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칠흑 같은 어둠 속 빛이라고는 하늘에 떠 있는 푸른 달뿐.
거기에 습기 가득한 눅눅한 냄새.
그리우면서도 익숙했다.
시후는 갑자기 변한 주변 풍경에 두 눈을 부릅떴다.
“이럴 수가….”
좀처럼 놀라지 않는 시후도 지금만큼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시후가 보고 있는 풍경.
강시후가 아닌 천마로서 기억하던 풍경이었다.
천 년 전 죽기 직전까지도 잊을 수 없던 장소의 모습.
바로 천마동이었다.
시후는 주변을 둘러보던 눈을 돌려 자신을 내려다봤다.
“허? 몸까지?”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한 앙상한 팔.
천마동에서 생활하는 동안 제대로 된 음식 섭취를 할 수 없었기에 언제나 이랬었다.
‘게임에서 이렇게까지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인가.’
시후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구현한 Safety World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이것으로 시후는 의심의 싹을 피웠다.
그저 현실에서 내공을 증진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여기던 이곳의 진짜 얼굴을 알고 싶어졌다.
‘돌아가면 좀 알아봐야겠군.’
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도를 넘는 지금의 상황에 시후는 Safety World를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려면 우선 이곳부터 나가야겠지?”
시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곳이 천마동의 어느 부분인지 파악했다.
천마동은 웬만한 경공술 없이는 오를 수 없는 깊이에 있었다.
그렇기에 달빛이 들어온다는 것은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고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수련장이 있는 곳일 거였다.
“역시. 수련장이 맞나보군.”
툭툭-
발로 땅을 툭툭 쳐봤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대리석이 느껴졌다.
“이런 단단한 대리석이 저렇게 깨져 있다는 것은.”
오늘이 바로 ‘마의 하늘을 보는 날’이라는 뜻이었다.
천마동에 있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소정의 음식, 수련에 필요한 영약 그리고 비급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든 아이가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음식도 영약도 비급도 아이들의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랬기에 아이들은 뜻이 맞는 이들끼리 또는 힘 있는 우두머리에 의해 무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무리가 그것들에 대한 우선순위를 점하기 위해 결투를 하는 날이 있다.
그날 이 바로 마의 하늘을 보는 날.
이날을 이렇게 부른 것은 천마동 위에서 이들의 싸움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
시후는 부서진 대리석 사이로 굳어버린 선혈을 봤다.
“오늘은 꽤 치열한 날이었나 보군.”
시후 역시 알고 있다.
지금 이것이 Safety World에서 보이는 환영이라는 것쯤은.
하지만 그리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이들을 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거봐. 내가 여기 있을 거라고 했지?”
“나도 알았다.”
“여기 있을 거라고 이야기한 것은 제가 먼저였거든요?”
그리운 얼굴 셋이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금(金), 비(飛), 월(月).”
시후의 강함에 이끌려 그를 따른 세 명의 동도.
후에 금화상단의 상단주가 되는 금.
비천대의 대장이 되는 비.
그리고 천마에게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된 월.
시후는 셋을 보며 아련한 눈빛을 보였다.
셋은 그런 시후를 보며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너 아까 어디 맞았냐?”
질색하는 금.
“아니다, 쟤 안 맞았다.”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비.
“고작 두 시진 만에 보는데 오랜만이라니요. 천(天) 님?”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월.
시후는 셋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냥, 조금 전에 봤어도 또 보니 반가워서 그런다.”
“뭐야, 너 설마 오늘 일 때문에 그래?”
“오늘 일….”
금이 말하는 오늘 일이란 마의 하늘을 보는 날 이후, 천마동을 나가게 되는 일 때문일 것이다.
시후가 아닌 저 셋이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걱정되냐?”
“뭐, 좀?”
“쪼옴? 푸핫!”
금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고는 시후에게 다가와 어깨동무했다.
“우리가 먼저 나가는 이유를 너도 알잖아.”
“…….”
“나는 나가서 네가 펼칠 세상에서 필요한 돈을 마련해야 하고.”
금이 엄지 끝과 검지 끝을 맞물려 동그라미 형태를 보였다.
그러고는 비를 가리켰다.
“쟤는 네 곁에 믿을 수 있는 자들을 모으기 위해서 나가는 거고.”
“맞다.”
비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은 월을 가리켰다.
“쟤는… 신부수업?”
“아, 아니거든요?!”
월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크큭, 알았어. 발끈하기는. 쟤는 너의 눈과 귀가 되기 위해 나가는 거잖아.”
그랬다.
이들이 시후보다 먼저 천마동을 나가는 이유.
그것은 세력이 없는 시후에게 힘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금은 자금을 마련하고 비는 시후의 사람들을 모아 단체를 만들고 월은 밤의 여인으로 군림하여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금의 말이 끝나자 월은 시후를 아련한 표정으로 봤다.
천 년 전, 월의 저 표정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월.”
시후는 금의 품에서 벗어나 월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다가오는 시후에 월이 주춤했다.
그리고 시후가 코앞에 당도하자 월의 얼굴은 완전 홍당무가 되었고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시후에게까지 들렸다.
“왜, 왜요?”
꿀꺽-
극도의 긴장감에 월은 마른침까지 넘겼다.
그런 월을 보며 시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제 곧….’
이곳이 코퀴토스 강을 들여다보았기에 겪는 환상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맞을 거였다.
“내가 천마동에서 가장 후회한 순간.”
“네?”
알 수 없는 시후의 말에 월이 되묻는 순간.
“누구냐?!”
금과 비가 둘의 곁으로 움직여 기를 끌어올렸다.
그제야 월도 무엇을 느꼈는지 주변을 훑으며 경계 태세를 보였다.
저벅- 저벅-
사방에서 여러 명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봐, 내가 그랬지? 여기 모여 있을 거라고?”
