아신다면 우선 그것부터…….”

조심스러운 서진의 말을 그가 서둘러 잘라낸다.

“그만 나가봐.”

“……그럼, 쉬십시오.”

그 답과 함께 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 멀어지는 그 소리에 두근두근

하는 심장을 안은 채 그대로 죽은 듯 누워 있자 이마 위로 입술이 닿아왔다. 그리

곤 잠시 후 그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는 척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 해.”

사근사근한, 마치 귓가에서 녹아들어가는 듯 달콤한 그의 음성과 우아하고 매력적

인 억양에 정신이 확 깨이긴 했지만 눈꺼풀은 여전히 무겁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

은 잠이 든, 이상한 상태였다.

“좋아. 아주 머리를 잘 굴리고 있어. 넌 역시 영리해서 마음에 들어.”

섬뜩한 그 말에 몸을 움찔한 순간, 그의 목소리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그의 

말이 띄엄띄엄 흩어진다.

“무슨…… 모르겠지만…… 이 상태로도 상관없겠지. 무슨 생각을…… 좀 더 지켜

보면 알 테니…….”

점점 멀어지는 그의 음성과 함께 맑게 깨어 있던 의식 역시 순식간에 가라앉아가

기 시작했다.

“일어나, 그만.”

“……으응…….”

“그만 일어나.”

짤막한, 얕은 잠을 깨우는 그 말에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재킷을 걸치던 그가 

툭하니 말을 던진다.

“저녁에 시간 맞춰서 회사로 나와.”

갑작스러운 그 말에 재현은 처음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인상을 쓰곤 한 박

자 늦게 다시 물었다.

“같이 저녁 할 테니, 나오라고. 6시 반쯤 나오면 돼. 사무실에서 기다려.”

하지만 여전히 머리에 안개가 낀 듯 멍해 잠시 그의 말을 곱씹어보다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전히 멍한 채라 움직임이 무디다. 느릿

하게, 굼뜬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엉망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

기자 그가 혀를 찬다.

“몇 시간을 자는 거야?”

“……약이 독해서…….”

더듬더듬, 느릿하게 말을 잇자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

다.

“몸이 무거워도 일어나. 약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끝이야.”

그럴 듯한 말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엔 약이 과했는지 조금 머리가 

울리는 듯해 관자놀이 부분을 누르다 문득 방금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방금, 나한테 회사로 나오라고 했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의 회사 근처로도 간 적이 없기에 이상하다는 듯 그렇게 

묻자 코트를 손에 들던 그가 무심히 답한다.

“방금 들은 이야기도 까먹는 거야? 대체 약을 얼마나 먹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회사에 가도 돼?”

“오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

“가면 안 되는 거 아냐?”

호적에는 올라 있고 모두들 존재는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선 안 되는 아이, 

그게 자신이었다.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지만 동생들의 경우는 윤진경 씨와 김윤

정 씨 두 사람이 자주 집을 오가기에 그 존재는 대부분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자신

의 경우는 아니었다. 회사에 대한 지분도 없고 드러나서 좋을 게 없기에 집안사람

들 외에는 접촉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평생 동안 회사에는 관여해서는 안 된다

고 생각하고,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다들 뻔히 알고 있는데 굳이 숨길 이유 없어. 시간 맞춰서 나와.”

“……꼭 나가야 돼?”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이만 나가야 하니 일어나서 움직여.”

여전히 강압적인 말투였지만 그렇다고 벌떡 일어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몸이 너

무 노곤하다.

“……피곤해.”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누우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어리광을 부리자 침대로 다가선 

그가 침대 맡에 걸터앉는다. 푹 꺼져가는 느낌에 다시 고개를 들어올리려는 순간 

그가 먼저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왔다. 

“으응…….”

깊고 농염한 입맞춤에 몽롱한 채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는 사이 그의 오른손

이 하체 쪽으로 내려와 입고 있던 하의를 끌어내린다.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든 하

의는 너무나 쉽게 흘러내렸고, 그의 손이 이내 사타구니 사이로 내려와 성기를 손

으로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만…….”

그런 걸 느낄 기력도 없는 터라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떨어진 체력과 성욕은 

전혀 다른 문제인 모양이었다. 서서히 아랫배로 몰려가는 열기에 허벅지 안쪽이 

화끈거려왔다. 일어나 앉을 기운도 없는데도 들썩거리는 허리에 그의 손을 잡으려

는 순간 성기를 매만지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잠 깼지? 이게 일어나.”

그 말과 함께 미련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코트를 손에 든 그가 방문으

로 향해간다.

이미 어쩔 수도 없는 상태로 불을 붙여놓은 뒤 상쾌한 얼굴로 떠나가는 그의 태도

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막 문을 열던 그가 돌아서 느

긋한 투로 말을 건넨다.

“그 뒤는 퇴근 후에 해줄 테니 지금은 네가 처리해. 7시야. 시간 정확히 지켜. 

갈 데가 있으니까.”

잘 자는 사람을 괜히 부추겨놓고는 혼자서만 멀쩡한 얼굴로 나가는 그의 뻔뻔함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누가 부탁했어?”

옆에 놓인 베개를 집어던지며 고함을 내지르자 그가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여유 

있는 얼굴로 문을 연다. 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그 문 앞에 서 있던 서진이 놀라 

바라보는 얼굴에 이번엔 서둘러 이불을 끌어올리자 살짝 눈짓으로만 인사를 한 서

진이 열린 문을 닫는다.

