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주군!”
목 놓아 외치며 눈을 번쩍 든 평치혁.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시후였다.
“주군!”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두 팔을 쫙 펼쳐 주군의 품에 안기려고 했다.
하지만.
“크악! 강시후!”
제갈재민의 악에 받친 고함이 발목을 잡았다.
평치혁은 고개를 홱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봤다.
퍼퍼퍽-
라마승들이 석장으로 일제히 소용돌이를 부수고 있었다.
탄지신공이 사라지자 라마진을 거두고 움직인 거였다.
제갈재민을 포함한 라마승들은 자신들이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는 것이 분했는지 다들 험악한 인상이었다.
제갈재민은 라마승들 사이를 비집고 나와 가장 선두에 섰다.
“이게 네가 준비한 건가?”
시후 일행들을 한번 훑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승려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섰다.
창-
승려들이 동시에 석장을 땅에 찍자 머리에 달린 고리가 울려 청아한 음이 퍼졌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그들의 눈은 살의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흥. 포달랍궁이라고 해도 결국 스님 아니신가요? 그런데 눈빛이 너무 흉흉하신데요?”
조민이 앞으로 나서며 빈정댔다.
그녀의 등장에 제갈재민의 표정이 굳었다.
제갈세가에 있을 때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자신과 조민의 관계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천재라고 불리며 여인이라도 차기 가주가 될 재목이라며 추앙받던 조민과 무공에 재능이라고는 개똥만큼도 없다며 경영 수업이나 배우라던 재민.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목덜미가 뻐근해져 왔다.
“오랜만이구나. 아버지는… 잘 계시지?”
“네. 덕분은 아니지만요, 숙모님은 건강하신가요?”
“뭐, 덕분에.”
둘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서로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다.
굳이 예의를 차릴 친분도 없거니와 지금 이 자리는 제갈세가라는 울타리의 싸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제갈재민이었다.
“어디, 너희가 모은 녀석들의 실력 구경 좀 해볼까.”
딱-
제갈재민이 손가락을 튕기자 왼쪽에 서 있던 승려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수가 정확히 25명.
그들은 제갈재민 앞으로 자리하더니 석장을 쥐고 합장했다.
“이들은 내가 직접 키운 ‘라마승’이다.”
그 말에 조민은 그들을 관찰했다.
흉흉한 눈빛은 좀 전과 같았다. 반들반들하게 깎은 머리도 다른 승려들과 같았다.
다른 점이라면.
“작…네요?”
그들은 다른 승려들보다 머리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키가 작았다.
본래 ‘직접 키웠다’라는 것은 신경을 써서 가르쳤다는 뜻일 터.
그렇다면 좀 더 특별하다는 것인데.
저들의 작은 키 외에는 다른 점을 찾지 못하는 조민이었다.
그 모습에 제갈재민이 웃었다.
“크큭. 천하에 제갈조민도 이들의 가치를 모르는 건가?”
제갈재민의 조롱에 조민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반박할 만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저들의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좋아. 기회를 주지. 1차전이라 생각하고 이들과 겨룰 기회를 말이야.”
창-
그 말에 라마승들이 석장을 땅에 내려쳤다.
그러자 그들 주변에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러고는 서로 자리를 바꾸더니 한 승려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포진했다.
삼각형대를 유지한 라마승.
동시에 석장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붉게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뭉게뭉게 모이더니 하나의 거대한 석장이 되었다.
“그것부터 막을 수 있다면 말이지.”
창-
제갈재민의 그 말과 함께 라마승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움직이는 라마승들.
엄청난 기운을 담은 거대한 붉은색 석장이 조민에게 날아들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조민의 조그마한 머리가 펑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조민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흥. 나서시죠.”
파지지직-
조민의 신호와 함께 그녀의 뒤쪽에서 번개가 날아왔다.
“제왕무적검(帝王無敵劍) 제이 초식, 제왕검벽(帝王劍壁).”
펑-
번개로 이루어진 검벽이 솟구치더니 붉은색 석장을 막았다.
솟구친 검벽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에는 수려한 검기를 흩뿌리는 백련검을 든 남궁진성이 있었다.
“남궁세가?”
제갈재민은 남궁진성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펼친 제왕무적검이 남궁세가의 비전절학인 것만은 알고 있었다.
라마승들의 합격기를 단번에 밀쳐낼 정도로 완벽한 제왕무적검을 펼치는 이라면 당연히 남궁세가의 가주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랐다.
“반로환동이라도 한 건가, 젊어 보이는데?”
“오, 저를 아시나요?”
남궁진성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는 순수하게 포달랍궁에서 자신을 어찌 아는 것인지 궁금했다.
문제는 그 질문을 듣는 이가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남궁세가. 도박, 사체, 술집 등등의 더러운 사업체를 운영하는 곳이라 들었지. 그리고 그곳의 가주는 남궁정도로 욕심이 많은 영감탱이라고 들었는데?”
제갈재민은 자신이 알고 있는 남궁세가의 정보를 읊었다.
남궁진성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가주가 바뀐 지가 언제인데요. 저는 남궁진성이라고 합니다.”
남궁진성은 이번을 기회로 그동안 감춰왔던 자신의 존재를 알릴 생각이었다.
시후를 포함한 몇몇 이만이 남궁정도를 포함한 첫째와 셋째가 죽은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이 폐관 수련에 들어가 남궁세가의 일들은 둘째가 맡고 있다고만 알려져 있었다.
굳이 다른 이들에게 남궁세가에서 일어난 참극을 전할 필요가 있냐며 시후가 함구하라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후가 허락했다.
“다른 분들은 무림에 뜻이 없으셔서 이제 제가 가주의 직책을 맡기로 했지요.”
