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헤어졌다며 침울해하는 덕칠이를 보며 시후는 어찌해야 할까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당장 연락처 달라고 한 후에 한나미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은 덕칠의 표정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한나미라는 이름 석 자만 거론했을 뿐인데 덕칠이의 멘탈이 나가버렸다.
‘저래서는 어디 써먹지도 못하겠는데.’
아무래도 이대로 한나미의 연락처만 쏙 얻어내기는 무리인 것 같아 시후는 조민에게 눈짓했다.
무공에 관한 것이라면 자신이 어떻게든 손을 써보겠지만 연애사에 관한 것은 자신이 없어 넘겼다.
조민이 아직 17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진지춘이나 자신보다는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조민은 시후의 눈짓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덕칠에게 다가갔다.
“두 분 잘 어울렸는데 아쉽네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좋은 만남이셨잖아요.”
“그렇죠…. 어제만 해도 같이 스파게티 먹으며 즐거워했는데….”
“그래요, 어제의 추억… 네?!”
조민은 덕칠이를 위로하다가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어제’라고 하셨어요?”
“네.”
“어제 나미 언니 만나셨다고요?”
“네.”
“그럼, 어제는 사귀신 거예요?”
“정확히는 어제 자정까지는 사귀었죠.”
“…오빠?”
조민은 입을 꾹 닫은 채 시후를 돌아봤다. 게슴츠레 뜬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시후 역시 조민과 같은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이 자식이, 너 지금 나 놀리냐?”
“네?! 제, 제가 감히 어떻게 시후님을… 아닙니다.”
덕칠이는 손사래를 치며 당황했다.
“그런데 왜 그딴 헛소리를 하지?”
“헛소리라니요. 우리 나미와 헤어졌다는 게 왜 헛소리입니까?”
“어제까지 만났다며.”
“네.”
“어제 즐겁게 저녁으로 스파게티도 드셨다며?”
“네.”
“그런데 헤어졌어?”
“네.”
“왜?”
시후는 최대한 인내심을 끌어 올려 되물었다.
그러자 덕칠이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갑자기 데이트 중에 긴급 소집이 있어 중간에 헤어졌거든요.”
“그래서?”
“그랬더니 나미가 다음에는 약속이 있으면 그것부터 해결하고 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이게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죠.”
“그랬더니?”
“도대체 제가 하는 일이 무엇인데 가르쳐주지 않느냐며 말다툼을 이어가다가… 결국.”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네….”
“와….”
시무룩한 덕칠의 표정에 시후는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덕칠이는 자기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다.
연애에 대해 잘 모르는 시후도 이 정도는 알았다.
연인끼리의 작은 다툼.
사소한 사랑싸움.
조만간 다시 만날 확률 100%의 사건.
그게 지금 덕칠이 겪는 상황이었다.
시후는 조금 전까지 덕칠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자신이 한심했다.
더는 녀석과 말을 섞기 싫어 손을 내밀었다.
덕칠이는 시후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후를 봤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슬쩍 들어 시후 손 위에 올려놓으려 했다.
탁-
그 손을 시후가 거칠게 쳐냈다.
“뒤질래?”
“그, 그럼….”
눈에 쌍심지를 켠 시후의 표정에 덕칠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랐다.
하는 수 없이 옆에 있던 조민이 나섰다.
“나미 언니 연락처요.”
“에? 그, 그건 왜요?”
이유를 묻는 덕칠에게 조민은 간략하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Safety World에서 이번에 시후가 받은 퀘스트가 그리스 신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전문가인 한나미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렇게 덕칠을 찾은 거였다.
거기까지 들은 덕칠은 눈이 번뜩 뜨였다.
그러더니 잽싸게 스마트 폰을 꺼내 시후에게 내밀었다.
폰 화면에는 ‘♡우리나미♡’라는 이름이 보였다.
“이왕 통화하실 거 제 폰으로 하는 게 어떠실까요?”
아마도 이것을 빌미로 한나미와 통화를 하려는 거였다.
그에 시후는 한숨으로 답했다.
“조민아… 얘는 답이 없다.”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덕칠이 폰에 적힌 번호를 자기 폰에 입력했다.
덕칠이는 굳이 저렇게 번거로운 짓을 왜 하나 싶을 때 조민이 나섰다.
“지금 상황에서 언니가 아저씨 전화를 퍽이나 받으시겠어요?”
“아….”
덕칠은 그제야 시후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는 조용히 폰을 갈무리했다.
시후는 덕칠이 알려준 나미의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 여보세요?
통화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았는데 한나미가 받았다.
시후는 천투변용술을 펼쳐 목소리를 변형했다.
일전에 한나미와 만났던 덕칠이의 사숙으로 말이다.
“한나미양, 오랜만이야. 내 목소리 기억하나?”
- 아! 사숙님?
“허, 허허 기억하는군. 잘 지냈나?”
- 네, 사숙님께서도 별 탈 없으셨죠?
둘은 간단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럴수록 덕칠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그동안 덕칠이 역시 꾸준히 무공을 연마했기에 큰 진전을 보였다. 덕분에 지금 시후가 통화하는 한나미의 목소리쯤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당장이라도 목 놓아 한나미에게 자신이 여기 있다며 소리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시후는 한나미와 통화하며 덕칠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리도 참을성이 없어서야 후에 당가를 이끄는 중역이 어찌 되려고.’
시후는 덕칠이를 적어도 당가 장로 자리까지는 앉힐 생각을 했었다. 그래야 좀 더 쉽게 당가를 써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미양, 다름이 아니라 내가 어제 급히 덕칠이 녀석을 불러서 둘의 데이트를 방해했더군.”
- 네?! 어제요?
