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14)

째깍거리는 초침의 소리가 울려왔다. 조용한 방 안에서 울리는 그 소리에 재현은 

연신 방안을 서성거리다 문득 시선을 돌려 협탁 위에 놓인 자명종을 바라봤다.

오후 8시 47분.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책상 위를 바라보자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서류

봉투와 몇 장의 팸플릿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 오후, 가족들 몰래 친구와 함께 등록을 해둔 유학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지원교로부터 9월 학기 입학허가서가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소

식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같은 학교를 신청했던 친구와 함께 유학원으로 가 입학허

가서와 함께 그 학교 근처의 어학원에 대한 팸플릿과 홈스테이 신청서, 그리고 F1

비자를 받기 위한 신청서를 넘겨받았다.

그 순간에는 기뻤다. 서류와 팸플릿들을 손에 쥐는 순간, 드디어 여길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정신이 반쯤 나가 지하철을 역방향으로 탔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후

였다. 처음 순간의 환희와 흥분이 사라지고 냉정을 되찾는 순간, 서서히 현실적인 

문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유학을 준비한 건 작년 가을부터였다. 우선, 입학허가서를 받기 위한 방법과 비자

, 그리고 좋은 어학원이 있는 곳을 고르기 위해 미국 전 지역의 사립고등학교와 

지역분위기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뒤졌고, 보안이 철저한 고급 주택가에 위치한 

적당한 사립 고등학교를 골라 입학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오늘, 입학허가를 받

았다.

9월 학기에 등록을 하게 되면 12학년을 한 학기 더 다녀야 하니 신중히 생각해보

라는 충고도 들었지만 지금은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목적이었기에 한 학기를 

더 다니든 한 학년을 더 다니든 상관없다. 혼자 떠날 게 아니라 동생들도 함께 데

려갈 거라는 건 문제였지만 동생들의 경우는 어학연수를 신청하고 근방의 어학원

에 등록을 한 뒤 어느 정도 언어에 익숙해진 후에 유학을 신청하면 된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자신만의 독단으로 진행시킨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일부러 가

족들이 눈치 챌까 SSAT를 보지 않는 학교를 고르고, 담임에게도 집에서 이미 허락

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성적증명서를 받아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담임도 

얼떨떨해하기는 했지만 워낙에 유학 준비를 하는 애들이 많은 학교라, 설마 그게 

집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 한 짓이라고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족들에

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핸드폰으로만 유학원 상담자와 통화를 하며 연결했기에 

아직까지는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잘 왔다. 문제는, 이젠 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할 때란 사실이었다. 비

자를 정식으로 신청하고 발급받기 위해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과

연 자신의 ‘보호자’라는 인간이 순순히 사인을 해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

적이다.

오늘을 위해 반년 이상을 쥐 죽은 듯 살아왔다. 그가 원하는 대로 순종하고 기를 

죽이고, 단 한 마디도 거스르지 않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과연 그 정도로 유학 서류에 사인을 해줄까, 한다면 역시나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의 변덕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니, 변덕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성격의 

문제다. 말을 안 들으면 말을 안 듣는다고 괴롭히고, 말을 들으면 건성으로 대한

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인생의 목표 자체가 자신을 피 말려 죽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 하나 들어주지 않으면서 그가 원하

는 일만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쉽사리 사인을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를 요구하든가, 분명 까다롭게 굴 것이

다.

분명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간절하다. 겨우 잡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 만약 안 된다면, 편법을 쓸 각오도 한 채였다. 하지만 

될 수 있는 한 정식으로 가고 싶다.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는 주위 사람을 둔 친

구를 통해 서류를 위조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금방 집안에 들킬 테니 될 수 있

는 한 정공법으로 가야 한다.

초조한 듯 재현은 왼손 엄지손톱을 씹으며 정신없이 방 안을 오가고 있었다. 등록

기간과 비자 발급 기간, 그리고 동생들의 어학연수를 준비하려면 조금이라도 서둘

러야 한다.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동생들의 경우는 다급히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허락을 받고 유학 갈 지역에 빌라를 구하고 보호자와 함

께 가려면, 지금부터 서둘러도 빠듯하다.

그러니까, 오늘 내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하며 방안을 빙빙 도는 사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문 쪽을 바라보자 곧 문이 열리며 커

다란 덩치를 한 녀석이 커다란 가방을 들쳐 메고 안으로 들어선다.

“방에 들르라고 했다며? 왜?”

매일 얼굴을 보는 동생임에도 볼 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쑥쑥 자라는 녀석을 보

곤 잠시 압도당해 재현은 걸음을 멈췄다. 아니, 그가 자라는 게 문제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살이나 많은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덩치가 좋았던 녀석이니 앞

으로도 더 자랄 것이다.

문제는 이 아이가 자라면 자랄수록 그 사람을 닮아간다는 거였다. 가끔 무의식중

에 얼굴이 마주치면 심장이 떨릴 정도로, 점점 그를 닮아가고 있었다.

“뭐야? 자기가 불러놓고.”

“어…… 아냐. 일단 들어와. 할 얘기가 있으니까.”

“왜? 나 저녁 안 먹고 와서 배고픈데.”

한참 먹을 나이라 하교 후 집에 들러 밥을 먹고 학원엘 가도 돌아오면 떠 배가 고

프다는 녀석을 알기에 아주 잠깐이라고 양해를 구했다.

“잠깐이면 돼. 문 닫아.”

“무슨 일인데?”

탁하며 등 뒤로 문을 닫은 재원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책상 앞으로 다가선 

재현이 책상 위에 올려둔 팸플릿 중 하나를 손에 들고는 침대에 털썩하니 주저앉

는 재원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뭔데? 미국 어학연수 코스?”

앞에 내밀어진 팸플릿에 적힌 글자를 그대로 읽어 내린 재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얼굴로도 일단 팸플릿을 받아든다.

“거기 동그라미 쳐둔 데서 골라. 너랑 재영이랑 같이 갈 데니까, 마음에 드는 데

로 골라. 거기에 따라서 집 위치를 정해야 하니까.”

차분한 재현의 설명에, 펄럭거리며 팸플릿을 펼쳐들던 재원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그의 앞에 선 재현을 올려다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더러, 지금 어학연수를 가라고?”

“맞아.”

“미쳤어? 난 유학 같은 건 안 간다고 했잖아.”

“나도 가는 거야. 오늘 입학허가서가 나왔어. 9월 학기로 들어갈 거야.”

재현의 빠른 답에 재원이 허를 찔렸다는 얼굴로 재현을 바라본다.

“형 고3이잖아.”

“12학년 한 학기는 더 다닐 거 각오했어. 그리고 8월 지나면 나 만18세니까 미국 

가서 면허 따면 충분히 너희 픽업할 수 있어. 물론, 보호자는 따로 가겠지만 불편

할 거 없을 거란 소리야.”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춘 듯 조금의 망설임 없이 준비된 사항에 대해 설명하는 재

현을, 재원이 난감하다는 얼굴로 바라본다.

“잠깐, 잠깐만…… 이거 너무 갑작스러운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유학 준비는 작년부터 한 거야. 대학에 가면 집 나가려고 했지만 내가 대학에 

가다고 너희를 데려고 나갈 수는 없어. 핑계가 안 대. 할머니, 아버지가 눈 시퍼

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내가 너희를 데리고 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하지만 

유학이라면 다르지. 유학원은 수배해놨으니까 우선 어학연수로 어학원으로 간 뒤

에 너랑, 재영이는 1월 학기에 등록하면 돼. 그리고 우리 보호자로는 막내삼촌이 

갈 거야. 여기서, 다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마지막 말에 재원의 얼굴 위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흐르기 시작했

다. 기쁘면서도 당황스럽고, 또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그걸 믿고 싶어 하는 듯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삼촌도? 갈 수 있는 거야?”

