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0화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그 장면이 떠올랐다.
뚝섬에서 혈교인들이 보였던 그 모습.
살이 찢기고 팔과 다리가 떨어졌지만, 다시 붙으며 되살아나던.
“혀, 혈천수라강(血天修羅罡)?!”
기억하기 싫지만, 생생히 기억하는 무공이었다.
짝짝짝-
남궁진성이 정확히 무공명을 말하자 제갈재민은 박수를 보냈다.
“제법 식견이 있네, 그 무공을 알아보고?”
“너희가 어떻게 혈교의 무공을?”
“뭐야, 당황하면 존댓말도 쏙 들어가는 거야?”
제갈재민은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남궁진성의 태도를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섬전!”
남궁진성이 울분을 토해내듯 제왕무적검 제일 초식 섬전을 펼쳤다.
번쩍-
이내 빛이 번쩍이자 남궁진성은 제갈재민의 이마에 생길 작은 구멍을 기대했다.
하지만.
창-
“뭐?”
경쾌한 음이 들리며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제갈재민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라마승 한 명이 석장을 들고 있었다.
“설마, 석장으로 섬전을 막은 거야?”
빛처럼 빠르다고 자신할 만한 섬전을 막다니.
제왕무적검을 십 성 익힌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쯧, 고작 폭죽 하나 막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나라를 잃은 표정을 짓나?”
제갈재민은 섬전을 막은 라마승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자 라마승은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남궁진성은 라마승 모두가 상처를 회복한 것을 봤다.
“이럴 수가….”
악몽 같은 기억으로 몸이 움츠러든 그때였다.
펑-
“뭐, 뭐야?!”
곁에 있던 남궁세가 정예 한 명의 머리가 터졌다.
머리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그의 모습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섬전이라. 뭐, 쓸 만하네.”
제갈재민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홱 들어 그를 바라본 남궁진성.
“어떻게?”
제갈재민의 곧게 뻗은 손끝에 붉게 물든 스파크가 보였다.
그것은 제왕무적검을 펼칠 때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뇌전의 기운이었다.
그것을 제갈재민은 검이 아닌 수강(手罡)으로, 그것도 남궁세가의 비전심법인 뇌전심법도 아닌 포달랍궁의 기운만으로 섬전을 펼친 거였다.
시후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지 못했을 경지를 너무나도 쉽게 따라 한 제갈재민에 남궁진성은 망연자실했다.
그랬기에 점점 다가오는 라마승들의 모습에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남궁 가주께서는 뒤로 잠시 물러나세요.”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는지 조민이 앞으로 나섰다.
조민은 푸른색 옥으로 만든 판관필 옥룡(玉龍)을 빼 들었다.
“이제부터 제가 지휘합니다. 모두 위치로 이동해 주세요.”
파팟-
조민의 지휘가 시작되자 남궁세가 정예들이 움직였다.
라마승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건가 싶어 제자리에 멈췄다.
조금 전 그들의 은신술 실력을 봤기에 경계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남궁세가 정예들은 라마승들이 아닌 그들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은 그때 조민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건곤망사진(乾坤妄死陳).”
사아-
남궁세가 정예들에게서 은은한 노란색 기가 흘러나와 하늘을 덮었다.
라마승들을 가운데 두고 돔을 이루는 형태였다.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 거지?”
조민이 발동한 진법을 보고 제갈재민이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직접 키운 라마승들에게 진법은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 거였다.
그 이유는 바로 저것.
창-
라마승들이 석장을 땅에 꽂고는 라마진을 펼쳤다.
외부의 어떤 공격도 막아내는 라마진은 소림의 백팔나한진조차 막을 수 있다고 자부했다.
따라서 조민이 펼치는 저런 진법이야 소용이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뭐야? 쟤네 왜 저래?”
라마승들이 이상했다.
라마진을 펼치던 그들이 갑자기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도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물에 빠진 것처럼, 누구는 잔뜩 겁에 질린 것처럼, 또 누구는 무언가에 짓눌리듯 바닥에 엎드려 허우적댔다.
“흥. 헛짓거리는 누가 하는지 보시죠.”
조민은 제갈재민에게 코웃음을 그대로 돌려줬다.
건곤망사진은 이번 여정을 위해 조민이 특별히 만든 진법이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거나 깃발을 이용해 진법을 짜던 조민은, 좀 더 강하게 진법에 빠진 이들을 속박하기 위해 사람을 더했다.
그것이 바로 남궁세가의 정예들.
그들의 발치에는 조금 전 조민이 꽂아두었던 깃발이 있었다.
