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3/14)

Chapter 2

쏴아 하며 귓가를 때리는 시원한 소리에 침대에 누워 있던 재현은 누운 채로 고개

만 들어 창가를 바라봤다. 지난 밤새 속이 볶여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자다 깨기를 

반복한 터라 잠을 자고 났는데도 지치는 기분으로 창가를 바라보자, 발 사이로 빛

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새벽인가 하는 생각에 눈을 껌뻑거리며 다시 시선을 돌려 

시계를 바라보자 시침은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새벽인가 하면 새벽치고는 밝고, 낮인가 하면 또 어둡다. 날이 너무 어둡다는 생

각에 인상을 쓰며 창가를 바라보고 있자 빗소리가 더욱 크게 울려왔다.

아, 비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에 지금이 새벽이 아니라 오후 한 시라는 결론에 다

다랐다. 새벽 내 뒤척거리다 겨우 오전에 잠이 들었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전신이 욱신거리며 쑤셔대는 

기분이었다. 팔다리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기분에 손으로 팔과 다리를 주물럭거리

다 겨우 침대에서 내려서자 눅눅한 나무가 발바닥에 와 닿았다.

확실히, 습하다. 공기도 무겁다. 덥고 불쾌한 기분에 협탁에 있던 리모컨을 들고 

에어컨을 켠 뒤 창가로 가 발을 거뒀다. 대나무로 짜여진 발이 위로 올라가자, 그 

아래로 소나기가 쏟아지는 후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후원 전체가 뿌옇게 보

일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꽃잎은 떨어지고 작은 연못은 빗줄기에 일렁이

고 있었다.

한 편의 동양화 같은 아름다운 정경이었지만 계속해서 비가 내리자 조금 지치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비가 오는 거야?”

가만히 창에 기대 있는데 침대 위에 둔 핸드폰 벨소리가 울려왔다. 벨소리에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침대 쪽으로 내려서 핸드폰을 손에 들자 서진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응.”

「아침 안 먹었다며? 괜찮아?」

“응. 그냥 좀 잤어.”

「그래, 잘했어. 푹 잤다니 다행이네. 오늘 아파트에 가볼 거지?」

“응? 어, 응.”

「그럼 세 시쯤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밥은 꼭 먹고.」

“알았어.”

「그럼 이따 보자.」

간단히 안부를 묻고 약속시간을 잡은 뒤 끊긴 전화에 재현은 다시 축축히 젖어 들

어가는 후원을 내다봤다. 세찬 빗줄기에 후원에는 자욱한 안개가 낀 채였다. 이제 

9월인데 왜 이렇게 비가 오는 걸까.

별채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외출준비를 했을 때쯤엔 비가 개어 있었다. 변덕스러

운 날씨에 젖은 길을 따라 우선 할머니께 외출보고를 하기 위해 본채로 향하는데 

본채 앞에 멈춰 선 리무진형의 대형 세단이 보였다. 그와 함께 본채의 문이 열리

며 깔끔한 여름용 원피스를 차려 입은 할머니께서 내려오고 계셨다. 그리고 그 옆

에는 두 명의 여자가 다소곳하게 따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여자들은 이집에 짐

을 풀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조금 짜증이 나 그녀들을 힐끔 바라본 뒤 막 차 앞에 멈춰 선 할머니께로 다가섰

다.

“어디 나가세요?”

“그래. 아침도 못 먹더니, 점심은 했니?”

역시나 말투가 너무 부드럽다. 이 여자의 이런 말투는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지만 

나름 아팠던 사람을 순하게 대하는 게 이상하다고 피하는 것도 못할 짓이라 이쪽

도 순종적으로 답해주었다.

“네. 별채에서 먹었어요.”

“그런데…… 어디 나갈 거니?”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외출이라고 확신을 한 듯한 그녀의 물음에 

마침 그녀에게 하려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내뱉었다.

“아파트에 가보려고요. 일단 가서 조금 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일단 가보려고요

.”

“사람 죽은 자리에는 함부로 가는 게 아냐. 돌아오면 꼭 소금 뿌려라.”

현대과학의 혜택을 그대로 받은 피부와 몸매를 하시고는 여전히 미신에 집착하는 

할머님의 말에 어쩐지 쓴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지극히 서양식의 취향을 가

지신 분이 묘하게 점을 좋아하셨다. 집안을 드나들던 무당도 여럿이었다. 돌아가

신 할아버지께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할머님도 뭐 하나를 하더라도 꼭 무당을 불러 

점을 보고 날짜를 잡고 액을 피한다고 부적까지 쓰곤 했다.

참 재미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냥 잠깐 다녀오는 거예요. 별일 없을 겁니다.”

“그러니 어서 짐을 옮겨. 그 아파트는 흉이 진 자리야. 너야 학생이니 상관없다

지만 정혁이는 사업하는 사람인데 그런 집에서 편히 쉬기나 하겠니? 그 애가 먼저 

말 안 해도 네가 먼저 옮기자고 해야지.”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그 사람한테 직접 하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액이니 운이니 

재수니 하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그 사람이 대놓고 경멸을 퍼부어댈 걸 알기에 그

냥 삭였다. 그 사람한테 말을 못 하니 자신을 붙잡고 이러는 건데, 싫다고 했다가

는 될 때까지 사람을 볶아댈 테니 수가 없다. 한 땀 정도는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

“돌아오시면 얘기해볼게요.”

“2층 다 정리돼가니 거기를 써도 좋고, 싫으면 서쪽 별채를 써도 되니까.”

“네.”

“그럼 다녀오마. 저녁은 집에 와서 먹을 거지?”

“네.”

“그럼 저녁 때 보자.”

그 말과 함께 기사가 와서 열어주는 뒷좌석에 올라탄 그녀가 서두르라는 말을 남

기자 얌전히 서 있던 윤진경과 김윤정이 차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다. 누가 보

기에도 외출하시는 시어머니를 공손히 배웅하는 며느리들의 모습이었다. 문제는 

저 두 며느리가 한 남자의 여자들이라는 게 문제일 뿐.

서서히 멀어지는 차를 보며 서진에게 본채로 오라고 문자를 보내려는데 윤진경이 

툭 하니 말을 던진다.

“이젠 아예 대놓고 며느리 취급까지 하시네. 저 까다로운 분이 대놓고 저렇게 예

뻐라 하시니, 기분 좋니?”

이죽거리며 시비를 거는 듯한 윤진경의 말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여자

는 어제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삼촌 잡아먹은 귀신이니, 며느리 취급이니 뭐니

, 아무리 서로를 막 대한다고 해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 어릴 때부터 

아무리 별말을 다 했다 해도 이건 지나친다.

“집에 안 가세요?”

“여기가 내 집 아닌가?”

“우리 집 족보에 윤진경이라는 이름은 없는데요?”

“내 이름은 족보에 없어도 내 아들 이름은 이집 족보에 있잖아.”

“상중에 족보에도 없는 외부인이 집안에 오가는 거 보기 안 좋습니다. 그만 돌아

가시죠.”

딱 잘라 그렇게 말한 뒤 문자를 보내고 기다리자 그녀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긁어대는 그 웃음소리가 거슬려 인상을 쓰며 그녀를 다시 돌아보자 그녀의 

입가 야비한 미소가 떠오른다.

“질투도 참 더럽게 한단 말야…….”

“……뭐라고요?”

“어릴 때부터 그렇지만 진짜 성격 더럽다고. 차라리 정원이처럼 귀엽게 피하거나 

노려보면 이해라도 가지, 고개 뻣뻣하게 들고 아닌 척 뒤로는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고 있잖아? 애들 엄마 노릇까지 하려고 했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서 상상도 못 했지. 이제, 좀 솔직해지는 게 어때? 당당하게 이 집 드나

드는 우리가 부럽다고.”

한 마디 한 마디, 신경을 긁어대는 그녀의 말에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 빙빙 돌리지 마시고요. 제 신경 긁으

시려는 건 알겠지만 이러는 거 답답하지 않으세요?”

“내가 하고 싶은 말 있는데 빙빙 돌리는 거 봤어?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기억상실에라도 걸린 거야?”

너 빤히 다 기억하는 거 안다는 듯 빈정거리는 그녀의 말투에 이제야 그녀의 태도

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 기억하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

던 모양이었다. 그게 그녀답다면 또 너무 그녀다워 한숨이 터졌다.

“진짜 기억이 없으니 묻는 거잖아요. 기억이 있다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겠죠.”

“그런 거짓말을 믿을 것 같아? 내가 호구로 보여?”

“그렇게 잘 아시면 제게 설명을 좀 해주시죠. 어설프게 말 흘리지 말고 제가 모

르는 게 뭔지 제대로 설명을 해보시라고요.”

