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저희가 주력이요?”
박혜령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불여우. 네가 똑똑하니 잘 들었다가 다른 녀석들 이해시켜줘라.”
“네?”
“앞으로 내가 없을 때 네가 리더다.”
갑자기 ‘리더’라는 직책을 주니 박혜령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후를 제외하면 태산과 인호의 실력이 발군이기는 하지만, 저 둘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다.
다른 프로게이머들이 그런 둘의 말을 따를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독불장군처럼 나대는 평치혁은 다른 사람들을 아우르는 능력이 없었다.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리더로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이 박혜령의 객관적인 평가였다.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할게요.”
“그러길 바라마.”
시후는 박혜령이 각오를 내보이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어느 정도는 귀찮아서 맡긴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불여우가 저리 의지를 다지니 그건 그거대로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불여우를 위해 좀 더 판을 깔아주기로 했다.
“너희는 이만 가봐. 다른 녀석들에게 앞으로 쟤가 리더니깐 말 잘 들으라고 하고.”
닭 볏과 숯 눈썹은 굳이 이 자리에 필요 없기에 돌려보냈다.
녀석들을 위해 공지를 하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좀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둘이 캡슐방을 떠나자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월드 오브 리그전에 참전하는 국가대표 인원은 총 24명.
12명의 주전과 12명의 후보로 이루어진다.
S.W SOFT는 그 24명 중에서 12명을 이번에 계약한 프로게이머들로 채울 계획이었다.
시후 역시 그 계획에 반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왕 하기로 한 것.
그 주전 12명 모두 자신들의 사람으로 채웠으면 했다.
그래서 직접 훈련을 시키고 조민을 매니저로 두어 실력 향상을 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어찌 호락호락하기만 한가.
느닷없는 포달랍궁의 등장에 시후는 계획을 변경해야만 했다.
‘포달랍궁에 대비를 해야 해.’
시후는 이미 접전을 벌인 포달랍궁과의 다음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준비에는 태산과 인호, 조민과 평치혁도 포함되었다.
혈교 녀석들이야 어찌어찌 상대했지만 포달랍궁은 그 녀석들보다 더 껄끄러운 녀석들이었다.
천마 시절에도 녀석들은 특별했으니 말이다.
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죽을 수 있는 일이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특히, 태산과 인호는 더욱더 말이다.
그래서 시후는 태산과 인호, 평치혁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을 통솔할 리더로 박혜령을 뽑았다.
이미 박혜령에게 상당 부분을 기대하는 녀석들이었기에 다들 따를 거였다.
시후는 캡슐방 한쪽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곳에 몇 가지를 적기 시작했다.
“우선 지금의 체력 훈련은 매일 한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힘들어도 참아, 분명 결실을 볼 때가 올 테니까. 그리고 너희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약을 줄 거니까 꾸준히 먹고.”
“약…이요?”
갑자기 무슨 약이냐며 묻는 박혜령의 표정에 시후는 품속에서 옥병을 꺼냈다.
옥으로 된 약병의 마개를 열자 청아한 향이 순식간에 퍼졌다.
“어머?!”
박혜령은 마개만 열었을 뿐인데 이런 향을 내는 약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소명단(小命丹)?”
그 대답은 인호가 대신했다.
인호는 시후의 손에 들린 소명단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시후가 소명단을 일반인에게 내보인 적이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J.K 제약회사와 중국 약선방에서 검증한 약이니 걱정은 하지 말고.”
“약선방? 설마, 중국에 그 약선방이요?!”
박혜령은 J.K 제약회사보다 약선방이라는 이름에 깜짝 놀랐다.
사실 박혜령이 약선방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좋은 한약이라며 얼마 전에 지어온 일이 있었다.
총명탕과 비슷한 효력이 있다던 그 약을 먹은 후 박혜령의 집중력은 비약적으로 늘었다.
제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약선방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알게 되었다.
천년의 연혁을 가진 그곳은 이미 중국의 주요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검증한 약이라니.
