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도저히 식사는 못 하겠다는 핑계로 별채에 남은 재현은 서서히 해가 져가는 시간
조용히 후원으로 나섰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이미 점심 먹은 걸 모두 토해서
본채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하자 마음대로 하라고 사라진 정혁 덕에 우유로 대강
저녁을 때운 뒤 후원으로 나선 재현은 여전히 고요한 후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별채에서 머물면서도 후원에 나온 건 이게 처음이었다. 아니, 이곳을
안 찾은 지도 꽤 된 것 같았다. 예전에는 도망쳐오기 좋은 곳이라 툭하면 이곳으
로 와 시간을 보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곳도 그다지 좋은 도피처가 되지
못했다. 제일 피하고 싶은 사람이 이곳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이상 더 이상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 마음대로 오가라는 허락을 받은 뒤에도 이곳엔 잘 오지 않았
었다.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한 하늘과 어우러진,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는 후원을 천천히 걸어 정자 위로 들어서자 이제는 그 정자가 작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 속에 숨으면 자신이 아예 보이지 않는 듯, 마치 이 아름다운 풍경화
속의 일부가 되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이곳이 자신
을 숨겨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곳이 불편해진 게 언제부터일까 하고 떠올리자 정자 안으로 들어가 앉는 순간,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그게 중 3때쯤일 것이다. 계절도 딱 이맘때쯤
이었다.
그날은 여러모로 운수가 사나운 날이었다. 어느 시절, 어느 나이 때에나 한 집단
안에는 강하고 폭력적인 녀석이 있게 마련이었고, 자신에게 운이 없었던 건 하필
그런 녀석들과 한 반이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운이 없는 정도로, 그
들이 딱히 자신을 건들거나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워낙에 좀 산다는 집안 자식들
만 다니는 학교라, 그 안에서도 흔히 칭하는 일진이라는 녀석들의 부모님들이 대
규모 로펌의 변호사거나 검사, 판사, 대학병원 원장이다 보니 학교에서도 그들에
게 손을 대지 못했고, 다들 그걸 알기에 알아서 피해갔고, 그들도 나름 상대를 골
라가며 괴롭혔다.
문제는, 그 녀석들이 괴롭혀도 되는 녀석이라고 찍은 녀석이 자신에게는 유일한
친구인 윤상명이라는 것이었고, 그날은 여러모로 일이 꼬여서 자신까지 그 싸움이
끼어들게 되어 어깨와 얼굴을 꽤 다쳤었다. 친구 녀석도 보통 성질이 아니다 보니
그들과 치고받는 일이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정작 가해자인 녀석들의 부모들이 몰
려와 항의를 했고, 고급 룸살롱을 경영하는 미혼모의 아들인 친구 녀석만 체벌을
받는 상황이 반복되어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날은 판이 좀 컸다. 네 녀석이
몰려들어 상명이를 몰아붙이고 일방적으로 린치를 가하는 걸 보니 이러다 큰일나
겠다 싶어 끼어들었던 게 본의 아니게 패싸움으로 이어져버렸다.
사실 그 전까지 자신은 이 집에 있으면 안 되는 아이다보니 학교로 오가는 사람들
도 없고, 딱히 문제가 있었던 일도 없다 보니 이 집안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몰랐
었다. 또 알았다 해도 그걸 내세울 생각은 없던 터라 싸움이 끝난 후 어느 정도의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다. 정학이나 사회봉사 네다섯 시간 정도의 처벌은 별 상관
없다는 생각이었는데 발각 후에도 의외로 담임은 여기저기 전화를 해 진땀을 빼며
자칭 일진이라는 녀석들의 부모들께 상황 설명을 했고, 자신에게는 이 문제를 크
게 만들지 말라고 애원을 해왔다. 그래도 일단 부모님께 연락은 하겠다는 그를 만
류하며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하자, 갑자기 담임의 얼굴이 환해졌던 건 기억을 한
다. 그 표정에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상명이도 체벌을 피해갈 수 있
던 상황이라 그 문제는 덮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제는 집에 도착한 후였
다. 싸운 직후에는 얼굴이 좀 시큰거린다 정도였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 즈음에는
왼쪽 관자놀이부터 볼까지 멍이 시퍼렇게 들어 눈뜨고는 봐줄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도저히 그 얼굴로는 별일 없다고 넘어갈 수가 없을 듯해 급히 기사
아저씨한테는 못 본 척해달라고 부탁하고 재원이에게도 아파서 일찍 잔다고 거짓
말을 해달라고 하고는 어른들에게 들키기 전에 본채를 빠져나와 이곳으로 도망을
왔었다.
그때는 이미 이 곳을 마음대로 오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터라 파스를 잔뜩 챙겨
들고 이 정자로 와 숨어 뻐근한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작은 손거울로 얼굴을 보며
이 얼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중 바스락거리는 발걸음소
리가 들려왔다. 시간도 딱 이 정도 시간이라 막 해가 져가는 후원에서 울린 발걸
음 소리에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왔다는 걸 눈치 채버렸다.
평소에는 질색을 하며 차라리 서쪽 별채를 없애버릴까, 라고 중얼거리던 그의 갑
작스러운 방문에 놀라 몸을 숙이는데 언제나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정자 안으로 들
어선 그가 자신을 불렀다.
『숨고 싶다면 제대로 숨어. 그렇게 느릿느릿 도망쳐봐야 다 눈치 채.』
너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 재빨리 튀어나오라는 그 말에 그렇지 않아도 쑤셔대
는 몸이 더 아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이 자신이 집에 없으면 쓸데없이
찾아댄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있을 때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막상 집
에 없으면 사람을 찾아댄다. 그게 짜증이 났다. 자신과는 여러모로 타이밍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순간처럼, 꼭 자신이 모르는 척해주었으면 하는 순간에만 사
람을 기차게 찾아내는 것도 싫었다.
순간 확하니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는 했지만 여기서 더는 숨을 곳도 없기에 느릿
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겨우 몸을 일으키는 정도로도 전신이 비명을 내질
렀다. 마디마디가 쑤셔대고 세게 맞은 어깨와 등이 욱신거리는 걸 참으로 똑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자 막 퇴근을 한 듯 양복을 걸친 채 정자 안으로 들어선 그가 인
상을 쓰는 게 보였다.
그가 인상을 쓰는 걸 본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자 성큼 앞으로 다
가선 그가 자신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불쾌한 듯 혀를 찬다.
『얼굴이 이게 뭐야?』
『맞았어.』
『……누구한테?』
『반 애들이랑 좀 싸웠어.』
말해도 별 상관은 없지만 이미 덮겠다고 한 일인데다 그 문제가 커지면 친구까지
걸려들 듯 해, 별일 아니라는 듯 툭하니 내뱉자 그가 턱에서 손을 떼곤 제일 심하
게 맞은 왼쪽 어깨를 세게 쥔다. 순간 비명이 터졌다.
『아파!』
『……좀 싸운 것 치고는 비명소리가 너무 크군.』
그 말과 함께 왼쪽 어깨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멍이 들지 않았어도 충
분히 아플 정도로 강한 그 악력에 이를 악문 채 항의하듯 그를 바라보자 그가 피
식 웃는다.
『파스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좀 싸운 거라고?』
『그렇게 만지면 누구라도 아파.』
『누구한테 맞은 거지?』
『그냥 싸움이라니까.』
누가 트럭에 깔렸다고 해도 관심도 없을 사람이 갑자기 웬 관심인가 해 그의 손을
밀어내려하자 그의 손이 억센 힘으로 어깨를 비틀기 시작했다. 눈물이 시큰하니
차오를 정도로 강한 그 힘에 비명을 삼킨 채 버티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다.
『누구지?』
『몰라.』
『반 친구들을 모른다고?』
『모르는 놈들이야.』
이쯤 되니 이젠 오기로라도 말하기 싫어 입을 꾹 다물고 버티자 그가 포기한 듯
어깨에서 손을 뗀다. 어깨를 비틀던 그의 손이 떨어져나가자 겨우 고통은 사그라
졌지만 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뭐, 좋아. 학교에 전화하면 그만이니까.』
말과 함께 휙하니 돌아서 당장 핸드폰을 꺼내드는 그의 모습에 놀라 그의 양복자
락을 잡았다.
『하지 마. 그냥 친구들끼리 싸운 거야. 애들 싸움에 어른들이 끼어드는 거 꼴불
견이야.』
『그건 다른 녀석들 얘기지. 볼 거라고는 얼굴뿐인데, 얼굴을 이 꼴로 만들어놓은
걸 봐주라고?』
기가 막힌 그 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결국 얼굴이 문제냐는 말이 목구멍까
지 치밀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말이 입술로 터져나갔다.
『내 얼굴 제대로 본 적이나 있어?』
『말 안 했던가? 네 얼굴은 마음에 든다고.』
아들한테 잘도 그렇게 지껄이는구나 싶어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하지만 괜히 그
의 심기를 거슬렸다 문제가 커질 것 같아 감정을 겨우 내리누르며 그의 옷자락을
놓고는 차분히 말을 건넸다.
『얼굴은 곧 나아. 괜히 쪽 팔리게 문제 일으키지 마. 별일 아냐. 애들끼리 싸운
거야.』
그 말에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던 그가 인상을 쓰며 자신을 내려다본다. 뭔가 굉
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 얼굴에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를 마주보고 있자
그가 작게 중얼거린다.
『역시, 넌 마음에 안 들어.』
『얼굴은 마음에 든다며?』
『얼굴만 마음에 드는 거지. 진짜 너무 건방지고 기가 세. 어떻게 이 집안에서 이
렇게 말을 안 듣는 녀석이 태어날 수 있는 거지?』
『그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지. 내 피 반은 아버지 피니까.』
내 성격 형성 과정이 궁금하다면 그쪽 성격과 이 집안사람들의 성격 분석부터 해
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잠시 말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가 기분이 상한 듯 같은 말을 반복한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어떻게 해야 널 고분고분하게 만들지?』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중얼거림이라는 걸 알았지만 자신만 보면 기를 꺾어 내리
려는 애를 쓰는 그의 태도에 반해 일부러 소리를 내 그의 말에 답해주었다.
『난 건드리지만 않으면 얌전해. 그러니까, 서로 부딪치지 말자고.』
공격적인 그 말에 그가 기가 차다는 듯 웃는 게 보였다. 어이없다는 미소였지만
처음으로 보는 자연스러운 그 미소에 조금 놀라기도 하고, 아주 조금은 가슴이 두
근거리기도 했다. 아무리 그 속이 고약하고 사람 같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가
끔 얼굴만으로도 모든 걸 용서 받는 인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라 쓰게 웃으
며 돌아서는데 그가 다시 머리통을 잡았다. 진짜 머리통을 쥐고 강제로 그를 향해
돌아서게 하는 바람에 놀라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춰온다.