그의 말대로 잠은 확실히 깼다. 이상한 방법이지만 하여간 정신은 확 들었다.

“젠장.”

최근 그가 바빠 제대로 관계를 가질 여유가 없었기에 확실히 쌓이긴 쌓였지만 그

렇다고 못 해서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대로 참을 만했는데 그가 불을 붙여 

놓았다.

여전히 몸은 나른하고 짜증이 나긴 하지만 일단 일어나기는 해야 한다. 확실히 어

제는 약이 과했다. 약 기운 덕에 근육이 다 녹아들기라도 한 듯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겨우겨우 몸을 움직여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무거운 다

리를 질질 끈 채 서둘러 욕실로 향해갔다.

그렇게, 평온한 나날이 흐르고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과 다를 바 없는, 그렇고 

그런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언제 나오는 거지?」

하루 종일 멍한 머리로 집안을 쑤시고 다니다 오후 6시 반이 되자 걸려온 전화에, 

재현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막 나가려던 참이야. 그런데, 시간 남아돌아? 이런 일로 전화까지 다 하고?”

그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은 서진을 통해 오기에 그와 직접 통화를 하는 일은 드물

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겨우 이런 일로, 그것도 아직 근무 

시간에 통화를 한다는 건 좀 이상했다.

「이런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왜? 재미없어?」

“……별로 재미는 없어. 지금 나가려고 겉옷 입던 중이야.”

검은색의 벨트가 있는 두꺼운 겨울용 재킷을 걸친 뒤 단추를 잠그고 막 벨트를 여

미자 그가 답해온다.

「단추가 많은 옷이면 좋겠는데?」

그 말에 막 걸쳐 입은 상의를 내려다보자 사방에 달린 단추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무 거나 들고 나온 건데 목부터 가려진 스탠드칼라의 밀리터리 룩이라 짜

증날 정도로 단추가 많은 옷이었다. 목부터 어깨와 손목에까지 줄줄이 쓰지도 않

는 단추들을 달아 놨다.

“단추는 질리도록 많아. 그런데 그건 왜?”

「벗기는 재미가 있으니까.」

기가 막힌 그 답에 막 머플러를 꺼내려다 황당해 되물었다.

“미쳤어? 왜 이래?”

「재미있으니까. 어서 나와. 난 지금 시찰 중이니 시간 맞춰서 들어갈 거야. 서진

이도 없으니 먼저 올라가서 사무실에서 기다려. 비서실에는 얘기해둘 테니.」

“아냐, 그럼. 그냥 밖에서 기다릴게.”

「올라가 있어. 들어가서 결제해야 할 서류들 처리만 하고 곧장 나올 테니까.」

“알았어. 지금 어디야?”

「안산.」

“……그럼 일 봐. 나도 지금 곧장 나갈 거니까.”

「좀 더 얘기해봐.」

“왜?”

「전화로 대화하는 것도 재미있어서. 얼굴이 안 보이니 훨씬 분위기가 좋은데?」

확실히 그건 그렇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 냉랭한 분위기가 돌기 일쑤라 대화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막상 얼굴은 안 본 채 통화를 하니 대화가 꽤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분위기가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얘기하라고 해도…… 별로 할 얘기가 없잖아.”

「아무 얘기나 해봐.」

“시찰하러 갔다면서 통화하고 놀아도 돼?”

「상관없어. 그냥 보는 척하러 나온 거니까. 일종의 전시용이지.」

“보는 척만 하지 말고 제대로 보지 그래? 당신이 쳐다보면 전시용이 아니라 압박

용이 될 테니까.”

머플러를 하려다 귀찮아 그냥 다시 넣어두곤 장갑만 낀 채 천천히 방을 나서 현관

으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딱히 급히 전화를 끊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고 

또 그다지 불편하지 않아 통화를 계속하며 별채를 나서 기다리던 차에 올라탔다.

「지금 차에 탄 거야?」

“응. 날이 꽤 춥네.”

차 안은 히터를 올려놔 후끈거렸지만 별채를 나와 차에 올라타는 잠깐 사이 느낀 

공기는 꽤 매서웠다. 차고 건조한,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스치는 느낌에 절로 어

깨에 몸이 들어갔다.

벌써 이런 계절이구나 하는 생각에 별 생각 없이 말을 흘리자 그 역시 담담히 받

아친다.

「곧 12월이니까.」

그러고 보니 이제 11월의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 재원이 수능을 치렀다

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결과야 어떻든, 이제 그 녀석은 자유다. 그가 마음을 

돌린 덕에 재영의 유학은 무기한 멈춘 채였고 재원은 곧 대학생이 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있었다.

“회사까지 가는 건 처음이라 좀 이상한데…… 진짜 나가도 되는 거야, 나?”

「다른 건 신경 쓸 것 없어. 예약해놓은 식당에서 식사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

면 돼. 호텔 예약해놨으니 오늘은 안 돌아가도 돼.」

그 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자신을 대외적으로 내보이려는 

건지는 대강 알겠지만 호텔은 좀 이상하다. 아무래도 말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

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팔아두려는 것 같기는 한데 아들이라고 

자신을 끌고 다니면서 호텔이 함께 가는 건 좀 이상하다. 그냥 잠만 자고 나온다

고 해도 이상한데, 절대 잠만 자고 나올 리가 없다는 걸 알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

다.

“……호텔은 좀 이상한데……. 그냥 일찍 들어오면 안 돼?”

「이미 예약 끝냈어. 오늘은 금요일이니 주말 내내 호텔에 있을 거야. 집으로는 

안 돌아가.」

“……그래도 괜찮은 거야?”

