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번 역이 종착
역이니 잊으신 물건 없이 내리라는, 극히 기계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눈앞에 선 지
하철 안에서 울려왔다.
정신없이 학교를 나와 학교 근처의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종착역에서 내린 재현은
역의 벤치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막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으로 향
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저 생각하고 생각할 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단서들과 지난 사흘간의 기억들
을 하나하나 그러모아 아귀를 맞추고 가설을 세우고, 어떻게든 지금 자신이 느끼
고 있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내려 촉을 세우고 모든 기억들을 잡
아끌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아는 게 사실이라는 증거만 늘어갈 뿐이
다.
지난 사흘간의 기억들과 사람들의 묘한 시선들, 그리고 그들이 던지던 난해한 이
야기들. 자신이 기억이 없다는 말을 믿지 못하던 이들과 자신을 보며 비웃던 윤진
경의 표정, 그리고 그녀의 말들, 그리고 묘하게 친절하시던 할머니와 낭패라는 얼
굴로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던 서진의 태도까지.
그 모든 것들을 지금 자신이 예감하고 있던 것과 결부시키면 맞아떨어진다. 정확
하게, 한 치의 틈도 없이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분명 그와의 관계에 대한 기억은 선
명함에도, 자신의 뇌가 납득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만약 그게 사실
이라면, 만에 하나 모든 게 자신의 생각대로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은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건, 지난 사흘간의 기억으로
만 돌아봐도 최소한 할머니와 윤진경은 그와 자신의 관계를 알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이 병적이다 싶을 정도로 폐쇄적인 집안에서 일단 외부인인 윤진경이 알고 있을
정도라면 집안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재원이나 재영도 뭔가를 알거
나 눈치 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는 순간 명치가 콱 막힌 듯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 어쩌다가, 그런 관계가 되었던 걸까?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 어떻게 내가 그런 대범하고 미친 짓을 저질렀던
걸까?
대체 왜,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사람이었던 걸까?
어째서?
거기까지 생각하던 재현은 문득 고개를 뒤흔들었다. 이미 그걸 사실이라고 인정하
고 받아들이는 스스로에게 진저리가 쳐졌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단서만으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자신의 본능이 그게 사실이라고 외쳐도 쉽게 인정해서는 안 된다
.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안 된다, 그건. 그와 자신
의 관계도 그렇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건 더더구나 말도 안 된다
. 알았다면 어떻게든 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손을 댈 수 없으니 자신을 정신
병원에 처넣든, 유학을 보내든, 어떻게든 수를 썼을 거다. 가족들이 눈 멀쩡히 뜨
고 그걸 지켜보면서 단 둘이 나가 사는 것까지 묵인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너무
비상식적이다. 아무리 저 집안사람들이 다들 제정신이 아니라도 이건 말이 안 된
다.
그리고 또…….
필사적으로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부정할 수 있는 핑계를 찾던 사이, 핸
드폰이 울려왔다. 다시 조용해진 지하철 역 안에서 유난히도 크게 울리는 벨소리
에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자 ‘서진 형’이라는 글자가 반짝거린다.
오후 5시 47분. 액정에 뜬 시간을 확인하자, 집을 나온 시간으로부터 대강 네 시
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겨우 다섯 시간 연락 안 됐다고 난리를 치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네 시간 만에 겨우 전화가 한 통 왔다.
이 전화를 안 받으면 서진이 어떻게 나올까? 계속해서 전화를 할까? 아니면 끊었
다 시간을 두고 전화를 할까?
어떻게 반응할지 지켜볼까 고민하던 중 문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허탈한 웃음이 흐른다. 갑자기 돌기라도 했는지 사람들을 시험
하고, 의심하고, 확인하려 든다. 이런 건 좋지 않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따지
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신경이 문드러질지도 모른다.
침착하자.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하다. 지금은 아무 것도 확인된 게 없다. 차분하
고, 평소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르며 재현은 통화버튼을 눌렀다.
“응.”
「어디야? 윤기사 기다린다고 연락 왔는데.」
담담한, 서진의 물음에 그제야 그분에게 전화한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는 걸 떠
올렸다.
“미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지하철 타고 나왔어. 아저씨 그냥 들어가시라고
해. 내가 알아서 갈게.”
「지금 어딘데?」
“여기…… 신설동역.”
본가에서 한참은 떨어진 역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뭔가 생각하고 싶은 게
있거나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몰래 지하철로 빠져나와 종착역까지 가곤 했기에,
별 다른 설명은 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자 서진도 알아들은 듯 쉽게 수긍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그냥. 과방인지 뭔지에 가봤는데 온통 모르는 사람들뿐이라서. 건물에서도 누가
인사를 하는데 얼굴을 보고도 아무 기억도 안 나더라고. 그래서 좀 기분이 이상해
서 잠깐 나왔어. 머리 좀 식히려고.”
「진짜, 전혀 기억 안 나?」
“응.”
「너 학교생활 꽤 열심히 했는데, 아깝네.」
“나 학교생활은 언제나 열심히 했잖아. 지각, 결석, 조퇴 한 번 없이 열이 39도
가 돼도 학교는 나갔으니까.”
그건 최선이라기보다는 차악의 선택에 가까웠다. 학교가 딱히 좋거나 친구들이 좋
아서 열심히 학교에 간 게 아니라, 그 집이 싫으니 학교로 도망을 친 거다. 그나
마 편하게 숨 쉬고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학교뿐이었기에 어
떻게든 학교에서의 시간을 늘리려 했던 거지, 딱히 학교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적당히 사람들과 지내는 법은 알고 있으니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한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 굉장히 충실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나름 기대를 하고 갔을 텐데 아무 소득도 없다니 맥 빠질 만하네. 나 지
금 신설동 역 근천데 같이 들어갈래?」
갑자기 나온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여기는 회사와는 꽤 먼 거리인데 왜 이 사람이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여긴 왜?”
「이쪽에서 사람 좀 만나고 곧장 퇴근하려던 길이야. 역 앞으로 데리러 갈게. 나
와 있어.」
“아냐, 퇴근하는 건데 그냥 집에 가. 난 택시 타고 가면 돼.”
「저녁 좀 얻어먹고 가려고 그래. 모처럼 일찍 퇴근을 하긴 했는데 집에서 저녁
차려먹기 귀찮아서.」
도저히 거절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그 말에 긍정의 답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몇 번 출구 쪽인지 와서 전화해줘.”
「네비 보니 1번 출구 쪽이야. 그쪽으로 나와.」
“……응.”
통화를 끊고는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머리가 정리된 건 아니지만 자신이 멈춰 있다고 시간 역시 멈춰 자신을 기다
려주는 건 아니다. 받아들이건, 받아들이지 않건, 지금은 그 집으로 돌아가 아무
렇지 않은 듯 살아야 한다. 적어도 삼촌의 칠칠재까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굴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
그 집을 나서기 전처럼, 아무 것도 기억 못 하는 척,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어야 한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지하철역 1번 출구로 나오자마자 바로 역 앞에 멈춰 선 차를 발견한 재현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다독거리며 천천히 차로 다가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탁- 하며 차문
을 닫고 안전벨트를 매는데 서진이 천천히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며 가볍게 인사를
건네 온다.
“덥지?”
“응.”
“6시가 넘었는데도 해가 안 지네.”
“그러게.”
짤막하게 답을 하며 의자에 기대앉자 흘깃 이쪽을 바라보던 서진이 차선을 바꾸며
걱정스레 말을 건다.
“얼굴 안 좋다.”
“갑자기 모르는 얼굴들이 달려와서 인사를 하는데, 아무 일 없는 척 웃으면서 인
사하는 거 꽤 피곤하더라고.”
“친구들한테 네 상태 얘기 안 했어?”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럴 틈도 없었어. 우르르 몰려왔다 갑자기 전공 있다고 우
르르 몰려나가서.”
대학생활이라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다보니 이 말이 맞는 건가 싶기는 했지만, 아
까 선배라는 사람의 말을 토대로 그렇게 말을 던진 뒤 시선을 돌리자 서진이 천천
히 고개를 끄덕인다.
“너랑 친했던 애들은 다 하나로 뭉쳐 듣나 보네. 아직 학부라 전공이라도 강의
많을 텐데.”
“그런가 봐.”
“얼굴색 많이 안 좋은데 다른 일은 없었어?”
그 말에 순간 속이 뜨끔해왔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일단 입을 다물기로 한 채
라 일부러 창밖을 내다보며 무심한 듯 말을 흘렸다.
“없었어. 알아나 봐야 일이 있든가 말든가 하지. 어설프게 대화에 끼어들다가는
기억 없는 거 들킬 거고, 그럼 일일이 사정 설명해야 하는데, 그럼 사람들 또 신
기하게 쳐다볼 거잖아. 그런 거 번거롭고 귀찮아. 사람들한테 일일이 설명하는 것
도 한두 번이지.”