“삼촌이 우리 보호자로 가게될 거야. 지금 우리 보호자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삼

촌뿐이니까. 비서가 따라갈 수도 있지만, 삼촌이 가는 쪽으로 끌고 가봐야지. 삼

촌도 이 김에 유학하러 간다고 하면 되니까.”

재현은 어떻게든 될 거라고 그렇게 단언했지만 재원은 그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

었다.

“그게 될까?”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봐야지. 어떻게든 해볼 생각이야. 이대로는, 살기 싫어.”

진심어린 그 말에 재원이 입을 뻐끔거린다. 그도 어지간히 당황스러운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머뭇거리다, 한참만에야 거의 한숨처럼 털어놓는다.

“……힘들 거야.”

“알아.”

“우리는 몰라도, 형이 나가는 건 절대로 허락 안 해주실 거야.”

주어는 빠져 있지만, 지금 재원이 말하는 ‘절대 허락을 안 할’ 한 사람이 누군

지는 재현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에 그래도 될 거

라고 우겨댈 수는 없었다.

확실히 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은 해둬야 한다. 어쨌든 자신은 아직 미성년자

이고 법적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만약 그가 절대 허락해주

지 않는다면…….

“만약에, 내가 못 나가게 된다면 너희들끼리라도 나가. 너희랑 삼촌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일단 준비하고 있어.”

“형은 어떻게 하게?”

“유학을 못 가도 난 몇 개월 뒤면 대학생이 돼. 그럼 어떻게든 이 집에서 나갈 

수 있어.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분명히, 그 사람이 그렇게 약속했었다. 사실, 자신이 그렇게 독단적으로 유학 준

비를 시작한 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라면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던 그의 약

속을 믿은 탓이었다. 일단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그 역시 지켜줄 거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지키지 않는다 해도 지키게 하면 된다.

“아버지가 그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어?”

“…….”

“그렇게 믿는다면 형은 아직도 아버지를 모르는 거야.”

“상관없어. 자기 입에서 나온 말이니 지켜야지.”

“……형은 진짜 전혀 모르는구나.”

의미심장한 그 말에 재현이 막 눈살을 찌푸리려는 순간 침대 협탁 위에 둔 핸드폰

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슬슬 시간이 되었기에 눈으로만 슬쩍 핸드폰의 액정을 확

인한 재현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응.”

「사장님 지금 들어가셔. 3분 뒤에 도착할 거야.」

언제나, 자기 손으로는 문자 한 통 안 보내는 그를 대신해 출퇴근 보고를 꼬박꼬

박 하는 남자의 목소리에 재현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투로 답했다.

“알았어. 저녁은 먹었어?”

「드셨어. 석찬 모임이 있었으니까.」

“형이랑 강기사 아저씨 말야.”

그 인간이 어디서 굶고 다닐 인간이냐고 하려다 적당히 말을 돌리자 그제야 그가 

알았다는 듯 작게 “아.”라고 대꾸한다.

「나는 아직. 아저씨도 아직이야.」

“저녁 차려놓으라고 할게. 먹고 가. 집에 가서 차리기 귀찮잖아.”

「그럼 나야 고맙지.」

“3분 뒤에 내려갈게. 좀 이따 봐.”

살벌하다 싶을 정도로 바르고 용건뿐인 통화를 끝낸 뒤 재현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재원을 바라보자 팸플릿을 손에 든 재원이 가만히 재현을 응시한다.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 얼굴에 재현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자 

이내 재원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일단, 보기는 할게.”

“그래.”

“그리고 부탁인데…… 그냥 좋게 말로 해. 아버지랑 싸우지 마. 형하고 아버지랑 

싸우면 재영이가 너무 무서워해.”

재원의 걱정에 재현은 약간의 죄책감이 담긴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최근 반년 

간은 조용했지만 그와 자신이 싸울 때마다 어린 재영이 무서워 도망치거나 방으로 

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음을 터트렸다는 걸 이젠 들어 알기에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자신의 싸움은 부자간의 싸움이라기엔 지나치게 살벌하다. 얼마 나

지 않는 나이차를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격렬하다. 화가 나 싸우다보면 할 소리 못

할 소리 구분 못 하고 있는 대로 서로를 비난하며 가끔은 폭력까지 오가 할머니와 

삼촌까지 달려와 말릴 정도였고, 가끔은 그 불똥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튀어 집

안이 발칵 뒤집히는 건 예사였으니 이제 겨우 10살이 된 재영에게는 악몽 같은 일

이었을 것이다.

“알았어. 안 싸울게.”

“제발, 부탁할게. 형하고 아버지랑 싸우고 나면 그 뒷감당은 삼촌이나 우리가 해

야 돼. 뭐라고 해도, 아버지는 형한테는 손대지 않으니까.”

그건, 재현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싸우다 격하게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걷어차거나 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자신이 그를 때린 적은 있어도 그가 자신에

게 손찌검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 늘 그랬었다. 항상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피우는 건 자신이었다. 그는 늘 웃으며 자신이 화가 나 고함을 지르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게 더 싫다.

“조심할게. 최대한 기분 맞춰서 좋게 얘기하고 끝낼 거야. 큰소리 나면 내가 불

리하니까.”

“화난다고 아무 거나 집어던지지 말고.”

“알았어. 절대 안 그럴게.”

“절대 말대답하지 마. 언성 높이지도 말고. 그렇다고 화난다고 무시하지도 말고. 

형이 고함치는 것보다 무시하는 걸 더 싫어하시니까. 무뚝뚝하게 쳐다보지 말고 

웃으면서 잘 얘기해. 먼저 차를 갖다 준다고 해도 좋고 옆에 있으면 더 좋아하니

까 최대한 시간을 끌어 봐. 무작정 얘기부터 꺼내지 마.”

하나하나, 마치 처음 학교에 가는 아이를 걱정하는 엄마처럼, 이건 하지 마라, 저

건 저렇게 해라, 라고 재원은 차분하게 재현에게 하나하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본

인이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자각이 있기에 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

였다.

“알았어.”

“형 말대로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잘 됐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차분하게 잘 얘기해봐. 형이 기분 잘 맞추면 어떨지 모르니까.”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잠시 재현의 머리를 스쳐가기는 했지만 재현은 굳이 그

렇게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재원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다.

“가봐. 들어오셨겠다.”

“응. 너, 저녁 먹는다고 했지? 준비해두라고 할게.”

“응.”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지며 돌아선 재현은 문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겨갔다. 문

을 열고 나와 긴 복도를 지나 서둘러 계단으로 내려섰다. 다급한 걸음으로 홀로 

내려서자 홀의 대리석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차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

신히 안 늦었구나 싶어 문 쪽으로 다가가자 응접실 쪽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

려왔다. 그 소리에 혹시나 싶어 보니 역시나였다.

“삼촌, 와 있었어?”

라고 재현은 빠르게 응접실에서 나오는 정원에게 그렇게 물었다. 겨우 일곱 살 많

은 삼촌이라는 건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재현은 그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건 재원

도, 재영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자신보다도 한참이 작은 야위고 여린 사람이지

만 일단 그는 자신과 함께 자란 셈이었고 재영의 경우는 그가 키운 거나 다름없기

에 아버지나 할머니보다도 가깝고, 또 유일하게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또 사랑스럽고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잠깐 차 좀 가지러 왔다가……. 지금, 형 들어오는 거지?”

“응.”

차’라니. 재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거짓말도 못 하는 사람이 말도 안 되는 거짓

말을 하는 속내가 너무 빤해 안쓰럽고, 또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나 싶으면 안타

깝고, 또 조금은 이러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기도 한 복잡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

보던 사이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문 쪽을 돌아보는 순간 재현은 숨이 턱 막혀오는 듯한 느낌

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환하게 조명을 밝힌 홀 안임에도 그가 들어서자 무겁게 공기가 가라앉는 느낌이었

다. 자신의 아비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젊은, 아니 오히려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에도 그는 그 이상의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각도가 줄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에 빈틈없는 쓰리

피스의 정장을 갖춘 채 거만한 태도로 홀로 들어서는 그는 자신뿐 아니라, 막내인 

재영의 아버지라고도 믿겨지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나이가 문제가 아니다.

