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도련님.”
“왜?”
“제가 정말. 진심으로 여쭤보는 건데요.”
“말해.”
“왜 제가 여기에 있는 겁니까?”
“…….”
진지춘의 질문에 시후는 눈을 흘겼다.
“그 질문만 벌써 3번째인 거 아냐?”
“알죠. 아는데 좀처럼 이해할 수 없으니 이렇게 또 질문드리는 거죠.”
“알면 그냥 받아들여.”
“이게 그냥 받아들일 일입니까? 제가 그래도 약선방 장로인데. 고등학교 보건 교사라니요?!”
진지춘은 입고 있는 흰색 가운을 이거 보라며 쭉 끌어당겼다.
가운 왼쪽 가슴에는 당당하게 ‘보건 교사 진지춘’이라고 적혀 있었다.
거기에 학교에서는 정갈해야 한다며 진지춘은 어울리지 않게 2 대 8 가르마를 탔다.
“풉!”
그 모습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련님!”
“아, 미안. 그럼 어쩌냐. 이렇게 해야 내가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는데.”
“끙….”
진지춘은 속으로 앓았다.
얼마 전 시후는 개학을 맞아 진지춘에게 한 가지 일을 시켰다.
자신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보건 교사로 오라는 거였다.
진지춘 한 명을 고등학교 보건 교사로 꽂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럴 때는 당가의 위세가 좋군.’
한국대를 장학하고 꾸준히 교수를 양성한 당가의 입김은 시후의 생각보다 좋았다.
당성치에게 보건 교사 일을 말하니 바로 다음 날 일 처리가 마무리될 정도로 말이다.
중국 약선방의 장로라는 진지춘의 직함 또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기존에 있던 보건 교사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견임으로 들어왔다.
특히, 한창 뛰어노는 아이들에게 자주 발생하는 염좌에 침만 한 것이 없어 학교 이사진은 진지춘을 쌍수 들고 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후가 진지춘을 보건실에 꽂은 이유는 하나였다.
“모범생의 모습으로 학교에 다니려면 보건 교사님의 처방이 필수잖아.”
“그래서 이렇게 시간만 나시면 오시는 겁니까?”
진지춘의 말에 시후는 어깨를 으쓱였다.
진지춘이 필요한 이유.
정당하게 체육 시간을 빠지기 위해서였다.
“내가 대충해도 체육 교사 눈에는 메달리스트로 보일 텐데. 그럼 귀찮아져.”
“그거야 조절하시면 되잖습니까.”
“아직은 무리야.”
시후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거였다.
무공을 익힌 몸. 그것도 초절정을 넘어 완연한 화경의 경지에 있는 시후였다.
천마지체라는 특별함 때문에 현경의 고수와도 겨룰 수 있었지만, 현재 경지는 화경이었다.
무공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힘이 거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도리어 힘을 죽이고 일반인과 다르지 않게 보이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내공이 일 갑자에 못 미치는 이들의 경우 그저 힘 좀 쓰는 일반인으로 여겨질 거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경지에 들어서면 무림인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도록 공부를 한다.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살림살이가 남아나지 않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거나 실수로라도 다른 이를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시후 역시 천마 시절에 그 공부를 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시후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일 수 있었다.
태산과 인호에게 역시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가르쳤다.
그랬기에 무공을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보였다.
하지만 체육 활동과 같이 몸을 쓰는 활동을 하게 되면 그 조절이 어려워졌다.
조절하고 조심한다고 해도 아차 싶은 순간 실력이 나오는 거였다.
그렇게 되면 남들 눈에는 초인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이 역시 천마 시절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적어도 완연한 현경의 경지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건 불가능해.’
현경의 초입도 아닌 완연한 현경의 경지.
그 경지에만 다다르면 100만분의 1에 확률도 없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저 녀석들도 함께 오신 거고요?”
진지춘은 시후가 누워 있는 침대 양옆에 마찬가지로 누워 있는 태산과 인호를 가리켰다.
“헤, 헤헤. 의선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태산과 인호가 고개를 꾸벅이며 멋쩍게 인사했다.
진지춘은 그런 둘을 보며 대충 손을 흔들었다.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이 모든 게 주인을 잘못 만난 내 죄지.”
진지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누가 들어도 시후를 탓하는 소리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시후가 발끈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런 진지춘에게 은은한 미소로 화답했다.
“뭐, 뭡니까? 그 미소는?”
“뭐, 덕분에 돌팔이도 심심하지는 않잖아?”
“심심하지 않다니요? 어차피 도련님 오셔봐야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가시잖아요!”
진지춘이 시후의 말에 되레 발끈했다.
자신이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부려 먹느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지춘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시후가 이렇게 보건실을 찾는 것이 체육 시간에 일어날 분란을 미리 방지하기 위함 있었지만 수련을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시후는 이번에 오른 천마지체 삼 단계를 양호실 침대에 누워 수련 중이었다.
다른 이들이라면 심상의 세계에 들어가 해야 하는 수련이었지만 시후는 천마분심공을 통해 해결했다.
다만, 일전에 운기행공을 천마분심공으로 꾸준히 하는 것과 다른 것은 지금처럼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였다.
일상적으로 대화를 하거나 수업을 듣는 것처럼 부동적인 자세에서 하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몸을 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일을 하면서는 천마분심공이라 할지라도 천마지체 삼 단계를 수련할 수 없었다.
시후는 진지춘에게 이런 자세한 설명을 해주려다가 입을 닫았다.
“생각해 보니 너도 지금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 거 아니었나?”
“제가요?!”
“그래. 쟤 때문에.”
“크, 크흠.”
시후가 고개를 까딱여 구석에 놓인 침대를 가리켰다.
