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7화
“누구냐?”
난데없이 나타난 여인.
흰색 천으로 전신을 두른 그녀. 마치 히잡을 입은 모습에도, ‘그녀’라고 생각한 것은 목소리 때문이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차분하게 만든다고 할까. 목소리만으로 인자함을 내보이는 그녀였다.
그녀는 정체를 묻는 시후의 질문에 미소로 화답하고는 천천히 걸어왔다.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걸어오는 그녀에게 시후는 다시 물었다.
“누구냐니까?”
“글쎄? 내가 누굴까? 맞혀봐.”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야?”
“뭐가 되었든?”
정말 스무고개라도 해서 정체를 맞추라는 건지.
‘등장부터 속을 긁는 재주가 있는 놈이군.’
아무래도 대답해주지 않을 심산으로 보여 시후는 독안공을 펼쳤다.
네깟 놈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낼 방법이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그런데.
띠링-
[대상과 ‘격’의 차이가 심해 정보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Safety World에서 처음으로 독안공이 실패했다. 대악마에게도, 대천사에게도 통했던 독안공이었건만.
‘격’의 차이가 심해 정보를 알 수 없다니. 시후는 점점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너 뭐야?”
“그래. 질문은 그렇게 해야지.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인지를 궁금해해야지.”
“말장난은 그만하지?”
점점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자 시후가 눈에 힘을 주었다.
말을 하기 싫어도 하게 만들면 되기에 힘을 쓰려는 거였다.
그런데 그녀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바로 그 눈빛이야.”
“뭐?”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그 눈빛. 그이를 닮은 그 눈빛이 마음에 들어 쭉 지켜봤지.”
“…….”
소름 돋는 그 말에 시후는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 그녀는 보통 NPC가 아니다. 보통의 NPC라면 지금 이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둘째, 그녀는 시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눈빛을 가졌다며 말하는 그녀의 상기된 표정이 말해줬다.
셋째, 그녀는 남편이 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었다.
그 말을 함과 동시에 그녀의 남편이 뒤에서 나타났으니 말이다.
“하, 하하. 헤라, 당신의 남편은 나요.”
호탕하게 웃으며 나타난 남자.노출증이라도 있는 것인지 상의는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는지 탄탄한 상체를 자랑하며 나타났다.
그리고 녀석과 함께 알림창도 나타났다.
띠링-
[헤라 여신을 만났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전 스텟이 +2 상승합니다.]
업적 보상으로 나타난 알림창으로 그녀가 헤라 여신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제우스?”
“오! 나를 아는가? 건방진 유저여?”
시후가 검지를 들어 남자를 가리키자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다른 이를 깔보는 듯한 저 말투와 눈빛. 당장이라도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욕구가 샘솟게 하는 재능의 소유자.
한나미에게 들었던 제우스의 모습 그대로였다.
띠링-
[제우스 신을 만났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전 스텟이 +2 상승합니다.]
알림창이 제우스가 맞는다며 확인 사살을 해줬다.
재단을 만들었더니 신들이 알아서 나타났다.
거기에 녀석들이 나타날수록 업적 보상으로 스텟이 상승했다.
그렇다는 것은 앞으로 열 번의 업적 보상이 남았다는 뜻.
씨익-
시후는 앞으로 받을 업적 보상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자 호탕하게 웃던 제우스가 웃음을 멈추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그 재수 없는 미소는?”
“아, 미안. 내가 그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실례했군.”
제우스의 비아냥에도 시후는 가볍게 넘겼다.
시후의 눈에는 지금 제우스가 영약으로 보였다.
덕분에 시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은 제우스가 되레 흠칫했다.
제우스는 슬쩍 헤라 뒤로 몸을 반쯤 숨겼다. 그러자 헤라가 쏘아봤다.
“크흠. 다른 이들은 아직인가?”
제우스는 멋쩍은지 다른 신들을 찾았다.
헤라는 그런 제우스에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내 남편만 아니면… 하아.”
