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유난히도 쾌청한 오전이었다. 아직 햇살이 뜨겁고 습도 역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어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공기가 선선해졌다.
밤새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하며 뒤척거리던 재현은 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서 샤
워를 한 뒤 검은색의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교복과는 조금 다른 타이트하고 얇은
옷감의 양복을 걸친 뒤 거울 앞에 선 재현은 검은 넥타이를 매며 차분히 오늘 일
을 정리해보았다.
삼촌의 막재는 할머님께서 다니시는 서울 근교의 절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삼촌
의 사인이 사인이다 보니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49재도 가족들만 참석한 채 조촐하
게 치를 예정이라고 들었다. 어차피 친구도 없던 사람이니 가족 외엔 딱히 참석할
이들도 없다.
어떤 이유가 있든,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으니 마지막 가는 길만은 꼭 참석해야
한다. 오전 중에 49재를 치른다 들었으니 절에 가 막재가 끝나면 돌아오는 길에
병원에 들른다는 핑계로 내려 그대로 김포 공항으로 가면 된다. 몇 가지 검사와
상담을 한다면 서너 시간 정도는 벌 수 있다. 혹시나 해 방금 전 서진과 통화를
했는데 그도 오늘은 여러 가지 일정으로 바빠 49재에는 참석하지 못한다 들었다.
어차피 그다지 친분도 없던 관계니 아버지의 비서인 그가 참석할 이유는 없다. 혹
시 자신을 챙기러 들를까 걱정했지만 오늘은 여기저기 갈 곳이 많아 들를 시간이
없다고 했으니 아마 할머니와 자신이 함께 움직이게 될 거다. 그럼, 빠져나오는
건 쉽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윤진경은 가족이 아니니 49재에는 직접 참석하지는 않겠지만 그녀의 성격이라면
근방까지 따라올 것이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따로 저장해두지 않았으니 잠깐 스칠
때 이야기를 하고 번호를 받으면 된다. 그리고 49재가 끝난 뒤 최대한 빠른 일본
행 비행기 편을 예약하고 떠나면 된다.
매듭이 진 넥타이를 고정시키며 재현은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문득 쓰게 웃
었다.
삼촌의 49재에 참석하면서도 온통 정신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여전히 그의 죽
음이 실감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지금 자신의 눈앞에 터진 일이 너무 크다보니 죽
은 삼촌을 애도하고 그의 영혼이 편히 쉬길 빌어줄 여유 같은 게 없었다.
묵직한 죄책감이 심장을 눌러온다. 평생을 외롭게 살던 그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
외롭게 만든 것 같아, 가슴이 무거웠다.
워낙에 외로움을 많이 타던 사람이었다. 타고나길 여리고 예민하게 타고난 그에게
이 집의 환경이나 사람들은 독이었다. 어리던 자신을 포함해 집안사람들 모두가
보통 성미는 넘는 사람들이다 보니 기가 약하고 여린 그로서는 늘 어깨를 움츠린
채 사람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늘 그는 겁에 질려 있었고, 동시
에 애정에 굶주린 얼굴로 사람들을 힐끔거렸다.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럽기도 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에 오
히려 마음이 쓰였고 자신보다 약하기에 그를 보살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은 끝까지 그를 돕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를 자살로 몰고 간
게 자신일지도 모른다.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재원이 자신을 ‘
살인자’라고 칭할 정도라면 분명 삼촌의 자살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건 자신
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49재에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한다. 영혼이라는 것뿐 아니라, 불
교에서 이르는 중음신(中陰神)이나 환생, 혹은 혼의 심판이라는 것도 믿지 않지만
만약 오늘이 그가 이승에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면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건 선택이 아닌 자신의 의무였다.
오전 8시. 정확한 시간에 나와 예상한 대로 할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집을 나선
재현은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49재를 지낼 사찰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섰다.
