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적당히 따뜻한, 그리고 조금은 건조한 바람이 불어왔다. 피부 위를 스쳐가는 완연
한 가을바람이 조용히 연한 갈색의 대나무 발을 흔들어댄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따사로운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 그리고 고요함. 노란 빛을
띤 가을의 낮고 따사로운 햇살이 방 안을 환하게 밝히는 평화롭기 그지없는 아침
이었다.
그린 듯 고풍스레 꾸며진 방 안에서는 유일하게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만 정
적을 깨우고 있었다.
이미 해가 뜬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밤새 잠을 설친 재현은 이미 깨어난 채로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바로 등 뒤에 있는 남자가 눈치를 챌까 고른 숨을
내쉬고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쥐죽은 듯 침묵하다 그가 깨어나 욕실로 사라진 후
에도 여전히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다.
밤새 머릿속을 도는 기억들로 혼란스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등 뒤에서 전신을 싸안은 채 잠든 그의 고른 숨소리가 족쇄처럼 심장을 조여댔다.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다른 건 떠올릴 수가 없
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건지 생각을 할 여유도 없어 그냥 무섭고 또 무서
워서, 그렇게 눈만 감은 채 밤을 지샜다.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숨을 죽이고 있던 중 욕실 문이 열
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게 열리는 그 미닫이문의 소리에 숨을 멈춘 채 다시
는 자는 척 기다리고 있자 침대 한쪽이 묵직하게 눌려온다. 그리곤 곧 매끄러운
손길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그 손길에 다시 심장이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그 소리가 들릴까 무서
울 정도로, 시끄럽게 울려댄다.
“그만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자는 한이 있어도 일단 일어나.”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과 함께 바로 위에서 울려오는 다정한 목소리에 몸이 흠칫
떨려왔다.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 움찔거리고 있자 그의 손 역시 멈칫한다.
“깨있군.”
그 말에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예리한 시선에 숨이
멈췄다. 놀라 겁을 먹은 아이처럼 눈도 깜빡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
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서재현?”
나지막한 그 부름에도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움찔거리는 사이 기
막힌 타이밍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재빨리 자리에서 몸
을 일으켜 앉자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문을 돌아본다.
“……뭐지?”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서진이었다. 귀에 박혀오는 그 음성에 놀라 그를 바라보자 다시 시선을 돌려 뚫어
져라 자신을 바라본다. 마주친 그 시선에 꼼짝도 못 한 채 그를 응시하고 있자,
그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본 채 답한다.
“서재에서 기다려.”
“네.”
짤막한 답과 함께 걸음소리가 멀어지자 그가 관찰하듯 천천히 얼굴을 뜯어보는 게
느껴졌다. 속내를 캐내려는 듯 예리한 그 시선에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시
선을 내리자 그가 다시 묻는다.
“또 뭐지?”
쓸데없이 예민하고 또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그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까 망설
이다 어설프게, 생각나는 대로 답해주었다.
“……그냥…… 좀 어색해서…….”
“뭐가?”
“그냥…….”
어설픈 그 답에 그가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느껴졌
다. 그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피부 위를 찔러왔다. 그 느낌이 싫어 괜히 부산스레
이불을 끌어올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자 그가 툭하니 내뱉는다.
“우울증 흉내라도 내려는 거라면 그만둬. 짜증나니까.”
“…….”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마. 이제 와서 바뀔 건 아무 것도 없어.”
조금 토라진 듯한 그 음성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있자 그가 천천히 침대에
서 일어선다.
“힘들어도 일단 일어나 있어.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돌아서 문을 향해 걸어간다.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문
으로 향한 그가 방에서 사라지자, 겨우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엉망이긴 하지만 분명히 되돌아온 기억들이 머리를 어
지럽히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보다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 초조해하던 때보다 지
금이 더 무서웠다.
이건, 잘못되었다. 모든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머리를 식히려 목욕을 하고 나왔을 때에도 그는 방에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다행
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다시 침대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
다.
뜨거운 물을 받은 욕조에 앉아 계속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머리는 패닉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가늠도 할 수 없어 멍하니 앉아 있다 현기
증을 느끼고서야 겨우 욕조를 나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멍하니 앉은 채였다.
초조하고 무섭고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라는 걸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분명 부분
부분 기억들이 돌아온 후임에도 뭐가 먼저고, 뭐가 나중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 어
지럽기만 하다.
“생각해, 서재현. 뭐든 생각해 봐.”
머리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두드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어 봐도 여전히 생각은 멈
춘 채였다.
여전히 모든 게 잘못되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 방 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 미친 사람처럼, 계속해서 어지럼증이 일 정도로 방을 돌고 또 돌고, 계속해서
방을 맴돌던 중 갑자기 복도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임에도 워낙에 집안이 조용해 그 소리가 크게 울려오는 듯했다.
그가 벌써 돌아온 건가 하는 생각에 걸음을 멈춘 채 두근두근하며 문 쪽을 바라보
고 있자 발걸음 소리가 방 앞에서 멈춘다. 순간 숨을 멈춘 채 기다리고 있자 곧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겨우 안도했다. 그 사람이라면 문을 두드릴 리가 없다. 그럼 집안일은
봐주시는 아주머니이거나 혜선일 수도 있다. 다행이라고 겨우 숨을 내뱉으며 짧게
답했다.
“네.”
그 말과 함께 곧 스르르 문이 열리며 아주머니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신다. 역
시나란 생각에 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도 되냐는
듯 이쪽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무슨 이이냐고 물으려는데 그녀가 침대를 흘깃 쳐다본다. 그 시선에 얼굴
이 화끈하니 달아올랐다.
시트와 이불을 갈러 들어온 듯했다. 그녀 역시 그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을 거
라는 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문제지만 그래도 그냥 알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과 눈
앞에서 그녀가 저 시트를 가는 걸 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침대는 제가 정리할게요. 이 방은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세탁실로 가져가 빨래를 해 널기만 하면 되는 거라 조금 뜨거워진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렇게 말하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그
외에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그 말에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자판을 누르는 모습에 그녀에게 다
가가려 하자 그녀가 놀라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곤 곧 다시 자판을 누르더니 핸드
폰을 내밀어 보인다.
『버릇이 돼서 문자로 보냈어. 식사는 언제 할 거야?』
“아…….”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 그간 이런 문제는 문자로 대화가 오갔던 모양이다.
“저, 혹시…… 아파트에서 일봐주시던 분도 아주머니세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한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몇 번 부딪칠 일
이 없었던 터라 워낙에 서먹하게 굴어 의식하지 못했는데 역시나 그 아파트에서도
이 아주머니께서 일을 봐주신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이 있었을 리가 없다. 이 집안의 특성 상 진짜 입이 무겁
고 믿을 만한 사람 외에는 쓰지 않는다. 이 집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집
안의 후원을 받아 자라 절대 배신하거나 함부로 입을 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특
히나 이 서쪽 별채는 그 특성 탓에 항상 말을 못하는 사람들만 고용해 왔다. 그러
니 아무리 분가를 했더라도 외부인을 그 아파트에 뒀을 리 없다.
역시나란 생각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아침은 조금 있다 먹을게요.”
그 말에 그녀가 알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방을 빠져나간다. 그리
고 조용히 닫히는 문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잘한 기억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별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 여겨서인지, 소소
한 것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고, 가장 충격적인 기억들부터 돌아오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다시 방 안을 서성이던 중 문득 협탁 위의 핸드폰으로 시선이 갔다
.
핸드폰은 여전히 꺼진 채였다. 하지만 충전은 끝났을 때였다. 파란불이 들어와 있
는 핸드폰의 윗부분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며 협탁 쪽으로 가 핸드폰을 들고 전
원을 켜자 곧 제조사의 로고와 함께 핸드폰이 켜진다.
가볍게 울리는 소리에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메시
지 음이 울려왔다. 아주머니께서 보내신 문자인가 싶어 메시지 창을 켜자 역시나
낯선 번호로 온 짤막한 문자가 보였다.
『아침은 몇 시에 먹어?』
늘 이런 식으로 연락을 하는 듯해 일단 번호를 저장해두려는데 새로 온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다. 이 번호를 아는 건 집안사람들뿐인데 누구일까 싶어 확인을 하자
그 위로 무뚝뚝한 말투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네가 가져간 책 네 거 아니래. 성희가 부탁한 거라니 연락해.』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에 눈을 껌뻑였다. 성희는 분명 과사에 있던
조교 누나의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날 자신에게 택배 박스를 전해준 게 그녀였
다. 내용물을 몰랐다 해도 자신에게 부탁한 책이라면 책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
을 텐데 그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보낸 날짜를 확인해 보니 이틀 전의 문자였다. 이미 충분
히 늦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통화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잠시 후 그가 전화를 받
는다.
「왜 이렇게 연락이 늦어?」
여전히 퉁명스러운, 조금 화가 난 듯한 그 목소리에 먼저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해요. 문자를 지금 봤어요. 며칠 아파서 누워 있어서요.”
「이 날씨에?」
“네, 집이 좀 추워서요.”
