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아킬라이는 멀란도랑이 아이스 돔을 펼치는 순간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의 표적이 자신이 아님을 알았고 시후가 너는 떨어져 있으라는 눈빛을 보냈기 때문이다.
왜 그러나 싶어 연유를 찾던 중.
그는 보았다.
‘이화…. 접목?’
아킬라이, 아니 진류강이 이화접목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혈교 소교주라는 입장 때문에 현실에서는 펼쳐볼 수 없는 무공이었다.
힘을 우선시하고 피를 갈구하는 혈교에서 다른 이의 힘을 되돌려주는 무공을 사용한다?
소교주의 자질까지 의심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진류강은 Safety World에서 이화접목을 펼쳤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흉내만 냈을 뿐 스킬로 사용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Lv. 200이 넘어가면서 상대한 몬스터들에게는 쓸모도 없었다.
‘그런데 저건 뭐지? 어떻게….’
천마는 그렇다고 쳐도 옆에 따라다니던 저 둘.
힘만 센 대머리와 얍삽한 로빈훗. 어떻게 저 둘이 이화접목을 펼칠 수 있냐는 말이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놀라는 사이 멀란도랑의 퍼펙트 실드 위로 날아오른 천마가 보였다.
“마강각(魔降脚).”
쾅-
시후는 천마지기를 담은 한쪽 발을 가슴까지 들었다가 내리찍었다.
흉흉한 검은 기운이 넘실거린 발은 곧 멀란도랑의 퍼펙트 실드를 두들겼다.
“어쭈? 버텨?”
단 한 방에 부술 의도였으나 멀란도랑의 퍼펙트 실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멀란도랑은 지금 퍼펙트 실드에 가진 마나 70%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시후는 멀란도랑이 제법이라는 생각에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를 본 멀란도랑은 등골이 오싹했지만 말이다.
“어디, 더 버텨봐라.”
“자, 잠깐…. 억!”
쾅-쾅-쾅-
시후는 멀란도랑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마강각을 연속으로 펼쳤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단순한 발구르기처럼 보일 마강각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거대했다.
만약 퍼펙트 실드가 아닌 헤라 왕국 광장에서 땅을 두들겼다면 헤라 왕국에 지진이 일어났으리라.
그런 힘이 담긴 마강각이었으니 아무리 퍼펙트 실드라 해도 한계에 다다랐다.
쩌적-
결국 세 번째 발구르기가 끝날 때쯤에 퍼펙트 실드에 금이 쩍 갔다.
멀란도랑은 시후의 네 번째 마강각이 퍼펙트 실드를 밟자 이를 악물었다.
“젠장!”
스팟-
그러고는 좀 전과 마찬가지로 무영창으로 블링크를 펼쳐 몸을 이동했다.
그가 이동한 곳은 아킬라이 근처였다.
헤라 왕국의 수호기사 단장인 그가 어떻게든 막아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하지만.
“커헉!”
퍼펙트 실드가 깨지고 멀란도랑이 블링크를 펼쳐 아킬라이 곁에 나타나는 것보다 시후가 한발 빨랐다.
시후는 순시보를 펼쳐 아킬라이 곁에 나타난 멀란도랑의 목을 움켜쥐었다.
멀란도랑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숨을 헐떡였다.
“이, 이거 놓…. 헉.”
“어딜.”
푹-
시후는 멀란도랑이 다시 한번 마나를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마법사들이 마나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
무공을 사용하는 무림인은 단전에 기운을 응축했다가 전신의 혈로 옮겨 기를 퍼트렸다.
그런데 마법사들은 달랐다.
그들이 말하는 ‘마나’라는 기운을 배꼽 아래 단전이 아닌 가슴, 즉 심장에 응집했다.
기운을 모으는 것뿐만 아니라 심장 주위에 원을 그리듯 기운을 회전시켜 여러 개의 고리를 만들었다.
지금처럼 마법을 펼치기 위해 마나를 움직이면 그 고리가 회전하며 안에 모았던 기운을 다른 곳으로 방출하는 식이었다.
시후는 독안공을 통해 기운이 회전하여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점혈을 했다.
“어차피 기가 흐르는 곳이야 다 같은 것이지.”
“어, 어떻게 마나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는 겁니까?”
“뭐, 나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시후의 저 말을 처음 듣는다면 재수 없다며 욕을 한 사발 했을 거였다.
