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쾅-쾅-쾅-
시후와 위리놈의 공방은 어둠의 숲을 뒤흔들었다.
주먹질 한 번에 공간이 떨리고 발길질 한 번에 지축이 울렸다.
그런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둘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코끝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운 지척에서.
한 방이라도 맞으면 승패가 갈릴 만한 공세를 나눴다.
"크하, 하하! 즐겁구나! 즐거워!"
"크큭, 미친놈."
위리놈이 소리 높여 웃자 시후가 욕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위리놈은 웃었다.
위리놈이 자신과 이만한 공방을 벌일 수 있는 이의 얼굴에 번진 미소를 봤다.
미친놈은 자신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하지만 싸움은 언제나 승기를 잡아야 즐거운 법.
촤악-
위리놈은 거대한 박쥐 날개를 활짝 폈다.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일단 시후를 떨어트려야 했다.
후웅-
거대한 날개를 휘두르자 강한 풍압이 일어났다.
두 개의 날개로 만든 풍압은 곧 서로 휘감기더니 주변의 것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회오리가 되었다.
위리놈은 날개를 펄럭여 그 회오리를 끌어당겨 시후의 등 뒤로 이동시켰다.
회오리의 흡입력으로 시후를 떨어트리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후의 주먹은 얼굴을 스쳐 지나갔고 발길질에 오금이 걷어차였다.
“크하, 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땅거죽을 끌어당길 정도의 회오리에 어떻게 끌려가지 않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이 공방의 승기를 잡기 위해서는 살을 내줘야 함을 말이다.
위리놈은 각오를 다지며 시후가 내미는 주먹에 맞추어 주먹을 내뻗었다.
쾅-
동시에 맞붙은 주먹질에 둘은 뒤로 쭉 밀려났다.
위리놈은 손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에 팔을 급히 등 뒤로 숨겼다.
반면 시후는 호흡을 고르더니 뒤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펑-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가더니 위리놈이 만든 회오리를 짓뭉개 버렸다.
그 장면에 위리놈의 눈썹이 꿈틀댔다.
“강해졌군.”
“뭐, 덕분에.”
시후는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위리놈의 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솔직히 고마웠다.
조금 전 녀석이 흘린 정보 덕분에 업적 보상을 받아 많은 스텟이 올랐다.
당장 현실로 돌아가 변화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일전에 느꼈던 그 쓰디쓴 패배의 아픔.
그것을 돌려줘야겠다는 의지만 없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 의지를 전부 다지기에는 여전히 실력이 모자랐다.
‘재수 없는 자식. 본래 힘을 쓰지 않고 있어.’
그랬다.
위리놈과 공방을 주고받으면서 느낀 것.
녀석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시후는 생각을 조금만 틀기로 했다.
“즐겁나?”
대뜸 물었다.
손목이 저리다며 마사지를 하는 녀석치고는 입꼬리가 너무 씰룩였다.
“즐겁냐고? 크큭, 아바돈을 뛰쳐나온 이후 처음으로 심장이 뛴다면 대답이 될까?”
“미친놈.”
시후는 확신했다.
‘저놈은 담수천과 같은 종자다.’
싸움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면 구미호에게 제 간이라도 내줄 녀석이 담수천이었다.
지금 위리놈의 눈빛은 그 담수천의 눈빛과 똑같았다.
그렇다면 답은 빠르게 나왔다.
대악마 위리놈을 담수천을 대할 때처럼 하면 되는 거였다.
“나도 즐겁다.”
“크큭, 그럴 줄 알았다. 그럼 더 즐거워져 볼까?”
위리놈은 자세를 낮춰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시후가 손을 들었다.
천마멸겁장을 날리려는 손동작이 아닌 잠시 멈추라는 손동작이었다.
“뭐지?”
위리놈이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당장이라도 달려들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한 채 말이다.
‘그래. 그거면 돼.’
이야기를 들을 자세만 되어 있으면 된다.
그가 담수천과 같은 성향이라면 무조건 따를 테니까.
“이대로 괜찮은가?”
“뭐?”
“우리 싸움을 이대로 계속해도 괜찮냐는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위리놈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시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후는 주변을 가리켰다.
“경천동지(驚天動地)라 하지.”
“뭐?”
“너와 나의 싸움은 하늘이 놀라고 땅을 뒤흔들 만한 어마어마한 싸움이지 않나?”
“그래서?”
“그런데 그런 싸움을 아무도 모르게 한다? 아쉽지 않나?”
“내 즐거움만 채우면 되는 것이거늘. 뭐가 아쉽다는 말이지?”