「하긴, 너 여름에도 감기 걸렸으니까. 정확히는 냉방병이지. 지금은 괜찮아?」
그러고 보니 감기라기보다는 냉방병이라는 말이 정확히 맞는 것 같았다. 외부는
더운데 집안은 냉기가 풀풀 날 정도로 에어컨을 켜놓고는 냉방병이라니, 진짜 돈
을 주고 병을 사는 기분이었다.
“이제 다 나았어요.”
「다행이네.」
라고 그가 안도한다. 진심으로 걱정을 한 듯한 선배의 음성에 잠시 뜸을 들이다
전화를 한 용건을 물었다.
“저, 그런데 문자…….”
「아, 맞다. 너 그날 가져간 택배, 책 맞지?」
“네. 그런데 그 책이 조교님 거였어요?”
조심스레 그렇게 묻자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지금 옆에 누구 있어?」
“아뇨. 혼자예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해. 그 책 네 거 맞아. 그런데 이틀 전에 네 그 친구라는 놈
하고 통화를 했는데 너한테 그렇게 문자 보내라고 부탁하더라. 네가 부탁했던 건
데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곤란하다고.」
“친구요?”
「그래, 전상명. 중학교 친구라고 하던데. 맞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명이랑 통화하셨어요?”
「응. 과 사무실에 전화 오면 연락 달라고 해서 시간 맞춰서 통화했는데…… 걔,
뭐하는 애냐?」
“네?”
「사람 더럽게 못 믿더라. 처음엔 설마설마 해서 친구 누구냐, 뭐하는 애냐고 물
으니까 네 중학교 친군데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해서 너 기억에 좀 문제가 생겼
다고 하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냐고 따지던데? 하도 꼬
치꼬치 캐물어서 너한테 들은 대로 말해줬는데도 너희 집 사람 아니냐고 계속 의
심해서 누가 서재현 친구 아니랄까 봐 그렇게 의심이 많냐고 하니까 그제야 믿더
라고. 너나 그놈이나 어린놈들이 뭐 그렇게 의심이 많아? 장래희망이 사립탐정이
라도 된대?」
그 말에 확실해졌다. 상명이다. 원래도 삐딱하고 의심도 많고 쉽사리 타인을 믿지
않는 녀석이라면, 전상명밖에 없다.
“……원래 그런 성격이에요. 그리고 저라도 기억 상실이란 말은 잘 못 믿을 거예
요.”
솔직히 자신이라도 그건 안 믿었을 거라고 대꾸하자 그가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답한다.
「뭐, 나도 처음엔 믿기 힘들었으니까. 하여간 그 더럽게 의심 많은 네 친구가 너
전혀 기억 없다니까 진짜 그런 거라면 그 책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 문자 보내달
라고 했어. 그래서 일단 너랑 통화하고 네 연락처 가르쳐준다고 하니까 자기는 지
금 너랑 통화 못 하다고 너랑 직접 통화 연결해달라고 하던데. 어쩔래?」
이번 말은 조금 놀랐다. 직접 통화를 못 한다니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다시
되물었다.
“왜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이유는 말 안 하고 그냥 너랑은 직접 통화 못 한
다고 진짜 네가 기억이 없는 거면 책 들고 나와서 통화하게 해달라고만 하고 끊었
어.」
“……어떻게요?”
「그 책 조교 책이라고 하고 학교로 가져 와. 미리 전화하면 랩실 하나 빌려둘 테
니까, 거기서 그 의심 많은 놈이랑 통화하게 해줄게. 번호는 나한테 있어.」
“그 녀석, 한국에 있어요?”
「응. 로밍한 거 아니면 한국에 있겠지.」
“저, 그럼 지금…….”
상명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 당장 나간다고 하려는데 멀
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 뒤로 이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어쩐지 이 통화를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서둘러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 선
채 문을 바라보고 있자 발걸음 소리가 바로 문 앞까지 다가와 멈춘다. 바로 문 앞
에 선 이의 존재에 다시 심장이 사정없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심장이 너무 뛰어 대서 가슴이 뻐근해져 올 정도였다. 그 시끄러운 박동에 천천히
, 소리가 나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굳어져가는 얼굴을 자연스레 풀려
애를 썼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상태를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절대 그가 눈치 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겨우겨우 표정을 풀고
어깨에서 힘을 빼는 사이 조용히 열리는 문틈으로 그가 들어선다. 느릿한 걸음으
로, 연한 남색의 셔츠와 면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필사적으로 표정을 풀고 있었지만 역시나 그는 지나치게 눈치가 빨랐다.
“뭐지?”
그 말과 동시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혹시라도 그가 눈치를 챈 건가 싶어 손
에 힘을 주던 순간 그의 시선이 아래쪽에서 멈췄다. 그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
다보자 자신의 손에 있던 핸드폰이 보였다.
“방금, 문자가 와서. 아침 언제 먹을 거냐고 물으시는데, 아주머니가.”
“지금 하지. 몸은?”
“어…… 괜찮아. 이젠 다 나았어.”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여 답하자 그가 그럼 나가자는 듯, 다시 돌아선다. 그 모습
에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를 잡았다.
“저기…….”
작은 그 목소리에 그가 걸음을 멈춘 채 돌아선다. 그리고는 뭐든 말하라는 듯 자
신을 바라본다.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그 시선에 뭐라고 답할까 망설이다 어
색하게 말을 돌렸다.
“서진 형은 갔어?”
“그 녀석도 바빠. 계속 네 보모 노릇만 할 수는 없어.”
담담한 투로 답을 한 뒤 그가 다시 돌아서는 모습에 마음이 다급해져 다시 그를
불렀다.
“저, 나 학교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진짜 짜증이 난 듯한 그 얼굴에 잠시 망설이다 다
시 용기를 내 말을 이었다.
“내가 학교로 받은 택배가 있는데 내 물건이 아닌가 봐. 조교 누나한테 부탁받은
책인데 내가 기억 못 하고 가져와서…… 갖다달라고 하는데…….”
그 말에 그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다. 자신의 성격 상 누구의 부탁을 받아 물건
을 주문하고 대신 받아주는 일이 없을 거라는 걸,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괜히 시선을 피하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들
킬까 아무렇지 않은 척 애써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다.
“네 일은 전부 서진이한테 연락이 가게 해놨을 텐데 왜 직접 너한테 전화가 온
거지?”
“나랑 친했던 누난가 봐. 학교 사람들한테는 기억 없다는 얘기 안 했어. 귀찮아
질 것 같아서.”
그건 딱 자신다운 말이었다. 아무리 큰일이라도 괜히 사람들이 말을 걸고 묻고 할
까 귀찮아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한다는 건, 딱 자신다운 반응이다. 그건 그 역시도
인정한 듯 잠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답해온다.
“김 기사 부를 테니 그 편으로 보내.”
“한 달도 넘은 책이라 직접 갖다 주고 싶어. 그쪽은 내 사정 모르는 상태고, 일
단 내가 부탁받고 늦은 거니까.”
확실히 만나 사과를 해야 한다고 말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마음에 안 든다
는 듯 인상을 쓴다.
“넌 왜 그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거지?”
“그게 예의니까.”
“그런 것까지 굳이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김 기사 편에 보내고 잊어. 아침부터
먹어.”
“직접 갖다 줘야 돼.”
“오늘은 내가 쉰다고 했잖아.”
“잠깐이면 돼. 아니면, 같이 나가든가.”
어쩐지 오늘 꼭 통화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최후의 카드를 꺼내놓자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진다.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화가 난 것 같기
도 하고 또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한 묘한 그 얼굴에 괜히 심장이 조여 왔다.
혹시나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을까 하는 불안함에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뭐가?”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올 때는 뭔가 다른 생각이 있다는 건데…….”
역시나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남자의 답에 괜스레 찔려 싫으면 말라는 듯 한 걸음
물러섰다.
“귀찮으면 굳이 나가자고 안 해. 날씨가 좋아서 그냥 물어본 거야. 계속 회사에
있었으니까.”
그냥 생각나는 대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대고 있자 그가 잠시 빤히 자신을 바라본
다. 언제나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나 지금은 그의 생각도 감정도 읽을 수가 없어
초조함을 감추며 그를 응시하고 있자 그가 잠시 후 답한다.
“둘이 나간 적은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우선 식사부터 하고 나가.”
상상이상으로 빠르고 순순한 그의 답에 순간 당황했다.
“……그래도 돼?”
“날씨가 좋으니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며 말한 그가 턱짓을 하며 걸음을 옮겨간다. 뜻밖
의 반응이 머리가 멍멍했다. 절대 쉽게 허락해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너
무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일단 학교에 갈 수 있다니 다행이긴 했지만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건, 그가 함께
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잠깐 들른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와 함께 학교까지 간
다는 것도 이상하고, 또 그를 기다리게 하는 건 더욱 이상하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이상한 건 그의 이상한 태도였다.
오늘 눈을 뜬 이후부터 그는 너무 다정했다. 말투나 표정은 여전하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손이, 그의 목소리가, 눈빛이 확연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자신은 불편하고 껄끄러운 느낌과 함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이건 너무 이상하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안 맞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기
만 하다.
