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따사로운 봄볕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볍게 부는 봄바람을 타고 후원 내에 흐드러
지게 핀 목단의 향이 퍼지자 온몸이 나른하게 풀려간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후원 정자 안의 의자에 누운 재현은 이어폰을 낀 채 눈을 감
고 있었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담담한 여성 보컬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던 중, 왼쪽 귀에서 이어폰이 빠져나갔다. 갑자기 소리
가 멀어져 천천히 눈을 뜨자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
다.
기분이 상한 듯, 차갑게 굳은 그의 표정에 말없이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렇게 아
주 잠시 간의 침묵이 흐른 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위도 너무 자주 하면 안 먹혀. 애를 태우려는 거라면 적당히 해.』
『……그런 거 아냐.』
『그럼?』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정원이 때문에?』
툭하니 내던지는 그 말에 인상을 쓰며 나머지 이어폰도 귀에서 뺀 뒤 일어나 앉으
며 대꾸했다.
『알면서 왜 물어?』
『왜 그 녀석 일로 네가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거지?』
이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겠다는 듯한 그의 말에 한숨을 쉬며 그 물음에 답해주
었다.
『삼촌은 나한테는 친형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식으로 도매급으로 팔아넘기려는데
안 좋은 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팔아넘기려고 하는 거라면?』
그 말에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그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
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역시나, 이 사람은 이상해, 라는 말이 입
가에서 맴돌았다.
『그런 식으로, 전부 다 치워버리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렇다면 확실히 너한테는 나밖에 남지 않겠지.』
순간 쓴 웃음이 터졌다. 의심 많고 철저하고 계획적인, 너무나 그다운 말이라서였
다.
그가 철두철미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과하다. 이미, 자신의 세계에는
그밖에 없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걸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까지 했으면 충
분한데도, 만족할 줄도 멈출 줄도 모른다. 그의 욕심과 집념에는 끝이 없었다.
『이미 당신밖에 없어.』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좀 더 영리하게 굴라고 했잖아.』
『난 그다지 머리가 좋지 못해. 머리를 굴리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아니, 넌 충분히 영리해. 다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지.』
『다 포기했다고 했잖아. 이젠 뭘 해도 별 생각 없어. 난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것뿐이야.』
『그렇다면 내가 뭘 하든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 왜 늘 문제를 만들지?』
조금 타박하는 듯한, 아니 어쩌면 비난하는 듯한 그의 말에 한숨이 나왔다. 적어
도 자신을 반쯤은 키운 삼촌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게 왜 그렇게까지 비난을 받아
야 하는 일인지, 그리고 왜 이런 문제 하나하나에 대해 일일이 해명을 하고 그의
이해를 구해야 하는지 조금 답답했다.
『당신이 조용히 내버려두면 나도 조용히 있을 거야. 이 집에 들어온 후로 날 돌
봐준 건 삼촌뿐이야. 재원이랑, 재영이도 삼촌이 반은 키웠어. 그러니까 그냥 조
용히 내버려둬. 나한테는 고마운 사람이야.』
『그 녀석이 네게 호의를 보인 건, 그냥 심심해서일 뿐이야. 그리고 네가 만만했
으니까지. 이 집안에서 자길 인간대접해주고 따르는 건 너희뿐이니까. 어쩌면, 우
월감 같은 걸 느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쓰레기니 더 어린 쓰레기들을 보면서 자
기는 괜찮다는 우월감 같은 걸 느끼거나 외로움을 해소하려 했던 것뿐이야. 너희
랑 있으면 자기가 좀 나아 보였을 테니까.』
말과 동시에 그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본인의 동생들뿐 아니라 아들
들을 향해서도 서슴없이 쓰레기라는 말을 내뱉는 그의 이상 성격은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들을 때마다 상처 받는다. 이젠 무뎌질 때가 됐는데도
, 꽤 아프다.
『그만해. 내가 그런 말 싫어하는 거 알잖아.』
『사실이니까.』
『그 쓰레기랑 한 침대를 쓰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너처럼 말 안 듣는 녀석은 드무니, 쓰레기치고는 특별하다고 해두지.』
가차 없는 그 말에 이젠 독기도 사라졌다. 화를 내는 것도, 말로 싸우는 것도 이
젠 지쳐버렸다.
『그만둬. 겨우 휴전했으니 이제 적당히 하자고. 아직 기분 안 좋아.』
질 게 뻔한 언쟁을 더 이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들고 있던 아이팟을 들고 자
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모든 싸움의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시작이 어떠하든,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되든, 승자는 그이고 패자는 자신으로 정해진 게임이었
다.
더는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것도 피곤해 방으로 돌아가 차라리 이불이라도 뒤집어
쓰고 자려는 생각에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가 팔을 잡았다. 팔목이 아플 정도로
강한 그 힘에 인상을 쓰며 그를 돌아보자 그가 조금 화가 난 듯 높아진 음성으로
속삭인다.
『내가 언제까지 네 비위를 맞춰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기가 막힌 그 말에 허탈한 한숨이 터져나갔다.
『비위 맞춰달라고 한 적 없어. 그냥, 아닌 건 아니라고 하는 거지.』
『그게 바로 날 거슬리게 하는 거야. 넌 단 한 번도 조용히 내 말을 들은 적이 없
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다해주고 있잖아. 말 잘 듣고 얌전하니, 죽으라면 죽는 시
늉까지 하고 있어. 이 이상 어떻게 순종을 해?』
신경이 곤두서 날카롭게 내뱉어진 그 말에 팔을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 그 힘에 팔이 부러질 듯 아파와 인상을 쓰자 그가 잇새로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바로 네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 항상 마지못해 져주고, 순종하는 척하는 것뿐이
지. 넌,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내게 애원한 적은 없어.』
끊임없이 반복되는 그 논쟁에 일부러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리고 화를 누그러뜨
린 채 이번엔 좀 더 부드러운 어조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래서 재원이도 재영이도 다 버렸어. 삼촌도 버렸고. 우리
엄마도 버렸어. 아니, 그 전에 인간이기를 포기했어. 이 이상 어떻게 해야 믿겠어
?』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담담하게 답했지만,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얼
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쓸데없이 의심이 많은 그의 태도에 지친 듯 그를
응시하며 이번엔 좀 더 목소리에서 힘을 뺀 채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싸우지 말자고. 나도 당신하고 싸우기 싫어.』
그 말에 팔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스르르 팔에서 떨어져나가는
그 손에 먼저 손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에게 매달린 채 속삭였
다.
『사랑해. 이젠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어.』
그렇게 속삭이며 어리광부리듯 그의 뺨에 입을 맞추자 그가 허리를 끌어안아준다.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허리에 감겨오는 그의 팔에 끌려 그의 품에 안겨 있자 그
가 눈가에 입을 맞춰준다.
『그래, 이렇게 하는 거야. 머리를 쓰려면 이 정도는 써야지.』
눈썹 위로 입술을 누르며 속삭이는 그 말에 조용히 그에게 안겨 있던 사이 저 멀
리고 탁-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건물 쪽을
바라보자 여느 날과 같이 빈틈없는 정장을 갖춰 입은 혜선이 이쪽으로 다가서는
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라 재빨리 그의 가슴을 밀어내자 그가 기분이 상한
듯 인상을 쓴다.
『뭐지?』
『죄송합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서 직접 왔습니다. 사모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어
제 하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으면 하시는데요.』
그 말에 다시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차며 그녀를 향해 답한다.
