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시후는 심호흡과 함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좋지 않아. 저 자식을 깨우는 데 생각보다 대가가 컸어.’
평치혁을 제갈재민의 마수에서 빼내오는 데 생각보다 기력이 많이 소진했다.
본래 천마흡기공을 통해 평치혁의 몸에 있던 사기를 끌어내고 무혈검으로 제갈재민과의 연결점을 자르면 끝날 일이었다.
천 년 전 사령신자를 상대할 때 몇 번이나 써먹었던 수법이었기에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후가 간과한 게 있었다.
평치혁이 그저 그런 활강시가 아니라는 것.
탈영활강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갈재민과의 연결고리는 탄탄했고 무혈검을 튕겨내기까지 했다.
‘천마지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이리도 한이 될 줄이야.’
Safety World에서 봉인당한 천마지기.
지금까지 Safety World에서는 언제나 득만 보던 시후였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봉인은 되어 사용하지 못하고 일은 벌어졌으니.
시후는 평치혁과 제갈재민의 연결 고리를 끊기 위해 선천진기를 사용했다.
천마지기를 대체할 만한 것은 그것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천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행동이다, 진짜.’
그만큼 평치혁을 아낀다는 의미였다.
선천진기를 사용한 덕분에 탈영활강시의 연결고리를 끊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아주 조금이라고 하더라도, 선천진기를 사용했기에 전장에 곧장 참여할 수 없다는 것.
시후가 전장에 참여하는 순간 제갈재민 역시 움직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선천진기를 소모한 시후가 불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남궁세가의 정예 한 명을 잃은 것은 뼈아팠다.
‘한 명도 잃지 않으려고 했건만.’
시후는 이번 전투에서 되도록 사상자를 내고 싶지 않았다.
평치혁을 회수하기만 하면 제갈재민과 단둘이서 결판을 내고 싶었다.
전장에서 장수끼리 단기 접전하는 것처럼 두 세력의 운명을 걸고 말이다.
그래야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시후의 마음과는 다르게 전황은 멋대로 흘러갔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시후는 흐트러진 선천진기를 안정시키고는 기감을 넓게 펼쳤다.
‘네가 알아차리기는 하겠지만.’
제갈재민이 예전과 같은 녀석이 아님을 알기에 당연히 눈치챌 거라 여겼다.
역시나 기감을 펼치자마자 제갈재민이 고개를 돌려 시후를 쳐다보곤 피식 웃었다.
마치 시후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웃어? 언제까지 웃나 보자.”
시후는 빠르게 기감을 더욱 넓게 퍼트렸다.
항구를 넘어 옆 마을, 또 그 옆 마을에 이르기까지 쭉쭉 넓혔다.
그리고 그 안에 잡히는 기를 모두 잡아냈다.
‘쯧. 더럽게도 많이 끌고 왔네.’
그 수가 어림잡아 300명에 달했다.
지금 제주도는 민간인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화산분화라는 AI의 거짓 정보로 주민이건 여행객이건 모두가 내륙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그렇다는 지금 잡힌 300명 모두가 포달랍궁과 연관된 녀석들이라는 것.
시후는 제갈재민이 상당한 준비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이 있었다.
‘없어?’
여기서 빠지면 안 되는 녀석의 기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설마….”
시후는 그것을 토대로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고 독단적인 성격의 제갈재민이 했을 법한 일에 대해서 말이다.
시후는 제갈재민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가설을 입증하여 써먹으려면 확인이 필요했다.
- 내가 신호하면 쏴.
그러면서 박초연에게 전음을 흘렸다.
딱히 대답을 듣지 않아도 시후는 알 수 있었다.
이미 박초연은 준비가 끝났음을 말이다.
아마도 시후가 신호를 하는 순간 전황은 다시 변할 것이다.
‘그럼, 그전에 녀석 좀 갈궈볼까.’