「그래.」

짤막한 그의 답 뒤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서진의 말에 자신이 먼저 통화를 끝내기로 했다.

“일 봐. 끊을게.”

「그래.」

라는 말과 함께 뚝하니 전화가 끊겼다. 안 어울리는 짓들을 계속하는 그의 태도에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은 채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건물의 지하주차장에서 내려 기사의 패스로 통과를 한 뒤 건물 최상층에 도착한 

재현은 낯선 건물 구조에 어색함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회사라는 곳이 원래 이런 곳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카펫이 깔린 넓은 복도를 

걸어 사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자 대리석이 깔린 넓은 비서실이 눈에 들어왔다. 드

라마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분위기에 조금 기가 눌려 멈칫하자 안에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 말을 건넨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아…… 저,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는데요.”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녀의 답에 자신과 함께 올라온 기사가 그녀에게 말을 

건넨다.

“본가에서 오셨습니다.”

라는 그 말에 그녀가 놀란 듯 후다닥 책상에서 나서 앞으로 다가선다.

“죄송합니다. 아드님이 오신다고 해서…….”

당황한 듯 뒷말을 흐렸지만 그 뒤의 말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이

라고 하니 당연히 아주 어린아이를 예상했을 것이다. 소문은 들었다 해도 사람이

란 기본적인 상식선 안에서 상상을 하게 마련이니까.

“괜찮습니다. 안에서 기다리면 되나요?”

그 말에 흘깃 그녀의 책상 너머로 보이는 문을 바라보며 답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

덕인다.

“네. 안내하겠습니다.”

세 개의 책상이 보였지만 지금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건 그녀 하나뿐인 듯 그녀가 

먼저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는 옆에서 기다린다. 잠깐 당황한 순간 외에는 혜선처

럼 깍듯하고 빈틈없는 그녀의 태도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사무실 안으로 들

어서 그 안에 놓인 소파로 가 앉자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아뇨. 곧 오신다고 했으니 그냥 기다릴게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한참이나 어린 자신에게도 끝까지 존대를 하며 인사를 마친 그녀가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가 사라진다. 소리도 없이 닫히는 문에 다시 혼자가 되어 사무실 안을 돌아

봤다. 대리석으로 싸인 벽과 바닥, 그리고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예술품으로 도배

가 된 사무실의 한 면은 전면 창으로 되어 있어 한눈에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

사무실이라는 곳이 이렇게 호사스러운 건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주머니에서 핸

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먼저 서진에게 연락을 하려다 잠시 망설였다. 보통 때

라면 그냥 서진에게 전화를 했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의 번호에 먼저 손이 갔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그라는 이유가 반,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감

상이 드는데 그 감정적인 혼돈을 이길 수 없다는 이유가 반이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며 핸드폰의 액정을 손끝으로 쓰다듬다, 그의 번호를 찾

아 문자를 적었다.

『지금 도착했어. 사무실이야.』

문자를 적기는 했지만 막상 전송 버튼을 누를 때엔 조금 망설여졌다. 어차피 그도 

곧 도착할 시간이라, 그냥 연락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며 핸드폰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문 너머에서 실랑이를 하

는 듯한 소음에 핸드폰을 손에 든 채 문 쪽을 돌아보자 쾅- 하며 문이 열렸다. 그

리고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부사장님!”

작게 울리는 그 음성과 동시에 그 ‘부사장’을 눈앞에서 본 재현은 한숨을 내쉬

었다. 

숙부와 또 안 좋은 타이밍에서 마주치게 되어버렸다. 이 사람하고는 진짜 악연이

라는 생각에 핸드폰을 내려두는데 그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비서에게 소리친다

.

“……나가.”

“네?”

“나가 있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친 뒤 숙부가 문을 닫으며 성큼 안으로 들어서 앞으로 

다가온다. 살기등등한 그 기세에 무심히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먼저 입을 열었

다.

“아버지 시찰 중이세요.”

“알아.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아버지가 불러서요.”

“그러니까 왜 너를 부르냐고?”

호통을 치듯 고함을 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자 

그가 잇새로 낮게 목소리를 토해낸다.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얼굴을 들고 회사까지 찾아와?”

“……그 사람이 부른 거예요.”

“그러니까, 뭘로 부른 건데? 아들로? 아니면 정부로?”

일부러 시비를 거는 듯한 그 말투에 태연하게 답해주었다.

“호텔로 가려는 걸 보니 정부로 부른 거겠죠.”

자신이 듣기에도 철면피 같은 그 답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토해낸다.

“너, 진짜 뻔뻔하다. 기억을 찾았다더니 더 뻔뻔해졌어.”

“그 사람 아들이니까요. 볼 일 있으시면 조금 있다 오시죠. 이제 곧 들어오실 시

간 됐으니까요.”

핸드폰으로 얼핏 시간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형이 너한테 그런 것까지 보고해, 이젠?”

“정부니까요.”

“너…….”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숙부가 다시 고함을 내지르려는 순간 그의 등 뒤로 문이 

열렸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울려오는 그 소리에 사무실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

다. 그리고 그 안으로 느긋한 남자의 구두굽 소리가 울려왔다.

느릿하고 조용한, 우아하기까지 한 그 소리에 숙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안으

로 들어서던 남자가 불쾌한 듯 인상을 쓴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나지막한, 아주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에는 무서울 정도의 박력이 실려 있었

다. 험악한 그 분위기에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있자 그의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

선 서진이 서둘러 문을 닫는다. 그러자 겨우 숙부가 답한다.