나도 진짜 궁금하니까, 라고 덧붙인 뒤 빤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그렇게 몇 분 간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다 당황한 듯 중얼거린다.

“진짜로 기억이 없다고?”

“없으니 없다고 그러죠. 제가 있는 기억 없다고 할 이유가 있나요?”

“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럼?”

그것도 내가 묻고 싶은 말이라고 하려는 순간 서쪽 별채 쪽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

다. 그 자리에 선 채 그쪽을 돌아보자 은색의 세단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선다. 그

리곤 곧 조수석의 차창이 내려가며 운전석에 있던 서진이 말을 건넨다.

“타. 더워.”

윤진경의 답을 듣고 싶기는 했지만 서진이 재촉하는 말에 결국 조수석의 문을 열

고 차에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는 것과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차 안에서 안전벨트

를 하는 사이 열린 사이드미러로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채 우뚝 선 윤진경이 보였

다. 팔짱을 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윤진경에게 다가선 김윤정이 이쪽을 힐끔힐끔 

보며 뭐라고 말을 걸자 윤진경이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낀다. 당황한 듯 어깨를 

들썩거리며 어수선하게 손짓까지 더해가며 인상을 쓰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보고 있자 서진이 차창을 올린다.

“비온 뒤라 습도가 높아. 좀 있으면 불쾌지수가 80을 돌파할 것 같은데.”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척하지만 그가 당황하고 있다는 게 빤히 보였다. 자신이 안

전벨트를 매기 전에는 절대로 먼저 차를 움직이는 법이 없던 서진이 타문을 닫자

마자 전진을 한 것도 이상하지만 일부러 말을 돌리는 기색이 너무 역력하다.

그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는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그의 패턴으로 보아 절대 이 이상은 말해주지 않을 것 역시 분

명하기에 그에게 말을 걸기를 포기했다. 아버지와 이야기를 한 건지 서진 본인의 

판단인지는 몰라도, 그가 입을 다물기로 했다면 그걸로 끝이다. 절대 말해선 안 

되는 것들을 말할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알아내야 한다. 기억이 안 난

다면 강제로 기억을 끄집어내든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라도 알아내야 한다.

차를 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곳은 도심에 위치한 거대한 고급 아파트 단지

였다. 서진의 말대로 입구에 들어서는 것조차도 까다로운 단지 내로 들어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카드키를 꺼내든 서진을 따라 최상층에 도착한 재현은 눈

앞에 있는 은색의 철문을 바라보다 본능적으로 지문 인식기를 열고 엄지를 갖다댔

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삐릭하고 문이 열린다.

그 모습에 서진이 놀라 말을 건넨다.

“기억나?”

“아니. 어떻게 봐도 지문인식기잖아.”

그러고 보니 입구 쪽도 굳이 카드키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얼굴인식이라는 써진 

버튼을 보았기에 등록만 해뒀다면 굳이 비밀번호는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열

린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호사스럽게 꾸며진 전실이 보였다. 복도처

럼 길게 늘어진 화분이 가득 찬 온실 같은 전실을 지나 중문을 지나 들어서자 대

리석이 깔린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본가만큼이나 쓸데없이 넓고 화려한 집

안을 한 번 쭈욱 돌아보자 복도 쪽으로 난 주방과 그 반대쪽으로 이어진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안쪽의 복도 끝에는 나선형의 계단이 보였다. 들은 대로 복층의 

아파트였다.

“아주머니는 청소만 하고 가시라고 했어. 너 사람 있는 거 불편해할 것 같아서.

“……삼촌은 어디서 죽었어?”

“위층 옥상 난간에서.”

이곳이 21층이니 위층은 최상층인 22층이다. 처음 층수를 봤을 때는 서진이 왜 22

층이라고 했나 했는데, 이쪽이 아니라 옥상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난 이만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혼자 있어도 되겠어?”

“응. 괜찮아. 집에는 알아서 갈게. 형은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강 기사 아저씨 보낼게. 차 타고 와.”

“괜찮아. 택시 타면 돼. 내 차는 어디 있어?”

“지하에 있는데 너 아직 운전하면 안 돼. 면허만 있지 무면허나 마찬가지잖아.”

“운전한 기억도 없는데 차 끌고 나갈 배짱 같은 건 없어. 차 좀 돌아보려고 그러

는 거야. 번호 몇 번이야? 키는?”

“키는 네가 갖고 있고, 번호는 1618이야. 방금 차 세운 데 뒤쪽에 있을 거야.”

“알았어. 그만 가봐. 오늘 고마워. 자꾸 귀찮게 해서 미안해.”

“그게 내 일인데, 뭐. 천천히 돌아봐.”

“응.”

마지막으로 어깨를 툭 친 서진이 다시 집안을 빠져나가자 넓은 집안으로 적막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습하고 무더운 밖의 날씨와는 달리 집안은 쾌적한 공기

로 가득 차 있었다. 에어컨이 계속 돌아가고 있는 듯 비었던 집 치고는 지나치게 

차고 맑은 느낌의 공기에 거실로 들어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집안을 돌아봤다.

뭔가를 찾는 듯, 탐색하듯 샅샅이 집안을 훑어봤지만 잘 꾸며진 모델하우스 같은 

집안에서는 뭔가를 느낄 수가 없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 뭔가가 확 하고 떠

오를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는데 아무 감흥도 없다. 아주 낯설고 불편하지만은 않은 

게 자신이 살던 집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 이상은 없다. 삼촌이 죽은 곳이라는

데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길게 숨을 내쉰 뒤 다시 한 번 집안을 돌아본 재현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긴 복

도를 지나 2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올라섰다. 나선형의 긴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역시나 대리석이 깔린 거대한 침실이 보였다. 한 면은 커튼이 쳐진 전면창이었고, 

바로 창 앞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옆의 왼쪽 벽으로는 화원과 이어진 유

리문이, 그리고 맞은편에는 드레스 룸과 욕실로 통하는 복도가 있었다. 아래층과

는 달리 방 한 칸과 욕실, 드레스 룸 외엔 전부 화원이었다.

삭막해 보일 정도로 넓은 방을 돌아보던 재현은 화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가 버튼

을 눌러 유리문을 열었다. 순간 강한 장미향에 머리가 아찔해져 왔다.

화원 안쪽 역시 에어컨을 틀어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듯 쾌청한 공기로 가득했지

만, 진한 장미향에 머리가 울려대는 듯했다. 넓은 화원을 가득 채운 수많은 장미

의 향과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그 색체에 어지러워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 어

느 정도 익숙해진 뒤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부터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미들이 

늘어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오묘한 색감의 스칼렛 메이딜란드와 프린세스 드 모나코, 그리고 화려한 썸머레이

디와 프레드릭 미스트랄, 우아한 블루문과 니콜, 색이 바랜 듯 연한 빛깔을 띤 우

아한 블루바조, 그리고 화사한 백색과 노란색의 골든보더와 엘로심플리시티와 백

색의 소슌과 푸루푸루까지.

이 정원은 그 사람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듯 고풍스럽고 화려했다. 실내 정원 

전체가 갖가지 크기와 색감의 장미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지루하지도 단조롭지

도 않았다. 유리벽 사이사이로 보이는 철근에는 넝쿨들이 뻗어 있어 이곳이 22층 

높이의 옥상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하늘 바로 아래의 정원 

같은 느낌이었다.

본채의 후원과는 또 다른,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서쪽 별채의 후원이 마치 

동양화 한 폭 안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듯한 공간이라면 이곳은 환상문학 속에 등

장하는 천국의 정원을 그대로 현실로 옮겨온 듯한 느낌이었다.

색색의 장미들을 돌아보며 나무가 깔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저 끝으로 옥상 

밖으로 난 문이 보였다. 유리문 너머로 높은 난간이 보이는 걸 보니 삼촌이 죽은 

곳이 그곳인 듯했다. 

천천히 그쪽으로 가 문을 열고 나서자 훅하니 습도를 품은 더운 공기가 몰려왔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길게 심호흡을 한 뒤 오솔길처럼 자갈이 깔린 길 

위로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난간 쪽으로 다가섰지만 역시나 아무 것도 떠오르는 

게 없다. 아니, 기억을 일으킬 만한 뭔가가 없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눈이 부실 정도로 파란 하늘만이 보일 뿐이다.