“이만한 싸움이라면 대륙 전체에 길이길이 남을 텐데?”
위리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후의 말이 이해는 되지만 그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냐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시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팔짱을 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모두 해보라는 뜻이었다.
‘됐어.’
그 모습에 시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쩜 저리도 담수천과 비슷한지.
녀석도 그랬다.
천마 시절, 녀석이 저잣거리에서 싸움을 건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천마라는 이름에 도전을 한 자.
무림에 과연 그 누가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하겠는가.
그리고 그 도전에서 살아남는다면?
실제로 담수천은 그 저잣거리에서 싸움으로 궁귀라는 칭호와 함께 투광(鬪狂)이라는 별호도 얻었다.
‘그러고 보니 궁귀 투광 담수천을 수식하는 단어가 지금에서야 있네.’
천년 전에는 없던 단어.
관종.
담수천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위대함을 알리는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다.
그런 담수천의 눈빛이 위리놈에게도 있으니.
시후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한 거였다.
“월드 오브 리그. 들어는 봤나?”
“음…, 아!”
어디선가 들어본 말에 위리놈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헤라 여왕을 만나러 갔을 때 상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기억했다.
대륙 전체에 벌어진 싸움판.
여러 가지 룰이 있었지만, 종족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랭킹전이라고 했다.
그때는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 넘겼지만, 그것을 시후가 거론하자 귀를 기울였다.
“그곳에 나도 나간다.”
“네가?”
“본래 거기서 이겨 우승 상품으로 너와 싸우게 해달라고 할 참이었거든.”
“지금 싸우고 있으니 나갈 필요가 없어졌군?”
“아니지.”
“뭐?”
“이번 싸움으로 확신이 섰지.”
“뭐가?”
“너를 내 발아래 꿇리는 장면을 사람들 앞에서 보여야겠다고 말이야.”
“……!”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시후의 눈빛에 위리놈도 덩달아 눈을 빛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무리 대악마라는 지위를 가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만이 아는 거였다.
솔직히 얼굴을 아는 녀석은 아바돔에 있는 악마들이 전부였다.
하다못해 일생의 적이라고 치부하는 천사 녀석들도 대악마 위리놈의 얼굴은 몰랐다.
전투 모드인 지금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곁에서 술을 마셔도 모를 거였다.
“그 싸움터….”
“월드 오브 리그전.”
“그래 그거. 거기서 싸우면 모두가 알게 되나?”
“알게 될 뿐이겠는가. 대륙에 있는 모두의 기억 속에 길이길이 남게 될걸?”
“으흠….”
그 말에 위리놈은 턱을 매만졌다.
당장 싸움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자가 눈앞에 있다.
이 싸움은 그저 자기만족에 그치게 된다.
그런데 조금만 참으면 자기만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기까지 하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좋아, 월드 오브 리그전. 나도 거기에 참여하지.”
“잘 생각했어. 그럼, 결승에서 보는 거로.”
척-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조금 전까지 죽일 듯이 싸우던 둘이었지만 순식간에 이해관계가 되었다.
위리놈은 싸움의 즐거움과 명성을 동시에 얻기 위해.
시후는 제대로 된 복수와 보상을 위해.
그렇게 시후는 후일을 기약하고는 로그아웃했다.
시후가 캡슐을 열고 나오자 먼저 나온 태산과 인호가 반겼다.
“오! 강시후, 이제 타협도 할 줄 알아.”
“훗. 그 정도야.”
“어머니, 아버지. 드디어 우리 시후가 달라졌어요, 기뻐하세요!”
“야, 야야. 그건 좀 오바….”
턱-
태산과 인호는 시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시후. 진정 오바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그래. 네가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하, 내가 뭘 또 그렇게….”
둘의 말에 시후는 반박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타협이라는 것을 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천마 시절의 행보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뿐더러 지금이라고 해봐야 별반 다를 게 없다.
남궁세가를 쳐들어간 일이나 혈교 녀석들과 싸웠을 때나.
타협보다는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켰다.
‘타협이라,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군.’
아니. 정확히는 대상에 따라 달리했다고 해야 할까.
천마 시절에는 한 여인에게만, 지금은 부모님에게만 해당하는 단어였다.
하다못해 절친이라 할 만한 태산과 인호에게도 언제나 가혹한 훈련을 시켰다.
그들이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작 당하는 처지에서는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을 거였다.
‘괜스레 미안해지는군.’
시후는 민망함에 목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되레 태산과 인호가 놀랐다.
“뭐야? 왜 발끈 안 해?”
