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우… 리… 나… 미?”
덕칠이 한나미의 애칭을 부르자 시후는 몸이 근질근질하며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의 애칭을 가까이에서 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오글거리는 일이었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덕칠의 눈에는 한나미만 보였다.
휙-
덕칠은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정자에 다다랐다.
하지만 바로 오르지는 않았다.
정자에 다다르니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한나미의 표정이 보였다.
“왜….”
“오빠, 정말 무공을 할 줄 아시네요?”
한나미의 말에 덕칠은 아차 싶었다.
그동안 한나미에게 무공을 숨겨 왔건만 조금 전 저도 모르게 경공술을 펼쳤다.
“그, 그게, 나미야….”
“오빠. 내가 섭섭한 게 뭔지 알아요?”
“그, 글쎄….”
“오빠가 내게 비밀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아, 그게….”
덕칠은 한나미가 쏘아댈수록 대답하지 못하고 어버버 댔다.
“그냥 지켜보려 했는데 더는 안 되겠네.”
결국, 참다못한 시후가 나섰다.
“뭐 하시려고요?!”
그러자 당소영이 시후의 팔을 잡으며 말렸다. 아무래도 연인 사이의 일이니 둘이서 해결하기를 바라는 거였다.
하지만 시후의 생각은 달랐다.
“쟤 지금 정상 아니야.”
“네?”
“조금 전까지 심상 세계에 있던 녀석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게 무슨…! 덕칠 씨가 심상 세계를 경험했다고요?!”
당소영은 깜짝 놀랐다.
심상 세계라니. 그렇다면 깨달음이 있었다는 말인데.
당소영이 아는 한 당가에서 그것을 경험한 이는 가주인 아버지가 전부였다.
당소영은 고개를 돌려 덕칠을 봤다.
확실히 덕칠의 모습이 평소와는 달랐다.
시후가 나섰음에도 덕칠은 여전히 한나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되레 한나미가 시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오빠가 정상이 아니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야. 일시적이지만 상단전이 열렸었기에 평소와 같은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거야.”
“그 말씀은….”
“좀 더 쉽게 말하면 약에 취한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상단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덕칠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한나미였다.
“그러니 비켜.”
시후는 당소영과 한나미를 슬쩍 한쪽으로 밀고는 덕칠에게 다가갔다.
덕칠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내공까지 끌어올렸다.
“하? 이 자식 봐라?”
시후는 그 모습에 제자리에 멈췄다.
그러고는 덕칠이 끌어올리는 내공에 맞추어 자신도 내공을 끌어올렸다.
‘어디, 얼마나 달라졌는지 볼까?’
시후의 생각대로 덕칠은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깨달음이 끝나는 순간 본신에 찬 기를 갈무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림인이라면 본능적으로 알고 행하는 거였다.
그러나 때마침 등장한 한나미 덕분에 덕칠은 그 본능을 저버렸다.
지금 덕칠에게는 한나미만 보였다.
이대로 덕칠이 기를 갈무리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난다면 덕칠의 상태는 갈수록 나빠질 거였다.
그래서 시후가 나섰다.
시후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와봐.”
오라며 손을 까딱이자 덕칠이 즉각 달려들었다.
그리 멀리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덕칠은 시후의 코앞에 있었다.
거기에 손날을 바짝 세워 시후를 찔렀다.
내공이 가득 담긴 수도에 시후 역시 수도로 맞섰다.
텅-텅-
손과 손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가 울렸다.
시후는 덕칠의 공격을 막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 정도면 절정의 반열에는 들었군.’
덕칠이 수도에 담은 기의 양과 질로 내공 수위를 파악했다.
둘의 수도가 부딪치자 그 여파가 정자에까지 미쳤다.
다행히 조민과 진지춘이 적절하게 대응하여 별 탈은 없었다.
‘그래도 중요한 손님인데 다치면 안 되지.’
시후는 혹시라도 한나미가 다칠까 봐 우려되어 덕칠을 유인하기 위해 연못 위로 날아올랐다.
수면 위에 가볍게 올라선 시후에 덕칠은 잠시 공격을 멈췄다.
그러자 시후는 또다시 손을 내밀어 까딱였다.
“의심하고 망설일 이유가 없을 텐데?”
시후의 말에 덕칠이 반사적으로 날아올랐다.
대신 좀 전과는 다르게 나비가 날아오르듯 날았다.
“우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나미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 정도로 덕칠이의 움직임은 아름다웠다.