바라보는 순간 시선이 멈추고, 눈이 마주치면 숨마저 멈춰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또 동시에 무서운 기백과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처음 만난 순간에도 느꼈

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기를 짓누르며 사람들을 압박하는, 그런 사람

이었다.

그래서 늘 이 사람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온다. 화가 나는 것도 같고 짜증이 나는 

것도 같고 숨이 막히는 것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속이 쓰린 건지 답답한 건지 알 수 없는 기분에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의 눈썹이 불쾌한 듯 휘어진다.

“뭘 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가 험악하다.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지, 기분이 상한 티를 그대로 

내비치는 그 음성에 방금 전 재원이 했던 말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최

대한 부드러운 투로 그에게 답해주었다.

“좀 멍해서. 서진 형, 가방 줘.”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 바로 그의 뒤에 선, 자신의 삼촌보다도 나이가 많은 그의 

비서이자 후배인 서진에게 손을 뻗자 서진이 순순히 가방을 넘겨준다.

“형, 강기사 아저씨랑 식사하고 가. 재원이도 같이 먹는대.”

“그래.”

아버지보다도 더 자주 보고 연락을 하는, 어떻게 보면 실질적인 자신의 보호자 같

은 서진에게 인사를 한 뒤 가방을 받아들고 돌아서자 그가 여전히 불쾌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불쾌해 시선을 피하려다 겨우 참고 차분히 말을 

건넸다.

“안 좋은 일 있었어?”

“…….”

“올라가.”

“……너,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언제 마음에 든 적은 있어?”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감정적인 그의 말투에 욱해 순간 공격적으로 나가

버렸다. 재원이 그렇게나 걱정을 하고 잔소리를 했는데도 또 병신 같은 짓을 했다

는 생각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생각보다 빨리 들어왔네. 석찬 모임 있다고 해서 늦을 줄 알았는데.”

최대한 차분한 투로 걱정한 듯 말을 던지자 그의 기세가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일찍 끝났어. 그런데, 저건 또 왜 와 있지?”

누그러진 게 아니었다. 마지막 말에는 칼날이 느껴졌다. ‘저거’라는 게 정원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옆으로 돌아보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정원의 어깨가 

축 쳐지는 게 보였다. 잔득 혼이 난 아이처럼 시선을 내린 채 바들바들 떠는 모습

에 그의 관심을 돌리려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

“내가 할 말 있어서 와달라고 했어. 들어올 시간에 내가 본채에 없으면 화낼 거

잖아.”

“무슨 할 말?”

“대학 문제랑 이것저것. 올라가. 안 피곤해?”

재현의 그 말에 여전히 미심쩍다는 듯 재현을 바라보던 그가 이내 흥미를 잃은 듯 

계단으로 다가선다. 그 모습에 재현이 서진에게 삼촌 좀 챙겨달라는 듯 시선을 보

내자 서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눈짓만으로도 말이 통하는 사람

이 있다는 건 편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계단으로 올라

섰다.

아무 말 없이 계단을 지나 2층의 복도 안쪽의 방으로 들어서 먼저 자연목으로 만

들어진 창가의 의자 위에 가방을 내려두곤 그가 벗어 건네는 재킷과 넥타이를 챙

겨 정교하게 깎인 오동나무 미닫이문을 밀어연 뒤 옷을 정리해 넣었다.

건물 내의 구조는 양식 저택 구조를 따르고 있지만 전체적인 외관과 내부의 디자

인은 모두 한옥의 형태를 따르고 있었다. 베란다는 있지만 베란다 창은 나무를 통

째로 깎아 만든 격자형의 틀이었고 유리창의 안쪽에는 한지를 덧대어 놓아 얼핏 

창호지를 바른 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창을 가린 블라인드 역시 붉은 색의 최고

급 단으로 만든 발이었고, 커튼 역시도 직인이 일일이 수국을 수놓아 만든 번아웃 

천이었다. 가구는 모두 자연목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의자 위에는 공단으로 만든 

보료가 깔려 있었다.

가끔 대체 얼마나 돈을 퍼부은 거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사스러운 방 안을 

돌아보며 창가 쪽의 의자에 앉는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막 커프스를 풀던 그가 짜

증스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돌아본다.

“아까부터 뭐지? 할 말이 있으면 해. 슬금슬금 눈치 보면서 맴돌지 말고.”

역시나, 예리하다. 최대한 평소와 같이 대하려 했는데 이 사람에게는 자신이 오늘 

좀 이상하다는 게 그대로 보인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 말을 꺼내야 할지, 아니면 

재원의 말대로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에게 들킨 이상은 더 이

상 끌 수 없다. 괜히 시간만 끌면 그의 심기만 거스를 수 있다.

“할 말이 있는데…….”

“해.”

“나, 유학 가고 싶어.”

그 말에 잠시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커프스를 다 풀어 테

이블 위로 내던진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어디로?”

“미국.”

“그건, 대학에 간 뒤 생각해.”

“9월 학기 입학 허가 받았어. 빨리 준비해서 떠나고 싶어.”

빠른 그 말에 그의 움직임이 멈춘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다시 불쾌한 듯 일그러

진다.

“뭐?”

“이미 입학허가 받았어. 비자 발급 받고 가면 돼. 준비는 내가 다했으니까 동의

서 작성하고 뉴욕 쪽에 빌라 하나만 구해줘. 애들도 내가 데리고 갈 거야.”

이미 계획해둔 것들을 차례차례 쏟아내자 그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웃는다. 

“네가 미쳤구나?”

“고등학교 졸업하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아.”

“아직 졸업을 한 건 아니지.”

“몇 개월 당기는 것뿐이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래서 말 잘 듣고, 그 까다로운 비위 다 맞추면서 죽어도 하기 싫은 배웅에 마중

에, 오밤중에라도 그가 들어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서 나갔고 시키는 대로 얌전

히, 말대답도 하지 않고, 화도 내지 않고, 하지 말라는 건 절대로 하지 않으며 반

년을 보냈다. 그러니, 그 정도 상은 받아도 되는 거 아니냐고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 눈초리를 휘며 웃는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고? 내가?”

“엄마랑 살고 싶다고 했을 때 분명히 그랬어. 고등학교 졸업한 뒤에 말하라고.”

그때는 준성인이 되니 얼마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말했었다. 분명히, 반년 

전 자신의 귀로 그렇게 들었다고 답하자 그의 입술이 미묘하게 비틀리는 게 보였

다.

불길한 미소였다. 순식간에 등골을 치고 올라오는 불안에 살짝 인상을 쓰자 그가 

역시나 예상대로의 말을 내뱉는다.

“미안하지만,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교를 졸업해도 넌 이 집에서 못 나가.”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나 당당한 그 답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아해져가는 체온에 이를 악문 채 그에게 항의했다.

“말이 다르잖아.”

“설마, 진짜 내가 그 말을 지킬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말을 했으면 지켜야지.”

“유학이 가고 싶은 거면 기다려. 이쪽은 정리해두고 나가야 하니까. 아직은 내가 

본사를 비울 수 없어.”

“누가 그쪽이랑 같이 나가고 싶대? 내가 왜 이 집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당신이 

없는 데로 가려고 하는 거잖아.”

“너, 머리가 나쁜 거야?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거야? 네가 그러니까 널 안 내보내

는 거야. 아직 제대로 길들이지도 못한 녀석을 세상에 풀어놓을 리가 없잖아.”

