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시후는 깜짝 놀랐다.
발밑에서 매화검이 튀어나오고 나서야 기척을 느끼다니.
‘젠장. 역시 탈영활강시라 이건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 순간 매화검을 들고 자하신공을 펼치는 평치혁이 보였다.
다른 이였다면 튀어나오는 순간 다시 들어가라며 밀어 넣었겠지만, 그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중국에서 봤을 때랑 다른 것은 제갈재민만이 아니었다.
‘눈이 살아 있어.’
어떻게 된 것인지 탈영활강시가된 평치혁의 눈이 일전과는 달랐다.
정말 딱, 눈만 살아 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시후는 독안공을 펼쳐 그의 생각을 읽었다.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는 평치혁.
그는 자신이 휘두르는 매화검으로 자기 목을 쳐버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매화검은 자하의 기운을 가득 담아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펼쳐냈다.
수천 송이의 매화 꽃잎이 땅속에서 뿜어져 나와 시후를 덮쳤다.
‘이게 매화만천(梅花滿天)? 탈영활강시의 영향인가?’
시후는 자신을 가두는 매화 꽃잎 속에서 평치혁이 펼친 무공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펼쳤던 매화만천과는 달랐다.
그때보다는 더욱 오밀조밀하게 시후를 포박하는 듯한 형태로 쏟아졌지만.
‘부드러움이 없어.’
유보다는 강의 기운을 가득 담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이었다.
시후는 매화만천에 작은 틈을 확인하고는 곧장 천마보를 펼쳤다.
그러자 평치혁이 곧장 따라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허, 이번에는 매화이도?”
이십사수매화검법 중 가장 빠른 검법으로 순식간에 시후에게 3연격을 날리는 평치혁이었다.
그렇다고 시후가 피하지 못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었다.
시후는 마주 오는 매화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가 들고 있기에는…!”
매화검부터 뺏어 그의 전투력을 낮추려던 시후는 돌연 평치혁의 뒤로 시선이 갔다.
좀 전에 펼쳤던 매화만천의 매화 꽃잎들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시후가 매화검에 손을 뻗는 순간에 맞추어 매화검을 감쌌다.
“칫.”
매화 꽃잎 하나하나가 절세보검에 버금가는 강기였기에 시후는 서둘러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시후가 물러나자 평치혁이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러자 매화검에 붙은 꽃잎들이 서로에게 엉겨 붙어 뭉쳤다.
평치혁이 검을 내지르자 뭉쳐 있던 매화 꽃잎이 유성처럼 시후에게 쏟아져 내렸다.
“낙매단하(落梅斷河)라, 초식 운용이 좋구나.”
시후는 발밑에서 기습을 노리고 쾌검으로 상대를 물린 후 하늘에서 강기를 떨구는 평치혁의 초식 운용에 찬사를 보냈다.
지금이 수련 중이었다면 박수까지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평치혁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
시후는 천마보를 펼치던 다리를 멈추고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한쪽 손을 펼쳐 내밀었다.
“천마멸겁장.”
쿠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천마멸겁장이 평치혁이 펼친 낙매단하와 맞붙었다.
유성처럼 떨어지는 매화 꽃잎을 검은 손바닥이 밀어내는 형상이 보였다.
평치혁은 이번에 승부를 보려는 듯 두 손으로 매화검을 잡고는 내력을 쏟아부었다.
그러자 매화 꽃잎 유성이 더욱 거대해졌다.
시후는 족히 배는 늘어난 압박을 느꼈다.
“크윽, 젠장. 평치혁!”
시후가 얼굴을 찌푸리고 악을 쓰며 평치혁의 이름을 외쳤다.
누가 봐도 낙매단하에 밀리는 모습이었다.
또한 실제로도 밀리고 있었다.
어느덧 매화 꽃잎 유성이 오장 앞에 다다랐다.
“오, 오오.”
어디선가 기대감에 잔뜩 부푼 목소리가 들렸다.
시후는 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살짝 돌렸다.
제갈재민 뒤에 포진한 포달랍궁 승려 중 한 명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다수 승려도 같은 표정을 보였다.
어서 매화 꽃잎 유성에 적중당하는 꼴을 보고 싶어 죽겠다는 듯했다.
하지만.
‘칫, 저 자식은 방심을 안 하네.’
정작 시후가 밀리는 모습에 낄낄대며 좋아해야 할 제갈재민이 사뭇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마도 지금 시후가 쇼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지.”
시후는 아쉬워하며 다른 손을 슬쩍 치켜들어 휘적였다.
