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봄이었다. 겨울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짧은 간극, 따사로운 봄바람이 불던 어느
날 밤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듯 소심한 그
소리에 재현이 짤막하게 “네.”라고 답하자 곧 문이 열리며 안으로 자그마한 남
자가 들어섰다. 반가운 그 얼굴에 재현은 웃으며 의자를 돌려 앉았다.
『왜?』
『잠깐 얘기해도 돼?』
고운 외모만큼이나 여리고 작은 그 음성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심스레 방 안
으로 들어와 방을 여기저기 돌아보더니 침대로 가 앉는다. 그리곤 여전히 작은 음
성으로 묻는다.
『공부했어?』
『아니. 그냥 책 보느라. 왜? 무슨 일 있어?』
괜히 말을 돌리며 머뭇거리던 그에게 뭐든 말해도 된다는 듯 답했지만 그는 여전
히 망설이고 있었다.
『응. 저기…….』
『말해.』
『저기…….』
자신이 한참 어릴 때에도 늘 자신을 어려워하던 사람이라 가만히 그가 용기를 내
길 기다리고 있자 그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온다.
『주말에 재영이네 학교에서 운동회 있잖아.』
『알아. 삼촌이 가기로 했잖아. 나도 학교 끝나면 곧장 갈 거고. 왜?』
뭐 문제 있냐고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잔
뜩 주눅이 든 채 무서운 듯 얼굴색을 살펴보는 그 기색에 웃으며 천천히 다음 말
을 기다리고 있자 그가 드디어 용기는 낸 듯 본론을 꺼낸다.
『너랑 나랑 가기는 할 건데…… 넌 어차피 늦을 거고…… 재영이가 엄마가 왔으
면 하는 것 같아서.』
조금 겁을 먹은 듯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에 겨우 그거였나 싶어 시원스레 답해주
었다.
『오라고 해.』
빠르고 짧은 답에 그가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묻는다.
『……그래도 돼?』
『엄마가 오는데 왜 못 오게 해? 시간 되면 오라고 해. 그런 걸로 화내거나 짜증
안 내.』
『아…… 다행이다. 재영이가 네가 싫어할 거라고 걱정해서…….』
그 말에 그제야 무슨 상황인지 대강 이해가 갔다. 재영이는 운동회가 되니 엄마를
부르고 싶기는 한데, 자신이 그녀를 싫어하는 걸 알기에 삼촌에게 상담을 했고,
삼촌은 그게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자신이 화를 내거나 인상을 쓸까 봐 무서워 낑
낑거리며 앓다 겨우 용기를 내 방으로 온 거다. 작은 강아지 같은 두 사람이 모여
앉아 별것도 아닌 일로 머리를 싸매고 끙끙 댔을 걸 떠올리니 문득 웃음이 나왔다
.
그런 걸로 화내지는 않는다. 그 여자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운
동회나 어머니 모임, 혹은 소풍 때마다 엄마가 아닌 젊은 비서가 따라가는 재영이
안쓰러웠던 건 사실이니 딱히 그런 것까지 화낼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도 겪었던 일이기에, 그쯤은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다.
『뭐야? 둘이 그거 갖고 고민한 거야? 엄만데 그런 데에 부르는 거 뭐라고 안 해.
그런 건 앞으로 재영이가 알아서 하라고 해. 김윤정 씨 연락처 알잖아.』
『아, 그게…….』
『응?』
『큰형이 연락하지 못하게 해서…….』
라는 그 말에 왜 그 이야기가 지금 자신의 귀에 들어온 건지 대강 이해가 갔다.
아마 그 남자가 화를 낼 것 같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물어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서진 형이 연락처 알잖아. 알려달라고 해서 불러.』
『혜선이 누나가 따라올 텐데 걸리면 혼날 것 같아서…….』
『화 안 낼걸? 관심도 없는데, 화를 왜 내? 아들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상관할 거 없어. 그냥 불러. 일 생기면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래서, 그러는 거야. 너 또 형이랑 싸우면 무서우니까.』
그 말에 아차 싶긴 했다. 그와 자신이 싸우면 또 집안이 뒤집어질 테고, 그럼 재
영이는 괜히 자기가 엄마 불러서 싸운다고 밤새 이불 뒤집어쓰고 울 게 뻔하다.
미리 예고하고 애들을 내보낼 수도 없고, 자신도 워낙에 욱하는 성미라 한 번 시
작하면 끝을 낼 줄 모르니까…….
『그럼 할머니한테 얘기해. 할머니가 미리 알면 귀에 안 들어가겠지.』
『어머니가 큰형한테 먼저 허락받으래.』
『관심도 없는 사람한테 허락 받을 필요 있어? 운동횐지 소풍인지 축제인지도 모
를 텐데?』
아니, 그 전에 보호자가 운동회에 따라가야 하는 초등학생 아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나, 하며 비꼬듯이 말하자 삼촌이 난감한 얼굴로 웃는다.
『나중에 문제 안 커지려면 일단 허락은 받는 게 좋을 것 같아. 재영이도 형한테
허락 안 받으면 전화 못 할 거고.』
자신이야 하고 싶으면 일단 뒤 생각 안 하고 벌이고 본다지만 재영이나 삼촌은 또
그런 성격이 못 된다. 이럴 때는 성격 나쁜 사람이 마음 편히 살기는 편하다는 생
각이 절실히 든다. 그나 자신처럼 말이다.
그래도 저번에 한 번 요란하게 싸운 뒤로는 거의 냉전 중이라, 그 사람하고 그런
얘기하는 건 껄끄러워 망설이고 있자 삼촌이 다시 조심스레 묻는다.
『그냥, 내가 얘기할까?』
그게 가능하다면 그게 가장 나을 것이다. 그 사람이라면 자신이 말하면 관심 없던
것도 안 들어줄 테니, 다른 사람이 말하는 쪽이 낫다.
『그래, 그럼.』
아무래도 그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책상 위에 둔 핸드폰이 울
려왔다. 시계를 보니 10시쯤이었다. 이제야 돌아오나 싶어 일단 반갑지 않은 전화
를 받았다.
『응.』
「사장님 지금 들어가시는데 오늘 기분 안 좋으셔.」
전화기에서 울려오는 서진의 음성에 툭하니 내뱉었다.
『알았어. 방에서 숨도 안 쉬고 있을게. 됐지?』
「그게 아니라 내려와서 얼굴 보이고 좀 사근하게 굴라고.」
『내가 왜?』
「어차피 너 찾으실 거라는 거 알잖아.」
『화풀이하려고 찾기는 하겠지. 들어오기 전에 별채로 도망가야겠네.』
진심으로 차라리 별채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하고 있는데 서진이 빠르게 말
을 이어간다.
「그러지 말고 내려와 있어.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되잖아.」
『싫어.』
「재현아.」
애원하는 듯한 그 말투에 슬쩍 삼촌을 돌아보자 삼촌이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바
라본다. 서진이 하는 말은 못 들었지만 자신의 말은 들은 듯, 그만 혼자 두고 달
아나지 말라는 듯한 그 얼굴에 마음이 약해져버렸다. 항상 그랬었다. 삼촌이 저렇
게 쳐다보면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만다.
『알았어. 내려갈게.』
「잘 생각했어. 곧 도착할 거야.」
『응.』
뚝하니 전화를 끊고는 대체 왜 이 사람은 쓸데없이 자신에게 이런 전화를 하는 건
가 속으로만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들어오신대.』
그 말에 삼촌의 얼굴 위로 아주 미묘하게나마 화색이 돌았다. 대체 왜 이 사람은
그 사람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이 이 집에 왔을 때
에 이미 그 사람은 이 집에 없었고 열다섯이 되어서야 다시 만났기에 그와 삼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어린 시절에는 어떠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
금 하는 걸로 봐서는 그 전에도 그다지 살가운 성격은 아니었을 게 분명한데, 대
체 왜 삼촌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나 미련을 못 버리는 걸까?
그 사람이 매력적인 존재라는 건 인정한다. 돌아가신 조부의 편애를 독차지했기에
전 재산을 물려받았으니 모두가 그에게 설설 기는 건 납득이 간다. 하지만 삼촌을
비롯해 이 집안사람들은 모두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
었다. 두려워하면서도 선망하고 열광적으로 그의 관심을 받기 위해 애를 썼다.
대체 그 괴물 같은 사람의 어디에 그렇게나 끌리는 걸까. 그게 아리송했다. 아무
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은 싫다.
자신이 바라는 사람은, 다정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자신만을 사랑해주고 진심으
로 아끼고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건, 친구건, 연인이건,
자신이 원하는 건 따스한 봄볕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찬 사람은 싫다.
잠시 측은한 듯 삼촌을 바라보고 있자 그도 자신의 시선을 느꼈는지 겸연쩍은 듯
목을 긁적거린다. 창피한 듯 시선을 피하는 그 모습에 그냥 말을 돌렸다.
