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제니와 마이클은 긴장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제니야, 진짜 며칠 더 있을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샐러맨더 님을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해 주실지 모르겠다.”
“…….”
제니는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일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를 데리러 와서 되레 우리가 여기 묶이게 되다니.”
“예정에 없던 일이니, 아버지께 여쭤봐야죠.”
“하아… 그래도 아버지가 제니 너를 이뻐하시니까. 네가 말씀드려봐.”
제니는 깜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살짝 언성까지 높아졌다.
“오빠! 이런 거는 차기 가주가 해야죠.”
“이럴 때만 차기 가주야? 아버지께 내가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면 얼마나 화를 내실지 뻔한데?”
“저도 아버지께서 케네디 가문의 가주로 임하실 때는 무섭거든요?”
“좋아. 그럼 제니 네가 한국에서 배웠던 가위바위보로 결정하자.”
가위바위보를 하자는 마이클의 말에 제니는 어이가 없었다.
장미기사단 단장이라는 자가 그래도 소드마스터라는 자가, 동생과 가위바위보로 이런 문제를 결정하자니.
하지만 마이클의 단호한 표정에 제니 역시 입술을 악물었다.
“좋아요. 딴말하기 없기에요?”
“그래, 단판이다!”
둘은 신중하게 서로를 탐색했다.
“가위.”
“바위.”
“보!”
단판의 가위바위보.
승자는 소드마스터인 마이클이었다.
“오빠, 속임수 쓴 거 아니죠?”
제니가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이클은 순간 뜨끔했지만 일절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괜히 생트집 잡지 말고 어서 영상통화나 해.”
“알았어요….”
사실 마이클은 소드마스터의 능력을 십분 활용했다.
제니가 가위를 내기 위해 움직이는 근육을 소드마스터의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읽었다.
거기에 극강의 순발력과 근력으로 보를 내려던 자기 손을 꾹 다물어 바위를 냈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열네 살 동생 한번 이겨보겠다고 별짓을 다 한다고 하겠지만 마이클에게는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아버지께 오늘의 비보를 전하기 싫었다.
제니는 깊은 심호흡을 한 후에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Daddy’라고 적힌 이름의 통화 버튼을 누른 제니는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통화가 연결되자 화면에는 중년의 남성이 나타났다.
자다가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모습이었지만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그는 눈을 비벼 통화 상대가 제니인 것을 확인하더니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 우리 제니~ 이른 아침부터 아빠가 보고 싶어 전화했어요?
애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였다.
“주무시고 계셨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 아니야. 우리 제니가 전화했는데 받아야지. 그런데 거기서 일이 잘 안되었나 보구나?
“네?”
제니는 흠칫했다.
이곳에서의 일을 이미 아버지가 아는 것인가 싶었다.
아니, 분명 알고 계신 눈빛이었다.
얼굴은 온화하게 웃고 있지만, 그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제니는 혹시나 해 마이클을 봤다.
하지만 놀란 것은 마이클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이클은 어찌나 놀랐는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 그리 겁먹지 않아도 된다. 가문과 관련된 일의 실패에 대해 내 단호하기는 하지만 그 상대가 남다르니 충분히 이해된다.
“모두 보신 거세요?”
- 그래.
굳이 어떻게 봤는지는 묻지 않았다.
시후와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그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제니는 알지 못했다.
감히 자신의 잣대로 파악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이들.
순간 제니는 한 가지 방책이 떠올랐다.
“가주님, 오늘 시후 오빠를 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 뭐지?
“그를 적대시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 무슨 뜻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제니는 아버지의 질문에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것 같았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담아 이야기했다.
- 샐러맨더 님이 겁에 질렸다는 말이냐?
“네. 처음에는 엄청나게 반기셨는데, 시후 오빠가 살기를 피워내자 겁을 먹으셨어요.”
- 으흠… 정령이 겁을 먹었다.
제니의 아버지는 제니가 한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제니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버지가 저런 모습을 보일 때면 무언가 사건이 반드시 터졌다.
그리고 제니는 지금 그 사건에 일부러 아버지를 밀어 넣고 있었다.
