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시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왜 성화신녀와 같은 기운이….’
제니가 처음 ‘safe zone’이라는 마법을 펼쳤을 때 비슷하다고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은 너무나도 닮았다, 아니 성화신녀 그 자체였다.
허공에 흩날리던 기운이 응집되어 형체를 이루고 자아를 찾아갔다.
자아를 찾은 그것은 숙주에게서 끝없이 힘을 탐했다.
그 힘으로 자신을 뽐내려는 듯 치장까지 했다.
30cm 정도 되는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얼굴에 반을 차지할 정도의 큰 눈과 오뚝한 콧대를 가진 녀석은 이것 보라는 듯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에헴, 드디어 이 몸 등장.]
“말을 해?!”
시후는 진심으로 놀랐다.
천 년 전 성화당을 찾을 때면 언제나 저렇게 생긴 녀석이 제일 먼저 반겨왔었다.
녀석은 마치 사람처럼 행동하며 성화신녀가 있는 곳까지 안내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말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그 녀석과 똑같이 닮은 이 녀석은 말을 했다.
“말이라기보다는 텔레파시에 가까워요.”
제니가 자기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맞아, 텔레파시야. 내가 그 정도야. 에헴.]
녀석은 제니의 말에 호응하며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시후는 녀석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러자 녀석도 시후에게 몸을 돌려 마주 봤다.
“호….”
[으흠….]
“오….”
[흐음….]
둘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를 살폈다.
한참을 그러던 중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시후였다.
“너, 나 모르냐?”
[응? 내가 널 어찌 아냐?]
“정말 몰라?”
[이상한 녀석이네?]
시후는 녀석이 자신을 못 알아보자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잘 봐. 정말 모르는지.”
시후는 오른손을 들어 옆으로 뻗었다.
워낙 큰 선내인 데다 중앙에 테이블 하나 딸랑 있는 상황이었기에 주변은 상당히 휑했다.
그런 곳에 시후가 천마지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휑했던 곳을 검은색 불꽃이 가득 채웠다.
“무, 무슨!”
갑자기 치솟은 불꽃에 깜짝 놀란 마이클이 제니의 손을 붙잡았다.
불길로부터 제니를 보호하려는 거였다.
그런데 제니가 그런 마이클의 손을 살며시 밀어내며 고개를 까딱여 불길을 가리켰다.
“흥분하지 말고 다시 잘 봐봐요.”
다시 보라는 제니의 말에 마이클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 유일하게 자기만 호들갑이었다.
불길을 일으킨 시후는 그렇다 치지만 곁에 있는 조민이나 제니, 하다못해 제니가 불러낸 녀석까지.
다들 저 불길이 자신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 듯 태연했다.
“크, 크흠….”
마이클은 멋쩍은 듯이 목을 풀더니 제니의 손을 슬쩍 놓았다.
[마이클은 여전히 동생 바보구나.]
그 모습에 테이블 위에 녀석이 혀를 차며 놀렸다.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잘 봐.”
[봤어. 검은 불꽃이라…. 신기하기는 하지만 몰라.]
“음… 그럼, 이건?”
화악-
시후는 천마지기로 만든 불꽃에 변형을 주었다.
천 년 전 천마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천마뢰음보(天魔雷音).
300장 밖에 있는 이에게도 우레와 같은 소리를 들려주는 경신술이었다.
어떤 난전이 있다 해도 천마뢰음보의 소리가 울려 퍼질 때면 적은 전의를 상실했고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런 천마뢰음보에 버금가는 천마의 등장을 알리는 다른 하나가 바로 이것.
“화마장(火魔掌).”
불길로 만든 마귀의 형상이 선내를 가득 메꿨다.
천 년 전 천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까불대는 녀석이 있으면 보여주던 무공이었다.
천마지기를 일으켜 만든 화마장은 그 이름에 걸맞게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이 저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후는 이 화마장을 성화당에서 펼진 적이 있었다.
인간은 아니지만, 자아를 가진 녀석들을 골탕 먹이려고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성화당을 찾을 때면 녀석들은 언제나 천마를 무시했었다.
자기들이 인간보다 잘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말을 하지 않아도 느껴졌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던 천마는 성화당을 찾은 여느 날 예의 마중을 나온 녀석에게 화마장을 보여줬었다.