『내려가자. 아버지 기분 안 좋다니 잘 얘기해봐. 난 입 닥치고 있을게.』
괜히 자신이 끼어들면 분위기만 안 좋아질 게 뻔해 최대한 조용히 있겠다고 말한
뒤, 삼촌과 함께 1층으로 내려서자 마침 현관문이 여리며 그가 안으로 들어선다.
서진의 말대로 기분이 나쁜 듯 살기를 뿌리며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 일단 싫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저럴 때는 대게 미쳐서 발광을 할 때까지 자신을 잡고 늘어
지는 사람이 지금이라도 차라리 별채로 도망가 버릴까 고민하는데 그가 먼저 말을
던졌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문 걸어 잠그고 시위를 하더니?』
『삼촌이 할 말 있다고 해서 따라 내려온 것뿐이야. 꼴 보기 싫으면 다시 올라갈
까?』
툭하니 던진 말에는 힘이 없었다. 다른 때라면 얼굴도 안 보고 다른 데로 도망쳤
겠지만 서진이 미리한 말도 있고 지금은 그에게 기어야 하는 때라 힘 빠진 목소리
로 그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질색을 해버렸다. 냉랭한 말투에서 독기가 빠지니 마
치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역시 그걸 눈치 챘는지 피식 웃는다. 하지만 자신이 독기가 빠진 만큼,
그에게서도 그다지 악의는 느껴지지 않아 모른 척 서진을 바라보며 손을 뻗자 그
가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네준다. 가방을 받아들며 이번엔 다시 어서 이야기를 하라
는 듯 삼촌을 돌아보자 삼촌이 우물거리며 막 계단으로 올라서려는 그에게 말을
건다.
『저기, 형.』
그 말에 그가 막 계단으로 올라서려다 뒤를 돌아본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삼촌
을 바라본다.
『주말에 재영이 운동횐데, 김윤정 씨 오시게 해도 될까? 다들 엄마 오는데 재영
이만 삼촌이 가면 좀 그렇잖아.』
그 말에 가만히 삼촌을 바라보던 그가 자신에게 시선을 던져온다. 그 시선을 무시
하고 있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웬일로 무언시위를 빨리 끝냈다 했더니,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군.』
말을 건 건 삼촌인데 자신을 향해 답을 하는 그의 태도에 인상을 쓰며 돌아보자
그가 불쾌한 듯 인상을 쓴 채 자신을 바라본다.
『여우 짓을 하려면 제대로나 해. 이렇게 어설프게 해봤자 기분만 상하니. 알면서
도 속아주게 하든가, 아니면 하지를 말아.』
아주 정확히 폐부를 찌르는 그 말에 뜨끔해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혀를 찬다.
『멍청하긴. 연락하지 말라고 했으니 연락은 끊어. 쓸데없이 엉뚱한 사람들이 오
가게 하지 마.』
툭하니 말을 내던진 뒤 다시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그럼 아버지가 가든가.』
날이 선 그 말투에 그가 피식 웃는다.
『내가 왜?』
『그럼 엄마라도 오게 놔둬. 어차피 오든 가든 관심도 없으면서 좀 내버려두라고.
』
이를 악문 채 이제 좀 그만하라고 항의하자 그가 기분이 좋아진 듯 웃는다.
『오든 가든 죽든 알 바 아니지만 네가 그 따위로 나오면 들어주기 싫어지거든.
당분간 김윤정은 이 집 근처로도 못 오게 해. 전화도 안 돼.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도 안 돼. 영원히.』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일부러 강조하는 그의 말투에 기가 막혀 그를 바라
보고 있자 그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응시한다. 얼마든지 더 해보라는 듯
도발하는 듯한 그 눈빛에 역시나 자신 때문에 괜히 그가 시비를 걸고 있다는 사실
을 알아버렸다. 자신이 없었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걸, 자신이 옆에 있으니
일부러 저러는 거다.
『집에 온다는 것도 아니라, 그냥 학교로 가는 거잖아. 그 정도는 관심도 없으면
서 왜 새삼 신경 쓰는 척해?』
『네가 원하니까.』
너무나 당연한 듯 나온 그 답에 며칠간 이어진 냉전의 화풀이를 지금 하는 게 뻔
히 눈에 보여 겨우겨우 참고 있던 게 폭발해버렸다.
『이제 좀 그만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던지며 고함을 내지르자 그가 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그냥 좀 놔두라고! 말 잘 듣고 알아서 피해 다니고 있잖아! 그렇게 내가 거슬리
면 차라리 이 집에서 나가라고 말로 해! 그럼 얼마든지 기쁘게 나가줄 테니까!』
『…….』
『엄마한테 가든, 혼자 나가 살든 알아서 할 테니까 차라리 내쫓기라도 하라고!
나도 그쪽 얼굴 보는 거 지긋지긋하니까!』
『뭐라고?』
『나도 아버지랑 같이 살 생각 없다고. 처음부터 그랬어. 엄마만 아니었으면 이
집에 안 왔어. 지금도 소름이 끼치게 싫다고. 당신도, 이 집도 끔찍해.』
기어이 못된 성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르자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웃는다.
그 웃음이 또 거슬려 그를 노려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선다. 느릿한
걸음으로, 뚜벅거리며 구둣굽 소리를 내며 느릿하게 다가서는 그의 움직임에 주변
이 고요해졌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한 홀 안에서 바로 자신의 앞으
로 다가선 그가 옆에 선 삼촌을 힐끔 돌아보더니 다시 자신을 바라본다.
『뭐라고 했지?』
『얼마든지 나가주겠다고.』
그 답에 그가 옆에 서 있던 삼촌의 따귀를 내리친다. 철썩하는 소리가 울릴 정도
로 요란한 그 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는 삼촌을 보고 놀라 몸을 움찔하며 경악에 찬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묻는다.
『다시 말해.』
『…….』
『아무리 정신 나간 망아지라 해도 생각이라는 건 하고 살아야지.』
『…….』
『다시 말해.』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의 눈빛과 말투에 놀라 기가 질린 듯 입을 다문 채 그를 바
라보고 있자 다시 그가 손을 들어 겨우 몸을 가눈 삼촌의 뺨을 내리 친다. 그 소
리가 날카로운 채찍처럼 뇌를 때려왔다. 놀라고 당황하고, 또 무섭다는 생각에 재
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그만해. 그만해…….』
『……그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닌데?』
『미안하다고. 잘못했어. 실수했어. 그러니까…… 그만해.』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가 화를 내는 건 많이 봤지만
누군가를 때리는 건 처음 본 데다, 그 상대가 하필 삼촌이라 그의 팔을 잡고 매달
린 채 바들바들 떨고 있자 그가 겨우 팔에서 힘을 뺀다. 그리고 조금은 분위기가
가라앉자 자신 역시 그의 팔을 손에서 놓자 그가 돌아서 계단으로 걸어간다.
그러다 문득 걸음을 멈춘 채 이번엔 삼촌이 서 있는 쪽을 돌아보다 다시 서진에게
말한다.
『앞으로 내가 오가는데 쓸데없는 것들 보이게 하지 마. 눈에 거슬리니까.』
그 ‘쓸데없는 것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말이 아닌 시선으로 말하고 있
는 그 모습에 옆에 선 삼촌을 돌아보자 빨갛게 얼굴이 부은 채 서 있던 삼촌의 얼
굴이 이번엔 파랗게 질려가는 게 보였다. 그 얼굴에 자신의 얼굴이 쓰려오는 듯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아프고, 미안하고 또 미안해 차마 괜찮냐는 말도 못 하고 바보처럼 그를 보
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갖고 있는지 알기에,
그리고 또 얼마나 간절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지 알았기에 자신이 그 순간 그를 얼
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던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늘 그를 아프게 하는 건 자신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도 그때는 이미 타
인의 수군거림에 익숙해져 다른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버
지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늘 상처 받고 아파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우울증이 심
해진 원인 역시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너무 아팠다. 그 후로 내내 후회했고 또 지금도 가시가 되어 남은 채였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몰라도, 우울증에 걸려 있던 그가 자살을 결심한 거라면 그
건 분명 자신 때문이었다. 겁 많은 그 사람이 자살을 결심할 정도라면 분명 그를
그렇게까지 몰아친 건 자신이었다.
멍한 정신에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리던 재현은 집에 도착한 뒤 곧장 별채로 향했다
. 머리가 텅 빈 듯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 생각도 못한 채 본능적으로 현관의 비밀
번호를 누른 뒤 집안에 들어서자 다리에서 힘이 풀려간다. 손에 든 책 한 권에 갑
자기 감성적이 된 탓인지, 아니면 며칠 간 휘몰아치는 일들에 지쳐서 그러는지,
단지 잠을 못 자서인지,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사실에 재현은 쓰게 웃었다. 오기 전까지는 끔찍하게 오기 싫었던 집이지만 막
상 도착하니 그래도 집이라고 마음이 놓이는 모양인지 갑자기 급격한 피로가 몰려
왔다. 한 걸음도 떼기 어려울 정도로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정신이 몽롱했다.