위태로워 보이는 곳이다. 건물 아래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이 너무 가까워 아찔하

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습도를 품은 공기와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한 햇살

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기억을 떠올리려 해봤지만,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지워진 듯 

깨끗하게 모든 게 사라진 채였다. 마치 깨끗하게 중앙기억장치의 한 섹터가 깔끔

하게 지워져버린 듯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뜬 재현은 여전히 막

막한 기분에 다시 걸음을 옮겨 화원을 지나 침실로 들어섰다. 햇살이 그대로 드는 

방안을 돌아보다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침대로 올라가 누운 뒤 아직 해가 남은 창

을 컨버터와 커튼으로 가리곤 이불을 끌어올렸다. 

늦은 시간까지 자고도 또 잠이 부족한지 졸음이 몰려왔다. 그 덕에 확실히 이 집

에서 살았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그 집에서는 오래 자도 피로했는데 이 

집에 와 침대에 눕자 솔솔 잠이 쏟아지는 걸 보니 이곳이 자신에게는 더 익숙하고 

편안한 곳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아주 잠깐만 잘 생각이었다. 아주 잠깐만. 

탁-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이 반쯤 깨인 상태가 아 서진이 왔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가운 손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는데 머리를 만져주는 시원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

다. 

『또 체했어? 아니, 체했을 리가 없지. 이틀 동안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체했을 

리는 없고…… 혹시 임신?』

장난치듯, 농담처럼,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의 뒤에서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 기가 막혀 그냥 웃고 말자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가 귓가에 입을 맞춘다.

『진짜 임신이라면 좋을 텐데.』

씨도 안 먹힐 그 농담에 침묵으로 대꾸하며 이불을 더 잡아끌어 덮자 그가 이불을 

끌어내리며 바로 위에서 몸을 겹쳐왔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듯 차갑게 식은 몸

이 피부 위로 닿아왔다. 맨살 위로 닿는 한기에 고집스레 이불을 다시 끌어올리려 

하자, 그가 자신의 손목을 내리누르며 입술을 겹쳐온다. 

입술을 살짝 씹으며 잡아먹을 듯 강하게 숨결을 빨아들이는 그 키스에 숨을 제대

로 내쉴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와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양 손목뿐 아니

라 다리까지 그에게 눌린 채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더는 숨을 참고 있을 수 없

어 몸을 비틀며 발버둥치자 그제야 겨우 입술을 뗀 그가 작게 속삭인다.

『애라도 생기면 볼만할 것 같지 않아?』

장난스러운 그 말에도 답하지 않은 채 시선을 돌리자 그의 목소리가 방금 전과는 

달리 낮아진다.

『또 뭐가 거슬린 거야?』

순식간에 기분이 상한 듯, 불쾌한 티를 내는 그 음성에 여전히 그와 시선은 마주

하지 않은 채 작게 대꾸했다.

『……몸이 안 좋아.』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에 다시 침묵하자 양쪽 손목을 내리누르던 그의 손이 떨어져나간다. 그리고

는 자연스레 이불을 손끝으로 끌어내리며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노골적으로 허벅

지 사이를 가르며 파고드는 그 손길에 놀라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다리 쪽에 힘

이 들어가지 않았다. 후들거리며 떨려오는 두 다리에 몸을 일으키려 하자 두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의 손이 엉덩이 사이의 골을 손끝으로 건드린다. 좁은 구멍을 꾹

꾹 누르며 내벽을 긁어내리자 그 허벅지 쪽으로 주룩 하며 진득한 액체가 흐른다.

그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다리에 힘을 주자 어느새 다리 사이로 파고든 그가 짓

궂은 미소를 흘린다.

『이게 그냥 흘러버리다니 아깝군.』

그 말과 함께 안쪽을 휘젓는 그 손길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만해. 일어날래.』

『그대로 있어.』

『씻고 싶어. 배도 고프고.』

싫다는데도 막무가내로 덮쳐오는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팔에도 전혀 힘이 들어가

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라는 것도 문제지만 그의 손길에 이미 몸이 반응

을 하기 시작한 탓이다. 

싫은데도 몸은 정작하게 반응해온다. 그 괴리감이 견디기 힘들었다. 머리는 차가

운데 몸은 뜨겁게 타올라 결국엔 이성을 놓게 되는 게 너무 싫었다. 마치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된 기분이 들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런 생각도 본능적 충동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그곳으로 파고드는 성기에 전율과 같은 쾌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단지 삽입

한 것뿐인데도 과하게 느껴지는 그 느낌에 몸을 애무해오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

여전히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지만 몸이 느끼는 쾌감 쪽이 더 강했다.

그를 밀어내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은 채 다리를 벌리고 그의 움직임에 맞춰 허

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기 시작했다. 더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현아! 재현아!”

텅 빈 집안에서 쩌렁쩌렁 울려대는 소리에 눈을 뜬 순간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에 재빨리 주변을 돌아봤지만 방 안은 어두웠다. 

해가진 듯 진한 어둠이 가득 깔린 방 안에서 재현은 눈을 껌뻑거리며 멍하니 주변

을 돌아보고 있었다. 방금 전 그게 꿈인지, 이게 꿈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피부 위로 생생하게 남자의 감촉이, 그리고 그 순간 느끼던 감각들이 너무나 강렬

하게 남아 자신이 꿈을 꾼 건지,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잘 구분이 가질 않았다

.

그 남자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꿈속의 자신이 일부러 그를 보지 않았기에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한 꿈임에도, 그의 

목소리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손의 감촉도, 그가 했던 말도, 자신이 했던 말도 너무나 현실처럼 생생하게 

울려대는데 목소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감각은 생생한데 앞만 보이지 않

는 느낌이었다.

분명,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꿈이라면 그렇게나 그 

감촉이 생생할 수 없다. 아직도 손목을 누르던 그의 손힘이 생생히 느껴진다. 마

치 방금 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눈을 뜨기 직전까지 어떤 남자에게 안겨 자

지러진 듯, 쾌감의 여운도, 감각도 여전하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 게임과도, 영화와도, 책 같은 것과도 다르

다. 그건 상상이나 몽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점의 

현실이었다.

재현이 침대에 누운 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던 사이, 방 안

의 조명이 켜졌다. 그리곤 당황한 듯 조금 높아진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구나? 없어서 놀랐잖아.”

그제야 자신을 깨운 게 서진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눈치 챈 재현은 그제야 겨우 현

실을 인지한 듯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꿈이 너무나 생생해 자고 일어난 게 

아니라 마치 정사를 치른 뒤 몸을 일으킨 듯 전신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허리에도 

팔에도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겨우겨우 헤드에 기대 몸을 지탱하고 있자, 침대

로 다가선 서진이 걱정스레 묻는다.

“걱정했잖아. 핸드폰도 안 되고 집에는 안 돌아왔다고 하고.”

그 말에 협탁 위를 돌아보자 전자시계가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이 집에 온 게 4시가 다 되어서였으니 5시간 넘게 잔 거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른

한 몸에 어깨를 꾹꾹 눌렀다.

“미안해. 피곤해서 정신없이 잤나 봐. 전화 했었어?”

“괜찮으면 됐어. 얼굴이 안 좋은데, 어디 안 좋아? 머리 아픈 거야?”

“괜찮아. 잠을 잘못 잤나 봐.”

침대 맡에 내려앉는 서진의 물음에 재현은 지친 얼굴을 한 채 아무렇지 않은 듯 

겨우 웃어 보였다. 하지만 역시나 기운이 없어서인지 자신이 느끼기에도 맥없는 

미소가 흘렀다.

전신이 나른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 모습에 서진이 잠시 얼굴

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묻는다.

“그런데, 여긴 왜 올라온 거야?”

“응?”

“여긴 사장님 침실이잖아.”

그 말에 재현은 놀란 듯 서둘러 방을 돌아봤다. 그리곤 쓸데없이 넓고 사치스러운 

방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버지와 자신이 둘이 살던 집이라면 당연히 위층 

전체를 쓰는 이 방은 아버지 방이어야 한다. 그래, 상식적으로 그게 맞다. 하지만 

아까는 이 방이 자신의 침실이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본능적으로 여기

로 올라왔고 여기서 잠들었다. 침대도 익숙하고, 무엇보다 저 화원이 너무 눈에 

익어 늘 봐온 것인 듯 자연스럽게 여기서 잠이 들었다.

“어…… 잠깐 착각했나 봐. 화원을 보려고 올라왔다가…….”

더듬더듬 재현이 하는 말에 서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내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해줬었지. 하여간 괜찮으면 됐어. 안 보여서 걱정

했거든.”

“미안해.”

“괜찮아. 저녁은 먹었어?”

“아니. 그런데 별로 생각 없어.”

“그래도 먹어야지. 아직 저녁 하는 데 있을 테니 가는 길에 식사하자. 나도 아직

이야.”

“아…… 집에 가야지.”

