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나이는?”
“21살.”
“전공은 뭐죠?”
“제어계측공학부요.”
“친어머니의 성함은요?”
“윤 명자 희자요.”
“어머니와 살던 시절 쓰던 이름은요?”
“윤주현이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뭐였죠?”
“뉴욕에 있던 사립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받아서 비자 준비를 위해서 아버지와 대
화하던 거요.”
“그리고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젊은 정신과 의사의 질문에 재현은 잠시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
이다, 적당히 말을 돌렸다.
“아버지가 안 된다고 해서 좀 화를 내다 방으로 가서 잔 것까지 기억나요. 그리
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고요.”
너무나 생생한, 바로 어제도 아닌 방금 전의 일처럼 선명한 그날의 기억이 벌써 2
년도 전의 일이라니 묘한 감각이 일었다. 기억상실이라는 게 기억은 사라져도 그
사라진 기억의 공백은 느껴질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는 아니었다. 필름의 한 부분
이 뚝 끊겨나간 듯, 지난 2년간의 기억이 깨끗하게 사라져 편집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그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채 정신과 의사와 한 달 넘게
자신의 현재에 대해 대화를 하고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허무할 정도
로 성과는 없었다.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이 그 기억들을 밀어내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로, 지독히도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어제 오후는 뭘 하셨죠? 오후 3시 30분경에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4시 쯤 1층
로비에서 30분간 컴퓨터를 하고 4시 30분쯤 병실로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봤어요.
본 프로그램은 케이블에서 하는 미국 드라마 CSI 라스베가스 4시즌 3, 4, 5편이었
고요. 중간에 밥을 먹고 5편이 끝난 뒤 8시쯤에 샤워를 한 뒤에 텔레비전을 켜고
이번엔 콜드 케이스 2시즌을 보다 11시가 넘어서 잤어요. 아침엔 8시 30분쯤 일어
나서 씻고 9시까지 산책을 하다 간병인이 가져온 아침 식사를 했고요. 반찬은 오
이냉국, 콩자반, 시금치랑 고사리 무침하고 홍어회였고, 밥을 다 먹고 이를 닦고
핸드폰으로 오락을 좀 하다 지금 여기 와 있고요.”
기억력 감퇴나 단기기억상실증 증세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하나하나 자신이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한 일들을 일일이 보고하자 의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
인다.
“두통이나 불면증 증세는 없다고 하셨죠?”
“네. 어지럼증, 두통, 메스꺼움 전혀 없어요. 불면증도 없고 환각도 착시도 없어
요.”
지난 한 달 간 매일 만날 때마다 머리는 안 아프냐, 구토감은 없냐, 가끔 뭔가 이
상한 것들이 떠오르지 않느냐, 등등 매일매일 반복된 질문을 기억해 먼저 전혀 문
제없다고 답해주자 그가 한숨을 내쉰다.
“서재현 씨 케이스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입니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특정 시간
의 기억이 사라지는 경우는 극히 드무니까요.”
“그것도 지긋지긋하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돌아온다는 건 정신적
인 스트레스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제가 재현 씨의 상담을 맡았고요. 하지만
, 재현 씨 본인도 아시죠? 재현 씨가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조숙하고 능숙하게 본
인을 숨기는 사람이라는 걸.”
제법 예리한 의사의 답변에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 나름대로는 최대한의 정
보를 주고 성의껏 모든 질문에 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해선 안 될 이야기들은 분
명 그 선을 지켰다. 집안의 묘한 분위기라든가, 가끔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싶다
는 생각을 한다는 건, 어떻게 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게 원인일지도
모르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할 수가 없으니 당연히 해결책도 나올 수 없
다.
정신과의사라는 건, 치료를 위해 자신의 모든 치부를 공유해야 한다는 점에서 다
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재현 씨의 복잡한 집안 사정이나, 성장 과정이 기억상실을 유발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 본인이 깨우치고 말로 꺼내 극복하지
않는 한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없을 것 같네요.”
“…….”
“언제 퇴원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셨다고 하던데?”
“네.”
“퇴원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사흘 전 한 마지막 테스트 결과, 인지능력, 기억력,
신경, 언어능력에 아무 문제도 없었으니 원하시면 퇴원하셔도 됩니다. 단, 뭔가
말을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제게 연락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신다면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희망적인 그 말에 재현은 안도한 듯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굳이 정신병동으로 옮기지 않은 채 일반병동에서 신경정신과와 정신과 쪽을 오가
며 상담을 받기는 했지만 병원이라는 게 꽤 지루하고 답답한 곳이라 이곳에 갇혀
있다가는 멀쩡한 사람도 정신병자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아는 곳도 없이, 하얀 가운을 입은 낯선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체크 당하며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실로 나가서 자신이 다
니던 학교를 돌아보고 자신을 아는 사람들과 부딪치는 쪽이 훨씬 더 능률적이다.
뭐든 빨리 적응을 하려면 일단 그 상황에 던져두고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
길 기다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다. 백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자 한 번의 실전을
못 따라가는 법이니까.
“그럼 퇴원하겠습니다.”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재현의 답에 의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시죠. 보호자께 연락드린 뒤 퇴원수속 해드리겠습니다.”
“아뇨. 연락은 제가 할 테니 퇴원 처리만 해주세요. 저 스물한 살이니 이제 성인
이잖아요?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2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 있는 건 당황스러웠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순간, 이제 자신이 준성인도 아닌 완전한 성인이라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되었다.
더는 보호자의 동의도, 보호자 자체도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뛰어넘은 2년의 시간이 준 선물 중 유일하게 자신을 기쁘게 한 건 이제 더 이상
뭔가를 하는 데에 있어 그 남자의 사인을 일일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원하신다면 퇴원서류에 사인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보호자께는 제가 연락을 해드릴까요? 일단 퇴원을 하는 건 알고 계셔야 할 테니
.”
“아뇨, 제가 할게요.”
물론, 당연히 연락은 할 생각이었다. 아니, 해야 한다. 일단 병원비를 지불해야
하니 서진이 와서 카드를 내줘야 한다. 바쁜지 사나흘에 한 번 병원에 얼굴을 내
민 서진은 자신에게 핸드폰만 던져주고는 지갑도 가져다주지 않은 채였다. 게다가
당황스럽게도 동생들과 삼촌의 전화번호를 하나도 등록해주지 않았다. 혹시나 해
기억하고 있는 번호로 전화를 해봐도 모두 없는 번호라는 말만 반복될 뿐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해 자신의 이전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봐도 역시나 없는 번호
라고 뜨는 걸 보니 2년 사이 다들 번호를 바꾼 모양이었다.
전화번호에 등록된 번호는 딱 서진의 번호 하나뿐이라 그에게 전화를 해 동생들의
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했지만 그는 지금은 기억에만 신경 쓰라고 하며 동생들은 지
금 자신의 상태를 모르니 퇴원을 한 뒤에 만나라고만 했었다. 그리고 일부러 문병
도 못 오게 했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사실, 자신이 독단적으로 퇴원을 하겠다고 선언한 뒤 서진에게 전화를 하려고 한
건 그런 이유도 있었다. 어쩐지 서진이 자신과 다른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퇴원을 하길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그게 미심쩍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병실에 들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
며 그는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이것저것을 묻고 진짜 기억 안 나냐, 전혀 모르겠
냐, 라고 묻고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의심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다, 결국엔 천천히 병원에서 쉬라는 말만을 반복하곤 사라져버렸다.
그건 절대 그답지 않은 짓이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지
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걱정을
한다기보다는 거짓말을 캐내려는 경찰처럼, 그는 집요했다.
그의 그런 태도가 의심에 불을 붙였고, 그 절정에 이르게 한 게 동생들이었다. 자
신의 장기 입원에도 동생들은 한 번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이건 상당히 이상하다
.
배는 다르지만, 재원도 재영도 분명 자신의 동생들이었다. 아버지가 그 모양이다
보니 오히려 형제들끼리 더 똘똘 뭉치는 성향이 있어, 형제들 간의 우애는 상당히
깊은 편이었다.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건 형제들뿐이
었고, 그 형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건 애착이라기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 집안에서,
그렇게까지 멸시 당하고 쓰레기 취급 받으면서 제정신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렇게라도 집착하는 상대가 필요했다.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한 달 가까이 입원을
하고 있는데 연락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삼촌 역시 자신과 형제처럼 자랐기
에 동생들과 별 다를 바 없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고 생각이라는 걸 하기 시작하자 이런 저런 의혹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혹의 결론은 역시나 뭔가 잘못되었다는 거였다.
“그럼 오늘 내로 퇴원할 수 있는 거죠?”
“네, 그러세요.”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짤막하게 인사를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선 재현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 의사의
사무실을 나오며 환자복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유일하게
등록되어 있는 서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들으며 잠시 기다리자 곧
통화가 이어졌다.
「응. 무슨 일 있어?」
“나 좀 데리러 와.”
「응?」
“오늘 퇴원할 거야. 방금 퇴원 허가 받았어.”
순간 대화가 끊겼다. 상당히 당황하고 놀란 듯한 서진의 반응에도 재현은 역시나
란 생각을 하며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조용히 답을 기다리고 있자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서진이 다시 묻는다.
「그냥 퇴원해도 된다고 해? 최 박사님, 나한테는 그런 말씀 안 하셨는데?」
“지금 내 담당의는 최 박사님이 아니라 이 선생님이시니까. 이 선생님이 이대로
는 소용없으니 퇴원해도 된다고 하셨어. 그리고 내가 원하기도 하는 일이고. 몸에
아무 이상 없는데 특실에 누워서 허송세월하기 싫어. 지금까지 안 돌아온 기억이
한 달 더 누워 있는다고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고. 개강 지났다며? 휴학계 냈다는
건 아는데 일단 학교에 가보게. 학교에 가보면 뭔가 떠오를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이렇게 급하게 퇴원을 하는 건 무리야.
」
“팔, 다리, 내장 다 멀쩡하고 열도 없고 기침도 안 해. 작은 종양 하나도 없고
위장 장애 하나도 없어. 아무리 특실이라도 사지육신, 오장육부 멀쩡한 인간이 병
실 차지하고 누워서 텔레비전만 보는 건 민폐야. 한 달 동안 본 드라마랑 뉴스만
으로도 흐름은 따라잡았어. 그럼, 이제 생활로 들어갈 때잖아?”
단호한 의사 표현에 서진이 그답지 않게 길게 한숨을 내쉰다.
「뭐라고 해도 말 안 들을 거구나.」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현실감각이야. 병원에 앉아서 내가 지금 무슨 학교 무슨
학부 몇 학년에 다니고 있는지 반복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게 아무리
들어봤자, 사실 실감 안 나. 내 기억은 거기서 멈춰 있으니까 외울 수는 있어도
그게 현실이란 생각은 안 들어. 무슨 역사 교육 받는 기분이라고.”
「그래, 알았어. 지금 데리러갈게.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어.」
“알았어.”
「그리고…… 사장님께는 연락드렸어?」
“내가 왜?”
문병을 바란 적도 없지만 입원 내내 전화 한 통도 없이 모든 일들을 서진에게 맡
겨 처리한 사람에게 왜 내가 그런 보고까지 해야 하냐고, 재현이 냉랭하게 답하자
서진이 달래듯 다시 말을 걸어온다.