시후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며 아버지가 시후에게 호감을 갖게 했다.
샐러맨더와의 일을 이야기할 때는 최대한 현실감 있게 설명했다.
그 결과 제니가 던진 미끼를 아버지가 물었다.
- 내가 직접 강시후 군을 만나볼 수 있을까?
“네?! 아버님께서 직접이요?”
제니는 능청스럽게 놀란 척을 했다.
제니의 계획은 이랬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버지는 다 알고 있었다.
아마도 마나를 통해 경호원과 동조하여 지켜봤을 거였다.
선내에서 벌어졌던 일들 역시 모두 말이다.
자신과 마이클은 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었지만 아버지는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 샐러맨더가 시후에게 붙잡혀 있는 것도 알 것이고 시후가 자신들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 거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들에게 어찌해 보라는 명령이 없다.
그것은 이런 역경쯤은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시후는 그저 그런 역경 대상이 아니었다.
시후에게 무슨 수를 쓰는 순간 그는 자신들을 적이라 여길 수 있었다.
적어도 제니는 아니지만, 제니가 속한 케네디 가문에는 절대 호의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케네디 가문이 계획하는 일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럴 때는 시후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아버지가 나서주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마이클과 자신은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할 테지만 케네디 가문의 가주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제니는 시후를 만나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일정을 고민해봤다.
비자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버지가 원한다면 그런 문제쯤이야 가볍게 해결된다.
제니는 그렇게 아버지가 시후를 만나고 싶어 그를 미국으로 부르게 되면, 샐러맨더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가주님, 그럼 언제….”
- 지금이 가장 낫겠구나.
“아…! 그럼 전용 비행기로….”
- 아니. Safety World에서 만나기로 하자.
“…네?!”
갑자기 Safety World에서 시후를 만나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제니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제니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라는 작자는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초면도 아니니 이야기 정도는 그곳에서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아… 네, 그렇죠. 그러면 저도 같이 들어갈게요.”
- 그러려무나. 그럼 접속하고 연락하거라.
“네.”
제니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자신도 접속하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시후와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아야 했다.
그렇게 통화를 종료한 제니는 서둘러 시후를 찾았다.
시후는 여전히 크루즈 안에 있었다.
제니가 다가오자 시후는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허락은 받았어?”
“그게….”
시후가 샐러맨더와 함께 며칠 한국에 있으라고 했을 때 제니는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시후는 그런 제니의 입장을 백분 이해하기에 다녀오라고 하고는 샐러맨더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왕 샐러맨더를 교육하기로 했으니 시간 들일 거 없이 바로 시작했다.
제니가 통화를 위해 비운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
제니는 그사이 확연하게 달라진 샐러맨더의 행동에 당황스러웠다.
“샐러맨더 님…, 안 불편하세요?”
[괜찮다. 이렇게 해야 멋쟁이가 된다고 했다.]
“네? 멋쟁이가 되는 거랑 정좌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이것이 ‘예의’라고 했다.]
“아….”
제니는 샐러맨더의 말에 시후를 봤다.
잠깐 사이에 시후가 무엇을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처음 살기를 띤 표정으로 샐러맨더를 교육한다고 했을 때는 무슨 심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시후는 샐러맨더를 살살 구슬려 ‘예의’를 가르치는 거였다.
제니가 안도하는 표정을 보이자 시후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제니가 오빠를 너무 띄엄띄엄 봤구나?”
“죄송해요. 아까는 오빠가 너무 무서워서 샐러맨더 님에게 당연히 험한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어요.”
[아니다. 시후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옛날에도 그랬다.]
제니의 말에 샐러맨더가 나서서 시후를 변호했다.
제니는 낯선 샐러맨더의 모습에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상황일 줄 알았으면 괜히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후는 한순간에 제니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야기가 잘 안되었나 봐?”
“그게… 아버지께서 오빠를 만나고 싶어 하세요.”
“나중에 미국에 가면 안 만날 생각이었나?”
“아니요. 지금 당장이요.”
“지금? 뭐, 영통이라도 하자는 거야?”
“아니요. Safety World에서 만나기를 바라세요.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시대요.”
