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약선방 장로 진지춘.
세간에는 그를 신의(神醫)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야 진지춘이 직접 그렇게 꾸며냈지만, 소문을 듣고 찾아온 병든 이들의 간절한 시선에 진지춘은 죽어라 공부했다.
특히 진지춘이 두각을 나타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침술이었다.
“도련님! 그거 아십니까?”
시후가 자리를 뜨자 진지춘이 쪼르르 뒤따랐다.
그러면서 연신 입을 놀렸다.
“제가 왜 신의로 불리는지요?”
“그건 돌팔이 네가 낸 소문 아니었나?”
“에이~, 도련님 기준에나 제가 돌팔이죠. 저 정말 능력 좀 됩니다.”
말하면서 진지춘은 한쪽 소매를 걷어 두 손가락을 오므리고 침을 놓는 시늉을 했다.
시후 역시 진지춘의 침술은 인정했다.
처음 진지춘의 몸에 지풍을 날려 한쪽 몸의 마혈을 눌러 확인했을 때, 이미 진지춘의 실력을 알아봤다.
하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이길래 절대 칭찬하지 않았다.
되레 돌팔이라며 구박을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진지춘에게는 득이 되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시후에게 당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실력이 늘었다.
처음 한쪽 마비를 푸는 데 일각의 시간이 걸렸다면 지금은 그에 반도 못 미치는 시간에 풀었다.
거기에 진지춘은 자기가 자신의 몸에 놓은 침술을 기억하고 또 공부했다.
결국 시후 덕분에 침술 실력은 늘었고 그만큼 겸손은 줄었다.
“제가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참 뭐하지만 말입니다? 진짜 침술에 있어서는 화타가 온다 해도 자신 있습니다.”
“그래. 네가 화타 씹어 먹어라.”
시후는 진지춘의 자화자찬에 어울려줄 심산이 없었기에 대충 대답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진지춘의 말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 같은 의원에게는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줄 침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침을 가장 잘 만드는 곳이 대력공방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침도 만들어?”
“네!”
진지춘은 시후가 드디어 자기 말에 반응을 보이자 이때다 싶어 빠르게 말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부터 주문을 넣었는데 그 녀석들이 바쁘다며 거절을 하더라고요.”
“걔들이?”
“네! 그런데 도련님께서 녀석들과 안면이 있다고 하시니. 저 정말 감격했습니다.”
대충 진지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얼마 전에 대력공방에 침을 만들어 달라며 주문을 넣었는데 그들이 바쁘다며 퇴짜를 놓았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들으니 어째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것 같아 시후는 목을 긁적였다.
‘내가 비고에서 찾은 물건들을 가져다줬을 때부턴가?’
얼마 전에 박초연에게 넘긴 보물들이 떠올랐다.
관악산 비고에서 찾은 그것들은 현대에서는 절대로 보지 못할 물건들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대력공방의 장인들이라고 해도 그것들을 활용해 쓸 만한 것을 만드는 데 꽤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거기에 얼마 전 포달랍궁의 일로 장로들까지 잃었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일 테다.
녀석들의 사정을 진지춘에게 속속들이 전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게 할 수는 없었다.
녀석들과 만나는 장소에서 진지춘이 설레발을 치게 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내가 대력공방에 몇 가지 재료를 넘기며 쓸 만한 것을 만들라고 했었다.”
“도련님께서 직접이요?”
“그래서 녀석들이 당분간 시간이 없을 거야.”
“무엇을 넘겨주셨길래 대력공방 같은 곳이 마비됩니까?”
“독각룡 비늘과 뿔, 음양옥, 운철….”
“예에?!!”
진지춘은 어찌나 놀랐는지 시후를 쫓던 발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독각룡…. 음양옥. 거기에 운철이라니.”
그런 것들은 진지춘 역시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귀한 것을 대력공방에 주었다니.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말이다.
진지춘은 실망감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허해졌다.
“도련님, 너무하십니다!”
“뭐야?!”
진지춘이 갑자기 울먹이는 표정으로 달려들자 시후는 순간 움찔했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순간 독안공까지 펼쳤다.
그리고 읽은 진지춘의 생각.