그게 너무 싫었다. 그 불편함과 두려움이, 끔찍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식사를 마치고 나와 차를 마신 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먼저 일어선 건 그였다. 외출을 하자며 먼저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를 따라 대강
청바지에 티셔츠를 껴입고 그를 따라나서면서도 계속해서 이제라도 말을 바꿀까
고민을 해야 했다.
마음은 다급한데 그와 함께라는 게 영 껄끄러워 어떻게 할까 망설이며 책을 찾는
다는 핑계로 서재로 와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주머니께서 치워놓으신 책은 가장
바깥쪽의 책장에 꽂혀 있어 찾는 건 쉬웠다. 하지만 그와 함께 차를 타고 학교까
지 가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마음이 급해 멍청한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제
와 안 나가도 된다고 하면 의심을 하게 될 테고, 지금은 우선 상명이와 통화를 하
고 싶다. 이 책이 뭔지도 확인해야 하고 왜 자신과 직접 통화를 하면 안 되는 건
지, 그리고 왜 자신과 연락이 끊긴 건지. 어쩌면 그 녀석이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성격 상 이런 문제에 대해 일일이 다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만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 혹시나 해서 방금 전에도 넘겨본 책을 또 다시 넘겨봐도 별거
아닌 화보집이었다. 뭔가 특이한 점은 전혀 없다. 이게 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
가면 안 된다는 건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 책이 엄청난 희귀도서일 수도 있
지만 책의 상태로 봐서는 선뜻 납득이 가질 않았다. 본채의 서고에 편당 수백에서
가끔은 천만 원 대를 호가하는 희귀서적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전문가들
의 손을 거쳐 깨끗하게 수리하고 습도조절기까지 설치된 서고에서 고이 보관된다.
어차피 희귀 고서적들은 일종의 재산이라 읽기 용도가 아니라 보관용으로 모셔지
는 책이라 관리를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책을 전달할 때에도 반드시
구매자 본인에게 권하거나 사람을 보낸다.
이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고민하던 사이 서재의 문이 열렸다. 그 소리에 놀
라 그쪽을 보자 그가 묻는다.
“책은?”
“찾았어.”
손에 든 책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그가 따라 나오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여전히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이제 와 말을 돌리는 것도 이상해 그를 따라 천천
히 건물을 나섰다.
건물의 현관문을 열자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집안과는 전혀 다른 그 온도
에 놀라 눈을 찌푸리자 그가 건물 앞에 대기 중이던 차의 운전석으로 향해간다.
이번에는 상당히 놀랐다.
“직접 운전하게?”
그 질문에 그가 뭐 문제 있냐는 듯 이쪽을 바라본다. 그가 운전을 직접 하는 걸
보는 건 처음이라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먼저 차에 올라탄다.
함께 외출을 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그는 늘 차의 뒷좌석에만 타는 사람이라 운전
석에 앉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라 놀라다 일단 조수석으로 가 올라타자 그가 시동
을 걸며 툭하니 말을 건넨다.
“벨트.”
“어, 응.”
그치고는 지나치게 친절한 그의 태도에 안전벨트를 매고 잠시 기다리자 차가 뜨거
운 햇살 아래로 움직여간다. 창밖의 풍경은 완연한 초가을인데 공기도 햇살도 이
상하게 뜨거웠다. 그 묘한 괴리감에 차창에 기대 창밖을 내다보자 곧 집안을 빠져
나와 도로로 나선 차가 한낮의 도심을 가로질러 간다.
“얼마나 걸리지?”
“응?”
“책.”
“아, 얼마 안 걸릴 거야. 사정 얘기 좀 하고 책만 전해주면 되니까.”
그 말에 그제야 아직 선배에게 연락을 안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급히 문자를 보
냈다. 지금 나가는 중이니 20분 정도면 도착할 거라고 문자를 보낸 뒤 슬쩍 왼쪽
운전석의 남자를 바라보자 그가 신호에 걸려 차를 멈춘다.
여전히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이렇게 쉽게 허락을 해주고 함께 외출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눈치를 살피고 있자 그가 가볍게 말을 던진다.
“기다릴 테니 곧장 내려와. 잠깐 드라이브나 하다 같이 저녁을 일찍 먹고 들어가
도 되니까.”
“시간 괜찮아? 바쁜 것 같던데.”
“아예 뺀 시간이니 상관없어.”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던 사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려왔다. 문자 알림음에 화면을 내려다보자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
『랩B실이 비었으니 그쪽으로 와. 1층 왼쪽 복도야.』
랩실이라니 실험실을 말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잠시 문자를 들여다봤다. 그런 것
까지 일일이 묻기는 그래도 하여간 찾아만 가면 된다는 생각에 그쪽으로 가겠다는
문자를 보낸 뒤 다시 고개를 들자 바뀐 신호에 그가 빠르게 차를 운전해간다.
더는 할 말이 없어 그대로 입을 다물고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 자신의 기억 상으
로는 그와 대화라는 걸 많이 해본 적도 없고, 그와 자신이 대화를 할 때엔 좋은
분위기로 끝난 적이 없기에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길이 막히지 않아 이른 시간에 도착한 학교 건물 앞에서 재현은 우선 한숨을 내쉬
었다. 워낙에 눈에 띄는 차라서인지 지나가는 이들이 한 번씩 돌아보는 시선이 따
가웠다.
안전벨트를 풀며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옆을 슬쩍 바라보자 그가
툭하니 말한다.
“어디서 보기로 했지?”
“아…… 랩실이래. 실험실 같은 거지?”
“10분.”
정확히 10분만 기다리겠다는 그 말은 여기서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그게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나올게.”
과연 빨리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한 뒤 차에서 내려서자 따
가운 햇살이 피부를 찔러왔다. 여름보다도 더 아픈 그 빛에 서둘러 차문을 닫고
도망치듯 건물 안으로 들어서 왼쪽 복도를 돌아보자 3층과는 달리 인적이 드문,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해 보이는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고요한 그쪽 복도를 돌아보다 서둘러 걸음을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서자 ‘컴퓨터
실습실’과 ‘LAB’이라고 써진 푯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LAB B’라는 푯말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가 문을 두드리자 곧 들어오라는 목소리
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실내에서 기
계들이 잔뜩 든 캐비닛을 확인하며 통화를 하던 주원이 이쪽으로 다가선다.
“잠깐, 왔어. 바꿔줄 테니 알아서 해.”
무뚝뚝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핸드폰을 내민 주원이 통화하라는 듯 고
갯짓을 한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핸드폰을 건네받자 그가 곧장 문을
열고 나선다. 진짜 딱 전화만 연결해주려는 듯, 통화는 알아서 하라고 말한 뒤 빠
져나가는 그를 보곤 핸드폰을 들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서며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서재현?」
그 목소리다. 자신이 아는 친구의 목소리가 맞았다. 순간 안심이 되었다.
“응. 맞아…….”
어쩐지 순식간에 그간의 초조함이나 불안함이 사그라져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인
적이 없는 황폐한 사막 위에서 아주 친근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쁘고 동시에 서
러움이 복받쳐 겨우 숨을 고르고 있자 상명이 갑자기 생뚱 맞은 질문을 건넨다.
「우리 중3 때 나 은근히 괴롭히던 영어 선생 이름이 뭐야?」
뜬금없이 나온 그 질문에 헛웃음이 터졌다.
“장난해? 영어 선생님은 얼굴 밝히는 아줌마라 너 엄청 예뻐했잖아. 괴롭히던 건
체육 선생이지.”
그때부터 이미 유학을 생각하고 있던 녀석이라 다른 과목은 다 버리고 오로지 영
어 공부만 열심히 했던 녀석이라, 말썽쟁이라도 영어 선생님에게는 꽤 예쁨을 받
았었다. 거기다 얼굴까지 잘 생겨서 영어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녀석을 떠
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상명도 의심을 푼 듯 안도의 숨을 내쉰다.
「서재현 맞구나.」
“그래, 맞아.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너 메신저에도 없던데.”
안심하는 순간, 그간 이상하게 생각했던 걸 그렇게 묻자 상대가 잠시 침묵하다 답
한다.
「너, 진짜 기억 안 나는 거야?」
“응.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기는 하지만 대부분 기억 안 나. 핸드폰도 바뀌고 해
서 연락처도 없고 내 메신저에는 네 이름도 안 보이고. 혹시 내가 연락 끊은 거야
?”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러게 묻자 상명이 한숨을 내쉰다.
「네가 아니라 네 아버지가 끊게 한 거지.」
“아버지가?”
「진짜 전혀 기억 안 나?」
“뭐가?”
교우 관계에는 전혀 상관 안 하던 그 남자가 왜 친구와 연락을 끊게 한 건지 이해
가 가질 않아 그렇게 되묻자 상명이 잠시 한숨을 내쉰 뒤 말한다.
「……책 가져왔지?」
“응. 이거 네가 보낸 거야?”
