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찾았다!”
시후는 안광을 터트려 주변을 훑었다.
그 결과 시후가 아니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단서를 찾았다.
척-
허공섭물을 일으켜 가져온 그것은 손바닥에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매화검 조각.”
그것은 연화봉 정상에 꽂혀 있던 매화검의 조각이었다.
본래라면 평치혁이 그것을 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 적절히 사용 방법을 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고 어쩔 수 없이 평치혁은 그것을 사용했다.
그 과정에서 미숙함 때문에 매화검이 손상된 거였다.
“때로는 멍청한 게 득이 되는구나.”
시후는 평치혁의 미숙함을 칭찬하며 매화검 조각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주먹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시후가 자하의 기운을 매화검 조각에 흘려 넣은 거였다.
그에 반응하듯, 매화검 조각은 본체의 존재를 찾았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 움찔움찔하는 매화검 조각.
시후는 그 반응이 가리키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것이 아니기에 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매화검 조각이 가리키는 그곳에 평치혁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서둘렀다.
“점점 강해지는데.”
매화검 조각은 본체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듯이 격하게 반응했다.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매화검 조각이 가리키는 그곳은.
“화산파?”
지금은 많은 관광객이 찾는 화산파였다.
시후는 바로 기감을 넓혀 평치혁을 찾았다.
‘녀석들도 알아채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
다른 녀석들이라면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만약 평치혁을 납치한 놈이 제갈재민이라면 눈치챌 터.
평치혁이 무슨 일을 당하기 전에 서둘러 녀석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평치혁의 기가 느껴지자 몸을 날렸다.
스팟-
주변에 CCTV가 있었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잠시 후 시후가 다다른 곳은 가장 끝 쪽에 있는 창고였다.
다른 곳들은 옛 화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옛날 건축 방식으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그 창고만 철문이 달려 있었다.
쾅-
시후는 망설임 없이 손을 휘저어 철문을 뜯어냈다.
몇 개 달려 있지도 않은 형광등이 흔들거리며 창고 안을 밝혔다.
흔들거리는 조명에 창고 내부의 모습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시후에게는 상관없었다.
“평치혁!”
아무리 어두워도 대낮처럼 볼 수 있었기에 창고 구석에 있는 평치혁을 빠르게 발견했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까지 확인했다.
작은 의자에 몸이 묶여 있는 평치혁.
시후는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야, 정신 차려!”
시후는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그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잘라버린 후 평치혁을 부축했다.
어서 그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뭐야.”
평치혁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느껴졌다.
분명 심장도 뛰고 온기도 느껴지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그가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시후는 그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이대로 무작정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만약 독에라도 당한 것이라면 간단한 치료라도 해야 했다.
시후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의 백회혈에 손을 가져갔다.
기를 흘려 넣어 몸 상태를 확인하려는 거였다.
하지만 백회혈에 손을 가져가는 그 순간.
훅-
평치혁의 품에서 비수가 날아왔다.
시후는 몸을 급히 뒤로 꺾었다.
하지만 시후를 따라 몸을 일으킨 평치혁은 비수를 역수로 들고 휘둘렀다.
초절정에 이른 고수의 움직임은 날카로웠고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평치혁이 살기를 가득 담은 공격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시후의 방심이 컸다.
핏핏핏-
검기까지 실린 그의 비수를 뒤로 물러나며 피했지만 결국 몸에 작은 상처가 생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상단전을 연 내게 이만한 상처를 남기다니.’
한국에서 봤던 평치혁의 무위가 아니었다.
“너 이 자식, 장난치고는 좀 심하다?!”
“…….”
시후가 역정을 냈지만 평치혁은 대답이 없었다.
핑-
대신 손에 쥐고 있던 비수를 사전 동작도 없이 시후에게 던졌다.
하지만 시후 역시 이번에는 대비하고 있었다.
“흥.”
시후의 콧방귀와 함께 비수는 허공에 멈췄다.
하지만 그 뒤로 보이는 평치혁의 모습에 눈이 커졌다.
“매개이도(梅開二度)?!”
이십사수매화검법 중 가장 빠른 초식으로 적을 2~3격 만에 베어버리는 무위를 평치혁이 펼쳤다.
그것도 자하의 기운까지 가득 담은 매화검으로 말이다.
피핏-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빠른 검격이 비수를 지나 짓이겨 들어왔다.
시후는 허공에 멈췄던 비수를 낚아채고는 맞대어갔다.
물 흐르듯 쏘아져 오는 검격을 가볍게 쳐낸 시후.
비수로 평치혁을 겨냥했다.
부악-
순식간에 검기가 비수를 감싸더니 평치혁의 미간을 노리며 길어졌다.
시후는 이것으로 그를 밀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평치혁이 정상인이라면 꺾을 수 없는 이상한 각도로 고개를 꺾어 검기를 피했다.
“미친.”
그의 이상행동에 깜짝 놀라는 그 순간 또다시 이십사수매화검법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매화토염(梅花吐艶)? 이게 미쳤나?!”
뱀의 혀처럼 요사스러운 검기가 시후의 검기를 휘감으며 쏘아져 왔다.
시후는 비수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강하게 내리쳤다.
쾅-
매화토염의 검기를 포함하여 평치혁의 머리를 쪼갤 듯이 내려친 비수의 검기는 엄청난 굉음을 일으키며 창고를 부수었다.
“크윽.”
평치혁은 이번 공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는지 한쪽 어깨가 피로 적셔졌다.
“이제야 네 목소리를 듣네?”
시후는 평치혁의 신음을 듣고는 그쪽으로 비수를 돌렸다.
