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6/14)

Chapter 5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꿈은 ‘어른’이었다. 대통령도 과학자도 연예인도 의

사도 변호사도 아닌, 그냥 어른이었다. 그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어서 어른이 

돼서 사람들이 어머니와 자신에 대해 수군거리지 못하게 싶었고, 그 집에 들어간 

뒤로는 그 집에서 나가기 위해 어른이 되고 싶었다. 특히나 그 사람이 돌아온 뒤

로는 어떻게든 그 집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어른’이 된다는 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그건 아

주 길고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만 얻을 수 있는 거였다. 어떻게 해도 단 하루도, 

한 시간도 단축할 수 없다. 일 분도, 일 초도 안 된다.

그래서 기다렸다. 막연히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앞으로 10년

, 이제 5년, 이제는 2년……. 그렇게 시간을 되새김질하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더는 누구도 자신의 인생에 간섭할 수 없고, 합법적으로 그 집을 떠나 자신의 힘

으로 인생을 꾸릴 수 있을 때를 간절히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지나 했다. 보호자의 확인이나 서명 없이, 자신 혼

자서 뭐든 할 수 있고, 이젠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그 순간이, 바

로 눈앞에까지 와 있었다.

하지만 그 꿈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곳에서, 철저하게 박살난 채였다.

그게 어떤 건지 한 번 누려보지도 못한 채 손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걸 

깨닫는 순간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신공항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 안에서 차문 쪽으로 바싹 기대앉은 

재현은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끌려 강제로 차에 

올라탄 뒤 바로 옆에 탄 그를 돌아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부러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려 문 쪽으로 바싹 붙어 앉아 몸까지 돌린 채였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숨이 막힌다. 보지 않고 무시해도, 그가 같은 차 안에, 그리

고 바로 옆 좌석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차에 올라탄 이후부터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자리에 앉아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이나 그가 내뿜는 분위기가 하도 살벌해 서진

도 말을 걸기 무서워할 정도였지만 지금 자신은 그의 기분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금치산자라니, 말도 안 된다. 너무 어이가 없어 대체 그에게 따질 생각도 못 한 

채 이를 악문 채 차 안에 앉아 있자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먼저 말을 던졌다.

“그래서, 어디까지 기억하는 거지?”

낮고 조용한, 언제나처럼 부드럽기만 한 그의 음성에 재현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

미 서진에게서 모든 보고를 들었을 텐데 같은 걸 묻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서였다. 지금 그가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그가 보고 들은 바와 다른 걸 원한다는 

건데, 불행히도 그의 기대에 부흥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다.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한 기억만 되돌아왔다고는 말해줄 수 

없다.

모른 척 해야 한다. 자신은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거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

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다 보고 들었을 거 아냐?”

“정확하게 어디까지?”

“고3, 5월 3일 저녁. 당신이 내 머리에 재떨이 집어던진 것까지.”

“그 이후는?”

“기억 안 나.”

그 답에 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거슬리는 그 답에 창가에 기댄 

채 눈만 움직여 그를 힐끔 돌아보자 그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본 채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입매와 부드럽게 휘어진 눈초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해 가

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때마침 그의 핸드폰이 울려온다.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

지 않은 채 핸드폰을 꺼내든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통화를 시작한다.

“네.”

짤막한 그 답에 재현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할머니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 사람

이 ‘네.’라는 존대를 쓰는 사람은 이제는 할머니뿐이다. 그 외의 상대에겐 절대 

존대를 하지 않는 남자니까.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신경이 곤두섰다.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 그쪽을 힐끔 돌아보자 그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본 채 느긋

하게 통화를 이어간다.

“서진이가 날짜 계산을 잘못한 모양이군요. 원래 오늘 도착 예정이었습니다. 재

현이가 용케 알고 마중을 나왔더군요. 그래서, 지금 같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그를 마중 나갔다는 말도 어이가 없지만 서진이 

날짜 계산을 잘못하다니, 말도 안 된다. 서진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그건 

두 사람이 미리 말을 그렇게 맞췄든가, 그가 거짓말을 한 거다.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예상에 두고 한 짓일지도 모른다.

씨도 안 먹힐 소리에 인상을 쓴 채 그를 돌아보자 그가 차에 탄 후 처음으로 이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에 기대앉아 턱을 치켜 올린 채 거만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그를 비난하듯 바라보고 있자, 잠시 후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져온

다. 

어떻게 봐도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그 미소에 시선을 돌리려

는 순간, 그가 말을 잇는다.

“알겠습니다. 아파트로 돌아갈까 했는데…… 마침 잘됐군요. 40분 후쯤 도착할 

테니 모처럼 가족들이 다 모였으니 오붓하게 식사라도 함께 하죠. 이렇게 다 모이

기도 힘든데.”

마지막 말과 함께 그의 눈빛 위로 이채가 서렸다.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악동처럼 눈을 반짝이는 그의 얼굴에 처음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표정이 불길하다는 생각을 떠올리던 사이, 겨우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채

곤 놀라 몸을 돌려 그를 향해 돌아앉자 그제야 그가 기분이 풀린 듯 미소 짓는다. 

정신이 얼얼할 정도로 황홀한 그 미소에도 먼저 소름이 끼쳐왔다.

“잠깐…….”

당혹스러움에 그들에게 말을 걸려하자 그가 왼손 검지를 들어 입술을 가린다. 조

용히 하라는 그 신호에 딱하니 입을 다물자 그가 부드러운 투로 말을 이어간다.

“좀 이따 뵙죠.”

1분도 되지 않는 아주 짧은 통화를 마친 뒤 그가 핸드폰을 재킷 안 주머니에 넣으

며 말을 걸었다.

“본가로 간다. 네 짐도 거기 있으니 상관없지?”

역시나 나온 그 말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지금이라면 가족들도 모두 있을 

시간이었다. 재원이와 재영이도 있을 거다. 다름 사람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그 아이들 앞에 이 사람과 함께 돌아갈 수는 없다.

“싫어…….”

“뭐가?”

“본가에 가는 거 싫다고.”

“어째서?”

“그냥 싫어.”

그 말에 그가 웃는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애매한 미소였지만 지금은 그 미

소의 의미를 파악할 여유 같은 게 없었다. 그저, 이대로 본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는 생각에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가에서 미소를 지운 채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응시한다. 그리곤 위협하는 듯 나지막한 음성으로 내뱉는다.

“서재현, 어설픈 수는 쓰지 마.”

짤막한 그 말에 마치 속내를 꿰뚫린 듯 심정이 덜컹거렸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영리하고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 남자였다. 

본인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표정, 머릿속을 

읽는 데는 능숙하다. 그리고 그를 다루고 이용하는 데에도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 말려들면 안 된다. 단 한 마디 말로,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모든 걸 

유추해내는 사람이니까. 절대 틈을 보여선 안 된다.

자꾸만 흔들리는 눈동자를 겨우 고정시키고 표정을 다듬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건 무슨 소리야? 그 집에 가기 싫다는 거잖아. 또 뭐가 문젠데?”

아무렇지 않은 척, 내가 그 집을 싫어하는 거 몰랐냐는 듯 그렇게 되묻자 그가 옅

은 미소를 띤다.

“한 달 전의 너라면 능숙하게 날 속였겠지만 2년 전이라면 다르지. 그리고, 말했

지? 더는 너한테 속아주지 않는다고. 그래서, 지금 어디까지 기억난 거지?”

이미 자신에게 기억이 돌아왔다고 확신하는 듯한 그의 말에 애써 무너지려는 표정

을 유지한 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억 안 나. 기억나면 내가 얌전히 있겠어?”

“거짓말은 하던 사람이나 하는 거지, 넌 거짓말할 종자가 못 돼. 그럴 성질이 못

돼먹거든.”

“휴학까지 하고 머저리 취급당하면서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까. 기억상실? 그 자체가 비상식

이야. 뇌에 아무 문제도 없이 기억이 사라졌다면 그건 네가 기억을 없애려고 한 

거고, 그렇다면 어떻게든 자극을 주면 다시 기억이 나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 집

은 널 자극하기에 최고의 환경이고. 그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너처럼 예민한 

녀석이 자극을 받지 않을 리가 없지.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을 끊은 그가 마치 그와 자신의 거리를 재는 듯 돌아보

다 눈초리를 접으며 웃는다. 그 미소에 흠칫해 입술을 살짝 깨물자 그가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진짜 2년 전의 너라면 날 보는 순간 핸드폰부터 집어던졌겠지. 겨우 고대하던 

성인이 됐는데 이젠 금치산자라니……. 여권뿐 아니라 면허증까지 네 라이센스는 

모두 취소됐어. 통장 하나, 핸드폰 하나를 만들려고 해도 내 사인이 필요한데, 네 

못된 성질에 그걸 안 상황에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을 리가 없지.”

그 말에 그를 본 순간 얼어붙어 있던 자신을 떠올리곤, 탄식해도 이미 늦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만약 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를 보는 순간 화가 나 핸

드폰부터 집어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금치산자냐고 따져 물었을 것이다. 아

니, 그 전에, 그런 식으로 그가 돌아오기 전에 도망을 치려했다는 것 자체가 자백

이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갔다. 자신이 느끼기에도 창백해

진 얼굴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다.

“자, 그래서 뭘 기억하지?”

“…….”

답할 말이 없어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은 채 침묵하자 그가 정곡을 찔러온다.

“나에 대해서는 기억이 난 거군.”

단정적인 그 답에 어깨가 움찔한다. 바보 같이 너무나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에 손

으로 입을 가린 채 입술을 세게 물어뜯자 그가 마음에 든다는 듯 말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다 된 거야.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겠군. 가장 필요한 기억은 모

두 갖고 있으니까.”

딱 그다운 그 말에 재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 외에 뭐가 중요하지?”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나한테는 더 중요한 것들이 많아.”

“솔직히 인정해. 너도 나와의 일 외엔 별 관심 없는 건 마찬가지잖아.”

도저히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분명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

다. 떠올리기 싫어도, 계속해서 그에 대한 생각만이 떠오르고 그 생각으로만 머리

가 가득 차 다른 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휘말려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어떻게든 그 

생각에서 벗어나려 해봤지만 그게 되질 않는다. 그게 제일 끔찍했다. 아무리 멀리

로 떨어지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도 그에 대한 생각만은 절대 떨쳐낼 

수 없다는 게, 너무나 끔찍했다.

어쩌면 자신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생각은 깊고 질겼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 질끈 눈을 감는 순간, 그 생각보다도 질긴 그가 다시 묻는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기억하는 거지?”

이번에도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가 다시 말을 돌린다.

“말하기 싫다면 상관없어. 집으로 돌아가서 한두 시간 정도면 대강 파악이 될 테

니.”

기어이 그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그 말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렀다.

“……그 집은 가기 싫어.”