「지금 해외 출장 중이시라 바쁘셔서 못 들어오신 거야. 네 얘기 전해 듣고 걱정
많이 하셨어. 전화 한 통은 해드려.」
“나를 걱정한 게 아니라, 괴롭힐 수 있는 상대가 하나 사라질까 걱정했겠지. 나
피 말려 죽이는 게 그 사람 인생의 최종 목표잖아. 그 목표가 사라지면 얼마나 슬
프겠어.”
아마 그럼 사는 게 꽤 지루해질 테니 걱정하긴 할 거라고, 재현이 답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자 서진이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 도착하면 전화할게.」
“응. 준비하고 있을게.”
준비라고 해봤자 간병인이 속옷들이 전부였다. 사고가 났던 때 입고 있던 옷은 여
기저기가 찢어져 모두 버렸다고 했고, 직업 간병인이 출퇴근을 하고 있으니 쌓인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간단히 속옷만 정리해 가방에 넣고 서진이 가져오는 옷을
입고 핸드폰 하나 달랑 들고 나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서진에게서 자세한 이야기를 끌어낼 생각이었다.
아니, 그도 더는 입을 닫고 있을 수 없을 거다. 직접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다
알게 될 테니, 그가 숨기고 있는 게 무엇이든 결국 다 말하게 될 것이다.
그게 뭘지, 서진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을 정도라면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모
르고 있는 것보다는 아는 쪽이 좋다. 뭐든 알아야 부딪칠 수 있으니까.
정확히 1시간 후 도착한 서진이 내민 옷으로 갈아입은 뒤 먼저 퇴원수속을 마친
그와 함께 병실을 나온 재현은 지하 주차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이곳에 온 뒤
“옷 갈아입고 기다려.”라는 말만 던진 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서진을 바라봤
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직설적으로 말을 던졌다.
“형, 나한테 할 말 있지?”
그 물음이 서진이 조금 머뭇거리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본다. 그 껄끄럽고
묘한, 마치 탐색하는 듯한 눈빛에 재현이 어서 말하라는 듯 재촉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조심스레 묻는다.
“너, 진짜 전혀 기억 안 나는 거야?”
“뭐가?”
“지난 2년간 있었던 일들.”
서진이 또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하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병원에 오가는 동
안 서진은 내내 가끔 저런 식으로 말을 걸곤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바라보
다, 기억나는 거 없냐는 듯 묻고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되물으면 곤란한 듯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설마 빤히 기억하면서 아닌 척하겠어? 기억이 없어서 답답한 건 내 쪽이야.”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거짓말을 할 리는 없지.”
말이 묘하다. ‘아무리 그래도’라니. 확실히 뭔가 일이 있었던 거다. 그리고 서
진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형, 이번엔 제대로 얘기를 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형 태도 이상한 건
알지?”
단도직입적으로 이제 정신이 들었으니 이야기하라고 그를 추궁하자 그가 시선을
돌린다.
“……차에 타고 얘기하자. 병원에서 할 얘기는 아냐.”
“무슨 일인데?”
“일단 나가서 얘기해. 그리고 어디로 갈래? 본가? 아니면 아파트?”
“당연히 집이지. 뭘 그런 걸…… 아…….”
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2년이 지났다면 자신이 혼자 나와 살
았을 가능성도 있다. 어떻게든 그 집을 뛰쳐나오고 싶어 했으니 대학 입학을 핑계
로 어떻게든 나왔을 것이다.
“나, 따로 나와서 살았어?”
“응.”
“혼자서?”
“아니. 사장님이랑.”
기가 막힌 그 답에 실소가 흘렀다. 그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치려고 온갖 머리
를 다 굴렸는데 같이 나가 살았다니 말도 안 된다. 그래서는 나가서 사는 의미가
없다.
“……내가 그러겠다고 했어? 그 사람이랑 둘이 살겠다고?”
“응.”
“……기억이 사라진 이유를 알겠네.”
다른 가족들이 있어도 그 정도였는데 단 둘이 살았다니 알 만하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마, 매일매일이 전쟁이었을 것이다. 눈치보고 말릴 사람도 없었을
테니 얼마나 험악하게 싸웠을까?
순간, 사라진 2년간의 기억을 전혀 되찾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기 시작
했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드는 걸 보니, 자신의 기억상
실의 원인이 명확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냥 하도 끔찍해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
던 것뿐이다.
“일단, 본가로 갈게. 애들도 보고 싶고……. 그 아파트로는 가고 싶지 않아.”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열리는 문안으로 들어서며 재현은 난감한 기분
에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어쩐지 서진이 아주 기본적인 학력사항 외에는 절대로
말을 하지 않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딱 그런 기분이다. 지금 그 사람이 해외 출장으로 국내에 없
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3층에 도착해 재현이 차의 뒷좌석에 올라타자, 자연히 옆
좌석에 탄 서진이 앞에서 운전을 하는 남자에게 본가로 가라는 말을 남긴 뒤 앞좌
석과 이어진 창을 닫았다. 앞뒤 좌석이 완전하게 분리된 차 안에서 서서히 차가
움직여 지상으로 올라서는 순간 재현은 뜨거운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서진을 재
촉했다.
“자, 차 탔어. 뭐야, 대체?”
“…….”
“제대로 얘기를 해줘. 어차피 집에 가면 다 알게 될 텐데, 아무 것도 모르고 있
다 바보 취급당하는 거 싫어. 2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집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도 아니고 얌전히 있어도 온갖 정신공격을 다 퍼붓는
이들을 상대로 반박 한 번 못 해보고 당하는 건 싫다고 솔직히 말하자 서진이 뜸
을 들이다 겨우 말을 내뱉는다.
“……너, 진짜 전혀 기억 안 나는 거야?”
“형…….”
한 달 간 자신의 상태를 보고도 아직도 그걸 못 믿겠냐고, 조금 지친 듯 원망하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제야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미안. 네가 그럴 성격은 아닌 건 아는데…… 역시 잘 믿기지가 않아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는데? 2년 동안 내가 사람이라도 죽인 거야?”
혹시 해외출장 갔다는 아버지를, 사실은 내가 찔러 죽이기라도 한 거냐고 묻자 서
진이 겨우 표정을 풀고 피식 웃는다.
“설마.”
“그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
“난 괜찮으니 말해봐. 뭐라도 상관없어.”
“……다 알게 되면 많이 놀랄 거야.”
“그러니까, 그 놀랄 일이 대체 뭐냐고? 갑자기 본 적도 없는 동생들이 한 백 명
이라도 줄줄이 나타나서 내가 발작한 거야? 아니면 또 어떤 아줌마가 나타나 안방
차지하고 있다 나랑 싸우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드디어 그 사람이 결혼이라도
한 거야? 그것도 아니면, 드디어 남자가 애라도 안고 나타났어?”
자신의 머릿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 그렇게 묻자 서진이 조용히 재현
을 돌아본다. 선팅을 짙게 했다지만 9월의 햇살을 막는 건 무리였다. 눈이 아플
정도로 강한 그 빛 아래로 보이는 서진의 표정은 그 빛 덕에 더욱 어두워 보였다.
그 표정이 기묘하게 신경을 건드려왔다.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나 동생과 관련된
모든 일을 처리했기에 그에 대해서는 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끔 이 사람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
을까 싶을 정도로 무슨 일이 있어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남자의 이런 얼굴은
확실히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었던 거다. 자신이 기억해야 하는 무슨 일이 있던 거다.
“나 이제 적당히 받아들였고, 적당히 정리했어. 걱정하지 말고 얘기해줘. 나 그
런 거 소화 잘하는 거 알잖아.”
“……그래도 충격 받을 거야.”
너무나 진지한 그 말에 마른 웃음이 터졌다.
“내가 진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아버지랑 나랑 둘이 살았다는 것보다 더 충격
적일까? 거기서 이미 받을 충격은 다 받았어.”
“……진짜 괜찮아?”
“그 사람 덕에 어릴 때부터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자랐어. 덕분에 신경줄 하나
는 세계 최고니까 걱정 말고 얘기해. 조금 놀라더라도 금방 괜찮아져. 놀라 기절
하거나 질질 짤 일은 없을 테니 얘기해.”
그가 나타난 이후부터 툭하면 집안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애인들과 잊을 만하면 불
쑥 불쑥 나타나는 동생이라는 존재들, 그리고 내가 새엄마야, 라고 하고 웃으며
나타났다 종래에는 반쯤 미쳐 날뛰던 여자들까지. 할머니와 다른 삼촌들이 있었다
지만 그들은 아버지에게는 한 마디도 못 하는 이들이라 결국 그 뒷감당은 자신이
다 해야 했다. 동생이라고 나타나는 애들을 우선 뒤로 세우고 친자검사 후 받아들
이거나 되돌려 보내거나 하는 일도 그렇지만 그 여자들과 피 터지게 싸우는 것도,
그리고 종래에는 그 남자와 싸우는 것도 모두 자신이 해야 했다.
미혼모인 어머니와 자란 시절을 지나 자존감을 완전히 무시당하며 자란 유년기,
그리고 아버지와 싸우고 그 주변사람들과도 매일 전투를 벌이며 치열하게 자란 청
소년기까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최악인 환경이었다. 아니,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그 남자였다. 그 남자는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야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여섯 살 때 이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열네 살
때까지만 해도 그를 본 적 없이 자랐기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나
이가 든 뒤 만난 아버지란 인간은 듣도 보도 못한 아주 이상한 종자였다. 나이 차
가 열다섯 살밖에 나지 않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건 같은 학교에 그런 아이가 하
나 더 있었고, 매스컴을 통해 미혼모, 청소년 임신 등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얻은 채였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버지보다는 연상이지만 고등학교
시절 자신을 낳은 어머니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부모님의 나이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초연해진 채였다. 자신에 대한 믿음과 뚜렷한 신념, 사랑 받고 자
랐다는 확신만 있다면 사회적 편견이나 불편한 시선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이상한 건 그 사람 자체다.
누가 봐도 이상한 남자였다. 아들들을 향해 ‘저거’라는 표현을 하는 거나 사람
들을 괴롭히고 미쳐가는 꼴을 보면서 즐기거나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문제
였던 건 그의 애인이나 가족들에게도 조금의 애정을 갖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애정은커녕 그는 그의 가족들을 모두 증오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도 사람들을
싫어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와의 관계가 나빴던 건 아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그
가 돌아오면서 처음에는 괜찮았다. 어린 시절 단 한 번 스친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다시 만난 그는 그 정도로 매력적이었기에 처음에는 그의 관심을 얻으려 애를 썼
었다. 하지만 그는 그쪽으로는 조금의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아무리 관심을 갖고 애정을 바라며 힐긋거리고 주변을 맴돌아도, 그는 오로지 무
시와 멸시로 일관했다. 대놓고 상처 주는 말들을 내뱉고, 재원이나 어린 재영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도 아무렇게나 던져댔다. 처음에는 놀라고 당황하다 어
느 순간부터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 미친 듯이 싸웠다. 그러다 그냥 포기하고 이
쪽에서 그를 무시하기 시작하니 이번엔 진짜 질기도록 사람을 괴롭혔다. 마주쳐도
그를 보지 않고 말을 안 걸면 다른 쪽에서 문제를 일으켜 반드시 그를 보고 화를
내게 만들었다. 그가 하는 짓이 하도 극악무도해 처음에는 벌벌 떨면서 그러지 말
라고 애원했지만 나중에는 웃으면서 무시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시를 하면
더 포악해지기에 결국은 그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웃긴 건, 그렇게 비위를 맞춰주면 성의가 없다고 타박을 한다는 거였다.