시후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돌팔이, 내가 네 어미 새는 아니잖냐?”
“뜬금없이 무슨 어미 새를 찾으십니까? 제 말은….”
“아아, 됐어. 네 말 들어봐야 거기서 거기지. 대신 대력공방에 이번에 준 운철로 네 물건 만들어 달라고 할게. 그럼 됐지?”
“…….”
진지춘은 그 말에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미쳤나.’
진지춘의 생각을 읽어보니 녀석은 자기를 어미 새처럼 여겼다.
먹이가 있으면 새끼 새에게 가장 먼저 가져다주는 어미 새 말이다.
도대체 머릿속이 어떻게 되어 있길래 그런 생각을 하는지 한번 뜯어보고 싶었다.
제 나이는 생각도 안 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진지춘의 모습이 보기 싫어 아이를 타이르듯 운철이라는 사탕을 내밀었다.
그 말에 진지춘의 표정이 풀린 것을 본 시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1층 커피숍에 대력공방 녀석들의 기척이 느껴지기에 걸음을 서둘렀다.
진지춘 역시 그런 시후의 뒤를 부지런히 쫓았다.
그렇게 둘이 1층 커피숍에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 자리한 삼인이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주변 시선이 단번에 몰렸다.
- 쯧. 그냥 앉아 있어라.
시후는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셋에게 전음을 보내고는 직원에게 음료 주문을 했다.
이렇게 잠시 뜸을 들여 몰린 시선을 떼어냈다.
잠시 후 음료가 나오자 시후는 진지춘과 함께 녀석들에게 갔다.
시후가 다가오자 셋은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 순간 시후가 슬쩍 기를 흘려 녀석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진지춘과 함께 녀석들 곁에 앉았다.
“방주? 눈치 좀 챙기자.”
“아, 네….”
시후의 지적에 박초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시후는 그에 그치지 않고 옆을 봤다.
“그나마 너는 눈치 좀 있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네 방주와 똑같이 행동하면 어쩌냐?”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평치혁이 고개를 떨궜다.
시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지막 녀석을 봤다.
“넌… 됐다.”
“네?!”
평생을 남의 눈치만 보다가 섭혼술에 당해 사경을 헤맸던 황보옥총까지 나무랄 수는 없었다.
지금 그녀가 이곳에 나온 것 자체가 무리 중인 게 뻔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후는 아무 생각 없이 옆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는 진지춘을 봤다.
운철로 침을 만들어 준다고 했더니 금세 저리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돌팔이, 양파 진맥 좀 해줘라.”
“양파요?”
“쟤 말이야. 조그마한 녀석.”
그 태연한 모습이 얄미워 일을 던져주었다.
진지춘의 실력이면 지금 양파의 상태를 확인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였다.
진지춘은 시후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황보옥총을 봤다.
“양…파?”
“아, 네….”
“성이 양 씨고 이름이 파야?”
“풉.”
진지춘의 진심 어린 질문에 곁에 있던 평치혁이 웃었다.
덕분에 양파는 고개를 떨구고 얼굴을 붉혔다.
황보옥총은 시후가 자신을 왜 양파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남 이후 비밀이 많아서 그렇게 부르는 거였지만 이제는 그리 부르지 않았으면 바랐다.
하지만 그것을 시후에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얼마 전에 자신이 섭혼술에 당해 죽음 문턱에서 헤매던 것을 시후가 데려왔다고 들었다.
오늘도 무리하면서까지 따라 나온 이유도 시후에게 직접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림을 받으니 죽을 맛이었다.
그런 황보옥총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지춘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호오? 어떤 섭혼술에 걸렸길래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는 게냐?”
“네?!”
“이리 와보거라.”
진지춘이 뜬금없이 황보옥총의 손목을 낚아챘다.
사실 진지춘이 이리 섭혼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동안 꾸준히 공부해서였다.
제갈세가 가주인 제갈신길의 치료를 위해 방문했을 때 자신은 제갈상민이 섭혼술에 걸린 것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때 시후가 아니었다면 제갈세가와 약선방은 척을 졌을 것이다.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던 늙은이를 치료하려는 척만 하던 것과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천지 차이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진지춘은 제갈상민이 섭혼술에 걸렸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섭혼술에 대해 꾸준히 공부했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그가 섭혼술에 걸렸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의 모습에 눈을 번뜩였다.