맞다. 여긴 잠깐 보러 온 거고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서려던 재현은 아래쪽이 질척거리는 느낌에 움직임을 멈췄다

. 놀란 듯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그 얼굴에 침대에서 일어서려던 서진이 의아한 

듯 재현을 돌아본다.

“왜?”

“어…… 아무 것도 아냐. 먼저 내려가. 나 욕실에서 샤워 좀 하고 내려갈게. 땀

이 좀 나서…….”

“왜? 어디 안 좋아?”

“몸살 기운이 있나 봐. 이 집이 추워서.”

라고 그럴 듯하게 외부와 집안의 온도 차를 핑계로 대자 서진이 더 걱정스러운 얼

굴을 한다.

“그럼 샤워하면 안 되잖아. 병원에 갈래?”

“그 정도는 아냐. 뜨거운 물에 샤워 좀 하면 돼. 몸이 좀 나른하네”

“그래, 그럼.”

재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넓은 방을 가로질러 계단

으로 내려섰다. 그의 등을 보던 재현은 그가 완전히 계단 아래로 사라지자 곧장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욕실로 달려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분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욕실을 나오자 욕실 앞의 테이블 위에 속옷과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서진이 갖다놓은 듯해 옷을 걸쳐 입고 머리카락을 닦던 수건을 팽개

친 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거실 쪽에 선 채 누군가와 바삐 통화를 하고 있는 서

진이 보였다. 

“……람들 다시 불러들이고…… 응,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두 명 정도…… 아, 

끊을게. 나중에 얘기하자.”

통화를 하던 중 자신을 바라본 서진이 놀라 통화를 끝내는 모습에 재현은 미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일이 마무리가 안 된 상태에서 연락이 안 되니 

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전화는 받을걸 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 서진이 핸드폰

을 주머니에 넣으면 묻는다.

“다 씻었어?”

“응. 미안. 일하던 중인가 봐.”

“뭐, 늘 하는 일이지. 나가야지.”

“그래야지. 내 방 어디야? 짐 좀 챙겨가려고 하는데.”

“저기 안쪽 오른쪽 방.”

“잠깐만 기다려.”

노트북이나 다이어리 같은 게 있으면 일단 챙길 생각으로 방으로 가려다 문득 든 

의문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다시 서진을 바라보며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거렸

다.

“형.”

“응?”

“혹시…….”

“혹시 뭐?”

“나…….”

“응?”

사귀던 사람이 있던 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모

른다니 애인에 대해서도 모를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단지 그

런 꿈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다.

어쩌면 단순한 꿈일 수도 있다. 그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하긴 하지만, 그냥 몽정

을 한 걸 수도 있다.

“……아냐, 아무 것도. 짐 챙겨올게.”

애써 그 꿈에 대한 생각을 떨쳐낸 뒤 복도 안쪽으로 들어서 오른쪽의 문을 열고 

불을 밝히자 넓고 심플한 디자인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뚫린 베란다 쪽으로는 퀸 사이즈의 침대와 협탁이 놓여 있었고, 그 오른

쪽 벽에는 책장과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분명히 여기가 자신의 방은 맞다. 

눈에 익은 제목들의 책들이 주욱 꽂혀 있는 책장과 노트북과 스케줄 노트가 놓인 

책상, 그리고 의자 옆의 사이드 테이블 쪽에 던져진 가방. 누가 봐도 학생의 방이

다. 위층의 생활감 없어 보이는 모델하우스 같은 침실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었다. 분명히 자신의 방이 맞는데, 어색하다. 오히려 

위층의 그 침실이 더 편안하게 느껴진 건 왜일까.

자신의 방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길게 한숨을 내쉰 재현은 서둘러 그 어색한 느

낌을 떨쳐내려 책상 앞으로 가 노트북을 챙겨 옆에 널려져 있던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그 김에 가방 안을 살펴봤지만 노트 몇 권과 전공 서적뿐이었다. 전공서적

은 꺼내 후루룩 넘겨봤지만 별게 없는 듯해 책장에 꽂혀 있던 노트들만 챙겨서 가

방에 더 넣고, 이번엔 서랍 안을 뒤져봤지만 역시나 아무 것도 없었다. 펜과 볼펜

, 그리고 공학계산기와 수정액 같은 것들만 가득 쌓여 있을 뿐 특별한 건 없다. 

서랍들을 뒤지다 결국 포기하고 가방의 앞주머니를 보자 검은색의 스마트키가 보

였다. 음각으로 ‘1618’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걸 보니 자신의 차 키였다.

하지만 차 키를 봐도 역시나 기대감은 생기지 않는다. 자신의 성격 상 차나 방에 

뭔가 중요한 물건을 두거나 메모를 해두거나 했을 리가 없다. 다이어리 같은 것도 

쓰지 않고 심지어는 친구들 다 하던 싸이월드나 블로그도 하지 않았다. 어지간해

서는 이메일도 사용하지 않는다.

흔적을 남기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던 자신의 성격을 보자면 어딘가에 기록이나 메

모를 남겨뒀을 리가 없다. 그나마 자신의 행동패턴을 알 수 있는 건 핸드폰뿐이지

만 핸드폰은 박살이 났다니 어쩔 수 없다.

“더 챙길 거 있어?”

혹시나 다이어리는 없나 싶어 다시 책상 위를 돌아보던 중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냐. 다 챙겼어. 그런데 나 다이어리 같은 거 안 썼어?”

“글쎄? 학교에서 나온 다이어리는 갖고 다닌 것 같은데……. 강의시간표랑 학사

일정 써진 다이어리는 본 것 같아. 가방 봤어?”

그 말에 다시 가방 바깥쪽의 주머니를 뒤져보자, 대학로고가 새겨진 다이어리치고

는 얇은 검은 가죽 케이스의 수첩이 보였다.

“아, 이건가 보네. 다했어. 이제 가도 돼.”

가방을 등에 멘 채 나서자 서진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현관으로 향한다. 그의 뒤를 

따라 방의 불을 끈 뒤 마지막으로 거실을 둘러보는데 활짝 열린 커튼 너머로 도시

의 야경이 보였다. 바삐 움직이는 차들의 불빛과 곡선을 그리며 놓인 가로등의 불

빛을 바라보던 사이 귓가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울려왔다.

『커튼…… 쳐줘. 싫어.』

귀에 익은, 너무나 잘 아는 그건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귀에 익은 동시

에 설다. 그건 그 음성이 너무나 높고 가늘어서였다. 아파서 신음하는 것도 같고, 

숨이 차 헐떡거리는 것도 같은, 그 음성에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앞뒤 상황도 없이 무작정 떠오른 그 목소리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등을 떠밀리듯 

빠르게 걸음을 옮겨 현관으로 나섰다. 그리고 중문 앞에서 전체의 조명을 끄는 버

튼을 누른 뒤 거의 달리듯 전실을 나온 뒤에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건,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

“왜 그래? 얼굴 창백한데.”

막 현관문을 나서며 서진이 의아한 듯 묻는 말에 재현은 억지로 웃음을 흘리며 고

개를 내저었다.

“더워서. 현관만 나와도 덥네.”

“열대야라. 9월 말까지 더울 거라네.”

“응…….”

대강 그렇게 말을 흘리며 다시 머릿속으로 방금 전의 그 음성을 떠올려보려 했지

만 어느새 그 음성은 깨끗하게 사라진 후였다. 그저 그 말의 의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눈이 부셔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지 바깥의 광경을 보기가 싫어서였는지 

커튼을 쳐달라는 그 말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의혹은 남아 있다. 그 순간의 느낌은 사라졌어도 기억은 한다.

확인을 해야 한다. 뭐든 좋으니, 정확한 증거물로 확인을 해야 한다.

“형, 내 핸드폰 통신사 어디였어?”

문득 떠오른 어떤 가능성에 서진에게 그렇게 묻자 서진이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며 되묻는다.

“통신사? 왜?”

“핸드폰 통화내역이랑 문자 조회 좀 하게. 자주 통화하던 사람이 누군지도 알아

보고.”

“아, 네 핸드폰 내 명의로 돼 있어. 내가 확인해야 할 거야.”

“아직도?”

“너 진짜 성인 된 지 이제 한 달이야. 아직까지는 핸드폰은 내 명의로 돼있고 차

도 사장님 이름으로 등록돼 있어. 통화내역이라면 몇 개월 치? 당장은 바빠서 안 

돼도 며칠 내로 조회해다 줄게.”

그 말에 재현은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석 달 정도. 그 정도면 우리 엄마 연락처 찾을 수 있겠지? 한 달에 한 번 정도 

통화했으니까.”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지만, 일단 엄마에게도 연락은 해둬야 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하자 엘리베이터의 하향 버튼을 누르던 서진이 당황한 듯 뒤를 돌아본다. 그 시

선에 재현이 “왜?”라며 되묻자 막 열리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진이 한숨과 함

께 내뱉는다.

