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유니크 등급의 월영검.
투산이 만들어준 그 검은 검신의 반대편이 투영되어 보일 정도로 얇은 검으로 평소에는 허리띠로 사용하다가 내공을 불어 넣으면 이렇게 한 자루의 검이 된다.
[월영검]
[등급 : 유니크]
[민첩 : +10%]
[기민함 : +10%]
[절삭력 : +10%]
[패시브 스킬 1 : 레벨 사용 제한 없음.]
[패시브 스킬 2 : 사용자의 레벨에 따라 파괴력 증가.]
[스킬 1 : 달 베기 - 눈에 보이지만 거리가 짐작되지 않는 달을 벤다, 원거리 공격 가능.]
[스킬 2 : 혼 베기 - 체력 5% 미만 대상에게 적중 시 발동, 혼을 구속한다.]
유니크 등급에 맞는 엄청난 옵션을 가진 아이템이다.
하지만 시후는 평소 검술보다는 박투를 즐겼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월영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시후가 전투 상황도 아닌데 월영검을 휘둘렀다.
그것도 천마기사-공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엘프, 아니 엘프였던 괴물들에게 말이다.
촤라락-
월영검에서 뿜어져 나간 검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맬리아를 포함한 괴물들의 목을 갈랐다.
다들 목을 잃은 몸뚱어리를 볼 거라는 생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시후가 월영검을 거두었음에도 그들의 목은 여전히 몸에 붙어 있었다.
띠링-
[혼 베기 적중.]
[체력 5% 미만인 대상에게 적중하였기에 대상의 혼을 구속합니다.]
[구속한 혼의 개수 : 12개]
시후는 눈앞에 나타난 알림창을 확인하고는 월영검을 허리띠로 돌려보냈다.
“음, 생각대로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시후와는 달리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지춘이 다가왔다.
“도련님? 지금 뭐하신 겁니까?”
“말했잖아. 쟤들 내가 거둘 거라고.”
“아니, 거두신다더니 검을 휘두르시기에 저는 죽인다는 말씀인 줄 알았죠.”
진지춘의 말에 옆에 있던 아폴론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시후는 그런 둘에게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쯧쯧쯧, 아둔한 녀석들. 쟤네처럼 그놈들과 밀접한 관계의 녀석들을 그냥 죽여?”
“그럼요?”
“잘 써먹어야지.”
“어떻게요?”
시후는 검지를 들어 아폴론을 가리켰다.
“올림포스 신들에게 한 명씩 붙여줘야지.”
“아….”
진지춘은 드디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데 저 모습으로 되겠습니까?”
시후가 거둔다던 12명의 엘프는 여전히 괴물의 모습이었다.
다만 조금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으르렁거리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신을 차린 듯 상황을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시후는 엘프들의 몸을 구속했던 천마기사를 풀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리 와.”
타다닥-
시후의 부름에 혼이 구속된 12명이 후다닥 달려왔다.
자신들의 의지로 달려온 게 아니라는 것은 맬리아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시후는 녀석들을 한번 스윽 훑더니 인벤토리를 열어 무언가를 꺼냈다.
“스킬북이다.”
“이걸 왜…?”
“익혀.”
12명에게 골고루 스킬북을 나누어준 뒤 익히라고 명령했다.
시후의 명령에 녀석들은 주저 없이 스킬북을 사용했다.
한차례 옅은 빛이 그들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녀석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익혔으면 어서 해봐.”
“이,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녀석들은 시후의 명령에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괴물의 몸이 뒤틀리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거대했던 체격이 작아지고 길어졌던 머리도 줄어들어, 괴물이 되기 전 본래 미남 미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진지춘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시후를 다그쳤다.
“도련님! 저거 뭡니까?!”
“보면 모르냐? 변용술 스킬북이잖냐.”
“헐!”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시후와는 다르게 진지춘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시후가 스킬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괴물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용술 스킬북이라니.
그런 스킬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후가 저들에게 준 것은 그저 그런 변용술이 아니었다.
무려 천투의 무공, 천투변용술이었다.