『곧 갈 테니 잠시 기다리시라고 전해.』
『차를 대기시켜놨습니다.』
잠시도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잠시 자신을 돌아보던 그가 먼저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서 따라오라는 듯한 그의 눈짓에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르자 그가 후원을 가로질러 서쪽 별채를 나가, 대기 중이던 차의 뒷좌석에 먼저
올라탄다. 그리곤 운전석의 바로 뒷좌석에 앉아 어서 타라고 눈짓을 하는 그를 보
곤 그의 옆 좌석에 타 차문을 닫자, 혜선 역시 조수석에 올라탄다. 그녀가 조수석
에 앉아 문을 닫자 곧장 차가 출발한다.
느릿한 속도로 본채를 향해가는 차 안에서 시트에 기대앉은 채 힐끔 그를 돌아보
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옆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하다. 도무지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그가 시선을 앞으로 고정시킨 채 자신의 시선을 의식한 듯 웃는다.
자신만만한, 다소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 그 미소에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 무슨 생각인가 하며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작게 속삭인다.
『이왕 굴리기 시작한 머리면 좀 더 효율적으로 굴려봐. 네가 마음에 드는 짓을
하면, 얼마든지 휘둘려줄 생각도 있으니까.』
『당신 같은 사람을 휘두를 정도의 머리가 있다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는 게 낫
지.』
반쯤은 진담이 섞인 그 대꾸에 그가 가볍게 웃음을 흘린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
린 듯 가벼운 그 미소에 차문을 열고 내리자 화려하지만 어딘지 무거워 보이는 본
채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 앞에 서자 갑자기 가슴이 콱하니 막히는 듯했
다. 이 집안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나 이 본채는 공기가 무겁고 탁하다. 그 공기가
벌써부터 전신을 짓눌러 온다. 아주 잠깐, 이 집안에 오가는 것만으로도 며칠을
잠도 못 자고 두들겨 맞은 기분이 들 정도로, 이 안의 공기는 좋지 않다.
간절히도 그 집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겨우 화해를 하고 또 험악한 분위
기를 조성할 필요는 없을 듯해, 꾹 참고 그를 따라 건물을 향해 걸었다. 천천히
낮은 계단을 올라가던 사이 먼저 내려 벨을 누른 서혜선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
었다. 그녀를 스쳐 먼저 열린 문안으로 들어서자 적당히 식은, 쾌청한 공기가 몸
을 감싸온다.
하지만 아무리 24시간 공기청정기를 돌리고 에어컨을 튼다 해도 역시나 그 불쾌하
고 불손한 공기는 그대로였다. 들어서자마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 바로 그의
옆에 붙어서 그와 함께 응접실 쪽으로 향해가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몇몇 가
족들이 보였다. 큰숙부와 큰고모, 그리고 둘째 고모와 막내 삼촌, 그리고 그 중앙
에 앉아계신 할머님을 본 순간 진심으로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방의 분위기도 그렇지만, 그 사람들이 싫다.
『차, 가져올게. 물도 마시고 싶어.』
바로 응접실 앞에서 그의 팔을 잡고 애원하듯 그렇게 말을 걸자 그가 잠시 자신을
바라본다. 탐색하는 듯한 그 시선에 그에게 애원하듯 바라보고 있자 이내 그가 고
개를 끄덕인다. 긍정의 답에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시 돌아 나와 반대편
복도에 위치한 주방으로 향했다.
피부 아래가 따끔따끔거리며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애써 참으로 주방으로 가 서자
차를 준비 중이던 아주머니와 서혜선이 보였다. 잔을 준비하던 그녀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에 적당히 말을 돌렸다.
『물 좀 마시려고요.』
그렇게 말하며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유리잔에 따랐다. 유리잔에 차가는 보이
는 생수를 내려다보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곤 다시 잔을 들고 주방을 나가 식
당 쪽으로 가자 막 복도에서 식당 쪽으로 들어서던 작은 고모가 이쪽을 보곤 인상
을 쓴다.
『팔자 좋다, 너?』
명백한 시비조였다. 괜히 신경질을 내려는 게 분명히 아무 말 없이 식탁 앞으로
가 잔을 내려놓자 그쪽으로 다가선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큰오빠한테 뭐라고 했길래 하루 만에 얘기가 뒤집혀?』
처음엔 또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잠시 생각해 보자 대강의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막내 삼촌의 결혼 이야기를 철회된 것 같아 안도하고 있자 그녀가 자신
의 침묵이 거슬린 듯 욱하는 얼굴로 빠르게 말을 내쏜다.
『너, 아무리 가족들이 다 안다고 해도 너무 뻔뻔한 거 아냐? 창피한 줄 알면 얌
전히 얼굴 숨기고 있을 것이지 이젠 대놓고 안방마님 노릇까지 하려고? 네가 뭔데
여기저기 간섭을 해? 인간이 양심은 있어야지.』
한 마디 한 마디, 노골적인 악의를 담아 바늘처럼 콕콕 내쏘는 그녀의 말에 신경
이 날카로워졌다.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거라면, 굳이 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려둔 잔을 다시 들어 물을 마시며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며 그녀의 시비에 응해
주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아예 대놓고 된 거 안방주인 노릇도 해보고 싶어서요. 그
것도 아주 제대로 해볼 생각인데요.』
도발적인 말을 내뱉으며 피식거리며 웃자 그녀가 기가 찬 듯 웃는다.
『너 진짜 뻔뻔하다. 어떻게 인간이 이래?』
『어차피 철판 깔고 살기로 한 지 오래니 그냥 재밌게 사는 쪽이 낫잖아요. 제 꼴
보기 싫으시면 고모가 나가셔야죠. 여긴 제 남자 영역이니까요.』
『이젠 아버지라고도 안 불러?』
『제가 좀 미쳐서요.』
여전히 뻔뻔한 답을 내뱉으며 빈 잔을 들고 돌아서려 하자 그녀가 짜증스러운 듯
내뱉으며 먼저 식당을 빠져나간다.
『미친 새끼.』
작게 울리는 그 말에 다시 주방으로 가 잔을 내려두는데 역시나 주방의 분위기도
어색하다. 지나치게 자신을 의식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결국 주방을 나와 홀로 향
하는데 막 안으로 들어서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반가운 그 얼굴에도 차마 아이에
게 다가갈 용기가 나질 않아 조용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넨다. 소심한 그 인사에 아이를 아무 말 없이 바라보
고 있자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복도를 두리번거리다 이쪽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
레 한 걸음 다가선다.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히 이쪽을 향해 다가서는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쭈볏거리며 앞으로 다가온 아이가 다 꺼져 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형, 나 생일인데…….』
기억하고 있었던 바라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알아.』
『생일 날, 나랑 놀아주면 안 돼?』
『…….』
『잠깐이면 되는데……. 형이랑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어떻게든 말을 걸 이유를 찾고 있다, 그 이유를 찾아 겁을 잔뜩 먹은 채 말을 건
아이의 용기는 가상하고, 또 어떻게든 그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안하고 또 안타깝고 당황스러운 상황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아이를 내
려다보고 있자 쿵쾅거리는 발걸음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계단 쪽을 바
라보자 재원이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왜 이 시간에 집에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걸 떠올리곤 시선을 돌리자 바로 재영이의 뒤로 다가
온 재영이의 뒤에서 아이의 어깨를 잡아 끈다.
