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3화
박초연은 마이클의 당황하는 모습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 역시 마이클을 저만큼 당황하게 만드는 이가 당연히 시후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어떻게든 시후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마이클보다 빠르게 움직이려 했다.
시후가 진짜 열 받아 날뛰기 시작하면 S.W SOFT 건물은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시… 어? 평 장로님?!”
그런데 있는 힘껏 고개를 돌리자 보인 이는 평치혁이었다.
그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사무실 문을 닫고는 걸어 들어왔다.
그런데 평치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악귀를 연상케 하는 그의 표정에 박초연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저토록 화나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평치혁은 살기를 풀풀 풍기며 들어와 박초연 곁에 섰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박초연이 깜짝 놀랐다.
“이건?!”
평치혁의 손을 타고 따스한 기운이 밀려 들어오는 거였다.
박초연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평치혁을 봤다.
사실 박초연은 조금 전 약간의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자신이 뿜어낸 살기였지만 마이클이 마법으로 그것을 튕겨내자 되레 내상을 입은 거였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평치혁이 내공을 흘려 치료해 주었다.
덕분에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았다.
한편, 마이클은 평치혁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놀랐다.
처음 문밖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시후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처음 보는 사내였다.
시후 말고도 한국에 이런 강자가 있나 싶어 놀라던 차에 그가 일으킨 기운에 또다시 놀랐다.
그의 생김새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따뜻한 기운을 일으켜서였다.
흡사 봄날에 만개하는 꽃밭을 연상했다.
거기에 얼핏 진짜로 꽃 향이 나는 듯도 했다.
“향수를 과하게 쓰는 자이군. 아, 영어는 못 알아듣나? 그럼, Translate.”
마이클은 사무실 공간에 통역 마법을 펼쳤다.
이제 잠시 후면 이곳에서 말하는 모든 언어는 통일될 것이다.
그런데 통역 마법이 채 발현되기도 전에 평치혁이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네깟 놈의 말쯤은 쉽게 알아들으니깐.”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까 싶어 통역 마법을 펼친 마이클은 움찔했다.
평치혁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서가 아니라 그가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이는 시후 이후에 처음이었다.
“그런 말 못 들어봤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
영화 대사에 빗대어 그의 말버릇을 탓하는 마이클이었다.
평치혁은 단번에 마이클의 의도를 파악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참나, 그러는 너는 매너가 있어서 이렇게 연약한 여성을 공격했냐?”
평치혁이 박초연을 가리켰다.
박초연은 갑자기 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몸을 움츠렸다.
마이클은 그 모습에 표정이 굳었다.
조금 전 자신이 박초연에게 한 짓에 아차 싶은 거였다.
실수도 그런 실수가 없었다.
살기를 내뿜는 정도의 힘을 가진 박초연의 행동에 그녀가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마이클은 저도 모르게 박초연의 수준을 본인에게 맞췄다.
현재 박초연의 경지는 일류 무인의 수준. 소드마스터인 마이클에게는 한참이나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소드마스터가 된 이후로 이런 실수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이 자신의 눈을 흐렸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마이클은 쉽게 인정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최대한 진정성을 담아 사과의 말을 건네는 마이클이었다.
박초연도 그의 마음이 느껴졌는지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아무리 그가 실수하고 사과하지만, 그는 마이클 케네디였다.
뒷배도 보통 뒷배를 가진 이가 아니기에 혹여 다른 문제라도 생길까 염려되어 이만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입을 떼기 전에 평치혁이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나섰다.
“그렇게 미안하다고 말로만 하는 게 진정한 사과인 건가?”
“뭐?”
“진짜 미안하면 머리를 숙여 사과해야지.”
“…….”
평치혁의 말에 마이클의 얼굴이 씰룩였다.
그러고는 박초연에게서 시선을 옮겨 평치혁을 봤다.
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것은 충분히 알았다.
시후를 연상할 정도의 살기를 뿜어낼 수 있을 정도의 고수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안하무인격으로 자신을 대할 수는 없었다.