무슨 약일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시후는 그런 박혜령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옥병에서 소명단 한 알을 꺼내어 내밀었다.
“먹어봐라.”
“가, 감사합니다!”
박혜령은 시후가 내민 소명단을 넙죽 받아 입에 넣었다.
근처에 있는 생수병에 담긴 물로 넘기려 했지만, 입에 들어간 소명단은 침과 섞이자 그대로 녹아 목구멍으로 흘러 넘어갔다.
그 순간 시후가 슬쩍 내공을 흘렸다.
본래는 며칠에 흘러 기력이 보충돼야 하지만 지금은 그 효력을 느껴야 했기에 내공으로 약효를 돌릴 수 있도록 도왔다.
“아…!”
박혜령은 몸을 부들부들 떨 정도의 효력을 느꼈다.
마치 독한 술을 마셨을 때처럼 위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치솟더니 온몸으로 뻗어져 나갔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며 몸에 넘쳐흐르는 활력을 가늠했다.
“와…. 눈까지 맑아진 것 같아요.”
실제로 일시적이나마 소명단의 기운으로 시력이 좋아진 거였다.
“앞으로 너희에게 삼 일에 한 알씩 소명단을 지급할 것이다. 그것을 먹고 훈련에 임해라.”
“네.”
거절할 필요가 전혀 없는 지시였기에 박혜령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 후 시후는 본격적인 훈련 계획을 이야기했다.
체력 훈련 후에는 실전 훈련을 위해 Safety World에 접속하라고 했다.
그곳에 접속하면 각자에게 스킬북을 줄 거였다.
비천화벽진(飛天火壁鎭).
비천대에게 가르친 진법이었다.
박혜령은 스킬북 이름을 듣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후가 이미 누구인지 알게되어서 비천화벽진이 무슨 스킬인지 단번에 알았다.
오크부족 퀘스트 때, 단 네 명이 일천에 달하는 오크의 공격을 막은 그 스킬.
지금도 간간이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영상이었기에 박혜령도 익히 알았다.
그런 스킬북을 시후가 준다는 소리에 박혜령은 놀라면서도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척-
“궁금한 게 있습니다.”
손까지 들어 질문하는 박혜령에 시후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 스킬북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지금은 하나도 없지.”
“그럼 어떻게 주시나요?”
“만들어서 줘야지.”
“만들…. 네?!”
별 대수롭지 않게 스킬북을 만든다는 시후의 말에 박혜령은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킬북을 만들다니.
지금까지 그 어느 유저도 그런 일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박혜령은 지금 이 자리에서 놀라는 게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산과 인호는 그렇다고 쳐도 D.M까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박혜령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시후에게 갖고 있던 적대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후는 그저 그런 낙하산이 아니었다.
박철 사장의 백으로 들어온 이가 아니라 어찌 보면 박철 사장이 정말 두 손 두 발 싹싹 빌어 데리고 온 귀인일 수도 있었다.
스킬북을 만들고 대악마와 겨룰 수 있는 유저.
무슨 일이 있어도 곁에 있어야 했다.
시후는 박혜령의 눈빛이 또 한 번 변하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쩜 저리도 자기 생각을 그대로 내보이는지.
어떨 때는 불여우 같다가도 이럴 때 보면 부족한 면모가 보였다.
‘차차 가르치면 되지.’
시후는 박혜령에게 리더로서 갖춰야 할 자질까지 교육할 생각을 했다.
흠칫-
“어? 뭐지?”
박혜령이 순간 밀려드는 오한에 흠칫했다.
시후는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비천화벽진을 시작으로 너희들 각자에게 맞는 스킬북을 줄 거다. 삼 일에 하나씩.”
“그 말씀은….”
“3일 안에 무슨 수를 써도 그 스킬들의 숙련도를 Lv.4 이상 올려라.”
“…네.”