결국 그는 자신이 뭘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그건 결국 그가 자신
을 아주 싫어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건 자신뿐 아니라 모든 가족들에게도 마
찬가지였다. 그는 본인 외의 모든 이들을 멸시하고 혐오하며 쓰레기 취급하고 있
었다.
그 덕에 이젠 무슨 짓을 당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
었다. 그 남자 덕에 평생 한 번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에 이젠
그가 무슨 짓을 했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어서 이야기하라고 재현이 서진을 바라보고 있자 서진이 다
시 침착함을 되찾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천천히 답한다.
“이럴까 봐 될 수 있는 한 퇴원을 늦추고 싶었는데……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빨리 받아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지금 네 상황은 대강 이해했지?”
“제어계측공학부 2학년. 유학은 날아갔고, 그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아버지랑 살
고 있고. 면허 땄고, 큰 삼촌하고 큰 고모 결혼하셨고. 불어난 동생은 없는 상태
고. 이제, 내 인적사항 다음으로 내가 알아야 할 게 뭐야?”
차분하게, 한 달간 외우기엔 창피할 정도로 짧은 인적사항을 줄줄이 내뱉고 있자
서진이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 외엔 별거 없으니까. 중요한 건…….”
“중요한 건?”
“……정원이가 죽었어.”
툭하니 던져진 그 말을, 재현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정원’이라는 이름이
낯설어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정원, 정원이가 누구더라, 사용인의 아이인가, 아니면 내 친구였던가, 하고 한참
을 생각하다 문득 그 이름의 주인을 떠올리는 순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듯했
다.
“……뭐라고?”
“정원이가 죽었다고. 자살했어.”
“하……?”
“나흘 뒤가 49재야. 오늘부터 슬슬 가족들이 올 텐데 너랑 같이 있다 죽은 거라
사람들이 널 좋게 보지는 않을 거야. 네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으니까.”
“뭐라고?”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 이야기에 재현은 계속해서 ‘뭐라고?’
라는 말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자신이 갑자기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신분이 상승하고, 미성년자에서 성인이 되었고, 그 집을 나와 보기도 끔찍한 아버
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당
연한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 속에서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고’에 대한
거였다. 아니, 그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형, 지금 장난하는 거지?”
“이런 걸로 장난할 리가 없잖아.”
“……말도 안돼…….”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니까.”
“……어떻게 죽은 건데?”
“추락사. 네가 살던 그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어.”
“왜?”
“우울증에 이런저런 스트레스 탓이겠지. 나도 그 녀석이 왜 네 아파트까지 찾아
가서 자살을 한 건지는 잘 모르지만, 정황 상 네가 말리는데도 그대로 떨어진 모
양이야. 즉사였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그 말에 재현은 서진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멍한 얼굴로
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을 귀로는 듣고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데, 그 이야기에는 현실감이 없었
다. 자신의 기억 속에는 너무나 멀쩡하던 사람이, 바로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순간
에도 차 핑계로 본채를 오가며 고양이처럼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던 그 사람이,
죽어 벌써 한 달이 지났다는 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건 말이 안 된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이건, 또 뭐야? 아버지랑 짜고 나 엿 먹이는 거야? 여기 몰래카메라라도 달아놓
은 거야?”
“재현아…….”
“그러지 않고는 말이 안 되잖아? 병이라면 이해해. 하다못해 교통사고라도 이해
한다고. 오늘 아침에 멀쩡하게 인사하고 헤어진 사람이 출근길에 차이 치어 죽을
수도 있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가보니 급사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자살
이라는 건 뭐야? 삼촌한테 자살할 용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 그래서 아무도 눈치 못 챈 거야. 원래 우울증은 있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
는 녀석이라 같이 살던 가족들도, 나도, 너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어. 하지만
사람은, 가끔 그렇게 죽기도 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죽을 결심
을 하기도 해.”
그런 게 우울증이라는 거니까, 라고 서진이 덧붙이는 말에도 재현은 도저히 그 말
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자살이라는 건, 다른 사람 목숨도 아니라 자기 목숨을 끊는 건, 진짜 독한 인간
들이나 할 수 있는 거야. 삼촌은 그런 거 못 해.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인간이
자기를 죽인다고? 그게 말이 돼?”
“그래서 떨어진 거지. 그래서, 목을 매단 것도 아니고 손목을 그은 것도 아니고
차나 지하철에 뛰어든 것도 아니라, 아파트에서 떨어진 거야. 그건 멈출 수도 없
고 머뭇거릴 틈도 없으니까. 떨어지는 순간, 그냥 끝나는 거니까.”
순간 재현은 할 말을 잃은 채 옆에 앉은 서진의 담담한 옆모습을 바라봤다.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는 건, 자신의 손목을 자를 용기도
목을 맬 자신도 없는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자살방법
이었다.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고 후회할 수도 없다.
“네 기억도 그래서 그런 걸 수도 있어. 그때 충격 많이 받았으니까.”
“……내가, 그걸 다 봤다고? 아니, 내가 옆에 있었는데도 못 말렸다고? 나보다
약한 그 사람을, 내가 못 끌어내렸다고?”
“그건, 나도 정확히는 몰라. 내가 연락을 받고 갔을 때, 넌 이미 반쯤 정신이 나
가 있었으니까. 경찰이 사건 경위를 물을 때에도 횡설수설하고 제대로 설명도 못
할 정도로 정신 놓고 있었어. 대강 들은 바로는 정원이가 네 아파트에서 같이 잤
는데 새벽에 깨보니 정원이가 안 보였다고, 그래서 찾아보니 옥상에 있는 정원 난
간에 있어서 네가 말리려고 했지만 그냥 떨어졌다고 들었어. 그 외엔 네가 정신이
나가 있어서 설명을 못 했어. 그 이후로도 너무 충격이 심해서 장례식도 참석 못
하고 며칠을 앓았었고. 최 박사님이 그때 네 상태 보고 신경안정제랑 수면제 처방
해주셨으니까 물어봐도 돼. 그래도 못 믿겠다면 정원이 사망신고서도 보여줄 수
있어. 당시 담당 경찰관이랑 통화를 해도 좋고.”
넌 그 정도로 확실해야 믿을 테니까, 라고 서진은 지극히 담담한 투로 설명을 마
무리 지었다. 더는 아니라고,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
이었다. 이건 농담이나 장난이라기엔 너무 악질적이다. 아무리 그 사람이라도 이
런 짓까지는 못 한다. 사람이라면, 못 한다.
그러니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 그게 현실이라면 일단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냥 삼촌이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을
했다더라, 라고 일단 머리에는 그렇게 입력했다.
그 이상은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이상을 떠올리면 정신이 견디질 못한다. 이건 또
처음 겪는 일이라 아직 소화할 준비가 안 되었다. 볼 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생
각했는데, 그래서 이젠 무슨 꼴을 봐도 괜찮을 거라 여겼는데, 자신이 안이했다.
서진이 그렇게 죽어라 다른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퇴원을 막았던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좋아. 알았어. 그건 알겠어. 거기까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왜 죽은 건데?
자살을 할 정도라면 이유가 있었을 거 아냐?”
“조사 결과 딱히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어. 그냥 우울증에 스트레스가 겹
쳤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이라 그렇게 넘어간 거고. 최근 유행처럼 자살붐이
일고 있었으니까.”
“……유서는 없었어?”
“있었어. 네 아파트가 아니라 그 녀석 방에. 이젠 다 놓고 편해지고 싶다고 써져
있던 거 보니, 애초에 죽을 생각으로 네 아파트에 갔던 것 같아. 그 아파트 22층
이니까.”
22층이라는 말에 재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순간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고소공포증 같은 건 없지만 15층 높이에서만 봐도 까마득한데 22층이라니……. 그
겁 많은 사람이 어떻게 거기서 떨어질 생각을 했을까?
“너 진짜 그때 많이 놀랐어. 경찰이 와서 조사할 때에도 사장님한테 매달려서 떨
기만 했으니까. 한여름인데도 너무 추워해서 담요를 어깨에 덮고도 계속 떨기만
했어.”
지금까지 이어진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지금 들은 말은 조금 다른 의미로 경악스
러운 이야기였다.
“……내가? 아버지한테 매달려 있었다고?”
“사장님이랑 같이 살았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내가 아버지한테 매달렸던 게 맞냐고? 미치지 않고서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랬어.”
사람이라는 게 너무 놀라면 도끼를 들고 서 있는 연쇄살인마한테도 매달리는 건가
, 하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정신이 나갔어도 어떻게 그 사람한테 매
달릴 생각을 했을까.
“진짜 말도 안 돼…….”
“너, 사장님하고 잘 지냈어. 둘이 살기 시작하면서 조용하게 잘 지냈었어. 지금
당장은 믿기 힘들겠지만, 사장님도 소식 듣고 출장까지 미루고 달려가셨을 정도였
고. 너도 사장님이 오시니까 겨우 말이라도 시작했어.”
이건 삼촌의 죽음처럼 믿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삼촌의
죽음은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니 자신이 믿기를 거부하는 거지만 이건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그거 나 웃으라고 하는 말이지?”
“사실이야.”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 소름끼치니까.”
그와 자신이 좋게 지내려면 그가 변하든가 자신이 변하든가 둘 중에 하나여야 하
는데…… 보다시피 자신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고,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변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절대 벌어질 수 없는
, 단 1% 가능성도 없는 일이다.
호기롭게 퇴원을 하던 때와는 달리 불과 몇 분 만에 지친 기분에 창가에 기대 창
밖을 내다봤다. 그러자, 서진 역시 더는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말을
돌린다.
“피곤하면 가는 사이에 좀 자. 아무리 육체적으로 문제는 없다고 해도 너 그때
일로 충격 많이 받고 잠도 설치고 해서 체력 많이 떨어졌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밥은 먹고 잠은 잘 자던 자신이 잠을 설칠 정도였던 건가, 하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어두운 하늘 아래로 다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차가 창을 두드리는 그 비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바를 물었다.
“……아버지는?”
“응?”
“장례식 가셨어?”
“바쁘셔서 장례식엔 참석 안 하셨어. 지금도 해외에 계셔. 아마 49재도 참석 못
하실 거야.”
그 말에 역시나란 생각이 들었다.
“너무 대단하고 바쁘신 분이라 동생 장례식에도 얼굴을 안 내미시는군. 그래도
마지막 가는 얼굴은 봐주지.”
그렇게나 보고 싶어서, 그리고 인정받고 싶어서 그의 주변에 기웃거리던 산촌을,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이름으로도 불러준 적이 없었다. 아무리 배가 다르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동생이라지만 그는 삼촌을 부를 때에 늘 물건에 쓰는 지칭어를 썼
다. 그리고 일부러 그를 보러 본채에 오간다는 걸 알면서도 볼 때마다 상처가 되
는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그게 상처주고 괴롭히려고 한 거라면 미움이라도 있겠
다 싶겠지만, 그는 진짜 삼촌을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삼촌을 볼 때 그는, 저 필요없는 물건이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지, 저걸 왜 안 치
우지,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도 그러지는 않는다.
“……진짜, 싫어. 그 인간…….”