“재현이가 왔다고 소문이 다 났어, 벌써. 어쩌려고 이래?”

그 말에 어깨가 굳어졌다. 겨우 몇 시간 사이에 회사에 소문이 났다니 조금 당황

스러웠다.

“그게 왜?”

“형이 사무실에 가족들 드나드는 거 질색한다는 건 사람들 다 알아. 어머니도 못 

오게 하면서 아들을 불렀다니 다들 비상하게 관심이 많다고. 게다가, 재원이나 재

영이라면 몰라도 이 녀석은…….”

억울한 듯 줄줄이 말을 내뱉으며 호소를 하는 숙부의 말을 그가 딱하니 잘라낸다.

“난 네게 내 사무실에 멋대로 들어오라고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언제나처럼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과 우아한 말투였지만 그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쭈뼛하니 피부 위로 바늘이 내리꽂히는 듯한 느낌

에 재현 역시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이 저런 식으로 말을 할 때엔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몸으로 여러 번 체험했기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

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앞에 선 숙부에게 다시 말을 던진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볼일 없으면 나가.”

“……그럼, 지금 저 녀석을 계속 사무실에 오가게 하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건 미친 짓이야. 벌써 이상한 소문들이 돌고 있다고.”

어제 서진이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의 말에 그가 서진에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웃어 보인다.

“소문? 어떤 소문?”

“…….”

“말해봐. 어떤 소문 말이지?”

“저 녀석이…….”

“내 아들 겸 첩이라고? 그게 왜? 어차피 사실 아닌가?”

씨도 안 먹힐 것 같은, 비웃음이 역력한 그의 말에 숙부가 입을 다물자 그가 이쪽

을 힐끔 바라보곤 코트를 벗어들곤 책상으로 돌아간다. 어색한 그 분위기 속에서 

서진이 들고 있던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은 뒤 사무실을 빠져나가자 의자에 기대앉

은 그가 천천히 숙부를 바라보다 마른 웃음을 흘린다.

뭔가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한 그 얼굴에 재현은 살짝 인상을 썼다. 웃고는 

있지만 지금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자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은 그가 자신을 부른다.

“이리 와, 서재현.”

부드러운 그 부름에 슬쩍 숙부를 돌아봤다. 숙부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눈치를 살피고 있자 그가 다시 한 번 이름을 불러온다.

“서재현.”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그 음성에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바로 그의 옆에 서자 그가 손을 뻗어 허리를 끌어당

긴다. 그 힘에 끌려 그의 의자 위로 몸을 기대는 순간 그가 목을 잡아끌며 입술을 

겹쳐온다. 명확한 의도를 담은, 일부러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혀를 섞는 음란한 

그 키스에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경악이었다.

가족들에게 이런 장면을 들킨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바로 정면에서, 그것도 여보

란듯이 이렇게 키스를 한 건 처음이기에 놀라고 당황해, 겨우 그의 팔을 잡고 애

원했다.

“그……만…….”

격렬한 입맞춤에 겨우 입술을 떼며 그렇게 말하자 그가 허리를 잡아당겨 자신을 

품에 안아든 채 숙부에게 말을 건넨다.

“이 정도면 내가 이 녀석을 사무실로 부르는 이유는 확실히 알았겠지?”

노골적인 그의 표현에 수치심으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자신의 입으로 첩이니 정부

니 언급할 때엔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숙부의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보

였다는 사실에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자 그가 다시 머리카

락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간다.

“이 김에 확실히 서열 정리를 해두지. 이건, 평생 나랑 한 침대 쓸 유일한 인간

이니 딱 그 정도로 대접해. 앞으로 영원히 내 사무실에 허락 없이 드나들 수 있는 

건 이 녀석뿐이야. 내 침실도 내 집도, 내 차도 마찬가지야. 넌 안 되지만, 이 녀

석은 돼. 이 정도면 서열 정리가 되지?”

확실하고 깔끔하게, 그의 기준에 있는 서열을 명확히 설명해주자 숙부가 기가 질

린 듯 중얼거린다.

“……이건 미친 짓이야, 형. 형, 지금 미친 거야.”

“그런가 보지. 더 할말 없으면 나가 봐. 그리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내 허락 

없이 내 사무실이나 주변에 얼쩡거리는 것들은 질색이야. 내 공간에 들어오는 것

도 내 물건에 손을 대는 것도 싫지만 가장 질색하는 건 힐끔거리며 내 일에 간섭

하는 거야. 머리가 돌은 아니니 이 정도면 잘 알아들었겠지?”

“…….”

“나가.”

나지막한 그 말에 등 뒤로 발걸음 소리가 울려온 뒤 곧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가 울려왔다. 숙부가 사라지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사무실 안의 분위기 에 겨우 겨

우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인상을 쓰며 그에게 따지듯 물었

다.

“이러려고 나 부른 거야?”

“어차피 소문난 김에 가릴 건 명확하게 가려두자는 거지.”

“가족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거기서 더 뭘 명확하게 해?”

“좀 더 대외적인 부분 말이야.”

느긋한 그의 말에 이번엔 재현이 숙부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 진짜 미쳤어?”

“다들 미쳤다니 미친 게 맞겠지. 잠깐 기다려. 몇 가지 서류만 처리하면 되니까.

휙하니 돌아앉아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보는 그의 모습에 이제야 슬슬 그가 자신

을 불러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설마설마 하긴 했었지만 이제야 명확해졌

다.