“너 그쪽이랑 연락 끊었어. 연락 끊은 지 거의 2년째야.”

뜻밖의 말에 조금 놀랐다. 같이 안 산 지는 오래 되었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통화를 하고 두 달에 한 번씩은 만났었는데, 연락을 끊었다니. 그건 진짜 의외였

다.

“왜? 그쪽하고도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애들이 크면서 학교에서 자기네 고등학교 다니는 형 있다

고 하는데 같이 살지는 않는다고 해서 부녀회에서 좀 말이 있었나 봐. 너희 어머

니가 미성년자 시절에 너 낳았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애들이 알까 봐 연락 끊는다

고 했어. 첫째가 슬슬 그런 얘기에 예민할 때라 이사까지 해서, 그 김에 너도 연

락 끊는다고 했어.”

그렇게 들으니 대강 이해가 갔다. 자신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도 하지 못하고 곧장 

일을 하다 직장에서 지금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으니 이런저런 소문이 신경 쓰였

을 것이다. 어머니의 남편은 사정을 다 알고 자신도 받아 들이겠다 했지만 그쪽 

집안 쪽에서는 그런 일로 남의 입방아에 오르기 싫다고 대놓고 자신의 앞에서 말

을 했을 정도니 이제 와서 소문이 도는 게 껄끄럽고 싫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그 

남편은 그렇다 쳐도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그건 잘한 것 같다. 지금의 자신이라도 그 상황이라면 똑같이 했을 것이다. 그건 

진짜 잘했다. 더 빨리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미련 때문에 질질 끓었던 거다.

“잘했네. 다행이다.”

자신에게 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서진이 바로 따라 엘리

베이터에 올라타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잘한 거야. 재원이랑 재영이도, 네가 그쪽 애들한테 너무 신경 쓰는 거 보

고 좀 섭섭해 했었으니까.”

“내가 그랬어?”

“응. 그쪽 애들이 어린데다 너 유난히 거기 막내한테 잘했잖아. 너 고2 때 어린

이날 기억 안 나? 걔가 너한테 와달라고 해서 너 두 탕 뛴 거.”

“아…… 그래서 고3 때는 재영이 데리고 캐리비언베이 가기로 했었는데. 맞다. 

그 약속은 지켰어?”

지하 2층 버튼을 누르며 무심히 그렇게 묻자 서진이 조금 당황한 듯 표정을 굳힌

다.

“아…… 그때…….”

“안 갔어?”

“정확히는 못 갔어.”

“왜?”

“그때 좀 아파서.”

“아버지한테 맞아서?”

스르르 닫히는 문을 보며 기억이 나는 대로 말하자 서진이 물끄러미 자신을 돌아

본다. 그건 기억나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자신이 먼저 답해주었다.

“그때는 기억나. 내 마지막 기억이 아버지가 던진 재떨이 맞고 머리에서 피 흘리

던 거니까.”

마지막 기억이 아주 아름답고 찬란하다고, 살짝 비꼬자 서진이 말없이 이쪽을 바

라보다 다시 묻는다.

“그 뒤는 여전히 기억 안 나?”

그 뒤에 아주 중요한 뭔가가 있는 듯한 서진의 물음에 한숨이 터졌다.

“대체 얼마나 맞았길래 그래? 진짜 죽도록 얻어터지기라도 한 거야?”

“……비슷해.”

순순한 서진의 답에 재현은 적지 않게 놀랐다. 자신이야 성격이 불같은 편이지만 

그 사람은 진짜 감정의 기복이 없는 인간이었다. 순간 화가 나서 손을 들긴 했지

만 그 정도로 누군가를 패는 건, 그 사람답지 않은 짓이다. 자신에게 보란 듯이 

삼촌의 뺨을 때린 적은 있지만 그건 한 대로 끝이다. 다른 사람이 손에 닿는 것도 

싫다는 사람이라, 그 정도로 과격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없는데, 그건 진짜 

의외의 일이었다.

놀라긴 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듣자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졌다. 그 사람도 이성

을 잃을 때가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자극했다는 사실이 기

분 좋았다.

“그때 머리를 다쳐서 아버지랑 잘 지냈나 보네. 그러다 이제야 제정신 돌아온 거

고.”

약간 웃음기를 담아 그렇게 말하자 서진이 작게 중얼거린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네.”

툭하니 내던져진 말이었다, 그건. 딱 듣기에도 아무 의식 없이 흘린 그 말에 재현

이 서진을 돌아보자 서진이 아차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

이 열렸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생각도 못 한 채 재현은 서진에게 물었다.

“진짜, 내가 그때 죽도록 얻어맞고 겁이라도 먹은 거야?”

“……그런 건 아냐. 네가 어디 목에 칼 들이댄다고 눈 하나 깜빡할 성격이야? 너

랑 사장님이 유난히 험악했던 건 네가 너무 겁이 없어서 그런 거라는 거 너도 알

잖아. 보통은, 사장님이 한 마디만 해도 다들 무서워하는데 넌 대들면서 싸우기까

지 했으니까. 그래서 사장님도 유난히 널 내리누르고 싶어 하셨고. 그렇게 보면, 

사장님하고 넌 많이 닮았어. 다른 건 넌 감정기복이 있다는 것뿐이니까.”

“그럼 뭔데?”

“그때 한번 크게 터지고는 좋아졌어. 다 풀어내서인지 좋아진 거야. 사장님도 꽤 

미안해했으니까. 내리자. 늦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남긴 뒤 서진이 서둘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장 입구로 

향해간다. 하지만 재현은 그 말을 있는 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형, 지금 그거 말 안 되는 거 알지? 그 사람이 미안해 할 리가 없잖아.”

“그땐 꽤 미안해하셨어. 너 진짜 많이 다쳤으니까.”

“진짜야?”

“응. 사장님도 그땐 꽤 감정적으로 나갔어. 본인도 놀라셨으니까.”

사람인 이상 그 정도로 사람을 팼으면 조금은 놀라긴 할 거라고, 재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원래 그런 사람이라면 몰라도 패 죽이는 것보다는 스트레스 받아 피토

해 죽게 만드는 게 주전공인 사람이니, 놀라긴 했을 거다.

“그 사람도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네. 난 괴물인 줄 알았는데.”

흘러내린 가방을 다시 고쳐 매며 지하주차장으로 나서자 훅하니 더운 공기가 몰려

왔다. 그 집에서는 전혀 계절을 의식하지 못했는데 9월인데도 열대야가 계속되고 

있었다. 끈끈한 습도와 더위에 서둘러 세워진 차 앞으로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혼란만 가중된 채 그 아파트를 떠나왔다.

들어오는 길에 잠시 가게에 들러 식사를 한 뒤 본가로 돌아왔을 때엔 자정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돌아왔다는 사실만 전한 뒤 서쪽의 별채로 돌아

와 우선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들어오는 밋밋한 화면을 보곤 파일들을 뒤져봤지

만 역시나 레포트밖에는 없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든 것들을 쭈욱 

돌아보다 이번엔 이메일 계정에 접속해 메일들을 확인했지만 그곳에도 역시나 학

교에서 온 학사 알림 메일과 스펨메일뿐, 특별히 사적인 내용의 메일들은 보이지 

않았다. 쓸모없는 메일들을 모두 지운 뒤 다시 인터넷 브로우저를 끄고 바탕화면

으로 나오자 메신저 프로그램이 보였다.

메신저를 켰을 때 과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잠시 망설이다 결국 비밀번

호를 치고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잠시 기다리자 로그인 화면이 켜지며 쪽지 수신

음이 들려왔다. 혹시나 해 쪽지와 이메일을 모두 확인했지만 학과의 소모임에서 

가는 엠티에 참석할 거냐는 내용과 여름방학 중의 스터디 모임에 대한 내용이 전

부였다. 전부 과대표가 전체 발송한 메시지일 뿐, 개인적인 안부를 묻는 쪽지도 

이메일도 없었다. 로그인을 해도 딱히 말을 거는 사람은 없기에 조용히 대화 상대

들을 돌아봤지만 고등학교 친구들 몇과 낯선 이름들만 줄줄이 떠 있을 뿐이다.

“상명이……. 윤상명.”

비슷한 환경이라 중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이름을 찾아봤지만 이상

하게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부터 쓴 아이디인데 왜 그 녀석이 삭제되었을까, 

이 녀석과도 싸우고 연락을 끊은 걸까? 함께 유학을 준비하고 이런저런 방법들까

지 알려줬던 녀석이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그러다 문득 유학을 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못 갔지만 이 녀석은 갔을 

수도 있다. 아니, 갔을 것이다. 그 녀석도 자신 만큼이나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

으로 떠나고 싶어 했으니 반드시 갔을 것이다. 그래서 연락이 끊긴 모양이었다.