「정확히는 네가 부탁한 거야. 그거 뒤표지 안쪽 봐.」
그 말에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놓고 펼쳐 두꺼운 하드커버의 안쪽을 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보통 책처럼 표지를 싼 종이 위를 내지로 발라 마무리한, 그냥
그런 책이었다.
“이게 왜?”
「안쪽 표지 뜯어 봐.」
그 말에 조금 망설이다 단단히 달라붙은 안쪽의 종이를 손톱 끝으로 긁어내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안쪽이 조금 뜬 듯한 그 느낌에 왜 지금까지 이걸 못
봤지, 하며 재빨리 종이를 뜯어내자 안쪽에 또 다른 종이가 보였다. 꽤나 두꺼운
재질로 만들어진, 두껍고 단단한 그 종이를 겨우 뜯어내자 아래쪽에 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재현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뭐야, 이건?”
하드커버와 종이 사이에 압축 비닐에 밀봉된 채 껴 있던 건 신분증이었다. 거기까
지는 별로 놀랄 게 없다. 문제는 그 신분증 위의 사진은 분명 자신이었지만 적힌
이름은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이라는 사실이었다. 주소지도 생년월일도 다르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거기 적힌 신분증의 정보는 전혀 다른 남의 것이었다.
「네가 부탁한 거야. 신분세탁 할 방법 찾아달라고 해서 그쪽 브로커한테 부탁해
서 만든 거야. 그 민번하고 이름은 자기 신분 판 애 거라 실제처럼 사용할 수 있
어. 지문 날인만 안 하면 핸드폰 계통이나 금융거래도 가능하고 집 계약도 가능해
. 경찰들도 판독 못 하는 거야.」
그건 알겠다. 잘은 몰라도 자신의 지갑에 있는 신분증과 거의 똑같아 판독이 불가
능하긴 하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왜 이걸 부탁했는데?”
「원래는 조용히 도망치려고 했는데 걸렸어. 아버지가 무슨 수든 쓸 거라고 마지
막으로 통화할 때 부탁했던 거야. 그거 부탁하고 연락 못 할 수도 있다고 해서 내
가 학교로 보내준다고 한 거야.」
“도망치려고 했다고? 내가 왜?”
「너, 진짜 기억 못 하는 거야? 전혀?」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듯한 그 말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전혀, 기억 안 나. 돌아온 기억에도 그런 건 없어.”
「그래. 그런 일도 있다고는 하니까. 내가 아는 경우는 대부분 약 처먹다 뇌가 녹
아내린 경우지만…… 뭐, 좋아. 일단 내가 아는 한은 얘기해줄게. 네가 떠벌떠벌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녀석은 아니라 나도 자세히는 몰라.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
“끊긴 건 고3 5월이야. 입학허가서 받고나서.”
그때 같이 유학 준비 중이었으니 잘 알 거라 생각하고 말을 끊자 상명이 작게 ‘
아.’라고 내뱉는다.
“나 유학은 안 건 거지?”
「입학허가서 받고 연락 끊겼었어, 잠깐. 난 그대로 유학 진행 중이라 어쩔 거냐
고 계속 기다리는데, 한 달인가 뒤에 갑자기 전화 와서 넌 못 간다고 해서 나 혼
자 진행한 거야. 너 그때도 보름 가까이 학교까지 빠져서 물어보니까 답은 안 하
고 그냥 느낌으로, 아버지한테 맞았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그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사람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흘린 것까지는 기
억하니까 맞는 듯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상명이 뭔가 떠오른 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다 나도 곧장 미국으로 와서 한동안은 정신없어서 연락 못 하다 올 초에 엄
마가 몸이 안 좋아서 들어왔는데 네가 좀 이상했었어. 불안해 보이기도 하고 안
하던 짓들을 해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도 대답은 안 하고 그냥 힘들다고만 하다
가 5월쯤엔가 아버지가 해외로 나가게 될 것 같다고 좋아하던 건 기억나. 그러다
갑자기 6월이 되니까 상황이 바뀌었다고 이상한 지역에서 전화를 해서는 신분 세
탁할 수 있는 방법 없냐고 해서 위조신분증은 준비해줄 수 있다고 했더니, 당분간
은 나랑도 연락 못 한다고 메신저나 메일도 보내지 말라고 하고 준비되면 학교로
보내달라고 하고 연락 끊어졌어. 그 뒤로 너 따라다니던 비선가 뭔가 하던 사람이
나타나서 너랑 통화한 번호 가져가고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협박을 하더라.
그 사람 분위기가 흉흉한 게 아무래도 이상해서 계속 전화하는데 핸드폰은 안 되
고, 너한테 연락도 없고 학교는 병가로 휴학했다고 해서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
하던 중이었어. 그 택배도 남의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거니까.」
아주 자세하지는 않지만, 처음으로 듣는 그 이야기에 머리가 멍해졌다. 기억이 난
부분들과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내가 위조신분증을 부탁했다고? 직접?”
「응. 그때 네가 횡설수설해서 정확히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아버지 출장 중에 빠져
나가긴 했는데, 아버지가 손 쓸 것 같으니까 새 신분증이 필요하다고 했어. 번호
로 봐서는 강원도 쪽 같았는데, 뜬금없이 이상한 번호로 전화를 해서는 계속 연락
못 할 테니 학교로 보내라고 하고, 끊겼으니까.」
“내가 왜 도망친 건데?”
「네가 그런 말 하는 놈은 아니니까 모르지. 나도 혹시나 한 건 그 비서 아저씨가
찾아와서 너랑 통화한 거 아니까 번호 내놓으라고 해서 준 것뿐이니까. 그리고 앞
으로 너랑 연락하게 되면 다칠 거라는 식으로 얘기를 해서, 아차 했는데 그 뒤로
계속해서 누가 주변에서 돌면서 핸드폰까지 감시당하는 것 같아. 네 전 번호로 계
속 전화하고 본가 연락처 찾아서 전화하니까 갑자기 그 비서 아저씨가 전화해서
너 연락 못 받으니까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하는 거 보니 내 번호나 네 번호,
둘 중 하나는 감시하는 것 같아서 이 전화도 그 선배한테 부탁한 거야. 학교로는
혹시나 해서 공중전화로만 한 거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안 하는 상명이 이 정도로 세심하게
걱정을 하고 주의를 할 정도라면 상황이 심각한 거다. 본인 성격도 성격이지만 물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 덕에 그런 쪽의 사람들을 많이 겪어 허풍과 진짜 위협은 명
확히 구분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그렇게 걱정을 하는 거라면 뭔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더는 이 녀석을 끌어들이는 건 안 된다. 그리고 선배도 마찬가지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 괜찮아. 그냥…… 사
고가 좀 있어서 연락 못 한 거지. 다른 일은 없었어. 아니, 없었을 거야. 지금도
잘 지내고 있고, 이건 이제 필요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진짜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지금 잘 지내고 있어. 내가 왜 이런 걸 부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편해. 아버지랑도 잘 지내고 있고 괜찮아. 아무래도 내가 그때 신경쇠약이
었던 모양이니까 너도 신경 쓰지 마. 병원 기록 얘기 들으니 나 그때 제정신 아니
었어. 걱정하게 했다면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실에 정신을 차릴 수는 없었지만 일단 위조신분증을 챙겨 넣으며 그
렇게 대강 말을 흐리자 상명이 잠시 침묵한다. 슬슬 10분이 되어가고 있어서 일단
랩실을 나가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상명이 한참의 침묵 후에 다시 말을 건넨다
.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너 지극히도 이성적이고 제정신이었어. 나랑
만날 때 일부러 백화점에 차 버려두고 지하철로 움직이면서 핸드폰까지 일부러 지
하철에 두고 내렸으니까. 내가 핸드폰 챙겨주려고 하니까 위치 추적당한다고 그냥
두라고 했잖아.」
“……내가 그랬어?”
「그랬어. 그냥 미친 척하면 된다고.」
이번 말은 조금 강했다. 분명히 금치산자 판정을 받을 정도로 불안했던 정신상태
가 사실은 멀쩡했다니, 그 말을 믿는 게 더 어려웠다. 이건 자신이 알고 있는 것
과 너무 다르다. 작정을 하고 미친 척한다고 해도 정신과 의사까지 속이는 건 어
렵다. 교본이라도 사놓고 공부하지 않는 이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순식간에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기억
의 조각조각들이 보일 듯 말 듯한 그림을 이루며 얽혀가고 있었다.
그 애매한 감각에 머리를 긁적거리다 문득 시계를 바라보자 1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미안. 나 더는 통화 못 해. 지금 나가봐야 돼. 하여간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경 안 써도 돼.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몰라도 난 지금은 괜찮아.”
「……그래, 그럼 다행이고. 너 같은 녀석이 기억을 잃을 정도라면 그럴 만한 이
유가 있을 테니 차라리 안 돌아오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지.」
“응.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됐어. 하여간 괜찮다니 다행이다.」
“응.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번호는 외워둘 테니까.”
「그래.」
짤막한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뒤 화면에 찍혀 있는 번호를 확인하곤 몇 번인가
번호를 되새기며 랩실 문을 열고 나서자 복도 창가에 서서 프린트된 종이를 보고
있던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없어 서둘러 그에게 다가서자 그가 이쪽을 돌
아본다.