“집안 큰 행사에 덕칠이 녀석이 꼭 필요해 다급하게 불렀었는데 내가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 게 되었더군.”
시후는 지금 덕칠이가 어제 데이트 도중에 빠진 일을 자신이 불러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만들었다.
한나미는 이전 일로 덕칠이에게 사숙이 어떤 존재인지 알았기에 시후의 말을 믿었다.
정말 어쩔 수 없어 그리 갔다는 것을 이해하는 거였다.
그러자 덕칠에게 서운했던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변했다.
- 아니에요, 사숙님. 제가 그만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네요.
“허, 허허. 아닐세. 그래서 내가 사과의 뜻으로 둘에게 보답을 좀 하고 싶은데.”
- 아, 아니에요.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아니야,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그리고 나미양의 도움도 받아야 할 일도 있고.”
- 제 도움이요?
“나미양, 여전히 서양사학을 전공하고 있나?”
시후는 덕칠이와 한나미에게 보답을 한다는 핑계로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는 거였다.
도움을 받고 보답을 하는 게 당연한 순리였지만 시후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저번에 Safety World에서 만났던 아이 기억하나?”
- 네, 그때 아라크네 퀘스트를 같이 했던 분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이번에 그 아이가 올림포스 열두 신에 대한 퀘스트를 하게 되었거든.”
- 열두 신 모두를 한번에요?!
“그렇다네. 그래서 말인데 그 아이와 이번 퀘스트를 같이 좀 해주겠나?”
- 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어요!
시후의 말에 한나미가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사실 한나미의 가장 큰 관심을 끈 것은 바로 올림포스 열두 신이라는 대목이다.
서양사학을 전공하는 한나미는 최근 그리스 신화에 대한 논문을 작성 중이었다.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일상에 덕칠이와의 데이트는 가뭄의 단비였다.
그런데 어제 덕칠이가 그리 가버렸으니 서운한 거였다.
그리고 도서관에 있는 자료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중 시후에게 이런 제안을 받으니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Safety World가 가상현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정보는 결코 얕볼 수 없는 거였다.
일전에 하버드 교수도 자신의 논문을 위해 Safety World에서 자료를 수집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 그렇잖아도 자료를 어떻게 찾아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잘 되었어요.
한나미는 되레 자신이 부탁한다며 지금 당장 그 지인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시후는 잘 되었다며 현재 당가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그 아이와 그 주소에서 만날 수 있게 말해놓겠네.”
-네, 그럼 들어가세요.
그렇게 둘은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덕칠이가 달려들었다.
“주군! 어쩌시려고 여기를 알려주셨습니까?”
덕칠이는 지금 한나미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보다는 일반인에게 무림의 존재가 알려질까 우려를 했다.
이곳에 오게 된다면 한나미의 눈썰미로 분명 이상함을 눈치챌 게 뻔했다.
하지만 시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넌 한나미랑 가볍게 만나는 거냐?”
“네? 그건 아닙니다만,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그게 아니라면 슬슬 말해줘도 되잖아.”
“무림의 존재를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한나미가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네가 하는 말을 헛소리라고 치부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아는데. 언젠가는 발을 들여놓게 될 아이라면 지금부터 네가 지켜주면 되는 것 아니겠냐?”
시후는 덕칠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았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옮기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하늘을 나는 무공이 초능력처럼 보일 터였다.
자고로 인간이란 자신이 가진 상식 밖의 일을 두려워하는 법.
그리고 무림이 마냥 즐겁기만 한 곳은 아니지 않는가.
때로는 피가 난무하는 일도 생길 수 있고,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런 곳의 존재를 과연 일반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덕칠이는 그런 곳에 자신이 있는 것을 한나미가 거부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거였다.
하지만 시후가 본 한나미의 성격은 덕칠이의 걱정과는 전혀 달랐다.
‘호기심을 보이면 보였지 절대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지는 않을걸.’
시후는 덕칠이의 어깨를 다독였다.
“남자라면, 무림에 살아가는 남자라면, 자기 여자는 품에서 놓지 않을 자신을 가져야지.”
덕칠이 역시 시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자신의 입장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당가의 후기지수로 인정은 받았지만, 아직 그 이상을 이루지 못했다.
무공도 더 갈고 닦아야 했고 자신만의 세력도 만들어야 했다.
덕칠은 그 후에 한나미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밝히게 되어 시후의 말에도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시후는 여전히 불안감에 떠는 덕칠의 모습에 아무래도 좀 더 도움을 줘야겠다 싶었다.
“이제 무음투척술은 할 수 있느냐?”
“네? 아, 네.”
갑자기 무공 이야기를 꺼내니 덕칠은 당황했다.
하지만 좀 전보다 진지한 시후의 눈빛에 바로 답했다.
시후가 말한 무음투척술은 덕칠이 가장 최근에 얻은 성취였다.
그것을 알고 물은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시후가 저런 표정으로 자신의 무공 수위를 물을 때는 한 걸음 더 나아갈 무언가를 던져준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나 시후는 덕칠이 잘 볼 수 있도록 자세를 가다듬고는 천천히 움직였다.
“무음투척술은 그저 소리 없이 암기를 던지는 것이 다가 아니다.”
스윽-
시후가 한쪽 팔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바람 한 점 없던 수련실에 바람이 불었다.
“소리를 없앴다면 만들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스윽-
다시 손을 휘젓자 이번에는 바람에 소리가 덧씌워졌다.
사락-사락사락-
아주 얇은 풀잎이 바람에 휘둘리면 이런 소리가 들리겠다고 생각했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룬다면 그 누가 현혹되지 않으리. 만천소음술(萬天召音術).”
덕칠은 시후의 손에서 펼쳐지는 만천소음술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근심 걱정 모두를 날려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