“날 끌고 어딜 다니려고?”

“재미있는 곳.”

그 답에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뒤로 돌아섰다.

“집에 갈래.”

“기다려. 10분이면 되니까.”

“내 얼굴 팔러 다니는데 좋다고 따라 나가라고?”

“저녁 식사 후에 가볍게 술 한 잔 하는 것뿐이야. 집안에 처박혀서 약이나 먹는 

것보다는 가끔씩 머리는 식히는 게 좋아. 더는 네 존재를 감출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그건 알았다. 지금 충분히 알아들었다. 계속해서 숨기고 숨기던 아이가 의도치 않

게 겉으로 드러나 추문이 돌고 있으니 더는 수군거릴 수 없게 대놓고 보여주겠다

는 그의 의도는 충분히 알았다. 사람들이란 숨기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지, 겉으로 

당당히 내보이는 이야기에는 금세 식어버리니까.

문제는 그가 사실화하려는 소문의 종류였다.

“지금, 당신 아들 얘기를 하는 거야? 정부 얘기를 하는 거야?”

“둘 다라고 해두지.”

기가 막힌 그 답에 재현은 뒷목이 뻣뻣해지는 듯한 느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 아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하려는 거야?”

“고개 뻣뻣하게 들고 다니게 해주겠다는 거야. 내 아들이라면 어딜 가든 확실히 

대접은 받을 테니.”

“그런 대접 받고 싶지 않아.”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든 앞에서라도 제대로 서열을 정하고 대접을 받아. 이용

할 수 있는 건 이용하고, 뒤에서 떠든다면 닥치게 만들어. 내 옆에 서서 당당하게 

큰소리 쳐보라고. 네가 숨을수록 사람들은 더 떠들어대. 막상 보면 별거 아니지만 

보이지 않으면 다들 망상에 부풀거든.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고

, 아무렇지 않게 넘겨.”

“난 그런 건 못 해.”

절대, 그런 일은 할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자, 그가 앞에 쌓인 서류들 중 하나를 

손에 들며 답답히 답한다.

“언제나 느끼지만, 넌 널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그런 건 누구도 못 해. 당신 빼고는.”

“아니, 할 수 있어. 앉아서 기다려. 빨리 끝내고 나갈 테니.”

“돌아갈 거야.”

“앉아.”

강압적인 그 말에 조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애써 화를 내리누른 채 얌전히 소파

에 가 앉았다. 이젠 뭐든 될 대로 되라는 기분이라 소파에 기대 앉아 한숨을 쉬자 

막 서류에 사인을 하던 그가 힐끔 이쪽을 바라본다. 탐색하는 듯한 그 시선에 일

부러 그쪽을 보지 않은 채 대꾸했다.

“왜?”

“신기해서.”

“뭐가?”

“네가 고분고분한 게.”

“반항해봤자 나만 손해니까.”

딱 잘라 말한 뒤 핸드폰을 꺼내들고 괜히 인터넷을 켜 검색을 시작하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다른 서류를 손에 든 그가 서류를 내려다보며 툭하니 말을 던진

다.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네 머리통은 하도 복잡해서 말이지.”

“복잡할 거 없어. 당장 이 사무실을 나가더라도 밖에는 서진 형이 서 있을 거고 

그 옆에는 기사들도 대동하고 있겠지. 회사 안에서 난동 피우고 끌려와봤자 나만 

손해잖아. 당신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쓸 테니까.”

“머리 회전은 빨라서 좋군.”

“당신 말대로, 당신을 많이 닮은 모양이지.”

딱 잘라 답한 뒤 화제의 검색어에 뜬 연예인 이름을 클릭한 뒤 줄줄이 뜨는 기사

들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 역시 조용히 다시 서류에 집중한다. 빠르게 펜을 굴리는 

소리만이 울리는 사무실 안에서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자 탁- 하는 소리와 함

께 의자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어서.”

서류를 제대로 보기나 했는지 순식간에 쌓인 서류들에 사인을 마친 그가 내뱉는 

말에 놀라 재현은 그를 돌아봤다.

“벌써 다한 거야?”

“이 따위 시시한 업무에 시간과 공 들일 여유는 없어.”

“중요한 거 아냐?”

“이미 다 보고 받은 일들이야. 그렇게 욕을 먹고도 실수를 할 머저리는 회사에 

안 두니 걱정 말고 일어서.”

옷걸이에 걸어둔 코트를 손에 든 그가 책상을 나와 다가서는 모습에 재현 역시 핸

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코트를 걸쳐 입는 그의 뒤를 

따르며 그에게 물었다.

“어딜 가는 거야?”

“식사하러.”

가방은 그대로 둔 채 나서는 그의 모습에 옆에 있던 가방에 손을 뻗으려 하자 문

으로 다가서던 그가 인상을 쓴다.

“내버려둬. 그런 거 들고 다니라고 부른 거 아냐.”

조금 기분이 상한 듯한 그 말에 얌전히 가방을 내려둔 재현은 그의 뒤로 다가서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재킷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사무실을 나와 비

서실을 통과하자 안에 있던 서진과 방금 전 봤던 비서, 그리고 대기 중이던 그의 

기사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다들 퇴근해. 그리고 차 키.”

라며 그가 먼저 기사에게 말을 걸자 기사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본다.

“네?”