이미 택시를 타고 오는 중에도 몇 번이나 쓰러질 듯한 현기증을 느꼈었다. 너무
피곤하고 노곤하게 몸이 늘어져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눈꺼풀이 몇 번이나 내려앉았다. 무릎 역시 꺾일 듯 위태
롭다.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져 내릴 것 같은 몸을 질질 끌고 방으
로 들어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눕는 순간
시야가 검게 변했다.
그리고 곧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몇 시간을 잔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몸이 나른하고 너무 피곤해 꿈도 꾸지 않은
채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누군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
따뜻하고 포근한 감촉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좋은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
다. 피곤이 모두 가시는 듯 나른해져 곤한 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머리카락을 쓰다
듬어주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곤 곧 그의 손길이 떨어져나갔다. 아쉬운 듯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눈을 뜨기는 싫어 그대로 다시 정신을 놓으려는데 뺨 위에서
간지러운 숨결이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 속에 닿아온 온기에 본능적으로 팔을 들
어 자신의 위에 있는 몸을 끌어안았다. 팔에 철근을 단 듯 무겁기는 했지만 온기
가 그리워 그를 끌어안으려던 순간 얼굴에 닿아오던 숨결이 멈춘다.
갑작스레 사라진 숨결에 막 눈을 뜨려는 순간 억센 손이 머리카락을 잡아끌었다.
그 힘에 놀라 눈을 뜨자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살기어린 남자의 얼굴에
숨이 멈췄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 빠르게 눈을 굴리다 그의 뒤로 보이는 방의 풍경에
아차 싶었다. 너무 피곤해 자신도 모르게 침실로 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집에 어
떻게 돌아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세게 쥔다.
머리카락이 뽑혀나갈 듯한 통증에 인상을 쓰며 그의 손일 밀어내려 손을 뻗었지만
워낙에 악력이 센 꿈쩍도 안 한다.
“아파. 왜 이래, 갑자기?”
어떻게든 그를 밀어내려 바동거리며 그렇게 묻자 그의 얼굴이 다시 가까워진다.
그리곤 이번엔 조용히 숨을 들이킨 뒤 중얼거린다.
“담배 냄새가 나. 멘솔인데…….”
그 말에 재현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주원이 테이블에 올려둔 초
록색의 담뱃갑에는 분명 ‘menthol’이라고 적혀 있었다. 워낙에 향이 강한 담배
이긴 하지만 머리카락에 남은 냄새를 기차게 알아채다니 좀 어이가 없었다.
“……학교에 갔다고 했잖아. 선배가 담배를 피워서 그래.”
그러니 이만 놔달라고 말하자 그가 여전히 자신의 말은 듣지 않는 듯 작게 중얼거
린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런 놈이 있었지. 그런데 대체 얼마나 옆에서 피워댔길래
이렇게 냄새가 밴 거지?”
“알 게 뭐야. 아파. 놔줘.”
“당연히 내가 알아야 할 일이지.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딴 놈 냄새를 달고 침대
로 들어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갑작스러운 그 말에 얼굴로 피가 몰렸다. 이 사람이 그간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
었는지, 순식간에 알게 만들어주는 그 말에 머리카락이 다 뽑히더라도 그를 밀어
내려 팔에 힘을 주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그리고 곧 그에게 끌려가기 시작했다
.
머리카락을 움켜쥔 그의 악력에 발버둥을 치려했지만 두피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결국 그에게 질질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에 공황상태가 되었다.
“놔! 뭐하는 거야?”
고함을 내지르며 발악을 해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을 질질 끌고 욕
실로 들어섰다. 나무가 깔린 바닥을 지나 통유리로 만들어진 샤워룸에 강제로 자
신을 쳐 넣은 그가 물을 틀자 차가운 물줄기가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공황 상
태에 이어 갑자기 치솟는 짜증에 그를 밀어내며 소리를 내질렀다.
“미쳤어? 뭐하는 거야?”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 겨우 고개를 들려는 순간 이번엔 머리가 벽에 부딪쳤다. 그
리고 등 전체가 벽에 닿아 저릿해 오는 순간 입술이 틀어막혔다.
갑작스러운 그 키스에 재현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밀어내려 온 힘을 다했다. 하
지만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신에겐
너무 강한 남자였다. 억센 그 힘에 눌려 옴싹달싹 못한 채 그의 키스를 받아들이
고 있자 그의 손이 서서히 몸을 더듬어온다.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까지. 그의
손은 아주 능숙하게 젖은 옷자락 위로 자신의 몸을 더듬어오고 있었다. 마치 자신
이 어디를 만지면 느끼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움직이는 그 손에 머리가 아찔해져
왔다.
너무나 깊은 키스와 애무, 그리고 코끝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에 몸이 달아오르
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은 그의 손길이 익숙한 듯 반응하고 있었
다.
그 괴리감에 진저리가 나 몸부림을 치는 사이 청바지의 버클이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왔다. 요란하게 울리는 물줄기 소리 속에서도 너무나 선명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에 놀라 몸을 틀려는 순간 그의 손은 이미 엉덩이 골을 더듬고 있었다.
젖은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에 걸친 채 은밀한 부분을 매만져오는 손길에 방금 전
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뜨거워졌다. 실오라기처럼 남아 있는 이성에
반항을 하여 애를 썼지만 이미 다리가 후둘거리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들쑤셔오는 지독할 정도의 쾌감에 그의 입술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렸다.
“하지 마…… 제발…….”
“그건 이런 상태로 할 말이 아니지.”
그의 말과 함께 다리를 가르고 들어온 그의 허벅지가 사타구니를 누르기 시작했다
. 그제야 자신이 발기한 상태라는 걸 깨달은 재현은 경악했다. 기억은 없어도 본
능은 충실하게 익숙한 상황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이 이전에 그의 손에 어
떻게 반응했는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자꾸만 흔들리려는 허리에
이를 악문 채 눈을 갑자 그가 나지막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조금 다른 시나리오를 써볼까 했는데…… 정공법이 최고지. 시간 낭비하
는 건 질색이니까.”
그 말과 함께 엉덩이의 좁은 구멍 안으로 쿡 하니 뭔가가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랄 틈도 없이 좁은 내부를 휘젓는 손가락에 머릿속이 텅 비
어갔다. 분명히 고통스럽고 어색해야 하는데, 싫어서 아프다고 몸부림을 쳐야 하
는 상황인데도 몸은 그 이상의 뭔가를 기대하듯 환희에 젖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아랫배 위로 성기를 비벼대듯 문지르며 숨을 헐떡거리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
낯설고 이상했다. 아니, 이미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된
채 움직이는 그 상황을 정신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아무리 외쳐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만……해…….”
이미 정복된 육체에 겨우 겨우 남은 이성을 부여잡고 그렇게 작게 다시 한 번 애
원했지만 그 목소리는 지나치게 높고 가늘었다. 그만하라는 게 아니라 마치 더 만
져달라는 듯 신음 같은 그 음성에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확실히, 자신은 미친 거다. 진짜 제대로 미쳤던 거다. 그러지 않고는 이런 짓을
할 수가 없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되새기던 사이 그가 목덜미를 살짝 깨물며 속삭이
듯 말한다.
“욕실에서 하는 거 좋아했잖아. 기억해봐. 젖은 채 넣어주면 자지러졌던 것도,
잘 생각해봐. 넌 머리보다는 몸이 더 기억력이 좋은 것 같으니까.”
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몸이 뒤집히며 등 뒤에서 탁- 하며 벨트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욕실 내에서 울리는 그 소리가 뭔지 깨닫고 몸을 돌리려
는 순간 머리가 눌렸다. 차가운 욕실 벽에 이마를 댄 채 잠시 멍하니 있던 사이
다리 사이로 몸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좁은 구멍 사이를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뜨겁고 단단한 살덩어리에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나갔다. 강제로 몸 안을 꿰뚫는 그의 성기에 턱이 덜덜 떨려올 정도로
지독한 통증이 스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비도 없이, 몸 안을 쑤셔대는 흉기에 달아올랐던 몸은 순식간에 차게 식었고 남
은 건 두통이 일 정도로 끔찍한 통증뿐이었다. 꼼짝할 수 없이 머리를 내리누른
채 그는 등 뒤에서 허리를 움직여가고 있었다.
격렬하고 빠른 그의 움직임은 흥분을 해 이성을 잃었다기보다는 화풀이를 하는 움
직임에 가까웠다. 그가 한 번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끔찍할 정도의 통증이 느껴져
비명을 내질렀지만, 마치 그게 그의 목적인 듯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이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한 공포와 자기혐오에 정신을 차
릴 수가 없었다.
마치 긴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아주 지독하고 긴 악몽이었다, 이건.
그러니까, 눈을 감았다 뜨면 괜찮아질 것이다.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 떠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그 통증도 유린당하고 있는 육체도,
또한 자신의 몸속을 들쑤시고 있는 남자의 존재도 모두 그대로였다.