머리가 너무 아파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작게 대꾸하자 그가 말을 끊는다. 그 묘

한 침묵에 다시 눈을 뜨고 그를 돌아보자 그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서른여섯

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한 채 한기를 내뿜는 그의 옆모습

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그린 듯 맵시 있는 입술을 움직여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젠 그 수엔 안 속아.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좀 더 지능

적이 돼보라고. 안됐지만, 이제 그 처연한 얼굴은 더 이상 안 먹히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그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의향이 없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물어버

렸다. 단호한 그 옆모습에 차마 더는 물을 수 없어 자신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을 물어도 순순히 답해줄 사람도 아니고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그에게 휩쓸릴 게 뻔해 더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본가까지 가는 내내, 그렇게 긴 침묵이 이어졌다.

무거운 철문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서는 차 안에서 재현은 초조한 듯 계속해서 옆

에 앉은 남자를 힐끔거렸다. 이 집의 철문이 보인 그 시점부터 심장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본채의 앞이다. 이 사람이 돌아온다고 했으니 아마 전 가족들이 

저 본채 안에 모여 있을 텐데,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건 싫다. 오늘은 도저히 정신

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그의 눈치를 살피다 다시 창밖을 보고, 또 다시 그를 힐끔거리다 본채를 

확인하길 반복하다 본채의 앞에 거의 다가왔을 무렵,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내뱉었다.

“……난 별채에 가있을게.”

“어른들 다 계신데 혼자 빠져나가는 건 안 되지. 아무리 피곤해도 얼굴은 비춰.

그 답지 않은 훈계조의 말에 울컥해 한 마디 더하려는 순간 본채 앞으로 들어선 

차가 스르르 멈춰 선다. 그리고 이윽고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가 뒷문으로 와 아버

지 쪽의 차문으로 다가서는 모습에 본능적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진짜 들어가기 싫어.”

태어나 처음으로,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은 처음으로 그의 옷자락을 잡고 그

에게 매달렸다.

그 정도로 절실했다. 지금 저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얼굴과 행동으로 그와 자신

의 관계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이실직고 하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없

다면 몰라도 이 사람과 함께라면 숨길 수 없다. 자신의 말투와 태도, 표정에서 이 

남자만은 기억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그건 싫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싫은 건 기억이 있는 상태에서 동생들에게 그와 자신이 함께 들어서는 거였다. 

그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하게 싫었다.

“진짜, 들어가기 싫어. 오늘은 그냥 가면 안 돼?”

마지막 남은 생명줄을 움켜쥐듯 그의 옷자락을 쥔 채 간절히 그렇게 말하자 그가 

빙긋 웃어 보인다.

“내게 원하는 게 있으면 좀 더 영리해지라고 했을 텐데?”

그 말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그가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기억해.”

“뭘?”

“전부 다는 아니지만…… 드문드문 기억나.”

처음으로 그가 기억하냐는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답을 내뱉자 그가 마음에 든 듯 

웃음을 흘린다. 그 사이 본채의 문이 열리곤 서혜선이 이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도착한 뒤 왜 들어오지 않냐고 채근하러 온 듯한 그녀를 보며 다시 그를 바라보자 

그가 느긋하게 차창을 내리며 중얼거린다.

“좋아. 이제야 좀 영리하게 구는군.”

작은 속삭임과 함께 순식간에 내려간 차창으로 다가선 서혜선이 먼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말을 건넨다.

“사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피곤해서 서쪽 별채로 곧장 갈 테니 식사하시라고 해. 난 별채에서 해결할 테니

.”

“인사도 안 드리시고요?”

“비행이 길어서 피곤해. 인사는 내일 드린다고 전해. 별채로 간다.”

마지막으로 차 옆에 대기 중이던 기사에게 명령조의 말을 던진 그가 차창을 올 리

가 서혜선이 힐끔 자신을 바라본다. 불편한 듯 묘한 그 시선에 그녀의 시선이 향

한 곳을 바라보자 그의 옷자락을 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아차 하며 재빨리 그의 

옷자락을 놓고는 옆으로 돌아앉자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리고 곧 다시 

운전석에 올라탄 기사가 서쪽 별채 쪽으로 차를 몰자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별채까지 가는 내내 심장의 고동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큰 잘못을 하

고 혼날까 도망치는 아이처럼, 불안한 듯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누가 따

라올까, 당장이라도 저 집에서 달려 나와 자신을 잡고 화를 낼까, 바로 서쪽 별관

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까지 뒤를 돌아보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자, 이제 대화라는 걸 시작해보지.”

조용한 별채로 들어서 집안을 정리 중이던 아주머니께 간단히 나가라는 말만 마친 

그는, 자연스럽게 침실로 들어서 양복 재킷을 먼저 벗었다. 그리곤 언제나처럼 자

연스럽게 자신에게 집어던지는 재킷을 박아든 재현은 순간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

만 이내 표정을 풀고는 옷장으로 가 재킷을 넣었다. 지금은 될 수 있는 한 시간을 

끌고 싶어 느릿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자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거린다.

원래 사람을 부를 때 저런 식으로 부르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이젠 적당히 

익숙해져 그가 저렇게 부르면 뒤탈이 있을까 재빨리 달려가곤 했지만 지금은 선뜻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침대에 앉은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진짜 이상하게도, 그 침대로 다가가

고 싶지 않아 머뭇거리자 그가 뭔가 알겠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이 침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기억하는군.”

“…….”

“이제와 새삼 긴장할 거 없어. 지금쯤이면 다 눈치 챘겠지만 너랑 내 관계는 이 

집안사람들 모두가 다 알아. 이 집에서 일하는 그 여자도 알고 있고.”

그러고 보니, 별채로 들어선 그가 나가라고 하자 식사는 했냐는 질문도 없이 조용

히 도망치듯 사라지던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건 뭔가를 알고 있는 사

람의 태도였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라 아주 간단한 대화만 핸드폰의 메모 프로그

램을 통해 주고받았기에 의식하지 못했는데 이 별채에서 계속 일을 했다면 그녀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아는 것도 당연하다.

가족들이야 그렇다쳐도 집안에서 일을 봐주시는 분들까지 전부 알고 있을 거라는 

건 상상하지 못했던 터라 조금 거리를 둔 채 그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아줌마도 안다고?”

“기억을 잃더니 지능까지 떨어진 거야? 기억한다면 알 거 아냐? 너랑 내가 이 방

에서 질펀하게 뒹굴고 난 뒤에 이불을 누가 빨았을 것 같아? 겨울에는 호청까지 

뜯어 빨아야 되는 이불에 정액으로 도배를 해놨으니 욕도 많이 했겠지.”

반박할 수 없는 그 말에 어깨가 늘어졌다. 그 분이 알 정도라면 진짜 모든 사람들

이 다 알고 있다는 거다. 어이없고 황당한 기분에 가장 궁금했던 바를 그에게 물

었다.

“왜 그걸 다 말한 건데?”

“서재현, 아무리 기억이 엉망이라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말한 적은 없어. 전

부, 네가 말한 거지.”

“……내가?”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재원이에게 제일 먼저 말했고 다음에 정원이었고, 뭐, 

그게 아니라도 본채에 있을 때에도 틈만 나면 눈치 안 보고 해댔으니 안 들킬 수

가 없긴 했지. 너 신음소리 꽤 요란하니까. 한 번 시작하면 누가 문을 열고 들여

다봐도 몰랐잖아.”

수치심을 자극하는 그 말에 확-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드문드문 떠오른 기억이 

있기에 도저히 아니라고는 말하지 못한 채 가만히 시선을 내리자 그가 이제 대강 

파악이 됐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리고 이번엔 그가 먼저 자신에게로 다가

와 바로 앞에 멈춰 선 채 눈을 마주하며 묻는다.

“그래서, 정확히 뭐가 기억난 거지?”

그렇게 물어도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가 기억이 난다고는 말할 수 없기에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하자 그가 턱을 들어올린다. 그리곤 강제로 시선을 맞춘 

채 말을 이어간다.

“그럼 내가 묻지. 네가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했던 건 기억해?”

기가 막힌 그 말에 이번엔 생각하기보다 입이 먼저 움직였다.

“말도 안 돼…….”

“네 입으로 한 말이야. 잘 떠올려 봐.”

“기억이 없다고 헛소리 하지 마. 당신 말대로, 난 기억이 없는 거지 뇌를 다친 

게 아냐.”

그러니까, 저능아 취급하지 말라고 그의 눈을 보며 받아치자 그가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든 듯 달콤한 미소를 흘린다.

“좋아. 그래야 서재현답지. 그 패기로 기억해내라고. 이 침실에서도 수없이 했으

니 잘 떠올려봐. 내가 화가 나면 네가 어떻게 풀어줬나, 내 혼을 빼놓으려고 날 

어떻게 유혹했는지 자세히 기억해봐.”

“웃기지 마. 그럴 리…….”

없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넥타이를 풀고 있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풀고 있는 

게 아니라, 그건 불현듯 지나가는 데자뷰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스쳐간 그 장면에 말을 멈춘 채 그의 목 부근을 바라보고 있자 

턱을 들어올리고 있던 그의 손이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그리곤 곧 바로 귓가에 대

고 유혹하듯 속삭인다.

“뭔가, 떠오른 거지?”

『그만하고 이리와.』

잔뜩 상기된 자신의 목소리와 함께 앞에 있던 넥타이가 스르르 풀어져 내린다. 손

쉽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의 넥타이를 풀어낸 손이 부드러운 실크 타

이를 집어던진 뒤 그의 셔츠를 풀기 시작했다. 대범하게도 그의 재킷을 밀어내고 

단추를 풀어 내리며 이윽고 그의 벨트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그 목소리도 분명 자신의 입가에서 나가고 있고, 그 손도 분명 자신의 시야에 잡

힌 자신의 손이었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기억을 조작하기라도 한 듯 절대 

믿을 수 없는 그 손과 음성에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준다.

그리곤, 안쓰럽다는 듯 연민에 가득 찬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떠오른다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여.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과거는 바뀌지 않으니

까. 후회할 거라면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지. 먼저 사랑한다고 한 건 너야.”

“……말도 안 돼…….”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서 그의 맨살에 입을 맞추며 초조한 듯 그를 먼

저 침대로 끌어당기고 있던 건 분명 자신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

그가 아니라 그를 끌어당기고 있는 기억 속의 자신을 부정하는 듯 말을 하자 그가 

눈가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가엾게도. 하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넌 신경줄 하나는 질긴 녀석이니까. 날 진

짜 화나게 만들 정도로.”

다정한 위로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의 손이 이내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세게 쥐곤 다시 눈을 맞춰온다. 방금 전과는 달리 화가 난 듯 번들거리는 그 눈에 

숨을 삼키자 머리채를 틀어쥔 대 이를 갈 듯 속삭인다.

“그러니까, 이 이상 열 받게 하지 마. 이미 충분히 화가 났으니까.”

살의를 담은 그의 손과 그 음성에 숨을 멈춘 채 입을 다물고 있자 겨우 그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샤워하고 올 테니 얌전히 기다려. 도망치고 싶으면 이번엔 좀 더 머리를 굴리고

. 머리 나쁜 녀석들은 질색이니까.”

말과 함께 넥타이를 풀어 내리던 그가 침실과 이어진 욕실 쪽으로 향해 사라진 뒤

에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숨소리는 거칠다. 그리고 심장 역

시 사정없이 뛰어대고 있었다.

