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2화
시후의 부름에 부랴부랴 달려온 당성치. 그의 가슴은 ‘희망’이라는 단어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시후의 부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시후는 분명 자신을 당가 가주 중에 가장 강한 이로 남을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절정을 넘어선 초절정. 아니. 그 이상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거였다.
그래서 기다렸다.
싸가지는 어디서 밥에 말아 드셨는지 알 수 없는 대력공방 장로라는 녀석이 자하신공을 터득하는 것을 보았을 때도 기다렸다.
이제 자신을 부르겠거니 했더니 웬걸. 어린 녀석들 세 명을 불러서 도식을 가르쳤다.
무슨 도식을 가르치나 싶어 구경하려는 찰나 수련실 문을 부수고 튀어나온 도강에 놀라 자빠졌다. 태산도 반으로 가를 엄청난 도식이 어린 녀석들 손에서 펼쳐졌다.
무슨 수련실이 어디 만화책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도 아니고 들어갔다가 나오기만 하면 엄청난 무공을 배워서 나왔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당성치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시후가 자신을 불렀다.
당성치는 평소 펼치지 않던 호접무 경공술까지 펼쳐 날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수련실. 그곳에는 시후 혼자만이 아니었다.
수련이 목적이라면 저들이 같이 있을 필요가 없을 텐데. 당성치는 싸한 느낌에 물었다.
“왜…?”
“어서 와.”
시후는 헐레벌떡 들어온 당성치를 미소로 맞이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당성치는 수련실 문지방을 넘지 않았다.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당성치의 시선이 자신이 아닌 조민에게 향해 있는 것을 눈치챘다.
“뭐야? 한눈에 반한, 뭐 그런 거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시후의 실없는 소리에 당성치가 발끈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조민이 시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기대하던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실망하신 눈치신데요?”
“기대하던? 아~.”
그제야 시후도 당성치가 어떤 마음으로 저리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하긴, 나라도 몸이 달았겠다.’
시후는 당성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달려온 녀석이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품속에서 옥병 하나를 꺼냈다.
“헐! 도련님! 그건 신명단 아닙니까?”
옥병의 정체를 눈치챈 진지춘이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신명단은 소명단과는 달리 양산할 수 없다. 그랬기에 약선방 장로인 자신도 한 병만 가지고 있다.
더욱이 시후의 손에 들린 저것은 그가 직접 제조하여 만든 것이다.
흔히 소림의 대환단이 최고의 영약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하지만 신명단도 그에 못지않다는 게 약성방의 평가였다.
대환단이 공청석유에 버금가는 영약으로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기력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한다면 신명단은 멀쩡한 무림인에게 희대의 영약이나 다름없다.
“맞아, 신명단. 당 영감에게 이거 열 알을 주지.”
“열 알이나요?! 저 영감탱이가 뭔 이쁜 짓을 했다고요?!”
“이제부터 할 거라서 주는 거야.”
“끄응….”
진지춘은 신명단 같은 영약을 당성치에게 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그래서 티를 팍팍 냈다.
진지춘은 시후의 뒤에서 안면을 연신 씰룩였다. 입은 삐쭉, 코는 벌렁벌렁, 눈썹은 역팔자로. 누가 봐도 네가 먹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안면근육으로 말했다.
당성치 역시 그런 진지춘의 표정을 읽었는지 심기가 편치 않았다. 하지만 둘의 대화로 확신한 것이 있기에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 영약을 제게 주시는 연유가….”
“앞으로 당 영감이 배울 무공은 이게 없으면 곤란하거든.”
그 말에 당성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도대체 어떤 무공이길래 자신의 수준에 저런 영약까지 필요하단 말인가.
꿀꺽-
당성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시후는 그런 당성치에게 웃으며 신명단이 든 옥병을 넘겨줬다.
“내일부터 시작할 테니까 오늘 자기 전에 한 알을 먹고 운기조식을 하고 자도록 해.”
“알겠습니다!”
당성치는 허리까지 숙여 옥병을 받아들었다.
“아이고~ 결국은 주셨네요, 저 귀한 것을.”