본능적으로 터져나간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은 채 창가에 기댔다. 바로 옆에 앉은
서진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애써 모르는 체 그를 무시했
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울려왔다. 그리고 심장 한가운데를 얻어맞은 듯 얼얼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더는,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이 집안의 공기는 불손하다.’라고 재현은 속으로 반복하
고 있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불손하다’라는 말을 쓰는 건 이 집안 특유의 오
만함이 집안 구석구석에서 묻어나는 탓이었다. 거리에서 그 집을 분리하는 높은
담장과 고성의 성문처럼 높고 단단한 철문, 그리고 그 철문 너머로 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정원과 으리으리한 건물들.
그 외관뿐 아니라 집안의 분위기 역시 내가 지금 몇 세기에서 살고 있는 건가 하
는 의심이 들 정도로, 불손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이 집안에서 정상적
으로 태어난 장남이었다면 사람을 죽여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저 집안이 천국이었
겠지만, 자신 역시 저 소수의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멸시 당한 이상 이 집 자체
가 지옥처럼 느껴질 뿐이다.
“아까 통화했는데, 윤진경 씨랑 김윤정 씨 와 있대. 할머님께 인사드릴 때 부딪
치게 될 거야.”
철문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가는 차 안에서 서진이 먼저 그렇게 알려주었다. 바로
아래 동생인 재원과 막내인 재영의 모친 이름에 재현은 조금 지친 듯 피로한 얼굴
로 되물었다.
“그 사람들은 또 왜?”
“요즘 자주 드나들고 있어. 최근 윤진경 씨가 기세등등해. 족보까지 뚫고 들어올
기세야. 원래부터도 재원이를 장남으로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
약간의 장난과 많은 악감정을 담은 그 말에 재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재원의
모친인 윤진경은 자신과 특히나 사이가 안 좋은 여자였다. 자신이 유난히 예민할
때 만났던 탓도 있지만 특히나 재원을 앞에 내세워 수시로 이 집에 드나들며 장남
인 자신을 경계한 탓에 자신 역시 그녀에게 모질게 대해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 나름대로는, 재원을 위해서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걸 알기에 적당히
수위를 조절하기는 했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한참이나 어린 자신이, 장남이라는 이
유로 한 마디도지지 않고 그녀를 막 대하는 게 불편했을 것이다. 그건 이해한다.
어쨌든 자신의 성격도 순한 편은 아니니까.
“재원이는 뭐라고 해?”
“여전히 질색하지. 하지만 그 사람이 아들 눈치 보는 것 봤어? 큰 사모님 눈치도
안 보는 사람인데. 큰 사모님 뵈면 아마 그 사람 좀 치우라고 할 거야.”
“내가 왜?”
“다른 사람들 말은 소용없잖아.”
“아버지한테 처리하라고 해. 내가 왜 그 사람 여자들 뒤처리까지 해줘야 되는데?
”
“사장님 앞에서는 또 완전 다른 사람이잖아. 네가 자리 비운 사이에 심할 정도로
기가 살았으니 적당히 기 좀 죽여 놔. 그래야 네가 편해.”
“지금은 그럴 기운 없어. 그리고, 어쨌든 재원이랑 재영이 입장에서는 어머니들
이 자주 오가는 쪽이 나으니까.”
그녀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하여간 재원이와 재영이에게는 어머니란 존재가
필요하다. 이런 집안에서 기 죽지 않고 밀려나지 않으려면 뒤에서 더러운 짓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자신이야 성격이 온순한 편은 아니라 당하고 살지만은 않지
만 그 아이들은 순하고 여린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뒤에는 욕심 많고 영악
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2년 사이 너랑 사이가 더 안 좋아졌으니 어느 정도 각오는 해둬. 만나자마자 싸
우려고 들지도 몰라.”
“거기서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는 거야?”
자조적인 그 말에 서진이 서서히 본채 앞에 멈춰선 차 안에서 그가 한 충고에 대
한 부연설명을 더해준다.
“너랑 사장님이랑 같이 나가 살기 시작한 후부터 더 안 좋아졌어. 사장님께서 널
좀 심하게 싸고돌기도 했고, 애들에 대해서도 너한테 다 알아서 하라고 하셔서 애
들 진학문제나 학교 문제에 입도 벙긋 못 했으니까.”
“그 사람이 날 싸고돌았다고? 형, 제발 믿을 수 있는 말을 해. 이래서는 형이 하
는 말을 하나도 믿을 수가 없잖아.”
“사실이야. 아직은 실감이 안 나겠지만 천천히 알게 될 거야.”
과연 알게 된다 해도 믿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는 했지만 이미 지친 채라
반론하지 않은 채 차에서 내리려 문을 열려하자 서진이 다시 말을 건다.
“먼저 들어가서 큰 사모님께 인사드려. 난 서쪽 별채에 네 짐 좀 두고 올게.”
그 말에 막 차문을 열던 재현이 인상을 쓴다.
“본채에 내 방 있잖아.”
“거긴 지금 비었어. 리모델링 중이라 정신없을 거야.”
“하지만 별채는…….”
서쪽 별채의 용도를 알기에 뭐라고 하려다 재현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다지
기분은 좋지 않지만 본채에 있는 것보다는 별채가 낫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문제로 입 싸움을 할 기운이 없다.
“알았어. 할머니는 내 상태 아셔?”
“응. 보고 드렸으니 아실 거야.”
“알았어. 내릴게.”
대강 상황 파악을 한 뒤 차에서 내려서자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우중충한 날씨에
검은색의 정장을 갖춰 입은 여비서가 문 앞에 선 채 자신을 맞이한다. 분명히 그
녀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 서혜선. 서혜선이었다. 할머님의 개인비서. 사람이 눈
앞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여자. 할아버지 쪽의 먼 친
척뻘 된다고 들었는데 표정이 차다. 그래서 15살 때부터 봐오고도 데면데면한 상
태로 지냈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여자의 얼굴에 뭐라고 말을 걸까
망설이다,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하자 그녀 역시 목례로 답하며 말을 건넨다.
“어서 와.”
“할머님 안에 계세요?”
“응접실에서 계속 기다리고 계셔. 들어가 봐.”
“네.”
그녀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 재현은 커다란 홀을 천천히 돌아
봤다.
확실히 바뀌었다. 자신이 기억하던 본채는 구조만 서양식일 뿐 내부 인테리어와
생활 방식은 지극한 동양적이었는데, 홀 안을 장식하고 있던 세 폭의 동양화가 사
라지고 화려한 바로크풍의 웅장하다 못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유화가 자리
하고 있었고, 계단의 벽 쪽을 꾸미던 붉고 푸른 주단으로 만든 발들도 모두 사라
진 채 그 위를 갖가지 화려한 회화들과 무거운 벨벳 커튼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난간 역시 고풍스러운 무늬가 들어간 나무에서 철제로 바뀌어 있었다.
이건, 확실히 할머니의 취향이었다. 본채를 리모델링 중이라더니 이렇게 하나하나
바꾸고 있으신 모양이었다. 원래 화려하고 웅장한 서양식을 좋아하시는 분이라 천
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계단 위쪽을 바라보자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어쩐지 싫다. 소름이 끼쳐올 정도로, 저 계단 위가 무섭다.
바로 저 위에 자신이 쓰던 방이 있는데, 그래서 오가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운 곳
이었는데 지금은 바라보는 것도 무서울 정도로 그곳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
우 인테리어가 바뀐 것뿐인데, 그곳을 쳐다보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불쾌하고 소름이 끼치는 듯한 감각에 아찔한 듯 눈을 감았다 뜨자 옆에 서 있던
혜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현아?”
바로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혜선이 약간의 걱정을
담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잠깐 돌아보느라고요. 저기 벽에 있던 모란이 그려진 그림이 없어져서요.”
“사모님께서 치우셨어. 왜? 낯설어?”
“……네, 좀.”
“……진짜 기억이 없나 보구나. 곧 익숙해질 거야. 사모님께서 기다리시니 먼저
인사부터 드리고 와.”
“네.”
두통이 오는 기분에 서둘러 계단 쪽에서 시선을 돌리고 응접실이 있는 오른쪽 복
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선 문 앞으로 다가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할머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아마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아이들을 모두 싫어
하던 할아버지와 달리, 할머니는 손자들을 꽤 좋아했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만은
예외였다.
그러고 보니 이 집안 전체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동생들과 막내 삼촌, 단
세 명뿐이었다. 그 외엔 할머니도, 아버지도,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다른 삼촌들
과 고모들도 모두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밖에서 낳아 겨우 인정받고 들어
온 아이라면 적당히 순종적이고 비굴하고 눈치를 볼 줄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성
격이 못 되니 그들의 시선에서는 자신이 거슬릴 수밖에 없다.
그녀를 만나면 그녀의 입에서 분명 안 좋은 이야기들이 나올 게 뻔해 잠시 마음을
다잡은 뒤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 재현입니다.”
“들어와라.”
일반적인 할머니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꽤 곱고 명쾌한, 힘이 있는 그 목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응접실에 앉은 세 명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집안에
서도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주름살 하나 없는
할머니와 외관상으로는 겨우 할머니의 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 둘이 할머님의 옆
에 놓인 긴 의자에 앉은 채였다. 생머리를 깔끔하게 틀어 올리고 샤넬의 트위드
정장을 걸친 미인은 윤진경, 둘째인 재원의 모친이었고, 다른 한 명은 부드럽게
웨이브진 단발의 좀더 여성스러운 분위기를 한, 막내 재영의 어머니였다. 아버지
의 애인들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봐왔기에 딱히 감정을 가질 필요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싫었다. 동생들은 좋아하지만, 동생들의 어머니들은 싫다.
“오랜만이네, 재현이.”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거는 윤진경과 그 옆의 여인에게 살짝 눈길로만 인사를 한 뒤
, 재현은 할머님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심려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알면 됐다. 앉아라.”
그녀의 말에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 반갑지 않은 두 여자의 맞은편 자리에 앉자 할
머님이 먼저 말을 건네신다.
“얼굴이 안됐구나.”
“네.”
“얘기는 들었다. 기억에 문제가 있다고?”
“심각한 수준은 아닙니다. 일시적인 기억 장애 수준이고, 뇌에는 아무 문제없으
니까요. 이러다 갑자기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고요.”
차분하게 의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자 그녀가 잠시 자신의 얼굴을 바
라보다 은밀한 투로 묻는다.
“……정원이 일도 기억 못 한다고?”
뭔가 거리낌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서진과 마찬가지로 탐색하는 듯, 뭔가를 확인
하려는 듯한 그 말투에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한다. 아무리 그녀가 낳은 아이가 아니라지만, 그래도 30년 가까이 키운 막내
아들을 잃은 여자치고는 피로하거나 슬픈 기색이 없는 그 얼굴에 잠시 그녀의 의
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기억나지 않습니다. 장례식도 참석 못 해서 죄송합니다.”
지치고 피로한 상태라 그럴 듯한 말을 늘어놓은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자 할
머님 역시 형식상의 그럴 듯한 대사를 늘어놓으신다.
“그건 어쩔 수 없지. 네가 많이 놀랐다고 들었는데,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그래,
정혁이는 봤니?”
자신의 아버지를 가리키는 그 이름에 재현은 담담히 답했다.
“아뇨. 아직 통화도 못 했습니다.”