아주 조금이라도 승기를 잡기 위한 확률을 올리고자 제갈재민의 속을 긁어볼 생각이었다.
시후가 걸어 나가자 제갈재민 역시 마주 걸어 나왔다.
둘은 검기와 강기가 난무하는 전장을 산책하듯 가로질렀다.
그렇게 전장 가운데서 만난 둘.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재민이었다.
“뭐 좀 찾았나?”
조금 전 시후가 기감을 펼친 것을 말하는 거였다.
시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숨어 있으면 못 찾는 게 바보지.”
“숨기다니. 그냥 저 언덕 너머에 뒀을 뿐인데.”
제갈재민은 포달랍궁의 후속 부대의 존재를 감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저런 걸 숨겨서 뭐 해.”
“…….”
시후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갈재민이 처음으로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는 이마의 제3의 눈이 시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으, 그 눈깔 좀 별로인 거 알지?”
시후가 몸을 움츠리며 엄살을 피웠다.
그러자 제3의 눈이 이번에는 시후를 지나쳐 뒤쪽으로 향했다.
“저건 뭔데? 박격포라도 쏘려고 그러는 건가?”
박초연이 준비한 것을 가리키는 거였다.
제갈재민이 그렇게 말할 만큼 대력공방이 준비한 것은 박격포와 똑같이 생겼다.
길게 뻗은 입구에 포탄을 넣는 순간 불을 뿜을 것만 같았다.
그런 것이 30대나 설치되어 있었다.
제갈재민은 다시 시선을 돌려 시후를 봤다.
“무력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화기라도 사용해보게?”
“그럴 리가. 그런 걸로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알긴 아는구나?”
일반인이라면 생각했을 현대식 화기가 이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선, 이곳에 있는 이들 그 누구에게도 1km 안에서 일어나는 저격은 피할 능력이 있었다.
수류탄이나 박격포와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모를까.
폭발까지 몇 초의 시간이 필요한 그런 것들은 터지기도 전에 폭발 범위에서 벗어날 터.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보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 모두가 무림인이라는 거였다.
무림은 무림만의 법이 있었다.
본신이 이룬 무력이 아닌 것으로 승리를 이룬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전투에서 이겨도 다른 이들의 조롱을 받을 거였고, 허울뿐인 승리만 거머쥐는 꼴이 되는 거였다.
만약 여기서 운 좋게 시후네가 미사일이라도 써서 포달랍궁의 모두를 죽인다고 하여도, 그것은 승리라 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벌어진 싸움은 어떻게 해서든 무림에 퍼질 것이고, 백 년이고 천년이고 전해질 것이다.
그렇게 역사에 길이 남을 텐데 치욕스러운 승리로 남는다면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그랬기에 시후도 제갈재민도 현대식 화기가 아닌 무공으로 싸우는 거였다.
서로가 제주도에 미사일을 떨굴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래. 그런 것을 그렇게 잘 아는 네가 준비한 저것은 그럼 뭘까?”
“궁금하지? 보여줄까?”
“크큭, 보여준다?”
“그래. 보여줄게.”
시후는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었다.
제갈재민도 그에 맞춰 웃었다.
“보여줄 테니 저것에서 무언가 뿜어질 때 가만히 있어라?”
“많이 똑똑해졌어.”
“좋다. 그럼 해봐.”
제갈재민은 흔쾌히 허락하며 옆으로 슬쩍 비켜섰다.
자신이 준비한 것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실제로 그 뒤에 있는 언덕 너머에는 포달랍궁의 후속 부대 승려들이 대기 중이었다.
언제든 제갈재민의 신호와 함께 뛰어들 준비를 마친 채로.
‘확실하군.’
덕분에 시후는 확신했다.
자신이 세운 가설이 맞았음을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아주 잘 쓰이겠어.’
진지춘에게 받아 품속에 넣어둔 물건이 빛을 발하리라 여겼다.
“좋아. 보여주지.”