비웃음 가득한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존심이 갈가리 내찢기는 기분이었다

.

이 사람은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아니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기로는 처음 만났

던 그날부터 늘 이런 식이었다. 그에게 복종하고 그의 관심을 받고 싶어 전전긍긍

하는 이들은 쓰레기처럼 무시하고 경멸하듯 바라보는 주제에, 그의 말을 거스르고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자신은 기를 쓰고 누르고 굴복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싫었다. 진짜 끔찍하게 싫었다.

“누가 누굴 길들여? 내가 당신 개야?”

“그래. 그러니까, 개처럼 기어. 그럼 당장 내보내줄 수도 있으니까.”

“하라는 대로 다했잖아. 이 이상 어떻게 기어?”

“그걸 긴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다

리고 눈치 보고 어떻게 눈이라도 한 번 마주칠까 애타게 기다리고 머리 한 번 쓰

다듬어달라고 얼쩡거리면서 눈치라도 살피라고. 그럼 얼마든지 네 동생들처럼 쓰

레기처럼 봐줄 테니까.”

순간 얼굴 위로 누군가 침을 뱉은 듯, 굳어버렸다. 그래, 굳어버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더는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굳어버린 채였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아니면 버러지라고 해줄까?”

“그 쓰레기랑 버러지가 손잡고 한번에 사라져주지. 안 된다고 해도 난 갈 거야. 

하루라도 더 당신하고 같이 살기 싫어.”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처참한 상황

에 이를 악문 채 돌아서자 의자에 기대앉아 있던 그가 느긋한 음성으로 답해온다.

“네가 얼마나 날 끔찍하게 생각하든, 현재 네 보호자는 나야.”

그리고 너는 미성년자고, 라는 말을 덧붙이는 그의 말에 주먹을 세게 쥔 채 걸음

을 멈추곤 그에게 그 말을 그대로 받아쳐주었다.

“나도 애들도, 어차피 키운 건 아줌마들이고 내 일 처리해주는 건 서진 형이야. 

내가 어디서 뭘 하건 관심도 없으면서 자기 필요할 때만 보호자니 뭐니 갖다대지 

마. 보호자라면 제대로 된 보호를 하고 나서 권리를 요구해. 책임은 지지 않고 권

리만 주장해봤자, 아무도 그 권리 인정 안 해주니까. 어쨌든 난 갈 거야. 그쪽이 

뭐라든 이젠 절대로 말 안 들어. 못 가게 하면 혀 깨물고 죽는 묘기를 보여줄 테

니까.”

이 정도면 충분히 참았고, 이쯤 되면 포기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줄줄이 쏟아낸 뒤, 재현은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더는 그의 비위를 

맞추며 그가 원하는 답을 내줄까 전전긍긍할 생각이 없어졌다. 쓰레기나 버러지 

취급 받아가면서까지 그의 허락을 구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약속을 지킬 생각도 

없었다면 유학은커녕, 대학을 가도 이 집에서는 못 나간다. 그럼, 다른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건 절대 그를 통해서가 아닐 거라는 확신에 더는 그

의 뜻을 따라줄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하며 빠르게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막 문을 밀어 열려는 순간이었다.

미닫이문의 움푹 팬 손잡이 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막 문을 밀어 열려는 순간 머리

통이 얼얼해졌다. 순간적인 충격에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휘청이는 

걸음에 머리가 멍해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이마 쪽에서 뜨끈한 뭔가가 흐르기 시

작했다.

땀 같기도 하고, 혹은 물 같기도 한 그것에 오른손을 들어 그 부근을 만져보자 빨

간 페인트 같은 게 손끝에 묻어났다. 처음엔 페인트라도 던진 건가 했었다.

하지만, 멍하니 울리던 머리가 깨어난 순간 그게 피라는 걸 정확히 인지했다. 그

리고 순간 웃었다.

지금까지 그가 폭력을 휘두른 전과야 수없이 많지만 자신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손찌검을 한 건 이게 처음이었다. 그런 사실을 떠올리자 아프고 어이없고 화가 난

다기보다는, 재미있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이 사람이 그 정도로 화가 났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패. 손만 대지 않고 사람 피를 말리느니, 차라리 이렇게 

패라고. 이건 흔적이라도 남으니까.”

지금 당신 나한테 아주 큰 실수한 거라고, 이건 분명히 학대의 증거로 남을 거라

고 빙그레 웃어 보이자 의자에 기대 앉아 있던 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그리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자신의 앞으로 다가선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도 피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사람이 미치면 어떻게 사람

에게 폭력을 행사하는지 충분히 습득하고 있었다. 가끔은 진짜 죽을 정도로 팬다

는 것도 알고 있다. 말로 피말려 죽이는 걸 더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가끔은 그 

말보다도 독한 폭력성도 보이는 남자니까.

차라리 죽도록 패서 병원에라도 실려 가게 하라고 빌며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

보며 웃자 바로 눈앞까지 다가선 그가 서늘한 눈초리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언제나처럼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 냉랭하고 무감각한 그 시선에 이죽거리듯 시선

을 피하지 않고 웃고 있자 그가 툭하니 내뱉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처음에는 그렇게나 마음에 들던 녀석이.”

“처음 듣는 소린데, 그건? 그런데 어쩌지? 난 그쪽이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

었으니 말야.”

그 말에 살벌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는다. 그 웃음에 얽힌 건 악의와 

비난이었다. 명백하게 읽히는, 그럴 리가 없다는 그의 감정과 자신을 비웃는 그 

기색에지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피식피식 마른 웃음을 내뱉던 그가 이

번엔 기분 좋은 듯 빙그레 웃는다.

“역시,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하는 게 좋겠어.”

소리가 조금 울려오는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경황이 없어 몰랐지만 서서히 

머리에서 통증이 느껴지며 머리가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 역시 둥둥거리며 

크게 퍼져나간다.

어질거리고 흔들거린다. 욱신거리며 쑤셔대는 통증에 어지럼증이 더하자 새삼 화

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짜증이었다, 그건.

“재미있네. 그쪽이 원하는 대로 안 한 게 있다니.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놓는 사

람이 말야.”

“딱 하나 있었지. 어떻든 너무 어려서 조금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생각이 바

뀌었어. 어리든, 늙었든 내 마음대로 하는 거였는데 괜한 친절을 보였어, 내가. 

어쨌든 네 첫인상은 마음에 들었으니까. 한 번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볼 생각이었

는데…… 내가 깜빡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난 그다지 인내심이 없는 인간이라는 걸

.”

“생각이라는 것도 하고 살아? 난 당신은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절대 쉽게 넘어갈 의사가 없다는 듯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

치는 사이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점점 냉랭하게 굳어가는 그의 얼굴

을 보는 순간, 무섭다기보다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즐겁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머리는 욱신거리며 눈앞은 어질어질한 것 같았지만 즐거웠다.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의 눈 안에 떠오른 쾌감을 정확히 읽어낸 듯 점점 더 표정이 

굳어져가고 있었다.

악의를 넘어서 이젠 살의마저 느껴지는 그의 표정에 어쩌면 오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그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는 사실에 대한 쾌감이 더 강했다. 그를 이 정도로까지 화나게 했다는 사실만으로

도 죽음을 무릅쓸 가치는 충분했다. 한 사람에 대한 증오가 때로는 목숨까지 걸 

정도로 강렬하고 충동적이라는 걸 그를 보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격렬한 감정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불행히도 자신은 아직 어려 그 강한 쾌감을 이성적 논리로 짓누를 수 없었

다.

그래서 그를 도발하는 말을 덧붙여버렸다.

“얼마든지 해봐. 패든, 발로 차든, 집어던지든, 마음대로 해봐. 그래도 난 떠날 

거니까. 다리가 부러지면, 기어서라도 나갈 거야.”