라마진이 아무리 대단한 진법이라고 하여도 지형지물과 인력까지 겸한 건곤망사진을 막을 수는 없다.
그들은 지금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
누구는 바닷속 깊은 곳에 빠졌거나 누구는 귀신을 보거나 또 누구는 건물에 깔리는 경험을 하고 있다.
“저렇게 한 시진만 있으면 기력이 다해 죽을 테니 모두 자리를 고수하세요.”
조민의 명령에 남궁세가 정예들이 검을 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사수하겠다는 결의가 돋보였다.
제갈재민은 그 모습에 저들이 진법에 빠졌다는 것과 그 진법이 남궁세가 정예들과 깃발에 의해 발동되고 있음을 알아챘다.
“라마승들이 저리된 것을 보니 대단한 진법이기는 한데, 그렇게 쉽게 약점을 노출해서야 쓰나.”
스윽-
제갈재민은 손을 뻗어 수강을 일으켰다.
그러자 붉은색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빛이 번쩍였다.
섬전이었다.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던 섬전이 라마승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남궁세가 정예에게 닿았다.
하지만.
펑-
“허?”
붉은색 섬전은 그의 지척에서 갑자기 터져버렸다.
분명 그의 머리를 꿰뚫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담았는데 저리 쉽게 막히자 제갈재민은 다시 섬전을 펼쳤다.
펑펑-
“뭐지?”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갑자기 저들의 실력이 향상된 것도 아닐 터인데 자신의 공격이 막히자 제갈재민은 의아해했다.
“건곤망사진은 그저 그런 진법이 아니에요. 당신들에게 라마진이 있다면 저희도 그만한 게 있지 않겠어요?”
조민의 말에 제갈재민은 인상을 구겼다.
저 말은 건곤망사진이 라마진처럼 외부의 그 어떤 공격도 튕겨낸다는 말이었다.
“안과 밖을 모두 신경 썼다?”
안으로는 적을 가두고 밖으로는 적의 지원을 막는 진법이라니.
아무래도 쉽지 않아 보였다.
제갈재민이 고민하자 조민은 옳다구나 싶었다.
지금 저 진법은 승리를 위한 진법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사실 건곤망사진은 라마승들이 아닌 제갈재민을 가두는 데 사용할 계획이었다.
남궁진성이 공황에 빠져 시후가 회복할 시간을 벌지 못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거였다.
이 전쟁의 승패는 시후와 제갈재민에게 달렸기에 시후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제갈재민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럼, 바로 2차전을 시작해볼까?”
딱-
제갈재민이 손가락을 튕기자 남아 있던 승려들이 움직였다.
“이들은 반라마승이라 한다. 어디 이번에도 잘 막아봐.”
창-
제갈재민의 말이 끝나자 반라마승들은 손에 들고 있던 석장을 땅에 꽂았다.
라마진을 펼치는 건가 싶은 그때 그들 모두가 석장을 두고 걸어 나왔다.
대신 걸치고 있던 승복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러자 드러난 그들의 몸.
당장 어디 보디빌더 대회를 나가도 우승을 따낼 것 같은 근육질의 단단한 체구를 갖추고 있었다.
난데없는 몸매 자랑이었지만 그보다 조민은 다른 데 눈길이 끌렸다.
조민은 라마진을 펼칠 때 나타난 붉은색 기운이 반라마승의 몸을 감싸는 걸 보았다.
마치 그 기운으로 갑옷을 입는 듯한 모습에 조민은 서둘러 신호를 보냈다.
“제갈세가 정예들 움직이세요.”
조민의 신호에 뒤쪽에 있던 제갈세가 정예들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그 수가 상당했다.
반라마승은 25명이 전부지만, 제갈세가 정예들은 70명은 되어 보였다.
그렇다면 제갈세가에 이만한 정예 무인들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또 아니었다.
이 중 절정의 경지에 든 이는 20명 남짓.
나머지는 일류의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조민이 이들을 이번 전투에 참전시킨 이유는 그만큼 아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각개로 하지 마시고 육합멸살진(六合滅殺陳)을 펼쳐 상대하세요.”
제갈세가의 육합멸살진은 여럿이 합을 맞추어 적의 사방을 포위하는 진법으로, 합만 맞는다면 일류 고수가 절정 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인술진이다.
조민은 이 방법으로 인명 피해를 줄일 생각이었다.
제갈세가 정예부대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반라마승들을 포위했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어 여러 개의 분대로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제갈세가와 반라마승의 전투.