감당하기 벅찬 그 상황에 그냥 정신을 놓아버렸다. 제발 다음에 눈을 떴을 때엔
이 모든 게 꿈이길 기대하며, 극한에 몰린 의식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어둠이 찾아들었다. 그 순간만은 어둠이 자신에게 천국이 되
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불현듯 불빛이 스쳤다. 새하얀 점들이 튀어 올라 어둠 속에서
부딪치는 순간 몸을 들쑤시는 통증에 의식이 깨어났다. 척추를 타고 올라 순식간
에 뇌를 조이는 통증에 이를 악물며 눈을 뜨는 순간 하얀빛으로 가득 찼던 세계가
곧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서서히 보이는 익숙한 방 안의 정경을 돌아보던 사이
다시 한 번 뒷목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머리 전체가 울려왔다. 제정신으로는 감
당하기 힘들 정도의 통증에 이를 악문 채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 통증은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온몸이 아프다. 전신이 마비가 된 듯 뼈와 근육이 단단히 굳고 계속해서 전신을
뒤덮은 아픔에 이가 딱딱 갈려 왔다. 뇌까지 후려치는 듯한 그 감각에 작게 신음
을 내뱉는 순간 뜨거운 손이 목덜미에 닿아왔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살결을 쓰다
듬는다. 나긋하고 따뜻하다. 고통을 위로해주는 듯한 그 손길에 눈을 뜨려는 순간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잘한 일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중요한 일들만 따로 별채로 보고하러 와.
당분간, 회사에 나가지 않을 테니까.”
나지막한 그 음성을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때려대는 두통과 전신
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저 어서 이 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사이 목을 더듬던
손길이 이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과는 달리 조금 강한 힘으로
어깨를 내리누르는 힘에 낮은 신음을 흘린 순간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잠깐 풀어놨던 녀석을 재교육을 시켜야 할 것 같아서. 겨우 여기까지 와서 또
놓칠 수는 없지. 이게, 한 번 더 내 눈앞에서 사라지면 진짜 미쳐버릴 것 같거든.
”
그 말과 동시에 그의 손이 등을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더듬듯, 하지만
확연한 욕망을 담은 그 손길에 통증에 넋이 나가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나며 순식
간에 기억들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생생한 고통과 함께 찾아오는 끔찍한 기억에 통증도 잊은 채 몸을 움직였다. 어떻
게든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침대 위를 기어나가
려 몸을 움직였지만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다급해졌다. 아니, 무서웠다. 엄습해오는 공포감에 마지막 남은 온 힘을 쥐
어짜 시트를 쥐고 겨우 몸을 움직이자 어깨를 더듬던 손이 어깨를 잡고는 강제로
몸을 돌렸다.
허리와 다리 아래에서 울려오는 통증에 비명을 삼키며 몸을 돌린 순간 환한 빛이
눈을 가득 채웠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그 빛에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바로 위
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찮게 굴지 마.”
화가 난 듯 조금 낮아진 그 음성에 눈을 뜨자,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와 눈이 마주쳤다. 환한 불빛 아래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서늘하고
차가웠다. 아니, 너무 차가워서 델 듯한 느낌이었다. 손을 대지 않아도 그저 바라
보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타버릴 듯 냉랭한 그 시선에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쿵쾅거리며 요란하게 뛰어대는 심장에 정신이 나간 듯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그
를 올려다보고 있자 그가 설핏 웃는 게 보였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그냥 악동 같은 미소였지만 그 미소 위로 보이는 기묘한 그
의 눈빛으로 지금 그가 하는 생각을 이해해버렸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냥 알아버렸다. 통증까지도 뒤덮는 끔찍한 그 예감에 몸부림을 치자 그
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짓누른 채 바로 위에서 몸을 덮어온다. 아무리 힘을
주고 몸을 흔들어도, 다리를 옭아매고 전신을 내리누르며 자신의 위로 올라타는
그의 무게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패닉에 빠진 채 몸을 가늘게 떨며 그를
바라볼 뿐이다.
겨우 깨달았지만 지금 자신은 나신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그에게
짓눌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전신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는 깔
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채였지만, 바로 이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기에 두려
워할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더는 안 된다고 애원하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잠시 자신을 내
려다보던 그가 전화기에 대고 다음 말을 이어간다.
“끊어. 앞으로 바빠질 테니 당분간 이 근처로는 아무도 얼씬하지 못하게 해.”
그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그가 핸드폰의 전원을 끈 뒤 침대 위로 내던진다. 그가
전화를 끊자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의 적막이 방 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무거운 침묵이 심장을 옥죄어온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진짜 귀신이거나, 혹은 생전 본 적 없는 낯선 남자라 해도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처음 보는 낯선 타인이라면 감당할 수 있
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다. 이 남자는 안 된다.
통증보다도 더 무겁게 자신의 뇌리를 짓누르는 건, 그와 자신의 생물학적 관계였
다. 그건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자신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지 않
는 이상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육체가 아닌 정신이 견디질 못한다.
“……하지 마…….”
한 번은 실수나 사고로 넘기더라도 두 번은 안 된다고 그에게 애원했지만 그는 개
의치 않은 채 쇄골 위에 입을 맞춰왔다.
“무서워할 거 없어. 이번엔 부드럽게 해줄게. 너도 좋아하잖아, 나한테 안기는
건.”
그 말에 턱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몸에서 울려오는 통증 때문이 아닌 그 말
때문이었다. 몸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뼈가 부러지든 머리가 깨지든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안 돼……. 이건 안 돼…….”
맨 피부 위에 닿은 그의 입술에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어내려 하자 귓불을 물어뜯
던 그가 귓가에 속삭여온다.
“한 번 한 건, 두 번이나 세 번이나 마찬가지야. 이제 와서 기억이 없다는 핑계
로, 아버지니 뭐니 떠들어봤자 웃기지도 않아.”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번엔 목덜미를 깨물렸다. 목덜미로 스치는
그의 숨결과, 살결을 핥는 혀의 축축한 감촉, 그리고 피부 위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멈춰 있던 것 같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감각하고 차갑기만 할 것 같던 남자의 체온은 지나치게 높았다. 손길도 더없이
부드럽고 혀도, 입술도 뜨겁기만 한다. 냉랭하던 그 시선과는 전혀 달리 뜨거운
남자였다. 아니, 어쩌면 너무 차가워서 뜨겁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그
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자신이 그의 체온을, 그 손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위에서 전신을 눌러오는 이 무게감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밀어낼 수 없는, 그 힘을, 무게를 몸이 기억하고 있다. 그 열기에 싸
인 순간 느낀 그 충만함도, 그의 가슴에 안긴 채 신음하던 순간의 쾌감도, 그 감
촉들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의 가슴이 얼마나 단단하고 따뜻한지를 기억한다.
흐르는 듯한 팔 근육의 감촉이 어떤지, 그의 팔이 어깨를 안아줄 때의 감촉이 어
떤지, 그리고 그에게 안겨 있으면 얼마나 편안한지, 모두 떠올랐다.
기억이 모두 돌아온 건 아니지만, 그 감각은 알고 있다. 슬플 정도로 아릿한 그
감촉은 너무나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터질 듯 뛰어대는 심장의 고동과 쿡쿡거리며 심장을 찔러대는 안타까운 통증에 눈
을 질끈 감고 있는 사이 그의 손은 피부 위를 더듬어 가고 있었다. 옆구리와 등을
부드럽게 쓸며 살결을 매만지고 흘러내린다.
짙고 농염한 손길이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게 부드럽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몸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 손길에 서서히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싫은데,
아니, 싫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진저리를 치며 그를 거절하고 발악을 해야 하는데
그게 되질 않는다.
“안 돼…….”
목덜미를 빨아들이고 쇄골을 핥고, 다시 가슴의 돌기를 빨아들이는 그의 입술에
몸이 노곤해져 간다. 아랫배로 피가 몰리며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나
무력하게 그의 힘에 눌린 채, 그의 손과 입술로 희롱 당하면서도 자신의 몸은 분
명히 느끼고 있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절대 이건 안 될 일인데.
아무리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고 달래도 자신이 느끼는 부분들을 만져오는 그의 손
길과 입술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머리와 몸이 완전히 따로 노는 그 괴리감에 시트를 손에 쥔 채 몸을 힘을 주자 옆
구리에서 움직이던 그의 손이 등을 타고 내려와 엉덩이 사이의 골을 가른다. 그리
고 방금 전 상처를 입어 계속해서 쑤셔대던 그 부분을 손끝으로 누른다.
찢어진 듯 상처가 난 그 부분이 눌리자 욕실에서의 기억에 생생히 떠올랐다. 강제
로 그 부분을 꿰뚫리던 순간의 고통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흔들려는 순간 안쪽으로
들어온 손가락이 내벽을 손톱 끝으로 긁어내린다. 빠르게 내벽을 할퀴어내는 그
손길에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머리가 어질어질해 왔다.
어이없게도, 공포감과 따끔거리던 통증이 쾌감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너무나 순식간에 손끝까지 떨려오며, 정신이 무너져 내릴 듯한 공포감보다 더 강
렬한 쾌감에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나갔다.