『저거 만지지 마. 더러운 거 옮아.』
악의가 담긴 공격적인 그 말에 고개를 떨어트리자 재영이에게 어서 올라가라고 한
뒤 자신을 바라본다. 날카롭게 박혀오는 그 시선에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온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완강하게도 자신을 거부하는 그 음성에 뭐라고 답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단 한
마디도 더 할 수 없어 그 자리에 우뚝하니 서 있자 잠시 조용히 있던 재원이 자신
의 휙하니 돌아서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빨리 좀 꺼져. 너만 들어오면 집안에 정액비린내가 진동을 해.』
이번 건 상당히 아팠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심장을 푹
찌르는 듯한 재원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장이 아려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자
복도 저편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음에도 움직일 수가 없
어 조용히 서 있자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울려왔다. 느릿한 그 걸음소리에 겨우
고개를 들자 홀로 나온 그가 자신을 발견하곤 인상을 쓴다. 그 얼굴에 겨우 겨우
표정을 풀고는 그에게 물었다.
『왜 벌써 나와?』
『…….』
『중요한 얘기 하려고 다 모인 거 아냐?』
주말이라지만 가족들이 줄줄이 다 모여드는 건 드문 일이라 그렇게 그에게 묻자
그가 이쪽으로 다가선다. 조금 빨라진 걸음에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바로 앞까
지 다가온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턱을 밀어 올린다.
『얼굴이 왜 또 그 모양이지?』
바로 눈을 마주한 채 나온 그 질문에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바를 답해주었다.
『그냥…… 좀 체한 것 같아.』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답이라는 건 알지만 그냥 떠오르는 대로 답하고나자 그가
웃는다.
『아아, 그래. 넌 종일 굶고도 체하는 특이한 재능이 있었지.』
약간의 비웃음과 짜증이 담긴 답에 고개를 돌려 다시 시선을 내리자 그가 뒤따라
나오던 사람들을 천천히 돌아본다. 그리곤 뭔지 알겠다는 듯 빤히 뒤에 서 있던
작은 고모를 돌아본다. 그 시선에 그녀가 움찔해 시선을 내리자 잠시 그녀를 바라
보던 그가 돌아선다.
『돌아가자.』
『……벌써?』
『아파트로 돌아갈 거야. 너무 시끄러워.』
진심어린 짜증이 밴 그 말에 그의 뒤에 선 이들을 돌아보다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선 채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가 알 수 없는 시선을 던져온다. 도저히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그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서둘러 다시 현관으로 돌아섰다.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홀을 가로지르는데 여전히 뒤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삼
촌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묘한 시선에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그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 아주 가끔씩, 조금은 지친 듯,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들을 담아 빤히 자신을
들여다보는 그 시선을 느낄 때가 있었다.
자신 때문에 상처를 입을 때나, 큰소리가 날 때 그는 늘 그런 얼굴로 자신을 바라
보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 미안해했고, 또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하
지만 그 눈빛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그가 그럴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몰랐었다.
그저 자신이 편한 대로만 생각하고, 편한 대로만 믿고 있었다.
멍한 정신으로 잠에서 깬 재현은 눈을 뜬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나무로 만든 격
자무늬의 천장 중심에는 웬일인지 에어컨 입구가 닫힌 채였다. 익숙한 그 광경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천천히 방 안을 돌아보자 열린 창틈으로 불어온 바
람이 발을 가볍게 흔드는 게 보였다.
약간의 더위와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바람의 흐름에 비릿한 연못의 물 내음과
함께 연못을 가득 채운 수련의 진한 향이 방 안을 돈다. 익숙하고 그리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 향에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창가를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어
갔다.
여전히 완전하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기억들은 대강 돌아온 채였다. 부분부분
빠진 곳들은 여전히 남아있고,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결국 모든 것
들이 자신이 의도한 바였다는 것만은 확실히 이해했다.
동생들과의 일도, 이 집을 나갔던 것도, 또 그 사람과의 관계도, 이젠 대강 납득
이 간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그와 함께 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밀어냈다는 사실만은 확실해졌다. 그리고 이 이상한 집안에서
자신을 비호해주던 사람은 아버지뿐이라는 것도, 자신이 어쩌면 그간 계속해서 삼
촌에서 상처를 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는 사실 역시, 대강 이해는 갔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역시나 한 가지 의문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어째서? 동생들까지 모두 밀어낼 정도로, 그렇게나 그 사람을 사랑했던 걸까?
그렇게 떠올려 봐도 그 감정이 당장 자신에게 와 닿는 건 아니었다. 그를 선망하
는 것도, 마음 흔들리며 설레었던 것도 이해는 가지만 역시나 모든 것들을 내던질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는 건 지금의 자신에게는 멀기만 한 일이다.
인생을 바꿔도 좋을 정도로 열정적이고 강한, 숙명적인 사랑이라는 건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 여겼기에 여전히 그런 감정을 이해하는 건 버겁다.
멍하니,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던 사이 스르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맥없이 문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자 그 문으로 연한 분홍색의 남방과 같
은 계열의 바지로 된 유니폼을 입은 지긋한 나이의 여자가 수액 팩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서다 눈을 껌뻑인다.
“이제, 정신 좀 들어?”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들여다보고 있자 침대 옆으로 다가선 그녀가 자신의
오른쪽 팔에 이어져 있던 팩을 확인하곤 이어진 선을 빼며 책을 갈아 끼운다.
“열은 모두 내렸지만 그래도 며칠은 나른할 거야. 에어컨을 너무 틀어놓으니 감
기가 오지. 열 때문에 탈수증도 왔지만 그보다는 영양실조가 더 크니까 이거 하나
만 더 맞고 일어나서 밥 좀 먹어.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면서 영양실조는 말이 안
되지.”
가벼운 반말로, 책망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이가 나이
라서인지, 아니면 특유의 친근한 말투 때문인지 그녀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다.
“말 잘 들어서 좋네. 그런데 계속 아파서 어째? 저번엔 죽지 않을 정도로만 얻어
맞아서 사람 놀라게 하더니.”
처음 보는 여자의 뜬금없는 말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3분의 1쯤
남은 팩을 확인하더니 다시 쟁반 위에 올리곤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준 그녀가 쟁
반을 들고는 돌아선다.
“그럼 조금 더 누워 있어요. 난 옆방에 있으니까 문제 있으면 여기 버튼 누르고.
”
쾌활한 인사말과 함께 사라지려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
“응?”
“아버지는……요?”
팍팍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그녀가 잠시 멍한 얼굴을 하다 이내 “아
하!”라고 작게 감탄사를 내뱉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그 잘생긴 사장님 말이지?”
“……네.”
“뻔히 알면서도 볼 때마다 놀란다니까. 너무 젊은 아빠라. 잠깐 회사 일 때문에
서재에 계셔. 그 잘생긴 비서가 와서 뭐 보고하던데.”
집안에 있구나, 하고 떠올리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그가 있다니 조금이나
마 안심이 되었다. 이상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인상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나이 차가 얼마 안 나서 긴가 민가 했는데 사이좋은가 봐. 아플 때도 계속 옆에
있어주고.”
집안 사정은 전혀 모르는 듯한 그녀의 말에 뭐라고 할지 곤란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방금 전 그녀의 말이 떠올라 다시 물었다.
“저, 제가 전에도 아팠었나요?”
그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한다.
“지난번엔 많이 놀라서 안 좋았고,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어디서 맞았는지 엉망이
돼 있었잖아. 신고 안 해도 되냐니까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자신이 기억이 없다는 것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대체 어디서 그렇
게 맞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2년 전 이야기를 하는 듯해 대
강 말을 맞추기로 했다.
“그때는 그냥…… 좀 일이 있어서요.”