“통화 다 했어?”
“네.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폐를 끼쳐서 죄송하고요.”
“그건 됐는데…… 너 무슨 남파 공작원이냐? 뭐 이렇게 복잡해?”
“그러게요. 통화 연결해주셔서 감사하고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어쩐지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한 기분에 스스로도 기분이 이상해져 씁쓸하게 웃고
있자 그 역시도 이상한 기색을 눈치 챘는지 핸드폰을 받아들며 묻는다.
“복학은?”
“아…….”
“내가 졸업하긴 하겠지만 복학하면 어떻게든 연락은 될 거야. 마지막처럼 인사하
지 마. 너 가끔 그럴 때 기분 이상하니까.”
“제가 전에도 그랬나요?”
“종강식 때 느낌이 좀 이상했다고 했잖아.”
“아…….”
“가봐라. 나도 좀 이따 강의 들어가야 돼.”
그 말과 함께 바삐 창가에 있던 종이들을 챙겨드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건
넸다.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가.”
마지막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서둘러 복도를 나오며 책을 두고 나왔다
는 게 떠올랐지만 어차피 버릴 책이라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우선 차
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나서 외관만으로도 번쩍거리는
차 앞으로 다가서자 조수석창 너머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다시 그를 보자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릿속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희미한 감각으로나마 이 사람이 무섭고 또 뭔지 모르지만 미안하다는 생
각이 들어 자꾸만 심장이 쿵쾅거린다.
하지만 이대로 서 있는 게 이상해 애써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차문을 열었다. 그리
고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가 통화를 끝낸 뒤 시동 버튼을 누른다. 아무 말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시동을 거는 모습에 서둘러 안전벨트를 하고 앞을 보자 서
서히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거운 그 분위기에 아무 말 않고 앞을 바라보고 있던 중 그가 건물 사이로 빠져
나가는 차 안에서 그가 툭하니 말을 건넸다.
“책은?”
“……전해줬어.”
짤막한 대화 후 다시 숨이 막혀오는 기분에 아주 작게 숨을 몰아쉬며 창밖을 내다
보고 있자 막 교문을 빠져나온 그가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
만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 탓인지 그의 표정이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닌 촉감으로 느
껴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건지, 아니면 뭔가를 들킨 건지 알 수 없어 두근두근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중,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서…… 통화는 재미있었어?”
갑작스러운 그 말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뭐?”
“오랜만이었잖아. 전상명, 네 하나밖에 없는 친구. 하지만 아주 질이 나쁜 친구
지. 나쁜 건 모조리 그 녀석에게 배웠으니까.”
지나칠 정도로 상세한 그 설명에 목뒤가 뻣뻣하게 굳어왔다. 자신의 핸드폰도 아
닌 선배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했다는 걸 그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뻣뻣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자 그가 왼쪽 도로로 빠지며 웃음 짓는다.
지나치게 여유로워 보이는, 그리고 조금은 자신을 비웃는 듯한 그 미소에 겨우 겨
우 목소리를 끌어냈다.
“어떻게 안 거야?”
“새 핸드폰으로 발신이 된 건 딱 한 건이었고 그 번호를 추적하니 전상명이라는
녀석과 여러 번 통화한 게 나왔으니까. 그리고 너와 오늘 오전에 통화를 하고 방
금 전까지 문자가 오가더니, 문자를 보낸 뒤 곧장 다시 전상명의 번호로 발신이
가고 네가 나오기 전까지 통화를 했으니 답은 하나잖아? 전상명과 서주원은 너 외
에는 아무 연계점이 없으니까. 그 책을 핑계로 통화를 하려고 나온 거겠지. 웃기
지도 않지. 네 성격에 누구 부탁을 들어줄 리도 없거니와 너한테 부탁 같은 걸 할
사람은 없어. 게다가, 네가 그런 식으로 부탁할 때는 아주 찔리는 일이 있다는 증
거니까.”
아주 정확한 그의 추리에 헛헛한 숨이 터졌다.
“통화내역까지 추적한 거야?”
“아버지니까.”
평소에는 아들 같은 건 쓰레기 취급하면서 신경도 쓰지 않는 주제에 자기가 필요
할 때만 보호자 운운하는 꼴에 속이 뒤집혔다.
“어떤 미친 아버지가 아들 통화내역을 추적을 해? 아니, 나는 그렇다 쳐도 상명
이랑 선배 전화까지 추적한 거야?”
“금치산자 아들이 어딜 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을 쓰
는 게 보호자의 도리지.”
기가 막힌 그 말에 목뒤가 뻣뻣해져왔다. 너무 화가 나고 또 당황하고 기가 막혀
서 눈앞이 하얗게 변해가는 듯했다.
“누가 그딴 거 신경 써 달래? 내 번호는 몰라도 다른 사람 번호까지 일일이 감시
하지 마!”
“지금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닐 텐데? 그래서, 무슨 대화를 그렇게 오래 한 거지
?”
또 다시 그 통화 내용을 묻는 듯한 말에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웃으며 점점 차의
속도를 올린다.
“서주원이었지? 말보로 멘솔을 피우는 녀석. 그러고 보니 녀석도 안 좋은 것들만
네게 가르쳐놨지. 내가 질색하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담배 냄새를 배게 하고 들어
왔으니까.”
그를 만나본 적도 없을 텐데 너무나 정확하게 나온 그의 말에 소름이 끼쳐왔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모든 걸 알고 있는 대상을 상대로 싸운다는 게 얼마
나 끔찍한 일인지, 지금 순간 적나라하게 깨닫게 된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가 기억하지 못하던 것들을 대신 알려주고 있잖아. 네가 원하던 게 이거 아니
었어? 서주원, 27살, 아버지는 경남 소원병원 원장, 어머니는 아름다운 재단 이사
장, 위로 형과 아래로는 여동생 하나가 있고, 형은 한의대 졸업 후 개원을 한 상
태고, 동생은 얼마 전에 결혼. 본인은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져서 현재 독립 준비
중. 해군을 자원입대해 제대하고 올해면 졸업이지? 전상명은 기억하는 것 같으니
관두지.”
자신도 모르는 선배의 신상까지 하나하나 꿰고 있는 그의 모습에 더는 기도 차지
않았다.
“그걸 왜 당신이 알고 있는데?”
“그 녀석 덕에 너와 트러블이 있어서 미리 조사해뒀던 것뿐이야. 질이 안 좋은
녀석이니까.”
“언제부터 내 주변 사람들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데?”
“아들의 교우 관계는 확실히 관리해둬야 한다는 걸 배웠으니까. 일탈을 한 뒤에
는 후회해 봐도 너무 늦더군.”
“웃기지 마. 언제부터 그렇게 아버지인 척했다고?”
“그럼, 말을 바꾸지. 나랑 한 침대 쓰는 녀석이 안 좋은 것들을 배워오는 게 싫
었다고 해두는 게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해.”
갈수록 가관이라고 자기 편한대로 이리저리 말을 바꾸는 그를 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유리한 대로 아버지니 보호자니 떠들어대며 하나하나 감시하고
확인하고 뒤를 쫓고 통화 내역까지 확인하는 그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 정도면 미친 거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날 숨 막혀 죽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건 그
냥 둬도 되잖아!”
“학습의 결과라도 해두지. 넌 풀어두면 머리끝까지 기어오르는 녀석이니까. 뒤통
수 맞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해. 알면서 당해주는 것도 덜 아플 때까지야.”
“그러니까,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통화했으면 알 텐데?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뜨끔한 그 말에 급격히 시선이 흔들렸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그를 바라본
채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웃으며 대교로 빠져 속도를 올린다.
“자세히는 몰라도 눈치는 있는 녀석이니 대강 설명을 해줬겠지. 그리고 너도 눈
치는 빠른 녀석이니 어느 정도는 눈치 챘을 테고. 대강이지만 알고 나니 감상이
어때?”
“……그 녀석은 아무 상관없어. 선배도 마찬가지고. 아는 대로만 설명해준 것뿐
이야.”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이 더 정확하기도 하지. 지나치게 개입을
하면 감정적이 되 거나 사감이 들어가니까. 그래서, 그 녀석이 뭐라고 했지?”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그의 물음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더 미적지근하게 굴거나 질문에 회피하려 든다면 그의 의심만 살 것이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진짜 별일 아니라
는 듯 반응할 수밖에 없다.
“내가 6월쯤에 지방에서 연락을 했다는 얘기만 들었어. 그 외엔 그 녀석도 몰라.
”
“그보다 뭔가 더 있을 텐데?”
그 말에 다시 심장이 조여들기 시작했다.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그의 말투에 설
마 위조신분증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을까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상명이 그런 부분
까지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눈치 챘다면 그가 먼저 택배에
도 손을 썼을 것이다.
“내가 불안해 보였다는 얘기도 들었어. 그리고…… 당신이 해외로 나
간다고 좋아했다는 것도.”
