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북한산 정상에 있는 산운사.
그 사찰 중앙에 세워진 석탑 앞에 한 보살이 서 있었다.
보살은 석탑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합장을 하거나 그 어떤 염을 외지도 않았다.
그런 보살의 모습은 절에 있는 스님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만한 모습이었다.
역시나 보살 곁으로 노승 한 명이 다가갔다.
노승은 보살 곁으로 다가가 합장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네.”
“궁주님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
‘궁주’라는 단어가 절에서 사용할 만한 건 아니었으나 보살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보살의 반응에 노승이 발끈했다.
“설마, 또 그곳에 가셨습니까?!”
“네.”
“쯧쯧- 아직도 그곳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셔서야 대업을 어찌 이루시려고….”
노승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보살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노승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표독스럽게 되받아쳤다.
“그런 걱정하실 시간에 제갈세가에 대한 정보 하나라도 더 빼 오시지요. 장로님.”
“허?! 궁주의 어미이기에 오냐오냐해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으십니까?!”
“눈에 뵈는 게 없으신 건 장로님이시지요. 저와 궁주님이 어떤 일을 겪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런 은혜도 모르는 년! 누구 덕에 망해가는 원후가가 이리 자리를 잡은 것인데!”
“누구 덕분이기는요. 제 아들 제갈재민 덕분이지요.”
“원후태령! 어딜 감히 궁주님의 이름을 입에 담느냐!”
노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원후태령은 개의치 않았다.
아니, 되레 장로라는 노승에게 한발 다가갔다.
“포달랍궁의 장로이신 분께서 이리 참을성이 없으셔서야. 저희의 대업은 이제 시작 아니었습니까?”
“끄응….”
그 말에 노승은 침음을 흘렸다.
그리고 은연중에 끌어올리던 기를 거두었다.
만약 원후태령이 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삼 갑자 넘는 기운을 담은 손이 원후태령의 머리를 부수었을 터였다.
“하긴 그 기나긴 시간을 기다려 왔는데 그거 더 못 기다리겠냐마는.”
노승은 원후태령에게 한 발 더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대력공방의 꼭두각시들까지 잃은 네년을 살려두는 이유가 궁주님의 폭주를 막기 위함을 잊지 말아야 할 거야.”
“…….”
그 말에 원후태령은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알았다. 자신의 목숨은 아들 제갈재민이 포달랍궁의 궁주가 되는 그날 사라졌어야 했다는 것을.
노승은 원후태령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렇게 제 분수를 자각하며 행동해야지. 다음 합일에 늦지 않게 궁주님을 모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길 바라네.”
“…네.”
그 말을 끝으로 노승은 등을 돌려 사찰 안으로 걸어갔다.
노승이 사라지자 원후태령도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적을 확인하더니 이내 경공술을 펼쳐 신형을 날렸다.
인적이 드문 길을 찾아 달리는가 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무 위를 내달렸다.
그렇게 산등성이를 넘어 얼마 달렸을까.
저 멀리 절벽이 보였다.
원후태령은 절벽 끝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해가 집니다. 슬슬 돌아가셔야지요.”
아무도 없는 허공에 말했지만, 대답은 절벽 밑에서 들려왔다.
“그렇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훅-
그러고는 절벽에서 누군가 솟구쳐 올라왔다.
가볍게 원후태령 곁으로 올라선 그는 일전에 시후에게서 그녀를 데리고 사라진 제갈재민이었다.
원후태령은 제갈재민이 다가오자 그의 뒤로 보이는 곳을 바라봤다.
“오늘도 학교를 보고 계셨습니까.”
“네.”
“아직 등교하는 이들이 없을 터인데 뭐 볼 게 있다고요.”
“그저 보고 싶었습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저곳을요.”
제갈재민이 보고 있던 것은 그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의 눈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조금 더 학교를 눈에 담고 싶은 그였지만 어머니가 찾아왔으니 이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로 했다.
“시간이 되면 알아서 내려갈 텐데 뭐하러 오셨습니까.”
“그래도 걱정되는 게 어미의 마음입니다.”
그 말에 제갈재민은 치아까지 내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그럼요.”
스윽-
원후태령은 손을 올려 제갈재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자신이 배 아파 난 아들.
제갈세가 차기 가주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무공에 소질이 없던 아들.
그래서 끼고 살았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아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녀석들이 있으면 직접 손을 쓰면서까지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이가 나타났다.
아들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녀석이었고 중학생일 때 이미 안면을 텄던 터라 정체도 알았다.
강인 병원 원장의 외아들 강시후.
분명 찌질했던 녀석이었는데 어찌된 것인지 자신이 펼친 금나수를 알아봤다.
너무 놀라 후일을 기약하며 물러나는 사이 제갈세가에서 쫓겨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강시후가 있다는 것을 공항에서 녀석이 찾아와 알았다.
불같이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강시후는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무위를 가진 무림인이었으니 말이다.
그 어린 녀석이 내뿜은 살기에 죽음의 공포를 맛보며 한국을 떠났다.
처가인 원후가에 돌아가 후일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그마저도 그리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섭혼술로 제갈세가를 집어삼키려던 원후가의 계획을 망친 탓에 후환이 원후태령에게 돌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제갈세가 일에 총력을 기울였던 원후가는 그 이후로 가세가 기울었다.
종국에는 하루에 한 끼를 먹는 게 어려워졌다.
그때 조금 전 사찰에서 만났던 노승이 찾아왔었다.
그는 자신을 포달랍궁의 장로라 소개하더니 라마의 뜻이라며 원후가를 도왔다.
물질적인 것부터 시작해 무공까지 말이다.