“연락해둬라. 걱정하고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이 연락을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예의상
답을 한 뒤 입을 다물자 다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와 자신은 늘 지극히
도 형식적인 대화만을 반복하기에 그 형식적인 내용이 떨어지면 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쯤 끝내는 게 서로에게 좋다. 괜히 대화가 길어져봐야 서로 스
트레스만 받을 뿐이니까.
일단 얼굴 보였고 멀쩡하다고 신고를 했으니 슬슬 이 지리멸렬한 대화를 끊을 타
이밍을 엿보던 사이, 윤진경이 끼어들었다.
“어머니, 재현이는 그만 쉬라고 하세요. 피곤해 보이는데.”
‘
어머니’라는 말이 귀에 거슬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술 끝을 올려 웃는다.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에 그녀를 무시하고 할머
님을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러는데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그만 나가서 쉬겠
습니다.”
“다들 그만 가서 쉬어라. 재현이 넌 서쪽 별채로 가서 쉬고.”
그녀답지 않게 부드러운 그 태도에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더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곤혹스러워, 자리에서 일어서자 앞에 앉아 있던 윤진경과 김윤정 역시
같이 일어선다.
“쉬세요, 어머니.”
“그래.”
깍듯한 인사 후 자신을 따라나서는 그녀들을 슬쩍 바라본 재현은 응접실을 나온
뒤 인사도 남기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례한 태도라는 건
알지만 좋게만 대해서는 끝이 없는 여자들이라 일부러 그녀들을 무시한 채 문을
향해 걷자 뒤에서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아주 높고 신경질적인 톤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사내들 줄줄이 잡아먹은 녀석치고는 너무 멀쩡하네? 다 죽어간다길래 난 또 환
장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잔뜩 가시가 돋친 그 말에 재현은 걸음을 멈춘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요?”
“지 삼촌까지 잡아먹은 귀신이 너무 멀쩡하니 하는 말이잖아? 그러게 너만 얌전
히 있었으면 조용할 걸 뭐 잘났다고 그 사람 신경을 건드려서 사단을 내? 그래놓
고 기억상실? 좋아하시네? 수치스러운 줄 알면 쥐 죽은 듯 닥치고 있지, 어디 얼
굴을 들고 다시 기어들어와? 사내 잡아먹는 요물이…….”
“윤진경 씨!”
폭언에 가까운 말이 이어지던 중 막 이쪽으로 다가서던 서진이 진경의 말을 막는
다.
“말을 좀 가려하시죠. 내뱉는다고 다 말이 되는 건 아닙니다.”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니듯, 붙어먹는다고 다 되는 건 아니지. 수치를 알아야지
. 지도 찔리니 기억 없다고 얼굴 뻔뻔하게 들고 나타난 거 보라고.”
뜻을 알 수 없는 그 말에 재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자 서진이 곧장 재현의 옆
으로 다가서 재현을 막아선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폭언을 하시는 건데요?”
“이 집안 사람들 다 아는 거 아냐? 저 자식이…….”
“그러니까, 그 집안 사람들 다 아는 걸 정확히 눈으로 보셨냐고 묻는 겁니다.”
서진이 냉랭한 태도로 마치 화를 내듯 도전적인 어투로 그렇게 묻자 그녀가 당황
한 듯 망설인다.
“그거야 다들 아는…….”
자신 없는 듯 말을 흐리는 그녀의 말을 서진이 다시 잘라낸다.
“적당히 해두시죠. 근거도 없는 헛소리나 퍼트리실 거라면 이 집에 출입 안 하시
는 게 좋으실 겁니다. 지금 이 일, 사장님께 보고 드릴까요?”
보고라는 단어에 계속해서 웃고 있던 진경의 얼굴이 당황한 듯 굳어지자 서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다.
“저도 저지만 재현이가 이런 걸 말 안 하고 넘어갈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재현이
가 재원이나 재영이처럼 묵묵히 입 다물고 당하고 있을 성격 아니라는 거 잘 아시
면서 자꾸 일을 키우시는군요.”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난 그냥 있는 사실 그대로…….”
“말조심하라고 방금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재현아, 가자.”
진경의 말을 무 자르듯 잘라낸 뒤 서진은 서둘러 재현의 팔을 잡아끌곤 긴 복도를
빠져나갔다. 서진의 손에 이끌려나가며 재현은 당황해 나란히 선 두 사람을 돌아
봤다. 살기등등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윤진경과 그 옆에서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고 있는 김윤정의 얼굴에 강한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이긴 하지만 없는 말을 떠드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형, 윤진경 씨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야?”
“신경 쓰지 마. 괜히 시비 거는 거야.”
“그런 투가 아니잖아. 내가 저 사람을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뭔가
있으니까 저러는 거 아냐?”
지금 자신이 아는 것 외에도 분명 다른 뭔가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묻자 막 홀로
나선 서진이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시선을 마주한
채 말을 건다.
“네가 기억 없다는 거 알고 괜히 저러는 거야. 저런 식으로 말하면 네가 예민하
게 반응할 거 아는 사람들이잖아. 넌 건들면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성격
이니까.”
서진의 말은 그럴싸했다. 워낙에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라 그녀들은 어떻게든 자
신을 자극하고 시비를 걸려 했고 그때마다 자신 역시 만만치 않게 받아쳐줬다. 그
러다 보니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신경을 내리 긁으려 할 말 못 할 말 다하기는 했지
만 지금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있으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 아냐?”
“네가 정원이를 잘 따랐잖아. 사장님하고 싸울 정도로 좋아하고 잘 따랐으니 그
러는 거야. 정원이 일로 사장님하고 집안 뒤집힐 정도로 싸웠던 것도 기억 안 나?
”
그 말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갔다.
“그건 그 사람이 삼촌을 막 대하니까…….”
“그때 말고 넉 달 전에.”
그 말에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넉 달 전이라고 해봤자 기
억나지 않는다. 삼촌 문제로 싸웠던 건, 고2 여름 때 즈음이었다. 그 사람이 자꾸
동생들과 자신 앞에서 삼촌을 무시하는 데에 욱해서 한바탕 했었고 그때에도 그가
삼촌을 말도 안 되는 상대와 결혼을 시켜 유학을 보낸다고 해서 결국 싹싹 빌고
끝내야 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 사건으로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
는 걸, 그 사람이 굉장히 싫어한다는 걸 알고는 그냥 조용히 있었다. 가만히 있으
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걸 깨달았기에 봐도 모르는 척 침묵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
다. 그런데 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에 인상을 쓰며 서진을 바라보고 있자 서
진이 한숨을 내쉰다.
“정원이 일로 넉 달 전에도 크게 싸웠었어. 그것도 집에 돌아왔다 싸운 거라 마
침 윤진경 씨도 와 있어서 봤을 거야. 너 집 나간 뒤로 사장님하고 잘 지내서 그
렇게 크게 싸운 건 오랜만이라 다들 이상하다 생각했을 거고. 네가 정원이를 너무
싸고도니까 사장님이 굉장히 불쾌해하셔서 뭐라고 하니까 너도 처음엔 그러지 말
라고 하다 또 욱해서 큰소리 냈었고. 그러다 결국 다시는 정원이에 대해 한 마디
도 하지 말라는 말 듣고도 네가 계속 매달려서 그것 때문에 사장님이 집안에 있던
사람들 다 내쫓고 난리였어. 어쨌든 네가 정원이에게 유별난 건 사실이었으니까.
”
서진의 말은 그럴듯했다. 그와 자신이 싸울 때에 나오는 전형적인 패턴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그 패턴에서 벗
어난 것들이 있었다.
“형 말대로 그렇다 쳐. 그런데 싸웠다면 원인이 있을 거 아냐?”
“정원이 결혼 얘기가 나왔었는데 네가 그러지 말라고 했었어. 그것 때문에 사장
님이 굉장히 화나셨고.”
“그걸로 왜 화를 내는데?”
“사장님은 그냥 네가 정원이 얘기 하는 걸 싫어하셨어. 재원이나 재영이도 마찬
가지고.”
그건, 진짜 너무 그대로잖아, 라는 생각에 한숨이 흐른다.
“그 말 들으니 도저히 사이 좋았다는 게 믿음이 안 가네. 아무 것도 변한 게 없
잖아. 그 사람은 내가 뭘 하든 싫어하는 거잖아, 결국.”
“조금 달라.”
“뭐가 다른지 전혀 모르겠어.”
결국 겉보기에만 다른 거 아니냐고 하려 하자, 서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들여다본다.
“이럴까 봐 퇴원을 미루라고 한 거야. 기억이 안 돌아온 상태로 돌아오면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았어. 지금의 너랑 2년 전의 너는 많이 달라서, 믿지 못할 일들이
많을 테니까.”
확실히 그럴지도 모른다.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2년 전 그
대로 멈춰버린 채라 그럴지도 모른다. 2년 사이에 진짜 큰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
른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 2년을 따라잡는 게 문제다. 2년 전의 자신이 지금의
내가 이럴 리 없다고 우겨봤자 주변 사람들만 곤란하게 할 뿐이라는 걸 알기에 받
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재현은 천천히 기분을 가라앉힌 뒤 다시 하나하나 중요한 일들을 체크하기 시작했
다.
“……나, 이 집에서 언제 나간 거야?”
“너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고등학교 졸업 직후라면 자신이 최후로 기억하고 있는 5월에서 불과 8개월 정도
후의 일이다. 겨우 그 짧은 기간 사이에 4년이 넘게 이어져오던 그와 자신의 험악
한 관계가 좋아졌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 변하긴 한 거다, 확
실히.
“그런데 왜 애들은 안 데리고 나간 거야? 나만 나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그게 조건이었어. 애들은 동쪽 별채로 옮기는 대신에 네가 사장님이랑 나가기로
한 거야. 대신, 애들은 마음대로 하게 해준다고 조건도 있었고. 윤진경 씨랑 김윤
정 씨가 이 집에 편하게 오가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어.”
역시 그런 조건이 있었던 거구나, 라고 생각하니 그 말도 안 되는 동거도 서서히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어떤 변화가 있었다기보다는 또 협박을 당하거나 뭔가 타
협을 한 거다.
“……역시 대가 없는 호의는 없는 거군. 딱 아버지다워.”
이 세상에 공짜란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쉰 재현은 살짝 흘러내린 머리카
락을 쓸어 넘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다시 걸음을 옮긴 서
진이 어깨를 두드려준다.
“일단 서쪽 별채로 가서 쉬어. 다른 별채들은 이제 슬슬 친척들이 올 때라 시끄
러울 거야. 이사님들이 널 꽤 괴롭힐 수도 있어.”
이사님들이란 나이 차 얼마 안 나는 숙부들을 가리킨다는 걸 알아듣고는 재현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들어온 지 10분도 안 됐는데 벌써 목이 뻐근해져오는 기분에 손을 뻗어 뒷목을 주
물럭거리자 서진이 걱정스레 말을 건다.
“피곤해?”
“응, 조금. 머리가 복잡해서.”
“한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려고 하니 그런 거야. 차 대기시켜놨으니까
데려다줄게.”
“괜찮아. 천천히 걸어갈게.”
“병원에서 곧장 나왔잖아. 빨리 들어가서 쉬는 쪽이 좋아.”