바로 눈을 바라보며 그 말을 내뱉던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단단하고 거대한 

뭔가에 얻어맞은 듯, 뇌가 출렁거리며 의식 역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재현은 역시 이 인간과 영원히 마주치지 말아야 했다는

, 이제 와서는 후회해봐야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

추적거리는 빗줄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후덥지근하고 느릿한 비가 연신 내리

는, 장마철이었다. 

그런 날씨는 진짜 싫다고, 재현은 멍하니 떠올리고 있었다. 검은 장막이 낀 듯 흐

린 하늘도, 피부 위로 달라붙어오는 습도도, 그 추적거리는 빗소리도 질색이었다.

더군다나 장례식을 끝낸 후 이런 날씨라니 최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습기가 가득 낀 나무 바닥에 주저앉아, 역시나 습도가 높은 나무로 만든 정자의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재현은 검은 상복을 걸친 채 불쾌한 듯 옷자락을 펄

럭거렸다.

바로 오전,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향년 예순셋.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고

인이 되시기엔 지나치게 젊은 나이였다. 아니, 그렇게나 완벽한 장비들과 최고급 

의사들을 옆에 두고 죽기엔 부끄러울 나이였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러운 심장발작

으로 바로 사흘 전 그의 서재에서 명을 다했고 오늘은 그의 관을 선산에 모시고 

온 날이었다.

하지만 딱히 어떤 감상은 들지 않았다. 원래부터도 저녁때에나 한 번 볼까 말까 

할 정도로 먼 사람이었고, 그는 자신을 싫어했다. 그도 당연한 게 그가 끔찍하게 

아끼던 첫째 아들이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고를 쳐 낳은 아이라는 건 어떤 

부모에게나 악몽이기 마련이다. 게다가 여섯 살까지 그 존재도 모르고 있다, 갑작

스레 아이를 낳은 여인의 가족 쪽에서 연락을 해와 그 존재를 알게 된 거라면 싫

어할 수밖에 없다. 그 덤으로 쉬쉬하고 숨기고 있던 아이들이 자신의 등장으로 줄

줄이 나타났으니 말 그대로 그에게는 날벼락보다 더한 재앙이었을 것이다.

그 덕인지 조부께서는 늘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보곤 했었다. 유전자 감식까지 한 

뒤에야 겨우 자신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자신과 마주칠 때마다 노골적인 혐오를 

아끼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당신의 죽음에 특별히 슬프다거나 하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불행히도 자신 역시 자신을 혐오하는 이를 사랑하고 따르기엔 지나치게 

예민하고 조숙한 아이였으니까.

그의 장례식 후 이렇게 조용히 아무도 없는 곳에 틀어박힌 건 죽은 당신을 애도하

고 추모하려는 생각보다는 그냥 집안의 분위기가 싫은 탓이었다. 그 날씨도 끔찍

하지만 그보다 더 싫은 건 본채에 모여 있는 가족이라는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배가 다른 형제들인 그들은 돌아가신 분의 영전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

는 이 없었고, 다들 누가 얼마의 재산을 물려받게 될지에만 잔뜩 예민해져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표정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대화를 하는 그들이 내뿜는 기이한 긴장감에 집안 전체에서 검고 어두운 뭔

가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피부로 그게 느껴졌다. 스멀거리고 끔

찍하고 불쾌한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할아버지의 임종 후에도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를 대신해 상주 역할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 서쪽의 별채

로 도망쳐 왔었다.

아버지는 미국 지사 쪽에서 대기업을 상대로 한 중요한 거래가 있다는 핑계로 장

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라면 그럴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딱 한 번 

봤었지만 자신을 보던 그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건, 흡사 악귀와 같았다. 냉랭하고 무감각한, 하지만 마치 경멸하고 증오하듯 

바라보는 그 눈빛은 기억이 난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무서운 눈빛만은 명

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보다도 더 강하게 자신을 거부하고 마치 쓰레기 

보듯 하던 그 눈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언젠가 저 사람이 날 죽일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감정은 살의에 가까웠다.

그래서, 다시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죽는 날까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게 끔찍할 정도로 그는 무서웠다.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 그의 얼굴 자체가 공포영화에나 나오는 끔찍한 형상으로 남아 있었다. 절

대 인간일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이 이미지만으로 남아, 그의 사진을 찾아볼 생각도 

그를 만날 용기도 낼 수 없었다. 실제로 본다면 그보다 더 무서울 것 같았기에 절

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딱 4년이면 된다. 아니, 정확히 4년 반이면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집을 나가기까지 딱 4년 반만 더 버티면 된다. 그걸 위안으로 삼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 9년간 한국에 돌아온 적이 없던 사람이니 앞으로 딱 4년 반

만 돌아오지 말아달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 집에서 가장 자신을 혐오하던 어른이 가셨으니, 4년 반만 더 버티면 된다

. 그럼, 다시 엄마와 살 수는 없어도 엄마의 근처에서라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

을 테니까.

이어폰을 낀 채 정자 안에 앉은 재현은 듣던 음악을 리플레이 시키며 본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어서 흩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빗줄기가 흐적거리며 쏟아지는 소리

가 음악 소리에 묻혀가고 있었다.

모두 자기들 일로 바쁠 테니 자신을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곳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던 건 우연히 

이 서쪽 별채의 비밀번호를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차에 타고 우연히 이 별채 앞을 

지나던 순간 옆에 있던 여자와 이야기를 하며 비밀번호를 누르던 어떤 여자의 어

깨너머로 그녀가 누르는 숫자를 얼핏 보고 기억한 것뿐이었다.

그때는 그저 무의식중에, 숫자를 외운 것뿐이었지만 어쩐지 그 숫자가 잊혀지질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 별채에 몰래 숨어들기 시작했다. 왜인지 몰라도 이 

서쪽에 위치한 별채에는 돌아가신 할아버지 외엔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는 금기가 

걸려 있었지만, 가끔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싶을 때면 이곳을 찾았다.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는 곳이기에 혼자 숨어 있기엔 딱 좋았다. 물론, 그래도 저 건물 내로는 

차마 들어갈 수 없어 늘 건물을 돌아 후원으로 나와 이 정자 안에 숨어 있었지만 

이곳에 있으면 늘 마음이 편안해졌다. 

벽을 둘러싸고 마치 이 후원을 에워싸듯 늘어선 버드나무들과 작은 연못. 그리고 

그 연목 위에 선 장자. 고풍스럽고 그윽한 동양의 정취가 풍기는 후원이었다.

그 후원을 가득 채운 꽃들은 마치 한지에 퍼져나간 물감처럼 흐드러지듯 뒤섞이듯 

피어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강한 향을 내뿜어대고 있었다. 단아한 금낭화와 수

국, 꽃창포와 소박한 금불초, 그 안을 화려하게 꾸며주는 홍초와 어수리, 그리고 

연못 위에 핀 물양귀비와 연꽃까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듯한 고전적인 그 후원 안에 있으면 모든 현실감을 잊게 된

다. 자신이 한 폭의 수묵화 속에 들어온 듯 그저 조용하고 정적인 공간 속에 녹아

들어 하나의 풍경이 되어버리는 듯 편안해졌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음산한 날씨

보다도 더 음울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주머

니에 있었던 MP3플레이어의 약이 다할 때 즈음, 슬슬 일어날까 하는데 발걸음 소

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숨을 멈춘 채 정자의 나지막한 벽 아래로 몸을 웅크렸다. 이곳에는 아

무도 들어올 수 없지만 그래도 이 건물의 일을 보는 사람이거나 정원사는 이곳을 

오갈 수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걸린 일은 없지만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그 할아

버지만이 오갈 수 있는 건물에 몰래 숨어들었다 걸리면 혼이 날 거라는 생각에 숨

소리마저 죽인 채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데 바로 정각 앞에서 사박거리는 발

걸음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가 한 마리 있군.』

부드럽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소리였지만, 그 보이지 않는 파동 위로 윤기가 

흐르는 듯 매끄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좋은 게 아니라 성량이 크고, 

발음 역시도 정확하고도 우아했다. 이런 목소리가 실제로도 있구나, 하며 신기하

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목소리였다. 때마침 이른 사춘기에 들어서 유난히도 

목소리가 갈라지던 시기라 저 목소리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던 사이,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라고 다른 남자가 묻자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남자가 다시 답한다.