‘그때 자지러지는 모습이 아주 볼만했지.’
어찌나 놀랐는지 두 손을 번쩍 들고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던 녀석이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어? 어?! 어어어?!!!]
녀석은 화마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고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시후는 그 모습에 성화당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래. 이제 기억이… 커헉!”
퍽-
시후는 이제 기억이 났냐며 말하려는 찰나 두 손을 들고 있던 녀석이 그 자세 그대로 가슴팍으로 날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고 녀석의 돌진을 막으려고 힘을 쓰면 자칫 화마장의 기운을 쓸 것 같아 그대로 녀석을 받았다.
덕분에 시후는 오랜만에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을 느꼈다.
[오랜만이다! 반갑다!]
녀석은 시후가 기침을 토하거나 말거나 그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반가움을 토할 뿐이었다.
시후는 드디어 자신을 기억한 녀석이 기특했다.
‘나야 한순간에 천 년의 세월을 넘어왔지만 녀석은 말 그대로 천 년의 시간을 보냈을 텐데.’
녀석이 사람의 범주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귀신이든 신이든, 그 무엇이든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품에서 옷깃을 붙잡고 반가움을 토하는 녀석이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후는 녀석의 기억을 돕기 위해 펼쳤던 화마장을 거두고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정해라. 그러다가 울기라도 하겠다.”
[그러고 싶은 거 꾹 참고 있는 거다. 그러니 넌 그냥 내 머리나 쓰다듬어라.]
“그래. 알았다.”
그렇게 서로를 반가워하는 둘의 대화에 나머지 일행은 당황스러웠다.
특히, 제니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돌처럼 굳었다.
“왜… 내 정령 샐러맨더 님이….”
제니는 지금까지 샐러맨더의 저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인간을 깔보던 게 샐러맨더였다.
그나마 제니는 정령의 계약자이기에 대우를 해줬지. 옆에 있는 마이클과는 대화조차 하기 싫어했다.
마이클 역시 제니와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한편, 조민은 그들과는 다르게 놀라는 중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제니에게 충고했었다.
시후가 가진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하며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동안 시후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직접 목격한 조민조차 지금 상황에는 할 말을 잃었다.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고, 제니가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면 시후의 품에 안겨있는 저것은 ‘정령’이 확실했다.
그런데 왜 그 정령이 시후를 저렇게 반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후의 태도로 보아 그 역시 저 정령과 구면인 것 같았다.
조민은 제니에게 했던 충고를 잊은 채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시후에게 물었다.
“오빠? 그거…?”
“샐러맨더라잖아.”
조민의 말에 샐러맨더가 움찔하자 시후가 재빠르게 이름을 말해줬다.
“아, 샐러맨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샐러맨더 정체가 뭐예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그럼 누구한테 물어요?”
“제니가 계약자라잖아.”
조민은 시후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자기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뻔히 알면서 시후가 대답을 회피하는 거였다.
무엇보다 대답을 미룬 대상이 제니라는 것에 시후의 의도가 명백히 느껴졌다.
판도가 기운 협상이었지만 쐐기를 박으려는 의도였다.
조민은 이를 악물며 시후의 의도대로 제니에게 다시 물었다.
“좀 자세하게 설명해줄래?”
“네.”
제니는 설명을 바라는 조민에게 친절하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샐러맨더는 불의 정령이에요. 그리고 저는 그의 계약자이고요.”
“계약자? 그럼, 네가 정령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말이야?”
“맞아요. 저희는 그런 사람을 ‘정령사’라고 불러요.”
“정령사라… 그럼 마이클도?”
“아니요. 오빠와 저는 확실히 달라요. 제 마나 특성이 정령과의 친화력이 높았기에 그렇게 되었어요.”
“그랬구나. 그럼, 왜 샐러맨더가 오빠한테 저러는 거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부분은 제니 역시 궁금했다.
“시후 오빠, 어떻게 샐러맨더를 아세요?”
제니는 시후에게 곧장 물었다.
덕분에 셋의 시선은 시후에게로 향했다.
뭐가 되었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거였다.
하지만 시후는 그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해줄 수는 없었다.