들었던 것들 중 적당히 걸러, 하나쯤은 그가 믿을 만한 이야기를 꺼내자 그가 나
지막한 웃음을 흘린다. 그 웃음이 묘하게 귀에 거슬려 몸을 움츠리자 그가 느긋한
투로 말을 이어간다.
“그래, 아주 좋아했겠지. 미친 넌 데려갈 수 없으니 혼자 나갈 줄 알고 좋아서
날뛰었겠지. 그러다, 그 꿈이 깨지니 어땠어?”
『정후가 어느 정도 안정되면 본사를 해외로 옮길 생각이야. 그리고 너랑 나 둘이
사라져버리는 거지.』
순간 떠오른 그의 말에 등골을 타고 한기가 끼쳐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느낀 공
포와 소름 끼치던 그 감각에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공
포감에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그가 더욱 속도를 올리며 끈질기게 물어온다
.
“응?”
집요하게 캐묻는 그의 태도에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기억 안 나.”
“……전혀?”
“전혀.”
“좋아. 그럼 내가 알려주지.”
갑작스러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강렬한 충
격에 겁에 질려 그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야?”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걸 알려주겠다고.”
“나한테 기억해내라고 했잖아.”
“물론, 모든 걸 말해줄 생각은 아냐. 나머지는 네가 기억해내. 난 소스만 줄 뿐
이니까.”
전혀 원한 바 없는 그 친절에 기가 질려 그를 바라보던 사이 그가 오른쪽으로 차
선을 바꾼다.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그를 바라
보자 그가 대로를 빠져나가며 한 마디를 더한다.
“그럼, 처음부터 시작해자고.”
아무리 한산한 시간이라도 빠르게 시내를 질주하던 차는 한 시간 전 출발했던 그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차이라면 별채가 아닌 본채라는 것뿐이었다.
“내려.”
안전벨트를 풀며 던진 그의 말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들어가기 싫어.”
간절한, 자신의 입장에서는 절실하기까지 한 그 말에 그가 안쓰럽다는 듯 자신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갖고 그에게 매달리려 했지만, 그의 태
도는 단호했다.
“네가 알고 싶어 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이번만은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지 않겠다는 듯 답한 뒤 그가 차의 도어락을
푼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문을 열려는 모습에 서둘러 그의 팔을 잡았다.
“싫어. 저기엔, 들어가기 싫어.”
마치 체벌을 받을 아이처럼, 싫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저 안으로 들어가기 싫다고
고집을 부리자 그가 살짝 눈살을 찌푸린다. 조금 마음이 약해진 듯한 반응에 그에
게 매달리듯 다시 한 번 말을 건넸다.
“들어가기 싫어.”
가늘게 떨려오는 음성에 잠시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던 그가 부드럽게 손을 밀어낸
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현실과 직면할 줄도 알아야지.”
그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을 누르고 있던 안전벨트가
풀렸다.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소리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린 그가 보닛을 돌아 이쪽으로 다가선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걸음으로 빠르게 조수석으로 다가선 그가 문을 열고는 팔을
잡아 끌어내린다. 그 힘에 끌려 차에서 내리자 그가 여전히 팔을 잡은 채 건물 앞
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 건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그 건물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머리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집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빙빙 돌며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순식간에 패닉 상태가 되어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던 사이 그가 벨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어서 오…….”
문을 열어준 혜선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 말을 무시한 채 그는 자신의
팔을 잡아끌어 집안으로 밀어 넣었다. 험악한 분위기에 혜선이 그와 자신을 돌아
보다 한 걸음 물러선다. 안 좋은 예감을 느낀 건지 빠르게 눈을 굴리며 사방을 돌
아보던 그녀가 판단을 끝낸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본채를 비우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바삐 걸음을 옮겨간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빙빙 돌아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비틀거리고 있던 중 집안에 있던 사람들이 빠르게 집안을 빠
져나갔다. 그리고 순식간에 집안은 텅 비었다.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그 커다란
건물 전체가 아주 작은 소음도 없이, 폐가처럼 텅 비어버렸다.
그 무서울 정도의 적막에, 사람들이 빠져나간 복도 쪽을 응시한 채 그 자리에 우
뚝하니 서 있었다. 집안을 도는 고요와 한기가 너무 무겁고 무서웠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의 앞에 있는 그 계단이었다.
저 계단이 싫다. 다시 돌아온 그날부터 느꼈던 바였지만, 그쪽을 바라보는 것만으
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저 계단이 싫었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려 오는 느낌에 필사적으로 그쪽에서 시선을 돌린 채 복도를 바
라보고 있던 사이, 억센 손이 머리카락을 잡아 쥐었다. 그리고는 강제로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하게 한다.
그 순간 에워싸듯 높이 올라간 나선형의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그 계단이 시야에 들어오자 다리에서 힘이 풀려갔다. 그리고
눈앞에 돌기 시작했다. 마치 술에 취한 듯, 시야가 급격하게 뒤흔들리며 요동을
치고 있었다.
“자, 잘 기억해 봐.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 기억이 사라진 부분이 어디
서부터인지.”
“싫어……. 알고 싶지 않아.”
“아니, 알아야 돼. 넌 그래야 할 의무가 있어.”
강압적인 그의 말투에 머리를 흔들며 그를 밀어내려 발버둥을 치자 머리카락을 쥐
고 있던 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무시무시한 그 힘에 비명도 내지르지 못
한 채 고개를 쳐든 순간 2층의 복도와 이어진 난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어떤 기억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갔다.
아팠다. 진짜 지독하게도 온몸이 아팠다. 통증에 머리가 울려오고, 또 무서워서,
진짜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저 계단으로 도망쳐 나왔다. 찢어진 셔츠 자락을 잡고
비틀거리는 몸뚱이를 간신히 끈 채, 어떻게든 살기 위해 저 계단으로 내려섰다.
뇌가 출렁이는 듯한 느낌에 좁은 계단은 일렁거리고 넓은 홀의 천장은 빙빙 돌았
지만 필사적으로 난간을 잡고 다리를 움직였다.
몸은 천 근처럼 무겁고 눈앞은 어지러웠지만 안정이 되길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건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건 공포였다. 단지, 공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육체는 지배한 통증과 정신을 점령한 공포감에 남은 온 힘을 쥐어짜 도망치려 했
지만, 곧 머리채를 잡혔다. 그리곤 곧 억센 힘이 머리카락을 잡아 뜯을 듯 쥔 채
자신의 몸을 계단 위로 끌고 가고 있었다.
저 계단 위로 질질 끌려가던 중 통증보다도 더한 끔찍한 예감이 몸을 관통했다.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이 곧 벌어질 거라는 예감에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렸
지만 그는 너무 강했고 자신은 약했다.
“싫어……. 하지 마…….”
겁에 질려, 기억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동시에 그렇게 애원했지만 그 사이에
도 몸은 그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남아있는 온 힘을 다해 발버둥치고 비명을 질렀지만 머리
채를 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분명, 저 아래에 있는 걸 아는데……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내려오는 걸 본 사람들이 있는데도, 바로 저 아래에서 눈이 마치고 자신을
본 사람들이 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척, 모르는 척, 모두 시선을 돌려버렸다.
누구도, 자신을 보지도 못한 듯 자신의 비명도 듣지 못한 듯 외면하고 있었다.
그게 더 끔찍하고 무서웠다.
그 많은 이들 중 누구 하나도 손을 뻗어주지 않고 있다는 게, 그리고 외면하면서
도 결국 이 상황을 모두가 듣고 보고 있다는 게 너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하
기만 했다.
“전부 기억하고 싶다고 했잖아. 기억해봐. 네가 왜 저 계단을 싫어하는지. 왜 그
렇게 이 집을 나가고 싶어 했는지.”
귓가에서 속삭여오는 그의 목소리에 잊으려 했던, 그리고 잊고 싶어 지워버린 기
억들이 하나하나, 마치 현실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온몸을 얻어맞고 피를 흘리며 침대 위로 내던져져 옷이 벗겨지고 강제로 몸이 열
렸다.
그의 분노를 담은, 마치 흉기 같은 그의 성기로 몸을 꿰뚫리며 비명을 지르고 도
와달라고 소리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그리고 끔찍해서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쳤지만 고통은 끊이지
않았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나 아픈데도 의식은 선명했다. 육체가 느끼는 감각도 눈앞의 광경도, 지나
치게 선명했다.
아파서,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목을 눌린 채 자신의 위에서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
며 눈물을 흘리고 애원했지만 그는 도취라도 된 듯 계속해서 허리를 움직일 뿐,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걸로 알아챘다. 그건, 그냥 폭력이었다. 말 그대로 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내
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폭력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이건 그냥 재수 없게 지나가던 누군가에게 걸려 죽도록
얻어맞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그 행위에 대해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하지만…….
“이제 기억이 좀 났어?”
나지막하게 울리는 그의 음성과 함께 불현듯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활짝 열린
방문 너머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하얗게 질린 채, 방 안을 바라보고 있는 삼
촌의 얼굴에 정신이 깨었다.