“아… 안 돼.”
조민의 생각처럼 흘러가지는 않았다.
쾅-
근육질의 반라마승들은 생긴 것답게 움직였다.
그들의 온몸은 흉기이며 갑옷이었다.
반라마승들은 자신들을 옥죄어오는 제갈세가의 육합멸살진을 쫓지 않았다.
제자리에 두 다리를 고정하고 다가오는 검을 그대로 몸으로 받고는 주먹을 내질렀다.
맞는 것과 공격을 동시에 감행한 것이다.
“무슨, 소림의 금강불괴라도 된단 말인가요?”
조민은 검이 통하지 않는 반라마승에 당황했다.
그것은 마치 소림수호신승 진권이 보여주었던 소림의 금강불괴와 같은 모습이었다.
거기에 그들이 내지르는 주먹은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까지 있었다.
그 힘으로 인해 육합멸살진이 틀어지는 경우가 발생하며 수세에 몰렸다.
“크큭, 야심 차게 내놓은 게 고작 저런 거라니.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감투를 쓰니 그런 것 아니냐.”
제갈재민이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조민은 반박하지 않았다.
지금은 저런 말에 일일이 상대하기보다는 해결책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두 명, 초절정과 절정의 고수만 있다면.”
조민은 지금의 전황을 파악했다.
건곤망사진을 버티고 있는 라마승과 육합멸살진에 맞서는 반라마승에게서 승리를 점할 가장 좋은 타개책으로 두 명의 고수가 필요했다.
“저자가 움직이기 전에….”
지금은 방관하고 있지만, 그가 움직이는 순간 남궁세가와 제갈세가 정예들은 순식간에 당할 것이다.
아직 그가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오직 시후때문이었다.
제갈재민도 어서 시후의 상태가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미안했습니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군요.”
“남궁세가 가주님.”
남궁진성이 조민 곁으로 다가왔다.
제갈재민의 농간에 망연자실했던 그가 정신을 차리고 다가왔다.
그리고.
“어디에 뛰어들면 되나?”
“평 장로님!”
평치혁이 매화검을 어깨에 두르고 곁에 다가왔다.
지금까지 시후를 부축하던 그가 이렇게 전선에 합류했다는 것은.
홱-
조민은 고개를 돌려 시후를 봤다.
“둘을 이용해서 좀 더 휘저어봐.”
시후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 예의 재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네!”
조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절정에 들어선 평치혁과 절정의 끝에 다다른 남궁진성의 합류.
조민이 그토록 원하던 패였다.
“그럼, 두 분만 믿겠습니다.”
“그러세요.”
“명령해.”
조민은 둘을 이용해 새로이 전장의 판을 짜기 시작했다.
그사이 시후는 뒤를 돌아봤다.
크루즈가 정박을 끝냈는지 후속 부대가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진지춘이 데리고 온 약선방의 의원들과 대력공방의 고수들.
몇몇은 진작에 배에서 뛰어내릴 수 있었지만, 시후의 명령으로 지금 이들과 함께 내렸다.
진지춘과 박초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은 다른 이들을 이끌고 시후 앞에 다다랐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하지만….”
진지춘이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어깨를 다독였다.
“꼴에 의원이라고 걱정하기는.”
“제가 도련님 주치의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걱정하죠.”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시후 역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진지춘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몸 상태를 소문낼 필요는 없었다.
“괜찮다는 데도. 그보다 가져오라는 건?”
“네, 여기요.”
진지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작은 목함(木函)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런데 그건 어디에다가 쓰시려고요?”
“궁금하지? 이런 걸 어디에다가 쓰려는지.”
“네.”
“좀 이따가 잘 봐. 아주 재미난 일이 벌어질 테니깐.”
그러면서 목함 안에 있던 물건을 꺼내 조심히 품속에 넣었다.
지금 당장 그 물건을 사용할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너희는 일단 부상자들을 돌봐.”
지금의 전장에 이들이 끼어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평치혁과 남궁진성의 투입으로 상당히 팽팽한 상황이었기에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시후는 알고 있었다.
제갈재민이 준비한 이들이 라마승과 반라마승이 다가 아님을 말이다.
“박방주.”
시후는 박초연을 불렀다.
그리고는 대력공방이 해주어야 할 일을 설명했다.
“될 수 있으면 눈에 띄지 않게 설치할 수 있지?”
“네.”
“그래. 그럼 뒤로 물러나서 설치해.”
그렇게 크루즈에서 내린 인원들을 배치한 시후는 심호흡을 길게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