시후는 제니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애들을 며칠만 더 머물게 하겠다는데 일을 점점 키우는 제니의 아버지가 이상했다.
그렇다고 마냥 거부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거부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제니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일이 어쩌다가…. 아, 너 때문이구나.”
딱-
시후는 샐러맨더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야! 아프다.]
“아프라고 때린 거다. 너 한 번만 더 급발진하면 더 세게 때려줄 거야.”
[우씨….]
샐러맨더는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으며 양 볼을 부풀렸다.
심기가 불편한 것을 그렇게나마 표현하는 거였다.
시후는 어쩌다가 일이 꼬였는지 생각하다가 자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샐러맨더와 눈이 마주쳤다.
이 녀석이 발끈해서 조민을 공격만 하지 않았어도 그냥 나중을 기약하고 오늘 제니와 헤어졌을 것이다.
번거롭게 일을 키운 원인이 샐러맨더에게 있다는 생각에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좋아, 만나자.”
“정말이요?”
“그래. Safety World에 접속하기 아주 좋은 곳을 알고 있으니 그리로 가자.”
“네.”
그렇게 Safety World 접속을 위해 시후가 제니 일행을 끌고 간 곳은 S.W SOFT였다.
시후가 익숙한 걸음으로 1층 로비에 들어서자 때마침 퇴근하던 박초연이 다가왔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세요?”
“잠깐 캡슐방 좀 사용하려고.”
“네…. 그런데 뒤에 있는 분들은 누구?”
시후가 Safety World 접속하고자 이곳을 찾은 게 한두 번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시후가 움직이자 그 뒤를 따라 움직이는 외국인 무리에 박초연은 시후에게 물었다.
시후는 대답 대신에 마이클에게 곁눈질했다.
그러자 마이클이 박초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Hello. My name is Michael Kennedy.”
“…What?!!”
마이클의 이름을 들은 박초연은 깜짝 놀랐다.
시후는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마이클에게 박초연을 맡기고는 3층 캡슐방으로 향했다.
평소 사용하던 캡슐을 열고 들어간 시후는 옆 캡슐에 들어가는 제니를 봤다.
“너도 들어가려고?”
“네. 아무래도 걱정이 좀 돼서요.”
“뭐, 너로서는 그럴 수 있겠다. 그럼, 블칸 영주성에서 볼까?”
“네. 거기서 봬요.”
시후는 제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캡슐을 닫았다.
그리고 로그인 장소를 블칸 영주성으로 지정했다.
일전에 가본 적이 있기에 소정의 골드를 내자 블칸 영주성에서 로그인할 수 있었다.
“오, 그때 부순 건 다 고쳤네?”
마지막으로 봤던 허름한 블칸 영주성은 깔끔하게 고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달라진 것은 외관뿐만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요.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는 고용인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시후를 안내하기 위해 마중을 나온 이들이 있을 정도로 여러 고용인이 보였다.
그렇게 고용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영주의 집무실이었다.
“영주님. 천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블칸 영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고용인은 문을 열어주었다.
시후가 안으로 들어가자 블칸 영주가 활짝 웃으며 한걸음에 다가왔다.
“하, 하하. 오랜만입니다.”
블칸 영주는 시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시후는 그런 블칸 영주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마주 잡지는 않았다.
대신 블칸 영주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자는 NPC인가 유저인가?”
그 말에 블칸 영주는 흠칫하더니 얼굴에 짓고 있던 웃음을 싹 지웠다.
그러고는 시후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을 마주 봤다.
둘이 그런 모습에 애가 타는 것은 옆에 있는 제니였다.
제니는 예의 블칸 영주의 영애의 모습이었다.
만약 시후 앞에 있는 이가 다른 이였다면 나서서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려 했겠지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아버지였다.
제니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긴장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상황을 걱정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블칸 영주였다.
블칸 영주는 다시 한번 시후 앞에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제니 아버지인 리암 케네디입니다.”
“반갑습니다.”
시후는 ‘블칸’이란 이름이 아닌 현실에서의 이름을 말한 리암 케네디에 손을 반갑게 마주 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