『아니, 됐어. 넌 그만 들어가.』

『본채에 가보셔야죠.』

『때 되면 갈 테니 넌 먼저 가 있어. 난 좀 더 후원을 둘러볼 테니까. 여길 어떻

게 할지 고민을 좀 해봐야지.』

『……비가 많이 내리는데요.』

『상관없어. 정자에서 좀 쉬다 들어갈 테니 먼저 들어가.』

순간 아차 싶어 소리가 터질까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자로 들어온다니 낭패였다.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됐어.』

『그럼, 응접실 쪽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가벼운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진 않았지만 저 걸음 소리가 그 

좋은 목소리를 가진 남자의 것이 아니라는 건 대화의 내용으로 명확히 알 수 있었

다. 젠장, 망했다, 하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뒤 두근두근하며 기다리는

데 탁 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비에 젖은 풀을 밟는 걸음소리와는 달리 딱딱한 나

무 바닥을 밟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자 양쪽으로 난 두 개의 입구 

중 바로 자신의 뒤쪽에 있던 입구 쪽에서 방금 전 들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

『넌 뭐지?』

짤막한, 진짜 궁금하다는 듯한 그 음성에 놀라 재빨리 뒤를 돌아보자 정각의 입구 

쪽에 우뚝 선 키가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남자를 보자 이번엔 다른 의미에

서 숨이 멈추는 듯했다.

떨어지는 빗줄기로 인해 뿌옇게 흐려진 후원을 배경으로 선 그는 살짝 젖은 머리

카락을 뒤로 넘기며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순수

해보일 정도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얼굴은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비현

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림 속에서 막 빠져나온 듯 그린 듯 우아하고 아름다운 얼굴선과 긴 눈매. 그늘

이 질 정도로 긴 속눈썹과 나른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까지. 어디 하나 흠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 위로 살짝 젖은 검은 머

리카락이 흘러내리자 그 비현실적인 미모가 무서울 정도로 기묘한 분위기를 풍겨

낸다.

이 후원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고풍스럽고 우아하면서도 난잡하게 흐드

러진 듯,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마치 이 후원을 배경으로 한 그림 속

에서 지금 막 튀어나온 듯, 아름다울 뿐 아니라 뿜어내는 분위기마저 독특하고 강

렬했다. 

그냥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재미있다는 듯 입술 끝을 

끌어올려 웃는다.

『여기 숨어든 걸 보면 이 집안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또 상복을 입은 걸 보

면 고용인의 아이도 아니고……. 넌 뭐지? 네 또래 애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이 없는데?』

장난스러운 듯, 가벼운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바닥에 주저앉아 그 남

자의 외관을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여기에 숨어들었다는 걸 들키면 아마도 꽤 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다른 날이면 몰라도, 어쨌든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이런 곳에 숨어든 건 잘못한 

짓이니까.

-라고 떠올리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따지면 저 남자도 공범자였다. 자신만 잘못한 게 아니다. 아

니, 오히려 저 사람 쪽이 더 나쁘다. 자신은 어쨌든 이 집안의 장손이었다. 하지

만 저 사람은 외부인 주제에 멋대로 이곳에 들어왔다. 무례한 걸로 따지자면 저쪽

이 더하다.

죽어도 혼자는 안 죽겠다는 생각에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들고 자리에서 일

어서 바로 그를 바라본 채 마주섰다. 그리고는 자신보다도 한참이 더 큰 그를 올

려다보며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다.

『그렇게 말하시는 그쪽은 누구신데요? 위령제까지 모두 끝난 뒤에 본가에 오신 

걸 보니 가족은 아니신 것 같고, 일단 오셨다니 조문객이신 것 같은데. 조문객은 

본채를 찾아주셔야죠. 여기는 별채입니다.』

그제야 느낀 바이지만 그 역시 검은 양복과 검은 넥타이를 한 걸로 봐서는 분명히 

조문객이었다. 조문객이 다른 곳도 아닌, 이 별채로 함부로 들어오다니 아주 무례

한 짓이라고 그에게 대꾸하자 그가 웃는다.

눈을 빛내며, 마치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악동처럼 짓궂게 웃는다.

『별채라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넌 왜 여기에 있지?』

뜨끔한 그 질문에 잠시 말없이 그를 훑어보았다. 분명히 본 적은 없는 사람이다. 

촌수가 멀더라도 친척이라면 한 번은 봤을 테고, 한 번 봤다면 저런 남자를 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기억에 저런 남자는 없다. 그러니까 분명 친척은 아니

다. 나이 가늠은 잘 안 되지만 외모로 보아 이제 스물여섯이나 일곱 쯤 된 듯 보

이니 큰 삼촌의 친구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첫째 고모의 남자

친구거나 애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식을 마친 뒤라 전 잠시 쉬러 온 겁니다. 그런데, 큰삼촌의 친구 분이신가

요?』

그 물음에 그가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쓴다.

『……삼촌?』

『서정후 씨요.』

짤막한 그 답에 남자의 눈이 커진다. 냉정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 위로 떠오른 당

혹스러운 듯한 표정에 오히려 이쪽이 놀라 그를 멀뚱히 바라보자 순식간에 그의 

표정이 다시 바뀌어간다. 마치 가면을 쓰듯 찰나의 순간 나타났다 사라진 그 표정

에,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표정의 변화가 빠른 사람이었다

기이한 사람, 이상한 사람.

어떻게 이런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자, 이내 냉정을 되찾은 그가 다시 살짝 눈웃음을 띤 묘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

본다.

그리곤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 그렇군. 맞아.』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삐딱하니 올려다보자 그가 

피식 하며 웃는다. 나른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 표정은 도발적

이었다. 신경을 긁어내리는 듯한 그 표정에 조금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괜히 어

른과 싸울 필요는 없을 듯해 적당히 말을 돌렸다.

『삼촌은 지금 본채에 계세요. 가족들 모두 그쪽에 계십니다. 인사를 하실 거라면 

그쪽으로 가주세요. 그리고, 절 여기서 봤다는 건 비밀로 해주시고요. 그럼 저도 

입 다물 테니까요.』

어차피 피차 잘못한 건 마찬가지이니 서로 눈감아주자고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그

는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듯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천천히 정자 안으로 들

어섰다.

『말뜻은 알겠지만…… 내가 왜 그걸 비밀로 해야 하지?』

소리를 먹는 빗줄기 속에서도 낭랑하게 울려오는 음성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앞

으로 다가서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손으로 밀

거나 위압적인 제스처를 보인 것도 아닌데 전신이 뒤로 밀리는 느낌이었다. 자신

보다 훨씬 키가 크다거나 덩치가 좋다거나 혹은 나이가 많다는 건 문제가 아니었

다.

그에게서는 독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숨이 막히고 답답한, 심장을 뒤트는 듯한 꼭 공포와 같은 

감정이었다.

그에게 밀려 뒤로 물러서다 점점 뒤로 밀리는 기분에 오기로 걸음을 멈췄다. 그리

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자 천천히 앞으로 다가서던 그 역시 바로 한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정확히 마주한 순간 그가 방긋 웃어 보였다. 

비웃는 듯한 그 웃음에 순간 욱해 버렸다.

『그쪽 분도,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오신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 서로 덮어주자고?』

『그게 좋잖아요.』

『나한테는 출입금지가 아닌데?』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는 그의 표정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

보고 있자 그가 다시 묻는다.

