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3화
다급한 박초연의 목소리에 시후는 바로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야?”
- 연락이 왔어요! SOS! 어떻게 하죠?! 마침 연락해 주셔서 감사해요!
횡설수설하는 박초연.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해봐.”
우선 그녀를 달랬다.
그러자 심호흡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후우, 후우. 죄송해요.
“됐고. 누가 뭐 어쨌는데?”
- 평 장로님께 SOS 신호가 왔어요.
“SOS?”
박초연의 말은 이랬다.
평치혁이 중국으로 떠나면서 몇 가지 장치를 가져갔는데, 그중에 자신의 위치와 위험을 알려주는 GPS 기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GPS 신호가 화산에 머무른 오늘.
- 조금 전부터 줄곧 SOS 신호를 보내오고 있어요.
“기계가 잘못되었을 리는 없고?”
혹여나 기계 이상인가 싶어 물었지만.
-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경우를 대비해 워치도 채워 보냈어요.
“워치?”
- 네. 그런데 거기서도 SOS 신호가 잡혀 현재 구급대로 연락이 간 상태예요.
이 정도면 확실하다.
‘평치혁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무슨 일이 생겼다?’
웬만해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
일전에 마이클과의 수련을 통해 그는 초절정에 단계에 들어섰다.
아무리 산세가 험한 화산이라 해도 그 정도의 무공 실력이면 산책로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생체 신호에 이상이 생길 정도의 일이 생겼다는 것은.
“아무래도 가봐야겠어.”
-네?! 아, 바로 준비할게요.
“그래. 녀석 좌표 내 핸드폰으로 보내놓고 너희는 준비해서 따라와.”
- 네. 그럼 인천 공항에서….
“아니 난 먼저 가 있을 테니깐, 알아서 와.”
- 아… 아, 네! 알겠습니다.
박초연은 그제야 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상황이 긴급하니 그가 먼저 중국으로 떠난다는 소리였다.
일전에 시후가 굳이 비행기가 없어도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을 잊지 않아 알아들었다.
중국 공안에게 걸리면 밀입국이며 뭐며 일이 복잡해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통화를 종료하자 바로 평치혁의 마지막 신호가 잡혔던 곳의 좌표가 왔다.
그것을 지도 앱에 넣자 가는 경로가 나타났다.
시후는 천잠음영술로 몸을 숨긴 후 집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사이 천마분심공으로 변화된 몸 상태를 확인했다.
‘확실히 상단전이 열렸어.’
Safety World에서 상단전의 기운을 느꼈고 상당한 스텟 업을 했기에 현실에서 어느 정도 변화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현실에서도 상단전이 열려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마지체로 이룬 것들이 모두 상단전과 연결되었어.’
본래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
이렇게 세 개의 단전이 연결되며 인간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힘을 갖는 것이 우화등선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후는 천마지체로 이룬 전신 요혈의 단전들이 중단전을 거치지 않고 상단전과 연결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화등선과 같은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있어도 등선하지 않았겠지만. 잘되었어.’
혹여 있을지도 모르는 최악의 경우가 발생하지 않아 안도했다.
시후는 몸을 돌려 서쪽을 바라봤다.
스마트폰은 인천공항을 가리키고 있지만 시후는 목적지에 표시된 아이콘만 봤다.
“가볼까.”
스팟-
상단전이 열리고 나서 가장 크게 바뀐 점은 의념기가 완연해졌다는 거였다.
이전에는 생각만으로 검을 움직이고 적을 제압하는 데 약 1초의 시간이 걸렸다면 지금은 그 시간이 사라졌다.
날겠다고 생각하니 그에 맞추어 기가 움직였고 소리 없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주변의 소음을 차단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빠르게 날아가는 게 최고지.’
굳이 모습을 감추는 은신술을 펼칠 필요도 없이 비행기보다 빠르게 날아갔다.
서울을 떠나 어느덧 바다가 보이자 이미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간간이 스마트폰을 보며 목적지를 확인했다.
그렇게 한 식경 정도가 지나자 어느덧 목적지인 화산이 보였다.
예전에 화산까지 가는 데 비행기며 자동차를 이용하느라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빠르게 당도했다.
“이 근처인 것 같은데.”
GPS가 나타내는 곳에 도착한 시후.
그 주변은 산세가 험해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이지만 눈에 익은 곳이었다.
“십 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이곳은 그러지 않는 것 같군.”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만, 특별한 장소라고 각인이 되어 있다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시후는 훌쩍 날아올라 주변 봉우리 중에 가장 높은 봉우리인 연화봉에 올랐다.
그곳은 사람 하나가 겨우 설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곳이었지만 주변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시후는 그곳에서 발치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여기 있었네.”
연화봉 꼭대기에는 무언가 거칠게 뿌리째 뽑힌 흔적이 있다.
주먹 하나 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깊은 구멍.
시후는 천 년 전 운암에게서 뺏었던 매화검(梅花劍)을 떠올렸다.
화산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천 년 된 매화나무로 만든 검.
얼핏 보면 목검으로 보일 그 검은 화산 장문인 손에 들리면 희대의 보검이 되었다.
“자하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전도율이 높았다고 해야 할까. 엄청났었지.”
절정의 실력을 갖춘 운암조차 검마와 쌍벽을 이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보였다.
시후는 평치혁에게 매화검의 존재를 알렸고 이곳의 상태를 보니 그가 취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검을 취한 녀석이 실종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발을 헛디딜 녀석도 아니고 뭐에 부딪혔나?”
혹시 경공술을 펼치던 중에 날아가던 새와 부딪쳤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연화봉을 내려가 사람들의 발길이 닿은 곳까지 도달한 시후는 예상하지 못한 것을 봤다.