작은 원을 그리는 시후의 손동작에 천마멸겁장 바로 뒤에 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처음 보는 무공이었는지 재갈재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하지? 저게 무슨 무공인지.”
시후는 제갈재민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느새 낙매단하에 밀려 낑낑대던 모습은 사라졌다.
제갈재민을 포함한 다른 승려들이 이상함을 눈치챈 순간.
펑-
천마멸겁장이 폭발했다.
그로 인한 기파가 순식간에 항구를 뒤흔들었다.
몇몇 승려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제갈재민은 제3의 눈으로 똑똑히 봤다.
시후의 천마멸겁장이 폭발하는 순간 그 안에 담겨 있던 기는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천마멸겁장이 사라지자 평치혁의 낙매단하는 매섭게 쏘아져 내렸다.
하지만 곧 시후가 만든 기의 소용돌이에 부딪혔다.
혹시 빨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싶던 그 순간이었다.
시후에게 쏘아져 내려가던 낙매단하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제갈재민에게로 향했다.
“흥. 잔재주는.”
제갈재민은 콧방귀까지 뀌며 여유롭게 승포 자락을 슬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퍼퍼벙-
낙매단하가 승포 자락에 빨려 들어가 엄청난 굉음을 울렸다.
휙-
굉음이 멈추고 제갈재민이 승포 자락을 슬쩍 들어 올려 시후에게 보였다.
“그런 짓거리로는 내 옷깃의 실오라기 하나 찢을 수 없다.”
다소 광오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그의 승포 자락은 멀쩡했다.
제갈재민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시후를 비웃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매영조하(梅影造河)라고 한다.”
수천 송이의 매화가 거대한 강물이 되어 제갈재민에게 날아갔다.
제갈재민은 올리던 한쪽 입꼬리 대신에 이를 악물며 다시 승포 자락을 치켜들었다.
퍼펑-
이번에도 역시 굉음이 울리며 매영조하를 빨아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포 자락을 내릴 시간이 없었다.
“그건 매화조광(梅化照光)이다.”
번쩍-
순간적으로 눈을 멀게 할 만한 빛이 번쩍였다.
다른 승려들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제갈재민은 제3의 눈으로 번쩍이는 빛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한줄기의 검기를 봤다.
“미친.”
펑-
이번에도 역시 승포 자락을 들어 올려 검기를 막은 제갈재민.
이번엔 자신하던 승포 자락이 반으로 갈라졌다.
“저 미친 새끼.”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제갈재민은 똑똑히 보았다.
처음 낙매단하의 방향을 틀어 이쪽으로 날렸을 때까지만 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시후는 평치혁과 싸우며 그가 날리는 무공 모두를 이쪽으로 날려 보냈다.
지금도 평치혁이 가까이 붙어 검을 휘두르자 발을 어지럽게 놀려 3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평치혁은 매화검에 기를 담아 검기를 날렸다.
“이건 그냥 검기네~.”
그것을 시후는 조금 전 소용돌이를 만들어 제갈재민 쪽으로 날렸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시후와 평치혁이 짜고 저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제갈재민은 알았다.
여전히 평치혁이 탈영활강시로서 자신과 연결된 것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시후가 만든 소용돌이였다.
퉁-
제갈재민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기를 손등으로 쳐내고는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시후를 공격하던 평치혁이 순식간에 제갈재민 옆으로 돌아왔다.
“뭐야, 이제 짜고 치는 고스톱 놀이는 끝인 거야?”
“쯧.”
시후의 비아냥에 제갈재민은 혀를 차며 그가 만든 소용돌이를 가리켰다.
시후는 천천히 걸어가 소용돌이 옆에 섰다.
“신기하지?”
“신기한 정도는 아니지만 처음 보는 거라서 궁금하군.”
“그럴 거야. 이게 중원에는 없던 거거든.”
“그럼, 천마신교에 있던 건가?”
움찔-
제갈재민이 천마신교를 거론하자 시후가 움찔했다.
‘확실하군. 저 녀석이 천 년 전 그놈이라는 게.’
조금 전 제갈재민의 말로 일말의 의심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은 제갈재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네가 천마였어.”
“……”
“그래. 이건 신기하네. 분명 약골이었던 강시후가 죽었다가 살아나더니 무공을 할 줄 알게 된 이유. 설마 천마의 영혼이 들어갔을 줄이야.”
제갈재민은 학교에서 시후가 자신에게 망신을 줬던 일을 거론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일이 지금에서야 설명이 되었다.
제갈재민이 배를 쓰다듬었다.