『여기가 뭐하는 덴지는 알고 있지? 이제 열둘, 아니 열세 살 쯤 됐나? 서재현?』

자신의 나이와 이름까지 알고 있는 걸로 봐서는 삼촌의 친구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날이 선 말투를 조금 부드럽게 바꿨다.

『……열다섯 살입니다. 중학교 2학년이요.』

『아……그래. 열다섯 살. 그쯤 됐겠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건 여섯 살 때였

는데…… 많이 자랐어. 얘길 듣자니 꽤 말썽을 부린다던데…… 의외네.』

『절 보신 적이 있으세요?』

『있지. 딱 한 번뿐이지만.』

『네?』

뜻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바라보는 순간 건물 안쪽에서 우산을 든 남자

가 나오며 급히 소리쳤다.

『사장님, 사모님께서……. 어…….』

검은색의 커다란 우산을 손에 든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곤 창백하게 질려간다. 목

소리만 들었을 때엔 몰랐지만 그는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던 할아버지의 비서였다. 

늘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던, 이서진이라고 하던 남자였다.

『재현아, 여긴 왜…….』

낭패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 남자야 어떻게 입막음이 가능하지만 서진은 

안 된다는 생각에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듣겠구나 싶어 머리카락을 벅벅 긁어대던 

사이 앞에 선 남자가 서진에게 말을 건넨다.

『무슨 일이지?』

『아, 저…… 사모님께서 지금 쓰러지셨다고 연락이…….』

『알았어. 그만 돌아가지.』

라며 남자가 기다리고 있자 서진이 빠른 걸음으로 정자 쪽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는 자신을 한 번 바라본 뒤 이번엔 다시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며 묻는다.

『저, 재현이는 어떻게…….』

그 말에 그가 자신을 돌아본다. 서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본 그가 별거 아니

라는 듯한 얼굴로 다시 돌아선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젠 내 거니까. 별채 출입은 이 녀석에 한해서는 허락할 테

니 그렇게 알려둬. 단, 다른 사람들은 마찬가지야. 누구도 여기 들어와선 안 돼.

『하지만 여긴…….』

『그러니까 허락해주겠다고. 재미있잖아?』

이젠 내 거라느니, 허락한다느니, 바로 앞에서 이 별채에 대해 영문 모를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에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머리를 

굴렸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니, 사실은 지금 저 대화의 내용은 반쯤

은 알아들었다.

그래, 저 남자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이미지와 지금 눈앞의 남자는 너무 달라서 도저히 

매치시킬 수가 없었다.

설마, 설마 하는 생각에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먼저 돌아선 그가 걸

음을 멈춘 채 자신을 돌아보며 손을 뻗는다.

『같이 돌아가자. 그럼 꽤 그럴 듯해 보일 테니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확신시켜주는 그의 말에 심장이 더욱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

했다. 비가 오는 고즈넉한 후원 안에서 경악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마지막으

로 쐐기를 받는다.

『오랜만의 부자상봉을 연출해줘야지.』

***

“……최악이야…….”

첫 시작이 잘못된 탓인지, 두 번째의 만남도 그리고 그 이후로 최악이라고 중얼거

리며 눈을 뜬 순간 눈앞이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아 몇 

번인가 눈을 껌뻑거린 뒤 다시 눈을 뜨자 서서히 천장의 무늬가 선명해진다. 병원

인가, 라는 생각을 떠올린 순간 위잉 거리는 에어컨 소리가 들려왔다.

아, 역시 병원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손을 들어 다친 부

위를 매만졌지만 붕대가 감겨 있지 않았다. 그 정도로 피를 흘렸을 정도라면 분명

히 붕대를 감았을 텐데, 아니 운 좋게 찢어지지 않은 건가, 해도 상식적으로 그 

정도로 피가 흘렀다면 찢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얻

어맞은 거라면 그 외에도 꽤 상처가 있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머리 뒤쪽을 손으로 매만지던 사이 호사스럽게 꾸며

진 병실의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서다 놀라 걸음을 멈춘다.

“깨어나셨네요?”

“네.”

며칠 못 깨어났던 건가 싶어 살짝 고개를 갸웃하자 다시 걸음을 옮겨 옆으로 다가

선 그녀가 인상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링거액을 확인하며 자연스레 말을 건다.

“머리는 괜찮으세요? 어지럽거나 하지 않아요?”

“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저 정신을 잃고 오래 있었나요?”

“하루 정도요. 하지만 검사 결과 전혀 문제는 없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보다 에어컨 좀 꺼주시겠어요?”

“에어컨 바람 싫어하세요?”

“그건 아닌데…… 5월인데 벌써 에어컨을 틀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라고 답하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곤 되묻는다.

“5월요?”

놀란 그 얼굴에 눈을 껌뻑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5월인데, 그녀는 반소매의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비가 오기라도 하면 한기가 들 정도로 추운데 왜 벌서 하

복을 입은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놀라 자신의 병상 아래쪽에 있

는 환자 정보를 확인하더니 다시 묻는다.

“이름이 뭐죠?”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본인 이름 기억 안 나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이 너무 다급해 보여 일단 그

녀의 말에 답해주었다.

“서재현이요.”

“나이는요?”

“고3, 열아홉이요.”

순간 그녀의 얼굴이 더욱 당황한 듯 굳어갔다. 뭐가 잘못된 건가 싶어 그녀를 바

라보고 있자 그녀가 뭔가에 쫓기는 듯 다시 묻는다.

“오늘 날짜가 며칠인지 알아요?”

“5월 3일, 아니 하루를 잤다니 5월 5일이요.”

아, 그럼 오늘이 어린이날이구나. 재영이에게 캐리비언 베이에 데리고 가준다고 

약속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자 옆에 서 있던 

그녀가 재빨리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그리곤 겨우 숨을 고르곤 다시 차분히 묻

는다.

“한 가지만 더 물을게요.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죠?”

“네?”

“아니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담당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라며 짤막한 말을 마친 그녀가 도망치듯 방에서 달려 나가는 모습을, 재현은 빤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의 당황해하는 얼굴에 전염된 듯 자신도 괜스레 마음이 초조해졌다. 원인도 모

른 채 불안함에 끌려 멍하니 사방을 돌아보던 중 익히 알고 있던 의사 선생님이 

병실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동공 확인과 반사작용 확인 및 한동안 팔을 수평으로 뻗기와 한 발로 서기

, 손가락으로 코끝을 만지기 등의 별 쓸데없는 테스트와 자신의 가족사항을 비롯

한 학교 이름과 반, 번호에 이르기까지 진짜 쓸데없는 질문들을 반복한 뒤에야 겨

우 주치의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을 이끌고 MRI실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CT촬영실로 간 뒤, 얼결에 신경정신과와 정신과에 끌려가 온갖 테스트를 다한 뒤 

겨우 다시 병실로 돌아와, 자신의 보호자 자격으로 온 서진과 함께 앉아 최종적으

로 의사들이 내린 결론을 들을 수 있었다.

“기억상실이구나.”

“……네?”

어린 시절부터 봐온 주치의에 말에 재현은 멍청한 얼굴로 “네?”라고 대꾸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그를 한 번 본 뒤 다시 서진을 올려

다보곤 다시 의사를 바라보자 나이가 제법 지긋한, 이미 이 병원의 원장 명함을 

달고 있는 남자가 한숨과 함께 답한다.

“일단 뇌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가끔 가벼운 교통사고나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경우 그 충격으로 기억이 뒤엉키는 경우가 있어. 일단 검사 상으로는 뇌엔 아무 

문제가 없고 인지능력도 모두 정상이니 크게 걱정할 건 없을 거야.”

“잠깐만요. 그 전에 더 설명해주실 게 있잖아요. 기억상실이라니…… 그럼 지금

이 몇 월이라는 건데요?”