“내가 직접 운전할 테니 모두 퇴근해.”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짤막한 그의 답에 서진이 잠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재현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을 못 들었다면 몰라도 들어버린 

이상 그가 불편하다. 지금까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오던 그의 감정을, 이젠 여실

히 알아버렸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지, 확실히 깨달아버렸다. 그러니 더는 그를 의식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 사람은 그의 사람이다. 어떻게 해도, 서진은 충직한 그 남자의 개였다. 그러니 

여기까지다. 자신 역시 딱 그 선까지만 지킬 것이다.

“어딜 가는 거야?”

비서실을 나와 복도의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그에게 묻자 그가 엘리베이터의 버튼

을 누르며 툭하니 답한다.

“식사하러 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어디로 가냐고?”

“식당.”

“말장난하지 말고.”

서서히 움직이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조금 짜증을 내자 그가 묻는다.

“뭐가 불안해?”

“전부.”

“그냥 데이트라고 생각해.”

짤막한 그 답에 놀라 그를 돌아보자 때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리곤 그

가 올라타며 말한다.

“타.”

그 말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자 그가 턱짓을 한다. 어서 타라는 그 신호에 얌

전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서서히 문이 닫힌다.

점점 닫혀가는 공간 속에 서 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또 다시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 직접 차문까지 열어주며 답지 않

게 다정하게 구는 그를 본 순간, 불안은 현실이 되어버렸다.

“뭐하는 거야, 지금?”

정확히 세 시간, 회사를 나와 딱 봐도 상류층 인사들이 그득한 레스토랑의 가장 

훤히 보이는 자리에서 식사를 한 뒤 이번엔 호텔의 바로 들어서며 재현은 그렇지 

않아도 먹은 게 얹힌 상태에 두통까지 일기 시작했다.

이미 회사의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리며 지하주차장을 가로지르는 사이 수많은 사

람들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퇴근시간과 겹쳐 주차장을 오가던 이들이 힐끔거리는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피곤했는데 그가 직접 운전석에 올라타는 모습에 다들 수군

거리는 소리까지 울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소리가 잘 울리는 주차장 내에서 수군

거리는 그 소리에 서둘러 차에 올라타 회사를 빠져나왔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참

을 만했다. 하지만 그는 아예 작정을 하고 얼굴을 팔기로 했는지, 그를 아는 체하

는 이들이 한 트럭은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신을 데리고 가 식사를 하면서 일부러 

그의 지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해주지 않았다. 말로는 얼굴을 팔러 다닌다고 하면서

도 의뭉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고 그의 그런 태도에 그와 인사를 하던 

사람들은 묘한 시선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숨겨놓았던 그의 아

들로서 자신을 인식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의미로 이해한 건지 알 수 없기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덕분에 나온 음식들을 반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겨우 그곳을 

빠져나오며 안도하려는 순간 그는 이번엔 호텔의 라운지로 자신을 끌고 왔다.

“내 얼굴, 이미 충분히 팔았어. 그만 돌아가.”

“데이트라고 했잖아.”

“……뭐?”

분명 잘못 들은 거라 여겼던 그 말에 놀라 멈칫한 사이 그가 허리를 안은 채 잡아

끈다. 황당한 그 태도에 놀라는 사이 얼결에 안으로 들어서버렸다. 어둡고 조용한 

라운지의 분위기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눈치를 살피고 있자 안으로 들어선 그가 

코트를 맡긴 뒤 먼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앉아.”

명령에 가까운 그 말에 잠시 망설이다 자리를 잡고 앉자 바텐더가 그에게 아는 척

을 해온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서글서글한 인상을 한, 유난히 붙임성이 좋아 보이는 바텐더의 질문에 그가 단조

로이 답한다.

“응. 킵해둔 멕칼렌으로.”

“곧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예의 바르고 깔끔하게, 자신에게는 고갯짓으로만 인사를 한 뒤 곧 잔을 준비하는 

바텐더의 모습에 재현은 조금 긴장을 한 채 테이블 위를 내려다봤다. 바텐더는 상

류층 손님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아는 듯,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걸지 않으

면 그다지 아는 체하지 않았고 딱히 누구냐 캐묻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불

편하다. 이런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고, 또 하필 옆의 남자와 함께라는 게 마음에 

걸려 주먹을 세게 쥐자 앞에 놓인 잔속으로 술이 반쯤 찬다. 찰랑거리는 투명한 

액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사이 앞에서 잔을 채워주던 바텐더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은 쉬러 오신 건가요?”

“응.”

“오랜만이시네요, 이런 것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가볍게, 아주 친숙한 사이처럼 바텐더와 대화를 나누던 그가 자신을 돌아본다. 그 

시선에 여전히 긴장한 채 술잔을 내려다보자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쓸어내

린다.

“술 잘하잖아. 양주는 별론가?”

“…….”

“마음에 안 들면 칵테일로 주문해.”

“……괜찮아.”

겨우 술잔을 손에 들자 그의 손이 귓불을 만지작거린다. 노골적인 그 행위에 놀라 

그를 돌아보자 그가 피식 웃는다. 여보란 듯, 대담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그 

행동에 대체 무슨 생각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가 귓가에서 손을 떼곤 다시 잔

을 손에 든다.

묵묵한 그 모습에 시선을 돌려 다시 잔을 내려다보며 침묵하자 바텐더가 다시 가

볍게 농담을 던진다.

“부끄러움이 많은 분인 모양이네요.”

“부끄러움이 아니라, 의심이 많지. 내가 뭘 하든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니까. 그

렇지?”