한참은 키 차이가 나던 시절이라 그가 허리를 숙인 상태로도 자신은 목이 떨어져
라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봐야 했다. 바로 눈앞에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심장이
세게 맥박치기 시작했다. 서서히 져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선 그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또 무표정해 괴기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또 왜?』
『누굴 보호하려는 거지?』
그 말에 정곡이 찔려 놀라 시선을 피하자 그가 다시 강제로 시선을 맞춘 뒤 다시
묻는다.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라 몸싸움까지 한 녀석이 굳이 가해자를 입에 담지 않으
려는 거라면 그 중 하나를 보호하려는 거겠지.』
관심도 없는 주제에 기가 막히게 사람의 성격이나 본질을 잘 파악해내는 그에게
이가 갈렸다. 관심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모르는 척 살 것이지, 징그럽게도 사
람의 속내를 잘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이러니까 말하기 싫은 거야. 보호해야 할 사람은 없어.』
『그럼 말해도 되겠네.』
『말하기 싫어. 자존심 문제야.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
『그럼 얼굴을 이렇게 만든 녀석을 대. 어차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전화 한 통이
면 끝나. 그렇게 되면 네가 보호하려고 하는 녀석도 걸려들겠지.』
그 말에 아차 싶었다. 오늘 싸움에 가담한 녀석들이야 전부 어떻게 되든 알 바 아
니지만 상명이가 처벌을 받는 건 곤란하다. 아니, 이 문제가 커지면 그 녀석이 혼
자 다 뒤집어쓸 가능성이 가장 크다. 다른 건 몰라도 그 가해자 놈들은 변호사에
판사 부모님을 대동하고 나타날 테니, 그 녀석만 피보는 거다.
순간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하는 게 가장 빠를까 고민을 하고 있자 그가
피식 웃는다.
『그렇게 미친 듯이 계산하고 머리 굴리지 말고, 솔직하게 대답해. 그게 가장 빠
른 답일 테니까.』
『……우리 반에 네 명 정도 일진이라는 놈들이 있어. 평소엔 조용한데 오늘은 내
가 걸렸어.』
『이름은?』
『박태진, 우지환, 강우현, 임태진.』
정확하게 오늘 자신의 얼굴을 때린 네 녀석의 이름을 말하자 그가 순식간에 그 이
름들을 외운 듯 머리통을 손에 놔준다. 그리곤 천천히 돌아서 걷는 모습에 다급히
그의 뒤를 따르며 그의 팔을 잡았다.
『어떻게 하려고?』
『퇴학 처분 정도면 되겠지.』
『걔네 부모님들 판사에 검사야.』
『그게 뭐?』
판사랑 검사는 어느 동네에 있는 개 이름이냐는 듯한 그의 말투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뭘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예감이 좋
지 않았다.
『진짜 퇴학시키려고?』
『그럼 가짜로 할까?』
『그냥 전학 정도로만 해. 선생님한테도 묻고 넘어간다고 했단 말야.』
치기어린 아이의 자존심과 같지 않은 체면에, 한 번 한 말을 물릴 수는 없어 그의
팔을 잡고 매달리자 그가 걸음을 멈추며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기가 막히
다는 얼굴로 되묻는다.
『누구 마음대로 그걸 덮고 넘어간다는 거지?』
『내 일이니까 내가 결정하는 게 맞잖아. 애들 싸움이야. 이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문제야.』
물론, 이렇게 심하게 싸우는 일은 드물지만 그 정도는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있
을 수 있는 다툼이라고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그의 화를 돋운 듯 그
의 표정이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아차 해 그의 팔을 놓자
그가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서재현,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문제는 없어.
모든 건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넌 내가 정하는 대로만 움직이면 돼. 네 의견도 의지도 생각도 필요 없어. 내가
결정하면 그대로 입 닥치고 얌전히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아무 생각 없이 그가 하는 대로만 따라가라는 그
말에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듯 핏기가 가셨다. 그 순간 느낀 감정을 뭐라고 설명
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건 굴욕에 가까운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쳤어? 내 문제를 왜 아버지가 결정을 해?』
『아버지니까. 불만 있으면 네 이름으로 핸드폰이라도 만들 수 있게 된 다음에 얘
기해.』
그건 억지였다. 어떻게 봐도 억지다.
『말이 안 되잖아.』
『말은 되지. 이 별채를 들락거리는 이상 널 내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어디서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냐고 화를 내자 어느새 어두워진 후
원 내에서 다시 걸음을 옮기며 느긋하게 답해준다.
『이 별채에 있는 건 내 ‘물건’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유일하게 이 건물을 허락
한 게 너고. 그걸로 답은 됐겠지?』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었다. 다만 ‘물건’이라는 말에만 화가 나 그에게
고함을 내질렀고, 그는 그걸 무시한 채 사라져버려 따져 물을 여유가 없었다. 게
다가 그 다음 날 갑자기 이사회가 소집되더니 자신이 말한 그 네 명이 갑작스레
유학을 빙자한 퇴학처분을 받고는 일주일 만에 학교 안에서 사라졌다는 데에 놀라
그의 말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그때는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에 놀라
워하며, 갑작스러운 그 네 명의 유학 소식에 학교 전체에 자신에 대한 갖가지 기
괴한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해 그를 방어하는 것만도 힘겨워 그의 말을 신경 쓸 정
신이 없었다.
그러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근 한참이 지난 후였다. 우연히 이 별채의
용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된 후 설마 하는 생각에 넌지시 그에게 물었었다. 이 건
물을 왜 없애려고 했냐고. 그러자 그가 답했다.
『필요 없으니까.』
너무나 짤막한 그 말에 의아한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웬일로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더해주었다.
『내 여자들이 그 집에 들어와 살 일은 없을 테니까. 난 여자들은 집안으로 들이
지 않는다는 주의거든.』
그래서 그럼 왜 굳이 별채를 그냥 두냐고 하니 그는 웃으며 답했다.
『네가 좋아하니까.』
라고.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순간, 이 후원이 껄끄러워져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렇다고 아예 오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확실히 그 전보다는 횟수가 줄어들 수밖
에 없었다. 아무리 질 나쁜 농담이라도 그런 말을 듣고도 이곳을 오간다는 건 그
의 그 저질 농담을 긍정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 게 뻔해, 될 수 있는 한 걸음
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발길을 끊을 수 없던 건, 이곳이 너무 아름다운 탓이었다
. 그리고 이곳에 있으면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던 탓이었다.
지금도 역시나 이곳에 나오니 답답하고 울적한 기분은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해 조
용한 후원을 돌아보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던 오래 전 기억
에 씁쓸한 미소가 감돈다.
그러고 보니 그와는 이곳에서 많이 마주쳤었다. 원하던 바는 아니지만 이곳에 드
나들 수 있는 건 그와 자신뿐이니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뿐이었고, 이상하게도 이
곳에서 그와 자주 마주치긴 했었다. 그때마다 싸우고 험악하게 굴다 각자 돌아가
곤 했지만 압도적으로 그와의 추억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새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왜 그렇게나 자신의 기를 꺾어
내리려고 했던 걸까? 물론, 어린 녀석이 툭하면 바락바락 대들고 화가 나면 소리
를 질러댔으니 그 성격에 오죽 거슬렸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답지 않
은 짓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눈앞에서 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사람이 왜 그
렇게까지 굳이 자신을 찾아다니며 기를 꺾어내려 했던 걸까?
『네가 말을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제대로 무릎 꿇고 빌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그래,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그를 거부하고 거절하거나 반항하는 걸 못 참았다
. 아니, 자신뿐 아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의 권위에 도전하는 건 참지 못한다. 그
건, 돌아가실 할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다. 차이라면 돌아가신 조부께서는 그나마
인간적인 분이라 싫어하는 사람들은 아예 보질 않았지만 그 사람은 거슬리는 상대
일수록 옆에 묶어두고 어떻게든 굴복시키든가 피를 말려 죽이려는 비인간적인 악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조차도 즐길 줄 아는 본인에게만은 아주 편리한 성
격과 뇌를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걸 모르고 그저 그에게 절절 매는 가족들을 비웃으며 마음껏 반
항했지만 그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게 된 후로는 나름 그에게 맞추려 노력했었
다. 물론, 이미 너무 늦어 그것도 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노력은 했었다.
자신이라고 그와 싸우는 게 좋았던 게 아니다.
여섯 살 어린 시절, 아주 잠깐 스쳐간 그가 너무 괴물 같은 인상으로 남아 두려워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꿈을 꾸던 때가 있었다. 늘 토요일에 치러지던 초등학교 운
동회에 친구들의 아버지가 사진기나 캠코더를 들고 오면 내가 정상적으로 태어났
다면 아버지가 저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곤 했었다. 늘 자신의 학교 행
사에는 형 같은 삼촌이 대신 왔기에 가끔 친구들의 아버지들이 사진을 찍어주거나
같이 식사를 하자고 챙겨주기도 하고 대강 사정 이야기를 하면 안쓰럽다는 듯 바
라보며 어깨를 두드려 주면 우리 아버지도 이랬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환상을 키워갔었다. 그래서 그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어느 정도는 기대를 하
고 있었다. 워낙에 자신의 머릿속에 남은 그의 귀신같은 이미지가 강하고 또 다시
만난 그는 너무나 젊고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미모라 자신의 머릿속에 있던 이상
적인 아버지 상을 그에게 덧씌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부질없는 희망
은 가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버지니까, 그리고 난 아들이니까. 아무리 그가 어린 시절에 낳아 자신이
열다섯이 될 때까지는 남처럼 살아왔다 해도 아침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핏줄은
땡긴다.’라는 유치한 감상을 바랐었다. 모르고 만나도 눈이 가고 어쩐지 기억에
남고 계속해서 생각나고 챙겨주고 싶고, 대단한 일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건방지게 굴거나 나쁜 짓을 하면 화를 내며 꾸짖으면서도 괜히 아파하고. 지극히
상식적이고 드라마나 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상황들을 꿈꾸며 그의 주변을 맴돌
기도 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남은 건 그에 대한 환멸과 증오, 그리고 미련스러운
감상에 대한 냉소뿐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감이 커질수록 그에게 끌리는 마음 역시 커져만 갔다. 어쩌면
그건 애증이었을지도 모른다. 얼굴을 보면 화가 나고 싫고 미운데, 이상하게도 자
꾸만 그에 대해서만 떠올리고 생각하고 그에게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지금도 마찬
가지로, 정작 중요한 기억에 대한 것들을 모두 내던진 채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해도, 아무리 몸부림을 치며 무시하려 해도 그를 떨쳐낼 수가 없다. 어쩌
면 그를 향한 복잡한 감정이 너무 커 다른 감정들은 모두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른
다.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나 소중하고 반짝거리는 사람들에 대한
작은 애정과 신뢰, 그리고 찰나의 순간 그치는 작은 감동이나 슬픔, 혹은 기쁨 같
은 것들 모두가 그에 대한 격렬한 감정 아래로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를 자신의 인생에서 밀어내고 싶었다. 그를 향한 증오와 기대, 배신 그
리고 상처들이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커 아예 그를 자신이 사는 테두리 밖으로
밀어내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때만을 기다렸다. 그의 영향
력에 벗어날 수 있고 더는 그와의 연결점이 사라지는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재현은 허탈한 듯 웃으며 어느새 해가 진 후원의 고요한
연못을 바라봤다. 여전히 조용히,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 그대로의 풍경으로 멈춰
있는 연못을 바라보자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면 이 세상 모든 게 바뀔 줄 알았다. 성인이 되는 그날로 당당하게 이
집안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게 될 줄 알았다.