하나씩, 서서히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드러나는 기억들은 독약처

럼 조금씩 자신의 몸에 쌓여가고 있었다.

도저히 침실에 있을 수 없어 복도로 나온 재현은 계속해서 부산스레 복도를 오가

고 있었다. 침실로는 다시 들어가기 싫고, 그렇다고 이 건물을 나서면 밖에서 누

구와 마주치게 될지 몰라 나갈 수도 없다. 웃기게도 공원처럼 넓은 집안에서 자신

이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본채로 가면 온 가족들이 있을 거고, 동쪽 

별채로 간다면 재원과 재영이 있다.

이 집을 빠져나간다 해도 솔직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이 집에서 나가봤자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그 아파트뿐이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해도 수중에는 

몇 천 원이 전부다. 카드는 자신이 사라지는 즉시 분실신고를 하면 그만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재현은 걸음을 멈추곤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자

신이 가진 것들 중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 달 전까지는 미성년자였던 걸 

감안한다 해도 핸드폰도, 신용카드도, 차도, 자신의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핸드

폰은 늘 서진의 명의로 된 걸 사용했고 신용카드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차 역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했다. 성인이 되었다 해도 자신은 본인 이름

으로 아무 것도 살 수도, 어떤 일을 할 수도 없다.

처음 병원에서 눈을 뜨고 기억상실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 순간보다 지금이 더 눈

앞이 막막한 기분이었다. 만약 이 집을 도망쳐 어딘가로 가도 신분증이 필요한 일

은 반드시 생길 거고, 신분증을 제시하는 순간 금치산자로 등록되어 분명히 보호

자에게 연락이 갈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게 없다는 소리다

. 어딜 가서 무슨 사고가 생겨도, 설혹 자신이 죽는다 해도 가장 먼저 연락이 가

는 건, 보호자인 아버지다. 어디로도 사라질 수 없다. 어떻게 해도 자신은 이곳으

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그와의 대화로 잠시 잊고 있던 문제를 구체적으로 떠올리자 소름이 끼쳐왔다. 이 

상황 자체가 지옥이다. 두 달 전이라면 방학 때라고는 해도 멀쩡하게 대학을 다니

고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에게 어떤 병신이 금치산자 선고를 한 걸까? 금치산자라

고 법적으로 선고를 받을 정도라면 최소한의 증명서류 정도는 있었어야 하는데,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신청을 하고 선고를 받은 걸까?

문득 거기에 생각이 닿아 바닥을 내려다보는 순간 현관 벨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

리에 놀라 현관 쪽을 바라보자 세 번 정도 울린 벨이 멈춘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

지 않는다. 누가 온 걸까, 하고 바싹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저 멀리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거 아닌 그 문소리에도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어대기 시작했다. 가족 중 누군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온 걸까 하는 생각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가만히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자 곧 복도 위로 눈에 익은 남자가 들어선다. 

서진이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며 복도로 들어서는 서진의 모습에 안도하는 

한편, 욱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그에게 따지고 화를 내봐야 소용없다는 건 알지만

, 그간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를 원망하듯 바라보고 있자 그가 가

방을 끌고 앞으로 다가서며 자연스레 말을 건넨다.

“있었네? 있었으면 문 열어주지.”

“…….”

“사장님은? 일단 짐 가져왔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너무나 평소와 같이 친근하게 말을 거는 그에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나갔다.

“짐보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뭐? 아…… 사장님 귀국? 날짜 계산을 잘못했어. 시차 때문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 내 여권 어떻게 된 건데?”

이것저것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간 그 물음에 그가 곤란한 듯한 얼굴로 걸음

을 멈춘다. 역시나 알고 있었던 듯한 그의 태도에 그를 채근하듯 바라보고 있자 

그가 한숨을 내뱉으며 가방을 자신의 앞으로 내민다.

“나도 그렇게 빨리 선고가 내려질 줄은 몰랐어. 그리고 네가 갑자기 비행기를 탈 

일이 있을 줄도 몰랐고.”

병원에 간다던 녀석이 그 시간에 왜 공항에서 여권을 내밀고 있었던 거냐고, 서진

은 돌려 탓하며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걸려들려 물

러서기엔 본질적인 문제가 너무 크다.

“지금 내가 묻는 게 뭔지 알잖아. 내가 왜 금치산자라는 건데?”

호전적인 그 질문에 서진이 한숨을 내쉰다.

“그때는 그럴 만했어. 너 기억 못 하지만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하기도 하고 사라

져서 찾아보면 엉뚱한 데 가 있기도 했고 했으니까. 며칠 전에 겨우 다섯 시간 연

락 안 된다고 난리쳤을 때, 너 뭐 그런 걸 갖고 그러냐는 얼굴을 했지? 너한테는 

그게 이상해 보였겠지만 그때는 그럴 만했어. 너, 상습적으로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으니까. 내가 경찰서로 데리러 간 것도 여러 번이야.”

“……뭐?”

기가 막힌 그 말에 짤막한 감탄사만을 내뱉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일단, 불면증과 단기 기억상실이 네 병명이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실이야. 궁

금하다면 이전에 네 상담기록하고 진단서, 그리고 원한다면 상담 녹화 테이프도 

보여줄 수 있어. 원래 네 담당 정신과 선생님은 윤 박사님이셨는데 이번에 윤 박

사님께서 은퇴하셔서 이 선생님으로 바뀐 거야. 이 선생님이 계속해서 너한테 기

억 감퇴와 단기 기억상실 테스트 했던 것도 그래서야. 넌 그거 지겨워했지만 두 

달 전의 네 상태가 그랬어. 정원이 죽은 후로는 더 심해져서 하루 전 일도 기억 

못 하기도 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수면제를 한번에 너무 많이 먹어서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었어. 위세척까지는 안 갔지만 머리가 아프다고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수면제를 먹었다니 의사들이 아예 요양소로 장기 입원을 권할 정도였어.”

“나 두통약 안 듣는 거 알잖아. 그래서 수면제 먹고 자는 거 뻔히 알면서 그게 

뭐가 문젠데?”

“문제는 네가 그때 그런 설명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는 거지. 게다가 양이 과했어

. 한 번에 다섯 알은 누가 봐도 과해.”

서진의 단호한 표정과 꾸짖는 듯한 말투에, 도저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 그의 말대로라면 알리바이도 증거도 확실하다. 허지만 자신은 증거도 기억도 없

으니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부정하면 바로 눈앞에 자신의 병원 기

록들과 진단서를 들이밀 것 같은 그의 기세에 눌려 입도 벙긋 못 한 채, 멍하니 

그를 응시하고 있자 서진이 정색하던 표정을 풀고는 담담히 말을 이어간다.

“그 동안 말 안 한 건 미안한데 기억도 없는 애한테 사실은 너 정신병까지 앓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이 선생님께도 미리 양해 구하고 기억 문제만 

봐달라고 했었고. 아마 이 선생님도 당황하셨을 거야. 네 진료기록을 갖고는 있는

데 기억상실이라는 거 빼고는 또 너무 멀쩡하니까. 그래서 계속해서 입원 권하고 

테스트 하신 거고. 기억 사라지고 나서, 확실히 너 좋아졌어. 사실은 분열증이나 

인격장애까지 의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억 없는 거 빼고는 멀쩡해졌으니까. 금

치산자 선고도 그래. 미성년자일 때는 괜찮았지만 성인이 되면 네가 무슨 짓을 할

지 몰라서 먼저 금치산자 선고 신청을 한 거야. 이젠 네 사인 하나에 어마어마한 

돈이 오갈 수 있으니까, 그건 최소한의 방어였어.”

지금까지 자신이 들은 말들 중 가장 논리적인 서진의 설명에 더는 아니라고 우길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그게 더 믿음이 가긴 한다. 기억이 없는 사이 벌어진 일들

을 떠올려본다면 자신이 미쳤었다는 말이 가장 그 상황에 맞아떨어진다. 그래, 미

쳤던 거다.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그래, 미친 거면 된다. 미쳤다는 거 하나면 모든 게 정리된다. 그리고 자신 역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재원이가 그런 거네…….”

문득 떠오른 재원의 말에 자조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치려면 너 혼자 미치지, 

멀쩡한 사람들까지 미치게 하지 말라던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때는 그저 자신을 비난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유적인 폭언이 아니라 말 

그대로였다.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할 필요도 없이, 그냥 자신은 좀 미쳤었던 거다.

허탈함에 그냥 웃음이 나왔다. 이젠 더는 놀랄 기운도 없어서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큰 숙부의 말대로 자신만은 절대 미치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 정신력 

하나만은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자신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간 오기로 버텼던 건지도 모른다. 이 집안사람

들 모두 정신병 하나씩은 달고 있다는 걸 알기에, 절대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

라고 오기로 버티다 정신을 놓는 순간 돌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사실, 미친 정도로만 따지자면 자신이 독보적이다. 숙부들도 고모들도 기껏해야 

우울증과 강박증, 도벽과 약물중독 수준이다. 자신처럼 제대로 미친 사람은 없었

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는 것에 기뻐해야 하는 걸까, 하고 떠올리는 사이 다시 

앞으로 서진이 애를 달래듯 부드러운 투로 위로를 건넨다.

“어쨌든 지금 넌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금치산자 선고 철회는 천천히 

상황을 본 뒤에 해도 되니까. 네가 정상적인 상태라면 얼마든지 취소 신청도 할 

수 있어.”

어린 아이의 눈앞에서 사탕을 흔들 듯, 서진은 달콤한 희망을 보여주려 했지만 불

행히도 자신은 그 말을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고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다. 차

라리 그 정도로 착하고 멍청하기라도 한다면 부질없는 희망이라도 갖겠지만 그러

기엔 자신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영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 그 사람뿐 아니라 서진도 믿지 않는다. 예전부터 그랬었다. 서진이 자신을 잘 

돌봐주고 자신 역시 그에게 기대고는 있지만, 그래도 그를 믿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불신은 지금 최고조에 달한 상태였다.

“내가 정신은 오락가락해도 병신은 아냐. 선고 신청은 해도 취소 신청은 안 해줄 

거잖아? 내가 신청한다 해도 취소 승인은 안 나겠지. 이미 미친 인간이라고 낙인 

찍히고 나면 아무리 나 안 미쳤다고 말해봤자 아무도 상대 안 해주니까.”

불면증과 단기기억장애가 발전을 해 이젠 기억상실까지 갔으니, 그 이유만으로도 

선고 철회는 불가능한 거 아니냐고 반박하자 서진이 조금 굳어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너무 그렇게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 너 지금은 괜찮잖아.”

“그래, 이럴 때는 또 정신이 멀쩡하지. 차라리 지금 미쳐버렸으면 좋겠는데…… 

이럴 때는 미치지도 않아.”

허탈함에 자조하듯 중얼거리자 서진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본다. 자신의 감정이 격

해진 걸 아는지 더는 아무 말 않고 기다리는 그 모습에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시 물었다.

“우리 엄마는 나 그랬던 거 알아?”