그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신이라고는 하지만 부부지간에서 제우스 역시 보통의 남편이었다.
“하, 하하. 여보?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나요?”
“그걸 몰라서 물어요?!”
“하, 하하….”
헤라의 어깨를 주무르며 쩔쩔대는 모습이라니.
시후는 제우스가 애처로워 보였다.
“자, 그러지 말고 일단 앉지? 그대들을 위해 준비한 자리이니까.”
지금 상황을 모면할 수 있도록 화제를 돌렸다.
둘은 시후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피식 웃었다.
“거봐요, 하는 짓이 귀엽다니까요?”
“당신 말대로군. 지켜볼 재미가 있겠어요.”
둘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시후를 바라보며 자리를 옮겼다.
자신들과 똑 닮은 동상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손님을 불렀으면 뭐라도 내와야 하는 거 아닌가?”
제우스가 원탁을 툭툭 치며 말했다.
헤라 역시 제우스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턱으로 원탁을 향해 까딱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방자함이군.’
정말 얼마 만인가.
자신을 한참 아래로 내려다보는 저 눈빛. 대악마 위리놈도 시후를 대할 때 저런 눈빛을 보이지는 않았다.
‘인(忍)’
시후는 속으로 ‘참을 인’ 자를 한 번 새겼다.”당신들이 좀 빨리 와서 그래. 이미 준비한 것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시후는 그동안 조민이 이날을 위해 준비한 것을 들었다. 지금도 그 준비된 것들을 갖고 일행들과 함께 케난 협곡을 오르는 중이었다.
“으흠, 우리를 기다리게까지 하는 것이라면 꽤 괜찮은 것이겠지?”
“당연하지. 기대할 만할 거야.”
“그래야 할 거야. 저분은 특히 음식에 까다로우니까.”
제우스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녹색 화관을 쓴 여신이 걸어 나왔다.
“반가워요. 제우스의 말대로 제가 음식에 좀 민감하니 잘 부탁드리죠.”
말은 잘 부탁한다고 했지만, 눈빛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준비한 게 형편없다면 무슨 짓이든 벌이겠다는 듯이 쏘아보았다.
‘인(忍)’
여신의 도발에 시후는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겼다.
이로써 두 번째 참을 인이었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참기로 다짐을 하고는 그녀를 살폈다.
‘녹색 화관…, 낫 모양의 펜던트라.’
그녀를 상징하는 몇 가지를 확인한 시후는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
띠링-
[데메테르 신을 만났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전 스텟이 +2 상승합니다.]
당연하게 정체를 눈치채자 업적 보상이 떴다.
“좋았어.”
시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전 스텟이 ‘6’이나 올랐다. 다른 유저들이라면 레벨을 24나 올려야 하는 성과였다.
“혼자 신났구만.”
시후가 좋아하는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제우스가 나섰다.
누가 봐도 적의에 가득 찬 눈초리였다.
시후는 제우스와 눈을 마주 봤다.
명백히 아래를 내려다보는 눈빛.
‘인(忍). 이번에 세 번째. 다음은 없다.’
시후는 이로써 오늘 다짐한 참을 인 세 번을 모두 썼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지만 시후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잠깐만 기다려줘.”
시후는 셋에게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에 메시지를 보냈다.
- 난 할 만큼 했다.
지금쯤 케난 협곡을 열심히 오르고 있을 조민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조민은 이번에 재단 준비를 하고 계획을 세우며 시후에게 부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오기 전까지는 참으라고.’
그래서 참을 인 자를 세 번이나 썼다.
퀘스트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퀘스트를 해결할 방법이 이 방법뿐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네가 천둥의 신이라지?”
시후는 들어 올렸던 손을 더욱 들어 하늘을 향해 뻗었다.
쿠릉-크릉-
그러자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구름이 가득한 날씨였지만 그렇다고 비 소식을 알릴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그런데 점점 주변이 어두워질 정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급격히 변하는 날씨에 헤라와 데메테르는 제우스를 돌아봤다.