본인이 본 상황이 어떤 건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너무 당황하고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이쪽을 바라보던 삼촌의 얼굴에 몸이 느끼는 고통보다도 더한 충격이 몸을
휘갈겼다. 날카로운 채찍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듯 얼어붙어가는 몸에 문 쪽을 바
라보고 있자 서진이 삼촌의 앞을 막아선다. 그리고 곧 문을 닫은 채 삼촌을 끌고
사라진다.
세세하게, 마치 그 장면을 촬영해놓은 필름을 돌려놓은 듯, 선명하게 눈앞을 스쳐
가는 그 장면에 댐이 터진 듯 순식간에 기억들이 몰려들어왔다. 잊고 싶었던, 그
리고 잊으려고 했던 그 기억들이 뒤죽박죽으로 터져 흐르며 한 순간 눈앞이 까맣
게 변해갔다.
넘쳐나는 정보를 감당하지 못한 채, 뇌가 그 순간 멈춰버렸다.
『뭘 하는 거지?』
그 끔찍한 사건 뒤 어느 정도 몸이 낫자 집을 나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할머니와도 이미 이야기가 끝난 후였기에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살기로 한
뒤 차곡차곡 짐을 싸던 중 문 안으로 들어선 그가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렇게 다친 뒤 양심의 가책은 느꼈는지 한동안 자신의 근처로도 오지 않던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여행 가방을 챙기며 무심히 답했다.
『보면 몰라? 짐 싸잖아.』
『그러니까, 왜?』
『할머니가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지내도 된다고 했어. 재영이랑 재원이는
나중에 데리고 나갈 거야. 어차피 고소도 못 하니 위자료로 그 정도는 받아도 되
잖아.』
당장 필요한 옷가지들을 챙겨 넣고 마지막으로 여벌 교복을 옷장에서 꺼내 가방에
넣으려는데 방 안으로 들어선 그가 멋대로 가방을 닫아버렸다. 아직 교복과 셔츠
를 넣지 못한 채라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조용히 읊조린다.
『못 나간다고 했을 텐데?』
『그래도 나간다고 했잖아. 기어서라도 나갈 테니 비켜.』
이미 바닥이었다. 더는 도망칠 곳도 피해갈 곳도 없다는 걸 알기에 이젠 아무 거
리낌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웃는다. 그 웃음이 신경에 거슬렸다. 불쾌하
고 기분 나쁜 그 느낌에 재빨리 가방을 열고 교복을 넣은 뒤 지퍼를 닫고 가방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막 그를 지나 방을 나가려는 순간 어깨를 잡혔다.
그 손길에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아직도 생생히 남은 그 통증과 끔찍했던 기억에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치자 그가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당황함이
역력한 그 표정에 서둘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한테 손대지 마. 죽는 순간까지, 다시는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마.』
『왜?』
독기에 찬 자신의 말과는 달리 너무나 단순한 그 물음에 순간 어깨에서 힘이 빠졌
다. 진심으로,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가 차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한 걸음 다가선다.
그의 위압감에 눌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선다. 그가 가까
워지자 그에게서 나는 샤워코롱 향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겨우 겨우 잊어가고 있
던 기억들이 다시 떠올라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에게 안긴 채 바로 바로 코앞에서 맡은 그 냄새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본
능적인 공포감에 점점 뒤로 물러섰지만 곧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도망갈 곳
이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올리자 위협하듯, 천천히 앞으로 다가선 그가 바로
한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며 빙긋 웃는다. 그리곤 손을 뻗어 뺨을 쥐어온다.
너무 뜨거워서, 그의 손이 닿은 부분이 타들어가는 듯한 감각에 몸을 경직시키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 눈초리를 휘며 웃는다.
『만졌는데, 이제 어쩔 거지?』
더듬듯, 뺨을 쓰다듬고 목줄기를 손끝으로 매만지며 던진 그 말에 사납게 그의 손
을 쳐냈다.
『……유치한 짓 하지 마.』
말장난은 관두라고, 똑바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끝은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오기로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은 무서
웠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 남자 자체가 무서워서, 똑바로 바라보는 것조차도 힘들 지경이었다.
간신히 후들거려오는 다리를 펴고, 겨우 겨우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이번엔 가
볍게 웃는다.
『그래, 내가 봐도 유치하긴 했어. 그럼,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그 말을 제대로 이해도 하기 전에 그의 팔이 허리를 감쌌다. 근육에 싸인 탄력 있
고 강한 팔이 허리를 휘어감아 당기자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겨드는 순간 확하니
코끝으로 그의 향이 퍼졌다.
지독할 정도로 독하고 찬 그 향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쇠사슬처럼 몸을 휘어
감던 그 팔의 감촉도, 그의 냄새도,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알던 순간의 그 감촉들도
싫을 정도로 상세히 떠올라 몸을 딱딱하게 경직시킨 채 바들바들 떨고 있자 그가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넣어 몸을 가른다.
사타구니를 짓누르는 그의 허벅지에 헉- 하고 숨이 막혀왔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한 번은 괜찮다.
사고라도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두 번은 아니다.
두 번은 감당하지 못한다.
『걱정할 것 없어. 네가 내 신경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너도 기분 좋게 해줄 테니
까.』
두 번째의 관계를 암시하는 듯한 그 말과 사타구니를 세게 짓누르는 그의 움직임
에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말았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 사람은 또다신 자신을 안으려 하고 있었다. 아무 죄책
감도 없이, 너무나 당연한 본인의 권리라는 듯, 그렇게 자신의 몸을 탐하려 하고
있었다.
그 반응에 기가 찼다. 이제 공포의 수준을 넘어서자 헛웃음이 터졌다.
『당신, 진짜 미쳤어?』
『그럴지도 모르지. 제정신이라는 말은 못 들어봤으니.』
『나 당신 아들이야.』
『그게 뭐?』
도저히 말귀를 못 알아먹는 그의 말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친 거라고, 그게!』
『마음에 드는 게 너뿐인데, 그게 어때서?』
『당신 마음에만 들면 다야?』
그의 품에 안긴 채 꼼짝도 못 한 채 그렇게 소리치자 그가 잠시 말을 끊는다. 드
디어 뭔가 말이 통한 건가 해 두 손으로 그를 밀어내려 하자 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가 속삭인다.
『……시끄러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입술이 겹쳐졌다. 강제로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입안을 핥아
대는 그의 혀에 손톱을 세운 채 그를 밀어내려 힘을 줬지만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몸을 옭아맨 채 전신을 짓눌러 오는 그의 힘에 머릿속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했다.
두 번은 아니다. 한 번은 실수라도, 두 번은 아니다. 절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
각에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려했지만 최초의 통증을 기억하는 몸은 공포로 굳어
져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도저히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그저 멍하니 몸을 떨고 있다 사이 너
무나 간단히 입고 있던 옷이 벗겨지고, 이번엔 그의 침실이 아닌 자신의 방에서,
그의 힘에 눌려 몸을 열었다.
두 번이나 그에게 안긴다는 것도 끔찍했지만 그보다 더 끔찍했던 건 첫 관계의 트
라우마 따위는 완전히 잊은 듯 부드러워진 그의 손길과 입술에 점점 반응해가는
자신의 몸이었다.
그의 말대로, 반항하지 않은 채 떨고 있자 그는 너무나 부드럽게 몸을 애무해갔다
. 몇 번이나 입을 맞추며 따뜻하게 몸을 안아주고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부분들
을 찾아내곤 그 부분을 집요하게 만지고 더듬고 문지르는 그의 손길에 서서히 몸
은 그에게 길들여져 가고 있었다. 세상에서 다시는 없을 정도로 상냥하게 안아주
고 애무하고 아래쪽을 정성을 들여 풀어주며 자신의 내부를 길들여갔다.
목덜미와 유두, 옆구리와 허벅지의 안쪽, 그리고 몸 안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예민
한 부분들이 모두 그의 손길 하나에 쾌감을 일깨워갔다.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 그의 손이 닿는 순간 전신이 녹아드는 듯 달콤한 감각에 젖
어 들어갈 정도로, 그는 침대 안에서만은 더없이 상냥했다.
그리고는 아주 당연한 듯, 자신을 안은 채 침대 안에서 잠이 들었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 계속해서 관계를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놀라고 또 기가 막혀서, 그리고 그에게 안기는 데에 익숙해져가는 자신
이 너무 싫어서, 어떻게든 도망치려 몇 번이나 엉뚱한 곳으로 달아나곤 했지만 그
럴 때마다 번번이 붙잡혀 집으로 끌려오기를 반복하던 사이 어느 순간 체념하게
되었다.
그는 그냥 재미있는 놀이를 하나 발견한 거고, 그러니까 곧 질릴 거라는 생각에
그가 질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나가자. 어디로든 가자.』
하얀 눈이 내린 어느 날, 재원이 그렇게 말을 건넸다. 그와 함께 집을 나가기로
했다는 말을 했던 그 날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놀란 녀석은 어린아이 둘이, 어떻게든 어디로든 떠나자고 그
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차피 나가봤자 하루도 못 가 잡힐 게 뻔한데도 재원은 어떻게든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 빠져 있었다. 아직 어리고 패기 넘치는 재원의 말에 당황하는 한편
또 그 녀석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원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가 아냐. 계속 생각해온 일이야. 형을 이 집에 둘 수는 없어. 그러니까
어디든 가자.』
자신이 아는 한 느긋하고 과묵하고 덤덤하기만 하던 녀석이 처음으로 필사적인 모
습으로 자신을 붙잡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간 이 녀석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
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특히나 더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자신만큼이나,
그 녀석도 무서워하고 당황하고 떨고 있었다.