이미 연락은 끊겼다지만 혹시나 해서 그렇게 묻자 서진이 천천히 고개를 내젓는다

.

“모르실 거야. 연락 끊은 뒤에 안 좋아졌으니까.”

“……다행이네.”

더는 그도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상대는 서진뿐

이었다. 그 사람을 상대로 말을 해봤자 결국엔 그의 페이스에 말려 자신의 상태만 

모두 알려주는 꼴이 될 테고 이 집안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리고 설

사 안다 해도 순순히 답해줄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이 뭔가를 물으면 악의로 똘똘 

뭉쳐 갖가지 거짓말과 왜곡으로 자신을 미치게 할 거라는 걸 알기에, 이 집에서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은 서진뿐이었다.

어쨌든 서진은 자신에게는 사실을 전해주는 유일한 메신저였다. 그 사실을 전해주

는 과정에서 임의대로 몇 가지 사실을 뺄 뿐, 더하지는 않은 사람이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원인 없는 신경성 통증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쓰자 그가 걱정스레 다시 묻는다.

“보고 싶으면 어머니 연락처 알려줄까?”

“……됐어. 이런 상태로 만나고 싶지 않아.”

그 말에 서진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완전히 나은 뒤에 만나는 게 좋을 수도 있으니까. 연락처는 내가 갖고 있

으니까 언제든 보고 싶으면 물어봐.”

“형은 아직도 우리 엄마랑 연락하는 거야?”

“연락하는 건 아니지만, 일단 상황은 파악하고 있어야 하니까. 내가 알기로는 잘 

지내고 계셔. 남편분이랑 애들도 다 잘 있고. 조금 사고가 있긴 했지만 사장님이 

전부 막아주셔서 괜찮아.”

갑작스러운 그 말에 놀라 서진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사고라니?”

“어머니 남편분이 개인건축업 하시잖아. 부도수표를 받아서 잠깐 자금 문제가 있

었는데 사장님께서 알아서 해결해주셨어. 넘어갔던 집도 전부 찾아주셨고 이쪽 일

도 몇 개 몰아주셔서 아무 문제없어. 사장님께서 뒤 봐주시는 한은 앞으로도 영원

히 문제없을 거고.”

한 순간의 걱정은 그 말로 곧 씻어지긴 했지만 이번엔 좀 더 다른 의혹이 일었다.

“……그건 또 무슨 꿍꿍인데?”

그 사람이 절대 대가 없는 친절을 베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신경을 곤두세

우고 그렇게 묻자 서진이 다시 한 번 긴 한숨을 내쉰다. 

“너, 이젠 좀 믿어. 사장님은 널 아끼셔. 네 기억은 최악인 상태로 남아 있으니 

잘 납득이 안 가겠지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셨어. 본가를 나간 것도 그

래서였고.”

그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자 다시 앞으로 다가선 서진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준다.

“이제 좀 쉬어. 아주머니 본채로 오셨던데 식사는? 다시 오시라고 할까?”

“…….”

“큰 사모님께서 걱정하셔. 아주머니 나가라고 했다는 소리 들으시고 또 너랑 사

장님이랑 싸우는 거 아니냐고 많이 걱정하셨어.”

“……그 사람하고 싸울 기운 같은 거 없어. 아주머니 오시라고 해. 저녁은 먹어

야 하니까.”

“그래, 그럼. 쉬어라. 머리 아프면 약 준비해줄까?”

“아냐, 됐어. 어차피 먹어도 안 듣는데, 뭐.”

“그래. 될 수 있는 한 약은 안 먹는 게 좋으니까. 그럼 갈게.”

커다란 짐 가방 하나를 가져다둔 채 서진이 현관을 향해 사라지자 다시 집안이 고

요해진다. 나무가 깔린 긴 복도에 홀로 남은 재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손

으로 머리를 꾹꾹 내리눌렀다.

두통이 심하다. 이 두통이 신경이 예민해지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자연히 두통이 

오긴 하지만 오늘은 유독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감당할 수 없는 사실들이 하나

씩 드러날 때마다 이렇게 머리가 울려온다. 이러다 머리가 깨져 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게 울려대기만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었다.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자신이 납득하기 힘든 일이나 감당

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 이렇게 머리가 울려대곤 했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속에 

쌓인 독이 이렇게 뇌를 쥐어짜며 자신의 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끔찍한 통증에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서 있는데 뒤쪽에서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가 

울려왔다. 아주 작게나마 레일을 밀어내는 그 소리와 함께 지금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가 울려온다.

“옷은?”

언제나와 같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거슬리면 참지 못하고 보채는 그 음성에 송

곳으로 뇌를 쑤셔대는 듯한 통증이 흘렀다. 그 아찔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 통증의 원인은 저 남자였다. 서정혁이라는 남자가 흘린 독기가 어느새 자신에

게까지 퍼져 스며들고 있었다. 그 독은 지나치게 강하고 독해, 해독제도 찾을 수 

없다. 중독성 역시도 강해, 한 번 노출되는 순간 더는 거부할 수도 없어진다. 그 

남자는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인 독이었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뭘 그렇게 꾸물대고 있냐는 타박에 두통을 겨우 겨우 참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

자,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서늘하게 빛나는 진한 검은 눈동자로 자신

의 눈을 응시해온다. 속내를 읽어내려는 듯 날카롭게 빛나는 눈을 본 순간 두통이 

멈췄다. 그 대신 아찔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뭘 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탁하며 벽에 머리가 닿아 인상을 쓰는 순간, 그렇게 속삭이며 그가 자신의 눈을 

내려다봤다. 달콤하게 젖어드는 듯한 그 시선과 바로 입술 위로 닿은 호흡 그리고 

그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감미롭고 부드러운 그 키스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자 그가 눈을 응시하며 감미

롭게 속삭인다.

『대체 이 머리통 속엔 뭐가 그렇게 많이 들었을까? 멍청한 바보들도 질색이지만 

너처럼 생각이 많은 것도 골치 아파. 어떻게 머리가 아플 정도로 생각을 하는 거

지?』

몸이 녹아내릴 듯 달콤한 속삭임과 함께 그의 눈동자가 눈 한 가득 들어왔다. 멀

리서 보면 검은 색이라고 생각하지만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그의 눈은 검은색이라

기보다는 아주 깊고 진한 청색에 가까웠다. 그 청색이 너무나 깊어서 언뜻 검은색

으로 보이지만 그 눈이 밝게 빛나면 푸른빛을 띤 채 일렁인다는 걸 알고 있다. 아

주 기분이 좋을 때 그의 눈은 아이처럼 천진하게 반짝거린다. 빛이 스치는 순간 

청량한 파란빛을 반사하는 바다처럼, 그렇게 깊고 진한 파랑이었다.

그 눈이 바로 앞에서 응시해오면 그 무섭던 두통도 복잡한 고민이나 생각들도 전

부 사라지곤 했던 것 같다. 아주 깊은 바다 속에 잠긴 듯 아무생각도 나지 않고 

현실감도 사라져버려 편안해졌다.

『그럼 내가 생각할 일을 만들지 마. 당신만 아니면 고민할 거 없어. 난 세상 복

잡하게 사는 사람 아냐.』

『그건 괜찮네.』

『……나 열 받게 하는 게 괜찮다고?』

그 말에 그가 짓궂게 웃는다. 아주 기분 좋은 듯 투명한 파란 빛을 띠는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눈가에 입을 맞춰준다. 그리고 작게 속삭인다.

『네가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좋다고.』

투정부리는 연인을 달래는 듯 그는 누구도 상상 못 할 정도로 달콤한 목소리로 자

신을 어르고 있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그건 분명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

는 일이었다.

그 눈빛도 입맞춤도 음성도, 모두 현실이었다.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간 그 기억에 멍하니 그를 바라본 채 서 있자 그가 불쾌한 

듯 인상을 쓰며 다시 묻는다.

“뭐지?”

“…….”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거야?”

순간 떠오른 기억 그대로 반복되는 그의 말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원래 이런 사

람이었다. 말투나 표정은 다르지만 본인에 관한 것 외엔 모두가 쓸데없는 생각이

라 치부해버리며 자신을 옭아매려 들었다.

이 사람은 좋지 않다. 아니, 나쁘다. 이 사람과 함께 하는 건 자신의 수명을 갉아

먹는 일이 될 것이다.

언젠가 그의 독이 자신의 숨통을 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서재현?”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하는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깨었다. 아주 잠깐이지

만 환영에 빠져 멍청한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서둘러 고개를 숙이곤 가방의 손잡이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서진 형이 가방 가져왔어. 침실에 갖다 둘게.”

“…….”

조금 낮아진, 맥없는 자신의 목소리에 그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

에 우뚝 서 있었다. 샤워를 마친 뒤 하체를 가린 수건 외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를 피하려 시선을 내린 뒤 가방을 끌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자 점점 그가 

가까워진다. 물리적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심장의 고동이 더욱 빠르고 강해져 간

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아예 숨을 멈춘 채 그의 곁을 스쳐가려는 순간 

그가 팔을 뻗어 자신의 앞을 막는다.

“무슨 일이지?”

근육에 싸인 탄력 있는 그의 긴 팔이 앞을 가로막는 순간 시원한 샤워코롱 향이 

코끝을 스쳤다. 맨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이 쓴 것과 같은 것이라는 생

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강한 향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그 냄새에 멈췄던 숨을 들

이키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너무나 익숙한 그 체취에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본능이라기보다는 거의 반사

작용에 가까운 그 반응에 그의 팔을 지나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그가 다시 

말을 건넨다.

“또 뭐가 떠오른 거군.”

지긋지긋할 정도로 눈치가 빠른 남자다. 모든 신경을 자신에게만 기울이고 있는지 

표정 하나, 눈짓 하나에도 빠르게 자신의 속내를 꿰뚫고 알아챈다. 그런 게 싫었

다. 기가 막히게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알아채고 그걸 비웃거나 짓밟으며 즐긴

다는 걸 알기에, 너무나 싫었다. 

“비켜.”

또 무슨 헛소리를 해댈까 진저리를 치며 그의 팔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가 빨랐다. 

자신의 앞을 막았던 팔이 사라지고 곧 그의 손이 뺨에 닿아왔다.

“뭐가 기억난 거지?”

천천히 뺨을 쓰다듬는 손길을 피하려 고개를 돌리자 그가 나지막한 웃음을 흘린다

.

“이제 보니 이것도 나쁘지 않네. 퍼즐을 맞추듯 하나하나 끼워 맞춰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멈췄던 게임을 다시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잔뜩 들뜬 그 음성에 천천히 고개를 들

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싱긋 웃는다. 진심으로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방금 전 

떠오른 그 순간처럼 눈을 빛내며 웃고 있는 그 얼굴에 순간 욱해버렸다.

“……당신은, 이게 재미있어?”

“아니, 재미없어.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길 수밖에.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까. 아니라고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모른 척 시선을 돌린다

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게 되는 게 아니니까. 너와 내 관계처럼.”