무작정, 아무 생각도 없이 성인이 되면 천지가 요동이라도 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이 상태였다. 자신은 옴싹달싹 못한 채 지금도 여전히 그의 비호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 집안에서도 그의 한 마디가 없으면 밥을 먹는 것조
차 마음대로 할 수 없어, 조마조마해하며 그의 눈치를 살피고 그의 허락을 구해야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은 생각할 것도 고민할 것도 없이 그저 그가 결정하는
대로만 따라가고 있었다.
“엿 같네, 진짜.”
그렇게 자조하며 한숨을 내뱉고는 잠시 격해진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는 이번엔
차분히, 머리를 정리해가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온 뒤부터 모든 것들이 급류를 탄
듯 빠르게 흘러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대책을 세울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대로 상황
이 최악으로 치달아갈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차분하게 머릿속을 정리해갔다.
그와 자신의 관계는 이해했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그와 어떻게 그런 관계까지
왔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유일하게 떠오른 그 선명한 기억을 더는 아니라
고 부정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가족 모두가 아는 일이라면 더 이상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해봤자 자신의 꼴만 우스워진다. 어떤 생각이었든 그건 자신이
행한 일이고 그건 자신이 잊는다고 잊혀지는 게 아니다. 지난 2년 간의 자신도 분
명 자신의 일부이므로 책임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되돌릴 수도 지워버릴
수도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건 자신이 감당할 몫이었다. 그러니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 상태가 안 좋았다는 것도 일단은 납득한다. 그와 그런 관계까
지 갔다면 미치지 않고는 버티지 못했을 테니 그것도 받아들였다. 삼촌의 죽음 역
시 이미 실감하고 있고, 재원과 재영이 자신을 거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
렇게까지 했는데도 자신을 따른다면 그건 그 아이들도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니 충
분히 그 아이들을 이해한다.
그렇게 자신이 아는 팩트들은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다. 서재현, 21살, 제어계측공
학과 2학년 휴학 중, 갑자기 2년간의 기억은 사라진 채이지만 확실히 미쳤었고 지
금도 반쯤은 정상은 아닌 인간의 과거는 그렇게 짤막하게 정리가 되었다.
이제 남은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자신에게 뭘 원하고 있느냐 하는 거였다. 대체 그
가 뭘 바라고 주변을 휘젓고 있는지부터 파악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거라면 내줘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재현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패닉을
일으킬 정도로 큰 문제였던, 그와의 관계나 삼촌의 자살, 그리고 동생들과의 관계
까지도 그 남자는 단 하루 만에 별거 아닌 일로 만들어버렸다. 이젠 그런 그에게
감사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가 돌아온 뒤 하도 사방팔방에서 일
을 터트리다 보니 그걸 막느라 다른 고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늘
그랬었다. 아무리 큰 고민이 있어도,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다른 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방식이든지 사람의 혼을 빼놓는 데에만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뭐든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
까지도, 그 남자는 멋대로 움직여가고 있었다.
“오밤 중에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정자의 바닥을 내려다보며 씁쓸히 웃고 있던 중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도 들지 않
은 채 답해주었다.
“생각.”
“……무슨 생각?”
“당신 생각.”
그렇게 말한 뒤 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정자의 입구에 기대선 그
를 보며 피식 웃었다.
“만족해, 이제?”
원대로 당신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다며 재현은 어두워진 정원에 선 그를 바라봤
다. 여전히 덥지만 그래도 제법 시원해진 밤,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든 진한 회색
의 셔츠에 그 색과 맞는 면바지를 걸친 뒤 소매를 접어올린 채 팔짱을 끼고 서 있
는 그는 도저히 그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젊기도 하지만 양복이 아닌
사복을 입으면 기껏해야 자신의 형뻘로 보이는 남자였다.
차라리 그가 아예 모르는 남이라면 이 마음속의 폭풍이 조금이나마 편했을까, 아
예 전혀 모르는 남남으로 만났더라면 그와 자신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
면 자신도 그를 순수하게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를 바
라보고 있자 그가 정자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다.
“답은 나왔어?”
조요한 후원의 분위기 탓인지 아니면 자신의 우울을 그가 눈치를 챘는지 그의 말
투 역시 부드럽다. 아니 그러고 보면 말투나 목소리만은 세상 누구보다도 우아하
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날을 세울 때 외에는 말이다.
“그 전에 당신이 한 가지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뭘?”
“왜 나랑…… 아니, 왜 나를 안은 거야?”
“하고 싶으니까.”
그 외엔 다른 이유가 뭐가 있냐는 듯한 그의 답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새삼 통감했
다. 저 남자에게는 이런 질문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자신이 멍
청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왜 나랑 하고 싶은데? 더 예쁜 남자, 여자들 널려 있잖아. 굳이 말 안 듣고 마
음에 안 드는 아들이랑 잘 필요가 있었어?”
“패고 무시하는 걸로도 말을 안 들으니, 처음엔 네게 세상을 좀 알려주려고 한
거였지. 너 같은 녀석을 길들이는 데에는 윽박지르고 패는 것보다는 그쪽이 잘 먹
히니까.”
딱 그다운 그 답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음에 안 들고 어떻게든 굴복시키
고 싶은데 죽어도 꺾이질 않으니 다른 수를 썼다, 라니 너무나 그다운 답이다. 하
지만 어쩐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저릿해왔다. 심장 안쪽을 쿡 찔린 듯
아리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 상처 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길들여졌어?”
“아니, 전혀. 그래서 더 열 받았었지.”
“그럼 한 번이면 충분한 거잖아. 그걸로도 안 됐으면 적당히 포기하지 그랬어?”
“안 되면 더 하고 싶어지니까. 그리고…….”
거기까지 말한 뒤 한 걸음 더 다가와 선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손에 쥐었다
. 그 손에 이끌리듯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바로 앞에 선 그가 담담한 시선
을 던져온다.
“……그 뒤는 네가 생각해내. 네가 날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 잘 기억해내.”
“당신은 날 사랑했어?”
“그것도 네가 기억해내. 이 이상 가르쳐줄 생각은 없으니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쥐어짜내.”
“쥐어짜낸다고 생각난다면 진즉에 기억났겠지. 해도 안 되니까 병신처럼 이러고
앉아 있는 거잖아.”
“……그 말도 못 믿겠다면?”
“믿기 싫으면 믿지 마. 안 믿는다고 내 기억이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어둠 속에서 깊게 가라앉은, 유난히도 깊은 청색의 그 눈을 흔들림 없이 응시하고
있자 그가 잠시 후 엉뚱한 질문을 내뱉는다.
“나한테 진심이 뭔지 아냐고 물었지?”
갑작스러운 그 말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라는 생각을 하던 중 문득 그가 돌아왔
을 때 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래, 그에게 그렇게 묻긴 했었다. 그런 걸 모르
는 인간이라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있냐는 말을 돌려 그렇게 물었었다
.
“그게 왜?”
“그 질문, 그대로 네게 묻지. 네 행동에 단 한 순간이라도 진심이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말에 절로 인상이 찡그러졌다. 대체 그 말의 저의를 알
수 없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빙그레 웃는다. 묘한 느낌의 미소였다. 즐거운
것도 같고 또 조금은 슬퍼 보이는 것도 같은 그 미소에 서둘러 물었다.
“내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답은 네가 기억해내. 난 이 이상은 알려줄 생각이 없으니까.”
“그럼, 그때까지라도 시간을 줘. 우리 문제니까, 우리 둘이 해결해.”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네 기억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던 그 순간부터 난 널 피
말려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널 다시 미치게 할까,
어떻게 해야 피가 거꾸로 솟아 돌아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오직 그 생각만
했었어. 그래, 솔직하게 말하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원하는 건 단 하나도 안 해줄 테니까.”
차분하던 그의 눈동자 위로 새파란 빛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파
랗게 일렁이는 그건 살기였다. 악의와 증오와 살의였다.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숨통이 막혀오는 듯한 그 시선에 숨을 멈추고 있자 그가 얼굴에서 손을
떼곤 돌아선다. 갑작스러운 그의 공격성에 두렵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마음
이 다급했다. 뭔가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더 있었다. 분명히, 그와 자신 사이에
뭔가 다른 게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불길한 그 예감에 자리에서 일어서 재빨리 그를 막아섰다.
“잠깐……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건데?”
초조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질문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다.
“알고 싶어?”
“알고 싶어.”
거침없는 그 답에 그가 웃는다. 여전히 눈은 냉랭했지만 입술 끝만 올려 웃는 기
괴한 미소였다. 그 묘한 느낌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조용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내 답을 원한다면 침대로 들어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온, 지나치게 빠른 그 답에 일순 표정이 굳었다.
“……그건 못 한다고 했잖아.”
“뭐든 원하는 게 있으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야. 못 하겠다면, 네가
생각해.”
그렇게 말한 뒤 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환하게 불이 밝혀진 별채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또다시 홀로 정자에 남겨진 재현은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어차피 한 번 한 건 두 번이나 세 번이
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차라리 그의 유혹에 이끌려갈까 하는 충동과 절대 그것만
은 안 된다는 이성이 미친 듯이 싸워대고 있었다. 하지만 충동은 강하고 이성은
얄팍했다.
아니, 어쩌면 단순히 그의 유혹에 진 충동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안 된
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지독한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전쟁이 난 듯 시끄러웠다.
어둠이 후원 전체에 깊이 내려앉아 있었다. 꽤나 시간이 흐른 듯 공기는 제법 서
늘해졌고 간혹 부는 잔잔한 바람에 연못의 수면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빛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 흐름에 따라 후원
도 시시각각 색채와 형태가 미묘하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재현만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린 듯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풍경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숨도 내쉬지 않
는 듯 조금의 움직임도 흔들림도 없었지만 그의 내부는 끝나지 않은 전쟁을 치르
는 듯 격렬했다.
수많은 생각들이 재현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다시 떠오르며 느슨하게 흩날린다. 그러다 한순간 또다시 휘몰아쳐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또 가라앉는다. 다시 찾아든 고요에 드디어 끝인가 하고 있으면 또다시
정신없는 광풍이 몰아쳐온다.
생각은 그렇게, 한 여름의 태풍처럼 쉽사리 멎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를 흔들고 감
정을 극과 극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 장렬할 정도로 격한 흐름에 긴 전투를
치른 듯 재현은 지치고 지친 채였다. 너무 피곤하고 진력이 나 그만 백기를 들려
해도 도저히 그 전쟁을 멈출 수가 없다. 두 손을 들고 물러나는 순간 모든 게 끝
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예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이 전쟁에서 패하는 순간,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아무 것도 변한 것
없이,
그건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아무리 미치도록 그를 사랑했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적어도 그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 상황을 종결시킬 가장 현명하고 현실적인 해결
책은 기억은 사라진 채로 두고 시끄러운 것들을 모르는 척 조용히 살아가는 것뿐
이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그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그와의 관계를 인정
하고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그 관계를 현실로 이어간다는 건 지금의 자신으로
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그에게 끌리는 건 인정한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에게 흔들렸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리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지금
은 그에게 처음부터 끌렸다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 끌림이라는 게 자신이 갖고 있
는 상식과 이성, 그리고 자신의 인생 전체를 포기할 정도로 광적인 사랑이냐, 묻
는다면 그건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아니다.
