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그리웠다.
뼈에 사무치고 가슴에 사무치고 뇌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가가.”
진소령이 시후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천년이 지났건만 그 미소에 시후의 가슴이 뛴다.
“가가. 기다렸어요.”
기다렸다는 그 한마디에 미치도록 달려가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그녀의 체온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심마(心魔)니까.”
그랬다.
지금 시후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모두가 심마에 의한 거였다.
무림인이라면 운기행공 중에, 아니 평생 금기시해야 할 심마.
시후는 그 심마에 스스로 빠졌다.
“각오를 다졌건만 그대를 보니 마음이 흔들리는구려.”
시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진소령이 더욱 환하게 웃는다.
“가가, 춥습니다.”
꿀꺽-
춥다는 말에 시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춥다’라는 그 단어에 차갑게 식은 그녀의 시신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시후의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으적-
순간 시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느끼는 것이 모두 허상임을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심마에 집어 삼켜질 것만 같았다.
“후우….”
다행히 입술을 깨문 통증으로 정신을 차린 시후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버텨야 한다. 좀 더. 좀 더.’
시후는 지금의 상황을 버티고 버틸 생각이었다.
그렇게 번 시간이 오늘의 핵심이었다.
심마에 빠지기 전, 시후는 마(魔)의 기운을 가진 천마지기와 항마(降魔)의 기운을 가진 구양신공을 격돌 시켰다.
그것도 본인의 몸속에서 말이다.
상반되는 두 개의 기운이 시후라는 몸에 갇혀 부딪쳤으니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본래라면 단전이 터져버릴 수도 있는 기운이었지만 시후는 천마지체였다.
몸속 365개의 혈도 모두가 단전이었다.
하나의 단전이 터진다고 해도 364개의 단전이 있으니 괜찮았다.
그리고 단전 하나가 터진다고 해도 364개의 단전이 터진 단전을 빠르게 수복했다.
어찌 보면 터질 단전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시후는 두 개의 기운이 충돌하면서 일어나는 엄청난 기운을 그저 흡수만 하면 되었다.
대신 이미 구양신공은 극성에 이르렀기에 그에 대항하려면 이번에 얻은 일 갑자의 내공을 천마지기로 만들어야 했다.
당연히 그 작업은 성공했다.
하지만, 극성의 구양신공과 그에 버금가는 천마지기의 충돌로 인해 심마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그 필연의 주인공이 하필 진소령이라는 것뿐.
시후는 극한의 인내심을 발휘하면서도 진소령의 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지금이 아니면 저런 생동감 있는 모습을 또 언제 보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시후의 심마는 점점 극에 달했다.
“가가, 왜 저를 안아주지 않으셔요.”
“…….”
“가가, 춥습니다.”
“크윽….”
“가가….”
“쿨럭.”
결국 버티고 버티던 시후의 입에서 한 움큼의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기혈이 뒤틀린 거였다.
이대로라면 결국 주화입마에 빠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턱-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시후를 누군가가 안았다.
시후는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어 자신을 잡아준 이를 봤다.
흐릿한 시야였지만 가까이에 있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시후는 자신을 그렇게 부르짖던 진소령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무언가 좀 달랐다.
조금 전까지는 시후를 갈구하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시후를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이 역시 심마인가.’
이번에는 측은지심을 이용해 자신을 농락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 줄 잡으세요!”
“…….”
“이대로 포기하실 거예요?!”
심마가 역정까지 내며 나무라기 시작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흐려지던 초점이 다시 맑아지기 시작했다.
“너는… 당소영?”
눈이 맑아지니 자신을 부축한 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진소령의 환생이라고 여길 정도로 똑 닮은 그녀.
당가의 셋째 여식 당소영이었다.
“네가 왜 여기에….”
시후는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실체일 리 없으니 말이다.
이곳은 실존하지 않는 곳. 심상의 세계였다.
이런 곳에 그녀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부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후는 다른 것에 헛웃음이 흘렀다.
“허, 거참. 내가 생각보다 너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더란 말이냐.”
그녀를 멀리하고자 했건만 그러지 못한 자기 모습을 깨달았다.
심마에 빠지고 나서야 그녀에 대한 마음을 깨닫다니.
그것도 뼈에 사무치도록 아련한 진소령 앞에서 말이다.
시후는 고개를 슬쩍 돌려 진소령을 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처음 나타났던 그 자리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왜일까.
보통의 심마라면 이쯤에서 시후가 무너질 만한 무언가를 할 텐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아니, 이미 무언가를 더 했나.
이건 죽음의 문턱에서 보는 그런 무언가인가.
하지만 시후는 이런 생각을 길게 이어나갈 수 없었다.
턱-
“정신 차리라고요!”
“…우푸(아파).”
“정신이 들어요?!”
당소영이 시후의 얼굴 양쪽을 두 손으로 꾸욱 누른 거였다.
기혈이 뒤틀린 것보다 당소영이 누르는 얼굴이 더 아팠다.
덕분에 정신은 좀 전보다 맑아졌다.
시후는 고개를 비틀어 당소영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당소영은 바로 시후의 오른팔에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꼈다.
“무슨 짓…!”
무슨 짓이냐며 나무라려는데 반대쪽 팔을 누군가 움켜쥐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다가왔는지 진소령이 미소 지으며 팔짱을 꼈다.