그래도 메신저에는 남겨두지 하는 생각을 떠올리던 사이 대화창이 켜졌다.

?야,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다다다다 내쏘는 듯한 그 말에 가만히 대화명을 보자 ‘『호경』 신학기 총회는 9

월 15일입니다.’라는 네임이 떠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봐도 딱히 기억나는 게 

없어 서둘러 챙겨온 다이어리를 열어 연락처란을 확인해 보자 ‘전호경’이름이 

보였다. 괄호 안에 ‘과대’라고 써놓은 걸 보니 같은 학년의 과대표인 모양이었

다.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던 사이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다음 대화가 올랐다.

?갑자기 휴학은 왜 한 거야? 연락도 안 되고. 뭐하냐??

다급한 듯한 그 말에 잠시 아는 척을 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아는 척하기로 했다.

?미안.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었어.?

일단 답을 하고 혹시 친구가 아니면 선배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해하면 기다리자

, 또 다음 대화가 올라온다.

?사고? 무슨 사고? 많이 다쳤어??

다행히 같은 학년인 모양이었다. 안도하며 다음 말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많이는 아니고, 교통사고라 좀 병원에 오래 있었어.?

?핸드폰은? 해지됐던데.?

?사고 때 박살나서 새로 샀어.?

?번호 알려줘. 새학기 연락망 만드는 중이었는데 잘 됐네.?

잠시 번호를 줘야 하나 망설였지만 과 친구에게 연락처를 못 준다고 하는 것도 이

상할 것 같아 순순히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잠시 후 다시 대화가 올라온다.

?핸드폰 박살났으면 애들 연락처는 있어??

?아니. 다 날아갔어.?

그래서 연락을 못 했다는 듯 슬슬 말을 흘리자 그가 납득한 듯 다음 말을 이어간

다.

?어쩐지 너무 연락이 안 되더라. 휴학했어도 개강총회에는 나와. 얼굴은 봐야지. 

그리고 애들 연락처 수정 다 되면 엑셀로 보내줄게.?

?응. 고마워.?

?아, 그리고 방학 중에 너한테 온 택배 있어서 내가 받아놨어. 너랑 연락 안 돼서 

내가 갖고 왔으니까 와서 가져 가. 과방 내 라커에 있어.?

택배라니, 학교로 뭘 시킨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 내 물건이라도 받

기는 해야 할 것 같아 짧게 답했다.

?응.?

그렇게 별 의미 없는 대화를 하던 중 대화가 끊겼다. 

택배라니 일단 받기는 해야겠지만 선뜻 모르는 사람들을 만날 용기는 나지 않았다

. 일단 기억 속에서는 깨끗하게 대학 생활에 대한 정보가 지워진 채이기에 이런 

상태로 학교에 가도 될까 하는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는 것보다

는 부딪쳐 보는 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지만 자신은 집보다 학교를 좋아했으니까, 적어도 거기에 가면 

뭔가가 떠오르거나 마음은 편해질지도 모른다.

오후 즈음 학교에 들를 생각으로 인터넷에서 학교 이름을 검색해 대학 위치와 대

학 내 공대 건물이 어디 있는가를 대강 파악한 뒤 컴퓨터를 껐다.

여전히 막막하긴 하지만, 어떻게 나아갈 길은 하나씩 열리고 있었다. 만약 내일 

대학에 가서도 아무 소득이 없다면 그때는 윤진경 씨와 직접 부딪칠 생각이었다. 

적어도 그 사람은 뭔가를 알고 있고, 자신을 위해 진실을 숨길 사람이 아니니까.

다소의 과정과 거짓이 포함되었더라도 그건 알아낸 뒤 자신이 걸러내면 된다.

하나하나 떠올린 뒤 노트북을 끄는데 노곤함이 몰려왔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졸음이 쏟아진다. 머리가 어딘가 잘못된 건지, 몸이 잘못된 건지 계속

해서 피곤하기만 하다.

노트북의 전원이 꺼지는 걸 확인하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침대로 가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9월인데도 계속되는 열대야에 에어컨을 틀

어놓은 뒤 다소 도톰한 가을이불을 덮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오후엔 학교에 다녀오려고요.”

정확한 시간에 맞춰 오늘은 본채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 툭하니 말을 던지자 할

머님이 같은 식탁에 앉은 세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오

늘따라 시비도 걸지 않고 얌전히 앉아 있던 윤진경과 김윤정, 그리고 오늘도 역시

나 친절하신 할머님의 놀란 얼굴을 조용히 돌아보고 있자 할머님이 먼저 말을 거

신다.

“학교에는 왜?”

“연락이 된 친구 하나가 학교에 짐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해서요. 휴학은 했지만 

일단 과 애들 얼굴은 봐둬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라, 그럼. 차 내줄 테니 다녀와라.”

“혼자 다녀올 수 있습니다.”

“지리도 익숙하지 않을 텐데 그럼 안 되지. 윤기사 보내줄 테니 돌아보고 같이 

돌아와라. 어제처럼 또 연락 안 되면 정혁이가 걱정한다. 어제도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고 해서 한바탕 뒤집어졌는데 그렇게 걱정을 하게 해 쓰겠니?”

마지막 말에 작게 혀를 차는 모습에 순간 멍해져버렸다. 다섯 시간이었다. 행선지

를 모르는 것도 아니라, 살던 집으로 가 겨우 다섯 시간 연락이 안 된다고 뒤집어

졌다는 것도 놀랍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했다는 건 더 이상하다.

스물한 살이 된 남자애가 닷새도 아니고 겨우 다섯 시간 동안 연락이 안 됐다고 

난리가 나는 집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집은 특히나 그런 걱정을 할 집이 아

니다. 쓸모없는 아이들 중 하나둘 정도야 납치가 되건 어디로 사라지건 알 바 아

닌 사람들이니까.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잠시 멍해지긴 했지만 이대로는 또 기사를 달고 학교에 

갈 판이라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어제는 제가 잠이 들어서 연락을 못 받은 거였고 오늘은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그렇게 몸이 허해져서 이 더위에 학교에 갔다 또 쓰러

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어제도 연락이 안 돼서 사람들이 얼마나…….”

이상한 말에 눈을 껌뻑거리자 윤진경이 재빨리 할머니의 말을 가로막는다.

“어머니, 재현이도 다 컸는데 기사 딸린 차 타고 학교 가기 싫을 거예요. 대학은 

그런 거 눈치 보이잖아요. 자기가 운전해서 가는 거라면 몰라도요. 그냥 학교 앞

까지 데려다주라고 하시고 들어올 때 바로 연락하라고 하세요. 다 큰 남자애가 집 

못 찾아 올 일도 없을 테고요. 재현이, 너도 그냥 그러겠다고 해. 그런 사고 난 

지 얼마 안 돼서 다들 걱정하시잖아.”

빠르게 내뱉어지는 그 말에 그녀를 한 번 바라본 뒤 다시 할머님을 돌아보자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시선이 오가는 게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서로 의견을 나

누는 듯 빠르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 신경을 곤두세우자 할머님께서 재빨

리 말을 바꾼다.

“저번에도 갑자기 연락이 안 된다 하더니 병원에서 연락이 와 놀랐잖니. 싫어도 

교문까지는 차 타고 가. 윤기사한테는 근처에서 기다리라고 하다 볼일 끝나면 연

락하고.”

한 발 물러선 듯한 그녀의 말에 안도하기보다는 의혹만 더욱 커졌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서진의 태도도 묘했다. 겨우 몇 시간 전화를 안 받는다고 그렇게 걱정을 하

는 건 좀 이상하다. 아무리 그런 사고 직후라 해도 이건 확실히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사고는 어떻게 난 걸까? 들은 바로는 달려오는 차를 못 보고 무단횡

단을 하다 차를 피하려고 쓰러졌다고 했는데 그게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 어딜 가

던 길이었는지도 듣지 못했다.

“저, 사고 어떻게 난 거였죠?”

그 말에 세 사람의 손이 동시에 뚝하니 멈췄다. 거의 동시 동작에 가까운 그 움직

임에 그들을 돌아보자 할머님이 수저를 내려놓으시며 차분히 답을 해주신다.

“그야 모르지. 방학 중이니 어딜 가다 다친 모양이지.”

“제가 그때도 연락이 안 됐다면서요?”

“혼자 나가 사고가 났으니 연락이 안 될 수밖에. 병원에서도 늦게 연락이 왔으니

까. 핸드폰도 안 들고 있었다니 어쩔 수 없지.”