“뭐야, 저거 왜 박살이 나 있어?!”
그곳은 일전에 봤던 곳으로 등산객들을 위해 만든 케이블카가 있는 곳이었다.
아니, 있던 곳이었다.
처참하다 못해 본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주변이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매표를 하던 곳은 미사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푹 파여 있고 본래 자리에 있어야 할 케이블카는 저 멀리 날아가 절벽에 박혀 있었다.
마치 이곳만 전쟁을 치른 것 같았다.
시후는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케이블카가 박혀 있는 곳에서 눈에 띄는 흔적을 발견했다.
순식간에 그곳으로 움직인 시후는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이건… 낙화단검(落花斷劍).”
자하신공 초반부에 있는 꽃잎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려 적을 짓이기는 검결.
그 흔적이 케이블카를 포함해 절벽에 새겨져 있다.
이쯤 되자 시후는 심각해졌다.
평치혁이 매화검으로 자하신공까지 펼쳐 상대해야 하는 누군가와 이곳에서 접전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가? 마이클 같은 고수라도 나타났다는…!”
평치혁과 이만큼 겨룰 수 있는 이가 마이클 외에 누군가 있을까 싶어 생각해봤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이가 있었다.
가장 상상하기 싫은 인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
시후는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치혁의 흔적이 아닌 다른 이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검기가 어지러이 휘날리며 주변을 부순 곳에서 그와 부딪친 흔적이 보였다.
그것은 검기와는 달랐다.
자르기 위한 것이 아닌 무언가를 부수기 위한 공격에 의한 흔적들이었다.
“젠장. 포달랍궁 녀석들이 확실해.”
이만한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확실히 어떤 무기보다는 권에 의한 것이었다.
천 년 전에야 권(拳)을 사용하는 문파야 수두룩하게 빽빽하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맥을 이어오지도 못한 문파가 이만한 무공 수위를 보였을 리도 없고 평치혁과 무슨 원수를 지지 않았다면 이만한 접전을 펼치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것으로 시후는 이만한 접전을 벌일 정도의 명분을 가졌고 힘을 지닌 곳을 떠올리자 한 곳이 떠올랐다.
“포달랍궁, 녀석들이 이곳에까지 나타났다는 말이지. 설마, 녀석이 직접?”
시후는 제갈재민을 떠올렸다.
원후태령을 구하러 나타났던 제갈재민은 시후가 당황할 정도로 범상치 않은 힘을 보였었다.
거기에 녀석은 분명 이마에 붉은 점 세 개를 찍은 포달랍궁의 궁주 라마가 확실했다.
“만약, 그렇다면 녀석이 위험해.”
무슨 이유에서인지 평치혁을 납치했다면 그의 안전을 결코 장담할 수가 없다.
순수 무공의 힘이 아닌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 포달랍궁은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짓을 벌일 확률이 높았다.
시후는 이를 빠득 갈며 심호흡을 했다.
뭐가 되었든 아주 작은 단서라도 발견해야 했다.
번쩍-
시후의 안광이 터질 듯이 번쩍이며 주변을 밝혔다.
* * *
“으….”
평치혁은 전신을 감싸는 고통에 힘겹게 두 눈을 떴다.
점차 시야가 밝아졌지만, 처음 보는 곳이었다.
주변을 얼마 밝히지 못하는 형광등이 몇 개 걸린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창고였다.
하지만 처음 보는 게 아닌 것도 있었다.
“나를 살려둔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평치혁은 자신을 향해 등을 지고 벽을 쳐다보고 있는 이에게 외쳤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흠칫-
평치혁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몸을 떨었다.
결코 겁을 집어먹거나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아, 이거?”
그는 자기 이마를 검지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붉은 점이 세 개 찍혀 있는데, 놀랍게도 그 가운데에 눈 하나가 있다.
즉, 그는 눈이 세 개였다.
평치혁이 놀란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분명 자신과 싸울 때까지만 해도 저러지 않았다.
그는 평치혁에게 점점 다가왔다.
“일단 칭찬부터 해야 이야기가 진행되겠어.”
“뭐?”
“네가 내 생각보다 대단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을 꺼낸 거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평치혁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에게 욕으로 답했다.
그러자 그가 씨익 웃었다.
“역시, 강시후의 수하라 그런지 입이 거친 건 똑같네?”
“뭐?!”
그의 입에서 시후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평치혁의 두 눈이 커졌다.
그와 동시에 한 인물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맞아. 내가 제갈 재민이야.”
평치혁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력공방 장로들을 죽인 녀석의 이름으로 말이다.
거기에 하나 더.
“그럼 네가 포달랍궁의 궁주?”
“맞아. 똑똑하네?”
“네가 어떻게….”
“어떻게? 내가 중국에 있었던 것? 아니면 너를 찾아 화산을 찾아간 것? 그것도 아니면.”
“크윽.”
턱-
제갈 재민은 평치혁의 목을 움켜쥐었다.
고통에 신음을 흘리는 그를 보며 히죽 웃는 제갈 재민.
“자하신공에 매화검까지 든 너를 제압한 이 힘?!”
그러면서 이마에 눈을 껌뻑였다.
그런데 그 눈이 점점 붉어졌다.
평치혁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 눈을 노려봤다.
그가 자하신공을 어떻게 알았는지, 매화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는지 이제 중요치 않았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지만 다 헛수고일 거다.”
그 역시 포달랍궁이 무공이 아닌 다른 힘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상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을 가할 것 같았다.
그랬기에 각오를 보였다.
하지만.
“크큭, 헛수고인지는 두고 봐야겠지?”
평치혁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 뒤로.
“크아아악!!”
평치혁의 기나긴 절규가 메아리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