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0 (11/14)

Chapter 10

거의 그에게 매달리듯 이끌려 겨우 별채로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한 일은 샤워 

룸으로 달려 들어가는 거였다.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서, 그리고 터져버릴 것 같아서 찬물을 틀고 머리를 갖다댔

다. 차가운 물줄기가 전신으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얼음물처럼 차가운 그 물줄

기에도 정신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과열된 뇌는 폭주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미

친 듯이 내달리고 있었다.

하나하나, 모든 게 떠올랐다. 그렇게나 생각해내려 할 때는 하나의 단서도 주지 

않던 기억이라는 것들이, 지금 순간 폭포수처럼 터져 흐르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멈추라고 해도 멈추질 않는다. 

이대로는 머릿속이 타다 터져버릴 것 같아 더 물을 틀려 손을 뻗는 순간, 차갑게 

식은 손 등 위로 뜨거운 손이 겹쳐졌다. 그리고는 샤워기를 끈다.

순간 차가운 물줄기가 멈추고 수건이 머리를 덮었다. 차갑게 식은 몸을 감싼 수건 

위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기억이 좀 돌아왔어?”

쏟아지던 물줄기보다도 더 차가운 그 음성이 귓가를 때리는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덜덜 떨려오는 몸에 그에게 작게 대꾸했다.

“손대지 마. 나한테…… 손대지 마.”

수건을 뒤집어쓴 채 그렇게 가늘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지만 그는 역

시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물에 젖은 자신의 어깨를 잡아 돌린 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줄 뿐이었다.

다정하고 침착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천천히 젖은 머리카락을 조심스

레 매만져주었다. 하지만 그 손길에도 도저히 떨림은 멎지 않았다.

그냥 무섭고, 또 무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서 

있자 그가 눈가에 입을 맞춰준다.

“이미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었어. 너랑 나, 단 둘이면 돼. 다른 건 생각할 

필요 없어. 다른 건 쳐다보지 말고 신경 쓸 것도 없어. 그냥, 너랑 나 단 둘이만 

세상에 있다고 생각해. 그럼 아무 문제없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재원보다도 더 어리고 현실성 없는 그의 말에 허탈한 한숨

이 터져나갔다.

“그런 거 못 해. 당신은 해도, 난 못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답하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의 손이 고개를 들

어올린다. 그리고 눈을 맞춰온다. 여전히 차기만한 그 눈을 마주한 채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고 있자 그가 속삭인다.

“아니, 할 수 있어. 넌 날 많이 닮았으니까. 질릴 정도로 닮아서…… 널 보면 화

가 나 미치겠단 말이지.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라. 하지만 널 

죽여 버리면 더 미칠 것 같고, 한 번쯤은 죽도록 패버리고 싶은데 손은 댈 수 없

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네가 말해봐, 서재현. 이건 뭐지?”

조용하고 나직하게 이어지는 그의 말과 함께 깊고 어두운 눈동자가 새파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차다. 하지만 뜨겁다. 오싹할 정도로 차갑지만 동시에 불처럼 

뜨거운 빛이었다. 창백하고 차지만 뜨거운 겨울의 햇살처럼, 그 시선이 자신의 몸

을 관통해간다.

그 눈빛으로 알아버렸다. 그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는 걸.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열정이 무섭고, 그 열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는 사

실을.

“대답해봐. 내가 왜 이러는지, 왜 널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는지, 네가 말해봐.

그런 걸 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고, 이미 모든 것들이 

틀어져 엉망이 된 채였다.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원상태로 되돌

려야 한다.

하지만…….

“다른 건 생각하지 마. 너와 나 단 둘만 있으면 돼. 날 사랑한다고 했던 걸 기억

해. 그리고 사랑하는 척해. 거짓말이라도 속아줄 테니까.”

알고 싶지 않지만 순식간에 이해해버린 그 말에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

고 있자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빠르게 옷자락이 벗겨져 나간다.

좁은 샤워 룸 안에서 순식간에 알몸이 된 채 그의 품에 안겼다.