“한국에 온 이후로 나를 무시하는 이가 또 있다니.”
마이클은 몸에 두르고 있는 오러에 기운을 더욱 흘려 넣었다.
그러자 더욱 짙어진 오러의 갑옷. 이제는 분위기마저 흉흉했다.
“하?! 사과하라니까 힘이나 쓰려고 하네?”
평치혁은 품속에서 검신이 없는 검자루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자하의 기운을 일으켜 검 자루에 담았다.
그러자 선분홍빛의 기운이 모여 검신이 되었다.
둘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서로를 공격할 기세였다.
덕분에 박초연만 안달이 났다.
둘이 일으킨 기운만으로도 이미 사무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서류들은 기풍에 휩쓸려 날아다니고 창문은 당장이라도 깨질 것처럼 울렸다.
이대로 둘이 충돌하게 되면 단 한 수에 사무실은 초토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둘을 말리기에 박초연의 힘은 너무나도 모자랐다.
“어떻게 해….”
박초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두 손을 모아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저들을 말려주었으면 했다.
그때였다.
셋은 동시에 흠칫하곤 고개를 돌려 사무실 문을 바라봤다.
그 뒤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살기에 차마 입을 열 수도 없었다.
꿀꺽-
셋은 어찌나 긴장했는지 동시에 마른침까지 삼켰다.
셋의 시선은 사무실 문고리에 고정되었다.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만한 살기를 품고 다가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생명을 위협할 만한 살기임에는 분명했다.
끼릭-
드디어 돌아가는 문고리 소리에 셋은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처럼 오싹했다.
들어온 이는 시후였다.
“…….”
익히 아는 시후의 모습이었지만 그가 내뿜는 살기는 익히 아는 게 아니었다.
철컥-
시후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러자 문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빠! 시후 오빠!”
제니였다.
마이클은 제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몰랐지만 적색경보처럼 들렸다.
그런데 시후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어,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시후는 당장이라도 한판 붙을 것 같은 평치혁과 마이클의 모습을 한 번 훑더니 시선을 옮겨 박초연을 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 규칙을 만든 게 너였어?”
“네?! 무, 무슨….”
대뜸 규칙 타령을 하는 시후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박초연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열리지 않는 사무실 뒤에서 제니가 다급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
“그 규칙은 꽤 괜찮은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S.W SOFT로서는 많은 이가 참여할 방안을 모색한 거라고요! 오빠! 내 말 듣고 있어요?! 이 문은 왜 또 안 열려?!”
시후가 들어오면서 문에 내공으로 막을 쳐놨기에 제니는 목 놓아 소리칠 뿐이었다.
제니의 말에 박초연은 시후가 무엇 때문에 저러는지 알았다.
이번에 박철 사장이 발표한 월드 오브 리그전의 규칙.
5판 3선승제로 이루어지는 경기의 규칙이었다.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나뉜 경기에서 개인전에 출전한 이는 단체전에 출전할 수 없다는 것에 저러는 거였다.
하지만 왜 저렇게 살기를 피워낼 정도로 화를 내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선해야 할 것은 알았다.
박초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시후를 설득하기 위해 마주 봤다.
“그렇게 해야 다들 즐길 수 있는 경기가 됩니다.”
“즐겨?”
“네. 월드 오브 리그전은 일종의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이 경쟁을 통해 즐거움을 찾는 겁니다.”
“…….”
“그런데 오로지 상대를 처치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
“세계인이 같이 즐길 수 있는 경기가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규칙을 제시했다? 나 같은 강자가 올킬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네.”
박초연의 설명을 들은 시후는 살기를 누그러트렸다.
‘젠장, 귀찮은 일을 하는데 명분이 생겼어.’
시후는 월드 오브 리그전을 일종의 유희로 여겼다.