사실 어젯밤 메신저로 말을 건 과대에게 굳이 사정 설명을 하지 않은 것엔 그런
이유가 가장 컸다. 자신 역시 삼류 막장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 아니냐고 비웃던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설명을 하는 것도 싫고, 어쩔 수 없이 구구절절 설명을 해
야 한다 쳐도 그게 말이 되냐며 서진이나 윤진경처럼 계속해서 이것저것 물으며
‘이것도 기억 안 나?’하는 사람들이 절반 이상은 될 텐데 질문을 받는 것도 일
일이 답하는 것도 귀찮다. 그래서 그냥 멀쩡한 척하기로 한 거다. 언젠가 복학을
하게 된다 해도 그때는 기억이 돌아온 이후일 테니 상관없는 일이고, 만약 기억이
계속 안 돌아온다면 어차피 복학은 못 하니 그 친구들은 안 보면 그만이라는 생각
이었다.
“하긴, 그런 거 설명하기 번거롭지. 잘 믿지도 않을 테고.”
“나라도 못 믿을걸. 드라마에 나오면 전파낭비라고 채널 돌릴 거야. 이놈의 나라
에서는 불륜, 기억상실, 출생의 비밀이 없으면 드라마가 안 되냐고 비웃으면서 그
시간대에 그 채널은 피할걸.”
“그렇겠지. 넌 그런 거 싫어하니까.”
원래도 말랑말랑한 성미는 아닌 터라 마음에 안 드는 문제에 있어서는 가차 없다.
이러니 트러블이 많이 생기는 거라고 재현 본인도 자각은 하고 있었지만 타고난
성미가 워낙에 단단해 그게 잘 안 된다. 그 덕에 그 집에서도 기 죽지 않고 살 수
는 있었지만 그다지 도움이 안 되는 성미인 건 확실하다.
에어컨을 틀어놓은 시원한 차 안에 올라타자 어쩐지 몸이 쳐져 아무 말 없이 시트
에 기댄 채 아직 해가 훤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서진이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
졌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다시 그를 돌아
보며 물었다.
“왜? 할 말 있어?”
“……지금 상황에서 이런 걸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좀 그렇기는 한데…… 너
도 알고는 있어야 하니까 말할게.”
조금 무거운 그 음성에 재현은 잠시 서진의 얼굴을 살폈다.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진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는 그걸 필사적으로 숨
기려 하고 있었다. 기억이 없는 자신에 대한 배려인지 뭔가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
겠지만 하여간 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뭐든 상관없다.
“말해. 이제 더 놀랄 것도 없으니까.”
“……사장님 돌아오실 거야. 일정을 당겨서 49재에는 못 맞춰도 사흘 내로 돌아
오실 거야.”
갑작스러운 그 소식에 더는 놀랄 게 없다던 패기는 그대로 사그라져버렸다. 서진
의 말과 함께 머릿속을 채우는 그의 목소리와 그 손의 감촉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
시는 듯한 느낌에 주먹을 세게 쥐며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왜? 갑자기?”
“아무래도 네 상태도 이상하고, 갑자기 몇 시간씩 연락 안 되고 하니까 걱정되셨
나 봐. 내가 그랬잖아. 너랑 사장님 잘 지냈다고.”
“……일은?”
“잘 마무리됐어. 중요한 일이라 직접 가신 건데, 네 소식 듣고 빨리 마무리하신
것 같아. 사흘 정도면 될 거야. 너도 사장님 보면 기억 빨리 돌아올지도 모르고.
”
싫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상황에서 그 사람과 직접 대면하는 건 싫다. 아직
전혀 준비가 안 된 채였다. 도대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막막하다.
“형…….”
“응?”
어디로 쉬러 가고 싶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잊고 있
었는데 서진은 그 남자의 사람이었다.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서진의 입을
통해 그에게 전달되고, 그 사람의 지시대로 움직인다. 서진을 못 믿는 건 아니지
만 그를 통해 뭔가를 하려 한다면 그 전에 제재당할 가능성이 크다.
아직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다. 아직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다.
이미 운을 띄운 후라 어떻게 말을 할까 망설이다 적당히 말을 돌렸다.
“……나, 운전 다시 하고 싶은데. 연수 받을 수 있어?”
그 말에 서진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을 끈다.
“글쎄. 아직은 안 하는 게 낫지 않아? 왜? 불편해?”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운전했다니까 하고 싶어서.”
“하긴, 너 운전하는 거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당분간은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차도 있는데 연수만 받으면 되잖아.”
“너 기억 없어져서 스트레스 심한 상태인데 이런 때 운전하는 건 위험할 수도 있
어. 운전 자체도 초반에 스트레스 많이 받으니까.”
확실히 운전을 한 기억이 없으니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데, 그 자체도 스트레
스인데다 때에 따라 달리는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차를 이런 상태에서 끌고 다니는
건 좋지 않다.
어차피 별 생각 없이 해본 말이라 서진의 말을 그대로 수긍했다.
“……알았어. 그럼 좀 이따 하는 게 낫겠네.”
“잘 생각했어. 피곤하면 눈이라도 감고 있어. 도착하면 깨워줄게.”
“그 정도는 아냐, 괜찮아.”
그렇게 말을 흐리며 재현은 조용히 아직 밝은 창밖을 내다봤다. 빠르게 변해가는
바깥의 풍경 위로 유리 위로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마르고 창백하고 지쳐
보이는 그 얼굴은 아주 눈에 익은 듯하지만 동시에 아주 낯설게도 보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재현?
그렇게 물어도 거울 속의 자신은 답이 없다. 그저 지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러시아워에 걸리지 않아 40분 만에 도착한 본채 앞에서 재현은 선뜻 차문을 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들어가야 한다는 건 아는데 차마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아니, 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지금은 할머니와 윤진경의 얼굴을 보
고 대화를 할 자신이 없다.
안전벨트도 풀지 않은 채 멍하니 건물의 현관문을 바라보고 있자 막 기어를 바꾼
서진이 의아한 듯 묻는다.
“왜? 안 내려?”
“……나 왔다고 얘기만 해주면 안 돼? 지금 저기 들어가기 싫어. 피곤해.”
지금 무슨 말을 듣게 되면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아 최대한 본채를 피하려 피곤하
다는 핑계를 대자 서진이 안전벨트를 풀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칠칠재 때문에 오늘부터 슬슬 가족들이 몰려올 테니 피하는 게 나
을 거야. 집 앞까지 와서 전화 드리기는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려. 보고만 하고 올
게.”
“응.”
시동은 끄지 않은 채 사이드만 내린 서진이 차에서 내려서는 모습에 재현은 겨우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서진과 함께 와 다행이었다. 혼자 왔다면 싫어도 본채에
들러야 했을 텐데 서진이 자신을 대신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었
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시트에 기대 있는데 바로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어서 비키라는 듯 요란하게 울려대는 그 소리에 눈을 뜨
고 사이드 미러를 바라보자 바로 뒤에 선 진한 은색의 대형차가 보였다. 가족들
중 하나인가 하고 바라보고 있자 곧 운전석의 문이 열리더니 눈에 익은 남자가 내
려선다.
큰 숙부인 서정후였다. 순간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버지와는 전부 배가 다른
숙부와 고모들 중에서도 가장 싫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보기만 하면 시비를 걸거
나 짜증을 내는 일이 잦아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사이 어느새 앞으로 걸어온 그가
운전석의 창을 두드린다.
“야, 차 안 치…….”
거친 어조로, 말을 꺼내던 그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말을 끊는다. 그리곤 조금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뭐야? 너였어?”
여전히 삐딱하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의 말투와 표정에 그를 무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지만 그랬다간 뒤처리가 복잡해질 게 뻔해 어쩔 수 없이 안전
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집을 나가 살았다니 저 사람을 따로 볼 일은 없었을 것 같아 그렇게 인사를 건네
자 양복을 걸쳐 입은 그가 입술을 비틀며 웃는다.
“다들 너무 멀쩡하다고 하더니, 진짜 멀쩡하네. 기억상실이라길래 드디어 너 미
친 꼴 볼 수 있나하고 기대했는데.”
아무리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는다지만 조카에게 악담을 퍼붓는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그가 차의 상판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다시 묻는다.
“그런데 서진이는? 똥차 세워두고 어딜 간 거야?”
“본채에요.”
“넌 왜 안 들어가고?”
“머리가 좀 아파서요.”
방금 전 서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자 그가 비웃는다.
“기억이 없어도 그 핑계는 여전하네. 머리가 아파서, 속이 안 좋아서, 피곤해서.
이 집에 올 때마다 그 핑계로 본채에는 안 들어왔잖아. 매번 그러는데도 형은 잘
도 그 핑계를 받아주더군. 네가 싫다니 본채에는 안 오고 별채에만 가있어서 우리
도 거기까지 알현을 가야 했잖아. 아쉽겠네. 우리가 절절 매며 쫓아다니는 꼴 보
면서 기분 좋았을 텐데, 전혀 기억을 못 하다니. 아, 그러고 보니 우리한테는 다
행이군. 이젠 그 꼴 안 봐도 되니까.”