그 모습에 뒤에 있던 진지춘이 비아냥거렸다.
당성치는 옥병까지 받아든 마당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의원 나부랭이께서는 주군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시나 봅니다?”
“뭐요? 의원 나부랭이? 이 미친 약쟁이가.”
“뭐?! 약쟁이?! 의원님 의원님하고 불러주니까 제가 잘난 줄 아나, 어디 독물에 빠져 녹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 독물? 약쟁이들이 쓰는 독이라 해봐야 청양고추보다 매울까? 그리고 당신 실력으로는 내 눈곱도 녹일 만큼의 독도 못 밀어 넣어.”
“어디 밀어 넣어주어 볼까? 뒷간에 가서 더러운 거 밀어내는 그 구멍으로 쑤욱하고 한번 밀어 넣어줘?”
둘은 멱살을 잡을 기세로 서로에게 비아냥거렸다.
시후는 점점 높아지는 둘의 언성에 말리기는커녕 뒤로 슬쩍 물러났다.
시후라는 벽이 사라지자 둘은 내공까지 끌어올려 말에 힘을 실었다. 마치 사자후로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다.
“오빠, 그냥 두고 보실 거예요?”
어느새 조민이 다가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조만간 손속이 오고 갈 것 같아서였다.
“괜찮아,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야.”
“그건 어린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거죠.”
“쟤들도 지금 하는 짓이 어린아이들이나 진배없는데 뭐.”
“그래도 저러다가 다치시기라도 하면….”
“그땐 둘 다 나. 가. 리. 나는 거지.”
시후는 은연중에 내공을 실어 말했다.
그러자 한참 말다툼인 둘의 귀에도 정확히 들렸다. 특히, ‘둘 다 나가리’라는 단어가 말이다.
둘에게 그 단어가 뜻하는 바가 서로 달랐지만 연신 놀리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진지춘은 당연히 무공을 배울 수 없다는 거였고 진지춘은 곁에 두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 뜻을 정확히 읽은 둘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아이고~ 우리 당가 가주님! 그 신명단 드시고 내공이 일취월장하셔서 꼭 대성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허, 허허! 우리 신의님~ 덕분에 제가 큰 뜻을 이룰 수 있겠습니다.”
약쟁이에서 가주님으로, 의원 나부랭이가 신의님으로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누가 봐도 보여주기식으로 어깨동무에 손까지 잡으며 서로 덕담을 나눴다.
짝짝짝-
그런 모습에 시후는 박수를 보냈다.
“앞으로도 내 앞에서는 가식이라도 그러기를 바란다.”
“하하…. 네.”
둘은 시후의 말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시후는 이제 되었다며 둘에게 떨어지라고 한 후 본론을 꺼냈다.
“당 영감, 내가 사람을 좀 쓰고 싶은데.”
“사람이라 하시면….”
“덕칠이.”
덕칠이의 이름이 나오자 당성치의 눈썹이 꿈틀댔다.
김덕칠.
그는 시후가 등장하기 이전만 해도 첫째 여식의 허드렛일이나 도맡아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가 시후와 만남을 갖고는 호접무를 터득했고 지금은 당가에서 차세대 무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시후가 덕칠이를 언급하자 당성치로써는 탐탁지 않았다.
내심 시후의 입에서 자기 여식의 이름이 나오길 기대한 거였다.
“그를 어디에 쓰시려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확히는 덕칠이를 쓰는 게 아니라 그의 여자친구가 필요한 거야.”
“…네?”
덕칠이가 아닌 그의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니.
당성치는 좀처럼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조민을 봤다.
이제 누구나 아는 거였다.
시후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17세의 소녀가 그의 대변인이자 지략가임을 말이다.
조민은 자연스럽게 시후를 대신해 이유를 설명했다.
“오빠께서 게임을 하시는데 그 언니의 지식이 필요하시다네요.”
“게…임이요?”
“Safety World 몰라?”
당성치 역시 Safety World를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절대자의 무공에 오른 시후가 자신에게 ‘부탁’이라는 명목으로 제자를 빌려달라는 이유가 여자친구의 지식이 필요해서라니. 그것도 게임을 하기 위해서라니.