바텐더를 향해 답하다 이번엔 자신에게 돌아온 질문에 재현은 당황해 그를 돌아봤

다. 오늘 그는 이상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너무 이상하다. 도저히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겁먹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바텐

더에게 말을 이어간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지. 자기가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문

제에 대해서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겐 다정하게 대하면 도망가

니 더 난폭하게 대할 수밖에.”

마치 자신은 없는 사람인 듯 반복하는 그들의 대화에 재현은 잔을 세게 쥐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가 푹하니 찔리는 듯 아픈 느낌이었다.

대체 왜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의 옆에서 바텐더와 이런 대화를 하는 건지 알 수 없

어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넘기자 타들어갈 듯한 감각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독한 그 기운에 인상을 쓴 채 잔을 내려두는 순간, 바텐더가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그건 상대가 잔인한 건데요?”

“그래. 잔인하지.”

“그럼, 더 다정하게 대해주셔야겠네요. 의심이 사라질 때까지.”

“글쎄…… 그랬다간 자살을 할 것 같은데?”

그 말과 동시에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그를 돌아보자 그가 지긋이 자신을 응시해

온다. 마치 답을 구하는 듯한 그 시선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과 밀려오는 두려움에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던 사이 그가 잔을 

비우며 다시 테이블 위로 내민다. 그러자 그의 잔을 채우던 바텐더가 느긋하게 답

해준다.

“가슴 아프시겠군요.”

“어쩔 수 없지. 아주 겁이 많거든. 뭐든 일단 의심하고 무서워하니까.”

듣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로 마치 녹아들어갈 것 같은 그의 말투에 몸을 경직시

키자 바텐더가 부드럽게 그의 말에 받아친다.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네요. 사장님과 그 분을 위해, 오늘은 좀 더 특별한 술을 

준비해드리고 싶은데요.”

“좋지, 그런 것도.”

“그럼…….”

계속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에 재현은 잔을 내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갈래.”

“왜?”

“머리 아파. 속도 안 좋고.”

서둘러 높은 의자에서 내려와 바를 빠져나가자 바로 뒤에서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왔다. 어두운 바를 가로질러 자신의 뒤를 따르는 그 소리를 무시한 채 엘리베

이터 쪽으로 향해가자 그가 걸음이 빨라진다. 그리고 곧 자신의 팔을 잡아끈다. 

그의 손을 뿌리치려 팔을 흔들자 그가 팔을 세게 쥔 채 나긋한 투로 말을 걸어온

다.

“왜? 또 무서워졌어?”

정확히, 자신의 속내를 간파한 그의 말에 걸음을 멈춘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

를 돌아보자 복도에 우뚝 선 그가 빙그레 웃어 보인다.

“뭘 그렇게 놀라지? 네 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했잖아. 넌 항상 그런 식이니

까. 조금만 다정하게 대하고 진심을 보이면 무서워서 도망치려고 하잖아. 그래서, 

이번엔 어디로 도망칠 생각이지? 얌전히 병원을 오가면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고 

어울리지 않게 백화점을 쓸고 다니면서 내가 뭐라고 하든 순종하고. 포기한 척 얌

전히 굴면서 내가 방심할 때를 노리는 거 아니었어?”

정확하게 허를 찔렸다.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그의 말에 허탈한 숨이 터져나갔다.

“그래서 오늘 날 불러낸 거야? 내가 진짜 도망치나 확인하려고?”

“……반쯤은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이제 됐겠네. 난 어차피 당신 못 이겨. 이제 만족해?”

“그건 당연한 거니 만족할 것도 없어. 그래서, 대체 무슨 생각이지?”

“무슨 상관이야? 이렇게 완벽하게 간파당하고 있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데?”

“당신.”

직선적인 그 답에 그의 눈빛이 아주 조금이나마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히 보인 그 혼란에 한동안 조용하던 가슴이 지끈하니 울려왔다.

확실히 이 남자는 좋지 않다. 아주, 좋지 않다.

또다시 시작된 가슴의 통증에 이를 악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

다.

“어째서?”

“……그걸 진짜 몰라서 물어?”

“모르겠으니까 네가 설명해봐.”

자신은 속이 타고 화가 나고 무섭고 끔찍해서 미칠 것 같은데 여전히 냉정하고 여

유로운 그의 표정과 말투에 이를 악문 채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답해주었다.

“지금 모른다면 내가 말해도 당신은 이해 못할 거야. 아니, 죽었다 다시 깨어나

도 당신은 모를 거야. 당신은 여기가, 망가졌으니까.”

그의 가슴을 손끝으로 누르며 그렇게 말하는 순간 칭-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려서는 사

람들이 옆을 스쳐가며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너무 따갑고 아파 

팔을 잡은 손을 뿌리치려했지만 그가 먼저 팔을 당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다

. 그리고 망설임 없이 최상층의 버튼을 누른다.

조용히 닫히며 위잉거리며 움직이는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집에 가. 이 이상 얼굴 팔고 싶지 않아. 당신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 이제 소문 

다 날 텐데 여기서 소문을 더하긴 싫어.”

“그럼 말해.”

끈질기다 못해 집요한 그의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그게 왜 알고 싶어? 어차피 믿지도 않을 거잖아.”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해.”

“언제부터 남의 생각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데?”

“오늘부터.”

기가 막힌 그 답에 실소했다.

“말장난하지 말라고 했지. 하나도 재미없어.”

“그럼 말을 바꾸지. 너니까 알아야겠어. 네 생각은 관심 있어.”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거야?”

“왜인지는 이미 알고 있잖아.”