“제우스?”
갑자기 왜 이런 짓을 벌이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제우스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내가 한 게 아니야.”
“무슨…! 설마?!”
자기가 날씨를 조종한 게 아니라는 제우스의 말에 헤라는 고개를 홱 돌려 시후를 봤다.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시후.
무심한 듯 쳐다보고 있지만 그 눈에는 적의가 보였다.
퀘스트를 위해 자신들을 부른 게 아니었나 싶은 그때.
“천마뇌전공(天魔雷電功) 일식(一式) 뇌전(雷電).”
번쩍-쾅-
케난 협곡 정상 위에 몰려든 먹구름에서 번개가 내려쳤다.
헤라 여신조차 눈을 찡그릴 눈부심이 그치자 시후의 손에는 일 척 길이의 번개가 쥐여 있었다.
“그건?!”
지금까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제우스가 벌떡 일어났다. 시후의 손에 들린 것이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아스트라페!”
아스트라페는 제우스가 다루는 번개를 뜻한다. 딱히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후의 손에 있는 것과 성질이 똑같았다.
“뇌전이라 한다.”
시후는 뇌전을 아스트라페라고 하는 제우스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시후 역시 한나미에게 아스트라페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그때 설명을 들으며 천마뇌전공 일식 뇌전과 비슷할 거라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제우스의 반응을 보니 제 생각이 맞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위력까지 같을까?”
시후는 좀 위험한 궁금증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한발을 뒤로 빼며 당장이라도 제우스에게 뇌전을 던질 투창 자세를 잡았다.
“자, 잠깐!”
그 모습에 제우스가 급히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제우스는 직감했다.
아스트라페와 똑 닮은 저 뇌전이라는 것. 그것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만약 자신의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 케난 협곡의 반은 날아가 버릴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런 것을 시후는 아무렇지 않게 던지려 했다.
아무리 올림포스 신이라 하지만 저런 것에 직격당했다가는 결코 좋은 꼴을 면하지는 못하리라.
그렇다고 저 혼자 몸을 피하기에는 곁에 헤라와 데메테르가 있지 않은가. 제우스는 두 여인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지금 우리와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제우스는 살짝 엄포를 놓아 시후를 제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을까.
이미 시후는 참을 만큼 참았다는 것을.
“전쟁? 이걸 아무렇지도 않게 막는다면 한번 생각해보지.”
“뭐?!”
시후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뇌전을 막으면 자신과 전쟁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는 거였다.
지금까지 시후를 아래로 내려다보던 제우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제우스는 인상을 구기며 기운을 끌어 올렸다.
‘내력과는 다른 것이군.’
제우스의 기운을 읽은 시후는 그것이 내공이 아닌 것을 알아챘다.
굳이 비슷한 것을 찾자면 성화령이 내뿜던 기운과 닮았다.
내공과는 질이 다르지만, 그 위력은 비견되는 기운.
신력(神力)이었다.
다른 이가 느꼈다면 당황할 만한 기운이었지만 시후는 이미 천 년 전에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사아아-
시후는 뇌전에 천마지기를 흘려 넣었다.
검은색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번쩍이던 뇌전을 감싸 안았다.
그러자 거기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나도 흉흉하게 변했다.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는 듯한 모습까지 보였다.
제우스는 순간 직감했다.
한 단계 더 발전한 저 뇌전이라는 것은 도저히 지금의 자신이 상대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자, 잠깐만! 일단 말로….”
“말은 충분히 했다.”
제우스는 싸울 의사가 없다며 두 손을 흔들며 시후를 말려봤다.
그 사이 헤라와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뒤로 몸을 피신했다.
둘을 버리고 자리를 뜰 수도 없으니 제우스는 죽을 맛이었다.
대화로 해결할 분위기가 아니기에 어찌하나 싶은 그때.
“오빠?!!”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