하지만 태산과 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말에 담긴 진짜 의미.
무공을 갈고 닦으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였다.
태산과 인호는 나날이 강해지는 시후를 보며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을 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시후처럼 능숙하게 점혈을 짚으려고 제갈세가에서 열심히 공부도 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생활과는 진작 달라진 둘의 인생이었지만 불만은 전혀 없었다.
무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자신들의 인생은 다른 일반인이라면 꿈도 꿔보지 못할 인생을 경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태산과 인호는 시후가 이런 일을 벌일 때마다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터득했다.
척-
“이제 우리가 맡을게.”
“그만 놓아줘.”
둘은 멀란도랑의 양팔을 잡으며 시후를 다독였다.
시후 역시 둘이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멀란도랑의 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켁, 케엑.”
멀란도랑은 기침을 거칠게 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 사이 태산과 인호는 멀란도랑을 대롱대롱 들고는 슬쩍 물러났다.
이제 둘이 역할이 이어질 차례였다.
“천마가 손속에 자비가 좀 없죠?”
“그러니까요. 동행할 사이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에요.”
“…….”
“참, 멀란도랑님 그 이름 말이에요. 천마 말대로 바꾸시는 게 낫겠어요.”
“뭐요?!”
열심히 시후를 욕하며 자기 편을 들어주는 것 같던 둘이 이름을 바꾸라는 말을 하자 멀란도랑은 발끈했다.
그런 멀란도랑의 등을 인호가 토닥였다.
“순리대로 사는 겁니다, 순리대로.”
“뭐가 순리라는 거요?! 내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들이 알기나 하느냔 말이요!”
탓-
멀란도랑은 거칠게 인호의 손을 쳐냈다.
태산과 인호에게 눈을 한차례 부라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더 말하기 싫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대마법사 멀린.”
“…뭐?”
인호의 한마디에 멀란도랑의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
“……?”
그게 무슨 말이냐는듯이 멀란도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반응에 인호는 한 템포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법이 엄격하게 금지된 세계에서 마법사라는 신분을 감추고도 대마법사의 자리에 오른 멀린. 그는 위대한 시골 소년에 불과하던 아더를 그 누구보다 용맹한 왕으로 만든 이였다.”
인호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멀란도랑은 집중했다.
“왕의 시종으로 살아가며 평생을 곁에서 그를 지켜준 멀린. 후에 왕이 숨을 거둘 때야 자신이 마법사임을 알린 멀린. 그가 남긴 업적은 누구에게도 비견될 수 없었다.”
“머, 멀린이라는 마법사가 말이요?”
“네. 저희 유저들은 멀린이라는 마법사를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대마법사…. 멀린이라….”
멀란도랑은 인호가 말한 멀린에 대한 것을 하나하나 짚어 읊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시후를 봤다.
멀란도랑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들과 유저라는 족속들은 그 존재의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들은 죽으면 리셋이 되어 다른 인격체로 복구되지만 유저들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타났다.
자신들과 다르게 그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들은 유저들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멀린이라는 이름이 저들 세계에서 그런 존재라니.
저들의 세계에서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그 이름을 시후가 자신에게 붙였다니.
멀란도랑은 시후를 다시 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확인한 인호가 태산에게 눈짓을 줬다.
태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란도랑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위대한. 대마법사 멀.린.님.”
“……!”
“동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멀란도랑은 이렇게 ‘멀린’이 되며 태산이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태산과 인호는 알고 있었다.
시후가 멀란도랑의 이름을 멀린이라고 부른 진짜 의미를 말이다.
그저 부르기 귀찮으니 이름을 줄인 것뿐일 거였다.
우연히도 그 멀린이라는 이름이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었고 태산과 인호는 그것을 인용하여 멀란도랑을 속인 거였다.
태산과 인호는 멀린과 하하 호호하며 즐겁게 멀린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다.
그 사이 멀린은 아이스 돔을 해제하며 주변에 흩뿌려진 마나를 거두어들였다.
보통 마법사가 마법을 펼친 후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 번 방출한 마나를 다시 거둘 수 있는 겁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이론적으로요? 지금 하고 계신 거는 아닌가요?”
“제가 지금 하는 것은 그것을 조금 흉내를 내는 것일 뿐입니다.”