남궁진성이 남궁세가의 진정한 가주라고 대외적으로 알리도록 말이다.
평소 권력욕이 많은 남궁진성은 이번 기회를 무조건 살릴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자신의 능력과 남궁세가가 가진 힘을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눈앞에 상대는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당신께서 말하는 그 1차전, 남궁세가가 상대해 드리죠.”
휙-
백련검을 치켜들자 노란색 검기가 솟구쳤다.
그러자 남궁진성 양옆에서 사람들이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에 제갈재민이 흠칫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그곳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거였다.
“대단한 은신술이군.”
솔직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이었다.
그렇다고 긴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들이 자신에게 저런 식으로 다가온다고 하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갈재민에게만 해당하는 일.
“라마승은 긴장감을 고양하라.”
창-
라마승들이 석장을 땅에 내려쳤다.
청아한 음이 울리는 것과 함께 자리를 바꾸는 라마승.
좀 전이 삼각형 대형이었다면 지금은 사각형 대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피어오르는 붉은색 아지랑이는 끈이 되어 서로와 서로를 연결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갑자기 기차놀이를 하자는 건가 싶어 웃었겠지만, 남궁진성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저 진형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그리고 뒤에 있던 시후 역시 말이다.
“너 이 자식, 나댈 때부터 알아봤어.”
“주군….”
“은신술 익힌 녀석들이 잘났다는 듯이 얼굴 내미니깐 저 자식들이 경계하잖아.”
그랬다.
지금 라마승들이 펼친 진형은 서로와 서로를 기운으로 엮어 어느 곳에서 들이닥칠지 모를 암살자를 대비하기 위한 거였다.
이렇게 되면 남궁세가는 가장 좋은 패 하나를 버리고 시작하는 게임과 다름없었다.
그 모든 게 남궁진성이 자신의 입지 좀 다져보겠다고 나대서 일어난 결과였다.
“주군….”
시후라면 무슨 방도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구원의 손길을 뻗어보려 고개를 돌리던 남궁진성은 깜짝 놀랐다.
일행들에 둘러싸여 있어 몰랐는데 시후의 상태가 좋지 못해 보였다.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거칠고 재수 없었지만,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방금 깨어난 평치혁에게 기대어 있었다.
아무래도 조금 전 평치혁을 깨우는 데 있어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우웅-
남궁진성은 기운을 일으키며 적의 이목을 자신에게 이끌었다.
여기서 시후의 상태가 저들에게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된다.
특히, 제갈재민에게는 더욱더.
만약 시후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면, 그는 곧장 달려들 게 뻔했다.
지금의 제갈재민은 자신을 막을 시후라는 큰 방해물이 사라진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칠 바보가 아니었다.
- 네가 싼 똥은 네가 치워야지?
-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벌겠습니다.
- 눈치는 빨라서 좋다.
시후의 전음에 남궁진성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았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시후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제가 한 실수는 제가 만회합니다.”
파지직-
남궁진성의 몸에 노란색 기류가 일어났다.
스파크가 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백련검에도 기운이 일어났다.
다시 몸을 돌린 남궁진성은 백련검을 치켜들어 제갈재민을 겨누었다.
“그 1차전, 제가 승리하는 것을 보여드리지요.”
“해봐. 라마승들은 적을 찢어발겨 죽여라.”
남궁진성의 도발에 제갈재민이 라마승들에게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창-
그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움직이는 라마승.
네모형 포진으로 남궁세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궁세가는 나를 따르라.”
탓-
남궁진성은 그 말과 함께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백련검을 어지럽게 휘두르는 남궁진성.
“제왕무적검 제사 초식, 만천검(滿天劍).”
백련검에서 흘러나간 검기가 파지직 거리며 순식간에 라마승들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그리고는 마치 폭우라도 내리듯 번개가 되어 라마승들을 덮쳤다.
파지직-
한눈에 봐도 엄청난 전류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라마승들 역시 멍청히 서서 당하지는 않았다.
만천검이 하늘을 가리는 순간 그들은 석장을 땅에 꽂았다.
그러자 조금 전의 라마진이 발동되어 붉은 좌불상이 만천검을 밀어냈다.
번쩍-
두 기운이 맞붙자 섬광탄이라도 터진 듯이 눈부심이 일었다.
라마승들은 눈을 찡그리느라 시야가 차단되었다.
그 찰나의 순간.
“제왕무적검(帝王無敵劍) 제일 초식, 섬전(閃電).”
섬광탄의 작은 빛이 터진 빛 사이로 일직선으로 뻗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빛은 한 라마승의 미간을 정확히 꿰뚫었다.
털썩-
그 라마승이 쓰러지자 라마승들을 연결했던 붉은색 기운이 끊어졌다.
“지금!”
그와 함께 남궁진성의 외침이 울렸다.
그러자 라마승들 사이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일어났다.
조금 전 남궁진성 곁에 자리해 있던 남궁세가의 정예들이다.
촤악-촤악-
그들은 라마승들 지척에서 일어나며 들고 있던 단검으로 그들을 공격했다.
바로 지척이었기에 라마승들은 미처 반응할 수가 없었는지 누구는 팔, 누구는 다리, 누구는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렇게 라마승들에게 적지 않은 상처를 입힌 남궁세가의 정예들은 다시 땅으로 스며들어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1차전은 저희가 이긴 듯하군요.”
마지막에 돌아온 남궁진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크, 크큭. 강시후. 네 수하들은 참으로 동태 눈깔들만 가졌구나.”
제갈재민이 크게 웃으며 남궁진성을 비하했다.
남궁진성이 그 말에 반박하려는 그때였다.
뿌득-뿌득-
“저, 저건… 설마?!”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