본래는 비천대와 동료들에게 하나씩 주려던 스킬북이었는데 지금은 저들에게 더 필요해 보였다.
“자아도 되찾았겠다 모습도 그 정도면 되었고. 이제 너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감사합니다!”
시후의 질문에 엘프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후가 그들의 자아를 찾아준 것은 모두가 알았다.
거기에 생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스킬북도 주었다.
비록 마나가 허락하는 시간에 한해서지만 ‘업’을 통해 변할 수 있던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덕분에 12명의 엘프는 이제 몸과 마음을 바쳐 시후를 따르기로 했다.
사실 기적처럼 보인 지금의 모습은 모두 시후가 계산한 거였다.
명계의 주민이니 업이니, 그래서 괴물이 되네 마네 등의 말이 오갈 때부터 시후는 월영검과 천투변용술 스킬북을 떠올렸다.
명계의 주민이라는 말은 명계에 혼이 구속되어 있다는 것.
시후는 월영검의 옵션으로 그들의 혼을 자신에게 구속했다.
덕분에 상실했던 이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엘프들이 자신의 외모에 큰 자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얻기 힘든 ‘업’을 통해 고작 한다는 것이 모습을 가꾸는 거라니.
시후는 그들의 소망을 천투변용술로 이루어주었다.
이 두 가지를 이루어준 덕분에 엘프들의 눈에는 시후가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해 보였다.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우러러볼 정도로 말이지.’
시후는 녀석들을 포함한 엘프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잠시 즐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후는 12명의 엘프를 불렀다.
“너희는 각자 올림포스 신들과 함께 내가 지시한 일을 처리해.”
“네! 맡겨만 주십시오!”
“좋아. 믿어 보겠어.”
시후는 그렇게 엘프들에게 믿기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고는 로그아웃했다.
덕분에 홀로 남은 진지춘만 아폴론에게 시달렸다.
“도대체 천마님의 능력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하, 하하…. 그게 저도 잘….”
사실이었다. 진지춘 역시 시후가 최선을 다해 싸운 모습을 보지 못했었다.
그나마 힘을 썼다 싶은 게 혈천마라강시와 싸울 때였는데 그때와는 또 달라진 시후의 강함을 느꼈다.
“그럼, 도대체 천마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목표요?”
“이루고자 하시는 게 있으실 거 아닌가? 그걸 알아야 우리도 입장을 정하지.”
“음….”
아폴론이 말하는 우리는 올림포스 신들을 말하는 거였다.
진지춘은 또 이렇게 올림포스 신들까지 시후의 수하가 되는가 싶어 소름이 끼쳤다.
그렇다고 아폴론의 질문에 대답해줄 수는 없었다.
진지춘 역시 시후가 이루고자 하는 것인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니 말이다.
대신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말이죠?”
“어서 말해보게!”
진지춘이 사뭇 진지한 표정에 아폴론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런 아폴론에게 진지춘은 바짝 다가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일단 시키신 일이나 잘 마무리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그렇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하실 겁니다.”
“뭐?”
“그럼, 저도 이만.”
진지춘은 얼떨떨한 표정의 아폴론을 그렇게 뒤로하고 로그아웃했다.
고글을 벗고 캡슐에서 나온 진지춘은 시후를 찾았다.
“도련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진지춘 역시 아폴론과 같은 것이 궁금했다.
지금까지는 시후의 강함에 이끌려 막연하게 따랐지만, 앞으로는 달라져야 했다.
약선방이 중국 정계 진출을 노릴 정도로 커진 판에 시후의 의중을 듣고 싶었다.
“도련님의 목표를 알고 싶습니다.”
“목표?”
“네. 도련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전부 알고 싶습니다.”
진지춘의 질문에 시후는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녀석은 아니었군.’
진지춘이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녀석이 아니라는 생각에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녀석에게는 말해주기로 했다.
천 년 전 천마 시절에도 그렇고 지금 강시후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
자유였다.