자신도 그건 알고 있다. 잊어도, 그리고 아닌 척 무시하려 해도 있었던 일은 사라

지지 않는다. 자신의 기억에서는 사라져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미 한 번 벌어진 일들은 되돌릴 수도, 지울 수도 없다. 그건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바지만, 그래도 그 부분은 찌르지 말았으면 좋겠다. 거

긴 너무 아프다. 하지만 아무리 나 아프니까 그만하라고 해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 처음부터 그랬었다. 이 사람은 항상 제발 이 부분은 좀 피해줬으면, 다시는 건

들지 말아줬으면 하는 부분만 골라 헤집어댔다. 

순간, 역시나 이 인간은 질색이야, 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늘 자신을 혼란스럽고 

아프게 하는 이 사람이 밉고 싫다. 그를 보면 원망스럽고 화가 나고 또 아프고 아

파서 싫다.

“내가 진짜,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어?”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되돌려 묻자, 그

가 살짝 고개를 숙여 시선을 맞춰온다. 바로 호흡이 마주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서 그의 눈동자가 일렁거린다. 그 빛에 숨이 차오른다. 심장이 터질 듯 울려대는 

소리에 그를 피하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뺨을 스치던 손끝이 이번엔 

입술로 와 닿았다. 그리고 그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했어, 네 입으로. 이 입술로…….”

유혹하는 듯한 시선과 입술을 짓누른 그의 손끝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의 체향

과 손길에서 느껴지는 설렘에 정신을 차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닿는 게 싫

지만, 좋다. 보기에도 끔찍한 사람이지만 자신은 계속해서 그에 대해서만 떠올리

고 있다. 너무 너무 싫은 사람이지만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머리와 

심장이 완벽히 따로 도는 듯한 그 괴리감에 이를 세게 악물자 그가 다시 머리카락

을 쓰다듬어주며 속삭여 온다.

“서진이와 무슨 얘길 했길래 이러는 거지?”

“…….”

“또 뭐가 거슬린 거야?”

“…….”

“응?”

다정하게 어르며 그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이 이상 가까워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눈을 가득 채우며 그가 다가서던 사이 그의 숨결이 입술 위에서 머문다. 그 간지

러운 호흡에 눈을 감으며 그의 살짝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입술 위로 그

의 입술이 겹쳐지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번개처럼 머리를 내리치는 충격에 눈을 뜨고 온힘을 다해 그의 가슴으로 밀어내며 

뒷걸음질쳤다.

미쳤다. 진짜 미쳤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와의 관계를 부정하

려 하면서도 막상 가까워지자 마치 입맞춤을 기다리듯 눈을 감고 기다리던 자신에 

대한 혐오에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서둘러 시선을 돌린 채 가방을 끌고 

다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오실 거야. 아무리 다 아는 관계라도 복도에서 이런 꼴 보여주고 싶지

는 않아. 들어가.”

어설픈 변명을 해대며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끈 채 가방을 들고 먼저 침실 쪽으로 

향하자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선 그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계속 그렇게 해보라고. 앞으로 재미있어 질 테니까.”

다른 때보다도 훨씬 낮아진 잔뜩 화가 난 듯한 그의 음성이 선명히 귀에 박혀왔지

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우선 그를 피하는 게 

먼저였다.

어떻게든 그를 피하려 침실에 가방을 내려둔 뒤 다시 침실을 나와 응접실로 도망

쳐 불을 끄고 자는 척했다. 아주머니께서 돌아오셔서 식사를 할 거냐고 물을 때에

도 눈을 감고 자는 척 일어나지 않자 아주머니께서 얇은 담요를 한 장 갖다 덮어

주셨다.

그리고 그대로 그 방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와 다시 마주칠까 무서워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밤을 보내야 했다.

그날 새벽 꿈을 꾸었다. 밤새 잠들지 못한 채 뒤척거리다 겨우 동이 트는 새벽녘 

잠이 들었을 때, 끊임없이 어딘가로 달려가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된 신전 같은 건물을 지나 아담한 골목을 빠져나온 뒤 사막을 가로지르

고, 마지막으로 폐허가 된 듯 모든 건물이 부서져 내린 도심을 달렸다. 이상한 나

라처럼 국적도 시대도 불분명한 그 공간을, 계속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내가 왜 달리는지, 뭘 찾는지, 혹은 무엇에 쫓기는지도 모른 채 그저 계속해서 그 

미로 같은 공간을 달리기만 했다.

“재현아? 재현아, 일어나야지.”

밤새 뒤척거리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재현은 어깨를 흔드는 힘에 번쩍 

눈을 떴다. 그러자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께서 기다리셔. 점심은 먹어야지.”

나지막한 그 말투에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자 서혜선 씨가 바로 자신의 옆에 앉

아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어…… 지금 몇 시죠?”

“정오야.”

그 말에 딱딱한 바닥에서 겨우 몸을 일으키자 그녀 역시 자리에서 일어선다.

땅바닥에서 자서인지 온 몸이 아파와 인상을 쓰며 덮고 있던 담요를 밀어내자 옆

의 테이블 쪽으로 간 그녀가 핸드폰을 건넨다.

“네 핸드폰. 오전에 왔어.”

바로 어제까지 들고 다니던 핸드폰과는 또 다른 기종의 핸드폰을 받아들자 그녀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선다.

“씻고 1시까지 본채로 와. 사모님께서 같이 점심 하자고 하셨어.”

“그냥 여기서 먹을게요.”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셔. 그리고 오늘은 윤진경 씨랑 김윤정 씨도 없으니 와서 

같이 식사해. 혼자 드시기 그러니까.”

죽어도 이 집에서 죽을 것 같던 두 사람이 떠났다니 의외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가셨어요? 두 분?”

“응. 당분간 오실 일 없을 거야.”

“왜요?”

“사장님께서 이제 드나들지 말라고 하셨어.”

갑자기 또 그건 무슨 변덕인가 하는 생각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 동안에는 멋대

로 하라고 내버려두더니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하다 어제 공항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설마 그 일 때문인가 하고 머리를 쓸어 넘기자 그녀가 할 말은 다 끝난 

듯 “그럼.”이라는 말을 남긴 뒤 돌아서 나간다.

그녀가 응접실을 나간 뒤 재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종일 여기저기 

싸다닌 데다 이런저런 일들로 머리가 복잡해서인지 납덩이처럼 무겁다. 우선 뜨거

운 물에 몸을 담가야 할 것 같았다. 이상할 정도로 몸이 너무 아프고 무거웠다.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별채를 나왔을 때는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식사 시간은 칼 같이 지키시는 분이라 조금 걸음을 서둘렀다. 워낙

에 까다로우시기도 하지만 특히나 시간에 철저한 분이라 기다리게 했다가는 뒷감

당이 힘들다는 걸 알기에 시간에 맞추기 위해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거의 달리듯 

본채에 닿아 벨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서혜선이 문을 열어준다.

“시간 맞춰서 왔네. 사모님 기다리셔.”

“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달리 시원한 공기가 피

부 위로 닿아왔다.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 남은 이 집안은 홀과 복도도 늘 에어

컨을 틀어놔 시원하다. 진짜 쓸데없는 낭비라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식당으로 들

어서자 역시나 쓸데없이 크기만 한 식탁에 먼저 앉아계신 할머님이 보였다.

“늦었습니다.”

“아니, 내가 일찍 내려온 거지. 앉아라. 식사하자.”

어떻게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그녀의 부드러운 어조에 그녀의 오른쪽으로 가 앉았

다. 그리곤 오늘도 여전히 한 올 흐트러짐 없이 틀어 올린 머리에 검은색의 랑방

의 투피스를 빈틈없이 갖춰 입고 계신 할머님을 바라보자 그녀가 먼저 숟가락을 

손에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용한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숟가락을 들고 냉국

에 숟가락을 대는데 그녀가 넌지시 말을 건네 온다.

“네가 정혁이한테 뭐라고 했니?”

조용히 숟가락을 움직이던 중 갑자기 나온 그 질문에 재현은 손을 멈췄다.

“……네?”

“오늘 아침에 정혁이가 진경이에게 해외로 나가라고 하던데.”

역시나, 어제 일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일에 대해 설명을 하는 건 

애매해 적당히 말을 돌렸다.

“전 아무 말 안 했는데요…….”

“집안에 여자들이 너무 자주 드나드는 것도 안 좋지만 재원이가 그래도 지 엄마 

오가니 얼굴이 밝아졌는데 아예 출입도 못 하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겠니?”

“…….”

“재원이도 그렇고 재영이도 아직 애들이라 엄마 손이 필요할 때야. 네가 거슬려

도 애들 엄마랑 얼굴은 보게 해줘야지.”

아주 미묘한 의미를 담은 그녀의 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기억이 없을 때라

면 몰라도 그와 자신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아챈 이상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

디가 모두 거슬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 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마치 자신을 손자가 아닌 아들의 여자로 보는 듯해 태도에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표정이 자꾸만 일그러지려 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정색

을 하고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알아서 하실 일이죠. 제가 거기까지 관여는 못 하니까요.”

냉국을 한 모금 마시고 젓가락을 들어 막 나물에 손을 대려하는데 그녀가 물끄러

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여자들이 집안을 드나들든 말든 상관 안 하던 녀석이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할 때

는 대부분 네가 신경이 쓰인다고 할 때라는 걸 아니까 하는 말이다.”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럼 왜 갑자기 재영이 유학 얘기까지 꺼내는데?”

“네?”

“유학이야 당연히 가야 하는 거지만, 애들 진학 문제도 알아서 하라던 녀석이 재

원이는 고3이니 대학 간 뒤에 보내고 재영이 혼자 먼저 보내라는 것도 이상하잖아

. 재영이 성격에 해외에 혼자 나가 적응을 할지도 모르겠고.”

기가 막힌 그 이야기에 애써 평온하게 유지하던 얼굴이 무너졌다.

“혼자 보내라고 하셨어요? 김윤정 씨나 재원이랑 같이가 아니고요?”

“윤정이는 아예 밖에서도 만나지 못하게 하라더구나. 비서 둘 붙여서 애 혼자 해

외로 보내라니 아무래도 무리잖아, 그건.”

“……갑자기 왜요?”

“그건 나한테 물을 게 아니지. 그 녀석이 이상한 짓을 할 때는 대부분이 너 때문

인데, 내게 물어봤자 알겠니?”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매서웠다. 대체 하룻밤 사이

에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자신을 추궁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당황해 서둘러 시선

을 내리자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싸운 거면 빨리 풀어주고, 네가 뭐라고 한 거면 그러지 

말라고 얘기해둬라. 진경이나 윤정이나 집에 드나드는 거 나도 반갑지는 않지만 

어린 애들을 엄마랑 떼어놔서야 쓰겠니? 게다가 혼자 유학이라니. 재원이라면 걱

정 안 해도 재영이는 혼자서 못 버틸 애야. 재원이 녀석도 아침에 그 얘기 듣고는 

난리를 치는 걸 겨우 학교에 보냈다.”

“…….”