차라리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그가 하는 말들의 의미를 전부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알고 싶지 않아도, 이해하지 않으려 해도 그냥 그 말이 전부 이해가 되었
다.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 아무 대꾸도 못한 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입가에서 웃음기를 거둔 채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좋겠어, 넌. 그렇게 사랑받으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사람한테?”
서른이 넘은 남자가 던지는, 아이처럼 유치하고 질투에 찬 그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본채의 현관으로 나서던 서진이 다급히 계단으
로 내려서 자신의 옆으로 다가서, 앞을 막아선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듯 인사
말을 던진다.
“일찍 오셨군요.”
“나야, 어차피 노는 게 일이니까. 그런데, 그새 또 붙어 다니는 거야? 둘이 있는
거 오랜만에 보네?”
“재현이를 돌보는 것도 제가 하는 일 중 하나니까요.”
그 답에 정후의 시선이 재현을 향해 움직인다.
“어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갑작스러운 그 질문에 재현이 그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살짝 인상을 쓰자
서진이 재현을 대신해 답한다.
“재현이가 본가에 온 게 오랜만이니까요. 당연히 저와 함께 있는 걸 보신 것도
오랜만이시겠죠.”
“그게 아니라는 거 알 텐데? 너희 둘 한동안 원수처럼 지냈잖아. 아, 그것도 기
억 안 나는 건가? 너, 서진이한테 히스테리 장난 아니었는데?”
다시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던진 그의 말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인상을
쓰자 서진이 서둘러 조수석의 차문을 열며 느긋한 투로 답한다.
“그때는 그런 상황이었고요. 타, 재현아. 피곤할 텐데 그만 가자. 차 빼드리겠습
니다.”
그 말과 동시에 자신의 어깨를 밀어 조수석에 올라타게 한 서진은 서둘러 차문을
닫은 뒤 보닛을 돌아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리곤 운전석 쪽에 서있는 정후에게 살
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차에 올라타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사이드 브레
이크를 내리곤 차를 몰기 시작했다. 조금 긴장한 듯 굳어진 그의 얼굴에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응?”
“히스테리라니. 내가 형한테 히스테리까지 부렸어?”
“그런 거 아냐. 그냥, 너 대학 가서 연락도 잘 안 되고 자주 늦고 해서 내가 잔
소리 좀 하니까 네가 좀 싫어했던 것뿐이야. 너, 다른 사람한테 화내는 성격 아니
잖아.”
“그래도, 내가 뭘 잘못했으니까 저러는 거 아냐.”
“신경 쓰지 마. 괜히 확대해서 얘기하는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그래도 내가 섭섭하게 한 거 있으면 사과할게. 미안해.”
“걱정 마. 그런 일 없으니까. 그보다 저녁은 먹여줄 거지? 너 별채에서 식사한다
고 해놨어.”
“응.”
저 멀리로 보이는 서쪽 별채를 보며 재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이 없는
시간 동안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
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자신은 많이 변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그 사람과도…….
또 다시 머릿속을 채워오는 생각에 사정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
직은 확신하지 말자.
지금은 그보다는 당장 그 사람이 돌아오기 전에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
은 그를 만나선 안 된다.
언젠가는 부딪칠 테고 어떻게든 만나야 할 사람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그를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러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어딘가로 가야
한다. 당분간 그와 마주치지 않을 곳으로, 사라져야 한다.
지금의 자신에겐 기억을 찾는 것보다 그게 더 절실한 문제였다.
서쪽 본채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 한참 뒤에야 서진은 안심한 듯 별
채를 나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떠나자 순식간에 집안 전체가 조용해진 집
안에서 재현은 샤워를 하고 다시 침실로 나섰다.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어둠이 잦아든 후원은 이미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후원
에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에서 빛이 흐르고 있었지만 어둑하다.
그렇게 정신없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머릿속은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엉망이었다. 서진에게는 들키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식사 중에도 툭하면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거나 다른 생각
에 빠져 서진과 제대로 된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현 상황과 이렇게까지 된 원인을 찾기 위해 부지런
히 머리를 굴려 봐도 역시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지난 2년간의 자신은 마치 지금
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그 사고의 방향과 원인을
찾아내기가 힘들다.
아니, 그 전에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가설’을 ‘이론’으로
인정해야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게 어렵다. 그걸 인정해버린다면, 더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버티고 있지만 여기서 아주 조금만
더 나아간다면, 겨우 겨우 유지되던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무섭다.
기억해내야 할 것들도, 또 생각해야 할 것들도 많은데 지금은 오로지 한 가지 문
제로만 머리가 가득 차 다른 걸 떠올릴 수가 없다.
머리가 복잡한 탓인지 왼쪽 관자놀이 부분이 지잉- 하며 울려왔다. 신경을 바늘로
긁어내다 어느 순간 쿡 하니 찔러넣는 듯한 그 통증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보통은 이런 일이 드문데 신경을 써서인지 두통이 시작되었다. 왼쪽에서 시작된
통증이 점점 목 뒤쪽으로 퍼져가는 듯한 기분에 서둘러 침대로 다가섰다. 한 번
두통이 시작되면 끔찍할 정도로 뇌를 쑤셔대는데 이상하게도 두통약은 전혀 듣지
않았다. 그래서 예전부터 두통이 시작되면 아예 수면유도제를 먹고 자버리곤 했다
. 일단 약이라도 먹고 자면 머리는 다소 무거워도 그 찌르는 듯한 통증은 사라지
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또 한 번 끔찍한 두통이 시작될 조짐에 우선은 그냥 자볼 생각으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리곤 방의 조명을 껐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하려는데 다시
쿡 하며 머리가 울려왔다. 이번엔 좀 강하다. 바늘이 아니라, 송곳으로 뇌를 찔러
대는 듯했다.
점점 강해지는 통증이 이를 악문 채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 아파…….”
작은 신음처럼, 그렇게 말을 내뱉으며 뒤척거려 옆으로 누운 순간 바로 뒤에서 어
떤 목소리가 울려왔다.
『전형적인 심인성 질환이지, 그건. 넌, 그냥 이 집이 싫은 거잖아.』
그 말에 자연스레 답이 튀어나갔다.
“알면 여기에 끌고 오지를 마.”
지독한 두통에 이를 갈 듯 튀어나간 그 답에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 내가
누구와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에 한순간 두통마저 잊은 채 그대로 눈
만 굴려 옆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방 안은 텅 빈 채였다. 자신 외엔 없다. 바로 몇 초 전 자신의 눈으로 빈
방을 확인하고 침대에 와 앉았다. 아니, 그 전에 애초에 이 집안으로는 자신 외엔
들어올 수 없다. 이 서쪽 별채의 출입을 허가 받은 건 자신뿐이었다. 그 외엔 이
건물 일을 봐주시는 아주머니와 용건이 있어 허가를 받은 사람 외엔 절대 들어올
수 없다. 그러니, 애초에 자신 외에 누군가가 이 방 안에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보이지는 않지만 바로 뒤에서 누군가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다. 호흡과 체온이 피부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
가 울려온다.
『왜? 너 여기 좋아했잖아. 원래는 싸그리 밀어버리고 화랑을 지을 생각이었는데
네가 마음에 들어 해서 그냥 둔 거야. 저 후원에 네가 서 있는 광경이 마음에 들
었으니까.』
목소리와 함께 팔을 더듬는 그의 손의 감촉까지 느껴졌다. 너무나 생생하게, 바로
뒤에 있는 남자의 존재에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목덜미에 입술이 와 닿았다. 가벼
운 듯하지만 분명한 욕망을 담은 그 입맞춤에 자신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그냥, 밀어버리지 그랬어.』
툭하니 내뱉는 듯한, 퉁명스러운 그 말투에 그가 작게 웃는다.
『그럴 수는 없지. 모처럼 재미있는 추억이 생긴 곳인데. 너처럼 건방진 녀석은
아주 드물거든.』
『그런 줄 알았으면 쥐죽은 듯 말 잘 들을 걸 그랬네.』
어차피 자신의 성격으로는 알아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 아쉬운 듯 그
렇게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겨준다.
『난 말 잘 듣고 심심한 녀석들보다는 너처럼 말 안 듣고 건방진 녀석들을 좋아해
. 내리눌러서 순종하게 만들면 짜릿해지니까. 말을 안 들으면 길들이고 반항하면
괴롭혀 찍어 누르는 재미지. 그리고 그런 녀석이 순종하면 사랑스러워지거든.』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바였지만 새삼 말로 들으니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악취미의 수준을 넘어선 악의다. 이 사람은 분명히 머리와 심장에 문제가 있
는 거다.
『적당히 익숙해져. 어차피 익숙해지지 않아도 잘 버티긴 하겠지만 올 때마다 그
렇게 머리가 아파서야 서로 피곤해지기만 해. 너와 내가 이 방에서 무슨 짓을 하
는지는 모두가 다 아는 일이야. 거기서 이미 끝난 게임이야. 어차피, 이제 와 끝
낼 생각인 건 아니잖아?』
단정적인 그 말에 툭하니 말이 튀어나갔다.