싫다는 말을 할 틈도, 그런 생각을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젖은 옷자락을 벗겨낸 

그는 순식간에 식어 있던 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알몸이 된 채 그의 입술과 

손길 하나하나에 녹아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 진저리가 쳐졌지만 지금은 그가 주

는 쾌락에라도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자신이 감당하기엔 벅차다.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수가 없어 

그에게 매달린 채 스스로 몸을 열었다.

기가 막히게도, 트라우마 따윈 없었다. 기억이 돌아왔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그의 

손길에 반응하고 그에게 안기는 순간 신음하고 있었다.

좁은 구멍을 손끝으로 벌려 강제로 안이 꿰뚫린 순간에도 자신은 그의 목에 매달

린 채 헐떡거릴 뿐이었다. 그저 삽입을 한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져서, 고통 

따윈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벽에 등을 기댄 채 그의 품에 안긴 채 신음했다.

그의 말대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주는 쾌감에 빠져 그냥 모든 

걸 잊고 싶었다.

“좋아. 거기…… 멈추지…… 마.”

나른하면서도 강렬한 쾌감이 허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그의 아래에 깔린 채 그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자신은 연신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가 안쪽을 세게 쳐올릴 때마다 느껴지는 쾌감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과도한 쾌락에 휩쓸려 

그의 손을 잡아 손끝을 핥으며 유혹하고 가슴을 만져 달라 손을 잡아끌며 섹스에 

미친 창녀처럼 몸을 뒤흔들 뿐이다.

욕실에서 한 번 사정을 한 뒤 다시 침대로 돌아온 후 그는 당연한 듯 다시 자신의 

위로 올라타 벌어진 그 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아직 남아 있던 그의 정액 덕

에 부드럽게 열린 그 안으로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 순간이 좋다. 이성도, 생각이라는 것도 날아가 버린 그 순간의 쾌감이 좋았다.

침대에 누워 허리를 휜 채 마음껏 신음할 수 있는 순간이 좋다.

“거기, 더! 앗!”

하반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에 수치도 잊은 채 더 해달라고 애원하며 그의 성

기를 조여 대자 그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숨을 몰아쉰다.

낯선, 하지만 동시에 낯익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교태를 부리듯 허리를 비

틀자 그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춰준다. 마치 달래듯 부드러운 입맞춤과 함께 그가 

속삭여온다.

“원하는 만큼 해줄 테니 초조해하지 마.”

달콤한 그 음성에 몸이 달아올랐다. 다정하기보다는 좀 더 거친 움직임을 원하기

에 숨을 몰아쉬며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그를 끌어안으며 교태를 부렸

다.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해줘. 갈가리 찢겨도 좋으니까…… 더 깊이 넣어줘. 어서

…….”

지금 자신의 위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마약 같은 그 관

계 자체에 빠져 눈물까지 흐르며 신음만 할 뿐이다. 어서 그를 갖고 싶어서, 좀 

더 그가 더 깊은 곳을 엉망으로 헤집어주기를 바라서, 그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 그리고 연신 숨을 헐떡이며 졸라대자 그가 손목을 내리누른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질나게, 천천히 내벽을 문지르기만 하는 그 움직임에 안달이 났다.

“깊이 찔러줘. 더 빨리.”

발작을 하듯 몸을 뒤흔들며 그의 성기를 물어뜯을 듯 아래쪽에 힘을 주자 그가 인

상을 찌푸린다. 낮은 신음을 토해내던 그가 다시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

다.

방금 전과는 달리 거칠고 빠른 그 움직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간다.

“아, 아윽!”

집요하고 강하게, 그 부분을 날카롭게 찔러 올리는 움직임에 숨이 차오르고 머리

가 텅 비어간다.

진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더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의 안쪽을 거칠게 헤집을수록 점점 쾌감은 강해지고, 그 쾌감에 중독 된 

채 자신은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 순간만은 짐승이었다.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짐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으앗!”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깊이 안쪽을 찔러 올린 그의 움직임이 멈추며 몸 안에 그

가 사정을 했다. 그 순간 자신 역시 두 번째의 사정을 한 뒤 거친 숨을 토해냈다.