도심과는 달리 선선한 공기가 가득 찬 숲 속에 위치한 사찰을 재현에게도 눈에 익
은 곳이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49재 역시 이곳에서 지냈는데, 할아버지의 경
우는 일곱 번의 재를 모두 직접 절에 와 치렀기에 이곳에 온 건 정확히 여덟 번째
였다. 그게 벌써 6년 전 일이지만 그때와 별 변함이 없는 곳이라 주차장에서 내려
서 잠시 그곳을 돌아보던 사이 바로 뒤따라 나온 차가 멈추곤 그 안에서 재원과
한 아이가 내려서는 게 보였다.
검은 상복을 입은 이미 두 아이를 바라보던 재현은 재원과 함께 내려서는 한 아이
를 본 순간 2년이란 세월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자신이 기억하던 것보다
도 훨씬 더 자란 재원을 보고도 놀랐지만 2년 사이 불쑥하니 자라 어느새 재원의
가슴팍에까지 닿고 있는 아이를 보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작고 약하던 그 아이가 어느새 저렇게까지 자라 있었다. 얼굴을 어린 시절
그대로 곱고 사랑스럽지만 키도 뼈대도 무서울 정도로 자라 있었다. 대체 이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또래 중에서도 작은 축에 끼던 그 아이가 이젠 자
신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놀라움과 황망함에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이쪽을 돌아본 아이가 겁을 먹은
듯 시선을 피하며 재원을 향해 돌아선다. 그와 함께 재원의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
을 향해온다.
그 눈을 보자 가슴 한쪽이 서늘해져 온다. 다시 떠오른 죄책감에 이번에는 자신이
시선을 피한 뒤 할머니와 함께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아이들이 따라서는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애써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그래도
그 시선은 어쩔 수가 없었다.
따끔한 바늘 같은 시선이 목덜미를 계속해서 찔러대고 있었다.
9시 30분 쯤 되자 불당 안으로 가족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그래봐야 할머니와 삼
촌 두 분, 고모 두 분과 뵌 적 없던 큰어머니와 고모부, 그리고 자신과 동생들이
전부였다. 그래도 열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기다리던 사이 막재가 시작되
었다.
처음 하는 게 아니라 대강 순서는 기억하기에 재현은 준비 중인 사람들을 바라보
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좀 다른 듯했다. 그게 신경에 거슬렸다. 분명히 삼촌
의 칠칠일재를 지내러 온 사람들임에도 막상 불당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막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다들 자신을 힐끔거리며 이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별 말
은 하지 않았지만 시선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혼자 웃기도 하면서, 또 가끔은
비웃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이 문드러질 것 같
았다. 어찌나 빤히 바라보는지, 재를 준비 중이던 스님들조차 당황스러워 이쪽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역시 이 사람들 질색이야, 라는 말을 안으로 곱씹으며 재현은 이를 악문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저 시선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순간 끝장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이 집안사람들 사이에서는 삶의 모든 것들이 투쟁과 분쟁이
라 잠시라도 머뭇거리거나 물러서는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작은 틈도, 허
점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져 상대를 미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 상대가 아무리
약한 아이라도 절대 봐주지 않는다. 약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없는 사람들이다. 신경줄 질기고 강한 사람들은 이겨 버티는 거고,
못 버티는 사람들은 우울증이든 뭐든 걸려 도망치게 된다.
아주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자신이 뭔가를 기억하고 있다고 달려들지도 모르기
에 재현도 전투적으로 이 상황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없는 척, 아무 기억도 안 나는 척 뻔뻔하게 굴어야 한다.
간소화해 치른다면 막재도 기껏해야 두세 시간 정도다. 그 정도는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재현은 하루 같은 1초를 견뎌내고 있었다.
막재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삼촌의 사진과 아끼던
물건들을 모조리 태우고, 마지막으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승무와 불경을 읊은 뒤
막재가 끝나자 비로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여전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
의 시선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서 느릿한 걸음으로 불당을 나오던 중 문득 뒤를 돌
아보자 느릿하게 움직이는 재영이 보였다. 앞으로 당분간은 못 볼 것 같아 잠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바로 재영의 옆에서 함께 움직이던 재원이 자신을 노려본다.