연못 위를 미끄러져 나가며 손과 팔을 휘두르는 덕칠의 모습은 마치 무용수가 춤을 추는 듯했다.
“등평도수(登萍渡水)?”
그 모습에 진지춘이 놀라 소리쳤다.
어지간한 경신술로는 꿈도 꿀 수 없는 등평도수를 덕칠이가 펼치다니.
거기에 하늘하늘 춤추는 덕칠의 손에서 펼쳐지는 무공은 더욱 놀라웠다.
피핑-
덕칠이 손을 휘두르자 연못 물이 떠올랐다.
방울방울 떠오른 물방울은 그대로 암기가 되어 시후에게 쏘아졌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물방울 암기가 사방에서 시후를 덮쳤다.
‘만천화우라, 그렇다면….’
물방울로 만천화우를 펼치는 덕칠의 모습에 시후는 담담히 손을 움직였다.
퍼펑-
연못 물을 솟구쳐 물방울 만천화우를 막았다.
하지만 덕칠이의 공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피핑-
조금 전 만천화우를 펼쳤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없어?”
“설마…. 만천소음술?!”
정자에 있던 진지춘과 조민이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랬다.
지금 덕칠은 수련실에서 시후가 보여줬던 만천소음술을 연못 물방울로 펼쳤다.
분명 소리가 들림에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만천소음술.
시후는 그 응용력에 손뼉이라도 쳐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저 공격부터 막아야 했다.
“흡!”
시후가 잠시 주춤한 사이 덕칠이 일말의 기합을 토해냈다.
만천소음술로 시후를 공격하는 거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시후는 충분히 느꼈다.
사방에서 자신을 옥죄어오는 수많은 기의 암기들을.
누군가 봤을 때는 절체절명의 위기처럼 보이는 그 순간 시후가 움직였다.
“천마보(天魔步).”
뒷짐을 진 채로 마치 산책을 하듯, 천마보를 펼쳤다.
퍼펑-
시후가 있던 자리의 연못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에 시후는 없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시후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상대를 현혹하며 어지러운 난전 속을 유유히 걷는 천마보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순간 사라진 시후가 나타난 곳은 덕칠의 바로 앞이었다.
“운(雲).”
시후가 말하자 덕칠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휘둘렀다.
촤악-
기를 잔뜩 머금은 수도가 시후의 얼굴을 반으로 갈랐다.
사람의 머리가 반으로 갈리면 뇌수와 피가 뿜어져 나와야 하건만 어째서인지 시후의 머리는 그저 흔들거릴 뿐이었다.
머리에서 시작한 흔들거림은 점차 몸 전체에 퍼졌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것인지 덕칠은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시후가 있었다.
“구름은 가를 수 있어도 죽이지는 못하는 법.”
“크악!”
촤악-
듣기 싫다는 듯 덕칠이 또다시 수도로 시후의 몸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러자 시후의 몸이 일도양단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피 대신에 갈라진 시후의 몸이 흔들거릴 뿐이었다.
“더 해보거라.”
“크악!”
또다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덕칠은 수도를 내려쳤다.
그런 행동이 점점 반복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덕칠의 주위에는 몸이 잘린 시후로 가득했다.
“헉, 헉헉….”
덕칠은 숨이 막히는 듯 목을 움켜쥐며 두리번거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후.
몸이 잘린 시후.
하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덕칠은 환각에 빠진 것은 아닌가 싶어 두 눈을 비볐다.
그때였다.
“그만하면 되었다.”
“으악!”
덕칠을 농락하던 시후의 목소리가 들린 곳은 정자 안이었다.
시후는 당소영이 내온 차를 음미하며 천연덕스럽게 일행들 뒤에서 나타났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일행들 모두가 소리쳤다.
한나미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덕칠은 시후의 목소리가 정자에서 들리자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아니. 날아오르려고 했다.
퍽-
“커헉?!”
덕칠이 움직이는 순간 옆에서 머리가 잘려 흔들거리던 시후가 주먹을 내질렀다.
아무 방비도 없이 덕칠이 옆구리에 꽂힌 시후의 주먹.
덕칠은 몸을 ‘ㄱ’자로 꺾으며 인상을 구겼다.
“크악!”
덕칠이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며 몸을 움직이자 몸이 잘린 시후들이 사방에서 덮쳤다.
덕칠은 호접무의 묘리를 담아 보법을 펼쳐보려 했지만, 그조차 불가능했다.
오른쪽으로 움직일라치면 그쪽에서 주먹이 날아왔다.