그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피부가 스치거나 가까워지면 호흡이 가빠지고 몸 안
이 욱신거리는 욕망을 느끼기는 하지만, 거기까지다. 딱 그 정도였다. 그건 성적
이끌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끌림이라는 게 사랑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한 달 전의 자신은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자신에게는 아니다.
그 정도로 간절하게,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좋을 정도로 그를 원하지는 않는다.
물론, 아버지에게 그런 흥분을 느낀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인간실격이기는 하지만
그 욕망을 드러내고 그에 빠져드는 건 안 된다. 단지 느끼는 것과 그걸 행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누군가에게 살의를 느끼는 건 죄가 아니지만 직접 살인을 한
다면 그건 죄가 되는 거니까.
이미 한 번 선을 넘겼다 해도 그건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은 안 된다. 그러니까
, 그가 어떤 조건을 내건다 해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순간 스쳐가듯 보인 그의 눈빛 때문
이었다. 깊고 진한 그의 눈동자가 상처 받은 듯 일렁거리는 순간의 그 느낌이 자
꾸만 자신을 잡아끌고 있었다.
대체 자신이 그에게 무슨 짓을 했던 걸까, 하고 떠올려 봐도 짐작 가는 바가 없다
. 그와 자신의 관계는 늘 그가 가해자였고 자신은 피해자였다. 일방적으로 몰아치
는 건 그였고 자신은 늘 코너에 몰려 살기 위해 그에게 대항하며 필사적으로 몸부
림을 쳐야 했다. 그는 늘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존재였고, 자신은 늘 그런 그에
게 상처만 받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자신이 그를 상처를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눈
이 자꾸만 마음을 뒤흔들어온다. 그답지 않게 연약하고 슬퍼 보이던 그 눈이 떠올
라, 자꾸만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려왔다.
왜인지, 그 눈이 잊혀지질 않았다.
제법 서늘해진 새벽, 해가 뜰 시간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집안에는 별채의 손님방
을 정리해놨다는 아주머니의 메모가 남아 있었다. 원래는 쓰지 않는 방이지만 자
신이 응접실에서 자는 걸 보고 정리해놓은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침
실과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복도 끝의 방으로 가 침대에 누워 그대로 눈을 감았지
만 역시나 잠이 오질 않았다.
이 집안의 저 끝에 있는 침실에 있는 누군가 때문에, 쉽사리 잠에 빠질 수가 없었
다.
시끌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에 선잠
에서 깬 재현은 인상을 쓰며 문 쪽을 바라봤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했
지만 소리가 요란하다. 문 너머의 복도에서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고
, 창가 쪽의 후원으로는 위잉거리는 요란한 기계 소리들이 울려왔다.
서쪽 별채는 조용한 곳이었다. 조용하다 못해 사람이 폐가처럼 을씨년스러울 때도
있었다. 이 건물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그와 자신, 그리고 집에서 일을 봐주시
는 아주머니와 심부름을 하는 서진과 서혜선 정도였다. 덕분에 이 건물 근처로는
사람들이 아예 얼씬하지 않아, 열흘에 한 번 후원을 관리하는 조경 전문가들이 올
때 외에는 늘 적막했다. 그들도 늘 낮에 볼일만 보고 떠나기에, 인기척이라는 걸
거의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밖이 너무 시끄럽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 방에서 나오자 긴 복도 끝 쪽의
침실로 박스와 옷걸이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눈앞에서 움직이는 대
량의 짐에 놀라 엉망이 된 머리를 쓸어 넘기고 있자 침실 쪽으로 나르는 짐들을
확인하던 서혜선이 자신을 보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다. 녀의 인사에 이쪽도 살
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현관에서부터 정신없이 옮겨지는 짐들을 피해 긴 복도를
걸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 짐들은 뭐예요?”
딱 봐도 양복으로 보이는 옷들이 줄줄이 박스와 한지로 만든 고급스러운 팩에 싸
여 침실로 들어가는 걸 보곤 그렇게 묻자 그녀가 침실 안쪽에서 옷을 정리하던 아
주머니께 ‘그건 오른쪽 장에 넣으세요.’라고 하곤 자신을 돌아본다.
“못 들었어? 사장님께서 오늘 아파트에 있던 짐 다 옮기라고 하셨는데. 이서진
씨가 바빠서 내가 대신 짐 옮기는 중이야. 별채엔 드레스 룸이 따로 없어서 급한
대로 지금 입을 옷들만 꺼내놓고 나머지 옷들은 안쪽 방 하나에 걸어놓을 테니까,
본채 리모델링 끝나면 옮기면 돼. 이제 인테리어만 끝나면 되니까 며칠 안에 끝날
거야. 사모님이 골라두신 가구들이 들어오는 데에 좀 오래 걸리는 거니까, 가구만
들어오면 돼.”
보고를 하듯 자세한 그녀의 설명에 순간 “아.”하는 멍청한 감탄사가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분명 어제 서진과 통화를 했을 때 아파트를 처분하고 본채로 들어가
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하지만 다른 일들이 하도 커 그건 별거 아니
라고 생각하고 넘겼는데, 막상 눈앞에 닥치자 막막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본
가도 아니라 본채로 옮긴다고 했었다. 리모델링 중이라고 하니 정리가 되는 대로
본채 2층으로 방을 옮기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싫다. 본채로 돌아가는 건 싫다
.
목덜미를 쓸고 지나가는 한기에 살짝 몸을 떠는 사이 모서리들을 감싼 진열장을
옮기는 남자들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 그녀가 침실 안쪽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
어간다.
“중간하고 왼쪽 옷장은 사장님 용으로 정리하는 중이야. 왼쪽 끝은 양복들이고,
중간은 평상복들. 넥타이랑 벨트랑 악세사리들은 진열장을 통째로 옮겨놓기로 했
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넥타이핀이랑 커프스는 따로 내가 보관해서 옮기는 중이
고. 넌 오른쪽 옷장을 쓰면 돼. 여섯 자 정도면 되지?”
하나하나 설명을 하며 자신의 이해를 구하는 그녀의 친절은 고마웠지만 그 전에
문제가 있었다.
“저기, 제 옷들까지 이 방으로 옮길 필요 없는데요.”
“하지만 사장님께서 어차피 같이 쓸 거라고…….”
툭하니 말을 내뱉다 실수를 한 듯 아차 하는 그녀의 얼굴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별채 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는 말을 못 하시는 데다 워낙에 조용해 의식할 일이
없었는데, 말을 하는 사람과 마주하자 대번에 그들이 그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
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티를 내서는 안 되는데, 이 사람들은 아직 자신이
그 사실을 아는 줄 모르니까 자신 역시 모른 척해야 하는데 절로 굳어지는 얼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수치심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이 사람들이 대체 속으로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
까, 하는 공포감에 얼굴이 달아올라 괜히 들어오는 짐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
가 머뭇거리다 다시 차분해진 얼굴로 변명 같은 말을 이어간다.
“별채에는 다른 침실이 없으니까, 우선 옷은 여기로 옮기라고 지시하셨어. 책은
어떻게 할래? 사장님 서재 책들은 본채 서재로 옮기는 중인데.”
정신이 없어서 말실수를 했다 싶었는지 그녀가 당황한 듯 화제를 돌리는 모습에
재현도 적당히 말을 맞췄다.
“그냥, 별채 서재에 놔주세요.”
“그래.”
거기까지 말한 뒤 돌아서려는데 그녀가 다시 자신을 잡는다.
“아, 재현아.”
그 부름에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집안일 봐주시던 아주머니가 그러시는데 학교에서 너 찾는 전화가 여러 번 왔었
대.”
“학교에서요?”
“응. 과방에 네 물건도 남아 있고, 지금 도서관에 미납 중인 책이 있어서 휴학
처리 중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던데.”
그런 이야기는 또 처음이라 재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다 처리된 거 아니었어요?”
“일단 서류는 처리된 거 같은데 미납 도서를 반납해야 제대로 정리가 된대. 이서
진 씨한테 전화하니 이서진 씨는 그런 소식 못 들었다고 해서. 서재 정리하는 중
에 찾아봤는데 대출 중인 도서는 없던데, 누구 빌려주거나 잃어버린 거 아냐?”
그렇게 물어봤자 자신에게 그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택배를
찾아온다는 것도 깜빡했었다.
“그럼 제가 학교로 가볼게요. 가서 확인하고 새 책으로 사야 하면 정리할게요.”
“그럴래?”
“네. 저 좀 씻고 나올게요.”
더는 그녀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돌아서 계속 들어오는 짐을 피해 복도 쪽
에 있는 욕실로 들어섰다.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물을 틀고는 찬물에 세수를 했다.
하지만 몇 번을 찬물을 뒤집어써도 화끈거리는 얼굴의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할머니나 재원, 그리고 서진이야 그렇다 쳐도 자신과는 데면데면한 혜선까지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참담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단속을 한다 해도 사람들의 입이라는 게 쉽사리 닫히지 않는 이상, 그녀가
알 정도라면 이미 바깥으로도 소문이 퍼졌을 수도 있다. 아직은 자신의 주변 사람
들은 모르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알 수도 있다. 그렇게까지 티를 내고 다
닌다면 모를 수가 없다.
아주 가까운 사람도 아닌 자신의 이름과 얼굴만 아는 사람들이 이런 치부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두려움과 수치심이라는 끔
찍한 조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생각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었다.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 지금 이 상황
으로부터, 그리고 이 집으로부터, 자신의 현실로부터 멀리 멀리로 도망치고 싶었
다. 도망칠 수 없다면 영원히 사라지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
다.
얼굴에 감각이 없을 때까지 찬물로 세수를 한 재현은 아직 정리 중엔 침실 쪽에서
옷을 챙겨들고 나와 손님방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건물을 나섰다. 집을 나가려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챙길 정신도 없었다. 그냥 도망
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차 별채에서 도망치듯 나와 빠른 걸음으로 대문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들어오면 얼마 걸리지 않지만 걸어서는 꽤 걸리는 거리라 빠르게 걸음
을 옮겨갔다. 초가을의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더위를 느낄 만한 여유
도 없어 거의 달리듯 정원을 가로질러 철문을 나섰다. 무거운 철문을 나와 문을
닫는 순간 겨우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기도를 누르고 있던 뭔가가 사라진 듯
한 느낌에 무더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다시 큰길가를 향해 가는데 바지 주머
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왔다. 혹시나 해 보니, 역시나 서진이었다.
하긴 지금 이 번호를 아는 건 서진과 그 사람뿐일 것이다. 번호가 바뀐 지 겨우
하루 된 데다 자신도 모르는 번호를 다른 사람들이 알 리가 없다. 귀신 같이 집을
나오자마자 전화를 한 걸 보니 문이 열리는 걸 확인한 누군가가 서진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귀찮아 받을까 말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전화를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할 사람이라, 결국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어디야?」
“……알면서 전화한 거 아냐? 대문이 안쪽에서 열리니 보안 카메라로 나 나가는
거 보고 누가 전화한 거 알아.”