멀린은 인호의 물음에 친절하게 설명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펼치기 위해 마나서클을 이용하는 데 그때 방출한 마나가 술식이 되고 그 안에서 마나가 융합되며 마법이 펼쳐진다는 거였다.
그런데 일반적인 마법사들은 이 행위를 ‘스킬’이라는 이름하에 만드는데 자신은 다르다고 했다.
“저는 스킬이 아닌 직접 시동어를 구사하여 마법을 발현합니다.”
“진짜요?!”
인호는 그 말에 놀라며 시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멀린 님이 바니힐 마을에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네.
- ??
간략한 시후의 답변에 인호 역시 간략하게 답했다.
- 블칸 영주 성. 공주.
그 메시지를 확인한 시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왕자님’을 찾으며 로맨스 장르를 꿈꾸던 공주 제희.
5서클의 마법사이면서 액세서리 제작 능력을 갖춘 그녀.
시후는 멀린과 제희의 만남을 머릿속에서 그렸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만남은 참으로 의미 있는 만남이 되겠어.”
시후는 제희 공주와 헤어질 때 그녀가 남겼던 말을 기억했다.
그녀가 무슨 뜻으로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미 있는 만남을 시후가 만들게 되었다.
“멀린.”
“크흠. 불렀습니까?”
시후의 부름에 멀린이 헛기침을 하며 다가왔다.
멀린이 가까이 다가오자 시후는 멀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 친구 할까?”
“친… 구?”
“그래, 친구. 앞으로 서로 말 편하게 하면서 친구 하자.”
씨익-
시후는 멀린에게 세상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린은 그 미소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친구라니.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자신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없었다.
언제나 있었으면 하고 소망은 했다.
하지만 친구는 소망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친구라는 이름에 가까워진 이들은 언제나 자기 능력을 알고 다른 마음을 품었다.
때로는 돈으로 팔고 때로는 두려움에 버렸다.
그래서 멀린은 대인기피증이 있음에도 꾸준히 사냥해 레벨업을 했었다.
격에 맞는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진정한 친구와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지만 멀린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적어도 힘에 굴복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서였다.
그런데 친구를 하자며 손을 내밀어준 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레벨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힘을 가진 자가 말이다.
멀린은 시후의 미소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친구. 나도 하고 싶었소.”
“좋아. 그럼 그 말투부터 바꾸고.”
“알았… 어.”
“그럼 이제 친구의 실력 좀 볼 겸 바니힐로 가볼까?”
“그러지. 거기서 진짜 내 실력을 보여줄게.”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그러자.
띠링-
[히든 NPC 멀란도랑 린달프일의 이름이 ‘멀린’으로 변경됩니다.]
[멀린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히든 NPC 멀린이 상태 이상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히든 NPC와 친구가 된 업적 보상으로 전 스텟 +5 상향됩니다.]
[히든 NPC의 상태 이상을 해제하여 업적 보상으로 전 스텟 +5 상향됩니다.]
알림음과 함께 메시지가 나타났다.
히든 NPC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후는 스텟이 오르며 변화하는 몸의 상태를 느꼈다.
다른 이들이라면 40레벨은 올려야 얻을 수 있는 스텟을 한 번에 올린 거였다.
시후는 몸에 충만히 차는 기운을 느끼며 멀린과 어깨동무를 했다.
“그럼, 가볼까?”
시후의 출발 구령과 함께 태산과 인호도 뒤따랐다.
그 뒤로 지금의 상황을 계속 지켜보던 아킬라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터덜터덜 뒤따랐다.
진류강은 시후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그의 손짓. 그의 무공. 그의 말투.
그가 Safety World에서 보여준 특징을 기억해 한국으로 넘어가 현실의 그를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산과 인호가 벌인 일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극도의 불안감과 적대감에 빠진 멀린을 둘이 쿵작쿵작하더니 속여 냈다.
세상에 이런 어리숙한 사기꾼들은 처음 봤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기가 통했다는 것이다.
이 일련의 믿기지 않는 상황을 겪은 아킬라이는 생각했다.
시후뿐만 아니라 그의 곁에 있는 이들 역시 결코 얕볼 수 없는 이들이라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당분간 따라다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남다른 각오로 시후를 따라 루프를 타고 바니힐 마을로 도착한 아킬라이는 제 생각을 고쳐야만 했다.
“그는 진정한 미친 자구나.”
그게 아킬라이가 어둠의 숲에 들어서는 순간 시후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