“내가 애냐? 인정할 건 인정한다.”
“아니. 아니지. 여기서 시후 네가 발끈해야 우리가 은근슬쩍 잘못을 묻어간단 말이야.”
“응? 그건 무슨 소리냐?”
“어…. 그게 말이야….”
태산과 인호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난처해했다.
그제야 시후는 둘의 의도를 파악했다.
“이 자식들. 내가 없는 사이에 뭘 또 어쨌는데?”
“그게….”
태산과 인호는 한숨을 내쉬며 시후에게 실토했다.
어둠의 숲에서 멀린과 함께 헤라 왕국으로 이동한 직후였다.
둘은 시후에게 이미 전음으로 헤라 왕국으로 돌아간 이후 로그아웃하라는 지시를 받았기에 그러려고 했었다.
그런데 아킬라이가 둘을 잡았다는 거였다.
“그 자식이 왜?”
“집요하게 묻더라고.”
“뭘?”
“네 정체.”
아킬라이는 로그아웃하려는 태산과 인호의 바지 끄덩이를 잡으며 시후의 정체를 물었다.
태산과 인호는 일전부터 시후가 자신의 정체는 비밀에 부치라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고 모른다며 잡아뗐다.
하지만 아킬라이는 상당히 타당한 이유를 대며 모른다는 말을 부정했다.
“우리가 너와 친한 것. 네가 우리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것. 무엇보다 자신과는 다른 명령을 받은 것까지.”
“그런 것들을 말하며 내 정체를 물었다고?”
“응….”
“그래서 말했어?”
“아, 아니야!”
둘은 손사래를 쳤다.
자신들도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진 않다고 말이다.
다만 아킬라이의 유도 신문에 넘어갔다고 했다.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는 사이 월드 오브 리그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우리가 거기에 참가한다는 말을 남겼다는 거지?”
“응…. 미안.”
“이런….”
이 정도면 정체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월드 오브 리그전에 참전하려면 한국 대표가 되어야 했다.
그렇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얼굴을 노출한다는 거였다.
월드 오브 리그전의 규칙으로 유저의 외모를 변경할 수는 있다고 하지만 사용하는 스킬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벌써 몇 차례 아킬라이와 퀘스트를 해온 바.
녀석의 눈썰미라면 금방 눈치챌 거였다.
시후는 녀석에게 보이지 않은 무공이 수두룩하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태산과 인호는 달랐다.
본래 가지고 있던 스킬이나 무공이나, 이미 모두 보여준 상태였다.
“쯧. 취소.”
“뭐가?”
“있어. 그런 거. 너희는 당분간 새로운 스킬 좀 배우자.”
시후는 둘에게 미안했던 감정을 싹 털어버렸다.
되레 이전보다 강도 높은 훈련을 다짐했다.
기존에 둘이 사용하던 무공 스킬 모두를 감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자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단 말이지.’
Safety World 안에서 본 아킬라이의 바뀐 눈빛.
기존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단순한 팬심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무언가가 말이다.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기에 시후는 미리 대비하기로 했다.
자신과 다르게 펼칠 수 있는 무공의 수가 몇 개 없는 태산과 인호를 혹독하게 훈련시켜서라도 말이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으, 응….”
둘 역시 자기 잘못을 알았기에 시후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시후는 당장이라도 둘에게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저 뒤에 있는 녀석들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웰컴 모니터 앞에 있는 네 명.
녀석들은 시후가 나온 이후 뭐 묻은 강아지마냥 우물쭈물하는 모습들이었다.
“너희들 이리 와봐.”
“네!”
넷은 시후의 부름에 휠체어를 조작해 빠르게 달려왔다.
휠체어를 타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몸에 힘이 없다는 것인데, 저만한 동작을 보인다는 것은 이번 위리놈과의 싸움으로 효과를 봤다는 뜻이었다.
“그래. 소감은?”
자신이 잘 지켜보라고 했으니 그 소감을 물었다.
그 말에 넷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대박입니다!”
대악마의 존재를 알아낸 것만 해도 대단한데 대악마와 비등하게 싸우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시후가 얼마나 강한지 넷은 알았다.
그리고 기대감에 차올랐다.
시후가 태산과 인호에게 스킬을 가르쳐주는 모습.
상대방의 공격을 그대로 흡수해 되돌려 주는 스킬.
아킬라이의 주력 스킬을 아무렇지 않게 둘에게 가르쳐주는 시후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런 것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에 차올랐다.
딱히 독안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넷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시후는 이 여섯을 데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빠르게 정할 수 있었다.
“앞으로 너희 여섯이 주력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