「그래, 맞아. 그런데 이 더위에 어딜 가? 나갈 거면 얘기를 하지.」
얘기를 하면 당연히 줄줄이 사람을 붙여 보낼 게 뻔해 일부러 혼자 나온 거였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얘기를 하면 지금 당장 사람들이 뒤에서 뛰어나올 것 같아 조
금 목소리를 억누른 채 담담히 답했다.
“학교에 가는 길이야.”
「학교에는 왜?」
“미반납 도서가 있대. 그것 때문에 휴학처리가 안 된다고 아파트로 전화 왔었다
며?”
「내가 확인했어. 도서관 쪽에 확인하니 그런 거 없대. 네 성질에 미반납 도서 같
은 걸 둘 리가 없잖아. 실수로 반납하지 못한 게 있어도 그런 건 휴학 신청할 때
먼저 조회대. 내가 다 일일이 체크하고 서류 처리 된 것까지 전부 확인했어. 학과
사무실에서 다른 체크를 잘못했던 거야.」
도저히 반론을 펼칠 수 없게 만드는 그 말에 다시 숨이 턱 막혀오는 듯했다. 겨우
저 집에서 도망쳤다 안심했더니 이젠 전화로까지 사람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 사람도 서진도, 조금의 틈을 주지 않고 사람을 몰아친다. 쥐를 몰아도 숨 쉴
틈은 주고 몰아야 하는데 이 사람들에게는 자비가 없다.
“짐도 찾아야 돼. 과방에 있대.”
「네 짐도 내가 전부 챙겨왔어. 그러니까 이 더위에 나갈 필요 없어.」
지금 그대로 다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가라는 그의 명령에 가까운 설득에 툭하니
말이 터져나갔다.
“나 정신병자 아냐.”
날카로운 그 말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와 자신 사
이로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따끔거리는 그 분위기에 서진이 한숨을 내쉰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결국 그런 말이야. 경찰서나 생전 듣도보도 못한 사람한테 연락 받고 나 데리러
오기 싫은 거잖아. 그거라면 걱정 마. 나 지금은 괜찮아. 기억이 없는 거지 미친
건 아냐.”
「그런 생각한 적 없어. 그냥 날이 더워서 걱정하는 거야.」
“더워서 다시 미치기라도 할까 봐?”
계속해서 날이 선 말들을 내뱉어내자 서진의 목소리 역시 조금 날카로워진다.
「너, 어제부터 나한테 좀 날카롭게 구는 것 같다.」
“맞아. 하지만 지금 형도 이상한 거 알지? 이쯤 되면 걱정과 보호가 아니라 감시
와 감금이야.”
그 말에는 서진도 답할 말이 없는지 뚝하니 입을 다문다. 그도 방금 전 그가 과했
다는 건 확실히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 입으로 나 지금은 괜찮다고 말했잖아. 그래놓고 잠깐 외출하는 데에도 전화
하고 확인하고 꼼짝도 못 하게 하려고 하는 거 이상해. 어디 가서 사고치거나 갑
자기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
「……나갈 거면 차 보내줄게. 오늘 더워.」
지금까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기어이 차를 딸려 보내겠다는 그 말에 신경이 곤
두선다.
“나 좀 그냥 놔둬. 어디로 안 사라질 테니, 잠깐 외출 정도는 마음대로 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걱정되면 위치 추적해. 핸드폰 위치 추적 되게 해놨을 거잖아. 형
명의니까.”
자신도 모르게 나간 히스테리컬한 반응에 도리어 자신이 놀라 말을 멈추기는 했지
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나간 후였다. 실수를 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게 마음
에 없던 말은 아니라 그냐 조용히 있자 잠시 후 서진이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쉰 뒤
, 언제나와 같이 담담한 투로 말을 건넨다.
「무슨 일 있었구나.」
질문이 아닌 확신에 찬 그 말에 있는 그대로 답해주었다.
“일이 너무 많아. 그래서, 지금 도망치는 거야.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오려고. 나
도 숨 쉴 틈은 있어야 살잖아. 저 집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조금 격해진 감정에 인상을 쓴 채 거칠게 말을 토해내자 서진이 알겠다는 듯 답해
온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힘들면 전화해.
곧장 차 보내줄게.」
“알았어.”
그것도 싫다고 하면 결국 그의 뒤에 있는 남자가 난리를 칠 게 뻔해 순순히 답하
자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긴다. 겨우 1분 정도 되는 통화였지만 이 무더
위보다도 그와의 짧은 통화에 더 지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한여름보다도 더한 무더위에 갑작스러운 피로가 몰려와 잠시 눈앞이 흔들려 질끈
걸음을 멈춘 채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기증이 멈추지 않아,
길게 이어진 담을 손으로 짚고는 숨을 고르다 고개를 들자 겨우 앞이 제대로 보이
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부터 그제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게 생각났다. 속이 비니 당연
히 기력이 딸려 어지럼증이 인 듯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 길바닥에서 쓰러진다 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근처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다고 학교에 도착해 한 번 왔던 공대 건
물을 찾았을 때엔 더위가 최고에 이른 시간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햇살에
도 건물은 어쩐지 우중충한 회색빛을 띤 채였다. 낡고 오래돼 보이는 건물의 외관
은 두 번째 보는 거라 해도 역시나 별 감상이 들지 않았다. 혹시나 해 들른 도서
관이 새로 지은 듯 번쩍거리던 것과 달리 학교 내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한 건물
은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그 사람 외에는 이렇게 깨끗하게 기억을 지운 걸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게 조금 힘겹게 느껴졌다. 오늘 또 전혀 모르는 이들이 가
득 찬 과방 안에서 그들을 살피며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걸 생각하니 그냥 가버릴
까 하는 충동이 들기도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
결국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전에 왔던 기억을 더듬어 308호를 찾아 걸음을 옮겨갔다. 긴 복도를 지
나 다시 계단으로 올라서 3층 안쪽 깊숙이 들어서자 308호라는 숫자가 보였다.
저번에는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다른 학생들이 없어 그 남자와 만나고 도망쳤
지만 오늘은 꽤 많은 학생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들 하나하나를 만나 그들이 누
구인지 파악을 하려면 신경이 문드러질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
을 굳게 먹고 308호 앞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 가볍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곧 안
쪽에서 “들어오세요.”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에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채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
다.
“이야, 서재현. 웬일이냐?”
남자 넷과 여자 둘. 좁은 과방 안에 모여 있다 자신의 등장에 조금 놀란 듯, 그리
고 의외지만 반갑다는 듯 자신을 맞이하는 사람들 중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
가 다가서 말을 건네 왔다. 낯선 그 얼굴과 음성에 그에 대해 떠올려 보려 했지만
역시나 전혀 기억나는 바가 없었다. 그저 눈치로 말투나 얼굴로 보아 자신과 비슷
한 또래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어색하게 답할 뿐이다.
“아, 택배 가져가라고 해서…….”
주어는 뺀 채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그가 기억났다는 듯 “아.”라고 작게 중얼거
리며 난감한 얼굴을 한다.
“아, 그 택배. 너랑 하도 연락이 안 돼서 호경이가 주원 형한테 맡겼는데?”
주원, 주원이 누구더라, 라고 떠올리다 강제로 암기했던 다이어리의 연락처 중에
‘한주원 선배’라는 이름이 있던 게 떠올랐다.
“어…… 주원 선배가 왜?”
“호경이가 계속 네가 준 새 번호로 전화했는데 갑자기 그 번호도 없는 번호라고
뜨고, 메신저에도 안 보여서 언제 연락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니까 주원 형이 과
사에 알아본다고 가져갔어. 성희 누나가 주원 형 동기잖아. 누나한테 부탁해서 집
주소 확인하고 연락해본다고 하던데.”
그럼 집으로 온 전화가 한주원이라는 사람이 했던 전화인가 싶어 알겠다는 듯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럼, 주원 선배 연락처 좀 알 수 있어? 나 택배 받아가려고 왔는데.”
전에 쓰던 핸드폰은 못 쓰게 돼서 연락처도 못 건졌다는 변명을 더하자 그가 알겠
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잠깐만. 그런데, 얼굴 괜찮아 보인다? 저번에 너 봤다는 애들이 얼굴 엄
청 창백하더라고 걱정하던데.”
자기 가방을 뒤져 핸드폰을 찾고 있는 녀석의 말에 문득 지난 번의 기억이 떠올랐
다. 며칠 전 학교에 들렀을 때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던 사람들이 몇 있었으니 그
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그냥, 그때 좀 속이 안 좋아져서.”
구구절절 설명을 하기도 귀찮아 간단히 답하자 뒤에서 자신을 힐끔거리던 사람들
중 좀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나선다.
“어디가 안 좋아서 휴학까지 한 건데? 많이 안 좋아?”
“특별히 어디가 안 좋은 건 아닌데…… 교통사고 후유증이 좀 있어서…….”
상대가 정확히 동기인지 선배인지 알 수 없어, 존대를 하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반
말을 하기도 애매해 말의 어미를 흐리자 그녀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놀란 얼
굴을 한다.
“교통사고 났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르르 달려들어 묻는다.
“왜? 어쩌다?”
“큰 사고는 아니고…… 앞에 차를 피하다가 조금…….”
자세한 설명은 빼고 대강 자신이 아는 대로 답하자 그 중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
는 남자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얼굴로 걱정을 늘어놓는다.
“그래도 큰 사고는 아니라니 다행이다. 멀쩡하던 놈이 왜 갑자기 휴학을 했나 했
더니. 교통사고는 몇 달 뒤에 아프기도 한다는데 조심해.”
확실히 선배인 듯한 남자의 얼굴에 이번엔 존대를 썼다.
“많이 다친 건 아닌데 뇌진탕 증세랑 조금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요. 큰 건 아니
고, 기억에 좀 문제가 있어서 휴학한 거예요.”
“기억? 왜? 뭐, 기억상실증 그런 거냐?”
설마 그건 아니겠지, 라는 듯 약간 웃음기를 담은 그의 말에 뭐라고 말을 할까 망
설이는데 앞에 있던 녀석이 번호를 찾은 듯 말을 건다.
“찾았어. 번호 불러줄게. 010…….”
그 말에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들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저번에 마주쳤던 남자의 얼굴에 놀라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번호를 불러주려던 녀석이 반가이 그를 맞는다.
“주원 형, 귀신이네. 그렇지 않아도 형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그 말에 놀라 옆에 선 녀석을 돌아보고 다시 그 남자를 바라봤다. 한주원 선배가
그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상황이라 조금 멍한 얼굴을 하고 있자.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선 그가 라커로 가 문을 열더니 그 안에 책을 넣고는 고갯짓을 한다.
“과 사무실에 맡겨놨어. 가서 줄게. 본인이 찾아가야지.”
과 사무실에 맡겨놓은 건 사실인 듯했지만 굳이 거기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건 그
가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의미였다. 지금 함께 있기는 껄끄럽고 불편한 상대였지만
자신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죄송합니다. 번거롭게 해드려서.”