몸 안에서 그가 정액을 쏟아내는 순간이 좋다. 몸 안이 젖어 들어가는 그 감각이 

좋았다. 안쪽이 그의 정액으로 가득 차는 순간의 환희는 그 어떤 절정의 순간보다

도 강렬했다.

어쩌면 자신의 동생들이 될지도 모를 그 정액들이 몸 안을 채워가는 순간, 자신은 

최고의 환희를 느꼈다.

미친 거다. 확실히, 자신은 미친 것 같았다.

절정의 시간이 흐른 뒤 찾아온 허탈함과 자괴감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눈가에 입을 맞춰온다. 진짜 사랑스러운 이를 다루듯 

조심스럽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그 손길과 입술에도 멍하니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있자, 마치 자신의 속내를 읽어낸 듯 그가 말한다.

“괜찮아.”

“…….”

“넌 괜찮아.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너랑 나 둘뿐이야.”

“…….”

“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오늘은 푹 쉬어.”

눈가에 닿아오는 그의 입술과 함께 그답지 않은 자상함과 부드러움에서 그의 걱정

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다정함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도 자신이 기

댈 수 있는 건 그 사람뿐이었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칠 수 있는 사람

도 그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안겨 잠을 잘 수 있는 것도 그뿐이다. 그가 모든 걸 망쳐놨음에도 지금 자

신에겐 그밖에 남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세계에는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무칠 정도로, 고독했다.

몸을 덮어오는 서러움에 따뜻한 그의 체온에 안긴 채 눈을 감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한 마디가 주문이 된 듯 정신이 나른하게 가라앉아간다.

몸은 전혀 피로하지 않았지만 연이은 충격으로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높은 하늘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이 실내로 들어와 

진한 장미향을 품은 채 머리카락을 나부낀다.

갖가지 장미들의 향이 섞인 그 바람에 그의 무릎을 베고 누운 채 책을 보다 책장

을 덮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얇은 잡지를 왼손에 든 채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가 흘깃 시선을 던진다.

『왜?』

『……그냥. 바람이 기분 좋아서.』

그 실없는 답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려 잡지를 바라본다. 

심각한 얼굴로 잡지를 보는 그 얼굴에 문득 웃음이 나왔다.

『또 왜?』

『잡지를 너무 심각하게 보니까 웃겨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보고 싶어?』

그 질문에 그가 들고 있던 잡지의 타이틀을 보곤 다시 보고 있던 책을 들어올렸다

. 그리곤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니. 경제잡지 같은 건 재미없어.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그렇겠지. 넌 일 더하기 일은 이가 돼야 하는 놈이니까. 삼이 돼도 안 되고, 사

가 돼도 안 되지.』

고지식하고 답답한 자신의 성격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그 말에 ‘난 원래 그래.

’라고 퉁명스레 답한 뒤 다시 책을 바라보고 있자 그의 손이 이번엔 귀를 간질이

며 더듬어온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옆에 앉아 있거나 이렇게 가끔 

시간이 날 때 침대나 소파에 나란히 눕거나 앉아 책을 보거나 할 때는 계속해서 

머리카락이나 목덜미를 지분거리곤 했다. 처음에는 그게 귀찮고 번거로웠지만 지

금은 익숙해져 오히려 그가 만지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라 목덜미를 더듬다 뺨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 다시 책에 집중하려 하는데 문득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다시 책을 내려두고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온다. 그리고 곧 입술이 겹쳤다. 포근하고 상냥하게 스치는 그 입맞춤에 눈을 

감았다 뜨자 그가 다시 잡지를 손에 든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해 보이는 그 모습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설렘, 혹은 충

동, 아니면 저릿한 통증 같은 이상한 그 느낌에 살짝 인상을 쓰며 그를 보고 있자 

그가 툭툭 자신의 손에 있던 책을 두드린다.

『책이나 봐.』

『…….』

『아니면, 침대로 갈래?』

그답지 않은 조금 짓궂은, 장난스러운 그 말에 다시 책을 들어올렸다.