그 때문에 원후가는 포달랍궁을 은인으로 대하며 따랐다.
후에 원후태령과 그녀의 아들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원후태령은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만큼 분한 일도 없었지만, 그로 인해 얻은 것도 있었다.
자기 아들. 제갈재민.
그가 포달랍궁의 궁주가 된 거였다.
그것도 가히 신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면서 말이다.
이 정도면 다시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복수를 꿈꾸며 돌아왔다.
그리고 복수의 날, 원후태령은 포달랍궁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대력공방의 꼭두각시들까지 이용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준비한 꼭두각시들은 모두 잃었고 자신은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만약, 그때 제갈재민이 와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 죽었으리라.
“그때 와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당연한 것을요.”
“그때도 그 눈으로 보신 겁니까.”
제갈재민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이마로 옮겼다.
턱-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원후태령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제갈재민이 손을 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더 다가오시면 그놈이 깨어납니다.”
움찔-
그 말에 원후태령이 흠칫하며 손을 내렸다.
‘그놈’이라는 것에 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제갈재민은 그런 원후태령을 지나쳐 걸어갔다.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잠시 볼일을 보고 들어갈 테니까요.”
“어딜 또 다녀오시려고요.”
“잠시 만날 이가 있어서요. 제 주제도 모르는 노망난 늙은이 하나가 말이죠.”
그 말을 끝으로 제갈재민의 모습이 사라졌다.
분명 눈앞에 있었음에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 남은 원후태령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홀로 미소 지었다.
* * *
시후는 제갈세가 수련실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지금부터 천마지체 삼 단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후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지금부터 할 일을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긴장감이 돌았다.
“강시후가 웬열?”
“그러게. 긴장을 다 하고?”
태산과 인호가 그런 시후 곁으로 다가와 웃었다.
둘은 시후의 양쪽 어깨에 한 손씩 올렸다.
시후는 그 손에서 그들의 마음을 느꼈다.
“그렇지? 긴장이라는 단어와 나는 어울리지 않아.”
“맞아. 긴장은 우리에게나 맡겨둡니다~.”
“맞습니다. 강시후 학생은 우리를 믿고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큭, 그건 무슨 말투냐?”
“몰라? 얼마 전에 유행한 군인 말투인데?”
태산과 인호는 예전에 봤던 ‘태양의 자식’이라는 드라마의 명대사를 읊었다.
평소 드라마에 관심이 없는 시후이기에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시후가 평소와 같은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였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무슨 드라마의 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둘의 마음을 충분히 느꼈다.
“흐읍, 후우. 잘 부탁한다.”
“응!”
시후가 한차례 심호흡으로 평소의 모습을 되찾자 둘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나 양옆에 자리했다.
그리고 시후의 앞과 뒤에는 제갈신길과 진지춘이 자리했다.
조민은 그보다 좀 더 물러나 이들 주위에 단검을 꽂았다.
진법을 펼치는 거였다.
“진권 스님. 이리로요.”
단검을 모두 꽂은 조민이 진권을 불렀다.
진권은 조민이 가리킨 곳으로 자리했다.
“진권 스님, 그곳은 생문이자 사문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죠?”
“네. 제 자리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씀이시지요?”
“맞아요. 절대 그 자리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아미타불.”
진권이 합장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바닥에 꽂힌 단검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민은 모든 단검을 확인하더니 시후를 돌아봤다.
그에 시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육합멸살진(六合滅殺陳)이라. 공부 많이 했구나.”
“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오빠를 해할 수 없을 거예요.”
진법을 가르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서 육합멸살진까지 펼칠 줄 알다니.
참으로 기특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머리라도 쓰다듬어 줘야겠다 싶었다.
이제 만반의 준비가 끝났으니 시후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럼, 다들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시후는 두 눈을 감았다.
천마지체 삼 단계.
일 단계와 이 단계와 다르게 천마지체 삼 단계는 그야말로 진정한 천마가 될 수 있는 단계였다.
본래라면 마기를 좀 더 흡수했어야 삼 단계에 올랐겠지만 포달랍궁의 등장으로 무리를 하는 거였다.
‘이 일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해주마.’
시후는 이자에 이자까지 붙여 돌려주리라 다짐하며 운기를 시작했다.
먼저, 천마분심공을 일으켰다.
한 몸에 각기 다른 두 개의 기운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우선 천마지기.
천마지기를 일으키자 검은색 기운이 시후의 몸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마치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랐지만,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다.
사전에 시후가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시후는 온몸을 뒤덮은 천마지기를 잡아당겼다. 당기고 당겨 몸 전체를 뒤덮는 아주 얇은 막으로 만들어갔다.
그러자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던 시후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마치 시후만이 흑백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색상이 없었다.
이제 두 번째.
정파 무림에서 가장 정순하며 항마의 기운을 가진 소림사의 절세심법인 구양신공의 기운을 일으켰다.
좀 전과는 다르게 시후의 몸에서 일순간에 태양이 떠오르듯 빛이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빛은 곧 시후의 몸을 뒤덮고 있던 천마지기와 부딪쳤다.
한 기운은 시후를 두르고 한 기운은 시후에게서 뿜어져 나가고.
그런 두 기운이 시후의 몸에서 충돌했다.
본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이 미친 짓을 시후는 일부러 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더.
시후는 부여잡고 있던 집중력을 흩트렸다.
그러자 서로 충돌하던 두 기운이 시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댐에 가로막혀 있던 강물이 물골을 만난 듯 빠르게 시후의 백회혈로 치솟았다.
그 순간 시후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하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가(哥哥), 어디 계셨습니까?”
그리고 보았다.
천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얼굴.
자신을 구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진소령을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