“내가 아니라 호경이한테 사과해. 과대라고 자기가 맡긴 했는데 계속 갖고 있다
잃어버리면 어쩌냐고 하도 징징대서 과 사무실에 맡겨놓은 거니까. 따라와.”
마치 시비를 거는 듯 툭하니 말을 내뱉은 그가 가방만 든 채 다시 방을 나서는 모
습에 방에 있던 사람들에게 그만 가보겠다는 말을 남긴 뒤 그를 따라 방을 나섰다
. 뒤에서 다시 와서 애들 얼굴 보고 저녁 먹고 가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
기는 했지만 전혀 모르는 타인들을 잘 아는 척하며 식사까지 할 생각은 들지 않았
다. 우선 택배를 찾고 돌아갈 생각으로 과방을 나와 앞에서 걷는 그를 따라 걷자
그가 사람이 없는 안쪽의 계단으로 내려서는 게 보였다. 보폭이 크고 걸음이 빠른
사람이라 조금 걸음을 서둘러 그의 뒤로 바싹 다가서자 조용한 계단으로 내려서며
그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던진다.
“저번엔 갑자기 왜 그런 거야?”
왜 그렇게 미친놈처럼 도망친 거냐, 를 많이 순화한 그 물음에 방금 전 과방 안에
서 했던 것과 같은 답을 내주었다.
“좀 아플 때라서요. 실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그 답에 그가 날카로운 시선을 던져온다.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거냐라는 그 시
선에 입을 다물자 그가 막 코너를 돌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때 하도 이상하게 보낸 게 신경 쓰여서 전화해보니 핸드폰은 없는 번호라고
뜨고, 너희 보호자 연락처로 등록된 번호로 전화해서 네 연락처 좀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연락처는 안 가르쳐주고, 과 사무실로
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 네 연락처 묻는 전화가 계속 오고 있고. 대체,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렇게 넌 숨고, 다른 사람들은 널 찾는 건데?”
번호는 당연히 해지되었으니 연락이 안 되는 거고 보호자로 등록된 번호는 서진의
것이니 자신의 연락처를 아무한테나 알려줬을 리가 없다. 모두 대강 이해가 되는
일이었지만 마지막 건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과 사무실로 절 찾는 전화가 왔다고요?”
“응. 8월 말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전화가 오는데 아무래도 같은 사람인 것
같다고 해서. 누구냐고 하니까 친구인데 너랑 연락이 안 된다고 연락처 좀 가르쳐
달라고 하길래 그건 규정 상 안 된다고 했더니 계속 전화를 하나 봐. 그래서 휴학
했다고 하니까 왜 했냐고 또 난리를 치고.”
그 말에 순간 떠오른 얼굴이 있었다. 친구라며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자신의 연
락처를 찾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윤상명, 단 한 명뿐이다.
“저, 그럼 그 사람한테 또 연락 오면 제 번호 가르쳐줄 수 있나요?”
“그건 안 돼, 규정상. 그 사람이 번호를 남기면 전해줄 수는 있지만 네 연락처는
가르쳐줄 수 없어. 그 친구인가 하는 사람한테도 그대로 말하니까 자기 연락처는
못 남긴다고 하고 끊었대.”
자신의 연락처를 찾고 있지만 본인의 연락처는 남길 수 없다니, 그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는 생각에 재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상명이 자신과 연락이 끊겨 찾는 거
라면 연락처를 남기는 거야 별거 아닐 테데 왜 연락처를 남길 수 없다는 걸까? 아
니, 아니다. 상명이라면 본가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고 있다. 그라면 굳이 번거롭
게 학교로 연락할 필요 없이, 본가로 연락을 하면 될 텐데 굳이 과 사무실로 전화
를 해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는 건 어떻게 봐도 이상하다.
그럼, 상명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찾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며 걷던
사이 1층 사무실에 도착한 그가 노크도 없이 문을 밀어 열고는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사무실 안에서 분주히 서류들을 확인하던 여자에게 “그거.”라고 말을
걸자 서류를 보던 그녀가 그를 한 번 보고, 다시 자신을 한 번 보고는 재빨리 사
무실 안쪽 캐비닛의 문을 열고 그 안에서 택배 상자 하나를 꺼내 들고 다가선다.
“여기. 재현이 오랜만이다. 아프다더니 얼굴 안 좋네.”
“네, 아직 다 회복이 안 돼서요.”
아까 과방에서 말한 조교 누나가 이 사람인 듯해 예의 바르게 답하며 상자를 내려
다보자 보낸 사람 란에 ‘옛책사랑 헌책방’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상자도
작지만 묵직한 걸로 봐서는 책이 맞는 것 같았다. 책을 왜 굳이 학교로 주문한 걸
까, 하는 생각을 하며 상자를 내려다보던 사이 그녀가 자신이 아닌 옆에 선 한주
원이라는 남자에게 말을 건넨다.
“교수님한테 애들 택배 맡아줬다고 욕먹었어. 네가 책임져.”
“이번 건 좀 특수 케이스잖아. 일해라. 학기 초라 바쁘지?”
“알면 좀 도와주든가.”
“학생이 애들 서류 보면 안 되잖아. 간다.”
“그래, 가라. 재현이도 잘 가고. 건강관리 잘해라. 얼굴 다 죽어간다.”
그다지 친분이 깊지는 않은 듯, 자신에게 무심하게 인사말을 남긴 그녀가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짜증을 내며 급히 수화기를 손에 든다. 바빠 보이는 모습에 말 대신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박스를 들고 돌아서자 먼저 문을 열고 기다리던 그
가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조용한 데로 가서 이야기를 하자는 듯한 그 태
도에 잠시 그를 따라갈까 망설이고 있자 그가 여전히 퉁명스러운 투로 말을 던진
다.
“잠깐이면 돼. 너한테 사과할 게 있어서 그런 거니까.”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고 표정도 화가 난 듯 굳어 있었지만, 나쁜 느낌의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한 대화의 내용이 워낙에 자신에게는 충격적이었던 터라 미처 그
를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입이 가볍다거나 경망스럽다는 인상은 아니다. 약간
신경질적인 표정이나 말투, 그리고 사람의 속내를 꿰뚫는 듯 예리한 시선 같은 게
조금 거북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에게 애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라면,
분명 그를 믿고 있었던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 모험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라면 자신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을지를 알 테니 사고
이전 자신의 상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 수 있을까 하는 꾀가 고개를 쳐들었다
.
그래서 말없이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게 긍정의 뜻이라는 걸 눈치 챈 듯 그
가 말없이 돌아서 걸음을 옮겨간다.
그리고 10분 후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간 곳은 학교 근처의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이었다.
커피를 산 후 꽤나 큰 카페의 안쪽, 유리로 막힌 작은 세미나룸으로 재현을 데리
고 들어선 주원은 재떨이를 찾아놓고는 먼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사방이 유리라
안이 훤히 보이기는 하지만 가게 가장 안쪽에 위치한, 그것도 자동문이 달린 흡연
실 겸 세미나룸이라 단 둘이 이야기를 하기는 좋은 위치였다. 마침 가게 안도 한
산했다. 나지막한 팝송이 흐르는 실내 분위기에 재현은 조용히 상대가 먼저 말을
건네길 기다렸다. 그 사이 주원이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재현 쪽으로 담뱃갑과 라
이터를 밀어 준다.
“피워.”
“……네?”
“담배 피워도 된다고.”
그 말에 재현은 내가 담배를 피웠던가,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역시
나 아리송하다. 기억이 사라진 뒤 담배 생각이 난 적도 없었고 자신의 소지품 중
담배나 라이터를 본 일도 없었던 터라 당황해 그대로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
가 멋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곤 담배를 한 모금 빤 뒤 연기와 함께 사과의
말을 먼저 내뱉었다.
“그때는 미안하다. 떠올리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을 해서. 나 때문에 휴
학한 게 아니라면 다행인데…… 그래도 걱정 많이 했었어. 종강 때도 그런 식으로
헤어져서 혹시나 했었거든.”
갑작스러운 그 말에 재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종강 때요?”
“정확히는 내가 고백했을 때지. 다시는 못 볼 것 같이 말하고 가서 좀 기분이 그
랬거든. 나 때문인가 싶어서.”
의외의 정보를 담은 주원의 말에 재현은 표정을 굳힌 채 그를 바라봤다. 그와 자
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그가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재현은 서둘러 그의 말을 잘랐다.
“저, 죄송합니다만…… 전 그 일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한 달 전쯤에 교통사고가 있었는데 그때 머리를 좀 다쳐서
기억이 사라진 채예요. 정확히는 2년 동안의 기억이 없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척하면서는 도저히 그와의 대화를 맞춰갈 자신이 없기에 솔직하게
털어놓자 잠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화난 듯 인상을 찌푸린다.
“……지금 나랑 장난하냐?”
“장난이라면 좋겠지만 아닙니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그럼 학교엔 어떻게 온 건데?”
“학생증 보고 인터넷에서 과방 위치까지 확인하고 온 겁니다. 갖고 있던 다이어
리에 적힌 메모랑 연락처를 달달 외워서 대강 인간관계는 파악한 거고요.”
재현이 진지한 얼굴로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어놓자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호경이는 그런 말 없던데? 그 떠벌이 녀석이 그런 재미있는 소재를 말 안 했을
리 없는데?”
“그쪽하고는 그렇게 긴 대화를 한 것도 아니고 굳이 알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말 안 했습니다. 학교 측에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솔직히,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귀찮고 말해봤자 선배처럼 믿지 못하겠다고 진짜냐고 되묻는 사람
들이 대부분일 것 같아서요. 그리고 이러다 갑자기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 피
곤한 일 만들기 싫어서요.”
지나치게 솔직한 그 답에 주원이 기가 찬 듯 웃는다.
“하…… 그건 진짜 너다워서 할 말은 없는데…… 진짜 전혀 기억 안 난다고?”
“네.”
“……그런 게 진짜 있는 거냐?”
“있더군요. 저도 처음엔 웬 삼류 막장 드라마를 찍는 거냐고 화를 냈었는데 실제
로 벌어지기도 하는 일인 모양이에요.”
신랄하게 내뱉으며 재현이 쓰게 웃자 인상을 쓰며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아들인
주원이 초조한 듯 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다시 재현의 눈을 바라본
다.
“그럼, 그것 때문에 휴학한 거야?”
“네.”
“……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방금 반쯤 남은 담배를 끈 그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새 담배를 빼물고는 불을 붙
인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그를 바라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뭘?”
“저 학교에서 어땠나요?”
“뭐가 어때? 지금 모습 그대로지. 기억이 없다는 거 전혀 못 느끼겠어. 너무 그
대로니까. 고지식하고 재미없고 칼 같은 것도, 전부 그대로야.”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재현은 그 말에서 조금이나마 위
안을 받았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그대로였던 모양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들은 지
난 2년간 자신의 모습은 하도 상식 이하에 상상 이상이라 감당하기 버거웠는데,
학교에서는 다행히도 그대로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있
다.
“혹시, 제가 학교나 모임 같은 데서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는 일 없었나요?”