“그럼 다행이고. 그럼 가볼게.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어디 아프거나 몸이 안
좋으면 곧장 얘기하고.”
“네.”
더는 말을 할 기운도 없어 맥없이 답을 한 뒤 다시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자 그
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운 그 소리 뒤에 곧장 문을 열었다 닫는 소리
가 들리자 다시 의식이 가라앉았다.
자기 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만 몸이 나른했다. 그리고 머리도 피로하다. 그냥 좀
자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자고 싶었다.
지독한 독감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열은 모두 내리고 몸살도 두통도 사라졌
지만 몸이 너무 무겁고 나른해 겨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죽으로 식사를 한 뒤
다시 수액을 맞으며 몇 시간을 자야 했다. 그렇게 또 하루를 보내고 난 후에야,
재현은 겨우 침대에서 내려설 수 있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겨우 오른쪽 팔목에 있던 바늘을 빼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
고 나온 재현은 어느덧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후원을 내다봤다. 여전히 햇살
은 뜨겁지만 각도는 낮다. 그리고 밖의 풍경도, 창을 통해 불어오는 바람도 여름
보다는 훨씬 건조하고 서늘한 느낌이었다.
아직은 초가을이라기보다는 늦여름에 가까운 시기였지만 올해는 가을이 빨리 오려
는지 날이 제법 선선해졌다. 기분 좋은 그 바람에 힘없는 다리를 질질 끌어 창가
로 다가가 보료에 앉자 넓은 후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역시나 좋아하는 풍경이지
만 마음이 허한 기분이 드는 건, 지금 이 집안에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아주 잠깐 잠결에 그를 보긴 했지만 눈을 떠보니 급한 일이 생겨 회사에 나갔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상주해 있던 인상이 좋던 간호사는 잘 좀 먹으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나갔고, 지금 이 집안에는 자신과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뿐이었다
.
아직 기력이 돌아오지 않아 자꾸 몸이 늘어져 자세가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똑바
로 앉아 있을 기운도 없어 창가에 팔을 대고 기대자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가 들려왔다. 가벼운 그 노크소리에 작게 “네.”라고 답하자 곧 문이 열리며 서
진이 들어선다.
꽤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또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던 순간
그에게 화를 냈던 게 떠올라 몸을 제대로 하고 앉은 뒤 조금 미안한 듯 바라보고
있자 그 역시 조금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서 창가로 다가온다.
“일어나 있어도 괜찮은 거야?”
“응. 감기는 다 나았어.”
“그래도 아직은 움직이지 마. 열이 대단했다는데.”
천천히 계단을 올라와 바로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 서진을, 재현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없는데 왜 이 사람이 여기에 온 걸까, 하는 듯한 재현의
시선에 서진이 먼저 답해준다.
“트러블이 생겨서 사장님께서 계속 회의를 하시는 중이야. 빠져나올 시간이 없어
서 대신 가보라고 하셨어. 그리고 심부름도 있고.”
“무슨 심부름?”
“큰 사모님께서 보약을 잔뜩 지어놓으셔서. 본채에는 거의 안 오고, 혜선 씨는
네가 부담스러워하니 대신 갖다 주라고 하셔서. 아주머니께서 좀 이따 들고 오실
거야.”
그 무섭고 자존심 강한 여자가 그렇게나 벌레 보듯 하던 자신에게 보약까지 지어
바치다니, 새삼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젠 아예 자신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자신을 이용하고 협력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 남
자와 타협을 하는 건 어려우니, 아쉬운 대로 만만한 자신을 이용하려는 거다. 그
속은 알겠다. 명분상이라 해도 이 집안의 여왕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존중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의 여자들이 이 집안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하지만 워낙에 오만방자한 인간이다 보니 어머니로서 대우는
하더라도 존중이라는 걸 모른다. 그런 그와 타협을 하며, 그의 여자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거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자존
심 따위는 숙이고 나긋하게 받아치며 보약 같은 것도 지어줄 수 있다.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기억이 어느 정도 돌아오자 대강의 상황들이 이해가 가기 시
작했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동생들의 태도도 갑자기 바뀐 할머니의 태도도, 그리
고 자신을 자극하려는 고모나 삼촌들의 태도도 납득이 간다.
하지만 납득하는 것과는 문제로 감정적으로 완전히 이해가 불가능한 것들 역시 남
은 채였다.
“막내 삼촌……하고 나 어땠어?”
“응?”
“삼촌 죽기 전에 어땠냐고?”
“아파트로 나간 뒤에 데면데면하긴 했지만 좋았어. 너희가 사이가 나빠질 이유가
없잖아.”
극히도 자연스러운 그 답에 재현은 서진의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히 다시 말했다.
“사실대로 얘기해줘. 나 어느 정도는 기억이 났어. 삼촌이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
고 말을 했는데, 티가 안 났을 리가 없잖아.”
그 말에 서진이 진심으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그 표정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진짜 서진도 몰랐던 걸까, 하는 생각에 그
를 바라보고 있자 서진이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정원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내 기억 속에는 그래. 내가 지금처럼 아팠을 때였던 것 같은데, 그런 말을
했어. 집은 아파트였던 것 같아.”
“네가 아팠을 때라고?”
“응.”
“……언젠지는 대강 알겠어. 학기 끝나고 네가 좀 아팠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정
원이가 아파트에 온 적이 있어. 사장님께 걸려서 곧 쫓겨났었는데…… 그때 그런
말을 했다고?”
“그랬던 것 같아. 일단, 내 기억에는.”
“그런 모진 말을 할 녀석이 아닌데…….”
재현 역시 그 말에는 동의했다. 절대 정원은 그럴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
만 그건 분명히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이었다.
“내가 삼촌한테 뭔가를 잘못했겠지. 형은, 뭐 아는 거 없어?”
“아니. 다른 건 몰라도 네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네가 정원이를 얼마나
아꼈는데.”
“삼촌은, 처음부터 내가 싫었다고 했어.”
그러니까 모든 게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거라고 그렇게 중얼거리자 잠시 말을 끊었
던 서진이 말을 이어간다.
“그렇게 말했더라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야. 그냥…… 열등감 같은 거였겠지.”
“삼촌이 나한테 그런 걸 느낄 이유가 없잖아.”
“비슷한 상황이지만 너무 강한 상대가 옆에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열등감을 느껴
. 자기가 비참하고 무능력해 보이니까. 넌 너무 강하고 쉽게 져주지도 않는 성격
인데다, 무엇보다…… 어떤 이유로든 넌 결국 이 집안사람들에게서 인정받았으니
까.”
“아버지의 여자로?”
약간의 자조를 담은 그 말에 서진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뜬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고, 이미 그렇게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내가 그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도, 이젠 알아. 그 정도의 기억은 돌아왔어.”
있는 그대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전하자 서진이 진지한 얼굴로 다시 물어온다.
“……정확히 어디까지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 다는 아냐. 그냥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기억났어.”
그 말에 서진이 안도한다.
“어쨌든 다행이다.”
긴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그 말에 내내 가장 궁금했던 바를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하고 나, 어떻게 된 거야?”
“……그건 기억 안 나?”
“기억난 건 최근 일뿐이야. 오래된 기억들은 여전히 그 상태야. 내가 어쩌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건지도…… 잘 기억 안 나.”
솔직히, 여전히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다고 말하자 서진이 잠시 자신의 안색을 살
피다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그건 나도 잘 몰라. 처음에는 안 좋았지만 한 번 크게 싸우고 난 뒤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는 것밖에는.”
“진짜 몰라?”