어차피 Safety World를 하면서 강해져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그래서 즐기기로 마음먹었고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거기에 프로게이머들을 국가대표로 만들어 여러 나라에 있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게 해준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악마 위리놈과 정식으로 겨룰 수 있는 상품도 준비한다고 했으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반쯤 유희로 여겨 시작한 여정에 여러 놈들이 끼어들었다.
S.W SOFT에서 영입한 프로게이머들.
D.M부터 시작해 박혜령을 포함한 나머지 녀석 모두를 챙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간을 들여 그들을 가르쳐야 했기에 시후는 팔자에도 없는 선생 노릇을 했다.
그 모든 것이 월드 오브 리그전의 규칙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곁에 있는 녀석들이 패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가르쳤는데, 이제는 시후 혼자서 잘해봐야 소용이 없는 경우가 되어버렸다.
그 모든 것이 S.W SOFT가 발표한 규칙 때문이라는 것은 제니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사항을 공표하면서 왜 내게 일절 언질도 없었지?”
미리 귀띔이라도 해줬다면 이렇게 열이 뻗치지는 않았을 거였다.
그 질문에 지금까지 당당하게 말하던 박초연이 머뭇거렸다.
“그게… 이렇게 화내실 것 같다고 해서….”
“뭐?”
“조민이 말해줬어요. 그런 규칙을 내세우면 분명 시후 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실 거라고.”
“…그래서 일단 저지르고 봤다?”
“네….”
“이 자식이.”
“히익!”
시후가 발끈하자 박초연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 그때 그녀 앞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평치혁과 마이클이 박초연 앞으로 움직인 거였다.
“어쭈? 뭐 하는 거냐?”
“어, 어… 그게….”
평치혁은 저도 모르게 움직인 것에 스스로 당황했다.
그랬기에 시후의 물음에 딱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이클은 달랐다.
“강시후, 어떠한 이유라도 여자는 때리면 안 됩니다. 특히, 초연 씨처럼 매력적인 여성은 더욱.”
마이클은 시후가 박초연을 때릴 것 같은 분위기에 그를 막고자 움직인 거였다.
그 말에 박초연은 얼굴을 붉혔다.
시후는 셋의 각기 다른 표정에 이마를 짚었다.
“하아…. 너희를 보고 있으니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다.”
누가 봐도 평치혁 역시 마이클과 같은 의도로 박초연 앞에 자리한 게 분명했다.
서로 잘해보라며 붙여놨으니 이만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마이클의 반응에 셋의 분위기가 오묘해졌다.
시후는 괜히 그들의 연애사에 끼고 싶지 않았다.
“박방주 보고 한 말 아니다.”
“그럼요?”
“조민, 어디 갔냐?”
S.W SOFT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는데 Safety World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조민이 조언을 했다고 하니 이 건물에 있나 싶어 기감을 펼쳐봤지만, 그녀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박초연과 조민은 서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것 같았다.
‘그만한 조언을 대뜸 해줄 녀석이 아니니까.’
조민의 성격으로 보아 시후에 대한 일을 아무에게나 조언하지 않는 것을 아는 거였다.
그리고 역시나.
“조민이라면 집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집? 제갈 세가?”
“네. 오늘 집이 완공된다고 하던데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얼마 전에 부서진 제갈 세가가 다시 지어졌다는 소리에 시후는 옳다구나 싶었다.
조민이 어디 있는지도 알았으니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어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전에 끌고 갈 녀석들이 있었다.
“너희도 같이 가자.”
“네? 저, 저는 왜요?”
평치혁은 시후가 자신을 가리키자 깜짝 놀랐다.
설마 조금 전에 그의 앞을 가로막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시후가 같이 가자고 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말입니까?”
“그래. 너희 어차피 한판 붙을 거잖아.”
“…….”
둘은 시후가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시후는 사무실의 상황을 알고 있는 거였다.
살기까지 뿜어내며 기운을 일으킨 시점에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둘은 시후가 자리를 뜨고 나면, 자웅을 가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후가 판을 깔아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후는 제니와 마이클, 박초연과 평치혁을 데리고 제갈 세가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