“꺼억,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아. 너도 나와 같은 처지라고 생각하니까.”
“너랑은 경우가 다르지.”
“뭐?”
시후는 그의 말에 반박하며 곁에 있던 소용돌이를 슬쩍 밀었다.
그러자 천천히 제갈재민에게로 움직였다.
그에 맞추어 시후도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강시후의 강한 염원으로 이루어진 거고, 너는 달뢰라마에게 이용당하는 거고.”
“…….”
그 말에 제갈재민은 입을 다문 채 조금 전까지 장난기 섞여 있던 시선이 아닌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봤다.
하지만 시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거봐, 너도 인정하잖아.”
“…….”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달뢰라마가 너를 기다린 거잖아. 너는 녀석의 매개체. 그리고 녀석은….”
우뚝-
시후는 말끝을 흐리며 제자리에 멈췄다.
제갈재민과는 고작 삼 장 정도의 거리였다.
그래서 그런지 제갈재민의 살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대단하군.’
시후는 솔직히 감탄했다.
비꼬고는 있지만, 지금의 제갈재민은 거의 완벽한 달뢰라마였다.
그래서 방심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녀석은 혹까지 달고 있었다.
그래서 시후는 녀석에게서 그 혹부터 떼어낼 생각이었다.
시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녀석은 기생충이지.”
“죽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구나.”
제갈재민이 그 말에 발끈하며 손을 까딱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평치혁이 앞으로 나섰다.
“너 때문에 내가 고생이 많아. 넌 이번 일 끝나면 무박 삼일 수련이다. 다시는 그런 꼴 당하지 않게 해주지.”
탓-
시후는 뒤로 훌쩍 뛰어오르며 평치혁에게만 살기를 뿌렸다.
그러자 평치혁은 조건반사처럼 시후에게 쏘아져 왔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평치혁은 매화검을 날카롭게 휘둘렀다.
시후는 천마보를 펼쳐 매화검을 한 치 앞에서 피했다.
그런 시후와 평치혁의 모습에 포달랍궁 승려들이 웃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거 또 할 생각인가?”
“에이, 그건 이제 못 하지. 봐봐. 검기를 하나도 안 날리잖아.”
“그러게. 그럼 아까처럼 그런 짓은 못하겠네?”
“그렇지. 그런데… 저 자식 왜 저렇게 어지럽게 우리 주위를 맴도는 거야?”
포달랍궁 승려들의 말처럼 시후는 평치혁의 검을 피하면서 그들 주위를 맴돌았다.
제갈재민도 그제야 그것을 눈치챘지만, 여전히 시후가 왜 그러는지는 알지 못했다.
“궁금해?”
그런데 시후가 그 잡담을 들은 것인지 목을 베려는 평치혁의 검을 피하며 승려들에게 물었다.
승려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후가 다시 한번 뒤로 훌쩍 날아오르며 제갈재민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제갈재민 앞에 있는 소용돌이를 말이다.
“저게 뭔지 궁금해했지?”
끄덕끄덕-
이번에도 역시 포달랍궁 승려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에는 없는, 이화신궁(梨花神宮)의 무공이야.”
다들 이화신궁이 어디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제갈신길만은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지금까지 뒷짐을 지고 있던 시후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촤라락-
그러자 제갈재민 앞에 있던 소용돌이가 움직였다.
그런데 그 수가 예사롭지 않았다.
제갈재민이 보기에는 하나로 보였던 소용돌이.
사실 시후는 소용돌이를 제갈재민에게 걸어가면서 점점 크기를 키워가며 겹겹이 늘려놓았다.
그 소용돌이가 시후가 손짓하자 제 자리를 찾아가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자리는 지금까지 시후가 포달랍궁 승려들 주위를 맴돌던 그 자리였다.
순식간에 소용돌이에 포위당한 포달랍궁의 승려들.
어찌해야 하나 싶은 그 순간 제갈재민이 그들 사이에 내려섰다.
“라마진을 펼쳐라.”
“네!”
그의 명령에 승려들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승려들을 감싸는 붉은색 기운이 피어올라 뭉쳐졌다.
“좋아. 버텨봐.”
시후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검지를 치켜들었다.
여전히 평치혁이 내지르는 검을 피하면서 정확히 소용돌이를 조준하는 시후.
“그거 이화신궁의 이화경(移化鏡)이라는 무공이다. 그리고 이건 탄지신공.”
퉁-
“강시후!!”
시후의 손에서 뻗어나간 탄지신공과 함께 제갈재민이 고함을 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