혹시라도 서진이 말한 대로 학교에서도 어딘가로 사라져서 애를 먹이거나 정서 불
안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나 싶어 그렇게 묻자 담배를 손에 들고 테이블에 기대
있던 그가 웃는다.
“그럴 리가 있겠어? 학교 징그럽게 꼬박꼬박 잘 나오고 내가 아는 한 제일 제일
칼 같은 게 너였어. 정확한 시간에 학교 와서 정확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고. 선
배들이 네가 아직도 고등학생인 줄 아냐고 해도 ‘이제 들어갈 시간이라서요.’라
고 히고는 아무리 선배들이 윽박지르고 잡아도 시간 딱 맞춰서 집에 들어갔어. 갑
자기 사라지거나 한 적은 없어, 한 번도.”
“……그럼 혹시 불안해 보인다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일은 없었나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추궁하듯 그에게 묻자 그가 막 재를 떨다 문득 손을 멈춘다.
그리고는 이상하다는 듯, 마치 관찰하듯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왜 그런 걸 묻지?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알 텐데?”
역시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편하다고 느꼈던 이유가 확실해졌다. 이렇게 쓸데없
이 눈치 빠른 사람은 거북하다. 확실히 이 사람은 자신이 대하기 힘들어하는 타입
이었다.
“저도 제가 그럴 타입은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가족들이 제가 사고 전에 이상행
동을 보였다고 해서요.”
“그건 가족이 아니라, 네 애인한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냐? 네 입으로 애인하
고 동거한다고 했는데, 가족이랑 애인이랑 다 같이 산 거 아니면 네 상태를 가장
잘 아는 건 같이 산 네 애인일 거 아냐.”
빈정거리는 투로, 주원은 순식간에 가장 아픈 곳을 찔러왔다. 애인과 가족이 같이
산 게 아니라, 가족 중 그 문제의 애인이 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대강 변명
을 흘렸다.
“입원한 뒤에 애인하고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어서요.”
그건 반쯤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입원 중인 한 달 간 그는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
었으니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던 사이 그가 어느새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세 번째의 담배를 꺼내며 무심히 답한다.
“내가 아는 한은 없었어. 내가 아는 인간들 중에 정신력은 네가 최고야. 목 앞에
칼이 들어와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녀석이 그럴 리가…….”
줄담배를 피우려 작정을 했는지 새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던 그가 순간 뭔
가 떠오른 듯 멈칫한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틀며 “설마, 그건가.”라고 중얼
거리는 말에 그를 재촉하듯 몸을 앞으로 숙이자 그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로 고
개를 갸웃하며 담배에 물을 붙인다.
“아는 게 있으면 뭐든 얘기해주세요. 아주 잠깐 스쳐간 거라도 상관없습니다.”
여전히 확신이 안 서는 듯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그의 모습에 이쪽이 애가 타 그
를 재촉하자 그가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질근거리며 씹다 천천히 이야기를 시
작한다.
“확실한 건 아닌데…… 올해 1학기 중간고사 때 전공 시험 날 애들 다 모여서 공
부하는데……. 아, 우리 학부는 전공 시험은 같은 과목은 반이 달라도 하루에 몰
아서 시험 보거든. 시험 문제 유출 안 되게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오전에 몰아
서 봐. 내가 기억하기로 그날 시험은 금요일 오후 6시였는데 5시 50분이 다 됐는
데 너 혼자 독서실에 앉아 있었어. 다른 2학년들은 다 시험 보러 달려간 후라 시
험 보러 안 가냐고 물어보려고 네 자리로 갔는데, 네가 그때 좀 이상한 책을 보고
있었어.”
“무슨 책요?”
“이상심리학하고 정신분석학 입문, 뭐 그런 거였는데. 내가 알기로 넌 그쪽 수업
안 들었거든. 우리 학교는 아예 심리학과가 없어서 그쪽 강좌는 교양이라도 개설
안 돼 있고. 게다가, 아무리 그쪽 관련 강의를 듣는다고 해도 전공시험 10분 앞두
고 독서실에서 다른 과묵 책을 열심히 보고 있는 게 이상해서 내가 시험 10분 남
았다고 알려주니까, 너 그제야 시계 보고 놀라 벌떡 일어나서 책 챙겼어. 반납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내가 해준다고 하고 책 받아들다 왜 이런 걸 보냐고 하니
까 네가 그때 좀 이상한 말을 하긴 했어.”
“뭐라고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는데…… 조만간에 미칠 것 같아서요, 라고 했나, 조만간
미칠 예정이라서요? 뭐, 대강 그런 말이었어. 그래서 이 자식이 이번엔 백혈병에
이어서 정신병을 파나 했거든”
역시나 상태가 안 좋았었구나 하고 떠올릴 새도 없이 주원의 입에서 뜬금없이 튀
어나온 ‘백혈병’이라는 단어에 재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혈병이요?”
자신이 또 무슨 헛짓거리를 한 건가 싶어 멍하니 되묻자 그가 인상을 쓴다.
“그것도 기억 안 나냐?”
“……전혀요.”
“너 입학하고 얼마 안 돼서 갑자기 백혈병 책 엄청 찾아보더니 골수이식하고 뭐
그런 거 알아보고 다녔었어. 그래서 가족 중에 누가 아프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동
생이 백혈병이라고 했었잖아. 그래서 골수 이식을 해줘야 하는데 아버지가 허락을
안 해준다고 그래도 준 성인인데, 그런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 거냐고 해서 이상
해서 생각했었거든. 동생이 백혈병인데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형이 골수 이식을
해준다는데, 왜 못 하게 하나 해서. 보통은 부모라면 형이 하기 싫다고 해도 설득
하니까. 통계적으로 부모자식간보다 형제간이 맞을 가능성이 더 크니까 해주고 싶
은데 검사도 못 하게 한다고.”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황 자체만은 이해가 갔다. 동생들
중 누군가 백혈병이라면 자신이라면 반드시 골수 이식 검사를 받으려 했을 테고,
그 남자라면 결사적으로 그걸 막았을 거다. 그러니 속만 태웠던 것도 이해는 한다
. 그건 극히 자신다운 짓이었다.
문제는, 분명 자신이 아는 한 재원도 재영도 병 없이 건강한 채라는 거였다. 아무
리 기억이 없더라도, 그 정도로 큰일이라면 누군가 한 번쯤은 자신에게 언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자신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원과 재영은
아주 건강해 보였다. 물론, 돈만 있으면 미래의 과학을 현재로 끌고 올 수 있다는
집안이니 어떻게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치를 시켰겠지만 그 정도로 큰
병이 있었다면 계속해서 주의하며 집안에 아예 응급처치실을 만들어놓고 아예 입
주 간호사를 고용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아니다. 재원이와 재영이는 아니다
. 그럼…….
갑자기 스친 생각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해도 지금 앞에 앉은 남자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고, 자신 역시
그에게 거짓말을 했을 이유가 없다.
어머니 쪽의 동생 중 누가 아팠던 걸까? 그래서 그 사람이 강제로 연락을 끊게 했
던 걸까, 하고 고민하던 사이 앞에서 막 다 피운 담배를 비벼 끈 그가 잠시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묻는다.
“그런데, 너 애인은 기억해?”
지금까지 거침없이 시원스레 내뱉던 남자가 갑자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어오자, 재현은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드문드문…… 그냥 스쳐가는 기억들은 있어요.”
워낙에 강렬하고 미친 사람인데다 기억을 못하면 산 채로 자신의 뇌를 꺼내 전기
충격을 줘서라도 결국 기억해내게 할 사람이라,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
다. 너무나 독하고 강해 기억을 잃은 지금도 그에 대해서만 기억하고, 또 그에 대
한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던 자신이 우스워 시선을 내린 채 앞에 놓인 손도 안 댄
컵을 바라보자 그가 씁쓸히 중얼거린다.
“진짜 많이 사랑하는구나.”
“……네?”
“다른 건 다 잊었는데도 그 사람만 기억할 정도라면 진짜 사랑하는 거잖아. 좀
궁금하긴 하다. 독주(毒酒) 같은 사람이라니…….”
너무나 정확한 그 표현에 잠시 놀라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제가 그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했나요?”
“고백한 뒤에 거절당하고 그냥 할 말이 없어서 애인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니
까, 굉장히 아름다운데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어. 마시면 혀가 녹아들 듯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데 마시는 순간 목이 타들어가는 독주 같은 사람이라고. 대신 한 번
맛을 들이면 절대로 못 끊는 술이라 아예 손도 대지 않는 게 좋지만 넌 이미 손을
대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했었거든. 그때 내가 많이 사랑하냐고 물었더니 너무 사
랑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고 했었고.”
나지막하게 울리는 주원의 음성에 재현은 참담한 듯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현재 자신에게는 낯선 사람의 입에서 그런 얘기
를 직접 들으니 새삼 실감이 되었다.
내가 그 사람을 정말 사랑하긴 했었구나, 하고. 그리고 덤으로 따라붙는 죄악감과
절망에 시선을 내린 채 컵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조금 명랑
해진 투로 다시 말을 시작한다.
“뭐, 하여간 그러다 좀 얘기하고 헤어지려는데, 네가 앞으로 영원히 안 볼 사람
처럼 인사를 해서 방학 내내 신경 쓰였었어. 그런데 핸드폰으로 전화하니 핸드폰
은 해지됐고 네 바뀐 연락처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혹시 나 때문에 학교 안
나오는 건가 걱정하는데 갑자기 휴학 신청까지 하니 걱정할 수밖에. 아, 그러고
보니 사과할 거 하나 더 있다. 네 보호자한테 연락했다 하도 꼬치꼬치 캐묻길래
너희 집 연락처 찾아서 전화해서 거짓말했어. 너 대출도서 남아있다고. 그건 미안
하다. 그래야 말 전해줄 것 같아서.”
마지막 말에 역시 이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그 얘기 안 하셨으면 아무도 저한테 그 소식 안 전해줬
을 거예요. 제가, 지금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본가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거든
요.”
“그럼 다행이고. 그래도 혹시 그것 때문에 집에서 혼나는 건 아니지? 오전에 네
보호자라는 사람이 전화해서 휴학 신청 어떻게 된 거냐고 해서 성희가 사무실에서
실수로 다른 학생하고 헷갈린 거라고 대강 둘러댔다고는 했는데…… 혹시 모르니
까.”
“그런 걸로 혼낼 사람 없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 오늘 감사했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빠져 잊고 있었지만 확실히 확인해야 할 일이 있어 그만 일어
서려 하자 그가 담뱃갑과 라이터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무심히 답한다.
“감사할 건 없고…… 기억만 문제 있는 거고 몸은 괜찮은 거지?”
“네. 건강한 상태에요. 검사 결과 아무 문제없었어요. 몸에도 뇌에도.”
“그럼 진짜 다행이고.”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옆에 둔 택배 상자를 들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그가 가방을 들려다 다시
자신을 부른다.
“아, 잠깐.”
“네?”
“과 사무실에 계속 전화 온다는 그 친구. 성희 말로는 좀 급한 느낌이었다는데
어떻게 할래? 네 연락처 알려주면, 일단 나한테 연락하라고 한 뒤에 확인하고 네
번호 알려줘도 되는데.”