『……책이나 봐. 휴일 낮은 좀 건전하게 보내자고.』

『휴일 밤은 괜찮고?』

낮은 웃음소리와 부드러운 목소리. 그건 진짜 그답지 않은 말투와 행동이었다. 하

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본가를 나와 단 둘이 살게 된 후로 아주 가끔씩, 그가 기

분 좋을 때만 보이는 그 미소와 악동처럼 짓궂은 말투와 행동들이, 마음을 설레게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진짜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었다.

단 둘이, 아무도 없는 곳에 둘만 있을 때엔 보통의 연인처럼, 진짜 사랑하는 사람

들처럼 보내곤 했으니까.

자신은 그를 속이기 위해, 그리고 그는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연인놀이에 푹 

빠져 있을 때였으니까…….

별 관심도 없는, 서재에서 아무렇게나 꺼내온 책을 손에 든 채 다시 읽던 줄을 찾

으려는데 그가 갑자기 툭하니 말을 던져왔다.

『역시 난 건전하고는 안 맞아.』

『……뭐?』

라는 물음이 끝나자마자 그가 자신의 손에 있던 책을 빼앗아 툭하니 의자 위로 내

던진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잡지 역시 아무렇게나 던져두곤 그대로 자신의 위

로 덮쳐온다.

『뭘 하는 거야?』

『휴일 낮부터 침대는 싫다니 화원에서 하자고.』

진짜로 하겠다는 듯 그의 무릎 위에 누워 있던 자신을 밀어낸 뒤 자신의 위로 올

라타는 그를 바라보자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여기서 하려고?』

그 물음에 그가 가볍게 입을 맞춰온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우리 둘뿐이야.』

쓸데없이 넓은 화원을 낀 복층의 아파트에는 분명 그와 자신뿐이었다. 이 집을 오

갈 수 있는 건 평일 낮, 자신과 그가 집을 비운 시간에 청소와 빨래 요리를 위해 

오가는 아주머니뿐이었다. 서진 역시 그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올 수 있고, 다

른 사람들은 아예 이 아파트 근처로도 올 수 없다.

그게 이 집으로 나와 사는 순간 그가 정한 규칙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사람들 중 

그 규칙을 어길 간 큰 사람은 없다.

이 아파트는 그와 자신만의 성이었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창공에 지어진 그와 자

신만의 밀월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러니 침실이든, 화원이든 가릴 이유가 없었다.

유리로 된 화원의 천장으로는 바로 파란 하늘이 보였고, 따뜻해진 날씨에 화원의 

문을 열어둔 채라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사방이 개방된 곳이

었지만 어차피 이 화원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화원은 이 아파트 단지에서

도 가장 높은 곳이었다.

『허리 들어.』

집안이라 편안하게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바지를 끌어내리는 그의 말에 얌전히 허리

를 들어 올리자 그가 속옷과 함께 천천히 옷자락을 끌어내리며 허벅지 안

쪽에 입을 맞춰온다.

예민한 살결 위로 그의 호흡과 입술이 닿을 때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간다.

조금의 거부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의 애무를 받으며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던

졌다.

어차피 길지는 않을 일이니까, 곧 끝이 날 테니까, 얼마든지 그를 위해 맞춰줄 수 

있었다.

이미 그때 서진을 통해 그가 곧 해외로 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였기에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었다.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이미 그도 알고 있었고 의사 역시 이런 상태에서 

해외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진단을 내린 후였다. 심각한 불면증과 간헐적인 

단기기억상실, 그리고 가끔씩 보이는 불안증세. 그 모든 게 이미 기록에 남은 채

였고 이민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그는 곧 떠나게 될 거였다.

그렇게,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떠나고 자신은 남는다. 그걸로 

모든 게 정리될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날까지는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보이지 않는 함정이 있

고 계산치 못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사랑해.』

그의 품에 안긴 채 이젠 습관처럼 그렇게 속삭이며 몸을 열었다. 별 의미 없는 말

이었지만 그 한 단어의 말이 그에게서 맹목적인 믿음을 끌어내고 있다는 걸 알기

에, 그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실수였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이 그 말이 가진 힘에 휩쓸려 그 말을 하는 이도, 그 말을 

듣는 이도 말의 함정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거 간과했다.