그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말라는 듯 경고하는 듯한 냉랭한 그 얼굴에 씁쓸한 감정
이 몰아쳤다. 삼촌을 보내는 막재 내내 다른 생각을 한 뒤에도 막상 재원과 눈을
마주치자 죄책감과 씁쓸함이 몰아쳐 왔다. 그게 삼촌에게 미안하고 또 서글프기도
했다. 죽은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삼촌을 애도하는 기색
없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자신도 결국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만 신경 쓰고 있었다.
죽은 이는 말이 없기에, 산 사람들만을 신경 쓰고 있다.
조금 슬프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씁쓸한 기분에 할머님과 다른 가족들이 주지스님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도망치듯
불당을 나선 재현은 몸을 감싸는 서늘한 공기에 길게 심호흡을 했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햇살이 꽤 강한데도 절 안의 공기는 차고 맑다. 숨이
탁 트이는 느낌에 천천히 돌계단을 내려서자 넓은 뜰과 우뚝 선 석탑이 보였다.
여름이라 돌담 너머의 숲도 뜰도 푸르렀다. 눈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광경에 천천
히 뜰을 돌아보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으로 비행기편을 확인했을 때 김포에서는 1시 50분, 3시 50분 비행기가 있
었다. 물론 표는 없는 상태였지만 운이 좋으면 3시 50분 비행기는 탈 수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을 하던 사이 바로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벌써 끝났어?”
제법 귀에 익은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검은색의 원피스를 단정하게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윤진경이 서 있었다. 역시나 가족은 아니라 49재에는 참석하지 않았지
만 격식은 갖춘 채 시간에 맞춰 이곳에 와 있던 모양이었다. 아무도 반기는 이도
없는데 참 부지런하다는 생각에 그녀를 향해 돌아서자 그녀가 주변을 슬쩍 돌아보
더니 한 걸음 다가선다.
“생각해봤어?”
목적어는 빠져 있지만 그녀가 가리키는 게 뭔지 빤하기에 직접적인 답보다는 다른
말로 긍정의 뜻을 비쳤다.
“전화번호 주세요.”
“응?”
“그쪽 연락처 모르니까요.”
그 말에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들고 있던 검은색의 클러치에서 메모
지 한 장을 꺼내 건넨다.
“핸드폰으로는 전화하지 마. 공항에 가서 공중전화로 해.”
“……그러죠.”
“넌 모르겠지만 세상이 좋아져서 핸드폰끼리 위치 추적도 가능한 세상이야. 지금
떠날 거면 적당한 데서 핸드폰 꺼 놔.”
그 말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사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줄줄이 이쪽으로 향해 오
는 게 보였다. 검은 옷을 걸친 이들의 모습에 서둘러 메모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그쪽을 바라보자 윤진경이 가장 앞선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다.
“잘 끝내셨어요?”
“그래. 굳이 안 와도 되는데 헛걸음 했구나. 재현아, 이만 돌아가자.”
냉랭한 투로 윤진경에게 말을 마친 할머니가 자신을 향해 말을 걸자 재현은 재빨
리 말을 돌렸다.
“할머니, 전 여기서 곧장 병원으로 갔으면 하는데요.”
“병원? 병원은 왜? 어제 갔다며?”
“어제 선생님이 바쁘셔서 오늘 예약해두고 왔어요. 머리도 너무 아프고 어제 일
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오늘 다시 검사를 해보려고요. 상담하고 몇 가지 테스
트를 해봐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요.”
이틀 전 밤 밤중의 전력질주가 꽤 괜찮은 변명거리가 되고 있었다. 갑자기 뛰쳐나
간 이유도, 그리고 뛰쳐나간 것 자체도 기억이 안 난다고 둘러대고 자기 발로 병
원에 가 진단을 받겠다고 하면 딱히 말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 윤기사랑 같이 가렴. 난 정후랑 움직이면 되니까.”