『끝낸다면?』
순간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너무나 생생하게, 마치 지금 벌어지는 일처럼 모든
것들이 생생히 느껴져 숨을 죽인 채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자 목덜미로 차가운 손
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길은 하나지. 네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말 그대로 죽이기라도 할 듯 목을 감싼 그 손에 약간의 비
웃음을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딴 게, 목숨을 걸 가치가 있어?』
『그래. 적어도 나한테는.』
별 시덥지 않은 일에 목숨을 건다는 생각에 그냥 웃음이 나갔다.
『당신은 미쳤어.』
『그래. 난 확실히 미쳤어. 그게 뭐 어때서? 문제 있어?』
『……아주 많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나한테는, 아무 문제없어.』
장난처럼 말을 끝낸 뒤 그의 입술이 목덜미와 어깨를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옷자락 사이로 들어온 그의 손끝이 맨살을 더듬어가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
했다.
그의 입술과 손이 닿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이 달아오르는 감각에 입술이 움직이
기 시작했다.
“그렇겠지. 당신은 미쳤으니까.”
자신의 입으로 중얼거린 그 말에 재현은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에 발작하듯 몸
을 떨기 시작했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뒤에 귀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건 닫아두었던 기억이었다. 분명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있던 현실이다.
더는 부정할 수 없다.
그것만은, 명확한 진실이었다.
나가야 돼, 도망쳐야 돼,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오로지 그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아 건물을 뛰쳐나와 무작정 대문 쪽으로 달렸다.
늦은 밤이지만 건물을 나오는 순간 후덥지근한 공기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달렸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여 미친 듯 달리고 또 달렸다.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절대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떤 이유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런 일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된다.
이건 분명 뭔가 잘못된 거다. 어디선가, 아주 크게 잘못되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질 듯 뛰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어
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이곳에 있다가는 진짜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광기에 찬 어둠이 자신의 뒤를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머뭇거리
거나 멈추면, 그 어둠에 먹혀버릴지도 모른다.
저 멀리 보이는 철문 너머의 세계로, 저 어둠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도망쳐야
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면 된다. 저 철문만 벗어나면, 된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필사적인 마음에, 바로 눈앞에 놓인 철문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뭔가에 어깨
를 잡혔다. 갑작스러운 그 힘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던 순간
, 바로 뒤에서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울려왔다.
“뭐야? 미쳤어? 밤중에 또 무슨 난동을 부리려고?”
책망하는 듯 날카로운 그 음성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 남자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소름 끼치는 그 얼굴이 바로 자신의 앞에 선 채
어깨를 부러트릴 기세로 잡아끌고 있었다.
마치 독사에게 어깨를 물린 듯한 기분에 그 손을 떨쳐내려 몸부림을 치자 다시 한
번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려댄다.
“이제 적당히 좀 해! 미치려면 너 혼자 미치면 되지, 왜 다른 사람들까지 미치게
해!”
귓가를 후려치는 고함소리에도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자신도 미쳐버리고 만다. 아니, 분명히
미친다. 아니, 이미 미친 건지도 모른다.
광기는 어떤 바이러스보다도 빠르게 전염되고 사람의 이성을 뿌리 채 뒤흔든다.
그렇게 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아직 제정신을 갖고 있을 때 떠나야 한다.
하지만 이 손이 떨어지질 않는다. 마치 독사처럼 어깨에 이를 박은 손이, 떨어지
지 않는다.
“놔!”
공황 상태에 빠져 비명처럼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뺨 위로 번개 같은 통증이 스쳤
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적당히 좀 하라고, 제발!”
귀를 때리는 거친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냉랭하지만, 그 남자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좀 더 낮고 거칠고, 어리다. 순간적인 통증에 정신이 들어 겨우 고개
를 들어올리자 앞에 우뚝 선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니다. 많이 닮았지만 분명히 그는 아니다.
“……이제 정신 들어?”
“…….”
“쇼도 정도껏 해. 이 밤중에 무슨 짓이야?”
비난하듯 내쏘는 그 말에 그제야 앞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자 지금 앞에 선 이가 그 남자가 아닌 재원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사람보다 조금 더 키가 작고, 좀 더 앳된 얼굴이었다.
그래, 그 사람은 아직 이곳에 없다.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는 아니다.
그래, 그가 아니다.
“……미안. 지금 좀 머리가 아파서…….”
멍한 얼굴로, 바보처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해대자 재원이 혀를 찬다.
“조용히 들어가. 괜히 일 만들지 말고.”
여전히 냉기를 품은 그의 말투에 맥없이 고개를 떨구는 순간, 돌아서려던 그가 문
득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곤 땅을 내려다본 채 인상을 쓴다. 그 시선에 따라 발치
를 내려다보자 여기저기 흙이 묻어 엉망인 발이 보였다. 어딘가에 부딪쳤는지 왼
쪽 두 번째 발톱이 깨져 피가 흐르고 여기저기 찢어진 상처와 흙이 묻어 있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그 맨발을 내려다보던 사이 여전히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
다.
“이제 와서 미친 척하면 누가 불쌍하게 여기기라도 할 줄 알았어?”
“…….”
“제발 조용히 좀 살자고. 너야 좋아서 하는 짓이라지만 우리는 무슨 죄야?”
“…….”
“너희 둘이 미쳐서 붙어먹는 건 상관없는데, 제발 미친놈들은 미친놈들끼리 뭉쳐
서 숨어서 살아. 적어도, 조금이라도 수치심이 있다면 나랑 재영이 앞에서는 붙어
먹지 말라고. 여보란듯이 그 더러운 꼴 보이지 마. 물론, 네가 사람이라면 말이지
만.”
계속되는 혹독한 말들에 다시 한 번 머리통을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모두’에 재원이나
재영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한여름보다도 더한 열대야에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기 시작했다. 여긴 너무 춥다
. 아니, 이 집은 늘 추웠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그 추위에 몸을 움츠리자 세게 혀를 찬 재원이 돌아선다
.
“좀 조용히 좀 살자. 너 하나 때문에 몇이 고생을 하는 거야? 좋아서 하는 짓이
라면 그냥 조용히 살아, 제발. 미친 척한다고 불쌍하게 여겨줄 사람 아무도 없으
니까.”
앞의 말과는 다른 의미로 충격적인 그 말에 와들거리며 떨던 몸의 진동마저 멈췄
다.
“……내가…… 좋아서 했다고?”
툭하니, 무의식중에 터져나간 그 말에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재원이 걸음을 멈춘
뒤 뒤를 돌아본다. 묵묵하고 무감각한 눈이었다. 원래도 무뚝뚝한 편이기는 하지
만 늘 눈만은 총기가 어려 반짝거리던 그 아이의 눈이 아니었다. 차분하고 고요하
게 가라앉아 석화되어가고 있는 그 눈을 안타까움과 공포가 얽힌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중 재원이 입술을 비틀어 웃는다.
“역시, 기억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네.”
“…….”
“넌 인생 살기 편해서 좋겠다. 너한테 불리하면 기억 안 난다고 해버리면 그만이
니. 이 집이 싫으면 나가고, 돌아와야 하면 기억 못 하는 척 돌아와서 웃고 있고,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 하고,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고. 그래도 아버지는
무조건 네 편이니까, 좋겠네. 다른 사람은 그 꼴 지켜보는 게 죽을 것처럼 힘들고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해도 넌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니 얼마나 편하겠어?
아, 그래서 네가 그런 건가? 그 사람이 뒤에 있으면 무서울 게 없으니까?”
재원의 말은 온통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전부 이해가 가기도 했다. 하지
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했어?”
“그래, 네 입으로. 좋아서 뒹구는 거니까 상관 말라고 했잖아. 여보란 듯이 나한
테도 보여줬잖아. 삼촌한테도 보여줬고.”
“……뭘 보여줬는데?”
툭하니 나간 그 질문에 재원이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그 더러운 걸 나한테 말로 하라고?”
그 말과 함께 뭔가가 머리를 스쳐갔다. 어떤 오래된 영화의 영상처럼, 빠르게 머
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것을 보이는 그대로 인
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확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 게 아니라, 뭔가 다른 일이 있었기를, 재원이
다른 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길 간절히 바라며 그의 답을 기다리던 사이
다시 자신의 앞으로 돌아선 재원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곤 바로 눈앞에
서 삐딱하게 선 채 눈을 바라보며 답한다.
“네가 그랬잖아. 아무데로나 도망치자고 매달리는 나한테, 네가 좋아서 하는 거
라고. 그 사람이 좋아서 같이 자는 거라고. 그리고 자랑까지 해줬지. 아버지 아래
에서 헐떡거리면서 자지러지는 꼴까지 구경시켜줬잖아. 덕분에 좋은 구경했지. 넣
기만 해도 간다는 게 뭔지 몰랐는데, 네 덕에 잘 알았어. 네 말대로, 진짜 너무
좋아서 실신까지 하는 꼴까지 보여줘서 고마워.”