‘이 자식 어떻게 저걸 알아봤지?’
진지춘이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딜라마섭혼술은 좀처럼 알아채기 힘든 섭혼술이었다.
일전에 시후조차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원후태령과 호된 재회의 시간을 가졌었다.
그런데 진지춘이 양파의 상태를 알아보다니.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진지춘을 써먹을 수 있는 곳이 수십 개는 떠올랐다.
“헉, 뭐지?!”
순간 진지춘은 뒤통수가 오싹할 정도로 오한이 들었다.
깜짝 놀라 주변에 기감까지 넓혔다.
하지만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자 결국 시선은 시후에게로 돌아갔다.
“도련님?”
“쟤 치료 먼저.”
진지춘은 실로 자기 입을 쥐어터져라 때리고 싶었다.
시후 앞에서 방금 보인 행동을 죽을 만큼 후회했다.
시후는 절대로 능력 있는 자를 놀리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진지춘은 한숨을 내쉬며 양파의 손목을 지그시 눌렀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박초연이 결국 참지 못하고 시후를 불렀다.
“시후님? 저분은….”
박초연 역시 양파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되어 물은 거였다.
대력공방에도 전문 의원들이 있었기에 그들에게서 치료받던 양파였다.
시후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진맥을 받게 하니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약선방 장로 진지춘.”
“진짜요?!”
시후는 일부러 진지춘의 이름과 약선방에서의 직위까지 정확히 알려줬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대력공방에 진지춘의 위신을 세워줘야 해서였다.
역시나 박초연은 약선방 장로 진지춘이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첫째는 약선방이 어떤 곳인지 익히 알고 있어서였고 둘째는 대력공방에 진지춘이 직접 집착에 가깝게 의뢰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억나서였다.
그동안 서면으로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피했는데 지금 시후 곁에 있으니 더욱 놀랐다.
박초연은 시후와 진지춘을 번갈아 보며 진땀을 흘렸다.
누가 봐도 진지춘은 시후의 동료였다.
그것도 좀처럼 보기 힘들 정도로 시후가 편하게 대하는 동료 말이다.
그간 진지춘의 요구를 거절한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는 박초연이었다.
“저번에 준 운철 있지? 그걸로 쟤 침 하나 만들어줘라.”
박초연이 난처한 모습을 보이자 시후가 옳다구나 하고 입을 열었다.
솔직히 대력공방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알았기에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싶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박초연 역시 시후가 먼저 해결책을 제시해주자 격하게 응했다.
“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오, 진짜요? 고맙소, 박 방주.”
고맙다는 인사는 진지춘이 직접 했다.
시후는 그런 진지춘에게 눈짓을 줬다.
양파의 상태가 어떠냐고 묻는 거였다.
그에 진지춘은 품속에서 대나무 침통을 꺼냈다.
“많이 호전되어 침 몇 방이면 괜찮아질 듯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직접 침을 놓으면 깨끗이 나을 거라는 뜻이었다.
시후는 진지춘에게 손을 휘휘 저어 그리하라고 하라고 했다.
이제 이곳까지 대력공방의 실세이니 둘을 부른 본론을 이야기할 때였다.
“관악산 비고에 있는 것들 모두 털어와야겠어.”
“거기에 뭐가 더 있어요?”
“어. 있으니까 준비 좀 해.”
일전에 같이 갔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시후가 저리 말하니 무언가 더 있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시후가 준비하라고 직접 말할 정도면 그것이 결코 작은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박초연은 대력공방의 주인답게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산에 있는 비고를 일반인들의 시선을 돌리고 털어오려면 꽤 많은 장비가 필요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되는 대로 보고드릴게요.”
“그래. 그리고 너는 내일부터 당가로 찾아와.”
시후는 평치혁을 가리켰다.
평치혁은 시후가 부르니 당연히 가겠지만 이유는 듣고 싶었다.
“거기는 왜요?”
“너 내일부터 자하신공 배울 거야.”
그 말에 평치혁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