분명 검사를 하러 여기저기를 오가며 본 바로는 여름이었다. 창 밖으로 종종 슬리

브리스 셔츠에 핫팬츠를 입은 방문객들이 오가고, 선글라스를 끼거나 양산을 든 

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걸로 봐서는 분명 한여름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지금

이 8월이나 9월이라면 자신은 몇 개월간의 기억을 잃었다는 뜻이 된다.

그걸 명확히 해두기 위해 재현이 그렇게 묻자 의사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서진을 

바라본다. 그 시선에 서진이 한숨을 내쉬며 재현을 내려다본다.

“몇 개월이 아냐.”

“그럼?”

“2년이야.”

“……뭐?”

“넌 지금 대학 2학년이야. 지금 여름방학 중이고.”

말도 안 되는 그 이야기에 재현은 실소했다. 

“2년이라고?”

“그래.”

“말도 안 돼…….”

삼류 영화나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빌어먹을 기억상실이라는 게 진짜 존재는 

하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할 듯 재현이 험악한 반응을 보이자 서진이 그런 재현의 

어깨를 꾹 내리누른다.

“일단 진정해.”

“그럼 내가 왜 병원에 있는 건데?”

“교통사고가 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사고가 난 게 아니라 차를 피하려고 하다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어. 다행히 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놀라 빨리 신고를 해서 

병원으로 실려 와서 만 하루를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야. 차에 치인 건 아니고 아

스팔트에 머리를 부딪쳐서 가벼운 뇌진탕 증세가 있던 것뿐이었어. 다른 데는 모

두 정상이었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일단 입원을 했던 거야.”

가벼운 교통사고나 머리에 충격을 받은 경우 기억 혼란이 올 수 있다던 의사의 말

이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형, 지금 장난하는 거지?”

“…….”

“미치겠네…….”

갑자기 2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3에서 반짝거리는 대학생이 되었다니 감사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묘한 기분이었다. 아니, 그 전에 그대로 대학에 진학을 했다

니 역시 유학은 날아간 건가 하는 생각에 어깨가 쳐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입원하고 천천히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겠어. 그

리고 이런 경우는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니까 너무 초조해하지는 

말고.”

당황해 하면서도 일단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듯한 재현의 모습에 의사가 그

렇게 말하자 재현은 질색을 했다.

“……입원이요?”

“응. 몸에는 아무 이상 없지만 이대로 갑자기 돌아가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될 

테니 당분간은 입원한 채로 흐름을 따라잡는 게 좋을 수도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 계속 치료를 받다 보면 갑자기 기억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2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공백이 얼마가 될까 하지만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고, 환경이 그 

정도로 변화했다면 그걸 따라잡기 꽤 힘들 것이다. 고3이 갑자기 대학교 2학년생

이 되는 것과 다름없는 바니까.

“그렇게 해, 재현아. 아직 완전히 회복이 된 것도 아니고, 혹시 모를 후유증 같

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너도 지금 상황에 대해 조금 거 받아들일 준비

를 해야 하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마치 친형처럼 서진은 재현의 등을 토닥거리며 재현을 달래주었다. 친근하고 다정

한 그의 손길과 말투에 재현은 그제야 조금 안정이 된 듯 서진을 바라봤다.

“애들은 어떻게 됐어?”

“아…… 재원이랑 재영이?”

“응.”

“애들은 잘 있으니 걱정할 것 없어. 학교 잘 다니고, 잘하고 있어. 재원이는 이

제 고3이고, 재영이도 이제 5학년 됐어. 아주 건강하게 잘 자랐어.”

“유학은?”

“아…… 못 갔지만 집안에서 잘 지내. 건물도 본채에서 동쪽 별채로 옮겼고 그쪽

에서 거의 따로 생활하면서 오히려 많이 좋아졌으니까.”

결국 유학은 못 간 모양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본

채에서 나가 동쪽 별채로 옮겼다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을 것이다. 동쪽 별채

라면 삼촌이 지내는 건물이니 애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러자 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했다.

“삼촌은?”

짤막한 재현의 질문에 서진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을 풀고

는 다시 재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런 건 천천히 생각해. 지금은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만 집중해. 가족들 

걱정은 말고.”

“……알았어.”

“그래.”

순순한 재현의 답에 다시 서진이 앞에 선 의사를 바라보며 꾸벅 인사를 건넨다.

“그럼, 박사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자주 들여다보기는 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후

유증이 없도록 신경 써 주십시오.”

“그래.”

“그럼, 부탁드립니다. 재현아, 이만 가볼게. 회사에 일이 있어서 급히 들어가 봐

야 해서.”

의사에게 인사를 하던 서진이 다시 재현에게 말을 건네자 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려다 뭔가 떠오른 듯 그를 잡았다.

“형.”

“왜?”

“내 핸드폰은?”

“응?”

“내 핸드폰 있을 거 아냐? 애들한테 전화라도 해주고 싶은데?”

“아, 네 핸드폰……. 그거 사고 났을 때 박살이 나서 다시 살릴 수 없었어. 네가 

쓰러질 때 꽤 멀리 날아가서 지나가는 차에 밟혀서 유심까지 박살이 나서. 새 핸

드폰 가져다줄게. 일단 그걸로 써.”

핸드폰까지 박살이 났다니. 그 안에 든 문자나 통화 내역으로 뭔가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희망도 사라져버렸다. 계속해서 일이 꼬이는 기

분이었다.

“알았어. 고마워. 난 괜찮으니까 가봐.”

“그럼, 푹 쉬어.”

그렇게 말한 뒤 먼저 방을 나서는 의사를 따라 서진이 빠른 걸음으로 병실을 나선

다. 상당히 급한 일이 있는지 마치 달리는 듯한 걸음으로 나서며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드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다 문이 닫히자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섰다. 딱히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울렁증도 메슥거림도 없는 걸로 봐

서는 확실히 머리를 크게 다친 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슬리퍼를 신고 

수액이 걸린 스탠드를 밀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의 조명을 켜고 안으로 들어서 거울을 보는 순간, “아.”하는 짤막한 감탄사

가 터져나갔다.

경황이 없어 거울을 볼 새가 없어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확실히 변해 있었

다. 자신이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날 저녁 그와의 대화를 연습하기 위해 한 시간이 

넘게 거울을 보며 표정을, 그리고 말투를 연습했기에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겨우 2년이었다. 서진은 그다지 변한 걸 느낄 수 없었지만 그 2년 사이 자신은 꽤 

변화해 있었다. 살이 빠져 얼굴이 더 갸름해졌고 늘 짧게 정돈하고 다닌 머리카락 

역시 살짝 얼굴을 덮을 정도로 길어 있었다. 낯익지만 동시에 낯설기도 한 그 얼

굴을 천천히 바라보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사람들이 나를 놀리나, 그가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

해 또 무슨 나쁜 짓을 하려는 건가하고 의심하고 있었지만 거울을 보는 순간 인정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외관의 변화는, 그 역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2년이야. 서재현, 받아들여. 겨우 2년이야. 그리고 생각해 봐. 그동안 무슨 일

이 있었는지.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잘 생각해봐.”

거울을 바라보며 마치 주문을 외우듯 그렇게 말을 반복했다.

2년 따위 별거 아냐. 그러니까 괜찮아. 초조해하지 말고 놀라지도 말고 무서워하

지도 마.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현실을 직시해. 믿을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일

이라도 이미 벌어진 이상 이건 현실이야.

현실을 떠올려. 도망치지 말고 거부하지도 마. 그래서는 끝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생각해. 또 생각하고 기억해내.

대체 그 2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기억해내.

그렇게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세뇌를 하듯 말을 걸고 또 걸었지만 어떻게 해

도 그 2년간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표백제를 넣고 세탁이라도 한 듯, 깨끗하게 지워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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