비웃음이 가득한 그 말에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과 재원이 하는 이야기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 도망치듯 한 걸음 더
뒷걸음질치려는 순간 머리채를 잡혔다. 머리카락을 전부 뜯어낼 듯 우악스러운 손
길에 휘청거리던 사이 강제로 고개를 들어올려져 눈을 뜨자 재원과 눈이 마주쳤다
.
화가 난 듯 잔뜩 사나워진 그 눈빛에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느새
덩치도, 힘도 차이가 나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자신과 거의 비슷한 키에, 비슷
한 덩치였던 녀석이 지금은 너무 크고, 너무 강하다.
“똑바로 들어, 서재현. 싸구려 창녀도 너처럼 천박하게 굴지는 않아. 바닥에 떨
어진 약쟁이 섹스중독자도 너처럼 아버지 위에 올라타서 자지러지지는 않는다고.
그게 창피한 줄 알면 제발 보통 사람들 사는 데에 나타나지 마. 멀쩡한 사람들까
지 미치게 하지 말고, 미친놈들은 미친놈들 세상으로 꺼지라고!”
마지막 말에는 악이 실려 있었다. 낮고 조용하지만 울분을 토해내는 듯한 그 음성
에 겁에 질려 그를 바라보고 있자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듯 잡아채던 손길이 떨어
져나간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선다.
“다시는, 그 면상 내 앞에 들이대지 마. 재영이한테도 마찬가지야. 삼촌 하나 죽
인 걸로 만족했으면 다시는 이 집에 걸음도 하지 마. 네가 싫다면, 아버지는 이
근처로도 안 올 테니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지 말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몇 걸음 앞으로 간 재원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 멍하니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자 잠시 후 그가 들으라는 듯 크게 툭하니 내뱉는다.
“대문 앞에 미친놈 하나 서 있어. 빨리 치워. 자꾸 대문 앞에서 오가면 거슬리니
까.”
가혹한 말임에도 그에 반박할 수도, 또 그 말에 상처를 받을 여유도 없었다.
머리가 그냥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다. 깨끗하고 하얗게 빈 채 더는 생각을 할 수
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에는 보고 싶지 않았던,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 기억들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고장 난 CD처럼 그 부분만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
다.
겨울이었다. 분명, 그건 겨울이었다.
새하얀 눈이 서쪽 별채의 후원을 덮은 채였고 연못의 수면에는 살얼음이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집안은 따뜻했다. 여름처럼 더워 옷을 걸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
을 정도였다.
겨울이라 갈대로 만든 발이 아닌 진한 와인색의 공단으로 만든 발 아래로 눈에 엎
인 후원의 광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흰 모란이 수놓아진 붉은 천 아래로 보이는
후원은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하고 고아했다. 창의 문양과 어울려 마치 잘 그려진
동양화 한 점을 감상하듯 그곳을 바라보던 사이 문득 갈증이 일었다. 방은 덥지만
겨울이라 역시 공기가 건조해 목이 아파왔다.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 방 안에 놓인 소형 냉장고로 가려는데 아무리 따뜻해도
역시나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침대 아래에 널려진 옷 중 아무 거나 주워
들었다. 사이즈가 큰 연한 하늘색의 드레스셔츠는 분명 자신의 옷은 아니었다. 하
지만 굳이 옷을 찾는 것도 귀찮아 셔츠를 걸쳐 입고 냉장고로 가 문을 열려 허리
를 숙이는데 다리 사이로 뭔가가 주루룩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싫어 물병을 꺼내든 채 욕실로 들어서려 하자 뒤쪽에서 그 남자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와. 어차피 곧 더러워질 텐데 씻을 필요 없잖아.』
『어차피 배고파질 텐데 밥은 뭐하러 먹어? 기분 나빠서 그래. 씻고 올게.』
『올라와. 아직 일어날 생각 없어. 어차피 아무도 깨우지 않을 테니까.』
분명히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은 먼저 호출하기 전에는 아무도 집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못을 박아둔 채였다. 사실 질척거리는 것도 싫지만 그 이상으로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다. 그의 말대로 지금 씻더라도 잠시 후면 또 마찬가지일 게 뻔해 어
떻게 할까 망설이다 물을 마신 뒤 다시 병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침대로 올라가
앉자 그가 허리를 당겨온다. 그의 손에 끌려 이불 속으로 들어가는데 보드라운 감
촉의 이불 여기저기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이 이불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건 싫어 어떻게 몰래 처리할까 고민하던 사이 그
가 위에서 몸을 눌러왔다. 얼결에 침대에 누운 채 인상을 쓰자 그가 웃는다.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데?』
『지금 그쪽이 하는 것보다는 훨씬 건전한 생각.』
『건전하기보다는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쪽이 낫지.』
과연 그가 하는 생각에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게 있을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던
사이 그의 입술이 목가에 와 닿았다. 여린 살을 살짝 빨아들이며 이를 세워오는
감촉에 낮은 신음을 흘리자 그의 손이 다리 사이를 가르며 그 안으로 들어온다.
이불을 밀어낸 채 다리 사이로 들어온 그가 목덜미에 가볍게 이를 세운 채 빨아들
이다 다시 셔츠를 밀어낸 뒤 유두에 입을 맞춘다.
『아.』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희롱당해 빨갛게 부어오른 채 생채기가 난 유두 위로 그의
호흡이 닿자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작은 돌기를 머금은 채 세게
빨아들이는 순간 허리가 들썩거려 그의 머리를 끌어안자 그의 혀가 유두를 쓸어
올리며 세게 빨아들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절대 해선 안 되는 짓인데, 머리로는 그렇게 알고 있지만
막상 그의 손이 닿아오면 흥분하고 그의 애무를 받으면 이성을 놓은 채 쾌락에만
빠져들게 된다.
그와의 관계는 너무나 자극적이고 강렬해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마치
마약처럼 빠져들어 자제가 안 된다.
너무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자극적인 관계로 시작을 해 이젠 다른 관계로는 만족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의 손이 아니면 안 된다. 이 사람의 피부와 이 사람의 입술이 아니면 이런
쾌감을 느낄 수 없다.
『넣어줘. 아래에…….』
거짓말처럼, 자신의 입술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갔다. 유혹하듯 다리를 활짝 벌리
며 허리를 들어올리자 그가 기분 좋은 듯 웃으며 눈가에 입을 맞춰준다.
이런 부드러운 키스에조차 몸이 뜨거워져 그의 어깨를 안은 채 이미 발기한 성기
를 그의 아랫배에 비벼대자 낮은 웃음을 흘리던 그가 자신의 두 다리를 들어올린
채 단숨에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애무도 없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성기에도 몸은 아무 저항 없이 그를 받아들였
다. 저항은커녕 그가 내벽을 찔러 올리는 순간 그대로 사정을 할 정도로 느끼고
말았다.
그게 창피하고 또 화가 나 몸을 비틀려하자 그가 다시 어깨를 내리누른다. 그리곤
기분 좋은 듯 아주 섹시한 웃음을 흘린다.
『냉랭한 척 굴다가 침대에만 들어오면 얌전해지는 이 갭이 좋아. 느끼면서도 싫
어서 몸부림치는 것도, 그러다 살짝 찔러주기만 해도 다시 자지러지는 것도 좋아.
그럴 때 넌 오싹할 정도로 섹시해지니까.』
수치심을 부추기는 그 말에 몸을 돌려 누우려 했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또 다시 흐느끼듯 신음을
흘린다.
이건 미친 거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될 수가 없다.
무력한 몸뚱이를 어떻게 하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던 사이 그의 손에서 힘이 빠
져나갔다. 그리고는 아주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있던 그가 다시 깊이 입술을 겹쳐
왔다. 입안을 샅샅이 핥으며 깊게 호흡을 빨아들이는 그에 맞춰 다시 호흡이 가빠
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체온에 시트를 세게 쥔 채 눈을 감자 잠시 후
그의 입술이 떨어져나간다.
『위에서 움직여 봐. 네가 원하는 대로.』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전이지만 후원에 쌓인 눈이 빛을 받아 방 안은 무
서울 정도로 환했다. 그 안에서 그의 위에서 움직이는 건 싫다고 하려 했지만 자
신이 말을 하는 것보다 그가 빨랐다. 삽입한 채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침
대에 눕자 자연히 자신이 그의 위로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천천히 움직여. 허리를 세우고, 느긋하게.』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명령하듯 말을 마친 그가 살짝 허리를 움직인 것만으로
도 머리가 하얗게 비어간다. 하반신을 가득 채운 저릿한 감각에 그의 말에 따라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위에 주저앉자 더욱 결합이 깊어졌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린 하반신에 탄성이 흘렀다.
『아…….』
순식간에 전신을 가득 채워가는 열기에, 섹스에 환장한 음란한 창녀처럼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라면 차라리 이성을 놓고 쾌락만
을 쫓는 게 행복하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후라 어쩔 수가 없었다. 생각이라는 걸
하면할수록 괴로워지기만 하니 차라리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느끼는 쪽이 낫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행복하니까.