“너도 기억이 없어 불안하고 속이 타는 건 알겠지만 밖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신

경 쓰게 하지는 말아야지. 오늘은 일찍 들어오라고 해서 저녁 같이 하고 적당히 

비위 맞춰서 풀어줘라. 너도 재영이 혼자 유학 보내는 건 싫을 거 아니냐?”

마치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듯 몰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입을 꾹 

다문 채 식탁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가 다시 시선을 돌린 채 손을 움직이기 시작

했다.

“식사 중에 너무 말이 길어졌구나. 일단 식사부터 해라.”

“…….”

“좀 이따 전화해서 언제 들어올지 물어보고. 그리고 오늘은 꼭 본채로 와서 식사

하거라. 어제 종일 기다리게 하고는 결국 본채에는 들르지도 않고 갔으니 오늘은 

꼭 얼굴 보여야지. 어제도 네가 아프다고 한 거니?”

불쾌함이 가득 한, 비난하는 듯한 그녀의 질문에 이번엔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

다. 분명히 자신이 본채에 들어가기 싫다고 칭얼거린 건 사실이니까.

“머리가 너무 아파서요. 죄송합니다.”

“머리는 또 왜?”

“……계속 두통이 있어서요.”

“넌 이 집에만 들어오면 머리가 아프구나.”

마치 자신이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듯 툭하니 말을 던진 그녀가 다시 조용히 식사

를 시작했다. 그녀가 수저를 움직이는 걸 본 뒤 자신도 입을 다문 채 모래알처럼 

꺼끌거리는 밥알들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겨야 했다. 그리나 역시나 그렇게 강

제로 떠넘긴 밥들이 제대로 소화가 될 리 없었다.

“젠장.”

식사를 한 뒤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먹은 것들을 전부 토해낸 재현은 세수를 한 뒤 

세면대를 짚곤 선 채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먹을 것들을 모두 게워낸 덕에 속은 편안해졌지만 이젠 또 머리가 울려대고 있었

다.

그녀가 한 말들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건 자신을 대하는 그

녀의 태도였다. 아무리 자신이 기억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라 해도, 과하다

.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눈치를 못 챈다면 그건 머리가 모자라거나 덜 떨어진 거다

. 진짜 완전히 기억이 없던 때에도 그녀가 하는 말이 거슬리고 껄끄러웠는데, 그

녀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유를 알고 나니 참을 수가 없다.

정상이라면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을 그에게서 떼어놓으려고 해야 한다. 그에게는 

뭐라고 할 수 없을 테니 자신을 정신병원에 처박는 한이 있더라도 어떻게든 자신

을 그와 떨어트려 놓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 술 더 떠 아예 자신을 그

에게로 떠밀려하고 있었다. 떠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남자의 여자로 인식하

고 그렇게 받아들이라 강요하고 있었다.

“다들 미쳤어…….”

아무리 이 집안 자체가 비상식적이라 해도 이건 지나치다. 이건 진짜 미친 거다.

찬물을 틀어 얼굴에 물을 끼얹고 다시 고개를 드는 순간 거울에 비친 창백한 자신

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낯설면서도 낯익고, 어색하면서도 익숙했다. 분명히 

자신의 얼굴인데 그 얼굴은 늘 피곤해 보이고 또 너무나 창백해 아예 모르는 타인

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야윈 게 문제가 아니다. 그 얼굴은 세상에 지치고 질린 얼굴이었다. 그에 연민과 

함께 원망하는 마음이 일었다.

“대체,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재현, 말해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건데?”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지만 거울 속의 자신이 그에 답을 해줄 리

가 없다. 말없이 자신을 응시해오는 거울 속의 얼굴에 순간 욱하며 화가 치밀었다

.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놨으면 어떤 힌트라도 줘야 하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건데? 일을 벌였으면 수습은 하고 도망쳐야지. 아

니, 최소한 왜 이렇게 된 건지 설명이라도 해줘야지. 왜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

들은 기억하게 만들고, 정작 중요한 것들은 생각나지도 않는 건데? 대체, 너 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답답한 마음에 세게 세면대를 주먹으로 내리쳐 봐도 역시나 상대는 답이 없다. 불

현듯 떠오르는 기억도 없다. 그와 관련된 문제 외에는 여전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뚝뚝 끊어진 필름에는 그에 대한 장면들만 남아 있는 채였다.

“제발…… 뭐든지 좋으니까 필요한 걸 떠올리게 해보라고. 나한테 유리하고 내가 

써먹을 만한 기억들을 돌려줘. 그 남자에 대한 거 말고, 다른 기억들을 달라고, 

서재현…….”

지친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

다.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누구도 답을 해주지 않는다. 과거의 자신조차도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또다시 쿡쿡 거리며 시작된 두통에 이를 악문 채 이마를 짚는데 현관 벨소리가 크

게 울려오기 시작했다. 방문을 알리는 그 소리에 그냥 가버리라고 속으로 중얼거

리며 우뚝 서 있는데 벨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려왔다. 집안일을 봐주시는 아주머

니는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그냥 들어오는데 벨을 누르는 거라면 방문객이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저렇게 질기게 벨을 눌러대는 건가 해 결국 수건으로 얼

굴을 닦아내고 복도로 나섰다.

시끄러운 소리에 일단 현관문으로 향해 가면서도 괜히 늑장을 부리게 된다. 그 사

이에 포기하고 돌아가주길 바라며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상대도 어지간히 급한지 

끊임없이 벨을 누르며 버티고 있다.

지친 기분으로 현관으로 가 인터폰을 바라본 순간 그 안에 비친 얼굴에 헉- 하는 

숨소리가 터져나갔다.

재원이었다. 교복을 입은 채 현관 앞에 선 기세가 흉흉하다. 선뜻 문을 열 용기가 

나질 않아 망설이고 있는데 이번엔 쾅쾅거리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결국 문을 여는 버

튼을 누른 뒤 현관 앞에 섰다.

그리고 잠시 후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벌컥 문을 밀어 연 재원이 

문 밖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에 길게 심호흡을 한 뒤 먼저 말을 건넸다.

“들어와. 아무도 없어.”

“네가 나와. 이 집 쪽은 쳐다보기도 싫으니까.”

너무 더러워서 안쪽으로는 발도 대기 싫다는 듯 인상을 쓰는 그 얼굴에 재현은 쓰

게 웃었다. 자신의 기억이 사실이라면 재원이 이 건물에 질색을 하는 것도 당연하

기에 결국 자신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현관에 있던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서자 

따가운 햇살 아래에 선 재원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아직 수업 중이잖아. 조퇴한 거야?”

이제 막 2시가 지난 시간이라 어떻게 이 시간에 교복을 입고 여기에 온 거냐고 묻

자 재원이 사나운 투로 대꾸한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방금 문자 왔어. 당장 다음 주에 재영이가 어학

연수를 간다니,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그 이야기에 재현은 눈을 껌뻑거렸다.

“……다음 주?”

“그래. 겨우 학교에 적응한 녀석한테 갑자기 유학이라니? 미쳤어?”

분명 방금 전 할머니에게 언뜻 재영의 유학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다음 주라니, 

그건 너무 빠르다. 아니, 그 전에 그렇게 빨리 진행을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잠깐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재영이가 다음 주에 어학

연수를 간다고?”

방금 들었던 것을 그대로 돌려 묻자 재원이 빠르게 받아친다.

“그래. 하룻밤 사이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치 윽박지르는 듯 자신을 추궁하는 그 말에 놀라기보다는 황당하다는 생각이 먼

저 들었다. 방금 전 할머니도 그랬지만 재원도 그가 벌이는 일들의 원흉으로 자신

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가 갑자기 뭔가에 관심을 보이거나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건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 네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라는 건

데?”

“너랑 아버지가 싸운 거잖아. 너희 두 사람 싸움에 왜 우리가 화풀이를 당해야 

되는데? 모르는 사람들하고는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녀석을 어떻게 해외로 혼자 보

내?”

빠르게 이어지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강 무슨 뜻인지는 이해가 

가는데, 그 말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잠깐만, 서재원. 전에도 말했지만 난 기억이 없어.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기억이 있든 없든 네가 뭐라고 했으니까, 그 사람이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는 

거잖아. 우리야 죽든 말든 상관도 없다던 사람이 갑자기 웬 유학 타령이냐고?”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지금 그 사람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해?”

“그럼, 갑자기 우리 엄마한테 해외로 나가라고 한 건 뭔데? 이름도 들리지 않게 

살라는 건 무슨 뜻이냐고?”

“그것도, 내가 알 리 없잖아. 윤진경 씨 얘기는 한 적도 없어. 재영이 얘기도 마

찬가지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의 말을 받아치자 재원이 그 말을 비웃는다.

“그래, 말은 안 하고 칭얼거렸겠지. 말할 필요도 없이 입 다물고 버티면 아버지

가 먼저 네 비위 맞추려고 하거나, 아니면 네 입을 열게 하려고 뭐든 하니까.”

“…….”

“항상 그랬잖아. 싸우는 건 너지만, 피해자는 우리야. 아버지는 어떻게 해도 너

한테는 손 안 대니까, 네 한 마디에 피 보는 건 우리라고.”

낮은 목소리로 악을 쓰는 듯한 재원의 말에 재현은 하얗게 질린 채 입을 꾹 다물

었다. 그 말에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그 시절에도 그

와 자신의 싸움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일이 있어 먼저 말을 건네면 그는 대

꾸도 하지 않고 무시하고 지나갔고, 거기에 화가 나 소리를 치거나 물건을 집어던

지면 웃으며 좋아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자신이 진저리를 치며 아예 입을 다물고 

무시하면, 자신이 아끼는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에게 화를 내, 결국 자신

이 소리를 치고 화를 내게 만들었다. 항상 그런 식이었다.

재원의 말대로, 반복되는 그 악순환 속에서 피해를 본 건 재원과 재영, 그리고 삼

촌이었다.

“네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으면 이제 우리 좀 놔둬. 너한테 도와달라고

도 안 해. 이젠 도망치게 해달라는 말도 안 해. 그러니까, 제발 그냥 우리끼리 조

용히 살게 놔두라고!”

점점 높아진 재원의 음성이 마지막에 가서는 악을 쓰는 듯 높아졌다. 귀를 채찍으

로 후려치는 듯한 그 소리에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마음을 다스리

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은 재원이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방금 전보다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다면, 네가 끔찍하게 아끼는 그쪽 동생들도 알아봐. 

우리한테 이 정도면 그쪽도 무사하지는 못할 테니까.”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튄 그 말에 놀라 눈을 껌뻑이자 재원이 뭘 그렇게 놀라는 

얼굴을 하냐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간다.

“그 사람이 열 받으면 우리한테만 날벼락 떨어지는 거 아냐. 아마 삼촌, 고모 줄

줄이 난리날 거야. 너희 엄마 네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거 하나 

말해줄까? 이건 겨우 시작일 뿐이야. 네가 입 다물고 반항하면 할수록 일은 더 커

지기만 할 거야. 감당 못 할 정도로 커지기 전에 네가 해결해. 아버지 위에 올라

타든 매달리든 어떻게든 처리하라고.”