『아무 데로나 가면 돼. 엄마한테 가든가, 아니면 외할머니 댁이나……. 이 집에
서 나갈 수만 있다면 어디든 좋아.』
『너희 엄마한테 가든 외가로 가든, 하루면 잡혀.』
『그럼 아무 데로나 도망치면 되잖아. 나가서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어디든 지방으로 가자고.』
『……가면?』
그 말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어수선하던 재원의 기세가 멈칫한다. 그제야 재
원도 현실적인 상황을 인지한 듯 조금 목소리를 낮춘다.
『……어떻게든 되겠지. 형이랑 나랑 뭐든 하면…….』
『미성년자 둘이 뭘 할 건데? 어딜 가든 일을 하려면 주민등록증을 요구할 거고
그럼 즉시 경찰들이 올 텐데?』
핸드폰도 모두 서진의 명의로 되어 있고 갖고 다니는 건 카드뿐이었다. 현금도 그
카드에서 인출을 한다. 카드를 쓰면 곧장 잡힐 거고 현금을 잔뜩 찾아 도망간다
해도 먹고 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누군가에게 손을 뻗어도 즉시 걸려든다. 특
히나 재원이 이 집에 있길 바라는 윤진경은 재원이 이 집을 빠져나가게 두지 않을
거다. 도와주기는커녕 사라지는 즉시 그녀가 먼저 찾아낼 것이다.
이 집안사람들뿐 아니라 그들과 연계된 이들은 본인들의 이익과 관련되지 않은 한
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걸, 확실히 깨달았다.
뭘 보든, 무엇을 듣든, 이 집안사람들은 그들에게 불리한 건 지워버리고 유리한
것들만 기억하는 편리한 뇌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절대 손끝 하나도 까딱하지 않는다. 눈앞에서 사람이 맞아죽어도, 강간을
당해 정신을 놓고 있어도 절대 손을 내밀지 않는다. 그저 수군거리며 비웃을 뿐,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
그걸 겨우 알았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은 도와주지 않고, 도와서는 안
될 아이들만 나선다는 걸, 이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도망칠 수 없다. 말로는 하지 않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조건으로, 어머니 쪽의 일도 모두 해결해주기로 그 역시 암묵적인 동의를 한 채였
다. 너무 약해져 수술조차도 쉽지 않은 어머니 쪽 동생의 모든 치료비를 부담하고
맞는 골수까지 찾는 데에 도움을 주고, 복잡해진 그쪽 집안 문제도 모두 해결해주
기로 한 채였다. 그리고 삼촌과 동생들은 동쪽 별채로 보내고 더는 그들에게 관여
하지 않겠다고 본인의 입으로 말했다. 그 덤으로, 재원과 재영의 어머니들을 집안
으로 오가게 해주는 것까지 승낙했다.
그 덕에 겨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체념하고 순종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
면 편해진다는 걸 겨우 깨달았다. 처음 하는 재미있는 놀이에 심취한 그는 지금
자신과의 놀이에 푹 빠져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있었다. 그저 한 마디 말을 던지면 그는 다른 조건을 제시했고
자신이 그를 수긍하면 그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었다. 그건 나름
아주 편리한 일이기에, 그가 그 놀이에 질릴 때까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그다지 길지 않다.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게 조용히 해결된다. 재
원이나 재영의 어머니들뿐 아니라 이 집안에 수시로 드나들던 그의 수많은 여자들
처럼, 그가 질리면 끝이다. 흥미를 잃으면 그는 곧 언제 봤냐는 듯 타인처럼 지나
쳐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절망한 여자들을 질리게 많이 봐왔다. 아이를 안고 오는 여자들도 있었고
재산이라도 좀 뜯어낼까 오가는 여자들도 있었고 가끔은 집안에서 난동을 부리는
여자들도 있었다. 할머니는 그 여자들을 상대도 하지 않았고 그럼 자연히 난동을
부리는 그 여자들 꼴을 봐야 하는 게 싫어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그 여자들에 대
해서도, 그리고 그 남자에 대해서도 질리도록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곧 질릴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남자의 여자관계는 길어야 2년
을 넘지 못한다. 제일 길었던 관계가 1년 8개월이었다. 그걸 너무 잘 알기에 딱 2
년만 참자고 생각했다. 아니, 2년도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통은 반년이면 끝
난다.
이미 머릿속으로 모든 계단을 마친 후라, 재원의 제의에 답하지 않은 채 입을 다
물고 있자 재원이 속이 탄 듯 고함을 내지른다.
『그럼 어쩌자고? 아버지랑 둘이 나가서 살겠다고? 그렇지 않아도 다들 수군거리
는데 아예 살림을 차려 나간다고? 다들 형 뒤에서 뭐라고 하는지나 알고 있냐고!
』
미쳤냐며 고함을 내지르는 재원의 음성에 헛웃음이 터졌다.
이미 그들끼리 은밀한 루트를 통해 집안사람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자신도 질리게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그와 관계를 반복했고, 그에 그는
거침이 없었다. 누가 눈치를 채든, 보든 상관없다는 듯 아무 데서나 자신을 안았
다.
보통은 침실에서, 또 한두 번은 욕실에서도 관계를 가지며 자신이 교성을 내지를
때까지 밀어붙였고 그 덕에 이 집안사람들 전부가 자신과 그가 함께 있으면 뭘 하
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한창 정사 중일 때에도 거리낌 없이 방으로 서진을 불러
들이던 남자였으니 사람들이 모른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지만 모르는 척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며 혀를 차고 더러운 것을
보듯 바라보기는 했지만 모두 입 밖으로는 그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
았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보면서도 못 본 척하는 건 이 집안사람들의 특기였으니까.
『이번엔 진짜 가야 돼. 이번이 아니면 도망도 못 쳐. 더는 안 돼. 어떻게든, 내
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돼. 이 집만 아니면 우린 어떻게
든 살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재원은 다시 한 번 자신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무나 간절한 그 얼
굴과 떨려오는 손에 순간 그냥 이 녀석의 손을 잡고 도망쳐 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그냥 조용히, 아무 데나 가서 둘이 어떻게든 살면 되지 않을까? 자신은
반쯤은 성인이고 이 녀석은 덩치가 크니까, 어지간한 성인보다도 더 크니까 어떻
게든 되지 않을까?
머릿속을 도는 비정상적인 망상에 마음이 격렬하게 흔들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성이 돌아왔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
었다. 아직 어머니 쪽 일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녀석은 너무 어리다. 그
리고 어쨌든 고이고이 자란 도련님이었다. 아직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고 너무나
어린 그 녀석에게 기대 도망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그건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망을 친다 해도 이 녀석은 자신에게
짐이 될 것이다. 아니,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녀석과 재영은 이 집안과 연
결된 끈질긴 실이 되어 자신의 발목을 잡아끌 것이다.
언젠지 모를, 만약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자신이 떠나가야 할 때, 이
아이들은 자신에게 족쇄가 되어올 것이다.
그러니까…….
『재원아,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그건, 내가 원한 거야.』
『……뭐?』
『내가 좋아서 자는 거라고. 아버지랑 둘이 나가서 사는 것도 내가 부탁한 거야.
조용히 둘이서만 살고 싶어서.』
자신이 듣기에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그리고 역시나 재원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웃기지 마. 그런 말을 누가 믿을 것 같아?』
『안 믿어도 어쩔 수 없어. 내가, 그 사람 사랑해. 사랑하게 됐어. 그래서, 그 사
람하고만 있고 싶어. 그러니까…… 도망칠 생각은 없어.』
재원의 눈을 바라보며, 그게 내 진심이라고 말하자 재원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자 재
원이 한 걸음 물러선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그 얼굴로, 그럼에도 조금은 의심
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서로를 잘 아는 형제이기에 재원은 미련을 끊어내지 못했다. 어떻
게든 도망치려 나름 머리를 굴리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함께 떠나자고 매달려 왔다
.
그게 고맙고, 또 한편으로는 버겁고 미안해 난감해하던 중, 그 남자가 아주 깔끔
하게 그 녀석을 잘라내 주었다. 다시는 자신의 얼굴도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
로, 최악의 방법으로 그 녀석이 자신을 밀어내게 만들었다.
그날, 그의 위에 올라타 엉덩이를 흔들며 신음하던 자신을 본 순간부터 더는 재원
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처럼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을 담고 한 번 더 함께 떠나자고 말하던 녀석을 거절하고 돌아
선 순간, 무뚝뚝하지만 다정하게 굴던 자신의 동생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자신이, 그를 자신의 세계에서 영원히 밀어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