단 한 번의 손짓으로 몸은 너무나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길 안에 녹아내려 그의
손끝 하나에 전신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다 타들어가는 듯했다. 예민해진 피부 곳곳이 근절거려 오고 다리
사이로 둔한 열기가 일었다.
나른해진 몸 위로 안타까움이 일었다. 아직은 부족하니, 더 움직여달라는 듯 엉덩
이가 흔들린다. 그 쾌감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절정을 조르
는 듯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허리를 휘며 그를 유혹하려 몸을 뒤틀자 다시 한 번
그의 손끝이 안쪽을 긁어내렸다.
다시 한 번 자극 당한 부분에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을 치고 있자 안쪽을 거칠게
휘젓던 손끝이 그 부분을 집요하게 문지르고 긁어대기 시작했다. 틈을 주지 않고,
예민한 부위를 자극해오는 그의 손길에 아랫배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아랫배가 울려왔다. 그 진하고 싶은 울림에 하반신 전체가 녹아드는 듯했
다. 아니 몸 전체가 그의 체온에 싸인 채 그의 피부 위로 녹아들고 있었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을 뒤덮는 열기에 밀려 수치심도, 이성도, 자
신의 머릿속에 있던 모든 금기들도 모조리 사라진 채였다. 원하는 건 몸 안에 타
오르는 불길을 토해내는 것뿐이었다. 자신으로는 도저히 제어가 불가능하기에 전
부 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숨이 차올라 가쁜 호흡을 내뱉으며 계속해서 내벽을 문질러대는 그의 손가락을 세
게 조였다. 아직 몸 안에 욕실에서 그가 남긴 정액이 남아있던 듯 손가락이 안쪽
깊은 곳을 쑤시며 움직이자 질척거리는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울려온다.
무서울 정도로 적막한 방 안에는 그와 자신의 호흡과 내부를 드나드는 손가락이
내는 마찰음만이 울려대고 있었다. 유난히도 크게 울려대는 그 소리가 수치심과
함께 쾌감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지독한 열병에 걸린 듯 온몸이 뜨겁고 머리는 어지럽다.
뇌까지 뜨거워져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리는 기분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 채 앓는
듯한 신음을 토해내고 있자, 어느 순간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간다. 천천히 안을
휘저으며 빠져나가는 손끝에 놀라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는 게 보였다.
그 미소에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흐트러짐 하나 없이 깔끔하고 빈틈없는 남
자의 흐드러지는 듯한 미소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고 또 농염해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그의 요염한 시선에 홀린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던진다.
남색의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상의가 사라지자 군살 하나 없는 근사한 상체가 드
러났다. 우람하다기보다는 날렵한 몸이었다. 양복을 입었을 때 보이던 그 날렵함
그대로 탄탄하고 가느다란 잔 근육들로 싸인 몸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
지금 눈앞의 남자가 누군지도 잘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멍해진 채 그를 바라보던
사이 그가 하의의 버클을 풀며 지퍼를 내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바로 잘 짜여진
복근 아래로 발기한 그의 성기가 드러났다. 그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흉악할
정도로 크고 단단하게 팽창해 있는 그 성기의 형태에 목이 타들어갈 듯한 갈증과
함께 몸 안이 욱신거려온다.
머리와는 상관없이 몸이 그걸 원하고 있었다. 절정의 쾌감을 주던 그것을, 자신의
몸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 남은 채 간절히 그걸 바라
는 듯 몸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나른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의 두
다리를 들어올린다.
맥없이 벌어진 채 그의 손에 흔들리는 두 다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재현은 뜨겁게
달아오른 성기가 회음부를 스치는 순간 오싹한 듯 몸을 떨었다. 아래쪽을 천천히
문지르며 엉덩이 골 사이로 파고드는 성기의 감촉이 너무 적나라해 머리가 어질어
질해 오고 있었다.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녹아내릴 듯한 느낌에 허리를 비틀며 낮은 신음을 내
뱉고 있자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뺨 위를 눌러온다.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을 대
하듯 다정한 그 입술에 가슴이 벅차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만큼이나 가슴 가득
히 따뜻한 물이 차오르는 기분에 그의 목을 끌어안는 순간 나지막한 그의 웃음소
리가 들려왔다. 기묘한 그 웃음소리에도 멍하니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사이 그
가 귓가에 속삭인다.
“내가 말했지? 네 몸은 머리보다는 기억력이 좋다고. 일단 시작하면, 아버지든
아들이든 그런 건 아무 상관없는 거야.”
짤막한 그 말이 몽롱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일깨우는 그
말에 열로 붕붕 떠다니던 의식이 돌아오자 순식간에 그의 성기가 몸 안을 꿰뚫고
들어왔다.
몸을 가르는 통증보다도 더 무서운 그의 말에 필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내며
비명을 내질렀다.
“안…… 돼……. 안 돼!”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려 발버둥을 쳤지만 그 역시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허리를 움직인 순간 몸에서 다시 힘이 빠져나갔다. 정확히 자신이 느끼던 그 부분
이 단단한 성기의 끝으로 눌리자 날카로운 전류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온다. 감전
이라도 된 듯 오싹한 그 느낌에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몸뿐 아니라 머리까지
녹아들어간 듯 다시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안 되는데,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는데 육체는 의지의 지배를 거부
한 채 움직여가고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의식이 입술을 움직인다.
“……안 돼……. 하지…… 마…….”
숨이 넘어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말로는 안
된다고 애원하지만 그를 거부할 힘은 없었다. 거부는커녕 전신이 그의 아래에 노
곤하게 녹아들어가 그의 손길에 흔들리며 움직여가고 있었다. 느릿한 그의 움직임
에 애를 태우며, 입으로는 안 된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어서 빨리 그가 움직여주
길 기다리고 있었다.
더 거칠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하게 자신을 몰아붙여 바라고 있다.
차라리 자신의 육체를 산산이 부서주길 간절히 기다리는 자신에게 진저리가 쳐져
눈을 감고 시선을 돌리자 그의 손이 턱을 잡아 돌린다.
“눈 떠.”
짤막한 명령 같은 그 말에 반사적으로 눈을 뜨자 그가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
려다보며 양 손목을 눌러온다. 꼼짝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으로 두 손을 침
대 위에 고정시킨 채, 바로 시선을 잡아끌고는 속삭인다.
“똑바로 보고 있어. 지금 네 위에 있는 남자가 누군지, 잊지 말고 기억해. 네가
지금 누구에게 안겨 있는지, 절대 잊지 마. 한 번도 넌더리가 나는데 두 번을 반
복한다면 이번엔 널 진짜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말에는 살의가 실려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죽
여 버릴 수도 있다는 그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아래쪽이 찔러 올려졌다.
느릿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마치 흉기처럼 아랫배 쪽으로 푹 찔려오는 성기에 헉-
하는 숨이 터져나갔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빠르게 아래쪽을 찔러오는 그 힘에
몸이 흔들리자 그의 손이 더욱 손목을 세게 움켜쥔다. 그 힘에 못 박힌 듯 침대
위로 고정된 채 다리를 벌리고 빠르게 내벽을 쳐올리는 그를 받아들여야 했다.
순식간에 밀고 들어왔다 빠져나가고 다시 거칠게 안을 쑤셔댄다. 막무가내로 움직
이는 듯 했지만 정확히 자신이 느끼는 그 부분을 찔러 올리는 그의 움직임에 정신
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비벼대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쾌감을 느끼던 그 부위를
집요하게 쑤셔대자 머리가 아득해졌다.
머릿속에 있던 복잡한 생각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행위에 몰두해가며 그의 움
직임에 맞춰 허리가 흔들려간다.
이성은 욕망 아래 처참하게 무너진 채였다.
계속되는 그의 움직임에, 아주 익숙한 듯 그의 호흡에 맞춰 그의 성기를 조이며
헐떡이는 숨을 내뱉었다.
그를 받아들인 구멍은 이미 얼얼해져 감각도 느낄 수 없었지만 내벽에서 느껴지는
쾌감만은 지나치게 선명했다. 더 이상은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그가 주는
쾌감이 너무 강렬해 눈물까지 흘리며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던 순간 마지막으로 안
쪽으로 거세게 파고들던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몸 안 깊숙한
곳에서 그의 정액이 퍼져나갔다.
너무 깊어서, 마치 임신이라도 할 듯 아랫배를 가득 채워가는 그 정액에 발기한
줄도 모르고 있던 자신의 성기 역시 정액을 토해냈다.
전신을 꽉 채워오는 그 쾌감에 이제 더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여기까지 온 이상 이미 끝난 거다.
자신의 정신력으로는 감당할 수 있는 경계를 넘어온 지 오래라 더는 생각이라는
걸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을 한다면, 현실을 제대로 인지해버린다면 자신이 미쳐버릴 거라는 걸 알기에
그냥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도록 머리를 비우고 본능에 몸을 맡
겼다.