“아니에요. 그냥 산 아래에서 내려주시면 택시타고 움직일게요. 예약 시간이 빠
듯해서요.”
“그래라, 그럼. 이만 가자.”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먼저 움직이는 걸 보곤 옆으로 물러섰다 그녀가 먼저 가길
기다리던 사이 옆으로 스쳐가던 작은 고모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기가 미친 건 아나보지?”
나름대로는 작게 중얼거린다고 한 말이지만 자신뿐 아니라 함께 걷던 이들이 모두
들어버린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한다. 못 할 말 했냐는 듯한 그
반응에 그녀를 지나 걸으며 그대로 받아쳐주었다.
“사고치고 아는 것보다는 미리 예방하는 게 나으니까요.”
약간의 조울증에 도벽까지 있어 종종 쇼핑이나, 술, 그리고 마약과 관련된 일로
사고를 치던 그녀에게 뼈가 있는 말을 던지자 그녀가 확하니 붉어진 얼굴로 자신
을 노려본다. 그 시선에 다음 말을 이어갔다.
“조울증이 심해지면 갑자기 자살도 한다는데 지금이라도 상담 받아보세요. 한 집
안에서 두 명이나 자살을 하는 건 좀 보기 그렇잖아요?”
“너나 조심해.”
“전 자살 같은 건 취향에 안 맞아서 끝까지 버틸 생각이거든요. 아마, 제가 제일
오래 버티지 않을까요?”
이 집안 사람들 중에서, 라고 말한 뒤 그녀를 내려다보자 그녀의 얼굴이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당장 물어뜯기라도 할 것 같은 그
얼굴에 일부러 걸음을 서둘러 앞서 걸으시던 할머니의 옆으로 다가서자 할머님께
서 흘깃 이쪽을 돌아본다.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입 꼬리는
아주 미묘하게나마 올라간 채였다.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이 또 떠올랐다. 할머니는 본인이 낳은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삼촌들이나 고모들을 싫어했다. 그것도 거의 혐오 수준으로 남편의 부정으로 태어
난 아이들을 증오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문득 소름이 끼쳐왔다. 강압적인 폭군 기질이 강하셨던 할아
버지와 감정을 전혀 드러내는 일은 없지만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누구보다도 격렬
한 증오를 갖고 있던 할머니,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유일하게 사랑 받았던 아버
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질투하고 시기하면서도 그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던 삼촌들과 고모들.
할아버지는 그의 자식들도 손자들도 모두 싫어했지만 아버지만은 사랑하셨다. 그
애정이 과해, 큰 아들을 위해 당신의 다른 아이들을 학대하는 수준이었음에도 그
는 큰아들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와 애정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돌아가시는 순
간에도 찾아오지 않은 큰아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필요 이
상의 것들은 하나도 남겨주지 않을 정도로, 돌아가신 분의 애정은 병적이었다. 그
건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께서는 그분이 낳은 유일한 아들인 아버지에
게 과한 관심과 사랑을 쏟았다. 겉보기에는 다른 자식들과 별 차이가 없는 듯했지
만 그녀는 그녀의 큰아들이 원한다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폭력적이
고 강압적인데다 바람기가 심했던 할아버지에 대한 반동이었던 건지 단지 그녀의
성격이 원래부터 그런지는 몰라도, 그녀는 큰아들의 여자들을 싫어했고 유일하게
그 아들을 닮은 재원만을 아낄 정도로, 아버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묘한 그들의 알력 관계가 선명하게 눈에 보이자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집
으로 돌아온 뒤 자신을 대하던 할머니의 태도나 자신을 이용해 윤진경을 견제하고
, 방금 전 그녀가 싫어하던 둘째딸과 언쟁을 하는 순간 그 기쁨을 참지 못한 그녀
의 얼굴을 떠올리자 솜털이 쭈뼛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지금 순간, 그녀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 대해 무
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걸 깨달은 자신에게 진저리가 쳐졌다. 굳이 몰라도 되는 일들만 빠르게 기억하
고 깨달아버리는 자신이, 증오스러울 정도였다. 그와 함께 어서 떠나야 한다는 생
각에 더욱 절실해졌다.