이건 또 말이 다르다. 서진은 분명 핸드폰이 박살이 났다고 했다. 메모리도 살리

지 못할 정도로 차에 깔려 엉망이 됐다고 했다. 

“핸드폰은 박살났다고 들었는데요?”

의혹이 생긴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들자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내쉰다.

“그러니까, 핸드폰이 박살이 났으니 신원 확인이 늦을 수밖에. 정원이 죽은 후에 

며칠 아팠다니 병원에 가던 길일 수도 있겠지. 그때 네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

서 다들 신경 쓰고 있던 차니까. 난 그만해야겠다. 식욕이 없구나.”

수저를 내려놓으신 뒤 자리에서 일어서시는 할머니를 보자 의혹은 더욱 강해졌다. 

아무래도 확실히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아직 자리에 앉은 윤진경을 

돌아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래봤자 난 몰라. 난 정원이 소식 듣고 너 병원에 입원했다는 말밖에 못 들었

으니까. 머리 다쳤다는 것도 너 퇴원하기 하루 전에 알았어. 우린 족보에 없는 사

람들이라 그런 거 일일이 못 전해 들으니까.”

그 말은 이해가 갔다. 워낙에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집안이라 아주 가까운 친인척

간에도 집안 소식은 어지간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특히나 사고소식이나 입원 소식 

같은 건 아예 알리지 않는다. 좋은 소식도, 나쁜 소식도 항상 한 번 걸러 알리는 

게 이 집 사람들이다. 

“……그거 말고라도 저한테 할 얘기 없으세요?”

“없어. 2년 사이 이런저런 일들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니니

까. 기억도 없는 애한테 날 세워서 미안해. 난 다 기억하면서 우리 엿 먹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거든.”

“제 기억이 없으면 그쪽이 어떻게 엿을 먹는데요?”

“기억 못한다면 다들 조심조심 대할 테니까.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면서 사람

들이 횡설수설하는 거 보면 재미있잖아.”

“수치스러워서 기억이 없는 척한다면서요? 제가 뭘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건데요?

바로 그제 자신을 보자마자 던진 그녀의 독설을 그대로 되돌려 묻자 그녀가 어깨

를 으쓱한다.

“그냥 해본 말이야. 그러면 네가 다 기억한다고 헛소리 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아

서. 나도 그만 일어날래. 더워서 식욕이 없네. 아줌마, 우리 수정과 좀 주세요.”

말을 돌리며 윤진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에 김윤정을 돌아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윤진경의 뒤를 따라 식당을 빠져나간다. 그다지 영리하지 못한 김

윤정은 영악한 윤진경의 비호 아래에서만 이 집안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

이라, 두 사람은 늘 세트로 붙어 다녔다. 김윤정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할까 했지

만 윤진경이 입을 닫았다면 김윤정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라면 혹시라도 뭔가를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오늘 그녀들의 태도

를 보자니 입을 다물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기억

이 있는 척할 걸 그랬다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

을 찾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식욕도 없던 터라 수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서 식당을 나섰다. 일단 

이야기는 했으니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현관으로 향하여 시선을 왼쪽으로 

고정시켰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계단을 보지 않으려 기를 쓰며 도망치듯 홀을 빠

져나왔다. 이 집의 다른 곳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이상하게 저 계단은 싫다. 방금 

전 본채에 왔을 때에도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그 계단을 통해 2층을 바라보

자 등골이 오싹해져 도망치듯 식당으로 들어가야 했다.

잠시라도 더 이 집에 있는 게 싫어 서둘러 홀을 지나 본채를 빠져나왔다. 본가에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본채를 오가야 할 일이 있지만 될 수 있는 한 오고 싶지 

않았다. 이틀 뒤에 있을 삼촌의 49재가 끝난다면 그 아파트가 아닌 어딘가로 가야 

할 것 같았다.

현관문을 열자 훅- 하니 뜨거운 공기가 몰아쳐왔다. 공기 중과 함께 바닥에서 느

껴지는 그 열기에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린 뒤 계단을 내려서는데 누군가 다급히 홀

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바로 뒤에서 문이 닫히더니 낭랑

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재현아.”

목소리는 아는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로 저렇게 상냥하게 이름을 불려본 게 처음이

라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바로 옆으로 다가선 윤진경이 부드러운 투로 말을 건다.

“이런 때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마침 때가 됐으니 말할게. 너 유학 가고 싶다

고 했지?”

“……그런데요?”

“그동안 계속 미적거렸는데 이 김에 가는 게 어떨까 해서. 이런 상황에서 학교 

계속 다녀봤자 강의 따라가는 것도 힘들 텐데, 이 김에 가는 게 어때? 훌훌 털어

내고 그쪽에서 새로 대학 입학하고 졸업하고 거기서 자리 잡는 것도 좋잖아.”

유학이야 늘 바라던 일이었지만,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라 인상을 쓰

고 있자 그녀가 자신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내가 이런 말하는 거 마음에 안 들겠지만 내가 하는 말이라고 삐딱하게 생각하

지 말고 심각하게 생각해 봐. 지금까지는 그 사람이 반대를 해서 안 됐는데, 이 

상황에서는 그 사람도 뭐라고 못 할 거야. 그리고 너한테도 그렇잖아. 2년간의 기

억이 사라진 데에는 다 그런 이유가 있을 테니, 굳이 기억을 찾으려고 하거나 하

는 것보다 환경 자체를 바꿔보는 게 좋지 않겠어?”

그녀의 말은 그럴 듯했다.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도 무리일 테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거북하게 여기는 이런 상황에

서 굳이 이곳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과감하게 환경을 바꿔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

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녀와 자신 사이에 있던 일을 잘 알기에 그걸 마냥 호의로만 받

아들일 수는 없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심각한 얼

굴로, 모처럼 진지하게 말한다.

“잘 생각해봐. 지금은 너를 위해서도 그게 최선이야. 앞으로를 위해서도.”

“……생각해볼게요.”

“그래. 그럼 날 더우니 어서 가봐. 윤기사 별채로 보낼게.”

자신이 기억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부터 유독 싹싹한 그녀의 태도가 내심 미심쩍

었지만 따져봤자 어차피 미리 준비해둔 번지르르한 답이 나올 게 뻔해, 더 이상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서쪽 별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도 피부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벌써 9월인데, 

아직 너무 덥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이야기한 대로 윤기사 아저씨를 교문 앞에서 돌려보낸 뒤 교문의 알림판을 보고 

더듬더듬 공대 건물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제어계측공학부의 과방은 공대 건물 3

층의 308호였다. 미리 확인해둔 정보를 되새기며 무더운 날씨에 교내를 헤매기 시

작했다.

학교에 오기는 했지만 딱히 어떤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자신의 성격 상 아무

리 친한 친구들에게라도 속을 터놨을 리는 없으니 그저 수박 겉핥기 식의 탐험이 

되겠지만, 그래도 택배를 찾는다는 핑계로 작은 단서라도 하나 얻어 볼까 하고 온 

것뿐이다. 아마, 가족 내의 어떤 문제 같은 건 전혀 티내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

생활이 어떤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친밀한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도 단 한 명의 친

구에게 외에는 가정사를 알린 적이 없으니 대학에서는 더욱 경계가 높았을 것이다

.

이곳에서 확인하고 싶은 건, 그저 자신이 어떻게 살았나 하는 거였다. 강의 시간

표로 대강 오후에만 강의를 신청했다는 건 알았지만 학교에는 언제 오고 언제 돌

아갔는지, 그리고 주말에는 뭘 했는지, 자신의 행동패턴에 대해서 파악을 한다면 

아버지와 대강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교문에서 20분가량이 걸려, 햇살을 피하려 거의 달리듯 빠른 걸음으로 공대 건물 

내로 들어선 재현은 겨우 숨을 편히 내쉬며 건물 안내도를 보다 들어온 입구가 3

층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308호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아무렇지 않은 듯 들어가서 교통사고 때문에 머리를 좀 다쳐서 몇몇 부분

에 기억이 사라졌다고 이야기를 한 뒤 천천히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

었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308호 앞에 서 문을 두

드렸다. 그러자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짤막한 그 답에 슬쩍 문을 밀어 열고 들어서자 너저분한 방 안의 창가에 놓인 책

상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검은 뿔테의 안경을 쓰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나이는 스

물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일단 선배구나, 라고 확인한 뒤 안으로 들어서

자 책상에 앉아 책을 내려다보던 그가 시선을 들다 조금 놀란 얼굴을 한다. 의외

라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잠시 후 인사를 건넨다.