‘천 년 전에 만났다고 어떻게 말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 미친놈이라고 볼 게 뻔했다.
반로환동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천 년의 세월을 지낼 수는 없었다.
혹시나 그들이 믿어도 문제였다.
지금까지야 그저 막연하게 반로환동한 고수로 생각했을 텐데 ‘천 년’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였다.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시후는 답을 바라는 셋의 눈빛을 슬쩍 피했다.
“과거에 마주친 적이 있어서 알게 되었어.”
“과거…요?”
셋은 시후의 어중간한 대답에 찝찝했다.
“오빠! 좀 제대로 대답해줘요!”
결국, 참지 못한 조민이 버럭 소리쳤다.
그런다고 해서 가르쳐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시후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샐러맨더가 나섰다.
[넌 누군데 그렇게 예의가 없냐?]
“…….”
대뜸 자신을 탓하는 샐러맨더에 조민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그러자 샐러맨더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민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왜 대답 못 하냐? 그냥 죽을 거냐?]
화악-
순식간에 샐러맨더의 손에서 화염이 일어났다.
샐러맨더는 그 화염을 손가락 끝에 모았다.
표적은 조민의 미간.
마치 레이저 포인트로 조준을 하듯 조민의 미간에 작은 점이 나타났기에 모두 알아챘다.
“자, 잠깐만요!”
펑-
깜짝 놀란 제니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가 묻힐 정도로 엄청난 폭파음이 들렸다.
제니는 순식간에 몸에서 빠져나간 마나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조민의 머리에 구멍이 뚫린 끔찍한 장면을 볼 수 없어서였다.
근데 그보다 더 끔찍할 정도로 등골이 오싹한 시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미쳤냐?”
[어…?!]
당황하는 샐러맨더의 목소리까지 들은 제니가 눈을 떴다.
일단 머리에 구멍이 뚫려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조민은 살아 있었다.
너무 놀랐는지 혼이 반쯤 빠져나간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안도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샐러맨더가 시후에게 머리카락이 붙잡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샐러맨더는 머리카락이 붙잡힌 수모보다는 자신을 노려보는 시후의 살기 어린 눈빛에 당황했다.
시후는 샐러맨더를 노려보다 문득 손바닥에 느껴지는 통증에 샐러맨더의 머리카락을 잡은 손이 아닌 다른 손을 봤다.
“아프네….”
그 손은 조민의 얼굴 바로 앞에 있었다.
샐러맨더가 조민의 이마를 조준하고 공격을 하는 찰나 시후가 손을 뻗어 막은 거였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샐러맨더의 엄청난 기운에 시후는 천마지기까지 펼쳐 손에 강기를 둘렀다.
그런데도 불에 덴 듯 상처가 남았다.
시후는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조민이 죽을 뻔했던 상황에 화가 치솟았다.
다시 샐러맨더에게 시선을 돌린 시후.
과거의 인연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목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히익!]
그 살기에 샐러맨더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시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샐러맨더가 택한 방법이라고는.
[계약자야! 나 좀 살려줘라!]
제니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였다.
샐러맨더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제니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제니라고 별수 없었다.
지금 시후가 보이는 표정은 제니가 한 번도 본 적도, 상상도 해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시후는 제니를 간절하게 찾는 샐러맨더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마디만 더 하면….”
[읍!]
굳이 뒷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샐러맨더 역시 뒷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시후는 조용해진 샐러맨더와 그런 녀석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제니와 마이클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과거, 천 년 전에 녀석이 성화신녀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려봤다.
“그래. 네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았다.”
[…….]
“넌 당분간 나랑 함께하자.”
[왜?]
“쟤들은 너무 착해.”
[그게 무슨 말이냐?]
“너 같은 녀석의 교육은 제니같이 착한 아이보다는 내가 딱이라는 소리지.”
[그 말은….]
당황하는 샐러맨더의 머리채를 슬쩍 놓아준 시후는 제니를 봤다.
“너희 여기에 며칠만 더 있다가 가라.”
“예?!”
“이 녀석 정신 교육 좀 하게. 며칠만 머물다가 가라고.”
그렇게 제니와 마이클은 뜻하지 않게 한국에 며칠 더 머물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