삼 일 만에 스킬 숙련도를 그만큼 올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박혜령이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시후가 주겠다고 말하는 스킬북이 어떤 것일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낙오되는 자는 시후의 성격으로는 가차 없이 내칠 게 분명했다.
박혜령은 낙오자 없이 따라오게 만드는 것이 리더로서의 책무라 생각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무거워지는 어깨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시후는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기본적으로 훈련은 3일의 패턴으로 리셋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주에 딱 하루.
“내가 직접 대련을 할 거다.”
“직접이요?”
“만약, 그 대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시후는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이미 박혜령이 자신의 뜻을 눈치채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 너는 녀석들에게 이 사실을 공지해주고 내일 보자꾸나.”
그렇게 시후는 박혜령을 떠나보내고 S.W SOFT를 빠져나왔다.
프로게이머들에게 주기로 한 소명들을 얻기 위해 제갈 상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명단 10병이 필요하니 내일까지 준비하라고 했다.
그런데 알았다며 대답한 제갈상민이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돌팔이가 들어왔다고?”
-네. 지금 세가로 오고 계신답니다.
“음….”
시후는 턱을 매만졌다.
돌팔이가 들어왔으니 일단 만나야 했다.
중국에서의 일이 어찌되었는지 들어야 하고 녀석에게 받을 물건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당장 태산과 인호의 훈련도 시켜야 했다.
포달랍궁 녀석들의 등장과 조금 전 아킬라이의 대화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새로운 무공을 가르치려던 차였다.
오늘 가르쳐야 내일부터는 제대로 된 훈련을 해야 하는데.
어쩌나 싶을 그때였다.
“아! 혹시 돌팔이 혼자 들어왔어?”
-아닙니다. 스님 한 분이랑 같이 들어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잘됐군.”
참으로 다행이었다.
태산과 인호에게 무공도 가르치고 진지춘에게 볼일도 봐야 하는데 아주 적당한 녀석이 같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소림사 사대수호신승 중에 한 명인 진권.
태산과 인호에게 그만한 대련 상대도 없었다.
시후는 제갈상민에게 곧 제갈세가로 간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태산과 인호와 함께 택시를 타고 제갈세가로 향했다.
가는 동안 시후는 태산과 인호에게 앞으로 가르칠 무공에 관해 설명했다.
“이번에 가르칠 무공은 도(刀)야.”
“갑자기 웬 도?”
“왜. 문제 있어?”
“아니, 우리는 그래도 우리에게 맞는 무공을 가르쳐줄 줄 알았지.”
태산과 인호는 시후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고 했을 때 각자 떠올린 것이 있었다.
이미 자신들이 배운 무공이 있으니 그것에 심화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배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것을 말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거였다.
“쯧. 본래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너희들 정체를 감춰야 하잖아.”
“아….”
시후의 찌증 섞인 말투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둘의 풀이 죽은 모습에 시후가 입맛을 다셨다.
“너희가 배울 무공은 백풍현(白風賢)의 무공이야.”
“백풍현….”
“백풍현은 한때 무림맹의 맹주 자리에 오른 자였고 도제(刀帝)라 불렸던 자야.”
“도제…! 도제?!”
잔뜩 풀이 죽어 있던 둘의 눈이 번뜩였다.
시후가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기대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체를 숨겨야 하는 상황이었고 단기간에 빠르게 배워야 했기에 절세의 무공을 배울 거라는 기대는 접었다.
그런데 도제라니.
그것도 무림맹 맹주라니.
도제라는 이름을 듣고 나서야 기운을 차린 둘의 모습에 시후는 피식 웃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남았기에 시후는 둘이 흥미를 보이는 도제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주기로 했다.
“도제 백풍현. 그는 지독한 깔끔쟁이였어.”
“깔…끔?”
“요즘 말에 빗대면, 결벽증?”
“도제가? 결벽증?”
“어. 얼마나 결벽증이 심했으면 그는 그것을 자신의 도에도 담았어.”
그리고 이어지는 시후의 이야기에 둘은 혀를 내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