주원이 보인 뜻밖의 호의에 재현은 조금 놀라 눈을 껌뻑였다.
“그래주실 수 있으세요?”
“그 정도는 괜찮아. 연락처 알려줘. 호경이한테 알려준 그 번호도 연락 안 되던
데.”
“아, 어제 번호를 바꿨는데 저도 아직 번호를 몰라서요.”
라고 일단 핸드폰을 들고 만지작거리자 그가 손을 내민다.
“줘봐.”
짤막한 그 말에 그의 손에 핸드폰을 건네주자 그가 액정 화면을 몇 번 누르자 그
의 가방에 있던 핸드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일단 네 번호 저장해둘게. 내 번호는 네 마음대로 저장하든가 말든가 하고.”
그 말과 함께 다시 핸드폰을 건네주는 그에게서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통화목록 버
튼을 누른 뒤 그의 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저장은 그렇고 외워둘게요. 언제 또 바뀔지 모르니까.”
“……왜?”
“네?”
“핸드폰이 왜 또 바뀌냐고?”
“……좀 사정이 있어서요.”
그의 번호를 키패드 위치로 외운 뒤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자 그가 이상하다
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기억 상실이라는 것
도 이상한데 핸드폰이 수시로 바뀌는 것까지 봤다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도 당연하다. 자신이 보기에도 수상하다.
자신은 나름 그 집안사람들에 비해 아주 정상적이고 평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진
짜 보통 사람의 기준에서는 자신도 아주 이상한 인간이었다. 그 사실을 실감하자
조금 묘한 기분이 들어 대화의 흐름을 바꿨다.
“저, 그리고 혹시 제가 담배 피웠나요?”
“아…… 뭐, 조금. 많이는 아니고 가끔.”
말과 함께 그가 설핏 웃음을 흘린다. 딱딱하게 굳어 있거나 화를 내는 얼굴만 봤
던 터라 왜 웃냐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여전히 웃음을 띤 채 답한다.
“내가 너한테 관심 가진 게 담배 때문이거든. 갑자기 담배 배우고 싶다고 해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버지가 싫어해서 배운다고 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어.
꼭 시간 맞춰 들어가면서도 술자리에는 꼭꼭 껴서 그것도 이상하다 싶어 한 번 물
어보니 아버지가 술 마시고 들어가는 거 싫어해서 그런다고 한 적도 있고. 합법적
인 선에서 아버지가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한다는 건 아버지에게 쌓인 앙금이 있
다는 건데, 그러면서도 해야 할 일은 확실히 하고 반항을 하되 절대 허용된 선은
안 넘긴다는 게 마음에 들었거든. 나도 아버지가 의대 가라고 해서 기를 쓰고 우
리 과로 온 거라, 약간의 동질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아. 막 하려던 것도 아버지
가 하라면 하기 싫어지는 심보, 난 확실히 이해하니까.”
그 말에 또 아리송해져버렸다. 그를 미친 듯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했다는 건 또 이상하다. 여전히 지난 2년간 자신의 행동은 알 듯 말
듯 묘한 상태였다.
사랑한다면 보통은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뭐든 다 하는 거 아닌가, 싫어하
는 것도 하고, 죽어도 하기 싫은 것도 하게 만드는 게 사랑이 아닌가, 고민하던
사이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그 사람의 뜻대로 해주기는 싫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그건 또 자신 답다. 사랑 같은 것과는 별개로 반항심 하나는 충만하
니까, 그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건 싫어했을 수도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저히 하나로 연결되지 않던 점들이 조금
씩이나마 이어지며 형태를 잡아가는 듯했다. 그 집안사람들이 말하는 자신은 도저
히 자신 같지가 않아 무조건 의심하고 부정하고 그러다 결국 그게 맞다는 결론에
닿으면 패닉에 빠져들곤 했는데 이 사람이 말하는 자신은 믿음이 간다. 그리고 어
떻게든 설명이 되는 행동을 해서 부정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왜 그랬는가를 생각
하고 납득할 수 있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나왔던 거지만 학교에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
치게 가까운 집안사람들은 극히도 주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비난하고
이죽거리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학교 사람들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관찰하고 본 그대로 설명해줄 수도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별 기대 없었지만 어마어마한 소득을 거둔 채라 조금 가벼워진 숨을 내뱉고 있자
그가 먼저 가방과 앞에 놓인 컵을 챙겨든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 모습을 확인
하고 자신 역시 택배 상자와 아직 가득 찬 컵을 들고 그를 따라 일어서자 그가 막
세미나룸을 나서다 묻는다.
“너 차는…… 아, 운전도 못 하나, 지금은?”
“네. 그냥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세미나룸을 나와 가게 입구로 향하며 그렇게 말하자 그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주
억거린다.
“그래. 그게 낫지. 그 친구한테 연락 오면 통화하고 네 번호 알려주든가 할게.
만약에 안 되겠다 싶어도 일단 연락은 해줄게.”
“네, 감사합니다.”
에어컨을 틀어 놔 시원한 가게를 가로질러 문을 열고 나서자 뜨거운 공기와 습도
가 몸을 휘감아온다. 아스팔트에서 아지랑이까지 피어오르는 광경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 그가 먼저 학교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럼, 난 올라간다.”
“네.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 번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가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들어 인사
를 하고는 터벅터벅 뜨거운 아스팔트를 밟으며 교문 쪽으로 향해간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며 택시를 타고 갈까, 지하철을 타고 갈까 고민하다 그냥 택시를 타기
로 했다.
더워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빠르게 걸어 큰길가로 잠시 기다리다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곤 목적지를 말한 뒤 핸드폰을 들고 서진의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그가 전화를 받는다.
「응.」
“다른 건 필요 없고 그냥 짧게 내 말이 맞는지 아닌지만 답해줘.”
「……응?」
“엄마 쪽 동생 중에 백혈병 걸린 애 있었어?”
「아…….」
짤막한 그 탄식은 곧 ‘yes’의 의미였다. 그렇게 알아듣고 서진이 다른 말을 하
기 전에 곧장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누구?”
「막내라고 들었어. 경선이.」
“치료는?”
「얼마 전에 다 끝났어. 걱정하지 마. 치료비 일체 사장님이 다 부담하셨고 기증
자 찾는 것도 도와주셔서 올봄에 수술도 했어. 완치 판정은 좀 있어야 하겠지만
의사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고. 완치된 상태에서 굳이 말하는 게 안 좋을 것
같아서…….」
팩트 뒤에 이어지는 그의 변명에 재빨리 말을 잘랐다.
“내가 엄마랑 연락 끊은 게 그 치료비 조건이었어?”
「그건…….」
“맞는지 틀린지만 얘기해줘.”
「……맞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골수 기증을 반대하는 대신 골수 기증자를 찾아주고
연락을 끊는 조건으로 치료비를 대준다. 딱 그 남자다운 거래였다. 그리고 그에
응한 것도 자신다운 짓이다. 하여간 수술은 잘 받았고 건강해졌다니 됐다. 그거면
된 거다. 혹시나 해 서진에게 전화를 한 건데 아이만 괜찮다면 됐다.
아직도 햇살이 쨍쨍한 바깥을 내다보다 다시 힐끔 계기판의 미터기 위의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다섯 시가 되기 전에 되겠
구나 하며 막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번엔 서진이 재빨리 묻는다.
「너, 그건 어디서 들은 거야?」
“학교에서.”
「……네가 학교에서 그런 말도 했다고?」
“했나 봐. 선배가 동생 괜찮냐고 물어봐서 알았어. 도서관 들러서 대출도서 없는
거 확인하고 과 사무실에서 문제도 다 정리했어. 남아있던 짐도 다 챙겼고.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이야.”
「기분은 괜찮아졌어?」
“좀 놀라긴 했지만 훨씬 나아졌어. 다섯 시 전에 도착할 거야.”
「그렇게까지 일일이 보고 안 해도 돼.」
“내가 미리 말 안 하면 계속 전화할 거잖아. 이제 볼일은 다 봤고 들어가서 쉴
거야. 아버지한테도 그렇게 얘기해. 안 그러면 형 볶을 테니까.”
「알았어.」
“그럼 끊을게. 오늘 좀 피곤하다.”
「그래.」
원래도 그다지 길게 통화하는 일은 없지만 다른 때보다도 더 짧은 통화를 끝낸 뒤
핸드폰을 택배 상자 위에 내려놓다 문득 그 상자 안의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책이
라면 집으로 주문해도 될 걸, 왜 굳이 학교로 받은 건가 싶어 두껍게 발린 테이프
를 손톱 끝으로 뜯어내고 상자를 열자 안에서 비닐에 싸인 화보집이 나왔다. 하드
커버 양장본에 A4사이즈 정도의 크기에 두께도 꽤 두껍다.
비닐에 싸여 있기는 하지만 표지 자체에 잔 스크래치와 모서리 부분이 마모된 걸
로 봐서는 확실히 중고도서였다. 게다가 한글이 하나도 없는 걸로 봐서는 구하기
어려운 해외에서 발간된 화보집인 듯했다. 그림이나 사진 같은 데엔 별 관심도 없
는데 왜 이런 걸 산 걸까 하는 생각에 비닐을 뜯고 안을 후루룩 훑어봤지만 컬러
인쇄가 된 두꺼운 종이 위에는 난해한 그림들만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림
에 대한 조예는 거의 제로에 가까워 피카소와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의 차이도 구
분을 못 하는 터라 웬 화보집인가 하다 한순간 이 화보집을 산 이유가 떠올랐다.
기억이 난 게 아니라 그냥 생각이 난 거다.
자신은 그림에 취미가 없지만, 삼촌은 그림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방 안에는
늘 화보집이 쌓여 있었다. 자신이 이런 걸 샀을 때는 분명 그에게 선물하려 샀을
거고, 이런 화보집은 대부분 컬렉터나 관련 공부를 하는 이들이 보관하고 있었을
테니 입고가 늦어져 방학 중에 학교로 온 모양이었다.
이젠 죽은,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를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가라앉아간다. 정신이
없어 그의 죽음을 되새길 여유도, 실감할 만한 정신도 없었는데 이 책을 보자 삼
촌이 죽었다는 게 새삼 현실로 다가왔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49재
가 끝난 그 순간보다도 이 낯선 책 한 권을 선물할 사람이 없다는 게, 훨씬 더 그
의 죽음을 가깝게 느끼게 했다.
“……왜 죽은 거야, 대체…….”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며 책의 표지를 손끝으로 더듬던 재현은 쓰게 웃었다. 백혈
병에 걸렸다던 동생이 완치가 되자 삼촌이 자살을 하고, 자신은 교통사고에서 상
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깨어났다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진짜 죽었어야 하는 건 자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대신해 동생이
죽을 뻔했고, 그가 살아나자 삼촌이 자신을 대신해 죽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진짜 괴물은 그 미친 남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명을 갉아먹는 자신일지도 모
른다.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슬픈 것 같았다.
햇살이 너무 찬란해서인지 눈뿐 아니라 가슴도 아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