이젠 뭐가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는 생각에 정신을 놓고 있던 사이 그의 입술이 입
술 위를 덮어왔다. 그리고 아주 깊이 입을 맞추며 허리를 끌어안는 그의 팔에 자
유로워진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마주 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그의 입술에 멍하니 그의 키스를 받으며 눈
을 감고 있자 그의 혀가 정성스레 입안을 훑으며 타액을 빨아들인다. 농염한 그
입맞춤에 그를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탈진한 듯 늘어지는 몸에 그대
로 눈을 감고 있던 사이 그의 성기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몸 안에 남은 정액이 그를 따라 흘러내리는 감촉에 몸이 오싹해져 힘을 주자 곧
입술 역시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자신의 허리를 안은 채 몸을 돌린다
. 그의 가슴에 안긴 채 그의 위에 올라타 있자 그의 손이 가슴의 돌기를 지분거리
기 시작했다.
장난을 치듯 만지작거리며 유두를 꼬집고 누르는 손길에 겨우 식었던 몸이 다시
열기를 띄기 시작했다.
“여기, 만져주는 거 좋아하지?”
살짝 웃음기를 띤 그 질문에 이를 악물고 버티자 그가 느긋하게 말을 잇는다.
“핥아줄 테니 일어나.”
그 명령에 가까운 말에 싫다고 거부하려 했지만 생각하기보다 빠르게 몸이 움직여
간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한 채 그의 위에서 상체를 일으킨 채 그의 얼굴 쪽으로 가슴을
내밀자 그의 입술이 유두 위로 닿아온다. 처음엔 가볍게 입을 맞추며 간질이더니
이내 그의 축축한 혀가 돌기를 핥으며 쓸어내린다.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두
를 핥던 그가 이를 세워 끝을 물어뜯는 순간 억눌린 신음이 터져나갔다.
간질거리는 그 느낌에 허리 아래까지 저릿해와 그의 아랫배 위로 막 발기하기 시
작한 성기를 비벼대자 그가 두 손으로 엉덩이를 쥔 채 끌어내리자 엉덩이 골 사이
로 어느새 단단해진 그의 성기가 닿아왔다.
삽입한 것도 아닌 그저 스치듯 닿아온 것만으로도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안에 있던 그것의 형태를 정확히 기억하는 듯 내벽이 움찔거리며
조여대는 느낌에 달뜬 숨을 내쉬고 있자 그가 느긋하게 말을 건넨다.
“넣어.”
짤막한 그 한 마디에 허리를 일으킨 채 그의 위에 무릎 꿇고 앉아 그의 성기를 손
으로 쥐었다.
이미 정신은 나간 채라, 오로지 본능에만 의지해 천천히 그의 위로 내려앉기 시작
했다. 이미 두 번이나 강제로 벌어졌던 구멍은 흘러내린 그의 정액으로 젖어 쉽게
열렸다. 시큰거리며 아프긴 했지만 익숙하게 그의 성기의 끝을 입구에 넣은 채 천
천히 숨을 내뱉으며 그의 위로 내려앉자 다시 한 번 그의 성기가 몸 안을 가득 채
워오기 시작했다.
상처 난 부위가 쓰려오고 무리한 삽입에 숨이 가빠오기는 했지만 아래쪽이 가득
찬 듯 느껴지는 충족감에 작은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다 들어왔어. 전부……. 아, 좋아…….”
자신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열기를 띤 가느다란 음성에 그가 부
드럽게 말을 건넨다.
“움직여 봐. 네가 원하는 대로.”
마치 귓가에서 울리는 듯 나른하고 다정한 그 음성에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익숙한 듯, 빠르게, 자신이 느끼는 부분을 찾아 허리를 움직이는 사이 다시 몸속
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그 열기에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짚은 채 점점 빠르게 몸을 움직여갔다.
본능은 수치도 잊은 채 굶주린 아이처럼, 그렇게 그의 몸을 탐해가고 있었다.
넓은 방 안 전체로 느릿하고 나른한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아날로그의 소음을 담은 몽환적인 멜로디에 한창 단 잠에 빠져 있던 재현은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스캣을 반복하는 보컬은 성별 구분도 어려울 정도로 낮고 허스키했지만 그 특유의
나른함에 편안하게 숨을 내쉬자 따뜻한 손길이 머리카락에 와 닿았다.
너무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그 손길에 천천히 눈을 뜨자 바로 옆에서 헤드쿠션에
기대앉아 서류를 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깔끔하고 빈 틈 없어 보이지만 편안한
옷차림에 부드러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그는 서류를 내
려다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쓰고 있는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그가
여전히 서류를 내려다본 채 작게 혀를 찬다.
“정후 녀석이 일을 망쳐놨어. 징징댈 시간이 있으면 이런 거나 제대로 처리해주
면 좋을 텐데. 이래서는 쓸모라곤 한 군데도 없잖아.”
뜻을 알 수 없는 그 말에 여전히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펄럭거리며 서류를
훑어보던 그가 이내 그 서류를 집어던지더니 핸드폰을 손에 든다. 그 와중에도 그
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상냥한 그 손
길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이 그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올라온 기획서 전부 폐기시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이 따위를 기획이라고
들고 올 머리통이면 필요 없어. 다음 것도 이 상태면 그 녀석을 통째로 쓰레기통
에 처박아버릴 테니, 단 한 군데라도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라고 전해. 이
게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니까.”
머리카락 위에 닿은 손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냉랭한 그 목소리에 무슨 소리
인가 해 고개를 들자 콜록거리며 기침이 터졌다. 발작적으로 터진 그 기침에 몸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입술도, 목구멍도 바싹 마른 채였다. 아니, 폐 속까지 모두
말라버린 느낌이었다. 침을 삼키려 해도 입안 역시 바싹 마른 채라 계속해서 콜록
거리고 있자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방 안의 냉장고로 가 생수병을 들고 다시 침대
로 다가선다. 그리곤 물병을 건네준다.
물병을 보자 더욱 심해진 갈증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팔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
았다. 온몸의 마디, 마디가 부서진 듯 쑤셔대고 근육 역시 칼로 난도질이라도 당
한 듯 갈가리 찢겨져나가는 듯했다. 기침을 한 번 할 대마다 폐가 터져나갈 듯한
통증과 함께 찾아온 전신의 동통에 무력하게 침대에 엎드린 채 기침이 가라앉기를
기다리자 그가 한숨과 함께 통화를 끝낸다.
“끊어.”
짤막한 한 마디로 통화를 끝낸 그가 핸드폰을 협탁 위로 내던진다. 그 와중에도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는 기침에 몸을 들썩거리고 있자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앉
은 그가 물병의 뚜껑을 연 뒤 자신의 목을 안아든다.
“마셔.”
그 말과 동시에 입술 위로 물병의 입구가 와 닿았다. 차가운 그 감촉만으로도 마
음이 조급해져 물을 마시려 했지만 그때마다 기침이 터져나가 물을 들이킬 수가
없었다. 겨우 입안으로 들어온 물도 모두 토해내듯 뱉어낸 뒤 콜록거리고 있자 자
신의 목덜미를 잡아 머리를 고정시킨 그가 물을 들이킨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간절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물을 들이킨 그가
그대로 입술을 겹쳐왔다. 그리고 조금씩 입 안으로 그가 머금고 있던 물을 흘려보
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입 안을 적셔가는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조금씩 목이 편안
해지기 시작했다. 한 모금의 물이 입술과 혀, 그리고 목구멍과 폐 속 깊숙이까지
흘러든다.
마른기침이 잦아들고 메말라 터질 것 같던 목구멍이 편안해졌다. 아주 적은 양이
었지만 당장 말라 터질 것 같던 목구멍을 적셔준 물에 겨우 혀를 움직여 물을 더
빨아들이려 했지만 더는 넘어올 물이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입술을 할짝거리며 매달리자 그가 한숨을 내쉰다.
“툭하면 굶고 안 자니 이러는 거야. 이번엔 그 못돼먹은 성질머리부터 고쳐.”
그가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만 말의 의미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머리
가 몽롱하고 목이 말라 한 번 더 그의 입술을 가볍게 핥자 그가 웃는다. 이 상황
이 꽤 마음에 든 듯 기분 좋은 미소를 띤 그가 이번엔 입술에 물병의 입구를 대고
천천히 입술로 흘려 넣어준다.
방금 전보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명치 위
에 얼음덩어리가 걸린 듯 아려오는 느낌에도 배고픈 아이처럼 허겁지겁 물을 들이
켰다. 절반가량은 입가로 흘리며 서서히 물을 목구멍으로 넘기던 사이 겨우 가슴
이 편안해졌다. 물의 냉기에 익숙해지고, 갈증이 가시자 그가 물병을 입술에서 뗀
다.
그 순간 입가에서 긴 숨이 터져나갔다. 달콤한 탄성처럼 흐르는 그 숨소리에 그가
다시 푹신한 베개 위로 머리를 내려준다. 입가로 흘러내린 물기가 거슬리기는 했
지만 지금은 그런 데에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그대로 눈을 감고 있자 따뜻한
혀가 입술을 핥아온다.