어렵게 그것을 피해 왼쪽으로 움직이면 그쪽에서는 발길질이 날아왔다.
그렇게 시작된 무차별 폭행.
퍽-퍼퍽-
“크악!!”
덕칠의 비명과 어울려져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후는 마시던 차를 쟁반에 내려놓으며 웃었다.
“음~ 소리가 아주 찰지구나.”
시후의 말대로 덕칠은 아주 찰지게 맞고 있었다.
이제는 반항하는 기색조차 없이 바닥에 잔뜩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시후들은 그런 덕칠을 서로 짓밟겠다며 앞다투어 밟았다.
그 모습에 조민은 걱정이 되었는지 시후에게 다가왔다.
“오, 오빠? 슬슬 그만두셔야 할 것 같은데요?”
“으흠… 그럴까?”
딱-
시후가 손가락을 튕겼다.
청아한 소리가 울리며 덕칠을 짓밟고 있던 시후들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다들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시후를 바라봤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천마보. 운(雲)이라 한다. 베여도 찢겨도 터져도 죽지 않는 구름이 ‘내’가 되어 적과 싸우는 무공이지.”
천마보(天魔步)-운(雲).
천마지체 삼 단계를 이루며 펼치게 된 무공 중 하나였다.
설명대로 천마지기를 형상화하여 적을 상대하는 거였다.
기로 이루어진 형체는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이가 보기에는 정말 시후의 모습을 한 귀신이 여럿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무공에는 큰 단점이 있다.
평소 시후가 펼치는 무공을 그것들은 펼치지 못한다는 거였다.
지금처럼 단순하게 손과 발만으로 적을 공격한다.
물론 단순한 손질과 발길질이지만 천마지기로 이루어졌기에 그 위력은 절정의 고수에 버금갔다.
바닥에서 꿈틀대는 덕칠의 모습이 그 위력을 증명해줬다.
“치료해야 하지 않나요?”
한나미가 덕칠이가 걱정되었는지 다급히 물었다.
그 소리에 다들 진지춘을 바라봤다.
하지만 진지춘은 턱을 매만질 뿐 움직이지 않았다.
“진 의원님?”
“괜찮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냐며 놀라는 한나미에게 진지춘은 시후를 힐끗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도대체 저 녀석이 도련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지만, 참으로 복 받은 놈입니다.”
“그게 무슨….”
“지금 저 녀석은 그냥 두들겨 맞은 게 아니라 추궁과혈을 당한 겁니다.”
추궁과혈을 당했다는 진지춘의 말에 조민과 당소영은 진짜냐며 시후를 바라봤다.
시후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고 턱을 까딱이며 덕칠이를 가리켰다.
그러자 바닥에서 꿈틀대던 덕칠이가 스르륵 일어났다.
“이게 무슨….”
덕칠이는 그렇게 두들겨 맞았음에도 되레 온몸에 기운이 넘치자 당황스러웠다.
거기에 미쳐 날뛰던 기운도 갈무리가 되어 있었다.
덕칠이는 이 모든 것이 시후 덕분이라 생각해 정자로 날아왔다.
털썩-
“이 은혜. 평생을 다해 보은하겠습니다.”
덕칠은 절까지 하며 시후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시후는 손을 슬쩍 휘저어 그를 일으켰다.
“알면 앞으로 잘하자?”
“네!”
덕칠은 당차게 대답하고는 한나미를 봤다.
한나미는 어찌나 덕칠을 걱정했는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은 그 모습에 덕칠은 훌쩍 날아올라 한나미 곁에 내려섰다.
“내가 그동안 말하지 못해 미안해.”
“…….”
“내가 있는 세계는 힘이 없으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거든.”
“…….”
“그래서 말하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는 지킬 수 있게 되었어. 내 소중한 모든 것을.”
스윽-
덕칠은 한나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덕칠이 말하는 동안 줄곧 대답하지 않던 한나미는 그 손길에 덕칠이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렇게 둘이 서로를 끌어안고 마음을 확인하는 그 순간.
시후는 다시 한번 몸이 근질근질하며 소름 돋는 것을 느꼈다.
역시 다시 봐도 연인의 애정행각을 지척에서 보는 것은 닭살 돋는 경험이었다.
시후는 당장 이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 봤겠지? 앞으로 사흘 동안 네가 겪을 모습이다.”
“히익!”
허공에 대고 내뱉은 시후의 말에 수련실 귀퉁이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쭈뼛거리며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나타난 것은 당성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