이미 몇 시간 전까지 정사를 나누던 몸은 너무나 쉽게 열렸고 몸 안에 남아 있던
정액 덕에 움직이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좁은 내벽을 가득 채운 단단한 성기를
느끼며 허리를 올렸다 다시 주저앉는 순간 깊숙한 곳까지 성기가 박혀왔다.
마치 내장을 꿰뚫는 듯한 그 느낌에 고개를 숙인 채 신음했다.
『……아…… 깊어. 안쪽 깊이까지 들어왔어.』
그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환희에 차 중얼거린 그 말에 그가 살짝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그 얼굴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이 남자가 이런 얼굴을 할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자 그냥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섹스를 할 때에만은 여러
가지 표정을 보여주는 남자였다.
잘 웃고, 잘 떠들고, 또 가끔은 저렇게 인상을 쓰기도 하고, 절정에 닿았을 때는
멍하니 아주 섹시한 얼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게 재미있었다. 이 남자의 여러 얼굴을 보는 것도, 또 자신의 안에서 움직이
는 이 남자의 성기를 느끼는 것도, 그리고 이 남자의 정액이 안을 가득 채워오는
것도 좋았다.
슬프게도, 자신이 사람이라는 걸 잊을 정도로 좋았던 것 같다.
일부러 천천히 아래쪽에 힘을 줬다 빼며 허리를 움직이던 사이 땀에 젖은 셔츠가
걸리적거렸다. 어깨에 걸린 옷자락이 거슬려 벗어던지려 몸을 숙이는 순간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그가 뭘 하려는 건지 알기에 셔츠를 벗어던진 채 가슴
을 내밀었다. 그리고 어서 유두를 핥아달라는 듯 그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무심히
창가로 시선을 던진 그 순간, 숨이 멈췄다.
창밖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그 후원에 너무나
눈에 익은 얼굴을 한 소년이 우뚝 서 있었다.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후원을 배경으
로 한 채 서 있던 그 소년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이가 딱딱 갈려 왔다. 방금 전까지 열기에 들떠 부드럽게 휘어지던 몸이 순식간에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어가자 자신을 안고 있던 남자가 창가를 돌아본다. 그리고는
이내 별거 아니라는 듯 “아아.”라는 말을 흘린 채 자신을 돌아본다.
『저 녀석은 신경 쓰지 마. 아까부터 보고 있었으니까.』
『…….』
『잠깐 후원에 들르라고 했는데…… 타이밍이 기가 막힌 녀석이지. 신경 쓰지 말
고 움직여. 잠깐 할 얘기가 있는 것뿐이니까.』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그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대로 꿈쩍도 하지 못한 채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있자 그가 혀를 차는 소리
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을 침대 위로 눕히는 힘에 겨우 몸을 움직여 그
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 마. 싫어!』
『구경꾼이 있는데 끝까지 보여줘야지. 하다 멈추면 보람이 없잖아.』
『하지 마!』
발작을 하듯 그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내고 소리를 내질렀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끔찍해 몸부림을 치자 그가 양 손목을 내리누른 채 다시 아래쪽
을 찔러온다. 아주 깊이, 끝까지 닿으려는 듯 안쪽 깊이 쳐올리는 그 성기에 헉-
하는 숨을 토해내며 허리를 휘자 그가 빠르게 허리를 움직여간다.
이미 전신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멈춰야 하는데, 적어도 지금만은 그를 거부
해야 하는데 그게 되질 않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자신은 교성을 내뱉으며 몸부
림쳤고 그를 밀어내기는커녕 숨을 헐떡거리며 연신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재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그냥 알 수 있었다. 그 역시 자
신만큼이나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계속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시각이
아닌 촉각으로 느껴졌다.
그 시선이 오감을 자극해갔다. 누군가,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이 상황이 끔찍한 만큼 쾌감 역시 더욱 강해져 가고 있었다. 몸과
정신이 느끼는 괴리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때 이미 미쳐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 시선을 느끼며 아버지의 아래에서 두 번째의 사정을 하며 교성을 내지르던 순
간, 자신은 이미 미쳐있던 건지도 모른다.
단편적으로 머릿속을 스쳐가는 기억에, 우뚝하니 어두운 복도에 주저앉은 재현은
땅을 내려다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게 기억이 났다. 아니, 적어도 그 남자와 자신 사이에 있던 일들은 대
강 기억이 났다.
이젠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아니라고 하려 해도, 그건 분명 자신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상황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아니, 이 상황이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끌렸었다. 저 후원에서 다시 그를 만난 날, 어떤 혼의 끌림 같은 걸 느
꼈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다가서려 했었
다. 아버지로서의 애정을 구하며 그의 주변을 돌고 그의 사랑을 받고자 애를 쓰며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하지만 곧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서 그에게 실망
해버렸고, 그와 자신 사이의 관계의 선 역시 모호해진 채였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에게 기대하던 감정은 가족이라는 범주 내의 것이 아니
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비인간적인 성격에 화가 났던 것 역시, 그가 아무도 사랑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들로서가 아닌, 인간으
로서 사랑받을 수 없기에 그에게 더 날카롭게 반응하며 싸웠던 건지도 모른다.
집안에 드나드는 그의 여자들에게 유독 뾰족하게 굴었던 것도 적어도 저 사람들은
한 순간이나마 그 남자에게 사랑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받을 수 없는
애정을, 그녀들은 받았기에 질투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유진경의 말대로 그건 그
냥 ‘더러운 질투’였다.
밉고 싫고 짜증나고 화가 나는 건, 진짜 싫은 상대에게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애정이 있어야 밉고, 관심이 있어야 화가 나는 거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필사적
으로 부정하려 했던 감정이었지만 확인사살을 받은 이상 더는 부정할 수 없다.
이제 그에 대한 자신의 감정도, 그리고 그와의 관계도 인정해야 한다. 기억이 없
던 2년간의 자신도, 결국 자신이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납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분명 자신이 저지른 짓이다.
“그래도……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서재현?”
아무리 그래도 해도 되는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미치도록 그를
원한다고 해도,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부도덕함을 떠나 더럽고 추잡한 짓이다.
“진짜 왜 그랬어…….”
그러모은 다리를 안은 채 그렇게 자신에게 물어봐도 대답해주는 이는 없다. 2년간
의 자신은 자신의 안에 있기에 해답 역시 자신이 내줘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답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설혹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 해
도 답이라는 건 존재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어떻게 해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답
은 나올 수 없다.
어쩌면 그래서 기억을 지운 걸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기억 못 하는
척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고 싶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 역시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에 그냥 없던 일로 돌리면 아무도 그에 대해 추궁
하지 않을 테니까. 그 남자 역시 자존심 때문에라도 다시 되돌리려 하지는 않을
테니까, 깨끗하게 잊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미쳤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사람에게 굳이 다시 미치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
어설프게나마 기억이 돌아오자 왜 자신이 기억을 눌러 내리려 했던 건지, 조금씩
이나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뇌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기억이 사라진 데에
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바로 한 달 전의 자신이 원하던 건 모든 걸 잊고 다시 시작하는 거였다. 지난 2년
간의 기억 따위는 완전히 잊은 채 다시 시작하고 싶었던 거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미래다. 그리고 현실이다. 잊혀진 과거 따위는 그냥 없던 일
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고 생각해. 이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라고.”
돌아온 기억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사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한 시라도 빨리,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그 일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 지금은 우선, 이곳을 떠나는 게 먼저다.
***
오전 11시. 침실로 들어가는 게 무서워 복도에서 밤을 그대로 꼬박 지샌 뒤 아침
이 되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재현은 침착한 얼굴로 본채를 향해 갔다
.
샤워를 한 뒤 거울을 바라보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자신을 세뇌했다.
아무 일도 없다. 난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말고,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예민하게 반응해선 안 된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며 제대로 설명을 하라고 추궁해야 한다.
수치심에 얼굴을 붉혀서도 안 되고, 놀라 창백하게 질리는 것도 안 된다. 최대한
냉정하게, 그리고 뻔뻔하게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당장이라도 죽을 듯 파랗게 질린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렇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해 세뇌시킨 뒤에야 겨우 평정을 찾은 얼굴에, 발 여기저기에 난 상처를
치료하고 그 핑계를 대고 병원에 가겠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 본채로 향해갔다.
간단히 병원에 간다는 것만 전하면 되니 전화로 해도 되지만 본채에 지나치게 가
까이 가지 않는 것도 의심을 살 것 같아 욱신거리는 발을 이끌고 본채로 향했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한 그 햇살에 눈가를 가린 채, 본채의 현관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졌다. 어제처럼, 아니 그제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자
고 자신을 타이른 뒤 다시 걸음을 옮겨 계단 위로 올라섰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지열에 대강 싸매둔 상처들이
쑤셔왔다. 얼굴이 안 좋은 건 어젯밤의 갑작스러운 발작과 상처 탓으로 돌리면 되
겠구나 하며 현관의 벨을 누르자 잠시 후 문이 열린다. 그리고 그 문틈으로 이 집
에 온 뒤 가장 많이 본 것 같은 윤진경의 얼굴이 보였다.