흘러내린 물을 핥으며 천천히 마른 입술을 적셔오는 그 입술과 겹쳐져오는 체온에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추워.”
얇은 이불을 덮은 채였지만 듯 방 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벌써 겨울이 온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가운 공기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갈증이 가시자 비
로소 피부도 온도를 인식한 듯 급격히 느껴지는 추위에 몸을 떨며 그 온기 속으로
파고들려하자 입술을 핥아주던 남자가 작게 속삭인다.
“이제 따뜻하게 해줄게.”
싸늘한 공기에 피부도 예민해진 채였다. 어서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고 싶어 입술
을 겹치는 남자를 끌어안으려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여전히 팔은 꿈쩍도 하지 않
았다. 침대 위에 못 박히기라도 한 듯 무거운 팔에 그가 어서 가까워지기를 기다
리고 있자 그나마 온기를 전해주던 이불이 흘러내린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솜털이 곤두섰다. 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순식간에 온기가 사
라지자 너무 추웠다.
“추워…….”
턱이 덜덜 떨려올 정도의 추위에 그에게 매달리듯 중얼거리자 그의 몸이 피부 위
를 덮어온다. 뜨거운 그 체온에 안겨 있자 그가 뺨을 맞댄 채 속삭여온다.
“이제 좀 기억이 났어?”
부드러운 그 말투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술을 뺨에 부비며 등을
손으로 더듬어간다. 감미로운 그 손길에 다시 허리가 떨려오기 시작했다. 등줄기
를 훑으며 내려오는 그 손길은 지나치게 선명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아주 어린
아이라도 눈치를 챌 만큼, 그의 손길은 노골적이었다. 하다못해 그와 이미 몸을
섞고 난 후라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
다.
“그만……. 힘들어.”
이미 몸은 한계에 달한 채였다. 눈을 뜨고 있는 것도 버겁다. 그의 말대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 탓에 체력이 다해서인지, 단지 몸이 아파서인지 전신
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자고 싶었다. 갈증이 가셨으니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등 뒤를 훑던 손으로 엉덩이 사이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고 그 손끝이 그 사이를 벌리는 순간 안쪽에서 뭔
가가 흘러나왔다.
서서히 진득하니 흘러내리는 정액에 몸아 오싹해져 왔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
도 없던 몸이 다시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몸이 달아오르는 감각에 당황해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그가 일부러 손가락을 늘려 입구를 벌린다.
“아…….”
난잡하게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그곳에서 흐르는 정액에 허리를 비틀자 그
가 서서히 내벽을 손끝으로 누르며 귓가에 속삭여온다.
“기억해? 끝난 뒤에 이렇게 흘러내리면 좋아하던 거.”
그 말에 확하니 얼굴로 피가 몰렸다. 꼼짝도 못 하고 그에게 짓눌린 채 그가 원하
는 대로 반응해주는 자신이 싫어 고개를 돌리자 그가 일부러 느릿하게 내벽을 휘
젓는다. 쿨쩍거리며 들려오는 그 마찰음과 너무나 쉽게 열리는 몸에 이를 악문 채
눈을 감고 있자 차가운 피부 위로 그의 입술이 와 닿았다.
목덜미를 빨아들이고 다시 쇄골을 핥은 뒤 유두에 머문 입술이 추위에 꼿꼿하게
선 유두를 빨아들인다.
“윽.”
단단하게 선 돌기를 핥으며 빨아들이고 살짝 이로 깨물며 희롱해간다. 질근질근
씹으며 가볍게 핥는 것만으로도 서서히 몸이 풀려가고 있었다. 이미 불이 붙은 몸
이 뜨거워져 내벽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조이자 그가 웃는다.
“역시, 넌 몸은 이해가 빨라서 좋아.”
“앗!”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두를 아플 정도로 세게 물어뜯겨 가느다란 신음을 내
뱉으며 몸부림치자 이번엔 탐욕스레 유두를 빨아댄다.
더는 참을 수 없어 허리를 들썩거리며 그의 옷자락 아래로 흥분한 채 발기한 성기
를 비벼대자 그의 손가락이 아래쪽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 따뜻하던 체온이 멀어
진다. 하지만 여전히 멎지 않은 채 아랫배를 쿡쿡 찔러대는 듯한 욕망에 바로 위
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를 올려다보자 그가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해온다.
열정과는 거리가 먼 차갑고 차분한 그 눈을 바라보며 몸을 움직이려 하자 그가 먼
저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이제 기억나? 네가 얼마나 많이 내게 안겼는지. 네 몸이 이젠 익숙해져 내 손이
닿으면 느끼고 얼마나 음란하게 젖어 열리는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울려오는 그의 말은 여전히 머리에 와 닿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고 몸은 뜨겁다. 그래서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예전처럼. 거짓말이라도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말해봐.”
그 말에 머릿속에서 그와 같은 말이 울려왔다.
『사랑한다고 말해봐. 진짜 사랑하는 것처럼.』
바로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말에 입술이 움직인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아니면 바로 지금 자신의 위에 있는 남자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지
만, 생각하기보다는 입술이 움직여갔다.
“사랑해.”
역시나 그의 눈빛만큼이나 열정과는 거리가 먼, 그저 열에 들뜬 신음과 다름없는
그 말에 그가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손끝으로 누른다
. 그리곤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 한 마디가 가진 힘을 기억해. 그리고 반복해
속삭이며 다시 날 사랑해봐. 몸뿐 아니라, 마음도 역시.”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그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욱신거리던 엉덩이
골 사이로 단숨에 그의 성기가 파고들어왔다. 순식간에 내벽을 짓누른 채 들어와
안쪽을 쑤셔대는 성기에 가냘픈 신음이 터지며 사정을 했다.
한순간에, 너무나 순식간에 단지 삽입한 것만으로도 사정을 한 재현은 몸을 굳힌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 감촉이 기억났다. 그의 말대로, 음란한 몸은 단지 삽입만으로도 사정을 할 정
도로 예민해진 채였다.
탈진된 채 다시 몸에서 힘을 빼는 순간, 안쪽에 있던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
했다. 느긋하게,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는 성기가 내벽을 쓸어올리자 다시
몸이 열기는 띠기 시작했다.
“그……만. 아파……. 지금은 너무…… 힘들어…….”
이미 육체는 한계에 달해 그에게 그만해달라고 애원을 했지만 말이 이어지는 사이
사이 흘리는 신음소리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오히려 앙탈을 부리는 듯 비음
이 섞인 그 목소리에 그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맥없이 벌려진 두 다리를 들어올린 채 깊이 안쪽을 쳐올리며 다시 빠져나간 뒤 또
다시 깊이 파고들어온다. 정확히 자신이 느끼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비벼대며, 다
시 찌르듯 처올리고, 또 다시 그 부분에 닿아 일부러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인다.
예민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탐하는 그의 움직임에 방금 전 사정을 한 성기가 다시
발기하기 시작했다.
“아, 거기 그만……. 그만, 앗.”
아예 그 부분이 짓무른 듯한 느낌에 애원을 해도 그의 집요한 움직임은 멈추지 않
았다.
선단이 그 부분을 스치며 찔러올릴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빠르게 쳐대는 그
의 허리에 허벅지 안쪽에 멍이 들고 안쪽을 사정없이 헤집어대는 성기에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두 다리를 안아든 채 강하게 쳐대는 그 힘에 전신이 흔들리며 과도한 쾌감에 눈초
리를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는 그의 움직임에 따라 질척거리는 마찰음 역시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
쉽사리 끝내지 않고 계속해서 빠르고 강하게 안쪽을 파고드는 그의 성기를 세게
조였지만 그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어서 끝내주기를 바라면서도 그의 성기가 주는 쾌감에 차 자신의 몸은 환희에 차
신음하고 있었다.
아프고 뜨겁다. 강제로 벌어진 내벽은 사방이 생채기가 난 듯 쓰려왔지만 그보다
는 쾌감이 강했다. 터져 나오는 교성도, 헐떡거리는 숨소리도 멈출 수가 없었다.
격렬하게 몸 안을 오가는 그의 성기를 생생히 느끼며 높은 교성을 내뱉는 사이 그
의 성기가 몸 안 가장 깊숙한 곳에 박혀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안쪽을 적셔가
는 정액에 자신의 성기 역시 두 번째의 사정을 했다.
닳고 닳은 창녀처럼, 삽입과 그의 정액이 몸 안에 퍼지는 것만으로도 느끼는 자신
의 모습에 자괴감 따위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그저 강렬한 쾌락이 남긴 여운에 들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사이 허리를 숙인
그가 눈가에 입을 맞춰준다. 삽입한 채 허리를 숙여오는 덕에 그의 성기가 안에서
움직이는 순간 또다시 낮은 신음을 흘리고 있자 눈가의 눈물을 핥아주던 그가 속
삭인다.
“아까워.”
다시 엄습해오는 한기에 그의 온기에 몸을 맡긴 채 그의 말을 귀로 흘려들었다.
머리가 울려와 그냥 모른 체 눈을 감으려 하자 그가 가볍게 허리를 쳐올리며 말을
이어간다.
