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6화
AI가 제주도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 한 것은 정보 조작이었다.
우선 휴산으로 유명한 한라산에 분화 조짐이 보인다는 정보를 인터넷 여기저기에 퍼트렸다.
전문가들의 조언과 어디서 찍었는지 모를 한라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까지 섞어서 말이다.
처음에 그것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실제로 제주도에 사는 주민들이 갑자기 비행기를 타고 내륙으로 이동하는 것을 봤다.
그리고 정부의 조사 결과.
[제주도 한라산 분화 긴박.]
이라는 기사 제목과 함께 정부에서 제주도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이게 가능해?”
시후는 고작 정보 조작으로 정부를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당연히 그것만으로는 힘들죠. 그래서 저희가 움직였죠.”
“저희?”
“거기 조사 나간 연구원들 모두가 당가 사람이에요.”
“헐.”
그러니깐 정부에서 유명한 지질학자를 포함한 조사원들을 파견했는데 그들 모두가 당가 사람이라는 거였다.
한국대를 통해 수많은 교수를 양성한 당가였기에 가능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 연기는?”
“그건 대력공방이요.”
불을 다루는 데 능숙한 대장장이들이기에 화산이 폭발할 것처럼 연기를 피워내는 것쯤은 간단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기계를 숨겨야 하는 것은 제갈 세가에서 진법으로 해결했다.
“거참, 이 정도면 한 나라를 정보 조작으로 바보 만드는 것쯤은 간단하겠어.”
“그게 모두 AI 덕분이죠.”
아무리 연구원들이 있고 희한한 기계를 설치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믿을 만한 정보를 조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매체에 공통된 내용을 퍼트려야 했고 사실에 근거한 거짓 자료를 조작해야 했다.
방대한 자료를 빠르게 퍼트려야 하고 출처가 의심되지 않게 해야 하기에 AI가 없다면 이번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확실히 AI가 대단하기는 대단하네. 잠깐.”
AI의 대단함에 놀라던 시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분명 일전에 AI는 외부에 간섭할 수 없게 설계되었다고 들었는데?”
AI가 Safety World가 아닌 현실에 간섭할 수 없도록 설계했다는 박초연의 설명이 떠올랐다.
그러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그래서 간이 AI를 만들어서 우회시켰어요.”
박초연이 다가왔다.
그녀는 시후가 궁금한 것을 설명하는 대신에 태블릿을 넘겨주었다.
그러자.
[오랜만입니다.]
간이 AI가 무엇인지 궁금하던 시후에게 태블릿이 인사를 했다.
좀 더 정확히는 태블릿에 나타나 있는 시후의 Safety World의 캐릭터 ‘천마’가 말이다.
이는 일전에 S.W SOFT 지하 5층에서 만난 AI가 분명했다.
“너 AI?”
[네. 맞습니다.]
“설마, 이렇게 빠져나올 수가 있다고?”
[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지만, 성공했습니다.]
설계 단계에 있던 제재 항목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AI는 편법을 썼다.
그것은 바로 현실에 아바타를 만들어 자신과 연동하는 것.
로봇 같은 것을 조종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태블릿에 들어갈 정도의 아바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밖으로 나온 후에 정보 조작을 했다?”
[네.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이지만요.]
AI 아바타가 하는 것은 딱 지금 정도가 최선이라고 했다.
더 방대하고 더 빠르고 더 정교한 정보 조작을 하려면 본체의 능력을 더욱 끌어와야 한다고 했다.
[지금은 고작 5%에 불과합니다.]
“허, 너 생각보다 쓸모 있다?”
[그런 말 종종 듣습니다.]
“그러냐.”
이제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되었으니 AI와의 대화를 대충 끝냈다.
한편으로 다른 궁금증이 생겼다.
‘저 자식 말투가 좀 변했어.’
본래 딱딱한 말투가 지금은 유순하게 변했다고 해야 하나.
마치 현대 시대에 때를 탄 듯 변한 말투였다.
‘나중에 인터넷 은어 같은 거 쓰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AI가 그런 말을 쓸 거라 생각하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대가 되기도 했다.
“나중에 이 녀석 말투 변하면 좀 가져와 봐.”
시후는 그것을 기대하며 박초연에게 태블릿을 넘겨줬다.
그 사이 크루즈선에 모두가 승선을 마쳤는지 조민이 시후에게 눈짓을 줬다.
“그래. 가자.”
그렇게 시후를 마지막으로 제주도 결전을 위해 크루즈선이 출발했다.
* * *
‘여긴… 어디지?’
캄캄한 어둠 속, 평치혁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의식을 부여잡았다.
‘여기서… 나가야….’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몸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평치혁의 생각일 뿐.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힘겹게 치켜뜨는 눈꺼풀이 전부인 평치혁.
어두운 장막이 걷히듯 올라간 눈꺼풀에 밝아진 시야.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드넓은 바다였다.
‘나는 분명 화산에 있었는데, 왜 바다에….’
평치혁의 기억과는 상황이 너무나도 변해 있었다.
매화검을 찾고 화산의 절경을 눈에 담던 자신이었다.
시후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 그의 앞에서 매화검을 한껏 뽐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 후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은 움직일 수 없고 기억은 나지 않고 정신은 불안정하고.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려고 애를 쓰는 그때였다.
“오, 이것 봐라?”
누군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승려?’
머리카락을 면도칼로 민 듯 반들반들한 대머리가 햇살에 비춰 반짝였다.
그를 승려라고 여긴 것은 그가 입은 옷 때문이었다.