그 어느 것에도 제한받지 않을 자유를 갖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 어떤 외압에도 견딜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힘이 강해질수록 따르는 이들은 많아졌고 지켜야 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그 속에서도 자유를 갈망했기에 다른 이들이 봤을 때는 천방지축으로 보였을 거였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천 년 전 친우들의 배신은 천년의 안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 강시후의 삶이 소중해졌다.
그때는 없었던 부모님의 존재가 소중했고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를 아꼈고 따르는 이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각기 저마다 어울리는 방법으로 무림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아직 시후는 자유롭지 못했다.
‘혈교의 싹을 모두 자르지 못했는데 포달랍궁까지 등장했지.’
시후는 새로운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했다.
일차적으로 자신이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Safety World를 하며 레벨과 스텟을 올렸다.
그곳에서의 레벨과 스텟은 시후에게 영약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이차적으로 동료들을 강하게 수련시켰다.
태산과 인호와 조민에게는 도제의 도식을 가르쳤고 당성치와 제갈신길에게는 초절정에 오를 수 있는 깨달음을 주었다.
평치혁에게는 자하신공을 가르쳐 화산의 무공을 대력공방 식솔에게 가르치라고 했다.
아무리 대장장이질이 본업인 녀석들이라 하지만 제 목숨을 지킬 정도의 힘은 길렀으면 해서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약성방.
중국 정계에 진출하라는 시후의 지시에 녀석들은 열심히 노력 중이다.
거기에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해줄 인재로 남궁세가 정예를 보내줬다.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면서도 시후는 살짝 아쉬운 게 있었다.
‘바로 이 녀석처럼 내가 가는 길을 묻는 녀석들이 없다는 게 아쉬웠지.’
그저 막연하게 뒤를 따르는 게 아니라 함께 목표를 향해 달릴 존재의 부재가 아쉬웠다.
그랬기에 시후는 진지춘의 질문을 쌍수 들어 환영했다.
“좋은 질문이야. 하지만 대답을 듣게 되면 꽤 힘들어질 텐데?”
“제가요? 왜요?”
진지춘은 고작 목표를 물어봤을 뿐인데 왜 자신이 힘들어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 지금처럼 시후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일 때면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눈칫밥으로 살아온 반백 년 세월이 알려줬다.
지금이 기회라고 말이다.
“그래도 듣겠습니다!”
진지춘은 결연한 표정으로 자세까지 고쳐 잡았다.
“좋아, 그렇게까지 듣고 싶다면 알려주지.”
그렇게 시후는 진지춘에게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진지춘에게 말해줬다.
작게는 가정의 평화를 크게는 세계를 아우르는 존재가 되리라고 말이다.
그에 덧붙은 계획까지 들은 진지춘은 좀처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다른 이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미친놈이라며 무시했을 거였다.
하지만 시후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동안 세상의 풍파란 풍파는 모두 경험했다 자신했던 진지춘.
그는 가슴이 설렜다.
“히이야, 정말 다행입니다.”
“뭐가?”
“저는 도련님께서 그저 생각 없이 되는대로 사시는 줄 알았는데 이리 엄청난 계획이 있으셨다니.”
진지춘은 나름대로 정말 탄복했다며 시후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것을 들은 시후의 표정은 싸늘했다.
“돌팔이, 지금은 Safety World 안이 아니다.”
“에이~ 도련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만한 인재가 없는 건 인정하시잖습니까.”
시후의 엄포에도 진지춘은 바짝 다가가며 아양을 떨었다.
날이 갈수록 넉살이 좋아지는 진지춘이었다.
시후는 진지춘의 그런 모습에 헛웃음을 삼켰다.
“그래. 오늘만 봐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무엇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시후의 원대한 계획도 들었겠다 당장 해야 할 것을 물었다.
그 질문에 시후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우선 개학해야지.”
“…네?”
“다음 주가 개학이거든.”
“아… 네.”
진지춘은 무언가 맥 빠지는 시후의 대답에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하지만 진지춘은 이때 알아챘어야 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의 눈으로 시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말이다.
그리고 얼마 후 원대한 계획과는 다르게 소소한 일상으로 돌아간 시후 곁에는 뜻밖에 진지춘이 함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