더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럼 더 무서운 일들이 생길 것 같았다.
할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병원 근방에서 내린 재현은 먼저 병원 앞에서 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가지 검사를 받으러 왔다는 말과 함께 검사하는 동안 핸드폰을
꺼둘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 뒤 윤진경의 충고대로 핸드폰 전원을 끄곤 병원에
서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김포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1시 40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채 향냄새까지 달고 다니는 건 이상해 코인라커에
서 가방을 찾아 반소매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고 검은 양복은 가방 안에 넣고 먼
저 공항으로 와 비행기 편을 확인했다. 1시 50분 발은 이미 이륙 준비 중이라 3시
50분발 비행기 편의 여분 좌석을 확인하기 위해 갔지만 역시나 좌석은 만석이었다
. 9월이라 슬슬 비수기임에도 이미 대기까지 꽉 찼다는 그 말에 잠시 여기서 기다
릴까 망설이다 결국 다시 공항철도 쪽으로 가 지하철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
직통열차로 30분 정도가 걸려 도착한 인천공항역을 빠져나와 공항 로비에 도착했
을 때는 3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번호표를 뽑고 10분 정도를 기다
리다 호명되는 번호에 데스크로 가 서 일단 항공편을 확인했다.
“오늘 일본행 비행기 중에 좌석이 있나요? 좌석은 상관없는데요.”
일반석이든 비즈니스석이든 일등석이든 상관없다고 초조한 얼굴로 그렇게 묻자 직
원이 빠르게 모니터를 보고 검색을 하더니 미소 띤 얼굴로 답해준다.
“4시 50분 발 일등석 네 좌석 예약가능하십니다.”
운이 좋았다. 일등석이지만 좌석이 남아 있다니 다행이었다.
“예약해주세요.”
“좌석은 어느 쪽으로 해드릴까요? 가장 뒤쪽의 창가좌석과 통로 쪽 좌석이 있는
데요.”
“창가로요.”
“네. 여권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서둘러 가방 안에 있던 여권과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자 여권을 받아
든 그녀가 빠르게 손을 움직인다. 그리곤 곧 결제까지 끝낸 뒤 티켓과 여권을 건
네준다. 그와 함께 출국심사장과 출국 게이트를 알려주는 그녀에게 인사를 한 뒤
재현은 여권과 티켓, 그리고 카드를 받아든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리고 있었다. 딱 맞는 시간에 항공권이 있었고 결제도 티켓
구매도 간단했다.
그 순간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일이 너무나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쁘다기보다 불안했다. 이렇게 아무 준비 없
이 즉흥적으로 시작한 일들이 너무나 잘 진행이 된다는 게 불안했다.
일이 잘 풀리는데도 점점 가라앉아가는 기분에 주머니에 손을 넣는데 문득 종이
한 장이 잡혔다. 윤진경이 건네준 쪽지였다. 일단 연락은 해야 할 것 같아 먼저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공중전화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둘러보다 바깥쪽의 공
중전화기를 발견하곤 방에 보이는 카페로 가 음료를 한 잔 사고 동전을 바꿔 그쪽
으로 향했다.
동전이 얼마나 들지 몰라 백 원 짜리는 몇 개 한번에 넣은 뒤 그녀의 번호를 누르
고 잠시 기다리자 통화가 연결되었다.
「응.」
“지금 인천공항이에요.”
짤막한 그 말에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래?」
“4시 50분발이에요. 6시 15분 도착 예정이고요.”
일단 항공권은 카드로 결제를 하긴 했지만 지갑 안에는 몇 만원뿐이었다. 신용카
드가 있기는 하지만 비밀번호도 모른다. 당장 무일푼으로 연고지도 아는 사람도
없는 일본으로 입국을 하는 게 막막해 소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자 그녀가 알겠다
는 듯 빠르게 답해온다.