확실히 지치기는 한 기분이라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그를 따라 건물을 나서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강한 햇살이 느껴졌다. 들어갈 때와는 우중충하던 하늘에
서 햇빛이 쏟아지자 현기증이 일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였다. 오전에는 뜨거운 햇
살이 비치다 오후가 되니 비가 내리고, 그리고 잠시 후 비가 그치고 흐려졌다 또
다시 이렇게 햇살이 내리쬐다니. 정신없는 날씨 변화에 머리가 아득해지는 듯했다
. 어쩐지 현기증이 나 비틀거리자 서진이 옆에서 팔을 잡아준다.
“그것 봐.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니까.”
“갑자기 더워져서 그래. 한 달 내내 에어컨 죽도록 돌리는 병원에 있어서, 날씨
적응이 안 돼.”
“그러니까 조용히 별채로 가서 쉬어. 아무도 방해 못 할 테니 나오기 싫으면 거
기서 나오지 마.”
“……애들은 언제 와? 재원이는 고등학생이니 그렇다 쳐도 재영이는…….”
그러고 보니 동생들을 본 것도 까마득해 그렇게 묻자 서진이 차 앞으로 다가가 뒷
좌석의 문을 열어주며 답한다.
“혜선 씨한테 들어오면 연락하라고 해둘게.”
열린 차문으로 가 막 올라타려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다시 옆에 선 서진을 바
라봤다.
“애들 핸드폰 번호 안 가르쳐줄 거야?”
“문자로 보내줄게.”
“응.”
서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차에 올라타 안쪽으로 들어가 앉자 서진이 바로 옆
에 올라탄다.
“오늘은 푹 쉬어.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응.”
“그리고 사장님께 연락드리고.”
“어차피 형이 벌써 했을 거잖아.”
움직이는 차 안에서 그렇게 되묻자 서진이 씁쓸하게 웃는다.
“그래도 퇴원했다고 보고는 해야지.”
“내가 죽으면 좋아할 사람한테 멀쩡히 퇴원했다는 보고하고 싶지 않아. 형이 전
해주기만 하면 돼.”
한 달 전까지의 그와 자신의 관계가 어떻든, 지금 자신은 그와 친밀하게 통화를
할 상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기억이 기억인 터라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도 싫다. 지금 그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건 머리통을 후려치던 그 통증과 어지럼증
뿐이니까.
“……뭐, 어차피 지금 영국 출장 중이시니까. 아마 다음 주에나 돌아오실 거야.
”
“관심 없어.”
또다. 툭하니 내뱉은 그 답에 서진이 묘한 시선을 던져온다. 마치 세밀히 관찰하
는 듯한 그 시선에 서진을 돌아보며 시선을 맞추자 서진이 어색한 얼굴로 웃어 보
인다.
“그냥, 좀. 여전하구나 싶어서. 넌…….”
이라고까지 말한 서진은 또 애매한 부분에서 말을 끊었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그
말투에 재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왜? 더 할 말 있으면 해. 망설이지 말고.”
“……아냐, 아무 것도. 아파트에서 네 짐하고 양복 챙겨서 보낼게. 당분간은 본
가에 있을 거지?”
“응. 49재는 지내야지. 애들도 보고.”
그 말에 옆에서 힐끔 이쪽을 바라본 서진이 다시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이런 말하기는 그렇지만 너랑 애들, 예전처럼 좋지는 않아. 그 애들도 그 애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으니, 아마 널 반기지는 않을 거야.”
“……왜?”
“애들 입장에서는 네가 사장님이랑 먼저 도망쳐버린 거니까.”
순간 허를 찔린 기분에 재현은 조금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
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 원망해?”
“그냥 좀 이런저런 오해도 있고, 네 어머니 쪽 동생들 문제도 좀 있었어.”
“어머니 쪽 동생? 왜?”
“너 어머니랑 연락하고 애들 자주 봤잖아. 그쪽 동생들도 꽤 예뻐해서, 애들 나
름대로는 소외감 느꼈을 수도 있어. 그리고 말했다시피…… 정원이가 네 아파트에
서 죽었잖아. 그것 때문에 쌓인 앙금이 있어. 재원이랑 재영이도 정원이 좋아했으
니까. 특히 재영이는 거의 정원이가 키운 거였고.”
“아…….”
그러고 보니 그 문제가 있었다. 삼촌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자살을 했으니,
그를 막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하기는 하지만 무
뚝뚝하고 가끔 욱하는 성미가 있는 자신보다 아이들에게 사근사근하고 푸근하던
삼촌을 잘 따르던 애들이었다. 친어머니들은 따로 있지만, 삼촌은 이 집에서 아이
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예쁜 옷이 있으면 사다주고, 맛있는 게 있으면 먹
여주고, 이 커다란 집을 무서워하던 재영이 잠을 못자면 같이 자주기도 하고. 그
런 사람을 잃었으니 슬퍼하고, 그런 사람의 죽음을 막지 못한 자신을 원망하는 것
도 당연하다. 아이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다.
“……많이 화났어?”
“화났다기보다는 납득을 못 하는 거니 당분간은 그냥 놔둬. 애들도 나름 풀어내
야 하니까. 좀 더 자라면 이해해줄 거야. 아직은 어려서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들
이 있으니까.”
과연 시간이 지난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말을 재현은 입안으로 구겨 넣었
다. 아이가 자라더라도, 상처는 남는다.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아이들이 멀어졌다는 사실
에 속이 쓰렸다.
겨우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충격을 받았다. 차라리 이럴 거
면 한 달 동안 하루에 하나씩 알려줄 것이지, 이 짧은 시간 사이에 그 많은 것들
을 받아들이고 화내고 슬퍼하고 정리를 하려다 보니 뇌와 심장이 그 속도를 못 따
라간다.
지금은 일단 조용한 데로 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뒤 해결책을 찾아내자. 기억이 돌아오건 돌아오지 않건, 자신에겐 분명히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차를 타고 얼마 걸리지 않아 서쪽 별채에 도착한 차에서 내려선 재현은 서진을 보
낸 뒤 천천히 서쪽 별채를 돌아봤다. 그러자 목조 건물 앞에 우뚝 선 한 여자가
보였다. 꽤나 지긋한 나이로 보이는 여인이 깔끔한 메이드 복장을 한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여인의 얼굴에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말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인 듯했
다. 서쪽 별채의 일을 봐주시는 분들은 늘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눈을 마
주한 채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들리나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그녀가 소리에 반응을 해온다.
“방은 어딜 쓰면 되죠?”
그 질문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가 먼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 자신을 기
다린다. 따라오라는 그 신호에 돌로 만든 계단으로 올라서 단층의 건물 현관으로
들어서자 먼저 신을 벗은 그녀가 기름을 먹여 반짝거리는 나무가 깔린 복도로 올
라선다. 천천히 집을 돌아보자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여긴 그대로였다. 전혀 변
하지 않았다.
2년 사이 변하지 않은 곳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넓은 복도를 따라 그녀를 따
라 걷자 그녀가 ‘ㄷ’자 형태의 복도를 따라 가장 왼쪽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으로 자신을 안내해간다.
그녀를 따라 잠시 걷다 도착한 방 앞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너른 방이 눈
에 들어왔다. 복도와 마찬가지로 나무가 깔린 넓은 방 안의 왼쪽에는 비단 이불이
깔린 나지막한 원목 침대가 놓여 있었고 나무로 된 벽에는 적갈색의 원목 가구들
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복도의 맞은편으로 난 낮은 계단으로 올라서면 바닥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창틀이 보였다. 그 창에는 갈대로 만든 발이 쳐져 있었고
창 앞에는 낮은 테이블과 비단 보료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자주 오가던 곳이라 낯설지 않은 그 풍경에 고개를 끄
덕이며 그녀를 돌아봤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 보세요. 건물 구조도
잘 알고 뭐가 어디 있는지 전부 아니까요.”
그 말에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그녀가 방을 나서 미닫이문을 닫는다. 혼자 된 방
안에서 계단으로 올라서 창가로 다가가 발을 걷자 창호지로 된 안쪽 창이 눈에 들
어왔다. 그 창을 열고 바깥을 바라보자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후원의 풍경
이 눈 안을 가득 채워온다.
이곳은 그대로였다. 조금씩 바뀐 다른 곳과는 달리 이 후원은 14살에 본 그대로였
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비밀스럽고 고풍스러운, 그리고 조금은 우울한 느
낌이 그대로 남은 아름다운 그 풍경에 보료에 앉아 창틀에 몸을 기댄 채 밖을 내
다봤다.
풍경이 고아하다. 조용하고 서늘하다. 그리고 정체되어 있다.
그런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시간을 되돌린 듯
예스러운 느낌의 이 후원은 비현실적이라 좋았다. 이곳에 있으면 바깥의 시끄럽고
복잡한 일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자신까지도 정체되는 듯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 곳은 늘 평화롭고 아
늑했다.
조금이나마 지친 마음이 가라앉아가는 느낌에 창틀에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아주 잠깐 잠이 든 듯했다.
까무룩 의식이 가라앉았다 다시 떠올랐다. 아주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눈이
아플 정도로 내비치던 햇살이 사라지고 어둠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비가 내
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용히 피부 위로 젖어드는 듯한 빗소리였다. 세
우(細雨)다.
창문을 열고 창틀에 기대 잠든 채라, 이러다 젖을 텐데,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저 밖의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너무나 감각들이 생생하다. 아니, 쓸데없이 신경들이 곤두선 채였다. 촉각
과 청각과 후각까지, 오감이 날이 선 듯 예리하다.
피부 위로 느껴지는 습도와 물비린내와 뒤섞인 꽃향기들, 그리고 안개처럼 흐리게
막을 친 빗줄기와 연못의 표면과 잎사귀들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소리에 찝
찌름한 비 맛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분명 의식은 깨어 있었다. 하지만 눈이 떠지지 않는다. 그리고 몸을 움직일 수 없
었다.
어서 일어나 창을 닫아야 하는데, 아무리 처마가 길게 져 있어도 비가 내리칠 텐
데 하는 걱정을 하던 사이 차가운 손이 목가에 닿아왔다. 축축하고 싸늘한 그 감
각에 몸을 움츠리자 그 손이 천천히 목덜미를 쓸어내린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시체처럼 차가운 그 손의 감촉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 느낌이 싫어 손
을 뿌리치려 했지만 잘 되질 않았다. 아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가위에
눌린 듯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묵직한 것이 내리누르는 듯한 감각과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한기에 식은땀이 흐
르기 시작했다.
이건 분명 가위다. 의식이 깨어 있으니까 가위에 눌린 거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거나 깨워주길 기다렸지만 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아
무도 들어올 수 없다. 가위가 자연히 풀릴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마치 스멀거리는 뱀처럼 몸을 감싸고 있는 서늘한 손에 이를 악다문 채 떨고 있자
식은땀이 비처럼 흘러내린다.
일어나야 하는데. 어서 눈을 떠야 하는데.
어떻게든 손가락이라도 움직이려 애를 쓰는데 목을 더듬던 손길이 등 뒤에서 세게
목을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그건 명백한 살기였다. 살의를 가진 그 손길에 발버둥치려는 순간 귓가에서 서늘
한 그 손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되고 ……는 안 되는 거지? 왜……. 어째서…….』
“재현아?”
어깨를 흔드는 힘에 번쩍 눈을 뜬 재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사방을 돌아봤다. 정신이 없는 듯,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재
현의 모습에 재현의 옆에 앉아 있던 혜선이 걱정스러운 듯 재현을 바라본다.