그게 가장 큰 오산이었다.

추적거리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오전, 모처럼 숙면을 취하고 깬 재현은 밖에

서 들려오는 빗줄기 소리에 천천히 눈을 뜨곤 창가를 바라봤다.

날은 어두웠다. 계속해서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오늘은 해가 보이지 않았다. 

어둑한 하늘과 계속해서 내리꽂히는 빗줄기. 빗줄기로 뿌옇게 흐려진 후원의 풍경

에 문득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지만 자신

이 그를 제대로 인식했던 첫 만남의 날도 이렇게 비가 왔었다.

멍하니 기억을 떠올리며 창밖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려 보자 텅 빈 방안이 눈

에 들어왔다.

그가 보이지 않았다. 또 일이 생겨 나간 건가하며 천천히 방을 돌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그의 셔츠를 대강 걸쳐 입고 창가로 다가섰다.

뿌옇게 흐려진 후원은 여전히 한 폭의 동양화처럼 음울하고 고아한 분위기를 풍겨

내고 있었다. 작은 연못도 정자도, 모두 그대로였다. 흐드러진 꽃잎도 나뭇가지들

도, 모두 6년 전 그대로였다. 계절이 바뀌어 꽃은 다르지만 그 풍경만은 여전했다

.

이곳은 여전히 멈춰 있고, 여전히 고요하기만 하다.

이상할 정도로 계절감도 시간의 흐름도 느낄 수 없는 풍경에 멍하니 창가에 기대

선 채 창밖을 바라보던 사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도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다리자 조용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곧 등 뒤

로 체온이 느껴졌다.

“추워. 또 감기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침대에 누워 있어.”

폭삭하니 전신을 감싸오는 체온에 조용히 그의 품에 안겨 있자 그가 뺨에 입을 맞

춰준다.

“머리는 괜찮아졌어?”

“……응.”

또 두통이 온 거 아니냐는 말에 짤막하게 답하자 그가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을 이

어간다.

“넌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응. 난 괜찮아.”

“그래. 그거면 됐어.”

부드럽게 몸을 안아오는 그의 체온과 팔의 힘에 스르르 몸이 풀려간다. 그의 품에 

안겨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이 집에 들어온 뒤 누군가에게 안겨본 일이 없어서, 

그가 이렇게 안아주면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건 단지 애정결핍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너무나 쉽게 그에게 안기는 데

에 익숙해진 것도, 그의 품이 아주 싫지만은 않은 것도, 단순한 애정결핍일 뿐, 

다른 건 없다. 그냥 그뿐이다.

“어디까지 기억이 났어?”

그 물음에 답하지 않자 그가 알겠다는 듯 가볍게 말을 흘린다.

“다 기억난 거군.”

이번에도 역시나 침묵으로 긍정하자 그가 마음에 든다는 듯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

온다.

“그럼 확실히 알았겠네, 더는 못 도망친다는 걸. 아무리 머리를 굴려봤자 빠져나

갈 길은 없을 거야. 나도 더 이상 네게 속아주진 않을 테니까.”

단 한 마디 외에는, 이라고 작게 덧붙이는 그 말에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그가 

하는 말이 뭔지, 이젠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와의 달콤하던 놀이에 먼저 종지부를 찍은 건 자신이었다.

이 집을 나간 후부터는 모든 것들이 순조로웠다. 쥐 죽은 듯 조용히 앉아 순종하

고 얌전히만 굴면 그는 다정했고, 간혹 싸움이 있거나 그가 외부의 일로 극도로 

기분이 안 좋아졌을 때는 그가 원하는 대로 애완견처럼 그의 기분을 맞춰주기만 

하면 됐다. 그는 의외로 단순하고 즉물적이라 기분이 최악으로 안 좋을 때에도 먼

저 유혹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풀어지곤 했다.

