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당성치는 당황스러웠다.
시후가 거절할 경우를 대비해 내걸 조건을 수십 개는 준비해 놓았고,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이 나이에 땡깡이라도 부릴 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시후가 보여준 무공은 상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났다.
무공으로 사람의 신체를 수복하다니,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무공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엄청난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가르쳐 준단다.
당성치는 자신의 요구를 너무나도 순순히 수락하는 시후를 물끄러미 봤다. 때마침 시후도 당성치를 보고 있었기에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 순간 당성치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아! 제가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뭐?”
“제가 주군의 큰 뜻을 파악하지 못했네요.”
“무슨 소리야?”
“그렇게 꼭 제 속내를 다 들춰야 하시겠습니까?”
“…….”
시후는 당성치의 오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말을 아꼈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이놈은 어떻게 된 게 지레짐작하는 정도가 남달랐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가르쳐준다 해서 당성치가 그것을 익힐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제 혼자 머리를 굴리더니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굳이 그 오해를 풀어줄 필요를 못 느꼈다. 아니, 되레 슬슬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저 당성치, 이번에 참으로 많은 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뭘 또?”
“제갈신길이요. 이번에 그의 상태를 확인한 의원이 말해주더군요. 그가 벌써 초절정을 눈앞에 뒀다고요.”
“그렇지.”
“그런데 그 계기를 만들어주신 게 주군 아니십니까?”
“맞아.”
사실이니 부정하지 않았다.
털썩-
그 대답에 당성치가 시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일전에 일러주신 호접무의 오의 만으로도 충분한 배움이었지만, 저는 그 위를 보고 싶습니다.”
“…….”
“이번에 도움을 주신다면 당가의 수장 자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오, 그래?”
헛소리를 하길래 대답을 망설였더니 가주 자리를 내놓는단다.
시후는 알았다.
권력욕이 남다른 당성치가 가주의 직위까지 내려놓으며 저에게 부탁을 하는 이유를.
그가 거론한 제갈신길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가와 제갈세가는 서로 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견제의 대상이었다.
앙숙 관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의식하며 자기 가문의 세력을 키우는 관계였다.
모순적이게도 머리를 잘 쓰는 제갈세가가 제약회사를 차렸고 약 다루는 데 능한 당가가 교수를 양성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균형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 관계에 시후가 등장한 거였다.
반로환동이 의심될 정도로 엄청난 무위를 자랑하는 무림 고수의 등장.
원체 머리를 잘 쓰는 제갈세가는 시후의 능력을 파악한 순간 그와 함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반면에 당가는 시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만 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컸다.
시후의 밑에 있으면서 같이 나아가려는 자와 시후를 이용하려는 자의 차이가 말이다.
당연하게도 시후는 제갈세가에 많은 것을 베풀었고 당가와는 아주 짧은 연만 맺었다.
솔직히 당소영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멸문을 당했으리라. 그 상황을 당성치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당가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상황. 그렇기에 지금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시후의 신임을 얻으려면 다른 무엇도 아닌 진심을 내보여야 함을 당성치는 깨달았다.
무릎을 꿇고 진실한 마음으로 무인의 태도를 보이는 당성치 모습에 시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고로 무인이란, 무공에 대한 갈망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법. 정치질은 그 후에 해야 하는 것이야.”
“그 말씀은….”
“솔직히 말하면 그 무공은 네가 범접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런….”
“대신, 널 당가 가주 중 가장 강한 자로 기억될 수 있게 해주지.”
“…! 감사합니다!”
당성치는 시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한 번 배척당했던 자신을 그가 거두겠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무공까지 가르쳐 주면서 말이다.
아직 무엇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잔뜩 들뜬 당성치의 모습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아마도 저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본격적인 수련에 들어가면 곡소리를 토할 테니까.’
차라리 죽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당성치를 수련시키는 시후였다.
그러니 당분간은 지금의 기분을 누릴 수 있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스윽-
시후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당성치가 가볍게 떠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성치는 자신을 감싸는 그 기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거부할 수 없음을 깨달아서였다.
강이 아닌 유의 기운에서 이런 것을 느끼다니.
당성치는 다시 한번 시후의 무위에 감탄했다.
그렇게 당성치를 일으킨 시후는 목을 가다듬더니 물었다.
“큼, 그런데… 당 소저는 괜찮나?”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시후가 불현듯 당소영의 안부를 묻자 당성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행들과 다른 장소에서 치료 중이던 당소영에게 안내했다.
당성치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옥상 가장 끝에 자리한 별채였다.
“그럼, 이야기 편히 나누십시오.”
당성치는 시후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잠시 자리를 떠나 있으라고 말이다.
예전에는 당성치의 이런 처사에 지나치다며 한 소리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당소영에 대한 마음을 인정했기에 그저 따랐다.
그렇게 주변에 다른 이들의 기척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시후는 별채의 문을 열었다.
약 열 평 남짓한 별채 안은 방이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의료장비들로 가득해 병실 같았다. 그 가운데 자리한 침상에 당소영이 누워 있었다.
잠에 든 것인지 얌전히 누워 있는 그녀를 발견한 시후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곁으로 다가간 시후는 먼저 당소영의 상태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신체 재생 능력을 극대화하여 상처를 치료하는 천마역력공을 그녀에게 펼쳐주었지만, 이미 잃은 기력은 되찾아줄 수 없었다.