“카악, 퉤! 달빛에 축배라도 들고 있었나?”
“몸이나 파는 년이니 마지막 회포라도 풀었나 보죠.”
세 방향에서 무리를 끌고 나온 이들.
대머리의 근육질 석(石), 등이 굽은 꼽추 뇌(腦), 풍만한 몸매를 과감히 드러낸 옷을 입은 색(色).
이들은 천마동에서 매양 시후와 마찰을 빚던 무리였다.
“그런 너희들이라도 오랜만에 보니 반갑군.”
“쟤 뭐라니?”
시후의 말에 그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곁에 있든 금도 마찬가지였다.
“천, 너 오늘 왜 그래?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아.”
“그럼, 다행인데…. 지금 괜찮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역시. 눈치가 가장 빠른 금이었다.
지금 저들이 자기 동료들을 이끌고 이런 야심한 밤에 수련장, 아니 시후 일행을 찾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달밤에 우리를 축하해 주려고 모인 것 같지는 않고. 허튼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호, 호호. 그 잘난 혀, 오늘은 끝을 봐줄 생각인데?”
“칫.”
금은 슬쩍 떠봤는데 색이 거침없이 말하자 상황을 직시했다.
“천, 어쩔 거야?”
“…….”
바로 저 말이었다.
천 년 전, 시후는 천이 저 말을 했을 때 가장 후회되는 지시를 내렸다.
그래도 천마동에서 목숨을 버티며 지냈던 동도들이라 생각했었다.
그랬기에 그들과의 싸움을 피했다.
천마답지 않은 행동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핏빛에 물든 후회뿐이었다.
스윽-
시후는 곁에 있던 금의 품에서 옥패를 꺼냈다.
“이것을 갖고 싶은 것인가?”
“카악, 퉤. 역시 너는 나 못지않게 똑똑해.”
시후가 내민 옥패. 그것은 다음 날 천마동을 나가는 데 필요한 증명패였다.
아무리 오늘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 천마동을 나갈 수 있는 저 옥패를 받았다 하지만 다음 날까지 갖고 있지 못한다면 허사였다.
그것이 천마신교의 법이었고 천마동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실력이었다.
시후는 옥패를 휙 하고 던졌다.
날아든 옥패를 가볍게 받아 든 뇌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옥패는 세 개이지 않았나?”
“…줘.”
까딱-
시후는 고개를 까딱여 다른 둘에게 옥패를 건네주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지못해 비와 월이 품속에서 옥패를 꺼내어 던졌다.
그것을 받아 든 석과 색은 눈을 빛냈다.
“이제 되었지?”
“크큭, 이리 쉬운 줄 몰랐는데.”
“쉽게 가자. 괜히 힘 빼기 싫다.”
“우리는 언제나 쉽게 가고 싶었어. 빌어먹을 천 네가 나대지만 않았어도.”
“그랬다면 미안하군.”
“……!”
시후의 사과에 다들 토끼 눈을 뜨며 깜짝 놀랐다.
“뭐야?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야? 천이 사과를 해?”
뇌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래도 시후를 진짜가 아니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거 아니다. 다른 놈이 내 행색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진짜야? 그럼, 너 미친 거야?”
도통 믿지 못하는 뇌였지만 시후를 노려보더니 피식 웃었다.
“뭐, 네가 아니든 말든. 그 셋은 진짜인 것 같으니….”
“하지 마라.”
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후가 되받아쳤다.
뇌가 이후에 무슨 명령을 내릴지 뻔했다.
아니, 알았다.
이날 시후는 이곳에 있는 모든 동도를 죽인다.
그 시발점이 바로 곁에 있는 월이 저들의 손에 죽기 때문이다.
저들의 수는 어림잡아 50명. 이쪽은 4명.
무위에 자신은 있었지만, 저들 역시 허투루 무공을 익힌 것은 아니었다.
이날 시후의 자비는 월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 분노는 저들 50명을 모두 몰살케 했다.
어찌 보면 후에 천마신교에 중요한 인물로 쓰였을지도 모를 이들이었다.
근육 멍청이로 보이던 석도 알고 보면 수하를 가족처럼 챙기던 녀석이었다.
꼽추로 태어났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뇌는 이런 험난한 천마동에서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생존할 수 있는 지식을 전해주던 녀석이었다.
자신이 가진 매력으로 정기를 흡수해 무공을 높이던 색 역시 자신과 살을 섞은 이를 끝까지 책임지던 녀석이었다.
시후는 월의 죽음도 저들의 죽음도 지금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저들이 원하는 것을 주었고 말려도 보았다.
하지만 뇌의 명령은 멈추지 않았다.
“모두 죽여!”
그의 신호와 함께 그들의 동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과연 코퀴토스의 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후는 후회로 물든 과거를 보여주는 코퀴토스의 강의 의도를 알고 싶었다.
여기서 저들을 막고 월을 구하는 것이 답일 것인가.
아니면 저들을 회유하는 것이 답일 것인가.
시후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위험은 다가오고 있었다.
“천!”
이제는 지척까지 다가온 그들에 금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들은 시후의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시후는 곁에 있는 세 명과 살기를 띠며 달려드는 저들을 보며 결심을 굳혔다.
“답은 언제나 나에게 있지.”
그러고는 천마지기를 끌어올렸다.
화악-
검은 아지랑이가 푸른 달빛을 가리며 피어올랐다.
주변 공기를 울리는 시후의 천마지기에 달려들던 이들도 곁에 있던 이들도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피어오르던 아지랑이가 점점 형체를 보이며 악귀의 얼굴을 드러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 천마신교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것이 나타나자.
“마, 마의 하늘을 뵙습니다!”
쿵- 쿵-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며 무릎을 꿇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