그건, 말 그대로 놀이였다. 자신이 그의 눈치를 보며 순종하며 그의 품에서 흐트

러지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만족스러워 했다. 그가 원하는 모습대로, 그가 

키우는 강아지처럼 다소 무뚝뚝하더라도 그만을 바라보고 그만을 기다리며 복종하

는 걸, 그는 즐겼다.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때까지는 그도 자신도 괜찮았다. 그건 어디까

지나 놀이였으니까, 놀이를 그 자체로 즐기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터였다. 

그 핑계로 자신도 겨우 겨우 그 관계를 견뎌낼 수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

면, 그 놀이가 끝나는 순간 뒤돌아서 집으로 돌아가 잊어버리면 되니까. 놀이는 

어디까지나 놀이일 뿐이니까.

그렇게, 편안하고 조용한 시간이 흘러가는 듯했다. 순종적으로 굴면 그는 곧 실증

을 낼 거고 자신을 얌전히 놓아줄 거라 여겼기에 그때까지 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

추며 적당히 그를 이용하며 참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그 때였다.

서진에게 그가 갑작스레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던 

중, 단 둘이 먼 곳으로 떠나 살자는 그의 말을 듣던 순간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

다.

그 순간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버렸기에, 너무 무서웠다. 아니, 그 전에도 기미

는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진짜 사랑에 빠진 남자처럼 굴기 시작했고 그게 어

색하고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자신은 모르는 척했다. 그걸 아는 체하면 모든 게 바

뀔 거라는 걸 알기에 의식 뒤로 묻고 모르는 척했었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본사를 옮길 준비를 하고 출장을 겸해 해외에 집을 알아

보겠다고 나가려는 순간 기회를 잡았다. 더는 그와 함께 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에

, 그리고 그대로 있으면 진짜 그에게 이끌려 한국을 떠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

움에 서둘러 계획을 실행했다.

그가 해외로 떠나는 날 원래는 그와 함께 떠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상명이와 만

나기 위해 꾸며낸 기억혼란과 갑작스러운 실종 등을 핑계로 그를 먼저 떠나보냈다

. 기다리겠다고 다녀오라고 그를 안심시키며 공항까지 배웅한 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학교에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서 사라졌다.

학교 독서실 쓰레기통에 핸드폰을 던져 넣고 차 역시 학교의 건물 앞에 세워둔 채 

모자를 눌러 쓰고 일부러 시내버스만을 골라 타 거의 하루가 꼬박 걸려 강원도까

지 내려갔다. 현금은 갖고 있던 카드들에서 정확히 의심을 받지 않을 정도로만 찾

아서 썼고 강원도에 도착하는 순간, 마침 성수기에 든 관광지들을 골라 이동인구

가 가장 많은 지역에 잠시 멈춰 상명이에게 새 신분증을 만들어달라고 연락을 하

고는 그 뒤로 다시 경주로 옮겨갔다.

사람들의 이동량이 많은 관광지들만을 골라 움직였고 그건 한동안 성공하는 듯했

다. 그 아파트에 오가는 사람들은 없기에 그 사람이 없으면 자신이 없다는 걸 하

루 정도는 들키지 않을 테고 그가 출장지에 도착해 전화를 할 때 즈음엔 이미 먼 

곳으로 떠나 있을 테니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자신이 어딘가로 사

라지는 건 흔한 일이었기에 사흘 정도는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거였다. 그

러다 누군가 연락을 하거나 경찰서에서 연락을 해올 테니 서진도 즉각적으로 대응

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계획은 완벽했다. 아무리 그들이 힘이 있어도 거기엔 한계가 있었다. 추적이 불가

능하다면 끝이다. 그리고 그 추적은 아주 잠깐이라도 흔적이 끊어지면 끝장이다. 

새로운 신분증까지 손에 넣는다면 자신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터였다.