무인에게 기력이란 그야말로 기.
특히, 당소영은 시후가 폭주할 때 가장 가까이 있었기에 본신의 모든 내력을 끌어다 썼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당소영을 품에 안았을 때 시후는 그녀의 몸 상태를 알 수 있었다.
“무리해서 선천지기까지 끌어 쓰다니.”
그랬기에 이리 깨어나지 못하는 거였다.
시후는 좀 더 정확히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마에 손을 댔다.
천천히 기를 흘려 넣으려는 순간.
“왁!”
“힉!”
돌연 당소영이 눈을 번쩍 뜨며 고함을 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는 민망한 듯 본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에 당소영이 활짝 웃었다.
“도련님께서 그런 소리도 내시네요?!”
그제야 시후는 자신이 당소영 장난에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탈하면서도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이리 장난을 칠 정도면 그래도 몸이 많이 호전된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시후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가 되레 당소영을 당황케 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환상의 티키타카는 아니어도 장난에 대한 화답이라며 장난을 걸어올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당소영을 당황케 하는 시후의 행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몸을 일으킬 정도는 아닌가 보구나.”
스윽-
당소영의 장난으로 미처 만지지 못한 당소영의 이마에 시후가 손을 올렸다.
거칠면서도 따뜻한 시후의 손이 이마에 닿는 순간 당소영의 두 눈은 화등잔만 해졌다.
“어…? 어, 어?”
너무 당황스러워 무슨 말이라도 꺼낼까 했지만 어버버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 사이 시후는 당소영의 몸속으로 기를 불어 넣었다.
몸 상태를 확인하는 거였다.
백회혈부터 용천혈까지 한 바퀴 돌고 온 기는 당소영의 몸 상태를 말해줬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행이었다.
“선천지기가 조금 상하기는 했지만 당분간 조심하면 금세 나을 것 같구나.”
“…….”
“그러니 당분간은 얌전히 치료 받아.”
시후의 따뜻한 말을 들은 당소영.
그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왜 시후가 자신에게 이러는 것인지.
저 눈빛, 저 미소 그리고 이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거짓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당소영은 이마에 올려진 시후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눈을 가렸다.
“갑자기 제게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라. 하긴, 그렇겠군.”
당소영의 질문에 시후는 떠올렸다.
그동안 자신이 당소영에게 했던 말과 행동들을.
경공이 느린 그녀를 허리에 짐짝처럼 꿰차고 날기도 했고 그녀의 눈앞에서 제 아비를 겁박하기도 했다.
그 어느 하나 그녀를 배려한 행동 따위는 없었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어.”
그래야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테니.
시후는 당소영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좀 전보다 더 상기된 당소영의 얼굴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포갤 수밖에 없었다.
쪽-
느닷없는 시후의 입맞춤에 당소영은 놀랐다.
하지만 시후가 어떤 기운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힘을 가한 것이 아니라, 고개를 살짝 돌리기만 해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자신이 왜 시후의 입술을 허락했을까에 대한 대답은 입술이 닿고 나서야 알았다.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자신을 피하던 그가 드디어 마음을 열은 거였다.
잠깐의 입맞춤이 끝나고 시후가 입술을 떼자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알 수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점점 깊어졌다
“그, 그만 나가세요.”
당소영은 이불을 끌어다 얼굴을 가리며 시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차마 더는 이런 감정으로 시후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지금 시후를 물리지 않으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어디까지 표현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귀엽군.”
“나, 나가요!”
그런 당소영의 모습에 시후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당소영은 소리 높여 고함을 질렀다.
“그럼, 좀 더 쉬고 일어나면 연락해.”
시후는 당소영의 축객령에 별채를 나섰다.
솔직히 시후 역시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감정에 주체할 수 없는 행동을 제약하기 어려운 것은 당소영뿐만이 아니었다.
시후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오른 따라 더욱 맑아 보였다.
“좋군.”
“좋으시겠죠.”
시후의 독백에 돌연 누군가가 대답했다.
깜짝 놀란 시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딱히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지금의 이런 모습을 가장 보여주기 싫은 사람.
“돌팔이. 벌써 일어났냐?”
진지춘이었다.
시후는 천천히 시선을 내려 진지춘을 찾았다.
그리고 후회했다.
두 눈은 게슴츠레 뜨고 주체할 수 없이 치솟는 입꼬리를 단속하느라 안면 근육을 꿈틀대는 진지춘의 얼굴을 보고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잡아다가 머릿속에 내공을 흘려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그 역시 성치 않은 몸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진지춘은 거침이 없었다.
“저는 죽다 살아났는데 도련님께서는 아주 살 맛 나셨습니다?!”
다소 거친 말투였지만 비꼬는 말은 아니었다.
그저 건수 하나 잡았으니 놀리고 싶은 거였다.
악의가 없는 그 말에 시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여기서 말이 길어졌다가는 저 녀석 성격상 한 달은 우려먹을 게 뻔했다.
“크흠, 좀 있으면 대력공방에서 사람이 올 거다.”
“누구요?”
“그들이 오면 너도 따라와라.”
“대력공방이라 하시면…. 제가 아는 그 대력공방이요?!”
진지춘은 맛깔나게 시후를 놀려먹을 생각을 접고 물었다.
그만큼 대력공방의 존재는 그에게 있어 특별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