그게 무공 성취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조민은 당성치의 동공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해해요. 오빠의 행동이 저희 같은 보통의 무인들 상식에는 적용되지 않아 혼란스러우신 거.”
“하, 하하….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나?”
“네. 저도 그렇고 저희 가주님도 그러시고…. 대부분 다 그러세요.”
조민은 어깨를 으쓱이며 굳이 고민하지 말라고 다독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지춘이 슬쩍 다가왔다.
“도련님. 저는 아닙니다.”
“깜짝이야. 너 내가 이렇게 슬쩍 다가오지 말라고 했지. 그리고 뭐가 아니라는 건데?”
시후는 이럴 때만 은신술 뺨치게 움직이는 진지춘을 나무랐다.
하지만 진지춘은 시후의 그런 나무람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성이라도 생긴 것인지 되레 웃으며 말했다.
“저만은 덕질에 진심이신 도련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진지춘이 한쪽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시후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너만 보면 왜 자꾸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을까.”
“두통에 좋은 침이라도 놔드릴까요?”
“온몸의 혈도에 침을 박히기 싫으면 좀 물러나 있지?”
“헤, 헤헤. 넵!”
진지춘은 시후의 엄포에도 장난스러운 태도로 물러났다.
이미 시후의 저런 모습에 익숙한 거였다.
시후가 진짜로 화를 낸다면 저런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자신은 고슴도치가 되리라는 것을 아는 거였다.
그런 진지춘을 보며 당성치는 왠지 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주군. 저도 이해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
“신하 된 도리로 주군의 여가생활을 존중해드릴 필요가….”
푹-
시후는 당성치의 말을 더는 듣기 싫었는지 지풍을 날려 아혈과 마혈을 눌렀다.
순식간에 말도 못 하고 몸도 움직이지 못하게 된 당성치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시후를 봤다.
“쓸데없는 거 닮으려고 하지 말고, 내일부터 지옥을 경험하게 될 테니 각오나 해.”
그제야 당성치는 눈치챘다.
진지춘이 벌인 저 멍청한 짓거리는 오로지 그에게만 허락된 것임을 말이다.
자신도 그와 같이 일을 벌이려다가는 시후의 말대로 나가리가 될 것 같았다.
시후는 당성치가 자신의 의도를 눈치챈 거 같자 아혈과 마혈을 풀어주고는 돌려보냈다.
그리고 잠시 후 시후의 지시대로 덕칠이가 왔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덕칠이는 수련실 앞에서 시후를 향해 인사를 했다.
“오, 그동안 꾸준히 공부했구나?”
시후는 단번에 달라진 덕칠의 모습을 확인했다.
일전에 덕칠이에게 소명단을 준 적이 있었다.
덕칠이 덕분에 한나미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도움으로 아라크네의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시후는 그때를 덕칠이 인생의 전환점이라 여겼다.
소명단을 주었지만, 그것을 덕칠이가 어떻게 활용하는지는 순전히 본인에게 달린 거였다.
그저 아침저녁으로 소명단의 약효를 흡수하는 데 그쳤을 수도 있지만 덕칠은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소명단과 비슷한 약을 만들었구나?”
“역시 알아봐 주시는군요.”
덕칠은 자신이 한 일을 시후가 단번에 알아채자 살짝 놀랐다.
시후의 생각대로 덕칠은 소명단 한 알을 남겨 그것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 결과 당가의 독초와 약초를 이용해 그와 비슷한 효능을 가진 약을 만들었다.
아직은 시험 단계라 자신만 복용했지만, 그 효과는 탁월했다.
당가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독에 대한 내성도 깊어졌으며 그에 비례하여 내공도 증진됐다.
시후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한 덕칠의 모습에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본론을 꺼냈다.
“그래. 내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네 여자친구의 도움이 좀 필요해서다.”
“여자친구라 말씀하신다면….”
“그 왜 있잖느냐, 그리스 신화에 빠삭한….”
“죄송하지만 헤어졌습니다.”
“…뭐?!”
시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