「입국 심사하고 나가면 내 사촌이 가있을 거야. 현금 준비해줄 테니 당분간 사촌
네서 쉬고 있어. 핸드폰도 사촌이 갖다 줄 테니 그걸로 연락하면 돼.」
“네.”
「잘 생각한 거야. 간 김에 푹 쉬고 와. 천천히 관광하고 온천에라도 가서 쉬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생각해봐.」
“알아서 할게요.”
「그래, 그럼 이만 끊을게.」
집안이라 눈치가 보이는지 그녀가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일단 일본에 가서 공항
에 우뚝하니 앉아있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 통화를 끝낸 뒤 전화기를 올려두곤 전
화박스를 빠져나왔다.
오후지만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외부로 나와 다시 한 번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계획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
일단 잘 곳은 마련했지만 일어라고는 전혀 못 하기에 여전히 막막하긴 마찬가지지
만 비행기에 올라탄 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지금은 움직이자. 멍하니 서 있는 것보다는 그 쪽이 낫다.
음료수를 대강 마시고 버린 뒤 3층으로 가 들고 있던 짐과 몸을 검사한 뒤 출국심
사장으로 가 직원이 설명해준 대로 C열에 선 채 잠시 기다리자 자신의 차례가 돌
아왔다. 출국심사라 조금 긴장을 하긴 했지만 여권과 얼굴을 확인한 뒤 간단히 체
류날짜와 목적 등에 대해서만 묻는 듯해 잠시 기다리고 있자 카운터 위에 앉은 남
자가 여권과 티켓을 보여 달라는 말을 건넨다.
그 말에 순순히 여권과 티켓을 건네자 뭔가를 확인하던 그가 빤히 자신을 바라본
다. 그 시선에 눈을 껌뻑거리자 다시 한 번 화면을 바라보던 그가 어딘가와 통화
를 한다. 바로 앞선 사람들의 경우는 몇 분 걸리지도 않아 문제없이 통과를 했지
만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을 쓰고 있자 잠시 후 그가 말을 건넨다.
“이 여권은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네?”
“사용 불가능한 여권입니다.”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날짜를 보니 작년에 만든 거였고 만료일은 아직도 6년
이나 남아있었다. 방금 전 확인했던 거라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자
잠시 후 검은 정장을 걸친 직원 둘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자신의 옆으
로 다가서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죠? 아직 만료일이 남아 있는데 사용할 수 없다뇨?”
“보호자분께 곧 연락이 갈 테니 잠시 사무실에서 대기해주십시오.”
“네?”
어이없는 그 말에 계속해서 멍청하니 ‘네?’라고 되묻던 사이 직원이 한쪽 방향
을 가리키며 어서 저쪽으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어이없는 상황에 일단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향해가자 직원이 자신을 작은 사무실로 안내한다. 얼결에 사무실
로 들어서기는 했지만 분명히 티켓을 살 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여
권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에 자신을 안내해준 직원을 돌아봤다.
“무슨 일인데 여권 사용이 안 되는 건데요?”
“잠시 기다리십시오.”
“기다리기 전에, 왜 여권을 쓸 수 없는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화를 내듯 그에게 따지자 그가 잠시 망설이다 또 같은 말을 반복한다.
“여권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법적대리인이 오실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그럼.”
짤막한 말을 남긴 채 사무실을 나서는 그를 보다 기가 막혀 가방 안에 있던 핸드
폰을 꺼내들었다. 전원이 꺼진 핸드폰을 켠 뒤 잠시 기다리다 이미 외워둔 윤진경
의 번호를 찾아누르자 잠시 후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
「왜? 문제 있어?」
“여권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무슨 소리죠? 여권이 취소가 됐다는데, 아는 거 없
어요?”