“왜? 어머님 안 계신데?”
화사한 노란색의 원피스를 걸친 여자의 부드러운 말투에 조금 적응이 안 돼 잠시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병원에 간다고 말씀드리려고 왔는데, 헛걸음 했네요. 그럼 됐어요.”
“병원? 어디 다쳤어?”
“발을 좀 타져서요. 이 선생님께도 잠깐 들러야 할 것 같고요.”
“이 선생님은 누군데?”
꼬치꼬치 캐묻는 그 말에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지금 그녀와 싸울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순순히 답해주었다.
“입원한 동안 절 담당해주신 정신과 선생님이요. 제가 어제 뛰쳐나갔다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요. 발 치료도 받고 상담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재원이 뭔가 말을 했을지도 모르고, 또 자신의 이상행동에 기억이 돌아
왔을지도 모른다고 여길까 먼저 선수를 치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
“그렇게 전할게.”
“네, 그럼.”
굳이 저 집안에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에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돌아서려 하자 그녀가 다시 말을 건다.
“지금 집에 차 없는데 내가 데려다줄까?”
답지 않은 그녀의 친절에 갑자기 신경이 곤두섰다. 그녀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영리하기도 하지만 기가 막히게 감이 좋아, 그녀와 조금 길게 대화를 하게 되면
속내를 들키기 십상이다. 지금은 최대한 사람을 피해야 할 때라, 다시 그녀를 바
라보며 정중하게 그녀의 제의를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택시 타면 되니까요.”
“택시 잡으려면 한참 나가야 하잖아. 발도 다쳤을 텐데 내가 데려다줄게. 그 김
에 너한테 할 말도 있고.”
유난히도 나긋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태도에도, 혹시라도 부분적이나마 기억이 돌
아온 걸 들킬까 막 그녀를 거절하려는데 그녀가 먼저 현관문을 닫고는 사라졌다.
아마 본채의 뒤쪽에 있는 차고에서 차를 빼 나오려는 듯했다.
그녀가 차를 가지고 나오기 전에 어서 본채를 빠져나가야 할 듯해 걸음을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섰지만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빠르게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어젯밤 돌부리에 부딪쳤는지 깨진 왼쪽 두 번째의 발톱이 유난히도 욱신거려왔다.
참고 걷기엔 통증이 강하다. 성의 없이 대강 붕대로 감아둔 덕에 고정이 되지 않
아 신발 안에서 들리는 듯했다.
점점 왼쪽 운동화 안쪽이 축축해지는 느낌에 인상을 쓰며 걸음을 멈추자 바로 뒤
에서 클랙슨 소리가 울려왔다.
“타.”
어느새 차를 가지고 나온 윤진경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타자 그녀가
핸들을 돌려 집을 빠져나간다.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하는 그녀의 옆모습에 자신
역시 안전벨트를 맨 뒤 욱신거리는 왼발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이 높은 철문을 빠
져나간 그녀가 그제야 은근한 투로 말을 건넨다.
“어제 내가 한 말 생각해봤어?”
갑작스러운 그 말에 재현은 긴장한 듯 어깨를 굳힌 채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
다.
“어제요?”
“유학 말야.”
“아…….”
그 얘기였구나, 하는 생각에 재현은 안도하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건 아직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요.”
“더 스트레스 받기 전에 움직이는 게 낫지 않아? 유학 준비는 아무래도 좀 걸릴
테니까 잠깐 쉬러 나가는 걸로 말야. 미국이 좋긴 하겠지만 다른 나라라도 상관없
고. 아, 일본 쪽에 내 사촌이 사는데 거기도 괜찮은 모양이던데 어때? 아니면, 중
국은? 아니지, 휴양이면 마닐라나 사이판 쪽이 좋으려나? 유럽까지 가기엔 몸 상
태가 안 좋을 테니까.”
어제라면 몰라도 오늘은,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먼 곳으로 내보내려는 그녀의 의
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 의견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녀의 페이스에 끌려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었다. 어차피 떠나기는 하겠지
만 그건 자신이 결정하고 준비해야 할 일이고 자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채다. 그
런 상태에서 그녀의 손을 빌리는 건 위험하다. 잠시 경유하는 곳이 같다고 그녀와
자신의 목표가 같은 건 아니니까.
“삼촌 49재가 내일이에요. 당장 떠나는 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얘기야. 49재는 지내야 하니 지금까지는 말 안 했는데, 칠칠재까
지 끝내고 나면 좀 쉬는 게 좋잖아. 너 어제 새벽에 갑자기 뛰어나갔다는 거 보니
스트레스 많이 받는 모양인데…… 여기 있어서 좋을 거 없어. 기억도 없는데 여러
사람하고 부딪치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당장에 복학할 것도 아니고. 집안에 있
어봤자 좋은 꼴 못 봐. 너도 이제 눈치 챘겠지만 저 집에서 널 반기는 사람은 하
나도 없어. 모두가 널 불편해하고 눈에 거슬려 할 뿐이지.”
그건, 그녀의 말대로였다. 예전에도 자신을 반기는 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그 전에는 동생들과 삼촌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삼촌은 죽었고, 동생들도
더 이상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젠 자신이 이 집에 남아있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녀의 손을 잡는 건 내키지 않는다. 역시나, 아직은 그녀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다.
“내일 49재 지나고, 그대로 잠깐 나가 있는 건 어때? 유학 준비는 내가 해줄 테
니까 머리 식힐 겸, 잠깐 해외에서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일본으로 갈 거라
면 내 사촌동생네서 지내도 돼. 굳이 네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지 않고 지낼 수 있
으니까, 우선 일본으로 가서 당분간 쉬다 거기서 다른 나라로 움직이면 되니까.”
아주 구체적이고 과하게 친절한 그녀의 설명에 재현은 여전히 경계심을 거두지 않
은 채 그녀에게 물었다.
“왜 저한테 이런 친절을 베푸시는 건데요?”
“오월동주라고 생각해. 네가 좋아서, 선의로 널 도우려는 건 아냐. 그냥 지금만
은 네가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바가 겹치니까 잠깐 손을 잡자는 것뿐이지. 그
리고, 지금은 너도 내 도움이 필요할걸. 아무 기억도 없는 상태라면 제대로 준비
가 안 될 테니까.”
“어차피, 준비는 서진 형이 해줄 텐데요?”
그 질문에 그녀가 웃는다.
“너, 이서진 너무 믿지 마. 만약 지금 네가 잠깐 해외에 가고 싶어서 이서진한테
티켓을 사달라고 한다면 곧장 그 사람에게 보고가 들어갈 거야. 그 사람은 네가
원하는 건 죽어도 안 해주는 사람이니 보고 받는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널 막으려고 할 거고. 그럼, 넌 또 못 떠나는 거지.”
분명, 그건 그렇다. 분명 서진은 아버지의 사람이니 만약 자신이 움직이려 한다면
무조건 보고를 할 것이다. 그건 알고 있다. 예전부터 그랬었으니 모른다면 바보다
. 사실 자신도 그게 걱정이 돼 서진에게 잠깐이라도 해외에서 쉬고 오고 싶다는
말을 못 하고 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제부터 거슬리는 게 있었다. 자신이 서진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숙
부의 말이나 서진을 믿지 말라는 윤진경의 말이 상당히 귀에 거슬렸다.
“……서진 형이 저에 관한 일을 다 보고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인데 그게
왜 이제 와 문제가 되는 거죠?”
“보고만 하고 끝이면 몰라도 널 돕는 척하면서 교묘하게 방해하니까 하는 말이잖
아. 덤으로 말하자면 비행기 편도 미리 예약하지 마. 네 이름이 예약자 명단에 뜨
는 순간 보고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내가 굳이 일본을 권하는 것도 그래서야.
일본이나 중국은 하루 오가는 비행기도 많고 가격 생각 안 하면 한 자리 정도는
당일 표를 구할 수도 있으니까, 소리 소문 없이 떠나고 싶은 거라면 내일 49재가
끝난 뒤 공항으로 곧장 가서 일본행 비행기표를 사. 가장 가까운 시간에 취소된
표가 한 장쯤은 있을 테니까. 그리고 탑승 전에 전화해주면 나리타에 내 사촌이
나가 있을 거야. 일본에서 당분간 지낼 거처랑 현금을 마련해줄 테니 카드 쓸 필
요 없이 여유 있게 쉬다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나한테 연락하고 떠나면 돼.”
순식간에 생각해낸 것치고는 아주 구체적인 그녀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지
금 상황 자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교하고
세밀한 계획을, 그녀가 대신 세워주고 있었다. 그 현실가능성 높은 계획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녀와 손을 잡는 것엔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모르면 몰라도, 그녀
가 자신을 이 집에서 밀어내려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아는 이상은 한 번쯤은 그녀
와 손을 잡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한 그 유혹에 소극적인 방식으로 그녀의 제의에 응하려는 의사를 전달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전 아직 여권도 없는데요? 내일 당장 출국하는 건 무
리예요.”