기다란 붉은 천을 몸에 칭칭 감은 타국 승려식 복장으로, 한국에서 보기 힘든 차림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생각하자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쩌억-
그런 평치혁의 생각에 맞추어 그의 이마 가운데가 갈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또 하나의 눈.
‘맞아. 이 자식이야.’
평치혁은 그제야 자신이 왜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것인지 기억해냈다.
매화검을 찾아 화산을 내려오려던 그때.
평치혁의 앞을 이 남자가 막아섰다.
그는 자신을 포달랍궁의 궁주 달뢰라마라고 소개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 뒤를 기억해 내려는 평치혁의 앞에 제갈재민이 미소를 지었다.
“너는 내 종이 되었지.”
‘종’이라는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 저항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쯧쯧쯧. 신기하단 말이야. 탈영활강시가 되었는데 영혼을 유지하다니.”
제갈재민은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웃음이 서늘한 칼날이 되어 평치혁의 가슴을 후벼 팠다.
하지만 이번에도 평치혁은 그 어떤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의 모든 제약이 제갈재민의 말대로 그에게 구속된 것이다.
‘주군… 죄송합니다.’
평치혁은 모자란 자신의 실력으로 인해 시후에게 돌아가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리고 죄송해했다.
그런 평치혁의 뜻을 읽은 것이지 제갈재민이 어깨를 토닥였다.
“너무 그렇게 상심하지 마.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주군이 저기 오고 있으니깐.”
‘주군?’
제갈재민이 가리키는 바닷가에서 배 한 척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저 배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콰과과광-
맑은 하늘에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귀를 틀어막았을 그 엄청난 소리.
평치혁은 그것이 누구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인 줄 알았다.
‘주군!’
곧 항구에 내려선 시후의 모습에 평치혁은 속으로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속으로 외친 함성은 절규가 되었다.
* * *
시후는 크루즈선 뱃머리에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당연하게 조민이 자리했다.
“우선 적의 주요 인물들 암살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파악한 적의 전력이 정확하지 않은 이상. 오늘 하루 정비를 하며 정보를 파악하며 암살을 시도하는 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민은 시후에게 자신이 짠 전략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적의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고 그중에 무공 수위가 높은 이들을 암살하여 전력을 줄인 후, 마음이 다급한 적을 끌어들여 진에 가두고 상대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시후는 진지하게 설명하는 조민의 모습에서 천 년 전 지괴를 봤다.
‘이제는 녀석만큼 전략을 짤 줄 아네.’
중원 무림에 나설 때마다 지괴는 작전을 저런 식으로 짰다.
인명 피해가 가장 적게끔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네? 뭐가요?”
시후는 조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 조민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된다.
자신과는 다르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지내면 된다.
“오늘은 기선 제압이 먼저야.”
“오빠, 설마…?!”
퉁-
조민이 눈치챈 순간 시후는 선미를 박차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40장 높이까지 날아오른 시후.
저 멀리 보이는 항구에 나와 있는 인물이 보였다.
“7일이라는 시간이 제법 길었어. 천마뢰음보.”
콰과과광-
천둥소리를 동반한 경신술과 함께 시후가 쏘아져 갔다.
덕분에 크루즈선에 있던 일행들은 적이 나타났음을 자각하며 전투준비에 돌입했고 항구에 있는 포달랍궁의 녀석들은 긴장했다.
그리고 항구에 내려선 시후의 모습에 제갈재민은 웃었다.
“뭐가 그리 다운되어 있나? 뭐가 문젠데?”
누가 봐도 빈정대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헤이 썸띵~’ 이렇게 맞받아쳐야 하나?”
“오~ 나는 또 나 보고 혼자 날아오길래 잔뜩 흥분했나 했지.”
“걱정 마. 때마침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는 무공을 알고 있어 괜찮아.”
제갈재민이 노랫말로 말장난을 하자 시후는 극에 오른 분노를 천마분심공으로 마음을 둘로 나누어 다스렸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저 웃는 낯짝에 곧장 검을 날렸을 것이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런데 쟤네들은 좀 늦을 것 같은데. 괜찮아?”
제갈재민은 고개를 빼꼼 빼고는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크루즈선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사이 제갈재민의 뒤에 하나둘씩 그의 옷과 같은 승려복을 입은 이들이 나타났다.
그 수가 무려 항구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오백 명 정도 되는 건가? 다들 절정 수준은 되는군.’
시후는 순식간에 적의 전력을 파악했다.
동시에 이 싸움이 절대 만만치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수적으로 살짝 열세인 것도 같고.’
시후는 아무래도 일행들이 오기 전에 기선 제압 삼아 적을 줄일 필요를 느꼈다.
“이런 거 많이 봤지?”
쾅-
의념만으로 펼친 기운은 순식간에 포달랍궁의 승려들을 덮쳤다.
마치 그들에게만 중력이 가중된 듯 몇몇이 무릎을 꿇었다.
‘역시 이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군.’
반면 제갈재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뭐 벌써 힘을 쓰나.”
제갈재민이 귀를 파던 손을 빼 휘저었다.
그러자 승려들을 압박하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역시, 만만치 않아.’
중국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성장한 제갈재민의 힘을 느꼈다.
시후는 아무래도 좀 더 힘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막네. 그럼 이것도 막아봐. 천마등화공.”
좀 전과는 다르게 승려들의 몸을 띄우는 시후.
거기에 삼매진화의 기운을 불어넣어 그들의 몸을 태워버릴 천마등화공의 무공을 펼쳤다.
승려들의 몸이 떠오르고 그들의 발밑에 불길이 치솟으려는 그때.
“가서 네 주인 물어.”
제갈재민의 신호와 함께 시후의 발밑에서 매화꽃이 피어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