“아무리 나라도 그런 사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는 알 수 없어. 네가 그런 얘기를
일일이 하는 성격도 아니고, 나도 물어볼 수 없는 문제고.”
“형은 언제부터 알았는데?”
“너 고3 가을부터.”
“……다른 가족들은?”
“거의 비슷하게 눈치 챘을 거야. 전혀 숨기지 않았으니까.”
“그래……. 됐어. 알겠어.”
이쯤 되니 반쯤은 포기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허탈한 듯 그렇게 말하고 나자 서진
이 걱정스레 얼굴을 살펴온다.
“괜찮아?”
“괜찮아. 어느 정도는 안정됐어.”
“아니라고 우긴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된통 앓고 나서인지, 아니면 떠오른 기억이 충격적이라 독기가 빠진 건지 더는 화
를 내고 우겨댈 기운도 없었다. 그냥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
다.
“그래,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다. 뭐 필요한 건 없어?”
“없어.”
“그래, 그럼 그만 가볼게. 쉬어.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하고.”
“응.”
짤막한 답을 끝내자 서진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곧 느릿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 다시 창밖을 내다보자 햇살이 가득 찬 후원
이 보였다.
아름다운 그 정경에 잠시 밖을 내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서 다시 침대로 가는데 침
대 옆의 협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보였다. 방전이 된 채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맥
없이 바라보다 일단 충전을 해야 할 것 같아 충전케이블을 찾아 연결하고는 그대
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에 앉으니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해
그대로 누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나 길고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깜빡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서서히 해가 져가는 시간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에 잠에서 깨 멍하니 앉아 있자 곧 약사발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신 아주머니께서
약을 건네주셨다. 반쯤 잠이 든 상태에서 멍하니 약을 받아 마신 뒤 식사가 준비
되었다는 말에 혼자 저녁을 먹고 준비된 차를 마시고 나자 오후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아주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나자 집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원래도 그런 곳
이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 적막함이 유난히도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해가
지자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가을의 정취와 함께 우울이 가라앉아 간다.
지난 2년간의 자신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
었다. 정확히, 난 이런 인간이다, 라고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할
일, 그리고 내가 절대 하지는 않았을 일들, 그리고 절대 내게 벌어질 수 없는 일
들에 대해서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이가 들고 세계에 적응해가면 자연히 신념은 사그라지고 기준은 무뎌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람의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가끔은 사람 자
체가 변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던 상대를 사랑하게 되기도 하고, 또 가끔은 가장 믿고 의지
하던 사람에게 상처받기도 하고, 죽는 순간까지도 부둥켜안고 가려던 사람들을 자
신의 손으로 밀어내기도 하고…….
이제는 스스로에게 대체 왜 그랬냐고 묻는 것에도 지쳐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조바심을 내고 기억을 좇으려할수록 그 초조함에 짓눌려 스스로를
제어하는 것도 힘겨워지고 있었다.
어쨌든 기억은 서서히 돌아오고 있으니, 완전해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돌아
올 기억들이 두려워, 차라리 여기서 멈춰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기도 했지만 어
차피 그것도 자신의 기억이라면 차라리 완전해지는 쪽이 낫다. 그래야 최소한 납
득은 할 수 있을 테니까.
창가 앞에 놓인 낮은 테이블 앞에 앉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자 이미 해가 완전히 진 후였다. 어둠이 짙게 가라앉자 캄캄한 후원을 둘러
싼 붉은 등 모양의 가로등이 켜진다. 그다지 환하지 않은, 은은한 그 빛에 후원은
조금이나마 밝아졌지만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사람의 기척도, 그 흔한 차 소리와 소음도,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없다.
마치 한순간 시간이 정지해버린 듯, 이젠 바람의 기척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던 발도, 풀잎도, 작은 연못의 물결도 얼어버린 듯 고요하다
. 시간도, 공기도 그대로 멈춘 듯 세상이 고요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마치 세상이 죽어버린 듯했다. 그 적막과 고요에, 지독할 정
도의 고독이 스며들어온다.
외롭다. 사무칠 정도로 외롭고 공허하다.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사막
위에 홀로 뚝 떨어진 듯, 외롭고 허망하다.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한 적도, 외롭다 느낀 적도 없음에도 지금은 그 외로움을 견
뎌내기 어려웠다.
이제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이 집안에서 정을 주었던 동생들도, 삼촌도, 모
두 자신이 밀어냈고 그들 역시 자신을 거부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다. 이제 자신
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더는 기댈 사람도, 아주 소소한 것들이라도 믿고 이야기
할 사람도 없다.
자신은 혼자였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 혼자만 우뚝 선 채 멈춰 있었다. 그
렇게, 홀로 남겨져 있었다.
외롭게, 또 외롭게, 그렇게 그냥 멈춰 있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라도 뚫려 헛헛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고 건조한 그 바람에
심장이, 그리고 손끝이 시려온다.
자신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 혼자 살아간다 해도, 마음을 기댈 곳은 필요하다. 언젠가 돌아갈 수 있는, 언제
든 만나 가슴에 맺힌 말을 터놓을 수 있는 한 사람은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완전히 홀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이제야 알았다.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멈춰 선 삶이 얼마나 허무하고 추운
건지,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불도 안 켜고 뭘 하는 거지, 이 시간에?”
멍하니 어둠에 찬 허공을 바라보던 중 울려온 그 음성에 천천히 소리가 울려온 방
향을 돌아보는 순간, 확하니 불이 켜졌다. 그 불빛에 눈이 시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순간 성큼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를 본 순간, 복잡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몰아쳐왔다. 허한 이 공간을 채울 사람
이 하필 그 사람이라는 데에 슬퍼하고 당황하면서도, 그래도 아직까지 자신의 곁
을 지켜주고 있는 그의 존재에 위안을 얻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순식간에 머릿
속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제 자신의 세계에는 그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
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쳐냈기에, 이제 자신
에겐 그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이 되돌아올 곳도, 자신에게 돌아올 사람도 그뿐이다.
복잡한 감정에, 막막한 기분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재킷의 버튼을 풀며
이쪽으로 다가선 그가 재킷을 벗어던지며 불쾌한 듯 묻는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더니, 얼굴은 왜 그 모양이야?”
그 말에도 아무 대꾸 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막 넥타이
를 풀던 그의 눈빛이 예리해진다. 그리곤 다시 묻는다.
“또 무슨 일이 있었어?”
추궁하는 듯한 그 말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 박자 느리게 답했다.
“……아니.”
“그럼?”
“……그냥……. 다시 돌아와 주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까…… 슬퍼서.”
어차피 자신이 최근의 기억부터 돌아왔다는 건, 이미 서진에게 보고를 받았을 게
뻔해 그렇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의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진다. 역시나
,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게 왜 슬플 일이지?”
“나한테는 슬퍼. 왜 하필 당신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으니까.”
천천히 삐걱거리는 다리를 움직이며 그와 시선을 피한 채 걸음을 옮겨가자 그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답한다.
“네가 원한 일이야.”
“……그래……. 내 잘못이지.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이야.”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자조하듯 답한 뒤 계단을 내려서는 순간, 그
가 툭하니 말을 던져온다.
“시시하게, 겨우 정원이 녀석이 한 말 때문에 우울증 흉내를 내는 건 아니겠지?
”
그 말에 걸음이 멈췄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답했다.
“당신한테는 시시할지 몰라도, 나한테는 굉장히 너무 큰일이야.”