마지막 말을 마친 재원은 그대로 돌아서 본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쪽은 쳐다

보기도 싫다는 본인의 말 그대로 뒤돌 돌아보지 않은 채 빠르게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에 정신이 얼얼해졌다.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머리에 가시처럼 박혀와 멀미가 날 정도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다시 집안으로 돌아온 재현은 서혜선 씨가 가져다준 핸드폰을 찾아 서진의 번호를 

누르고 그가 전화를 받기를 기다리며 정신없이 복도를 서성이기 시작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재영의 갑작스러운 유학 이야기도 그렇지만 재원의 말을 

듣고 보니 아주 안 좋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져 초조한 듯 복도를 오가며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서진이 

전화를 받는다.

「응. 왜?」

무심히 던지는 그의 물음에 재현은 그에 대한 답이 아닌 질문을 돌려주었다.

“무슨 일 없어?”

「응?」

“무슨 일 없냐고? 재영이 유학 건 말고, 또 다른 일은 없는 거야?”

「아…… 들었어?」

“나 들으라고 흘린 말이 지금까지 내 귀에 안 들어왔을 것 같아?”

그러니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수작은 부리지 말라고 거칠게 대꾸하자 서진이 침묵

한다. 역시나란 생각에 걸음을 멈춘 채 흥분을 가라앉혔다. 스스로도 지나치게 예

민해져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지기에 잔뜩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며 일단 하

나씩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윤진경 씨랑, 김윤정 씨 일은 어떻게 된 거야? 애들하고 만나지도 말라니. 그 

사람들이 이 집에 살림을 차리든, 딴 남자랑 살든 전혀 상관 안 하던 사람이 갑자

기 왜 그러는 건데?”

「그간은 딱히 터치 안 하셨지만 결정적으로 두 사람이 집까지 마음대로 오가도록 

허락해주신 건 너 때문이었는데, 이젠 네가 기억 못 하니 허락해줄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 그리고 무엇보다 윤진경 씨는 네 일본행을 도우려 공모한 탓도 있으니까 

그건 철회 안 하실 거야.」

바로 어제 일인데 기억 안 나냐는 듯 서진이 말을 흘리는 순간 재현은 순간 극심

한 혼란을 느꼈다.

돌려서 말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서진 역시 일이 이렇게 된 건 모두 자신의 탓이

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 사람도 아니라, 세 사람이나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을 하니 이젠 슬슬 진짜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건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

다. 자신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아주 큰 잘못을 해서 일이 벌어진 건가, 하는 

생각에 말을 멈춘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자 서진이 짤막한 숨을 토해낸다.

「어쨌든 그쪽은 어떨 수 없어. 윤진경 씨는 이번 달 내로 파리 쪽으로 유학 형식

으로 떠날 거고 김윤정 씨도 해외로 나가게 될 거야. 그리고 아마 재영이도 다음 

주 안에는 떠나게 될 거야. 그리고 하나 더 알려주자면 사장님께서 오늘 아파트 

처분하라고 하셨어. 아예 짐 옮기게 될 거야, 본채로.」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만들려는 그의 가상한 노력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난 그런 얘기 못 들었어!”

「그런 거 미리 얘기하고 의논하는 분 아니라는 거 알잖아. 무슨 일인지 몰라도 

빨리 화해해. 일 더 커지기 전에.」

“그러니까, 뭘 화해하냐고? 싸운 일이 없어, 애초에.”

좋은 분위기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살벌하게 싸움을 하거나 물건을 집

어던진 건 아니다. 그 사람도 자신도 감정 격해지는 일 없이, 적어도 겉으로는 격

하게 감정을 드러내거나 고함을 내지르는 일 없이 조용히 넘어갔다. 몇 마디 험악

한 말이 오가긴 했지만 그 정도는 그와 자신 사이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수준의 

언어들이었다. 그건 가벼운 말다툼 수준에도 못 든다.

- 그래, 계속 그렇게 해보라고. 앞으로 재미있어 질 테니까.

불현듯, 그가 어젯밤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에는 그가 그냥 짜증을 

내는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던 그 말의 의미가 번개를 치듯 자신의 뇌리를 훑고 지

나갔다.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해버리자 머리가 어지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일렁이

는 듯 시야가 흔들려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자 잠시 멈췄던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의식하지 못했어도, 뭔가 또 거슬린 거야. 이대로 가면 너만 힘들어. 오늘 

오전에 갑자기 이사회까지 소집하셨어. 서정후 이사님을 해외 지부장으로 내보내

시는 것도 준비 중이시고, 계열사 쪽으로 인사이동이 좀 있을 거야. 그리고 무엇

보다…….」

거기까지 말한 뒤 서진이 말을 흐린다. 그 불안한 기색에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며 그에게 물었다.

“무엇보다 뭐?”

한껏 맥이 풀린 음성으로, 죽일 거면 한번에 죽이라는 듯 채근하자 서진이 느릿하

게 대꾸한다.

「네 외가 쪽 자금도 곧 막힐 거야. 너희 외할아버지 이쪽 하청 공장 운영하시잖

아. 아마 그쪽 자금줄 다 틀어막게 될 거야. 당분간은 문제없어도 보름 안에는 문

제 생겨. 간단히 어음 하나만 날려도 부도나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너희 어머니 남편 쪽으로 간 공사들도 모두 중단시킬 수도 있어. 사장

님 성격 알잖아.」

순간, 허탈한 숨소리가 터져나갔다. 사방에 지뢰가 깔려 언제 줄줄이 터질지 모르

는 상황이 되니 이젠 경악할 기운도 없다. 놀라는 데도 이젠 지쳐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겨우겨우 먹은 점심을 모두 토해낸 뒤 현기증까지 더해지자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웠다.

“대체…… 그 사람은 왜 이러는 건데?”

아무리 그 사람이라도 단지 ‘재미’만을 위해 본인까지 귀찮아지는 일들을 줄줄

이 벌일 리는 없다. 대체 그 ‘재미있는 일’의 목적이 뭐냐고 다 꺼져가는 목소

리로 중얼거리고 있자 서진이 담담히 답을 내준다.

「너한테 뭔가를 원하시는 거겠지. 아니면, 진짜 화가 많이 나신 거거나.」

서진은 꽤나 예리하고 객관적으로 그 남자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분명 그가 이런 

식으로 상식 밖의 행동을 해대는 이유는, 자신에게 원하는 반응을 얻기 위한 행패

이거나, 진짜 화가 나서 자신을 피 말려 죽이려고 하는 보복이거나 둘 중의 하나

다. 하지만, 어제 자신의 정신병력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외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어떻게 해야 내가 효과적으로 미치나 시험하는 거겠지.”

냉소적인 그 말에 서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난 팁은 줬어. 그 뒤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큰 사모님도, 나도, 아무도 못 

해. 너만 할 수 있는 일이니 사장님하고 잘 얘기해 봐.」

“그러니까 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 건데?”

「오늘 일찍 퇴근하실 거야. 저녁 때 잘 얘기해. 일 더 커지기 전에 마무리해야지

.」

재원과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서진의 목소리에 재현은 복도 벽에 

등을 기댄 채 긴 숨을 내뱉었다. 확실히 갑작스러운 소란의 원인은 자신이다. 그

가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벌인 일이니 수습을 하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한다.

그건 알았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알았어. 끊을게.”

「들어가시기 전에 전화할 테니 잘 생각해 봐. 의외로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으니 

성질대로 하지 말고.」

“……알았어.”

「그래. 그럼 끊을게.」

서진이 먼저 바쁜 듯 뚝하니 전화를 끊는 순간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복도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그 위로 자신의 한숨이 가라앉아간다.

깨어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며칠 간 잠을 자지 못하고 혹사당한 듯 피로

했다. 아니, 지금 자신의 삶 자체가 너무 피곤하다.

어른이 되면, 성인만 되면 모든 게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대로였다. 대

학생이 되어도, 성인이 되어도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더 나락으로 떨

어져 내리기만 한 듯 더는 바라는 것도 기댈 것도 의지할 것도 없었다.

더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이보다 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없기에 

계속해서 지쳐만 갈 뿐이다.

“나한테 이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니? 그런 거라면 성공했으니 이제 돌아와, 

서재현. 그리고 나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 봐도 역시나 돌아오는 답도

, 기억도 없다. 한 달 전의 자신 역시 이 절망이 지긋지긋한 듯 돌아올 기미를 보

이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와 재원이, 그리고 그 외 모든 사람들처럼 너 때문에 이

렇게 되었으니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자신의 안에 있는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서재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채였다.

오후 6시 17분.

응접실 안을 서성거리던 재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응접실 바닥에 깔린 

보료에 앉아 긴 한숨을 내뱉었다. 5시 40분 경 막 회사를 나가고 있다는 서진의 

연락을 받은 채였다. 이제 슬슬 그가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를 보면 어떻게 말을 꺼내고 

어떤 식으로 대화를 풀어가야 할지도 애매하지만, 그 전에 어떤 얼굴로 그를 대해

야 할지도 아직 결정내리지 못한 채라, 그의 귀가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함만 

더해간다.

일단 담담히 맞이하고 이야기를 꺼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기억하던 일상대로 

그를 맞이한 뒤 대화를 시작해야 할까. 아니, 일상대로라면 대화의 시작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에, 자신은 그에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는 말로 인

사말을 대신하고, 그는 그럼 또 화를 내거나 무시하며 스쳐가기에 대화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웃으며 그를 맞이하는 짓 같은 건 못 한다. 그렇기엔 자신의 얼굴

은 지나치게 정직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사이 문자가 도착했다.

『3분 뒤에 별채에 도착할 거야.』

짤막한 그 문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을 나섰다. 그

리고는 주방을 정리 중이던 아주머니께 잠시 자리를 피해달라고 한 뒤 현관 앞으

로 가 계속해서 그에게 어떻게 말을 걸지를 고민했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라면 화가 나 우선 고함을 쳤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지난 

후라 흥분도 가라앉아 있었다. 침착하게 얘기하다.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사

람이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침착하고 차분하게 대화를 끌어가야 한다.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잠시 기다리자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은 바깥이 

보이지 않는 구조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기다리고 있자 곧 벨소리가 울려왔다. 

비밀번호를 알면서도 굳이 벨을 누르는 그의 속내가 빤히 보여 쓰게 웃으며 인터

폰의 화면은 보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곧 철컥- 하며 문고

리가 돌아가며 문이 열린다.

그 소리에 바싹 긴장한 채 현관을 바라보고 있자 열린 문 안으로 그가 들어선다. 

아직은 꽤 더운 날씨임에도 빈틈없이 양복을 갖춰 입은 그의 등장에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힐끔 이쪽을 바라본 뒤 들어서 복도를 가로지른다.

자신의 마중이 아주 당연한 듯 자연스레 무시하고 들어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 그를 따라 들어선 서진이 가방은 건네준다.

“가방.”

“응.”