여전히 뻗어져 나온 검기는 10보나 떨어진 평치혁의 코앞에 있었다.
손을 슬쩍 뻗기만 해도 머리를 꿰뚫을 수 있는 거리.
보통의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낄 만한데 평치혁의 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려움도 없고 투지도 없어?’
멍한 것은 아닌데 그의 눈에서는 싸움에 임하는 자의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빠르게 온다고 했건만 아무래도 한발 늦은 것 같았다.
그런 시후의 생각에 호응이라도 하듯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흐, 흐흐. 아주 재미있어.”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것인지.
평치혁이 앉아 있던 의자에 제갈재민이 앉아 있었다.
시후는 평치혁을 겨냥하고 있던 검을 돌려 제갈재민을 노렸다.
“워, 워워. 진정해, 진정해. 그러다가 네 충직한 수하 하나 잃겠어.”
“쯧….”
시후는 그의 비아냥에도 검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시후가 검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평치혁이 몸을 날려 제갈재민의 앞에 자리해서였다.
그것도 자기 어깨에서 흐르는 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두 팔을 쫙 벌려 그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래, 맞아. 내가 무슨 짓을 했어.”
제갈재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기는 하지만 무엇인지 알려주기 싫다는 듯이 말이다.
“흥. 그까짓 섭혼술 따위.”
“섭혼술? 푸웁. 푸하, 하하!”
시후는 제갈재민의 어머니인 원후태령이 사용했던 섭혼술을 떠올렸다.
그 역시 포달랍궁에서 배운 것.
그곳의 궁주인 제갈재민 역시 섭혼술로 평치혁을 저리 만든 거라 여겼다.
하지만 제갈재민은 시후의 그런 생각을 마음껏 비웃었다.
“아하하, 아이고. 웃겨라. 크큭, 저것이 섭혼술 따위로 비유 받다니.”
“그럼, 아니라고?”
“크큭, 이건 말이야. 탈영활강시(奪靈活殭屍)라는 거야.”
“탈영…! 활강시?!”
시후조차 처음 듣는 거였다.
하지만 활강시가 무엇인지는 안다.
‘이지를 상실하고 주술사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꼭두각시라는 말인데. 탈영은 뭐지?’
도무지 탈영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 시후의 표정에 제갈재민은 만족스럽다며 웃었다.
“그렇지. 네가 알면 이상하지. 내가 만든 거니깐.”
“네가 만들어?”
“그래. 본래 우리 궁에 있던 반선라마(班禅喇嘛)가 창안한 활강시를 내가 보강한 것이지.”
“…….”
“크큭, 궁금해 미치겠다는 그 표정. 아주 볼만해.”
시후는 제갈재민이 더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은 평치혁이 당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
시후의 시선에 제갈재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평치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 어깨를 거침없이 주무르는 제갈재민.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는 평치혁의 모습에 시후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뻔했다.
다음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장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상처가…?”
제갈재민이 주무르는 그 부분이 수복되기 시작했다.
피가 멈추고 새살이 돋아나며 본래 모습을 되찾았다.
“크큭, 그래. 이게 바로 탈영활강시의 가장 큰 장점이지.”
탁탁-
제갈재민은 평치혁의 어깨를 두들겼다.
조금 전까지 피가 뚝뚝 떨어지던 그 부분은 본래의 맨살을 보였다.
“어때. 죽이지?!”
“너 이 새끼!”
시후는 인상을 확 구겼다.
방금 평치혁에게 일어난 일로 제갈재민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했다.
상단전을 연 덕분이기도 하지만 시간을 역행하지 않는 이상 저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제갈재민은 시후의 반응에 박수를 보냈다.
“오~ 이게 무엇인지 아는구나?”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어찌 그런 짓을 해?!”
시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갈재민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네 생각대로 탈영활강시는 이 녀석의 영혼을 빼내어 몸의 주도권을 내가 갖는 거야. 덕분에 신체가 가진 생명력을 이렇게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지.”
그의 말대로 평치혁의 상처를 수복한 것은 오로지 평치혁 자기 생명력을 이용한 거였다.
좀 더 정확히는 선천진기(先天眞氣)를 사용해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회복될 상처를 고작 몇 초 만에 낫게 한 거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당연하게도 평치혁의 수명이었다.
‘당장 되돌려야 해.’
일반적으로 시체를 되살리는 강시와는 다른 활강시.
아직은 방법이 있었다.
스윽-
시후는 비수에 천마지기를 흘려 넣었다.
흉흉한 기운이 순식간에 휘몰아쳤다.
“오오, 역시 장난이 아닌데?”
제갈재민은 평치혁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자 평치혁 역시 한쪽 손을 뒤로 돌려 그를 보호하며 매화검을 시후를 향해 들었다.
‘평치혁을 기절시키고 녀석을 제압한다.’
시후는 자신 있었다. 제아무리 포달랍궁의 궁주라 해도 말이다.
의념기를 펼치는 순간은 찰나일 테고 눈 깜짝할 사이에 둘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움찔-
평치혁의 어깨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제갈재민을 보는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
“크큭. 역시 너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더라니.”
시후는 제갈재민의 이마에 생긴 눈을 주시했다.
제3의 눈.
포달랍궁 궁주인 라마들이 얻는 힘 중에서 가장 위험한 힘이 바로 저 제3의 눈이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배운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너… 계승을 받은 것이냐.”
“맞아. 내가 바로 달뢰라마(達賴喇嘛)이니라.”
제갈재민의 제3의 눈이 희번덕이며 시후를 노려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