명확히 알 수 없는, 하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그의 진심에 절망적인 얼굴로 그

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이는 건지, 대체 뭘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건지

. 그가 원망스럽고 또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해져 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미칠 것 같으니까.”

화가 난 듯 조금 높아진 음성으로 마지막 말을 내뱉은 그가 입술을 겹쳐왔다. 거

칠고 강하게, 마치 물어뜯기는 듯한 그 키스에 머리가 아찔해져왔다. 욕망이나 본

능보다는 복잡한 감정의 격류와 이 숨 막히는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정확히는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그에게 끌려가주기로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열고 들어선 룸 안에서 침실로 들어설 여유도 없이 응

접실에서 몸을 겹쳤다. 입고 있던 두꺼운 옷들을 벗어던지고 아무 말 없이 소파에 

누워 서로의 몸을 애무하고 키스를 하며 삽입을 했다.

굶주린 듯 비명 같은 교성을 내지르며 몇 번이나 사정을 하고, 그에게 안겼다.

그도 자신도 한계를 모른 채 끝까지 내달리기만 했다. 그에게 안기는 순간만은 아

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원하는 대로 소리치고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팔목을 세게 잡히고 어깨를 물어뜯기면서도, 고통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 통증마저도 쾌락이 되어 몸을 덮어갈 뿐이다.

두 번은 소파에서 그리고 다시 한 번은 침실로 옮겨 침대 위에서 관계를 가진 후, 

그대로 탈진한 듯 침대로 쓰러져 내렸다. 그리고 그날 밤은 약이 없어도 푹 잘 수 

있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모처럼 약 없이 정신없이 단잠에 빠져있던 재현은 어스레한 빛 아래에서 눈을 떴

다.

활짝 열린 커튼 틈으로 연한 빛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여명이었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멍하니 그 빛을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앉은 재현은 조용히 옆에 누운 남자를 내려

다봤다. 푹신한 베개에 기댄 채 정신없이 잠이 든 남자의 얼굴은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여전히 젊고, 여전히 아름답고,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위로 진한 남색의 빛이 가라앉아간

다. 아니, 어쩌면 그건 빛이라기보다는 어둠이었을지도 모른다.

깊고 진한, 그리고 차가운 새벽의 어둠.

이 남자와 너무나 어울리는 그 어둠에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보기에는 더없이 차갑기만 할 것 같던 그의 피부는 자신보다도 뜨겁고 부드러웠다

.

그래,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보기에는 무서울 정도로 차지만 손이 닿는 순간에는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위험한 남자다. 그 외면만을 보고 섣불리 손을 대거나 다가서면 다치게 된

다.

“진짜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희미한 어둠 속에서 재현은 그렇게 작게 물었다. 잠든 그가 대꾸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주 작게 속삭이듯 그렇게 묻고는 다시 혼잣말을 이어갔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거기까지 말한 뒤 재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끊었다. 차마 그 뒤의 말은 할 

수 없다는 듯, 고통스러운 얼굴로 옆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던 재현은 다시 한 번 

길게 숨을 내뱉은 뒤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 침대에 누

우려던 순간이었다.

손목이 잡혔다. 갑작스러운 그 힘에 놀라 그를 돌아보던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 깊은 어둠을 담은 채 무겁게 빛나고 있는 그 눈동자에 숨을 멈추자 그가 묻는다

.

“네가 나를, 뭐?”

방금 깬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또렷한 시선과 발음에 놀라 그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엉뚱한 질문을 내뱉었다.

“……안 자고 있었어?”

“너 때문에 깼어. 말은 끝까지 해야지. 네가 나를 어쨌다는 거지?”

“…….”

“대답해.”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에 재현은 그를 무시한 채 다시 돌아누우려 했

다.

“더 자. 아직 새벽이야.”

말을 끝낸 뒤 그의 손을 떨쳐내려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그의 힘에 끌려 침대에 

누운 채 고개를 들자 바로 위에서 그의 시선이 내려왔다. 마치 내리꽂히는 듯 강

한 그 시선에 숨을 멈추자 그가 아주 나긋한 음성으로 다시 묻는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뭐지, 그 뒤는?”

“……말하고 싶지 않아.”

“어째서?”

“말하는 순간 인정하는 게 되니까.”

“무엇을?”

그 물음에 재현은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게 왜 알고 싶은데? 어차피 안 믿을 거잖아.”

무덤덤한 시선을 한 채 단호히 말을 던지자 그가 설핏 웃는다.

“그래, 안 믿어. 믿을 수가 없지. 너한테는 벌써 몇 번을 속았는지 셀 수도 없으

니까.”

“그래. 그게 좋아. 우리는 딱 그 정도가 좋아.”

서로 믿지 말고, 진심도 보이지 말고, 거짓말하고, 속고 속아주고. 

그와 자신은 딱 그 정도가 좋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겉으로는 웃으며 아

무렇지 않은 척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끔은 연인처럼 굴고, 또 가끔은 냉랭하게 

싸우고, 또 가끔은 사이좋은 부자인 척 연기를 하고.

그렇게 사는 게 좋다. 서로를 믿고 상대에게 진심을 보인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 그와 자신은 그럴 관계가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였다.

그러니까 딱 이 정도가 좋다.

여기까지가, 그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모처럼 악몽도 약도 없이 잠을 푹 자서인지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맑고 두통도 없

었다. 하지만 오늘은 심장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잠시 괜찮았던 가슴의 통증이 다

시 시작되었다.

그 통증이 싫었다. 두통보다도 불면증보다도, 그게 끔찍하게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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