그 완벽한 계획에 문제가 생긴 건,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관광객들에게 밀려 일

부러 복잡한 시간에 복잡한 장소로만 옮겨 다니던 중, 마음이 약해져서, 그래도 

혹시나 동생들이나 삼촌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지 못하고 

삼촌에게 연락을 한 게 실수였다.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가족이기에 삼촌에게 전화를 해 동생들의 안부를 확인한 

뒤 끊으려는데 어디로 움직일 거냐고 삼촌이 물어왔고, 이번엔 부산 쪽으로 갈 것 

같다고 하곤 곧장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곳곳에 위치한 감시카메라를 피해 

조심스레 움직이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최대한 눈에 안 띄는 

차림으로 부산행 버스를 타고 가장 안쪽 자리에 들어가 앉아 관광객들 사이에 낀 

채 부산역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막 역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기가 막히게도 앞을 

막아선 이들에게 둘러싸여 강제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행선지를 알아낸 건지, 상상도 하

지 못했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던 그의 물음에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말에 답

해주었다.

“아무 것도.”

그렇게 짤막한 대화가 끝난 뒤 침묵이 흘렀다.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그 분위기에 

잠시 말을 끊고 있다 그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전부 기억났다면 이젠 알겠지? 다시는 날 아프게 하지 마. 또 한 번 날 다치게 

하면 그땐 널 진짜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넌 날 배신하고 아프게 했어.』

부산 역에서 잡혀온 그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날 이렇게 다치게 한 건 칭찬해줄게. 하지만, 넌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그 말에 문득 웃음이 터졌다. 본인의 상처만 눈에 보이는 그의 태도에 웃음이 나

왔다. 그래서 마음껏 비웃으며 그를 할퀴어댔다.

『당신, 바보 아냐? 그 말을 진짜 믿은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할 리가 없잖아.』

“당신도 날 다치게 했잖아. 그것도 최악의 방법으로.”

“……그래. 그럼 서로 비긴 걸로 치지. 하지만 두 번은 안 돼.”

“뭐가 불안해? 당신 말대로, 난 이제 아무 것도 못 하는데. 이미 내 수는 다 간

파당한 거잖아.”

이미 한 번의 전적이 있으니, 아니 정확히는 두 번의 전과가 남은 채라 자신이 머

리를 굴리는 패턴은 이미 다 파악한 후일 것이다. 핸드폰도 주변 사람들도 믿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반경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을 테고 그 안

에서 아주 작은 오차만 생겨도 금세 반응해올 것이다.

사방이 다 막힌 상태니 더는 갈 곳이 없다.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길은 없다.

그걸 이젠 알고 있다. 기억이 없었다면 또 같은 짓을 할 뻔했지만 기억을 한 이상

,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그가 다치기 싫어하는 만큼, 자신 역시 더는 다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서 있자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그러니까 더는 엉뚱한 생각은 하지 마. 이 세계엔 우리 둘만 있으면 돼. 지금까

지처럼 넌 사랑하는 척해. 나도 믿어주는 척할 테니까.”

그 말에 허탈한 숨이 터졌다. 거짓말인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도 그 거짓에 매달

리려는 남자의 모습이 너무 가엾고 또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왜 그런 거짓에라도 매달리려고 하는 걸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었지만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걸 납득

해버린다면 마음이 흔들릴 걸 알기에,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야?”

“……그래.”

“거짓말이라도?”

“아픈 것보다는 속는 쪽이 나으니까.”

흘러내린 셔츠 사이로 드러난 어깨에 입을 맞춘 그가 속삭이는 말에 어쩐지 가슴

이 저릿해왔다. 왜인지 모르게, 그냥 가슴이 아팠다. 머리뿐 아니라 심장까지 고

장이 난 건지, 가슴에 멍이 든 듯 먹먹하니 울려대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채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줄게. 하지만 나 믿지 마. 죽을 때까지.”

차라리 그쪽이 마음은 편하다. 그가 자신을 믿지 않는다면 자신도 그에게 죄책감 

같은 걸 느낄 이유가 없으니까.

이제 자신이 왜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기억한다. 뭐가 그렇게 무서웠는지 무엇으

로부터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했는지, 모두 기억한다.

그러니 남은 건 이번엔 제대로 도망치는 것뿐이다. 이번엔 확실하게, 실수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야 한다.

되돌릴 수 없다면 지워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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