시후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쏴!”
펑-
박초연의 목소리와 함께 뒤쪽에 세워둔 박격포에서 불이 뿜어졌다.
30대의 박격포에서 발사된 그것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언덕 너머로 날아갔다.
제갈재민은 그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분명 날아가는 모양이나 생긴 것까지 일반적인 박격포와 똑같았다.
현대식 화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그럼 저것은 무엇인지 궁금하던 찰나였다.
언덕 너머에서 붉은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독?”
그랬다.
시후가 박격포 탄도에 넣어 날린 것은 다름 아닌 독이었다.
그것도 언덕 너머에서 터졌지만, 그 언덕을 넘어 이곳까지 다다를 정도로 방대한 양의 독이다.
그런데 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제갈재민은 조금 전보다 더욱 의아하다는 듯이 갸우뚱댔다.
“고작?”
말장난까지 하며 공을 들인 것이 고작 독이냐고 묻는 거였다.
그 물음에 시후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저 독은 당가에서 특별히 준비한 것이지. 학의 벼슬에서 추출한 학정홍(鶴頂紅)과 인면지주(人面蜘蛛)의 독을 섞은 거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런 독이 무슨 소용이 있냐는 반응이었다.
“저 언덕 너머에 있는 녀석들은 독 따위로 어찌 될 녀석들이 아님을 모르는 건가?”
상당한 자신감이 보이는 제갈재민이었다.
시후도 그것은 인정했다.
“그렇겠지. 저 너머에 있는 녀석들도 활강시니깐.”
움찔-
그 말에 제갈재민은 티 나게 움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언덕 너머에 있는 승려들, 아니 이곳에 있는 승려들 모두가 활강시였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저들이 활강시라는 사실을 눈치챈 이는 없었다.
그만큼 일반인으로 보일 정도로 완벽했다.
그런데 시후가 그것을 알아차리자 놀란 것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
“독단적이고 남을 잘 믿지 못하는 네가 직접 키운 녀석들이라면서 데리고 온 녀석들이 보통은 아닐 테니깐.”
“단지 그것만으로?”
“아니지, 하나 더 있지. 결정적인 게.”
“…….”
제갈재민은 어서 대답하라고 매섭게 물었다.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원후태령.”
“……!”
제갈재민은 어머니의 이름이 시후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눈을 부릅떴다.
시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내 목이 걸린 이런 판에 그 녀석이 없다는 게 이상하잖아?”
“고작 그것만으로?”
“아! 굳이 꼽자면 하나 더 있지.”
“……?”
“너 마마보이잖아.”
꿈틀-
그 말에 제갈재민의 얼굴 근육이 꿈틀댔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준비한 패 모두를 시후에게 까발려진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저깟 독으로 내 활강시가 어찌 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학정홍이나 인면지주의 독은 산 사람에게나 통하는 것이지,
죽은 이들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화골산과 같이 뼈까지 녹여버리는 극독이 아니라면 모를까.
시후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두 독을 혼합하여 독무를 만든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제갈재민과 대화를 하는 사이 언덕을 넘어온 독무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랐다.
“내가 말이야. 평소 이런 성격은 아닌데, 이번만큼은 뒤탈 없이 일 처리를 해야겠다 싶었거든.”
“뭐?”
시후는 독무가 라마승들과 반라마승들을 덮치는 것을 보고는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그 물건을 꺼내자.
“너…?!”
제갈재민 세 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휙-
그와 동시에 시후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안 돼!”
제갈재민 역시 시후를 따라 날아올랐지만, 이미 언덕 가까이 다다른 시후를 잡을 수는 없었다.
시후는 무서운 속도로 뒤따라오는 제갈재민은 한 차례 힐끗하고는 손에 쥔 것을 강하게 흔들었다.
“반야마라밀!”
딸랑- 딸랑-
그렇게 시후의 손에 들려 있는 주먹만 한 종이 크게 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