「어…… 그럴 리가 없는데……. 너 그 사람 출장 나갈 때 따라 나간다고 만든 건
데…… 잠깐만…… 설마…… 진짜 그게 됐나? 벌써 처리될 리가 없는데…….」
마지막 말에서 감이 왔다. 이 여자는 뭔가 알고 있다. ‘벌써’라는 말을 쓰는 걸
보니 그래서 서둘러 자신에게 출국을 하라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처리가 되는데요? 뭘 알고 있는 거죠?”
「최변호사 사모님께 나도 우연히 들은 건데…… 그게 그렇게 쉽게 처리가 안 되
는 일인데…….」
최변호사라면 아버지의 고문변호사다. 그리고 자신의 변호사이기도 했다. 뭔가 수
를 쓴 건가 해 다시 따지듯 물었다.
“그러니까, 뭐가요? 뭐가 쉽게 처리가 안 되는데요?”
「……두 달 전쯤에 금치산자 신청을 했다고 들었거든.」
그 말에 감이 왔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그걸
인정할 수가 없어 그 주체를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누가요? 누가 금치산잔데요?”
「너.」
예상했던 답이었지만 막상 직접 듣자 충격은 컸다. 멀쩡한 사람에게 금치산자라니
, 그 전에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신청을 하고 어떤 미친 인간이 자신을 금치산자
로 선고를 한 거냐고 화가 나 따지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몹시 불길했다. 단순한 노크 소리임에도 등 뒤로 한기가 스치는 듯한
기분에 핸드폰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문을 돌아보자 곧 문이 열려간다.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열리는 그 문틈으로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시원한 남색의 여름양복을 걸친 채 언제나 액세서리처럼 달고 다니는 서진과 몇
명의 수행원들을 배경으로 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
다. 그리고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 그럼 일단 나와. 해외는 안 되니까 국내로……. 여보세요? 서재현, 여보세
요?」
핸드폰을 손에 든 채 그대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그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 자
신의 손에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든다. 그리고는 여전히 ‘여보세요“’를 반복하
는 상대에게 자신을 대신해 답해준다.
“내가 직접 왔으니 신경 쓸 거 없어. 너와는 돌아가서 직접 얘기하지. 끊어.”
말과 함께 뚝 하니 전화를 끊은 그가 핸드폰을 든 손을 뒤로 내밀자 서진이 재빨
리 다가서 그 핸드폰을 받아든다.
“번호 노출됐으니 데이터 모두 옮기고 해지시켜.”
“알겠습니다.”
짤막한 답과 함께 서진이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는 뒤에 선 다른 직원들과 함께 사
무실에서 빠져나간다. 가벼운 걸음소리와 함께 곧 문이 닫히자 그가 자신을 바라
보며 웃는다.
재미있다는 듯 눈을 휘며, 아주 예쁘게 웃어 보인다.
“오랜만이지? 너한테는 2년만인가?”
“…….”
“서진이에게 대강 상황 보고는 들었지만 기억이 없어도 못된 버릇은 여전하네.
툭하면 사라지고 도망치고. 넌 이게 재미있을지 몰라도 난 재미없거든.”
그 말과 함께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얼굴
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그가 그만큼 다가선다.
“진짜, 널 어떻게 할까? 성질대로 해버리자니 내가 아쉽고, 그냥 두자니 미칠 것
같고. 어떻게 할까? 응? 네가 말해봐.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하지?”
방금 전 웃고 있던 얼굴은 거짓인 듯 살기마저 내뿜고 있는 그의 얼굴에 뒤로 더
물러서자 그가 다시 눈초리를 접으며 웃는다. 그리곤 그 표정과는 전혀 다른 냉랭
한 음성으로 말을 건넨다.
“뭐, 좋아. 기억이 없다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이번엔
그렇게 쉽지 않을 거야. 더는 나도 너한테 속아주지 않을 테니까.”
뜻 모를 그 말에 멍하니 그를 바라바보고 있자, 그가 마지막 말을 남긴다.
“다시 돌아온 걸 축하해, 서재현. 또 시작해보자고. 이번엔 누가 이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