앞으로 내밀어진 가방을 받아들자 서진이 어서 따라 들어가 잘 얘기해보라는 듯 

눈짓을 한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살짝 고개만 끄덕여 보인 뒤 돌아서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하며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집안을 떠도는 무거운 적막에 가방을 

손에 든 채 긴 복도를 걸어 침실로 들어서자 그가 재킷을 벗어 침대 위로 던져놓

는 게 보였다. 자기 손으로는 절대 옷을 정리하는 법 없는 그를 보며 침대 위에 

널브러진 재킷을 들고 옷장으로 가 가방은 창가에 놓인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옷

은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었다. 그 사이 넥타이를 풀고 커프스를 빼 던지는 그

를 바라보며 살짝 입술을 즈려 물었다. 슬슬 이야기를 꺼내야 할 타이밍인 듯해 

그거 던져둔 넥타이와 넥타이핀, 그리고 커프스를 챙기는 척하면서 넌지시 말을 

꺼냈다.

“재영이 유학은 어떻게 된 거야?”

고급스러운 필기체로 ‘JH’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남색의 커프스를 들여다보며 그

렇게 묻자 그가 조끼를 벗다 나지막한 웃음을 흘린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딘

지 신경을 건드리는 그 웃음소리에도 애써 곤두선 신경을 참으며 그를 돌아봤다.

“다 얘기 들었어. 갑자기 왜 보내는 건데?”

“그냥.”

예상했던 그 답에 자꾸만 얼굴이 일그러지려한다. 앞에 있던 돌멩이가 그냥 발에 

걸리니 찼다, 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결국 인상을 쓰자 조끼까지 벗어 던

진 그가 더 해보라는 듯 눈을 빛낸다. 그 악동 같은 표정에 역시나, 또 걸려들었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저건 무슨 취향인지 그는 사람을 열 받게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화를 내는 걸 아주 좋아했다. 다른 

사람이 화를 내면 무시하고 다시는 찍 소리도 못 하게 짓밟아주면서 유독 자신만

은 조용히 있게 두지를 않는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전부 팽개치고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그랬다가는 

내일쯤엔 온 가족들이 별채로 뛰어올 게 뻔해 겨우겨우 화를 내리눌렀다.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왜 갑자기 애를 혼자 보내는데? 보낼 거라면 김윤정 씨랑 

같이 보내면 되잖아. 아니면, 재원이도 있고.”

“그게 네가 바라는 바니까.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해주기 싫거든.”

드레스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며 웃으며 던진 그 말에 어이없다는 웃음이 터져나갔

다. 이것도 너무나 예상했던 대로라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김윤정 씨도 나갈 거면 차라리 같이 보내. 그게 좋잖아. 걱정도 안 해도 되고.

오후 내내 생각해서 낸 결론은 그거였다. 현재로서는 그게 최고의 시나리오다. 이 

집안에 있어봐야 신경만 문드러질 테고 애의 성격형성에도 좋지 않다. 마음의 병

을 더 얻기 전에 어머니와 함께 해외로 나가서 자유롭게 사는 게 그 아이에게 나

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유학에는 찬성이지만 그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워낙

에 내성적인데다 유약해 비서 두 명만 달려 보내기엔 불안하다. 그것도 본인이 원

하는 것도 아니라 쫓겨 가는 형식이라면 좋지 않다. 중고등학교 때 일찍 유학을 

떠난 녀석들 중 유학에 성공한 녀석은 20%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것도 적응을 

했다는 차원에서의 성공이지, 정확히는 조기유학의 대부분은 실패를 해 다시 돌아

오거나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최소한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는 상대와 함께 보내라고 그에게 제안하자 

그가 피식 웃는다.

“내가 왜 그 녀석 걱정을 해야 하는데?”

“……아들이잖아.”

“그냥 어디서 굴러온 거지, 원해서 생긴 아이도 아닌데 신경을 써야 하나?”

너무나 그다운 그 말에 순간 욱해 버렸다.

“그럼 나에 대한 신경도 좀 꺼주지? 재영이가 간다면 나도 따라갈 거야.”

“가고 싶다면 가봐. 금치산자를 태워줄 비행기가 있다면.”

또 다시 끔찍한 상황을 일깨워주는 그의 얄미운 말투에 목소리가 날카로워진다.

“그럼 어쩌라고?”

“그냥 둬. 너랑은 상관없는 문제잖아.”

“다른 문제는 그렇다 쳐도 재영이 문제는 아니잖아.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제

대로 말을 해. 다른 데 가서 화풀이하지 말고, 나한테 제대로 말하라고.”

화를 참지 못하고 다시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건 네가 알아낼 일이지. 잘 기억해봐. 내가 왜 이러는지, 그리고 네가 뭘 해

야 하는지.”

“기억 안 난다고 했잖아.”

“그래도 기억해내. 어떻게 해야 내가 화를 풀지, 네가 생각해봐.”

“무릎이라도 꿇고 빌까?”

“그건 추천하지 않아. 고개 뻣뻣하게 들고 무릎만 꿇어봤자 더 화만 나니까. 사

과하고 비는 것도 진심이 들어있어야 마음이 움직이는 거지, 너처럼 마지못해 빌

어준다는 표정으로 애원해봤자 소용없어.”

그 말을 재현은 비웃었다.

“진심이라는 게 뭔지는 알고 하는 소리야?”

이죽거리는 그 말에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선다. 

“적어도 보이는 건 알지. 넌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나는 타입이니까. 그러

니까, 비는 건 안 돼. 자, 그럼 어떻게 날 설득할 거지?”

어서 뭐든 이야기해보라는 그 얼굴에 차갑게 되받아쳤다.

“난 모르니까 당신이 말해봐. 어떻게 해야 날 좀 조용히 내버려둘 건지.”

“유혹을 해도 좋고, 침대로 끌어들여 달래는 것도 좋지. 베갯머리송사처럼 잘 먹

히는 건 없으니까.”

바로 눈을 들여다보며 웃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확하니 얼굴로 피가 몰렸다. 그

의 위로 올라타서라도 설득을 하라던 재원의 말이 떠올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가 눈웃음을 치며 좀 더 다가선다.

“잘 생각해봐. 내가 화를 내면 네가 어떻게 달랬는지. 나한테 어떻게 매달리고 

속삭였는지 기억해봐.”

그래봤자 전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려는 순간 기억해냈던 몇 가지 기억들 중 하나

가 스쳐갔다. 그의 손을 잡아끌고 먼저 유혹을 하며 넥타이를 풀어내리던 그 감촉

이 떠올랐다.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그를 잡아끌던 순간의 기억에 손에 들고 있던 

커프스와 넥타이가 툭 하니 바닥으로 떨어져내린다.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부드러

운 실크 넥타이를 바라보자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흘러내리던 그 

감촉을 기억한다. 그 부드럽고 매끈거리는 천이 손바닥을 빠져나가는 순간 그의 

옷깃을 잡고 단추를 풀어내리던 것도 기억난다. 그와 함께 뚝 끊겼던 기억의 다음 

순간이 떠올랐다.

『미치게 해줘. 다른 건 생각 안 나게.』

그의 목에 매달리며 노골적으로 그를 원한다고 속삭이는 자신의 음성에 절망이 찾

아들었다. 그 순간, 자신은 분명 제정신이었다. 기억이 명확한 건 아니지만 그 말

을 하는 자신의 음성과 그 순간의 감각으로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기억을 하

고 못 하고의 문제를 떠나, 그건 분명 자신의 의지였다.

미쳐서 그와 관계를 가졌던 게 아니라, 그와의 관계 때문에 차라리 미치길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생생히 떠오르는 입맞춤과 그에게 매달려 몸을 부비는 자신의 모습에 정신이 아득

해져 멍하니 서 있자 그가 바로 앞에서 속삭여온다.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렇게 해봐. 내가 널 위해 뭘 하게 만들어보라고.”

“…….”

“네가 잘하던 거잖아. 사랑한다 말하고 매달려 봐. 달콤하게 몸을 열고 날 유혹

하고, 원하는 걸 속삭여. 그렇게, 내가 들어주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만들어봐.”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음성과 바로 앞에 선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체향, 그리고 

옷자락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숨이 가빠온다. 무서울 정도로 강한 심장의 

고동에 시야마저 흔들리는 듯했다. 습관과 관성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무의식

중에 자신의 몸은 그의 목소리와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고 있었다.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며 체온 역시 뜨거워져 간다.

아주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는 순간 그에게 매달릴 것 같은 몸의 반응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이를 악물었다. 더는 본능과 충동에 따라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된

다면, 또 결국 같은 상황의 반복일 뿐이다.

미쳐야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라면 바꿀 수 있을 때 바꿔야 한다. 그리고 바

로 지금이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본능을 

억누른 채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엔 제대로 된 답을 돌려주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거 알잖아. 난 그런 건 못 해.”

그 말에 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받아친다.

“언어 선택을 잘 해야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지.”

결국 네겐 그 정도의 성의는 없는 거라고 비웃는 듯한 그 말에 그를 응시한 채 그

가 원하는 대로 진심으로 애원했다.

“대신 부탁할게. 재영이랑 재원이 그냥 둬. 그냥 놔두기만 해도 돼. 어쨌든 당신 

아들이잖아.”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 아주 조금이나마 혼란스러운 듯 일렁이던 그 눈빛에 기대 그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자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그답지 않게, 마음이 약해진 듯한 그 미소에 다시 입

을 열려 하자 그의 손이 목을 끌어안아온다. 그리곤 바로 귓가에 속삭인다.

“쉿.”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그렇게 말한 뒤 자신의 머리카락 위로 입을 맞추

던 그가 이내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진짜, 재영이를 혼자 보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신이 명확히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듣는 그의 너무나 다정한 말투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따뜻하고 상냥한 말투였다.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줄 듯 달콤한 음성에, 목을 쓰다듬는 손길조차도 마냥 따뜻하기만 하다.

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할 때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소 그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태도에 멍한 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그게 네가 가장 원하는 거야?”

그 말에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하자 그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하게 흐

드러지듯 귓가에서 울리는 그 웃음소리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그의 팔을 손으로 잡

으며 밀어내려하자 그가 다시 한 번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인다.

“그래. 그럼 반드시 혼자 보내야겠군.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게 

좋겠어.”

그 말에 재빨리 그를 밀어내자 그보다 먼저 뒤로 물러선 그가 욕실을 향해 돌아서

며 눈웃음을 흘린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얼굴로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재

빨리 그의 소매 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자신을 돌아본다. 할 말이 있

으면 해보라는 듯한 그 표정에도 입술이 움직이질 않는다. 막상 붙잡긴 했지만 무

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질 않는다.

그래서, 바보처럼 멍청한 말을 내뱉어버렸다.

“그러지 마.”

“…….”

“나한테 화난 거면 나한테 화풀이해. 애들한테는 그러지 마.”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그렇게 매달리자 그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하게 바뀌어간다

. 가면을 쓴 듯 순식간에 변해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자 그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니까, 바로 그게 문제라고. 네가 이러면 이럴수록 내가 더 열 받는다는 걸 

알아둬. 지금도 겨우 참고 있는 거니까.”

말과 함께 그가 자신의 손을 뿌리친 뒤 욕실로 향해 걷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

는 말만 남긴 채 그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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