“괜찮아? 계속 헛소리를 하던데?”
조금 놀란 듯한 그녀의 음성에 재현은 그제야 겨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겨우
자유로워진 몸에 눈을 세 번 깜빡인 뒤 움직이자 관자놀이를 타고 땀이 흘러내린
다.
온몸이 무겁고 뻐근했다. 전심이 땀에 젖어 있고 목가는 더없이 무겁고 뻐근하다.
누군가 목을 비튼 듯 얼얼한 느낌에 목가를 손으로 만지자 손바닥 가득 땀이 묻어
나온다.
흥건한 땀방울에 재현이 여전히 멍한 눈으로 손을 바라보고 있자 혜선이 다급이
말을 건넨다.
“식은땀 좀 봐. 최 박사님 불러줄까?”
겨우 이 정도에 주치의를 불러준다는 그녀의 말에 재현은 정신이 번쩍 든 듯 서둘
러 자세를 고쳐 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가위에 좀 눌려서 그런 거예요.”
재현이 여전히 잔뜩 긴장해 있는 어깨에서 힘을 빼며 몸을 바로하자 살피듯 자신
을 바라보던 혜선이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안 좋으면 얘기해.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섭다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교통사고는 아니고 차 앞에서 쓰러진 것뿐이지만 굳이 정정해줄
기운이 없어, 재현은 대강 말을 흐렸다.
“그럴게요. 그런데 여긴 왜…….”
“강 기사님 편에 네 짐이 왔어. 양복이랑 입을 옷이라고 이서진 씨가 보냈어. 지
갑하고 카드도 있어.”
그 말에 계단 아래를 바라보자 커다란 여행 가방과 수트케이스, 그리고 지갑이 놓
여 있었다.
“아주머니께 옷 정리해달라고 할까?”
“아뇨, 제가 할게요. 걱정 마시고 가보세요.”
오래 있을 건 아니라도 며칠간이라도 지내야 하는 이상 정리는 해야 하지만 자신
의 짐을 타인에게 맡기는 건 질색이다. 두 손 멀쩡한 성인이 그런 걸 타인에게 맡
긴다는 것도 싫지만 일단 누군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도 싫어하는 편이라
내가 하겠다고 말하자, 그녀가 순순히 끄덕이며 물러섰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재영이 올 시간 거의 다 됐어. 볼 거면 30분 후 쯤
본채로 와. 재영이랑 재원이 다 본채에서 식사하고 건너갈 거야.”
“네.”
“그럼 쉬어.”
용건을 마친 그녀가 마치 도망치듯 빠르게 방 안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다 천천
히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창틀을 짚고 겨우 균형을 잡는데 왼쪽
종아리가 아파왔다. 종아리 뒤쪽의 근육이 뭉친 듯 단단하고 무거웠다.
아니, 종아리뿐이 아니라 온몸이 무겁다. 전신이 잔뜩 물을 머금은 듯 무겁게 가
라앉기만 한다. 몸도 마음도 축 쳐지는 기분에 일어서 창밖을 바라보자 비는 오지
않았다. 그저 흐릴 뿐, 비가 내린 흔적은 없었다.
분명 빗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것도 꿈이었던 모양이다.
“개꿈이네…….”
방금 전 그 꿈을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악몽일 뿐이라고 치부한 뒤 어깨에서 힘을
뺀 재현은 일단 옆에 놓인 짐을 정리하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조용히 계
단으로 내려서 우선 여행가방을 들고 붙박이장 쪽으로 가며 뻣뻣한 목을 풀려 목
을 좌우로 움직였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데도 이상하게 뒷목이 얼얼했다. 마치 누군가 목을 조르기라
도 한 듯 아려왔다.
여름이라서인지 날씨가 흐린데도 해가 지는 시간은 늦다. 7시가 다 돼가는 시간임
에도 제법 환한 하늘에, 재현은 샤워를 한 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느긋하게
본채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녹음이 진 울창한 숲을 지나 한참을 걸어 본채에 도
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가고 있었다. 어둑해질 무렵 본채에 들어선 재현은 먼저
재영을 찾았다.
“재영이 아직 안 돌아왔어요?”
막 문을 열어주던 아주머니께 그렇게 묻자 그녀가 차분한 어조로 답해준다.
“재영이는 학원 갔다 좀 늦게 올 거야. 요즘은 재원이가 더 빨리 와.”
“학원요?”
“응. 영어학원에 논술학원하고 요즘은 한자랑 중국어도 배워. 화요일하고 금요일
에는 태권도장도 가고.”
“아…… 그래요.”
이 집 특성 상 보통은 과외를 시키지 집 밖으로는 애들을 내보내지 않는 편인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학원을 다니게 해준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학원만 다
섯 개인 건 좀 무리지 않나 싶기도 했지만, 이 집안에 공기에 익숙해지기보다는
밖으로 도는 편이 낫다. 그 녀석도 숨 쉴 곳은 필요하니까. 그리고 조금이라도 평
범한 아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상식이라는 게 뭔
지 배우려면 사람들이 많은 곳에 있는 편이 좋다. 이 집안에만 있으면 상식에 대
한 개념 자체가 흔들리게 되니,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려면 사람들 속에 파묻
히는 게 낫다.
몸은 고되겠지만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응접실이나 주방에 가 있을까 하
는데, 삐익거리는 벨소리가 들려왔다. 본채의 현관 벨소리였다.
문을 열려 다가오는 아주머니께 손을 들어 내가 열겠다고 신호한 뒤 직접 문 앞으
로 가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문을 밀어 여는 순간 숨이 멈추는
듯했다.
“어…….”
2년이었다. 2년이면, 한창 성장기의 사내아이들은 골격뿐 아니라 얼굴과 분위기까
지 바뀐다. 하지만 그 녀석은 워낙에 큰 녀석이라 그다지 변하지 않았을 거라 여
겼는데,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거의 비슷하던 눈높이가 고개를 들어 봐야 할 정
도로 높아져 있는 것도 굉장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얼굴의 윤곽과 체형이 완
전히 달라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단지 덩치가 커진 게 문제가 아니었다. 무서울 정도로 자란 키보다 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순하고 인상 좋던 소년이 순식간에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성인 남자가 된 듯, 낯선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너무나 그를
닮은 그 얼굴이었다.
분명히, 이 아이는 아버지를 닮았었다. 그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에 인상
이 달라 자세히 뜯어보지 않으면 거의 의식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나
많이 닮았다. 아직은 좀 더 어리고 신경질적인 느낌이지만, 마치 아버지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꼭 닮아 있었다.
어쩐지 심장이 터질 듯 아팠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고 숨을 내쉬기 어
려웠다.
너무 놀라 멍하니 문가에 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재원이 불쾌한 듯 눈썹을 찌
푸린다. 그 미묘한 변화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몸을 짓누르는 듯
한 압박감에 뒤로 물러선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 재원이 아무 말 없이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 시선이 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 아이가 자신을 이렇게 바라본 적은 없었
다. 처음 만난 그 날부터 자신에게 깍듯하게 형이라고 다가섰고 그 이후로도 자신
의 말에는 늘 순종적인 아이였다. 둘 다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이 집에 들어왔고,
의지할 데가 없었기에 마치 친구처럼 친하고 격 없이 지냈었다. 다른 형제들처럼
싸우는 일 한 번 없이, 너무나 잘 지내왔다.
그런 아이가 지금, 자신을 너무 무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경멸하고 거부하
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찌르는 듯 날카로운 그 시선에 속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심장을 찔러
대는 그 통증에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던 재원
이 시선을 돌린 채 한 걸음 내딛는다. 성큼, 홀 안으로 들어서 자신을 무시한 채
옆으로 스쳐가는 그의 위압감에 눌려 뒷걸음질친 채 서 있자 바로 옆을 스쳐가던
그가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인다.
“살인자.”
정신이 반쯤 나간 채 본채 뒤쪽의 후원으로 나선 재현은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후
원을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다.
“젠장.”
겨우 11개의 숫자를 누르는 것뿐인데도, 계속해서 손가락이 미끄러져 몇 번이나
번호를 누르고 지우기를 반복해야 했다. ‘빌어먹을 터치스크린’이라는 말을 반
복하며 다시 꼼꼼하게 터치패드 위의 번호판을 누르던 재현은 화면 위로 떠오른
11개의 번호를 보곤 이번엔 곧장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다 통화
가 이어지자 다급히 입을 열었다.
“형, 재원이가…….”
하는 말이 대체 뭐냐고 하려는데 바로 이어진 상대방의 음성에 말이 끊겼다.
「뭐지?」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낮고 윤기 나는 목소리와 부드럽고 우아한 억양. 그리고 세
련된 말투까지. 목소리와 외관만 보자면 더없이 근사하기만 한 남자의 음성에 입
술을 꾹 닫았다. 그리고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서 있다 핸드폰을 내려 액
정 위의 번호를 확인했다.
분명히 서진의 번호라고 생각하고 눌렀는데, 아니었다. 혹시나 해 다시 번호를 곱
씹어 봐도 자신의 기억에는 없는 번호였다. 워낙에 통화할 일이 없어 그 남자의
전화번호 같은 건 핸드폰에 저장하지도, 외우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왜 이 번호를
누른 걸까? 아니, 그 전에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자신은 그의 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걸까?
순간 너무 놀라 얼결에 전화를 끊고는 화면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자 곧 다시
벨이 울려온다. 방금 전 그 번호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이걸 받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계속해서 울려대는 그 소리
에 어쩔 수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아무 말 없이 답을 기다리는 그 분위기에 먼저 입을 열었
다.
“전화를 잘못 걸었어. 실수야.”
시차를 계산해 보니 그쪽은 아직 오전 시간대였다. 한창 바쁠 시간이라 서둘러 전
화를 끊으려 하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가 차다는 웃음이었다.
「……이건 또 뭐하는 짓이지?」
“서진 형한테 걸려다 실수한 거야. 미안. 끊을게.”
이번엔 진짜 전화를 끊으려 핸드폰을 귀에서 떼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신경을
긁어내리는 듯한 그 웃음소리에 인상을 쓰고 있자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하고 있어, 서재현. 아주 잘하고 있어. 곧 직접 보고 얘기하자고.」
말은 잘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잔뜩 비틀린 채였다. 굉장히 화
가 난 듯한 그 말투에 반사적으로 받아쳤다.
“왜 또?”
「왜 또? 이제 와서 너랑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뭐, 좋아. 이것도
나름 재미있어. 하지만 여기까지야. 더는 날 화나게 하지 마. 이 정도도 충분히
참았어.」
“‘참는다’는 말도 알아? 난 아버지는 그런 말은 모르는 줄 알았는데?”
냉랭한 그 답에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겼다. 어이없는 상황에 재현은 핸드폰을 손
에 든 채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냥 단축번호를 누르면 될 걸 정신이 나가
일일이 번호를 누른 자신도 멍청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아버
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건 너무 놀라웠다. 기억도 못하던 그의 번호를 본능적으
로 누를 정도라니, 그와 자신이 꽤 가깝게 지냈다는 서진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실감은 안 된다. 그와 자신 사이에 팬 골이 그 정도로 쉽게 해결이
될 리 없기에 얼떨떨했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증거들이 명확하게 하나둘 씩 나타
나고는 있었다.