“너 여권 있어. 작년에 러시아에 다녀왔잖아.”
“……러시아요?”
“응. 내가 알기로는 그래. 겨울 방학 중에 잠깐 갔다 온 걸로 알아.”
여권이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지만, 한겨울에 러시아행이라니 황당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더운 건 그런 대로 버티지만 추운 건 질색이라 겨울엔 집밖으로 나
가는 것도 싫어하는 자신이 한겨울에 혹한의 러시아를 가다니 그건 또 무슨 변덕
인가 싶어서였다.
너무 엉뚱한 나라 명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그 시선
을 느꼈는지 쓰게 웃는다. 그리고는 곧 이실직고 한다.
“까칠하고 사람 못 믿는 건 여전하네. 좋아, 사실대로 말해줄게. 너, 그때 그 사
람이랑 갔었어. 정확히는 그 사람 출장이었는데 그 사람이 널 데려간 거지. 너,
러시아 질색이라고 싸우던 거 기억난다. 추워서 싫다고 징징대면서도 그 사람이
가자니까 결국 갔어.”
그 말에 비로소 그 미스터리한 러시아 여행의 이유가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
고 보니 그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나니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집안사람들이 보이
는 이해불가능한 행동과 난해한 말들, 그리고 자신이 보였던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이해 불가능한 행동들과 현재 자신을 둘러싼 이 비상식적인 상황까지. 그와 자신
의 뒤틀린 관계를 기반으로 이해하면 그 모든 게 이해가 된다.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다.
결국, 모든 키는 그와 자신 사이의 관계였다. 그 부분이 뒤틀려 있기에 논리적으
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들이 많았던 거다. 물론, 이 상황 자체가 워낙에 비상식적
인 상황이라 어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적어도 개연성은 있다. 비상식 내에
서의 개연성이라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어쨌든 인과관계만은 확실히 성립하고 있
었다.
이미 납득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문제이지만 여전히 떠올리는 게 아파 괜히 왼쪽
발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자 그녀가 힐끔 자신의 시트 아래를 바라본다.
“왜? 아파?”
“……조금요. 발톱이 깨진 데가 눌린 것 같아요.”
“어? 응급실로 들어갈까, 그럼?”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괜히 상처 핑계를 대고 뚫어져라 발을 내려다보고 있자 그녀가 속도를 올린다. 한
산한 시간대로 신호에도 걸리지 않고 빠르게 거리를 가로지르는 차 안에서 재현은
왼쪽발의 통증에 왼쪽 무릎을 세게 누르며 흘리듯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그런데, 전 제 방에서 여권은 못 봤는데요.”
“네 방에 없으면 서진이한테 있거나 그 사람한테 있겠지. 그 사람 침실은 찾아봤
어?”
그러고 보니 위층 침실은 뒤져보지 않았다. 자신의 방은 형식적으로 꾸며놓은 것
뿐이고, 대부분의 시간은 그의 침실에서 보낸 듯하니, 여권은 그의 침실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의 성격 상 맞지 않는
일이라, 모른 척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제 여권을 왜 아버지가 갖고 있는데요?”
“네가 도망칠까 봐 숨겨놨나 보지.”
농담처럼 던지는 그녀의 말에는 뼈가 느껴졌다. 괜히 찔리는 게 있어서인지 아니
면 그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뜨끔한 기분에 일부러 왼쪽 발이 아
픈 듯 인상을 쓰며 받아쳤다.
“제가 도망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나 했으면 좋겠네요.”
“머리는 좋은 사람이니 알고는 있을걸. 다만 이유는 모르겠지. 그 사람은 사람이
도망치고 싶어지는 기분이 뭔지 모르니까. 자기가 느껴본 적이 없으니 백과사전을
갖다 놓고 석 달 열흘을 앉아 설명해 봐도 소용없을걸.”
자신만큼이나 신랄한 그녀의 말투에 조금 놀란 듯 운전석을 돌아보자 그녀가 여전
히 차분한 얼굴로 차를 운전해간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한 듯 담담하고 편안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병원 앞에 도착해 바로 큰길가에 나
와 있는 응급센터 앞에서 차를 세워준다.
“주차하고 올 테니 들어가 있어.”
“아뇨, 그냥 돌아가세요. 치료 받고 택시 타고 갈게요. 아니면 서진 형 부르든가
요.”
안전벨트를 풀고 나서며 거기까지는 됐다고 딱 잘라 거절하자 그녀 역시 할 이야
기는 다 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온다.
“그래, 그럼. 그리고 내가 말한 거 잘 생각해봐. 그 사람 곧 돌아올 텐데 그 사
람 돌아오면 너 어디 못 가. 머리를 잘 굴리라고. 감정만 내세우지 말고 너한테
뭐가 도움이 될지, 누가 도움을 줄지 잘 생각하고 판단해. 너 너무 뻣뻣하고 고집
센 거 너도 알지? 너처럼 살면 인생 피곤해져. 이용할 건 이용하고, 포기할 건 적
당히 포기해. 사람들 다 그렇게 살아. 너만 특별할 거 없어.”
이번에는 확실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냥 해보는 충고가 아니라 자신의 미련을
질책하는 듯한 그 말을 이번엔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이미 어제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선배에게서 같은 말을 들은 후이기에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충고 고맙게 듣겠습니다. 그럼 감사했습니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며 마지막 인사를 남기자 그녀가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져간다. 서서히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다 차가 완전히 사라지자 응급실로 들어
가지 않고 그대로 근처의 약국으로 가 붕대와 소독약, 그리고 연고를 사든 뒤 택
시를 잡았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던 주소를 말하자 차가 빠르게 도로를 질주해간
다.
윤진경의 과도한 친절은 당황스럽지만 지금은 그녀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었다. 그녀의 의도야 어떻든 지금 그녀는 자신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그녀의 말대로 자신은 지금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 자신
에게 여권이 있는지도 모르고 해외로 가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막상 떠나더라도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대책도 없다. 시간이 있다면 어떻게든 길을 만들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영원히 숨어 다닐 생각은 아니지만 당분간은 조용히 쉬고 싶다. 일단 그 사람을
피한 뒤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한다.
사실은, 그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섭다. 그 사람을 보면 문득 자신이 튀어나와 그에
게 매달리거나 기억을 잃기 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게 무섭다. 아직은 마음의 준
비가 되지 않았다.
왜 하필 그에 관한 기억만 떠올랐는지, 다른 기억은 여전히 깨끗하게 잊은 채 그
사실만을 기억해낸 자신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아무 기억이 없는 상태라
면 2년 전 그 상태로 그와의 관계가 이어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윤진경의 말대
로, 불행히도 자신은 고지식하고 뻣뻣하고 고집이 세다. 어설픈 거짓말이나 연기
같은 건 못 한다. 아니, 뻔뻔하게 연기를 잘하더라도 그 사람이라면 귀신 같이 알
아챌 것이다.
그러니까 그와 마주치기 전에 사라져야 한다. 그가 돌아온다면 자신이 떠나는 게
맞다.
이번만은 윤진경을 믿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파트로 돌아와 우선 피에 절은 왼발을 대강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다행히 발
톱이 완전 빠지지는 않고 들린 채라 살점과 닿은 부분에 연고를 바르고 이번엔 붕
대로 단단히 감싸 맨 뒤 절뚝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그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침대의 협탁을 뒤지다 서재로 가 핵상 서랍을 하나씩 뒤지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여권이 나왔다. 서진이 갖고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우선 여권을 챙겨들
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이번엔 자신의 방으로 가 작은 여행가방에 간단히 필요한
옷가지들을 챙겨 넣은 뒤 집을 나와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김포공항으로 가 지하
철역의 코인라커에 가방을 넣었다. 코인라커를 사용하는 게 처음이라 몇 번이나
헤매면서 겨우 짐을 맡긴 뒤 열쇠를 챙겨들고 다시 역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본가로 돌아갔다.
내일, 삼촌의 49재가 있다. 할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칠칠재는 할머니께서 다니
시는 절에 위탁했을 테니, 거기서 곧장 재가 끝난 뒤 나오다 핑계를 대고 중간에
내려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오면 된다. 김포 쪽에서 표를 구하기 힘들면 그대
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갈 생각이었다. 혹시나해 여권도 가방 안에 넣
어뒀으니 걸릴 건 없다.
오늘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 얌전히 별채에 처박혀 있다 내일 오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오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급하지는 않았는데 윤진경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어서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마치 강박처럼 그 생각이
자신을 짓눌러오고 있었다. 도망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님에도, 막연히 그와 만
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해진다.
생각대로 일이 잘 진행이 될지, 과연 윤진경이 그녀의 말대로 자신을 도와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자신의 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운이니 운명이니 하는 것도,
불확실한 건 질색이지만 그 정도로, 지금은 절박하다.
우선은 그가 돌아오기 전에 떠나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다른 건 그 뒤에 생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