“가가, 저 처자는 누구입니까?”
“어? 아… 어….”
시후는 순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심마다. 심마야, 현실이 아니다.’
이렇게 되뇌었지만 어째서인지 오른팔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그렇게 시후가 대답을 망설이자 이번에는 당소영이 물었다.
“도련님? 쟤가 도련님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예요?”
“뭐? 아니, 그건….”
대답할 수 없었다.
실제로 기혈이 뒤틀린 원인은 진소령이라는 심마에 빠진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을 대답했다가는 진소령이 받을 상처가 우려되어 입을 땔 수조차 없었다.
시후가 그렇게 둘의 질문에 우물쭈물하자 이번에는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내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가가를 꾀기 쉬웠겠구나?”
“뭐야?! 내 얼굴이 어딜 봐서 너와 같다는 거지? 그러는 너야말로, 천년 전의 인연이라면 이제 그만 놓아주는 게 어때?”
“놓아라? 놓아야 할 것은 네 그 더러운 손으로 붙잡고 있는 가가의 팔이니라.”
“흥! 너나 도련님 힘들게 하지 말고 그만 놓아주시지?!”
둘은 시후를 사이에 두고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시후는 고개를 뒤로 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도 어느 한쪽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둘 다 놓으라며 팔을 뗄 마음도 없었다.
‘심마가 이런 게 맞는 건가?’
솔직히 시후도 심마에 빠져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의심이 들었다.
저승사자가 마중 나와 요단강으로 안내한다는 심마이건만 이건 무언가 달랐다.
분명 진지춘이 이 상황을 보기라도 했다면 한마디 했을 거였다.
“도련님! 양쪽에 쥔 떡을 언제까지 고민하실 거예요?”
“맞아, 그렇게….”
시후의 생각을 읽기라도 당소영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정답이었다.
지금 겪는 모든 것들은 심마였다.
언제까지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시후는 고개를 돌려 왼팔에 매달려있는 진소령을 내려다보았다.
“가가….”
진소령은 시후가 무슨 뜻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인지 안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까지 보이던 미소는 사라졌다.
대신 어여쁜 그 얼굴에는 아련함과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시후는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잘 벼려진 보검으로 심장을 후벼 판다면 이런 느낌일 터였다.
“가야 하오. 나를 기다리는 이들이 너무 많소.”
“…….”
“비록 심마에 빠져 그대를 보게 되었지만, 무척 반가웠소.”
“가가….”
시후는 왼팔에 힘을 주어 진소령을 꼬옥 안았다.
그리고 천천히 밀어냈다.
이제는 그녀를 떼어 놓기로, 아니. 심마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음 먹는 순간 이 심마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저도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심마에 빠질 만큼 그리운 그녀의 얼굴에서 스스로 눈을 떼면 되는 거였다.
씨익-
시후는 애써 미소 지었다.
심마이지만 결코 그녀에게 슬픈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그러자 진소령도 미소 지었다.
“가가, 다시 뵐 날을 기다리고 있겠어요.”
심마가 기다린다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부정하고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후는 그저 미소 짓는 얼굴로 천천히 두 눈을 감을 뿐이었다.
눈이 감겨 암흑만이 드리우자 다른 감각이 깨어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깨어난 것은 청각이었다.
“도련님! 도련님!”
그런데 어째서 여전히 심마에 빠졌을 때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의문이었다.
그 순간 후각이 깨어났다.
익숙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끈적하면서도 달콤하지만, 지극히 위험한 독향이었다.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설마 하는 심정에 두 눈을 뜨자 그녀가 보였다.
“당소영?”
어찌 된 것인지 당소영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소영의 한쪽 얼굴에 붉은색 선혈이 흐른 자국이 보였다.
“너 왜….”
“도련님!”
와락-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당소영이 시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시후는 피할 겨를도 없이 그녀를 품속에 안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분명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자신이었다.
제갈세가 수련실에서 지인들의 호위를 받던 자신이 두 발로 우뚝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변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이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이게 무슨….”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습격이라도 받은 것이란 말인가.
시후는 두리번거리며 이유를 찾았다.
그러자 저 멀리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태산? 인호? 돌팔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셋은 시후의 부름에 몸을 움찔하더니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너희 왜….”
“크윽!”
셋에게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반대쪽에서 신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쪽에는 제갈신길과 조민과 진권이 널브러져 있었다.
셋 역시 시후의 목소리를 듣고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이들의 공통점은 누군가와 생사결을 펼친 것 같은 몰골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우는 당소영.
스륵-
한참을 울던 당소영이 비틀대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을 시후가 끌어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때, 촉각이 돌아왔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몸 전체로 느껴졌다.
그제야 시후는 자신이 속옷 한 장만 걸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사태가 어찌 된 것인지 이해했다.
“내가 폭주를 했구나.”
시후가 심마에 빠지면서 이성을 잃고 폭주를 한 거였다.
그것도 제갈세가 본가가 초토화될 정도로 말이다.
천운은 자신을 지키던 저들이 죽지 않았다는 거였다.
스윽-
시후는 손을 들어 허공섭물을 일으켰다.
그러자 바닥에서 꿈틀대던 여섯이 둥둥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그들을 앞까지 데리고 온 시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마역력공(天魔逆力功).”
천마지체 삼 단계에 들어서야 펼칠 수 있는 비기가 시후의 손에서 펼쳐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