“오랜만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 아는 사이인 건 확실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2학년들은 전부 전공 들어갔고 1학년들은 3학년한테 기합 받으러 갔어. 4학년들

은 취업설명회 갔고. 앉아. 30분쯤 지나야 다들 돌아올 거야.”

툭하니 말을 던진 뒤 그가 다시 시선을 내려 책을 본다. 무심한 듯한 그 반응에 

잠시 어떻게 할까 하다 돌아서기로 했다. 왜인지 이 남자는 껄끄럽다. 기억은 나

지 않아도 친하게 지낸 사람은 아닌 듯했다. 아니, 자신은 저렇게 툭툭 내뱉고 신

경질적인 타입들을 원래부터 어려워하는 편이니, 아마 사이가 좋지는 않을 것 같

았다.

그래서, 그냥 돌아서기로 했다.

“그럼, 30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말에 다시 그가 눈만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그리곤 인상을 쓴다. 살짝 찌푸린 

눈썹에서 지금 그가 느끼는 불쾌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해 걸음을 멈추고 기다리

자 그가 몸을 일으키고는 탁- 하니 보던 책을 덮는다. 그리고는 턱짓으로 문을 닫

으라는 듯 신호한다.

박력 있는 그의 표정과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문을 닫고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피곤한 듯 미간을 꾹꾹 누르다 다시 시선을 맞춰온다. 

그리고는 다시 안경을 쓴 뒤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내뱉는다.

“너 말이다…….”

“네?”

“나 때문에 휴학한 거야?”

“……네?”

“그런 거면 적당히 해. 너 까칠하고 결벽증에 부끄러움 많다는 건 알겠는데 말 

안 한다고 했잖아. 나, 고백했다 차였다고 원한 갖는다거나, 차여도 포기 못하고 

미련 질질 흘리는 성격은 아냐. 더군다나 애인 있는 사람은 빨리 포기해. 그런 거 

소문내서 나한테도 좋을 거 없고, 소문이나 내고 다닐 만큼 시간 남아돌지도 않아

. 너한텐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몰라도 그 정도로 인간성 바닥은 아냐.”

낯선 남자가 줄줄이 내뱉는 그 말에 딱하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어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그가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낮게 혀를 찬다.

“내가 그렇게 쓰레기로 보였냐? 너한테 유난히 틱틱거린 건 사실이지만 너 미워

서 그런 건 아냐. 그때도 말했지만 신경 쓰여서 그런 거야. 그런데 넌 너무 무심

하고, 애인 있는 티까지 내고 다니니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기분으로 괴롭힌 

것도 있고. 고백한 것도, 차라리 차이자는 기분으로 고백한 거지, 뭘 어쩌려고 한 

건 아냐. 아무리 나라도, 여보란 듯이 학교 가는 놈 목덜미에 잇자국 남겨서 보내

는 애인은 무서워. 원한 사면 청부살해라도 당할까 안 건드려.”

그 말에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가리자 그가 한심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하지만 아차 할 정신도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왜 자신이 그런 짓을 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상상도 못 했던 이야기의 나열에 넋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을 도저히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말에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를 응시하고 있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너, 진짜 순진한 거야? 소심한 거야? 뭘 그렇게 기를 쓰고 애인 있는 걸 숨기려

고 해? 애들도 아니고 1학년들도 그쯤 되면 다 알아. 있으면 그냥 있다고 말하면 

되지, 뭘 그렇게 창피해서 숨기려고 해? 네가 그냥 ‘애인 있어요.’ 한 마디만 

하면 다 그러려니 하는데 네가 유독 숨기려고 하고 창피해하니까 다들 애인이 남

자 아니냐고 의심하잖아. 여자들이라고 손톱자국만 남기는 건 아냐. 좀 노는 나이 

많은 누님하고 사귄다고 하면 다들 의심 안 할 걸, 왜 그렇게 유두리가 없어? 이

래서는 완전 내가 소문내고 다닌 걸로 뒤집어쓸 판이잖아.”

그런 의심 받는 건 질색이라는 듯 남자가 툭하니 말을 던지다 이내 머리카락을 벅

벅 긁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는다. 그리곤 팔짱을 끼고 앉으며 다시 

말을 이어간다.

“하여간, 나 때문에 휴학한 거면 아직 시간 있을 때 복학해. 멀쩡한 놈이 아프다

는 핑계로 휴학하고 쉴 필요 없어. 갑자기 핸드폰 해지한 것도 오바지만, 방학 내

내 연락 한 번 없이 지내다 갑자기 휴학계까지 내는 건 과잉 반응이야. 어차피 난 

좀 있으면 졸업이야. 한 학기도 아니라 나 취업 나가면 앞으로 너랑 나 몇 달 볼 

일 없어. 네가 이렇게 과잉반응만 안 하면 내가 너한테 고백한 것도, 네가 남자 

애인이랑 동거 중인 것도 아무도 모르고 넘어갈 거라고.”

정신없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말을 듣던 중 그의 한 마디가 쿡 하니 

뇌를 찔러왔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듯 머리 위를 맴돌던 이야기들이 정확히 

뇌를 파고드는 순간 입이 먼저 움직였다.

“……동거 중이라고요?”

그 물음에 그가 그렇지 않아도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더 험악하게 찌푸린다.

“뭐?”

“제가…… 남자랑 동거 중이었다고요?”

“말해놓고 까먹었냐? 그날 술에 좀 취하기는 했지만 정신은 멀쩡했는데 기억 못 

해? 네 입으로 말했잖아. 너 애인 있는 거 사실이고, 남자라는 것도 사실이고, 이

미 같이 살고 있다고. 가끔 손목에 멍 들어오는 것도 그 남자 섹스 취향이 고약해

서 그런 거라고, 아예 작정하고 이실직고 했잖아.”

『이게 그냥 흘러버리다니 아깝군.』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귓가에서 환청이 울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불현듯 느

껴지는 감각에 본능적으로 오른쪽 손목으로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 감각이 남아 있었다. 억지로 손목을 잡아 누르던 억센 아귀힘과 마주 닿은 피

부에서 느껴지던 온기. 그의 호흡과 전신을 감싸오던 피부의 감촉, 그리고 아래를 

꿰뚫던 단단한 성기와 그 순간 느껴지던 쾌감까지.

강제로 잡힌 손목이 너무 아파서 멍이 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의 입술이 목덜

미를 깨물던 순간의 고통도 잡아먹힐 것 같던 그 공포감도, 너무나 생생했다.

그의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속삭임은 기억한다. 그리고 분명 그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잘 알고 있고, 친숙한, 그런 느낌이었다.

“어이? 서재현?”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뭔가 말을 하는데 그게 

귀에는 울리는데 머리로는 와 닿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어떤 목소리가 가득 차 있

어 그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널 보면 화가 나.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아.』

이를 가는 듯 낮은 목소리였다. 말 그대로 화가 나서 미치겠다는, 진짜 어떻게 해

야 할지를 모를 정도로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는 목소리였다.

“왜 그래? 너,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그가 의자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선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느

낌도 없다. 마치, 그 남자가 환영인 것 같았다. 자신의 현실은 머릿속에 있고 지

금 저 남자가 하는 말도, 하는 행동도 모두 자신이 보는 환상처럼 느껴졌다.

자신에게 현실은 환청이었다. 너무나 생생히 울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만이 진실

이고, 현실이었다.

『어쩌면 이렇게나 말을 안 들을 수가 있지? 어떻게 할까, 널? 어떻게 해야, 말을 

듣게 만들지?』

나긋나긋한 투로 속삭이는 그 음성에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그건 분명 자신이 아

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말투였다.

그건 분명…….

“재현아?”

턱 하며 어깨에 닿은 손에 놀라 발작을 하듯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가 놀

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너, 진짜 어디 안 좋은 거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은 괜찮다

는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공포로 인해 머리가 얼어버린 기분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가볼게요.”

“야, 그…….”

뭔가 더 말을 하려는 그를 무시하고 돌아선 채 다시 문을 열고 도망치듯 그 안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미친 듯 달리기 시작했다. 건물을 빠져나오던 중 몇 명이 

자신을 아는 척하며 인사를 건네려 했지만 그들이 모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무섭다는 생각에만 빠져 어서 그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강박뿐이었다.

자신을 등지고 선 어두운 뭔가가 서서히 등 뒤로 스며들고 있었다. 

스멀거리는 어둠이 자꾸만 등을 타고 오르며 신경을 자극한다. 어서 어둠 속을 바

라보라고, 이게 너라고, 유혹하며 잡아끈다.

고개만 살짝 돌려 저 어둠을 바라봐도 모든 것이 선명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보

고 싶지 않다.

아직은 알고 싶지 않다.

아직은,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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