그는 죽어도 이해 못 하겠지만, 자신에게 그건 큰 충격이었다. 어쩌면 머리로는
기억하지 못해도 자신의 가슴 어딘가에서는 기억하고 있었기에, 삼촌의 죽음에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정도로, 자신에게는 삼촌의 죽음보다도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지친 기분에 맥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작게 혀를 찬다.
“말했을 텐데. 그 녀석이 너희에게 극진한 건 그래야 자기가 좀 괜찮은 인간처럼
보이니까 그랬던 것뿐이야. 그리고 내 아이들을 돌봐주면 내가 자길 돌아봐줄 거
라고 생각했겠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지만.”
너무나 그다운, 자신의 기억에도 있는 그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감미로운 그 음
성에 다시 그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되물었다.
“삼촌이 당신의 애정을 원한다는 걸 알면서, 그렇게 무시한 거야?”
그 물음에 그가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커프스를 떼 침대 위로 던진다.
“약한 것들은 질색이야. 불쌍하게 쳐다보고 애원하면 누가 어떻게든 도와줄 거라
고 생각하는 녀석들은 쳐다볼 가치도 없어. 그건 약한 게 아니라 그냥 의지박약이
야.”
“그렇게 타고 나는 사람들도 있어.”
“그건 변명이야. 강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나태하게 멈춰 약하다는 핑계로 뭐든
우선권을 쥐려 하는 것뿐이지. 그리고, 그런 것들을 두고 바로 쓰레기라고 하는
거고. 혹자는 그것들을 사회에 암적인 존재라고도 하지.”
가차 없는 단어와 그 표현에 이제 더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 외의 사람
들은 모두 약하고 나태한 쓰레기였다. 본인이 너무나 강하기에 약하다는 걸,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아프다는 말도, 슬프다는 말도, 어쩌면 사랑한다
는 말도 이해 못 할지도 모른다. 천성적으로, 그는 타인에 배한 이해와 배려라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었다.
과연 그에게도 다칠 심장이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 할 거야. 약하다는 게 뭔지.”
“그딴 걸 이해해줄 생각는 없어. 너처럼 쓸데없이 동정심만 넘쳐 그 쓰레기들이
기어오르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나도 나태한 쓰레기니까.”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 받아치자, 그가 웃는다. 너무나 차게, 어이없다는 듯
그 말을 비웃는다.
“넌 강해. 아니, 너무 강하지. 내가 진심으로 화를 내게 만들 정도로, 쓸데없이
강하기만 해.”
넥타이와 커프스를 모두 침대 위로 던져둔 뒤 베스트의 단추를 풀던 그가 던진 말
에 문득 정신을 잃기 전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열이 높아 제정신은 아니었지
만 분명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간 그가 몇 번인가 그런 말을 했던 걸
기억하기에 좀 더 그에게 다가선 뒤, 이번엔 진지하게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한 건데?”
그 말에 그가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곤 정확히 시선을 마주한 채 순식간에 냉랭해
진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해온다. 몇 걸음,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답을 구하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느릿하게 답한다.
“말했을 텐데? 네가 기억해내라고. 모두 기억난다면 볼 만 해질 테니까.”
그다지 좋지 않은 뉘앙스에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물었다.
“내가, 당신을 죽이려고 달려들기라도 한 거야?”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렇게 묻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차라리 그랬다면 재미있기라도 했지.”
“그럼?”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해지게 어서 이야기해보라고 그를 재촉하자 그가 입을 다문
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본다.
그 시선이 낮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 어두운 빛으로 물들어가는 그의 눈빛은
전에 본 적 없이 진지하고 차분했다. 너무나 진지한 그 눈빛이 당혹스러웠다. 대
체 왜 그가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듯 그의 눈을
응시하고 있자, 잠시 후 그가 낮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답한다.
“넌 아주 안 좋은 짓을 했어. 아니,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한 거지. 내가
네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게 만들었으니까.”
말끝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듯한 그의 억눌린 말투에서 그 감정이 선연하게 느껴져 입술을 꾹 다물
자 그가 눈을 서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여전히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이
제는 괜찮아진 건지, 도무지 감정을 알 수 없는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베스트
를 벗어 던진 그가 이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바로 한 걸음 정도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인다.
“그러니까, 열심히 생각해봐.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그렇게, 나쁜 짓을 한 거야?”
“넌 날 아주 가슴 아프게 했어. 그래, 그건 인정해주지. 날 다치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니까.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넌
. 나도 내가 그렇게 상처 받을 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날 아프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에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손을 뻗어
뺨을 쥐어온다. 따뜻한 그 손의 온기에 스르르 눈을 감자 그가 눈가에 입을 맞춰
준다.
“네가 그랬지? 전부 네 잘못이라고.”
나지막한 그의 말에 눈을 질끈 감은 채 그의 허리를 안고 매달렸다. 가슴이 아파
왔다. 그 말이 너무 아파 숨도 내쉬기 힘들어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매달려 있자
그가 위로하듯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춰준다. 그리고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로 속
삭여준다.
“네 말이 맞아. 전부 네 잘못이야. 동생들이 널 버린 것도, 정원이가 죽은 것도
전부 너 때문이야. 처음부터 그 녀석들이 상처 받은 건 너 때문이었어. 네가 조용
히만 있으면 될 걸, 네가 한 마디 할 때마다 놀라고 무서워하고 상처받는 건, 그
녀석들이었어. 넌 절대로 상처 받지 않으니까. 겁도 없고 무서워하는 것도 없으니
까 그 녀석들이 상처 받는 건 생각도 안 한 거지. 그래놓고 넌 결국엔 모두를 버
리고 배신하고 아프게 하기까지 했어. 그러니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야.
모두 널 버린 건, 네가 교활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서야. 상처 받고도 네 곁에 남
은 것도, 지금 널 지켜줄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어. 다른 녀석들은 널 견뎌내질
못했으니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시처럼 심장에 박혀왔다. 지독할 정도로, 그는 하나하
나 짚어 자신에게 상처가 될 말들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 아프고 싫었
지만 전부 그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지끈거리는 심장의 통증에 그에게 안긴 채 이를 악물자 그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
며 다정하게 이마에 입을 맞춰준다. 그리고 눈물이 날 정도로 상냥한 음성으로 속
삭여준다.
“이제 알겠지? 이제 네 세상엔 진짜 나밖에 없다는 걸.”
그날 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상냥했다. 부드럽게 안아주고 계속해서 이마와 눈가
에 입을 맞춰주며 자신을 어르고 위로해주었다. 긴 시간을 들여 자신을 위로해주
고, 따뜻한 체온으로 전신을 감싸주며 몸을 애무해갔다.
아주 소중한 물건을 다루듯 따뜻하게 몸을 애무해주고 안아주고 자연스럽게 몸이
열리기를 기다려주었다.
너무나 상냥하고 따뜻해서, 그의 손길에 몸이 녹아들어가는 듯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서서히 그의 열기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몸이 열렸다. 아무 거부감 없
이, 저항도 없이 벌어지는 다리 사이로 그가 들어와 그의 성기를 삽입하는 순간에
도 고통은 거의 없었다. 전신이 저릿해지는 쾌감뿐이었다.
“기분 좋아.”
몽롱해진 의식으로 달콤하고 나른한 목소리를 내뱉자 그가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
여간다. 천천히, 아주 느긋하게 안쪽을 휘젓는 그의 단단한 성기에 자신 역시 허
리를 휘며 그를 더 깊이 받아들이려 엉덩이를 높이 쳐올렸다.