“임신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네 동생을 네가 직접 낳는 것도 재미있지 않아?”
귓가에서 울려대는 그 소리에도 순식간에 의식이 내려앉아갔다. 그의 말을 이해하
려는 노력조차 할 기력이 없었다.
더는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 따뜻한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는 순간 작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럼…… 못할 테니까.”
아주 작은 그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곧 어둠 속으로 묻혀 사라져버렸
다.
아주 잠깐 잠을 잔 기분이었다.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잤던 건지도 모른다.
가늘게 떨려오는 몸과 마디마디가 쿡쿡 쑤셔대는 기분에 눈을 뜬 재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방 안은 어두웠다. 밤인지, 새벽인지, 지나치게 어두웠다. 그 어둠 위로 고요함이
가라앉자 저 멀리서 나지막한 빗줄기 소리가 울려왔다. 투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
져내리는 그 빗소리에 ‘아, 비가 오는구나.’라고 떠올린 순간 이번엔 머리가 울
려왔다.
이명이 울리며 머리 전체가 울려대는 느낌에 목을 숙이는 순간 등과 허리가 쑤셔
왔다. 아니, 온몸이 다 아팠다. 밤새도록 두드려 맞기라도 한 듯 아팠다.
열에 들뜬 듯 멍한 정신과 계속해서 떨려오는 몸에 도움을 청하려 주변을 돌아봤
지만 어두운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파…….”
감기다. 지독한 독감이다. 그러고 보니 계속 몸이 안 좋았던 것 같다. 게다가 이
집은 너무 춥고 밖은 더웠다. 그 온도 차를 극복하지 못한 듯 바들바들 떨려오는
팔다리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침대 옆의 협탁을 뒤졌다. 혹시라도 무
슨 약이라도 있을까 싶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뒤졌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이에도 느껴지는 한기에 에어컨을 찾으려 손을 뻗었지만 에어컨은 꺼진 채였
다.
이건 자신의 몸이 느끼는 한기였다. 몸이 너무 뜨거워 이 온도가 추운 거다.
불덩어리 같은 몸에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이내 목이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
졌다. 열기에 목구멍도 말라버린 듯 팍팍했다.
목구멍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물도 보이지 않았다. 물을 마시려면 냉장고까지 가
야 한다.
한 걸음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목이 너무 아파 침대에서 내려서는 순간 무릎
이 꺾였다. 순간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진득한 액체에 진저리를 치며 다시 일
어서려 했지만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으슬거리는 오한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닥을 기어 냉장고로 향해갔다. 하지만 팔
도 움직일 수가 없다.
온몸이 너무 아파서, 그리고 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도와……줘. 누구든지…… 제발…….”
바닥을 기며 마치 기도하듯 온 힘을 쥐어짜내 신음하는 순간 불현듯 어떤 목소리
가 둔하게 울리는 머릿속을 스쳐갔다.
『아파?』
냉랭한 그 목소리에 뜨겁던 몸이 차게 식어갔다. 그래서 처음엔 누군지 기억해내
지 못했다. 머리가 아프기도 하지만 언제나 작고 자신 없던, 그래서 더없이 상냥
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저렇게 차갑게 울릴 줄은 몰랐기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도
저히 떠올릴 수가 없었다.
쿡쿡거리며 쑤셔대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그 소리 위로 빗줄기 소리가 섞여간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이어진다.
『난 처음부터 네가 싫었어.』
그 소리에 고개를 들자 어둠 속에 선 자그마한 남자가 보였다. 순하고 연약해 보
이는 인상에 늘 위태로워 보이던 작고 가느다란 체구의 남자가 바로 앞에 선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늘 자신을 보던 그의 얼굴과는 달랐다. 수줍게 웃으며 조심스
레 눈치를 살피고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아니었다. 무표정한 얼굴은 신체처럼 창
백하게 질린 채였고, 맑게 빛나던 진한 갈색의 눈동자 위로는 번들거리는 광기가
어려 있었다.
『네가 우리 집에 온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널 좋아해본 적이 없어. 네가 형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옆에 있지 않았을 거야. 지긋지긋하고 짜증났으니까. 넌
모르겠지만, 몇 번이나 네 목을 조르려고 했는지 몰라. 넌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걸 다 갖고 있으면서도 그게 얼마나 귀한 줄을 모르니까.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원하는 걸 다 쥐고 있으면서 그 가치도 모르고, 그걸 던져버릴 생각만 했으
니까.』
머릿속에서,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울리는 그 말에 재현은 머리를 감
싸 안았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거다. 이상한 거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기억이다. 자신의 머릿
속에서 떠오른 기억들 모두가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이건 특히나 현실적으로 불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가 그렇게 자신을 증오했을 리가 없다.
『착각하지 마, 서재현. 사랑도 없이 그냥 실수로 태어난 주제에, 당당하고 거만
한 아이 따위는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아.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너 같은 걸 좋아
할 수는 없어. 어느 정도의 비굴함은 예의야. 고개를 숙이고 눈치를 보고 불쌍한
척해야 잘못 태어난 아이들은 사랑받을 수 있어. 어차피 쓸모없는 아이 주제에 너
같이 이기적이고 거만한 녀석을 사랑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이 집안사람들
이 널 싫어하는 건 이 집안사람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해서야. 아무리
속이 좋은 인간이라도, 널 좋아할 수는 없어. 앞으로도, 널 사랑해줄 사람은 절대
없을 거야. 재원이도, 재영이도, 이젠 네가 지긋지긋할 테니까.』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심장을 내리찍고 있었
다.
이건 기억이다. 너무나 생생하고 선명한, 현재와 가장 가까운 기억이었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선명한 기억이 거짓일 수는 없다. 하지
만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걸,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가혹한 기억의 편린에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비명을 참는 사이 계속해서 소리가 이
어져간다. 듣기 싫어 귀를 틀어막으려 해도 머릿속에서 울려오는 소리는 어쩔 수
가 없었다.
『왜 너는 모든 게 쉽지? 어째서, 넌 아무 것도 안 하고 다 가질 수 있는 거지?
그렇게 혐오하고 질색을 하는데,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 건데? 왜 나는 그렇
게 비굴하게 구걸해도 가질 수 없는 걸, 넌 너무 쉽게 손에 넣고 쓰레기처럼 버리
려고 하는 건데?』
마치 저주처럼, 조용하고 낮게 계속되는 그의 음성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증오
를 넘어선 그 강한 혐오와 살의가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홧김에 내뱉는 말도, 그냥 해보는 말도 아니었다. 그건 지금까지 자신이 들었던
말들 중 가장 그의 진심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저 순하고 착하기만 하던 남자가 가면 뒤로 감추고 있던 감정이었다.
그걸 알기에 더는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 끔찍한 소리가 멈추길 기다리던
사이 다시 조용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파?』
그 기억 속의 물음에 현실의 자신이 답한다.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신음하듯 가냘픈 음성으로 답하며 이를 악무는 순간 다시 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난,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잔인한 그 말에 귀를 틀어막으려는 순간 방 안이 환해졌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
줄기에 눈을 꼭 감은 채 몸을 웅크리자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안아준다.
피부에 감겨오는 그 체온이 따뜻하고 익숙해 그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다. 지금
은 그가 누구든 상관없었다. 살인마나 혹은 저승사자라 해도 그는 자신에게는 구
원자였다.
“살려줘……. 누구든 좋으니까…… 나 좀 살려줘…….”
다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의 품에 매달린 채 애원하자 어깨를 안아 품에 당긴 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가 되묻는다.
“……무슨 일이지?”
나지막한 그 질문에 그의 셔츠자락을 잡은 채 매달려 흐느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아파.”
아이처럼, 아주 작고 어린 아이가 보채듯 그에게 안긴 채 칭얼거리자 목덜미들 쓰
다듬으며, 그가 작게 중얼거린다.
“열이 높아.”
별 감상 없는 듯 툭하니 내뱉어진 그 말에 억울하다는 듯 그에게 호소했다.
“……머리가…… 몸이, 너무 아파…….”
어리광처럼 그에게 매달리며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자 그가 천천히 머리를 쓰다
듬어준다.
“괜찮아. 감기 따위 별거 아냐.”
“……아파…….”
“괜찮아. 이 정도는 참아도 돼. 이쯤은 별거 아냐. 넌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놨으니까.”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들려온 그 말에 숨이 턱하니 맡겨왔다. 더는 그에게 칭얼거
릴 수도 없었다.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건지, 왜 삼촌이 자신을 그렇게나 증오하게 된 건지,
그리고 어떻게 또 이 사람을 상처 입힌 건지, 알 수 없지만 그 죄책감만은 선연히
느껴졌다.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자신이 잘못했던 거다. 그 연
약한 사람이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할 정도라면, 분명 자신이 잘못한 거
였다.
그러니까 모든 게 잘못된 건 자신 때문이다.
이 사람과의 관계도, 삼촌의 죽음도, 모두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그게 너무 아팠다. 그 죄의 무게가, 자신에게는 너무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