진지춘은 헛기침을 하며 그쪽을 힐끗거렸다.
그 침대에는 진지춘과 마찬가지로 흰색 가운을 입은 이가 누워 있었다.
“김소미 선생님께서는 자는 모습도 참으로 아름다우셔. 그렇지?”
시후는 더욱더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진지춘이 받아치지를 못했다.
평소라면 발끈하거나 더욱 능글맞은 말로 대처를 하였을 터인데 지금은 어째서인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이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어떻게 두 번 띠동갑인 여성에게 반하지?’
시후의 짓궂은 농담에도 진지춘이 받아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투덜대며 보건 교사로 보건실을 찾은 날. 진지춘은 보건 교사 김소미에게 반했다.
160cm가 되지 않는 작은 키에 얼굴의 반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안경을 쓴 김소미.
한눈에 반할 만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진지춘 역시 김소미를 처음 본 순간. 속으로 시후에게 육두문자를 남발했다.
하지만 서로의 소개가 오간 후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진지춘은 어느새 김소미에게 빠져 있었다.
평소 방정맞은 모습에 가려 있지만 진지춘만큼 의학에 조예가 깊은 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지춘은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랄 정도로 의학 지식의 수준이 높았다.
그랬기에 자신과 말이 통하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이라고는 약선방 방주인 송하룡뿐이었다.
그런 진지춘에게 김소미는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여성’이었다.
그래서일까. 진지춘은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게 김소미를 대했다.
“크흠, 김소미 선생 문제도 그렇습니다. 저렇게 매번 수혈을 짚어 재워버리면 몸에 무리가 오는 거 아닙니까?”
시후의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진지춘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시후는 화를 내지 않았다.
“왜? 내 실력이 미덥지 않아?”
“도련님 실력이야, 감히 따라갈 자가 없다는 거 압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라는 게….”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다음부터는 너도 저 옆에 재워줄까?”
“헙! 무, 무슨 그런 낯 뜨거운 말씀을!”
진지춘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돌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저 자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만해야겠다.’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후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연세가 지긋한 중년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라니. 꿈에서라도 다시 볼까 두려웠다.
“됐고, 다음 체육 시간은 무슨 핑계로 빠질지나 잘 생각해놔.”
시후는 그 말을 끝으로 지풍을 날려 김소미의 수혈을 풀어주었다.
“으흠….”
김소미가 옅은 신음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시후와 태산과 인호는 김소미가 완전히 잠이 깰 때까지 기다려줬다.
“보건 쌤. 저희 이만 가볼게요.”
“어? 벌써?”
“벌써라니요, 체육 수업이 끝난 지가 언젠데요.”
“어머? 어느새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갔네? 어떻게 된 게 요즘 시후 너만 오면 잠이 쏟아져 큰일이네.”
“샘이 많이 피곤하셨나 보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시후는 진지춘에게 살짝 곁눈질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김소미에게 알아서 둘러두라는 뜻이었다.
진지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 보건실을 나온 셋은 서둘러 교실로 돌아갔다.
다행히 아직 다음 과목 선생님은 오지 않았다.
셋이 자리에 앉자 교실 앞문이 열리며 시후네 반 담임이 들어왔다.
“뭐냐? 지금 담임 쌤 수업 시간 아니잖아?”
“그러게? 무슨 일 있나?”
태산과 인호는 갑작스러운 담임의 등장에 의문을 가졌다.
시후는 담임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딱히 상관은 없었다.
부모님을 위해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시후는 이미 고등학교 교과목을 모두 머릿속에 넣은 상태였다.
지금 수능을 치러도 시후는 한국대에 입학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교실 밖에서 담임이 호명하기만을 기다리는 녀석은 신경 쓰였다.
“자자, 주목.”
담임이 교탁을 두드리자 수군거리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오늘은 너희들에게 특별한 친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들어와라.”
담임의 호명에 밖에서 기다리던 이가 앞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태산과 인호는 두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쟤가 왜 여기서 나와?”
“시후야? 쟤 뭐냐?”
“그러게 말이다….”
태산과 인호가 당황스러워 시후에게 물어봤지만 모르기는 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이, 거기 3인방. 조용.”
담임의 호통에 셋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담임의 호명에 교실로 들어온 이가 씨익 웃었다.
“너는 자기 소개하거라.”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제갈조민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한다는 조민의 말에 다들 손뼉을 쳤다.
“그만. 그리고 어차피 알게 되겠지만 조민은 너희들보다 한 살 어리다.”
“네?!”
“외국에서 이미 대학 과정을 수료한 아이여서 고등학교 들어오면서 한 학년 월반을 하게 되었다. 그리 알고 잘 대해 주길 바란다.”
“와….”
담임의 설명에 다들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시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까지 일언반구 없던 녀석이 갑자기 월반이라니. 그것도 자신이 있는 반으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교실 밖으로 끌어내서 연유를 묻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서 더 튀었다가는 담임의 특별 관리 대상으로 낙인이 찍힐 거였고 그렇게 되면 두고두고 귀찮아질 게 뻔했다.
“조민은 저기 창가 쪽 빈자리에 가서 앉거라.”
창가 쪽 빈자리는 바로 시후 옆자리였다.
조민은 담임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총총 걸어와 시후 옆자리에 앉았다.
시후는 그런 조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는 전음을 보냈다.
- 무슨 짓이지?
시후의 질문에 조민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어 건넸다.
한쪽 눈을 찡그리는 윙크까지 하면서 말이다.
‘악의는 없어 보이는데 이 녀석 무슨 생각인 거야?’
시후는 좀처럼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조민의 행동에 일단 노트를 펴봤다.
“응?”
그리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읽은 시후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