하지만 너무 느리다. 그리고 부드럽다. 서서히 내벽을 문지르는 그의 움직임에 안
달이 나 신음을 흘리며 그를 조르듯 그의 성기를 세게 조이자 그가 살짝 인상을
쓰며 움직임을 멈춘다.
심술을 부리는 듯한 그 행동에 조바심이 나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허리를 흔들
자 그가 웃는다. 그 여유로운 미소에 마음이 다급해져 그를 끌어안으며 그의 아랫
배 위로 성기를 비벼대자 그가 다시 한 번 안쪽을 깊이 쳐올린다. 가볍게 문질러
대며 애를 태우던 그가 예리하게 그 부분을 쳐올리는 순간 탄성이 터져나갔다.
“거기, 좋아. 더…….”
달콤한 비음을 흘리며 그에게 칭얼거리듯 말을 걸자 그가 빠져나갔다 다시 한 번
그 부분을 정확하게 찔러올린다. 방금 전보다 더 강한 그 자극에 허리가 휘었다.
마약처럼 강하고 빠른 그 쾌감에 전신이 휩쓸려가고 있었다. 이런 쾌락을 한 번
느낀다면 잊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술로도, 약으로도, 이 세상 그 어떤 걸로
도 대신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손끝까지 휩싸오는 그 강렬한 감각에 교성을 내지른 순간 다시 한 번 집요하게 그
부분을 찌르던 성기가 몸 속 깊이까지 박혀왔다. 젤을 사용해 충분히 시간을 들여
풀어준 아래쪽은 마치 여자처럼 젖은 채 음란한 마찰음을 내고
있었다.
탐욕스럽고 음란한 몸이었다. 기억에는 없어도 자신의 몸은 창녀처럼 길들여져,
삽입하고 사정하는 게 아닌 아래쪽을 정신없이 헤집어지고 아랫배가 남자의 정액
으로 꽉 찰 때 느끼고 신음하도록 바뀌어 있었다.
아 쪽으로 들어오는 성기를 느끼는 순간 쾌감에 울부짖고, 추잡할 정도로 노골적
으로 그의 성기를 먹어치울 듯 조여 댄다.
수치심도 모른 채 그에게 매달려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자 그가 이번엔 귓불을 물
어뜯으며 달콤하게 속삭인다.
“여기가 좋아?”
가쁜 숨소리와 함께 들려온 그 말과 거의 동시에 척추를 타고 전율과도 같은 충격
이 흘렀다. 마치 번개가 친 듯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듯한 느낌에 높은 신음을
흘리자 그가 아슬아슬하게 선단이 걸릴 정도로 허리를 뺀 뒤 거칠게 밀고 들어온
다.
“아, 윽!”
잇새로 터져나간 신음에 허리를 휘며 그의 어깨에 손톱을 세우자 그가 허리를 끌
어안아 흔들리는 몸을 지탱해준다. 단단한 쇠줄에 감긴 듯 강한 그 팔에 싸인 채
그의 허리를 다리로 휘감자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온 채 그가 거친 숨과 함께 내
뱉는다.
“이젠 인정하고 받아들여. 이렇게 널 만족시켜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그리
고 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야.”
희미한 의식 속에서 들려온 그 말 뒤로 그와 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
서 울려왔다.
『이제 네가 돌아갈 곳은 없어. 이 세상에서 널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이야.』
조금 더 낮고 차갑지만,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너무나 생생하게 울려대는 그 음
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기억이었다. 그리고 현실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느껴지는 공포감에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몸은 여전히 뜨거운
데 머릿속은 더없이 차다.
그 괴리감에 문득 헐떡이던 숨을 멈추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 다시 묻는다.
“왜 그러지?”
『왜 그러지?』
똑같은 물음이, 마치 메아리처럼 머릿속에서 울려왔다. 그리고 그 물음에 머릿속
의 자신이 답한다.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냐.”
머릿속에 떠오른 그 답을 그대로 반복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마치 기억에 있던 그
대로인 듯 자신의 팔이 다시 그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더해달라는 듯 허리를 비틀
자 다시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리 빨라진 그의 움직임에 목을 뒤로 젖히며 요염한 신음을 토해내는 순간 다시
한 번 어떤 소리가 울려왔다.
『정후가 어느 정도가 되면 본사를 해외로 옮길 생각이야. 그리고 너랑 나 둘이
사라져버리는 거지. 여기는 정후랑 서진이에게 맡기면 되니까. 어느 나라가 좋아?
』
마치 연인에게 밀어를 속삭이듯 다정한 그 목소리에 오금이 저려왔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떠나자고 하는데도, 기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거였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해서
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아윽!”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사이, 그가 몸 안쪽에서 사정을 했다. 몸속을 가득
채운 그 감각에 자신 역시 사정을 하자 그가 입을 맞추며 그대로 몸을 끌어안아주
었다.
사정 후의 허탈함과 아직 빼지 않은 채 전신을 안아주는 그의 체온에 끌려 달뜬
숨을 내쉬면서도 머릿속은 여전히 차갑게 식은 채였다. 기이한 그 느낌에 천천히
숨을 고르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서서히 그가 빠져나간다.
이번에는 안쪽에서부터 긁어내듯 내벽을 쓸어내리는 느낌과 함께 그의 성기를 따
라 흘러내리는 정액에 낮은 신음을 내뱉자 완전히 몸 밖으로 빠져나간 그가 등 뒤
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린다. 그리고 곧 등으로 그의 가슴이 닿아왔다. 빈틈없이
밀착된 피부를 통해 그의 체온과 심장 박동까지 세세히 느껴지는 듯했다. 혹시나
자신의 심장 소리도 들릴까 무서워 그대로 힘을 뺀 채 심호흡을 하자 그가 목덜미
에 입을 맞춰준다.
“오늘은 그만 자. 아직 몸이 안 좋으니.”
『또 열이군. 이 날씨에 또 정신 놓고 헤매고 다니니 이 모양이지. 오늘은 상태가
안 좋으니 일찍 자.』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미열에 나른하다며 누워 있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렇
게 말했었다.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은 너무나 다정했고 목소리 역시 달콤해 무서울 정도였
다.
그가 진짜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무서웠다.
『병원이 싫다면 잠깐 해외로 나가 있어. 어떻게든 시간을 내볼 테니까.』
이상하다. 그건 너무 이상하다. 분명히 목소리도 얼굴도 그가 맞는데 그 사람 같
지가 않았다.
돌아온 기억 속의 자신만큼이나 지금 기억 속의 그는 낯설고 이상했다.
“내일부터 당분간은 나가지 않아도 되니까 푹 자도 돼.”
『내일은 회사에 안 나갈 테니 푹 쉬어도 돼. 혼자 두지 않을 테니까.』
현실의 그도, 꿈속의 그도 상냥하지만 그 상냥함에 심장이 두근두근 크게 뛰고 있
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명확한 근거 역시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그건 설렘이 아닌 공포였다.
뭔가 아주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한 채 뒤척거리다 깜빡 잠이 든 듯했다. 아주 잠깐,
얕은 잠에 빠진 순간 철컹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왔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
적소리와 귀를 때리는 레일의 소음 뒤로 곧 치익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온다. 바로 자신의 앞에서 빠르게 움직여가는 이들은 자신의 옆을 스
쳐 계단 위로 사라졌고,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이들은 지하철 안으로 사라져 이내
들어올 때와 같은 소음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철컹거리는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순식간에 플랫폼 안으로는 정적이 감돌았다.