대체 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고민하다 다시 핸드폰을 내려다보곤 단축
번호를 누르자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바쁜지 쉽사리 통화가 연결되지 않아 다
시 후원 안을 서성거리며 기다리자, 열 번 정도의 신호음이 울린 뒤 서진이 전화
를 받는다.
「응. 무슨 일 있어?」
“살인자라니, 무슨 소리야?”
앞뒤 설명도 없이 무작정 나간 그 말에 서진이 되묻는다.
「뭐?」
“재원이가 나한테 살인자라고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내가 사람이라도 죽
인 거야?”
말 한 마디 걸기도 힘든 재원의 냉랭한 태도에 차마 그에게는 묻지 못하고 서진에
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묻자 서진이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내가 미리 말했잖아. 널 곱게 보지는 않을 거라고. 너처럼 재영이랑 재
원이도 정원이를 잘 따랐어. 그런데 너랑 같이 있다 죽었으니 너한테 책임을 미룰
수밖에. 다들 네가 정원이를 안 말렸다고 생각해. 그날 정원이가 죽을 때 옆에 있
던 것도 너고, 말리지 못한 것도 너니까.」
서진의 변명은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있었다. 재원이 자신을 바라보던 경멸하는 듯한 시선이나 윤진경의 그 매서운 말
투, 그리고 할머니나 집안 사람들의 기묘한 태도까지. 모든 게 이상했다. 원래도
자신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건 그냥 꺼려한다는 느낌과는 다른 느낌이
었다.
“……형, 나 바보 아냐. 재원이 말투는 그런 게 아니었어. 윤진경 씨도 그러고
재원이도 그렇고. 그냥 하는 말들이 아냐. 대체 삼촌하고 나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신경이 예민해진 채라 빠른 어조로 서진을 닦달하자 서진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
로 받아친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다들 원인을 모르니 같이 있던 너한테 책임을 떠넘기는
것뿐이야. 내가 이럴까 봐 너 정원이 49재는 지나서 퇴원하게 하려고 했던 거야.
칠칠재까지는 가족들 분위기도 그럴 테니까.」
서진의 답은 정석이었다. 그렇게 이해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머리로
는 그의 말이 맞다고 이해가 가는데, 본능이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어떻게
봐도 이건 이상하다. 재원이, 겨우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저렇게까지 적대적인 태
도를 취할 녀석이 아니다.
“형, 말은 이해하는데…… 아무래도 이건 이상해. 2년이 지나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 무조건 시간이 흘렀다는 탓으로 돌릴 수는 없어. 내가 더 알아
야 할 일이 있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될 수 없어.”
「그래,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중요한 것들은 모두 이야기
했어.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너 사장님하고 잘 지낸 후부터는 사장님이 거의
다 직접 일을 처리하셔서 나랑 자주 볼일 없었어. 게다가 네가 말이라도 많은 녀
석이라면 몰라도 너 네 얘기 안 하는 녀석이잖아. 그 외에 사적인 게 뭐가 있는지
몰라, 나도.」
“진짜야?”
「그래.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 전에 살던 아파트에 가 봐도 좋고, 네 차도
보고 방도 돌아봐. 학교에 가 봐도 좋고.」
“……나, 차 있었어?”
「응. 운전하고 다녔어, 직접.」
그러고 보니 지갑을 봤을 때 분명 학생증하고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차를 몰고 다녔다는 건 의외였다. 확실히, 많은 게 다르다. 그러니까 확인을 해봐
야 한다.
“그 아파트, 그대로 있지?”
「응.」
“내일 가볼 수 있어?”
「그래. 내일 오전은 무리고 오후에 들를게. 같이 가서 봐. 그 집 가서 돌아보면
뭐가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주소만 알려줘. 혼자 가볼게.”
「거기 들어가는 거 까다로워. 전자키 다 나한테 있으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너
비밀번호도 기억 안 나잖아. 나도 비밀번호는 몰라. 사장님하고 너, 둘만 알아,
그 건물 비밀번호는.」
“알았어. 그럼, 부탁할게.”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오늘은 일단 푹 쉬어.」
“응. 자꾸 전화해서 미안해.”
「아냐. 끊을게.」
통화종료 버튼을 누른 뒤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머리가 아프거나 어지러운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꽤 충격을 받았는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밥을 먹을 기운도 없어 그대로 별채로 돌아가 자고 싶었지만
식사자리까지 피할 수는 없다. 계속 피하고 숨기만 한다면 더 현실에서 멀어지기
만 할 뿐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부딪치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선 재현은 핸드폰을 든
채 다시 집안으로 향했다.
“재원이는 식욕이 없다는구나. 날이 더워서 그런가 보니, 우리끼리 하자.”
다행인지 불행인지 속이 안 좋다며 재원이 동쪽 별채로 돌아간 후라, 식당에 마주
앉은 사람은 할머님과 자신, 그리고 껄끄러운 두 명의 여자들뿐이었다. 재원이 자
리에 없다니, 재현은 조금 실망하면서도 동시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 괴리감에 작
게 한숨을 내쉰 뒤 네 명이 식사를 하기엔 지나치게 큰 대리석 식탁 앞에서 의자
를 빼곤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착석과 동시에 할머님이 먼저 수저를 드셨다
.
“시작하자.”
맛깔스러운 빛을 띤 나물들과 전골 요리, 그리고 몇 가지 전과 산적. 소식을 하는
가족들이라 소량으로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 위를 바라보다 할머님이 먼저 수저를
움직이는 걸 본 뒤 숟가락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수저를 움직이자 무거운
침묵이 식탁 위를 돈다. 맞은편에 앉은 두 명이 옷까지 갈아입은 걸로 봐서는 오
늘 밤 이 집에서 떠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게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어차피 안 보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묵묵히
식사를 계속하는데 식사를 하시던 할머님이 문득 이쪽을 바라보신다.
“통 식사를 못 하는구나.”
그 말에 그릇을 내려다보니 그렇지 않아도 적은 양의 밥이 거의 그대로였다. 원래
도 양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지금은 더더욱 식욕이 없다. 아침, 점심도 제대로 안
먹고 있다 퇴원을 한 터라 배가 고플 만도 한데 도통 식욕이 없다.
“날이 좀 더워서요. 식욕이 없네요.”
“뭐 다른 거 해줄까? 동치미 좋아하지? 좀 꺼내오라고 할까?”
목소리가 싹싹하다. 그리고 말투도 더없이 나긋하다. 만날 때마다 필요이상의 말
은 하지 않고 늘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시선을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던 그녀
의 과도한 친절에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몸이 많이 축난 것 같은데, 이 김에 아예 본가로 들어오
는 건 어떠니?”
“네?”
“정혁이는 워낙에 바쁜 녀석이니 너 혼자 있다 또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
본가로 들어와서 지내면 사람들이 많으니 먹을 것도 잘 챙길 수 있고, 동생들 자
주 봐서 좋잖아. 너 들어오면 정혁이도 들어올 테니, 재원이나 재영이도 좋을 거
아니냐?”
무심한 듯 던지는 그녀의 말에 순간, 그녀의 목적을 알아채고 말았다. 갑자기 웬
친절이신가 했더니 역시나 그녀의 목적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다시 이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에게 먼저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 게 빤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 집안 사람들이 자신에게 어떤 친절을 베풀
때엔 아버지에게 뭔가를 바랄 때였다. 워낙에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이라서, 진짜
그의 심장조차도 무기질로 뒤덮여 있는 듯 감정이라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라 뭔
가를 바라는 게 있어 부탁을 할 때에도 이쪽의 사정보다는 그쪽의 기분이 아주 중
요했기에, 그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챈 이후부터는 그와 직접 대화해서는 해결이
안 되거나, 그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무서운 경우에, 은근히 자신을 이용해 그와
싸우게 하거나 그들이 원하는 걸 끌어내게 만들었다.
이쪽이 화를 내면 그 사람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이용하는 거다. 그게
진짜 끔찍하게 싫었다.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지만, 제가 들어온다고 아버지가 들어오시진 않을 것 같은
데요.”
“들어올 게다. 네가 나가자고 해서 나갔으니 들어오자면 들어오겠지. 시끄러운
게 싫으면 서쪽 별채를 비워둘 테니 거기를 쓰면 되잖아. 요양도 겸해서.”
그 말에 묵묵히 식사를 하던 윤진경이 놀란 듯 고개를 들어 할머님을 바라본다.
“어머님, 서쪽 별채는…….”
당황한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에 할머님이 담담한 얼굴로 대꾸
한다.
“왜?”
“그게…… 아무리 그래도 남들 눈이 있는데……. 잠깐이야 방이 없어 쉰다지만
재현이가 거기서 지내는 건 보기 그래요.”
“그게 왜?”
“서쪽 별채는…….”
이라고 윤진경이 말을 흐리자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불쾌한 듯 낮아진다.
“그게 벌써 언젯적 이야긴데?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그런 걸 신경을 써?”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말을 뚝 자르시는 할머님의 냉담한 얼굴에 윤진경이 당혹
스러운 얼굴로 옆을 돌아보자 이번엔 김윤정이 나선다.
“어머님, 옛날이야기라고는 해도 아버님이 돌아가신 게 겨우 6년 전이잖아요. 10
년째 비어있기는 했지만 가끔 집에 들르시는 손님들도 거기가 어떤 곳인지 다들
아는데…… 남들 보기 민망하잖아요.”
김윤정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리자 할머님이 기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
녀들에게 묻는다.
“재현이가 거기 안 들어가면 정혁이가 거길 너희한테 내줄 것 같으냐?”
날카로운 그 물음에 허를 찔린 듯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문다. 그 모습에 속으
로 혀를 차는 사이, 할머님이 말을 이어간다.
“그런 거면 어서 정신 차리고 포기해. 원래는 돌아오자마자 그 건물부터 철거하
려고 했던 녀석이다. 풀 한 포기 안 남겨두고 싸그리 밀어버린다는 걸 남겨둔 건
재현이가 지낼 거라 그런 거니, 그 건물 욕심은 버려.”
그 말에 이번엔 재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당히 묘한 느낌의 말이었
다. 그 건물의 용도를 몰랐다면 몰라도, 그걸 아는 이상 그 말이 이상하게 다가왔
다.
“할머니, 저…….”
그건 확실히 이상하다고 말을 하려는데 그녀가 멋대로 말을 자른다.
“안 넘어가더라도 천천히 넘겨. 바깥 일 하는 사람 신경 안 쓰이게 하려면 잘 먹
어야지. 그리고 네가 건강해야 그 놈도 잘 챙길 거 아니냐. 내 말도 안 듣는 녀석
이니 너라도 챙겨야지.”
그건 더 이상하다. 아버지를 왜 내가 챙겨야 하는 거냐고 물으려다 문득 맞은편에
앉은 여자들의 불쾌한 듯한 시선에 그제야 할머니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
금 그녀는 저 여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게 분명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을 앞세워 저 두 사람에게 경고를 하려 하고 있는 거다.
이 이상은 다가오지 말라고. 너희 자리는 딱 거기까지니 그 이상 간섭하고 파고들
려 하지 말라고, 벽을 세우는 거다.
눈치를 챈 이상 더 이상 뭐라고 말을 하기도 모호한 상황이라 입을 다문 채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끔거리는 윤진경의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일부러 그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수저를 움직였다.
그와 함께 다시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아 간다.
그 무거운 침묵에 어서 이곳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