이곳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역을 빠져나갔고, 기다리던 이들은 지하철을 타고 사
라지자 남은 건 하릴없이 의자에 앉아 있던 자신뿐이었다. 이곳은 자신에겐 목적
지도 아니고 출발지도 아니었다. 그래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못 박
힌 듯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갈 건지도 모른 채 그저 조
용히 고여 있을 뿐이다.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에 조용히 땅을 내려다보고 있자,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
려왔다. 느릿하고 조용하게, 마치 눈치를 살피는 듯 조용조용한 그 걸음 소리가
몹시 귀에 익다고 생각하던 차, 눈앞에 익숙한 운동화가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소리가 내려온다.
『가자.』
여리디 여린, 여전히 어린 소년 같은 작은 그 음성에 고개를 들자 고운 얼굴을 한
그가 서 있었다. 이제는 죽어 사라진, 삼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계속 여기 있으면 안 돼. 겨울이라 추워.』
걱정스러운 듯 자신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이는 그 말에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대
꾸하지 않자 그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곤 안쓰럽다는 목소리로 속삭인다.
『재현아, 그러지 마. 집에 가자.』
『……돌아가기 싫어. 그 안에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아.』
담담하니, 발끝을 내려다본 채 그렇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그가 바로 자신의
앞에 주저앉아 눈을 마주친다. 상냥해 보이는 밝은 갈색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어
쩐지 창피해져 시선을 돌리자 그가 따뜻한 손으로 손을 잡으며 자신을 달랜다.
『재현아, 잘 생각해 봐.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큰형은 더 날 찾을 거야. 형이 찾
으려고 한다면 넌 절대 도망칠 수 없어. 어디로 가든, 곧 들킬 거야. 이틀도 안
걸려. 하루면 끝나.』
지금처럼, 이라고 그가 덧붙이는 말에 다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차갑게 식은 손을
쥐고 온기를 전하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힘든 건 알지만, 그냥 형이 원하는 대로 해줘. 말 잘 듣고 얌전하게 굴어. 순종
하면 형도 더는 네게 손대지 않을 거야. 형은 그냥…… 널 복종시키고 싶어 하는
거야. 형은 반항하면 복종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면 곧 관
심을 잃어.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조용히 형이 원하는 대로 해줘. 시키는
대로 얌전히 굴면 곧 흥미를 잃을 거야.』
『……그 사람이 원하면 계속 안기라고?』
『잠깐이면 돼. 큰형은 변덕스러워. 너도 알잖아. 지금은 그냥 널 길들이고 싶어
하는 것뿐이야. 너와 형의 관계에서 형이 주도권을 쥐면 끝나는 거야. 그러니까,
이 시기만 지나면 돼. 너, 동생도 걱정되잖아. 형이라면 네 동생 구해줄 수 있어.
맞는 골수가 없다면 만들어줄 수도 있는 사람이야. 최고의 의료진들이 붙어서 준
비가 되는대로 수술을 할 거고, 그럼 동생은 완전히 괜찮아질 거야. 동생 때문에
생긴 빚도 형이 알아서 처리해줄 거고. 아무 것도 걱정할 것 없어. 그냥 형이 원
하는 대로 해줘.』
조근조근 귓가에서 울리는 그 말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삼촌의 말대로 그
가 쉽게 흥미를 잃어준다면,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가주기만 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다.
시한부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걸로 모든 게 괜찮아진다면 좋다.
하지만…….
『……만약 그래도…… 끝이 안 나면?』
『그럴 일은 없어. 큰형은 그렇게 집착이 심한 사람은 아냐. 자존심만 건들지 않
으면 돼. 하라는 대로 하고 원하는 대로 해줘. 반항하지 말고 소리치지 말고 무시
하지 말고.』
『그럼 또 무성의하다고 화를 내겠지.』
지금까지 지긋지긋하게 반복된 그 상황을 잘 알기에 그렇게 자조하자 삼촌이 두
손을 세게 쥐며 그 답지 않게 강한 어조로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무시하지 말라고. 그리고 만약 형이 화를 내더라도, 이렇게 도망치는
건 좋지 않아. 아무리 잠깐이라고 해도 형은 이런 걸 좋아해. 네가 도망치면 도망
칠수록 재미있어할 거야.』
그건 삼촌의 말대로였다. 반항하면 찍어 내리고 도망치면 잡아오고 거부하면 굴복
시키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 하고, 좋아하는 건 단 하나도 허락해주지 않
는 그 남자의 성격대로라면 분명 도망치는 걸로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 거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좋든 싫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고 자신은 그에게
질질 끌려갈 뿐이니까.
『재현아, 조금만 있으면 곧 괜찮아질 거야. 형이 완전히 흥미를 잃으면 너도 완
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어. 이게 기회라고 생각해. 형은 그냥 너한테는 폭력도 소
용없다는 걸 아니까 다른 방법을 쓰는 것뿐이야. 너, 그때 그랬지? 그건 아무 일
도 아니라고. 그냥 얻어맞은 거라고.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진 거랑 마찬가지
라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그냥 얻어맞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
『재현아…….』
계속되는 침묵에 애가 탄 듯 삼촌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온다. 그 음성 뒤로 하얀
입김이 서린다. 역내였지만 날이 워낙에 추워 숨을 내쉴 때마다 희미한 입김이 번
져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몸에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리고 슬슬 돌아가야 할 때였다.
삼촌이 왔다면 그 역시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이대로 버티면
곧 다른 사람들이 올 거다. 아니, 이미 와 있는지도 모른다. 삼촌도 자신을 설득
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저 위에서 내려와 자신의 목에 줄을 걸고 개처럼 질질 끌고
갈 거다.
『……가. 집에 가서 생각해볼게. 여기 너무 춥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싫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바닥에서 일어선 삼촌이
재빨리 다가와 팔을 잡는다.
『어려울 거 없어. 나나 재원이나 재영이처럼 하면 돼. 눈치 보고 무서워하고 복
종하면 돼. 다들 그렇게 살아.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어.』
너라고 특별할 것 없다는 그 말에 어쩐지 가슴이 시려왔다.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
각해본 적도 없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지만 삼촌의 눈에는 자신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걸로 비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씁쓸해져
시선을 내리자 삼촌이 다시 한 번 찬 손을 꼭 쥔 채 눈을 맞춰온다.
『힘든 건 알지만 네가 조용히 해야 돼. 아무도 널 도와줄 수 없어. 큰형에겐 어
머니도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그냥 조용히 흘러가.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그간 그와 자신의 싸움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삼촌의 그 말에 비로소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그냥 조용히만 있으면 된다면 해야 한다. 늘 피해를 보
는 건 삼촌과 동생들이었으니 그들의 말에 따르는 게 맞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반쯤은 자포자기한 기분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삼촌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흐른다.
『그래, 잘 생각했어.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
『그래야지.』
『그만 가자. 너 손 너무 차다. 얼음장 같아.』
자신의 손을 꼭 쥔 채 삼촌이 먼저 계단 쪽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르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그렇게 돼서 모든 게 편해진다면 그걸로 끝내자
고.
어차피 변덕스럽고 이상한 사람이니까, 진심으로 그에게 순종하고 얌전해진다면
곧 흥미를 잃을 테니까.
그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와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도와줄
사람은 없었으니까…… 이미 나온 길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곧 끝나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쥐죽은 듯 살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니까, 그는 다정하면 안 된다. 상냥하게 대하는 것도 진짜 연인처럼 안아주는
것도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도 안 된다. 그는 포악하게 군림하고 지배하며
자신을 압박하며 괴롭히고 버려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던 거다.
그는 절대, 자신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